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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최고재판소, 통일교 해산명령 확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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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최고재판소가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통일교)에 대한 해산명령을 최종 확정했다. 일본 언론에 따르면 일본 최고 재판소는 지난 22일 통일교 측이 제기한 특별항고를 기각하고, 도쿄고등재판소의 해산명령 결정을 유지했다.
일본에서 법령 위반을 이유로 종교법인에 해산명령이 내려진 사례는 과거 오움진리교와 묘카쿠지 등 두 차례 있었지만, 민법상 불법행위를 근거로 최고재판소가 종교법인의 해산을 인정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앞서 도쿄지방재판소는 지난해 3월 가정연합에 대해 해산을 명령했다. 당시 재판부는 헌금 피해자가 최소 1천500명을 넘고 피해 규모도 204억엔(약 1천944억원)에 이른다고 판단했다. 이후 올해 3월 도쿄고등재판소도 문부과학성의 해산명령 청구를 받아들인 1심 판단을 유지했다.
최고재판소 역시 통일교 교인들이 1973년부터 2022년까지 장기간에 걸쳐 불법적 헌금 권유를 통해 다수 피해자에게 막대한 재산상 손해를 입혔다고 판단했다. 특히 이러한 행위가 일부 신자의 일탈이 아니라 세계 각국에 대한 경제적 지원을 강조해 온 통일교 창설자들의 방침 아래 이뤄졌으며, “교단이 조직적으로 관여해 실행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아울러 재판부는 해산명령이 내려지더라도 신자들의 종교 활동 자체가 금지되는 것은 아니며, 임의 종교단체 형태로 활동을 이어갈 수 있다는 점에서 헌법상 기본권 침해는 간접적 영향에 그친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해산명령은 헌법에 위반되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일본 내 통일교 논란은 2022년 아베 신조 전 총리 피격 사건을 계기로 본격화됐다. 범인이 가족의 경제적 파탄 원인으로 어머니의 고액 헌금을 지목하면서 사회적 파장이 확산했고, 고액 헌금 피해 문제가 주요 사회 현안으로 떠올랐다.
이후 일본 문부과학성은 2023년 10월 통일교에 대한 해산명령을 청구했고, 법원은 1·2심에 이어 최고재판소까지 모두 이를 인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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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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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허가 건물’이라고 국가문화유산 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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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장로회 소속 부산중부교회(김광호 목사)가 ‘무허가 건물’이라는 이유로 국가문화유산 등록에 제동이 걸렸다. 부산중부교회는 한국전쟁 이후 부산시 중구 보수동 일대 다른 건물등과 함께 자리를 잡은 후 지금까지 등기를 못해 왔다.
지난 6월 10일 ‘6.10 민주항쟁국가기념식’에서 이 교회 담임목사였던 故 최성묵 목사가 국민훈장 동백장을 추서 받았다. 부산중부교회는 1970-80년대 부산지역 민주화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해 왔었고, 부산지역 유신 독재를 향한 민주화운동의 상징적인 곳이었다는 점에서 지역교계는 이번 ‘국가문화유산 제동’에 안타까움을 표하고 있다.
부산시는 지난해 12월 16일 이곳을 부산미래유산으로 지정한 바 있다. 이를 계기로 국가문화유산 등록 추진에도 적극 나섰지만, 법적으로 무허가 건물이라는 점이 발목을 잡았다. 주차공간 확보와 소방시설 구축으로 등기가 가능하지만, 중부교회 위치상 불가능에 가까운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건축법이 시행된 1962년 전에 세워졌다는 사실이 입증되면 현행 건축법상 규제를 받지 않을 수 있다. 다행히 중부교회는 1959년 준공 당시 연도를 새긴 머릿돌이 존재 해 입증은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비슷한 사례도 있다. 인근에 위치한 중구 대청동의 대한성공회 부산주교좌성당은 1924년에 건축해 미등기 상태였지만, 목재 골조 등 건축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사후 등기 절차를 거쳐 2013년 10월 국가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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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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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석웅 목사]예수 데칼코마니(Decalcoman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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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에게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라고 조롱하는 내용이 나온다. 아니다. 자기를 구원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하지 않은 거였다.
‘할 수 없는 것’과 ‘하지 않는 것’은 다르다. ‘할 수 없는 것’은 ‘무능(無能)’이다. ‘하지 않는 것’은 힘을 다룰 수 있는 능력이 있어서 가능한 일이다. 그러므로 힘이 있다고 유능(有能)이 아니다. 힘을 다룰 수 있는 능력이 유능이다. 핸들링(handling) 되지 않는 힘은 폭력일 뿐이다.
유능과 함께 힘을 다룰 줄 아는 사람에게 붙여줄 수 있는 단어가 겸손이다. 무능해서 힘을 쓰지 못하는 것은 겸손이 아니다. 그것은 그냥 무능이다. 무능한 사람이 겸손한 척, 하는 것은 비굴(卑屈)일 뿐이다. 그러나 힘이 있어도 그 힘을 다루는 능력이 없다면 그 사람에게 겸손이란 단어가 결코 어울릴 수 없다. 그런 사람에게 어울리는 단어는 교만이나 무례(無禮)일 것이다. 자기가 가진 유능을 잘 다루어 적재적소에 써야 할 때 쓸 줄 아는 사람을 겸손한 사람이다.
예수님은 무능한 분도, 교만한 분도 아니다. 말씀 한마디로 12군단도 더 되는 천사를 부르실 수 있는 분이다(마 26:51). 그러나 그렇게 하셨다면 성경의 예언은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못 내려오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셔서 내려오지 않으신 것이다. 인류를 구원하시려고 스스로 십자가에 매달려 계신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을 성취하시기 위해 자신의 유능을 조절하신 것이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려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힘은 다른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는데 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일에 써야 한다. 타의에 의해 목 박히는 것은 무능이다. 스스로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은 유능이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그렇게 살라 하신다. 그러면서 하신 말씀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는 것’이란다. 그러면 많은 열매로 부활한단다. 예수님은 자신이 그렇게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다.
안타깝게도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른다는 사람들이 모인 교회 안에도 다른 밀알을 십자가에 못 박으려는 사람은 많은데 스스로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사람은 보기 어렵다. 자신이 죽는 밀알 되기보다는 다른 밀알을 죽여 자기만 살려는 사람들만 많은 것 같다.
미술에 데칼코마니(decalcomanie)라는 기법이 있다. 어떤 무늬를 특수한 종이에 찍어 얇은 막을 이루게 만든 뒤 다른 표면에 옮기는 전사(轉寫) 기법을 말한다. 미술 수업시간에 종이 한쪽 면에 물감을 마음대로 짜 놓은 후, 종이를 반으로 접어 손으로 문질러 펼치면 마치 쌍둥이처럼 똑같은 모양의 그림이 나온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예수님의 데칼코마니가 되어야 한다. 예수님을 안 믿는 사람들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는 웬만해서 성경을 읽지 않는다. 기독교 방송을 듣지도, 보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비기독교인들이 예수님을 알 수 있는 방법은 하나다. 데칼코마니같이 예수님을 닮은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예수님의 성품, 인격, 언어, 남을 대하는 태도, 시선, 마음 씀씀이까지 예수님의 데칼코마니가 되어 예수님의 삶을 우리 삶의 현장에 전사(轉寫)할 수 있어야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요즘에 노아 시대의 데칼코마니 같은 세상을 살고 있다. 이런 세상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사탄의 데칼코마니들을 이기려면 우리는 진하고 선명한 예수님의 데칼코마니가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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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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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연구]오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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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고 계실 때,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아들들과 함께 예수님께 와서 청탁을 했습니다. 마태복음 20장 20~21절입니다. <20 그 때에 세베대의 아들의 어머니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니 21 예수께서 이르시되 무엇을 원하느냐 이르되 나의 이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이때 예수님께서는 대답 대신 질문을 하셨습니다. 20장 22절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그들이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잔을 자신들도 마실 수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여기 <내가 마시려는 잔>이란 십자가의 죽음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시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중이었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이 이 잔의 의미를 알고 있었는지 의심스럽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그들은 그 잔을 마실 수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이들의 대답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은 놀랍습니다. 20장 23절입니다. <이르시되 너희가 과연 내 잔을 마시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내가 주는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예수님께서는 야고보와 요한이 순교의 잔을 마신다고 하더라도, 예수님의 좌우편 자리는 하늘의 하나님 아버지께서 정한 이에게 돌아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치명적 오해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나는 주님을 위해 고난의 잔을 마셨으니, 주님의 좌우편은 내 자리가 될 것>이라고 기했는데, 막상 전혀 다른 사람이 그 자리에 있다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얼마나 부끄러울까요?
에스더서에 나오는 하만이 그랬습니다. 에스더의 사촌 오빠인 모르드개는 대궐 문에서 일을 보던 하급 관리였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는 대궐 문을 드나드는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에 있던 하만에게 절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아마도 하만이 신에게나 드릴 만한 절을 요구했기 때문에, 유다인인 모르드개로서는 그렇게 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 여겨집니다. 어쨌든 이로 말미암아 모르드개를 미워한 하만은 모르드개 뿐 아니라, 유다 민족 전체를 도륙하도록 아하수에로 왕에게 허락을 받은 터였습니다.
어느 날 하만은 모르드개를 죽일 수 있게 해 달라는 청을 하려고 일찍 왕을 찾았습니다. 그런데 그 전날 밤 잠이 오지 않던 아하수에로 왕은 궁중 일기를 읽게 했는데, 모르드개가 빅단과 데레스의 반역을 막은 일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때 모르드개에게 상을 주지 못한 것을 안 왕은 모르드개에게 줄 상을 의논하려고 하만을 기다리던 참이었습니다. 왕은 <왕이 존귀하게 하기를 원하는 사람에게 어떻게 하여야 하겠느냐>고 물었고, 이 순간 일생일대의 치명적 오해를 하게 되었습니다. 하만은 왕이 존귀하게 하기를 원하는 자가 자신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왕의 명령은 뜻밖이었습니다. 왕이 존귀하게 하려는 사람은 모르드개였습니다. 그는 모르드개에게 왕복을 입히고 왕의 말에 태워 온종일 수산성을 돌면서 <왕이 존귀하게 하시는 사람은 이렇게 한다>고 외쳤습니다. 그리고 그날 밤 에스더가 베푼 잔치에 두 번째로 갔다가, 그의 악한 음모가 드러나 죽음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오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자신은 잘 믿는다고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그렇지 않은 경우가 있습니다. 사람이 보는 것과 주님께서 보시는 것은 다릅니다. 마태복음 7장 22~23절입니다. <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이런 오해에 빠지지 않으려면 겸손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반대의 경우엔 망신하게 될 것입니다. 언제나 부족함을 느끼고 겸손하게 하나님을 섬기길 원합니다. 그리고 진실한 믿음을 가지도록 힘써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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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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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칼럼]오해를 풀고 참 소통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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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방미를 앞두고 너무나 큰 부담을 가졌습니다. 3년 전 참전용사 행사를 하러 갔을 때, 정말 3일 밤을 꽉 새웠거든요. 이번에도 그럴까봐 정말 가슴이 조마조마했습니다. 그래서 방도 혼자 쓰고 어떻든지 잠을 자려고 노력하였습니다.
저는 미국에 도착하자마자 시작되는 참전용사 초청행사를 섬겼거든요. 3시간 넘는 행사는 저뿐만 아니라 구순을 훌쩍 넘긴 한국전 참전용사들에게도 적지 않는 피로감을 느끼게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웬일인가요? 그분들은 시차가 없어서 그런지, 끝까지 꼿꼿한 자세로 앉아서 경청하고 박수하며 감탄하시는 것입니다.
저는 이튿날 추모의 벽에 가서 헌화식을 한 후, 주일에는 워싱턴 한인장로교회에 가서 설교를 하였습니다. 이 행사에 축사를 하기 위하여 동행하신 이언주 의원님은 오후에도 북한 주민의 인권과 한국과 관계되는 분들을 만나자고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저의 건강을 생각해서, 저 대신 박요셉 목사님과 만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만남과 대화의 요지를 전해 들었습니다.
그다음 날은 공항으로 가는 귀국길에 올라야 했지만, 이언주 의원님께서 대한민국과 동아시아 전략가요 담당관인 존 제이 리안(John Jay Ryan) 담당관을 만나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 자리는 목사님이 꼭 같이 가야 한다”고 해서 가게 되었습니다.
아침 일찍 일어나 미 국무부로 들어갔습니다. 저는 처음에는 아무 말도 안 하고 이언주 의원님과 존 제이 리안 담당관과의 대화만 듣고 있었습니다. 제가 가만히 들어보니까, 대화의 요지는 대미 투자, 조선소 설립 문제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이미 미국은 조선소를 폐기한 거나 다름이 없대요. 그래서 대한민국이 도와줘야 새로운 배를 만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거기에 전문가가 아니니까 듣고만 있었습니다. 이언주 의원님은 유창한 영어를 구사하면서 한국의 입장에서 전략적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한 40여 분을 그런 얘기를 하다가 한국 주무 담당관이 갑자기 저에게 질문을 하는 것입니다. “소 목사님께서는 한국교회 주요 지도자인 줄로 알고 있는데, 왜 정부가 나서서 교회를 박해하고 국회에서는 종교단체 해산법을 추진하고 있는 것입니까? 왜 가만히 지켜보고 있습니까?” 그러면서 여러 가지 극단적 예를 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 국장님, 저도 그런 몇몇 사례에 대해서는 굉장히 깊은 유감을 표현하였고 도가 넘는 일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국장님께서 오해하는 부분이 있는 것 같습니다. 종교단체 해산법이 교회폐쇄법이 아니라는 것만은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누가 그런 정보를 갖다주고 그런 오해를 심어줬는지는 몰라도 그건 완전히 사실과 다릅니다. 종교단체 해산법은 신천지나 통일교의 영업을 막기 위한 것입니다. 기성교회, 정통교회를 폐쇄하기 위한 법은 결코 아닙니다.”
그러자 “통일교와 신천지가 기성교회와 다른 점이 무엇입니까?”라고 묻는 것입니다. “국장님, 미국에도 수많은 이단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 이단들은 사회적, 문화적 병리현상을 일으키는 컬트 집단이지요. 통일교와 신천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컬트 집단을 해산하기 위하여 법을 제정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일부 교회와 목회자들이 그걸 교회폐쇄법으로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나서서 그 법을 발의했던 몇몇 의원님께 전화해서 ‘이렇게 한국교회가 많은 우려를 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목적이 좋아도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것은 서로 간에 오해와 충돌 관계를 일으킬 수가 있습니다. 적어도 그 법을 발의하기 위해서는 기존 교회 혹은 정통 교회에 대한 예외조항을 만들어야지, 아무리 선한 목적을 가지고 법을 만들어도 그 법이 정통 교회까지 악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랬더니 “그럴 수가 있겠네요. 우리는 정통 교회를 보호하고 컬트 집단의 비즈니스를 막기 위해서 발의를 했는데 목사님 말씀을 듣고 보니 오해의 소지가 있네요. 당장 이 법을 발의하지 않겠습니다. 이 법안은 폐기하겠습니다. 그리고 정통교회가 동의할 만한 법안을 만들겠습니다. 목사님께서 큰일을 하셨군요. 귀한 정보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면서 아주 화해로운 분위기로 바뀌게 된 것입니다.
그때 제가 그런 얘기를 했습니다. “이러한 상황과 팩트를 트럼프 대통령께도 잘 보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자 그분이 “폴라 화이트 목사를 아십니까?”하는 것입니다. “저는 모릅니다. 국장님께서 소개시켜 주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제가 트럼프 대통령을 만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최선을 다해 노력해 보겠습니다.”
그분의 말씀이 립서비스였는지 진정성의 말씀인지는 몰라도 듣기에 어색하지는 않았습니다. 거의 1시간 반 가까이 걸친 대화였지만 거침없는 이야기를 서로 주고받았습니다. 어쩌면 그분들은 미국의 조선업보다 한국교회를 더 염려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그 염려가 긍정적 염려라기보다는 오해가 섞인 염려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그 오해와 염려를 풀어주고 왔지만 공항으로 오는 길에 여러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국교회는 자정능력을 가지고 정화하고 각성하며 부흥운동을 일으켜야 합니다. 한국교회마저도 이념에 갇혀 대국 사상을 가져야 한단 말입니까? 누군가가 그런 오해를 하도록 잘못된 정보를 가져다 주었을 텐데요. 꼭 그렇게 해야 했을까요? 조금이나마 대한민국을 오해하고 있었던 부분을 풀어주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한결 가볍기도 하고 뿌듯하기도 했습니다. 저는 앞으로도 기회가 될 때마다 이런 소통과 화해 사역을 잘 해내겠습니다. 방미 일정 동안 저를 위해서 기도해 주신 모든 성도님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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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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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칼럼]그들의 피에는 헤게모니가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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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년 이탈리아의 뭇솔리니 파시즘 정권에 의해 투옥되어 20년 형을 받은 안토니오 그람시(Antonio Gramsci, 1891~1937)에게는 풀 수 없는 수수께끼 같은 물음이 하나 있었습니다. ‘왜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삶을 갉아먹는 자본주의 체제를 무너뜨리지 않고 동조하는가?’ 기존의 마르크스주의가 대답할 수 없었던 질문입니다. 그리고 고심 끝에 그가 나름대로 찾아낸 답이 바로 ‘헤게모니’였습니다. 체제의 지배는 ‘강제’(coercion)뿐만 아니라 ‘동의’(consent)에 의해 이루어지는데, 억압적 기구가 아니라 교육·언론·예술 등을 통해 이데올로기를 유포하고 이를 자발적으로 수용하게 하는 일종의 ‘문화적 지배’가 바로 ‘헤게모니’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사람들은 이를 ‘패권’이나 ‘주도권’을 상징하는 말로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사실 따지고 보면 그리스 도시국가의 ‘맹주권’을 가리켰던지라 본래 의미로 회귀한 셈이기도 합니다. 고대 그리스에서 이 헤게모니를 얻기 위해 수 세기 동안 아테네와 스파르타와 테베 등이 서로 얼마나 경쟁했습니까? 그런데 현대에 와서 이러한 ‘헤게모니 쟁탈전’이 유독 치열한 전장이 있습니다. 바로 ‘진보’를 자처하는 진영입니다.
진보의 뿌리는 프랑스 대혁명 시절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국민의회(Assemblée nationale)가 소집되자 의장을 중심으로 오른쪽에 성직자와 귀족을 중심으로 한 보수파가 앉았고, 왼쪽에는 왕정 타파와 신분제 폐지를 부르짖던 개혁파들이 앉았는데 이들을 ‘좌파’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혁명을 주도했던 진보 진영에서 정치의 헤게모니를 둘러싸고 치열한 다툼이 벌어집니다. 먼저는 온건한 지롱드파와 과격한 자코뱅파가, 나중에는 급진파 내부에서도 로베스피에르와 당통이 주도권을 두고 싸웠습니다. 엎치락뒤치락하던 끝에 최종 패권은 아이러니하게도 나폴레옹에게 돌아가 버리고 말았지요. 1917년 혁명 이후 러시아에서도 헤게모니를 둘러싸고 치열한 다툼이 벌어졌습니다. 레닌의 후계 자리를 두고 일어난 스탈린과 트로츠키의 살벌했던 헤게모니 쟁탈전은 결국 망명지(멕시코)까지 쫓아온 암살자에 의해 트로츠키가 죽임을 당함으로써 막을 내렸습니다. 1960년대 중국 공산당 내부에서 벌어졌던 헤게모니 쟁탈전도 엄청났지요. 실용주의 노선으로 마오쩌둥(毛澤東)의 헤게모니에 도전했던 류사오치(劉少奇)도 결국 감옥에서 비참하고 쓸쓸하게 죽었습니다. 이후 덩샤오핑(鄧小平)이 중국의 패자가 되기까지에도 더욱 치열하고 살벌했던 헤게모니 쟁탈전이 있었습니다.
물론 어떤 체제든 주도권을 둘러싸고 헤게모니 쟁탈전이 벌어지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유독 진보 진영의 헤게모니 쟁탈전이 치열해 보입니다. 그람시도 말했듯이 ‘진보’는 기득권과 맞서 싸워야 하기에 정치적 유전자 속에 헤게모니를 향한 투쟁심이 더 뚜렷하게 각인되어 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해 보았습니다. 지금 한국의 여당 내부에서 벌어지고 있는 소위 ‘명·청 갈등’ 내지 ‘친명과 반명’의 대립도 이런 관점에서라면 얼마든지 해석이 가능한 현상입니다. 이제 출범한 지 1년밖에 되지 않은 신정부 내에서 개혁의 과제들이 산적해 있고 게다가 숨 가쁘게 돌아가는 국제정세에 고유가와 환율급등 및 부동산가격의 도전이라는 민생 현안과 무엇보다 젊은 층의 신(新) 참정권 운동으로 혼란이 가중되는 이 시점에 도대체 여당 내부에서 저리도 다투는 이유는 무엇인가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여기에 ‘그들의 피에는 헤게모니가 흐른다’라는 수사적 표현으로 조심스레 답을 제시한다면 무리한 해석일까요? 1987년 민주화운동으로 대통령직선제를 쟁취한 후 대선 정국에서 진보 진영이 동교동파와 상도동파로 분열하여 결국 보수파에 승리를 내어주었던 역사 역시 외부를 향했던 투쟁심이 헤게모니를 둘러싸고 내부로 역행한 결과라고 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헤게모니’는 성경에도 여러 번 등장합니다. 즉, 명사로는 “다스리는 자”(마 2:6), “말하는 자”(행 14:12), “인도하는 자들”(히 13:7), 동사로는 “여기고”(빌 2:3), “여길, 여김”(빌 3:7, 8), “여기라”(약 1:2)로 나타납니다. 그람시의 ‘헤게모니’가 사람들의 의식과 상식을 지배하는 힘이듯, 성경 속 개념 역시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가치관에 끌려다니지 않고 하나님의 관점으로 세상을 해석하는 주도권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헤게모니에 관련하여 무엇보다 예수께서 하신 말씀이 중요합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막 10:43-44), 여기서 “크고자 하는” 혹은 “으뜸이 되고자 하는”이 바로 헤게모니를 좇는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들(그리스도인)의 핏속에는 어떤 헤게모니가 흘러야 하겠습니까? 섬김과 종이라는 역설적 헤게모니가 아닐까요? 목숨까지도 오직 나라와 국민을 위해 내놓을 수 있는 그런 예수적 헤게모니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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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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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의말씀]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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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기도입니까? 사랑입니까? 순종입니까? 헌신입니까? 물론 그 모두 다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의 뿌리에는 반드시 믿음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위기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을 수 있었을까요? 사도 바울에게는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나님께서는 사도 바울의 모습을 통해 우리에게 중요한 진리를 가르쳐 주십니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위기를 기회로 만든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 말씀을 통해 우리도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믿음을 배우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 여러분,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믿음은 어떤 믿음입니까?
첫째, 위기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는 믿음입니다.
참된 믿음은 현실을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위기의 현실을 외면하는 것도 아닙니다. 믿음은 위기보다 더 크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문제보다 하나님의 계획을 더 크게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같은 상황인데 결과가 달라집니다. 그래서 믿음은 우리의 질문을 바꿉니다. “왜 하필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났습니까?”에서 “하나님께서 이 일을 통해 나에게 무엇을 이루시길 원하십니까?”로 질문을 바꾸어 놓습니다.
오늘 우리의 삶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실직이 위기일 수 있습니다. 질병이 위기일 수 있습니다. 사업 실패가 위기일 수 있습니다. 관계의 깨어짐이 위기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위기 속에서도 일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위기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찾기 시작할 때, 위기는 더 이상 우리 인생의 장애물이 아니라 하나님이 일하시는 통로가 됩니다.
그러면 여러분,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믿음은 어떤 믿음입니까?
둘째, 있는 곳에서 최선을 다하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성공보다 충성을 기뻐하십니다. 달란트 비유를 보십시오. 다섯 달란트 받은 종이 주인의 칭찬받았습니다. 그런데 두 달란트 받은 종도 똑같이 칭찬받았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 하나님은 결과보다 충성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얼마나 성공했느냐?”를 먼저 묻지 않으십니다. “얼마나 충성했느냐?”를 먼저 물으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오늘 하나님께서 맡기신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십시오. 가정에서 최선을 다하십시오. 직장에서 최선을 다하십시오. 교회에서 최선을 다하십시오. 보이는 열매가 없어도 최선을 다하십시오. 그때 하나님께서 위기를 기회로 바꾸어 주실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믿음은 어떤 믿음입니까?
셋째, 하나님의 선하신 결과를 신뢰하는 믿음입니다.
로마서 8장 28절은 말씀합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모든 것”입니다. 여기에는 우리의 성공도 포함됩니다. 우리의 실패도 포함됩니다. 우리의 눈물도 포함됩니다. 우리의 상처도 포함됩니다. 우리의 질병도 포함됩니다. 우리의 고난도 포함됩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에 들어가면 하나님의 선을 이루는 재료가 됩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모든 것으로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손을 바라보고 하루하루 믿음으로 살아가기로 결단할 수 있길 축복합니다.
그리하여 사도 바울처럼 위기를 기회로 만들고, 절망 속에서도 소망을 발견하며,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경험하는 저와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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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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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적경영학개론]AI와 기업경영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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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1분기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영업이익이 57조원과 37조원으로 사상 최대 실적을 올렸다. 생성형 AI 기술의 열풍이 전 산업으로 확대되고, 이를 구동하기 위한 HBM 메모리와 차세대 AI 가속기 수요가 증가하며 초유의 이익이 발생한 것이다. AI 인공지능(Artificial Intelligence)은 인간의 학습능력, 추론능력, 지각능력, 자연언어의 이해능력 등을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실현한 기술을 의미한다. 초기 AI가 체스나 바둑과 같은 규칙 안에서 최적의 수를 찾는 좁은 의미의 것이었다면, 지금의 AI는 방대한 데이터를 기초로 텍스트, 이미지, 영상, 코드 등 콘텐츠를 스스로 창조해 내는 생성형 AI(Generative AI)로 진화하였다.
그리고 많은 기업이 자율주행, 정밀 의료, 스마트 팩토리, 금융공학 등 산업의 AI 인프라 구축을 위해 투자와 혁신을 도모하고 있다. 그러나 성장의 이면에는 인간의 일자리 상실, 부의 양극화, 딥페이크(Deepfake), 거짓 정보로 인한 오염, 알고리즘에 내재된 편향성과 차별 등을 염려하는 시각도 있다. 그러면 이러한 요소들을 포함해 AI의 물결이 기독경영인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일까? AI 인공지능에 대한 성경의 직접적인 언급은 없다. 그러나 인간의 모든 시대의 활동, 특히 기업의 경영에 대해 성경은 명확한 기준을 제시한다. 본 글은 성경적 경영학개론 다섯번째 칼럼으로 ‘AI와 경영’을 주제로 다음 4개의 성경적 원리를 제시하고자 한다.
첫째는 청지기적 AI 기술 경영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시고 세상을 다스리고 지킬 청지기적 문화 명령을 주셨다(창1:28, 2:15). AI 기술은 비즈니스의 업무 효율성을 포함, 인간의 질병 원인을 찾아내고 생태계 파괴 기후의 데이터 자료 분석 등 다양한 모습으로 긍정적 역할한다. 그러나 성경은 이익의 극대화나 효율성을 위해 인간이 AI 시스템의 부속품처럼 취급되거나 통제하는 것에 대해 반대한다. 이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으로 고유의 존엄성을 갖고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둘째는 데이터 윤리이다(잠11:1, 암5:24). AI는 인간이 입력한 데이터에 의존해 학습한다. 데이터에 조작된 거짓 정보나 잘못된 편견이 포함된다면 이를 그대로 확대 재생산하여 기업과 사회에 피해를 주는 속이는 저울 역할을 할 수 있다. 실제 과거 대출 승인, 채용 심사, 복지 수급자 선정 등에 AI가 특정 계층을 불합리하게 차별한 사례도 지적을 받고 있다. 따라서 AI 기업의 경영인은 바른 데이터 입력과 축적을 기초로 정직한 의사결정을 하여야 하며, 나아가 아모스 5장의 교훈처럼 ‘정의가 물같이 공의가 마르지 않는 강같이 흐르게’ 기업윤리를 창출해 가는 수행자 역할을 하여야 할 것이다.
셋째는 기술의 한계 인식이다(창11:4). 실리콘밸리의 기술 지상주의자들은 AI와 생명공학을 결합하여 인간의 한계인 죽음마저 극복하고 생명을 창조하려 한다. 그러나 이는 하나님의 주권을 침범하는 행위이다. AI는 인간의 죄를 대속해 구원할 능력이 없다. 따라서 경영자의 리더십은 다양한 연구개발과 투자는 하되 기술의 한계를 겸손히 인정하는 데서 출발하여야 한다. ‘우리가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다’는 바벨탑과 같은 교만에서 벗어나, 기술을 하나님이 허락하신 경계 안에서 절제하며 사용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넷째는 이웃 사랑과 섬김의 실천이다(마22:37-39, 25:40). AI 기업의 호황을 통해 그 수익성이 주목을 받고 있다. 그러나 이윤은 최종 목표가 아닌 섬김의 수단(Vehicle)으로서 가치를 갖고 있어야 한다. ‘마음과 뜻과 목숨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고 성경은 교훈하고 있다. AI 기술이 특정 기업의 수익 창출 수단을 넘어, 그리스도의 사랑과 자비를 나누며 소외되고 연약한 자들을 위해서도 사용될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특별히 지구촌 곳곳 제3세계 국가의 경우 열악한 환경적 요소로 인해 AI는 물론 의료 교육 등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곳이 너무나 많아 그 섬김의 실천이 요구된다.
결론적으로 AI와 기업경영, 산업의 발전은 앞으로도 지속될 전망이다. 반도체 산업의 영업이익 호황 또한 국가 재정수익과 기업의 해외경쟁력 확보를 위해 좋은 시그널로 받아들여진다. 아울러 성경적 경영은 기독경영인에게 끊임 없이 도전하고 실천해야 할 과제이다. AI 기술 경영도 예외가 아니다. AI를 통해 하나님 나라의 의와 복음이 선한 모습으로 전파되는 사례가 더욱 많아지기를 기도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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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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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충우돌 크리스천 자녀 양육기]“엄마가 너희의 정서적 지지 기반이 되어 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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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오늘 학교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
초등학교 4학년 딸이 학교에 갔다 와서는 친구들 사이에 있었던 일들을 조잘조잘 이야기한다.
“내 친구가 그 일 때문에 엄마한테 엄청 혼나고 벌도 섰대. 진짜 슬펐을 것 같아. 내 친구 너무 불쌍해. 그 엄마 너무 했어.”
“친구한테 그런 일이 있었구나. 그런데, 이야기를 들으니 은별이 친구도 이런저런 부분에서는 잘못한 것 같은데, 그 엄마도 딸이 그렇게 행동해서 기분이 나빴을 것 같아.”
아이의 이야기를 듣고 나의 의견도 말하려는 순간, 아차 싶었다. 아이는 이미 100% 자신의 말에 공감하지 않은 나를 향해 불신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고 나도 “그냥 잠잠히 듣기만 할걸…”이라는 후회가 밀려올 때는 이미 늦었다는 것을 직감했다.
‘부분적 공감’
결혼을 하고 아이를 양육하면서 깨달은 나의 한계 중 하나는 “나는 누군가를 온전히 100%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이다. 그 상대가 내가 사랑하는 남편이나, 내가 낳은 아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나의 가족은 내게 ‘온전한 공감’ 받기를 원하며 감정을 쏟아 대화를 하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온전히 공감해주는 척 하지만 실제로는 ‘부분적 공감’만 하며 대화의 종착지로 가면 갈수록 내 이야기만 하는 어리석음을 수없이 많이 저지른다.
특히, 아이들과의 관계에서 정서적 공감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머리’로 알기에 공감하는 척, 마음을 이해하는 척, 100% 경청하는 척 하지만 내 마음 속에는 ‘내 것을 아이들에게 주입’ 시켜야한다는 속셈이 꿈틀거리고 있다.
사람의 내면을 건강하게 만드는데 필요한 결정적인 요소 중 하나는 가까운 사람으로부터 받는 ‘정서적 지지’이다. 내 편이 되어주는 단 한 사람,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나의 정서를 100% 공감해 줄 수 있는 단 한 사람, 내 마음이 무너져 내릴 때 언제든 기댈 수 있는 단 한사람만 있어도 사람은 절망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
특히 내면이 막 자라기 시작한 아이들에게는 가장 가까운 엄마, 아빠로부터 받는 절대적 공감과 수용이 인생을 건강하게 펼쳐갈 평생의 거름이 된다.
그런데, 난 사실 공감과 수용이 쉽지가 않다.
내가 사랑하는 아이들에게는 말처럼 그들의 정서적 지지 기반이 되어주고 싶은데, 실제 삶 속에서는 나의 정서를 읽고 처리하는 것만으로도 벅차서 아이들의 마음을 100% 온전히 수용하지 못하는 경우가 훨씬 많다.
그래서 오늘부터 연습하기로 했다.
먼저, 아이가 나를 부를 때는 하는 일을 멈추고 아이에게 집중하기로 했다. 일을 마치고 집에 들어오면 나를 기다리는 것은 아이들뿐만이 아니다. 싱크대에 쌓여있는 그릇들, 건조기 속에 들어있는 빨래들, 거실 여기 저기 널려 있는 책들 등 모두 나의 손을 거쳐 제자리를 찾아야 한다. 빨리 집안일을 끝내고 아이들 저녁 준비를 하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면 아이들이 “엄마”라고 불러도 그 일을 하면서 대충 “어, 무슨 일이니?”라고 흘려보낼 때가 많았다. 아이의 요구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이 훈련부터 시작해보았다. 내가 무슨 일을 하고 있어도 아이가 부르면 하던 일을 멈추고 즉각 반응하기. 물론 쉽지 않았다. 거품이 잔뜩 묻은 고무장갑을 쉴 새 없이 빼다 끼다를 반복했으며 두부 한 모를 온전히 다 써는데 20분이 걸리기도 했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서 절충점을 찾아 처음보다는 시간이 많이 줄어들었지만 그래도 아이들의 입장에서 그들의 요구를 먼저 들어주는 일은 시간과 희생이 필요했다.
또한, 아이들 한 명 한 명과 하루 10분 정도 대화하는 시간을 갖기로 했다. 아이들이 많아서 엄마와의 둘만의 대화 시간이 필요한데 지금까지는 실천하지 못했지만 지금부터 한 걸음이라도 내딛어 보는 것이다.
나도 엄마가 처음이라 수없이 많은 시행착오를 겪는 중이어서 아이들의 온전한 정서적 지지 기반이 되어 줄 수 있을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내가 아이들에게 버팀목이 되는 존재, 어떤 상황에서도 아이들 편이라는 정체성을 내가 먼저 인식하고 행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 가치를 마음 속에 담고 노력할 때 아이들에게 나의 진심이 조금이나마 전달되리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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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세대
- 좌충우돌 크리스천 자녀 양육기
2026-0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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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세대 칼럼]기도할 때 일어난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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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는 우리 신앙 생활의 중요한 기초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를 맺고,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여러 문제들을 하나님께 의탁할 수 있습니다. 특히, 다음 세대에게 기도의 의미와 그 힘을 알려주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먼저, 기도의 주권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사도행전 12장에서 우리는 베드로가 감옥에 갇혔을 때 교회가 간절히 기도한 이야기를 접합니다. 베드로의 친구이자 제자였던 야고보는 칼에 맞아 죽었지만, 베드로는 기도 덕분에 구출됩니다. 이 사건은 기도의 응답이 항상 우리가 원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지 않을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지만, 그 응답은 오직 그분의 뜻에 따라 이루어집니다. 다음 세대에게 이 사실을 가르쳐, 기도의 결과에 대한 신뢰를 심어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두 번째, ‘하나님은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일하신다’라는 것입니다.
기도는 단순한 요청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기도를 통해 놀라운 능력을 나타내십니다. 베드로가 감옥에서 구출된 것처럼, 우리의 기도도 하나님께서 초자연적으로 역사하시는 통로가 됩니다. 다음 세대가 기도를 통해 기적을 경험할 수 있도록, 그들이 상상할 수 없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게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기도를 통해 변화되지 않을 것 같던 상황이 바뀌는 경험을 하게 된다면, 그들은 기도의 힘을 깊이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세 번째, 기도할 때 의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베드로가 구출된 후, 기도하던 사람들은 그의 소식을 듣고 믿지 못했습니다. 기도를 드리면서도 응답될 것이라는 믿음이 부족했던 것입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기도할 때, 그들의 마음속에 있는 의심과 두려움을 내려놓게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크신 분이며, 그분의 능력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합니다. 다음 세대가 기도할 때 의심이 아닌 믿음으로 나아가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네 번째, 기도는 신앙의 특권입니다.
기도는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특별한 특권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과 직접 소통하며, 그분의 응답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다음 세대가 기도의 소중함을 알고, 언제 어디서든 하나님께 간구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깊어지고, 그들이 삶의 어려움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기도는 단순한 의식이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깊게 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는 중요한 길입니다. 우리의 다음 세대가 이러한 기도의 힘을 깨닫고,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기도하며 인도하며 본을 보이는 어른들이 되시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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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6-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