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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서연구] 버림받은 자의 기념비
    사무엘상 15장을 읽을 때마다 슬픔을 느낍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사랑했던 사람이 버림받는 이야기가 나오기 때문입니다. 버림받은 사람은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이었습니다. 그가 버림받은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일찍이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하여 광야에 나왔을 때 아말렉 족속이 그들을 가로막아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그때 모세는 두 손을 들었고, 여호수아는 군사를 이끌고 싸웠고 승리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아말렉을 진멸하겠다고 말씀하신 바 있었는데, 아말렉을 진멸하라는 명령이 사울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런데 사울이 아말렉을 친 것까지는 좋았으나, 그는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진멸하기는커녕 아말렉의 왕 아각을 살려서 데려왔고, 수많은 짐승도 약탈해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순종하지 않는 사울에게 실망하셔서 그를 버리셨습니다. 사무엘상 15장 10~11절입니다. <10 여호와의 말씀이 사무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11 그가 돌이켜서 나를 따르지 아니하며 내 명령을 행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 하신지라 사무엘이 근심하여 온 밤을 여호와께 부르짖으니라> 사무엘은 슬픈 마음으로 사무엘을 만나러 갔습니다. 그러나 그때 사울 왕은 갈멜에 자기를 위한 기념비를 세우고 있었습니다. 사무엘상 15장 12절을 보면 <12 사무엘이 사울을 만나려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났더니 어떤 사람이 사무엘에게 말하여 이르되 사울이 갈멜에 이르러 자기를 위하여 기념비를 세우고 발길을 돌려 길갈로 내려갔다 하는지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상황을 생각해 보십시오. 사울은 땅의 일만 보고 있었습니다. 땅에서는 그가 적의 왕을 사로잡고, 수많은 짐승을 약탈하여 대승을 거둔 것처럼 보입니다. 자신이 영웅이 된 것처럼 보였고, 기념비를 세울 만 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하늘의 일은 알지 못했습니다. 땅에서는 사울이 승리에 도취되어 있을 때, 하늘에서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실망하셨고, 그를 왕으로 삼으신 것을 후회하셨고, 그의 왕위를 다른 자에게 주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사무엘을 통해 전달된 하나님의 말씀을 보세요. 사무엘상 15장 26~28절입니다. <26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나는 왕과 함께 돌아가지 아니하리니 이는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 왕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음이니이다 하고 27 사무엘이 가려고 돌아설 때에 사울이 그의 겉옷자락을 붙잡으매 찢어진지라 28 사무엘이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오늘 이스라엘 나라를 왕에게서 떼어 왕보다 나은 왕의 이웃에게 주셨나이다> 하나님에게서 버림받은 것도 모른 채, 기념비를 만드는 사울의 모습이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결국 그의 왕좌는 다윗에게 넘어갔습니다. 저는 한국교회도 지난 세월 동안 이런 실수를 했다고 생각합니다. 그 동안 제법 열심히 하나님 나라를 위해 선교와 봉사에 힘쓴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과연 우리는 전적으로 하나님께 순종했을까요? 그렇지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기념비를 세우느라 바빴습니다. 성도가 좀 모이면 목회에 성공했다고 자부했습니다. 마치 하나님의 은혜로 승리했음에도 자신이 아말렉에게 이긴 것처럼 도취된 사울과 같습니다. 그리고 사울이 기념비를 세우듯이, 한국교회도 자기 교회를 자랑했습니다. 세간에서 자신의 교회를 얼마나 높게 평가하는지에 우쭐했습니다. 방송에 설교를 송출하는 교회들이 많은데, 한때는 이것이 선교를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 교회는 방송 설교도 하고 있다>고 과시하는 성격이 강했습니다. 교회들은 성도가 좀 모이면 거대한 교회와 수양관을 짓는 게 유행이었습니다. 목회자들은 박사학위 과정에 등록을 하고, 노회와 총회에서 이름을 알리려고 노력했습니다. 이런 저런 모임에서 이사장, 회장 한 두 자리를 하는 것도 순수한 섬김보다 기념비적 측면이 강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설교집이라도 몇 권 내지 않으면 명함을 내밀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요즘 한국교회의 현실을 보면서 슬픔을 느낍니다. 교세가 급속하게 위축되고 있고, 세상에서 비난받습니다. 교회들이 자신감을 잃고 움츠러들고 있습니다. 혹시 하나님께서 사울에게 실망하신 것처럼, 우리에게 실망하셨을까 하여 크게 염려됩니다. 촛대를 옮기시려고 작정하신 것은 아닌지 두렵습니다. 그런데 지금도 여전히 기념비를 세우는 데 열심인 우리 모습이 안타깝습니다. 지금 필요한 것은 기념비를 세우는 게 아니라, 십자가 앞에 엎드리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우리의 기념비들이 버림받은 자의 기념비가 되지 않길 원합니다. 하나님께 엎드려 전적으로 겸손하게 순종하길 원합니다. 그게 살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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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9-23
  • [시사칼럼] “욕망”의 개혁과 재구성
    교회와 백화점의 공통점은 무엇일까요? 제임스 스미스의 문제작 『하나님 나라를 욕망하라(Desiring the Kingdom)』에 답이 있습니다. 바로 “욕망”입니다. 우리는 지금 ‘욕망의 시대’에 살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젊은 세대로 갈수록 그런 경향이 더욱 뚜렷합니다. ‘카푸어(car poor)’나 ‘영끌족’이란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전자는 좋은 차 사느라 가진 돈 다 써버리고 가난하게 사는 경우를, 후자는 영혼까지 끌어모아 주택(주로 아파트)을 구매하는 경우를 가리키는 신종 용어입니다. 이러한 현상을 우려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기성세대 대부분이 그러하겠지요. 그러나 정작 당사자들은 ‘그게 어때서?’라며 나름대로 만족감을 누리고 살아갑니다. 기존의 언론에서 다소 부정적인 논조로 이러한 현상을 보도하는 이유는 이를 ‘욕심’ 때문이라고 보기 때문인데, 차라리 “욕망”의 발로라고 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욕망”이라는 개념은 좋고 나쁨의 양단에서 일종의 왕복 진자 운동을 보여 왔습니다. 제임스 스미스는 현대 프랑스 철학을 함께 연구한 기독교학자입니다. 서구권에서는 원래 욕망을 ‘결핍’을 전제로 다소 부정적으로, 즉 무언가 부족하기 때문에 욕망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자크 라캉(Jacques Lacan, 1902-1981)은 인간이 이성의 주체라기보다 욕망의 주체이며, 그것도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는 존재(거울 이론)라고 주장했습니다.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 1929-2007)에 따르면 역사는 생산의 시대에서 소비의 시대로 넘어 왔으며, 이 새로운 시대의 핵심은 바로 “욕망”인데 ‘욕구’가 자연적 필요와 관련된다면 “욕망”은 그 너머에 있는 추상적인 어떤 개념이라 정의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자주 인용하는 스피노자(Baruch Spinoza, 1632-1677)는 이미 “욕망은 인간의 본질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이 자신의 존재를 지속하려고 노력하는 코나투스(Conatus)다.”라고 한 바 있습니다. 여기서 “코나투스”라는 단어는 사도행전 14장 6절에도 등장합니다. 곧 “이방인과 유대인과 그 관원들이 두 사도를 능욕하며 돌로 치려고 달려드니”에서 마지막 단어가 이에 해당합니다.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미셀 푸코(Michel Foucault, 1926-1984)가 현대는 아마도 그의 시대라고 불릴 것이라 극찬했던 질 들뢰즈(Gilles Deleuze, 1925-1996)는 “욕망은 흐르게 하고 흐르고 절단(coupures)한다”는 유명한 명제를 통해 욕망을 아예 우주의 내재적 원리이자 그 운행을 관장하는 에너지라고 선포했습니다(안티 오이디푸스, 11). 이들에 따르면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라는 유명한 명제는 ‘나는 욕망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로 바뀌어야 하는 셈입니다. 물론 들뢰즈는 욕망을 이렇게 능동적으로 보지 않고 수동적 종합으로 이해합니다만, 아무튼 우리는 이들 사상가들의 주장을 결코 폄훼하거나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현실을 바라보고 현실을 읽고 저마다의 대안을 제시하는 역할을 감당했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염연히 욕망이 존재합니다. 현대의 그리스도인들도 저마다 이런저런 욕망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도 “돈과 욕망의 포로, 그것이 타락이다”(김기석) 식의 고전적인 해석이 아니라 욕망 개념의 개혁을 통해 보다 적극적이고 능동적이며 선한 기독교적 욕망을 새롭게 재구성해야 합니다. 성경에도 의외로 “욕망”이란 단어가 흔치 않습니다. 다만 그 앞에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롬 6:12),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롬 13:14),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요일 2:16)와 같이 다소 부정적인 수식어가 붙은 채로 등장할 뿐입니다. 그러나 일절의 욕망이 부재하다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바랄 수 있겠습니까? 일절의 욕망이 부정하다면 어찌 하나님께서 욕망덩어리인 사람 모양으로 오셨겠습니까? 칼빈(John Calvin, 1509-1564)은 십계명 해설에서 “사랑의 정신에 합당하지 않은 모든 욕망은 우리 마음에서 축출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Inst. 2. 12). 신자는 마땅히 사랑에 합당한 “하나님 나라를” 욕망해야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욕망해야 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욕망해야 하고, ‘예배를’ 욕망하고 ‘선행을’ 욕망하고 ‘지복(至福)’을 욕망해야 합니다. 현대 사상가들은 현실의 욕망만 강조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보이지 않으나 바라는 신령한 이런 바들을 욕망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또한 “욕망”은 ‘생각’과 달리 실천을 전제합니다. 가령 하나님 나라를 생각만 하고 정작 실천하려들지 않는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욕망의 개혁과 재구성”이 필요합니다, 바로 지금 이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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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9-23
  • [은혜의말씀] 시내산 언약(출 19:1~6)
    반복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평과 원망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애굽을 떠난 지 꼭 삼 개월이 되던 날 시내산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백성과 ‘언약’을 맺으십니다. ‘언약’이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베리트”라고 합니다. 이 뜻은 ‘묶는다’라는 뜻인데, 이것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하나로 묶는 약속”이라는 의미입니다. 오늘은 이 ‘시내산 언약’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시내산 언약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맺으신 언약입니다. 언약은 본래 쌍방간의 합의하에 이루어진 약속입니다. 그러나 ‘시내산 언약’은 하나님께서 일방적 은혜로 베풀에 주신 언약입니다. 우리의 구원도 하나님께서 이루어가고 계십니다. 우리가 잘나고 똑똑해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사랑이 하나님의 은혜가 이 일을 해나가고 있는 줄 믿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4절에 나옵니다.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인도하였다’는 말은 강하신 하나님의 손길, 비교할 수 없는 위대한 구원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이 독수리 날개에 업혀 구원을 받았듯이,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에 업혀 구원을 받았습니다. 2. 그런데 이 언약에도 순종이 필요합니다.(5절) 하나님은 이제 언약을 통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삶을 살아가길 원하십니다. 단순히 하나님을 아는 차원에 머물 것이 아니라, 삶에 적용하고 실천하여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를 맺기를 원하십니다. 바로 순종에서 출발합니다. 그런데 순종에는 엄청난 축복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1)내 소유가 되고(5절) 본문에서 이스라엘을 내 소유라고 특별하게 말씀하신 까닭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온 세계가 하나님의 것이지만,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는 이스라엘을 가장 보배로운 소유로 삼겠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사 43:1) 여기서 ‘소유’라는 말은 보석 곧 귀중한 재산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집안에 있는 값비싼 보석을 가장 안전하게 보호하며, 그것을 특별한 기쁨으로 여기듯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와 같이 여기시겠다는 것입니다. 2)제사장 나라가 되며(6절) 제사장은 사람을 대신하여 하나님께 중보합니다. 축복을 빌어줄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바로 이러한 나라로 세움을 받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전하고 영원한 대제사장으로 오셔서 이 언약을 완성하셨습니다. 신약에 와서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한 사람들을 제사장으로 삼으신다고 말씀하십니다.(벧전 2:9) 모두가 왕 같은 제사장들입니다. 이제 성도들이 자신만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 때문에 누군가 축복을 받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3)거룩한 백성이 되리라(6절) ‘거룩’이라는 말은 하나님에게 해당하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에게 거룩하게 되는 특권을 허락하셨습니다. ‘거룩’이라는 개념의 가장 기본적인 핵심은 ‘구별’된다는 것입니다. 거룩한 백성은 세상과 구별된 하나님의 백성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주셔서 우리를 거룩한 백성으로 삼으십니다. 또 우리 안에 성령을 주셔서 거룩하게 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원해 주시고, 하나님의 백성 삼아주시며, 이 놀라운 복을 주시는 은혜를, 늘 찬송하며 살 수 있는 여러분 되시길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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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9-23
  • [교회음악칼럼] 교회음악의 새로운 이해 2
    찬양이란 무엇인가? 라는 물음에 대한 정의는 또 다른 각도에서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께로 방향을 맞추는 것이고 나아가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에 대하여 표현하는 것이다. 앞서 강조한바 있지만 찬양의 사전적 정의는 칭찬하다, 갈채를 보내다, 존경 또는 인정을 표현하다, 말이나 노래로 높이다, 크게 보이게 하다, 영광을 돌리다, 즉 하나님을 최고로 높임을 이러한 언어로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정의를 풀어서 이야기하자면 두 가지 관점으로 요약할 수 있는데 첫째로 우리가 직접적으로 하나님을 높이거나 혹은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경외감을 표현함으로서 찬양하는 것이고, 둘째로 우리가 간접적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칭찬하거나 혹은 크신 분으로 보이게끔 찬양으로 소개하는 것이다. 따라서 찬양은 우리가 직접 하나님께 드릴수도 있고, 하나님에 관하여 다른 사람에게 표현함으로서 드려질 수 있다는 말이다. 성경에 근거한 찬양의 특징을 이해하면 좋을 것 같은데,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찬양은 활기찬 축제 분위기에서의 노래나 외침 또 말이나 악기연주 그리고 춤 등 다른 외적인 모습으로 외부로 표출되어야 하는 특이점이 있다. 구약 시편을 통해서 볼 때 이스라엘의 찬양과 경배는 매우 감정적이면서 열정적으로 소리를 높여서 거기에 다양한 악기들과 함께 드리는 모습을 많은 부분에서 보게 되는데 충분한 상상이 가능한 그림으로 이해된다. 우리가 왜 찬양해야만 하는가에 대한 이유도 다시금 명확하게 하고자 한다. 1.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이다. 그를 찬양할 지어다.(시150:1, 시150:6) 2.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거하시는 주여(시22:3) 3. 찬양은 영적 전쟁의 무기이기 때문이다. 즉 찬양 속에 힘이 있다는 말이다.(대하20장) 4.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좋은 일이기 때문이다.(시92:1) 5. 우리의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시기 때문이다.(시48:1, 계4:11) 6. 우리를 창조한 이유가 찬양하게 하기 위해서 이기 때문이다.(렘13:11, 벧전2:9, 이43:21) 이처럼 성경은 우리가 왜 찬양해야 하는지를 구구절절 이야기하고 있다. 우리는 찬양을 통하여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창조의 목적에 부합되게 거룩함과 아름다움으로 하나님께 경배와 찬양을 드리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이다. 다행이도 특별히 하나님께서는 우리 속에 찬양하고픈 마음을 넣어 두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찬양하는 것은 삶을 통해 가장 자연스럽게 흘러나오게끔 되어 있는 것으로 이해해도 좋을 듯하다. 이 얼마나 축복되고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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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9-23
  • [분홍목사의다음세대이야기] “교사들이여,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입니다(2)”
    교회학교 선생님 여러분! 남이 나를 몰라 준다고 마음 아파하지 마세요. 남이 내가 무슨 수고를 하는지 모른다고 해서 그것 때문에 서운해하지 마세요. 하나님이 여러분을 세우셨고, 여러분을 통해서 하나님이 교회의 역사를 이루실 줄 믿습니다. 예수님은 열 두 제자를 부르실 때 주님과 함께 있게 하시려고 부르셨습니다. 이게 동행이잖아요? 동행하는 게 먼저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동역하는 걸 중요하게 보지만 먼저는 동행입니다. 동행한다고 그러면 우리는 사실 부담스럽잖아요. “주님과 동행?” 그러면 왠지 힘들고 어렵고 부담스럽습니다. 하지만 ‘동행’이라고 하는 게 어떻게 하는 것이죠? 함께 손을 잡고 걷는 것이잖아요? 보폭을 맞추고 방향을 맞춰서 속도를 맞춰 걷는 건데요. 같이 동행을 할 때 누가 더 힘들까요? 내가 힘들까요, 하나님이 힘들까요? 여러분, 옆에 꼬마가 있는데 옆에 꼬마랑 저랑 둘이 걷는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러면 제가 힘들어요, 꼬마가 힘들어요? 제가 힘들죠. 꼬마는 힘들 것이 없죠. 왜? 꼬마는 막 걸으면 되잖아요. 아무 데나 막 걸으면 제가 맞추어야 하잖아요.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할 때 여러분, 오해하지 마세요. 우리가 힘든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훨씬 힘들어요. 우리가 워낙 우리 맘대로 가니까 “야! 너 그렇게 갈 거야? 진짜?” 그리고는 같이 가주시고 “야! 너 그렇게밖에 못해?” 그런데 같이 가주시고 동행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동행이 무엇인가? 바로 예배입니다. 우리는 매주 최고의 예배를 못 드리잖아요? 가슴에 손을 얹고 말해보세요. 나의 예배가 매번 하나님 수준에 맞는 예배입니까? 아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 수준으로 내려와 주셔서 우리의 예배를 받아주세요. 그것도 매주요. 여러분, 오늘도 예배 가운데 은혜 많이 받으셨죠? 그거 내가 한 거 아니잖아요? 그거 하나님이 나와 함께 동행해 주셨어요. 내 수준으로 내려오셔서 은혜를 주셨어요. 얼마나 감사해요? 여러분, 그렇게 우리는 하나님이 동행해 주시는 데 그 예배 가운데서 그다음 힘을 얻으면 뭘로 가요? 바로 동역으로 갑니다. 마가복음 3:14~15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귀신을 내쫓는 권능도 가지게 하려 하심이러라.” 그랬어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전도하는 힘을 주십니다. 교사 열심히 하면 어떤 일이 벌어지나요? 아이를 잘 먹이고 양육하면 어떤 일이 벌어지나요? 부모님이 감동을 하십니다. 그리고 안 믿는 부모가 우리 교회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합니다. 우리 아이가 나도 아이를 잘 건사 못하는데 선생님이 너무 안 잘 챙겨요. 매일 매일 기도해 주시고, 매주 전화 오고, 아이 잘 도착했다고, 잘 먹고 있다고, 잘 놀고 있다고, 또 잘 데려다주고, 그러니까 선생님의 사랑에 부모들이 감동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에 나온 새 신자가 있는데 아이들 때문에 어쩔 줄 모르는데 선생님이 와서는 “안녕하세요. 그 아이는 저희 부서로 데려가요.” 예배를 마음껏 드리고 났더니 그 아이가 “엄마! 저 오늘 너무 예배 잘 드렸어요. 너무 재미있어요.?” 그러면은 “야! 우리 교회 또 와야지!” 이런 마음이 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교사는 교사 열심히 하면 전도하는 겁니다. 교사만 열심히 해도 전도가 된다니까요? 여러분, 찬양대원은 찬양으로 전도하는 것입니다. 담임목사는 설교로 전도하고 여러분은 여러분의 자리에서 예배하므로 전도를 하는 것입니다. 저는 교사들에게 이야기를 해요. 절대 나가서 전도할 생각하지 말고 애들 잘 가리켜라! 그럼 그게 전도다! 애들이 우리 교회 행복하면 가만히 있겠어요? 가만히 있지 않아요. 계속 소문을 내요. 아파트에 소문내고, 학원에 소문내고, “우리 선생님 짱이야! 우리 교회 짱이야!” 그러면 몰려오게 되어 있다니까요! 부모를 감동시키면 그 부모까지 다 얻을 수 있어요. 얼마나 좋아요. 그리고 뭐라고 하세요? 귀신을 내쫓는 권능을 주신답니다. 여러분, 교사들에게 묻습니다. 여러분, 귀신을 내쫓는 권능이 있습니까? 있습니다! 우리는 귀신이라고 말하면 착각을 하는데 너무 헐리웃 영화를 많이 봤어요. 너무 전설의 고향을 많이 봤어요. 그래서 ‘귀신’ 그러면 어머나 ‘무서운 귀신’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귀신은 무서운 존재가 아닙니다. 그럼 귀신은 어떤 존재일까요? 성경에 쓰여있기를 마태복음 10:1 “예수께서 그의 열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 오늘의 말씀을 마태가 적을 때 그냥 귀신이 아니라 더러운 귀신이라고 적습니다. 성경적으로 귀신의 개념은 무서운 귀신이 아닙니다. 더러운 귀신입니다. 왜 더럽습니까? 하나님을 알되 경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해야 해요? 당장 쫓아내야 하는 게 맞는 것입니다. 또한 귀신만이 아니라 모든 병과 모든 악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셨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제자로서의 우리의 모습입니다. 여러분, 우리 아이들은 지금 정말 더러운 귀신에 빠져 있어요. 세상을 지배하는 정복의 영, 경쟁의 영, 남을 짓밟고 올라가서라도 내가 잘되어야 한다는 세상 물질의 영, 개인주의 영, 이기주의 영에 지금 아이들이 가득해서 아이들을 지금 괴롭히고 끌어내려고 있어요. 이러한 때에 모든 더러운 것과 모든 악한 것을 물리치는 하나님의 권능이 내 손에 있음을 믿고 우리 아이들과 함께 이 세상을 바꾸어 나가는 하나님의 사랑의 군사, 하나님의 화해의 정병으로 우리가 쓰임 받을 수 있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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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분홍목사의 다음세대 이야기
    2022-09-23
  • [다음세대칼럼] 또 하나의 기적- 둥지극단 이야기
    “로미오! 당신의 이름은 왜 로미오인가요?” “어머? 우리 처음 본 사이에요. 제가 그렇게 쉬운 여자로 보이나요?” “난 엄마 딸 자격 없는 년이다. 엄마 왜이래 몸이? 나 때문에 이렇게 된거가? 엄마를 버리고, 엄마 아프게 한 이 못된 년을 속 시원해질 때까지 때리라! 왜 아무 말도 안하는건데 차라리 때리고 욕을 하란 말이다” “점순아 잊지않았지? 넌 지구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사랑하는 딸 점순이다” “엄마~~~~~” 2017년도부터 시작된 둥지극단 “엄마의 바다”는 이번에 여섯 번째로 9월 2일과 3일 이틀간 부산진구청소년센터에서 3번의 공연을 하였습니다. 각종 비행과 범죄로 소년재판을 받고 둥지청소년회복센터에서 생활 중인 아이들과 시작한 ‘둥지극단’이라는 자체가 큰 의미가 있습니다. 또한 연극의 스토리가 가족과 갈등, 가출 등 아이들의 살아온 삶의 상황과 비슷한 내용을 담고 있어서 더욱 의미가 있습니다. 이번 “엄마의 바다 2022”에도 3번의 공연에 100여명의 분들이 오셔서 아이들의 작은 몸짓에 큰 격려를 주셨습니다. 둥지에서 연극공연을 하게 된 계기는 6년 전 평소 아이들에게 관심을 갖고 공연의 관람의 기회를 제공해주었던 극단 디아코노스 김태연 단장이 둥지 아이들과 1주일에 1회 만남으로 연극을 통해 자기를 표현하고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기 위한 출발이었습니다. 이후 아이들이 생각보다 더 적극적으로 반응을 하고 연기감각도 좋아 연극공연이 가능하리라는 생각에 본격적으로 추진하게 된 것이 이번에 여섯 번째 공연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소외된 채 자기 표현을 서툴러하고 눈치를 보던 아이들이 자기들만의 무대에서 숨겨진 재능과 끼를 표현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처음 둥지 아이들이 공연을 위해 연습하면서 ‘대사를 외울 수나 있을까’ 하는 걱정은 다 사라진 채 점점 더 진지하게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처음 가족과 친구들을 불러 우리끼리 하려던 공연이 아이들이 정말 열심히 연습하는 모습에 감동을 받아 더 제대로 된 무대를 마련해주고 싶은 마음이 들어 둥지극단이라 이름을 정하고, 한 번도 주인공이 되지 못했던 아이들이 주인공이 되는 무대를 만들어 주고 있습니다. 매년 연극공연을 준비하면서 아이들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이전에 비해 아이들의 표정도 밝아지고 함께 생활하는 분위기도 좋아지고 서로를 배려하는 모습이나 작은 약속을 지키는 모습에서의 변화가 생겼습니다. 무엇보다 이탈하거나 무단가출하는 일이 하나도 없이 점점 더 하나가 되어가는 것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연극을 하면서 아이들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처음에 연극을 한다고 했을 때 다들 별 흥미도 없었고 귀찮게 생각했습니다. 그렇다 보니 연극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사소한 다툼도 잦았고 우리들 사이에 갈등도 많았습니다. 다투고 화해하기를 반복하면서 우리들은 더욱 뜻 깊은 이야기와 무대를 만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 동안 우리는 참 많은 변화를 하였습니다. 어느새 우리는 습관처럼 대사를 외우며 웃고 떠들었고, 연습에 열중하고 있는 우리를 발견했습니다. 별거 아닌 변화라 생각할 수 있겠지만, 우리로선 엄청나게 큰 변화를 한 것입니다. 저희들은 아름답고 자랑스러운 사람으로 변했습니다. 아마, 이 공연이 끝나고 나면 더 자랑스럽고 멋진 우리들이 되어 있겠지요? 우리들의 노력이 색색의 화려한 조명에 묻히지 않고 색을 빛내는 별이 되고 싶습니다” 둥지 아이들이 이번 연극의 무대에서 뿐만 아니라 자신의 인생의 무대에서도 주인공으로 더욱 행복한 삶을 살아가도록 응원해주는 분들이 필요합니다. 주변의 위기청소년, 비행(非行)청소년들이 이러한 관심과 응원을 통해 이젠 새로운 모습으로 자신의 삶의 행복한 비행(飛行)을 하길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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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9-23
  • [신앙교육나침반] 성경적 성교육, 부모가 지금 하라!
    다음세대가 위험합니다. 수많은 기독부모들이 하나님 자리를 이탈하여, 하나님이 아닌 세상으로부터 양육의 지혜와 힘을 얻습니다. 기독부모들은 다음세대의 교육을 학교와 학원에 전적으로 의탁합니다. 그 결과, 다음세대는 성경적 신본주의 대신 세속적 인본주의로 세뇌되고 있습니다. 세속적 세계관은 과연 무엇일까요? 세계관은 모든 행동과 생각의 이유가 됩니다. 세속적 세계관의 중심에 “I am God!” 사상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는 진화론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인간의 근원은 하나님이 아니라 동물이라는 사상입니다. 인간은 동물이므로, 내가 원하는 것(본성)이 곧 가장 바람직한 방향이 됩니다. 이러한 세계관에 지배를 받는 다음세대는 이렇게 외칩니다. “내 생각과 감정이 나를 이끈다!” 내 몸의 주인이 하나님이 아니라, 나 자신이 되면 결과는 어떠할까요? 낙태, 동성애, 폭력과 살인이 모두 정당화됩니다. 다음세대는 세상으로부터 진화론에 입각한 성교육을 받으면 안 됩니다. 다음세대는 믿음의 부모로부터 가정에서, 성경적인 성교육을 받아야 합니다. 가정에서 어떻게 성경적인 성교육을 할 수 있을까요? 향기나무교육개발원은 십계명 6계명과 7계명에 근거한 성경적 성교육 설교와 놀이를 개발하여 현재 보급하고 있습니다. 부모들이 가정에서 자녀에게 성경적인 성교육 설교를 할 수 있는 ‘실물자료와 영상자료’를 제공합니다. 또한 온 가족이 성경적인 성교육을 경험할 수 있는 ‘우리집 성경놀이키트’를 제공합니다. 부모들이 어렵지 않고 쉽게, 성경적인 성교육을 전수할 수 있는 양질의 컨텐츠를 만나보시기 추천드립니다. 성경적 성교육에서 강조해야 할 중요한 포인트를 몇 가지 알려드리겠습니다. 첫째, 성경적 성교육은 ‘가정의 창조’부터 이야기해야합니다. 세상은, 신체의 성기관의 구조와 기능에 중점을 두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성경험을 부추기는 방법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성경적인 성교육은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셔서 가정이 되게 하신 말씀부터 이야기합니다. 세속적 세계관으로 볼 때, 가정은 목적이 없고 인간의 본성을 따라 저절로 생겨난 공동체입니다. 그러나 성경적인 세계관으로 볼 때, 가정은 하나님의 분명한 목적과 설계를 따라 탄생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가정을 세우는 목적으로, 사람에게 생명과 성(性)을 부여하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하필 가정을 만드셨을까요? 아담과 같은 여러 명의 남자를 만들어서 강한 군대를 만드시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요? 왜 하나님은 가정을 세우는 것으로 창조의 대미를 장식하셨을까요? 말라기 2장 15절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에게는 영이 충만하셨으나 오직 하나를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어찌하여 하나만 만드셨느냐? 이는 경건한 자손을 얻고자 하심이라.” 하나님은 경건한 가정을 통해서 믿음이 대대로 전수되기를 열망하십니다. 둘째, 성경적 성교육은 하나님이 잉태되는 순간부터 생명과 성(性)을 선물하셨음을 이야기해야 합니다. 생명과 성(性)은 인간이 엄마 뱃속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생각과 감정대로 생명과 성(性)을 함부로 해서는 안 됩니다. 만일 내 마음대로 하나님이 주신 성(性)을 함부로 바꾼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생명이 위험해집니다. 성(性)은 생명과 동일한 가치와 비중이므로, 생명처럼 소중하게 지키고 보호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십계명 6계명(살인하지 말라!)과 7계명(간음하지 말라!)을 연이어 명령하시며 생명과 성(性)을 보호할 것을 외치셨습니다. “제발 사람의 생명을 살려라! 제발 사람의 성(性)을 지켜라!” 셋째, 성경적 성교육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몸을 사랑하라고 이야기해야 합니다. 세상은 몸을 인격으로 보지 않습니다. 자신의 생각과 감정이 인격이며, 몸은 동물의 본성을 지닌 물질이라고 봅니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들은 자신의 쾌락을 위해 몸을 함부로 사용합니다. 하나님은 정반대입니다(로마서 12장 1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하나님은 몸을 통해 예배 받으십니다. 왜냐하면 몸은 하나님의 형상을 나타내는 존귀한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8주가 된 태아는 강낭콩만한 작은 크기라고 합니다. 세상은 생각과 감정이 없는 조그만 태아를 인격체로 보지 않고 단백질 덩어리로 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8주도 되지 않은 작은 태아를 하나님의 형상자로 보십니다(시편 139:16). “내 형질이 이루어지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루도 되기 전에 주의 책이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 인구갤럽조사에 따르면 1년에 150만 명의 태아가 불법적인 방법으로 죽어갑니다. 인구비례로 볼 때, 세계에서 태아를 가장 많이 죽이는 나라가 바로 대한민국입니다. 더 이상 미루지 마십시오. 부모들은 하루 빨리 믿음의 자녀에게 성경적인 신본주의 세계관을 심어주어야 합니다. 가정에서 자녀에게 성경적인 성교육을 통하여 하나님이 주신 생명과 성(性)에 담긴 하나님의 꿈과 열망을 전수해주십시오. 성경적 세계관이 담긴 성경놀이를 통해서 이 땅에 경건한 가정이 아름답게 보존되기를 기도합니다. [성경적 성교육놀이 문의: 향기나무교육개발원 031-305-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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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9-23
  • 특별국 공천 논란
    고신총회가 개회예배 이후 첫 사무처리부터 논란이 일었다. 특별국(총회재판국, 총회감사국, 선거관리위원회) 공천에 있어서 특정노회가 연이어 반복해서 공천되는 일에 대한 총대들의 지적이 있었다. 서울남부노회 이세령 목사는 “총회재판국의 경우 부산, 경남 지역 노회가 다수이고, 총회감사국에는 직전 서기와 회계가 포함되어 있는데 그렇게 하는 것이 바람직한 일"인지 질의했다. 총회 서기가 공천과정에 대해 해명했지만, 계속해서 여러 의견들이 제기되면서 이 문제로 장시간 토론이 진행됐다. 결국 공천위원회의 보고를 받자는 의견과 개의안(총회재판국은 부산노회와 경남노회, 선거관리위원회는 경남진주노회의 공천자를 교체하는 안)을 놓고 투표했다. 투표결과 개의안의 투표수가 많아 새롭게 공천하기로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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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야의 소리
    2022-09-23
  • 과열된 임원선거. 총회장의 중재안은...?
    첫날 임원선거 직전 강학근 총회장은 총대들에게 양해를 구했다. 강 총회장은 “아무리 생각해도 임원선거가 과열되어 양쪽에서 문제제기를 할 경우 오늘 투표를 못할 수 도 있을 것 같다”고 전하면서 “어제 양쪽 후보자들과 선관위원장님께 양해를 구해 오늘 소견발표를 하지 않고, 인사만 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또 질의는 받지 않고, 만약 질문이 있다면 서면으로 질문 할 것을 강조했다. 선관위도 “질문내용이 상대방을 비방하는 의도가 있다면 답변하지 않겠다”며 양측의 과열된 신경전을 애써 지우려는 모습을 보였다. 결국, 총회장의 중재안으로 선거는 조용하면서 빠르게 진행됐다. 모 총대는 “총회장이 총회를 위해 나름 고심한 것 같다. 덕분에 (투표가)조용히 넘어간 것 같다. 지도자는 이런 결단이 필요한 것 같다”며 총회장의 결단을 환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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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야의 소리
    2022-09-23
  • 주요교단 성도수 감소
    예장통합 통계위원회에 따르면 지난해 12월 전체 교인수는 235만 8914명으로 2020년에 비해 3만4005명(1.42%p)이 감소했다. 예장통합 전체 교인 수는 2015년부터 꾸준히 감소 추세를 보인다. 2015년에는 전체 교인 수가 278만9102명으로 정점을 찍었다가, 6년 만에 43만188명이 줄은 것으로 확인됐다. 반면 교회수와 목사수는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교회 수는 9421개로 2020년(9341개)에 비해 80개(0.85%p)가 증가했고, 목사 수 또한 2만1423명으로 2020년(2만1050명)과 비교했을 때 373명(1.77%p) 늘었다. 예장합동도 전체 교인 수가 9만 명 감소했다. 예장합동 107회 총회 보고서에 따르면, 교인 수가 전년 대비 3.8% 감소한 229만 2745명(2021년 12월 31일 기준)으로 집계됐다. 예장합동 교인 수는 5년 연속 감소하는 추세로, 이 기간 47만 명 줄었다. 예장통합과 달리 교회 수도 전년 대비 3.6% 줄어든 1만 1262개로 집계됐다. 지난해에만 교회 424개가 문을 닫았다. 반면 목사 수는 2만 6168명으로 전년 대비 2.7% 증가했다. 예장고신은 등록교인 숫자가 40만 명대가 깨졌다. 총회 보고서에 따르면 2022년 2월 현재 고신교회에 등록된 교인은 388,682명으로 지난해 401,538명에 비해 12,856명이 줄었다. 세례교인 역시 273,435명으로 지난 해에 비해 1,564명이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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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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