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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음세대칼럼] 또 다른 사사시대
    한국교회는 위기에 직면해 있다. 가장 큰 위기 중 하나는 교회학교 숫자가 해마다 감소하고 있다는 것이다. 얼마 전, 경남에 위치한 한 교회를 방문한 적이 있다. 주일 낮예배 출석수가 100여명 되는 교회인데 담임목사로부터 중고등학생이 없어 청소년부가 모임을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듣게 된 일이 있었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런 현상은 코로나 시대를 지나면서 비대면 예배로 상징되는 온라인 예배 및 간소화된 예배의 형태로 더욱 가속화되어 가고 있는 실정이라 할 수 있다. 특히 거리두기가 해제되어 정상적으로 돌아갔음에도 여전히 회복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은 한국교회의 미래를 더욱 어둡게 만들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이를 바꿔 말하면 바로 이런 문제를 극복해 나가는 것이 한국교회가 사는 길이라 생각한다. 이 말에 모든 목회자를 비롯한 교회 지도자들은 동의할 것이다. 하지만 그 누구도 이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한국교회는 다른 세대가 일어났던 사사시대를 재현하고 있다. 사사시대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세대가 일어나서 다른 세대가 되었다. 그 다른 세대들이 시대를 주도하며 살아갔다. 그들의 삶에 왕이 없으므로 각기 옳은 소견대로 행하며 살아갔다. 마치 현재의 한국교회처럼 교회 학교가 사라지고,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나고 있다. 모든 한국교회 지도자들이 고민하고 기도하며 몸부림치고 있지만 해결되지 않는 숙제다. 시편기자는 78편에서 ‘내 백성이여, 내 교훈을 들으며 내 입의 말에 귀를 기울일지어다.’ ‘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며 예로부터 감추어졌던 것을 드러내려 하니’ ‘이는 우리가 들어서 아는 바요 우리의 조상들이 우리에게 전한 바라’ ‘우리가 이를 그들의 자손에게 숨기지 아니하고 여호와의 영예와 그의 능력과 그가 행하신 기이한 사적을 후대에 전하리로다.’ 시편 기자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것은 들어서 아는 것이요, 우리 조상들이 전해주었기 때문에 알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그렇다면 우리의 사명도 단순하다. 우리도 다음 세대에 전해주어야 한다. 우리는 다시 자손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주어야 한다. 대를 이어가면서 들려주어야 하고, 믿음의 유산을 물려주어야 한다. 믿음의 유산을 물려주는 것은 선택이 아니다. 어떠한 상황 가운데에서도 해야 할 하나님의 명령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분명하게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다음 세대에게 믿음의 유산을 물려주기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그것은 역사에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 사사시대를 교훈삼아 다음세대를 세워가야 한다. 사사기 2장 7절 하반절 말씀에 기록되어 있기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모든 큰 일을 본 자들이 사는 날 동안에 여호와를 섬겼더라.’ 그런데 또 같은 사건을 기록하는 여호수아서는 다른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여호수아 24장 31절 말씀에 ‘모든 일을 아는 자들이’라고 기록한다. 아는 것과 보는 것의 차이는 무엇일까?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아예 모르지 않았다. 하나님과 깊은 관계를 맺지 못했다는 말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불완전한 정복 전쟁으로 점점 타락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점점 가나안 종교와 문화에 동화되어 갔다. 배교와 타락이 일어나게 되었다. 신앙의 형식화로 인해 가나안의 우상까지 섬기게 되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교회의 현실은 어떠한가? 예배의 형식화, 믿음의 형식화로 인해 다음세대에게 하나님과 깊은 관계를 맺는 참 신앙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는 말이다. 자녀들에게 다음세대들에게 당장의 입시와 학업에만 몰두하도록 주일성수와 예배의 소중함에 대해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우리 기성세대의 잘못이다. 그래서 다음 세대가 사사시대에 일어났던 다른 세대로 하나님과 깊은 관계를 맺지 못하게 되었다. 이것이 한국교회의 현실이다. 수련회도 마찬가지다. 청소년의 눈높이를 위해 ‘재미’의 요소를 가미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지나치게 재미를 위주로 하는 수련회가 많아진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 일이다. 성경학교도 많이 변질되어 간다. 무엇에 우선순위를 두고 성경학교와 수련회가 개최되는지 궁금하다. 모든 프로그램이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과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로 이루어졌던 옛날의 수련회가 그립다. 다가오는 여름방학이 되면 저마다의 교회에서 성경학교와 수련회가 이어진다. 이런 좋은 기회에 모든 다음 세대들이 하나님과 깊은 관계를 맺기를 소망해본다. 제발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하여 하나님과 인격적인 만남을 가지게 되길 소망한다. 그래서 세상 가운데서 힘차게 하나님 나라를 이루며 살아가는 다음세대가 되길 간절히 소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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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7-15
  • [신앙교육나침반] 선택이 아닌 필수, 가정과 함께하는 여름성경학교!
    우리아이들은 약 2년 동안 코로나 펜데믹으로 인해 교회공동체의 사랑을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3년 만에 주어진 기적 같은 시간에, 교회와 가정이 하나 되는 자리를 만들었습니다. “교회와 가정이 연합하면 새로운 힘과 영향력이 발휘된다!”는 사실에 확신을 가지고 “가정과 함께하는 여름성경학교”를 추진하였습니다. “가정과 함께하는 여름성경학교”의 가장 큰 특징은 부모를 모든 예배와 순서의 리더로 세우고, 교사들은 부모가 잘 이끌 수 있도록 섬기는 역할을 합니다. 이러한 경험을 통하여 신앙교육의 주도권을 교회에서 가정으로 전환하게 하고, 부모가 신앙교육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소명을 얻기를 기대하였습니다. 이러한 목표를 위해 모든 예배와 프로그램 순서에 부모가 참여하도록 하였습니다. 부모님들은 기존에 성경학교에 자녀를 데리고 오던 역할이 아닌, 성경학교 예배를 섬기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부모님들이 찬양싱어, 율동, 악기연주, 성경암송첸트, 성경놀이진행에 참여하셨고, 자녀와 교사들은 부모들의 주도적이고 즥극적인 모습에 눈물이 날만큼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부모들은 예배자이며, 프로그램 진행자로 참여하므로 성경학교 준비 강습회와 기도회에 참여하여 교사들과 함께 적극적으로 준비하였습니다. 이번 성경학교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비전은, 성경학교에 참여하는 모든 부모, 교사, 자녀들이 교회공동체의 사랑과 위로를 경험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참여하는 가정을 네 팀으로 나누었고, 교회와 가정의 연합된 공동체를 조직하였습니다. 각 팀은 다양한 연령의 부모, 교사, 자녀로 구성된 작은 교회공동체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자녀들이 자신의 팀 안에서 ‘나에게 교회공동체가 있구나!’, ‘교회공동체의 사랑이 참 따뜻하구나!’를 온 몸으로 경험하기를 기대하며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당연히 들어 응답해주셨습니다. 영아부터 노년에 이르는 전 세대의 연령이 연합된 팀은 한 몸이 되어서, 서로를 따스하게 보듬어주고 돌보는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부모가 불신자라서 혼자 참여한 자녀를 내 자녀처럼 함께 돌보아주고, 칭얼대는 어린동생을 함께 안아주며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러한 자리에서. 모든 부모와 교사와 자녀들은 2년 동안 맛보지 못한 교회공동체의 사랑을 뜨겁게 경험하며 회복과 기쁨을 누렸습니다. 약 250명의 부모, 자녀, 교사들이 함께 모여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따스하게 보듬어 일으켜 세우는 자리가 만들어졌습니다. 과연 250여명의 전 세대가 성경학교 모든 예배와 프로그램에 함께 은혜 받을 수 있을까요? 네! 첫째 날, 우리는 함께 울고 감동했습니다. 교사들은 부모들의 주도적이고 능동적인 모습에 감탄하였고, 부모들은 교사들의 헌신적인 섬김에 감동받았습니다. 아이들은 교회공동체의 하나됨 속에서 말로다 할 수 없는 기쁨을 보여주었습니다. 향기나무 우리집 성경놀이터는 전 세대를 분리하지 않고, 전 세대가 성경놀이 안에서 하나되게 하는 컨텐츠입니다. 세대통합을 가능하게 하는 놀이중심, 경험중심 컨텐츠 덕분에 가정과 함께 하는 성경학교는 불협화음 없이 은혜롭고 매끄럽게 진행될 수 있었습니다. 영아부터 노년에 이르는 전 세대 연령이 함께 뛰며, 함께 은혜 받을 수 있었습니다. 마지막 날, 마지막 시간! 모든 부모들은 가정의 영적 리더가 되기로 결심하며 자녀를 품에 안고 뜨겁게 기도하였습니다. 성경학교가 마친 후, 부모들은 예전의 모습이 아닙니다. 힘이 없는 눈빛은 비장함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이 부모를 향해 주신 부르심과 비전을 발견하였기 때문입니다. 교회와 가정이 연합하여 만드는 이러한 힘과 영향력이 한국교회에 널리 퍼져가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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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앙교육 나침반
    2022-07-15
  • [좌충우돌크리스천자녀양육기] 시행착오
    중학교 2학년인 첫째를 양육하면서 자주 되뇌는 단어 중 하나가 ‘시행착오’이다. “나는 이 아이가 첫째이기에 시행착오를 겪고 있는 중이다”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상황을 마주하니 나 역시 시행착오를 겪고 있다” 어떤 날은 시행착오를 겪어도 노련하게 피해가고 싶은데 잘 안된다. 5살 어린아이가 달리기를 하면 꼭 한번은 돌덩이에 걸려 넘어지듯 나 역시 마음을 단단히 먹다가도 한순간에 걸려 넘어지며, 그 자리에 일어나지 못하는 내 모습을 발견한다. 첫째가 1학기 기말 성적표를 뭉그적거리며 내놓지 않고 있는 걸 참다 참다, 등굣길에 차 안에서 “지금 당장 성적표를 내 놓지 않으면 학교 앞에서 차를 세우고 너와 몇 십 분을 있어야 할거야”란 나의 윽박에 궁시렁 거리며 성적표를 내놓는데, 점수를 보는 순간 아이가 미룬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시험을 친 후 본인이 가채점해서 나에게 말한 것과 실제 성적이 차이가 났기 때문이다. 나는 차 안에서 슬쩍 점수를 훑어본 후, 정말 너무 많은 말들이 하고 싶었지만 다 참고 딱 한마디만 했다(물론, 이 말도 하지 않았어야 했나 싶지만). “얘아, 앞으로는 실제 성적표가 나오기까지 아무말 안하고 기다리는 것이 필요할 것 같다.” 그런데, 아이는 이미 본인이 생각한 점수보다 잘 안나왔기에 짜증과 화가 난 상태였는데 엄마가 한 마디 더 보태니 이 때다 싶어 모든 탓을 나에게 돌리기 시작했다. “엄마는 내 성적에 관심도 없었으면서…”부터 시작해 마지막에는 “엄마가 도와준 것도 없으면서…”로 끝이 났다. 아주 짧은 시간에 이 아이의 말을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 나도 마음이 상해 같이 받아쳐줬다. “엄마가 너에게 도와준 것이 없다고!”라고 말한 후 차를 세우고, 차 문 잠금을 해제 시켰다. “차에서 내려서 걸어가!” 아이는 순간, 내 얼굴을 한번 보더니 곧장 차에서 내렸고,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쌩하고 달렸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뒤에 타고 있던 애들이 아우성을 친다. “엄마, 오빠 다시 태우러 가요. 여기서 학교까지 가려면 얼마나 먼데…” “엄마, 형 불쌍해요 다시 가요.” 2분 정도 가다 다시 돌아서 첫째 앞에 차를 세웠는데, 어쭈, 이 아이의 반응이 예사롭지가 않다. “안 타요. 그냥 가요.” 나도 내 마음을 추스르고, 나름의 용서를 하고자 차를 돌렸는데, 그냥 가란다. 더 이상의 자비는 없다고 생각해 이젠 진짜 앞만 보고 달렸다. 나머지 아이들의 학교까지 가면서 머릿속에 수많은 경우와 어쩔 수 없는 변명들이 뒤섞였지만 상황을 바꿀 수는 없었다. 내가 참을성이 부족해 소중한 아침에 물을 일부러 엎질렀는지, 아니면 한번은 엎질러질 물이었는지 알 수 없지만 결국 내 앞에 물은 흥건히 흘렀고, 이 물 또한 내가 닦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애들을 다 데려다주고 왔던 길을 다시 되돌아 집으로 가면서 큰 아이가 걸어서 학교에 잘 가고 있는지 밖을 계속 쳐다봤다. 잠시 후 학교 정문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는 거리에서 터벅터벅 걸어오고 있는 아이를 발견했다. 오르막 내리막길을 한 20분 넘게 걸었을 것이다. 그다지 긴 거리는 아니지만, 등굣길에 엄마와 갈등을 일으킨 후 걷는 그 길의 발검음을 무거웠을 것이다. 혼자 걸으며 아이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 수 없지만 한 가지 분명한 건, 엄마인 나의 생각은 복잡하고, 첫째를 키우며 겪는 수많은 시행착오가 나의 부족함과 합해져 걷잡을 수 없이 많아짐이 두렵다는 사실이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집으로 올라가며 생각을 정돈하기 위해 천천히 발걸음을 내딛었다. 나의 연약함과 모자람을 깨달으며 한 걸음, 그런 모자람이 죄의식으로 자리잡지 않게 밀어내면서 또 한 걸음, 오후에 만나서 대화할 아이를 생각하며 또 한 걸음을 내딛으며 단정하지 못한 생각들을 하나로 모이게 했다. 오늘 하루는 생각할 시간이 꽤 길어질 것 같고, 여전히 육아가 쉽지 않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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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좌충우돌 크리스천 자녀 양육기
    2022-07-15
  • 교수평의회, “총장은 진정성 있게 공개 사과하라”
    고신대학교 교수평의회(이하 평의회)가 지난 6월 13일 거행된 고신대 총장 취임식에 불교계 인사가 내빈으로 공식적으로 인사했던 사태에 대해 성명서를 발표했다. 평의회는 “고신대는 1946년 9월 20일 개교 이래 약 76년의 세월 동안 개혁주의적 정체성을 유지해왔다. 그런데 본 사태는 고신대의 정체성이 오해받을 수 있는 중요한 사안으로 간주된다”며 5가지 내용의 입장을 밝혔다. 5가지 내용은 ‘총장이 대학의 모든 구성원들이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내용으로 진정성 있게 공개 사과할 것’, ‘총장은 각종 대내외 행사에 대학과 교단에 폐해를 끼치는 행동을 하지 않겠다는 결의를 공개적 약속’, ‘총장은 기독교 및 개혁주의 정체성을 지키는 일에 앞장설 뿐 아니라 이를 통해 대학과 교단의 화합과 발전에 진력하겠다고 공개적 약속’, ‘총회 및 이사회는 총장의 이번 사태에 드러난 잘못된 행동에 엄중 경고하고, 재발방지를 위한 약속을 받을 것’, ‘총회 및 이사회는 총장의 대학 경영방침을 재확인하고, 특히 기독교 및 개혁주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총력을 기울이도록 요구하고, 이의 수행 여부를 수시로 확인하고 점검할 것’ 등이다. 한편, 이병수 총장은 지난 6월 14일 대학 교수들에게 ‘사과의 글’을 남긴 바 있다. 이 총장은 “금번 총장 취임식 중 고신대학교 및 고신총회의 정체성 및 정서에 부합하지 않는 인사가 참석하고 소개된 것에 대하여 송구한 마음과 심심한 사과의 말씀을 공식적으로 드립니다”고 전체 메일을 보낸 바 있다. 하지만 교수평의회는 “그 글 내용만 읽어보면 참석하지 않은 사람들 경우 무슨말인지 정확이 인지하지 못했을 것”이라며 “어떤 내용이 잘못되었는지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진정성 있는 공개 사과를 원한다”고 입장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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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야의 소리
    2022-07-15
  • 국내 코로나 백신 개발 일등공신이라고 주장하는 신천지
    이단 신천지(교주 이만희)가 최근 국내 코로나19 예방백신으로 개발된 ‘스카이코비원멀티주’ 개발에 자신들이 일등공신이라고 주장하는 홍보자료들을 배포했다. 신천지측은 “질병관리청에 따르면 백신 개발 과정 중 백신 임상시험 효능 평가에 필요한 국가표준물질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며 “이러한 상황에서 신천지예수교회 성도와 군 장병 등 국내 코로나19 완치자들이 제공한 혈장이 백신 국가표준물질로 사용되면서 국산 1호 백신이 탄생할 수 있게 됐다”고 주장했다. 신천지측은 “지난 2020년부터 3차례에 걸쳐 코로나19 완치자 3,741명이 자발적으로 혈장공여에 참여했다. 이는 당시 기준 혈장공여자 4,096명 가운에 91.3%를 차지한다”고 강조했다. 교계 모 인사는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사실을 벌써 잊어버리고, 자신들의 조금한 선행에 자화자찬에 빠져 있는 모습을 보니 안타깝다”며 “전형적인 이단의 형태”라고 규정했다. 제발 좀 부끄러운지 알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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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7-15
  • 어떻게 하면 노년에 어느 곳에서 삶을 마무리 할 것인가?
    얼마전 TV예능 프로에서 인간이 가장 빨리 늙는 나이는 70세와 78세가 되면 자기도 모르게 바싹 늙는다는 어느 박사 연구 보고를 들었다. 고령자의 가구 독거 비율이 가파르게 증가하면서 ‘우리가 어떻게, 어디에서 죽을 것인가’라는 민감한 문제를 다룬 책을 보았다. 70대는 100명 중에 70명이 죽고 30명이 살고, 80대는 80명이 죽고 20명이 살고, 90대는 90명이 죽고 10명이 산다는 이야기다. 일본 학술지의 연구 보고서에도 2050년에는 인구 중 40%가 죽는다는 보고에 그만큼 일본은 노년의 숫자가 급속도로 늘어난다는 이야기다. 우리도 방관할 때가 아니다. 최근 모일간지 지즈코 도쿄대 명예교수의 저서 ‘집에서 혼자 죽기를 권하자’(이주희 옮김, 동양북스) 216쪽에서 “일본은 이미 초고령사회를 넘어서 매년 태어나는 아이보다 삶을 마감하는 노인이 더 많은 다사(多死)사회, 즉 대량 죽음의 사회시대로 돌입했다”고 진단하고 있다. 저자는 “고독사를 두려워하기보다 살아있을 때 고립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익숙한 곳이나 신뢰할 수 있는 친구들과 교류하며 자유롭게 사느냐의 여부가 노후 삶의 질을 좌우한다는 뜻이다. 자녀 세대에게 “부모 임종시 꼭 곁을 지켜야 한다는 ‘임종 입회 콤플렉스’를 갖지 말라”고도 말한다. 부족한 나는 70대 초반에야 노인복지사를 인강으로 배우면서 실제적인 현장에서 절실히 실감할 수 있었다. 부산 서구 괴정동에 있는 모 노인요양원에서 한달간 현장실습을 나간 적이 있었다. 70대 어느 노인 할머니는 치매로부터 자유롭지 않아 잠자는 시간 외에는 의자에 손을 묶에 두고 지냈다. 같은 요양원 안에서 아픈 노인들끼리 얼마나 시기와 질투가 많던지, 매일 싸움판에 이를 중간에서 말리는 일이 다반사였다. 지즈코 교수의 말대로 시설에서 죽는 것 보다 익숙한 공간에서 자기 집에서 간병요양사가 주기적으로 방문하는 케어가 훨씬 낫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생의 마지막은 시설이나 병원에서 죽는 것보다 자기의 평소 안식처가 되는 내 집에서 생을 마감할 수 있게 가족들이 협조해야 한다. 아예 못한다면 간병인 보호를 받아 생을 마감하는 것이 천국 가는 길에 순탄하도록 돕는 것이다. 의사 쓰지가와 시토시가 쓴 책에서 2013년 60세 이상 고령자 50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 조사에서 ‘혼자 사는 고령자의 생활 만족도가 가족과 함께 사는 고령자보다 높다’는 자료를 얻었다. “가족과 함께 살면 아무래도 나를 억누르고 스트레스를 더 받아 빨리 죽으니 생활만족도가 낮아질 수밖에 없다”는 조사에 응한 어느 60대 여성이 이렇게 말했다. “노인이 되게 되면 며느리는 물론이고 자식도, 손자 손녀들도, 나이 든 할아버지, 할머니를 멀리하게 되고 결국 부부나 혼자 남게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자식도 다 필요가 없다”라는 소리가 절로 나오게 된다. 자식들이 가까이 살기보다 멀리있어 자식들 조차도 모르게 살기를 희망하고 있는 추세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이제 우리도 학교교육이나 교육교육이나 생활교육 한복판에 죽음교육을 끌어들여야 한다. 작별 인사나 임종은 아예 꿈 꾸지도 말고 평소 유언장이나 일기장에 써놓고 자기가 가진 재산을 비밀을 지킬 수 있는 믿음 있는 변호사한테 유언을 간직하게 하여, 섬기는 교회나 어려운 이웃 아프리카 등 좋은 곳에 기부하는 것이 좋다. 가장 합리적인 부분은 크리스천들은 다음세대를 위하여 장학사업으로 대학에 기부하여 후진양성에 쓰이도록 하는 것이 하늘나라에 가서도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고 의의 면류관을 받을 것이다. 다만 이렇게 해 두기 전에 꼭 해놓고 가야할 것이 있다. 죽기 전에 부부가 묻힐 자리나 묘자리부터 미리 잡아놓고 봉을 하지말고 평평한 잔디 아래에 ‘여기 주님을 섬기다가 하늘 나라에 가는 누구가 잠들어 있다’고 묘자리 비석 돌판에 만들어 놓고 죽어야 한다. 이것은 절대 자식들이 만들기는커녕 화장하여 비석도 묘지도 할까말까 해둘 것을 예상하고 정리해 두고 가야한다. 훗날 죽고나서 형제들끼리 재산 싸움하며 법정까지 가는 것을 많이 보았기 때문에 자식들에게 물려 주지 말기를 당부드리고 싶다. 나는 21세기포럼에 절반의 기금을 기부해서 법인을 만들어 매년 시상하는 고 장성만 목사로부터 하늘나라에 가시기 하루 전날 사모님이 바꿔주어 전화를 받았다. 목사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신 장로, 내가 21세기포럼 선교대상(문화예술부문) 제10회(2015년 12월 3일) 시상식을 직접 이사장으로서 전달 못하는 것이 너무 아쉽네. 벌써 주어야 하는데 서운하게 생각지 말게. 이해하여 주기 바라네.”라고 마지막 유언 같은 말에 나는 그 전화를 받고 눈물이 찡했다. 그래서 그 선교 시상식 때 받은 부상상금 금액 일천만원에서 세금 제외하고 60여만원 모자라는 부분까지 메꾸어 일천만원을 채워서 좋은데 쓰자하여 아직까지 아내, 자식들 모르게 섬기는 은성교회에 다음세대들을 위해 장학금을 내어 놓았다. 약속 금액은 더 있지만 우선 이것이 시발점으로 삼아 선하게 쓰여지기를 바랬다. ‘메멘토모리(죽음을 기억하라)’ 죽은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너희가 영광을 보리라’ 하셨던 주님. 코람데오 정신으로 훗날 부활하던 그 순간 해피엔딩으로 우리 모든 믿음의 노인들이 초대되리라.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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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7-15
  • [목회자칼럼] 하프 타임
    일년의 절반을 지난 시간이다. 삶은 타이밍이다. 인생길에는 초기에 대응할수 있는 황금같은 시간인 골든타임이 있고, 중간 평가를 하며 후반전을 준비하며 쉬어가야 될 하프타임이 있고, 모든 것을 마무리하는 파이널타임이 있고, 어쩌다가 은혜와 덤으로 주어지는 인저리타임이 있다. 코로나를 지나면서 이 모든 시간이 뒤범벅이 되어 혼란해져 버렸다. 코로나가 터졌을 때 초기대응을 우왕좌왕하며 제대로 못했다. 그렇게 2년을 훌쩍 지나고 2022년도 절반을 지나면서 분명히 하프타임인데 누구도 냉정한 중간평가를 내리기가 어렵다. 그렇다고 코로나 종식을 선언할 수도 없을 만큼 확산과 재확산을 거듭하고 있다. 어떤 사람은 지금껏 조심을 하다가 최근에 코로나에 확진이 되기도 하였다. 혹자들은 가을이 되면 다시 새로운 팬데믹이 온다고 하니 지금의 시간이 파이널타임인가? 덤으로 주어진 은혜의 시간인가? 분간이 되질 않는다. 어쩌면 오늘 이 시간이 골든타임이요 하프타임이요 파이널타임이다. 성경은 이르기를 첫 사랑을 회복하라, 그 날이 도적같이 임하리라.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고 외치며 우리로 하여금 종말론적인 삶을 살게 한다. 코로나를 지나며 많은 것이 중단되었고 회복하기 어려울 만큼 상실한 것도 많다. 한날의 괴로움도 족한 줄로 알고, 하루를 천년같이 살아가고, 오늘밤 주님 앞에 선다면 대답할 말을 준비해야 될 것이다. 1년의 절반을 지나며 코로나를 아직도 종식시키지 못한 가운데 한 해의 후반전을 열어가는 우리에게도 꼭 필요한 말씀이다. 지나온 상반기를 감사하는 맥추절을 지나면서 절반의 아쉬움이 남고 절반의 감사가 생긴다. 절반의 아쉬움은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린 체 코로나에 떠밀려 거의 3년을 지나왔다는 것이고 절반의 감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의 은혜로 여기까지 생존케 해 주셨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30년 동안 가만히 계신 이후 세례를 받으시고 본격적인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신 것을 보면 골든타임이요, 30년을 기다리신 것을 보면 하프타임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30년 동안을 가만히 계셨고 이제 세례를 받으시고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실 때 아버지 하나님께서 몇 가지를 선결해 주셨다. 때를 채우고, 형식을 갖추고,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임하고, 하늘로부터 소리를 들려 주셨다. 첫째, 때를 채우셨다. 예수님께서 때가 차매 이 땅에 오셨다. 백 년 전에 오셔도 안 되고 백 년 후에 오셔도 안 될 만큼 때를 맞추어서 오셨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하고 성경이 기록될 언어가 통일되어 있었고 정치, 사회, 경제, 문화적으로 때가 무르익어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다. 범사에 기한이 있고 만사가 때가 있다. 이 때를 위함이 아니냐며 때에 맞게 쓰임 받은 사람이 에스더다. 제철에 그 땅에서 나온 과일이 맛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철따라 우로를 내려서 농사가 가능하게 하신다.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차매 거둔다. 때를 채워야 된다. 사람은 살아갈 때 서러운 때가 있고 가난한 때가 있고 어려운 때가 있다. 그 세월을 채워야 된다. 때를 분별하는 것이 지혜이다. 세월을 아끼고 우리 날 계수함을 알고 때에 맞게 움직이는 것이 철이 든 것이다. 둘째, 형식을 갖추었다. 성령으로 잉태되신 죄가 없으신 예수님께서 죄 씻음 받는 세례를 받으신 것은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오신 것이다. 예수님은 세례를 받을 필요가 없었지만 세례를 받으셨다. 형식도 중요하다. 왜냐하면 형식에 내용이 들어가기 때문이다. 패션 테라피가 있다. 옷을 입느냐에 따라 내면의 세계가 달라지는 것이다. 사람이 정신이 나가면 패션이 이상해진다. 단정한 옷차림을 하면 마음도 정돈이 된다. 유대인들이 강한 이유는 오랜 세월동안 나라 없이 떠돌아 다니며 고생한 것과 사면에 적들이 있어서 전쟁에 지면 물러날 수 없는 배수진을 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절기를 잘 지켰다. 절기 때 가족들이 다 만나고 음식을 나누어 먹고 가정교육이 이루어졌다. 탈무드를 통한 자녀교육이 되었기에 절기를 통하여 만남과 나눔이 이루어지는 자리가 형성되었기에 신앙 유산을 잘 계승할 수가 있었다. 절기를 지키는 것이 형식을 강조한 것 같지만 그 형식 속에 아름다운 내용들이 담겨진다. 셋째, 하늘이 열렸다. 전후좌우가 막혀 있어도 기도할 때 하늘이 열린다. 교회는 전도의 문이 열려야 되고 자녀는 태의 문이 열려야 된다. 하늘 문이 열리고 인간관계가 열리고 사업이 열려야 된다. 막힌 인간은 소망이 없고 열린 사람은 소망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독생 성자의 사역 위에 하늘 문을 열어 주셨다. 넷째, 성령이 임하셨다. 힘으로 능으로 깡으로 돈으로 안되고 주의 영으로 되기 때문에 성령이 임하실 때 권세와 능력을 받고 주의 일을 할 수 있다. 예수께서 마귀에게 이끌리어 가지 않고 성령에게 이끌리어 광야로 가사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고 승리하셨다. 다섯째, 하늘로부터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기뻐하는 자라는 소리를 들려 주셨다. 믿음은 들음으로 오고, 시험도 들음으로 오는데 성도는 사랑의 소리를, 성령이 들려주는 소리를 들어야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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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7-15
  • [김정환 사무총장] 기후 위기에 대응하는 작은 실천 - 다시 아나바다!
    봄은 새싹이 움트고 여름은 만물을 키우고 가을이 오면 결실을 맺고 겨울은 결실을 함께 나누는 계절의 섭리가 이제는 완전히 변했다. 봄이 오는지 가을이 가는지도 모르게 여름과 겨울이 온다. 거기에 더해 날씨까지도 심상치 않다. 전 세계적으로는 때 아닌 한파와 폭염, 홍수가 발생해 지구촌을 고통스럽게 하고 있다. 대한민국도 마찬가지다. 보지 못했던 큰 산불로 그동안 잘 가꾼 숲이 훼손되었다. 이번 장마에도 서울을 비롯한 중부권은 폭우가, 남부지역은 폭염으로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날씨를 경험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무너뜨리는 인간의 무절제한 삶의 행태가 만들어 낸 기후 위기로 인한 것임을 알게 되고 해가 갈수록 두려운 마음이 든다. 요즘 탄소중립, 넷 제로라고 해서 이해하기도 어렵고 알게 되어도 선뜻 실행하기 힘든 말들이 언론을 통해 계속 들려오고 있다. 기후변화로 위기에 처한 지구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탄소중립을 위한 다양한 분야에서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한다. 정부는 탄소중립을 위해 각 나라들과 연대하며 지원하는 정책 방안을 마련하고 실행해 나가야 하며 기업은 기업의 이윤 뿐 아니라 사회적 책임을 다하기 위해 탄소중립을 향한 노력을 해야 한다. 시민은 정부나 기업이 그 책임을 다해 나갈 수 있도록 관심을 가지고 지켜볼 뿐 아니라 정책 과정과 기업의 노력을 점검해 나가야 한다. 그와 함께 개개인은 효율적으로 에너지를 사용하고, 재사용 재활용 등을 통해 탄소 배출량을 최대한 줄이는 제로웨이스트 운동을 생활 속에서 실천해 나감으로써 삶의 변화도 필요하다. 2009년 캘리포니아의 한 여성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하는 ‘제로웨이스트 운동’은 처음에는 한 여성의 블로그에서 시작된 개인으로부터의 작은 실천 운동이었지만 지금은 생활 속에서 배출되는 쓰레기를 최소화함으로써 환경을 살리고 탄소 발생도 줄여나가는 개인의 일상을 변화시키는 운동이다. 일회용 컵을 사용하지 않고 다회용 컵을 사용하고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비닐봉투 대신 장바구니를 사용하고 채소나 과일은 다른사람 보다 먼저 용기에 담아서 오는 ‘작은 용기’도 필요하다. 우리 주변을 둘러보면 크고 작은 생활협동조합, 제로웨이스트 매장이 있다. 그곳에 가면 다양한 제로웨이스트 제품이 지구를 위해 환경을 위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제로웨이스트는 새로운 실천 운동이 아니다. 1997년 한국YWCA에서 시작한 재활용운동의 대명사라 할 수 있는 ‘아나바다 운동’이 그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어렵고 힘들었던 IMF 시기에 아껴 쓰고 사용할 수 있는 물품은 이웃과 나누고 내가 필요한 것과 바꿔쓰고, 다시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수리해서 쓰는 아나바다 운동은 어렵고 힘들었던 시기에 전 국민의 호응을 받았다. 이제는 지구를 살리기 위해 제로웨이스트라는 이름의 아나바다운동을 다시 시작해야 한다. 조금은 불편하지만 우리 모두를, 지구를 행복하게 만드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지구를 회복시키는 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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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7-15
  • [부산기독교이야기] 전쟁기 부산 교계: 구국운동
    전쟁이 일어나자 기독교회가 중심이 되어 구호 혹은 구제 사업을 기획했고 나라를 위한 구국 운동이 전개되었는데 그 첫 조직이 ‘대한기독교구제회’였다. 남침 소식을 들은 서울의 한경직 목사와 여러 교회 지도자들은 서울 종로의 예수교서회에 모여 피난민을 돕기 위한 목적으로 대한 기독교 구제회를 조직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전쟁 3일 만에 서울이 적의 수중에 들어가게 되자 구체적인 사업을 시작하기 전에 해산되고 말았다. 7월 3일에는 대전으로 피난 온 한경직 김창근 황치헌 목사 등이 대전 제일교회당에 회집하여 대한 ‘기독교구국회’를 조직하였다. 한경직 목사가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전세에 밀려 7월 17일에는 대구 기독교청년연합회(YMCA)에로, 9월 이후에는 부산으로 옮겨가 본부를 두고 대구와 부산 등 남한 30여 개 처에 지부를 조직하고 국방부와 사회부와 협력하면서 선무(宣撫), 구호, 방송, 의용대 모집 등을 실시하여 구국활동과 구제, 인보(隣保) 봉사 활동을 전개하였다. 특히 3천 여 명에 달하는 기독교 의용대를 모집하여 전투에 참가케 한 일도 있었다. 그런데 이들은 전투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카츄사 부대와 육군 통신학교 등 특수 업무에 동참하게 배려하였다. 인천상륙작전으로 서울 수복이 이루어지고 3개월간 공산치하에 있었던 서울이 해방을 맞았으나 중공군의 개입으로 다시 후퇴하게 되었다. 이른바 1.4후퇴였다. 서울의 교회는 다시 수난을 당하게 되었고 피난민은 남으로 향하여 부산으로 몰려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피난민구호대책이 시급했다. 1월 9일 노진현 목사가 담임하고 있던 부산중앙교회당에서 모인 기독교 각 교파 지도자들은 ‘기독교연합전시대책위원회’를 결성했다. 한경직 목사는 회장으로 류형기, 김창근, 황종률 목사는 부회장으로 김양선 목사는 총무로 피임되었다. ‘기독교연합전시대책위원회’는 ‘대한예수교각교파연합 신도대회’를 계승한 조직으로 볼 수 있는데, 대한예수교각교파연합 신도대회는 1950년 12월 27일 유엔 사무총장, 미국의 투르만 대통령, 그리고 맥아더 사령관에게 메시지를 전달하고 “전쟁은 자유, 민주국가와 공산독재국가 간의 최후 결전의 전초전이므로 유엔군이 승리할 때까지 전진 무퇴할 것”을 요청하였고 이를 위해 기도하겠다고 내외에 천명하였다. 또 한경직 목사와 유형기 목사를 미국에 파견하여 한국의 현실을 알리는 한편 피난민 구호를 위한 여론을 형성하고 도움을 요청하였다. 이런 일련의 활동에서 주한 선교사들의 수고와 헌신이 지대하였으나 이 글에서는 취급하지 않았다. 앞에서 언급했지만, 1951년 3월 38선 이남을 모두 탈환한 이후 38선을 사이에 두고 전쟁이 교착상태에 빠지자 내외로부터 휴전에 대한 요구가 대두되어 1951년 7월 10일 전전 협상이 개시되었다. 이 때 부산에서 ‘구국신도대회’를 개최하고, 한국기독교회는 정전을 반대하고 북진 통일을 이루어 줄 것을 호소하였다. 피난지 부산의 기독교회 지도자들이 중심이 되어 채택한 결의문은 아래와 같다. “정전 반대 신도대회의 결의문, 우리는 조국의 완전 독립과 세계평화에 대한 신의 축복을 빌어 마지아니한다. 1950년 6월 25일 북한 공산세력 남침에 의하여 전토(全土)가 폐허화 되었고 수백만의 인명이 피살되었음은 비통한 사실이다. 앞으로 보다 더 가혹한 유혈을 강요하고 있는 차제에 개성에서 개최된 정전 회담에 대하여 전 세계는 비상한 관심을 집중하고 있다. 우리 한국의 백만 신도들은 속한 기일 내에 정전되어 평화의 봄이 오기를 절원(切願)하는 바이다. 그러나 원수의 38선이 강토를 분할하고 철의 흑막이 동족 강압을 계속할 우려가 있는 한 여하한 협정도 찬성할 수 없음이 우리의 결의임을 명백히 하는 바이다. 38선을 중심한 정전협정은 거(去)6.25 사변 이상의 불법 침입을 계획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주는 것이며, 따라서 UN의 오늘까지의 희생은 도로(徒勞)케 되며 태평양을 혈해(血海)로 화할 비극이 연출됨을 면치 못할 것이다. 우리는 신앙의 자유를 위하여 여하한 고통과 희생이 있다하더라도 공산세력을 국경선 외로 몰아내고 한국 남북통일의 완전독립을 지향하여 일로매진(一路邁進) 할 것을 굳게 결의하는 바이다. 주후 1951년 7월 12일, 在釜山韓國信徒大會.” 기독교계는 정전 협정을 반대하고 완전한 통일을 이루어 달라는 호소였다. 이런 휴전협정 반대 입장은 교계의 변함없는 입장이었다. 1953년 6월 15일에는 구국신도대회 이름으로 ‘세계교회에 보내는 휴전반대 성명서’와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보내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1953년 6월 14일에는 서울에서 약 2천명의 기독교인들이 참석한 가운데 ‘북진통일기원대회’(대회장 전필순 목사)를 개최했고, 1953년 6월 15일에는 NCC 주최로 ‘전국 기독교신도 구국대회’를 개최하고 휴전을 반대하고 북진통일을 기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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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7-15
  • [소강석칼럼] 휠체어가 날개가 되다
    제가 예전에 명성교회에 설교를 하러 갔는데 대통령 취임식에서 지휘하셨던 차인홍 교수님께서 지휘를 하고 바이올린 연주도 하며 미니콘서트를 하는 것입니다. 차인홍 교수님은 어린 시절 소아마비를 앓으셔서 걸을 수 없고 휠체어를 타고 다녀야만 했습니다. 더구나 가난한 집안 형편으로 부모님이 도저히 키울 수 없어서 재활원에 보낼 정도로 그의 어린 시절은 불우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재활원에서 극적으로 하나님을 만나고 바이올린을 접하게 됩니다. 끝없는 고난과 시련의 연속이었지만, 춥고 냄새나는 연탄 광에서 하루 10시간씩 연습을 하며 꿈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24세의 나이에 미국 신시내티음악대학에 유학을 가게 되었고 라이트주립대학교의 오케스트라 지휘자 겸 교수가 되었 습니다. 제가 그분의 간증과 연주를 듣는데 너무 감동이 되는 것입니다. 그날 예배를 마치고 인사를 나누는데, 저에게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목사님은 저를 잘 모르시겠지만 저는 목사님을 잘 압니다. 미국에서도 코로나로 인해 교회에 갈 수 없었는데 새에덴교회 유튜브로 함께 예배 드리며 목사님의 설교 말씀에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제가 그런 말을 들으니 더 감동이 되어서 “저희 교회에도 한번 초청을 하고 싶으니 다음 주에 당장 오시라”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약속을 잡고 교회로 돌아와 집사람에게 얘기를 했더니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목사님, 왜 그렇게 급하게 약속을 잡았어요? 다음 주일은 그다음 날이 6월 6일 현충일이어서 적지 않은 성도들이 금요일부터 여행을 가거나, 아니면 주일예배만 드리고 오후에 휴일을 즐기러 갈 수 있는데 저녁예배에 성도들이 얼마나 오겠습니까? 교회 체면도 있는데 어떻게 하시려고요.” 생각해 보니까, 집사람 말도 일리가 있었습니다. 순간 저도 흔들렸습니다. 그래서 차인홍 교수님께 양해를 구하고 날짜를 옮겨 볼까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그러나 ‘은혜받을 사람은 따로 있는 것이지’하는 생각을 하며 그냥 계획한 대로 추진하기로 했습니다. 물론 차인홍 교수님께는 한 말씀도 하지 않고요. 드디어 차인홍 교수님께서 저희 교회에 오셔서 성가대 지휘를 하시고 간증도 하고 연주를 하시는데 정말 큰 은혜와 감동이 되었습니다. 이상하게 저는 그분이 바이올린 연주만 해도 눈시울이 젖고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입니다. 장애인이기 때문에 더 그런지 몰라도 그분의 연주에는 삶의 애환이 느껴지고, 깊고 여리고 뭉클한 감동이 있습니다. 특별히 ‘어메이징 그레이스’를 연주할 때는 더 가슴이 뜨거워지고 눈동자가 촉촉하게 젖었습니다. ‘아, 어쩌면 저렇게 아름다운 연주를 할 수 있는 가.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놀라운가. 정말 위대한 인생 역전이요, 한 편의 드라마와 같은 삶이다.’ 차인홍 교수님은 간증하시는 내내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었으면 자신은 오늘 이 자리에 설 수 없었고,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자신의 인생을 설명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차인홍 교수님의 일생은 하나님 은혜와 그분의 최선이 만남으로써 위대한 걸작품을 이룬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분은 달변가도 아니고 뻥을 치는 것도 아니지만 정말 순수하고 진지하게 자신의 삶에 임한 하나님의 은혜를 간증하였습니다. 그분이 쓰신 저서 ‘휠체어는 나의 날개’라는 제목처럼 두 다리를 못 쓰는 약함이 오히려 강함이 되었고, 휠체어가 하늘을 날아오르게 하는 날개가 된 것입니다. 그날은 아무래도 연휴가 있는 주일 저녁이라 더 많은 성도들이 오지 못한 것은 아쉬웠지만, 그래도 많은 성도들이 오셔서 은혜를 받았고 주일 저녁이었지만 유튜브로 3,4000명 내외가 참여해 은혜를 받았습니다. 이 세상에 약점이 없고 절망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분에게는 연약한 다리가 삶을 반전시키는 힘이 되었고, 휠체어가 오히려 인생의 날개가 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약점이 강함이 되고 휠체어와 같은 불편함이 날개가 될 수도 있으니까요.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간증하며 날아오르는 삶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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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강석 칼럼
    2022-0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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