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2(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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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 부활 Risen
    부활 Risen, 2016 드라마 미국 107분 2016.03.17 개봉 감독 : 케빈 레이놀즈 주연 : 조셉 파인즈(클라비우스), 톰 펠튼(루시우스), 클리프 커티스(예슈아)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이다. 사도 바울은 자신은 십자가와 부활의 증인이라고 강력하게 주장한다. 십자가와 부활이 기독교의 모체며 이로 인해 세상이 새롭게 되었다고 바울은 강력히 주장한다. 이 기초 위에 기독교가 세워졌다. 따라서 오늘 우리도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삶에 새기고 그 복음을 전하며 살아간다. 그렇다면 예수님 당시에 십자가와 부활은 어떤 의미가 있었을까? 우리 시대의 감상적 느낌과 달리, 십자가는 고대 사회, 특히 로마 사회에서는 수치 그 자체였다. 주지하듯 십자가형은 로마가 살인이나 무엇보다 로마 제국에 대하여 반란을 일으킨 자를 처형하는 방식이었다. 십자가는 극심한 고통 및 수치를 주기 위해 행하던 방식이었다. 예수님만 십자가 형을 당한 것이 아니라 당시에 십자가 형은 빈번하게 이뤄졌다. 게르트 타이센 등의 신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주후 6년 경 갈릴리의 세포리스 지역에서 로마 제국에 대한 반란군이 일어났고, 시리아 주둔 로마군이 진격해 와서 반란군을 제압했고, 당시 반란에 가담한 유대인 남자 약 2천명을 십자가 형에 처했다고 한다. 따라서 십자가는 끔찍함이자 저주의 상징이다. 하지만 바울은 십자가가 우리의 자랑이라 말한다. 왜 그런가? 예수님의 십자가형은 다른 죄수들과 결정적인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다른 자들이 자신들의 죄에 대한 형벌로 십자가형을 받았다면 예수님은 자기 죄가 아닌 인류의 죄를 위해 십자가형을 받았기 때문이다. 누가는 자신의 복음서에서 이 사실을 정교하게 묘사한다. 십자가형을 집행한 로마의 백부장의 증언을 기록한다. “이 사람은 정년 의인이었도다.” 마가는 그 백부장이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고 고백했다고 기록한다. 로마 백부장이 보기에도 예수님은 죄가 없으셨다. 자신이 집행하던 그 어떤 죄수와도 달랐음을 그는 눈여겨 보았을 것이다. 십자가 형틀 위에서 자신과 타인을 저주하는 대신 예수님은 용서를 선언하셨다. 그 남다름, 그 위대한 선언에 백부장은 자신도 모르게 신의 아들로 인정하고야 말았다. 하나님의 아들, 이 부분이 중요하다. 로마 사람들도 ‘신의 아들’을 숭배했다. 어떤 이는 황제 가이사가 죽지 않았다고 했고, 네로가 부활했다고 믿기도 했다. 옥타비아누스는 자신이 신의 현현이라 말했다. 만약 누군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다면 그는 진정한 신의 아들이자 세상의 통치자로 증명된다. 이것이 로마 사회의 중요한 인식이다. 이런 맥락에서 영화는 예수님의 부활을 추적한다. 복음서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부활의 증인으로 등장하지만, 영화에서는 제자들이 아닌 제 삼자, 로마의 호민관 클라비우스를 부활의 증인으로 등장시킨다. 클라비우스는 총독 빌라도의 요청에 따라, 예수가 부활했다는 헛소문을 잠재우라는 명령을 듣고 조사에 나선다. 그는 예수님의 무덤부터 꼼꼼히 조사한다. 무덤을 지키던 병사들을 조사하고, 이어 부활을 증언하는 제자들의 비밀 공동체를 추적해 들어간다. 또한 클라우비스는 로마의 관료로써 골고다의 다른 시체들과 무덤들까지 정밀하게 조사한다. 혹시나 시신을 유기하고 거짓말 한 것이 아닌지를 검토하기 위함이다. 클라우비스의 목적은 분명하다. 예수의 부활은 엉터리며 그런 일은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이후 영화는 클라우비스의 극적 체험을 다룬다. 제자들을 쫓던 클라우비스는 제자들 사이에 보이는 예수님으로 인해 놀라고, 자신에 대한 제자들의 반응에 놀란다. 적을 적으로 여기지 아니하는 그들의 사랑에 놀란다. 결국 클라비우스 자신의 세계관이 무너진다. 그가 든 칼 뿐 아니라 그의 가치관 자체가 무장해제 된다. 로마의 정신 PAX ROMANA의 허상을 깨닫는다. 진정한 평화는 자기희생이요 사랑임을 체화해 간다. 그 과정은 영화를 통해 직접 보면 좋을 듯 하다. 영화 ‘부활’은 오늘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은 예수님의 부활을 꼼꼼하게 추적해 보았느냐고 묻는다. 의심의 터널을 거쳐서 확신의 빛에 이르렀냐고 묻는다. 이 과정이 중요하다. 우리는 예수님을, 예수님의 부활을 무작정 믿어서는 안 된다. 분명한 자기 확신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키에르케고르가 말한 바 부조리의 신앙의 과정을 거쳐야한다. 또한 영화 ‘부활’은 묻는다. 만약 부활을 의심 없이 믿는다면 당신은 클라우비스처럼 인생 전체를 걸 수 있냐고, 클라우비스처럼 칼을 버리고 사랑의 길로 갈 수 있냐고 묻는다. 로마의 장교였던 클라비우스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삶이 완전히 바뀌었다. 사도 바울 역시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삶이 극적으로 바뀐다. 사도 바울도 부활을 믿지 않았다. 그는 부활이란 마지막 날에 하나님이 온 세상을 심판하고 유대인을 세계 위에 세울 날 이루어질 일이라고 확신했다. 그 전에 누군가 부활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 분명히 죽었다고 여겼던 그 분을 만났다. “누구십니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그 만남으로 인해 바울은 변화되었다. 그리스도인을 박해하고 부활을 전하고 다녔던 자들을 감옥에 가두었던 그가 도리어 십자가와 부활을 자랑하는 사도가 되었다. 오랜 후 예수님의 부활을 제대로 믿은 사람들이 등장한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소설 [죄와 벌]에서 ‘예수님의 부활’을 전한다. 자신의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가 고리대금업자 노파를 살해하고 자신의 죄를 숨긴 채 살아가지만, 결국 하숙집 소녀 소냐가 읽어준 요한복음 11장으로 인해 새롭게 태어난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할 것”이라는 말씀 앞에 엎드렸다. 그의 양심이 살아나고 내면에서 새로운 삶이 살아났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즉시 경찰서로 향하여 자수하고 시베리아 형무소로 가는 길에 오른다. 하지만 그는 변화되었다. 죽었던 양심이 살아났다. 살았으나 죽었던 삶에서 거듭난 사람이 되었다. 시베리아 행을 오히려 기쁨으로 받아들였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라스콜은 부활의 사람이 되었다. 그는 죄로부터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가 된 것이다. 부활의 주님을 믿는 삶은 죄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이다. 얼마 후 또 한 명의 위대한 작가 톨스토이 역시 자신의 마지막 장편 소설 제목을 [부활]로 정한다. 자신의 인생을 반추하는 소설에서 톨스토이 자신의 대역인 네흘류도프 공작은 복음서를 읽던 중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접한다. 그리고 네흘류도프의 내면은 부활의 주님에 대한 감격으로 벅차오른다. 네흘류도프는 자신의 영지를 소작농들에게 분배할 계획을 세운다. 이제 더 이상 그들은 자신의 종이 아니라 형제다. 형제 자매가 된 자들에게 네흘류도프 공작은 땅을 상속한다. 분배한다. 왜냐면 예수 안에서 하나 된 형제, 자매들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내면의 부활은 외적인 변화로 이어진다. 죽음의 권세를 물리치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자들은 극적인 삶의 변화를 경험한다. 클라비우스처럼 칼을 버리고, 사도 바울처럼 부활의 증인이 되고, 라스콜니코프처럼 진정한 회개에 이르게 되고, 네흘류도프처럼 형제애가 살아난다. 삶의 극적인 변화가 일어난다. 그렇다면 우리 스스로에게 질문해 보자. 나는 부활의 주님을 믿는가? 나는 부활의 주님을 만났는가? 그렇다면 나는 변화되었는가? 삶의 열매가 맺어지는가? 부활은 결코 형용사가 아니라 동사라는 것을 명심하면 좋겠다.
    • 문화
    • 영화
    2024-03-25
  • [영화] 크리에이터
    크리에이터 The Creator, 2023 개봉 2023.10.03./ 장르 SF/액션/국가 미국/등급 12세이상관람가/러닝타임 133분 감독 : 가렛 에드워즈 출연 : 존 데이비드 워싱턴(죠수아), 젬마 찬(마야), 와타나베 켄(하룬), 매들린 유나 보일스(알피) 멀지 않은 미래, 미국 LA에 핵폭탄이 터졌다. 100만 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 일은 인공지능 로봇이 저지른 것으로 알려지고, 국방부는 인공지능 로봇과의 전면전을 선언한다. 무엇보다 인공지능 로봇의 설계자인 니르마타를 찾아 제거하는 일이 급선무다. 이 특별 임무에 죠수아 병장이 투입된다. 죠수아는 니르마타의 근거지로 예상되는 마을에 잠입하고 거기에서 마야라는 여인과 사랑에 빠진다. 어느 날 특수 부대가 쳐들어와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마야는 생명을 잃는다. 실의에 빠져 있는 죠수아에게 앤드류 대령이 찾아오고 마야가 살아있다는 소식을 전한다. 마야는 니르마타의 측근이며 그들은 인류를 멸망시킬 가공할 무기인 A. I. 로봇을 개발 중이라고 전한다. 마야를 살리고 싶다면 니르마타를 제거하고 그들이 개발 중인 로봇도 제거하라는 명령을 죠수아는 받아들인다. 죠수아는 다시 한 번 이들의 본거지로 침투하고 거기에서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된다. 누구도 말하지 않았던 비밀을 듣게 된다. 인류를 멸망시킨다는 무기는 어린아이의 모습을 한 로봇 알피였고, 니르마타가 설계한 로봇 알피는 오히려 인간을 사랑하고 인간과 로봇이 공존하는 것을 위해 만들어진 평화의 상징이었다. 가렛 에드워즈의 신작 크리에이터의 내용이다. 영화 크리에이터는 우리에게 몇 가지 생각거리를 던진다. 우선, 크리에이터는 올해의 화두였던 챗 GPT의 연계선상에 있다. 세계는 인공지능의 등장과 발달과정을 눈여겨보고 있다. 아울러 인공지능과 로봇의 결합에 온통 관심이 쏟아진다. 일찍이 터미네이터라는 영화가 던졌던 스카이 넷의 세상이 올지 모른다는 우려가 쏟아진다. 이 영화도 그런 연장선상에 있다. 기술은 발전하고 있다. 인공지능과 로봇이 결합한 형태, 영화 크리에이터에 등장하는 로봇들이 멀잖아 우리 삶에 공존할 가능성이 있다. 영화가 던진 질문은 이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형태의 로봇은 인류에게 이로운가? 해로운가? 그들은 인류의 친구인가? 적인가? 우선 영화에서 앤드류 대령으로 대표되는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이들을 적으로 규정한다. 인공지능 로봇은 장차 인류를 멸망시킬 대상으로 여긴다. 그렇다면 왜 이런 생각, 이런 설정을 할까? 일찍이 칼 세이건은 자신의 책 [코스모스]에서 이렇게 말했다. “지구 문명이 악의에 찬 외계 문명과 만났을 때 어떻게 하면 좋을까 하고 걱정할 필요조차 없다. 그들이 살아남았다는 자체가 동족이나 다른 문명권과 잘 어울려 살 줄 아는 방법을 이미 터득했음을 입증하기 때문이다. 스스로를 다스리고 남과 어울려 살 줄 모른다면 그렇게 오랜 세월을 견뎌 낼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가 외계 문명과의 만남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우리 자신의 후진성에서 유래한 것이다. 우리의 공포감은 우리 자신의 죄의식을 반영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과거에 저지른 잘못을 잘 알고 있다. 인류의 역사에서 한 문명이 그보다 약간 선진적인 또는 약간 후진적인 문명에게 철저하게 파괴당하는 야만적 상황을 우리는 여러 차례 목격했다. 콜럼버스와 아라와크 족의 만남이 그랬고, 코르테스와 아즈텍이 그랬다. 우리는 저들도 우리와 같을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외계 문명과의 조우를 두려워하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외계인의 성간 함대가 우리 하늘에 나타났을 때 우리가 그들과 잘 화해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칼 세이건의 우려처럼,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가상의 적을 선정하는 경향이 있다. 그들의 눈에 낯선 존재들은 잠재적 적으로 규정된다. 비단 외계인의 문제만이 아니다. 미국인들은 자신들과 다른 제3세계의 사람들을 잠재적 적, 잠재적 악으로 여긴다. 그리하여 과도한 방어기제를 발동한다. M. D.전략(미사일 방어체제)도 그 중 하나이지 않은가? 여전히 흑인들이나 동양인들은 잠재적 범죄자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에드워즈의 영화에 등장하는 앤드류 대령과 특수부대원들은 로봇들을 적으로 규정하고, 악의 씨앗 자체를 없애기 위해 노력한다. 반면 죠수아 병장은 중립지대에 있다. 그는 앤듀류 대령의 명령을 따라 로봇들을 파괴하기 위한 작전을 펼친다. 하지만 로봇들과의 조우, 대화를 통해 그의 생각에 전환이 일어난다. 특히 미국이 가공할 무기라 여겼던 로봇 알피와의 조우는 죠수아의 생각을 완전히 바꾸어 놓는다. 실제로 알피는 평화의 상징이었고, 알피는 모든 적대적 생각을 극복하는 힘을 가진 로봇이었다. 그렇게 설계되어 있었다. 죠수아 병장처럼 우리에게도 이런 접촉이 필요하다. 다른 문명 혹 타인에 대한 대부분의 적대적 생각은 직접 대면하지 않은 상태에서 우리의 우려에서 비롯된다. 만나보면 달라질 수 있다. 가다머의 주장처럼 우리는 우리만의 선입견에서 비롯된 선이해구조를 가진다.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 가다머는 지평융합이 필요하다고 했다. 지평융합은 만남과 대화를 통해 일어난다. 이슬람 사람들이 즐겨 쓰는 말인 ‘인샬라’( In Sha Alla)처럼, 긍정인지 부정인지는 상대방이 아니라 나의 내면에서 일어난다. 내가 긍정으로 여기면 상대는 긍정으로 다가오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또 하나 짚어야 할 것이 있다. 영화 크리에이터가 보여주는 로봇들은 하나님의 창조물인가? 아닌가? 유발 하라리가 말한 호모 데우스인가? 호모 마키나인가? 신학자 페트릭 세리는 위고의 말의 빌려 이렇게 말한 적 있다. “자연은 하나님의 즉각적 창조물이고, 예술은 하나님이 인간의 마음을 통해서 창조하시는 일이다.” 부언하면 자연이 하나님의 직접 창조물이라면 예술 혹 기술은 인간을 통한 간접 창조물인 셈이다. 이마미치 도모노부는 단테의 신곡을 강의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요컨대 진정한 시인은 자기가 아니고 신 안에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어로 ‘신 안으로 들어간다’는 말을 ‘엔토우시아모스’라고 한다. ‘엔 en’은 영어 ‘인 in’, ‘토우 thou’는 ‘테오스 theos’에서 유래했으므로 ‘신 god’이다. 시인이 시를 창조할 때는 ‘신 안의 존재 das – In – dem – Gott – Sein’다.” 이렇게 볼 때 로봇은 신의 영감을 받은 인간의 창조물이라 할 수 있다. 다르게 말하면 신의 2차 창조물이자 간접 창조물이라 부를 수도 있겠다. 따라서 신의 창조 자체는 선하므로 신의 2차 창조물인 로봇도 선하다 볼 수 있다. 문제는 이것을 사용하는 인간의 태도 아닐까? 영화 크리에이터에 등장하는 장면처럼 알피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알피를 이용해 오히려 세계를 통합하려는 앤드류 대령이 문제 아닐까? 또한 우리는 생각해 볼 거리가 있다. 이러한 인공지능 로봇에게 영혼이 존재할까? 물론 현대 뇌과학의 담론은 인간에게조차 영혼이라는 실체는 없다고 주장한다. 단지 뉴런의 현상일 뿐 정신이나 영혼도 화학 작용일 뿐이라는 주장을 한다. 하지만 우리의 신학 전통, 특히 아우구스티누스를 따르는 전통에 의하면 신은 두 가지 방식으로 세상을 창조하신다. 재료를 창조하셔서 그 재료가 물질을 형성하게 하신다. “신이 처음 원질료(재료)를 창조했다. 그러한 질료로부터 갖가지 힘에 의해 물(物)이 형성되었다. 따라서 일체는 신에 의해 창조된 것과 신에 의해 창조된 힘으로부터 형성된 것이다. 여기에 창조와 형성의 기본적인 구별이 행해진다. 다시 말해, ‘밖에 드러나는 현상’과 ‘그 배후에 있는 것’ 두 가지가 있다는 사고방식이 여기에 드러난다. 그러므로 질료 materia와 형상 forma 는 신에 의해 창조된 것이다.” 이런 가르침에 따르면 인공지능 로봇, 크리에이터에서의 알피는 질료와 형상을 가진 셈이다. 신의 일차적 창조와 이차적 창조의 산물이다. 하지만 인간의 영혼은 부모를 매개로 태어날 때 신이 부여하신 것이라고 신학은 가르친다. 이런 신학 전통에서 볼 때 실제 인공지능 로봇이 인간과 유사한 정신 활동을 할지라도 그들에게 영혼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따라서 인공지능 로봇은 구원의 대상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영화 크리에이터가 보여주는 알피의 창조자 니르마타가 하나님이 될 수 없는 이유다. 영화 크리에이터는 이처럼 우리에게 질문들을 던진다. 우리는 인공지능 로봇의 등장에 지나친 우려를 할 필요가 없다. 그것 또한 하나님의 선한 창조물에 속하기에 우리를 위해서 필요한 것이다. 또한 인공지능 로봇은 하나님의 직접 창조물인 인간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점도 기억하자. 오직 인간만이 영혼의 담지자라는 사실을 기억하자. 그러하기에 인간인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 세계와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 창조하신 사물들을 잘 관리하고 보존하고 지켜야 할 사명을 가지고 있다. 인간이 구원받아야 할 궁극적인 이유이기도 하다. 타락한 죄성은 창조세계와 창조물을 자신의 욕망의 도구로 변질 시킬 것이기에. 구원받아 회심한 영혼이어야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잘 관리할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특별한 창조물이자 동시에 하나님의 창조물을 관리할 사명을 부여받았다는 것을 잘 기억하는 것 – 이것이 영화 크리에이터가 우리에게 던지는 도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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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02
  • [영화] 위대한 탄생(내티비티 스토리) 2017
    위대한 탄생(내티비티 스토리) 2017, 감독 : 캐서린 하드윅, 주연 : 오스카 아이작(요셉), 케이샤 캐슬 휴즈(마리아) 역사상 가장 위대하고 놀라운 일은 아기 예수님의 탄생이다. 하나님이 인간으로 오셨고, 하늘의 자리를 버리고 땅으로 오셨고, 주인이 종으로 오신 사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탄은 역설이다. 이 역설이 우리의 구원을 가능하게 했다. 우리와 같이 되시고, 우리의 죄값을 지불하시고, 우리와 거주하기 위해 그 분이 오신 날이다. 하지만 세상은 이 날을 인간들의 축제로 변질시켰다. 연인들의 날로 바꾸고 선물 꾸러미로 대체했다. 이번 호에 소개하는 영화를 통해 성탄의 참된 의미, 본질을 묵상하면 좋겠다. 영화 위대한 탄생은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를 스크린에 담았다. 예수님은 약 2천 년 전 로마 제국이 온 세상을 통치할 때 유대 땅 작은 마을에서 태어나셨다. 우리가 익히 들어온 스토리다. 잘 알고 있는 이야기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어쩔 수 없는 역사적, 시공간적 간극이 있다. 우리는 21세기 대한민국에 살아가고 있기에 당시의 문화, 분위기, 사실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 위대한 탄생은 역사적 고증을 통해 그 시대의 분위기를 우리에게 알려준다는 장점이 있다. 물론 일점일획도 틀리지 않은 정확무오 한 것은 당연히 아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당대의 사회, 문화, 스토리를 이해하는 것에 상당한 도움을 준다. 우선 영화는 예수의 모친이 되실 마리아에게 집중한다. 그녀가 성령의 음성을 듣는 것, 친척 엘리자베스를 찾아가는 것, 자신에게 일어난 놀라운 임신의 사실을 묘사한다. 사실 당대의 문화와 사회적 분위기에서 결혼도 하지 않은 처녀가 아이를 가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또한 오늘날과 같은 익명성의 사회도 아니다. 마리아가 살았던 곳은 작은 마을이었고 온 마을이 일가친척으로 구성된 집성촌이다. 어느 집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훤히 아는 시대다. 그러한 때에 처녀의 몸으로 잉태를 했으니 그녀가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다. 영화는 이러한 마리아의 고뇌, 당시 주변 인물들의 반응, 그녀를 비난하는 것에서 인정하기까지의 이야기들을 풀어낸다. 우리는 이 지점에서 생각해 보아야 한다. 예수님의 탄생에 있어 한 여인의 위대한 믿음이 있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녀는 사람들의 비난을 감수하고자 했다. 자칫 목숨의 위험까지 있을 상황을 받아들였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이유는 그녀의 믿음에 있다. 성령님의 역사에 민감했고, 기도의 사람이었다. 그녀의 경건한 기도 생활은 세상의 기준이 아닌 하나님의 음성에 민감하게 하였다. 만약 마리아가 세상의 기준, 세상의 가치관이 더 강했다면 그녀는 순종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녀는 순종했다. 믿을 수 없는 일을 믿었다. 불가능한 일이 가능할 수 있음을 믿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처럼 역설을 믿었고, 믿음의 조상 에스더처럼 죽으면 죽으리라는 담대한 믿음으로 믿었다. 이 믿음이 있었기에 예수님의 탄생이 이루어졌다. 또한 마리아와 정혼한 남자 요셉의 혼란도 잘 보여준다. 약혼녀가 아이를 가졌으니 어찌 당황하지 않을 수 있을까? 인간으로서의 고뇌, 분노, 당혹감은 당연하다. 우리는 성경을 너무 쉽게 읽기에 그 행간에 있는 감정, 분위기, 혼란을 간과하기 쉽다. 영화는 친절하게 이러한 일련의 모습들을 잘 보여준다. 성령의 음성을 듣고 그녀를 받아들이기까지의 요셉의 마음 상태를 잘 보여준다. 요셉 또한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의 육신의 아버지로서의 자격이 충분하다. 그의 믿음, 그의 결단, 그의 다짐은 당대의 윤리를 뛰어넘는다. 요셉 역시 성령님의 음성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자기 머리로, 자기 상식으로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에 대하여 순종했다. 하나님의 뜻은 자기의 뜻과 다를 수 있음을, 하나님의 일은 인간의 일과 다를 수 있음을 믿었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었다. 요셉은 마리아가 아기를 낳을 때까지 동침하지 않았다고 성경은 말해준다. 요셉의 신실함을 엿볼 수 있는 장면이다. 영화를 통해 우리는 이런 믿음의 사람들의 이면, 고뇌, 결단을 볼 수 있어 좋다. 또 하나 이 영화의 장점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을 극복하게 해 준다. 우리는 그 동안 르네상스 이후의 유럽 사람들이 그린 성화를 통해 예수님의 모습을 보아왔다. 우리가 본 예수님은 긴 머리에 비단 옷을 입고 있는 서양의 잘 생긴 남성이었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것은 심각한 이미지의 오류임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은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태어난 동양인이셨다. 당연히 예수님의 부친 요셉과 모친 마리아도 중동인이다. 영화 위대한 탄생은 이 점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예수님의 혈통은 유대인이시다. 유럽인이 아니시다. 로마인이 아니시고 유대인이시며, 서양인이 아니라 동양인이시다. 영화를 통해 이러한 오류를 교정할 수 있다. 아울러 동방으로부터 온 박사들의 내방, 헤롯의 반응, 헤롯의 군사들의 만행을 스크린 속에 펼쳐놓는다. 요셉과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데리고 피난 가는 생생한 현장을 보여준다. 이러한 면에서 이 영화는 우리에게 장점이다.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 그 느낌, 분위기, 위기를 잘 보여준다. 따라서 영화 위대한 탄생은 아기 예수의 탄생이 그저 몇 줄 성경의 기사로 끝나지 않고 대신 긴박하고 극적인 스토리라는 것, 그러하기에 더욱 위대한 스토리이며 우리의 구원 이야기임을 잘 보여준다. 자 그렇다면 이제 예수님의 성육신이라는 주제를 조금 생각해 보면 좋겠다. 영화를 통해 감동을 받을 뿐 아니라, 성육신이 우리에게 어떠한 의미가 있는지 살펴보자. 서두에서 잠시 언급했듯이 성육신은 경이로운 사건이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다. 가장 높으신 분이 가장 낮은 자가 되셨다. 무한하신 분이 유한의 몸을 입으셨다. 자기 부정의 절정이다. 성육신, 즉 예수님의 탄생은 철저한 자기 비움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이신 그 분이 왜 인간으로 오셨는가? 왜 우리와 같아지셨는가? 그것은 우리의 잘못된 본성을 치유하기 위해서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처음 만드시고 세상을 맡기셨을 때 아담과 하와는 결정적으로 시험에 빠졌다. 사탄의 유혹은 한 가지였다. 이 열매를 먹으면 하나님과 같이 된다는 것이다. 즉 인간이 하나님이 된다는 유혹이다. 다른 말로 상향성의 욕망이다. 이 욕망은 사람들 사이에 시기심과 질투를 낳는다.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일을 낳았다. 바벨탑의 핵심도 하나님처럼 높아지려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려는 시도였다. 이후 수많은 인간들, 왕들은 하나님이 되려고 했다. 성육신은 정확히 이것과 반대다. 인간이 신적 존재가 되려는 것이 아니라, 신이 인간이 되셨다. 상향성이 하니라 하향성의 극치를 보여주셨다. 인간의 본성이 상향성을 향하기 때문에 이것을 치유하기 위해 가장 높은 곳에 계셨던 그 분이 낮아지심으로 하향성이 살 길임을 보여주셨다. 그리하여 그 분을 영접함으로 우리는 상향성의 본성을 극복하고 하향성을 배운다. 필립 얀시는 이렇게 말했다. “권력의 사다리는 위로 향하지만, 은혜의 사다리는 아래로 향한다.” 따라서 성육신, 즉 성탄의 본질을 이해하는 키워드는 낮아짐이다. 자기 비움이자 자기 부정이다. 낮은 곳에 임하는 은혜다. 그래서일까? 성탄의 기쁜 소식은 들판에 있던 목자들에게 가장 먼저 알려졌다. 성탄을 축하한다면 우리 또한 낮은 곳으로 가야 할 것이다. 소외된 자들, 가난한 자들, 외로운 자들에게 이 기쁜 소식은 전해져야 한다. 가장 높으신 그 분이 가장 낮아지셨기에 그 분을 영접하는 가장 낮은 자들이 역설적으로 이제 가장 높은 자가 된다. 그래서일까? 아타나시우스는 말했다.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아들로 오셔서, 사람의 아들들을 하나님의 아들들로 만들어 주셨다.” 올해의 성탄은 이 본질을 잘 이해하면 좋겠다. 영화 위대한 탄생을 통해 우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는 것에 위대한 믿음의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을 알면 좋겠다. 마찬가지로 오늘 우리의 믿음을 통해 다시 한 번 이 땅에 예수님의 임재를 증거하며, 우리의 본성인 높아짐을 극복하고 예수님처럼 낮아짐을 실천하는 성탄절이 되면 좋겠다. 이 기쁜 소식이 교회당 뿐 아니라 온 세상에 널리 널리 퍼지기를 소망한다.
    • 문화
    • 영화
    2023-12-20
  • [영화] 오펜하이머 -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
    오펜하이머 Oppenheimer, 2023 개봉: 2023.08.15./ 장르: 스릴러/드라마 /국가: 미국, 영국/ 등급: 15세이상관람가 / 러닝타임: 180분 감독 : 크리스토퍼 놀란 주연 : 킬리언 머피(J. 로버트 오펜하이머),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루이스 스트라우스), 맷 데이먼(레슬리 그로브스), 에밀리 블런트(키티 오펜하이머), 플로렌스 퓨(진 태트록) 프로메테우스는 제우스의 명을 따라 인간을 만들었다. 신들과 인간이 나뉘어 질 때 프로메테우스는 제우스를 속인 채 인간에게 불을 전해 주었다. 인간들은 프로메테우스가 전해 준 불로 문명을 이루었지만, 프로메테우스는 제우스의 미움을 받아 쇠사슬에 결박당한 채 독수리가 간을 쪼아 먹는 벌을 받아야 했다. 프로메테우스에게 불을 전수 받아 문명을 이룬 인간들은 어떠했을까? 그들은 자신들의 문명으로 서로 죽고 죽이는 일을 해 왔다. 따라서 불은 이중적이다.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하기도 했으나 파괴하기도 했다. 문명, 과학과 기술의 발전은 인간의 삶을 편리하고 풍요롭게 한다. 플라스틱의 발견은 인간의 삶을 정말 편리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플라스틱의 남용은 결국 환경재앙을 낳는다. 노벨은 다이너마이트를 개발했다. 다이너마이트는 도로를 닦거나 공사를 진행할 때 참으로 편리하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것으로 가공할 무기를 만들어 상대를 죽이는 데 사용한다. 다니어마이트의 가공할 힘은 끔찍한 살상을 낳았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신작 [오펜하이머]는 우리에게 여러 가지 생각거리를 던진다. 우선 오펜하이머는 2차 대전 당시 미국의 맨하탄 프로젝트를 이끈 책임자다. 오펜하이머는 하버드를 졸업하고 영국, 독일 등지에서 물리학을 공부한 후 캘리포니아 공과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가 교수로 있었던 1930년대 말은 물리학의 전성기였다. 덴마크 물리학자 닐스 보어는 빛이 파동이자 입자라는 놀라운 발견을 이루었다. 소위 양자물리학의 시작을 알린 인물이다. 당시 화두였던 양자물리학은 세상을 보는 관점을 새롭게 했다. 과학자들은 점점 더 마이크로 세상을 알게 되었고, 세상은 원자라는 아주 작은 단위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원자는 양성자와 중성자로 구성되어 있었고, 양성자와 중성자는 핵력이라는 힘으로 서로 끌어당기는데 이것이 분리하는 과정에서 엄청난 힘을 발휘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문제는 이런 과학적 발견이 한참일 때 하필 유럽은 아니 전 세계는 히틀러가 추동한 전쟁 중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히틀러의 지원 하에 그 유명한 물리학자 하이젠베르크가 원자 폭탄을 연구 중이었다. 2차 대전 참전을 결정한 미국은 급했다. 무엇보다 독일 나찌 정권보다 우선적으로 원자 폭탄을 개발해야 했다. 만약 히틀러 정권이 먼저 성공한다면 그 결과는 불을 보듯 뻔하다. 전 세계의 파멸, 미국의 파멸이다. 이러한 급박함 가운데 군 장성 레슬리 그로브스의 지휘 아래 원자폭탄 완성을 위한 맨하탄 프로젝트가 추진되었고, 그로브스는 총 책임자로 칼텍의 오펜하이머 교수를 지목했다. 오펜하이머는 막 유럽의 양자물리학을 공부하고 온 뒤 제자들을 양성하고 있었고, 미국에서 양자물리학의 전도사로 이름을 날리고 있었다. 예상치 못한 일에 가담하게 된 오펜하이머는 자신이 소유하고 있던 뉴멕시코의 로스 알라모스의 목장 지대에 거대한 단지를 만든다. 즉, 핵무기 개발에 필요한 물리학자들과 그들의 가족들, 행정요원들과 군인들을 끌어 모은다. 그로브스 장군이 행정적 책임자라면 오펜하이머는 개발 책임자로써 그 임무를 수행한다. 마침내 이 프로젝트는 성공하는데 독일보다 앞서 원자폭탄 개발에 성공한다. 하지만 원자폭탄 개발 성공과 상관없이 히틀러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독일을 패망하게 되었다. 어쩌면 쓸모없게 된 원자 폭탄, 하지만 트루먼 대통령의 생각은 달랐다. 이 프로젝트에 상상을 초월하는 돈을 투자했고 국민들은 그 결과를 기대했다. 트루먼은 여전히 저항중인 일본에 이 폭탄을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이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각각 원자 폭탄은 투하되었고 그 가공할 위력에 일본은 즉각 항복을 선언하고 전쟁은 끝이 난다. 하지만 원자폭탄의 가공할 위력에 가강 놀란 사람은 오펜하이머였다. 그는 이 개발 프로젝트의 총 책임자였지만 폭탄을 사용했을 때 그 엄청난 위력, 살상, 되돌릴수 없는 재앙에 충격을 받았다. 이후 오펜하이머는 오히려 원자 폭탄 개발을 중지할 것을 요청했고 이런 끔찍한 무기들의 개발 및 사용을 반대했다. 미국 정부는 오펜하이머의 이런 주장에 당황했고, 그를 공산주의자로 몰았으며, 2차 대전 후 새로운 냉전의 시대가 열릴 때 소련의 스파이로 몰아갔다. 오펜하이머는 이후 정부 혹은 루이스 스트라우스와의 지난한 싸움을 해야 했고, 자신의 결백함을 증명하기 위해 싸워나가야 했다. 영화는 이런 과정을 잘 다루고 있다. 영화 오펜하이머는 영웅 전기가 아니다. 오펜하이머가 원자폭탄을 개발해서 2차 대전을 승리로 이끈 미국의 영웅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가 원자폭탄 개발 후에 겪는 내면적 갈등을 다룬다. 아울러 원자폭탄이라는 가공할 힘, 핵이라는 위험, 그것이 사용되었을 때 돌이킬 수 없는 끔찍한 재앙과 환경위기에 대하여 고민하게 한다. 1986년에 일어난 소련의 체르노빌 원전 폭발 사건은 원폭의 끔찍한 재앙을 인지하는 계기가 되었다. 체르노빌의 환경 파괴 및 인간 피폭의 위험은 현재도 진행형이다. 또한 2011년 일본의 후쿠시마 원전 사고는 더욱 끔찍한 재앙이었다. 지진과 그로 인한 해일로 인해 후쿠시마 원전은 돌이킬 수 없는 재앙으로 이어졌다. 레베카 솔닛은 자신의 책 [이 폐허를 응시하라]에서 분명히 말한다. 사람들은 폐허가 될 때 까지 그 위험을 잘 모른다고. 하지만 폐허가 된 상황에서 정말 무엇이 중요한지를 깨달을 수 있고 또 깨달아야 한다고. 뉴욕을 강타한 끔찍한 9.11 테러 현장에서 레베카는 알게 되었다. 우리가 편리하게 사용하는 비행기가 얼마나 끔찍한 재앙으로 이어질 수 있는지를, 또한 그 재앙이 우리의 가족, 형제, 자매들을 죽음으로 몰고 갔는지를, 그래서 폐허 더미에서 우리는 폭주하는 문명의 발전, 기술의 무차별 개발에 대하여 생각하고 멈출 줄 알아야 한다고 그녀는 강조한다. 더 발전된 기술은 돌이킬 수 없는 재앙을 낫는 것이기에. 오펜하이머의 각성 이후 미국은 달라졌을까? 아니다. 오히려 이어진 냉전 시대에 미국과 소련은 앞 다투어 핵무기 개발에 착수했고, 현재 전 세계가 보유하고 있는 핵무기는 지구를 수십 번 사라지게 할 만한 가공할 파괴력을 가지고 있다. 만약 하나라도 사용이 된다면 불가항력적이고 되돌릴 수 없는 재앙을 파생할 것이다. 오래전 칼 세이건은 탄식했다. 로켓 기술로 우주개발에 힘쓰면 좋을 텐데 오히려 핵탄두를 싫어서 인류 전체를 멸종시키려는 일에 사용하다고 그는 안타까워했다. 오늘 우리는 칼 세이건보다, 오펜하이머보다 더 심각하게 고민하고 논의해야 마땅하다. 우리의 편리를 위한 기술은 지구를 점점 더 병들게 하기 때문이다. 인간 편리를 위해 만든 자동차, 항공기 등이 내 뿜는 이산화탄소 등으로 지구의 대기는 몸살 중이다. 지나친 육식은 지구온난화를 가중시킨다. 편리한 전기 생산을 목적으로 하는 원전은 핵 폐기물 처리에 곤혹을 겪고 있다. 대수롭지 않게 사용하는 플라스틱 제품들로 인해 바다와 땅, 동식물이 시달리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시점에 멈출 줄 알아야 한다. 전 지구적 대 전환이 필요하다. 톱다운 방식으로 각국의 리더들은 핵무기 감축 및 원전의 축소, 또한 이동수단의 대 전환을 이루어 내야 마땅하다. 지구는 심각한 몸살을 앓고 있고 우리는 다음 세대에게 끔찍한 재앙을 물려줄 수 있기 때문이다. 생각의 전환, 생활 방식의 대 전환이 필요하다. 지구 생태를 향한 신학적 고찰도 필요하다. 생태도 하나님의 선한 창조물이다. 우리는 이 창조물을 보호하고 보존할 사명을 부여받았다. 새 하늘과 새 땅은 여기에서 이루어진다는 각성이 필요하다. 편리보다는 불편을, 현재보다는 미래를 생각하는 전환이 필요하다. 오펜하이머의 뒤늦은 후회가 우리의 것이 되지 않도록, 지금 여기에서 결단하고 전환해야 할 것이다. 바로 나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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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10
  • [영화] 새 영화와 옛 영화의 만남을 노래하다
    기독교 영화제의 덕목 서울국제사랑영화제(2023.09.14.~09.19)가 20주년을 맞이했다. 명실공히 아시아 최초의 국제기독교영화제로 출범했지만 서울시로부터 재정지원을 받기 위해 ‘기독교’ 대신 보편적인 용어인‘사랑’을 선택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대신 우리나라 최초의 기독교 영화 전문 상영관으로 ‘필름포럼’을 인수하여 2개의 상영관을 상시운영할 수 있게 된 것은 장기간 운영이 가능하도록 큰 버팀목을 갖추게 된 일이었다. 서울국제사랑영화제가 20년 동안 한국 기독교 영화인들의 구심점 역할을 하며 나름 기독교 영화 발전에 공헌해온 것은 분명 한국 기독교사에 기록될 만한 역사적인 일이다. 한국 교회 성도들의 숫자가 증가하고 우리 사회가 문화의 시대로 들어갔을 때 예배당 대신 영화관을 선택한 일 자체가 놀라울 따름인 까닭이다. 특히 세속적인 문화와 영화에 길들여져 신앙 따로 영화 따로 생활했던 기독교인들에게 적어도 신앙과 영화와의 관계를 일치시킬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한 점은 칭찬받을 만한 일이다. 그래서 주최 측은 20주년을 맞아 매년 수여하던 ‘기독교 영화인상’을 대신해서 영화제 발전에 이바지한 사람들에게 ‘공로상’을 수여하는 행사를 개막식 무대 위에서 진행하였다. 주최 측이 아닌 관객의 입장에서 볼 때 서울국제사랑영화제는 영화제가 아니면 볼 수 없는 최신 기독교 영화와 너무 오래돼서 구하기 힘든 옛날 기독교 영화를 한자리에서 만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제공하는 데 큰 의미가 있다. 영화전문가들이나 조직 없이 한 개인이 외국의 새로운 기독교 영화들을 찾아보는 일은 쉽지 않다. 기독교 영화제는 개인의 수고를 덜어줄 뿐만 아니라 새로운 기독교 영화예술의 세계로 인도하는 역할을 한다. 특히 기독교 영화가 가지고 있는 메시지는 신앙을 돌아보게 만들며 세속적 문화에 대한 저항과 하나님 나라의 문화를 향한 강한 의지를 북돋는다는 점에서 어떤 유명 설교가도 할 수 없는 큰 영향을 끼치기도 한다. 20회를 맞아 서울국제사랑영화제가 준비한 개막작 <지저스 레볼루션>(Jesus Revolution, 2023)은 일반 극장에서는 만나볼 수 없는 새로운 기독교 영화다. 금년 봄 미국에서 개봉하여 흥행적인 면과 대중적 관심을 모으는 데 성공했지만, 국내 어떤 영화사도 이 영화를 수입할 수는 없었다. 미국의 배급사는 한국 내 영화관에서 개봉하는 데 따른 수고나 비용을 감수하기보다는 넷플릭스라는 손쉬운 플랫폼을 택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익히 들어 알고 있는 손양원 목사의 순교사를 다룬 <사랑의 원자탄>(1977)은 디지털 리마스터링 작업을 끝내고 관객을 맞이한 옛날 영화다. 강대진 감독의 이 역작은 한국 기독교 영화의 역사를 일으킨 작품으로 익히 알려져 있지만 요즘 세대 가운데 이 영화를 본 사람은 극히 드물다. 비디오 플레이어가 각 가정마다 있었던 1990년대 까지만 하더라도 <사랑의 원자탄>은 비디오테이프로 존재했었다. 그러나 비디오테이프는 장기간 보관이 어렵고 디지털 기기에 적용하는 일도 불가능하다. 따라서 디지털 리마스터링 작업을 하는 일은 현시대에 옛 작품을 경험하게 할 뿐만 아니라 영구 보존이 가능하다는 의미도 갖고 있다. 히피문화 속의 미국교회를 들여다 보다 흔히 어윈 형제 감독으로 불리우는 존 어윈(Jon Erwin)의 최신작 <지저스 레볼루션>은 우리 시대에 기독교 영화의 가치를 제대로 전수해준 수작이다. 갈보리 교회를 이끌었던 척 스미스 목사의 신학적 평가를 앞세우지 않고 미국 사회와 기성세대가 외면한 한 무리의 젊은이들이 어떻게 예수님께로 돌아왔는지에 초점을 맞추어 본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교훈을 얻는 시간이 될 수 있다. 왜냐하면 1960년대와 1970년대 초반까지 캘리포니아를 중심으로 번성했던 히피 문화 속에서 진리를 잃어버린 양들과 이들을 찾아 나서는 목자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있기 때문이다. 갈보리 교회를 담임하고 있던 척 스미스(켈시 그래머) 목사는 히피들에 대한 혐오 대신 그들의 영혼에 관심을 기울이고 교회로 인도하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히피 출신의 열정적인 전도자인 로니 프리스비(조나단 로미)를 만나 자신의 집에 머무르고 식사를 제공하는 등의 간단한 친절을 베푼 일이 계기가 되어 한 명 두 명 히피들이 모여들더니 어느새 그들은 갈보리 교회 안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한다. 맨발로 다니고 목욕은 언제 했는지 까마득하고 교육과 결혼에 대한 전통적 가치관을 배제한 채 마약을 하고 반전운동에 나선 이들을 당시 교회들이 수용하기란 쉽지 않았다. 그러나 히피들 가운데는 기성세대의 문화에 반기를 들었지만 교회가 가르치는 영적인 가르침에는 귀를 연 이들이 적지 않았다. 이들 가운데는 10대에 마약을 하며 히피들과 어울려 다니는 그렉 로리(조엘 코트니)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현재 하베스트 교회를 담임하고 있으며 이 영화의 원작자이기도 하다. 이 영화의 백미는 ‘피레이츠 코브 해변(Pirate's Cove Beach)’에서 히피들이 바닷물에 들어가 세례(침례)를 받는 장면이다. 캘리포니아 해변에서 마약에 심취했던 히피들이 거듭나고 있음을 보여주는 장면으로 그 숫자만 무려 4,500명이 넘었다고 한다. 반문화주의자이며 미국사회의 골칫거리였던 히피들이 거듭나는 이 장면을 시사주간 타임지는 ‘예수 혁명(Jesus Revolution)’이란 타이틀을 붙였다. 강대진 감독의 발견 <사랑의 원자탄>을 만든 강대진 감독은 1960년대와 70년대 한국의 대표적인 영화사인 ‘신필름’에서 활동했던 다작의 연출자였다. 같은 ‘신필름’에 소속되어 1974년 <별들의 고향>으로 영화계에 입문한 이장호 감독조차도 강대진 감독의 영화는 보았지만 강대진 감독을 만난 기억이 없을 만큼 그는 수수께끼 같은 인물이다. 그가 한국 기독교 드라마 영화에 새로운 장을 연 <사랑의 원자탄>(1977)을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사랑의 뿌리>(1978)와 <석양의 10번가>(1979) 그리고 <죽으면 살리라>(1982) 등으로 이어진 기독교 영화들을 순식간에 만든 사람임을 아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다. 어떻게 보면 기독교 영화제가 아니라면 강대진 감독의 기독교 영화예술의 세계는 알려지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영화제 기간 중 디지털 리마스터링 작업을 통해 복원된 <사랑의 원자탄>을 감상할 수 있고, 또한 이 영화가 영구 보존될 수 있게 된 것은 매우 잘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의 다른 기독교 영화들도 모두 디지털 리마스터링 작업을 서두를 필요가 있음은 두말한 나위가 없다. <사랑의 원자탄>은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잘 알고 있듯이 손양원 목사의 순교자로서의 삶을 묘사한 작품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일반 기독교 영화와는 다르게 두 가지의 특징을 담고 있음이 발견된다. 하나는 반공정신에 대한 강하고 함축된 메시지를 읽을 수 있는 점과 다른 하나는 손양원 목사의 아들 동인이를 둘러싼 두 여학생 사이의 묘한 연애 구도가 펼쳐진 점이다. 손양원 목사의 순교를 다룬 영화 속에 반공사상이 들어 있는 것은 두 아들이 공산분자에 의해 살해된 데다 손목사 또한 6.25전쟁 당시 인민군에 의해 처형된 역사적 사실, 그리고 1970년대 반공사상이 널리 퍼져있었던 시대의 흐름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손목사의 두 아들을 살해한 안재선을 양자로 삼았다는 점에서 기독교의 용서와 사랑의 가치가 살아있음을 분명하지만 기독교 신앙과 반공사상이 쉽게 결합되어 1970년대 첫 기독교 영화로 탄생한 점은 당시의 시대상과도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 가장 흥미로운 점은 순교영화에 등장한 멜로 드라마적 요소이다. 영화에서 손목사의 큰 아들 동인은 고등학교 시절 리더십이 뛰어났고 영실과 경혜라는 두 여학생이 그를 좋아하는 것으로 설정되어 있다. 손목사 가정에서는 영실이를 아꼈고 이를 질투한 경혜의 보복행위는 손목사의 순교정신을 기대한 관객들로서는 예상하지 못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것은 <박서방>(1960)과 <마부>(1961)등의 한국영화사의 명작을 연출하며 축적된 연출능력과 당시 인기 있었던 멜로 드라마의 요소를 삽입함으로써 대중성을 확보하려는 시도 가운데 벌어진 일로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강대진 감독은 1987년 54세의 나이에 영면한 까닭에 더 이상 그의 기독교 작품에 담긴 정확한 그의 의도를 파악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 특히 증산도 교주 강일순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 <화평의 길>(1984)을 연출한 사실은 왜 그랬는지에 대한 궁금증을 자아내게 만든다. 기독교 신앙이 없다면 여러 편의 기독교 영화들을 만들 수 없다고 보는 데 갑자기 웬 증산도 영화인지를 묻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이다. 이에 대해 이장호 감독은 당시 영화감독들의 사정이 대부분 어려웠던 점을 감안하면 생활고에 따른 선택이 아니겠냐는 추측을 내리고 있기는 하다. 기독교 역사를 다룬 영화들의 의미 두 영화는 모두 과거를 다루고 있지만 현재의 신앙에 각성을 일으키는 작용을 한다. <지저스 레볼루션>과 <사랑의 원자탄>이 현시대의 한국 교회와 기독교인들에게 던지는 교훈은 분명해 보인다. 첫째, 사회적 평판이나 주관적 시각에서 사람을 판단하지 말 것을 영화는 우리에게 권고하고 있다. 맨발로 다니고 마약이나 하는 히피들을 쓸모없는 사람들로 보지 않고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될 사람들로 바라보는 시선은 손양원 목사가 한센병 환자들을 돌보았던 애양원 사역을 바라보는 시각과 일치한다. 세상에서 버려지고 혐오의 대상이 되었던 사람들이 신앙에 바탕을 둔 사랑의 손길에 의해 어떻게 변화될 수 있는지를 깨닫도록 영화는 우리를 돕고 있다. 둘째, 기독교인 혹은 교회에는 관심이 없지만 영적인 존재로 살아가기를 원하고 영혼 구원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있음을 영화는 깨닫게 한다. 히피들은 세속적이며 물질만능주의 문화에 반기를 든 반문화주의자들이다. 그들은 눈에 보이는 세계 너머에 존재하는 새로운 영적 세계에 대한 호기심을 갖고 있다. 1960년대 기독교를 떠난 히피들이 동양에서 건너온 뉴에이지 전도사들의 유혹에 넘어간 것도 이 때문이다. 자신의 두 아들을 죽인 살인자를 양자로 삼은 손양원 목사의 모습 또한 천국을 사모하는 영적인 이해 없이는 불가능해 보인다. 셋째, 현대의 교회는 영적 구원을 갈구하는 사람들 곁으로 먼저 다가서야 함을 영화는 보여준다. 척 스미스 목사는 벽돌로 지어진 예배당을 넘어서 해변으로 나아가 천막을 치고 예배를 드렸다. 히피들이 거기에 있었기 때문이다. 손양원 목사는 한센병 환자들이 모여 사는 애양원으로 갔다.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사람들이 거기에 있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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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9-22
  • [영화] 한류열풍 속 K-기독교 영화를 꿈꾸다
    한류열풍과 기독교 정신 한류문화가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일본과 동남아시아 위주로 불었던 한류열풍이 아니라 유럽과 북남미를 비롯하여 아프리카와 중동지방까지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고 할 만큼 그 영향권 또한 세계적이다. 한류 문화의 내용 또한 몇몇 대중가수나 드라마에 국한된 지난날과 달리 매운맛 라면에서 K9자주포에 이르는 각양각색의 한류문화가 세계인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 음악만 하더라도 클래식에서 퓨전국악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노래와 춤을 즐기는 데 현대와 고전 가리지 않는다. 어떻게 세계에 한국문화의 바람을 불러일으켰는지 한국인조차 놀랄 정도다. 새로운 한류의 현상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아래 감춰진 한국인의 문화유전자를 찾아볼 필요가 있다. 이화여대에서 한국학을 가르쳐 온 최준식 교수는 한류문화를 발전시켜 온 한국인의 특성을 문(文)과 신(神)에서 찾았다. ‘문’은 학문을 좋아하고 한국인의 성향을 뜻한다. 서양의 문화혁명을 일으킨 구텐베르크의 활판인쇄술(1445) 보다 금속활자로 인쇄한 고려의 직지심체요절(1377)이 빠르고, 인류 최초로 생일을 가진 문자인 ‘한글’(1443)을 만든 일 등은 한국인이 ‘문’을 좋아하는 기질적 특성을 보여준다. 최준식 교수가 말하는 한류열풍을 일으킨 한국인의 또 한가지 특성인 신(神)은 한국인의 가장 오래된 종교적 성향인 샤마니즘, 즉 무교적 성향을 말한다. ‘신명난다’는 말은 무엇에라도 홀린 듯 한마음 한뜻을 이루어 외국인이라면 감히 생각지도 못한 일을 이뤄내는 한민족의 성향을 말한다. 돈이나 기술, 시설 등 아무것도 갖춰진 것이 없는 상태에서 거북선이 그려진 5백원 지폐를 들고 영국의 투자자를 찾아가 마침내 세계최대의 조선사를 일으킨 현대그룹의 정주영 회장 같은 사람은 ‘신명’나게 일을 한 사람이었다. BTS와 블랙핑크, 백남준과 임윤찬, 김연아와 손흥민 등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뛰어난 재능을 가진 한류문화의 주인공들에게서 우리는 신명나게 몰입하는 한국인들만의 기질적 특성을 읽을 수 있다. 신(神)에 대한 최준식 교수의 해석과 적용에 백퍼센트 동의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한국은 종교박람회장이라 부를 만큼 다양한 종교들이 존재하지 않았는가! 대신 한국의 근현대사에서 기독교가 나라와 민족을 부흥 발전시킨 원동력의 역할을 해왔음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즉 기독교는 서양의 선교사들이 내한한 이후부터 한민족의 문화역량을 발전시킨 데 중요한 역할을 해 왔다. 따라서 오늘날 문화 유전자적 요소인 신(神)은 샤머니즘이 아닌 기독교가 되어야 한다. 프로테스탄트 정신에 입각해서 검약과 절제, 저축의 정신을 키웠고, 신분차별을 폐지하고 서구식의 근대교육의 길을 연 것도, 민주주의제도를 정착시킨 것도 우리나라에 들어온 기독교 덕분이다. 특히 세상을 보는 시각을 자국에 국한되지 않고 전세계를 바라보도록 시선을 넓힌 일은 한국교회와 기독교 정신이 한류문화에도 영향을 끼치고 있음을 깨닫게 한다. 영화 <아버지의 마음>은 이 사실을 감동적으로 깨우치게 만든다. 우리에겐 ‘아버지의 마음’이 있는가? 7월 개봉을 앞둔 김상철 감독의 신작 <아버지의 마음>(2023)은 미국의 기독교 영화시장 진출을 생각하면서 만든 작품이다. 지금까지 미국 극장에서 상영된 한국의 기독교 영화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관객들은 재미교포들이나 한인 후손들로 대개의 경우 한인교회를 대상으로 한 홍보의 결과였다. 김상철 감독이 원하는 바는 외국의 영화상영 방식을 그대로 따라서 외국의 기독교인들을 만나는 일이었다. 즉 주목할 만한 기독교 영화로 인정받아서 소니나 디즈니 같은 메이저 영화사들이 갖고 있는 배급 경로를 따라 미국의 기독교 영화시장에 진출하고 싶은 의지가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아버지의 마음>은 우리에게는 빈곤아동구호단체인 ‘컴패션(Compassion)’의 설립자 에버렛 스완슨(Everette Swanson, 1913~1965) 목사와 컴패션의 후원자와 결연을 맺은 아동들의 성장한 일화를 보여주는 선한 다큐멘터리 영화다. 영화의 절반은 한국전쟁 당시 비참한 고아들의 실상과 선교사로 내한한 에버렛 스완슨 목사가 미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너는 무엇을 하겠느냐?(What are you going to do?)’주님의 음성을 듣고 전쟁고아들을 돌보기로 결심하는 과정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렇게 해서 1952년 컴패션은 시작되고 폐허가 된 상황에서 국가도 하지 못했던 전쟁고아들을 돌보는 사역을 소개한다. 영화의 또 다른 절반은 현재의 시점에서 컴패션을 후원하는 인플루언서 황태환과 그와 결연을 맺은 필리핀의 엄마를 잃은 소녀 나탈리, 그리고 컴패션의 도움으로 르완다 내전의 대학살을 견디고 이제는 어엿한 사회인으로 성장한 메소드 등 에버렛 스완슨 선교사의 사역의 열매들을 영화는 제시한다. 특히 유튜브 채널 ‘비글부부(Bgeul Bubu)’를 운영하며 유명해진 ‘하준파파(황태환)’의 출연은 이 영화의 제목인 ‘아버지의 마음’을 매우 감동적으로 관객에게 전하고 있다. 다복하기만 한 이 가정의 6개월 된 둘째 아이가 갑자기 심장마비로 인해 하늘나라로 가버린 상황에서 아버지의 마음이 어떠한지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영화에서는 미처 언급하지 못했지만 ‘세바시’에 녹화된 딸을 잃은 아버지 황태환의 마음은 이러했다. 아빠가 너의 죽음이 그냥 죽음이 아닌 희생이었다는 것을 반드시 증명시켜줄게. 너가 그냥 왔다간 것이 아니라, 너는 분명히 너의 사명을 끝냈다라는 것을 아버지의 인생을 통해서 반드시 보여줄게. 관객들은 황태환이 먼저 간 어린 딸과의 약속을 컴패션을 통해 지키고 있음을 바라볼 수 있다. 딸을 잃기 전만 하더라도 이해할 수 없었던 컴패션의 사역은 이제 고아와 과부를 돌보시고 사랑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이 자신의 마음 속에서도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게 된 것이다. 딸을 잃어버린 아픔은 부모가 없는 고아들의 처지를 돌아보게 만드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이것은 마치 헨리 나우웬이 얘기한 ‘상처입은 치유자(Woonded Healer)’처럼 자신이 입은 상처로 인해 다른 사람에게 생명을 주는 역할, 즉 예수님이 하셨던 일을 자신이 하고 있음을 말해 준다. 첫 번째 K-기독교 영화를 꿈꾸다 김상철 감독은 미국의 기독교 영화 시장에 진출하는 첫 한국인 감독이 될 가능성이 높다. 영화 기획의 단계부터 미국영화시장에 진출하는 것을 하나님이 새롭게 주신 소명으로 인식하며 제작을 해왔기 때문이다. 너무도 자연스럽게 스완슨 선교사와 컴패션을 알게 되었고, 스완슨 선교사의 전기를 쓰는 작가와 주변 인물들이 영화처럼 나타났으니 말이다.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 가운데서 황태환 출연자를 제외한다면 대부분 외국인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용하는 언어도 영어가 주를 이룬다. 영화 흥행에 있어서 언어의 장벽이 많이 낮아졌다고는 하지만 문화가 다른 대중들에게 영화의 언어가 모국어인지 아니면 외국어인지는 파급 효과면에서 차이가 있다. 내레이션 또한 해외 상영물의 경우 할리웃의 유명 배우를 섭외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특히 <미션 임파서블7>과 마블 시리즈 등 할리우드의 블록버스터급 영화에서 항공촬영을 담당한 스티븐 오가 스탭으로 참여하여 메이저급의 영상을 제공한 면도 영상미를 높이며 높아진 대중의 눈높이에 부응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무엇보다 세대와 문화를 초월한 선한 관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점은 이 영화가 대박이 나더라도 국뽕에 취할 염려를 갖지 않게 만든다. 빈곤과 고통에 빠진 어린이들과 결연을 맺고 아빠처럼 엄마처럼 돕는 일은 세계 구석구석 영화가 개봉되는 곳마다 오히려 확산될 필요가 있다. 전쟁의 처절한 상처를 보듬고 일어나 아버지의 마음으로 세상의 어린이들을 품는 영화를 보는 일은 자기만족이 아닌 이웃 사랑을 위한 첫걸음이 될 수 있는 까닭이다. 한국전쟁 직후인 1954년을 기준으로 전국에는 414개의 고아원 시설이 있었다. 이 가운데 기독교 계통의 선교사와 후원단체가 운영하는 고아원의 수가 266개 시설에 이르렀고, 이곳에는 28,748명의 고아들이 돌봄을 받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특히 미국의 선교사들은 미군의 협조와 본국의 교회와 긴밀히 연계하면서 다른 단체들보다도 더 많은 구호 물품과 재정, 구호 인원들을 통해 구호활동에 나섰다. 한국의 컴패션은 1952년 스완슨 목사가 전쟁고아들을 향한 간절한 사랑으로 시작되었지만, 2003년부터 한국의 컴패션은 수혜를 받는 국가에서 후원을 베푸는 국가로 전환되는 기적을 보여주었다. 기독교 한류가 번쩍하는 스파크를 일으키는 순간이다. 유엔 가입국 가운데 역사상 원조를 받던 나라에서 다른 나라에 원조를 주는 유일한 나라는 대한민국밖에 없기 때문이다. 과연 <아버지의 마음>은 최초의 K-기독교 영화로 기록될 수 있을 것인가? 이를 위한 팁이 있다면, 모든 한류문화 대열에 편승한 콘텐츠들은 일단 국내에서 사람들의 관심과 인기를 받았다는 사실이다. 블록버스터 영화들이 개봉되는 7월 뜨거운 극장가에 정면으로 도전하며 승부수를 띄운 <아버지의 마음>의 성공여부는 우리들 손에 달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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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6-29
  • [영화] 죽음이 서툰 남자가 남긴 사랑
    캐릭터로 승부하는 영화의 구조 못된 캐릭터가 변하여 선한 영향력을 주는 인물이 되는 이야기는 대중에게 감동을 주는 형식으로 자리 잡으며 기독교인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왜냐하면 그곳에는 죄와 은혜라는 성경이 말하는 인간관과 구원관이 내재해있기 때문이다. 죄를 저지르는 밉상의 행동과 성격은 대중의 관심을 끄는 역할을 한다. 자신이나 이웃과 평화를 누리며 살아가는 일반적인 사람들의 모습과는 사뭇 다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대중의 기대는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하나는 죄에 대한 징벌로서 심판을 받는 캐릭터의 모습이다. 못된 성격에다 이상한 짓을 한 사람은 그에 대한 대가로서 벌을 받아 마땅하다는 논리가 여기에는 깔려있다. 다른 하나는 은혜라 말할 수 있는, 예상치 않는 누군가의 도움과 친절로 인해 밉상이던 캐릭터가 선한 이미지로 변하게 되는 일이다. 예수님을 만난 세리장 삭개오 이야기(눅19:1-10)는 캐릭터의 변화를 통해 감동을 주는 이야기의 원형적 성격을 보여준다. 삭개오는 로마의 식민지였던 이스라엘에서 자기 백성의 돈을 뜯어다가 로마에 바치는 세리였던 까닭에 대중들의 비난을 받는 직업을 가지고 있었고, 작은 키가 주는 외모 등은 그가 부정적 이미지가 잔뜩 묻어나는 캐릭터의 소유자란 사실을 보여준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난 뒤 그는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다’(눅19:8)는 폭탄 발언을 하는 등의 대중들을 깜짝 놀라게 만드는 선한 캐릭터로 변신한다. 이것은 교훈과 재미가 공존하는 이야기의 본래적 성격을 보여준다. 한마디로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된 사건’(요2:1-10)처럼 인생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능력과 변화된 인간이 보여주는 선한 삶의 가치는 대중이 선호할 뿐만 아니라 성경적 가치를 품은 행복한 이야기인 셈이다. 마크 포스터 감독이 만들고 톰 행크스가 주연을 맡은 영화 <오토라는 남자>(A Man Called Otto)는 전형적인 꼰대 기질의 남성이 같은 주거 단지에 이사 온 멕시코 출신의 가족과 조우하면서 겪게 되는 인생 변화를 그리고 있다. 사랑하는 아내를 암으로 떠나보내고 삶의 의욕도 잃어버린 채 신경질만 살아있는 오토(톰 행크스)는 자신의 앞집으로 이사 온 마리솔(마리아나 트레비노)과 그의 남편 토미(마누엘 가르시아롤포)네 가족을 귀찮은 사람들로 여기기 시작한다. 주차를 제대로 할 줄도 모르고 사다리며 공구를 빌려달라고 부탁하는 등 조용하기만 했던 오토의 일상은 이사 온 사람들로 인해 흔들리기 시작한다. 다만 마리솔이 감사의 뜻으로 놓고 간 음식들이 오토의 마음을 흡족하게 만드는 바람에 그나마 굳어 있던 마음을 풀어주는 역할을 한다. 비록 남의 집에 세 들어 이사를 왔지만 자녀가 있는 시끌벅적한 마리솔 가족이 오토의 고독한 인생에 큰 변화를 주게 될 것이란 점은 누구나 예측할 수 있다. 누가 죽음을 멈추는가? 임신한 아내가 교통사고로 인해 유산의 아픔을 경험하고, 장애를 갖게 된 아내마저 세상을 떠난 뒤 외로운 오토의 선택은 아내의 뒤를 따라가는 일이었다. 철두철미한 성격의 오토는 전기도 전화도 끊으며 죽음을 기획하기 시작한다. 영화는 오토가 기획하는 네 번의 죽음을 보여준다. 첫째는 밧줄에 목을 매는 방법, 둘째는 엽총을 이용하기, 셋째는 차고에서 자동차의 배기가스를 자동차 안으로 유입시켜서 질식사를 도모하는 방법, 그리고 마지막에는 철길 위로 뛰어 내려 달려오는 기차와 마주치는 방법 등이다. 물론 네 번의 서로 다른 방법을 시도했다는 것은 앞의 방법들이 모두 실패로 돌아갔음을 의미한다. 이 영화의 가장 흥미로운 점은 네 번째 자살시도를 제외한 나머지 방법들이 수포로 돌아가게 된 결정적 이유가 바로 마리솔과 이웃들의 등장 때문이란 사실이다. 주택단지를 매일 순찰하며 분리 수거로부터 주차 문제까지 속속들이 간섭을 해온 오토는 이웃주민들에게는 필요한 것이 있으면 제공받을 수 있는 해결사였던 것. 성격은 까칠해 보여도 도와달라는 이웃의 청을 거절 못하는 착한 마음씨의 소유자가 바로 오토라는 남자라는 사실은 이웃들이 그를 내버려 두지 않는 결정적 이유가 된다. 오토의 자살 시도가 이웃에 의해 거듭 실패하게 되는 일은 OECD국가 가운데 자살률 1위를 기록하고 행복지수가 59위(2022 세계행복보고서)에 불과한 대한민국 국민들이라면 눈여겨볼 만한 시사점이 있다. 첫째는 이웃과의 소통이 죽음을 중지시킬 수 있으며, 둘째는 타인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행동이야말로 죽음에 대한 생각을 멀리하게 만드는 요인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죽고 싶을 만큼 외로운 상황이란 아무도 자신을 찾는 사람이 없는 가운데 남을 도울 수 있는 여력의 상실에서 오는 진공의 상태라 할 수 있다. 마리솔은 남편이 다치는 바람에 구급차에 실려 병원에 가자 오토를 찾아가 차로 거기까지 데려다 달라고 요청한다. 그것도 모자라 운전연수를 해달라고 부탁하고 남편과 데이트를 하기 위해 아이들을 봐 달라고까지 한다. 그런데 툴툴거리고 퉁명스럽기 이를 데 없는 오토는 그러면서도 이러한 부탁들을 외면하지 않는다. 죽음을 내쫓는 중이다. 인간은 자신이 해야 할 역할이 주어질 때 숨쉬기를 포기하지 않는 법이다. 고독한 죽음의 현장과 유품정리사 마리솔은 어느 겨울 아침, 오토의 집 앞에 눈이 치워지지 않은 채로 덮여있는 것을 보고는 오토의 집을 향해 슬리퍼 차림으로 달려간다. 부지런하고 깔끔한 성격의 오토가 집 앞의 눈을 치우지 않는다는 것은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음을 뜻하는 메시지인 까닭이다. 아니나 다를까 오토는 침대 속에서 영면한 채 발견되고 마리솔 가족을 위한 유서를 남겨 놓는다. 한국 같았으면 또 하나의 고독사(孤獨死)로 남을 뻔했다는 생각에 따뜻했던 영화는 어느새 마음을 얼리고 만다. 죽은 후 몇 달이 지난 뒤 백골 상태로 발견된 독거노인의 주검 이야기가 불현듯 생각났기 때문이다. 통계청의 최근 사회적 고립도 조사에 따르면 전국민의 1/3은 사회적 고립의 상태에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사회적 고립도는 인적·경제적·정신적 도움을 구할 곳이 없는 사람의 비율이 얼마인지 나타내는 지표로서 여기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고독사의 위기를 겪을 가능성이 높다. 한국 사회에서 낯설지 않은 고독사는 유품정리사라는 신종 전문가들을 매스미디어 안으로 소환시키기 시작했다. 유품정리사는 한국사회가 겪는 비극이라 할 수 있는 고독사가 낳은 신종 직업이다. 높은 자살률과 낮은 출생률, 1인 가구의 증가에 따르는 가족공동체의 붕괴, 경제적 독립이 불가능한 독거노인의 증가 등 최근 대한민국에서 일어난 심각한 사회현상들은 외롭게 죽음을 맞이하는 이들이 남긴 흔적을 지울 사람을 필요로 할 수밖에 없었다. 고독사는 가족이나 주변인들과 단절된 채 아무도 모르게 홀로 생을 마감한 후 일정한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발견되는 죽음을 의미한다. 보통 좁은 방안에 산더미처럼 쌓인 쓰레기 더미와 배달된 음식물들 찌꺼기들이 썩어 있고, 술병들이 널부러져 있는 경우는 고독사 현장의 공통된 풍경이기도 하다. 2021년 5월에 공개된 넷플릭스의 10부작 드라마 <무브 투 헤븐: 나는 유품정리사입니다>는 유품정리사의 모습을 대중에게 각인시킨 결정적 역할을 수행했다. 아스퍼거 증후군이 있는 유품정리사 그루(탕준상)와 그의 후견인 상구(이제훈)가 그루 아버지의 직업을 이어받아 세상을 떠난 이들의 마지막 이사를 도우며 그들이 유품을 통해 미처 전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남은 이들에게 대신 전달하는 과정을 담아냈다. <무브 투 헤븐>은 주요 국가에서 넷플릭스 인기순위에서 1위를 차지했는가 하면, 2021 아시안 아카데미 크레이에티브 어워즈(Asian Academy Creative Awards, AACA)에서 각각 최고의 드라마 시리즈상과 남우주연상(이제훈)을 수상하기도 했다. 유품정리사 김새별이 쓴 ‘떠난 후에 남겨진 것들’ 속에는 고독사를 방지할 수 있는 조언이 담겨있다. 귀를 기울이면 다음과 같은 얘기를 들을 수 있다. “내 가족, 내 이웃에 대한 작은 관심만 있다면. 안부를 묻는 전화 한 통, 따뜻한 말 한마디가 누군가에게는 살아갈 힘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모른다. 포기하려던 삶을 부여잡고 다시 시작할 수 있게 하는 것은 거창한 도움이 아니다. 당신은 소중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일깨워 주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작은 배려와 친절을 통해 가능한 일이다.”
    • 문화
    • 영화
    2023-05-19
  • [영화] 안중근의 신앙이 빛난 영화 ‘영웅’
    예수의 수난과 기독교 영화의 시작 레아르(Léar)라는 예명으로 더 유명한 사진작가이자 영화제작자인 알버트 키르히너(Albert Kirchner,1860-1902)는 1897년 최초의 기독교 영화라 할 수 있는 예수의 고난을 묘사한 5분짜리 영화 <수난>(La Passion)을 발표했다. 1895년 12월 28일 뤼미에르 형제가 그랑 카페에서 상영했던 영화를 현대영화의 출발점으로 여기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불과 1년여 만에 이루어진 일이다. <수난>은 현재 필름이 남아있지 않지만 당시의 기록을 살펴보면 예수의 탄생에서 부활에 이르기까지 생애의 주요 사건을 다룬 12장면으로 이루어졌다. 연극배우들이 동원되었고 파리에서 촬영되었지만 키르히너가 예루살렘을 여행하는 동안 촬영된 영상물 <Scenes de la vie du Christ>의 장면 일부가 들어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수난>을 관람한 사람들 가운데는 예수가 도발적으로 묘사되었다며 비판을 하기도 했지만, 영화 제작자들에게 미친 영향은 매우 컸다. 대중적으로 인기를 끌었을 뿐만 아니라 뤼메에르 형제조차도 그다음 해인 1898년 11분 분량의 영화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수난>(La vie et la passion de Jésus-Christ)을 내놓았을 만큼 성경의 예수 그리스도를 묘사한 영화의 인기는 대단했다. 키르히너가 만든 첫 기독교영화는 파리에 있는 가톨릭 출판사인 파리의 본느 프레스(Bonne Presse)의 지원을 받아 제작되었다. 가톨릭의 교세가 강한 프랑스의 지역적 특성과 가톨릭 교회가 영화예술에 대해 갖고 있는 관심이 매우 크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세계는 물론 한국기독교 영화사를 논할 때 가톨릭 교회의 역할과 영향을 무시하기란 쉽지 않다. 오늘날의 영화 이전에 빛을 렌즈에 투과시켜 생성된 이미지를 가지고 성경을 가르친 환등의 기술을 개발한 사람도 예수회의 사제이자 기술자였던 아타나시우스 키르허(Athanasius Kircher 1601-1680)였다. 안중근 의사의 열정을 담은 영화사 2022년도가 지나가기 전 한국의 가톨릭 교인들은 가슴 뿌듯한 영화 두 편을 맞이할 수 있었다. 한 편은 한국인 최초의 사제 서품을 받은 김대건 신부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 <탄생>(2022.11.30. 개봉)이었고, 다른 한 편은 안중근 열사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저격 실화를 다룬 <영웅>(2022.12.21. 개봉)이었다. <탄생>과 <영웅>은 모두 고난의 역사라는 시대적 배경 속에서 주인공의 가톨릭 신앙이 주는 의미와 역할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는 비슷하지만, <탄생>이 가톨릭 교회 내부의 지원에 힘입어 제작될 수 있었다면, <영웅>은 2009년도에 막을 올린 동명의 뮤지컬의 인기에 힘입어 같은 내용을 스크린에 옮긴 상업영화란 점에서 제작 목적의 차이를 엿볼 수 있다. 흥미로운 점은 가톨릭 교회에서 <탄생>을 추천할 때는 김대건 신부의 신앙과 순교를 강조하기 보다는 외세의 침략 속에서 조선 근대화의 길을 연 청년의 모험담이라는 역사성을 강조한 반면, <영웅>의 경우는 일반영화로 분류됨에도 불구하고 안중근 의사와 어머니 조마리아의 신앙에 나름 무게를 두며 관람을 권했다는 사실이다. 가톨릭 영화의 특성이 강한 <탄생>의 경우는 일반인들의 관람을 권장하고 싶은 한편으로 일반영화로 분류되는 <영웅>을 보는 사람들에게는 가톨릭 신앙이 안중근 의사에게 끼친 영향을 기억해주기를 바라는 가톨릭 교회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흥행 결과는 영화에 대한 제작 의도에 따라 다르게 판단할 수 있다. <탄생>은 공식기록으로 344,714명의 관객을 동원했다. 150억 원의 개인 후원을 받아 제작비에 투입하고 교황청 시사회를 비롯하여 감상문 공모전 1등에게는 성지순례 티켓을 수여하는 등의 각종 이벤트를 생각할 때는 기대에 못 미친다고 볼 수도 있지만, 대중의 관심이 크지 않은 종교영화라는 장르를 생각할 때는 그리 나쁘지 않은 스코어이다. 어차피 각 교구와 성당별로 별도의 관람이 이루어지는 까닭에 실제 관람객은 늘어날 것이고 가톨릭 신앙인들의 자긍심을 높이는 데는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영웅>의 스코어는 3,266,045명(2023.03.26. 기준)으로 손익분기점에는 약간 못 미치는 기록이지만 주인공 안중근 의사로부터 신앙의 면모를 기억할 수 있는 관객의 숫자를 생각한다면 가톨릭 교회의 입장에서는 의미있는 스코어라 할 수 있다. 한국영화의 최고 인기 콘텐츠 ‘안중근’ 안중근 의사는 한국영화가 사랑한 최고의 소재이다. 한국영화사에 가장 많이 제작된 영화도 안중근 의사에 대한 것이다.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로서 을사늑약의 중심인물이자 초대 총독을 지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저격한 일은 민족의 원한을 푸는 카타르시스를 제공했고, 이토의 격살이 단순히 민족적 감정에 따른 결과가 아니라 동북아시아의 평화를 위한 큰 그림 가운데 일어난 일이란 점은 그가 감옥 있을 때 쓴 〈동양평화론 東洋平和論〉과 더불어 그가 행동가였을 뿐만 아니라 사상가로서의 면모를 가지고 있음을 세상에 알리었다. 또한 어머니 조마리아와의 친밀한 모자지간의 애정과 고난을 이기도록 만든 그의 가톨릭 신앙 등 그의 삶 요소요소에 박혀있는 격정적이며 애잔한 페이소스는 대중들이 좋아하는 드라마적인 요소가 아닐 수 없다. 한국 영화사에 안중근 의사가 등장한 일은 해방 직후인 1946년 부터다. 영화가 민족의 역사의식을 일깨우는 의미있는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는 바람과 그에 따른 상업적 성공에 대한 기대감이 함께 하는 것은 해방 이후의 영화사 초기부터 지금까지 한국의 영화 제작자들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생각이 아닐 수 없다. 즉 의미도 있고 재미도 있어야 한다는 영화의 가치관을 엿볼 수 있다. 뮤지컬 영화 ‘영웅’과 역사물을 통해서 그리는 신앙 영화 <명량>이나 <한산>이 그러하듯이 한일관계의 현실적인 이해 속에서 일본과의 역사를 다룬 영화들은 새롭게 읽히며 흥행에도 영향을 받는다. <국제시장>을 만든 윤제균 감독이 특유의 유머 감각까지 동원하며 만든 <영웅>이 손익분기점에도 못미치는 결과를 낳은 것은 어쩌면 지금의 대일관계가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되는 상황과 관련이 있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이미 오리지널 뮤지컬로 100만 명이나 본 유명한 극을 영화화한 까닭에 익숙함이 영화관으로 향하는 관객의 발걸음을 뜸하게 만들었을 수도 있다. 혹자는 코로나 이후 비싸진 영화관람료를 원인으로 돌리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웅>은 주인공의 종교적 성격을 일반 대중들에게 거부감없이 어떻게 다가설 수 있는지를 잘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영웅>의 가치를 높이 평가할 수 있다. 안중근은 세례명이 ‘도마’로 알려져 있듯이 영화는 그의 행적 곳곳에 가톨릭 신앙의 면모를 심어 놓았다. 안중근 의사(정성화)가 집을 떠나기 전 어머니 ‘조 마리아’(나문희)가 묵주를 건네고 힘들 땐 언제나 주님께 의지하라고 이야기하는 장면이나, 안 의사가 이토를 격살하기에 앞서 용기를 달라며 십자가 앞에서 기도하는 장면, 오랜 친구 마두식(조우진)의 장례를 성당에서 치른 후 십자가에 달린 예수상을 보며 조국이 우리에게 무엇이냐고 울부짖는 장면 등은 거부감없이 주인공의 신앙이 어떠하며 그것이 민족의 거사를 앞두고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를 일반 대중들에게 전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죽음을 앞둔 결사의 비장감이 휘몰아치는 장면에서 아무리 세속적인 사람일지라도 신앙의 가치를 외면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특히 영화에 등장한 안중근 의사의 법정에서의 마지막 변론은 신앙적 가치와 애국적 행동 사에서 갈등이 어떻게 중재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흥미로운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우선 이토를 살해한 것을 하나님의 이름을 사죄드리오. 하지만 개인이 아닌 대한의용군 참모중장으로서 이토 히로부미를 살해한 이유를 밝히고 싶소.” 당시 로마의 대주교는 안중근 의사가 이토를 저격 살해했다는 이유를 들어 가톨릭 신자 자격을 박탈했었다. 안 의사에 신자 자격이 복원된 것은 2010년에 와서였다. 가톨릭 교회가 적극적으로 안중근 의사를 연구하고 미디어를 통해 그의 신앙의 됨됨이가 의거에 미친 영향을 알릴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된 것이다. 훌륭한 역사의 인물을 바라보는 대중들의 마음에는 그 인물이 가진 신앙적 면모에 대한 거부감은 줄어드는 반면, 수난을 이기는 힘으로서 신앙을 새롭게 이해하도록 만들기도 한다. <영웅>으로부터 기독교 영화인들이 가장 크게 배우는 덕목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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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
    2023-04-05
  • [영화] 할리우드의 삼위일체를 체험하라
    진짜 영화다운 영화 보는 즐거움과 실감나는 소리, 몸으로 느끼는 영화 속 움직임, 그리고 머리에 각인되는 메시지 등 뭐 하나 나무랄 데 없는 제임스 카메룬 감독의 영화 <아바타:물의 길>은 진짜 영화다운 영화가 무엇인지를 알게 한다. 3D와 4D로 체험하는 입체영상과 흔들리는 의자 때문만은 아니다. 영화가 필요로 하는 각각의 요소들이 따로 놀지 않도록 잘 결합시켜서 전체적으로 하나의 완결된 작품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초대형 스크린을 통해 관객을 새로운 세상으로 안내하며 192분 동안 잠시도 시선을 돌리지 못하게 만드는 이 영화는 세계의 영화팬들이 <아바타> 이후 13년 동안 기다려 온 바로 그 영화라 할 수 있다. 특히 넷플릭스나 애플tv, 디즈니플러스 등 휴대폰과 노트북으로 볼 수 있는 OTT서비스가 보편화 되어 있고, 코로나 펜데믹으로 인해 영화관 나들이가 제한되어 있었던 세상을 향해 <아바타2>는 진짜 영화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며 영화관의 가치를 새삼 인정받도록 만들었다. 할리우드 영화를 빛나게 만든 세 가지 실체 <아바타2>는 미국의 할리우드 영화가 온 세상을 지배하도록 만드는 제작의 원리로써 자본과 기술 그리고 상상력이 완벽하게 하나로 결헙된 영화다. 이것을 우리는 ‘할리우드의 삼위일체’라고 부를 수 있다. 첫째는 자본이다. 무엇보다도 할리우드 영화를 움직인 실체는 돈이다. 영화는 자본을 확충하는 도구이며, 모은 돈은 또 다시 영화에 재투자하여 더 많은 자본을 모으는 데 사용된다. 1975년도만 하더라도 할리우드의 평균영화제작비는 광고비를 포함 310만 달러에 불과했다. 그런데 소리 없이 제작비는 상승하면서 1984년도에는 1440만달러에 달하더니 1996년도에는 3980만달러, 2003년에는 6380만달러까지 치솟았다. 제임스 카메룬 감독은 할리우드의 제작비 상승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인물이다. 그는 1991년 <터미네이터2>를 만들면서 최초로 제작비 1억 달러를 돌파했는가 하면, 1997년 작품인 <타이타닉>은 제작비 2억 달러를 기록한 최초의 영화로 기록되고 있다. 천문학적인 제작비 상승의 흐름은 <아바타>로 이어졌다. <아바타>(2009)의 추정 제작비는 약 2억3700만 달러지만 <아바타: 물의 길>의 경우 제작비로 추정되는 금액은 3억5000만 달러로 알려져 있다. 요즘 환율로 치자면 한화로 약 4592억 원에 이른다. 그러나 할리우드 영화를 잘 아는 전문가들 가운데는 4억 달러(약 5244억 원) 이상이 들어갔을 것으로 추정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그러나 역대급으로 들어간 제작비를 염려할 필요는 없다. 전편 <아바타>는 지난 13년 동안 동안 전 세계에서 약 29억 달러(약 3조8000억 원)을 벌어들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세계영화사에서 가장 많은 돈을 벌어들인 영화 1위에 올랐다. 투자한 돈보다 더 많은 돈을 벌어들일 자신이 있다면 투자한 금액의 규모는 문제가 될 수 없다고 보는 것이 할리우드 제작사들의 경영철학인 셈이다. 둘째는 기술이다. 컴퓨터 그래픽을 가능하게 만드는 할리우드의 프로그램 기술은 성령처럼 눈에 보이지 않지만, 영화가 완성된 후 관객들은그 기술의 존재를 체험할 수 있다. <아바타2>는 전편 보다 더욱 발전된 기술을 적용하여 미래형 영화를 만들었다. 3D영화는 인간의 눈을 대신하는 카메라를 두 대를 놓고 찍어서 특수렌즈로 상영하고 또한 관객들은 입체감을 느낄 수 있도록 특수안경을 착용하고 관람하는 영화를 말한다. 제작은 쉬워 보이지만 눈을 피로하지 않게 하면서 동시에 생생한 사실감을 살리는 일이 기술의 관건이다. 아이디어 자체가 새로운 것은 아니지만 지금까지 우리가 보아왔던 평면적인 2D영화와는 전혀 다른 경험의 세계를 제공해주고 있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움직이는 의자에 앉아 마치 놀이동산에 온 듯한 느낌을 제공하는 4D는 젊은 관객들을 다시 영화관으로 불러들이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하고 있다. 4D영화는 궁극적으로 입체적 영상이 체험으로 발전할 때 미래의 영화가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중심에 설수 있음을 예견하고 있는 듯 하다. 2D와 3D는 체험의 질과 느낌 자체가 다르다. 신앙인들 가운데 성령체험을 사모하는 이들이 있듯이 할리우드의 열렬한 성도(광팬)들 가운데 상당수는 2D로 된 <아바타2>를 봤음에도 불구하고 3D로 다시 보기 위해 줄서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그것은 영화를 바라보는 시각을 다르게 만들기 때문이다. 셋째는 상상력이다. 상상력은 아직 눈에 보이지 않은 할리우드 영화를 눈앞에서 현실화시키는 궁극적 실재다. 또한 스크린에 나타난 상상의 세계를 통해 우리는 할리우드의 자본과 기술의 실체를 볼 수 있다. 이것은 곧 할리우드의 자본과 기술은 상상력을 통해 나타나며 관객과 만나는 접점이란 것을 뜻하기도 한다. 할리우드의 상상력은 현실에서는 도저히 일어날 것 같지 않은 놀라운 이적을 펼쳐 보인다. 1895년 뤼미에르 형제가 처음 영화를 만들었을 때 충격을 받은 것처럼, 불과 50년전 사람들이 <아바타2>를 봤다면 기적이란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상상의 세계 판도라 행성을 보여주고 그 속에 살고 있는 네비족과 인간의 유전자로 합성된 인간의 분신 아바타를 실제처럼 느낄 수 있는 것은 자본과 기술이 낳은 상상력의 결과다. 자본과 기술, 그리고 상상력 가운데 누가 먼저라고 말할 수 없지만, 이들은 항상 함께하며 할리우드를 움직인다. ‘할리우드의 삼위일체’는 그래서 놀랍고 경이로우며 한편으로 두렵기까지 하다. 앞으로 적어도 한 세기 동안 할리우드에 맞설 만한 영화는 나오기 힘들 것이다. 다시 말하면 앞으로도 계속해서 할리우드가 세계의 영화를 지배할 것이란 전망은 <아바타2>를 통해 더욱 확고해졌다고 할 수 있다. 환경문제와 원시종교의 세계관 그러나 희망은 있다. 자본과 기술 그리고 상상력을 그 자체가 동력을 갖고 있지 않다. 즉 지성과 영혼이 있는 사람이 그 쓰임새를 결정하며 그 배후에는 세계관이 존재하게 마련이니 말이다. 즉 세계관의 변화는 기술과 자본 그리고 상상력이 일으킨 감동이 선하고 가치있는 삶으로 연계시킬 수 있다는 점이다. 물론 <아바타2>의 세계관은 기독교 세계관과는 다르다는 점이 안타깝지만 말이다. <아바타2>는 전작의 인물을 소환하여 가족과 환경보호 그리고 복수에 대한 이야기를 펼친다. 1편의 주인공이자 해병대 출신의 백인으로 나비족의 몸을 얻게 된 제이크 설리(샘 워싱턴)는 나비족 추장의 딸 네이티리(조 샐다나)와의 사랑 끝에 결혼하고 자녀를 낳으며 가족을 이루고 숲속 나비족의 리더로 살아가게 된다. 그러나 판도라 행성에서 철수했던 ‘하늘에서 온 사람’들이라 불리는 인간들은 지구가 더이상 살 수 없는 폐기처분의 상태에 이르자 판도라 행성으로 이주하기 위한 건설작업을 펼치게 된다. <아바타>가 보여준 세계관은 기독교적이지 않다. <아바타2>는 현실에 대한 은유가 살아있는 SF영화다. 미래 세계에 인류는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아 판도라 행성에 오게 된다. 1편이 자원에 대한 인간의 욕망을 드러냈다면, 2편에서는 영생의 물질을 찾기 위해 해양생물을 포획하는 만행을 저지른다. 그 과정에서 나비족이 원시적 신앙의 모습이 드러나며 환경보호를 위한 대안도 그 속에서 자연스럽게 제시된다. 마치 과거 아메리칸 인디언들이 지녔던 토테미즘(Totemism)신앙을 따르고 있음을 보게 된다. 영화 속 나비족이 신성하게 여기는 거대한 ‘영혼의 나무’는 바닷 속에서도 발견된다. 나비족은 이 나무를 숭상하고 그 앞에서 행하는 제의와 여주인공인 네이티리의 어머니가 주술적 치료를 행하는 샤먼(무당)의 모습을 보이는 것은 이 영화가 나바호족의 문화뿐만 아니라 토테미즘적 세계관까지도 차용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오늘날 나바호족의 선조들이라 볼 수 있는 캐나다 인디언들은 지금도 거대한 나무로 만든 토템폴을 숭배하고 있고, 무엇보다도 인간과 자연과의 교감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 나비족들이 머리끝에 달린 촉수로 자연과 교감하며 서로에 대한 이해를 촉구한다는 사실은 자연과의 일치를 강조한 인디언들의 생각과 동일하다. 엄청난 돈과 최첨단 기술의 결합이 낳은 이 원시적 세계관의 등장은 현대사회의 문제 해결을 토템과 샤먼 같은 탈기독교적이며 신비주의에 의지하려는 감독을 포함한 미래를 꿈꾸는 현대인들의 의식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 즉 현대 기계문명이 일으킨 파괴적인 행동에 인류의 미래를 맡기기보다는 비록 원시적이지만 기독교 문명 이전의 세계관에서 대안을 찾으려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서부시대에 백인들이 인디언들을 몰아냈지만, 이제는 뜻밖에도 인디언들의 사고가 백인들을 지배하는 형국으로 변모하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아바타2>는 분명 서구사회가 과거 역사에서 저지른 강대국의 팽창주의 그리고 우리가 직면한 문제인 환경파괴 비판 등 다양한 메시지를 담고 있으며 이것은 전세계 사람들 누구나 관심을 가질수 밖에 없는 현실의 문제를 묘사하고 있다. 환경보호는 우리 시대의 절박한 필요이며, 나비족의 세계관이 환경보호에는 일부 도움이 될지 모르지만, 기계적으로 대응하는 환경보호 자체가 인간 삶의 목적이 될 수 없고, 인간의 생명을 위협하는 환경에 대해서 수동적인 자세를 갖는 것이 올바른 삶도 아니다. 우리는 문화명령으로 일컬어지고 있는 창세기 1장 28절에 언급된 ‘다스림’과 창세기 2장 15절에 언급된 ‘다스림’과 ‘지킴’을 청지기적 사명으로 바르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즉 우리는 <아바타2>의 상상력을 기독교 세계관 안에서 거듭나게 만들어야 한다. ‘다스린다’로 번역된 히브리어 아바드(abad)의 뜻은 ‘섬기다’(serve)라는 의미로 사용된 일상용어이며, 목적어로 사용시에는 ‘경작하다’의 뜻을 갖게 된다. ‘지키다’라는 히브리어 '샤마르'(shamar)도 문맥상 창조의 질서를 보존하기 위한 인간의 노력을 수반하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환경을 가꾸고 지키는 일은 환경자체에 신성성을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한 의도를 실현시킨다는 점에서 하나님께 대한 섬김이 되는 것이다. 자연을 목적으로 삼지 않고 하나님을 진정한 삶의 목적으로 여길 때 환경문제에 대한 답도 얻을 수 있음을 말한다. <아바타>를 보며 세계의 그리스도인들은 재미에 심취만 할 것이 아니라, 세상이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읽어내야만 한다. 그 출발점은 당연히 환경문제에 대한 성경적 답변이며, 그것을 실천하는 교회의 등장이다. 조금 불편하더라도 세상 사람들보다 덜 쓰고 아끼고 나누면 교회를 바라보는 세상의 시각은 분명 달라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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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1-02
  • ‘조선의 바울’이라 불렸던 사내를 만나다
    한국기독신문 2022. 11월 둘째주 기독교 역사를 교육하는 새로운 방법 권혁만 감독이 기독교 영화콘텐츠의 새로운 장르에 도전했다. 지금까지 그 어떤 감독도 시도하지 않았던 뮤지컬 장르를 통해 한국 기독교 역사의 태동기를 담았다. 그의 작품들을 보고 있으면 공영방송의 TV 연출자로서 쌓은 경력과 방송세계에서 얻은 경험들이 고스란히 기독교 영화콘텐츠를 발전시키는데 필요한 역량으로 축적되어 온 것을 볼 수 있다. 그의 작품들은 무엇보다 형식적인 면에서 진보하고 있으며 새로운 도전을 멈추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한국 기독교 영화의 세계에서 권감독은 보배와 같은 존재가 아닐 수 없다. 21세기 들어 한국 기독교 영화를 지배했던 장르는 다큐멘터리였지만 권혁만 감독은 그에게 익숙한 다큐멘터리 장르에 머물지 않았다. 그는 다큐멘터리에 드라마를 요소요소에 삽입시킨 ‘팩션 드라마’를 선보였다. 손양원 목사의 깊은 사랑을 보여준 <그 사람 그 사랑 그 세상>(2014)이나 주기철 목사의 타협하지 않는 신앙을 담은 <일사각오>(2016)는 모두 사실에 가깝게 제작된 드라마란 뜻으로 ‘팩션 드라마’에 해당한다. 사실(Fact)에 충실하면서도 드라마적 감동을 주기 위한 소설적 상상력(Fiction)을 사용한 장르를 ‘팩션(Faction)'라 부른다면 지금까지 그의 영화들은 바로 여기에 해당한다. KBS PD로 성탄절 특집프로그램을 통해 기독교 역사와 사상을 전해 온 권혁만 감독이 이번에는 한국 최초의 목사 김창식의 신앙과 삶을 뮤지컬 형식에 담아서 돌아왔다. 2021년 12월 성탄 특집으로 방영된 콘텐츠를 극장용으로 재편하여 더욱 넓어진 감동과 역사의 세계로 관객을 안내하고 있다. 1888년 서양인들이 조선 아이들을 유괴해서 삶아 먹는다는 괴소문에 격분한 김창식은 직접 증거를 찾기 위해 서울 정동에 있는 올링거(Franklin Ohlinger) 선교사 집에 하인으로 위장취업을 하게 된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올링거 선교사 부부의 친철함에 감동을 받는 한편 산상수훈을 읽고 기도하다 거듭남을 체험하며 선교사의 길을 걷게 된다. 특히 1894년 5월에 있었던 평양박해의 순간에도 끝까지 신앙을 지키며 홀 선교사(William James Hall)로부터 ‘조선의 바울’이란 별명을 얻은 김창식의 뜨거운 삶을 영화는 뮤지컬로 보여준다. 특히 홀 선교사 부부를 비롯하여 그에게 세례를 준 아펜셀러 선교사, 김창식의 아들 김영진과 홀 선교사의 아들 셔우드 홀이 해주 구세주 병원에서 의사가 되어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는 등 한국선교 초기의 역사와 인물들이 대거 등장하게 되는 일은 기독교 역사를 단숨에 삼켜버리는 초대 한국교회사의 한 장을 읽는 느낌이다. <머슴 바울>의 제작사도 이를 충분이 이해하고 있는 듯하다. 교회의 적극적인 관람만을 권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다음세대들에게 영화관람후 한국교회사에 대한 지식을 가질 수 있도록 토론자료를 무료로 제공하고 있다. 이것은 매우 현명한 일이며 일반 영화와도 차별화되고 기독교 영화의 활용가치를 높이는 일로서 교회의 관심을 적극적으류 유도하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공영방송의 성탄특집을 바꾸다 한국교회는 미디어가 세상을 움직이는 시대의 도래에 발맞춰 신문과 라디오 케이블TV 등 신 ·구미디어 양쪽에서 나름대로 선교적 소명을 감당해왔다고 자부해왔지만, 유독 공중파 TV와 공영방송 안에서는 별다른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다. 종교의 자유와 더불어 종교 간의 형평성 문제 때문에 기독교 신앙이 직접 노출되는 방송은 제작되기도 어려웠고 좋은 콘텐츠를 외부에서 가져다 방영하는 일도 쉽지 않았다. 그나마 기독교 콘텐츠가 마음껏 방송을 탈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은 성탄절밖에 없었다. 석가탄신일에 불교 영화를 내 보냈다고 비판하는 사람이 없듯이 성탄절만큼은 기독교 관련 영상물들이 ‘성탄특집’이란 이름으로 세상에 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방송의 모든 프로그램에는 제작비가 필요하고 제작비는 사회의 관심 혹은 시청률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는 까닭에 방송제작자들은 안정된 시청률을 얻을 수 있고 사회적 관심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소재를 찾기 마련이다. 특히 공영방송의 경우는 준세금의 성격을 가지고 있는 방송수신료로 운용되는 까닭에 시청률과 상관없이 국가나 국민이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콘텐츠는 제작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지만, 기독교에 대한 관심도 없고 기독교방송콘텐츠를 제작할 때 일어날 수 있는 타종교의 비판이 두려워 아예 시도조차 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고 볼 수 있다. 즉 지금까지 성탄특집을 담당한 사람들은 기독교 시청자들의 존재와 기독교 콘텐츠가 국가와 사회에 유익을 줄 수 있다는 인식은 미처 하고 있지 못했다. 따라서 우리가 기억하는 성탄 특집물은 212분이라는 긴 상영시간 때문에 평소에는 방송국에서 틀지 않았던 영화 <벤허>와 같이 할리우드의 고전 성서영화를 질리도록 보는 것 외에 별다른 대안이 없었다. 21세기 들어 일어난 성탄 특집물의 변화는 2011년 12월 23일, 성탄특집으로 방영한 <KBS스페셜-울지마 톤즈>로부터 시작되었다. 남수단에서 한센병 환자를 돌보며 교육과 봉사를 하다 대장암으로 숨진 이태석 신부의 사역이 다큐멘터리로 방영되면서 성탄특집의 외형과 작품성은 급격히 향상되기 시작했다. 충분한 시간을 갖고 계획을 하는 한편으로 해외촬영과 공들인 편집은 소재 중심을 지향할 수밖에 없는 다큐멘터리의 감동을 배가시키면서 극장판으로 제작되는 데 성공했다. 권혁만 PD의 신앙과 직업에 큰 도전을 준 것도 <울지마 톤즈>였다. <울지마 톤즈>는 명화히 가톨릭에 대한 우호적인 이미지를 그리고 있을 뿐만 아니라 감동이 극장용 영화로 제작되는 데 까지 이르도록 우리 사회에 미친 선한 파장은 매우 컸다. 그런데 <울지마 톤즈>를 만든 구수환 PD 본인은 신앙이 없는 무신론자였다. 기독교 신앙도 없는 사람이 저토록 감동적인 작품을 만드는데 정작 신앙이 있는 자신이 신앙적 작품을 만들지 못하는 것에 대한 깊은 반성과 성찰은 오늘날 한국의 대표적인 기독교 영화감독으로 권혁만을 만든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성탄특집 다큐멘터리 <죽음 보다 강한 사랑 손양원>이나 <일사각오>도 <울지마 톤즈>의 전례를 따랐다. 드라마형식을 일부 도입하여 세미 다큐 형식으로 과거를 보다 사실적으로 표현하며 역사성을 부각시키기 위해 적지 않은 관계자와 현장을 일일이 만나고 답사한 결과 수준 높은 기독교 다큐멘터리가 탄생할 수 있었다. 그리고 <울지마 톤즈>가 극장판으로 재편집되어 적지 않은 관객을 만났듯이 <죽음 보다 강한 사랑 손양원>은 <그 사람 그 사랑 그 세상>이란 제목의 극장용으로 만들어져 한국교회와 사회에 의미있는 영향을 끼쳤다. 반목과 대립의 사회에서 손양원 목사가 보여준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은 우리의 눈과 귀를 모으기에 충분했던 까닭이다. <그 사람 그 사랑 그 세상>은 공영방송의 PD가 극장용 기독교 영화 감독으로서도 충분히 제 몫을 할 수 있음을 보여준 신호탄과도 같은 것이었다. 기독교 최초의 뮤지컬 영화 <머슴 바울>이 취한 형식은 뮤지컬이다. 한국 기독교 영화에서 뮤지컬 장르를 택한 경우는 이번이 처음이다. 공연무대에서 기독교 뮤지컬은 인기 있는 기독교 문화콘텐츠로 자리 잡은 지 오래되었다는 점에서 기독교 뮤지컬 영화의 출현은 다소 늦은 감이 없지 않다. 교회는 뮤지컬을 제작하는데 최적의 인프라를 가진 까닭에 대중적으로 활성화된 기독교 콘텐츠라 할 수 있다. 예배당에서 강대상을 치우고 할 수 있는 단막극 형태로부터 천 석이 넘는 대형 공연장에 어울리는 대형 뮤지컬에 이르기까지 규모에 맞게 다양한 기독교 뮤지컬들이 그동안 펼쳐져 왔었다. 무엇보다도 교회는 음악과 친숙한 문화를 갖고 있으며, 춤과 노래를 통한 메시지 전달에 능숙한 인력을 찾기가 쉽고 성경과 기독교 역사 속에서 흥미로운 이야기를 쉽게 찾을 수 있는 점은 기독교 뮤지컬이 앞으로도 크게 발전할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머슴 바울>은 뮤지컬이 가진 대중적 특징과 교회가 그동안 축적해 온 음악과 이야기의 장점들을 모아 새로운 기독교 영화의 형식을 제공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무엇보다도 MZ세대와 어린이를 포함한 가족이 함께 볼 수 있도록 뮤지컬 장르의 장점들을 기독교 신앙과 역사 교육에 접목시켰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을 만하다. 뮤지컬 영화라는 장르는 일반 드라마에 비해서 관객의 이해력과 집중력이 높을 뿐만 아니라 심리적이며 극적인 표현을 노래로 대치할 수 있는 큰 장점이 있어서 다양한 연령층이 포함된 가족영화로 만들기에 매우 적합하다. 예를들어 주인공 김창식이 혹독한 핍박을 받으면서도 하나님을 부인하지 않는 장면에서 그가 모진 고문에도 신앙을 지켰다는 사실을 극으로 표현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매질을 당하는 김창식이나 매를 든 포졸의 때리고 맞는 연기가 필요하고 이에 따른 특수분장도 해야 한다. 매질을 당하면서도 배교의 유혹을 이기는 장면은 내면의 연기가 필요하다. 이것 또한 연기자에게는 부담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 모든 장면을 뮤지컬은 한 곡의 노래로 대체할 수 있다. 노래에 이야기를 담고 내면에서 일어나는 갈등과 신앙을 곡조를 통해 표현할 수 있다. 따라서 뮤지컬의 음악적 요소가 갖는 특징은 서로 다른 평가를 받기 쉽다. 고도의 연출력을 필요로 하는 장면을 너무 쉽게 간다는 점에서는 뮤지컬을 낮게 평가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오락성을 갖춘 표현력 때문에 대중에 대한 친화력을 높이 평가하는 사람도 있다. <머슴 바울>이 지금까지 권혁만 감독이 연출한 영화 가운데서 가장 재미있고 모든 연령층을 수용할 수 있는 대중성이 높은 영화라는 평가를 받을 수 있는 것도 그가 뮤지컬 장르를 택했기 때문이다. 다큐멘터리를 통해서는 역사적 사실감을 높이고 드라마를 통해서는 관객의 감정을 사로잡고 음악을 통해서는 즐거운 몰입에 이르게 하는 영화 <머슴 바울>은 기독교 영화콘텐츠의 지평을 넓혔다는 소리를 듣기에 부족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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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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