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1-10-2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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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서울극장’의 종료와 ‘오징어 게임’의 시작
    영화의 역사를 새로 쓸 시간 서울극장이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지난 8월 31일을 끝으로 한국영화계에 짙은 발자취를 남긴 채 문을 닫았다. 1960, 70년대 영화의 배급과 제작으로 한국영화계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던 합동영화사의 곽정환 회장은 종로3가에 있던 재개봉관 세기극장을 인수하여 새롭게 단장한 뒤 1978년 현재의 자리에서 서울극장의 시대를 열었다. 오직 한 개의 상영관만을 갖고 있었던 당시의 극장문화에서 서울극장은 종로3가 교차로를 앞에 두고 단성사와 피카디리와 마주하는 위치에서 한국을 대표하는 극장가를 형성하는 데 일조했다. 서울극장은 기독교 영화계의 발전과도 깊은 관계가 있다. 2011년 제9회 서울국제기독교영화제(현. 서울국제사랑영화제)가 서울극장에서 열린 일을 비롯하여 2019년 ‘모두를 위한 기독교영화제’와 2020년 한국기독교영화제 등 한국 기독교계의 영화인들이 모이고 기독교 영화들을 교회와 대중에게 선보이는 사랑방 기능을 수행해 왔다. 이것은 서울극장을 이끌어 온 곽정환 장로와 그의 부인 고은아 권사의 영화선교에 대한 믿음과 의지의 결과이기도 했다. 비즈니스 마인드가 지배하는 상업영화계에서 돈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기독교 영화를 상영하고 기독교 영화계를 알게 모르게 지원했던 일은 대중문화의 영향을 일찌감치 간파한 덕분이었다. 곽정환 장로는 합동영화사를 설립하여 한국영화사의 중요한 작품들을 만든 제작자로도 유명했지만, 영화배우이자 아내인 고은아 권사와 함께 기독교 전문 영화사인 은아필름을 설립하여 한국 기독교 영화발전에 의미있는 족적을 남기기도 했다. 1994년에 서울극장에서 개봉한 <무거운 새>는 곽정환 감독이 직접 연출한 작품으로 기독교계에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 작품은 위인전 형식의 기존 기독교 영화의 틀을 깨고 재미교포사회를 배경으로 현대적인 감각을 가지고 인생의 위기에 임하는 하나님의 역사를 영상에 담아서 기독교 영화의 새로운 면모를 보였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은아필름의 고은아 권사는 <무거운 새>를 시작으로 10편의 기독교 영화 제작에 대한 신념을 밝혔지만, 교회 성도들은 뜻대로 움직여주질 않았고, 기독교 영화의 부흥과 발전에 대한 소망은 새로운 세대에게로 넘어갔다. 아날로그적인 정서가 물씬 묻어나던 서울극장의 페이드 아웃(fade-out, 영화 장면에서 밝았다가 차츰 어두워져서 사라지는 기법). 그것은 어쩌면 기독교 영화의 변신을 요구하는 신호탄인지도 모른다. 코로나19로 인해 가뜩이나 관객을 잃어버린 영화관의 현실은 넷플릭스와 왓챠, 웨이브 같은 인터넷이 되는 곳이면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개인 관람 시스템으로 영화를 몰아가고 있는 중에 있다. 서울극장이 사라진 한국 기독교 영화계가 새로운 디지털 플랫폼 시스템에서 어떻게 자신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지 기대와 걱정이 뒤섞여 있다. 세계인의 마음을 훔친 ‘오징어 게임’ 지난 9월 17일 공개된 <오징어 게임>은 불과 4일 만에 미국을 비롯해 대륙을 가리지 않고 세계 22개국 넷플릭스에서 시청자 조회 수 1위에 올랐다. 최근 <살아있다>와 <승리호>, <킹덤:아신전> 등의 한국영화가 세계 1위에 오른 적은 있지만 9편에 이르는 한국의 시리즈형 드라마가 미국 시장에서 1위를 기록하기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넷플릭스가 2백억을 투자한 몰입도 높은 드라마 <오징어 게임>은 명불허전(名不虛傳)이란 말의 뜻이 무엇인지도 제대로 보여주고 있다. 영화 <남한산성>과 <수상한 그녀>, <도가니> 등을 연출한 황동혁 감독의 재능은 이정재와 박해수, 정호연 등 연기력을 검증받은 유명 배우들의 캐릭터를 잘 살려낼 뿐만 아니라 인간의 가치와 사회 문제를 일깨우는 의미있는 결과물을 만들어 냈다. 특히 한국인 감독과 배우가 참여하고 한국의 문화가 두텁게 입혀진 드라마임에도 불구하고 세계의 넷플릭스 가입자들이 열광할 만한 보편적 주제를 제시함으로써 한류문화가 어떻게 세계인의 눈높이에 다가갈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즉 <오징어 게임>이 단지 한국인들의 호응만을 기대한 것이라면 넷플릭스는 결단코 2백억을 쏟아붓지는 않았을 것이란 뜻이다. <오징어 게임>은 빚에 허덕이며 절박한 상황에 처한 456명의 사람들이 최종 우승자 한 명에게 총상금 456억을 몰아주는 데스 게임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마지막까지 생존한 사람은 막대한 우승 상금을 가져갈 수 있지만, 나머지 455명은 목숨을 잃게 된다. 이 드라마에 대한 찬사와 비난은 한 명을 제외한 참가자 모두의 죽음이 전제되었다는 데 집중되어 있다. 게임 참가자들이 경험하는 6가지 게임의 성격은 개인의 독립적인 능력에 따라 생존이 결정되는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와 ‘설탕 뽑기’도 있지만, 상대의 희생이 있어야 하거나 상대를 희생시킴으로써 살아남아야 하는 ‘줄다리기’나 ‘구슬치기’ 같은 게임도 있다. <오징어 게임>에 대한 찬사는 기성세대가 어린 시절 골목에서 놀았을 법한 천진난만한 놀이가 목숨이 달려있는 잔혹한 게임으로 변할 때 일어나는 감정의 혼란으로부터 시작된다. 놀이동산으로 사용하면 딱 좋을 것 같은 그라운드는 피로 물들고 친분과 인간애로 돈독해진 관계는 하루아침에 피를 보는 사이로 전락하고 만다. 극한의 상황에 내몰릴 때 나타나는 인간의 본능과 욕망의 끝자락을 지켜볼 수 있는 점은 이 드라마가 문화를 초월하여 보편성을 갖게 만든 출발점이기도 하다. 문제는 명확했지만 정답은? 이 드라마가 물질문명을 살아가는 시청자들에게 던지는 질문은 한가지다. 목숨을 잃을 가능성이 있지만, 인생을 한방에 역전시킬 수 있을 만큼 엄청난 돈을 가질 기회가 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이 드라마는 자본주의 시대에 맞는 매우 현실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 현대인들이 얼마나 돈의 유혹에 취약한지를 <오징어 게임>은 참가자의 자유의지와 민주적인 절차를 통해 설명하고 있다. 즉 <오징어 게임>이 범죄드라마로 읽혀지지 않는 것은 게임이라는 형식을 빌려 쓰고 있을 뿐만 아니라 게임 참가자들의 자발적 동의로 진행되는 자유롭고 민주적인 진행방식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참가자 절반이 찬성하면 얼마든지 게임을 중단한다는 나름대로 계약도 맺고 있다. 드라마는 참가자들의 불안과 불만이 터져 나오면 숙소로 사용하는 체육관 천장에 달려있는 커다란 돼지저금통에 가득찬 5만원권 지폐 뭉치들을 보여주며 이러한 멘트를 스피커를 통해 흘려보낸다. “우리는 당신들에게 단 한 번도 강요한 적이 없다. 당신들은 모두 스스로의 의지와 선택으로 이곳에 왔다.” 사기꾼들이 피해자들에게 늘 하는 말이긴 하지만 이 드라마에서는 인간의 욕망이 죽음의 위협에도 멈추지 않음을 보여준다. 왜냐하면 게임의 참가자들은 드라마 초반부에 살상의 현장을 목격한 후 게임을 중단하고 세상으로 복귀한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돈에 쪼들리며 사는 세상이 더 지옥 같다는 말을 뒤로하고 대부분의 참가자들이 다시 게임 현장으로 돌아오는 모습은 이 드라마의 주제 가운데 하나인 현대인의 돈에 대한 충실한 욕망을 드러낸다. 생존을 위한 서바이벌 게임이지만 우승자에게 거액의 상금이 배당되는 ‘오징어 게임’의 규칙이란 돈과 생명이 서로 맞바꿀 수 있을 만큼 균등한 교환가치를 지니는 자본주의 사회의 실상을 대변하고 있는 것이다. <오징어 게임>은 기독교 가치관으로 들여다 볼 때 심각한 오류를 드러낸다. 첫째는 재미를 추구하는 목적으로 설정된 이 게임에서 과연 타인의 죽음과 죽음 앞에서 일어나는 타인의 욕망을 지켜보는 재미가 과연 인생을 만족시켜주는가에 대한 성찰의 부족이다. ‘오징어 게임’의 주최자이자 001번을 받은 첫 번째 참가자이기도 한 노인 오일남(오영수)은 죽음을 맞이하면서 ‘오징어 게임’의 생존자가 된 성기훈(이정재)에게 이 잔혹한 살상게임을 하게 된 이유를 밝혔다. 즉 돈에 대한 욕망을 쫓는 사람들이 죽고 죽이는 모습을 지켜보는 데서 오는 즐거움, 그리고 더 나아가서 참여하는 데서 오는 재미를 느끼기 위함이라고. 둘째는 ‘오징어 게임’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온전한 자유에 대한 해답을 영화는 제시하지 못하는 점이다. 게임의 실무 책임자인 프론트맨(이병헌)은 이전 게임의 우승자로서 게임의 모순성을 직접 체험한 사람이지만 오히려 게임의 진행자로 남아 있다. 주인공 성기훈은 그 많은 돈은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한번 게임 참가를 독려하는 전화를 뿌리치지 못한다. 결국 돈이 아니면 재미를 쫓는 인생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못하는 한계를 보여준다. 재미를 인생의 가치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성경은 역사상 가장 럭셔리한 삶을 살았던 솔로몬왕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한다.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1:2) 넷플릭스와 기독교영화 인터넷으로 각종 영상물을 즐길 수 있는 넷플릭스(Netflix)는 관객이 사라진 코로나19의 세상에서 영화의 새로운 보금자리로 자리매김을 하는 중이다. 극장 상영을 하지 않고 넷플릭스용으로 제작된 영화들에 대해서 과연 진정한 영화인지에 의문을 표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현재의 추세는 일반 영화와 넷플릭스용 영화 사이에 차별을 두지 않는 분위기가 대세다. 작품의 질이 떨이진다고 보기 보다는 오직 넷플릭스에서만 볼 수 있도록 제한을 두는 의미가 영화가 역사에서 중요하게 생각한 창작과 관람의 자유에 대한 제한을 두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즉 넷플릭스의 입맛에 맛는 영화들이 제작되어 넷플릭스에서만 볼 수 있을 때 과연 영화의 생태계가 온전해질 수 있는지 의문을 갖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코로나19의 상황은 오히려 넷플릭스와 같은 새로운 영화관람의 플랫폼이 영화인들에게는 구원자처럼 다가서고 있어서 넷플릭스의 영화를 기존의 영화계가 거부하기는 힘들게 되었다. 2021년 제26회 부산국제영화제만 하더라도 넷플릭스용으로 제작된 영화들 가운데 <마이 네임>, <지옥>, <승리호>, <낙원의 밤> 등 4편의 한국영화를 포함한 세계적인 거장의 작품들까지 총 7편의 영화가 상영된다. 국제영화제에서 볼 수 있는 넷플릭스 영화란 이제 영화는 플랫폼에 상관없이 관객을 만나고 관객의 선택을 받는 일이 중요해지는 수요자 중심의 영화로 변모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넷플릭스에서 기독교 영화를 볼 수 있을까? 물론이다. 알렉스 켄드릭 감독의 순전한 기독교 영화 <오버커머>(Overcomer, 2019)는 극장 대신 넷플릭스를 선택했다. 단 일반 극장이나 넷플릭스 모두 수요가 있어야 공급이 따른다는 시장경제의 원리에 충실하다는 사실은 반드시 알아 두어야 한다. 기독교 영화를 보고 싶은 관객들이 줄을 서기 시작한다면 넷플릭스는 <오징어 게임> 보다 훨씬 많은 돈을 기독교 영화 제작에 투자할 것이다. 사실 <오징어 게임>에 투자된 200억원은 할리우드에서 납품하는 단가의 10분의 1에 불과하다. 9편에 이르는 시리즈물임을 생각할 때 편단 겨우 20억원이 조금 넘는 금액에 불과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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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0-01
  • [영화]‘모가디슈’의 한국인을 말하다
    류승완 감독이 그린 남북 갈등의 현대사 류승완 감독이 <베를린>(2015)에 이어 남북 간의 갈등을 역사 속 사건을 통해 새롭게 조명한 영화를 만들었다. 영화 <베를린>이 남북 첩보원들의 충돌과 인간애를 액션을 통해 그려냈다면, 최신작 <모가디슈>는 남북갈등은 시대적 배경으로 전개시켜 놓은 채 소말리아 반군의 혁명 속에서 함께 탈출하기 위해 함께 고군분투하는 남북외교관의 모습을 다루었다. 즉 <베를린>에서는 남과 북이 서로에게 총을 겨누는 적대적 관계로 등장한다면 이번에는 외부의 총을 피해 협력해야 하는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모가디슈>에서 발견하는 한민족의 상황은 한마디로 웃프다(겉으로는 웃기지만 속으로는 슬픈 처지라는 신조어). 동서독을 나누던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지 얼마 안 된 시점에서 벌어진 일을 다루고 있어서 남북은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가 되어버렸을 때의 상황을 읽을 수 있다. 1991년 남과 북은 유엔가입을 앞두고 아프리카 국가들의 표를 얻기 위해서 치열한 외교전을 펼쳤다. 유엔 회의장에서는 잘살든 못살든 한 국가당 한 표의 투표권이 주어지는 까닭에 아프리카 국가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일이 시급했다. 소말리아주재 한국 대사관의 한신성(김윤석) 대사는 안기부 출신의 정보 요원 강대진 참사관(조인성)이 가져온 선물 보따리를 들고 소말리아 대통령을 만나러 가는 길에 무장강도를 고용한 북한 대사관의 방해 작전에 피해를 받고 만다. 강대진은 이에 대한 보복이라도 하듯 북한의 총기가 소말리아 반군의 손에 들어간다는 언론 플레이를 벌여 어떻게든 소말리아 정부와 북한 간의 관계를 떨어뜨려 놓으려 한다. 이런 상황 속에서 반군은 수도 모가디슈에 진입하게 되고 남북대사관 직원과 그 가족들은 수도를 탈출해야 하는 위기에 직면하게 되는 것이다. 류승완 감독은 ‘지명(地名)’을 통해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식을 취해왔다. 이전 작품의 도시 베를린은 동서독 분단을 상징하는 도시여서 남북 정보원들의 생사를 넘나든 작전이 전개되는 상황은 충분히 관객을 납득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베를린은 이제 분단이 아닌 통일을 상징하는 도시가 되었다. 그 누구도 합칠 수 없을 만큼 골이 깊어진 이념과 경제적 차이를 극복하고 한순간에 무너진 베를린 장벽은 남북분단의 상황에서 왜 우리만 과거 냉전 시대의 대결 구도를 벗어나지 못한 채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생각을 일으켰다. 이제 류승완 감독은 ‘모가디슈’를 들고 나왔다. 우리에게 소말리아는 국제 수송선들 납치하여 몸값을 받는 ‘소말리아 해적’으로 알려졌을 뿐이다. 영화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리들리 스콧 감독의 <블랙 호크 다운, Black Hawk Down, 2001>을 떠올릴 수도 있을 것이다. 1993년 소말리아에 파견된 유엔평화유지군으로서의 미군 특수부대와 유엔의 구호식량을 착취하는 소말리아 민병대와의 시가전이 압권인 영화였다. 그런데 소말리아와 모가디슈는 이게 전부였다. 부정과 혼돈의 도시 소말리아의 모가디슈. 그 속의 남북은 부조리한 상황 가운데서 살기위해 함께 탈출을 감행한다는 점에서 모가디슈는 통일 이전에 개별적 생존을 상징하는 도시로 남게 될 전망이다. 한국의 영화 관객들은 이제 낯선 소말리아에 대한 또 하나의 기억을 간직하게 되었다. 모가디슈에서 드러난 한국인의 민족성 영화는 평소 인식하지 못했던 인간 무의식의 통로 역할을 한다. 특히 사람들이 주목하고 인기 있는 영화들은 그 사회 구성원들의 집단 무의식(Collective Unconscious)을 보여준다. 칼 융(Carl G. Jung)이 언급한 집단 무의식은 개인이 갖는 무의식과는 달리 사회 구성원들이 역사와 전통 그리고 문화 가운데 갖게 되는 무의식으로 보통은 신화나 설화 그리고 전래동화를 통해 드러난다. 특별히 생각하지 않아도 그 문화 속에 사는 사람들의 삶 속에서 은연중 나타나는 것이 있다면 집단 무의식의 영향이라 볼 수 있다. 현대 사회에 적용하자면 집단 무의식은 대중성을 통해 나타난다. 한국의 오랫동안 사랑받는 상업영화나 시간을 뛰어넘어 인기 있는 가요 안에는 한국인의 집단 무의식이 들어있을 가능성이 높다. <모가디슈>에는 세 가지의 한국인의 집단 무의식으로 해석될 수 있는 민족성이 내포되어 있다. 첫째는 경쟁(競爭)의 무의식이다. 그 먼 아프리카에서조차 남과 북은 갈라져서 서로에 대한 비방과 투쟁을 멈추지 않는다. 말이 좋아서 외교전이지 실상은 거짓과 술수 그리고 폭력이 난무한다. 그런데 이 같은 갈등은 소말리아에 주재하는 남북외교관들이 아프리카에까지 오게 하는 원동력이며 그들은 경쟁 가운데서 자신의 입지를 넓혀가는 성과를 거둔다. 삼국시대에 민족 안에서 분열했던 신라와 고구려 백제의 모습으로부터 조선시대의 당파싸움과 현대 사회에서 여야로 나누어져 치열하게 싸우고 경쟁하는 모습은 때로는 국민들을 절망시키고 위기로 몰아가기도 하지만 이는 에너지를 고양시키고 적절한 안내를 통해 성장의 밑거름이 되기도 한다. 우리는 일제강점기를 경험했고 미국의 도움을 받아 살아온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지금은 이 국가들과 경쟁하고 있지 않은가! 둘째는 동정(同情)의 무의식이다. 어려운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돕는 동정은 인간의 본능 같지만 그렇지 않다. 아무리 미워하고 못된 사람이라도 잘못되고 위기에 빠졌을 때 모르는 척 넘어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그런데 한국인들로서는 모른 척 하기가 쉽지 않다. 특히 도와달라고 사정하는데 이를 어찌 무시할 수 있냐는 생각이 한국인들의 마음에는 있는 듯하다. 북한 대사관이 소말리아 반군에 의해 피습당하고, 믿었던 중국대사관마저 폭도들에 의해 강탈당하는 모습을 보며 북한의 림용수 대사(허준호)가 택한 곳은 한국 대사관이었다. 총알이 빗발치고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에서 림용수 대사는 한국 대사관의 문을 두드리며 도움을 요청한다. 한국 대사관 안에서는 고민이 흐르고 마침내 문을 열어준다. 이들을 망명으로 보고하여 실적을 올리려는 외교적 술수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북한 대사관 직원들을 맞이하는 한국 대사관 안에는 난장판 속에서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는 것이 옳다는 기류가 흐른다. 셋째는 문기(文氣)의 무의식이다. 책을 좋아하고 배움을 가치 있게 여기는 무의식이 한국인에게 있다. 남북의 외교관과 가족들은 승용차에 나눠 타고 이탈리아 대사관으로 피신하게 된다. 아마도 이 영화에서 류승완 감독이 가장 심혈을 기울여 찍은 액션 장면이 아닐 수 없다. 도로마다 반군이 장악한 상황에서 총알이 빗발치듯 쏟아지는데 이들은 어떻게 탈출에 성공할 수 있었을까? 임용수 북한 대사는 한국 대사관에 있던 책들을 모아 승용차의 외부에 붙여서 방호벽을 만든다. 끈과 테이프로 책들을 승용차 위와 겉면에 부착시켜서 총알이 뚫고 오지 못하도록 일종의 방탄복 역할을 하게 함을 볼 수 있다. 책으로 총을 막는다! ‘펜이 칼보다 강하다’라는 서양 속담이 있었다면 앞으로는 ‘책으로 총을 막는다’라는 말도 유행시켜야 할 듯하다. 관객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장면이지만 이것은 문기(文氣)에 대한 한국인의 무의식을 상징화시킨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세계에서 금속활자를 가장 먼저 만든 민족일 뿐만 아니라 선교사가 들어오기 전에 한글로 번역된 성경이 먼저 들어온 선교역사를 우리는 갖고 있지 아니한가? 지금도 대한민국은 세계에서 두 번째로 성경을 많이 출판하는 나라다. 모가디슈의 그리스도인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한신성(김윤석) 대사의 부인 김명희(김소진)의 이미지에 깊은 인상을 받을 수밖에 없다. 김명희는 매우 신실한, 교회 밖의 사람들이 본다면 극성스러울 정도로 기독교 신앙을 가진 인물로 묘사되고 있다. 대사 부인 역할을 맡은 김소진 배우는 <마약왕>에서도 범죄의 길에 빠진 남편(송강호)을 구하고 가정을 지키는 그리스도인 현모양처의 역할로 주목을 받았었다. 대사관 밖의 어려움을 감지한 김명희는 여직원과 직원 부인을 모아 기도회를 연다. 교회도 다니지 않고 심지어 불교 신자이기도 하지만 이들은 청산유수로 주기도문을 외울 줄도 안다. 기독교 영화가 아닌 일반 상업영화 속에서 기독교인이 보여준 신앙의 모습은 대개 긴박하고 무거운 상황을 잠시 쉬어가게 만드는 코믹한 설정으로 자리 잡는 경우가 적지 않은데 이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이후에 나타난 대사 부인의 행실은 감동적이며 긍정적인 그리스도인의 이미지를 갖고 있다. 대사부인 김명희는 저만 살려고 애쓰며 이기적인 존재가 되기 쉬운 전장의 상황에서 부상당한 현지인 운전사를 치료해주고 대사관을 가득 채운 북한 대사관 가족들에게 아낌없이 식사를 대접하는 면모를 보인다. 남북의 위기 속에서 화합하는 모습을 보여줘서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뻔히 예상할 수 있는 장면을 거부했던 류승완 감독도 이 장면만큼은 뺄 수 없었다. 바로 남북이 함께 식사하는 자리에서 절인 깻잎을 집기 쉽도록 젓가락으로 잡아주는 장면이다. 이 주인공은 소말리아의 그리스도인 김명희였다. 모가디슈의 남북이 마음을 여는 순간이다. 이것이 실화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류승완 감독의 머릿속에는 남북이 위기 속에서 마음을 열고 함께할 수 있는 자격이 되는 사람을 찾지 않을 수 없었고, 그 역할은 그리스도인인 대사부인에게로 돌아갔다. 이것은 세상이 생각하고 수용할 수 있는, 혹은 마땅히 그렇다고 여기는 그리스도인의 이미지이기도 하다. 상업영화 속에 언뜻언뜻 비치는 그리스도인의 이미지는 그리스도인에 대한 세상의 생각과 판단을 담고 있다. 영화는 세밀한 작업이며 의미 없는 장면이란 영화 안에 들어갈 수가 없다. 또한 반대로 영화 속 그리스도인의 이미지는 관객에게 영향을 줄 수도 있다. 비그리스도인들이 성경을 읽고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을 잘 알기 때문에 부정적 입장을 취하는 것이 아니다. 언뜻 나타나는 이미지, 특히 매스미디어를 통해 드러나는 그리스도인의 이미지를 통해 자신의 생각을 새롭게 하기도 하고 기존의 생각을 강화시켜 나가기도 한다. 현대를 사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이미지가 중요한 시대에 살고 있음을 새삼 깨닫게 하는 영화가 아닐 수 없다.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오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벧전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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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8-13
  • [영화]한국영화가 사회문제를 다루는 두 가지 방법
    영화, 선진국 대한민국에서 일어나는 일을 말하다 지난 7월 2일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가 한국의 지위를 개발도상국 그룹에서 선진국 그룹으로 변경했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 전 세계 경제가 어려운 상황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은 경제 규모로는 세계 10위에 올랐고, 1인당 국내총생산(GDP)에서도 이탈리아를 추월하는 등 선진국으로서의 면모가 확인된 까닭에 이번 발표는 예상된 일이었다. 특히 의미가 있는 것은 대한민국이 개발도상국 범주를 벗어나 선진국에 진입한 최초의 국가라고 유엔이 공인한 일이다. 그렇다면 한국영화 속에 나타난 한국 사회는 과연 선진국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을까? 증권이나 금융사기와 같은 선진국형 범죄가 소재로 등장하는 현실은 분명 경제력을 갖춘 한국의 현주소를 보여주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해결방법이 극히 사적인 고통과 이에 따른 복수로 끝을 맺을 뿐 제도적인 개선에 이르지 못한다면 무늬만 선진국이라는 오명을 벗어나기 어렵다. 특히 장애인과 같은 사회적 약자를 대하는 현실을 다룬 영화라면 영화를 보는 내내 얼굴이 화끈거림을 감출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점에서 과연 우리는 선진국인지를 자문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김창주 감독의 영화 <발신제한>과 김정인 감독의 <학교 가는 길>은 우리 사회에 일어난 갈등이 선진국형인지 아니면 아직도 개도국 수준에 머물고 있는지를 확인시켜주고 있다. <발신제한>은 드라마로 제작된 상업영화인 반면 <학교 가는 길>은 다큐멘터리다. 드라마는 스릴러나 액션 등과 같은 대중이 선호하는 방법을 동원하여 사회문제를 부각시키는 장점이 있다. 과거의 시간 속에 잊혔던 문제를 새롭게 인식시키는데 매우 유용한 방식이다. 그에 비해서 다큐멘터리는 소재주의를 선택한다. 즉 원래부터 우리가 알고 있는 사건이나 문제를 깊이 파고들며 연출자가 제시하는 새로운 이해를 촉구받는 형식이다. 은행의 불완전 판매에 대한 복수 드라마 타입의 스릴러 장르를 표방한 영화 <발신제한>은 자본주의의 꽃인 금융업의 비리를 지적하고 그로 인해 희생당한 사람의 존재를 상기시킨다. 돈 많은 고객을 관리하는 PB(프라이빗 뱅크) 센터장 성규(조우진)는 두 아이를 자신의 고급 SUV에 태우고 출근하는 길에 테러범(지창욱)으로부터 걸려온 발신 번호 제한표시의 전화 한 통을 받는다. 거액의 돈을 마련하지 않으면 자동차 시트 밑에 설치한 사제폭탄을 폭파시키겠다는 협박 전화는 성규를 대혼란에 빠뜨리고 그는 어떻게든 아이들을 살려야겠다는 생각에 VIP 고객에게 전화를 걸어 그들의 돈을 유용하려 한다. 전후 사정을 알지 못하는 경찰은 성규를 테러범으로 오인하여 그를 뒤쫓기 시작하고 지뢰 위에 걸터앉은 모양새의 성규는 절체절명의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게 된다. <발신제한>은 2016년에 국내에서 개봉한 스페인 영화 <레트리뷰션: 응징의 날>을 각색한 작품이다. 자동차에 갇혀 있는 상태에서 다양한 감정을 표현해야 하는 만큼 연기력이 출중한 배우가 필요하다는 점에서 주연을 맡은 조우진 배우는 합격점을 받고도 남음이 있다. 특별히 이 영화를 <더 테러 라이브>와 <끝까지 간다> 등 작품성 있는 스릴러 영화들을 편집한 편집 감독 출신의 김창주 감독이 연출했다는 점은 이 영화의 전개가 매우 빠르고 간결하여 요즘 젊은층의 성향에도 잘 맞을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외국영화를 각색했다지만 범행의 이유가 은행의 잘못된 투자로 인해 손실을 입고 가족이 파괴된 상처 입은 사람들의 복수란 점까지도 동일한 것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그런데 한국영화를 본 관객들은 은행의 불완전 판매로 인해 큰 손실을 입은 범인의 복수극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 한마디로 개연성 있는 이야기로 보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2011년 부산저축은행 사태는 1조 원이 넘는 피해액에 3만8천 명에 이르는 서민 피해자들을 낳았지만, 아직도 보상은 요원한 상태다. 금융기관들이 이익에만 몰두한 채 고위험 금융상품을 제대로 안내 없이 판매하는 일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발신제한>은 금융계에 윤리적 경고장을 날린 셈이다. 지역이기주의를 극복한 어머니들의 용기 지난 5월 5일, 어린이날에 개봉한 <학교 가는 길>은 발달장애인을 위한 특수학교인 ‘서진학교’ 개설을 둘러싼 지역사회와 장애아 학부모들과의 갈등을 그린 다큐멘터리 영화다. 특수학교 설립문제로 학부모와 지역사회가 큰 갈등을 겪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김정인 감독은 2017년 9월 5일에 진행된 ‘특수학교 설립을 위한 2차 주민토론회’부터 카메라를 들고 직접 당사자들을 인터뷰하며 장애인 가정이 겪는 현실을 모으기 시작했다. 슬프고 어두운 모습만 있을 것이라는 예측은 빗나갔다. 웃음과 기쁨 그리고 자녀와의 갈등이 있는 모습은 여느 비장애인 가정과 다를 게 없었다. 비장애인들이 장애인들에 대해 가진 편견의 가장 중요한 원인은 함께 어울려 살지 않기 때문이란 사실을 영화는 가르쳐 주고 있다. <학교 가는 길>에는 국민을 안타깝게 만들었던 어머니들이 학교를 짓게 해달라고 지역주민 앞에서 무릎 꿇고 사정하는 바로 그 장면도 등장한다. “집에서 2시간 전부터 학교를 가려고 나와야 합니다. 여러분들도 부모이시고 저도 부모입니다. 단지 장애가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아이들의 학교를 여기에 지을 수 없다고 하시면... 그럼 어떻게 할까요? 여러분들이 욕을 하시면 듣겠습니다. 여러분들이 모욕을 주셔도 저희 괜찮습니다. 여러분들이 지나가다가 때리셔도 맞겠습니다. 그런데 학교는 절대로 포기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장애아들도 교육받을 권리가 있지 않습니까?” 지역사회와의 갈등을 줄이기 위해 서진학교 설립을 반대하는 지역주민들에 대해서 몸을 낮추고 이해하려는 어머니들의 언행은 존경스러울 따름이다. ‘특수학교를 반대하는 것은 아니나 우리 지역에는 안된다’ 혹은 ‘특수학교가 들어서면 집값이 떨어진다’는 몇몇 주민들의 발언에 분노하는 사람은 관객들뿐이다. 아이들을 위해 학교를 짓는 일이라면 모든 것을 감내할 준비가 되어 있는 어머니들은 역시 위대했다. 특수학교 설립보다는 지역 국회의원의 공약사항이면서 생활에 편리한 의료시설 건립을 찬성하는 지역주민들의 의견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지 않은 전형적인 지역이기주의가 등장했다는 판단은 피할 수 없었다. 특수학교 설립을 반대하는 모습 이란 이름하여 님비(NIMBY·Not In My BackYard)현상에 다름 아니었다. 님비는 ‘내 뒷마당에는 안 된다’란 뜻으로 사회에서 필요로 한 시설이나 정책을 집행할 때라도 ‘내가 사는 지역에 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화장장이나 쓰레기 매립장에서부터 핵폐기물 처리장에 이르기까지 혐오나 기피시설로 인정되는 한 자신의 지역사회에서의 건립을 반대하는 운동에 대해 붙여진 이름이다. 그러나 지역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라면 지역이기주의에 편승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한국에서 님비현상이 지역이기주의로 비판을 받는 결정적 이유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가 무시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정신적으로나 신체적으로 혹은 경제적으로 외부의 도움과 특별한 배려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사회적 약자들 역시 존엄한 인간이며 사회의 구성원으로 누려야 할 권리가 있는 법이다. 따라서 적극적으로 반대 운동을 벌일 만큼 사회적 약자에 대한 편견이 도를 넘어 지역이기주의로 확산될 때 우리는 님비현상의 비인간적 행태를 문제 삼을 수 있는 것이다. 한국교회의 숙제 보건사회연구원의 2020 장애인 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2020년 3월 말 기준 등록장애인은 2,622,950명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2017년에 비해 약 4만2천 명이 늘어나는 등 지속적인 증가 추세를 보이고 있다. 그나마 장애인이 느끼는 차별의 시선은 약간 줄어든 것이 다행스럽다. 장애인 실태조사에서 함께 시행한 설문조사 가운데 장애인 차별에 대하여 ‘없다’고 응답한 비율은 36.5%로 2017년 20.1%, 2014년 27.4%에 비해 증가함으로써 우리 사회의 장애인 차별이 점차 줄어들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아직도 장애인을 차별하는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월등히 많은 현실을 피해가지는 못했다. 님비현상을 극복하며 사회의 약자를 돌보는 일은 한국교회가 감당해야할 시대적 과제이기도 하다. 세속화된 사회에서 지역사회와 소통을 이루는 가운데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될 수도 있다. 구한말 가난한 나라 조선에 발을 디딘 선교사들은 사회에서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았던 장애인과 소외받은 사람들에 대한 관심과 돌봄을 시작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캐나다의 의료선교사 로제타 홀(Rosetta Sherwood Hall) 선교사는 1894년 시각장애인 학교인 평양여맹학교를 세움으로써 국내 특수교육의 첫 문을 열었다. 한국교회와 기독교인들이 존경받을 수 있었던 것은 세상이 편견을 갖고 하지 못했던 사회적 약자를 품었기 때문이었다. ‘소자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마25:40)는 예수님 말씀은 님비현상에 대해 침묵해서는 안 되는 교회의 사회적 사명을 뜻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왕 사랑을 실천하고자 한다면 지혜롭게 해야 할 일이다. ‘다툼이나 허영’(빌2:3)이 아닌 지역사회도 함께 품으며 겸손한 마음으로 이타적 존재가 누리는 기쁨을 제공하는 것이 마땅하다. 영화는 사회를 고칠 수 있을까? 문제를 알면 해결 방법도 찾을 수 있다. 영화가 한국사회의 문제를 제기한다면 그 답은 영화를 보는 관객의 마음에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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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7-09
  • [영화] 올림픽이 기억하는 신앙의 영웅
    올림픽이 열리기 전에 꼭 봐야 하는 영화 도쿄올림픽이 코 앞으로 다가왔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 개최가 불투명한 가운데서도 올림픽을 준비하는 선수들의 심장은 뜨겁게 뛰고 있다. 만일 그 선수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영화 <불의 전차>는 자신의 심장이 요동치는 분명히 이유를 발견하게 해줄 것이다. 하나님이 주시는 힘으로 뛰고 있다는 사실에서 금메달보다 더 높고 위대한 목표가 눈 앞에 펼쳐지는 광경을 볼 수 있으리라. 영국이 낳은 위대한 육상선수 에릭 리델(Eric H. Liddell, 1902-1945)과 해롤드 아브라함(Harold Abrahams, 1899-1978)의 멋진 스포츠맨십이 빛나는 영화 <불의 전차>(Chariot of Fire)는 제작된 지 40년을 맞이하면서 스포츠영화로써 뿐만 아니라 기독교 영화로도 고전의 반열에 든 작품이다. 1981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을 비롯한 각본상, 의상상 그리고 음악상 등 무려 4개 부문을 획득했을 때 미국의 그리스도인들은 영화 <벤허>가 1960년 아카데미상 11개 부문을 휩쓴 이후로 가장 대중적인 기독교 영화가 탄생했다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었다. 그러나 한국의 극장가는 할리우드에서 울려 퍼진 환호성을 35년 동안이나 외면했다. 한국전쟁 이후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은 영화 가운데 한국의 극장에서 걸리지 않은 유일한 영화라는 꼬리표도 따라붙었다. <불의 전차>가 한국의 극장에서 공식적으로 개봉하기까지는 세기가 바뀐 2016년에서야 가능했다. 필름 원본을 디지털 리마스터링 작업을 거쳐서 디지털 영사 시스템에 맞춘 작업을 끝낸 직후였다. 그리고 지난해 가을 코로나로 인해 극장가에 신작들의 상영이 연기된 상황에서 관객의 호응도가 좋았던 영화들을 모아서 재상영하는 행사 가운데 다시 한번 극장에 걸릴 수 있었다. 이 위대한 명작을 극장에서 볼 수 없었던 것도 그리고 이제야 극장에서 만날 수 있었던 것도 그리스도인들 때문이었다. 기독교 영화를 외면했던 그리스도인들이 이제야 눈을 떠서 이 영화의 가치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불의 전차>는 기독교가 외면받는 이 시대에 더욱 기독교의 가치를 일깨워 주는 최고의 명작이다. 1924년 파리올림픽 육상 단거리 금메달리스트인 에릭 리델(이안 찰슨)과 해롤드 아브라함(벤 크로스)의 열정 넘치는 도전을 그린 영화 <불의 전차>가 특별한 이유는 신앙과 예술 그리고 재미라는 기독교 대중영화의 세 요소를 모두 갖췄기 때문이다. 신앙의 가치가 빛나는 영화일수록 예술성도 떨어지고 재미도 없을 것이라는 편견은 빨리 버리는 것이 좋다. 세상에서 가장 품위있는 영화 <불의 전차>는 스포츠맨들의 치열한 경쟁을 내면화시켜 품위 있는 스포츠영화가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었다. 경기에 나서는 선수들 사이에서 일어날 수 있는 시기와 질투 혹은 음모 등은 눈꼽만치도 보이지 않는다. 대신 최선의 가치를 추구하는 주인공의 내면적 갈등과 극적인 결과가 매우 느리게 표현될 뿐이다. 연출은 영국 귀족의 자세처럼 기품이 있어 보인다. 대중들의 호기심을 끌만한 자극적인 장치도 촬영기법도 보이지 않는다. 기교를 부린 점이 있다면 선수들이 달리는 장면에서 느린 동작으로 표현하며 반젤리스의 주제가를 덧입힌 정도다. 지난 2012년 제30회 런던올림픽 개막식에서 사이먼 래틀경이 지휘하는 런던심포니 오케스트라는 영화의 장면과 함께 바로 <불의 전차>의 테마를 연주함으로써 이 영화가 영국의 현대사를 빛낸 사건임을 전세계에 알렸다. 특히 ‘미스터 빈’으로 알려진 영국의 코미디언 로완 앳킨슨이 코믹한 연주와 연기로 참여하는 바람에 <불의 전차>는 더욱 세계인의 머릿속에 잊을 수 없는 올림픽 영화로 남게 되었다. 이 영화의 품위는 명예를 중시하는 영국인의 고전적인 전통이 내용으로도 확인되고 있어서 주목받을 수 있었다. 1919년 영국 캠브리지 대학의 신입생 환영회는 정오를 알리는 12번의 종소리가 멈추기 전까지 캠퍼스를 한 바퀴 도는 달리기 경주로 영화는 시작한다. 이 경기에 참여하고 또한 지켜보는 학생들은 도전과 패기와 열정으로 가득한 젊은이들일 따름이다. 그러나 이들은 단순히 젊다는 의미만을 지닌 학생들이 아니라 순수함과 바른 가치관을 가지고 국가와 세계를 위해 봉사하는 지도자가 될 사람들이란 점에서 세상사는 그리스도인의 역할을 떠올리기에 충분하다. 신입생 환영식에서 캠브리지 대학 학장은 강당 벽면 동판에 새겨진 이 대학 출신으로 1차세계 대전에서 나라를 위해 싸우다 죽은 전사자 명단을 보며 이렇게 회상하고 있다. “약속된 미래를 향해 정열적으로 학문을 탐구하던 모습을 기억합니다. 그들은 한 시대의 꽃이었고 영국의 자랑이었습니다.” 이 영화 속에서 나타난 명예란 한 개인이 자신의 이기적인 욕망을 위해서 살지 않고 자신 보다 높은 뜻을 향해 헌신하고 노력하며 사는 사람의 모습임을 나타낸다. 국가대표 육상선수란 개인의 명예뿐만 아니라 자신이 소속된 집단의 명예를 짊어지는 사람인 것이다. 해롤드 아브라함과 에릭 리델은 모두 영국의 명예를 위해 뛰지만 아울러 이들은 각각 유대인 사회와 스코틀랜드의 기독교도라는 자신이 속한 사회의 명예를 짊어진 사람들인 것이다. 대조적인 두 주인공의 절묘한 성격묘사 스코틀랜드 출신의 선교사인 에릭 리델과 유대인 고리대금업자의 아들인 해롤드 아브라함을 투 톱으로 내세운 이 영화의 캐릭터 설정은 역사적 실화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절묘한 대조를 이룬다. 두 사람이 육상선수로서 시합을 준비하고 경기에 임하는 자세는 완벽하게 다르다. 한마디로 세계관이 다른 까닭이다. 해롤드는 전형적인 유대인적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다. 에릭 리델을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다고 판단한 해롤드는 최고의 실력있는 코치인 무사비니를 찾아가 자신을 훈련시켜줄 것을 부탁한다. 선수가 코치를 선택하는 것은 마치 봉건시대에 여자가 남자에게 먼저 청혼하는 것과 같이 너무 이례적인 일로서 당시로서는 너무도 파격적인 행동이 아닐 수 없었다. 이것은 어떻게든 열심히 노력하는 행위를 통해 자신이 인정받고 최상의 자리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는 유대교의 율법주의의 영향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그러나 리델은 다르다. 그가 심장이 터질 듯 달리는 이유는 오직 한가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일 뿐이다. 중국선교를 위해 육상을 포기하라는 누이의 권유에 대해 리델은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은 중국을 위해서 날 만드셨어요. 그분은 또한 나를 빠르게 달릴 수 있도록 만드셨지요. 난 달릴 때 하나님의 기쁨을 느껴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남보다 잘 뛸 수 있는 달란트를 주신만큼 이 재능을 주님을 위해 사용하겠다는 신념이 그를 최고의 선수로 만들었다는 사실에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리델로부터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선물을 수용하고 사용할 줄 아는 ‘은혜의식’을 발견할 수 있다. 하나님의 은혜를 느끼는 자는 표정도 남다르다. 아브라함은 항상 긴장된 표정으로 나타나는 반면에 리델의 얼굴에는 평안이 넘친다. 원칙있는 신앙생활에 임하는 하나님의 축복 1924년 파리올림픽에 참가한 영국국가대표선수단은 에릭이 주일성수를 이유로 그의 주종목인 100m 경기에 나가지 않기로 하자 심각한 혼란에 빠진다. 영화는 어찌할 바를 모르는 임원들과는 대조적으로 예배에 참석해서 성경을 읽으며 진중한 리델의 모습을 보여준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이사야40:30) 주일에 교회에 가지 않고 축구하던 어린이를 타일렀던 에릭 리델은 말과 행동이 신앙의 원칙에 기반을 둔 참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은근히 가르치고 있다. 리델의 원칙 중심의 신앙생활은 주일성수문제에 대한 논란을 떠나서 관객으로 하여금 하나님 중심의 신앙으로 돌이키게 만드는데 큰 의미가 있다. 에릭은 동료 선수의 제안으로 자신의 주종목이 아닌 400m 경기에 나가 금메달을 목에 걸게 된다. 100m 금메달 후보였던 만큼 400m에 나가 우승한 것을 당연하게 생각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100m와 400m는 뛰는 방법도 전략도 다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신의 주종목도 아닌데 어떻게 우승할 수 있었을까? 에릭 리델은 달랐다. 그가 예사롭이 않다는 사실은 함께 뛰는 다른 선수들의 표정에서 읽을 수 있다. 리델과 함께 경기에 출전하는 옆의 다른 선수들이 리델을 보며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들을 수 있다면 우리는 곧 그가 금메달을 딴 이유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의 속엔 뭔가 있는 것 같아. 자네나 내가 갖지 못한 뭔가 특별한 것 말야.” 그리스도인이라면 주변의 사람들로부터 이런 얘기를 들어야 하지 않을까? 리델은 모든 행동의 기반을 신앙 위에 두었다.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잘 뛸 수 있는 달란트를 주신만큼 이 재능을 주님을 위해 사용하겠다는 신념이 그를 최고의 선수로 만들었고 하나님은 그를 축복하신 것이다. 나는 올림픽이 열리기 전 연례행사처럼 학교에서 선교학을 배우는 학생들을 모아서 <불의 전차>를 보곤 한다. 세상의 금메달보다도 더욱 귀한 주님 주시는 면류관을 향해 열심히 공부하고 신아앙의 훈련을 받는 학생들에게 이 영화를 보는 것만큼 즐거운 교육이 없기 때문이다. 최고의 지성을 겸비한 영국 캠브리지의 학생들이 조국과 학교의 명예를 위해 달리는 모습을 보노라면 심장이 뛰지 않을 수 없다. 중국선교사 에릭 리델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달리는 것을 보노라면 무신론이 지배하는 세속적 사회에서 우리는 은혜와 열정을 가지고 살아가지 않을 수 없다. 자신보다 큰 목표를 향해 달리는 젊은이들은 아름다운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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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6-11
  • [영화] 동성애를 향한 기독교 해법을 담은 영화
    기독교 영화도 스트리밍 서비스 시대 기독교 영화 사역을 하는 ‘필름 포럼’이 배급상영권을 가진 두 편의 수입 영화를 스트리밍 서비스로 내놓았다. 하나는 신림동 주사랑교회 이종락 목사의 베이비 박스 사역을 다룬 <드롭 박스>(Drop Box, 2014)이고, 다른 하나는 과거 동성애로부터 회복된 찬양 가수 데니스 저니건(Dennis Jernigan)의 고백을 담은 영화 <싱 오버 미>(Sing Over Me, 2014)다. 이 두 편의 다큐멘터리 영화는 상영 당시 기독교 언론의 주목을 받았지만 교회 성도들에게 제대로 홍보되지 못한 채 금방 잊혀지고 말았다. 특히 한국 교회가 동성애 반대 운동에 보인 관심과 열심에도 불구하고 동성애자를 향한 하나님의 치유와 사랑의 손길을 보여주는 <싱 오버 미> 같은 화제작을 놓친 것은 너무 안타까운 일이었다. 그동안 이 영화를 볼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교회에서 ‘필름 포럼’에 요청하여 교우들이 함께 보는 출장 상영밖에 없었다. 이 경우 교회 안에서의 단체 관람은 가능하지만 개인적으로 영화를 깊이 감상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 네이버 영화관이나 케이블 TV의 VOD 서비스를 통해 이 영화를 볼 수 있게 되었다. 동성애에 대해 기독교 교리적인 접근이나 설교식의 가르침에 부담을 느끼는 현대인들에게 안성맞춤인 <싱 오버 미>는 동성애는 선천적이며 변화가 불가능하다고 믿고 있는 동성애 옹호론자들의 주장을 완전히 뒤집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현장을 목격할 수 있다는 점에서 동성애에 대한 탁월한 기독교 관점을 감동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문제는 이 영화를 극장에서 본 관객 수가 영화진흥위원회 공식통계로는 불과 1,808명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 영화를 다시 한 번, 그것도 쉽고 편하게 볼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 코로나19로 인해 극장을 찾기보다는 스마트폰이나 노트북 그리고 케이블TV로 영화를 보는 것을 선호하는 현대인들의 성향에 맞게 기독교 영화도 스트리밍 서비스나 VOD 서비스로 상영 플랫폼을 바꿨다. 이것은 언제 어디서든 기독교 영화를 손쉽게 접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는 까닭에 앞으로는 스트리밍 서비스 제공을 목표로 극장 상영이 이루어지는 변화가 기독교 영화계에도 일어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미국에서 외면한 탈동성애 기독교 영화 영화 <싱 오버 미>는 교회 안에서 동성애자로 살아왔던 데니스 저니건의 신앙적 갈등과 예수님의 사랑으로 회복되기까지의 과정을 그린 다큐멘터리 영화다. 마치 무용담처럼 어두운 과거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다가 마지막에 가서 하나님의 은혜에 힘입어 빛나는 행복을 이뤘다는 간증형식의 여느 다큐멘터리 영화와는 다르다. 특히 동성애에 대한 신학적 비판을 쏟아붓기보다는 주인공이 보여주는 진솔한 고백과 눈물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힘입은 기독교인이라면 동성애로부터 돌이킬 수밖에 없음을 깨닫게 한다. 따라서 교회 안에서 미처 커밍아웃하지 못한 채 숨어서 신앙생활하는 동성애 기독교인이거나 혹은 동성애에 대해 세상적 시각을 가진 기독교인이라도 감동받고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 깊은 상처와 혼돈 속에서도 그것을 어루만지는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영화는 유명 찬양사역자의 다큐멘터리답게 그가 부른 찬양을 배경음악 삼아 그의 과거를 비추며 현재의 고백을 담았다. 어린 시절의 사진을 배경으로 진행하는 부모님과의 인터뷰와 그의 절친 척(Chuck King)이 말하는 저니건에 대한 언급 사이사이로 부모와 친구가 몰랐던 저니건의 동성애에 대한 고백이 이어진다. 다섯 살 나이에 공중화장실에서 바지를 내리고 나타난 성인 남자에 대한 경험으로부터 청소년 시절 여자아이 같다는 놀림을 피하려고 여자 친구에게 키스했지만 전혀 이성의 느낌을 받지 못한 이야기들은 일반적인 동성애자들의 과거와 비슷하다. 그러나 저니건은 하나님이 자신을 동성애자로 만드셨으니 난 어쩔 수 없다는 자포자기식의 동성애에 대한 자기합리화에 머물지 않고 끊임없이 갈등하고 변화를 모색해왔다는 점에서 동성애를 숙명으로 알고 사는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이 영화의 강점은 바로 여기에 있다. 지독한 갈등의 상황 가운데서 기독교의 신앙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를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또한 동성애가 유전적 혹은 선천적인 까닭에 동성애에 대한 책임이 인간이 아닌 하나님께 돌리려는 동성애 숙명론자들의 의견이 틀렸음을 보여주기도 한다. 우리가 동성애에 대해 가지는 왜곡된 이해 가운데 하나는 동성애 숙명론이다. 그러나 최근 연구에 따르면 동성애는 후천적이며 사회적 학습에 따른 경향이 강하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왜냐하면 일란성 쌍둥이의 경우 모든 유전자가 동일하기 때문에 만일 동성애가 선천적이라면 일란성 동성애자 쌍둥이는 함께 동성애자여야 하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영화 <싱 오버 미>는 데니스 저니건을 통해 동성애가 어렸을 때 경험했던 왜곡된 성적 경험으로부터 발생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미국 최대의 장로교 교단에서조차 동성애 목사 안수를 인정할 만큼 동성애 문화에 대해 자유로운 미국사회에서 <싱 오버 미>는 극장에서 개봉조차 하지 못한 채 DVD로만 출시되었다. 영화에 대한 각종 통계와 정보를 보여주는 IMDb(Internet Movie Database) 조차 극장 개봉 및 수입에 대한 통계가 전혀 나와 있지 않다. DVD를 통해 이 영화를 본 미국 기독교인들의 의견은 완전히 극과 극이었다. 10점 만점에 10점을 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100점을 쓴 사람도 있었다. 신앙은 물론 성적 취향에 대한 개인의 자유를 옹호하는 동성애 지지자들이 얼마나 부정적인 시각으로 탈동성애자를 바라보는지를 알 수 있다. 세속적이고 동성애 문화가 만연한 미국사회는 이 영화를 외면했다. 이를 역으로 해석하자면 아직까지도 대한민국은 동성애 문화에 지배받지 않으면서도 성경의 진리를 실현시킬 기회가 남아있다는 뜻이 되기도 한다. <싱 오버 미>를 보는데 공개적으로 비판하는 기독교인은 아직 없지 않은가! 동성애에 대한 기독교 변증영화 <싱 오버 미>는 동성애를 자연스러운 성적취향으로 인정하려는 현대사회를 향해 하나님의 분명한 말씀을 전하고 있다. 이것은 <싱 오버 미>가 기독교 동성애자들을 향한 멋진 기독교 변증의 성격을 가졌기 때문이다. 현대의 세속적이며 상대주의적인 문화 속에서 프란시스 쉐퍼는 기독교 문화의 변증학적 성격을 강조한 바 있다. ‘변증학(Apologetics)’이란 일종의 기독교 신앙을 ‘변호’하는 것을 뜻한다. 특히 쉐퍼는 ‘변증학’의 목적을 방어(defense)와 전달(communication)이라고 말한바 있는데, 여기서 방어는 비기독교 혹은 반기독교적 메세지로부터 기독교 신앙을 보호하기 위한 논증적 방어를 뜻한다. 그러나 쉐퍼는 그의 다양한 저술과 강연, 그의 아들이자 다큐멘터리 감독이었던 프랭키 쉐퍼를 통한 영화 제작 활동이 의미하듯이 방어보다 전달에 관심이 많았다. 즉 그는 어떤 특정한 세대가 이해할 수 있는 형식으로 기독교를 전달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던 것이다. 이 때 영화 <싱 오버 미>야 말로 오늘날 영화세대에게 기독교가 동성애자들을 향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관심 그리고 회복을 기대할 수 있음을 전달하는 훌륭한 문화변증의 실천자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싱 오버 미>가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기독교 동성애자들은 교회 누군가의 도움을 기대하고 산다는 점이다. 저니건 역시 성인이 된 이후 동성애자로서 살아가는 일에 대한 죄의식에 휩싸이는 한편으로 동성을 갈구하는 육체의 정욕 사이에서 방황하는 자신을 도와줄 누군가를 찾았음을 고백한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갈5:17)는 성경말씀은 그를 두고 하는 말이다. 그러나 그가 찾아간 교회의 도움은 없었고 오히려 교회 목회자는 자신을 탐하는 또 다른 동성애자였음을 알고 기겁할 수밖에 없는 과거 상황묘사에 관객들은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다. 그가 동성애에 대한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 찾아간 교회는 딱 두 부류로 나누어졌다. 동성애에 대한 신랄한 비판만으로 가득 차 있거나 아니면 그와 동성애를 나누기 원하는 목회자가 있었던 교회였다. 이때 크리스천 동성애자들이 취할 수 있는 자세란 교회에서는 이성애자인 척하며 입을 다물고 밖에서는 육체의 탐욕에 스스로를 맡겨버리는 일이다. 교회는 고민 끝에 예배당을 찾는 동성애자들을 맞을 준비가 되어있어야 함을 의미하는 대목이다. 둘째, 예수님이야말로 동성애에 대한 갈등과 상처를 회복시키고 치유하시는 답이 된다는 사실을 영화는 보여준다. 어쩌면 이 영화 가운데 가장 명언이라 할 수 있는 대사가 저니건의 절친 척으로부터 나온다. 동성애로 살아온 친구의 고백을 들은 후 척은 매우 감동적인 말을 한다.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방법은 잘 모르겠지만 답은 안다. 답은 예수님이다. 내가 너와 함께 해줄게.” 시간은 걸릴 수 있지만 그러나 예수님이 답이다.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님의 사랑(롬5:8)이라면 가능하다. 어쩌면 당연하고 기독교의 평범한 얘기처럼 들리지만 이보다 더 정확한 해답을 우리는 알지 못한다. 그리고 이것을 데니스 저니건은 자신의 삶과 그가 만든 찬양곡을 통해 증거하고 있다. ‘약할 때 강함 되시네/ 나의 보배가 되신 주/ 주 나의 모든 것/ 주 안에 있는 보물을/ 나는 포기할 수 없네/ 주 나의 모든 것/ 예수 어린 양 존귀한 이름/ 예수 어린 양 존귀한 이름’ 우리의 귀에 익숙한 찬양곡 ‘약할 때 강함 되시네’는 언제 들어도 기독교인의 마음에 감동을 준다. 예수를 보고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말한(요1:36) 세례 요한의 고백을 바탕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신앙고백이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울려 나옴을 느낄 수 있다. 만일 <싱 오버 미>를 보고 난 후라면 이 찬양이 주는 감동은 더욱 클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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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5-06
  • [영화] 유배 속에서도 빛나는 인생을 만드는 세계관
    절망 속에서 낭비하지 않은 인생을 말하다 이준익 감독의 영화는 항상 유머를 동반한 교육적 가치가 빛난다. 피교육자의 시선을 사로잡으며 흥미진진한 교육방법을 추구하는 교육자라면 그리고 목회자라면 그의 영화만큼 좋은 시청각 교육자료는 없다. 영화 <사도>에서는 영조의 강압적인 교육열이 가져온 부정적 결과를 보며 가정교육의 현실을 되돌아볼 수 있었고, 백제(전라도)와 신라(경상도)의 결전을 보여준 <황산벌>에서는 사투리를 해석하지 못하는 바람에 백제를 공격하지 못하는 신라군의 우스꽝스러운 상황을 지켜보며 커뮤니케이션의 중요성을 인식할 수 있었다. <라디오 스타>(2006)와 <즐거운 인생>(2007)에서 <변산>(2018)에 이르는 현대물 또한 사회의 주변부에 머무르는 인물을 통해 어떻게 인생을 살아야 하는지를 이준익 감독은 유머 감각을 곁들이며 관객을 감동적인 교육의 현장으로 인도했다. 이 감독의 영화를 통한 의미의 전달 양식은 1959년생인 그의 나이가 말해주듯 자칫 ‘꼰대 이야기’로 들릴 듯하지만, 현대인이 잃어버린 혹은 필요로 하는 시대상의 가치와 맞물려 매우 품격있는 영화로 인식되곤 한다. 그의 최신작 <자산어보> 또한 마찬가지다. 정약전(丁若銓, 1758~1816)이 흑산도에서 16년간 귀양을 살면서 쓴 <자산어보>가 기록된 배경을 보여주면서 영화는 당시 국가적 지탄의 대상이었던 사학죄인의 남다른 행보를 보여주었다. 그것은 절망과 고독의 순간에도 빛날 수 있는 세계관의 결과이기도 하다. 절망적일 것 같은 흑산도의 유배 생활에서 정약전(설경구)은 사람과 바다를 발견한다. 영화에서 그는 주변을 돌아보고 이웃에 관심을 기울이는 일이야말로 절망과 고독을 이기는 비결임을 깨닫는다. 정약전은 서자출신의 젊은 어부인 창대(변요한)와 깊은 교류를 나누며 마을 사람들과 어울릴 뿐만 아니라 상것들이나 관심을 보일 물고기에 대한 호기심을 감추지 않는다. 아무리 죄인이라고는 하지만 유교 사회에서 중앙관직에 올랐던 양반이 비린내 나는 생선을 주무르고 갯벌을 헤집고 다닌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 괴상한 행동에 의문을 품은 창대를 향해 약전은 이렇게 말한다. “학처럼 사는 것도 좋으나 구정물, 흙탕물 다 묻어도 마다 않는 자산 같은 검은색 무명천으로 사는 것도 뜻이 있지 않겠느냐” 약전이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것은 단순히 물고기에 대한 호기심이 충만해서가 아니라 인간과 자연을 바라보는 세계관이 유교와는 달랐기 때문이다. 즉 바다와 물고기에 대한 관찰과 경험을 바탕으로 지식을 기록하려는 자세는 서학과 가톨릭의 영향을 받은 세계관의 결과이다. <자산어보>는 일종의 어류도감이다. 유교가 중심인 당시 상황에서 생물학자도 아닌 그가 나름대로의 분류법을 만들어 어류도감을 쓰는 이유는 서학으로부터 실용적인 지식의 가치를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한 자연세계에 대해 이해가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장약전과 동생 정약용은 가톨릭 신앙을 가졌었지만 후에 가톨릭과 결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정약전 연구가들은 그가 가톨릭 신앙을 떠난 이후에도 예수의 십자가구속과 같은 핵심 교리를 믿는 수준에는 이르지 못하지만 인격적이며 만물을 주재자인 하나님으로서의 천(天) 개념을 유지하였을 것으로 여기고 있다. 특히 천(天)이 만물을 짓고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평등적 인간성(仁)을 부여하였다는 생각을 여전히 갖고서 이를 유배 생활 가운데서도 적용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왜 정약용이 아닌 정약전일까? 정약전의 동생 정약용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에 비견될 만큼 조선 후기에 다양한 분야에 위대한 업적을 남긴 르네상스적인 인물이었다. 철학에서부터 유학과 법학, 의학, 건축 등 조선 후기에 살았던 실학자로서 일반적인 학자가 관심을 가졌을 분야뿐만 아니라 일반 백성들의 실생활에 도움이 될 만한 영역에도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여 탁월한 저서들을 남기기도 했다. 그가 남긴 500 여권의 저서들은 워낙 분야가 다양하고 방대한 내용을 가지고 있어서 아예 정약용을 학문의 중심에 놓고 그의 사상을 연구하는 다산학(茶山學)이 탄생할 정도다. 그렇다면 정약전(丁若銓)에 대한 세간의 인식은 어떨까? 역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가 정약용의 형이며 <자산어보>(玆山魚譜)의 저자라는 정도는 알 수 있을지 모른다. 그래도 정약용에 비하면 생소하기만 하다. 특히 정약용의 유배지인 강진에 비하면 정약전이 16년간 유배 시절을 보낸 흑산도는 지리적으로나 심리적으로 대중들에게는 거리감을 느끼게 만든다.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1993) 시리즈의 첫권인 ‘남도답사 일번지’에서 첫 번째로 꼽은 장소가 전남 강진이었고, 강진의 문화와 역사의 중심에는 정약용과 다산초당이 있었다. 그런데 흑산도는 목포에서 쾌속선을 타고도 2시간을 가야 하는 섬이고, 강진만큼 인기 관광지도 아니며 흑산도 홍어가 생각날 뿐 그 누구도 정약전을 흑산도와 연결지어 생각하는 사람들은 없다. 그런데 한국에서 대중적이며 의미있는 역사 영화를 잘 만들기로 소문난 이준익 감독은 강진의 정약용이 아니라 흑상도의 정약전을 택했다. 당연히 할 얘기도 많고 무엇보다도 관객들이 익히 잘 알고 있어서 정약용을 다루는 영화를 만든다면 흥행에도 도움이 될 가능성이 높은데 그는 정약용이 아닌 정약전을 취했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어디까지나 감독의 민초 중심의 역사관 때문이라 할 수 있다. 그가 전에 만든 역사 영화의 면모를 훑어보면 답은 금방 찾을 수 있다. <왕의 남자>(2005)로 시작하여 <황산벌>(2003)과 <평양성>(2011), <사도>(2015), 그리고 <동주>(2016)와 <박열>(2017) 등의 역사물을 만든 이준익 감독은 <자산어보>의 정약전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가 역사를 보는 시각 가운데 하나는 전면에 드러나지 않은 숨은 역사를 통해 현시대를 잘 들여다 돌아보는 일이다. 이준익 감독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과거 역사와 현재와 관계를 이렇게 설명했다. “역사는, 현재를 투영하거나 반영하는 것이다. 현재를 반영하지 않을 거면 사극을 왜 찍어야 하나? 과거의 이야기가 현재와 맞닿는지가 중요하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기록된 역사와 흥미진진한 왕과 권력 중심부에 있었던 인물을 통한 역사 외에도 기록되지 않았지만 혹은 표면에 드러나지 않지만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데 필요한 중요한 의미를 전해주는 역사가 존재한다는 사실에 이준익 감독은 카메라의 앵글을 맞춘다. 그로 인해 관객은 천편일률적인 역사가 아닌 새로운 역사를 이해하고 앞으로의 역사를 창출해나갈 수 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세대 차이 극복의 비결, 젊은 벗을 두었는가? 이준익 감독은 <자산어보>에 등장하는 정약전의 명대사로 “벗을 깊이 알면 내가 더 깊어진다”를 들었다. 이것은 약전이 창대의 스승 역할을 하면서 벗으로 살아갔던 유배 생활의 묘미를 표현한 말이기도 하다. “외울 줄밖에 모르는 공부가 나라를 망쳤다”라고 생각하는 약전과 어떻게든 유교 경전을 공부해서 출세를 원하는 창대는 가치관의 차이를 분명하게 드러낸다. 거기다 양반과 서얼이라는 신분의 차이는 물로 나이도 확연히 구분된다. 평생을 공부만 하던 선비와 물고기만을 잡아 온 어부 사이에서 공통점은 하나도 없어 보인다. 그런데 그들은 어떻게 벗이 되었으며 깊은 교감을 나누는 사이로 변했을까? 영화는 서로를 인정하며 자신의 필요를 채워줄 상대를 발견했기 때문임을 보여준다. 약전은 바다와 물고기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가진 창대를 인정하며 자신이 가진 실학 정신을 구현해간다. 창대는 약전이 비록 나라의 벌을 받는 사학죄인이지만 그의 학문의 깊이를 인정하고 자신이 필요로 하는 글공부를 도와줄 사람임을 알게 된다. 사대부는 어부와 함께 하지 않고 왕을 따르는 백성은 사학죄인을 가까이 해서는 안되지만 두 사람은 서로를 인정하고 서로의 공부를 돕는 관계로 나아가면서 서로의 인생의 발전을 꾀하게 되는 것이다. 이번에도 이준익 감독의 영화를 통해 교육자료를 얻게 되었다. 사회를 건강하게 만들고 교회를 성장시키데 <자산어보>는 어떻게 기여할 수 있을까? 한국사회와 교회가 당면한 심각한 문제 가운데 하나는 세대 간의 갈등이다. MZ세대(밀리니얼 세대와 1995년 이후에 태어난 Z세대)는 기성세대를 불신하고 기성세대는 이들이 자신의 가치관과 다르고 이해할 수 없는 세대라며 혀끝을 차고 있을 뿐이다. 교회는 특히 최첨단 기술 문명의 혜택을 받고 자란 MZ세대를 수용하는데 그 어려움이 더욱 심하다. 해결방안은 <자산어보>가 보여주었다. 세대도 다르고 가치관도 다른 두 사람이 어떻게 인생의 발전을 이루어가는가를 말이다. 영화에 초반부에 등장하는 약전과 창대 사이의 관계는 전혀 화합할 수 없는 갈등 덩어리였지만, 어느새 서로에게 벗과 스승의 관계로 새롭게 변했다는 사실에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입신양명의 꿈을 접고 고향으로 돌아온 창대가 약전이 쓴 <자산어보>를 붙잡고 우는 장면에서 결국 그들은 하나의 가치관으로 통일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신다(딤전2:4). 내 안에 하나님의 진리가 있다면 진리 안에서 새로운 세대와 하나 되는 기쁨을 누려야 하지 않겠는가? 문화가 다르고 외계인처럼 사는 것 같지만 MZ세대에게도 배울 것이 있고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교회는 가지고 있지 않은가! 약전이 유배 생활 중의 시선을 오직 자신에게만 집중했다면 그는 결코 행복하지도 않았고 <자산어보> 같은 위대한 자연과학서는 탄생하지 않았으리라. 흑산도에서 그의 눈길은 자신이 아닌 자신을 둘러싼 어부들과 바다를 향해 돌렸고 이를 통해 그는 자신의 사상을 실천하고 그를 따르는 제자를 만들었다는 사실을 기억할 일이다. 이제 돌아보자. 벗을 삼고 스승을 삼을 만한 사람이 누구인지 호기심을 가득 머금은 눈길을 가지고 주변을 돌아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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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4-09
  • [영화]한국계 미국 이주민의 삶에서 묻어나는 가족애와 기독교 신앙
    재미교포 감독이 딸에게 들려주는 자전적 이야기 당신은 사랑하는 딸에게 지나간 가족의 이야기를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알렉스 헤일리의 원작 소설 <뿌리>(Roots)처럼 연대기적 서술방식으로 아프리카 땅에 거주하던 먼 조상에서 시작해서 노예 시절을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가족사를 소상히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매우 긴 시간이 필요하며 영화로 제작한다면 시리즈물이 될 수밖에 없다. 많은 출연 인원이 필요하고 시대극에 따르는 분장과 세트 등 준비할 것도 많고 무엇보다도 제작비에 대한 부담이 클 수밖에 없다. 더구나 소설이건 영화건 긴 호흡이 필요한 콘텐츠 대하기를 버거워하는 Z세대인 딸아이가 긴 시간 동안 아버지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듣고 있을지도 의문이다. 재미교포인 정이삭 감독은 영리했다. 자신이 살아온 미국 이민자로서의 삶이 어떠했는지를 딸에게 들려주기 위해 그는 한 시대로 시간을 압축하는 대신에 많은 이야기와 의미를 담고 있는 상징물들을 집어넣어 이 문제를 해결했다. 깊이 있는 이야기가 넓게 펼쳐져 있는 것은 아니지만 어느 이야기를 하든 미국 이민자로서 가족을 향한 사랑이라는 결론에 도달하도록 짜임새를 갖췄다. 따라서 115분의 상영시간은 물 흐르듯 어느새 흘러가고 딸 아이의 가슴 속에는 한국인 이민역사 속에서 누구나 한 번쯤 듣고 보았을 법한 이야기가 가족애라는 이름으로 남아있게 되었다. 영화는 1980년대 미국의 시골이라 할 수 있는 아칸소로 이주해 온 재미교포 가정의 이사하는 모습으로부터 시작한다. 트레일러에 이삿짐을 가득 싣고 도착한 새로운 보금자리는 평원 위에 세워진 멋진 저택이 아니라 언제든 트럭이 끌고 갈 수 있는 이동주택, 즉 바퀴 달린 집이었다. 도시에서 쓴맛을 본 미국 이민자의 어려운 선택이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는 미국적이며 또한 고단한 한국인 이민자의 삶을 보여주는 상징으로 표현된다. 도시에서의 삶을 뒤로 한 채 농장을 일구며 성공을 꿈꾸는 제이콥(스티븐 연)은 아내 모니카(한예리)와 병아리감별사로 일을 하며 어린 남매를 키우고 있다. 병아리 똥구멍을 통해 암수를 구별하는 병아리감별사는 전문기술이 없는 한국인들이 미국이나 호주로 이민을 떠날 때 선택하는 인기직종 가운데 하나였다. 한국인의 눈썰미가 병아리 감별에 특화되어 있다는 소문은 진실인지 알 수 없으나 그것은 분명 우리의 이민역사에 기록된 일이었다. <미나리>는 주인공 가족이 일구는 땅 이야기와 어린 남매를 돌보기 위해 한국에서 건너 온 할머니 순자(윤여정)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이 가족이 겪는 갈등과 사랑을 말하고 있다. 즉 땅과 할머니는 영화적 재미의 요소이면서 동시에 장황해질 수 있는 가족 이야기를 압축시키는 역할을 한다. 미국 땅에서 자라나는 한국의 미나리 넓은 땅은 한국인이 미국에 대해서 갖는 첫인상이다. 손바닥만 한 땅이라고 말하는 한국과 달리 미국의 너른 땅에 마음껏 농사를 짓고 아이들을 교육시키려는 제이콥에게 닥친 시련은 물(농업용수)을 구하는 문제였다. 그는 미국 농부들이 흔히 하는 수맥 찾기(Dowsing) 방법을 비과학적이라고 생각하며 ‘머리를 쓰는 한국인’답게 직접 우물을 파지만 이내 말라버리고 만다. 물이 마른 땅은 인간을 고통스럽게 만들기 마련이다. 영화의 미학적 표현에서 물(水)은 매우 요긴하게 쓰인다. 인간의 삶에 필수적인 까닭에 불(火)과 더불어 갈등의 원인인 동시에 해결의 원초적이 방법이기 하다. 성경은 요한복음 4장에서 물질적인 물이 어떻게 영생의 의미로 치환되어 성경을 읽는 독자들의 마음에 깊이 박히게 되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4:14)하는 예수님의 말씀은 영화예술 속에서도 거듭 반복되는 미학적 표현이다. 한국에서 온 할머니 순자는 뇌졸중으로 인해 불편한 몸을 거두지 못하는 바람에 창고에 불을 내고 만다. 제이콥의 야망이 사라지는 순간이다. 가족을 위해서 미국의 촌에까지 와서 농장을 한다고 하지만 그 안에는 도시에서 살 때 같은 동포인 한인에게 받았던 상처로부터 도피하고자 하는 면과 자신의 욕심 때문에 아내 모니카(한예리)와의 갈등이 내재 되어 있었다. 그런데 어렵게 농사짓고 한인 상점에 판로를 개척하는 등의 노력이 잿더미가 되고 모습을 지켜봐야 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영화의 미학에서 불은 잘못된 것을 태우며 새롭게 만드는 정화(淨化)의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성경도 이를 지지하고 있다. ‘그 때에 그 스랍 중의 하나가 부젓가락으로 제단에서 집은 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그것을 내 입술에 대며 이르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사6:6-7) 제이콥의 욕심은 불로 인해 사라지고 이제 가족만이 남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삶이 망한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중심적 사고를 버리고 진정 가족을 위하는 새로운 삶의 시작을 뜻하는 일이다. 미나리는 원더풀! “미나리는 얼마나 좋은 건데. 미나리는 잡초처럼 아무 데서나 막 자라니까 누구든지 다 뽑아먹을 수 있어. 부자든 가난한 사람이든 다 뽑아먹고 건강해질 수 있어. 미나리는 김치에도 넣어 먹고 찌개에도 넣어 먹고 국에도 넣어 먹고. 미나리는 아플 때는 약도 되고. 미나리는 원더풀! 원더풀이란다” 할머니 순자가 딸의 가족을 위해 갖고 온 것은 고춧가루와 멸치만은 아니었다. 한국 이민자들의 삶을 다룬 그 어떤 영화에서도 볼 수 없는 미나리 씨앗을 가져와 개울가에 심었다. 순자는 미나리가 자라나는 것을 보고 어린 손자 데이빗(엘런 김)에게 미나리에 대한 얘기를 들려준다. 당연히 미나리는 미국의 이민자로 살아가는 한인 주인공 가족을 상징한다. 더 나아가서는 미국 사회에 새롭게 뿌리를 내리고 성장하는 한국의 이민자들을 뜻할 수도 있다. 이 영화를 본 미국 교포들이 웃고 울며 동감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농장에 물이 마르고 창고가 불타버리는 바람에 수확한 농산물이 못쓰게 되어도 물가에 심은 미나리는 쑥쑥 자라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영화는 마지막 장면에서 제이콥은 미나리가 풍성히 자라난 광경을 바라보며 아들의 손에 쥐어준다. “혼자서도 잘 자라네. 데이빗, 할머니가 좋은 자리를 찾으셨어. 맛있겠다!” 미나리를 통한 보이지 않는 할머니의 사랑과 한국인의 기질이 손자에게 전수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하다. 상업영화에 익숙한 관객이라면 이 장면에서 영화가 끝나는 것이 아쉽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창고가 불타고 농사를 다시 시작해야 하는 시점에서 할머니가 남긴 미나리를 팔아 주인공 가족이 이민 생활에서 성공했다는 얘기로 결말을 짓기를 원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영화가 왜 왜 78회 골든글로브 외국어영화상을 비롯하여 유수의 영화제를 휩쓸었는지를 곰곰이 생각해봐야 한다. 미나리를 팔아 부자가 되는 일은 한국의 한 특정인에게는 일어날 수 있는 일이지만 보편적이지는 않다. 그러나 미나리에 담긴 가족(할머니)의 사랑과 민족적 특이성을 통해 미국 사회에서 행복한 삶을 사는 일은 이민자들의 사회인 미국에서는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일이다. 모름지기 상을 받으려는 영화는 인종과 문화를 초월하는 보편적 가치가 내재 되어야 하는 법이다. 이민자의 신앙은 어디로 가는가? <미나리>는 기독교인 감독이 만들고 기독교인이 등장하는 보편적 정서를 가진 일반영화다. 해석에 따라서는 기독교의 가치가 은연중 표현된 영화로 볼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선교를 목적을 두고 만든 영화라고 보기는 어렵다. 여러 모양의 기독교인들이 등장하지만 신앙의 감동을 주는 인물이나, 불신앙자가 신앙인이 되는 변화의 모습이 나타나는 일반적인 기독교 영화와는 다른 까닭이다. 아내 모니카는 집에서 찬송가를 들으며 생활하고 아들이 잠들기 전 기도를 가르치는 매우 신실한 기독교인으로 등장한다. 남편 제이콥은 그다지 신앙에는 관심을 갖고 있지 않지만 가족을 따라 함께 예배에 참석하는 정도의 성의를 보인다. 이 영화가 기독교적인 평가를 내릴 때 흥미있게 작용하는 인물은 영화의 앞부분으로부터 끝날 때까지 제이콥의 농사일을 도와주는 미국인 폴이다. 그는 제이콥과 그의 땅을 축복하는 기도를 하고, 방언을 하며, 할머니가 뇌졸중을 쓰러진 이후에는 제이콥의 집에서 마귀를 쫓아내는 의식을 행하기도 한다. 주일이면 커다란 십자가를 어깨에 메고 걸어가는 바람에 교회에 다니는 아이들의 조롱을 받는 장면도 있다. 기독교인들이 혼란스러워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해석의 초점은 이민자들이 겪는 신앙생활의 현실을 이해하고 불안한 마음을 신앙에 의지하며 살아가는 이민자의 삶에 맞추는 일이다. 병아리 감별을 하면서 모니카는 먼저 온 한인으로부터 여기에 온 사람들은 한인교회가 없는 작은 동네로 온 것이라고 이야기를 듣는다. 교회로부터 상처를 받은 한국 이민자들의 현실을 나타내는 말이다. 그러나 아이가 심장병을 앓고 있고 뇌졸중으로 쓰러진 어머니를 앞에 두고 미지의 땅에서 불안한 삶을 살아갈 때 신앙은 폴과 같은 신비적인 신앙의 면모를 가진 사람을 거절하기 어렵다. 2005년도 조사에 따르면 재미 한국인의 70%는 교회에 다니는 것으로 보고되었다. 원래 한국에서부터 기독교인이었던 사람들이 이민을 간 경우도 많지만, 미국의 한인교회의 사회적 역할 때문에 적지 않은 이민자들이 기독교로 개종을 하기도 한다. 이것조차도 성령님의 인도하심과 은혜일 수 있다. 한국에서 건너 간 미국 이민자들의 낯설고 고단한 삶과 신앙 사이에는 깊은 상관관계가 있다는 것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 문화
    • 영화
    2021-03-05
  • [영화] 그리스도인 가정의 폭력과 내밀한 상처의 공개
    보고싶지 않은 현실을 보여주는 영화 이승원 감독의 독립영화 <세자매>를 보면 대한민국이 영화를 잘 만드는 나라란 사실이 눈에 들어온다. 세 자매 역할을 훌륭하게 소화해 낸 개성있는 여성 연기자들을 보유하고 있고, 저예산의 독립영화임에도 불구하고 개봉 6일 만에 5만 명이 넘는 관객들이 이 영화를 찾을 만큼 다양한 영화를 소비하는 훌륭한 관객들도 있다. 코로나의 어려움 가운데서 일군 성과라서 그 가치는 높이 평가받을 수 있다. 무엇보다도 화려하고 스케일이 큰 대형상업영화가 아닌 소소한 일상생활을 세밀히 묘사하며 삶의 성찰에 이르게 하는 작은 영화들을 제작할 수 있고 상영할 수 있는 능력을 보유한 점은 높이 평가를 받을 만한 일이다. 특히 대한민국에서는 영화가 오락적 가치만을 존중받는 것이 아니라 사회문제를 일깨우는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은 매우 고무적이다. <세자매>는 가족 드라마임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폭력 아래서 성장한 성인이 겪어야 하는 트라우마가 일상생활 가운데 묘사되는 영화라서 끝까지 앉아서 보는 일 자체가 감독이나 배우의 뛰어난 역량 없이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즉 고통의 시간을 의미 있게 만들지 않는다면 관객은 보고 싶지 않은 장면으로 가득 찬 영화를 보기 위해 돈과 시간을 쓰는 수고를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영화 <세 자매>는 어른으로 성장하여 각각 가정을 이루고 살아가는 세 여성에 대한 개별적 이야기의 조합으로 보이지만, 결말에 가서 문제의 근원이 된 아버지로부터 폭력을 겪으며 어린 시절을 보낸 공통된 과거의 기억을 복원한다는 점에서 관객이 끝까지 볼 수밖에 없는 영리한 구성방식을 취하고 있다. 관객들이 보고 싶지 않은 장면들은 세 자매가 각각 겪는 현실을 통해 나타난다. 첫째 희숙(김선영)은 고스족 차림의 기괴한 스타일에 몰입한 채 자신을 무시하고 반항적인 태도를 지닌 딸아이와 살고 있다. 남편은 가끔씩 나타나 돈만 뜯어 가는 채권자 같은 존재로서 영화에는 단 한 장면에만 등장할 뿐이다. 암진단을 받았지만 자기의 잘못인 것 같아서 누구에게도 얘기하지 못한 채 그저 미안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아갈 뿐이다. 둘째 미연(문소리)은 교수 남편을 두고 있고 본인은 교회 성가대 지휘자로 활동하며 겉으로는 가장 번듯한 생활을 하고 있다. 교회 생활에 열심이지만 남편이 같은 교회, 그것도 본인이 지휘하는 성가대 솔리스트인 여대생과 바람피우는 현장을 목격한 뒤로는 더욱 자신의 속마음과 감정이 외부에 노출되지 않도록 단속하느라 심한 내적 갈등에 휩싸이게 된다. 셋째, 미옥(장윤주)은 대학로 연극 작가로 활동하며 재혼인 남성과 결혼하여 살고 있지만 집필 작업이나 가정일 모두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술에 찌들어 살고 있다. 주변 사람들과 걸핏하면 시비가 붙고 아내나 엄마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도 알지 못한 채 도무지 대책이 서지 않는 삶을 술에 의지해서 살아갈 뿐이다. 이 세 자매가 보여주는 일상은 관객 누구도 마주하고 싶지 않은 인물과 사건들로 둘러싸여 있다. 그러나 그 원인을 따라가는 과거의 시간 속에서 우리는 진짜 해서도 안 되고 당해서도 안 되는 부정적 경험이 도사리고 있음을 알게 된다. 폭력적인 아버지를 지켜보는 절묘한 타이밍 영화 <세자매>와 정인이 사건이 교차하게 된 시점은 참으로 절묘하다. 16개월 된 입양아 정인이를 가혹하게 학대해 숨지게 한 사건을 관객들은 기억하면서 영화를 봐야 했으니 말이다. 특히 정인이의 양부모가 모두 기독교인이란 사실이 밝혀지면서 개신교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노골화되고 있는 가운데 관객들은 영화관 밖의 현실과 영화 속 장면들이 허구가 아닌 사실일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질 수 있다. 정인이의 양부모는 유명 기독교 대학 출신의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며 양부의 직업 또한 기독교방송국 직원인데다 정인이의 조부와 외조부 모두가 교회 목사인 것으로 알려지면서 기독교인이 일으킨 반사회적 행동에 세상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사랑을 말하는 기독교인이 남도 아닌 자식에게 어찌 그럴 수 있느냐라는 사회적 분노가 공감대를 형성할 만큼 확산하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말이다. 영화의 결말 부분에서 세 자매는 아버지의 생일잔치를 위해 자신들이 성장한 고향마을에 들어선다. 변하지 않고 자리를 지키는 옛 건물을 바라보면서 그들은 어린 시절 아버지의 폭력에 고통받았던 과거를 떠올리게 된다. 어머니를 때리고 밖에서 바람피워 데려온 큰 언니와 막내 남동생에 대한 매질이 유난히 심했던 아버지는 지금 교회의 장로가 되어 있었다. 영화는 과거의 전형적인 가부장주의적인 문화가 일반화된 상황에서 기독교인 가정도 예외가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이점은 영화에서 교회와 기독교 신앙생활의 적지 않은 부분이 배경으로 등장하지만 우리 사회의 전체적인 모습 또한 부조리함을 나타냄으로써 기독교를 비판하거나 폄훼하려는 의도가 있지 않음을 확인시켜준다. 어린 시절 둘째와 셋째는 아버지의 폭력을 피해 내복 바람으로 신발도 신지 못한 채 동네 가게로 피신하고 가게 안에 있던 손님들에게 경찰에 신고해줄 것을 부탁한다. 그러나 술 마시던 남자 손님으로부터 ‘아저씨가 쭈주바 사줄테니 그거 먹고 아버지한테 가서 잘못했다고 빌라’는 말을 들은 게 전부였다. 자녀에 대한 아버지의 학대가 용인되고 상처 입은 아이들의 미래는 눈곱만치도 생각하기 어려웠던 시절이었다. 이 영화의 가장 큰 장점은 가정폭력과 아동학대로부터 상처받은 인간이 성장 후에도 고통의 흔적을 갖고 살아가는 현실을 세밀히 묘사한 점과 그것이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에서 사과와 용서 없이는 치유되기 어렵다는 사실을 은연중 드러낸 점이다. 영화의 후반부에 이르도록 나타나지 않던 막내아들은 끝 장면에 이르렀을 때 자신의 존재를 크게 부각시키는 일을 저지르고 만다. 아버지의 생일잔치 때 어린 시절 아버지로부터 받은 학대의 곪은 상처가 결국 터지고 마는 것이다. 목사님이 초청되고 좋은 음식이 배열된 잔치 자리에서 막내아들은 아버지가 앉아 있는 식탁 위로 오줌을 싸는 바람에 난장판을 만들어 버리고 만다. 이쯤 되면 장로인 아버지는 문제의 심각성도 깨닫고 문제의 원인이 자신에게 있다는 사실도 깨달을 법도 하지만 아버지에게 그런 기색은 보이지 않는다. 단지 목사를 초청한 자리에서 자식에게 망신당하고 체면이 구겼다는 당황한 표정만이 역력할 뿐이다. 이제 이 영화의 명대사이자 성경적 관점에서 이 영화를 평가할 만한 가장 중요한 장면이 이어진다. 첫째 희숙의 골칫거리 딸의 입에서 터져 나온 한마디. “왜 어른들은 사과할 줄 모르는 거에요! 사과하세요!” <세자매>는 기독교 영화가 될 뻔했다 어떤 영화들은 순간의 묘사만 잘했더라면 기독교 명작으로 남을 뻔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세자매>가 그렇다. 마지막 결정적 장면에서 성경적 관점이 드러난다면 이전의 모든 장면들은 새롭게 해석되는 가운데 기독교 영화라는 위치를 부여받을 수 있게 되었을 텐데 그렇지 못한 점이 너무 아쉽다. <세자매>에서 장로인 아버지는 사과하라는 외손녀의 말을 듣고 세 딸과 막내아들 앞에서 그동안 저지른 죄에 대해 용서를 빌었다면 어땠을까? 자신이 배움이 적고 신앙이 모자라서 하나님이 보내주신 귀한 선물인 자식들을 때린 것에 대해 눈물로 회개했다면 이 영화의 판도는 달라졌을 것이다. 담임목사가 지켜보고 있는 자리에서 생일잔치가 난장판이 되어버리는 바람에 체면이 구겼다는 생각을 버리고 아버지로서 자식에 대한 사랑을 회복할 수 있는 일생일대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면 너무 교화적이란 평가를 받았을까? 어차피 <세자매>를 끌고 가는 힘의 중심에는 둘째 미연(문소리)이 있으며 영화는 미연의 신앙생활을 세밀히 묘사하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교회 성가대 지휘자로서의 사회적인 생활에서부터 가정 일상사에서도 신앙의 권위를 결코 잃지 않는 모습은 상반된 평가를 받게 된다. 식사 기도를 하지 못하는 자녀에게 훈계하는 모습은 신앙의 권위를 내세운 폭언처럼 들리기도 하지만 밥상머리에서 신앙교육을 시키는 가정이 많지 않다는 점에서 꼭 부정적으로만 볼 수도 없다. 십일조 봉투를 챙기며 남편이 받은 특강료에 대해서 말하는 것을 꼭 남편을 잡아먹지 못해 안달이 난 여자로 볼 수만도 없는 노릇이다. 남편과 바람 핀 성가대원과 머리끄덩이를 붙잡고 싸우기보다는 조용히 압박을 주어 일을 해결하려는 모습은 냉정한 태도일 뿐 위선적이라 말하기 어렵다. 다만 철야 기도회 자리에서 남편과 바람 핀 성가대원을 이불을 씌우고 발로 지긋이 밟는 행위는 부드러운 언행과 불일치를 이루며 이중적이란 평가를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신앙인의 이중적 행태는 폭력적인 아버지의 영향이라는 전제가 깔린다면 이해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세자매>는 둘째 미연의 집들이 예배 상황과 아버지의 생일축하연을 영화의 앞과 뒤에 배치함으로써 기독교인이지만 폭력적인 아버지 밑에서 자란 둘째 딸에게서도 학습되고 있음을 상기시킨다. 난장판이 되어버린 아버지의 생일파티에서 참고 참았던 아버지를 향한 분노를 쏟아내던 둘째 미연에게 셋째 미옥은 “언니 눈에서 아버지가 보인다”고 말한 것은 가부장적이며 권위주의적인 신앙인의 이중적인 태도가 자식에게까지 되물림 되어 나타날 수 있음을 나타낸다. 그러나 남편의 내연녀를 대하는 미연의 모습은 개인의 특수한 상황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 보았을 때 결국 이 영화의 주제가 성경적 가치를 품고 있는 가의 여부가 이 영화의 성경적 가치를 판단하는데 핵심이 될 수 있다. 장로인 아버지는 자녀들에게 용서를 비는 대신 유리창에 자신의 머리를 박고 피를 흘리는 것으로 마무리를 한다. 그것은 용서를 구하는 자의 태도가 아니다. 오히려 자식을 잘못 키웠다는 자책에 가까운 행동일 수 있다. <세자매>는 단편적이나마 신앙인의 가정과 교회의 모습을 조명한다. 기독교 신앙인과 교회의 허물을 보여주는 것 자체를 문제 삼을 수는 없다. 사실이 또한 그러하니 말이다. 그러나 문제의 해결방법은 달라야 한다. 단지 세 자매의 연대와 끈끈한 가족애가 문제해결 방법이 될수는 없다. 그것은 전형적인 휴머니즘 가족 드라마의 결말일 뿐이다. 기독교 영화의 상징적 특징은 완벽한 신앙인의 모습을 보여주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죄와 문제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과 사랑 안에서 회개와 용서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지의 여부에 달려있다. 아버지가 세 자매에게 용서를 구하고 회개하는 가운데 가족의 연합을 도모했다면 우리는 훌륭한 기독교 영화의 탄생을 목격할 수 있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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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2-08
  • [영화] 갈릴리 혼인풍습에 담긴 예수 재림의 메시지
    CBS CINEMA가 보낸 위로의 선물 코로나19로 인해 한국 영화계가 고사 위기 직전까지 갔던 2020년도에도 기독교영화계는 의미 있는 족적을 남겼다. 김상철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부활: 그 증거>는 지난 12월 말 현재 2만9천3백 명이 넘는 관객 수를 기록했다. 일반 영화의 극장 관객 수가 20년 전으로 후퇴한 상황 속에서도 기독교 다큐멘터리 영화가 3만 명 가까운 스코어를 기록한 일은 매우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코로나로 인해 예배당 출입이 원활하지 못한 상황은 부활신앙을 조명했던 이 영화에 대한 기독교인의 관심을 촉발시켰다고 보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로마의 박해를 피해 지하동굴에 숨어서 신앙생활을 했던 카타콤(catacomb)의 생생한 영상은 고난 속에서도 신앙을 지켰던 순교자들의 삶이 코로나로 인해 고통받는 한국의 기독교인들에게 전해지면서 큰 도전을 주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기독교 영화를 제작하고 수입 배급도 하는 ‘CBS CINEMA’의 역할이 컸던 한 해였다. 6월에는 미국의 유명 CCM 밴드인 ‘머시미(Mercy Me)’ 리드 보컬 바트 밀라드 (Bart Millard)의 인생과 노래를 보여준 <아이 캔 온리 이매진>을 재개봉한 데 이어서 11월에는 어린아이의 순수한 믿음이 감동을 주는 가족영화 <아이 빌리브>를 극장에 걸었고, 가나의 혼인 잔치 이야기를 통해 예수님의 재림과 종말의 의미를 가르친 다큐멘터리 <가나의 혼인잔치:언약>의 극장상영에도 성공했다. 비록 수입영화이기는 하지만 한국의 기독교인들에게 적지 않은 감동과 영향을 줄 수 있는 영화란 점에서 2020년 기독교영화계가 암흑의 시간으로 빠져드는 것을 막아내는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그 가운데서도 브랜트 밀러 주니어 감독의 다큐멘터리 <가나의 혼인잔치:언약>(Before the Wrath, 2020)을 유튜브를 통해 일정 기간 무료로 공개한 일은 기독교 문화선교의 시대정신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뜻깊은 일이 아닐 수 없다. 영화관까지 직접 찾아가기 쉽지 않은 코로나19의 현실에 대한 대안으로 한국인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동영상 플랫폼을 통해 누구나 볼 수 있도록 공개했기 때문이다. 영화를 수입하거나 제작하는 입장에서 돈이 들어간 영화를 무료공개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영화를 돈을 버는 통로로만 생각하지 않는 사역자 정신은 하나님 말씀이 필요하고 성경에 대한 바른 이해가 절실한 시기에 기독교 영화를 과감히 대중의 품에 안길 수 있었다. 특히 웹2.0의 시대정신을 구현한다는 점에서도 현대의 문화 흐름에도 부합한다고 볼 수 있다. 웹2.0의 정신은 참여, 공유, 개방에 있다. 지식정보화 시대에는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자신만이 붙잡고 내놓지 않는다면 쌍방형 소통의 가치가 중요한 디지털 문화에 어울린다고 볼 수 없다. 아울러 무료공개의 시점이 크리스마스 전후 기간이란 점도 매우 의미가 있다. 코로나로 인해 전세계가 ‘고요한 밤’이 되어버린 성탄절에 맞추어 문화선교단체가 할 수 있는 최상의 선물을 제공한 까닭이다. 2020년 11월 26일에 개봉한 이 영화는 극장에서 1만3천 명이 넘는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전방위적인 사역이 필요한 시기임을 보여주는 예가 아닐 수 없다. 갈릴리 가나의 혼인풍습에 담긴 그리스도 재림 다큐멘터리 <가나의 혼인잔치:언약>은 성경에 예언된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이해와 각성을 촉진 시킨다.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 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행1:11)는 성경의 말씀처럼 부활하고 승천하신 예수님의 재림은 초대교회 교인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메시지였고, 그 이후로부터도 여전히 기독교인들의 신앙에 중요한 축을 이루어 왔다. 그러나 현대 기독교인의 신앙에서 재림은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한 채 시한부 종말론과 같은 이단의 교설만이 재림의 의미를 왜곡시키고 있을 뿐이었다. 1992년 다미선교회는 그해 10월 28일에 휴거(携擧) 현상이 나타나고 1999년에는 세상의 종말이 온다고 주장하여 파란을 일으켰지만 결국 이단이 퍼뜨린 해프닝으로 끝나고 말았다. 그러나 정상적인 교회에 끼친 그 후유증은 대단히 심각했다. 교회에서 종말론에 대한 설교는 자취를 감췄다. 기독교인은 분명 세상의 종말에 대한 믿음을 갖고 살아가야 하지만 성경의 바른 이해에 바탕을 둔 종말에 대한 설교를 듣기 어려운 세상에 살게 된 것이다. 영화 <가나의 혼인잔치:언약>은 종말에 나타날 현상으로 예수님의 재림과 휴거에 대한 이해를 성경에 나타난 갈릴리지방의 혼인풍습에 비유하여 설명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특히 ‘언제 예수님이 재림하시는지’에 대한 지금까지의 관심으로부터 ‘왜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가’와 같은 본질적인 접근과 해석을 보여줌으로써 기독교 대중의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이 영화는 예수님과 그 제자들이 갈릴리 사람이라는 것으로부터 착안하여 갈릴리지방에서 있었던 독특한 혼인풍습 속에 예수 재림에 대한 예언의 실마리를 심어놓았다고 얘기한다. 즉 예수님께서 왜 세상에 다시 오시는가에 대한 문제뿐만 아니라 휴거와 재림의 때에 대한 비밀 등을 이해하려면 갈릴리지방에서 행해진 혼인풍습을 먼저 아는 것이 우선임을 강조하고 있다. 영화 속에서 예수님의 재림과 연관된 갈릴리 혼인풍습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는 이미 초림하셨던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왜 재림하시는지에 대한 이해를 다루는 부분이다. 갈릴리의 혼인풍습은 신랑과 신부 사이의 결혼에 대한 언약이 이루어지는 과정이며 영화는 이를 드라마 형식으로 세밀히 묘사하고 있다. 신랑의 아버지가 아들과 함께 신부의 마을 어귀에서 증인들이 보는 앞에 혼인 서약서를 읽고 선포하는 일이며, 신랑이 주는 포도주를 신부가 받을 때 비로소 결혼에 대한 신부의 승낙이 이루어지는 일 등은 미처 우리가 알지 못했던 갈릴리의 결혼 풍습이었다. 특히 약혼과 결혼 사이에 적지 않은 시간의 간격이 있으며 약혼기간 동안 신랑은 신부와 함께 살 집을 준비한다는 사실에서 예수님의 승천과 재림 사이에 존재하는 시간의 간격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내 아버지 집에는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요14:2) 하는 말씀이 상응하는 대목이다. 둘째는 오직 하나님만이 예수님이 재림하는 날에 대해서 아는 것과 같이 영화는 신랑이 약혼을 끝내고 신부를 데리러 오는 날의 결정이 오직 신랑의 아버지에게 있음을 밝히고 있다. 신랑의 아버지가 아들 신랑에게 신부를 데려올 때가 되었음을 얘기하면 신랑은 곧장 나팔을 들고 밖으로 나가 마을 전체를 깨운다. 즉 결혼식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날 새벽이나 자정에 시작되는 것이다.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마24:36)는 성경 말씀은 정확히 갈릴리의 혼인풍습과 일치한다. 셋째는 휴거를 연상시키는 장면이 갈릴리 결혼 풍습에 있음을 설명하는 부분이다. 신랑이 나팔을 불어 동네를 깨우면 친구와 하객들 가운데 준비된 자들만이 일어나 마을을 빙빙돌며 신부의 집에 들어갈 채비를 하게 된다. 신부와 또한 준비된 들러리들이 신랑을 맞으러 나오고 신랑은 신부와 드디어 재회하게 되는 것이다. 이 때 신부는 그저 신랑을 따라서 집에 가는 것이 아니고 신랑의 친구가 내려놓은 가마에 올라타 들린 채로 신랑의 집으로 가게 된다. 갈릴리 사람들은 이 모습을 보고 신부가 공중에 들려 아버지 집에 간다고 표현함을 영화는 밝히고 있다.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살전4:17)는 말씀이 절묘하게 어우러지는 장면이 갈릴릴 결혼식에서 발견할 수 있다는 사실은 얼마나 놀라운가! 새해에 가장 먼저 볼 영화 미국에서 성경적 시각으로 영화를 평가하는 사이트 ‘Dove.org’는 이 영화를 목회자와 교사를 포함한 모든 기독교인들이 꼭 봐야 할 영화로 추천했다. 그것도 될 수 있는 한 빨리 이 영화를 볼 것을 권하고 있다. 기독교 영화를 촌각을 다투며 시급히 볼 것을 권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그러나 <가나의 혼인잔치:언약>라면 서둘러 봐야 한다는 데 동의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예수님 재림에 대해서 이토록 설득력 있는 해석을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들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언제 재림하실지 모르는 가운데서 신부 된 기독교인이 신랑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함을 배우는 일 만큼 중요하고 시급한 일이 어디 있을까? 신앙교육은 단순히 정보의 축적에 머무르지 않는다. 즉 신앙적인 행동에 이르도록 만든다. ‘등을 들고 신랑을 맞이하러 나간 열 처녀의 비유’(마25:1-13)에서처럼 슬기로운 자들로 살아가도록 영화는 관객의 마음을 부추긴다. 혹시 종말과 재림에 대해 가르치기를 두려워하는 교회 설교자나 교사가 있다면 이 영화의 도움을 받으면 된다. 비록 고고학자의 발굴 장면에서 사실성이 좀 떨어지고 예산의 한계 때문에 유명 배우를 캐스팅하지는 못했지만, 영화가 전하는 메시지는 이 모든 부족함을 상쇄시키고도 남음이 있다. 느슨해졌던 믿음의 끈을 단단히 매고 새해를 시작하는 기독교인이라면 첫 번째로 봐야 하는 영화가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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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1-07
  • [영화] 방사능의 미래를 알지 못했던 위대한 여성 과학자
    위인전을 다루는 영화의 방식 어느 사회에서나 위인전은 두 가지의 특성을 갖는다. 하나는 어린이들이 즐겨보는 교육적 성격을 고려하여 사회의 모범이 되고 윤리적으로 문제가 없는 무흠한 인물을 위인전에 올린다. 그러나 그것은 진실이 아니다. 전기작가는 편집과정에서 어린이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긍정적인 면을 강조하고 업적 위주로 기술한 결과 문제는 없고 위대함만을 부각하여 인물을 재창조하는 셈이다. 위인전의 또 하나의 특징은 위인전을 펴낸 사회가 지향하는 이데올로기를 반영한다는 점이다. 반공이 사회의 중요한 구호로 등장할 때는 6.25의 영웅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이 한국에서 펴낸 세계의 위인전집에 올랐는가 하면, 수출증대에 나라의 모든 것을 걸었을 때는 현대그룹의 정주영 회장이 아동을 위한 위인전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영화도 위인을 다루는 방식이 책과 다르지 않다. 21세기에 퀴리 부인에 대한 영화를 만든다면 과학의 가치와 여성의 역할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한 교육적이며 시대적인 상황과 무관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상업영화로서 관객을 모아야 하고 책과 경쟁해야 하는 구도가 명확해지면 영화는 다른 길을 갈 수밖에 없다. 그것은 장르(genre)의 특성을 갖는 일이다. 장르란 일종의 영화의 분류법으로 비슷한 내용이나 형식에 따라 영화들을 묶어 영화의 특성을 이해하는 방식이다. 역사적 위인들의 생을 조명하는 영화들은 드라마라는 장르 안에서 이해되며 주인공이 경험하는 사건을 다루는 가운데 인물의 성격을 조명하는 방식을 취하곤 한다. 이 과정에서 장르영화는 ‘반복과 변형’이라는 특유의 전개방식을 보여준다. 즉 관객이 이미 잘 알고 있는 위인에 대한 내용을 영화는 ‘반복’한다. 이것은 관객의 기대감을 충족시켜주는 역할을 한다. 이순신 장군의 영화를 보러 온 관객들은 임진왜란의 용맹스럽고 왜군을 물리치는 호쾌한 승전의 기쁨을 만끽하기 위해 온다는 사실을 상업영화는 외면할 수 없다. 그러나 관객이 알고 있는 것만을 묘사하는 영화는 새로울 게 없다는 판정을 받게 마련이다. 그래서 장르 영화는 ‘변형’이라는 전개방식을 따른다. ‘변형’은 관객이 미처 알지 못하거나 알았다 하더라도 잘못 알고 있는 것을 다룸으로써 관객의 예상을 뛰어넘는 전개방식이다. 관객은 뻔할 것 같은 영화로부터 새롭게 기대감을 갖게 되며 앞으로 영화가 어떻게 전개될지 호기심을 머금은 채 스크린을 응시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이 만든 <링컨>(2012)은 장르영화의 성격을 명확히 보여준다. 미국의 남북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흑인 노예를 해방시킨 위대한 미국의 16대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에 대한 관객의 기억들을 소환하여 스크린에 반복하여 펼치지만 똑같지는 않다. 스필버그는 링컨이 순수하고 정직하며 어떤 야망도 갖고 있지 않은 고결한 위인이라는 동화책에 나올 법한 이미지는 여지없이 깨뜨린다. 링컨은 의회에서 노예제를 완전히 폐지시키는 수정헌법 13조가 통과될 수 있도록 시간을 벌기 위해 반대편인 남부연합 대표들이 워싱턴에 들어오는 여정을 지연시키고, 심지어 자신의 법안에 반대표를 던질 생각인 야당 의원에게 관직을 제공하는 댓가로 찬성표를 얻어낸다. 다시 말하면 술수를 부리고 야당 의원을 매수하는 셈이다. 분명 관객의 예상을 뛰어넘는 ‘변형’된 링컨의 모습이 등장한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노예폐지와 같은 숭고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링컨의 행동이었음을 관객들은 깨달으며 링컨에 대한 기대감을 충족시키며 극장을 나서게 되는 것이다. 책으로는 알지 못했던 마리 퀴리 그렇다면 우리에게 익숙한 또 다른 위인 ‘마리 퀴리(Marie Skłodowska-Curie)’는 어떨까? 흔히 ‘퀴리 부인’으로 우리의 귀에 익숙하고 라듐 발견으로 노벨상을 받은 위대한 여성 과학자가 우리가 기억하는 위인전의 내용이지만, 그녀가 남성 중심의 학계에서 여성으로 치열하게 싸우는 한편으로 남자로부터 사랑을 갈구하는 여인의 이미지를 떠올릴 수 있는 사람은 이 영화가 나오기 전까지는 없었다. 이란 출신의 여성 감독 마르잔 사트라피 감독의 <마리 퀴리>(Radioactive, 2019)는 위인전이 미처 언급하지 못한 퀴리 부인의 빛과 그림자를 모두 담고 있는 영화를 연출함으로써 ‘반복과 변형’의 장르적 특성을 영화에 담아내는데 성공했다. 위인전에서는 알지 못했던 퀴리 부인의 이미지는 세 가지의 ‘변형’을 이루며 관객의 예측을 넘나든다. 첫째는 자신의 일에 관한한 거침없는 성격의 소유자임을 영화는 제시했다. 마리 퀴리(로자먼드 파이크)가 자신의 연구실에서 쫓겨나게 되었을 때 혈기를 부리는 모습은 다소 당황스럽다. 남성 중심의 위원들 앞에서 다소곳하게 앉아 있어야만 우리가 상상한 퀴리 부인의 이미지와 어울리는 것은 아니지만 자신의 연구를 위해서라면 남성들과 거침없이 맞붙는 투지는 위인전에서는 결코 나오지 않는 내용이다. 모든 분야에서 여성이 남성과 동등한 대접을 받지 못했던 시절임을 감안 한다면 혈기를 부리는 여성 과학자의 탄생은 남성 중심의 사회에도 얼마간의 책임이 있음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마리 퀴리는 연구실과 연구결과물을 독점하던 남성들에 대해 늘 경계심을 가졌던 것은 사실이었다. 1903년 자신의 연구 동료이자 남편인 피에르 퀴리(샘 라일리)와 공동으로 노벨상을 수상하게 되었을 때 자신이 직접 스웨덴에 가서 상을 받지 못하고 수상소감 또한 말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 그녀는 몹시 분노한다. 둘째는 우리가 아는 마리 퀴리가 있기까지 남편 피에르 퀴리의 역할을 새롭게 인식시킨 것도 영화가 제시한 새로운 점이었다. 연구실에서 쫓겨난 마리를 위해 새로운 연구실을 마련해주며 연구에 몰두할 수 있도록 도운 피에르가 없었다면 과연 퀴리 부인은 탄생할 수 있었을까? 사랑의 동반자로서 결혼하고 늘 마리 옆에서 함께했던 남편 피에르의 존재는 마리의 내면세계에 안정감과 사랑에 대한 충족을 가져옴으로써 위대한 여성 과학자의 탄생을 지켜볼 수 있었다. 남편 피에르가 마차에 치여 죽은 후 마리 퀴리가 남편의 동료이자 연구원이었던 남성과 자신의 집에서 사랑을 나누는 일은 아마도 이 영화를 본 관객들을 당황스럽게 만든 일이었다. 퀴리 부인의 어린 두 아이가 아빠 대신 낯선 남자와 침대에 함께 있는 엄마를 열린 문 사이로 지켜보는 장면은 정숙한 퀴리 부인의 이미지만을 갖고 있었던 관객의 예상을 여지없이 깨뜨리고 말기 때문이다. 유부남 연구원과 밀회를 즐겼지만 이내 그 아내로부터 욕을 들어야만 이 위대한 여성 과학자의 모습에서 우리는 결국 인간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를 깨닫게 된다. 개방적인 성의식을 가진 관객이라면 이 또한 마리 퀴리의 거침없는 성격과 성에 대한 주체적인 행동으로 여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남편이 죽은 후 사랑이 필요했다는 마담 퀴리의 고백은 자신의 성적 욕망에 대해서 솔직하고 담대한 현대적인 여성의 이미지로 다가설 수 있기 때문이다. 감독은 마리 퀴리가 감히 넘볼 수 없는 위인이라기 보다는 보통 사람과 다름없이 욕망을 가진 인간으로서 묘사하려는 의도를 읽을 수 있다. 그러나 성경적 관점에서 보자면 그것은 일찍이 다윗과 같은 위대한 왕이 성적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밧세바와 같은 유부녀와 정을 통했던 인간의 죄성과 연약함의 결과일 뿐이다. 다만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따라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주의 많은 긍휼을 따라 내 죄악을 지워 주소서’(시51:1)라며 회개의 기도를 한 반면 마리 퀴리는 기독교인이 아니란 점이 다를 뿐이다. 이 차이는 영원이라는 간격을 벌릴 수 있지만 말이다. 신앙없는 과학의 미래 영화는 기독교 신앙으로 인도되지 못한 과학자의 삶과 연구결과물이 가져올 허무함과 비극을 제시한다. 마리 퀴리는 남편 피에르가 죽은 후 정신적 혼란을 경험하며 그렇게도 강하게 자신을 떠받치고 있던 과학으로부터 이탈하는 경향도 보였다. 마리 퀴리는 죽은 남편을 만나기 위해 영매를 찾아 나선다. 남편의 손에 이끌리어 갔던 심령술 모임에서 영매는 베토벤의 혼령을 자신의 몸속으로 불러내어 피아노 연주를 했었다. 죽은 남편의 영혼을 불러내어 대화하려는 마리 퀴리의 행동은 결국 남편에 대한 진한 사랑과 더불어 아무리 노벨상을 받은 과학자라도 인생의 풀리지 않는 문제를 껴안고 살아가고 있으며 얼마든지 사이비 심령술에도 빠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영화는 병원 복도에서 이동 침대 위에서 지나간 자신의 삶을 떠올리는 동일한 장면으로 시작과 끝을 맺는다. 다만 끝맺음 부분에서 마리 퀴리는 자신의 방사능 연구가 가져올 미래의 방사능 유출과 관련된 비극적 사건의 예시를 함께 떠올린다. 1945년 히로시마 원폭투하와 1961년 네바다 사막에서의 공개된 핵실험, 그리고 가장 최근에 있었던 1986년 체르노빌 원전폭발의 장면들이 등장한다. 마리 퀴리 사후에 벌어진 핵과 방사능의 어두운 그림자는 그녀의 위대한 연구와 발견이 가져다 준 비극의 열매였다.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투하된 핵폭탄은 8만 명을 즉사시켰고, 방사선 피폭과 관련된 질병과 부상으로 14만 명이 이후에 죽었다. 인구 35만 명의 히로시마 시민 가운데 22만 명이 사라진 것이다. 네바다 사막의 핵실험장은 구경꾼을 불러 모으는 관광상품이 되었고, 체르노빌 원전 폭발사고로 방사능에 오염되어 사망한 사람이 백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미국의 일간지 USA 투데이는 보도했다. 마리 퀴리는 자신의 연구업적을 발표하는 자리에서 당당하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저는 이것을 이렇게 부릅니다. 방사능”. 이 영화의 원제목은 ‘방사능(Radioactive)’이다. 열정있는 과학자가 발견한 이 수고의 결과는 인류를 구원했는가? 아니면 파멸로 이끌고 있는가? 마리 퀴리는 알지 못했고 알 수도 없었다. 그래서 신앙이 없는 과학을 볼 때마다 물가에 뛰어노는 어린아이를 보는 것과 같은 심정을 감출 수가 없는 것은 필자만의 생각은 아닌 듯하다. 과학자들에게는 다윗의 기도가 필요한 때이다.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시 5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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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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