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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서연구]그녀가 거기에 간 이유(요한복음 20장 1-2절)
    지금까지 저는 어려운 교회에서 목회한 적이 없습니다. 서울에서 수백 명의 성도가 있는 교회에서 교육지도사와 전임전도사, 부목사 사역을 했습니다. 만 32세에 담임목회를 시작했는데, 어려운 개척교회가 아니라, 장로님이 여러 명 계신 교회였습니다. 그 후 지금은 그 보다 훨씬 큰 교회에서 목회하고 있습니다. 이런 저를 부러워하는 분들도 있습니다만, 저는 주님을 따르는 고단함을 잘 알지 못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부산에 있을 때 일부러 일 년에 한두 번 아내와 함께 차를 몰고 부산 외곽의 시골로 나갔습니다. 지나다가 교회가 있으면 무턱대고 들어가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 날에는 모든 것이 값진 교훈이었습니다. 낯선 교회에 처음 들어가는 경험, 그 교회의 성도들이 <어디서 오셨습니까?>라고 물을 때의 느낌, <지나가다 들렸다>고 대답하고 한쪽에 자리를 잡고 잠시 드리는 기도, 그 후 교회 주보를 읽어보고, 교회 내부를 두리번거리면서 살피던 생소한 느낌, 그리고 조금 분위기가 다른 예배와 설교..... 어떤 교회의 목사님은 일찍 나오셔서 직접 교회 문을 열고, 불을 밝히고, 강단을 정리하고, 예배 준비를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성도들이 오길 초조하게 기다렸을 것입니다.그러다가 네댓 명의 성도들이 참석했겠지요. 저희 부부 두 사람은 예배 분위기에 상당한 변화를 가져왔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 목사님께서는 어떤 마음으로 설교했을까요? 그리고 다음 주일에도, 그 다음 주일에도 계속 그러했겠지요. 갑자기 교인이 많이 늘어나거나 재정이 불어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늘 모자라고 쪼들렸을 것입니다. 처음엔 3년 정도만 하겠다고 생각하고 오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3년이 30년이 된 분들도 많을 것입니다. 누가 <왜 이 교회에서 목회하느냐>고 물으면 뭐라고 대답하실까요? 어떤 분은 그 지역에 대한 소명 때문이라 대답하겠지요. 제가 들은 대답 중 하나는 <능력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그대로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같은 목사로서 마음이 무거워지는 대답이기는 했지만,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현실적 대답이었습니다. 이런 질문에 대한 정답은 무엇일까요? 정답은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보내셨고,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여기서 섬긴다>입니다. 그러나 이 정답은 머리에만 있을 뿐, 가슴으로부터 이 대답을 하는 분이 몇 분이나 있을까요? 제 동기 목사님 중에 김동찬 선교사님이 있습니다. 그 분은 인도네시아에서 삼십 년 이상을 사역하고 있습니다. 기독교 정신으로 설립된 고등학교에서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신학교에 간다고 하니 아버지는 학비도 끊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분은 그 길을 갔고, 지금은 온 가족을 주님께 인도하셨습니다. 정말 주님을 사랑하지 않았다면 할 수 없었을 일입니다. 지리산 자락의 목사님을 몇 분 알고 있습니다. 삼십일 년째 골짜기에 머무는 분이 있습니다. 언젠가 지나가다 갑자기 들렸더니 일을 하시느라 바빴습니다. 얼굴을 그을리고 옷맵시는 흐트러져 있었지만, 얼굴에서는 천사의 웃음이 배어났습니다. 이분 역시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거기 머물게 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후 안식후 첫 날, 아직 어두울 때에 무덤에 갔습니다. 아직 어두울 때 여인의 몸으로 무덤에 가는 것은 쉽지 않고 두려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막달라 마리아는 왜 무덤에 갔을까요? 그 이유는 단 하나, 주님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두려움도 이기게 했습니다. 저의 숙제는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는가>란 질문에 제대로 대답하는 것입니다. 농어촌의 어려운 교회에서, 개척교회에서, 힘든 선교지에서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 모든 일을 감당하고 계신 분들처럼, 저도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설교하고, 심방하고, 기도하는 목사가 되고 싶습니다. 그 외의 여러 가지 인간적 동기들은 우리를 부끄럽게 할 뿐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십자가를 지신 것처럼, 마리아가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무덤에 간 것처럼, 우리도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예배하고 섬겨야 하겠습니다. 이 마음을 주시길 간절히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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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0-22
  • [서임중 칼럼]허리를 굽혀라.
    한 잎 낙엽이 속삭이듯 창문을 노크하며 날아 내린다. 아파트 앞 둘레길 가로수도 어느새 울긋불긋 채색 옷을 갈아입고 빼곡히 짙던 잎새들을 조금씩 솎아내며 서 있다. 열어놓던 창문도 이제는 닫아야 하는 계절의 변화에 분주함을 잠시 멈추며 걸어온 삶의 발자취를 돌아본다. 고희의 세월을 살아온 날들을 회상하는 가운데 나는 천국으로 가는 길목에 거룩한 옷을 갈아입으려 얼마나 애쓰는가 생각해 본다. 어린 나이에 포항중앙교회 담임목사로 부임을 했었다. 목회 추억이야 헤아릴 수 없이 많지만 가을이 되면 떠오르는 에피소드가 있다. 노회를 마친 어느 주일 당회 모임에서 평소 어린 목사를 따뜻하게 품고 지극히 아껴 사랑하며 동역하시는 큰형님 같은 장로님이 웃으시며 조용하게 “목사님께 한 말씀 드려도 되겠습니까? 목사님, 노회에 가셔서 너무 그렇게 허리 굽혀 인사 안 하셔도 됩니다. 큰 교회 당회장이라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중앙교회 당회장의 자리에 걸맞은 모습이 필요한 것은 아닌가 생각합니다” 장로님의 말씀을 백분 이해하면서 나도 웃으면서 말씀을 드렸다. “대형교회 목사가 인사할 때 허리 굽히면 안 된다는 성경구절이 어디 있습니까?” 당회원들은 파안대소하면서 분수에 맞는 언행이란 꼭 필요한 것임을 서로 이해하고 포항중앙교회는 관계개념에서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섬기고 베풂의 삶을 실천하는 교회를 지향하자고 했었다. 나의 목회병법에는 10가지가 있다. 그 중의 하나가 휴지통 목회다. 모든 사람들이 자기 필요에 따라 사용한 후 버려야 할 것들은 휴지통에 버린다. 휴지통은 가득차면 비우고 다시 채운다. 교인들이 교회생활을 하는 동안 이런저런 일들에서 오는 불평 원망이 왜 없겠는가? 그럴 때면 상호간에 얽히고설킨 것들을 목사에게 와서 털어놓는다. 그리고 자기 뜻이 관철되면 웃고 돌아가지만 그렇지 않으면 온갖 아픔을 목사에게 되돌려주는 일들이 다반사로 일어난다. 그런 경우에 나는 휴지통 목회로 일관한다. 다 받아들이고 더 담을 수 없도록 채워지면 십자가 앞에서 다 비워버린다. 그것은 육체의 허리를 굽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허리를 굽히는 것이다. 이것이 나의 목회병법의 한 가지다. 가을이 깊어가던 어느 날 청소를 하는 집사님을 계단에서 만났다. 걸레를 들고 청소 도구를 옆에 세우고 있던 집사님은 나를 보자 언제나처럼 애기 같은 웃음을 지으며 한 걸음 비켜서다가 들고 있던 빗자루를 떨어뜨렸다. 내 발 앞에 떨어진 빗자루를 내가 엎드려 주워서 건네주니 “목사님, 목사님, 죄송, 죄송해요, 죄송해요”하며 어쩔 줄 몰라 하시던 모습을 나는 평생 잊을 수가 없다.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집사님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먼지를 닦고 휴지를 줍고 연신 허리를 굽히고 일어서고 굽히고 일어서고... 하루 종일, 일 년 내내 집사님은 그렇게 교회를 쓸고 닦는다. 집사님의 아름다움은 육체적 허리를 굽힐 때보다 마음의 허리를 굽힐 때 더욱 확연히 전해져온다. 이조(李朝) 역사에 가장 겸손하면서도 충정 어린 재상으로 국가 발전에 이바지한 인물 가운데 고불(古佛) 맹사성(孟思誠)을 빼놓을 수 없다. 일생을 가난하게 지내면서도 성품은 온유했고, 그러면서도 공사(公私)를 분명하게 하면서 직무에 강직했던 재상이었다. 그는 이조(李朝) 역사의 대표적인 청백리(淸白吏)로서 공직자가 지녀야 할 자세를 오직 목민(牧民)에 두었고 청렴결백(淸廉潔白)을 생활신조로 삼았다. 청렴하면서도 부드럽고 그러면서도 강직했던 고불(古佛)의 정신은 오늘처럼 공직사회의 기강이 무너지고 처처에 공직자의 비리가 만연해지는 때에 참으로 좋은 본보기가 되는 역사의 교훈이다. 그렇다고 고불이 본래부터 겸손하고 훌륭한 재상이었던 것은 아니다. 어릴 때부터 명석한 머리로 교만했던 고불이 그처럼 훌륭한 인물이 된 중요한 사건이 있었다. 야사(野史)에 의하면 맹사성이 열아홉에 장원급제-正史는 1386년(우왕 12년) 27세에 문과 전시에 장원급제- 후 파주 군수로 명을 받았을 때 선사(禪師)를 찾아 훌륭한 정치를 수행할 수 있는 고언(高言)을 듣기를 청했다 그 때 고승(高僧)이 이르기를 “선한 일을 많이 하고 악한 일은 하지 마시오”라는 지극히 평범한 한마디를 들려주었다. 오만한 맹사성은 “스님, 그 말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입니다. 그런 말을 들으려고 여기까지 올라온 줄 아십니까?” 하며 노기 띤 얼굴로 일어섰다. 고승은 “먼 산사(山寺)까지 오셨는데 녹차라도 한 잔 들고 가시기 바랍니다” 하고 권유했다. 오만했던 맹사성도 부끄러운 마음으로 못 이긴 체 자리에 앉았다. 고승은 맹사성 앞에 녹차 잔을 놓고 차 주전자로 찻잔에 차를 따랐다. 그런데 찻물이 흘러넘쳐 방바닥을 적시는데도 계속 따르고 있는 것을 본 고불이 더 화가 나 “스님, 지금 찻잔이 넘쳐 방바닥을 적시고 있지 않습니까?” 하며 화를 냈다. 고불의 말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고승은 혼잣말로 이렇게 중얼거렸다. “녹차 잔의 물이 넘쳐 방바닥 버리는 것을 보고 알면서 왜 지식이 넘쳐 자신의 성품과 인격을 버리는 것은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할까?” 이 말을 들은 맹사성은 부끄러운 마음에 얼굴을 들 수 없어 황급히 차를 마시고 일어서 문밖으로 나갔다. 자리를 피하려는 급한 마음에 서두르던 맹사성이 낮은 문지방에 이마를 부딪치고 손으로 이마를 감싸며 나가는 맹사성의 뒤에서 고승의 설법 같은 두 번째 말이었다. “엎드리면 부딪치는 법이 없습니다” 오만했던 고불이 위대한 이조의 명재상 고불 맹사성이 되게 한 한 사건이 이것이었다. 교회도 사회도 정치도 어느 한 곳 성한 곳이 없는 오늘을 살아가면서 왜 모두 이렇게 시끄럽고 불편한가를 생각해 보면 맹사성을 향한 고승의 말 한마디가 명언이 된다. 마음의 허리를 굽히면 육신의 허리도 굽혀진다. ‘허리를 굽혀라’ 그것이 너의 마음을 나의 마음에 자연스럽게 끌어당기는 아름다운 삶의 지남철이다. Bend down! Bend over! 얼마나 멋있는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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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0-22
  • [시사칼럼]깐부
    요즘 유행하고 있는 “깐부”라는 말을 아십니까? 어릴 땐 구슬치기나 딱지치기를 참 많이 했는데, 그래도 실력이 꽤 좋은 편이어서 따는 날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몽땅 다 잃고서는 무척 속상했던 날이 하루 있었습니다. 알고 보니 상대방 두 사람이 같은 편이었고, 서로를 뭐라고 부르면서 둘 사이에는 계산을 하지 않는 거였습니다. 그때 자기들끼리 부르던 명칭을 한참의 시간이 흐른 1986년에 또 듣게 되었습니다. 배우 박중훈과 김혜수의 데뷔작이기도 한 영화의 개봉 때문이었는데, 그 제목이 바로 “깜보”였습니다. 그 후로는 또 까맣게 잊고 살았는데, 같은 뜻을 가졌다는 단어 하나가 21세기에 이토록 세계적으로 유행하다니 참 신기하고 놀랍습니다. 넷플릭스(Netflix)를 통해 전세계에 방영되어 모조리 시청률 1위를 휩쓸어버린 한국 드라마 ‘오징어게임’ 속에 등장해서 어쩌면 앞으로 옥스퍼드 영어 사전에도 등재될지 모르는 “깐부” 말입니다. 알고 보니 지역에 따라 “깜보(부)”나 “깐부(보)” 혹은 “가보(갑오)”라고도 불린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 말은 어디서 유래했을까요? 일단 “깜보”에 대해서는 미8군 시절의 소규모 음악 밴드 ‘캄보(combo)’에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지만(오종석, 국민일보), 늘 밖에서 같이 뛰어 놀아 가무잡잡해진 친구를 가리키는 우리말이라는 견해도 있는바(네이버 사전), 앞선 영화 속 주인공 장두이 배우의 극중 별명이 “깜보”였는데 이런 뜻으로 썼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깐부”와 관련해서는 일본어 ‘카부(株)’가 어원이라고 하는데, 에도시대 상인조합 ‘카부나카마(株仲間, かぶなかま)’ 또는 지분을 가리키는 말 ‘카부시키(株式, かぶしき)’의 “카부”가 일제강점기 때 들어왔다는 견해로(이무완, 오마이뉴스), 쓴 돈을 나누어 낼 때 ‘카부시키하다’라는 말을 썼다는 증언도 함께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간 “깐부치킨”이라는 가게를 운영해 온 분은 요즘 상상도 못했던 엄청난 특수로 어리둥절해 하면서도 어원을 묻자 어릴 때 고향(평안도)에서 쓰던 말이라 했다고도 하고, 친구로 유명한 고사성어 ‘관포지교(管鮑之交)’의 중국어 발음 ‘꽌보’나 일본어 발음 ‘깐보(かんぽう)’가 변해서 생긴 말이라는 설도 있습니다. 이러다가는 안 그래도 한국을 시샘하기 바쁜 일본이나 중국에서 “깐부”도 자기네 것이라 주장할지도 모르게 생겼습니다. 현대판 “깐부”는 드라마 속에서 이렇게 등장했습니다. “우리는 깐부잖아. 깐부끼리는 니꺼 내꺼가 없는 거야.” 내 것 네 것을 가리지 않고 함께 소유하고 사용하는 관계, 그런 의미라면 진정한 “깐부”는 성경 속에서 찾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초대교회 성도들은 각자의 소유를 심지어 팔아가면서까지 함께 쓰고 함께 나누며 살았다고 사도행전은 두 차례나 기록하고 있으니 말입니다(행 2:44-45, 4:34-35). 그런데 더 놀라운 점은, 재물이나 재산만이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바울이 자신의 동역자들을 어떻게 소개했던가요? 갈라디아교회 성도들에 대해서는 “나를 위해서 눈이라도 빼줄 것 같은 사람들”이라고 했고(갈 4:15),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에 관해서는 “자신을 위해 목이라도 내놓을 사람들”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롬 16:4)? 아무리 서로를 끔찍하게 아끼는 동역자라 하더라도 어떻게 눈을, 목을, 기꺼이 내놓을 수 있는 그런 사이가 될 수 있단 말입니까? 성경 속 신자들만 그랬던 것도 아닙니다. 나환자 친구들을 위해 자신의 안위와 가족과 심지어 생명까지 아끼지 않았던 최흥종 목사님, 손양원 목사님 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요? 답은 여기 있습니다. 사람들을 위해 목숨까지 아끼지 않으신 예수께서는 누군가를 위해 마찬가지로 자기 목숨까지 아끼지 않는 이들을 향해 “친구”라 부르셨습니다(요 15:4).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깐부”라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지금 여러분의 곁에는 이와 같은 깐부가 있습니까? 아니, 지금 이 순간 나는 누군가에게 이와 같은 깐부가 되어 주고 계십니까? 만일 그렇지 못했다면, 이제부터라도 우리는 누군가에게 진실한 깐부가 되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나는 너에게 너는 그에게 그는 나에게 깐부가 되어 준다면, 이 세상사람 모두에게 하나쯤은 주님 닮은 깐부가 하나씩 붙어있지 않겠습니까? 대선을 앞두고 최근 정치권에서도 깐부라는 말이 연일 등장해 화제입니다. 야당의 어느 예비주자는 “우리 깐부 아닌가요? 치열한 경쟁은 하되 품격 있게, 동지임을 잊지 맙시다”라 했고, 여당의 원내대표도 “오늘부터 우리 모두는.. 깐부, 네것내것 없고 네편내편도 없다, 우리만이 있을 뿐”이라 했다지요? 좋습니다, 이 나라 이 민족을 위해, 지금까지 격동의 세월을 용케 함께 헤쳐 온 사이들이 아니십니까? 그러니 앞으로는 부디, 더러운 이(利)나 부패한 사욕(私慾)이 아니라, 나라 사랑과 민주주의의 열정과 미래의 비전과 타자를 위한 희생과 헌신의 깐부들이 되어주시기를 바랍니다. 누구보다 우리부터 주 안에서 그런 깐부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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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0-22
  • [은혜의 말씀]예수님의 시간표(요 11:1~7)
    여러분은 기도의 응답이 즉각적이고 빠르다고 여기십니까? 아니면 더디다고 여기십니까?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의 사랑을 받던 나사로가 병들어 위급하게 되었습니다. 마르다 마리아 자매는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어 구원을 요청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틀이 지나도록 아무런 소식이 없습니다. 결국 오빠가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자기는 예수님의 남다른 사랑을 받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며칠이 지나도록 예수님이 나타나지 않으시자 그들의 마음에 상처와 고통은 컸으리라 생각됩니다. 우리의 신앙을 뿌리 채 흔들어 놓는 이 위기의 상황 앞에서 주님으로부터 아무런 응답을 받지 못했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주님의 사랑이 나와 함께 한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나사로처럼 갑작스런 시련을 만날 때 주님의 사랑을 의심하기 쉽습니다. 나름대로 신앙생활도 열심히 하고 있는데 예기치 못한 큰 어려움을 만나면 주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말씀이 멀게만 느껴진다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나사로 삼남매가 우리에게 던져주는 중요한 메시지가 있습니다. 아무리 이해할 수 없는 시련이 우리 앞에 나타나도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위기 가운데서도 여러분은 혼자가 아닙니다. 사랑의 주님이 여러분과 함께 계십니다. 믿어지지 않으면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십자가는 나를 끝까지 사랑하신다는 하나님의 사랑의 확증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5:8) 2, 주님은 가장 적절한 때에 찾아오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본문을 보세요. 사람들이 달려와서 위급함을 전하는데도 예수님은 서두르지 않으십니다.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고 말씀하시면서 오히려 이틀을 거기서 더 머무셨습니다. 두 자매의 속은 얼마나 타 들어갔을까요? 나흘 후에야 비로소 나사로의 집을 찾아오셨습니다. 그때 마르다가 예수님을 만나자마자 내뱉은 말이 무엇입니까? 21절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왜 이렇게 늦게 오셨어요? 빨리만 오셨으면 이런 일이 없었을 텐데” 예수님의 지체하심에 대한 상처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슬픔에 잠긴 두 자매를 향해서 “네 오라비는 다시 산다”고 단언을 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그 가정에 가장 적절한 때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자매들이 생각하듯이 늦은 게 아닙니다. 모든 것을 아시는 주님인데, 어떤 것이 그 가정에 가장 좋은 것인지를 아는 주님인데, 주님은 가장 적절한 때에 가장 적절한 방법으로 오신 것입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 주님은 가장 적절한 때에 가장 적절한 방법으로 해결해주십니다. “3best : best time / best way / best thing” 참된 믿음의 사람들은 기다릴 줄 아는 사람입니다. “기다리는 자들에게나 구하는 영혼들에게 여호와는 선하시도다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 (애3:25,26) 예수님의 시간표는 가장 정확합니다. 가장 적절한 때에 오셔서 우리를 건져주실 것입니다. 그 사실을 믿고 시련 중에도 승리하시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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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0-22
  • [역사바로알기]복음병원 설립자 전영창(1917.12.26~1976.5.20)
    출생과 기독교 입문 전영창은 1917년 12월 26일 전라북도 무주군 적상면 여원리에서 전일봉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전영창의 할아버지 전치선은 일제치하에서 선교사를 통해서 예수를 믿으면 독립도 할 수 있다는 말에 기독교를 믿기 시작하여 온 가족을 교회로 인도하였다. 영창의 아버지 전일봉도 할아버지의 독립정신과 신앙심을 이어받아 3.1운동이 일어났을 때는 읍내 장터에서 열변을 토하며 만세시위를 주도하다가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과 옥살이를 하였다. 전영창 나이 세 살 때였다. 집안은 가난하였으나 아버지의 교육열로 전영창은 집에서 20리나 떨어져 있는 안성초등학교를 입학하여 졸업했다. 미국장로교 선교사 보이어(Elmer T. Boyer,1893-1976)가 해마다 두 차례 그의 동네로 와서 성찬식을 베풀곤 했는데 이때 전영창은 성구암송책에 있는 성경구절을 전부 암송하고 소요리 문답까지 막힘없이 다 외우자 보이어 선교사는 초등학교를 졸업한 영창을 학비까지 지원해 주며 신흥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해서 근로장학생으로 공부하게 해 주었다. 1936년 5년제 신흥고보를 졸업하고 고향에 있는 초등학교 촉탁선생이 되었으나 학생들에게 조선 역사를 가르친 것이 문제가 되어 학교에서 쫒겨났다. 일본유학과 투옥 신사참배 강요가 전국을 휩쓸 때 끝까지 이를 반대한 전영창을 눈여겨 보았던 신흥고등보통학교 교장 윌리엄 린튼(William Alderman Linton,1891-1960)이 영창을 일본의 고베신학교로 유학을 가도록 지원해 주었다. 1938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 영창(21세)은 신학교를 마치고 신사참배 거부 운동에 참여하다가 1941년 12월 1일 일본의 진주만 공습으로 신사참배 반대자 일제 단속에 걸려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후꾸오까 감옥에서 1년간 옥고를 치루고, 5년간의 집행유예로 출감하여 조국에 돌아와 주거 제한 속에 활동하였다. 영창은 일본에서 우찌무라 간조의 저서들을 탐독하면서 “조국을 구원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복음뿐”임을 깨닫고 조국을 위해 자신의 일생을 복음전파에 헌신하기로 결심했다. 우찌무라 간조의 책을 읽으면서 신학을 제대로 공부하기 위해서는 미국으로 가야겠다고 작정하고 투옥될 때부터 이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며 영어공부에 혼신을 다했었다. 해방과 미국유학 1945년 해방이 되자 미군 통역관 모집에 응시, 합격한 후 미군 24군단 군목인 브라운 소령의 통역관으로 일하면서 필라델피아에 있는 웨스트민스트 신학교에 유학을 가고 싶다는 소원을 말하자 마침 웨스트민스트 신학교를 졸업하고 미 군목으로 와 있었던 벧종드를 소개해 주었다. 벧종드는 자신의 모교에서 신학공부를 하고 싶다는 이 기특한 청년을 포옹하며 신학교에 편지를 보내 장학금을 받게 해 주었고 개인경비까지 다 부담을 해 주었다. 당시 미군정청 산하 외교업무 담당처는 첫 한국유학생을 위해 새로운 규정을 만들어 여권과 비자를 발급해 줌으로 1947년 4월 건국 이후 최초의 유학생이 되어 펜실베니아 웨스트민스트 신학교로 유학생활을 시작했으나 2년 뒤 미시간주 홀랜드에 있는 웨스턴 신학교로 옮겨와 공부를 계속 하던 중 1950. 6. 25 한국전쟁이 발발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1951년 1월 웨스턴 신학교 졸업을 앞두고 있을때 1951년 1월 3일 맥아더 장군이 한국에서 철수한다는 소식이 들리자 전영창은 뮬더 학장을 찾아가 지금 바로 조국으로 돌아가겠다고 했다. “만약 공산주의자들이 한반도 전체를 점령하게 되면 나는 조국에 돌아갈 기회를 영영 놓치고 말것입니다. 주님은 내가 목사가 되어 미국에서 일하는 것을 원하시는 게 아니라 내 조국을 위해 일을 시키려고 미국에 보낸 것이 아닙니까? 내가 만약 조국에 돌아가지 않으면 주님뿐만 아니라 동포들까지 배반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그들의 목자가 되기 위해 미국에 왔는데 이제 위험에 빠진 양들을 모른 체한다면 목자는커녕 사악한 사기꾼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이 조국을 점령하기 전에 돌아가 내가 해야 할 일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배평모, ‘거창고등학교 이야기, 종로서적, 1996. 23-24쪽) 뮬더 학장은 졸업을 두 주 남기고 포탄이 쏟아지는 한국으로 돌아가겠다는 게 말이 되지 않는다며 막아섰다. “학위를 받으려면 졸업을 해야 하니, 두 주일을 기다리며 사태를 지켜보자”고 했다. 전영창은 나라가 위기에 빠졌는데 학위가 무슨 소용이냐며 완강한 태도였다. 전영창의 고집을 꺽을 수 없음을 깨달은 뮬더박사는 귀국을 허락하고 수속도 책임질테니 가족을 미국으로 보내라, 그리고 두주일 후의 졸업시험은 치고 가라고 했다. 그러나 전영창은 학장의 두 가지 제안을 모두 거절하자 하는 수 없이 학장은 이사장과 협의하여 졸업시험을 치르지 않더라도 졸업장을 줄 수 있도록 배려하여 1951. 1. 8일 저녁 학장실에서 뮬더 박사의 아내가 지켜보는 가운데 졸업장을 수여했다. 귀국경비는 학장의 친구 게리드윗 목사의 도움으로 해결하였고 게리드윗 목사가 주변 사람들에게 호소하여 비행기 티켓 값은 물론, 전란중의 조국을 도우려는 전영창을 위해서 미화 5,000불을 별도로 모금을 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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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0-22
  • [목회자칼럼]그릇 이야기
    사람을 그릇에 비유하기도 한다. 통 큰 대인, 대기만성, 그릇이 크다. 믿음은 사이즈다. 입을 넓게 열라. 주님은 깨끗한 그릇을 쓰신다. 그릇 준비가 되어야 쓰임 받는다. 열왕기하 4장에 보면 엘리사 시대에 선지자의 제자들의 아내 중 한 여인이 엘리사를 찾아와 부르짖었다. 하나님을 경외한 믿음 좋은 남편은 사역의 꽃을 피워보지도 못한 채 죽고 두 아들을 빚쟁이들이 끌고 가서 종을 삼으려하는 기가 막힌 현실이었다. 주의 일을 하다가 큰 어려움을 당한 것이다. 선을 행하다가 낙심천만한 일이 닥친 것이다. 호사다마다. 삶은 편집이 가능한 녹화방송이 아니라 실시간 생방송이다. 예측불허의 돌발변수가 많고 한순간도 안심할 수가 없으니 순간대처 능력을 길러야 된다. 교육전도사 정도의 아직 어린 사역자 집안에 갑자기 가장이 죽었다. 가장 큰 고통은 나 한사람만이 아니고 온 가족에게 고통이 전이되는 것이다. 졸지에 아내는 과부가 되고 두 아들은 벼락거지가 되었다. 어려움은 누구나, 언제나, 어디나 있지만 대응방식이 문제이다. 문제를 문제 삼지 말고 기도제목으로 삼으면 문젯거리가 간증거리가 된다. 삶의 막장에 떨어지거든 분노조절장애에 빠져 있지 말고 주를 찾아라. 어려움을 당할 때에 누구를 찾아가느냐가 중요하다. 사람 앞에 하소연 하지 말고 사람의 도움을 기대하지 말라. 사람들 보기에 웃기는 사람이 되지 말고, 하나님 앞에서 우는 자가 되라. 사사시대를 보면 어려움이 있을 때 하나님께 나아가 부르짖으면 그때마다 사사를 보내어 주셔서 구원해 주셨다.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어둠의 일은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패션 테라피이다. 어둠을 탓하지 말고 일어나 빛을 발하라. 어두운 방에서 어둠아 물러가라 외치지 말고 스위치를 켜라. 스위치를 켜면 불이 오고 스위치를 끄면 불이 간다. 믿음을 켜면 슬픔이 꺼진다. 가면 전도 대상이 있고 안가면 없다. 하면 되고 안하면 안 된다. 소금물을 마시면 갈증이 유발된다. 식물이나 동물들은 빛을 보려고 필사적으로 나아간다. 안 된다, 어렵다, 힘들다, 죽겠다, 못살겠다는 입방정을 떨지 말고 주께 기도하라. 챌린지가 체인지가 된다. 코로나가 위기이기도 하지만 기회이기도 하다. 인생은 게임이 아니다, 도박이 아니다. 진지하게 하루하루를 살아내는 것이다. 사랑하면 방법이 보이고 싫어하면 변명이 생긴다. 쓸데없는데 감정소모 하지 말고 말싸움한다고 기를 빼앗기지 말고 복음전도 하는데,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엘리사는 먼저 과부의 집에 무엇이 있느냐고 되물었다. 과부는 “기름 한 그릇 외에는 아무것도 없나이다”라고 대답하였다. 기름 한 병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지만 하나님은 하잘 것 없는 것에서 시작해서 큰 기적을 만드신다. 다윗의 물맷돌, 모세의 지팡이, 라합의 붉은 천 조각, 엘리야의 손만한 구름, 기드온의 보리떡, 벳새다의 오병이어는 모두 하찮은 것이지만 기적을 이루었다. 은사에 크기가 아니라 믿음의 크기가 중요하다. 엘리사는 과부에게 너는 밖에 나가서 모든 이웃에게 그릇을 빌리라고 하였다. 소극적인 것은 비극적으로 결말이 나기 쉽다. 우물 안의 개구리가 아니라 우물 밖의 개구리가 되어야 된다. 성경은 가서 제자 삼으라고 한다. 부끄러워하지 말고, 쪽팔린다 생각하지 말고, 주저하지 말고 넉살, 깡살, 애살을 가지고 나서야 된다. 일을 내가 다 할 필요도 없고 할 수도 없다. 빌린다는 것은 내게 없는 것을 남에게서 빌려오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능력을 빌려오는 것이 실력이다. 배워서 남 주자. 벌어서 섬기자. 4절, 그릇에 기름을 부어서 채우라고 하였다. 마음은 비우는 것이 아니라 채우는 것이다. 빈 깡통이 시끄러운 법이다. 우리는 일을 하기 전에 먼저 채워야 된다. 휴대폰을 사용하기 전에 먼저 배터리 충전을 해야 된다.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을 때에 권세와 능력을 받고 새 일을 할 수가 있다. 성령충만, 은혜충만, 진리충만한 후에 새 역사가 일어난다. 성령충만 없이 사역을 하는 것은 고통이다. 7절, 너는 가서 기름을 팔아 빚을 갚고 두 아들과 함께 생활하라고 하였다. 장사하라는 것이다. 장사를 하는 것은 종합예술이다. 경기의 흐름을 알고, 사람들의 심리와 시대의 필요를 파악하는 사람이 장사를 잘 할 수 있다. 장사를 해보면 그 사람의 인성, 영성, 야성, 정성, 감성이 다 드러난다. 장사를 잘하는 사람은 사람을 얻고, 인심도 얻고, 실력도 생긴다. 장사를 못하는 사람은 결국 다른 일도 힘들다고 볼 수 있다. 달란트 비유에서 착하고 충성된 종은 바로 가서 장사하였다. 지체하거나 꾸물거릴 이유가 없다. 골든타임, 하프타임, 파이널타임을 알고 시간차 공격을 한다. 원망, 핑계, 변명을 내세울 필요가 없다. 있는 것을 가지고 바로 가서 장사해야 된다. 실패는 해도 피드백은 남는다.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며 노하우가 생긴다. 사업장, 직장이 바로 선교지이다. 기름병을 내다 팔아서 빚을 갚아야 된다. 빚지고 가난하고 병들고 아픈 문제를 해결해야 된다. 사역을 성공적으로 하고나면 무엇보다도 삶의 자신감이 생긴다. 삶이 고달프면 마음이 위축이 되고 어두워지기 쉽다. 그래서 열등감, 수치감, 패배감에 빠지고 만다. 빚을 갚고 난 후 두 아들과 생활하라고 하였다. 겨우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삶이 아니라 사명을 위해 생활해야 한다. 믿음의 그릇, 소망의 그릇, 사랑의 그릇을 키워라. 빌려오든지, 채우든지 내다 팔아서 생존이 아닌 생활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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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0-22
  • [의학칼럼]이유 모를 안면통증, 삼차신경통(2)
    삼차 신경통의 치료는 이차성의 경우 원인에 따라 치료하지만, 원인이 없는 특발성의 초기 치료는 우선 약물치료와 심리적 지지를 병행한다. 약물치료의 경우 신경 이완제 약물이 투약되며 장기간 약물을 복용할 경우 여러 가지 부작용이 발생할 수 있어 전문가의 지도가 꼭 필요하다. 대표적인 약은 ‘카르바마제핀(Carbamazepin)’으로 흔한 부작용은 졸림, 어지러움, 변비 및 운동실조 등이 있다. 그러나 장기간 신경이완제의 투약에도 불구하고 통증을 완화하는 효과가 떨어지거나 약물에 따른 부작용이 심각하여 궁극적으로 시술 또는 수술이 필요한 경우가 많다. 과거부터 여러 방법의 시술 또는 수술이 삼차 신경통을 치료하기 위하여 시행되었으나 현재 전 세계적으로 ‘경피적 삼차신경 고주파 응고술’과 ‘미세혈관 감압술’이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경피적 삼차신경 고주파 응고술’은 전신마취가 필요하지 않은 시술이며 과거에 수술에 실패한 경우, 미세혈관 감압술에 부적합한 신체 질병이 있는 경우, 또는 약물치료에 실패했거나 약물치료로 합병증이나 부작용이 생긴 환자에게 적응된다. 시술 방법은 부분마취 후 디지털 이동형 x선 형광투사촬영장치를 이용하여 통증이 발생하는 빰의 피부에 주사침을 삽입하고 삼차신경이 통과하는 타원 구멍에 주사를 진입시킨다. 투관침을 제거한 후 고주파 전극을 위치하고, 목표점에 대한 시험 자극을 시도한 후 삼차신경을 찾아낸다. 그리고 고주파를 이용하여 찾아낸 삼차신경을 90초 동안 전극의 온도를 75~80도까지 올려 치료한다. 시술 후 대부분 즉각적인 통증 완화를 경험하지만, 환자의 100%가 감각 소실이 일어나는 단점이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시술은 장기적으로 유용하지만 이상적인 치료법으로 증명된 것은 아직 아니다. 일반적으로 위 사례의 중년 남자의 경우처럼 필자는 전신마취의 위험성이 없는 경우 ‘미세혈관감압술’을 우선 추천을 한다. ‘미세혈관감압술’은 머리 뒤쪽 후두골에 백원짜리 동전 크기의 구멍을 내고 소뇌를 개방한 후 삼차신경의 뿌리를 압박하는 뇌혈관을 찾아서 그사이에 ‘테플론’이라는 수술재료를 끼워 놓는 수술이다. 재발이 약 10% 정도에서 발생하지만 대부분 환자에서 주요 합병증 없이 낮은 유병률을 가지고 치료할 수 있을 정도로 아주 효과적인 방법이다. 우선 ‘미세혈관감압술’을 필자가 추천하는 이유는 ⑴ 수술 이후에도 증상이 지속하거나 다시 재발할 때도 재수술이 쉽고 ⑵ 재수술의 경우에도 불구하고 수술 성적이 좋으며 ⑶ 부득이 수술에 최종 실패할 경우 차선책으로 ‘경피적 삼차신경 고주파 응고술’ 을 고려할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 SNS의 무책임한 정보 제공으로 인해 삼차신경통의 적절한 치료가 늦어지는 경우가 많으며, 환자의 올바른 이해가 부족하여 전문 진료 기관을 헤매는 경우가 높아지고 있다. 결론적으로 위 사례처럼 삼차 신경통의 치료는 환자 본인이 의심 증상을 놓치지 않고 반드시 전문가의 진료와 검사를 받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오늘 진료실에서도 필자는 얼굴이 너무 아파서 온 중년의 여자 환자가 이런저런 이유와 증상으로 상담을 오랫동안 하였다. 삼차신경통은 일상생활을 바꿀 수 있는 질병이다. 이러한 고통에서 하루빨리 해방되기 위해서는 환자들은 전문가의 세심한 진료가 꼭 병행되어야 함을 잊지 말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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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0-22
  • [부산기독교이야기]전쟁기 구호단체들: 메노나이트중앙위원회3
    한국에서 활동하기 위해 MCC의 파송을 받고 내한한 사실상의 첫 사역자는 1953년 3월 내한한 어네스트 레버와 데일 위버였다. 이들의 임명 기간은 3년이었다. 이들이 내한하게 된 것은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달라스 보렌과 MCC극동책임자인 데일 네블의 정지 작업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위버는 MCC한국 책임자였고, 레이버는 재정관리 및 구제물자 관리 책임을 맡았다. 어네스트 레이버(Earnest Dee Raber, 1927-2018)는 오하이오주 투스카라와스 카운티 출신으로, 세계2차대전 집총거부 신앙을 인정받아 pax 요원으로 와싱톤 주에서 대체 복무를 한 바 있다. 그 후 오하이오주 보링 그린에 위치한 보링 그랜 주립대학에서 교육학을 공부하고 1950년 졸업했다. 졸업 후 플로리다 주 윈터 헤이븐에서 잠시 교사로 일한 바 있으나, MCC요원으로 훈련을 받고 1953년 3월 한국으로 오게 된 것이다. 이때부터 1956년 1월까지 약 3년간 부산에서 일했다. 한국에 온지 7개월이 되던 1953년 10월 7일에는 부산의 교회의 한 한국인 교회에서 메리 미첼(Mary Milster Mitchell, 1922-2010)과 결혼했다. MCC요원으로 사역을 마감한 레이버는 서울로 이동하여 감리교 선교사로 4개월간 더 일하고 1956년 5월 고향 오하이오주로 돌아갔다. 데일 위버(Dale Albert Weaver, 1918-2011)는 캔사스 주 하퍼 카운티 출신으로 7남7녀 중 11번째 자녀였다. 그의 아버지는 1907년 목사가 되었는데, 어머니는 1925년 4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는 2년 후 재혼했다. 데일 위버는 고센대학에서 1년간 수학하고 농사를 짓다가 회사원으로 일했다. 그러든 중 전쟁이 일어난 한국에서 봉사하기로 작정하고 한국행을 자원하여 앞의 레이버와 더불어 펜실베이니아 주 아크론의 MCC본부에서 선교훈련을 받고 1953년 1월 MCC선교사로 임명되어 어네스트 레이버와 함께 일본을 거쳐 미군 군용기를 타고 1953년 3월 6일 부산에 도착했다. 위버는 첫 한국 MCC 지부장으로 임명되었는데, 한국본부 주소는 부산 부민동 2가 5-9번지였다. 한국인 주택을 구입해 약간 수리하고 사무실로 사용하게 된 것이다. 우편물 수납을 위해 부산우체국 사서함 112호를 사용했다. 전화는 따로 없이 인접한 미국 감리교 선교부의 부산 416번의 전화를 빌려 사용하고 있었다. 사무실에는 한국인 행정 직원 두 사람을 채용하였다. 주요 정책과 예산 집행은 미국 본부가 관장했고, 프로그램 운용과 예산안 집행은 한국 본부가 맡았다. 그리고 메노나이트교회가 보내는 구호품은 UNCACK, 미국한국구제회(ARK) 그리고 세계교회 종사회(CWS)를 통해 한국으로 전달되었다. 1953년부터 1954년까지 1년 예산 내역을 보면, 복지, 건강, 교육, 구제를 위한 월 예산이 1,650불, 구제물자는 211,000불에 해당했는데, 식품은 100톤, 의료와 침구 50톤, 비누 5톤, 크리스마스 선물 꾸러미 15톤(7,000개), 원면과 원모 50톤이었다. 그런데 이런 예산 중 직접적인 전도나 교회 사역을 위한 예산은 없었다. 즉 MCC는 메노나이트교회를 선전하거나 교회 설립을 목표하지 않았고, 순수한 구제사역에 집중하여 구호 대상자를 신자들에게로 제한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1953년 10월 이후에는 미국 MCC가 보낸 456톤의 구호물자가 들어왔는데, 식료품이 156톤, 우유가 140톤, 의류 신발 비누가 160톤이었다. 한국에서의 MCC사역은 4가지로 구분될 수 있는데, 이미 내한하여 UNCACK에서 일하는 달라스 보랜의 사역, 메노나이트실업학교 설립을 위한 기초 작업, UNCACK, ARK, 그리고 CWS를 통해 우송된 구호물자 배부, 그리고 한국에서 전개할 예비 사역과 장비의 조달이 그것이었다. 이 중 대구 인근인 경산에 메노나이트실업학교 설립을 위한 준비가 순조롭게 진행되어 학교 부지 매입비로 10,250달러, 학교를 위한 각종 수리비로 1,500달러, 운영 행정 비용과 장비구입비로 1,200달러가 소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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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0-22
  • [성서연구]세례 요한을 생각하며(마태복음 11장 1-6절)
    세례 요한은 예수님보다 여섯 달 먼저 태어나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이미 그의 출생과 사역이 구약성경에 예언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예수님의 메시아 사역 초기에 투옥되었습니다. 마태복음 4장 12절은 <예수께서 요한이 잡혔음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물러가셨다가>라고 기록함으로써 요한의 투옥 사실을 알리고 있습니다. 투옥 상태로 지내던 요한은 마태복음 11장에서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냈습니다. 오늘 본문이 이를 보여줍니다. 요한이 제자들을 보낸 이유는 감옥에 있으면서 예수님에 대해 혼란이 왔기 때문이었습니다. 2절을 보면 <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요한의 태도는 매우 충격적인데, 그 이유는 요한이 예수님께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요, 오실 메시아임을 증거한 장본인이기 때문입니다. 요한이 이렇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가장 큰 이유는 예수님께 대한 요한의 기대와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모습 사이에 괴리가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요한은 당시 마카루스 감옥에 있었습니다. 아마도 요한은 예수님께서 자신을 감옥에서 구원해 주시길 기대했을 것입니다. 아니면 적어도 로마와 헤롯의 세력을 물리치고 이스라엘을 위한 일을 시작하길 기대했을 것입니다. 조금만 기다리면 세상이 바뀌고, 자신은 자유를 얻을 것이라고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이 생각한 일을 하고 계시다면 무슨 소문이라도 들려와야 할 텐데, 그리고 세상이 소란스러워야 할 텐데, 세상은 너무도 조용했고, 감옥에도 역시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혼란에 빠졌습니다. 정말 예수님께서 메시아인가에 대해 의문이 생겼습니다. 그는 참지 못하고 제자들을 보내 질문하게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요한의 제자들이 왔을 때, 예수님께서는 어떤 답을 주셨습니까? 4-5절을 보면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하고 계신 메시아 사역을 말씀하셨습니다. 그 후의 일은 성경이 언급하지 않고 있어서 제자들의 보고를 들은 요한이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요한은 헤롯이 제수인 헤로디아와 결혼한 것을 비판했고, 그로 인해 헤롯의 생일에 헤로디아의 딸 살로메의 춤값으로 죽음을 당했습니다. 요한이 헤롯의 부정한 결혼을 비판한 것을 보면 그는 사회 현안에 대해 매우 강한 비판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 요한이 예수님께서 사회 현안보다 개인들에게 말씀을 전하고 병자를 고치는 등의 일을 하시는 것을 어떻게 생각했을지 궁금합니다. 예수님께로 로마와 헤롯의 세력을 축출하고, 자신을 감옥에서 구출하길 기대했다면, 예수님께 대한 원망을 가졌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면 예수님의 사역을 전해들은 후, 자신이 기대하는 일보다 더 본질적인 사역을 하신다고 생각하면서 기뻐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요한의 경우를 보면서 우리 입장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어떻게 하시길 기대하는 것일까요? 여러 가지 문제가 많은 대한민국 사회에 개입하셔서 정치, 사회, 경제, 문화 여러 분야에 구체적인 일을 행하셔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이런 생각을 하노라면, 예수님께서 우리 사회를 방치하시는 게 아닌가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히틀러를 끌어내리려고 암살에 가담한 것으로 알려진 본 훼퍼 목사님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그러나 이런 갈등을 생각하면서 내리는 결론은 예수님을 우리에게 맞추려 해서는 안 되고, 우리가 예수님께 맞춰야 하겠다는 것과, 예수님께는 모든 것에 대한 계획과 섭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쪼록 주님의 손길이 우리를 구원하시길 기대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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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0-01
  • [소강석 칼럼]길이 아니어도 가야할 길
    주님, 코로나의 폭풍에 부러진 갈대들이 보이시나요. 꺼져가는 등불 아래서 흐느껴 우는 남루 한 영혼들의 울음소리도 들리신가요. 차가운 달빛에 길 잃고 쓰러진 겨울의 들판, 갈대들의 신 음소리가 아우성치고 끝이 보이지 않는 코로나 의 밤은 절망과 우울, 분노와 회의의 검은 사신들을 보내어 도시의 성벽을 허물고 있습니다. 아니, 영혼의 화원들을 짓이기며 찔레와 엉겅퀴로 가득한 폐허의 도성으로 만들려 하고 있습니다. 주여, 언제까지 입니까? 어느 때에야 햇살 눈부신 아침이 오는 것입니까? 아직도 닭 우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 정적의 밤, 여전히 코로나의 어둠은 자욱하고 한국교회는 찢기고 상하여 쓰러져 가고 있습니다. 끝없이 밀려오는 반기독교적 악법을 막아내기에도 점점 힘겹습니다. 그러나 저희는 아직도 하나 되지 못한 채 분열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저희는 언제까지 연합하지 못하고 기존의 성만 수성하려고 하는 것인가요. 길이 없다고 말하면서 성 밖을 나서지 않는 것일까요. 아니, 그 길을 가면 가시에 찔리고 엉겅퀴에 상하고 목마름에 쓰러질 것이라고 말하며 아예 길을 나서려고도 하지 않는 것일까요. 그러나 길이 아니어도 가야 할 길이 있고 길이어도 가지 않아야 할 길이 있습니다. 연합의 길은 아무리 멀고 험해도 반드시 가야 할 길이고 분열의 길은 아무리 편하고 좋아보여도 가지 말아야 할 길입니다. 저희는 지금까지 너무나 오랫동안 분열의 길을 선택했고 성을 쌓은 채 문을 닫았습니다. 그러나 주님, 이제는 그 성문을 열고 나와 비록 길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반드시 가야 할 연합의 길을 걷게 하여 주옵소서. 저는 이 길을 열기 위하여 지금까지 온 몸으로 부닥치며 걸어왔습니다. 분열하기는 너무나 쉬웠지만 하나로 만드는 것이 이토록 힘들다는 사실을 다시 깨닫습니다. 그래서 저도 포기하고 싶고 의문과 회의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과연 이 길이 맞는 것인지, 끝이 보이지 않는 길 위에서 지쳐 쓰려지고 잠 못 드는 불면의 밤 을 지새울 때도 많았습니다. 만약에 저 개인적인 업적이나 공적에 대한 사욕 때문에 여는 길이라면 당장에 멈추게 해 달라고 눈물의 기도를 얼마나 많이 드렸습니까? 그때마다 주님은 단 한 번도 부정적인 시그널을 보여주신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제가 기드온처럼 다시 한 번 감히 여쭙습니다. 이것마저도 주님이 원하시는 길이 아니라면 포기하겠습니다. 그럼에도 주님께서 가야할 길이라고 명령하시면 길이 없어도 그 길을 가겠습니다. 그 외롭고 고독한 황야에서 차가운 이슬에 젖고, 별빛에 기대어 잠드는 밤을 보낼지라도, 저는 한국교회 연합의 새 길을 열기 위하여 기꺼이 그 길을 가겠습니다. 물론 지금까지도 주님이 인도하셨고, 성령님의 부축 없이는 단 한 발자국 도 걸어올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요즘 따라 제가 더 지쳐가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때로는 심장이 조이고 숨 쉬기도 답답할 때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마침내, 첫 걸음을 내딛는 준비를 시작하였습니다. 이제 막, 한국교회 연합이라는 호가 출항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주님, 그 어떠한 풍랑과 파도도 헤쳐 나갈 수 있는 동력을 주옵소서. 그리고 우리 모두가 함께 손을 잡고 역사의 새 길을 열어가게 하옵소서. 다른 생각과 다른 주장들도 마침내 어둔 밤을 비추는 별빛이 되게 하시고 흐린 별이라 하더라도 아침의 태양으로 떠오르게 하소서. 한국교회가 하나 되면 코로나의 잔인한 겨울도 물리칠 수 있습니다. 코로나를 아웃시키고 풀잎이 돋아나는 봄의 들녘에서 흩어진 갈대 들이 붉은 심장의 꽃으로 다시 만나는 환희의 계절이 다가오게 할 수 있습니다. 주님, 다시 한 번 간구합니다. 저희 스스로 차갑게 손 놓아 버린 분열의 밤을 쫓아내버리고 다시 하나 되는 눈부신 아침이 오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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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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