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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연구]오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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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고 계실 때,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아들들과 함께 예수님께 와서 청탁을 했습니다. 마태복음 20장 20~21절입니다. <20 그 때에 세베대의 아들의 어머니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니 21 예수께서 이르시되 무엇을 원하느냐 이르되 나의 이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이때 예수님께서는 대답 대신 질문을 하셨습니다. 20장 22절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그들이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잔을 자신들도 마실 수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여기 <내가 마시려는 잔>이란 십자가의 죽음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시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중이었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이 이 잔의 의미를 알고 있었는지 의심스럽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그들은 그 잔을 마실 수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이들의 대답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은 놀랍습니다. 20장 23절입니다. <이르시되 너희가 과연 내 잔을 마시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내가 주는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예수님께서는 야고보와 요한이 순교의 잔을 마신다고 하더라도, 예수님의 좌우편 자리는 하늘의 하나님 아버지께서 정한 이에게 돌아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치명적 오해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나는 주님을 위해 고난의 잔을 마셨으니, 주님의 좌우편은 내 자리가 될 것>이라고 기했는데, 막상 전혀 다른 사람이 그 자리에 있다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얼마나 부끄러울까요?
에스더서에 나오는 하만이 그랬습니다. 에스더의 사촌 오빠인 모르드개는 대궐 문에서 일을 보던 하급 관리였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는 대궐 문을 드나드는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에 있던 하만에게 절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아마도 하만이 신에게나 드릴 만한 절을 요구했기 때문에, 유다인인 모르드개로서는 그렇게 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 여겨집니다. 어쨌든 이로 말미암아 모르드개를 미워한 하만은 모르드개 뿐 아니라, 유다 민족 전체를 도륙하도록 아하수에로 왕에게 허락을 받은 터였습니다.
어느 날 하만은 모르드개를 죽일 수 있게 해 달라는 청을 하려고 일찍 왕을 찾았습니다. 그런데 그 전날 밤 잠이 오지 않던 아하수에로 왕은 궁중 일기를 읽게 했는데, 모르드개가 빅단과 데레스의 반역을 막은 일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때 모르드개에게 상을 주지 못한 것을 안 왕은 모르드개에게 줄 상을 의논하려고 하만을 기다리던 참이었습니다. 왕은 <왕이 존귀하게 하기를 원하는 사람에게 어떻게 하여야 하겠느냐>고 물었고, 이 순간 일생일대의 치명적 오해를 하게 되었습니다. 하만은 왕이 존귀하게 하기를 원하는 자가 자신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왕의 명령은 뜻밖이었습니다. 왕이 존귀하게 하려는 사람은 모르드개였습니다. 그는 모르드개에게 왕복을 입히고 왕의 말에 태워 온종일 수산성을 돌면서 <왕이 존귀하게 하시는 사람은 이렇게 한다>고 외쳤습니다. 그리고 그날 밤 에스더가 베푼 잔치에 두 번째로 갔다가, 그의 악한 음모가 드러나 죽음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오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자신은 잘 믿는다고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그렇지 않은 경우가 있습니다. 사람이 보는 것과 주님께서 보시는 것은 다릅니다. 마태복음 7장 22~23절입니다. <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이런 오해에 빠지지 않으려면 겸손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반대의 경우엔 망신하게 될 것입니다. 언제나 부족함을 느끼고 겸손하게 하나님을 섬기길 원합니다. 그리고 진실한 믿음을 가지도록 힘써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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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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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칼럼]오해를 풀고 참 소통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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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방미를 앞두고 너무나 큰 부담을 가졌습니다. 3년 전 참전용사 행사를 하러 갔을 때, 정말 3일 밤을 꽉 새웠거든요. 이번에도 그럴까봐 정말 가슴이 조마조마했습니다. 그래서 방도 혼자 쓰고 어떻든지 잠을 자려고 노력하였습니다.
저는 미국에 도착하자마자 시작되는 참전용사 초청행사를 섬겼거든요. 3시간 넘는 행사는 저뿐만 아니라 구순을 훌쩍 넘긴 한국전 참전용사들에게도 적지 않는 피로감을 느끼게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웬일인가요? 그분들은 시차가 없어서 그런지, 끝까지 꼿꼿한 자세로 앉아서 경청하고 박수하며 감탄하시는 것입니다.
저는 이튿날 추모의 벽에 가서 헌화식을 한 후, 주일에는 워싱턴 한인장로교회에 가서 설교를 하였습니다. 이 행사에 축사를 하기 위하여 동행하신 이언주 의원님은 오후에도 북한 주민의 인권과 한국과 관계되는 분들을 만나자고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저의 건강을 생각해서, 저 대신 박요셉 목사님과 만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만남과 대화의 요지를 전해 들었습니다.
그다음 날은 공항으로 가는 귀국길에 올라야 했지만, 이언주 의원님께서 대한민국과 동아시아 전략가요 담당관인 존 제이 리안(John Jay Ryan) 담당관을 만나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 자리는 목사님이 꼭 같이 가야 한다”고 해서 가게 되었습니다.
아침 일찍 일어나 미 국무부로 들어갔습니다. 저는 처음에는 아무 말도 안 하고 이언주 의원님과 존 제이 리안 담당관과의 대화만 듣고 있었습니다. 제가 가만히 들어보니까, 대화의 요지는 대미 투자, 조선소 설립 문제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이미 미국은 조선소를 폐기한 거나 다름이 없대요. 그래서 대한민국이 도와줘야 새로운 배를 만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거기에 전문가가 아니니까 듣고만 있었습니다. 이언주 의원님은 유창한 영어를 구사하면서 한국의 입장에서 전략적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한 40여 분을 그런 얘기를 하다가 한국 주무 담당관이 갑자기 저에게 질문을 하는 것입니다. “소 목사님께서는 한국교회 주요 지도자인 줄로 알고 있는데, 왜 정부가 나서서 교회를 박해하고 국회에서는 종교단체 해산법을 추진하고 있는 것입니까? 왜 가만히 지켜보고 있습니까?” 그러면서 여러 가지 극단적 예를 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 국장님, 저도 그런 몇몇 사례에 대해서는 굉장히 깊은 유감을 표현하였고 도가 넘는 일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국장님께서 오해하는 부분이 있는 것 같습니다. 종교단체 해산법이 교회폐쇄법이 아니라는 것만은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누가 그런 정보를 갖다주고 그런 오해를 심어줬는지는 몰라도 그건 완전히 사실과 다릅니다. 종교단체 해산법은 신천지나 통일교의 영업을 막기 위한 것입니다. 기성교회, 정통교회를 폐쇄하기 위한 법은 결코 아닙니다.”
그러자 “통일교와 신천지가 기성교회와 다른 점이 무엇입니까?”라고 묻는 것입니다. “국장님, 미국에도 수많은 이단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 이단들은 사회적, 문화적 병리현상을 일으키는 컬트 집단이지요. 통일교와 신천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컬트 집단을 해산하기 위하여 법을 제정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일부 교회와 목회자들이 그걸 교회폐쇄법으로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나서서 그 법을 발의했던 몇몇 의원님께 전화해서 ‘이렇게 한국교회가 많은 우려를 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목적이 좋아도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것은 서로 간에 오해와 충돌 관계를 일으킬 수가 있습니다. 적어도 그 법을 발의하기 위해서는 기존 교회 혹은 정통 교회에 대한 예외조항을 만들어야지, 아무리 선한 목적을 가지고 법을 만들어도 그 법이 정통 교회까지 악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랬더니 “그럴 수가 있겠네요. 우리는 정통 교회를 보호하고 컬트 집단의 비즈니스를 막기 위해서 발의를 했는데 목사님 말씀을 듣고 보니 오해의 소지가 있네요. 당장 이 법을 발의하지 않겠습니다. 이 법안은 폐기하겠습니다. 그리고 정통교회가 동의할 만한 법안을 만들겠습니다. 목사님께서 큰일을 하셨군요. 귀한 정보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면서 아주 화해로운 분위기로 바뀌게 된 것입니다.
그때 제가 그런 얘기를 했습니다. “이러한 상황과 팩트를 트럼프 대통령께도 잘 보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자 그분이 “폴라 화이트 목사를 아십니까?”하는 것입니다. “저는 모릅니다. 국장님께서 소개시켜 주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제가 트럼프 대통령을 만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최선을 다해 노력해 보겠습니다.”
그분의 말씀이 립서비스였는지 진정성의 말씀인지는 몰라도 듣기에 어색하지는 않았습니다. 거의 1시간 반 가까이 걸친 대화였지만 거침없는 이야기를 서로 주고받았습니다. 어쩌면 그분들은 미국의 조선업보다 한국교회를 더 염려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그 염려가 긍정적 염려라기보다는 오해가 섞인 염려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그 오해와 염려를 풀어주고 왔지만 공항으로 오는 길에 여러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국교회는 자정능력을 가지고 정화하고 각성하며 부흥운동을 일으켜야 합니다. 한국교회마저도 이념에 갇혀 대국 사상을 가져야 한단 말입니까? 누군가가 그런 오해를 하도록 잘못된 정보를 가져다 주었을 텐데요. 꼭 그렇게 해야 했을까요? 조금이나마 대한민국을 오해하고 있었던 부분을 풀어주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한결 가볍기도 하고 뿌듯하기도 했습니다. 저는 앞으로도 기회가 될 때마다 이런 소통과 화해 사역을 잘 해내겠습니다. 방미 일정 동안 저를 위해서 기도해 주신 모든 성도님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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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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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칼럼]그들의 피에는 헤게모니가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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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년 이탈리아의 뭇솔리니 파시즘 정권에 의해 투옥되어 20년 형을 받은 안토니오 그람시(Antonio Gramsci, 1891~1937)에게는 풀 수 없는 수수께끼 같은 물음이 하나 있었습니다. ‘왜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삶을 갉아먹는 자본주의 체제를 무너뜨리지 않고 동조하는가?’ 기존의 마르크스주의가 대답할 수 없었던 질문입니다. 그리고 고심 끝에 그가 나름대로 찾아낸 답이 바로 ‘헤게모니’였습니다. 체제의 지배는 ‘강제’(coercion)뿐만 아니라 ‘동의’(consent)에 의해 이루어지는데, 억압적 기구가 아니라 교육·언론·예술 등을 통해 이데올로기를 유포하고 이를 자발적으로 수용하게 하는 일종의 ‘문화적 지배’가 바로 ‘헤게모니’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사람들은 이를 ‘패권’이나 ‘주도권’을 상징하는 말로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사실 따지고 보면 그리스 도시국가의 ‘맹주권’을 가리켰던지라 본래 의미로 회귀한 셈이기도 합니다. 고대 그리스에서 이 헤게모니를 얻기 위해 수 세기 동안 아테네와 스파르타와 테베 등이 서로 얼마나 경쟁했습니까? 그런데 현대에 와서 이러한 ‘헤게모니 쟁탈전’이 유독 치열한 전장이 있습니다. 바로 ‘진보’를 자처하는 진영입니다.
진보의 뿌리는 프랑스 대혁명 시절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국민의회(Assemblée nationale)가 소집되자 의장을 중심으로 오른쪽에 성직자와 귀족을 중심으로 한 보수파가 앉았고, 왼쪽에는 왕정 타파와 신분제 폐지를 부르짖던 개혁파들이 앉았는데 이들을 ‘좌파’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혁명을 주도했던 진보 진영에서 정치의 헤게모니를 둘러싸고 치열한 다툼이 벌어집니다. 먼저는 온건한 지롱드파와 과격한 자코뱅파가, 나중에는 급진파 내부에서도 로베스피에르와 당통이 주도권을 두고 싸웠습니다. 엎치락뒤치락하던 끝에 최종 패권은 아이러니하게도 나폴레옹에게 돌아가 버리고 말았지요. 1917년 혁명 이후 러시아에서도 헤게모니를 둘러싸고 치열한 다툼이 벌어졌습니다. 레닌의 후계 자리를 두고 일어난 스탈린과 트로츠키의 살벌했던 헤게모니 쟁탈전은 결국 망명지(멕시코)까지 쫓아온 암살자에 의해 트로츠키가 죽임을 당함으로써 막을 내렸습니다. 1960년대 중국 공산당 내부에서 벌어졌던 헤게모니 쟁탈전도 엄청났지요. 실용주의 노선으로 마오쩌둥(毛澤東)의 헤게모니에 도전했던 류사오치(劉少奇)도 결국 감옥에서 비참하고 쓸쓸하게 죽었습니다. 이후 덩샤오핑(鄧小平)이 중국의 패자가 되기까지에도 더욱 치열하고 살벌했던 헤게모니 쟁탈전이 있었습니다.
물론 어떤 체제든 주도권을 둘러싸고 헤게모니 쟁탈전이 벌어지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유독 진보 진영의 헤게모니 쟁탈전이 치열해 보입니다. 그람시도 말했듯이 ‘진보’는 기득권과 맞서 싸워야 하기에 정치적 유전자 속에 헤게모니를 향한 투쟁심이 더 뚜렷하게 각인되어 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해 보았습니다. 지금 한국의 여당 내부에서 벌어지고 있는 소위 ‘명·청 갈등’ 내지 ‘친명과 반명’의 대립도 이런 관점에서라면 얼마든지 해석이 가능한 현상입니다. 이제 출범한 지 1년밖에 되지 않은 신정부 내에서 개혁의 과제들이 산적해 있고 게다가 숨 가쁘게 돌아가는 국제정세에 고유가와 환율급등 및 부동산가격의 도전이라는 민생 현안과 무엇보다 젊은 층의 신(新) 참정권 운동으로 혼란이 가중되는 이 시점에 도대체 여당 내부에서 저리도 다투는 이유는 무엇인가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여기에 ‘그들의 피에는 헤게모니가 흐른다’라는 수사적 표현으로 조심스레 답을 제시한다면 무리한 해석일까요? 1987년 민주화운동으로 대통령직선제를 쟁취한 후 대선 정국에서 진보 진영이 동교동파와 상도동파로 분열하여 결국 보수파에 승리를 내어주었던 역사 역시 외부를 향했던 투쟁심이 헤게모니를 둘러싸고 내부로 역행한 결과라고 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헤게모니’는 성경에도 여러 번 등장합니다. 즉, 명사로는 “다스리는 자”(마 2:6), “말하는 자”(행 14:12), “인도하는 자들”(히 13:7), 동사로는 “여기고”(빌 2:3), “여길, 여김”(빌 3:7, 8), “여기라”(약 1:2)로 나타납니다. 그람시의 ‘헤게모니’가 사람들의 의식과 상식을 지배하는 힘이듯, 성경 속 개념 역시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가치관에 끌려다니지 않고 하나님의 관점으로 세상을 해석하는 주도권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헤게모니에 관련하여 무엇보다 예수께서 하신 말씀이 중요합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막 10:43-44), 여기서 “크고자 하는” 혹은 “으뜸이 되고자 하는”이 바로 헤게모니를 좇는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들(그리스도인)의 핏속에는 어떤 헤게모니가 흘러야 하겠습니까? 섬김과 종이라는 역설적 헤게모니가 아닐까요? 목숨까지도 오직 나라와 국민을 위해 내놓을 수 있는 그런 예수적 헤게모니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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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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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의말씀]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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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기도입니까? 사랑입니까? 순종입니까? 헌신입니까? 물론 그 모두 다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의 뿌리에는 반드시 믿음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위기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을 수 있었을까요? 사도 바울에게는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나님께서는 사도 바울의 모습을 통해 우리에게 중요한 진리를 가르쳐 주십니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위기를 기회로 만든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 말씀을 통해 우리도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믿음을 배우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 여러분,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믿음은 어떤 믿음입니까?
첫째, 위기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는 믿음입니다.
참된 믿음은 현실을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위기의 현실을 외면하는 것도 아닙니다. 믿음은 위기보다 더 크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문제보다 하나님의 계획을 더 크게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같은 상황인데 결과가 달라집니다. 그래서 믿음은 우리의 질문을 바꿉니다. “왜 하필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났습니까?”에서 “하나님께서 이 일을 통해 나에게 무엇을 이루시길 원하십니까?”로 질문을 바꾸어 놓습니다.
오늘 우리의 삶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실직이 위기일 수 있습니다. 질병이 위기일 수 있습니다. 사업 실패가 위기일 수 있습니다. 관계의 깨어짐이 위기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위기 속에서도 일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위기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찾기 시작할 때, 위기는 더 이상 우리 인생의 장애물이 아니라 하나님이 일하시는 통로가 됩니다.
그러면 여러분,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믿음은 어떤 믿음입니까?
둘째, 있는 곳에서 최선을 다하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성공보다 충성을 기뻐하십니다. 달란트 비유를 보십시오. 다섯 달란트 받은 종이 주인의 칭찬받았습니다. 그런데 두 달란트 받은 종도 똑같이 칭찬받았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 하나님은 결과보다 충성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얼마나 성공했느냐?”를 먼저 묻지 않으십니다. “얼마나 충성했느냐?”를 먼저 물으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오늘 하나님께서 맡기신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십시오. 가정에서 최선을 다하십시오. 직장에서 최선을 다하십시오. 교회에서 최선을 다하십시오. 보이는 열매가 없어도 최선을 다하십시오. 그때 하나님께서 위기를 기회로 바꾸어 주실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믿음은 어떤 믿음입니까?
셋째, 하나님의 선하신 결과를 신뢰하는 믿음입니다.
로마서 8장 28절은 말씀합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모든 것”입니다. 여기에는 우리의 성공도 포함됩니다. 우리의 실패도 포함됩니다. 우리의 눈물도 포함됩니다. 우리의 상처도 포함됩니다. 우리의 질병도 포함됩니다. 우리의 고난도 포함됩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에 들어가면 하나님의 선을 이루는 재료가 됩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모든 것으로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손을 바라보고 하루하루 믿음으로 살아가기로 결단할 수 있길 축복합니다.
그리하여 사도 바울처럼 위기를 기회로 만들고, 절망 속에서도 소망을 발견하며,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경험하는 저와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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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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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적경영학개론]AI와 기업경영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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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1분기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영업이익이 57조원과 37조원으로 사상 최대 실적을 올렸다. 생성형 AI 기술의 열풍이 전 산업으로 확대되고, 이를 구동하기 위한 HBM 메모리와 차세대 AI 가속기 수요가 증가하며 초유의 이익이 발생한 것이다. AI 인공지능(Artificial Intelligence)은 인간의 학습능력, 추론능력, 지각능력, 자연언어의 이해능력 등을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실현한 기술을 의미한다. 초기 AI가 체스나 바둑과 같은 규칙 안에서 최적의 수를 찾는 좁은 의미의 것이었다면, 지금의 AI는 방대한 데이터를 기초로 텍스트, 이미지, 영상, 코드 등 콘텐츠를 스스로 창조해 내는 생성형 AI(Generative AI)로 진화하였다.
그리고 많은 기업이 자율주행, 정밀 의료, 스마트 팩토리, 금융공학 등 산업의 AI 인프라 구축을 위해 투자와 혁신을 도모하고 있다. 그러나 성장의 이면에는 인간의 일자리 상실, 부의 양극화, 딥페이크(Deepfake), 거짓 정보로 인한 오염, 알고리즘에 내재된 편향성과 차별 등을 염려하는 시각도 있다. 그러면 이러한 요소들을 포함해 AI의 물결이 기독경영인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일까? AI 인공지능에 대한 성경의 직접적인 언급은 없다. 그러나 인간의 모든 시대의 활동, 특히 기업의 경영에 대해 성경은 명확한 기준을 제시한다. 본 글은 성경적 경영학개론 다섯번째 칼럼으로 ‘AI와 경영’을 주제로 다음 4개의 성경적 원리를 제시하고자 한다.
첫째는 청지기적 AI 기술 경영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시고 세상을 다스리고 지킬 청지기적 문화 명령을 주셨다(창1:28, 2:15). AI 기술은 비즈니스의 업무 효율성을 포함, 인간의 질병 원인을 찾아내고 생태계 파괴 기후의 데이터 자료 분석 등 다양한 모습으로 긍정적 역할한다. 그러나 성경은 이익의 극대화나 효율성을 위해 인간이 AI 시스템의 부속품처럼 취급되거나 통제하는 것에 대해 반대한다. 이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으로 고유의 존엄성을 갖고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둘째는 데이터 윤리이다(잠11:1, 암5:24). AI는 인간이 입력한 데이터에 의존해 학습한다. 데이터에 조작된 거짓 정보나 잘못된 편견이 포함된다면 이를 그대로 확대 재생산하여 기업과 사회에 피해를 주는 속이는 저울 역할을 할 수 있다. 실제 과거 대출 승인, 채용 심사, 복지 수급자 선정 등에 AI가 특정 계층을 불합리하게 차별한 사례도 지적을 받고 있다. 따라서 AI 기업의 경영인은 바른 데이터 입력과 축적을 기초로 정직한 의사결정을 하여야 하며, 나아가 아모스 5장의 교훈처럼 ‘정의가 물같이 공의가 마르지 않는 강같이 흐르게’ 기업윤리를 창출해 가는 수행자 역할을 하여야 할 것이다.
셋째는 기술의 한계 인식이다(창11:4). 실리콘밸리의 기술 지상주의자들은 AI와 생명공학을 결합하여 인간의 한계인 죽음마저 극복하고 생명을 창조하려 한다. 그러나 이는 하나님의 주권을 침범하는 행위이다. AI는 인간의 죄를 대속해 구원할 능력이 없다. 따라서 경영자의 리더십은 다양한 연구개발과 투자는 하되 기술의 한계를 겸손히 인정하는 데서 출발하여야 한다. ‘우리가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다’는 바벨탑과 같은 교만에서 벗어나, 기술을 하나님이 허락하신 경계 안에서 절제하며 사용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넷째는 이웃 사랑과 섬김의 실천이다(마22:37-39, 25:40). AI 기업의 호황을 통해 그 수익성이 주목을 받고 있다. 그러나 이윤은 최종 목표가 아닌 섬김의 수단(Vehicle)으로서 가치를 갖고 있어야 한다. ‘마음과 뜻과 목숨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고 성경은 교훈하고 있다. AI 기술이 특정 기업의 수익 창출 수단을 넘어, 그리스도의 사랑과 자비를 나누며 소외되고 연약한 자들을 위해서도 사용될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특별히 지구촌 곳곳 제3세계 국가의 경우 열악한 환경적 요소로 인해 AI는 물론 의료 교육 등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곳이 너무나 많아 그 섬김의 실천이 요구된다.
결론적으로 AI와 기업경영, 산업의 발전은 앞으로도 지속될 전망이다. 반도체 산업의 영업이익 호황 또한 국가 재정수익과 기업의 해외경쟁력 확보를 위해 좋은 시그널로 받아들여진다. 아울러 성경적 경영은 기독경영인에게 끊임 없이 도전하고 실천해야 할 과제이다. AI 기술 경영도 예외가 아니다. AI를 통해 하나님 나라의 의와 복음이 선한 모습으로 전파되는 사례가 더욱 많아지기를 기도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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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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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건축칼럼]유럽의 공동화 현상이 주는 공간의 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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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의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가지고 있는 유럽의 교회와 성당은 이미 공동화되어 교회의 본질적 기능을 상실한 지 오래되었다. 이런 현상은 한국 교회 건축에서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현대는 하루가 과거 수년간의 시간을 변화시키고 있다. 인공지능과 로봇 산업은 그 사이클을 더 가속화시키고 있음을 지금 우리는 보고 있다.
유럽의 교회가 공동화되는 원인은 우리에게 반면교사가 될 것이다. 사회적 요인은 별도로 하고, 건축과 공간적 측면에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유럽의 교회는 공간의 구조가 예배 중심 공간으로 편중되어 있다. 전체 연면적 중에서 예배 공간이 70퍼센트 전후를 점유하고 있다. 모든 공간의 중심이 본당 위주로 건축되어 있다. 현대 사회의 다양한 문화적·사회적 요구를 수용할 수 없는 구조이다. 지역사회와도 전혀 소통할 수 없는 구조이다. 이것이 공동화의 주된 요인이다.
둘째, 지역사회와 연결되지 못한 공간 기능이다. 교회가 위치한 지역과 소통하거나 근린센터로서의 기능이 부재하다. 그 이유는 본당 위주로 공간이 편중되어 있어 지역과 함께하거나 소통할 수 있는 여지가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셋째, 과도한 외관의 상징 체계이다. 교회라는 인지성을 시각적인 측면에서 해결했다. 과도한 종합이다. 지붕, 스테인드글라스의 확실한 입면 등은 건축물의 유지·보수에 많은 비용을 지출하게 했고, 공간이나 기능의 효율성은 오히려 더 약화시켰다. 교회라는 상징은 눈에 보이는 것에서 공간의 체험으로 바뀌어야 한다. 종교적 건축물은 공간이 주는 느낌과 분위기, 공간의 경험에서 오는 거룩성이 더 본질적이기 때문이다. 크기의 압도에서 오는 상징성의 표현은 중세 시대의 종교 건축이 주는 특징이다. 우리는 아직도 건축에서 우리 교회가 더 랜드마크적 스케일을 추구하고 있다.
건축을 계획하고 준비하는 과정이라면 무엇보다 건축 후에 교회가 공동화 현상에 직면하지 않는 방안에 대한 연구가 선행되어야 한다.
공간을 계획하고 용도와 기능의 분배를 계획할 때 본당의 비중을 줄이고, 교회와 지역사회가 유기적으로 연합되는 측면에서 고려해야 한다.
본당은 40퍼센트 미만, 지역사회와 소통하는 공간은 30퍼센트, 교육 공간은 30퍼센트의 균형 있는 공간 배분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그다음에 세부적 용도와 기능이 수립되어야 우리 교회는 지속 성장이 가능한 교회로 기능할 것이다. 지금보다 10년, 20년을 보고 계획하는 안목의 확장성을 고려할 시점이다. 많은 물질과 수고로 건축된 교회가 정체되는 이 역설은 공동화가 주는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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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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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규교수의 역사탐색]엑소몰로게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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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교회 역사에서 맞닥뜨리는 흥미로운 단어 중의 하나는 엑소몰로게시스(Ἐξομολόγησις)라는 용어이다. ‘공개 참회’ 혹은 ‘공개적인 회개’라는 뜻이다. 이 단어는 두 개의 접두사, 하나의 어근, 그리고 명사화 접미사로 구성되어 있다. 따져 보면 이 단어는 ‘...로부터 밖으로’ 라는 의미를 지닌 ex-(ἐξ)와 ‘같은’ 혹은 ‘동일한’의 의미를 지닌 접두사 호모(homo-, ὁμο-), 그리고 ‘말하다’(원형동사 λέγω)라는 뜻의 로그(log, λογ- )에 접미사 시스(sis, -σις)가 결합되어 있는데 현대적 의미로 해석하면 내가 지은 죄나 잘못을 밖으로 드러내 말한다는 의미인데, 공개참회(public penance)를 의미하는 단어였다. 이를 라틴어에서는 exomologesis로 쓰고 있다. 이 용어는 초대교회적 상황에서 사용되었는데, 2세기 라틴교부인 테르툴리아누스(Tertullianus, 160~220)가 203년 저술한 ‘참회론’(De poenitentia)에서 찾아볼 수 있다. 포에니텐치아(Poenitentia)가 개별 참회(Private Penance)를 의미했다면, 엑소몰로게시스는 공적 참회를 의미했다.
당시 교회는 세례 후에 범한 배교, 간음, 살인과 같은 대죄(중죄)는 용서받을 수 있는 기회가 한 번뿐인데, 그것은 ‘공개적인 참회’를 통해서 가능하다고 가르쳤다. 이 공개적인 참회를 엑소몰로게시스라고 불렀다. 테르툴리아누스는 몬타누스 이단으로 기운 시기에 쓴 『정결론 De pudicitia』에서는 배교, 간음, 살인과 같은 중죄는 교회가 용서해줄 수 있는 권한을 벗어난 범죄라고 주장하기도 했지만, 당시 교회는 엑소몰로게시스를 통해 용서받을 수 있는데 세례받은 후에는 오직 한번만 가능하다고 했으나 실제로는 한번으로 제한되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엑소몰로게시스는 어떻게 행해졌을까? 참회자는 공동체 앞에서 거친 베옷을 입고 머리에 재를 뒤집어쓰고 일정기간 금식하며 죄를 자백해야 했다. 때로는 참회의 의미로 성도들이 회집하는 집회소 출입구에 엎드려 있으면 출입하는 성도들이 참회자를 밟고 지나도록 했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세례를 구원의 방주로 비유했는데 방주가 파선당할 수 있다고 보았고 이때 엑소몰로게시스가 널빤지와 같은 역할을 하여 마지막 구원의 기회가 된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엑소몰로게시스가 행해졌던 사례는 데키우스(Decius) 박해 이후였다. 249년 봄 황제가 된 데키우스는 250년 1월부터 기독교를 모질게 박해했으나 251년 6월 트라키아를 침공한 동게르만계 고트족에 맞서 싸우다가 아브리투스 전투에서 아들과 함께 전사했다. 이로서 박해는 끝나고 잠시 평화를 누렸다. 그런데 박해시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배교했던 이들이 다시 교회로 돌아오고자 했다. 감독이었던 키프리아누스는 배교했던 이들이라 할찌라도 교회는 엑소몰로게시스의 과정을 거쳐 이들을 받아드릴 수 있다고 보았다. 물론 죄의 경중에 따라서 참회 기간이나 참회 정도를 달리했다. 이때 노바투스로 시작된 노바티안들(Novantian)은 배교한 자를 받아들이는 교회는 참된 교회일 수 없다며 교회를 분리하여 분파운동을 벌였다. 이들은 지상의 교회는 배교자를 사면할 수 있는 권리가 없고, 배교자를 받아드리는 것은 교회의 거룩성을 훼손하는 일이라고 주장했다.
유사한 사례가 디오클레티아누스 박해후에도 재현되었다. 303년 다시 대박해가 시작되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군대 내 신자 숙청을 시작으로 교회당 파괴, 성경 소각, 성직자 투옥 등 기독교 말살정책을 폈다. 뿐만 아니라 모든 신자들에게 황제숭배와 우상숭배를 강요하는 등 조직적인 박해를 가했다. 이때 상당한 정도의 배교자가 발생했다. 그러다가 다시 평화를 누리게 되었을 때 배교자들이 다시 교회로 돌아왔다. 이때 교회는 엑소몰게시스를 통해 배교한 이들이라도 교회가 받아드릴 수 있다고 보았다. 아우구스티누스도 같은 생각이었다. 당시 네 단계의 엑소몰게시스를 시행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첫 번째 단계는 예배당에 입장하지 못하고, 밖에서 베옷을 입고 서서 들어가는 성도들에게 눈물로 기도를 부탁하는 우는 자로서 3~4년을 보내게 했다. 두 번째 단계는 예배당 현관까지 들어와 성경봉독과 설교는 듣게 하였으나 기도에는 참여할 수 없는 3년, 세 번째 단계는 예배당 안으로 들어와 회중과 함께 무릎 꿇고 참회 기도를 할 수 있으나 성찬에는 참여하지 못했다. 이 기간이 7년이었다. 4번째 단계는 예배의 모든 과정에 동참하고 성찬에 참여할 수 있었다.
배교했던 성직자들 또한 엑소몰로게시를 거쳐 성찬을 베풀 수 있는 권한을 회복할 수 있었다. 이런 환경에서 일어난 운동이 도나투스로부터 시작된 도나티스트운동(Donatists)이었다. 이들은 배교한 성직자들의 복권을 반대하고, 배교한 전력이 있는 이들이 집례하는 세례와 성찬을 인정하지 않았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들의 분리주의적 완전주의적 교회관에 반대하면서 “교회는 알곡과 가라지가 심판날까지 함께 썪여 있는 곳”이라고 하면서 도나티스트들을 반대했다. 심지어는 국가의 공권력을 동원하여 이들을 진압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를 계기로 아우구스티누스는 성례의 효력은 집례자의 거룩에 기초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 이후 ‘엑소몰로게시스’는 서서히 사라지고 오늘의 로마교의 고해성사로 발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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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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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칼럼]AI 시대에 성도와 교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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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는 지금 인공지능(AI)이라는 문명의 전환기를 맞이하고 있다. 산업혁명이 인간의 노동을 변화시켰고, 정보혁명이 인간의 소통 방식을 바꾸었다면, AI는 인간의 사고와 판단의 영역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실질적으로 필자도 설교 원고를 마무리하거나 칼럼의 문장을 정리할 때 인공지능의 도움을 받는다. 따라서 AI는 교육, 경제, 의료, 문화는 물론 종교 생활에도 적
지 않은 영향을 주고 있다. 이처럼 전환기의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기대와 두려움이 공존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기독교인은 기술의 발전 앞에서 지나치게 불안해하거나 맹목적으로 의존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역사의 주관자는 인간의 기술이 아니라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성도들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창 1:1)고 고백한다. 그러므로 역사의 시작과 끝이 하나님의 손에 있기에 우리는 어떤 시대를 만나든 믿음으로 살아갈 수 있다.
AI 시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정보가 아니라 지혜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AI를 통해 수많은 정보를 손쉽게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정보가 많다고 해서 반드시 지혜로운 것은 아니다. AI는 자료를 제공할 수는 있지만 무엇이 옳고 그른지,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지 분별하는 능력까지 줄 수는 없다. 최근 가짜 뉴스와 딥페이크 영상이 사회적 문제로 떠오르는
것도 같은 이유이다. 기술이 발전할수록 진실을 분별하는 영적 통찰력은 더욱 중요해진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세상의 정보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하며 영적 분별력을 키워야 한다.
또한 성도들은 문명이 주는 편리함 속에서도 영성을 잃지 말아야 한다. AI의 가장 큰 장점은 편리함이다. 그러나 신앙은 편리함만으로 성장하지 않는다. 기도와 말씀 묵상, 예배와 섬김은 시간을 투자하고 인내하는 과정을 통해 깊어진다. AI가 설교 자료를 정리해 줄 수는 있지만 기도를 대신할 수는 없다. 성경을 요약해 줄 수는 있지만 성령의 감동을 대신할 수는 없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기술이 아니라 믿음을 통해 세워진다. 따라서 AI를 유용한 도구로 사용할 수는 있지만 결코 하나님을 대신하는 자리에 둘 수도 없고, 두어서는 안 된다.
AI 시대일수록 인간의 존엄성은 더욱 중요해진다. 인공지능은 계산하고 분석하며 인간의 언어를 흉내 낼 수 있다. 그러나 사랑하고 희생하며 공감하는 것은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하셨다고 말씀한다. 인간의 가치는 능력이나 생산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에 있다. 예수님께서는 병든 자를 만나 주셨고, 죄인의 눈물
을 받아 주셨으며, 외로운 사람들의 친구가 되어 주셨다. 이러한 사랑과 공감은 어떤 기술도 대신할 수 없다. 그러므로 교회는 AI 시대일수록 더욱 사람을 소중히 여기고 사랑을 실천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따라서 교회의 공동체성은 더욱 중요해질 것이다. 현대인들은 다양한 네트워크에 연결되어 있지만 정작 깊은 관계는 잃어가고 있다. 온라인 소통은 늘어나지만 외로움은 줄어들지 않는다. 이러한 시대에 교회는 함께 예배하고, 기도하며, 울고 웃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초대교회가 세상을 변화시킨 힘은 뛰어난 기술이 아니라 사랑의 공동체성에 있었다. AI가 발전할수록 교회는 더욱 따뜻한 공동체로 세워져야 한다. 사람이 보여야 한다.
또 교회는 AI를 무조건 거부할 필요도 없다. 하나님은 기술과 문화를 복음 전파의 도구로 사용하셨다. 인쇄술과 방송과 인터넷의 효용성과 확장성은 선교의 지평을 넓혔다. 중요한 것은 기술이 아니라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의 가치관과 목적이다. 교회는 기술을 두려워하기보다 성경적 가치관을 따라 선용해야 한다. AI 시대에도 인간은 여전히 죄인이며 하나님의 은혜를 필요로 한다. AI가 정보는 제공하나 용서는 할 수 없다. 사람의 질문에는 대답하나 영혼은 구원할 수 없다. 인간 존재의 가장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답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
AI가 세상을 바꾸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AI의 문화를 생성하는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것은 여전히 복음이다. 기술은 끝없이 발전하고 변화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 세상이 인공지능의 능력에 감탄할 때, 성도들은 하나님의 지혜를 의지해야 한다. 사람들이 기술의 미래를 말할 때, 성도들은 하나님의 나라와 부활과 영생을 노래해야 한다.
AI 시대를 살아가는 성도들과 교회의 사명은 분명하다. 기술을 두려워하지도, 우상화하지도 말고,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로 선용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어떤 시대에도 변하지 않는 복음을 붙들고 하나님과 더욱 깊은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결국 미래를 결정하는 것은 기술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이다. 이것이 AI 시대에도 교회가 흔들리지 않는 이유이며, 세상
가운데 존재해야 하는 이유이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사 40:8)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히 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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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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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법특강]요한 낙스는 왜 교회법을 ‘권징서’라고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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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장로교회는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16세기 종교개혁 당시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의 지도자 중 한 사람은 요한 낙스(John Knox, 1513-1572)다. 그는 본래 로마 천주교회의 사제였으나 스위스 제네바에서 목회하는 요한 칼빈에게 배웠고, 제네바에 있는 영국 피난민교회 목사로 봉사했다. 그 요한 낙스가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의 기틀이 되는 <제1권징서>를 만들었다. ‘요한’ 이름이 들어가는 다른 5명 요한과 함께 영국 메리 여왕의 치세 동안 제네바의 영국인 피난민교회에서 사용하던 <제네바 기도서>(Genevan Form of Prayers)를 기초로 개정해서 만든 <제1권징서>는 1560년 스코틀랜드교회 총회에서 승인되었다.
제1권징서는 총9장이다. 제1장은 복음에 반대되는 모든 교리는 철저히 금지되어야 한다는 것을, 제2장은 세례와 성만찬의 성례, 제3항은 우상숭배 폐지, 제4항은 목사직과 목사의 적법한 선출, 제5장은 목사의 사례비와 교회의 재산분배, 제6장은 교회의 재산, 제7장은 교회의 권징, 제8장은 장로와 집사의 선출, 제9장은 교회의 정책(설교와 성경해석, 혼인, 장례 등)을 각각 다룬다.
스코틀랜드 장로교회 교회법을 ‘권징서’라고 부르는 만큼 <제1권징서>는 ‘교회적인 권징’(Discipline)을 중요하게 여겼다. “선한 법과 그 법을 엄격하게 시행하지 않고서는 국가가 번영하거나 오래 유지할 수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 세상의 칼이 간과하거나 벌하지 못하는 잘못을 책망하고 교정하는 교회적인 권징의 질서 없이는 하나님의 교회가 순수함에 이를 수도 없고 지킬 수도 없다.” 예를 들면 술취함, 무절제, 위증, 가난한 사람에 대한 억압, 저울과 자로 속이는 일, 중상모략 등의 일은 교회가 마땅히 다루고 반드시 벌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로마천주교회의 영향으로 지금 교회 안에서 악이 엄격히 처벌되지 않고 있음을 개탄하며, 하나님의 교회는 이 모든 자, 세상의 칼이 처벌해야 할 마땅한 자들까지도 징계해서 공적으로 회개할 때까지 기도와 성례에 참여하지 못하게 하라고 지적한다. 또 <제1권징서>는 권징이 신중하게 진행되도록 권징의 절차를 자세하게 말한다. 범죄가 은밀하고 소수에게만 알려져 있고, 의혹의 단계일 때는 개인적으로 모든 악의 모양에서 멀리하도록 권고하라고 한다. 그러나 범죄가 공개적이고 간음, 술주정, 싸움, 비속한 욕설, 저주와 같이 가증스러운 범죄일 때는 치리회(당회) 앞에 소환하라고 한다. 만약 그가 진심으로 회개하면 교회는 받아들여야 한다. 언제든지 죄인이 진심으로 회개하고 악한 길에서 돌이키면 하나님은 그가 범한 죄악을 하나라도 기억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겔 18:21-22, 33:14-16). 그런데 만약 그가 회개하지 않고 완고할 때 당사자 이름을 공개하지 않은 채 교회 앞에 알리고 마음이 감동해서 진정으로 회개하도록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도록 부탁해야 한다. 그래도 회개하지 않는다면 두 번째 주일까지 교회 앞에 광고하나, 세 번째 주일에도 회개하지 않는다면 치리회를 통해 출교를 공포해야 한다. 출교가 공포된 후에는 가족을 제외하고 교인은 그와 교제하지 못하도록 했다.
<제1권징서>는 어떤 신분의 사람이든지 다스리는 자든 다스림을 받은 자든, 설교자든 가장 가난한 사람이든 죄를 범했을 경우 모두 권징에 순종해야 함을 말한다. 교회의 눈과 입은 일관되고 비난받아서는 안 되기에 특히 목사의 생활과 대화는 부지런히 연단되어야 한다. <제1권징서>는 목사를 도와 권징의 일을 담당할 치리회를 언급한다. 이 말은 치리회의 가장 큰 일은 권징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목사와 장로와 함께 집사도 치리회 회원으로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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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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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연구]자기 죄를 자복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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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날 세례 요한이 유대 광야에 나타나 죄를 책망하면서 회개를 촉구하는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그 말씀의 권세는 대단했습니다. 사람들의 굳고 교만한 마음이 부서져 내렸고, 거룩한 충격을 받은 사람들은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라고 물었습니다. 군인과 세리까지 가슴을 치며 탄식했습니다. 요한은 <회개에 합당한 열매>, 즉 변화된 삶을 요구했고, 결단하는 이들에게 요단강에서 세례를 주었습니다. 당시 요한은 온 유대를 충격과 기대로 가득 채웠습니다. 요한의 권위가 대단했기 때문에 예루살렘의 사람들도 혹시 그가 오시리라고 예언된 메시아인가 생각했을 정도였습니다. 요한복음 1장 19절입니다.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네가 누구냐 물을 때에 요한의 증언이 이러하니라> 이게 요한의 능력이었습니다.
이 대목에 눈길을 끄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은 요한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이 <자기 죄를 자복했다>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1장 5절입니다.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다 나아가 자기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라> 이 말씀을 읽을 때 성령님께서 깨닫게 하시는 게 있었습니다. 그것은 오늘 우리는 <자기 죄는 자복하지 않고, 남의 죄나, 공동체의 죄만 언급>한다는 것입니다.
교회에서나 교계 연합 모임 등에서 회개하는 기도를 드릴 때가 많습니다. 그때 자칫 우리는 대한민국의 죄, 한국교회의 죄 등을 고백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거기 우리 자신의 죄는 빠져 있다는 것입니다. 공동체의 죄를 자백하지만, 그것은 <자백>이라기보다는 단순한 <언급> 혹은 분노한 <고발>일 때가 많습니다. 자백은 마음을 찢고 탄식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다시는 그렇게 하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로 우리를 하나님께 드릴 때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공동체의 죄를 언급할 때는 객관적 사실을 약간의 분노와 염려로 언급하는 데 그칠 때가 많습니다. 이렇게 할 때 영적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는 남을 비판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자신은 의인이 되는 것입니다. <한국교회의 죄를 용서하소서>라고 기도할 때, 은근히 <나는 그렇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건 큰 문제입니다. 세례 요한의 말씀을 들은 이들은 <자기 죄>를 자복했습니다. 남의 죄나, 공동체의 죄는 아무리 자복해도 구원에 이르지 못합니다. 죄의 용서와 구원은 자기 죄를 고백할 때, 우리 각자에게 주어지는 은혜입니다.
1907년의 평양대부흥운동은 사실은 <대회개운동>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하디 선교사에서 시작한 회개가 원산을 거쳐 평양으로 이어졌고, 그것이 장대현교회를 중심으로 거대한 회개 운동으로 이어졌기 때문입니다. 당시 장로였던 길선주 목사께서 자신이 친구가 임종하면서 가족을 돌보아 달라며 맡긴 돈을 가진 일을 회개하는 등 많은 이들의 회개가 이어졌습니다. 그 결과로 성도의 숫자가 늘었습니다. 부흥은 의도된 것이 아니라, 회개에 대한 자연적 결과였습니다. 이에 비해 2007년에 있었던 평양대부흥 100주년 행사들은 회개가 빠진 채 부흥만을 원하여 의도적으로 기획된 면이 있습니다. 이는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습니다.
느헤미야도 우리에게 중요한 것을 보여줍니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온 이들을 통하여 예루살렘에 비록 성전이 세워지긴 했지만, 성 자체는 황폐한 채로 방치되어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 후 그는 그 일이 마치 자신과 자신의 가문의 죄인 듯이 회개했습니다. 느헤미야 1장 6~7절입니다. <6 이제 종이 주의 종들인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주야로 기도하오며 우리 이스라엘 자손이 주께 범죄한 죄들을 자복하오니 주는 귀를 기울이시며 눈을 여시사 종의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나와 내 아버지의 집이 범죄하여 7 주를 향하여 크게 악을 행하여 주께서 주의 종 모세에게 명령하신 계명과 율례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였나이다> 예루살렘이 무너진 것은 느헤미야가 살던 때를 기준으로 백년도 훨씬 더 된 일이었지만, 그는 이것을 자신과 자기 집안의 죄 때문으로 이해했습니다.
기억합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자기 죄>를 자백하길 원하십니다. 그게 참 회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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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5-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