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1-12-08(수)

제13회 한국기독언론대상에 부산일보의 ‘늦은 배웅’ 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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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숙 목사, 제24회 김선경전도사기념상 수상

‘피난민의 어머니’로 불리는 김선경 전도사를 기념하기 위해 남대문교회(담임 손윤탁 목사)가 제정한 ‘제24회 김선경전도사기념상’에 시각장애인들의 쉼터와 무료급식소를 운영하며 복음을 전하는 이희숙 목사가 선정됐다. 남대문교회는 본인이 시각장애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본인보다 더 어려운 환경에 있는 시각 장애인들과 어르신들을 위해 쉼터와 무료급식소를 운영하며 돌봄사역에 전력하고 있는 이희숙 목사에게 21일 제24회 김선경전도사기념상을 수여하고 목회 활동을 격려했다. 이희숙 목사는 2011년 3월 경북 김천 모암동에서 지역의 시각, 지체, 지적 장애우들 에게 무료급식을 시작해 급식뿐 아니라 시각장애우의 삶의 애환을 들어주며 한 영혼 한 영혼 영적 돌봄을 해 나가고 있다. 교회의 돌봄으로 거듭난 시각장애우 들과 협력해 지역 내 장애 우들의 체험활동과 쉼터를 운영해 하며, 가족이 없는 장애우 생활을 돌보는 사역을 지속적으로 수행하고 있다. 이런 사역을 통해 시각장애인들이 세상 속에서 자신들의 삶을 찾아갈 수 있도록 개개인의 은사를 발견하여 삶에 희망을 가질 수 있게 하고 있는 등 공로가 인정되어 전국 여 교역자연합회 추천을 받아 이번에 상을 받게 됐다. 남대문교회 손윤탁 목사는 “한국교회의 처음교회를 자임하는 남대문교회는 지역에서 작은 예수로 살아가며, 성도를 돌보고, 소외된 이웃을 섬기며, 기도하는 여교역자들을 격려하기 위해 24년째 김선경 전도사 기념상을 수여하고 있다”라며, “본인의 장애를 아랑곳 안하고 힘들고 소외된 장애인들을 돌보고 섬기는 이희숙 목사에게 24번째 기념상을 수여하게 되었다”라고 말했다. 이날 김선경전도사기념상을 수상한 이희숙 목사는 “비록 눈도 보이지 않고 몸도 자유롭지 않지만 예배와 교제 그리고 돌봄 사역을 통해 시각장애인들에게 복음의 기쁨을 전하고 있다”라며, “그들의 아픔과 함께 생활했을 뿐인데, 우리 실로암샘물교회 공동체 모든 장애우들을 격려하시는 것으로 알고 겸허히 받겠다”고 수상소감을 전했다. 한편, 김선경 전도사(1905~1997)는 한국전쟁 이후 남한으로 몰려드는 ‘피난민들의 어머니’로 불리면서 월남한 성도들을 돌아보고, 가족과 친지를 찾아 신앙생활을 시작할 수 있도록 도왔다. 30년 사역을 마치고 1975년 정년 은퇴할 당시 김 전도사는 한국교회 최초로 원로 전도사로 추대됐으며, 원로목사에 준하는 예우를 했다. 남대문교회는 지난 1998년 김선경 전도사 기념사업회를 발족하고 매해 한국교회를 섬기는 여 교역자를 발굴, 시상하고 있다.

‘대면예배 집합금지 취소’ 소송 기각

세계로교회와 서부교회가 부산시를 상대로 제기한 ‘대면예배 집합금지 명령 취소’ 소송이 기각됐다. 지난 19일 부산지법 행정2부(부장판사 최윤성)는 “종교시설에서의 대면예배는 동일한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 집회·결사를 통해 내부적으로 형성된 종교적 신념을 외부에 표명하는 것이므로 대면예배를 하는 자유는 종교행사의 자유에 해당한다. 이는 누구도 침해할 수 없는 내부적으로 형성된 종교적 신념을 외부에 표명하거나 실천할 수 있는 자유라는 점에서 최대한 존중되고 보장되어야 한다”고 판단하면서 “하지만 국민의 생명권과 신체권이 침해될 수도 있는 급박한 상황이 발생해 이를 보호하기 위한 목적에서 그 제한이 불가피한 경우라면 행정청이 관련 법령에 근거해 이를 제한할 수 있다고 할 것”이라며 “대면예배를 금지하는 방식으로 종교의 자유를 제한했다는 사정만으로 종교의 자유의 본질적인 내용을 침해했다고 볼 수 없다”고 판결했다. 선고직후 ‘예배회복을 위한 자유시민연대’(대표 김진홍, 김승규)는 법원 정문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헌법상에 기본적인 종교의 자유, ‘예배의 자유’를 불인정한 판결에 아쉬움을 표하며 즉시 항소 할 것을 밝혔다. 예자연은 “이번 행정 소송의 결과는 ‘코로나19 사태에서도 종교의 자유를 규정한 헌법이 밀리거나 잊혀져서는 안된다’라는 사실을 불인정한 판결”이라며 “이번 판결은 정부의 문제점 보다 공공복리를 앞세워 헌법상에 보장된 기본적 권리를 철저히 무시한 판결”이라고 비판했다.

창원남중, 지역교회와 함께 ‘사랑데이’ 진행

창원지역의 유일한 미션스쿨인 창원남중학교(교장 윤기철)는 지난 11월 11일(목) 가래떡데이와 빼빼로데이를 품은 ‘사랑데이’를 진행했다. 창원남중의 자랑인 사랑데이는 올해 지역 교회들의 참여로 의미가 더욱 깊었다. 창원한길교회(성인수 목사), 가음정교회(제인호 목사), 진해동부교회(박종윤 목사), 북창원한빛교회(최성대 목사), 창원은광교회(박해섭 목사), 명곡교회(이상영 목사), 세광교회(황은선 목사) 등 창원지역 교회의 지원으로 이뤄졌기 때문이다. 올해는 샌드위치, 마카롱, 햄버거, 빼빼로, 가래떡 등 다양한 간식을 담아 학생들에게 제공했다. 아침을 먹지 않고 등교하는 아이들에게 아침을 먹이고 싶은 한 기독 교사의 마음이 불씨가 되어 10년째 이어져 온 의미 있는 역사이다. 채희원(중2) 학생은 “먼 거리에서 등교하며 힘들 때도 있지만, 창원남중학교에서 사랑받는 것이 느껴져 사랑데이를 자랑하고 다닌다”고 말했다. 또 장세아(중1) 학생은 “제가 다니는 교회(가음정교회)가 사랑데이를 함께해주어서 너무 자랑스럽고 전도할 수 있는 길이 열려 행복하다”고 말했다. 윤기철 교장은 “사랑데이 행사에 지역교회들이 도움을 주셔서 너무 감사하다. 하지만 창원남중학교가 미션스쿨로 책임을 잘하고 있는지 무거운 숙제처럼 느껴지기도 한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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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 자세로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해 나가는 기독교 운동을 펼쳐 나가자”

Q. 제35회차 총회에서 회장으로 선출되신 소감을 부탁드립니다. A. 코로나 팬데믹이라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 다시 35회기 부산NCC 회장의 소임을 맡아 무거운 책임감을 느낍니다. 모든 교회가 맘 편히 주일 예배조차 드릴 수 없는 상황 속에서 다시 일어나 교회의 신뢰 회복과 극단으로 기울지 않는 교회 이미지 구축에 작은 힘이나마 보탤 생각입니다. Q. 부산NCC가 오래된 역사에도 불구하고 지역교계에 크게 부각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부산NCC를 간략하게 소개 부탁드립니다. A. 부산NCC는 80년대 초 군사정권하에 부산지역에서 민주화운동을 하다 탄압 받고 수배자가 되고 옥고를 치르게 된 민주인사들을 보호하고 지원하며, 함께 시대의 아픔에 참여한다는 정신으로 시작된 ‘부산인권선교협의회’가 그 시초였습니다. 이후 민주화와 하나님 나라 선교를 위한 길에 교회가 더 적극적으로 응답해야하겠다는 공감대를 바탕으로, 1985년 창립총회를 개최했습니다. 이후 민주화와 인권 통일 환경 선교, 교회일치 등을 위해 헌신해 왔으며, 현재 35회기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지역 교회에서는 NCC 활동에 대해 빨간 색칠을 하던 시절이 있었으며, 지금까지도 그러한 정서가 남아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80년대 90년대 부산NCC 인권위원회가 중심이 되어 부산지역의 반독재 민주화 투쟁을 주도했고, 이후에도 지역에서 발생하는 각종 현안에 대해 진보적 목소리를 지속적으로 내어 왔습니다. 최근의 예를 들자면 8부두 미군 부대의 세균 실험실 철거 운동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일반 시민들이 거의 모르고 있던 문제였으며, 부산NCC는 미군 부대 앞 1인 시위를 하는 등 시민들에게 이 문제를 알리고자 노력했습니다. Q. 보수적인 정서가 강한 곳에서 진보적인 색체를 내기 힘들 것 같습니다. 가장 큰 어려움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A. 극단적이라 할 만큼 보수 지향적으로 치우친 지역 교회의 정서들이 아무래도 가장 큰 장벽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보수적 신학을 바탕으로 서로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교리도 진보적 NCC 운동을 힘들게 하는 요소 중의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하는 일에는 진보 보수가 따로 없습니다. 비록 서로의 섬기는 위치가 다를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하나님 나라를 세워나가는 일에는 합력하여 선을 이룰 수 있습니다. 돌이켜보면, 암울하고 막막했던 군사독재 시절에 민주의 깃발을 들고 거리로 나섰던 사람들 중에 많은 이들이 그리스도인들이었습니다. 그분들이 특별한 교육을 받거나 다른 진보적 사상을 가져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이 땅에 하나님의 질서가 세워져서 평화롭고 자유로운 민주적 세상이 이뤄지기를 꿈꾸는 보통 사람들이었고 하나님 앞에 무릎 꿇어 기도하는 기독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많은 교회에서 이들을 백안시하며 이들에게 붉은 색칠을 하던 힘든 시절이 있었습니다. 이런 현상은 현재도 진행되고 있습니다. 자신과 생각이 다르다고 붉은 색칠을 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서로 다름을 인정하며 교회가 하나님 나라를 꿈꾸는 일이며 세상으로부터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아서,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지탄을 받으며 그로 인해 교회의 선한 의지들마저 세상으로부터 배척을 당할 때가 너무 가슴이 아프며 힘든 점이기도 합니다. Q. NCC운동은 우리주변의 가난하고 소외된 자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평화통일, 인권운동 등을 실천해 왔습니다. 민주화운동에 있어서도 NCC는 큰 역할을 감당해 왔는데요, 그런데 어느 시점부터 NCC 활동이 과거에 비해 많이 위축되었고, 예전 같지 않다는 비판에 직면해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리고 NCC 활동을 활성화 시킬 계획이 있으시면 말씀해 주십시오. A. NCC 운동과 활동에 관심을 가져 주신 것에 우선 감사드립니다. 우리 사회에 신자유주의가 확대되면서 개인주의의 팽배와 개인 간 경쟁의 격화가 시민운동의 위축 원인 중의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그에 따라 기독교시민운동을 주도하던 부산NCC도 그러한 세태의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민주화가 진척됨에 따라 반독재 민주화 투쟁이라는 큰 목표의 상실과 사회가 다양화 되면서 발생하는 문제도 다양화 되고 이에 부산NCC가 보다 다양하고 복잡한 주제에 대해 전문화된 대처 역량을 갖추지 못한 것도 하나의 요인으로 작용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이는 기독교 단체가 가지는 한계이기도 합니다. NCC 운동이 예전과 같지 않다는 비판에 대해 우리 자신을 되돌아보고 반성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으며 여전히 부족하다고 하는 현실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부산NCC로만 한정해서 이야기한다면, 저희는 여전히 소수며 비주류라 할 수 있지만 민주화와 인권, 환경, 통일, 장애인, 여성, 이주노동자 등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들을 위한 다양한 활동에 참여하고 헌신해 가고 있습니다. 특히 부산NCC 소속 목사님과 회원님들이 부산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공동대표, 부마민주항쟁기념재단 이사, 탈핵부산시민연대 상임대표, 부산환경운동연합 상임대표, 부산밥퍼 대표 등을 맡고 있는 등 여전히 지역 시민사회 운동에 깊숙이 관여하며, 지역과 사회에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는 일에 헌신하고 있습니다. 운동의 활성화를 위해 현실적으로 당면한 과제라면, 운동과 활동의 내용들을 더 널리 알려 공유하고, 무엇보다 젊은 일꾼들을 발굴하여 함께 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숙제는 대부분의 시민사회단체가 다 같이 겪는 어려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젊은 기독인들의 관심을 끌 수 있는 아젠다를 발굴하여 이를 온라인 홍보하고 청년들의 참여 유도를 통해 청년 기독운동을 활성화할 예정입니다. 따라서 새 회기에는 젊은 기독교인들을 위한 사업의 발굴에 매진할 것이며 이러한 과제들을 위해 기도하며 함께 이루어 나갈 수 있도록 노력해 나갈 것입니다. Q. 부산NCC가 위원회(상임, 특별) 중심으로 활동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어떤 상임위원회가 활동하는지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A. 상임위원회로는 교회와사회위원회, 교회일치위원회, 선교위원회, 신학위원회, 여성위원회, 인권위원회, 평화통일위원회, 환경위원회 등이 있고, 특별위원회로는 장애인위원회, 다문화위원회, 종교대화위원회, 노숙인사회복귀지원위원회, 역사편찬위원회, 생명사랑위원회, 청년위원회, 교육훈련위원회, 조직강화특별위원회 등이 있습니다. 지난 회기에는 우리 사회 모든 영역이 그러했지만, 저희도 코로나19라는 특수한 상황으로 인해 대면 모임을 대부분 취소하였습니다. 그러한 와중에서도 비대면으로 할 수 있는 연대와 연합의 예배는 계속해서 드렸으며 해당 위원회는 다음의 활동을 이어 나갔습니다. ‘일본 정부의 후쿠시마 오염수 무단방류 사건’ 에 대해 항의하며, ‘부산 기독시민사회단체’ 들을 모아 노상 기도회를 개최한 후 항의서한을 일본영사관에 전달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미얀마의 민주화운동을 후원하는 모금 활동도 전개했으며, 8부두 미군 부대의 생화학무기실험실 철거 운동에 나서기도 했습니다. Q. 끝으로 지역교계에 당부하실 말씀이 있으시다면. A. 부산NCC는 지난 세월 그리스도교 일치 및 한반도의 정의 평화 인권과 환경 통일 운동에 힘써왔으며, 앞으로도 고난 받는 이웃과 함께하는 기존의 삶의 자세를 지속적으로 유지해 나갈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보수 기독교계가 지금껏 주장하고 있는 편협한 교리 속에 예수님을 가두어 둘 것이 아니라 보다 열린 자세로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과 함께하는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해 나가는 기독교 운동을 함께 펼쳐 나갈 것을 제안합니다.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사랑의 연대를 이루고 계셨듯이 모든 기독교인들이 한 지체로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연대하며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도구로 쓰임 받기를 소망합니다. 우리가 함께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이 땅에 정의가 강물 같이 흐르며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먹으며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는 평화를 이루기 위해 함께 힘을 합하여 나간다면, 신뢰를 잃어가는 교회를 회복하고 이 땅에 진정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며 온 세상에 광대한 하나님의 나라가 펼쳐질 것이라 굳게 믿습니다.

[저자와의 대화] “아이들과 대화의 물꼬를 여는 작은 문이 되길”

Q. 이번에 <청소년 기독교 세계관 에세이 - 어떻게 생각해?> 책 출간을 축하드립니다. 먼저 간략한 책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A. <청소년 기독교 세계관 에세이 – 어떻게 생각해?>는 책 제목에서 볼 수 있듯이, 청소년을 대상으로 하는 책입니다. 특히, 우리 삶에서 다양하게 경험하는 사건들을 기독교 세계관의 관점에서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를 청소년의 눈높이에서 이해하기 쉽도록 쓰여진 책입니다. Q. 책을 에세이 형식으로 취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A. 이 책의 원고는 제가 있는 브니엘고등학교의 아침방송(명상의 시간 같은) 예배 시간에 읽는 설교문입니다. 이름은 설교문이지만, 10%가 채 되지 않는 4백여 명의 남자 고등학생들이 아직 눈도 뜨지 못한 그 아침에 듣게 하기 위해서는 실제 그들의 삶과 관련 있는 이야기를 담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일반적인 설교의 형식을 취하지 않고 다소 자유로운 에세이 형식으로 사회의 다양한 주제들을 기독교 관점으로 풀어내는 글을 써서 읽어주었고, 그 글들을 다듬고 보완한 책이 바로 <어떻게 생각해?> 입니다. Q. 청소년들이 확립해야 할 기독교 세계관에 관한 책이다. 청소년들에게는 가볍지 않는 주제라고 생각합니다. 건강한 기독교 세계관이 무엇이고, 청소년들에게 왜 중요할까요? A. 일반적으로 세계관은 세상을 바라보는 눈에 씌워지는 렌즈로 비유를 하게 되는데요. 이 세계관은 선천적으로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교육과 경험과 환경에 의해 형성된다고 봅니다. 이 세계관 중에서도 균형 잡힌 성경의 가치관으로 형성된 세계관을 우리는 건강한 기독교 세계관으로 봅니다. 세계관이 교육과 경험과 환경에 의해 형성되는 것이라고 말했는데요, 이러한 세계관은 보통 대학생이 되면 어느 정도 굳어진다고 봅니다. 물론, 대학생이 된 후에도 세계관의 충돌과 붕괴 재창조가 일어날 수 있지만, 오히려 만들어진 세계관을 다시 만드는 것보다, 아직 굳어지지 않은 세계관을 바르게 인도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일 것입니다. 특히 요즘에는 워낙 많은 세계관을 제시하는 미디어가 많아서, 우리의 자녀들이 비성경적인 세계관 혹은 반성경적인 세계관으로 만들어질 수 있는 가능성이 높은 현실입니다. 그런 점에서, 다음세대 청소년들에게 성경적 기독교 세계관을 제시하고 그것이 제대로 뿌리 내리고 열매 맺게 하는 것이야말로 진정으로 다음세대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점점 더 핸드폰과 유튜브 속으로 파고 들어가고 있는 지금의 다음세대들에게 유튜브 알고리즘이 만들어주는 세계관이 아닌 성경적 기독교 세계관을 만들어 주는 일이 필요한 때입니다. Q. 현재 브니엘고교 교목으로, 또 함께하는교회 협동목사로 교회와 학교에서 청소년들을 위한 사역을 하시면서 청소년들의 상황과 필요를 잘 아실 것 같습니다. 이 책을 청소년들이 어떻게 읽히기를 바라시나요? A. 학교에서는 쉬는 시간에 읽을 만한 책이 되면 좋겠습니다. 수행평가, 중간/기말고사, 모의고사 등등으로 우리 학생들은 수많은 ‘읽기지옥’에 빠져 있습니다. 그들에게 또 하나의 머리 아픈 책을 주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쉽게 빨리 읽을 수 있는 얇은 책을 주고, 그것을 읽어냄으로써 또 작은 성취감도 느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가정에서는 큐티책 옆에 부모님과 같이 읽을 책으로, 교회에서는 공과책 옆에 부교재로 함께 읽을 수 있는 토론교재로 사용되기를 바랍니다. Q. 성인 독자는 어떻게 읽으면 될까요? A. 독자를 청소년층으로 국한한 것은, 먼저는 청소년들을 위한 책을 선물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다음세대를 말하면서도 그들을 위한 기독교서적이 상대적으로 적은 것이 못내 아쉬웠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실 우리들의 교회 안에는 신앙을 늦게 시작했거나 영적으로 어린아이 같은 분들도 많이 계십니다. 예수님을 만난 지 이제 3개월 된 분들에게도 일반적인 교회의 양육은 다른 장년들이 받는 신앙교육을 함께 받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요. 이 책은 초신자분들이 이제 막 교회에 적응해 나갈 때 읽을 만한 책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책의 원고가 처음부터 불신자 학생들도 그 대상으로 고려하여 쓴 글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책은 구역모임에서도 초신자들과의 대화의 문을 여는 작은 문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 Q. 책을 쓰시면서 가장 중점적으로 염두 하신 것은 무엇인가요? A. 이제까지는 기독교 세계관을 가르친다고 할 때, 기독교 세계관의 개념, 역사 등을 교육하는 것에 시간을 할애하다보니, 실제적으로 오늘 나에게 있는 일을 기독교 세계관으로 풀어내고 적용하는 일을 연습하지는 못했습니다. 또한, 실제적으로 기독교 세계관을 가르치는 교사가 그의 삶에 기독교 세계관을 어떻게 적용하는지를 보여주지도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 책에서는 ‘기독교 세계관이 무엇인가?’를 이야기하기보다, 기독교 세계관으로 뉴스를 해석하고, 영화를 해석하고, 책을 해석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우리 자녀들에게 모범을 제시하는데 주안점을 두었습니다. 교육학에서 자주 이야기 되는, ‘들은 대로 말하고, 본대로 행동한다’는 말처럼, 기독교 세계관을 적용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이 책에서 제일 중요한 점입니다. 주일학교에서 듣는 설교는 ‘본문에서 상황으로’라는 방향성을 가지지만, 이 책은 ‘상황에서 성경으로’가는 방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설교는 당연히 본문에서 상황을 해석해야 하겠지만, 학생들은 상황에 대한 성경의 해석을 듣고 싶어 하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이 책에서는 최대한 이슈가 되는 시사와 문화와 사회 문제에 대한 성경적 관점을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Q. 책은 20개의 주제에 따라 <내용>, <배경>, <생각하기>로 나뉘어져 구성되어 있다. 책의 구성을 이렇게 기획한 이유에 대해 말씀 부탁드립니다. A. 내용은 설교문을 다듬은 에세이지만, 그것을 그냥 혼자 읽기보다 친구들과 같이 토론하거나 부모님과 함께 토론할 수 있게 하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내용>에서 한 주제를 설명했다면, 그 주제를 다룬 알려진 사회적 배경 혹운 뒷이야기를 더 상세하게 <배경>에서 다루어 줌으로써 토론의 마중물을 제공했습니다. 여기에 직접적인 질문까지 <생각하기>에서 던짐으로써, 이 책은 에세이면서 동시에 교재의 성격을 가지게 됩니다. Q. 앞으로 청소년을 위한 기독교세계관에 관련된 책을 계속 쓰실 계획이 있으신가요? A. 기독교세계관 에세이를 조금 더 쓸 계획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시리즈가 청소년 사역자들이 설교의 예화로, 혹은 제자반의 교재로 사용할만한 자료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아울러, 청소년들에게 ‘기독교세계관’이 무엇인지를 좀 직설적이고 쉽게 풀어내는 시리즈도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 책은 에세이 형식이 아닌 제자반이나 교회학교의 교재로 사용할 만한 책으로 쓰일 것입니다. Q. 마지막으로 이 책의 독자가 될 청소년 사역사와 자녀를 둔 부모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A. 이 책은 학교 현장에서 이미 학생들의 귀에 들려진 내용이고, 그것을 통해서 적지 않은 신자, 불신자 학생들이 반응했던, 어쩌면 검증된 책입니다. 우리 귀한 청소년들에게 자녀들에게 믿고 권할만한 책이 적은 이 시대에, 자신 있게 책장에 꽂아주셔도 된다고 말씀드립니다. 그리고 먼저 읽어주시고, 학생들과 자녀에게 질문해 주십시오. “어떻게 생각해?”

“희망을 전하는 일에 참여해주세요”

Q. 지난 9월 9일은 장기기증의 날이었다. 우리나라에서 장기기증이 언제 시작됐고, 현재 우리나라 장기기증 현황은 어느 정도인지 궁금하다. A. 저희 사랑의장기기증운동본부는 1991년 1월에 설립되어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장기기증 운동을 시작했다. 현재 우리나라의 사후 장기기증 등록 현황은 전 국민의 3.06%인 158만 명이 희망등록에 참여했다. 많은 국민이 참여하신 것 같지만 미국이나 유럽의 대부분 국가는 희망등록률이 30~40%를 넘기 때문에 아직도 많은 참여가 필요하다. Q. 사랑의장기기증운동본부 부산울산지부 소개를 부탁드린다. A. 부산울산지부는 본부 창립 이듬해인 1992년 10월에 설립됐다. 이후 지금까지 장기기증 생명나눔운동을 펼쳐오고 있으며, 현재 부산의 장기기증 희망등록자는 12만4천 명으로 부산시민의 3.65%가 참여해 전국 17개 광역자치 단체 중 서울에 이어서 두 번째로 높은 등록률을 기록하고 있다. 울산은 3.60%로 전국에서 네 번째로 높은 등록률을 기록했다. Q. 장기기증에 대한 교회의 참여(율)는 어느 정도인가? 혹시 통계 자료가 있다면 소개해 달라. A. 현재 부산에 소재중인 교회가 약 1800여개 정도인데 이중에서 270개 교회가 성도들과 함께 장기기증서약에 동참해주셨다. 부산지역은 복음화율도 낮은 편이고 타지역에 비해 보수적인 분위기라고 많이 말씀하시지만, 의외로 교회의 참여율은 높은 편이다. 좀 더 상세히 말씀드리면 참여 교회 수는 고신 측 79개 교회, 통합 측 77개 교회 순으로 참여했고, 참여율은 감리교회와 성결교회들의 참여율이 높은 편이다. Q. 현재 코로나로 많은 사람들이 힘들어 한다. 장기기증도 코로나로 어떤 영향을 받고 있는 지 궁금하다. A. 코로나 이전인 2019년과 이후인 2020년을 비교해 보면, 장기기증 등록률이 44% 줄어들어 코로나 이전에 비해 절반 정도의 감소를 보이고 있다. 장기기증운동은 교회, 학교, 기타 공공기관 등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참여하는 장소가 필요한데, 모든 활동이 제한돼 심한 타격을 받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의과대학생들의 연구용으로 기증되는 시신기증도 학생들의 수업 결손, 시신의 코로나 감염문제 등으로 여러 제약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Q. 장기기증 활성화를 위한 방안으로, 부산울산지부에서 진행 중인 프로그램이 있다면 소개 부탁드린다. A. 서울 본부와 함께 장기기증 온라인 프로그램 강화, 온라인 장기기증 교육프로그램, 언택트 걷기대회 등 여러 가지 프로그램을 운영 중이지만 장기기증운동은 아직 오프라인을 통한 활동의 비중이 큰 사업이다. 부산울산지부는 국민건강보험공단 부울경지역본부와 지난 6월 업무협약을 맺었는데, 저희는 건강보험공단의 연명치료결정제도를 적극 홍보하고 건강보험공단은 민원실에 장기기증서약서를 비치해 시민들이 연명치료결정과 장기기증등록을 손쉽게 할 수 있도록 해 시민들의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Q. 장기기증을 위한 절차는 어떻게 되나? 그리고 장기기증 동참하고 싶으신 분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린다. A. 장기기증희망서약은 지금 당장 나의 신체 일부를 기증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 그때 내 몸의 일부를 기증할 형편이 되면 기증하겠다고 하는 약속이며, 법적 강제성이 있는 제도가 아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기증의 순간 가족의 동의가 꼭 필요한 것이기 때문에 우선은 나와 약속하고 가족에게 이야기 해두는 것이 중요하다. 코로나 시대에 우리 모두가 너무 지쳐있다. 이 힘든 시절에 장기기증을 기다리시는 분들과 그 가족들에게 사람들의 무관심은 더욱 가슴 아프게 다가오고 장기이식을 위한 기다림의 시간은 더욱 길어지고만 있다. 지금 당장 이 분들에게 장기기증의 기적을 전하는 것이 힘든 일이라면 기증서약을 통해 희망을 드리는 일에는 꼭 참여해 주시기 바란다. 그리스도인의 사랑이 많은 사회적 약자들에게 흘려보내어지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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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인문학] 거룩한 분별력과 명확한 통찰력으로 교회의 위기 극복해야

홍석진의 《시선》- 세상을 향한 따뜻한 통찰 - 보수교단의 중견교회 목회자인 저자가 그동안 한국기독신문에 게재한 시사컬럼을 발췌하여 한 권의 책으로 묶은 사회비평 에세이이다. 어거스틴을 전공한 저자답게 “글은 단지 소통의 필요를 채우는 데 급급해서는 안 되며 영혼을 살찌우는 유익함이 있어야 한다”는 어거스틴의 수사학에 부합하는 글이라는 은사 문병호 교수의 평대로 시대와 공감하는 시의적절한 예화와 원전에 대한 해박함, 법대 출신다운 날카로움과 정연한 논리, 무엇보다 군더더기 없는 정갈한 글솜씨가 읽는 이들의 눈길을 사로잡는 매력이 있다. 편을 갈라야 속이 풀리는 이 세태에 양심과 성서의 가르침 따라 어느 한쪽의 진영논리에 휘둘리지 않는 그의 시선은 교회를 넘어 우리 사회의 작은 이들을 향하고 있다. ◇ 저자소개 ∥홍석진 목사 부산에서 중·고등학교를 나와 서울대학교 법괴대학에서 공법을 전공했다. 사법, 행정, 외무고시를 준비 중 척추 뼈가 터져서 인생이 꼬이기 시작했다. 우여곡절 끝에 주님의 강권의 힘에 굴복, 뒤늦게 총신신학대학원에 입학, 목회자의 길을 걷고 있는 저자는 대전 서문교회와 부산 사랑의 교회를 거쳐 현재 온천제일교회의 담임목사로 재직 중이다. 목회 기간 중 세상과 소통하기 위하여 매주 주보에 칼럼을 쓰기 시작, 호응을 얻으면서 교계신문의 칼럼리스트로 이어졌다. 출판사의 간곡한 요청으로 출간된 이 책 《시선》은 저자의 첫 저서이다. 프로테스탄트“우리는 먼저 스스로에게 항의해야 합니다. 혹시 잘못 걸어가고 있지는 않은가. 부지불식 간에 본질에서 멀어져 버린 것은 아닌가, 성경에 투사하여 자문해 보고 고칠 부분이 있으면 과감하게 고쳐서 다시 근원으로 돌아가는 것이 개혁주의의 본령입니다.” 사회비평에세이김길구 이 책은 한국기독신문에 게재된 2017년부터 2020년까지의 칼럼 중에서 뽑은 50편의 칼럼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책표지에는 ‘목사가 쓴 사회비평에세이’라는 소제목이 우선 눈길을 끕니다. 읽고 놀란 것은 중견교회 목회자가 성경 원어부터 자크 라캉, 칼 폴라니 같은 사상가들을 넘나드는 박학다식함 때문입니다. 독서의 폭과 깊이를 가름해 볼 수 있는 책이라고 느꼈습니다. 김현호 저도 복음주의 목회자들이 인문학적 글이나 설교에 약해 사회와 소통하기 어렵다는 선입견을 갖고 있었는데, 그 편견을 깬 책이라 흥미롭게 읽었습니다.홍석진 우여곡절 끝에 목회를 결심하고 다시 만난 주님을 접하곤 기존의 인간과 사회, 그리고 역사를 바라보는 눈이 송두리째 바뀌었습니다. 마치 색깔 있는 안경을 쓴듯한 느낌? 새로운 시선 말입니다. 이런 관점을 한 길가는 사람들과 나누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 생각을 주보와 신문에 썼는데, 책으로 이어질 줄 몰랐습니다. 이 책을 읽고 단 한 분이라도 주님 안에서 거룩한 분별력과 명확한 통찰력, 그리고 새로운 혜안을 얻었으면 좋겠습니다. 김길구 아무리 에세이라 해도 사회비평이라면, 우선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이해해야 하고 개개인의 삶의 모습에 영향을 미치는 사회·역사적 과정에 대한 관계적, 구조적인 종합적 사고가 필요할 텐데‥ 글을 쓸 때 어떤 기준으로 쓰나요?김현호 우리 사회가 극심한 진영논리에 빠져있잖아요? 그 관점에서 본다면 저자가 바라보는 시선은 중립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홍석진 우선 저는 이 방면의 전문가가 아닙니다. 말씀은 우리의 일상 속에서도 적용되어야 한다고 믿는 목회자예요. 교회와 세상이라는 이분법적 구분을 극복해야지요. 그래서 제가 느낀 세상을 글을 통해 소통하고 싶었습니다. 물론 같은 사물을 바라볼 때도 저마다의 시선이 다르겠지요. 저의 글쓰기 작업은 우선 양쪽의 입장을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않게 소개하고, 과연 성경 원문은 이 문제에 대해 어떻게 말하는가를 판단한 후 글쓰기의 기준으로 삼습니다. 교회의 오적(五賊)김길구 그럼 본문 속으로 들어가 보지요. 시인 김지하의 시 제목을 딴 한국교회의 오적을 얘기했는데 한국 교회가 세상을 논하기에 앞서 자성의 뜻으로 우리 문제가 무엇인지를 먼저 알아보죠? 교계의 오적이 무엇인지?홍석진 편의상 오적을 ABCDE로 구분했어요. 우선 부재(Absence)의 문제입니다. 성서 텍스트 해석 부재, 공시적인 통찰력의 부재, 통시적인 역사의식의 부재입니다. 제가 생각하기에는 후자의 두 가지가 젊은이들이 교회로부터 멀어지는 요인이라고 생각합니다. 둘째는 독재(Bonapartisme)입니다. 권위적인 목회자와 조직, 그리고 우매한 평신도들의 맹종이 어우러진 결과입니다. 셋째는 상업주의(Commercial)입니다. 한국교회는 경건이 아닌 「돈」에 물들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넷째는 이원론(Dualism)입니다. 교회와 일상을 구별하는 이중적인 삶이죠. 마지막으로 이기주의(Egoism)입니다. 우리집 뒷마당은 안된다는 님비(NIMBY)현상을 넘어 우리 교회만 아니면 된다는 개교회주의인 님시(NIMCY)현상으로 인해 교회가 위기에 처했지요. 우리가 극복해야 할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차별금지법에 관하여김길구 살기가 각박해져서 그런지 혐오는 우리나라뿐 아니라 지구촌의 중요한 화두 중에 하나인 것 같습니다. 기독교와 혐오 일견 어울릴 것 같지 않은데 역사를 돌이켜보면 혐오를 자양분으로 성장했다는 생각도 들더군요. ‘혐오의 늪에 빠진 한국 교회’라는 분들도 계십니다. 본문 중에는 차별금지법에 대한 언급도 있는데‥김현호 묻지마 반대를 외치는 우리 지역 교계의 풍토에서 이런 주장은 의외인데요?홍석진 저의 주장은 단순합니다. 한자 모순(矛盾)처럼 논리의 모순이죠. 교계의 주장은 “우리는 차별주의자가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차별금지법을 반대한다.” 이런 논리로 우리 교회에 대한 차별을 반대하면서, 동시에 차별금지법에 대해 반대하는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지잖아요. 성경은 차별을 조장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막힌 담을 허무신 분이시니까요. 아젠다 설정을 다시 해야 합니다. 포스트 코로나 국가김현호 코로나19 이전과 이후의 사회는 분명 다를 것이라는 예측이 많습니다. 우리나라도 대응을 잘한 편인데, 앞으로의 대응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홍석진 우리는 팬데믹의 상황 속에서 희미하게나마 그에 대한 답을 얻었다고 봅니다. 첫째, 민주주의적 가치와 절차를 존중하는 나라가 살아남고 발전하리라고 봅니다. 둘째, 형평과 선을 실천하는 나라가 살아남고 발전하게 될 것입니다. 형평과 선은 국제법상의 원칙입니다. 창18:19의 하나님 나라의 핵심 원리인 ‘의와 공도’와 무관치 않습니다. 성경은 나그네와 이방인, 고아와 과부, 가난한 잔에 대한 돌봄과 배려를 ‘공의와 정의’라고 부릅니다. 이 원리가 잘 작동되는 나라는 흥하고 그렇지 못한 나라는 쇠퇴하리라고 봐요. 셋째는 신뢰를 소중히 여기는 나라는 틀림없이 생존하고 발전합니다. ‘포노사피언스’ 세대에 정보를 투명하게 공개한 나라와 비밀주의로 은폐와 조작을 일삼는 나라와는 신뢰면에서 차이가 있겠죠. 신뢰지수가 국력으로 이어질 것으로 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죠. 환경은 교회 본연의 사명김현호 이 책의 내용 중 공감 가는 것 중에 하나는 환경문제에 대한 교회의 대응에 대한 것인데요? 요즘 이상기후에 대한 위기의식이 예전에 비해 많이 높아진 것 같습니다. 기후변화가 우리가 피부로 느낄 정도로 심각한 수준이라는 방증이겠죠?김길구 2019년 환경파괴로 인한 지구멸망의 위기 앞에서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세계 정상들에게 경종을 울린 당시 16세의 스웨덴 소녀 그레타 툰베리의 눈물어린 UN기후행동정상회의의 연설은 인류의 대홍수를 예언한 성경의 인물 노아를 빗대 ‘노아방주급 예언’으로 회자 되고 있습니다. 교회가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요?홍석진 하나님이 주신 창조세계의 모습을 간직하는 일은 교회의 당연한 일입니다. 우선 기후위기를 보는 시선의 차이가 문제입니다. 인류생존의 문제이지, 좌·우 진영의 이념적 문제가 아닌데, 환경문제를 얘기하면 좌파라는 딱지를 부치는 것이 문제예요. 저희 교회가 지금 건축 중이잖아요? 생태적인 교회로 살기 위해서 세 가지를 제안했어요. 첫째는 교회 십자가 색을 붉은 것이 아닌 초록십자가로 하자, 두번째는 지붕을 태양열 집열판으로 하자. 세 번째가 교회 용수를 빗물재순환 분리시스템으로 하자는 것이었는데, 이러 저런 현실적인 이유로 무산되고 말았죠. 아쉽지요. 김길구 길지 않은 시간이었습니다만, 저자의 진리에 대한 갈구와 복음의 진정성을 느끼기에는충분한 시간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매 주제 하나 하나가 여운을 주는 귀한 시간이었습니다. 앞으로 더 좋은 책들을 기대해도 좋을 것 깉습니다. 다음 호에는 꽤 알려진 분이죠? 나의 관계를 재구성하는 ‘바운더리 심리학’의 저자 정신과 의사인 문요한의 《관계를 읽는 시간》을 가지고 얘기해 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정리 : 김길구 】

[기독교교양읽기]“우리는 모두 주님 앞에 서 있습니다”

김응교의《손 모 아》 -시련 앞에서의 시 이야기- 기도하는 손의 모습을 책 제목으로 하였다. 저자 김응교 시인 겸 평론가는 활발한 매스컴 활동으로 대중에게 친근한 문학인이다. 기독교문학을 포함하여 문학의 대중화에 앞장서고 있는 그가 2016년 겨울 KBS국제부 라디오에서 북한에 보내는 라디오 프로그램에 소개된 시편과 2017년 《월간 목회와 신학》 세계기도시에 연재한 내용 중 팬데믹 시대 고통 받는 이들을 위하여 수정 보완하여 엮은 시 해설서이다. 츠빙글리로부터 기형도, 칼 바르트, 릴케, 까뮈, 윤동주, 디킨스, 톨스토이 등 국내외의 유명 문학인과 종교인 등 50여 편의 시편들이 수록되었다. 중학교 졸업식 때 저금통을 깨 기타를 사줬던 저자의 누이가 팬데믹 기간 중에 죽은 개인사도 있어 질병과 슬픔 앞에서란 부제가 더 공감이 간다. 늦가을, 시가 그리운 교인들에게 권하고 싶은 책. ◇ 저자소개 ∥김응교 시인, 문학평론가 문학과 종교는 본래 하나로 출발했다고 믿고 있는 저자는 연세대 신학과를 졸업하고, 연세대학교 국문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87년 분단시대에 시 발표를 시작으로 1990년 한길문학 신인상을 받았다. 1991년 《풍자시, 약자의 리얼리즘》을 실천문학에 발표하면서 평론 활동으로 영역을 넓혀왔다. 1996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대학원에서 비교문학을 공부하였고, 1998년 와세다대학 객원교수로 10년간 강의하였다. 현재 숙명여자대학교 교양교육원 교수로 있으며, 트위터로 대중과 소통하고 있다. ◇ 저서∥ 《씨앗/통조림과 평론집 한일쿨투라》, 《한국시와 사회적 상상력》, 《박두진의 상상력 연구》등 많은 저술이 있으며, 번역가로도 활동 중이다. 비아토르 간 / 2021. 5.25. / 16,000원 ◇ 같이 읽으면 좋은 책 《그늘-문학과 숨은 신》 / 김응교 / 새물결플러스 《처럼-시로 만나는 윤동주》 / 김응교 / 문학동네 《곁으로- 문학의 공간》 / 김응교 / 새물결플러스 #기도는? “기도(祈禱)는 첫째 ‘나’를 잘라내는 영적인 도끼질이다. 내 정욕과 욕망과 고집을 쳐내는 대화의 시간이다. 둘째 더불어 사는 세상을 위해 깨닫게 해 달라는 말씀을 듣는 시간이다. 셋째 그 힘으로 노력하며 살겠다고 다짐하고 고백하는 시간이다.” 김길구 휴가가 예상보다 길어졌네요. 그 사이 박 관장께서는 제8대 부산복지개발원장에 취임하셨습니다. 축하드립니다. 공직에 있어 바쁘실 텐데 이 코너를 계속하기로 하셨습니다. 참가자들의 자원하는 마음이 이 코너가 장수하는 비결 같습니다. 감사드립니다. 인사 한마디~ 박영규 복지개발원은 부산광역시의 사회복지정책개발과 시민에 대한 사회복지서비스를 증진시키는 일을 하는 기관입니다. 시민들의 삶의 질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는 만큼 미력이나마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김현호 3개월을 쉬었다 다시 시작하려니 새로운 느낌이네요. 심기일전해서 잘해보도록 하겠습니다. #팬데믹 시대의 성찰과 위로의 메시지 김길구 오늘은 계절에 어울리는 가벼운 주제로 정했습니다. 흔히들 가을을 사색의 계절이라고 하는데 이번 호에는 문학평론가이자 시인인 김응교의 《손모아》로 정했습니다. 이 책에 대해서 소개해 주시죠? 김현호 요즘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의 모든 매스컴들이 팬데믹 소식을 우선해서 다루잖아요? 이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주는 저명한 분들의 기도문과 시편 등 50여 편을 묶어 해설한 책입니다. 박영규 그동안 코로나19는 많은 신조어를 만들어 내었습니다. ‘코로나 블루’는 우울한 일상을 표현하며, ‘코로나 레드’는 장기화에 따른 분노를, 그리고 분노를 넘어 폭발해 버린 현대인들의 심리상태를 ‘코로나 블랙’이라고 한다더군요. 일찍이 경험하지 못한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자화상인데요. ‘질병과 슬픔 앞에서’라는 부제가 상징하듯 힘들어하는 이들에게 고난에 대한 깊은 성찰과 위로와 희망의 메시지입니다. 김길구 저도 다양한 저자의 이력 그리고 시에 대한 해제까지 있어 한편 한편이 많은 것을 생각게 하여 오랜만에 몰입해서 읽었습니다. 월별로 4~5편씩 구성되어 있는 50여 편의 전 작품을 다 다룰 순 없고 오늘은 가을 편을 중심으로 몇 편만 소개해 보지요. 저는 러시아의 대문호 레프 톨스토이의 마지막 시가 여운에 남습니다. 「(중략) 아버지여, 생명의 근원이시여, 우주의 영이시여, 생명의 근원이시여, 날 도와주소서. 내 인생의 마지막 며칠, 마지막 몇 시간이라도 당신에게 봉사하며 당신만 바라보며 살 수 있도록 날 도와주소서」 이 시를 읊조리다 보면 생의 마지막을 시골의 작은 역에서 객사한 노 사상가가 떠오릅니다. 그 무엇이 이 거인을 거리에서 헤매게 하였을까? 기성교회를 거부하고, 그가 배회하며 그토록 찾으려고 했던 것이 과연 무엇이었을까? 궁금했는데, 이 시를 보고 깨닫게 되었어요. 우리 교계도 거목들의 마지막 모습이 구도자로 보기 힘든 경우가 종종 있잖아요? 마지막 며칠, 몇 시간이라도 하나님을 바라보고 봉사하겠다는 거인의 간절함이 우리를 숙연케 합니다. 김현호 그의 일대기를 보면 유서 깊은 백작 집안의 아들로 태어나 군복무 중인 24살에 작가로서 첫발을 내딛는데, 당시만 해도 그는 권위와 폭력에 길들여 있었고, 40대까지 방탕한 생활을 했어요. 결혼 후 그의 대표작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리나≫ 등을 통해서 명성도 얻었지만, 그의 인생관이 바뀐 것은 그의 나이 42세 때 시작해 50세에 마친 안나 카레리라 집필 시기인 8년여의 기간이라고 해요. 국가와 권력과 종교에 대한 깊은 회의로 자살을 생각했을 정도의 고뇌 끝에 50대에 이르러 그는 회심하게 되었고 58세 때 ≪바보 이반≫이란 작품으로 새로운 모습을 보여줍니다. 박영규 이 단편에서 톨스토이의 분신인 바보 이반은 톨스토이의 좌우명을 그대로 실천합니다. 영리한 사람들은 손으로 일하지 않는다는 악마의 유혹에 “손과 등은 일하라고 주어진 것이다.”라고 말하며 이반처럼 우직한 바보들이 모인 나라야말로 누구도 정복할 수 없는 건강한 나라라고 말합니다. 농노해방운동에도 기여한 그는 기독교인의 실천적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 잘 보여 주고 있어요. 김길구 저자의 전작인 ≪그늘≫을 보면 톨스토이는 헨리 조지가 쓴 베스트셀러 ≪진보와 빈곤≫이란 책을 읽고 큰 영감을 받습니다. 그 결과 당시의 농노제도에 가까운 토지제도를 신랄히 비판합니다. 헨리 조지의 토지 사상을 건너뛰고는 이해할 수 없다는 그의 대표작 ≪부활≫에 서 “땅은 사람의 소유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것입니다.”라는 것을 보면서 이 시대 젊은이들의 좌절과 ‘대장동 사건’으로 시끄러운 우리나라를 보면서 톨스토이는 과연 무슨 생각을 할까요? #선한 힘들에 관하여 김현호 지난 2020년 코로나바이러스가 퍼지면서 제일 많이 읽힌 책은 알베르트 카뮈의 <페스트 La Peste>라는 소설이라고 하는데, 저는 기도문에 실린 네 명의 인물에 주목하는데 도그마에 싸인 교리의 기독교와 부조리한 세계에 맞서 예수의 삶과 변혁적 기독교에는 긍정적인 마음을 가졌던 인물들이죠. 의사 리유, 반항하는 인물 장타루, 성실한 임시직 공무원 그랑, 참혹한 현실 속에서 새롭게 깨달은 인물, 기자 랑베르를 통해 이상적인 ‘선한 사마리아인상’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김길구 책에는 널리 알려진 곡들의 일화를 소개 하고 있는데, 디트리히 본회퍼의 기도문 <그 선한 힘들에 관하여>이 가스펠 <선한 능력으로>로 번안되어 교인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데, 독재자 히틀러 암살운동에 가담한 죄목으로 체포된 후 수감, 종전을 코앞에 두고 1945년 4월 9일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기 전 죽음을 예감하고 그의 약혼자에게 전한 편지에 쓰인 기도문으로 그의 마지막 유작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1970년 작곡가 지그프리 트피치가 곡을 붙인 이 곡을 들을 때마다 마틴 루터의 ‘내 주는 강한 성이요’라는 찬송가 못지않은 감동을 느끼곤 합니다. 전편에 흐르는 신앙의 확신과 죽음 앞에서도 당당했던, 저자의 표현을 빌리면 ‘잔혹한 낙관주의’가 가슴을 여미게 합니다. 박영규 할리우드 애니메이션 <슈렉>에 삽입되어 화제가 된 곡이며, 2008년 로큰롤 명예의 전당과 2010년에는 작곡가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던 2016년 82세로 작고한 캐나다의 다재다능한 시인이자 싱어송 라이터, 배우인 레너드 코헨의 중독성이 강한 노래 <할렐루야>에 대한 얘기도 흥미로운데, 다윗과 밧세바의 금지된 사랑을 노래한 곡인데, 가사가 많은 것을 생각케 합니다. 「(중략) 사랑은 승리의 행진이 아니야 사랑은 차가운 것 사랑이란 부서진 할렐루야~」나 「그래서 내가 사랑으로부터 배운 것은 그대보다 총을 빨리 뽑는 사람을 먼저 쏘는 방법이었죠」라는 노랫말이 부서질 줄 알면서도 사랑하고 욕망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한계와 성서기자의 한 인간의 실수를 눈감지 않고 굳이 다윗의 아내가 아닌 우리아의 아내로 표현한 강직한 역사관, 그리고 부정한 가계에서 태어날 수밖에 없었던 예수의 피할 수 없는 운명 등의 얘기가 흥미롭게 이어집니다. 김길구 50여 편을 다 들려드리지 못해서 아쉽습니다. 한편 한편이 다 귀한 글들 입니다. 이 짧은 가을날 독서삼매경에 빠져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다음 호에는 도서출판 엠마우스에서 펴낸 홍석진 목사의 세상을 향한 따뜻한 통찰 《시선》으로 찾아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정리 : 김길구 】

기독교인이 인문학 공부를 해야 하나요?

디아코니아부산 제2회 기독교인문학 포럼 우선 귀한 시간을 주신 백양로교회와 이를 주관하시는 (사)디아코니아부산 이사장 김태영 목사님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제 사역과 관련하여 기독교인들이 왜 인문학을 알아야 하는지 묻는 분들이 꽤 있습니다. 긍정적인 의미로 묻는 분들도 계시지만, 그렇지 않은 분들도 계시죠. 교단의 선배 목사님 한 분이 교회에서 그런 공부를 왜 하느냐고 해서 제가 ‘종교개혁자 중에는 인문학자들이 많았다’고 했더니, ‘그래서 종교개혁이 엉망인 거야’ 이러시는 거예요. 그래서 말을 더 잇지 못하고 ‘예’하고 말았습니다. 그러한 분들의 인식 속에는 인문학이 기독교의 적으로 교회에 나쁜 영향을 끼친다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실제로 그런 논쟁은 초기 교회사에도 많았습니다. 실제로 터툴리안의 경우 ‘예루살렘과 아테네’가 무슨 상관이 있으며 ‘아카데미아와 에클레시아(교회)는 무슨 관계가 있으냐?며 적대감을 들어 내기도 했습니다. 물론 터툴리안이 유명한 법학자이기 때문에 몰라서 한 말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만, 한국의 기독교인 중에는 이런 생각을 가진 분들이 많습니다. 오늘 이 시간 제가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려고 하는 것은 크게 역사적 맥락과 개념적인 측면에서 설명을 드리려고 합니다. ■ 인문학이란 무엇인가? 실제 인문학이 무엇이냐고 했을 때 우선 동양적 개념에서 인문학이란 말을 더 잘 이해하려면 그 말의 반대말을 알아보면 됩니다. 동양에서는 인문(人文)의 반대 말이 천문(天文)입니다. 천문은 여러분들도 잘 아시다시피 별의 움직임이잖습니까? 하늘에 대한 연구가 천문학입니다. 그래서 천문지리라고 했고 혹은 인문지리라고 했거든요. 그래서 하늘 天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무늬 문자라 의미도 있습니다. 그래서 별의 움직임의 무늬, 자취, 흔적을 조사하는 것을 천문학이라고 한다면, 인문학은 사람의 자취입니다. 뱀이 지나가면 흔적을 남기듯, 사람의 자취를 통하여 사람이 가야 할 길을 연구하는 것을 인문(人文)이라고 하였습니다. 동양에서는 만물을 구성하는 요소로 천, 지. 인(天地人)을 말하는데 지는 지리 즉 땅의 원리 같은 것이지요. 여러분들이 학교를 다니실 때 문·사·철이란 말을 들어보셨지요? 일반적으로 동양의 인문학은 보통 문학, 역사, 철학을 아우르는 개념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들이 쓰는 인문학은 서양적 개념입니다. 인문학은 인문과학, 자연과학, 사회과학과는 다릅니다. 영어로 보면 인문학(Humanities)이란 단어가 humanity 와 liberal arts(교양과목)의 의미로 쓰입니다. 인문과학이란 인간이 무엇인가를 묻는 학문으로 추상적이고 보통적인 인간, 개별적 인간을 다룬다면, 사회과학은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를 다루는 학문으로 사회학과 역사학처럼 공동체 속에서의 관계를 다루고 있습니다. 자연과학은 자연을 연구하는 학문입니다. 그런데 요즈음 개념이 확대돼 이러한 것을 다 아우르는 개념이 되었습니다. 과학의 발달로 자연과학의 도움 없이 - 생물학, 빅뱅이라든지 상대성이론, 불확실성의 원리 등과 신경과학, 뇌과학 같은 것을 안 다루고는 - 인간을 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석, 박사 등이 연구하는 humanity가 전문적이고 학문적인 영역이라면 우리가 말하는 인문학은 liberal arts 즉 시민교양으로서의 대중인문학 입니다. ‘한 사람으로서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 인간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고 그런 것을 교양으로 가르치는 학문으로서의 인문학’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즘 매스컴이나 유튜브 등을 통하여 플라톤아카데미 등 인문학 강좌 등을 쉽게 접할 수 있습니다.. ■ 헤브라이즘 VS 헬레니즘 신학(Theology)이란 단어는 신을 나타내는 theos 와 학(學), 이성, 언어, 논리 등을 나타내는 logos의 결합, 즉 인간을 신의 눈으로 이해하는 헤브라이즘과 인간을 인간의 눈으로 이해하는 헬레니즘이라는 어떻게 보면 서로 상반되는 구조의 산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오래 전에 독일의 여성신학자 도르테 죌레가 예루살렘에 있는 <나와 너>로 유명한 마틴 부버(Martin Buber)를 방문했을 때의 일화입니다. 그녀가 신학을 한다고 하자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부버가 하는 말이 “신학이라…그걸 어떻게 하지?”하는 것이었습니다. 죌레는 이때 비로소 히브리사상과 그리스사상의 차이의 깊이를 이해할 수 있었다고 술회했습니다. 학문으로서의 하나님이 아니라 성경에서 경험하는 인격적 하나님을 어떻게 파악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물론 부버가 신학을 왜 모르겠습니까? 몰라서 그런 말을 하지는 않았겠죠. 신학이란 뜻이 가능하냐는 반어적 표현이겠죠. 헤브라이즘은 하나님 중심의, 인간을 신의 눈으로 보는 것이라면 헬레니즘은 인간을 인간의 눈으로 보는 것입니다. 고신대학교 입구의 비석에 코람데오(Coram Deus) ‘하나님 앞에서’ 처럼, 인간이 인간이기 위해서는 우리의 일상이 항상 신을 인식하며 밥을 먹고 일을 하고 또 사람을 만나는 일 등의 모든 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야 하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창조론에서 본 기독교는 어떠한 존재입니까? 성경은 우리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image of God)대로 창조되었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당시에는 왕만이 신의 형상이던 시절에 하비루 같은 하찮은 민중들에게 맹자의 말을 빌리면 왕후장상 따로 없다는 놀라운 선언을 한 것입니다. 기독교는 인간을 인간의 최대치로 본 것입니다. 그러나 요즘 기독교는 인간을 보잘 것 없는 벌레같은 존재로 낮춰 보지 않습니까? 교회만 오면 죄인, 죄인하며 인간을 폄훼합니다. 구속론으로 보더라도 기독교만큼 인간을 높게 평가하는 종교는 없습니다.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 차이점이 있는데 그 가운데 가장 유별난 점은 신이 인간을 위해 희생하는 종교라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다른 종교는 인간이 신을 위하여 헌신하는 것이라면 기독교는 신이 인간을 위하여 희생된 종교라는 것입니다. ■ 신학과 인문학의 관계는? 리챠드 니이버의 「그리스도와 문화」에 나타난 다섯 모델을 중심으로 1) 대립: 문화에 대항하는 그리스도 2) 일치: 문화의 그리스도 3) 종합: 문화 위의 그리스도 4) 역설: 문화와 역설 관계에 있는 그리스도 5) 변혁: 문화를 변화시키는 그리스도의 다섯 유형이 있는데 비판적 수용과 거리 확보를 통해 문화를 변화시키는 변혁 모델이 바람직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교회사 측면에서 밀접한 관계를 유지해 온 기독교 신학과 인문학과의 관계를 시간이 없어 짧게 말씀드리면, 고대에는 정통신학과 플라톤 주의가 결합했으며, 중세에는 중세신학과 신플라톤주의가 결합하였고, 근대를 연 종교개혁기에는 마르틴 루터, 훌리히 츠빙글리, 장 칼뱅 등 핵심 종교개혁자들은 모두 인문학자였다는 사실입니다. 중세가 몰락하고 새로운 질서 도래를 앞둔 과도기적 상황에서 다시 ‘근원으로(Ad Fontes)’ 돌아가자는 운동들이 전개되었는데 남유럽은 그리스와 플라톤 다시보기의 르네상스로, 북유럽은 성서와 어거스틴 연구의 종교개혁의 영향으로 ‘원전을 원어로!’ 읽는 독서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습니다. 왜 고전읽기운동인가? 한 예로 라틴어로 번역된 불가타역본에는 회개하라를 고해하라로 잘못 번역하여 카톨릭에서는 고해성사가 일상화 되었는데, 헬라어 원어를 대조해 본 결과 오역을 발견하고는 종교개혁자들은 고해성사를 폐지했습니다. 이처럼 인쇄술의 발달과 함께 각 나라의 민족주의 대두로 자국어 성경이 보급되면서 종교개혁의 열풍은 전 유럽을 강타하자 혹자는 종교개혁을 독서혁명이라고 부를 정도였습니다. ■ 인문학을 하는 이유 그러므로 인문고전을 읽는다는 것은 사람답게 살기 위함입니다. 앞서 말했듯이 인문학이란 ‘인간다움’입니다. 인간이 인간답게 산다는 것을 캐묻는 작업입니다. 그렇기에 소크라테스는 성찰하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고 했고, 톨스토이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성찰하지 않는 삶은 짐승과 같다고 했다. G.O.D의 노래 ‘길’의 가사처럼 내가 지금 제대로 살고 있는지,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건지를 묻고 또 묻는 작업입니다. 살기 위해서, 잘 살기 위해서, 살아도 산 것 같이 살기 위해서 우리는 인문학을 읽어야 합니다. 두 번째로 인문학을 한다는 것은 자신과 시대를 성찰하기 위함입니다. 인문학은 거울과 같습니다. 거울이 없다면, 우리는 자신의 얼굴을 알 수도, 볼 수도 없습니다. 현재의 나와 우리의 삶에 대한 성찰의 작업이 인문학입니다. 그렇기에 그 책에는 나, 남 없는 우리 모두의 얼굴이 담겨 있습니다. 내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들여다보는 데는 인문학 만한 것이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인문학을 한다는 것은 시대를 비판하기 위함입니다. 이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성찰하는 학문인 인문학은 비판하는 학문이기도 합니다. 성가시게 예언자처럼 쓴소리, 잔소리를 여과 없이 해대는 것이 인문학의 본령이기 때문입니다. 시대를 해석하기도 하고, 시대를 비판한다는 점에서 인문학은 우리에게 꼭 필요합니다. 다른 하나는 그 인문학을 비판하기 위해서 인문학을 읽어야 합니다. 앞서 신학과 인문학의 관계를 말하면서, 신학이 바라본 인간은 결국 하나님 앞에 선 인간(Coram Deo)입니다. 인간다움이란 창조자 하나님을 제외하고, 구속하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젖혀두고는 설명하기 어려우며, 그것 없이는 참다운 인간을 해명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신학과 신자는 당대의 인문학적 결과물을 유심히 따라가며 세심하게 읽어야 시대를 통찰하고 비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논리적으로 신학은 인문학 없이도 존재할 수 있지만, 현실적으로 인문학 없이 신학은 절름발이에 다름 아닙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누구보다도 인문학을 더 진지하게, 즐겁게 읽어야 합니다. "학생 때 들은 허혁교수의 강의가 생각난다. ‘독일 교인들은 일상에서도 칸트나 하이데거와 같은 담론을 즐기는데, 우리는 명품, 부동산 얘기 밖에 없다. 그런 인문학적 소양의 부재가 지금의 기독교 위기를 초래한다고 볼 수 있다" "문학, 예술 등을 아우르는 인문학은 우리에게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을 제공한다. 그리스도의 정신이 이 땅에 충만하려면 콘텍스트인 인문학적 시각으로 텍스트인 성경을 바라볼 때 더 많은 인간에 대한 이해와 통찰을 얻을 수 있다" "신학은 그 시대의 물음에 대한 기독교적 응답이다. 그런 의미에서 신학과 인문학은 서로에게 상호보완적 관계로 발전해 왔다. 물론 한계가 모호한 지점이 있기는 하다. 최근 인문학의 붐은 상호 소통의 도구가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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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복수의 세상에서 용서를 외치다

상실을 대하는 태도가 믿음을 결정한다 현대영화에서 기독교 영화와 세속적인 영화를 결정짓는 요인 가운데 하나는 상실(喪失)에 대응하는 태도에 달려있다. 건강과 재산을 잃어버린 상황이 전개된다면 세속적인 영화는 욥의 아내처럼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욥2:9)라는 식의 분노로 화면을 채우기 십상이다. 그러나 기독교 영화라면 욥이 말한 것처럼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같이 되어 나오리라’(욥23:10)는 주인공의 고백과 함께 상실과 고난의 의미를 발견하려는 의지를 화면 가득 펼칠 것이다. 그런데 건강과 재산 정도가 아니라 부모나 자식, 형제를 불의한 자들의 손에 의해 잃어버린다면 어떨까? 드라마의 대중적 인기 요소가 ‘갈등’에 있다는 것을 생각할 때 영화는 주인공의 갈등이 크면 클수록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을 가능성이 높은 까닭에 주인공을 극한의 상황으로 내모는 경향이 있다. 이때 기독교 영화가 아닌 세속적인 영화라면 갈등은 분노와 더불어 복수로 이어지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복수는 대중영화에서 갈등을 해결하는 가장 인기있는 방법이다. 관객은 복수를 보여주는 영화를 통해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영화 제작자는 관객의 눈길을 사로잡아 흥행에 성공할 가능성이 높은 까닭에 관객이나 제작자 모두 복수극을 마다할 필요가 없다. 특히 복수극에 자주 나타나는 폭력성에 대해서도 윤리적 비판을 비켜갈 수도 있다. 왜냐하면 액션이란 이름으로 행해지는 복수는 정의로운 심판으로 위장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화에 등장하는 복수의 가장 큰 위험성은 그것이 ‘인간다운 행동’으로 인식되거나 예술의 차원에서 미학의 한 부류로 취급될 때 일어날 수 있다. 박찬욱 감독의 소위 말하는 ‘복수 3부극’은 인간다운 행동으로서의 복수를 묘사한 영화들이다. <복수는 나의 것>(2001)과 <올드 보이>(2003)에 이어서 <친절한 금자씨>(2005)에 오면 복수는 그 잔인성이 사회의 규범적 가치를 초월하여 영혼에 대한 속죄의 방법으로 발전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즉 복수가 인간의 가장 종교적 차원으로 승화되는 모습을 보이기까지 한다. <친절한 금자씨>에서 아이들을 유괴 살인한 백선생(최민식)에 대한 집단적 복수 살해 장면은 종교의례를 방불케 한다. 그들은 일상생활을 영위하던 도시를 떠나 한적한 시골의 폐교의 한 교실 한가운데 백선생을 묶어 놓고 한사람씩 차례대로 잔인한 보복행위를 가한다. 피가 튀지 않도록 우비를 입고 연장을 손에 들고 살해방법에 대한 절차와 방법을 의논하고 들어가는 이들의 모습은 마치 신의 제단에 제물을 바치는 예식행위를 연상시킨다. 죽은 아이들을 위한 속죄 행위로서 벌이는 백선생에 대한 복수는 이미 보복살인이 인간적인 행동으로 정당화하는 수준을 넘어 경건한 예식을 통한 예술적 수준에 이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비나 웜브란트는 달랐다 <사비나:그리스도를 위한 고난, 나치시대>(Sabina: Tortured for Christ, the Nazi Years , 2021)는 루마니아의 공산정권에서 기독교 신앙을 지키다 14년간이나 옥살이를 했던 리처드 웜브란트 목사와 그의 아내 사비나 웜브란트의 사랑과 용서를 그린 아름다운 영화다. 영화의 전반부는 유대인이었던 두 남녀가 만나서 결혼을 하고 기독교인이 되기까지의 과정을 다루었다. 마르크스의 책을 가까이했었던 남편 웜브란트는 결핵에 걸려 요양생활을 하던 중 성경을 접하고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된다. 유대교와 마르크스주의는 역사적으로 기독교와 갈등 관계에 있었다는 점에서 웜브란트의 회심은 진리를 향해 발걸음을 옮기는 사람이 겪게 될 고난과 순교적 신앙을 예고하는 일이나 다름없었다. 영화의 후반부는 루마니아를 점령하며 유대인 사냥에 나섰던 독일군이 소련군에 의해 퇴각당하는 상황에서 일어난 일을 묘사하고 있다. 숨은 유대인을 찾아 나섰던 독일군은 상황이 역전되어 유대인이었던 웜브란트 목사 부부의 도움으로 소련군의 눈을 피해 숨을 곳을 찾는 신세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 영화의 가장 아름다운 장면은 사비나 웜브란트(Raluka Botez)와 유대인 도살자로 불리며 사비나의 가족을 학살한 당사자 보릴라(Gabriel Costin)와의 만남에 있다. 어느 날 밤, 잠을 자던 사비나는 남편으로부터 자신의 가족을 학살한 바로 그 독일군이 소련군의 눈을 피해 자신의 집 거실에 있음을 듣게 된다. 학살자를 눈앞에서 마주한 사비나는 어떻게 행동할까? 분노와 복수의 마음이 머리끝까지 올랐을 것 같지만 영화는 그 반대의 장면을 보여준다. 사비나는 자신의 가족을 죽인 학살자를 끌어안고 입을 맞추며 복음의 핵심이 용서임을 말한다. “복음의 핵심은 용서입니다. 제가 용서받은 것처럼, 당신도 용서를 구하면 주님께서 용서해주실 거에요.” 그리고 배고픈 그를 위해 먹을 것을 준비한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당연한 장면처럼 느껴져야 하지만 낯설게 보이는 것은 우리가 대중영화 속 복수의 논리에 너무 익숙해졌기 때문이리라. 사비나 웜브란트는 철저히 성경적인 사람이었다. “네 원수가 배고파하거든 음식을 먹이고 목말라하거든 물을 마시게 하라. 그리하는 것은 핀 숯을 그의 머리에 놓는 것과 일반이요, 여호와께서 네게 갚아 주시리라”(잠25:21-22)는 성경의 말씀을 그대로 따르고 있지 않은가! 사비나 웜브란트는 예수님이 가르쳐 준 용서를 실천한 사람이었다. 분노와 복수가 넘쳐나는 영화세상에 기독교 영화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순간이 아닐 수 없다. 웜브란트와 ‘순교자의 소리’ <사비나:그리스도를 위한 고난, 나치시대>는 교회가 주목할 만한 매우 특별한 제작과정을 보여주었다. 일반적인 상업영화의 제작 수순을 밟지 않고 <순교자의 소리>라는 선교단체의 후원 속에서 제작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기독교 전문 영화연출자와 교회 혹은 선교기관이 특별한 목적을 두고 극장용 영화제작에 나서는 선례를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연출을 맡고 스태프들을 통솔한 존 그루터스(John Grooters)감독은 ‘순교자의 소리’와 깊은 협력관계를 유지하며 지속적인 영화제작에 나선 사람이다. <사비나:그리스도를 위한 고난, 나치시대>를 제작하기 직전에는 웜브란트 목사의 고난과 신앙을 주제로 한 책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Tortured for Christ)을 영화로 만들기도 했다.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은 공산치하의 루마니아에서 핍박받는 웜브란트 목사와 동료 그리스도인이 고난받는 충격적인 현장을 카메라에 담았고, 한국의 경우 2020년 부활절을 앞두고 유튜브로 공개되어 2만3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관람을 한 기록을 갖고 있다. 또한 2019년에는 한국을 방문하여 북중접경지대에서 선교활동 하다 북한에서 순교한 한충렬 목사와 그의 영향으로 예수를 믿게 된 북한청년의 이야기를 다룬 단편영화 <상철:북한>(Sang-chul: North Korea, 2019)을 제작하기도 했다. 모두 제작을 지원한 선교단체의 특성을 보여주는 영화들이다. ‘순교자의 소리(The Voice of the Martyrs)’는 리처드 웜브란트 목사(Richard Wurmbrand, 1909~2001)가 공산주의 국가의 지하교회를 돕기 위해 설립한 선교단체로 출발하여 현재는 전세계 70여개국에서 핍박받는 그리스도인을 돕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풍선에 성경책을 담아 북한으로 날려 보내는 운동을 하는 단체로 알려져 있다. ‘순교자의 소리’는 웜브란트 목사 부부의 순교적 신앙을 한국교회에 전수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큰 의미가 있다. 여기서 ‘순교적 신앙’이란 자신의 가족을 학살하거나 그리스도인을 핍박하는 사람을 용서하고 사랑하는 일을 뜻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할 때 만일 정부나 권력기관과의 갈등이 빚어진다면 처벌을 감수하더라도 성경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함을 뜻하기도 한다. 일제강점기 때 신사참배를 반대하던 그리스도인들은 옥고를 치러야 했고, 주기철 목사님 같은 분들은 순교로서 신앙을 지키기도 있다. 21세기 대한민국의 그리스도인들은 헌법에 보장된 종교의 자유를 누리고 살고 있지만, 차별금지법 문제나 대북선교, 코로나 시대의 예배의 자유 등 세속적 정부나 권력기관과의 갈등을 경험하고 있어서 순교적 신앙에 대한 이해가 필요한 실정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웜브란트 목사 부부는 예수님이 가르쳐 준 용서를 실천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분열과 갈등이 넘쳐나는 시기에 이 영화를 우리가 봐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영화]‘서울극장’의 종료와 ‘오징어 게임’의 시작

영화의 역사를 새로 쓸 시간 서울극장이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지난 8월 31일을 끝으로 한국영화계에 짙은 발자취를 남긴 채 문을 닫았다. 1960, 70년대 영화의 배급과 제작으로 한국영화계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던 합동영화사의 곽정환 회장은 종로3가에 있던 재개봉관 세기극장을 인수하여 새롭게 단장한 뒤 1978년 현재의 자리에서 서울극장의 시대를 열었다. 오직 한 개의 상영관만을 갖고 있었던 당시의 극장문화에서 서울극장은 종로3가 교차로를 앞에 두고 단성사와 피카디리와 마주하는 위치에서 한국을 대표하는 극장가를 형성하는 데 일조했다. 서울극장은 기독교 영화계의 발전과도 깊은 관계가 있다. 2011년 제9회 서울국제기독교영화제(현. 서울국제사랑영화제)가 서울극장에서 열린 일을 비롯하여 2019년 ‘모두를 위한 기독교영화제’와 2020년 한국기독교영화제 등 한국 기독교계의 영화인들이 모이고 기독교 영화들을 교회와 대중에게 선보이는 사랑방 기능을 수행해 왔다. 이것은 서울극장을 이끌어 온 곽정환 장로와 그의 부인 고은아 권사의 영화선교에 대한 믿음과 의지의 결과이기도 했다. 비즈니스 마인드가 지배하는 상업영화계에서 돈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기독교 영화를 상영하고 기독교 영화계를 알게 모르게 지원했던 일은 대중문화의 영향을 일찌감치 간파한 덕분이었다. 곽정환 장로는 합동영화사를 설립하여 한국영화사의 중요한 작품들을 만든 제작자로도 유명했지만, 영화배우이자 아내인 고은아 권사와 함께 기독교 전문 영화사인 은아필름을 설립하여 한국 기독교 영화발전에 의미있는 족적을 남기기도 했다. 1994년에 서울극장에서 개봉한 <무거운 새>는 곽정환 감독이 직접 연출한 작품으로 기독교계에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 작품은 위인전 형식의 기존 기독교 영화의 틀을 깨고 재미교포사회를 배경으로 현대적인 감각을 가지고 인생의 위기에 임하는 하나님의 역사를 영상에 담아서 기독교 영화의 새로운 면모를 보였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은아필름의 고은아 권사는 <무거운 새>를 시작으로 10편의 기독교 영화 제작에 대한 신념을 밝혔지만, 교회 성도들은 뜻대로 움직여주질 않았고, 기독교 영화의 부흥과 발전에 대한 소망은 새로운 세대에게로 넘어갔다. 아날로그적인 정서가 물씬 묻어나던 서울극장의 페이드 아웃(fade-out, 영화 장면에서 밝았다가 차츰 어두워져서 사라지는 기법). 그것은 어쩌면 기독교 영화의 변신을 요구하는 신호탄인지도 모른다. 코로나19로 인해 가뜩이나 관객을 잃어버린 영화관의 현실은 넷플릭스와 왓챠, 웨이브 같은 인터넷이 되는 곳이면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개인 관람 시스템으로 영화를 몰아가고 있는 중에 있다. 서울극장이 사라진 한국 기독교 영화계가 새로운 디지털 플랫폼 시스템에서 어떻게 자신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지 기대와 걱정이 뒤섞여 있다. 세계인의 마음을 훔친 ‘오징어 게임’ 지난 9월 17일 공개된 <오징어 게임>은 불과 4일 만에 미국을 비롯해 대륙을 가리지 않고 세계 22개국 넷플릭스에서 시청자 조회 수 1위에 올랐다. 최근 <살아있다>와 <승리호>, <킹덤:아신전> 등의 한국영화가 세계 1위에 오른 적은 있지만 9편에 이르는 한국의 시리즈형 드라마가 미국 시장에서 1위를 기록하기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넷플릭스가 2백억을 투자한 몰입도 높은 드라마 <오징어 게임>은 명불허전(名不虛傳)이란 말의 뜻이 무엇인지도 제대로 보여주고 있다. 영화 <남한산성>과 <수상한 그녀>, <도가니> 등을 연출한 황동혁 감독의 재능은 이정재와 박해수, 정호연 등 연기력을 검증받은 유명 배우들의 캐릭터를 잘 살려낼 뿐만 아니라 인간의 가치와 사회 문제를 일깨우는 의미있는 결과물을 만들어 냈다. 특히 한국인 감독과 배우가 참여하고 한국의 문화가 두텁게 입혀진 드라마임에도 불구하고 세계의 넷플릭스 가입자들이 열광할 만한 보편적 주제를 제시함으로써 한류문화가 어떻게 세계인의 눈높이에 다가갈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즉 <오징어 게임>이 단지 한국인들의 호응만을 기대한 것이라면 넷플릭스는 결단코 2백억을 쏟아붓지는 않았을 것이란 뜻이다. <오징어 게임>은 빚에 허덕이며 절박한 상황에 처한 456명의 사람들이 최종 우승자 한 명에게 총상금 456억을 몰아주는 데스 게임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마지막까지 생존한 사람은 막대한 우승 상금을 가져갈 수 있지만, 나머지 455명은 목숨을 잃게 된다. 이 드라마에 대한 찬사와 비난은 한 명을 제외한 참가자 모두의 죽음이 전제되었다는 데 집중되어 있다. 게임 참가자들이 경험하는 6가지 게임의 성격은 개인의 독립적인 능력에 따라 생존이 결정되는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와 ‘설탕 뽑기’도 있지만, 상대의 희생이 있어야 하거나 상대를 희생시킴으로써 살아남아야 하는 ‘줄다리기’나 ‘구슬치기’ 같은 게임도 있다. <오징어 게임>에 대한 찬사는 기성세대가 어린 시절 골목에서 놀았을 법한 천진난만한 놀이가 목숨이 달려있는 잔혹한 게임으로 변할 때 일어나는 감정의 혼란으로부터 시작된다. 놀이동산으로 사용하면 딱 좋을 것 같은 그라운드는 피로 물들고 친분과 인간애로 돈독해진 관계는 하루아침에 피를 보는 사이로 전락하고 만다. 극한의 상황에 내몰릴 때 나타나는 인간의 본능과 욕망의 끝자락을 지켜볼 수 있는 점은 이 드라마가 문화를 초월하여 보편성을 갖게 만든 출발점이기도 하다. 문제는 명확했지만 정답은? 이 드라마가 물질문명을 살아가는 시청자들에게 던지는 질문은 한가지다. 목숨을 잃을 가능성이 있지만, 인생을 한방에 역전시킬 수 있을 만큼 엄청난 돈을 가질 기회가 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이 드라마는 자본주의 시대에 맞는 매우 현실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 현대인들이 얼마나 돈의 유혹에 취약한지를 <오징어 게임>은 참가자의 자유의지와 민주적인 절차를 통해 설명하고 있다. 즉 <오징어 게임>이 범죄드라마로 읽혀지지 않는 것은 게임이라는 형식을 빌려 쓰고 있을 뿐만 아니라 게임 참가자들의 자발적 동의로 진행되는 자유롭고 민주적인 진행방식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참가자 절반이 찬성하면 얼마든지 게임을 중단한다는 나름대로 계약도 맺고 있다. 드라마는 참가자들의 불안과 불만이 터져 나오면 숙소로 사용하는 체육관 천장에 달려있는 커다란 돼지저금통에 가득찬 5만원권 지폐 뭉치들을 보여주며 이러한 멘트를 스피커를 통해 흘려보낸다. “우리는 당신들에게 단 한 번도 강요한 적이 없다. 당신들은 모두 스스로의 의지와 선택으로 이곳에 왔다.” 사기꾼들이 피해자들에게 늘 하는 말이긴 하지만 이 드라마에서는 인간의 욕망이 죽음의 위협에도 멈추지 않음을 보여준다. 왜냐하면 게임의 참가자들은 드라마 초반부에 살상의 현장을 목격한 후 게임을 중단하고 세상으로 복귀한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돈에 쪼들리며 사는 세상이 더 지옥 같다는 말을 뒤로하고 대부분의 참가자들이 다시 게임 현장으로 돌아오는 모습은 이 드라마의 주제 가운데 하나인 현대인의 돈에 대한 충실한 욕망을 드러낸다. 생존을 위한 서바이벌 게임이지만 우승자에게 거액의 상금이 배당되는 ‘오징어 게임’의 규칙이란 돈과 생명이 서로 맞바꿀 수 있을 만큼 균등한 교환가치를 지니는 자본주의 사회의 실상을 대변하고 있는 것이다. <오징어 게임>은 기독교 가치관으로 들여다 볼 때 심각한 오류를 드러낸다. 첫째는 재미를 추구하는 목적으로 설정된 이 게임에서 과연 타인의 죽음과 죽음 앞에서 일어나는 타인의 욕망을 지켜보는 재미가 과연 인생을 만족시켜주는가에 대한 성찰의 부족이다. ‘오징어 게임’의 주최자이자 001번을 받은 첫 번째 참가자이기도 한 노인 오일남(오영수)은 죽음을 맞이하면서 ‘오징어 게임’의 생존자가 된 성기훈(이정재)에게 이 잔혹한 살상게임을 하게 된 이유를 밝혔다. 즉 돈에 대한 욕망을 쫓는 사람들이 죽고 죽이는 모습을 지켜보는 데서 오는 즐거움, 그리고 더 나아가서 참여하는 데서 오는 재미를 느끼기 위함이라고. 둘째는 ‘오징어 게임’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온전한 자유에 대한 해답을 영화는 제시하지 못하는 점이다. 게임의 실무 책임자인 프론트맨(이병헌)은 이전 게임의 우승자로서 게임의 모순성을 직접 체험한 사람이지만 오히려 게임의 진행자로 남아 있다. 주인공 성기훈은 그 많은 돈은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한번 게임 참가를 독려하는 전화를 뿌리치지 못한다. 결국 돈이 아니면 재미를 쫓는 인생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못하는 한계를 보여준다. 재미를 인생의 가치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성경은 역사상 가장 럭셔리한 삶을 살았던 솔로몬왕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한다.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1:2) 넷플릭스와 기독교영화 인터넷으로 각종 영상물을 즐길 수 있는 넷플릭스(Netflix)는 관객이 사라진 코로나19의 세상에서 영화의 새로운 보금자리로 자리매김을 하는 중이다. 극장 상영을 하지 않고 넷플릭스용으로 제작된 영화들에 대해서 과연 진정한 영화인지에 의문을 표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현재의 추세는 일반 영화와 넷플릭스용 영화 사이에 차별을 두지 않는 분위기가 대세다. 작품의 질이 떨이진다고 보기 보다는 오직 넷플릭스에서만 볼 수 있도록 제한을 두는 의미가 영화가 역사에서 중요하게 생각한 창작과 관람의 자유에 대한 제한을 두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즉 넷플릭스의 입맛에 맛는 영화들이 제작되어 넷플릭스에서만 볼 수 있을 때 과연 영화의 생태계가 온전해질 수 있는지 의문을 갖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코로나19의 상황은 오히려 넷플릭스와 같은 새로운 영화관람의 플랫폼이 영화인들에게는 구원자처럼 다가서고 있어서 넷플릭스의 영화를 기존의 영화계가 거부하기는 힘들게 되었다. 2021년 제26회 부산국제영화제만 하더라도 넷플릭스용으로 제작된 영화들 가운데 <마이 네임>, <지옥>, <승리호>, <낙원의 밤> 등 4편의 한국영화를 포함한 세계적인 거장의 작품들까지 총 7편의 영화가 상영된다. 국제영화제에서 볼 수 있는 넷플릭스 영화란 이제 영화는 플랫폼에 상관없이 관객을 만나고 관객의 선택을 받는 일이 중요해지는 수요자 중심의 영화로 변모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넷플릭스에서 기독교 영화를 볼 수 있을까? 물론이다. 알렉스 켄드릭 감독의 순전한 기독교 영화 <오버커머>(Overcomer, 2019)는 극장 대신 넷플릭스를 선택했다. 단 일반 극장이나 넷플릭스 모두 수요가 있어야 공급이 따른다는 시장경제의 원리에 충실하다는 사실은 반드시 알아 두어야 한다. 기독교 영화를 보고 싶은 관객들이 줄을 서기 시작한다면 넷플릭스는 <오징어 게임> 보다 훨씬 많은 돈을 기독교 영화 제작에 투자할 것이다. 사실 <오징어 게임>에 투자된 200억원은 할리우드에서 납품하는 단가의 10분의 1에 불과하다. 9편에 이르는 시리즈물임을 생각할 때 편단 겨우 20억원이 조금 넘는 금액에 불과하지 않은가!

[영화]‘모가디슈’의 한국인을 말하다

류승완 감독이 그린 남북 갈등의 현대사 류승완 감독이 <베를린>(2015)에 이어 남북 간의 갈등을 역사 속 사건을 통해 새롭게 조명한 영화를 만들었다. 영화 <베를린>이 남북 첩보원들의 충돌과 인간애를 액션을 통해 그려냈다면, 최신작 <모가디슈>는 남북갈등은 시대적 배경으로 전개시켜 놓은 채 소말리아 반군의 혁명 속에서 함께 탈출하기 위해 함께 고군분투하는 남북외교관의 모습을 다루었다. 즉 <베를린>에서는 남과 북이 서로에게 총을 겨누는 적대적 관계로 등장한다면 이번에는 외부의 총을 피해 협력해야 하는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모가디슈>에서 발견하는 한민족의 상황은 한마디로 웃프다(겉으로는 웃기지만 속으로는 슬픈 처지라는 신조어). 동서독을 나누던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지 얼마 안 된 시점에서 벌어진 일을 다루고 있어서 남북은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가 되어버렸을 때의 상황을 읽을 수 있다. 1991년 남과 북은 유엔가입을 앞두고 아프리카 국가들의 표를 얻기 위해서 치열한 외교전을 펼쳤다. 유엔 회의장에서는 잘살든 못살든 한 국가당 한 표의 투표권이 주어지는 까닭에 아프리카 국가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일이 시급했다. 소말리아주재 한국 대사관의 한신성(김윤석) 대사는 안기부 출신의 정보 요원 강대진 참사관(조인성)이 가져온 선물 보따리를 들고 소말리아 대통령을 만나러 가는 길에 무장강도를 고용한 북한 대사관의 방해 작전에 피해를 받고 만다. 강대진은 이에 대한 보복이라도 하듯 북한의 총기가 소말리아 반군의 손에 들어간다는 언론 플레이를 벌여 어떻게든 소말리아 정부와 북한 간의 관계를 떨어뜨려 놓으려 한다. 이런 상황 속에서 반군은 수도 모가디슈에 진입하게 되고 남북대사관 직원과 그 가족들은 수도를 탈출해야 하는 위기에 직면하게 되는 것이다. 류승완 감독은 ‘지명(地名)’을 통해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식을 취해왔다. 이전 작품의 도시 베를린은 동서독 분단을 상징하는 도시여서 남북 정보원들의 생사를 넘나든 작전이 전개되는 상황은 충분히 관객을 납득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베를린은 이제 분단이 아닌 통일을 상징하는 도시가 되었다. 그 누구도 합칠 수 없을 만큼 골이 깊어진 이념과 경제적 차이를 극복하고 한순간에 무너진 베를린 장벽은 남북분단의 상황에서 왜 우리만 과거 냉전 시대의 대결 구도를 벗어나지 못한 채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생각을 일으켰다. 이제 류승완 감독은 ‘모가디슈’를 들고 나왔다. 우리에게 소말리아는 국제 수송선들 납치하여 몸값을 받는 ‘소말리아 해적’으로 알려졌을 뿐이다. 영화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리들리 스콧 감독의 <블랙 호크 다운, Black Hawk Down, 2001>을 떠올릴 수도 있을 것이다. 1993년 소말리아에 파견된 유엔평화유지군으로서의 미군 특수부대와 유엔의 구호식량을 착취하는 소말리아 민병대와의 시가전이 압권인 영화였다. 그런데 소말리아와 모가디슈는 이게 전부였다. 부정과 혼돈의 도시 소말리아의 모가디슈. 그 속의 남북은 부조리한 상황 가운데서 살기위해 함께 탈출을 감행한다는 점에서 모가디슈는 통일 이전에 개별적 생존을 상징하는 도시로 남게 될 전망이다. 한국의 영화 관객들은 이제 낯선 소말리아에 대한 또 하나의 기억을 간직하게 되었다. 모가디슈에서 드러난 한국인의 민족성 영화는 평소 인식하지 못했던 인간 무의식의 통로 역할을 한다. 특히 사람들이 주목하고 인기 있는 영화들은 그 사회 구성원들의 집단 무의식(Collective Unconscious)을 보여준다. 칼 융(Carl G. Jung)이 언급한 집단 무의식은 개인이 갖는 무의식과는 달리 사회 구성원들이 역사와 전통 그리고 문화 가운데 갖게 되는 무의식으로 보통은 신화나 설화 그리고 전래동화를 통해 드러난다. 특별히 생각하지 않아도 그 문화 속에 사는 사람들의 삶 속에서 은연중 나타나는 것이 있다면 집단 무의식의 영향이라 볼 수 있다. 현대 사회에 적용하자면 집단 무의식은 대중성을 통해 나타난다. 한국의 오랫동안 사랑받는 상업영화나 시간을 뛰어넘어 인기 있는 가요 안에는 한국인의 집단 무의식이 들어있을 가능성이 높다. <모가디슈>에는 세 가지의 한국인의 집단 무의식으로 해석될 수 있는 민족성이 내포되어 있다. 첫째는 경쟁(競爭)의 무의식이다. 그 먼 아프리카에서조차 남과 북은 갈라져서 서로에 대한 비방과 투쟁을 멈추지 않는다. 말이 좋아서 외교전이지 실상은 거짓과 술수 그리고 폭력이 난무한다. 그런데 이 같은 갈등은 소말리아에 주재하는 남북외교관들이 아프리카에까지 오게 하는 원동력이며 그들은 경쟁 가운데서 자신의 입지를 넓혀가는 성과를 거둔다. 삼국시대에 민족 안에서 분열했던 신라와 고구려 백제의 모습으로부터 조선시대의 당파싸움과 현대 사회에서 여야로 나누어져 치열하게 싸우고 경쟁하는 모습은 때로는 국민들을 절망시키고 위기로 몰아가기도 하지만 이는 에너지를 고양시키고 적절한 안내를 통해 성장의 밑거름이 되기도 한다. 우리는 일제강점기를 경험했고 미국의 도움을 받아 살아온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지금은 이 국가들과 경쟁하고 있지 않은가! 둘째는 동정(同情)의 무의식이다. 어려운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돕는 동정은 인간의 본능 같지만 그렇지 않다. 아무리 미워하고 못된 사람이라도 잘못되고 위기에 빠졌을 때 모르는 척 넘어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그런데 한국인들로서는 모른 척 하기가 쉽지 않다. 특히 도와달라고 사정하는데 이를 어찌 무시할 수 있냐는 생각이 한국인들의 마음에는 있는 듯하다. 북한 대사관이 소말리아 반군에 의해 피습당하고, 믿었던 중국대사관마저 폭도들에 의해 강탈당하는 모습을 보며 북한의 림용수 대사(허준호)가 택한 곳은 한국 대사관이었다. 총알이 빗발치고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에서 림용수 대사는 한국 대사관의 문을 두드리며 도움을 요청한다. 한국 대사관 안에서는 고민이 흐르고 마침내 문을 열어준다. 이들을 망명으로 보고하여 실적을 올리려는 외교적 술수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북한 대사관 직원들을 맞이하는 한국 대사관 안에는 난장판 속에서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는 것이 옳다는 기류가 흐른다. 셋째는 문기(文氣)의 무의식이다. 책을 좋아하고 배움을 가치 있게 여기는 무의식이 한국인에게 있다. 남북의 외교관과 가족들은 승용차에 나눠 타고 이탈리아 대사관으로 피신하게 된다. 아마도 이 영화에서 류승완 감독이 가장 심혈을 기울여 찍은 액션 장면이 아닐 수 없다. 도로마다 반군이 장악한 상황에서 총알이 빗발치듯 쏟아지는데 이들은 어떻게 탈출에 성공할 수 있었을까? 임용수 북한 대사는 한국 대사관에 있던 책들을 모아 승용차의 외부에 붙여서 방호벽을 만든다. 끈과 테이프로 책들을 승용차 위와 겉면에 부착시켜서 총알이 뚫고 오지 못하도록 일종의 방탄복 역할을 하게 함을 볼 수 있다. 책으로 총을 막는다! ‘펜이 칼보다 강하다’라는 서양 속담이 있었다면 앞으로는 ‘책으로 총을 막는다’라는 말도 유행시켜야 할 듯하다. 관객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장면이지만 이것은 문기(文氣)에 대한 한국인의 무의식을 상징화시킨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세계에서 금속활자를 가장 먼저 만든 민족일 뿐만 아니라 선교사가 들어오기 전에 한글로 번역된 성경이 먼저 들어온 선교역사를 우리는 갖고 있지 아니한가? 지금도 대한민국은 세계에서 두 번째로 성경을 많이 출판하는 나라다. 모가디슈의 그리스도인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한신성(김윤석) 대사의 부인 김명희(김소진)의 이미지에 깊은 인상을 받을 수밖에 없다. 김명희는 매우 신실한, 교회 밖의 사람들이 본다면 극성스러울 정도로 기독교 신앙을 가진 인물로 묘사되고 있다. 대사 부인 역할을 맡은 김소진 배우는 <마약왕>에서도 범죄의 길에 빠진 남편(송강호)을 구하고 가정을 지키는 그리스도인 현모양처의 역할로 주목을 받았었다. 대사관 밖의 어려움을 감지한 김명희는 여직원과 직원 부인을 모아 기도회를 연다. 교회도 다니지 않고 심지어 불교 신자이기도 하지만 이들은 청산유수로 주기도문을 외울 줄도 안다. 기독교 영화가 아닌 일반 상업영화 속에서 기독교인이 보여준 신앙의 모습은 대개 긴박하고 무거운 상황을 잠시 쉬어가게 만드는 코믹한 설정으로 자리 잡는 경우가 적지 않은데 이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이후에 나타난 대사 부인의 행실은 감동적이며 긍정적인 그리스도인의 이미지를 갖고 있다. 대사부인 김명희는 저만 살려고 애쓰며 이기적인 존재가 되기 쉬운 전장의 상황에서 부상당한 현지인 운전사를 치료해주고 대사관을 가득 채운 북한 대사관 가족들에게 아낌없이 식사를 대접하는 면모를 보인다. 남북의 위기 속에서 화합하는 모습을 보여줘서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뻔히 예상할 수 있는 장면을 거부했던 류승완 감독도 이 장면만큼은 뺄 수 없었다. 바로 남북이 함께 식사하는 자리에서 절인 깻잎을 집기 쉽도록 젓가락으로 잡아주는 장면이다. 이 주인공은 소말리아의 그리스도인 김명희였다. 모가디슈의 남북이 마음을 여는 순간이다. 이것이 실화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류승완 감독의 머릿속에는 남북이 위기 속에서 마음을 열고 함께할 수 있는 자격이 되는 사람을 찾지 않을 수 없었고, 그 역할은 그리스도인인 대사부인에게로 돌아갔다. 이것은 세상이 생각하고 수용할 수 있는, 혹은 마땅히 그렇다고 여기는 그리스도인의 이미지이기도 하다. 상업영화 속에 언뜻언뜻 비치는 그리스도인의 이미지는 그리스도인에 대한 세상의 생각과 판단을 담고 있다. 영화는 세밀한 작업이며 의미 없는 장면이란 영화 안에 들어갈 수가 없다. 또한 반대로 영화 속 그리스도인의 이미지는 관객에게 영향을 줄 수도 있다. 비그리스도인들이 성경을 읽고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을 잘 알기 때문에 부정적 입장을 취하는 것이 아니다. 언뜻 나타나는 이미지, 특히 매스미디어를 통해 드러나는 그리스도인의 이미지를 통해 자신의 생각을 새롭게 하기도 하고 기존의 생각을 강화시켜 나가기도 한다. 현대를 사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이미지가 중요한 시대에 살고 있음을 새삼 깨닫게 하는 영화가 아닐 수 없다.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오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벧전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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