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1-10-28(목)

한교총, “위드 코로나 환영, 예배 회복에 집중해야 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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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예배를 못 드리는 교회, 그 원인을 찾아야(논평)

지난 5일 정부(보건복지부)가 발표한 자료에 의하면,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가 ‘자가 격리자 관리 현황 및 사회적 거리두기 이행상황’을 조사한 것 가운데, 교회에서 예배드리는 것도 조사했는데, 그 중에 예배드리는 것을 실시하지 않는 교회가 16%가 나왔다고 한다. 충격이다. 이 자료에 의하면, 정부와 지자체가 점검 인원 7,411명을 동원하여 종교시설(교회) 16,403개소에 대하여 지난 10월 3일, 주일 예배 실태에 대한 것을 조사했다. 그 중에 현장예배를 드리는 곳은 13,355개소로 82%였으며, 비대면예배를 시행하는 곳이 351개소로 2%이었고, 아예 예배를 실행하지 않는 곳이 2,693개소로 약 16%를 차지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아직도 상당수의 교회들이 주일 예배를 드리지 못하고 있다는 것인데, 이 비율로 계산하면 한국교회 전체를 약 6만 개로 보았을 때, 9,600여 개의 교회들에서 예배가 중단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원인이 무엇인지를 파악해야 한다. 정부는 지난해 2월부터 ‘온라인 예배’와 7월부터 ‘비대면 예배’를 강조해 왔으며, 이를 위반할 시 무거운 처벌을 하겠다는 것으로 인하여, 한국교회의 예배가 초토화된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나마 교계 일부에서 노력하여, 올해 7월에 법적인 판단을 받음으로, 비대면 예배가 문제가 되며, 비록 매우 제한적이지만 현장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그런데 지금까지 3개월이 지났음에도 일선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 것으로 볼 수 밖에 없다. 예배가 없는 교회는 존립에 문제가 있음이다. 이에 대하여 교계와 각 교단과 지역의 교회 연합회는 협력을 통하여 그 상황을 면밀하게 파악하고, 그 원인을 찾아야 하며, 그것이 정부가 무리하게 교회의 예배를 제한한 것에 원인이 없는지를 정확히 파악해야 한다. 현재 정부는 ‘위드 코로나’로 가기 위한 로드맵을 마련하고 있는데, 그 과정에서도 또 교회를 타킷으로 예배 문제를 간섭할 수 있다고 본다. 각 교단의 가을 총회에 나타난 지표를 보면, 대부분의 교단들에서 교세가 지난해부터 현격하게 줄어든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것도 정부의 교회 탄압에 의한 것은 아닌지 살펴보아야 한다. 한국교회가 코로나를 빌미로, 예배 문제에 대하여 더 이상 권력에 양보하거나 밀리는 모습이 되어서는 안 된다. 교회는 단순히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사업장이나, 종교놀이를 하는 곳이 아니라, 하늘의 뜻을 이 땅에 전하는 신성한 곳이다. 또한 구원을 선포하고 이뤄가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임재하시는 곳이다. 따라서 교회의 존재 이유 가운데 중요한 예배 문제를,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식으로 해석하고, 비기독교인들이 주장하는 대로 따라가선 안 된다. 한국교회는 지난 2년간 예배 문제에 있어 상당수의 교회에서 혼란과 시행착오를 겪었다. 이제는 더 이상 이런 일들을 계속해선 안 된다. 이미 연합기관들 가운데 이를 염려하여, 정부측과 대화를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 바, 더욱 강력하고 분명한 입장을 취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 예배 문제를 누구에게 위임할 수도 없고, 의지할 수도 없다. 또 기대할 수도 없다. 오직 한국교회 전체가 나서서 예배의 중요성을 확실히 해야 할 때이다. 예배를 드리지 못해 존재감을 상실한 교회들을 우리는 어떻게 볼 것인가? 정말 하나님 앞에서 애통한 심정을 가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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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와의 대화] “아이들과 대화의 물꼬를 여는 작은 문이 되길”

Q. 이번에 <청소년 기독교 세계관 에세이 - 어떻게 생각해?> 책 출간을 축하드립니다. 먼저 간략한 책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A. <청소년 기독교 세계관 에세이 – 어떻게 생각해?>는 책 제목에서 볼 수 있듯이, 청소년을 대상으로 하는 책입니다. 특히, 우리 삶에서 다양하게 경험하는 사건들을 기독교 세계관의 관점에서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를 청소년의 눈높이에서 이해하기 쉽도록 쓰여진 책입니다. Q. 책을 에세이 형식으로 취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A. 이 책의 원고는 제가 있는 브니엘고등학교의 아침방송(명상의 시간 같은) 예배 시간에 읽는 설교문입니다. 이름은 설교문이지만, 10%가 채 되지 않는 4백여 명의 남자 고등학생들이 아직 눈도 뜨지 못한 그 아침에 듣게 하기 위해서는 실제 그들의 삶과 관련 있는 이야기를 담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일반적인 설교의 형식을 취하지 않고 다소 자유로운 에세이 형식으로 사회의 다양한 주제들을 기독교 관점으로 풀어내는 글을 써서 읽어주었고, 그 글들을 다듬고 보완한 책이 바로 <어떻게 생각해?> 입니다. Q. 청소년들이 확립해야 할 기독교 세계관에 관한 책이다. 청소년들에게는 가볍지 않는 주제라고 생각합니다. 건강한 기독교 세계관이 무엇이고, 청소년들에게 왜 중요할까요? A. 일반적으로 세계관은 세상을 바라보는 눈에 씌워지는 렌즈로 비유를 하게 되는데요. 이 세계관은 선천적으로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교육과 경험과 환경에 의해 형성된다고 봅니다. 이 세계관 중에서도 균형 잡힌 성경의 가치관으로 형성된 세계관을 우리는 건강한 기독교 세계관으로 봅니다. 세계관이 교육과 경험과 환경에 의해 형성되는 것이라고 말했는데요, 이러한 세계관은 보통 대학생이 되면 어느 정도 굳어진다고 봅니다. 물론, 대학생이 된 후에도 세계관의 충돌과 붕괴 재창조가 일어날 수 있지만, 오히려 만들어진 세계관을 다시 만드는 것보다, 아직 굳어지지 않은 세계관을 바르게 인도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일 것입니다. 특히 요즘에는 워낙 많은 세계관을 제시하는 미디어가 많아서, 우리의 자녀들이 비성경적인 세계관 혹은 반성경적인 세계관으로 만들어질 수 있는 가능성이 높은 현실입니다. 그런 점에서, 다음세대 청소년들에게 성경적 기독교 세계관을 제시하고 그것이 제대로 뿌리 내리고 열매 맺게 하는 것이야말로 진정으로 다음세대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점점 더 핸드폰과 유튜브 속으로 파고 들어가고 있는 지금의 다음세대들에게 유튜브 알고리즘이 만들어주는 세계관이 아닌 성경적 기독교 세계관을 만들어 주는 일이 필요한 때입니다. Q. 현재 브니엘고교 교목으로, 또 함께하는교회 협동목사로 교회와 학교에서 청소년들을 위한 사역을 하시면서 청소년들의 상황과 필요를 잘 아실 것 같습니다. 이 책을 청소년들이 어떻게 읽히기를 바라시나요? A. 학교에서는 쉬는 시간에 읽을 만한 책이 되면 좋겠습니다. 수행평가, 중간/기말고사, 모의고사 등등으로 우리 학생들은 수많은 ‘읽기지옥’에 빠져 있습니다. 그들에게 또 하나의 머리 아픈 책을 주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쉽게 빨리 읽을 수 있는 얇은 책을 주고, 그것을 읽어냄으로써 또 작은 성취감도 느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가정에서는 큐티책 옆에 부모님과 같이 읽을 책으로, 교회에서는 공과책 옆에 부교재로 함께 읽을 수 있는 토론교재로 사용되기를 바랍니다. Q. 성인 독자는 어떻게 읽으면 될까요? A. 독자를 청소년층으로 국한한 것은, 먼저는 청소년들을 위한 책을 선물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다음세대를 말하면서도 그들을 위한 기독교서적이 상대적으로 적은 것이 못내 아쉬웠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실 우리들의 교회 안에는 신앙을 늦게 시작했거나 영적으로 어린아이 같은 분들도 많이 계십니다. 예수님을 만난 지 이제 3개월 된 분들에게도 일반적인 교회의 양육은 다른 장년들이 받는 신앙교육을 함께 받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요. 이 책은 초신자분들이 이제 막 교회에 적응해 나갈 때 읽을 만한 책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책의 원고가 처음부터 불신자 학생들도 그 대상으로 고려하여 쓴 글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책은 구역모임에서도 초신자들과의 대화의 문을 여는 작은 문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 Q. 책을 쓰시면서 가장 중점적으로 염두 하신 것은 무엇인가요? A. 이제까지는 기독교 세계관을 가르친다고 할 때, 기독교 세계관의 개념, 역사 등을 교육하는 것에 시간을 할애하다보니, 실제적으로 오늘 나에게 있는 일을 기독교 세계관으로 풀어내고 적용하는 일을 연습하지는 못했습니다. 또한, 실제적으로 기독교 세계관을 가르치는 교사가 그의 삶에 기독교 세계관을 어떻게 적용하는지를 보여주지도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 책에서는 ‘기독교 세계관이 무엇인가?’를 이야기하기보다, 기독교 세계관으로 뉴스를 해석하고, 영화를 해석하고, 책을 해석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우리 자녀들에게 모범을 제시하는데 주안점을 두었습니다. 교육학에서 자주 이야기 되는, ‘들은 대로 말하고, 본대로 행동한다’는 말처럼, 기독교 세계관을 적용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이 책에서 제일 중요한 점입니다. 주일학교에서 듣는 설교는 ‘본문에서 상황으로’라는 방향성을 가지지만, 이 책은 ‘상황에서 성경으로’가는 방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설교는 당연히 본문에서 상황을 해석해야 하겠지만, 학생들은 상황에 대한 성경의 해석을 듣고 싶어 하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이 책에서는 최대한 이슈가 되는 시사와 문화와 사회 문제에 대한 성경적 관점을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Q. 책은 20개의 주제에 따라 <내용>, <배경>, <생각하기>로 나뉘어져 구성되어 있다. 책의 구성을 이렇게 기획한 이유에 대해 말씀 부탁드립니다. A. 내용은 설교문을 다듬은 에세이지만, 그것을 그냥 혼자 읽기보다 친구들과 같이 토론하거나 부모님과 함께 토론할 수 있게 하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내용>에서 한 주제를 설명했다면, 그 주제를 다룬 알려진 사회적 배경 혹운 뒷이야기를 더 상세하게 <배경>에서 다루어 줌으로써 토론의 마중물을 제공했습니다. 여기에 직접적인 질문까지 <생각하기>에서 던짐으로써, 이 책은 에세이면서 동시에 교재의 성격을 가지게 됩니다. Q. 앞으로 청소년을 위한 기독교세계관에 관련된 책을 계속 쓰실 계획이 있으신가요? A. 기독교세계관 에세이를 조금 더 쓸 계획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시리즈가 청소년 사역자들이 설교의 예화로, 혹은 제자반의 교재로 사용할만한 자료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아울러, 청소년들에게 ‘기독교세계관’이 무엇인지를 좀 직설적이고 쉽게 풀어내는 시리즈도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 책은 에세이 형식이 아닌 제자반이나 교회학교의 교재로 사용할 만한 책으로 쓰일 것입니다. Q. 마지막으로 이 책의 독자가 될 청소년 사역사와 자녀를 둔 부모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A. 이 책은 학교 현장에서 이미 학생들의 귀에 들려진 내용이고, 그것을 통해서 적지 않은 신자, 불신자 학생들이 반응했던, 어쩌면 검증된 책입니다. 우리 귀한 청소년들에게 자녀들에게 믿고 권할만한 책이 적은 이 시대에, 자신 있게 책장에 꽂아주셔도 된다고 말씀드립니다. 그리고 먼저 읽어주시고, 학생들과 자녀에게 질문해 주십시오. “어떻게 생각해?”

“희망을 전하는 일에 참여해주세요”

Q. 지난 9월 9일은 장기기증의 날이었다. 우리나라에서 장기기증이 언제 시작됐고, 현재 우리나라 장기기증 현황은 어느 정도인지 궁금하다. A. 저희 사랑의장기기증운동본부는 1991년 1월에 설립되어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장기기증 운동을 시작했다. 현재 우리나라의 사후 장기기증 등록 현황은 전 국민의 3.06%인 158만 명이 희망등록에 참여했다. 많은 국민이 참여하신 것 같지만 미국이나 유럽의 대부분 국가는 희망등록률이 30~40%를 넘기 때문에 아직도 많은 참여가 필요하다. Q. 사랑의장기기증운동본부 부산울산지부 소개를 부탁드린다. A. 부산울산지부는 본부 창립 이듬해인 1992년 10월에 설립됐다. 이후 지금까지 장기기증 생명나눔운동을 펼쳐오고 있으며, 현재 부산의 장기기증 희망등록자는 12만4천 명으로 부산시민의 3.65%가 참여해 전국 17개 광역자치 단체 중 서울에 이어서 두 번째로 높은 등록률을 기록하고 있다. 울산은 3.60%로 전국에서 네 번째로 높은 등록률을 기록했다. Q. 장기기증에 대한 교회의 참여(율)는 어느 정도인가? 혹시 통계 자료가 있다면 소개해 달라. A. 현재 부산에 소재중인 교회가 약 1800여개 정도인데 이중에서 270개 교회가 성도들과 함께 장기기증서약에 동참해주셨다. 부산지역은 복음화율도 낮은 편이고 타지역에 비해 보수적인 분위기라고 많이 말씀하시지만, 의외로 교회의 참여율은 높은 편이다. 좀 더 상세히 말씀드리면 참여 교회 수는 고신 측 79개 교회, 통합 측 77개 교회 순으로 참여했고, 참여율은 감리교회와 성결교회들의 참여율이 높은 편이다. Q. 현재 코로나로 많은 사람들이 힘들어 한다. 장기기증도 코로나로 어떤 영향을 받고 있는 지 궁금하다. A. 코로나 이전인 2019년과 이후인 2020년을 비교해 보면, 장기기증 등록률이 44% 줄어들어 코로나 이전에 비해 절반 정도의 감소를 보이고 있다. 장기기증운동은 교회, 학교, 기타 공공기관 등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참여하는 장소가 필요한데, 모든 활동이 제한돼 심한 타격을 받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의과대학생들의 연구용으로 기증되는 시신기증도 학생들의 수업 결손, 시신의 코로나 감염문제 등으로 여러 제약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Q. 장기기증 활성화를 위한 방안으로, 부산울산지부에서 진행 중인 프로그램이 있다면 소개 부탁드린다. A. 서울 본부와 함께 장기기증 온라인 프로그램 강화, 온라인 장기기증 교육프로그램, 언택트 걷기대회 등 여러 가지 프로그램을 운영 중이지만 장기기증운동은 아직 오프라인을 통한 활동의 비중이 큰 사업이다. 부산울산지부는 국민건강보험공단 부울경지역본부와 지난 6월 업무협약을 맺었는데, 저희는 건강보험공단의 연명치료결정제도를 적극 홍보하고 건강보험공단은 민원실에 장기기증서약서를 비치해 시민들이 연명치료결정과 장기기증등록을 손쉽게 할 수 있도록 해 시민들의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Q. 장기기증을 위한 절차는 어떻게 되나? 그리고 장기기증 동참하고 싶으신 분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린다. A. 장기기증희망서약은 지금 당장 나의 신체 일부를 기증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 그때 내 몸의 일부를 기증할 형편이 되면 기증하겠다고 하는 약속이며, 법적 강제성이 있는 제도가 아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기증의 순간 가족의 동의가 꼭 필요한 것이기 때문에 우선은 나와 약속하고 가족에게 이야기 해두는 것이 중요하다. 코로나 시대에 우리 모두가 너무 지쳐있다. 이 힘든 시절에 장기기증을 기다리시는 분들과 그 가족들에게 사람들의 무관심은 더욱 가슴 아프게 다가오고 장기이식을 위한 기다림의 시간은 더욱 길어지고만 있다. 지금 당장 이 분들에게 장기기증의 기적을 전하는 것이 힘든 일이라면 기증서약을 통해 희망을 드리는 일에는 꼭 참여해 주시기 바란다. 그리스도인의 사랑이 많은 사회적 약자들에게 흘려보내어지기를 기도한다.

"코로나 시대, 신앙의 근육 키우며 다음세대 양육하다"

Q. 먼저, 함께하는교회에서 코로나19 상황에서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프로그램들에 대해 설명 부탁드립니다. A. 지금까지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코로나19 시대를 지나며 우리 교회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한국 교회가 힘들고 어려운 시간들을 보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2020년 2월 말부터 교회 역사상 처음으로 ‘온라인 예배’를 드리기 시작하며, “과연 우리 교회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가?” 기도하며 고민했습니다. 교역자들, 교회 중직자들과 회의를 하며 코로나 상황에서도 “코로나 때문에” 못하는 것이 아니라 “코로나 덕분에” 할 수 있는 것을 찾아보자고 의견을 모으고 크게 3가지의 주제로 프로그램을 세웠습니다. 첫째는 “성도의 삶을 공감하라”입니다. 코로나로 인해 삶이 무너진 성도들을 깊이 공감하고 그들을 위로해 줄 수 있는 사역을 했습니다. ‘문고리 심방’ ‘찾아가는 선물 박스’ ‘심방 간사를 통한 일대일 심방 강화’ 등이 바로 이런 사역들이었습니다. 둘째는 “창의적으로 사역하라”입니다. 모일 수 없는 상황이지만 이 때가 위기이자 기회라고 생각했습니다. ‘드라이브 스루, 드라이브 인 예배’ ‘온라인으로 함께 참여하는 크리스마스 행사’ ‘야외 송구영신 예배’ 등이 이에 속하는 사역입니다. 특히 12월 31일 밤에 온 성도가 교회 주차장, 각자의 자동차 안에서 예배를 드린 것은 매우 특별하게 기억이 나는 행사입니다. 마지막으로 “개인 신앙 성숙을 도와라”입니다. 코로나로 인해 집에 머무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성도 개인의 성장을 위한 프로그램을 진행해야겠다고 생각해 ‘가정예배 정착’ ‘온라인 통큰통독’ 등을 시행했습니다. Q. 또 최근에 맥추감사헌금을 어려운 교회를 위해 전부 사용한 것으로 들었습니다. 이 일을 하게 된 계기와 진행 등 구체적으로 말씀 부탁드립니다. A. 코로나가 1년 이상 장기화되면서 우리 교회도 이렇게 힘든데, 미자립이나 개척교회들은 얼마나 힘들지 걱정이 됐습니다. 저도 교회 개척을 했기에 개척의 어려움과 힘듦을 잘 알고 있고, 환경이 어려우면 목회자도 힘을 잃고 낙망할 수 있기에 어떻게 하면 좋을지 오랜 시간 동안 고민했습니다. 그러던 중 7월 첫 주에 하는 맥추감사헌금을 이웃에 어려운 교회를 위해 사용하면 좋겠다고 결정, 24개 교회를 선택해 교회 리더들과 청년들이 7팀으로 나누어 직접 교회를 찾아갔습니다. 목사님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듣고, 그들의 어려움을 위로하고 우리 교회에서 준비한 것들을 드리니 대부분의 목사님들로부터 큰 위로를 받고 새 힘을 얻었다는 피드백을 들었습니다. 저희가 많이 준비한 것은 아니지만 마음과 정성이 교회에 잘 전달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었는데, 전달 받은 교회에서 기뻐했다고 하니 저희 교회 성도님들도 매우 감사했습니다. 이번 프로그램에 참여한 집사님은 “이번 개척 교회 섬김 사역을 통해 지금 당장 주님께서 이 개척교회에 파송받아 섬기라고 명령하면 따를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며, 이번 나눔을 통해 우리 교회만 생각하는 우물 안 개구리에서 벗어나 넓은 시야를 갖게 되었다고 간증하기도 했습니다. Q. 함께하는교회는 구청과 협력해서 다양한 사역들도 진행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A. 지역 사회를 섬기는 것은 교회의 큰 사역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저희 교회도 구서동으로 이전 후 금정 구청과 협력 관계를 맺으며 교회에서 도울 수 있는 것은 돕기 위해 애쓰고 있습니다. 지역 사회 독거 노인 반찬 나눔을 비롯, 여름 생수 전달, 어려운 이웃 물품 나눔 등 정기, 비정기적으로 섬기고 있습니다. 또한 젊은이들에게 위로와 힘을 주고자 부산대 앞에서 도시락-반찬 나눠 주기를 하고 있고, 교회 근처에 있는 오륜정보학교에 매주 간식으로 섬기며 10명의 집사님들이 직접 아이들을 상담하고 교제하는 사역도 하고 있습니다. ­ Q. 코로나19가 발생하고 예상치 못한 환경의 변화를 맞고 있습니다. 코로나 종식을 바라는 한편, 비대면 프로그램 등 사역의 이어가며 활성화하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함께하는교회는 1년 6개월을 어떻게 지나왔는지 알고 싶습니다. A. 저희 교회는 정부의 방역 수칙을 엄격하게 따르면서 예배, 소그룹 등을 멈추지 않고 계속해 왔습니다. 사실 코로나 시대를 지나며 가장 염려가 되는 것이 소그룹이었습니다. 우리 교회는 주중에 교회에서 크고 작은 소그룹들이 늘 이뤄졌기에 당장 이를 멈추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소그룹은 멈추지 않고 줌으로 대체해서 교회 훈련이 끊어지지 않게 했습니다. 또한 코로나 상황이라는 특수성에 맞게 색다른 사역들도 했는데, 그 중 하나가 지난해 9월, 상황이 좋지 않아 비대면으로 예배 드릴 때, 주일학교 아이들을 위해 ‘드라이브 스루-함교’ ‘드라이브 인 예배’를 한 것입니다. 교회를 나오고 싶어도 못나오던 아이들이 차 안에서 선생님을 만나고 선물도 받으면서 “빨리 교회에 가고 싶어요. 선생님, 교회가 너무 좋아요”란 말을 들었을 때는 뭉클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앞에서도 말씀드렸듯이 작년 크리스마스 행사도 온라인 생중계로 했고, 송구영신 예배는 교회 주차장에서 각자 자동차 안에서 1, 2부로 나눠 드리는 등 나름대로 고민을 하면서 1년 6개월을 지냈습니다. Q. 코로나19로 힘들어 하는 교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 교회들에게 격려하며 도전해 주고픈 말씀이 있으시다면? A. 아마, 지금까지 대부분의 목사님들이 다 같은 마음, “버티고 견뎌보자”라는 이 마음으로 코로나 시대를 보내고 있지 않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정말 다들 너무 수고 많으십니다. 코로나 시대에도 희망과 대안은 교회라는 생각으로 목사님들이 조금만 더 힘을 내어 주시기 바랍니다. 견디는 것도 힘이고, 적응하며 이겨내는 것도 실력이라 생각하고, 코로나 때 신앙의 근육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어가기를 바랍니다. Q. 앞으로 함께하는교회의 섬김의 계획과 비전에 대해 듣고 싶습니다. A. 우리 교회는 ‘다음세대를 준비하는 젊은교회’라는 비전으로 한 영혼을 그리스도의 제자로 세우기 위해 섬기고, 양육하며, 훈련하는 교회입니다. 함께하는교회는 다음세대가 교회에 없다고 말하는 이 때, 다음세대가 힘들다는 이 때, 다음세대를 치유, 회복하고 세워나가고 있습니다. 요즘에 많은 사람들이 인재가 없다고 말합니다. 우리 교회는 실력과 영성으로 이 세상을 바르게 이끌 지도자를 양성하고, 특히 우리가 속한 부산 땅을 품을 영향력 있는 기독교인들이 많이 나오길 바라는 마음으로 양육하고 있습니다. 다음세대에게 언약 백성의 가치관을 계승하고, 기독교 세계관으로 세상을 살아갈 수 있도록 훈련시키는 사역을 앞으로도 계속 해 나갈 것입니다. 최혜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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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교양읽기]“우리는 모두 주님 앞에 서 있습니다”

김응교의《손 모 아》 -시련 앞에서의 시 이야기- 기도하는 손의 모습을 책 제목으로 하였다. 저자 김응교 시인 겸 평론가는 활발한 매스컴 활동으로 대중에게 친근한 문학인이다. 기독교문학을 포함하여 문학의 대중화에 앞장서고 있는 그가 2016년 겨울 KBS국제부 라디오에서 북한에 보내는 라디오 프로그램에 소개된 시편과 2017년 《월간 목회와 신학》 세계기도시에 연재한 내용 중 팬데믹 시대 고통 받는 이들을 위하여 수정 보완하여 엮은 시 해설서이다. 츠빙글리로부터 기형도, 칼 바르트, 릴케, 까뮈, 윤동주, 디킨스, 톨스토이 등 국내외의 유명 문학인과 종교인 등 50여 편의 시편들이 수록되었다. 중학교 졸업식 때 저금통을 깨 기타를 사줬던 저자의 누이가 팬데믹 기간 중에 죽은 개인사도 있어 질병과 슬픔 앞에서란 부제가 더 공감이 간다. 늦가을, 시가 그리운 교인들에게 권하고 싶은 책. ◇ 저자소개 ∥김응교 시인, 문학평론가 문학과 종교는 본래 하나로 출발했다고 믿고 있는 저자는 연세대 신학과를 졸업하고, 연세대학교 국문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87년 분단시대에 시 발표를 시작으로 1990년 한길문학 신인상을 받았다. 1991년 《풍자시, 약자의 리얼리즘》을 실천문학에 발표하면서 평론 활동으로 영역을 넓혀왔다. 1996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대학원에서 비교문학을 공부하였고, 1998년 와세다대학 객원교수로 10년간 강의하였다. 현재 숙명여자대학교 교양교육원 교수로 있으며, 트위터로 대중과 소통하고 있다. ◇ 저서∥ 《씨앗/통조림과 평론집 한일쿨투라》, 《한국시와 사회적 상상력》, 《박두진의 상상력 연구》등 많은 저술이 있으며, 번역가로도 활동 중이다. 비아토르 간 / 2021. 5.25. / 16,000원 ◇ 같이 읽으면 좋은 책 《그늘-문학과 숨은 신》 / 김응교 / 새물결플러스 《처럼-시로 만나는 윤동주》 / 김응교 / 문학동네 《곁으로- 문학의 공간》 / 김응교 / 새물결플러스 #기도는? “기도(祈禱)는 첫째 ‘나’를 잘라내는 영적인 도끼질이다. 내 정욕과 욕망과 고집을 쳐내는 대화의 시간이다. 둘째 더불어 사는 세상을 위해 깨닫게 해 달라는 말씀을 듣는 시간이다. 셋째 그 힘으로 노력하며 살겠다고 다짐하고 고백하는 시간이다.” 김길구 휴가가 예상보다 길어졌네요. 그 사이 박 관장께서는 제8대 부산복지개발원장에 취임하셨습니다. 축하드립니다. 공직에 있어 바쁘실 텐데 이 코너를 계속하기로 하셨습니다. 참가자들의 자원하는 마음이 이 코너가 장수하는 비결 같습니다. 감사드립니다. 인사 한마디~ 박영규 복지개발원은 부산광역시의 사회복지정책개발과 시민에 대한 사회복지서비스를 증진시키는 일을 하는 기관입니다. 시민들의 삶의 질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는 만큼 미력이나마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김현호 3개월을 쉬었다 다시 시작하려니 새로운 느낌이네요. 심기일전해서 잘해보도록 하겠습니다. #팬데믹 시대의 성찰과 위로의 메시지 김길구 오늘은 계절에 어울리는 가벼운 주제로 정했습니다. 흔히들 가을을 사색의 계절이라고 하는데 이번 호에는 문학평론가이자 시인인 김응교의 《손모아》로 정했습니다. 이 책에 대해서 소개해 주시죠? 김현호 요즘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의 모든 매스컴들이 팬데믹 소식을 우선해서 다루잖아요? 이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주는 저명한 분들의 기도문과 시편 등 50여 편을 묶어 해설한 책입니다. 박영규 그동안 코로나19는 많은 신조어를 만들어 내었습니다. ‘코로나 블루’는 우울한 일상을 표현하며, ‘코로나 레드’는 장기화에 따른 분노를, 그리고 분노를 넘어 폭발해 버린 현대인들의 심리상태를 ‘코로나 블랙’이라고 한다더군요. 일찍이 경험하지 못한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자화상인데요. ‘질병과 슬픔 앞에서’라는 부제가 상징하듯 힘들어하는 이들에게 고난에 대한 깊은 성찰과 위로와 희망의 메시지입니다. 김길구 저도 다양한 저자의 이력 그리고 시에 대한 해제까지 있어 한편 한편이 많은 것을 생각게 하여 오랜만에 몰입해서 읽었습니다. 월별로 4~5편씩 구성되어 있는 50여 편의 전 작품을 다 다룰 순 없고 오늘은 가을 편을 중심으로 몇 편만 소개해 보지요. 저는 러시아의 대문호 레프 톨스토이의 마지막 시가 여운에 남습니다. 「(중략) 아버지여, 생명의 근원이시여, 우주의 영이시여, 생명의 근원이시여, 날 도와주소서. 내 인생의 마지막 며칠, 마지막 몇 시간이라도 당신에게 봉사하며 당신만 바라보며 살 수 있도록 날 도와주소서」 이 시를 읊조리다 보면 생의 마지막을 시골의 작은 역에서 객사한 노 사상가가 떠오릅니다. 그 무엇이 이 거인을 거리에서 헤매게 하였을까? 기성교회를 거부하고, 그가 배회하며 그토록 찾으려고 했던 것이 과연 무엇이었을까? 궁금했는데, 이 시를 보고 깨닫게 되었어요. 우리 교계도 거목들의 마지막 모습이 구도자로 보기 힘든 경우가 종종 있잖아요? 마지막 며칠, 몇 시간이라도 하나님을 바라보고 봉사하겠다는 거인의 간절함이 우리를 숙연케 합니다. 김현호 그의 일대기를 보면 유서 깊은 백작 집안의 아들로 태어나 군복무 중인 24살에 작가로서 첫발을 내딛는데, 당시만 해도 그는 권위와 폭력에 길들여 있었고, 40대까지 방탕한 생활을 했어요. 결혼 후 그의 대표작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리나≫ 등을 통해서 명성도 얻었지만, 그의 인생관이 바뀐 것은 그의 나이 42세 때 시작해 50세에 마친 안나 카레리라 집필 시기인 8년여의 기간이라고 해요. 국가와 권력과 종교에 대한 깊은 회의로 자살을 생각했을 정도의 고뇌 끝에 50대에 이르러 그는 회심하게 되었고 58세 때 ≪바보 이반≫이란 작품으로 새로운 모습을 보여줍니다. 박영규 이 단편에서 톨스토이의 분신인 바보 이반은 톨스토이의 좌우명을 그대로 실천합니다. 영리한 사람들은 손으로 일하지 않는다는 악마의 유혹에 “손과 등은 일하라고 주어진 것이다.”라고 말하며 이반처럼 우직한 바보들이 모인 나라야말로 누구도 정복할 수 없는 건강한 나라라고 말합니다. 농노해방운동에도 기여한 그는 기독교인의 실천적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 잘 보여 주고 있어요. 김길구 저자의 전작인 ≪그늘≫을 보면 톨스토이는 헨리 조지가 쓴 베스트셀러 ≪진보와 빈곤≫이란 책을 읽고 큰 영감을 받습니다. 그 결과 당시의 농노제도에 가까운 토지제도를 신랄히 비판합니다. 헨리 조지의 토지 사상을 건너뛰고는 이해할 수 없다는 그의 대표작 ≪부활≫에 서 “땅은 사람의 소유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것입니다.”라는 것을 보면서 이 시대 젊은이들의 좌절과 ‘대장동 사건’으로 시끄러운 우리나라를 보면서 톨스토이는 과연 무슨 생각을 할까요? #선한 힘들에 관하여 김현호 지난 2020년 코로나바이러스가 퍼지면서 제일 많이 읽힌 책은 알베르트 카뮈의 <페스트 La Peste>라는 소설이라고 하는데, 저는 기도문에 실린 네 명의 인물에 주목하는데 도그마에 싸인 교리의 기독교와 부조리한 세계에 맞서 예수의 삶과 변혁적 기독교에는 긍정적인 마음을 가졌던 인물들이죠. 의사 리유, 반항하는 인물 장타루, 성실한 임시직 공무원 그랑, 참혹한 현실 속에서 새롭게 깨달은 인물, 기자 랑베르를 통해 이상적인 ‘선한 사마리아인상’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김길구 책에는 널리 알려진 곡들의 일화를 소개 하고 있는데, 디트리히 본회퍼의 기도문 <그 선한 힘들에 관하여>이 가스펠 <선한 능력으로>로 번안되어 교인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데, 독재자 히틀러 암살운동에 가담한 죄목으로 체포된 후 수감, 종전을 코앞에 두고 1945년 4월 9일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기 전 죽음을 예감하고 그의 약혼자에게 전한 편지에 쓰인 기도문으로 그의 마지막 유작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1970년 작곡가 지그프리 트피치가 곡을 붙인 이 곡을 들을 때마다 마틴 루터의 ‘내 주는 강한 성이요’라는 찬송가 못지않은 감동을 느끼곤 합니다. 전편에 흐르는 신앙의 확신과 죽음 앞에서도 당당했던, 저자의 표현을 빌리면 ‘잔혹한 낙관주의’가 가슴을 여미게 합니다. 박영규 할리우드 애니메이션 <슈렉>에 삽입되어 화제가 된 곡이며, 2008년 로큰롤 명예의 전당과 2010년에는 작곡가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던 2016년 82세로 작고한 캐나다의 다재다능한 시인이자 싱어송 라이터, 배우인 레너드 코헨의 중독성이 강한 노래 <할렐루야>에 대한 얘기도 흥미로운데, 다윗과 밧세바의 금지된 사랑을 노래한 곡인데, 가사가 많은 것을 생각케 합니다. 「(중략) 사랑은 승리의 행진이 아니야 사랑은 차가운 것 사랑이란 부서진 할렐루야~」나 「그래서 내가 사랑으로부터 배운 것은 그대보다 총을 빨리 뽑는 사람을 먼저 쏘는 방법이었죠」라는 노랫말이 부서질 줄 알면서도 사랑하고 욕망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한계와 성서기자의 한 인간의 실수를 눈감지 않고 굳이 다윗의 아내가 아닌 우리아의 아내로 표현한 강직한 역사관, 그리고 부정한 가계에서 태어날 수밖에 없었던 예수의 피할 수 없는 운명 등의 얘기가 흥미롭게 이어집니다. 김길구 50여 편을 다 들려드리지 못해서 아쉽습니다. 한편 한편이 다 귀한 글들 입니다. 이 짧은 가을날 독서삼매경에 빠져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다음 호에는 도서출판 엠마우스에서 펴낸 홍석진 목사의 세상을 향한 따뜻한 통찰 《시선》으로 찾아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정리 : 김길구 】

기독교인이 인문학 공부를 해야 하나요?

디아코니아부산 제2회 기독교인문학 포럼 우선 귀한 시간을 주신 백양로교회와 이를 주관하시는 (사)디아코니아부산 이사장 김태영 목사님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제 사역과 관련하여 기독교인들이 왜 인문학을 알아야 하는지 묻는 분들이 꽤 있습니다. 긍정적인 의미로 묻는 분들도 계시지만, 그렇지 않은 분들도 계시죠. 교단의 선배 목사님 한 분이 교회에서 그런 공부를 왜 하느냐고 해서 제가 ‘종교개혁자 중에는 인문학자들이 많았다’고 했더니, ‘그래서 종교개혁이 엉망인 거야’ 이러시는 거예요. 그래서 말을 더 잇지 못하고 ‘예’하고 말았습니다. 그러한 분들의 인식 속에는 인문학이 기독교의 적으로 교회에 나쁜 영향을 끼친다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실제로 그런 논쟁은 초기 교회사에도 많았습니다. 실제로 터툴리안의 경우 ‘예루살렘과 아테네’가 무슨 상관이 있으며 ‘아카데미아와 에클레시아(교회)는 무슨 관계가 있으냐?며 적대감을 들어 내기도 했습니다. 물론 터툴리안이 유명한 법학자이기 때문에 몰라서 한 말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만, 한국의 기독교인 중에는 이런 생각을 가진 분들이 많습니다. 오늘 이 시간 제가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려고 하는 것은 크게 역사적 맥락과 개념적인 측면에서 설명을 드리려고 합니다. ■ 인문학이란 무엇인가? 실제 인문학이 무엇이냐고 했을 때 우선 동양적 개념에서 인문학이란 말을 더 잘 이해하려면 그 말의 반대말을 알아보면 됩니다. 동양에서는 인문(人文)의 반대 말이 천문(天文)입니다. 천문은 여러분들도 잘 아시다시피 별의 움직임이잖습니까? 하늘에 대한 연구가 천문학입니다. 그래서 천문지리라고 했고 혹은 인문지리라고 했거든요. 그래서 하늘 天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무늬 문자라 의미도 있습니다. 그래서 별의 움직임의 무늬, 자취, 흔적을 조사하는 것을 천문학이라고 한다면, 인문학은 사람의 자취입니다. 뱀이 지나가면 흔적을 남기듯, 사람의 자취를 통하여 사람이 가야 할 길을 연구하는 것을 인문(人文)이라고 하였습니다. 동양에서는 만물을 구성하는 요소로 천, 지. 인(天地人)을 말하는데 지는 지리 즉 땅의 원리 같은 것이지요. 여러분들이 학교를 다니실 때 문·사·철이란 말을 들어보셨지요? 일반적으로 동양의 인문학은 보통 문학, 역사, 철학을 아우르는 개념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들이 쓰는 인문학은 서양적 개념입니다. 인문학은 인문과학, 자연과학, 사회과학과는 다릅니다. 영어로 보면 인문학(Humanities)이란 단어가 humanity 와 liberal arts(교양과목)의 의미로 쓰입니다. 인문과학이란 인간이 무엇인가를 묻는 학문으로 추상적이고 보통적인 인간, 개별적 인간을 다룬다면, 사회과학은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를 다루는 학문으로 사회학과 역사학처럼 공동체 속에서의 관계를 다루고 있습니다. 자연과학은 자연을 연구하는 학문입니다. 그런데 요즈음 개념이 확대돼 이러한 것을 다 아우르는 개념이 되었습니다. 과학의 발달로 자연과학의 도움 없이 - 생물학, 빅뱅이라든지 상대성이론, 불확실성의 원리 등과 신경과학, 뇌과학 같은 것을 안 다루고는 - 인간을 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석, 박사 등이 연구하는 humanity가 전문적이고 학문적인 영역이라면 우리가 말하는 인문학은 liberal arts 즉 시민교양으로서의 대중인문학 입니다. ‘한 사람으로서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 인간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고 그런 것을 교양으로 가르치는 학문으로서의 인문학’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즘 매스컴이나 유튜브 등을 통하여 플라톤아카데미 등 인문학 강좌 등을 쉽게 접할 수 있습니다.. ■ 헤브라이즘 VS 헬레니즘 신학(Theology)이란 단어는 신을 나타내는 theos 와 학(學), 이성, 언어, 논리 등을 나타내는 logos의 결합, 즉 인간을 신의 눈으로 이해하는 헤브라이즘과 인간을 인간의 눈으로 이해하는 헬레니즘이라는 어떻게 보면 서로 상반되는 구조의 산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오래 전에 독일의 여성신학자 도르테 죌레가 예루살렘에 있는 <나와 너>로 유명한 마틴 부버(Martin Buber)를 방문했을 때의 일화입니다. 그녀가 신학을 한다고 하자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부버가 하는 말이 “신학이라…그걸 어떻게 하지?”하는 것이었습니다. 죌레는 이때 비로소 히브리사상과 그리스사상의 차이의 깊이를 이해할 수 있었다고 술회했습니다. 학문으로서의 하나님이 아니라 성경에서 경험하는 인격적 하나님을 어떻게 파악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물론 부버가 신학을 왜 모르겠습니까? 몰라서 그런 말을 하지는 않았겠죠. 신학이란 뜻이 가능하냐는 반어적 표현이겠죠. 헤브라이즘은 하나님 중심의, 인간을 신의 눈으로 보는 것이라면 헬레니즘은 인간을 인간의 눈으로 보는 것입니다. 고신대학교 입구의 비석에 코람데오(Coram Deus) ‘하나님 앞에서’ 처럼, 인간이 인간이기 위해서는 우리의 일상이 항상 신을 인식하며 밥을 먹고 일을 하고 또 사람을 만나는 일 등의 모든 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야 하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창조론에서 본 기독교는 어떠한 존재입니까? 성경은 우리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image of God)대로 창조되었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당시에는 왕만이 신의 형상이던 시절에 하비루 같은 하찮은 민중들에게 맹자의 말을 빌리면 왕후장상 따로 없다는 놀라운 선언을 한 것입니다. 기독교는 인간을 인간의 최대치로 본 것입니다. 그러나 요즘 기독교는 인간을 보잘 것 없는 벌레같은 존재로 낮춰 보지 않습니까? 교회만 오면 죄인, 죄인하며 인간을 폄훼합니다. 구속론으로 보더라도 기독교만큼 인간을 높게 평가하는 종교는 없습니다.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 차이점이 있는데 그 가운데 가장 유별난 점은 신이 인간을 위해 희생하는 종교라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다른 종교는 인간이 신을 위하여 헌신하는 것이라면 기독교는 신이 인간을 위하여 희생된 종교라는 것입니다. ■ 신학과 인문학의 관계는? 리챠드 니이버의 「그리스도와 문화」에 나타난 다섯 모델을 중심으로 1) 대립: 문화에 대항하는 그리스도 2) 일치: 문화의 그리스도 3) 종합: 문화 위의 그리스도 4) 역설: 문화와 역설 관계에 있는 그리스도 5) 변혁: 문화를 변화시키는 그리스도의 다섯 유형이 있는데 비판적 수용과 거리 확보를 통해 문화를 변화시키는 변혁 모델이 바람직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교회사 측면에서 밀접한 관계를 유지해 온 기독교 신학과 인문학과의 관계를 시간이 없어 짧게 말씀드리면, 고대에는 정통신학과 플라톤 주의가 결합했으며, 중세에는 중세신학과 신플라톤주의가 결합하였고, 근대를 연 종교개혁기에는 마르틴 루터, 훌리히 츠빙글리, 장 칼뱅 등 핵심 종교개혁자들은 모두 인문학자였다는 사실입니다. 중세가 몰락하고 새로운 질서 도래를 앞둔 과도기적 상황에서 다시 ‘근원으로(Ad Fontes)’ 돌아가자는 운동들이 전개되었는데 남유럽은 그리스와 플라톤 다시보기의 르네상스로, 북유럽은 성서와 어거스틴 연구의 종교개혁의 영향으로 ‘원전을 원어로!’ 읽는 독서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습니다. 왜 고전읽기운동인가? 한 예로 라틴어로 번역된 불가타역본에는 회개하라를 고해하라로 잘못 번역하여 카톨릭에서는 고해성사가 일상화 되었는데, 헬라어 원어를 대조해 본 결과 오역을 발견하고는 종교개혁자들은 고해성사를 폐지했습니다. 이처럼 인쇄술의 발달과 함께 각 나라의 민족주의 대두로 자국어 성경이 보급되면서 종교개혁의 열풍은 전 유럽을 강타하자 혹자는 종교개혁을 독서혁명이라고 부를 정도였습니다. ■ 인문학을 하는 이유 그러므로 인문고전을 읽는다는 것은 사람답게 살기 위함입니다. 앞서 말했듯이 인문학이란 ‘인간다움’입니다. 인간이 인간답게 산다는 것을 캐묻는 작업입니다. 그렇기에 소크라테스는 성찰하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고 했고, 톨스토이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성찰하지 않는 삶은 짐승과 같다고 했다. G.O.D의 노래 ‘길’의 가사처럼 내가 지금 제대로 살고 있는지,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건지를 묻고 또 묻는 작업입니다. 살기 위해서, 잘 살기 위해서, 살아도 산 것 같이 살기 위해서 우리는 인문학을 읽어야 합니다. 두 번째로 인문학을 한다는 것은 자신과 시대를 성찰하기 위함입니다. 인문학은 거울과 같습니다. 거울이 없다면, 우리는 자신의 얼굴을 알 수도, 볼 수도 없습니다. 현재의 나와 우리의 삶에 대한 성찰의 작업이 인문학입니다. 그렇기에 그 책에는 나, 남 없는 우리 모두의 얼굴이 담겨 있습니다. 내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들여다보는 데는 인문학 만한 것이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인문학을 한다는 것은 시대를 비판하기 위함입니다. 이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성찰하는 학문인 인문학은 비판하는 학문이기도 합니다. 성가시게 예언자처럼 쓴소리, 잔소리를 여과 없이 해대는 것이 인문학의 본령이기 때문입니다. 시대를 해석하기도 하고, 시대를 비판한다는 점에서 인문학은 우리에게 꼭 필요합니다. 다른 하나는 그 인문학을 비판하기 위해서 인문학을 읽어야 합니다. 앞서 신학과 인문학의 관계를 말하면서, 신학이 바라본 인간은 결국 하나님 앞에 선 인간(Coram Deo)입니다. 인간다움이란 창조자 하나님을 제외하고, 구속하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젖혀두고는 설명하기 어려우며, 그것 없이는 참다운 인간을 해명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신학과 신자는 당대의 인문학적 결과물을 유심히 따라가며 세심하게 읽어야 시대를 통찰하고 비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논리적으로 신학은 인문학 없이도 존재할 수 있지만, 현실적으로 인문학 없이 신학은 절름발이에 다름 아닙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누구보다도 인문학을 더 진지하게, 즐겁게 읽어야 합니다. "학생 때 들은 허혁교수의 강의가 생각난다. ‘독일 교인들은 일상에서도 칸트나 하이데거와 같은 담론을 즐기는데, 우리는 명품, 부동산 얘기 밖에 없다. 그런 인문학적 소양의 부재가 지금의 기독교 위기를 초래한다고 볼 수 있다" "문학, 예술 등을 아우르는 인문학은 우리에게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을 제공한다. 그리스도의 정신이 이 땅에 충만하려면 콘텍스트인 인문학적 시각으로 텍스트인 성경을 바라볼 때 더 많은 인간에 대한 이해와 통찰을 얻을 수 있다" "신학은 그 시대의 물음에 대한 기독교적 응답이다. 그런 의미에서 신학과 인문학은 서로에게 상호보완적 관계로 발전해 왔다. 물론 한계가 모호한 지점이 있기는 하다. 최근 인문학의 붐은 상호 소통의 도구가 되지 않을까?"

[기독교인문학]‘한 사람에 대한 관심과 배려 그리고 존중

박 양 규 《인문학은 성경을 어떻게 만나는가》 한국의 대형교회의 교육현장에 있던 그의 고민은 하나님의 말씀이 정작 필요한 갈급한 이들에게 성경은 왜 생동감 없이 격리된 언어로 존재하는가?에 대한 물음의 답이 이 책에 담겨 있다. 그의 해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모세와 함께 출애급한 200만명의 히브리인, 베드로가 전도한 3,000명의 결신자, 오병이어의 기적과 5,000명의 군중처럼 ‘영웅’만 기억하고, 그 뒤에 감춰져 숫자로만 기억되는 ‘아무개’들의 재발견이다. 이를 위하여 문학, 역사, 철학, 예술의 인문학을 끌어드린다. 인문학의 정신이 ‘영웅’이 아닌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한 관심과 배려, 그리고 존중이라 믿기 때문이다. 지적 과시가 아닌 밀레와 고흐의 시선처럼 아래로의 관심과 환대가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때문이다. ◇ 저자소개 박 양 규∥ 총신대와 동 대학원에서 신학을 전공하고, 고려대학교 서양사학과에서 헬레니즘 분야로 석사과정을 마쳤다. 영국 에버딘대학교에서 중간사 분야로 박사 과정을 수료, 삼일교회에서 교회학교를 총괄했다. 목회자로서 저자의 오랜 고민은 목회와 교육현장에서 왜 성경이 현실에 와 닿지 않는가, 왜 성경은 격리된 언어로 존재하는가였다는 그는 현재 대형교회의 울타리를 벗어나 성경과 인문학을 연결한 교회교육 콘텐츠를 제시하기 위하여 유튜브 채널 <교회교육연구소>와 <큐리랜드TV>를 운영하고 있다. 저서로는 《유럽비전트립》, 《청소년들을 위한 하이델베르크》, 《중세교회의 뒷골목 풍경》 등이 있다. 샘솟는 기쁨 / 2021. 1. 21. / 16,500원 ◇ 같이 읽으면 좋은 책 《인문학으로 읽는 성경》 김주철 / CLC / 《설교자는 왜 인문학을 공부해야 하는가》 김도인 / 글과 길 / ‘ 지식’이 아닌 ‘시선’ “한국의 기독교 집단이 성경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것이 인문학과 관련해서 대담하게 던지는 질문이다, 성경적이지 않다면 인문학으로 성경을 읽는 ‘태도’가 필요한 이유이다. ~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한 인간을 향한 ‘시선’이지 인문학 ‘지식’이 아니다.” 바르게 믿기 위하여 인문학 필요 김길구 우리 코너 이름이 기독교+인문학입니다. 서로 앙숙 같은 신본주의냐 인본주의냐를 가르는데 익숙한 우리 풍토에서 용어에 대한 오해가 꽤 있는 것 같아요? 김현호 그것은 오해지요. 중세는 물론 종교개혁을 선도한 이들의 학문적 배경에는 인본주의자들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보수적이라는 미국도 1980년대부터 기계문명의 발달로 인한 인간성 상실에 대한 반성으로 대부분의 기독교 학교들이 고전교육 등 인문학을 강화하는 추세입니다. 박영규 말씀하셨듯이 원래 인문학은 기독교 세계 속에서 성경을 뿌리에 두고 태어났어요. 하나님이 주신 이성을 통하여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사고하는 방법을 배우기 위함이었으니까요. 김길구 인문학 Humanities 은 인간의 근원적인 문제를 탐구하는 학문입니다. 그런 인문학이 성경과 만나면 어떻게 될까? 오늘의 주제입니다. 김현호 ‘수십 년간 기독교인으로 살아오면서 안타까운 점은 여전히 한국 교회에는 질문과 토론이 없고 자구 하나에 집착하며 바벨탑 같은 성경 지식만 쌓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공허한 설교와 맹목적 아멘만 넘쳐나는 것도 여전하다. 이를 극복하려면 관성으로 굳어진 시각의 틀을 깨고 성경을 바라보는 노력이 필요하다.’ 경향신문 기자인 저자의 누나가 쓴 추천사의 일부입니다. 우리 교회의 일그러진 자화상이지요. 박영규 저자는 학문과 일상, 성경과 삶이 분리되고, 교회 교육의 안팎이 다른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습관과 관성의 틀을 깨는 인문학적 시각으로 성경과 공감하고 소통하는 새로운 ‘관점’을 제공해 주고 있습니다. 김길구 최근 출판계의 흐름 중에 하나는 인문학을 주제로 한 출간이 꾸준히 느는 현상이 아닌가 싶은데, 기독출판계 역시 이러한 흐름에 예외가 아니죠? 어때요? 김현호 그렇지요. 저희 모임에서도 이정일 교수의 〈문학은 어떻게 신앙을 더 깊게 만드는가〉란 책으로 독서 나눔을 가진 적이 있는데 참가자들이 성경을 인문학적 배경을 통해 다양한 시각으로 이해하려는 것을 보고 저도 놀랐습니다. 교인들의 수준이 높아졌다고 봐야 하나요? 박영규 성경도 잘 모르는데 인문학까지? 라는 부정적 시각도 있고요. 자칫 19세기의 ‘살롱문화’처럼 신분과 계급, 지적 허영을 과시하기 위한 일종의 ‘귀족적 문화’로 변질 될까 우려되기도 합니다. 김길구 책으로 들어가 보죠. 고전의 반열에 오른 작가들의 주제 의식과 명작이 된 시대적 배경에 대하여 예를 들고 있지요? 김현호 「데미안」에서 묘사된 인생의 고뇌, 「걸리버 여행기」에서 말하는 부조리한 현실, 밀레와 고흐의 작품이 전하는 ‘한 인간에 대한 연민’ 같은 투철한 주제 의식이 고전의 반열에 오른 이유로, 러시아 정교회의 극심한 타락과 프랑스 사회의 가득한 부조리가 톨스토이와 까뮈를, 영국사회의 부도덕과 스페인의 부패한 사회상이 톨스토이와 돈키호테라는 캐릭터를 창조한 시대적 배경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박영규 한마디로 시대를 꿰뚫어 보는 작가의 ‘시선’이 향하고 있는 곳을 얘기하고 있어요. 예를 든 작품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산다는 기독교가 지배했던 유럽의 얘기들이잖아요. 괄목할만한 성장을 이룬 우리 교계 기독교인의 삶도 점점 ‘살롱문화화’ 되고 있지 않은지 성찰해 봐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런 작품들은 우리에게 많은 통찰을 주고 있지요. 이것이 인문학이 필요한 이유겠죠. 주인공이 아니 보통 사람들에 주목해야 김길구 이제 이 책의 주제로 들어왔어요. 먼저 성경을 바라보는 ‘시선’에 대해서 말씀을 하셨는데, 이 책의 또 하나의 주제는 성경에 나오는 ‘주인공’이 아닌 이 책에서 ‘아무개’라고 불려지는 이름 없는 작은 이들에 주목하라는 것입니다. 김현호 인문학이 신학을 전달하는 통로라면 그것을 잘 아우를 수 있는 장르가 문학 같아요. 서점에 있으면 신학책들이 많이 들어와요. 자칫 과잉교리와 신학의 전달로 성경 말씀이 실생활과 괴리된 공허한 설교가 되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박영규 저자는 성경의 주인공들의 스토리에 가려진 동시대의 ‘아무개’들에게 다가가 그들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그 말씀을 적용할 때 말씀에 생명력이 생겨 아무개들이 살아갈 지혜와 영감을 얻게 되는데, 그 이유는 그 아무개들이 바로 오늘, 우리들의 모습이기 때문이죠. 김길구 이 책은 270쪽에 어떤 믿음을 가졌는가? 어떤 삶을 선택할 것인가? 등 흥미로운 12개의 주제로 나눠 각 주제마다 벤치마킹, 공감하기, 인문학적 성경읽기라는 3단계 과정을 두어 성경공부의 깊이를 더하는데요,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를 떠나는 장면을 다룬 ‘떠날 것인가, 머물 것인가?’를 통하여 인문학과 성경이 어떻게 만나는가를 알아보죠. 김현호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이해하려면 우선 「우르」에 대한 선이해가 필요합니다. 우르는 세계사에 등장하는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중심도시죠. 인류 최초의 서사시 <길가메시 서사시>나 성문법 함무라비 법전은 우르를 중심으로 꽃을 피웠던 이 메트로폴리스를 고려치 않으면 그의 ‘순종과 결단’의 의미가 빛이 바래죠. 당시 우르는 문명과 법 제도가 완비된 완벽한 주거공간이었습니다. 저자는 주인공의 아브라함의 결단에 주목합니다. 공감하기, 그리고 인문학적 성경읽기 박영규 1단계인 벤치마킹하기에서는 여기에 멈추지 않고 한 걸음 더 들어가 ‘영웅’인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처럼 하나님께 직접 듣지 못하고 전언을 듣고 그의 명령에 따라야 했던 그 많은 주변부 사람들의 입장에서 그 말씀을 재해석하고, 고심 끝에 따라나서야 했던 이들의 처지를 되돌아보고 그들의 결단에 우리도 공감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매일 매일을 크고 작은 선택을 해야 하는 수많은 ‘아무개’ 속에 한 명인 바로 우리 자신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김현호 다음 단계인 공감하기 단계에 이르면 사걀의 <이삭의 희생>을 보면서 당시 사회적 약자였던 사라의 입장이 되어 보고, 고심 끝에 내린 그녀의 믿음에 주목합니다. 그리고 아브라함과 롯이 나그네를 환대하는 장면에 이르면 ‘선한 영향력’이란 고지를 점령해야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다르게 설정된 태도에서 나옴을 상기시킵니다. 3단계인 인문학적 성경읽기에서는 창세기 12장1절의 야웨께서 명령하셨다. ‘너 자신을 위해서’ 네 고향, 즉 네 친척, 네 아버지의 집을 떠나~(창12:1, 히브리어 원본)의 성경본문을 통해 번역본에 빠진 ‘너 자신을 위해서’란 부분을 통해 아브라함과 함께했던 아무개들을 살펴보면서 우르를 떠난 것은 하나님을 위한 것인가, 아니면 아무개들 자신을 위한 것인가?란 물음에 우리가 스스로 답하도록 인도합니다. 박영규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인문학이 하나님과 다른 길을 가는 것 같지만 결국에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간의 이성을 통하여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김길구 정리하자면 저자의 인문학적 성경읽기의 특징은 성경에 등장하는 수많은 등장인물 중 몇 사람으로 기억되는 ‘영웅’들의 위인전이 아니라 주변부의 등장인물 한 사람 한 사람에게도 관심과 배려, 그리고 존중의 시선으로 잃지 않는 따뜻함이 있다는 점이고, 저자는 이것이 인문학의 정신이라고 합니다. 이를 위하여 시대를 넘나드는 해박한 문학, 역사, 예술을 아우르는 다양한 이야기를 통해 텍스트인 성경이 고대 중동의 케케묵은 박제화된 남의 나라 이야기가 아닌 우리의 삶의 현장인 바로 지금 여기의 콘텍스트에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으로 다가오는 감동을 느꼈던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다음 호인 7, 8월에는 여름휴가 관계로 연재를 쉽니다. 비정상이 정상이 되어버린 코로나19 시대 독자 여러분의 건강한 여름나기를 성원합니다. 감사합니다. 【 정리 : 김길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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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모가디슈’의 한국인을 말하다

류승완 감독이 그린 남북 갈등의 현대사 류승완 감독이 <베를린>(2015)에 이어 남북 간의 갈등을 역사 속 사건을 통해 새롭게 조명한 영화를 만들었다. 영화 <베를린>이 남북 첩보원들의 충돌과 인간애를 액션을 통해 그려냈다면, 최신작 <모가디슈>는 남북갈등은 시대적 배경으로 전개시켜 놓은 채 소말리아 반군의 혁명 속에서 함께 탈출하기 위해 함께 고군분투하는 남북외교관의 모습을 다루었다. 즉 <베를린>에서는 남과 북이 서로에게 총을 겨누는 적대적 관계로 등장한다면 이번에는 외부의 총을 피해 협력해야 하는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모가디슈>에서 발견하는 한민족의 상황은 한마디로 웃프다(겉으로는 웃기지만 속으로는 슬픈 처지라는 신조어). 동서독을 나누던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지 얼마 안 된 시점에서 벌어진 일을 다루고 있어서 남북은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가 되어버렸을 때의 상황을 읽을 수 있다. 1991년 남과 북은 유엔가입을 앞두고 아프리카 국가들의 표를 얻기 위해서 치열한 외교전을 펼쳤다. 유엔 회의장에서는 잘살든 못살든 한 국가당 한 표의 투표권이 주어지는 까닭에 아프리카 국가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일이 시급했다. 소말리아주재 한국 대사관의 한신성(김윤석) 대사는 안기부 출신의 정보 요원 강대진 참사관(조인성)이 가져온 선물 보따리를 들고 소말리아 대통령을 만나러 가는 길에 무장강도를 고용한 북한 대사관의 방해 작전에 피해를 받고 만다. 강대진은 이에 대한 보복이라도 하듯 북한의 총기가 소말리아 반군의 손에 들어간다는 언론 플레이를 벌여 어떻게든 소말리아 정부와 북한 간의 관계를 떨어뜨려 놓으려 한다. 이런 상황 속에서 반군은 수도 모가디슈에 진입하게 되고 남북대사관 직원과 그 가족들은 수도를 탈출해야 하는 위기에 직면하게 되는 것이다. 류승완 감독은 ‘지명(地名)’을 통해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식을 취해왔다. 이전 작품의 도시 베를린은 동서독 분단을 상징하는 도시여서 남북 정보원들의 생사를 넘나든 작전이 전개되는 상황은 충분히 관객을 납득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베를린은 이제 분단이 아닌 통일을 상징하는 도시가 되었다. 그 누구도 합칠 수 없을 만큼 골이 깊어진 이념과 경제적 차이를 극복하고 한순간에 무너진 베를린 장벽은 남북분단의 상황에서 왜 우리만 과거 냉전 시대의 대결 구도를 벗어나지 못한 채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생각을 일으켰다. 이제 류승완 감독은 ‘모가디슈’를 들고 나왔다. 우리에게 소말리아는 국제 수송선들 납치하여 몸값을 받는 ‘소말리아 해적’으로 알려졌을 뿐이다. 영화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리들리 스콧 감독의 <블랙 호크 다운, Black Hawk Down, 2001>을 떠올릴 수도 있을 것이다. 1993년 소말리아에 파견된 유엔평화유지군으로서의 미군 특수부대와 유엔의 구호식량을 착취하는 소말리아 민병대와의 시가전이 압권인 영화였다. 그런데 소말리아와 모가디슈는 이게 전부였다. 부정과 혼돈의 도시 소말리아의 모가디슈. 그 속의 남북은 부조리한 상황 가운데서 살기위해 함께 탈출을 감행한다는 점에서 모가디슈는 통일 이전에 개별적 생존을 상징하는 도시로 남게 될 전망이다. 한국의 영화 관객들은 이제 낯선 소말리아에 대한 또 하나의 기억을 간직하게 되었다. 모가디슈에서 드러난 한국인의 민족성 영화는 평소 인식하지 못했던 인간 무의식의 통로 역할을 한다. 특히 사람들이 주목하고 인기 있는 영화들은 그 사회 구성원들의 집단 무의식(Collective Unconscious)을 보여준다. 칼 융(Carl G. Jung)이 언급한 집단 무의식은 개인이 갖는 무의식과는 달리 사회 구성원들이 역사와 전통 그리고 문화 가운데 갖게 되는 무의식으로 보통은 신화나 설화 그리고 전래동화를 통해 드러난다. 특별히 생각하지 않아도 그 문화 속에 사는 사람들의 삶 속에서 은연중 나타나는 것이 있다면 집단 무의식의 영향이라 볼 수 있다. 현대 사회에 적용하자면 집단 무의식은 대중성을 통해 나타난다. 한국의 오랫동안 사랑받는 상업영화나 시간을 뛰어넘어 인기 있는 가요 안에는 한국인의 집단 무의식이 들어있을 가능성이 높다. <모가디슈>에는 세 가지의 한국인의 집단 무의식으로 해석될 수 있는 민족성이 내포되어 있다. 첫째는 경쟁(競爭)의 무의식이다. 그 먼 아프리카에서조차 남과 북은 갈라져서 서로에 대한 비방과 투쟁을 멈추지 않는다. 말이 좋아서 외교전이지 실상은 거짓과 술수 그리고 폭력이 난무한다. 그런데 이 같은 갈등은 소말리아에 주재하는 남북외교관들이 아프리카에까지 오게 하는 원동력이며 그들은 경쟁 가운데서 자신의 입지를 넓혀가는 성과를 거둔다. 삼국시대에 민족 안에서 분열했던 신라와 고구려 백제의 모습으로부터 조선시대의 당파싸움과 현대 사회에서 여야로 나누어져 치열하게 싸우고 경쟁하는 모습은 때로는 국민들을 절망시키고 위기로 몰아가기도 하지만 이는 에너지를 고양시키고 적절한 안내를 통해 성장의 밑거름이 되기도 한다. 우리는 일제강점기를 경험했고 미국의 도움을 받아 살아온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지금은 이 국가들과 경쟁하고 있지 않은가! 둘째는 동정(同情)의 무의식이다. 어려운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돕는 동정은 인간의 본능 같지만 그렇지 않다. 아무리 미워하고 못된 사람이라도 잘못되고 위기에 빠졌을 때 모르는 척 넘어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그런데 한국인들로서는 모른 척 하기가 쉽지 않다. 특히 도와달라고 사정하는데 이를 어찌 무시할 수 있냐는 생각이 한국인들의 마음에는 있는 듯하다. 북한 대사관이 소말리아 반군에 의해 피습당하고, 믿었던 중국대사관마저 폭도들에 의해 강탈당하는 모습을 보며 북한의 림용수 대사(허준호)가 택한 곳은 한국 대사관이었다. 총알이 빗발치고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에서 림용수 대사는 한국 대사관의 문을 두드리며 도움을 요청한다. 한국 대사관 안에서는 고민이 흐르고 마침내 문을 열어준다. 이들을 망명으로 보고하여 실적을 올리려는 외교적 술수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북한 대사관 직원들을 맞이하는 한국 대사관 안에는 난장판 속에서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는 것이 옳다는 기류가 흐른다. 셋째는 문기(文氣)의 무의식이다. 책을 좋아하고 배움을 가치 있게 여기는 무의식이 한국인에게 있다. 남북의 외교관과 가족들은 승용차에 나눠 타고 이탈리아 대사관으로 피신하게 된다. 아마도 이 영화에서 류승완 감독이 가장 심혈을 기울여 찍은 액션 장면이 아닐 수 없다. 도로마다 반군이 장악한 상황에서 총알이 빗발치듯 쏟아지는데 이들은 어떻게 탈출에 성공할 수 있었을까? 임용수 북한 대사는 한국 대사관에 있던 책들을 모아 승용차의 외부에 붙여서 방호벽을 만든다. 끈과 테이프로 책들을 승용차 위와 겉면에 부착시켜서 총알이 뚫고 오지 못하도록 일종의 방탄복 역할을 하게 함을 볼 수 있다. 책으로 총을 막는다! ‘펜이 칼보다 강하다’라는 서양 속담이 있었다면 앞으로는 ‘책으로 총을 막는다’라는 말도 유행시켜야 할 듯하다. 관객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장면이지만 이것은 문기(文氣)에 대한 한국인의 무의식을 상징화시킨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세계에서 금속활자를 가장 먼저 만든 민족일 뿐만 아니라 선교사가 들어오기 전에 한글로 번역된 성경이 먼저 들어온 선교역사를 우리는 갖고 있지 아니한가? 지금도 대한민국은 세계에서 두 번째로 성경을 많이 출판하는 나라다. 모가디슈의 그리스도인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한신성(김윤석) 대사의 부인 김명희(김소진)의 이미지에 깊은 인상을 받을 수밖에 없다. 김명희는 매우 신실한, 교회 밖의 사람들이 본다면 극성스러울 정도로 기독교 신앙을 가진 인물로 묘사되고 있다. 대사 부인 역할을 맡은 김소진 배우는 <마약왕>에서도 범죄의 길에 빠진 남편(송강호)을 구하고 가정을 지키는 그리스도인 현모양처의 역할로 주목을 받았었다. 대사관 밖의 어려움을 감지한 김명희는 여직원과 직원 부인을 모아 기도회를 연다. 교회도 다니지 않고 심지어 불교 신자이기도 하지만 이들은 청산유수로 주기도문을 외울 줄도 안다. 기독교 영화가 아닌 일반 상업영화 속에서 기독교인이 보여준 신앙의 모습은 대개 긴박하고 무거운 상황을 잠시 쉬어가게 만드는 코믹한 설정으로 자리 잡는 경우가 적지 않은데 이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이후에 나타난 대사 부인의 행실은 감동적이며 긍정적인 그리스도인의 이미지를 갖고 있다. 대사부인 김명희는 저만 살려고 애쓰며 이기적인 존재가 되기 쉬운 전장의 상황에서 부상당한 현지인 운전사를 치료해주고 대사관을 가득 채운 북한 대사관 가족들에게 아낌없이 식사를 대접하는 면모를 보인다. 남북의 위기 속에서 화합하는 모습을 보여줘서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뻔히 예상할 수 있는 장면을 거부했던 류승완 감독도 이 장면만큼은 뺄 수 없었다. 바로 남북이 함께 식사하는 자리에서 절인 깻잎을 집기 쉽도록 젓가락으로 잡아주는 장면이다. 이 주인공은 소말리아의 그리스도인 김명희였다. 모가디슈의 남북이 마음을 여는 순간이다. 이것이 실화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류승완 감독의 머릿속에는 남북이 위기 속에서 마음을 열고 함께할 수 있는 자격이 되는 사람을 찾지 않을 수 없었고, 그 역할은 그리스도인인 대사부인에게로 돌아갔다. 이것은 세상이 생각하고 수용할 수 있는, 혹은 마땅히 그렇다고 여기는 그리스도인의 이미지이기도 하다. 상업영화 속에 언뜻언뜻 비치는 그리스도인의 이미지는 그리스도인에 대한 세상의 생각과 판단을 담고 있다. 영화는 세밀한 작업이며 의미 없는 장면이란 영화 안에 들어갈 수가 없다. 또한 반대로 영화 속 그리스도인의 이미지는 관객에게 영향을 줄 수도 있다. 비그리스도인들이 성경을 읽고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을 잘 알기 때문에 부정적 입장을 취하는 것이 아니다. 언뜻 나타나는 이미지, 특히 매스미디어를 통해 드러나는 그리스도인의 이미지를 통해 자신의 생각을 새롭게 하기도 하고 기존의 생각을 강화시켜 나가기도 한다. 현대를 사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이미지가 중요한 시대에 살고 있음을 새삼 깨닫게 하는 영화가 아닐 수 없다.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오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벧전2:12)

[영화]한국영화가 사회문제를 다루는 두 가지 방법

영화, 선진국 대한민국에서 일어나는 일을 말하다 지난 7월 2일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가 한국의 지위를 개발도상국 그룹에서 선진국 그룹으로 변경했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 전 세계 경제가 어려운 상황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은 경제 규모로는 세계 10위에 올랐고, 1인당 국내총생산(GDP)에서도 이탈리아를 추월하는 등 선진국으로서의 면모가 확인된 까닭에 이번 발표는 예상된 일이었다. 특히 의미가 있는 것은 대한민국이 개발도상국 범주를 벗어나 선진국에 진입한 최초의 국가라고 유엔이 공인한 일이다. 그렇다면 한국영화 속에 나타난 한국 사회는 과연 선진국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을까? 증권이나 금융사기와 같은 선진국형 범죄가 소재로 등장하는 현실은 분명 경제력을 갖춘 한국의 현주소를 보여주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해결방법이 극히 사적인 고통과 이에 따른 복수로 끝을 맺을 뿐 제도적인 개선에 이르지 못한다면 무늬만 선진국이라는 오명을 벗어나기 어렵다. 특히 장애인과 같은 사회적 약자를 대하는 현실을 다룬 영화라면 영화를 보는 내내 얼굴이 화끈거림을 감출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점에서 과연 우리는 선진국인지를 자문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김창주 감독의 영화 <발신제한>과 김정인 감독의 <학교 가는 길>은 우리 사회에 일어난 갈등이 선진국형인지 아니면 아직도 개도국 수준에 머물고 있는지를 확인시켜주고 있다. <발신제한>은 드라마로 제작된 상업영화인 반면 <학교 가는 길>은 다큐멘터리다. 드라마는 스릴러나 액션 등과 같은 대중이 선호하는 방법을 동원하여 사회문제를 부각시키는 장점이 있다. 과거의 시간 속에 잊혔던 문제를 새롭게 인식시키는데 매우 유용한 방식이다. 그에 비해서 다큐멘터리는 소재주의를 선택한다. 즉 원래부터 우리가 알고 있는 사건이나 문제를 깊이 파고들며 연출자가 제시하는 새로운 이해를 촉구받는 형식이다. 은행의 불완전 판매에 대한 복수 드라마 타입의 스릴러 장르를 표방한 영화 <발신제한>은 자본주의의 꽃인 금융업의 비리를 지적하고 그로 인해 희생당한 사람의 존재를 상기시킨다. 돈 많은 고객을 관리하는 PB(프라이빗 뱅크) 센터장 성규(조우진)는 두 아이를 자신의 고급 SUV에 태우고 출근하는 길에 테러범(지창욱)으로부터 걸려온 발신 번호 제한표시의 전화 한 통을 받는다. 거액의 돈을 마련하지 않으면 자동차 시트 밑에 설치한 사제폭탄을 폭파시키겠다는 협박 전화는 성규를 대혼란에 빠뜨리고 그는 어떻게든 아이들을 살려야겠다는 생각에 VIP 고객에게 전화를 걸어 그들의 돈을 유용하려 한다. 전후 사정을 알지 못하는 경찰은 성규를 테러범으로 오인하여 그를 뒤쫓기 시작하고 지뢰 위에 걸터앉은 모양새의 성규는 절체절명의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게 된다. <발신제한>은 2016년에 국내에서 개봉한 스페인 영화 <레트리뷰션: 응징의 날>을 각색한 작품이다. 자동차에 갇혀 있는 상태에서 다양한 감정을 표현해야 하는 만큼 연기력이 출중한 배우가 필요하다는 점에서 주연을 맡은 조우진 배우는 합격점을 받고도 남음이 있다. 특별히 이 영화를 <더 테러 라이브>와 <끝까지 간다> 등 작품성 있는 스릴러 영화들을 편집한 편집 감독 출신의 김창주 감독이 연출했다는 점은 이 영화의 전개가 매우 빠르고 간결하여 요즘 젊은층의 성향에도 잘 맞을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외국영화를 각색했다지만 범행의 이유가 은행의 잘못된 투자로 인해 손실을 입고 가족이 파괴된 상처 입은 사람들의 복수란 점까지도 동일한 것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그런데 한국영화를 본 관객들은 은행의 불완전 판매로 인해 큰 손실을 입은 범인의 복수극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 한마디로 개연성 있는 이야기로 보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2011년 부산저축은행 사태는 1조 원이 넘는 피해액에 3만8천 명에 이르는 서민 피해자들을 낳았지만, 아직도 보상은 요원한 상태다. 금융기관들이 이익에만 몰두한 채 고위험 금융상품을 제대로 안내 없이 판매하는 일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발신제한>은 금융계에 윤리적 경고장을 날린 셈이다. 지역이기주의를 극복한 어머니들의 용기 지난 5월 5일, 어린이날에 개봉한 <학교 가는 길>은 발달장애인을 위한 특수학교인 ‘서진학교’ 개설을 둘러싼 지역사회와 장애아 학부모들과의 갈등을 그린 다큐멘터리 영화다. 특수학교 설립문제로 학부모와 지역사회가 큰 갈등을 겪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김정인 감독은 2017년 9월 5일에 진행된 ‘특수학교 설립을 위한 2차 주민토론회’부터 카메라를 들고 직접 당사자들을 인터뷰하며 장애인 가정이 겪는 현실을 모으기 시작했다. 슬프고 어두운 모습만 있을 것이라는 예측은 빗나갔다. 웃음과 기쁨 그리고 자녀와의 갈등이 있는 모습은 여느 비장애인 가정과 다를 게 없었다. 비장애인들이 장애인들에 대해 가진 편견의 가장 중요한 원인은 함께 어울려 살지 않기 때문이란 사실을 영화는 가르쳐 주고 있다. <학교 가는 길>에는 국민을 안타깝게 만들었던 어머니들이 학교를 짓게 해달라고 지역주민 앞에서 무릎 꿇고 사정하는 바로 그 장면도 등장한다. “집에서 2시간 전부터 학교를 가려고 나와야 합니다. 여러분들도 부모이시고 저도 부모입니다. 단지 장애가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아이들의 학교를 여기에 지을 수 없다고 하시면... 그럼 어떻게 할까요? 여러분들이 욕을 하시면 듣겠습니다. 여러분들이 모욕을 주셔도 저희 괜찮습니다. 여러분들이 지나가다가 때리셔도 맞겠습니다. 그런데 학교는 절대로 포기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장애아들도 교육받을 권리가 있지 않습니까?” 지역사회와의 갈등을 줄이기 위해 서진학교 설립을 반대하는 지역주민들에 대해서 몸을 낮추고 이해하려는 어머니들의 언행은 존경스러울 따름이다. ‘특수학교를 반대하는 것은 아니나 우리 지역에는 안된다’ 혹은 ‘특수학교가 들어서면 집값이 떨어진다’는 몇몇 주민들의 발언에 분노하는 사람은 관객들뿐이다. 아이들을 위해 학교를 짓는 일이라면 모든 것을 감내할 준비가 되어 있는 어머니들은 역시 위대했다. 특수학교 설립보다는 지역 국회의원의 공약사항이면서 생활에 편리한 의료시설 건립을 찬성하는 지역주민들의 의견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지 않은 전형적인 지역이기주의가 등장했다는 판단은 피할 수 없었다. 특수학교 설립을 반대하는 모습 이란 이름하여 님비(NIMBY·Not In My BackYard)현상에 다름 아니었다. 님비는 ‘내 뒷마당에는 안 된다’란 뜻으로 사회에서 필요로 한 시설이나 정책을 집행할 때라도 ‘내가 사는 지역에 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화장장이나 쓰레기 매립장에서부터 핵폐기물 처리장에 이르기까지 혐오나 기피시설로 인정되는 한 자신의 지역사회에서의 건립을 반대하는 운동에 대해 붙여진 이름이다. 그러나 지역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라면 지역이기주의에 편승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한국에서 님비현상이 지역이기주의로 비판을 받는 결정적 이유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가 무시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정신적으로나 신체적으로 혹은 경제적으로 외부의 도움과 특별한 배려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사회적 약자들 역시 존엄한 인간이며 사회의 구성원으로 누려야 할 권리가 있는 법이다. 따라서 적극적으로 반대 운동을 벌일 만큼 사회적 약자에 대한 편견이 도를 넘어 지역이기주의로 확산될 때 우리는 님비현상의 비인간적 행태를 문제 삼을 수 있는 것이다. 한국교회의 숙제 보건사회연구원의 2020 장애인 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2020년 3월 말 기준 등록장애인은 2,622,950명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2017년에 비해 약 4만2천 명이 늘어나는 등 지속적인 증가 추세를 보이고 있다. 그나마 장애인이 느끼는 차별의 시선은 약간 줄어든 것이 다행스럽다. 장애인 실태조사에서 함께 시행한 설문조사 가운데 장애인 차별에 대하여 ‘없다’고 응답한 비율은 36.5%로 2017년 20.1%, 2014년 27.4%에 비해 증가함으로써 우리 사회의 장애인 차별이 점차 줄어들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아직도 장애인을 차별하는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월등히 많은 현실을 피해가지는 못했다. 님비현상을 극복하며 사회의 약자를 돌보는 일은 한국교회가 감당해야할 시대적 과제이기도 하다. 세속화된 사회에서 지역사회와 소통을 이루는 가운데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될 수도 있다. 구한말 가난한 나라 조선에 발을 디딘 선교사들은 사회에서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았던 장애인과 소외받은 사람들에 대한 관심과 돌봄을 시작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캐나다의 의료선교사 로제타 홀(Rosetta Sherwood Hall) 선교사는 1894년 시각장애인 학교인 평양여맹학교를 세움으로써 국내 특수교육의 첫 문을 열었다. 한국교회와 기독교인들이 존경받을 수 있었던 것은 세상이 편견을 갖고 하지 못했던 사회적 약자를 품었기 때문이었다. ‘소자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마25:40)는 예수님 말씀은 님비현상에 대해 침묵해서는 안 되는 교회의 사회적 사명을 뜻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왕 사랑을 실천하고자 한다면 지혜롭게 해야 할 일이다. ‘다툼이나 허영’(빌2:3)이 아닌 지역사회도 함께 품으며 겸손한 마음으로 이타적 존재가 누리는 기쁨을 제공하는 것이 마땅하다. 영화는 사회를 고칠 수 있을까? 문제를 알면 해결 방법도 찾을 수 있다. 영화가 한국사회의 문제를 제기한다면 그 답은 영화를 보는 관객의 마음에 있을 것이다.

[영화] 올림픽이 기억하는 신앙의 영웅

올림픽이 열리기 전에 꼭 봐야 하는 영화 도쿄올림픽이 코 앞으로 다가왔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 개최가 불투명한 가운데서도 올림픽을 준비하는 선수들의 심장은 뜨겁게 뛰고 있다. 만일 그 선수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영화 <불의 전차>는 자신의 심장이 요동치는 분명히 이유를 발견하게 해줄 것이다. 하나님이 주시는 힘으로 뛰고 있다는 사실에서 금메달보다 더 높고 위대한 목표가 눈 앞에 펼쳐지는 광경을 볼 수 있으리라. 영국이 낳은 위대한 육상선수 에릭 리델(Eric H. Liddell, 1902-1945)과 해롤드 아브라함(Harold Abrahams, 1899-1978)의 멋진 스포츠맨십이 빛나는 영화 <불의 전차>(Chariot of Fire)는 제작된 지 40년을 맞이하면서 스포츠영화로써 뿐만 아니라 기독교 영화로도 고전의 반열에 든 작품이다. 1981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을 비롯한 각본상, 의상상 그리고 음악상 등 무려 4개 부문을 획득했을 때 미국의 그리스도인들은 영화 <벤허>가 1960년 아카데미상 11개 부문을 휩쓴 이후로 가장 대중적인 기독교 영화가 탄생했다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었다. 그러나 한국의 극장가는 할리우드에서 울려 퍼진 환호성을 35년 동안이나 외면했다. 한국전쟁 이후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은 영화 가운데 한국의 극장에서 걸리지 않은 유일한 영화라는 꼬리표도 따라붙었다. <불의 전차>가 한국의 극장에서 공식적으로 개봉하기까지는 세기가 바뀐 2016년에서야 가능했다. 필름 원본을 디지털 리마스터링 작업을 거쳐서 디지털 영사 시스템에 맞춘 작업을 끝낸 직후였다. 그리고 지난해 가을 코로나로 인해 극장가에 신작들의 상영이 연기된 상황에서 관객의 호응도가 좋았던 영화들을 모아서 재상영하는 행사 가운데 다시 한번 극장에 걸릴 수 있었다. 이 위대한 명작을 극장에서 볼 수 없었던 것도 그리고 이제야 극장에서 만날 수 있었던 것도 그리스도인들 때문이었다. 기독교 영화를 외면했던 그리스도인들이 이제야 눈을 떠서 이 영화의 가치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불의 전차>는 기독교가 외면받는 이 시대에 더욱 기독교의 가치를 일깨워 주는 최고의 명작이다. 1924년 파리올림픽 육상 단거리 금메달리스트인 에릭 리델(이안 찰슨)과 해롤드 아브라함(벤 크로스)의 열정 넘치는 도전을 그린 영화 <불의 전차>가 특별한 이유는 신앙과 예술 그리고 재미라는 기독교 대중영화의 세 요소를 모두 갖췄기 때문이다. 신앙의 가치가 빛나는 영화일수록 예술성도 떨어지고 재미도 없을 것이라는 편견은 빨리 버리는 것이 좋다. 세상에서 가장 품위있는 영화 <불의 전차>는 스포츠맨들의 치열한 경쟁을 내면화시켜 품위 있는 스포츠영화가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었다. 경기에 나서는 선수들 사이에서 일어날 수 있는 시기와 질투 혹은 음모 등은 눈꼽만치도 보이지 않는다. 대신 최선의 가치를 추구하는 주인공의 내면적 갈등과 극적인 결과가 매우 느리게 표현될 뿐이다. 연출은 영국 귀족의 자세처럼 기품이 있어 보인다. 대중들의 호기심을 끌만한 자극적인 장치도 촬영기법도 보이지 않는다. 기교를 부린 점이 있다면 선수들이 달리는 장면에서 느린 동작으로 표현하며 반젤리스의 주제가를 덧입힌 정도다. 지난 2012년 제30회 런던올림픽 개막식에서 사이먼 래틀경이 지휘하는 런던심포니 오케스트라는 영화의 장면과 함께 바로 <불의 전차>의 테마를 연주함으로써 이 영화가 영국의 현대사를 빛낸 사건임을 전세계에 알렸다. 특히 ‘미스터 빈’으로 알려진 영국의 코미디언 로완 앳킨슨이 코믹한 연주와 연기로 참여하는 바람에 <불의 전차>는 더욱 세계인의 머릿속에 잊을 수 없는 올림픽 영화로 남게 되었다. 이 영화의 품위는 명예를 중시하는 영국인의 고전적인 전통이 내용으로도 확인되고 있어서 주목받을 수 있었다. 1919년 영국 캠브리지 대학의 신입생 환영회는 정오를 알리는 12번의 종소리가 멈추기 전까지 캠퍼스를 한 바퀴 도는 달리기 경주로 영화는 시작한다. 이 경기에 참여하고 또한 지켜보는 학생들은 도전과 패기와 열정으로 가득한 젊은이들일 따름이다. 그러나 이들은 단순히 젊다는 의미만을 지닌 학생들이 아니라 순수함과 바른 가치관을 가지고 국가와 세계를 위해 봉사하는 지도자가 될 사람들이란 점에서 세상사는 그리스도인의 역할을 떠올리기에 충분하다. 신입생 환영식에서 캠브리지 대학 학장은 강당 벽면 동판에 새겨진 이 대학 출신으로 1차세계 대전에서 나라를 위해 싸우다 죽은 전사자 명단을 보며 이렇게 회상하고 있다. “약속된 미래를 향해 정열적으로 학문을 탐구하던 모습을 기억합니다. 그들은 한 시대의 꽃이었고 영국의 자랑이었습니다.” 이 영화 속에서 나타난 명예란 한 개인이 자신의 이기적인 욕망을 위해서 살지 않고 자신 보다 높은 뜻을 향해 헌신하고 노력하며 사는 사람의 모습임을 나타낸다. 국가대표 육상선수란 개인의 명예뿐만 아니라 자신이 소속된 집단의 명예를 짊어지는 사람인 것이다. 해롤드 아브라함과 에릭 리델은 모두 영국의 명예를 위해 뛰지만 아울러 이들은 각각 유대인 사회와 스코틀랜드의 기독교도라는 자신이 속한 사회의 명예를 짊어진 사람들인 것이다. 대조적인 두 주인공의 절묘한 성격묘사 스코틀랜드 출신의 선교사인 에릭 리델과 유대인 고리대금업자의 아들인 해롤드 아브라함을 투 톱으로 내세운 이 영화의 캐릭터 설정은 역사적 실화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절묘한 대조를 이룬다. 두 사람이 육상선수로서 시합을 준비하고 경기에 임하는 자세는 완벽하게 다르다. 한마디로 세계관이 다른 까닭이다. 해롤드는 전형적인 유대인적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다. 에릭 리델을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다고 판단한 해롤드는 최고의 실력있는 코치인 무사비니를 찾아가 자신을 훈련시켜줄 것을 부탁한다. 선수가 코치를 선택하는 것은 마치 봉건시대에 여자가 남자에게 먼저 청혼하는 것과 같이 너무 이례적인 일로서 당시로서는 너무도 파격적인 행동이 아닐 수 없었다. 이것은 어떻게든 열심히 노력하는 행위를 통해 자신이 인정받고 최상의 자리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는 유대교의 율법주의의 영향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그러나 리델은 다르다. 그가 심장이 터질 듯 달리는 이유는 오직 한가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일 뿐이다. 중국선교를 위해 육상을 포기하라는 누이의 권유에 대해 리델은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은 중국을 위해서 날 만드셨어요. 그분은 또한 나를 빠르게 달릴 수 있도록 만드셨지요. 난 달릴 때 하나님의 기쁨을 느껴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남보다 잘 뛸 수 있는 달란트를 주신만큼 이 재능을 주님을 위해 사용하겠다는 신념이 그를 최고의 선수로 만들었다는 사실에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리델로부터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선물을 수용하고 사용할 줄 아는 ‘은혜의식’을 발견할 수 있다. 하나님의 은혜를 느끼는 자는 표정도 남다르다. 아브라함은 항상 긴장된 표정으로 나타나는 반면에 리델의 얼굴에는 평안이 넘친다. 원칙있는 신앙생활에 임하는 하나님의 축복 1924년 파리올림픽에 참가한 영국국가대표선수단은 에릭이 주일성수를 이유로 그의 주종목인 100m 경기에 나가지 않기로 하자 심각한 혼란에 빠진다. 영화는 어찌할 바를 모르는 임원들과는 대조적으로 예배에 참석해서 성경을 읽으며 진중한 리델의 모습을 보여준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이사야40:30) 주일에 교회에 가지 않고 축구하던 어린이를 타일렀던 에릭 리델은 말과 행동이 신앙의 원칙에 기반을 둔 참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은근히 가르치고 있다. 리델의 원칙 중심의 신앙생활은 주일성수문제에 대한 논란을 떠나서 관객으로 하여금 하나님 중심의 신앙으로 돌이키게 만드는데 큰 의미가 있다. 에릭은 동료 선수의 제안으로 자신의 주종목이 아닌 400m 경기에 나가 금메달을 목에 걸게 된다. 100m 금메달 후보였던 만큼 400m에 나가 우승한 것을 당연하게 생각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100m와 400m는 뛰는 방법도 전략도 다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신의 주종목도 아닌데 어떻게 우승할 수 있었을까? 에릭 리델은 달랐다. 그가 예사롭이 않다는 사실은 함께 뛰는 다른 선수들의 표정에서 읽을 수 있다. 리델과 함께 경기에 출전하는 옆의 다른 선수들이 리델을 보며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들을 수 있다면 우리는 곧 그가 금메달을 딴 이유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의 속엔 뭔가 있는 것 같아. 자네나 내가 갖지 못한 뭔가 특별한 것 말야.” 그리스도인이라면 주변의 사람들로부터 이런 얘기를 들어야 하지 않을까? 리델은 모든 행동의 기반을 신앙 위에 두었다.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잘 뛸 수 있는 달란트를 주신만큼 이 재능을 주님을 위해 사용하겠다는 신념이 그를 최고의 선수로 만들었고 하나님은 그를 축복하신 것이다. 나는 올림픽이 열리기 전 연례행사처럼 학교에서 선교학을 배우는 학생들을 모아서 <불의 전차>를 보곤 한다. 세상의 금메달보다도 더욱 귀한 주님 주시는 면류관을 향해 열심히 공부하고 신아앙의 훈련을 받는 학생들에게 이 영화를 보는 것만큼 즐거운 교육이 없기 때문이다. 최고의 지성을 겸비한 영국 캠브리지의 학생들이 조국과 학교의 명예를 위해 달리는 모습을 보노라면 심장이 뛰지 않을 수 없다. 중국선교사 에릭 리델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달리는 것을 보노라면 무신론이 지배하는 세속적 사회에서 우리는 은혜와 열정을 가지고 살아가지 않을 수 없다. 자신보다 큰 목표를 향해 달리는 젊은이들은 아름다운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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