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11-08(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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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언)고령화시대의 설교자들에게 제안합니다.
    지하철을 타고 내릴 때 지공거사(지하철 무임승차 경로우대 어르신)가 듣는 안내 방송은, “슈크림 도어가 열립니다. 발 빠진 쥐 발 빠진 쥐. 전통차와 생강차 사이가 넓으니 맥이실 때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젊은이들이 듣는 정확한 내용은 “스크린 도어가 열립니다. 발 빠짐 주의 발 빠짐 주의. 전동차와 승강장 사이가 넓으니 내리실 때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고령화 사회에서 웃고픈 현실이다. 난청 어르신들은 불편하다. 대한민국은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초고령 사회로 진입하고 있다. 고령화 사회로 진입하면서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하지만, 노인성 난청도 그 중 하나다. 교회에서는 노인성 난청 성도가 설교를 제대로 알아 들을 수 없어 예배에 소극적으로 참예하는 문제도 발생한다. 의사 신문에 따르면 인구 20% 이상이 노인인 초고령화 사회에 진입하면서 난청인구도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다고 한다. 인간의 신체는 20대에 성장이 멈추고 30대부터 서서히 노화가 시작되는데 40대가 되면 시력이 떨어지면서 노안을 위해 돋보기 안경을 쓰기 시작한다. 귀도 마찬가지로 노화에 따라 청취 기능이 점점 떨어져 70대에 이르면 3명 중 1명이 난청을 겪게 된다고 한다. 노인성 난청 인구가 늘어 남에도 교회는 난청 어르신들을 위한 배려가 거의 없는 현실이다. 아니 역설적으로 표현하자면 교회 설교자가 연로하신 어르신들에게 속고 있는지도 모른다. 연로하신 분들은 난청으로 설교를 잘 알아 듣지 못하면서도 미소를 지으면서 끄덕 끄덕 거리시고 찬양도 할 수 있는 척 지혜롭게 처신하신다. 60세 이상 어르신들의 난청이 생각보다는 심각하기 때문에 예배 중 설교를 어느 정도 알아 듣는지, 대표 기도에 어느 정도의 진심을 담아 아멘으로 화답하는지, 그냥 체면상 반응을 보이는 건 아닌지 꼼꼼히 살펴 볼 필요가 있다. 노인성 난청 어르신들이 늘어 나는 고령화 교회를 위해서 몇가지 제안하고자 한다. 1. 시청각 교재(PPT)를 활용하자. 교회마다 빔프로젝터에서부터 고화질의 대형 LED까지 잘 구비되어 있다. 아쉬운 것은 그 좋은 영상 시설로 강단 위 주인공의 얼굴, 소지하면 필요 없을 수도 있는 찬송가 가사, 성경 본문 정도만 보여 준다. 영상 시설을 설교할 때 시청각 교재로 사용한다면 좋겠다. 50-60년 전 주일학교에서는 괘도(걸그림) 융판, 환등기 등을 이용한 시청각 교육으로 주일학교는 재미가 있었다. 교육의 효과적인 측면에서도 듣기만 한 것은 10%, 본 것은 50%, 체험한 것은 80%의 효과를 거둘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설교자 대부분은 말로 설교하고 청중은 듣기만 하는 실정이니 교육 효과가 아주 낮다. 교회의 영상 시설로 PPT(PowerPoint)를 많이 사용하자. PPT를 세련되게 제작하면 좋겠지만, 어설프고 간단하게라도 요약된 내용을 청중이 읽으면서 설교의 흐름을 따라 을 수 있을 정도라도 PPT를 적극 활용하면 좋겠다. 요즘 텔레비전을 시청해 보면 대부분의 방송들은 음을 소거해도 그 흐름을 충분히 따라 갈 수 있을 정도로 자막을 많이 사용한다. 굳이 화면에 설교자 얼굴을 내어야 한다면 자막 문화가 대세이니 설교 내용을 자막으로 보내어도 좋겠다. PPT를 제작하여 사용해 보면 설교자에게도 유익이 크다. 큰 제목 작은 제목을 정하고 주제 또는 줄거리를 요약하면서 PPT를 만들게 되면 설교하기에도 좋다. 설교를 완전 파악하니 청중과 눈을 맞출 수도 있다. 거기에 지도 그림 등을 찾아 사용하면 더 분명하고 쉽게 성경을 설명할 수 있게 된다. 2. 난청 어르신들을 위한 또 다른 대안으로 헤드폰(이어폰)을 비치하자. 드물기는 하지만 외국인을 위하여 통역을 하면서 헤드폰(이어폰)을 비치하는 교회가 더러 있다. 난청의 어르신들은 외국어로 설교를 듣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무슨 말인지 잘 알아 듣지 못하니 헤드폰(이어폰)을 제공하여 또렷하게 설교를 듣고 예배에 편리하게 참여할 수 있게 하는 것도 좋은 방안이라고 생각한다. 3. 더 나아가 목회적 차원에서 보청기 착용을 권하고 지원하자. 노인 인구 중 보청기가 필요한 중등도 난청 유병율이 20-25%라고 한다. 교회 로비에 돋보기가 비치되어 있는 것을 쉽게 본다. 노안이 오면 돋보기를 사용하듯이 난청이 오면 보청기를 착용하여 설교 말씀을 더 또렷한 소리로 들으면 좋지 않겠는가. 문제는 보청기는 고가이다. 교회가 목회적 차원에서 소액이라도 지원하면서 보청기 착용을 권하면 좋겠다.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 노화된 귀는 어쩔 수 없다. 그래도 천하보다 더 귀한 어르신들이 난청이지만 말씀을 더 잘 듣고 예배에 더 능동적으로 참예할 수 있게 배려와 지원을 아끼지 않는 교회가 많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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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27
  • (기고)“중보기도의 능력 체험담 과소평가 해온 원로장로”
    나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극적으로 살아나왔다. 가족들과 믿음의 형제자매들이 부르짖는 중보기도 덕분이었다고 간증하고 싶다. 그러니까 내가 119 구급차에 실려 서울 신촌 세브란스병원 응급실에 말 못하고 반신불수 상태에 빠진 체로 누워있었다. 2024년 4월 2일 오전 8시30분경 이었다고 전해졌다. 의사들의 파업으로 병원은 적막했으나 당번이 마침 신경과 의사였기에 완벽한 처치를 마치고 중환자실로 이송되었다. 중환자실의 첫날밤 의식은 있으나 말을 못하고 손발이 경직되어 불구자에 가까웠다. 밤은 깊어 갔다. 자정 무렵 비몽사몽간에 낮 익은 통성기도 소리가 우렁차게 고막을 울렸다. 그리고 여러 갈래의 기도들이 아름다운 색줄기를 이루어 하늘로 올라갔다가 사푼사푼 내려오고 있었다. 이런 기도소리 중에는 아버지의 97세 생신을 축하하기 위해 해외에서 온 딸들의 부르짖음도 있었다. 그리고 우리 장로님, 김 장로님을 지켜달라는 성도들과 동료 장로들의 간절한 기도 소리가 신기하게 들려왔다. 심지어 10여 년 전에 세상을 떠난 아내와 일가친척, 심지어 내가 섬긴 한상동 목사, 한경직 목사, 강원용 목사, 정진경 목사, 강병훈 목사의 얼굴이 뚜렷하게 보였다. 김준곤 목사와 조용기 목사는 웃으시면서 돌아갔다가 그때, 그 시간에 오라고 타일렀다. 나는 이 소리들이 바로 나의 급변 소식을 듣게 된 그리스도인들의 중보기도임에 틀림없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새벽 5시경이었다. 간호사가 와서 말했다. "어르신, 아까 찬송 부르셨지요? 할렐루야 아멘도 몇 번 하셨어요" 나는 다음 순간 말문이 열렸다. “아~아 그래요?” 그리고 손발도 자유롭게 움직여졌다. 그날아침 그러니까 생일날인 4월 3일 아침 나는 새로 태어남을 느꼈다. 이날따라 병원식은 미역국 밥이었다. 그 후 3일을 중환자실에 있다가 주치의 처방에 따라 하루를 일반병실에 머문 후 입원 닷 새만에 퇴원 귀가했다. 되돌아보면 하나님의 도우심이 범사에 함께 하심을 믿는다. 그날아침 7시 18분쯤 미국에서 온 둘째 딸 원숙이는 화장실에서 나오자마자 침대에 쓰러진 아버지에게 오찬 약속 확인 차 전화를 했다. 전화를 받았으나 말을 못하고 중얼대니 사고가 크게 난 줄 알고 종로에서 마포집까지 달려왔다. 뒤이어 도착한 사무국장 이희연은 무조건 지체없이 119를 불렀다. 골든 타임이 남아 있었다. 의사들이 파업 중인데 그날아침 응급실 당번이 신경과 의사여서 일사천리 치료가 가능했다. 중환자실도 많이 비어 있었다. 그 무엇보다 릴레이식 중보기도의 응답이 온몸을 감싸 안았다. 나는 퇴윈 후 천국에 갖고 가지 못 할 세속적인 물질이나 가치관들을 가차없이 정리하고, 상대화 하는 길을 향해 걷기로 했다. 그리고 중보기도를 멀리한 독선적 신앙을 버리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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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24
  • [기고] 백해무익한 재판국원의 자격 시비
    기독신문 제2417호(2023.12.19일자)에 “재판국 서기 박종일 목사 ‘자격 논란’ 불거졌다.”라는 신문 기사가 보도되었다. 필자는 사건의 내막을 알지 못하므로 신문기사의 내용을 토대로 재판국원의 자격 여부에 관련해서만 글을 쓰고자 한다. 1. 잘못된 헌법 적용  재판국원의 자격을 제기한 이재천 목사는 “박종일 목사는 권징 조례 제19조 상회 지시도 위반했다. 우리가 판결을 해도 누군가 박목사의 자격 문제를 건다면 판결이 무효가 될 우려가 있다.”라고 부질없는 염려를 하는 것 같아 보인다. 권징 조례 제19조의 “… 상회가 하회에 명령하여 처리하라는 사건을 하회가 순종하지 아니하거나 부주의로 처결하지 아니하면 상회가 직접 처결권이 있다.”라는 헌법 규정은 “단순하게 상회가 하회에 시행할 것을 지시한 후 하회가 시행하지 아니하면 상회가 직접 시행하는 것으로 종결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시사항 외에 어느 누구를 시벌 한다거나 회원권 여부에 결부하는 것은 지나친 넌센스에 다름 아니다.  또한 이재천 목사는 권징 조례 제91조에 “소원자나 피소원자 된 하회 회원 등은 그 사건 심의 중에는 상회의 회원권이 정지 된다.”라는 헌법 규정을 오해하였다. 이 목사는 “권징 조례 제91조에 따라 박종일 목사의 재판국원의 자격이 정지되어야 한다.”라고 확대 해석하였으나 본 규정은 “소원이나 피소원 된 하회의 회원은 상회에서 그 사건을 심의하는 중에만 잠시 회원권이 중지 되는 것뿐이요, 재판국원 자격이 없다거나 재판국의 서기 자격이 없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이에 관하여는 재판국장이 “과거 재판국장에 대한 상소가 올라 왔는데 그대로 자격이 유지됐다.”라고 사례를 밝힘으로 더 이상 왈가왈부 할 것 없이 잘 처리되었다고 본다. 2. 제안자 반대 불가의 원칙 제안자 반대 불가의 원칙이란 자기가 제안한 안건은 결코 자기는 반대할 수 없다는 법리이다(교회 법률 상식 pp. 46-47). 예를 들면 어떤 교회가 예산편성을 할 때에 예결산 위원회가 제직회에 제안하면 제직회에서 예결산 위원은 안건에 결코 반대할 수가 없고, 제직회가 결의해서 공동의회에 제안하면 제직회원은 제직회를 할 때 찬성한 사람이나 반대한 사람을 무론하고 공동의회에서 반대할 수 없다는 말이다. 따라서 총회 재판국원이나 재판국의 임원들까지도 모두 다 재판국원들이 세웠는데 본인들이 뽑아서 세워 놓고 자격이 없으니 물러나라는 것이 말이나 되는가! 재판국원을 총회가 세웠을 때 재판국원들도 총회원이요, 임원을 세울 때도 재판국원들이 세웠으니 국원들이 제안자로서 재판국원들끼리 자격이 있느니 없느니 하는 시비를 할 수 없다는 것이 곧 법이 정한 바이다(권징 조례 제94조). 3. 결론 일부 재판국원들이 “재판국원끼리 서로 보호해야 한다며 해당 문제는 잠재하자는 주장”과 같이 백해무익한 재판국원의 자격 시비는 종결하고 최종심인 총회 재판국의 면모로서 오직 법으로 승리하는 재판국의 판결을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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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08
  • [강연] 기독교인들에게 인문학은 왜 필요한가?
    본고는 백양로교회(담임목사 김태영)가 운영하는 사단법인 디아코니아부산에서 마련한 디아코니아 지상포럼의 발표 내용을 전재한 것입니다. (편집자 주) 1. 인문학이란 무엇인가?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인문학이 왜 필요할까? 이런 질문에 답하기 전에 먼저 인문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정리해 두어야겠다. 우리가 인문학(人文學, Studia Humanitatis)이라고 할 때 이 말은 문사철, 곧 문학과 역사 철학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이 말은 틀린 말이 아니다. 그래서 인문학이라는 말은 흔히 자연과학에 대비되는 개념으로 쓰인다. 자연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학문이라는 것이다. 인문학을 인간에 대한 학문이라고 말할 때 인문학이란 문학이나 역사나 철학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광범위한 의미를 지닌다. 그 광범위한 의미란 바로 인간을 위한, 인간다운 삶을 추구하는 학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인문학이라고 말할 때 이 말은 문학이나 역사나 철학만이 아니라 문화와 예술을 포괄하는 보다 광의의 인간에 대한 탐구를 목적으로 하는 학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인문학에서 삶의 목적과 의미를 찾고자 한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갈 때 자연과학적 지식이 필요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인간다움을 추구할 수 없다. 과학이나 기술이 장인(匠人) 혹은 기술인(技術人)을 양성할 수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인간다움을 영위할 수 없기 때문에 이런 전공에 앞서 인문학 관련 강좌를 듣게 한다. 우리나라에서 유명한 공과대학이 짧은 기간에 전문적인 기술인을 양성한다는 목표아래 학부 1학년 때부터 자연과학 분야만으로 구성된 교과를 운영한바 있으나 몇 년이 못가 문제점을 파악하게 되었다. ‘인간의 얼굴을 가진 과학’이 되기 위해서는 인문학적 소양이 필요하다는 점을 알게 된 것이다. 그래서 전공과목을 가르치기 전에 인문 혹은 사회과학에 대한 이해를 갖도록 교과를 개편한 일은 널리 알려져 있다. 의학도 마찬가지이다. 만일 어떤 의사가 과학과 의료기술로만 무장되어 있다면 로버트와 같은 의료인이 되고 말이다. 인간과 사회에 대한 폭넓은 지식이 필요하기에 의과대학에도 의무적으로 인문학교실을 두게 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인문학은 대학교육은 물론이지만 인간 교육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고 할 수 있다. 2. 인문학은 왜 필요한가? 그런데 근년에 와서 인문학이 천대를 받고 있다. 문학이나 역사나 철학을 공부해도 취업에 어렵고 실용적이지 못하다는 이유이다. 사회전체로 볼 때 자연과학이나 공학이나 의학이 발전해야 하지만 다른 한편 인문학적 토대가 없으면 건실한 사회가 될 수 없고 어쩌면 인간 상실의 심각한 위기에 빠질 수도 있다. 인간 없는 과학은 있을 수 없다. 그런데 현제 우리나라에서 인문대학은 인기가 없어 폐과되거나 다른 학과와 통폐합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아무리 어려워도 인간 삶의 근간을 이루는 인문학을 경시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이런 점에서 고전이 강조되고 고전 읽기도 권장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인문학은 왜 필요한가? 두 가지로 정리해 두고자 한다. 첫째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고 해석하고 설교하기 위해서 필요하다. 이런 말이 있다. “성경만 아는 사람은 성경도 모른다.” 성경과 성경이 기록된 환경을 둘러싸고 있는 언어, 문화, 역사, 사상, 종교 등 인문학적 배경을 알지 못하면 성경을 바르게 이해할 수 없게 된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칼빈은 1559년 6월 5일 제네바 아카데미를 개교했을 때 신학예비과정을 개설했다. 성경과 신학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전에 인문학적 소양을 터득하게 하기위해 신학예과를 설치한 것이다. 제네바 아카데미의 신학 예과 과정에서는 그리스어나 히브리어 등 성경 언어만이 아니라 라틴어와 프랑스어를 공부하게 했고, 중급과정에서는 호머, 키케로, 버질, 크세노폰, 폴리비우스 등의 작품을 읽게 했고, 고급과정에서는 키케로나 데모스테네스의 웅변술 등 수사학을 공부하게 했다. 즉 고전과 고전어, 철학과 변증, 논리학과 수사학을 공부하게 한 것이다. 이런 인문학적 바탕에서 성경을 읽고 해석해야 바르고 풍요롭게 성경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 주변에서 인문적 소양의 무지 때문에 성경을 왜곡하거나 곡해하고, 독단적으로 혹은 주관적으로 해석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성경을 이상하게 해석하거나 비 논리적인 독단적인 해석하는 경우는 대체적으로 인문학적 소양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결국 성경만 아는 사람은 성경도 모르게 된다. 1830년대 인도로 갔던 서구 선교사들이 직면했던 문제는 성경과 기독교를 가르치기 전에 문자와 언어, 기초교육이 없이는 인도에 건실한 복음주의적인 교회를 세울 수 없다는 확신이었다. 그래서 학교를 세워 먼저 글자와 문자부터 가르쳤다. 인문학적 소양이 없으면 인간과 사회, 성경과 기독교를 바르게 이해할 수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근대의 선교학교(mission school) 운동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인문학적 소양이 부족하면 무지와 억지, 반지성주의에 빠지게 된다. 둘째,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인문학은 인간, 혹은 존재에 대한 이해를 가능하게 한다. 인문학은 인간을 위한, 그리고 인간에 대한 학문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인문학은 구원받아야 할 전도(선교)의 대상인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를 깨닫게 만들어 준다. 인문학의 대상은 인간이고, 인문학의 본질은 그러한 인간성을 탐구하는 데 있다. 인문학은 도대체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질문해 왔기 때문에 인문학(人文學)은 사실은 인간학(人問學)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인간과 인간의 본질, 인간 삶의 환경에 대한 폭넓은 지식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필요한 지식이지만 특히 목회자에게는 더욱 그러하다. 목회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지만 그 대상은 인간 곧 ‘사람’이다. 따라서 목회를 잘하려면 사람에 대한 폭넓은 이해가 있어야 한다. 목회자가 열심히 기도하고 심방하고 설교하면 되지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전도의 대상인 인간에 대한 이해는 매우 중요하다. 기독교 인문주의자였던 칼빈은 그의 <기독교강요> 서두에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De cognitione Dei)은 우리(인간)를 아는 지식(De cognitione hominis)과 연결되어 있다고 하는 이른바 이중지식을 다루면서, 인간이 하나님을 알게 될 때 비로소 자기 자신을 알 수 있고, 우리 인간을 통해 하나님을 알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인간은 하나님에 의하여 창조되었었을 뿐만 아니라, 인간 존재의 의미는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께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인문학은 인간을 인간에 대해 사유하고 질문하면서 인간다움 삶을 살게 하는데 유용한데, 인간이 추구하는 삶의 의미와 목적은 오직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에서만 찾을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정리하면 인문학을 통해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를 알게 해 주고, 인간은 하나님에 의해 지음 받은 의존적 존재라는 점을 알게 해 준다는 점이다. 3. 기독교와 인문학 기독교와 인문학을 대립적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15세기 이후의 인문학(인문주의) 운동은 종교적인 운동이 아니었으나 결과적으로 종교개혁의 토대가 되었다. 르네상스 운동기의 인문주의운동이 있었기 때문에 종교개혁이 일어날 수 있는 여건을 제공한 것이다. 그래서 인문학과 기독교를 대립적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우리가 주목할 것은 개혁사상의 토대를 형성했던 사람들은 다 르네상스 운동에 영향을 받았던 인문주의자였다는 사실이다. 루터도 그러했고 칼빈도 그러했다. 인문주의 교육이 개혁운동의 바탕이 된 것이다. 인문주의의 가장 큰 영향을 받았던 인물이 츠빙글리였다. 그는 사실상 종교개혁자이기에 앞서 인문주의자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문주의와 종교개혁, 혹은 인문학과 기독교 간의 상관관계에 대해서 잘못된 이해를 가진 이들이 없지 않은 것 같다. 인문주의를 서구에서 휴머니즘(humanism)이라고 하는데, 이를 인본주의(人本主義)로 해석한다면 의미는 크게 달라진다. 인본주의는 인간중심주의로서 신중심주의와 대조적인 의미로 받아드려지는데, 르네상스 운동이 일어났던 시기에 인문주의는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는 인문주의, 곧 휴머니즘이 아니었다. 도리어 그리스와 로마의 언어와 문학에 강조점을 둔 교육의 형태였다. 곧 지금의 인문학이었다. 이 시대의 인문학을 상징적으로 표현해 주는 것이 라틴어 ‘ad fotes,’ 곧 ‘원천에서’ 혹은 ‘원천으로부터’였다. 즉 인문주의란 “원래의 자료들로 돌아가자(go back to the original sources)”는 슬로건으로 요약될 수 있는 문화 운동이었다. 인문주의의 영향을 받은 개혁자들은 그 ‘원천’을 ‘성경’으로 보아 오직 성경, 곧 성경으로 돌아가자고 외쳤던 것이다. 정리하면 인문학(humanities)을 신본주의가 아닌 인본주의(人本主義, humanism)나 인도주의(人道主義)로 보아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인문학은 기본적으로 인간에 대한 탐구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인간의 삶의 의미와 목적을 취급하며 사색하고 질문한다. 이런 점에서 인문학적 소양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인간과 사회를 건실하게 성찰할 수 있는 토대를 제공한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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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0-27
  • [기고] 학교법인 이사회 보고서에 대한 반론
    제72회 총회에서 상정된 <고신대학교 복음병원 연혁(설립자, 설립일, 초대원장) 수정 청원건> 에 대한 학교법인이사회의 보고서가 제73회 총회 회순(123p 참조)에 보고되었다. 우선 복음병원 역사 수정건을 안건으로 상정해 주신 3개 노회와 지난 1년 동안 이를 심의하느라 수고하신 학교법인이사회 소위원회 위원들과 관계자분들의 노고에 감사를 드린다. 그동안 이사회가 본 건을 심의하면서 참고자료로 ‘복음병원 사령원부’, ‘제3영도교회 당회록’ 등을 인용했고, 참고인으로는 이상규 교수, 정남환 교수, 오경승 병원장, 김영대 원목실장, 조긍천 목사, 정수생 목사 등을 출석시켜 의견을 청취했다고 했다. 이사회의 복음병원 역사 수정건에 대한 보고서 전문을 접한 필자는 우려와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다. 안타깝게도 이사회는 사료 전체를 인용치 않았고, 의도하는 결론을 위해 일부만 인용하고 있었다. 이미 오기된 역사자료를 표준인양 인용하기도 했다. 마치 “복음병원 역사는 수정할 것이 없다” 는 결론을 위해 짜맞추기식 논의를 하지 않았나 하는 우려도 갖게 했다. 아직 총회가 개회되지 않았지만 첫 문제 제기자로서의 책임감과 전후 사정을 잘 모르는 총회 총대들이 본 건에 대한 보다 객관적인 관점으로 복음병원 역사 수정건을 이해하고 토의해 주시기를 바라면서 기 제출된 이사회 보고서에 대한 필자의 소견과 반론을 준비했다. 1. 학교법인 이사회 보고서 내용은 다음 3가지로 요약된다. 1) ‘설립자’는 전영창선생이 설립했음을 부정하지는 않으면서도 “전영창, 한상동, 장기려 3인이 동역하여 설립했다”는 ‘설립자 3인설’을 인용했다. 2) ‘설립일’ 건은 제3영도교회 당회록과 복음병원 사령원부를 근거로 1951. 1. 15일이 아니라 1951. 6. 21일임을 종전 그대로 인용했다. 3) ‘초대원장’ 건은 복음진료소 첫 의사는 차봉덕 의사임을 인정하면서도 사령원부를 근거로 차봉덕이 초대원장이 아니라 장기려가 초대원장임을 인용했다. 결국 이번 이사회 보고서는 “복음병원 역사 수정건은 수정할 것이 없다”는 것이 결론이었다. 이사회가 위와 같은 결론을 이끌어 낸 주요 자료는 ‘제3영도교회 창립사’와 ‘복음병원 사령원부’였다. 이 두 자료를 근거로 복음병원 역사는 수정할 것 없이 복음병원 설립은 전영창, 한상동, 장기려 3인이, 설립일은 1951. 6. 21일, 초대원장은 장기려박사라는 종전의 역사를 수정없이 그대로 유지해야 한다고 인용했다. 그렇다면 정말 이사회는 위 두 자료를 정확히 인용했을까? 유감스럽게도 이사회는 위 두 자료를 사실대로 인용하지 않았다. 심지어 제3영도교회 역사는 앞 부분은 가린체 연혁 뒷부분만 인용함으로 총대들로 하여금 오해할 수 있도록 했다. 2. 이사회의 제3영도교회 당회록 및 발간사 인용 문제 이사회가 실수한 가장 결정적 장면은 제3영도교회 역사를 인용함에 있어서 역사 전부를 인용치 않고 당회록 앞부분에 있는 발간사만 인용했다는 점이다. 보고서를 보면 “제3영도교회 창립사에 의하면 주후 1951년 3월 6일 마산에서 개최한 제 54회 경남노회에서 인가받았고, 동년 3월 23일 예배당 공사를 시작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5월 하순에; 마루를 놓고 6월 3일 주일부터 예배를 보고, 9월 중순에 공사를 필하기로 되었다.”라고 하면서 “1951. 1. 15일에 제3영도교회에서 구제회와 진료소를 함께 시작했다는 것은 시기적으로 일치하지 않습니다”라고 결론 지었다. 이사회의 보고서처럼 제3영도교회는 1951년 3월 6일 경남노회 인가로부터 시작되었을까? 아니다. 제3영도교회는 이보다 2년 전인 1949년 8월 7일부터 시작되었다. 제3영도교회 연혁을 보면 1949년 8월 7일 제일영도교회에서 영도 4개처 교회를 설립키로 하고 수요일부터 박상순전도사 인도로 42명이 모여 개척예배를 드림으로 시작되고 있다. 1950년 3월 17일 202평 부지 매입, 1950년 11월 1일 가설예배당 완공, 1951. 3월 6일 경남노회에서 인가를 받았다. 이사회는 제3영도교회 역사의 앞부분은 전혀 인용치 않았다. 왜 그랬을까? 제3영도교회 시작점을 1951년 1월 15일 이후로 해야만 1951년 6월 21일을 병원 개설일로 꿰맞출수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사실이 아니길 바라지만, 만일 이사회가 1951년 1월 15일에는 시기적으로 병원을 시작할 수 없었다는 사실을 주장하려고 교회역사 앞부분 2년은 생략하고 뒷부분만 인용했다면 이는 중대한 오류요 실수다. 제3영도교회의 연혁만 보아도 쉽게 알 수 있는 사실을 1951. 6. 21일을 설립일로 옹호하기 위해서 한 교회의 역사마저 왜곡 인용했다면 이는 총회를 눈가림으로 속이려했고 또 다른 역사왜곡을 획책했다는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단순한 실수인지 왜 그렇게 했는지 반드시 밝혀 주시기 바란다. 3. 복음병원 ‘사령원부(辭令原簿)’ 인용 문제 이사회가 복음병원 역사에 준거처럼 인용한 ‘복음병원 사령원부’는 과연 설립자, 설립일, 초대원장에 대한 결정적인 문서일까?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오히려 이 원부는 보고서의 인용과는 달리 설립자는 전영창, 초대원장은 차봉덕임을 더 확실히 입증해 주는 문서이다. 우선 이 ‘사령원부’는 가치 있는 사료(史料)일까? 이는 이 자료를 누가, 언제, 어디서 작성했는지를 살펴보는 것으로부터 검토해야 한다. 만일 이 사령원부를 1951년, 영도에서 전영창이나 장기려, 또는 당시 원무과에서 작성했다면 이 문서는 복음병원 역사에 결정적인 사료가 될 것이다. 그러나 전혀 그렇지 않았다. 무려 15년이 지난 이후 누군가에 의해 정리된 문서였다. 1) 이 ‘사령원부’는 1951년 영도에서 작성된 문서가 아니다. 이 사령원부 표지에 ‘主後 1951年 以降’으로 기록되어 있다. 언뜻 보면 마치 1951년에 기록한 문서처럼 보인다. 그러나 以降(이강)이란 이후(以後)라는 뜻으로 1951년 설립이후 복음병원 직원의 임명내용을 정리해 둘 목적으로 기록한 명부란 뜻이다. 또한 이 문서는 부산 영도에서 작성된 문서도 아니다. 표지 왼편에 보면 이 문서를 작성한 장소가 명기되어 있다. “부산시 암남동 산 34번지 복음병원”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말은 이 문서의 기록장소가 병원이 설립된 영도가 아니라 암남동 송도에서 작성된 명부임을 밝혀준다. 먼 훗날 기록되었다는 뜻이다. 2) 이 문서는 1965년 이후 이재술 장로가 작성한 명부였다 역사기록에서 누가 기록했느냐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 사건 당사자인 장기려나 전영창, 또는 당시 원무과에서 기록한 문서라면 그 의미가 클 것이다. 그러나 이 문서는 필자가 여러 경로를 통해 확인한 결과 복음병원 서무과장이셨던 이재술 장로의 필체였다. 이재술 장로 가족에게 이 명부의 필체를 확인 요청했다. “제 부친의 글씨체가 독특해서 아무나 흉내 낼 수 없는데 너무나 비슷합니다.”라는 답변이었다. 또 다른 유력한 원로에게 이 사령원부의 작성자가 누구일까요? 라는 질문에 “그 당시에 이런 문서를 작성할 분은 서무과에 근무한 이재술 장로님뿐이다”고 답변했다. 이재술 장로는 1965년부터 복음병원 서무과장으로 근무했다. 그는 거창고등학교에서 전영창 선생과 함께 서무과장으로 8년간 근무하다가 장기려 박사의 요청으로 1965년 2월 4일 부산복음병원으로 부임, 1971년 12월 31일까지 약 7년간 근무하셨다. 그렇다면 이 사령장부는 1965년부터 1971년 사이에 작성된 문서가 확실하다. 복음병원설립 후 15년~22년 어간에 이재술 장로가 작성한 사령원부는 그 당시 회자 되는 구전과 자료들을 근거로 작성된 것임은 자명하다. 이때는 이미 전영창이나 차봉덕은 복음병원 역사에서 배제된 때였고 장기려 중심의 역사로 재편되어 고착된 때였다. 복음병원 설립일도 이미 1951. 6. 21일로 지키고 있었으니 사령원부에도 첫 발령일을 6월 21일로 기록했다. 이 사령원부가 나중에는 복음병원의 정사(正史)로 변착(變着)되어 ‘고신의료원 50년사’에도 그대로 인용 되는 등 지금까지 이어져 왔다. 3) 이 사령원부는 전영창 선생이 설립자임을 밝혀준다. 이 사령원부에서 제1호로 임명된 직원은 총무 전영창이다. 누가 임명했나? 전영창이 전영창을 발령했다. 발령처 대한기독교경남구제회 대표자가 전영창이기 때문이다. 경남구제회(법인격) 이사장인 전영창이 병원의 총무로 자신을 임명한 것이다. 당시 전영창은 법인의 대표나 직함에는 관심이 없었다. 자신을 병원의 총무로 임한 것은 본인 스스로가 총무로 자임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병원초기 총무처럼 모든 시설, 장비, 의료기 구입, 수선, 운영일체를 도맡았다. 그래서 장기려박사도 당시 전영창을 ‘총무요 설립자’라고 표현했었다. 예나 지금이나 설립자가 법인과 병원의 대표자가 된다. 지금의 의료법상으로도 그렇다. 이 사령원부가 비록 전영창을 병원의 총무로 임한다고 했지만, 실상은 법인과 병원의 대표자요 설립자인 것이다. 경남도청도 1951. 12. 23일 복음의원을 의료기관으로 인가하면서 전영창을 병원의 대표자(경남도보 제 103호, 개설대표자 전영창)라고 명시했다. 주무관청이 전영창을 설립자요 대표자로 허가했으면 병원설립자 논쟁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 그럼에도 금번 보고서가 전영창, 장기려, 한상동 3인이 동역해서 설립했다는 병원설립자 3인설을 주장하는 것은 맞지 않다. 이는 주무관청의 허가마저 무시한 것이고 의료법에 대한 무지의 소치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당시 전영창이 복음진료소를 개원할 때 한상동 목사는 전여 관여치 않았고, 장기려 박사는 6개월 후에야 2대 원장으로 참여했다. 그런데 어떻게 이 두 분이 공동 설립자가 될 수 있다는 말인가? 대한민국 의료법 제33조(개설 등)는 법인 또는 의사 1명만이 의료기관의 대표자가 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사회가 복음병원 3인 설립설을 인용하려면 최소한 대한민국 의료법이 어떻게 규정하는지에 대한 상식은 가지고 인용했어야 했다. 3인 설립설이 불가능한 4가지 이유는 필자의 “나삼진목사의 복음병원 설립자 3인설에 대한 반론”(기독교보 2022. 7.13일자)을 참고하기 바란다. 4) 이 사령원부는 차봉덕의사가 초대 원장임도 밝혀준다. 이 사령원부는 인사발령 제2호 차봉덕을 의사로, 제6호 장기려를 원장으로 기록했다. 그러나 이 원부는 차봉덕을 첫 번째 의사로 임명했음을 확인해 주고 있다. 의료법 제33조에 따르면 처음 개설하는 의사가 원장이고 초대원장이 된다. 대한민국 의료법 제 33조 8항(그 밖의 규정)에는 “의료인은 의료기관 개설시 어떠한 명목으로도 둘 이상의 의료기관을 개설 운영할수 없다”로 되어 있다. 한명의 의사가 둘 이상의 의료기관에 중복해서 근무해도 불법이 된다. 장기려박사는 6월 말까지 제3육군병원에 외과과장으로 계속 근무하고 있었다. 그리고 7월 2일에 부임했다. 개설시 있지도 않은 장기려를 초대원장이라 주장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비록 이 원부가 기록자에 의해서 차봉덕을 의사로, 뒤에 부임한 장기려를 원장이라고 기록했다 해도 의료법상으로는 처음 개설한 의사가 원장이 되는 것이다. 모든 판단 기준은 법을 따라야 한다. 따라서 이 사령원부는 의료기관 개설에 대한 의료법에 반하는 인위적 기록이다. 이사회 보고서가 아무리 장기려를 초대원장이라 강변해도 이 사령원부는 오히려 차봉덕의사가 초대원장임을 입증하고 있다. 사실(fact)을 호도, 왜곡한 기록은 역사가 될 수 없다. 이 기록은 기록자 또는 주변의 의도가 개입된 기록, 즉 차봉덕을 배제하고, 장기려를 초대원장으로 만들기 위한 인위적 기록으로 밖에 볼 수 없다. 기록이 중요하지만 사실을 왜곡한 기록은 역사가 될 수 없다. 5) 대한기독교경남구제회와 복음진료소는 동시에 설립했다. 이사회 보고서는 경남구제회와 진료소를 동시에 설립할 수 없다고 했다. 1주일 만에 두 기관을 설립하는 것은 ‘무리’라는 주관적 해석으로 1951. 1. 15일 병원 설립일을 부정하고 있다. 부정하려면 이를 뒷받침할만한 역사적 사료를 제시해야 함에도 이사회는 그 어떤 사료도 제시하지 않으면서 ‘무리’라는 추론으로 부정하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법인과 수익기관(병원)은 동시에 설립한다. 심지어 병원설립이 되지 않으면 법인허가도 인가되지 않는다. 6.25전쟁 중 5천불 구호금을 가지고 미국에서 급거 귀국한 전영창 선생이 불과 1주일 만에 구제회(법인)와 진료소를 설립한 것이 왜 ‘무리’라고 억측하는가? 당시는 전란 중이었고 수십만의 피난민들이 부산으로 몰려와 구호를 위해 백방으로 뛰며 마음이 급했던 전영창이 1주일 만에 구제회와 진료소를 준비하는 것이 왜 불가능하다고 단정하는가? 지금의 여유있는 관점으로 보면 이해가 안된다. 그때는 그만큼 시대가 급박하고 긴박했었다. 또한 당시에는 국민의료법이 제정되기 전이므로 의사가 진료하는 곳이 집이든 창고든 어디서나 병원개원이 가능했다. 의료법이 없는 시대에는 의사만 있으면 이틀만에도 병원 개원이 가능하다. 구제회와 진료소를 동시에 설립하는 것은 전혀 불가능한 것이 아니다. 1월 설립 후 불과 두달 후인 그해 3월 경남노회가 각 교회로 하여금 헌금하여 보내 주도록 결정한 것은 경남구제회가 운영하는 진료소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전영창의 아들 전성은은 부산 영도로 이사를 오니 진료소 앞에는 아버지가 미군부대에서 얻어온 재료(밀가루 옥수수 등)로 끓인 죽을 받기 위해 선 줄이 200m는 되었다고 회상했다. 경남노회가 결의해서 보내 준 구호헌금은 이렇게 쓰인 것이다. 경남구제회와 진료소를 동시에 설립했다는 것은 설립자 전영창의 기록이 이를 입증한다. 전영창은 그의 자서전격인 전영창 전집Ⅱ <거창고등학교 전영창> 연혁에서 “1951. 1. 15일 피난민 무료진료소 복음병원을 개설”했다고 남겼다. 그의 장례식 연혁에서도 같은 내용이 보고 되었다. 그의 아들 전성은이나 제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설립자 본인이 1. 15일 구제회와 병원을 설립했다고 설교시나 강연때 자주 말씀하셨다. 그럼에도 이사회가 이를 부정할만한 사료나 근거도 제시하지 못하면서 “무리”라는 말로 부정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 그 외에도 1. 15일 병원을 설립했다는 여러 근거 및 자료는 많다. 필자의 <복음병원 숨겨진 초기역사>를 참조하기 바란다. 4. 마무리 하며 복음병원 역사 수정건을 다룬 이사회의 총회 보고서 결론은 “복음병원 역사는 수정할 것이 없다”였다. 필자는 이사회가 그 근거로 제시한 ‘제3영도교회 역사’와 ‘복음병원 사령원부’의 실체를 분석하면서 그 인용이 부적절했음을 지적했다. 이 두 문서는 복음병원 역사 수정건을 반대할만한 사료가 될 수 없다. 오히려 3개 노회가 제출한 복음병원 역사 수정건을 지지하는 사료들로도 볼 수 있었다. 전술한 바와 같이 이사회 보고서는 제3영도교회 역사를 잘못 인용했다. 사령원부 또한 복음병원설립 후 15년 이후 작성된 문서로서 이미 전영창과 차봉덕이 복음병원 역사에서 배제되고 장기려 중심의 역사로 고착된 때 작성된 문서임을 밝혔다. 이 사령원부가 나중에는 복음병원의 정사(正史)로 변착(變着)되어 ‘고신의료원 50년사’에도 그대로 인용 되었고 오기된 역사로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고신총회 70년사(총회출판국, 2022)에서는 설립자는 전영창, 설립일은 1951. 1. 15일, 초대원장은 차봉덕을 정사(正史)로 남겼다. 바라옵기는 이번 고신총회가 3개 노회에서 제기한 복음병원 역사 수정건을 객관적 사료들을 기준으로 검토해 주시고 비록 시간이 걸리더라도 교단의 역사학자들과 관계자들이 공청회나 학술발표회 등을 거치면서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합의점을 도출하여 복음병원 역사와 연혁을 수정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5. 수정해야할 복음병원 정사(正史)는 무엇일까? 1) 복음병원 설립자는 전영창선생이다. (1) 장기려 박사의 증언. 장기려 박사는 복음병원 회보인 ‘영아와 유아의 찬미’(창간호) 권두사에서 전영창을 일컬어 “설립자 전영창씨는”(장기려, 영아와 유아의 찬미 창간호, 1951)이라고 칭했다. 복음병원 회보 제4집(1976년)에서도 “본원의 설립자이며 총무 일을 보아 주셨던 전영창 선생”이라 했다. 또한 한국일보 연재기사(1976년)에서도 “복음병원 설립자 전영창씨와 함께” 라는 설명을 사진과 함께 남겼다. 그 외 그의 자서전 등 여러 곳에서 설립자는 전영창임을 밝혔다. 많은 사람들이 지금도 각종 언론, 세미나에서 장기려박사를 설립자라고 말한다. 복음병원 연혁에 아직도 설립자를 전영창으로 표기하지 않고 있다. (2) 주무관청인 경남도청의 확인 1971년 발행된 복음병원 회보 <영아와 유아의 찬미> 제 3집 복음병원 연혁에 “1951. 12. 23. 복음의원 개설 허가받음(경남도보 제 103호, 개설대표자 전영창)”이라는 기록이 있다. 이는 경남도청이 복음의원 설립자를 전영창으로 확인해 준 것이다. 주무관청이 전영창을 개설대표자로 인정했으면 다시는 3인설 같은 주장을 해서는 안될 것이다. (3) 황영갑(차봉덕원장 남편), 전성은(전영창의 아들), 차진실(차봉덕원장의 조카), 맹숙희(초창기 간호사), 성소균, 이재술, 지강유철, 이상규 교수 등 수많은 분들이 전영창선생을 설립자로 증언했다. 2) 복음병원 설립일은 1951년 6월 21일이 아니다. (1) 1951년 6월 21일은 장기려 박사가 제 3육군병원에 재직 중일 때다. 지강유철의 장기려 자서전에는 “1951. 6. 21일 한상동, 전영창, 그리고 경남구제위원회 회계 김상도 목사와 함께 제 3육군병원(외과과장 장기려박사 근무지)으로 찾아갔다. 선생은 망설일 이유가 전혀 없었다. 그렇게 하겠노라고 대답하고는 채 열흘이 되기 전인 6월 30일 제3육군병원을 그만두었다.”고 했다. 6월 21일은 전영창이 외과의사를 구하기 위해 한상동목사의 소개로 장기려박사를 만난 날일뿐이다. 6월 21일이 개원일이 될 수 없는 이유다. (2) 경남노회 회의록도 1951년 6월 이전에 설립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1951년 3월 6일~8일 마산문창교회에서 개최된 제54회 경남노회에서 “대한기독교 경남구제회 승인하고 각 교회는 연보하여 구제회로 보내 주시되 연보는 4월 29일 주일 일제히 하여 주기로 함” (맹호원, 경남노회 회의록, 角丸인쇄소, 1929). 이 결의는 복음진료소가 1951. 6월 23일 이전에 이미 개설되었음을 의미한다. 3) 복음병원 설립일은 1951년 1월 15일이다. 1951년 6월 21일이 복음병원 설립일이 아닌 이상 이제 남은 것은 1951년 1월 15일뿐이다. 이 날짜는 전영창 전집Ⅱ <거창고등학교 전영창, 마루그래픽스, 2013. 9.15>의 연혁에서 확인된다. 또한 전영창 선생의 장례식 때 보고된 장례식 순서지 연혁에서도 “1951. 1. 15. 부산에 복음병원 창설”로 기록했다. 이에 대해 전성은은 “이 날짜는 아버지가 학교에서 설교나 훈시 시 자주 말씀하신 내용으로서 1951년 1월 9일 미국에서 유학 중 급거 귀국하여 1월 15일에 경남구제회와 복음병원을 설립하셨다고 말씀하셨기에 그것을 근거로 연혁에 기록한 것”이라고 했다(전성은, 경남 거창 자택에서, 김세중, 고명길에게 증언, 2014. 5. 19) 4) 초대원장은 차봉덕 원장이다. 복음병원의 초대원장이 차봉덕이라는 사실은 장기려 박사 본인의 입으로 자신이 영도 복음진료소에 갔을 때 서울의전 출신 여의사(차봉덕)가 근무하고 있었고 이를 이어받았다고 했다. 또한 차봉덕의 남편 황영갑 목사의 자서전에서도 확인된다. 그 외 차봉덕원장의 조카 차진실 사모, 당시 간호사였던 맹숙희 권사, 전기기사 김종열장로 등의 증언에 의해서도 확인이 된다. 늦게 발굴된 복음병원 사령원부도 차봉덕을 첫 번째 의사로 재직했음을 입증하고 있다. 당시에는 의대 졸업장만 있으면 가정집이던 창고던 어디서나 개원할 수 있었다. 복음진료소도 의사가 진료하는 엄연한 병원이었다. 차봉덕원장이 6개월 만에 이임하고 전영창선생마저 3년 후 병원을 떠나자 장기려박사 중심으로 병원역사가 정리되다 보니 정영창, 차봉덕 원장의 이름은 사라지게 된 것이다. 그렇다고 초대원장이 바뀔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의료법상 단 3일을 근무했다해도 첫 개설의사가 초대원장이 되는 것이다 6. 고신총회 총대님들께 드리는 고언 1) 학교법인 이사회의 보고서가 주관적 역사 해석이 아니라 역사적 사료들을 정확이 인용했는지를 검증해 주시기 바랍니다. 2) 검증 시 역사학자들의 사료(史料)에 근거한 설명과 관련자들의 의견도 참조해 주시기 바랍니다. 3) 다양한 의견이 있을 시 충분한 시간을 갖고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다각적인 객관적 사료 조사와 연구, 학술토론, 공청회 등을 통해서 합의점을 도출하고 결론에 이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복음병원의 숨겨진 역사는 단순히 복음병원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전영창 선생을 축출하고 역사를 오기한 분들 역시 고신의 초기 인사들이었기에 신앙의 정통과 생활의 순결이라는 고신정신과 정체성 문제로까지 연결됩니다. 이런 점에서 총회의 복음병원 역사 수정건 심의는 결코 가벼이 할 수 없으며, 그 역사적 소임과 책임이 매우 크다 할 수 있습니다. 신사참배 문제로 고신이 분리될 때 교회당을 미련 없이 포기하고 새롭게 개척한 것은 물질을 초월하는 순교자적 신앙과 순수성이라 자랑했습니다. 그러나 복음병원문제에서는 왜 전영창을 부정축재자로 억지 탄핵하고 축출했었는지 뒤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천막병원에서 점점 확장되고 커져가는 복음병원 재산권문제가 그 중심에 있었음은 그 당시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었습니다. 전영창이 복음병원의 이사장으로서 훗날 자신의 재산이라고 주장할까 두려웠던 것일까요? 1953년 전영창을 탄핵하는 임시노회에서 조수옥, 전성도, 황철도, 김상도, 안용준, 최일영목사 등이 그토록 반대하며 전영창의 무고를 변호하고 항변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신앙의 정통과 순교정신을 강조한 고신을 향한 충고와 항변은 아니었을까요? 지체된 정의도 정의가 아니지만 불의한 결정과 왜곡을 그대로 지나치는 것은 더더욱 정의가 아닐 것입니다. 코람데오 정신도 아닙니다. 부디 바라옵기는 학교법인이사회와 총회는 몇몇 사람의 주관적 역사해석이 아니라 객관적 사료를 근거로 검증해 주시고, 역사학자들의 연구와 기술방법에 따라 학술토론이나 공청회 등을 통해 공정하게 심의결정할 수 있기를 부탁드립니다. 더 확실한 새로운 사료가 나오면 누구나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고 따를 것입니다. 그동안 이 일에 수고하신 학교법인 이사회와 관계자분들께 심심한 감사를 드립니다. 이 모든 일에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시기를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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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9-11
  • [기고] 식사
    식사는 대접을 받기도 하고 대접을 하기도 하고 때론 때우기도 한다. 식사를 때운다는 것은 시간이나 여건이나 음식이 부족하여 급하게 먹음을 말한다. 원래 의미는 “대신하여 불충분한 대로 넘기다.”로 대충 불충분한 대로 먹음을 말하는 것이다. 성경에 나오는 다양한 식사에 관한 내용 중에 [마태복음 12:1]에 보면 그 때에 예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가실 새 제자들이 시장하여 이삭을 잘라 먹으니 라는 구절이 나온다. 또 사마리아로 가는 길에 제자들이 음식을 구하러 가서 돌아와 보니 이미 식사를 하신 예수님의 일화가 있다. 또 오천 명의 군중이 배가 고파 기진할 때 제자들이 찾은 것은 예수님만 겨우 때울 오병이어였다. 그러나 예수께서 축사하시니 배불리 먹고도 남을 식사가 되었다. 그렇다면 제자들이 준비한 때울 것을 예수님이 식사로 만드신 비결은 무엇인가? 가나혼인 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만드신 것이 그 처음이었다. 물은 식사가 될 수 없으나 포도주는 식사에 포함이 된다. 또 최후의 만찬을 준비하기 위해 애제자 둘을 보내어 물동이를 이고 가는 자를 따라가 최후의 만찬을 준비하게 하셨다. 이처럼 예수님의 식사는 물이 포도주를 만들어지듯이 준비되어 진다. 여기서 우리는 오병이어로 돌아가 진정 음식으로 섬긴 자는 누구일까 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오병이어를 들고 하늘을 향해 축사하셨고 장정 5천명과 그들의 주변인들을 다 먹이고도 다섯 광주리가 남게 되었다. 모두가 예수의 놀라운 능력에 감탄하며 그를 이스라엘의 왕을 세우려 했을 때 오히려 예수님은 오병이어로 섬긴 한 아이로 부터 시작된 식사를 기뻐하신 것이다. 또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먹는 식사자리에서 한 여인이 가져와 깨뜨려 부은 옥합에 든 향유를 드셨다. 이는 마치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를 영접하여 희어져 추수할 때가 됐다고 하신 것처럼 이러한 식사로 예수를 섬기려는 자들을 통해 예수께서 영광을 받으시며 배불리 먹고 마신다는 것이다. 가끔 우리는 때우듯이 식사를 한다. 밀밭을 지나가며 이삭을 자르듯이 급히 먹는다. 그러나 주님은 적은 것으로도 섬기는 자를 보시고 축사하시고, 또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게 하라” 하시듯, 최후의 만찬 때 살과 피를 내어 준 자신을 기억하라 하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먹고 마시는 모든 것들이 그의 축사를 통해, 때우는 끼니가 아닌 성찬이 될 수 있도록 날마다 그를 기억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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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8-24
  • [기고] 솔로몬의 재판과 예수님의 재판
    솔로몬의 재판은 일천번제를 드려 하나님께 지혜를 구했고 그로인해 지혜로운 판결을 내린 솔로몬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러나 예수님의 재판은 간음하다 끌려 온 여인이 용서를 구했고 여인을 죽이고자 돌을 들고 선 자들에게 "죄 없는 자가 돌을 던져라." 하신 말씀에 모두 돌을 놓고 여인을 용서한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또 솔로몬의 재판이 솔로몬의 지혜를 칭찬했다면 예수님의 재판은 돌을 들고 선 자들이 여인의 죄를 용서하는 자비에 이르렀음을 기록한 것이라 하겠다. 모든 재판은 재판관이 하지만 솔로몬 때나 예수님 때나 재판을 바라보는 시민들이 있고 그들의 손에는 보이거나 보이지 않거나 한 돌들이 쥐어져 있다. 좋은 재판은 그들의 손에 든 돌들을 어떻게 내려놓게 하는가 하는 것이다. 솔로몬의 재판은 하나님이 주신 지혜로 명판결을 한 솔로몬의 지혜에 놀란 군중들이 자신의 돌을 내려놓고 일천번제와 같은 제사로 나아오게 한 사건이라면, 예수님의 재판은 자비를 구한 예수님의 말씀에 찔린 군중들이 자신의 돌을 내려놓고 용서의 자리로 나아오게 하신 사건이라 하겠다. 결국 이는 일천 번제를 드려 얻는 지혜보다는 간음하다 끌려 온 여인을 용서 할 수 있는 자비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신 것으로 우리가 올려드리는 예배를 통해 더 나은 지혜를 구하기보다는 더 자비로운 마음을 갖게 해달라고 구하라는 것이다. 또 이는 예배를 드림을 멈추라는 것이 아니라 예배를 통해 타인을 지배하고 이기는 지혜를 구하기보다는 타인을 용서하는 자비로운 마음을 구하는 것이 먼저라는 것을 강조한 말씀이라 하겠다. [마태복음 12:7]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라면 무죄한 자를 정죄하지 아니하였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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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4-20
  • [기고] 어머니 배남호 권사님을 그리며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11:25-26절)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살전 4:16-17절) 저희 어머님 배남호 권사님이 100년의 삶을 마감하고(1924.5.25음-2023.4.1) 지난 4월 1일 토요일 밤 9:58분에 천국, 주님의 품에 안기셨습니다. 토요일 밤, 주일, 고난주간 등 경황이 없어서 어머님 천국길 다 마치고 늦게나마 어머님과 저희 가정에 베푸신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를 전합니다. 바쁘신 중에도 많은 목사님 장로님 성도님들이 말씀과 기도로 위로해 주셨습니다. 위로예배(오정현 목사님, 백승준 목사님, 고성삼 목사님, 천환 목사님), 위로예배(이한식 목사님, 심종화 장로님), 입관예배(김용의 선교사님, 조생준 목사님, 옥금석 장로님), 발인예배(강성관 목사님), 하관예배(권오헌 총회장님, 길성구 장로님, 홍콩엘림교회 조윤태 목사님), 안장예배(46회 동기, 장종환,김일영 목사님, 노상규 목사님, 최승락 고려신학대학원장님). 저희 어머님 배남호 권사님의 100년은 참 고달프고 힘든 세월이었습니다. 49-50세 2년간 병으로 고생하셨으나 약도, 의사도 고치지 못하는 병으로 의학적으로 사형 선고를 받고 죽음을 맞기 위해 고향을 떠나서 3살 위 형과 제가 자취하던 마산으로 오셨습니다. 당시 마산창원지역에서 제일 유명한 고려병원(현 삼성창원병원)에서도 고치지 못해서,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피골이 상접한 어머님은 기운이 없어서 늘 누워계셨고 모기소리만큼 작은 목소리를 들으면서 저는 ‘엄마가 3개월이면 돌아가시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때 제 나이 16살이었습니다. 어머님이 고향을 떠나올 때 동네 아주머니들이 각골댁(어머님) 이제 더 이상 못보는구나 하셨습니다. 그 때 그 불쌍한 저희 가정에 예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서마산교회를 설립한 박순병(국민학교 교장) 장로님의 부인 조숙정 집사님(권사, 천국)의 전도로 교회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새신자가 왔다고 김태윤 목사님(미국 거주), 박순병 장로님(천국)과 성도님들이 심방 오셔서 예배, 기도해 주시고 그 후 40대 중반의 기도를 많이 하는 허해옥 집사(권사, 천국)님이 하루도 빠지지 않고 거의 매일 저희 자취방에 오셔서 2-3시간씩 기도해 주셨습니다. 그 6개월 동안 물 한 컵 대접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도 그 불쌍한 저희 가정에 예수님의 사랑으로 매일 찾아오셔서 기도해 주셨습니다. 교회에 출석한지 6개월쯤 된 어느 날 제가 깜짝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3개월이면 돌아가실 것 같았던 저희 어머님이 6개월이나 되었는데도 살아계셨을 뿐만 아니라 병이 완전히 나아버린 것입니다. 할렐루야! 주님께 영광 올려드립니다. 지난 6개월 동안 약도, 병원도 그 어떤 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교회에 나갔고 김태윤 목사님과 박순병 장로님, 제4문창교회 성도들이 와서 심방 예배드려 주셨고 허해옥 집사님이 거의 6개월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오셔서 기도해준 것 밖에는 없는데 죽어가던 우리 어머님이 살아나셨습니다. 나사로를 살리신 하나님께서 우리 어머님을 살리신 것입니다. 그리고 꼭 배로 사셨습니다. 그리운 저의 어머님 배남호 권사님은 지난 4월 1일 토요일 밤 10시에 그렇게 그리던 저 천국 주님의 품에 안기셨습니다. 불신 가정이었던 저희 가정에 예수님 찾아오셔서 큰 구원을 이루시고 많은 은혜와 복을 주셨습니다. 어머님과 두 딸이 권사로, 막내 아들인 제가 목사로, 외손자 김석홍 목사(향상교회 담임), 친손자 박대선 목사(성안교회 부목사)가 되었습니다. 저희 가정은 예수님 믿고 영육간에 참 많은 복을 받았습니다.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말로 다 형용 못하네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한없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다 기록할 수 없습니다. 천국에서 다시 만날 것을 믿으며 어머님 배남호 권사님을 주님의 품에 올려드리며 큰 구원을 베푸신 하나님께 영광과 감사를 올려드립니다. 늘 울어도 눈물로써 못 갚을 줄 알아 몸 밖에 드릴 것 없어 이 몸 바칩니다. 감사합니다. 샬롬! 마라나타!!!
    • 기고/강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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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4-20
  • [기고] 4월 20일 ‘장애인의 날’을 맞이하여 교회에 제언합니다
    필자는 1980년생으로 선천성뇌성마비장애인이며 대신석수교단에서 안수를 받고 현재 부산 세대로교회(합신)를 섬기는 목사다. 1년 전부터는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참여하는 온라인 독서모임인 '위드애인(with愛人)'에서 사회와 발제를 맡고 있다. 이 독서모임은 장애인 10명, 비장애인 13명이 함께 참여하고 있는데 온라인 모임답게 지역도 부산을 중심으로 김해, 천안, 의정부 등 다양하다. 모임을 할 때마다 자주 나오는 이야기 중에서 하나가 “교회에서도 장애인식개선교육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장애인 인식개선 교육’은 법정의무교육 중의 하나로 ‘직장 내 장애인 인식개선 교육’으로 알려져 있다. ‘장애인 인식개선 교육’은 「장애인고용촉진 및 직업재활법」 제5조의2(직장 내 장애인 인식개선 교육), 제86조(과태료), 시행령 제5조의2(직장 내 장애인 인식개선 교육)에 근거 법령을 두고 있는 법정의무교육으로서, 사업주는 장애인에 대한 직장 내 편견을 제거함으로써 장애인 근로자의 안정적인 근무여건을 조성하고 장애인 근로자 채용이 확대될 수 있도록 직장 내 장애인 인식개선 교육을 실시하여야 한다. 만약 사업주가 교육 실시 의무를 미이행하거나 사업주 및 교육기관의 장이 교육 실시 관련 자료 3년 보관 의무를 위반하는 경우 최대 300만원 이하의 과태료가 부과될 수 있다. 이러한 근거 법령에 따라 학교나 기관, 사업체들은 대부분 1년에 1회 정도 ‘장애인 인식개선 교육’을 의무적으로 받고 있다. 그런데 종교기관들은 여기에서 예외인 것으로 알고 있다. 사실 이러한 교육이 필요한 곳이 종교 기관이지 않을까 싶다. 특히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강조하는 교회들은 의무 대상에 포함되지 않아도 이런 교육을 자발적으로 해야 되지 않을까? 필자는 미혼임에도 불구하고 최근 ‘두란노 아버지학교’를 수료했다. 아버지학교에 가 보니 참여자 중 대부분이 장소를 제공한 교회의 성도들이었다. 참여한 이유도 놀라웠는데, 아버지학교를 수료해야 그 교회에서 임직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웃고 넘겼지만 생각해 보면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이 든다. 또 하나, 필자는 이번에 ㅁㅁ대학교에 편입했다. ㅁㅁ대학교는 학생들에게 다양한 경험과 참여를 하게끔 만들기 위해 ‘포인트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여러 분야의 경험과 참여들을 통해 쌓인 포인트들은 다음 학기에 장학금을 신청할 때 유리하게 작용된다. 장학금 신청자 중에서 포인트 고순위자를 선발하여 ㅁㅁ대학교 핵심역량우수장학금을 지급하는데 실례로 ‘장애인 인식개선 교육’에 참여하면 30포인트를 제공한다. 필자가 두 가지 실례를 든 것은 이제 곧 다가올 ‘장애인의 날(4월 20일)’을 맞이하여 교회에 다섯 가지를 제언하기 위함이다. 1. 목사는 1년에 두 차례(봄과 가을) 열리는 정기노회에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참석하여야 한다. 노회는 정기노회 때든지 또는 목사 임직자들을 대상으로 ‘장애인 인식개선 교육’을 진행해 주기를 제언한다. 2. 교회는 임직자(집사, 권사, 장로) 대상자들을 대상으로 임직식 전에 ‘장애인 인식개선 교육’을 진행해 주기를 제언한다. 3. 교회는 매년 제직들을 대상으로 ‘제직세미나’를 대부분 진행하는데, 그 때에 ‘장애인 인식개선 교육’도 진행해 주기를 제언한다. 4. 교회는 선교사나 유명인들을 초청하여 부흥회나 세미나를 열어 그들의 삶을 듣듯이, 1년에 1회에서 2회 정도 장애인 목회자들을 초청하여 그들의 삶을 들음으로 장애인의 대한 인식이 자연스럽게 변화되는 장을 마련해 주기를 제언한다.(꼭 장애인주일에 맞춰서 초청할 필요 없음. 그것도 또 하나의 편견이나 차별일 수 있기 때문이다.) 5. 무엇보다 이것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려면 담임목사와 교회 내 중직자와 교사들이 먼저 ‘장애인 인식개선 교육’에 앞장 서 주기를 제언한다. 장애인은 그리 멀리 있지 않다. 장애인 목회자도 그리 멀리 있지 않다. 따지고 보면 우리 모두가 예비 장애인이고 인생 말년 쯔음에는 대부분이 장애인이 된다. 많은 교회들이 ‘장애인의 날’을 기점으로 '장애인 목회자'를 초정해서 설교를 들었다는 소식과 성도들을 대상으로 '장애인 인식개선 교육'을 했다는 소식들이 여기저기서 많이 보이고, 많이 들렸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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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4-17
  • [기고] 메시아닉 시크릿
    지식홍수의 사회에서 알고자 하는 것은 검색엔진을 돌리면 된다. 검색엔진을 돌리면 빅데이터가 순차적으로 배열하여 알고자 하는 지식을 채워준다. 그러나 이젠 검색엔진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빅데이터를 이용하여 알고자 하고 하고자 하는 것들을 만들어주는 시대가 되었다.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것이 쳇GPT이다. 그림을 그려주고 음악도 만들어주며 심지어 글도 대신 써 준다. 검색이 아닌 대작을 해주는 것이다. 신학 교수들이 많은 것을 알고 있어 책을 쓰고 강의도 하였다. 학생들은 강의 내용을 인터넷에 올려 빅데이터화 시켰다. 누군가 교수가 내어준 리포터를 하기 위해 쳇GPT에게 묻는다. 그리고 높은 수준의 빅데이터가 담긴 리포터를 단 몇 분 만에 받게 된다. 이러한 지식의 홍수사회에서 교수들이 살아남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아주 중요한 것들은 빅데이터화 되지 못하도록 다양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 당시 입으로 회자 되는 것들과 과거로부터 구전되는 것들이 오늘날의 빅데이터라 하겠다. 등잔 밑이 어둡다고 하는 속담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복음이 가려졌다. 심지어 예수께선 자신이 메시아이심을 숨겨달라고 했고 자신이 한 기적과 표적들을 알리지 말라고 당부했다. 그러한 성경 기록 내용을 메시아닉시크릿이라 한다. 왜 예수께서 이토록 자신과 자신의 사역을 숨기려 하셨을까? [누가복음 8:10] 이르시되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다른 사람에게는 비유로 하나니 이는 그들로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복음학에 정통하신 예수께서 나신 곳이 지방이고 가난한 동네라서 가말리엘 문하생이나 요한의 제자들보다 입지가 없었다. 또 그가 하는 메시지는 당시의 성경에 대한 해석과는 달랐고 그 메시지를 받는 무리는 성전에 접근하지 못하고 배척당하는 자들일 뿐만 아니라 심지어 요한의 제자들까지 예수의 가르침과 행위에 의문을 품었다. 그러나 예수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시고 더욱 숨기려 하셨다. 심지어 자기 제자들에게까지 비유로 말씀하시면서 가끔씩만 그 말씀을 풀어 주셨다. 어느 날 요한의 제자 두 명이 찾아 왔다. 백 부장의 종을 고치시고 과부의 아들을 살렸다는 소문이 돌자 세례요한이 제자 둘을 예수께 보낸 것이다. 허름한 예수의 제자들 앞에 말짱한 요한의 제자 둘이 찾아와 "세례요한이 우리를 보내어 당신께 여쭈어보라고 하기를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하더이다." 하니 예수께서 대답하시길 "너희가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먹은 사람이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하셨다. 그리고 덧붙이신 말씀이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이때 예수의 제자들이 요한의 제자 둘을 배웅하러 간 듯하다. 잘 배운듯하고 잘 입은 듯하고 특히 세례요한의 제자라서 더욱 그럴듯해 보이는 요한의 제자들을 배웅하고 온 자기 제자들에게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보라 화려한 옷을 입고 사치하게 지내는 자는 왕궁에 있느니라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선지자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도 훌륭한 자니라" 예수님의 열두 제자는 제자 둘을 보내 당당히 예수께 질문을 던진 요한과 그 제자들의 품격에 놀라, 자신들이 예수와 함께 한 시간들 속에 보고 들은 모든 것을 순간 잊고, 오히려 그들의 멋진 모습이 실족할 동기가 되고 있었다. 그때 예수님은 자기 제자들에게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고 물으신 것이다. "요한이 보낸 자가 떠난 후에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광나루와 지방 신학대학 그리고 노회 소속의 신학원은 적당한 차이가 있다. 예수는 지방 삼류 신학원 강사였다. 그리고 그의 학생은 열두 명이었다. 가말리엘 문하생으로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던 사울에게도 예수와 그 제자들은 삼류 지방 신학을 하는 이단 사이비였다. 그래서 그는 사명감을 가지고 이단 척결에 앞장섰다. 그런 그도 스데반의 당당한 죽음 앞에서 한번 놀라고 다메섹 도상에서 주를 만나 또 놀랐다. 그리고 한순간에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고 주님을 따르는 제자가 된 것이다. 복음서와 사도행전은 유대인의 성서에 포함되지 않아 지금도 그들에게는 가려져 있다. 비록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를 따르고 가말리엘 문하생 사울이 바울이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어도 지금의 이스라엘에게는 얼굴을 가린 수건과 같다. 그러나 이방에게는 복음의 시크릿이 없다. 오히려 많은 빅데이터가 넘쳐난다. 그 일을 성령께서 하고 계신다. 성령의 일은 메시아닉 시크릿과 같다. 모두에게 일어나지 않고, 또 일어난 일에 대해 모두가 공감하지 않고, 그래서 모두가 믿는 것이 아닌 일들이, 오늘날 우리 곁에서 일어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직접적으로 성령을 체험한 사람들은 그 불씨를 옮기기 위해 은사에 따라 복음을 전한다. 그 복음이 누군가에겐 얼굴을 가리는 수건이 되고 누군가에겐 가려진 눈을 뜨게 하는 구원의 메시지가 되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쳇GPT의 홍수를 벗어날 수 없다. 믿는 자들의 빅데이터는 늘어날 것이고 그것을 따라 다양한 창작과 대작과 지식의 홍수가 일겠지만, 그런 중에도 성령은 운행하시며 하나님의 남은 자들을 세우시고 새롭게 하시며 구별해 놓으실 것이다. 마치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의 제자가 되고 가말리엘 문하생이 예수의 제자가 되듯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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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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