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6-02-12(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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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상률 목사(후암교회 원로)

 

이 글은 2024년 10월 31일 2회 송상석포럼에서 발표된 내용이다. 

 

상석 목사가 세상을 떠난 후로 오래도록 금기시 되어 왔던 그 이름이 새롭게 조명 받게 되는 것을 보면서 여러가지 감회가 새로워진다. 제일문창교회 당회가 송상석 목사의 기념사업을 펼치며 그분의 업적과 정신을 계승 발전시키고자 하는 것을 높이 평가하면서 또 한편 편향되지 않는 시각으로 역사적 자료들을 발굴해 내고 햇빛을 보게 하는 사학자(史學者)들의 노력에도 경의를 표하는 바이다.

필자가 맨처음 송상석 목사와 관계하게 된 것은 악연(惡緣)으로 시작되었다. 1976년5월 그해 고신대 신대원을 졸업하고 동기생인 강영식, 주종근 전도사와 함께 전국교회에 드리는 공개서한을 발송하면서 송상석 목사의 비위를 크게 건드려 버렸다.

참고로 2016년에 발행된 경남(법통)노회 100년사에는 “1976년2월19일 고려신학대학원 제30회 졸업생 중 주종근 전도사(가음정교회) 손상률 전도사(성주교회) 강영식 전도사(화삼교회)는 총회가 분열되려는 상황에서 뜻을 같이하여 여러 날 밤을 새우면서 쓴 ‘파수병의 절규’ 라는 제목의 서신을 1976년 5월 7일 전국교회 앞으로 발송했다. 같은 해 6월 25일 두 번째, 7월 15일에 세 번째, 8월 20일에 네 번째 서신을 발송했고, 제26회 총회 직전인 9월 10일에는 어떤 경우에도 교단은 나누어지면 안 된다는 일념으로 다섯 번째 서신을 발송했다”고 기록되어 있다.(p285) 그 첫 번째 글에서 송상석 목사와 마주치게 되고 말았다. 제1신 내용 중에 “동기와 내용이 어떠하든지 간에 피소자의 입장에 있던 송 목사께서 다시 맞고소를 하므로서 소송 반대를 들고 나온 경남노회가 안으로는 소송을 용납하는 것으로 비판을 면치 못하고 있습니다”라는 부분에서다.

이 문제로 송상석 목사는 노발대발하여 임시노회를 소집하고 “머리에 피도 마르지 않은 전도사들이 나이 많은 목사의 이름을 활자화 하여 전국에 뿌리다니”하며 노회에 징계를 요청하였다. 하마터면 갓난 애숭이들이 그대로 목이 잘릴 뻔 했던 위험한 상황이었으나 노회의 중진들이 극구 만류하여 일단 경고하는 것으로 가볍게 넘어 갔다.

 

그해 여름 강도사 시험을 거처 이듬해 목사가 된 나에게 송 목사님이 한번 만나고 싶다는 연락을 해 왔다. 나는 이미 한번 찍힌 일이 있는지라 내심 걱정을 하면서 찾아갔더니 뜻밖에도 엄청난 과제를 맡기시는 것이다. 그때 송상석 목사는 “한국절제교육연구사료집”을 집필하면서 거기 포함시킬 내용 가운데 초기 한국교회가 사용한 만국통일공과중 절제공과 부분을 빼서 정리 해 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목사님에게 왜 그런 일을 제게 맡기시느냐고 물었더니 “이 작업은 신학적 소양이 있고 문장력도 갖춘 사람이라야 할 수 있는데 손 목사를 적임자라고 생각한다”고 하였다. 아이러니 하게도 공개서한 첫 서신에서 필화사건으로 징벌을 받을 뻔 했다가 그 일로 인하여 신학적 소양과 문장력을 인정받아서 요긴하게 쓰임을 받게 되었다.

그런 일이 있은 이후에도 나는 반고소 교단 6년 동안 총회의 임원으로 교단의 진로와 정책을 입안하는 일과 주일학교 교재를 편찬하고 출판하는 일이며 신학교 일에도 관계하는 등 열심히 봉사하였다. 안타깝게도 1982년 제32회 총회에서 소송문제에 대한 언급 없이 합동을 결의할 때 그 현장에 있었지만 끝내 명분 없는 합동에 동참하지 않았고 그 후로는 교단을 달리하게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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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상석 목사

 

1. 오해와 진실

 

고대 인도에서 유래 했다는 ‘장님과 코끼리’(盲人模象)의 우화가 있다. 어느 마을에 여섯명의 맹인이 코끼리를 만져 보고 제각각 다르게 평가 했다는 내용이다. 첫 번째는 다리를 만져보고 코끼리를 기둥처럼 생겼다고 했다. 두 번째는 꼬리를 만져보고 새끼줄처럼 생겼다고 했다. 세 번째는 코를 만지면서 나무 방망이처럼 생겼다고 했다. 네 번째는 귀를 만지면서 부채처럼 생겼다고 했다. 다섯 번째는 상아를 만지면서 단단한 창 같다고 했다. 여섯 번째는 배를 만지면서 커다란 벽처럼 생겼다고 했다.

 

사람의 지식은 자기가 보고 느끼고 인식하는 범위만큼 한계를 지닌다는 뜻이다. 문제는 어느 한쪽만 보고 아는 부분적인 지식을 가지고 그것이 전체인 것처럼 주장하거나, 다른 사람의 관점을 무시해 버리는 것에 있다. 지나간 시대의 인물을 놓고 후세 사람들이 평가 하게 될 때는 생전의 업적이나 동시대 인물들의 구전 또는 기록된 자료에 의존해야 하기 때문에 본인이나 가족이 체험한 것처럼 정확하고 완전하게 기술 할 수는 없다. 사실 한국 교회사적 인물에 해당하는 송상석 목사의 경우 몸담았던 고신 교단 안 에서도 호불호(好不好)가 극명하게 나누어 져 있어서 같은 팩트를 놓고도 전혀 다른 평가를 하곤 했다.

 

여러해 전 서울에 있는 어느 신학대학원에서 교회사를 강의하는 교수 한사람과 만난 적이 있었다. 그 친구는 한국교회 초기부터 역사 전반을 연구하던 중 여러 부분에서 송상석 이라는 이름이 나오는 것을 발견하고, 그분의 이력을 살펴 보았다고 한다. 그분이 일제 치하에서 부터 각계의 유력인사들을 규합하여 절제운동을 전개하였고, 언론과 교육에 기여한 것 등 당시 크리스챤 인사 중에서 대단한 인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분이 평양신학교를 졸업하였으며 일제말기 신사참배 문제로 교회가 어려움을 당할 때 고초를 겪으면서도 동지들을 도왔다는 것과 해방 후 고려신학교 설립 때 중국 봉천에 거주하던 박형룡 박사를 모셔다 교장으로 추대한 일까지 대단한 업적이 있는 분으로 알고 있었다. 그 친구가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그렇게 신학교 설립에 산파역할을 했고 교단 성장에 크게 기여했던 인물이 왜 말년에는 자신이 몸담고 키워 왔던 고신총회로 부터 징계를 받아 면직까지 되었는지 도저히 이해 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 교수처럼 어떤 선입견이나 이해관계가 없이 객관적인 눈으로 관찰한다면 훌륭한 업적이 들어나고 높이 평가를 받아야 할 인물임에도, 그와 반대로 부정적 시각에서 개인적인 실수나 약점만을 크게 부각시키며 악마화 시켜 버린다면 역사에 오명으로 기록을 남기게 된다. 어쩌면 송상석 목사의 경우가 여기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이 그분에 대한 편향된 시각을 가지고 사실과 다른 내용을 퍼뜨렸거나 선동을 하여 일반에 오해를 불러 일으켰고 점차 그것이 정설처럼 굳혀지게 되어 버린 경향이 많다고 본다.

 

1969년 내가 고신대학에 입학하던 해 학내문제로 많이 시끄러웠는데 송상석 목사를 반대하는 일부 교수와 학생들이 이사장 퇴진을 요구하며 수업을 거부하곤했다. 그 즈음 학생회 임원 몇사람이 이사장과 담판을 짓겠다고 마산을 찾아갔는데 그들이 직접만나 대담을 하고는 생각이 달라 졌다고 했다. 전해 진 말에 의하면 자기들은 송상석 이사장이 학교운영에 전횡을 일삼고 사욕에만 눈이 어두운 사람이라고 들어 왔는데 직접 만나고 보니 전혀 아니더라. 그분도 기도하는 목사님이었고 눈물도 있는 것 같더라. 생각보다 지나칠 정도로 검소해 보였으며 사심이 없는 것 같더라고 했다.

그 당시 경남노회 안에서도 송상석 목사와 뜻을 같이하며 그분을 추종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 것 같았지만 막상 송목사가 명예훼손을 당하고 여러 가지 음해에 시달려도 거기 맞서서 팔걷어 붙이고 나서는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았다.

제24회 총회 이후 경남법통노회가 정화노회와 대립하면서 대책위원회를 만들고 쉴새없이 회의가 열리거나 공청회를 하는 등 복잡한 시기에 있었던 일이다.

여러 모임이나 회의때 마다 송상석목사 본인이 직접 나와서 사건마다 소상하게 설명을 하곤 했는데 이런 모습이 회원들의 눈에 불편해 보인다고 노회의 중진 몇사람이 찾아가서 그런일은 다른 사람들 에게 맡기고 목사님은 한걸음 뒤에 물러나 있어주면 좋겠다고 건의 한적이 있었다. 이에 대하여 송상석 목사의 반론은 “나에게 관한 문제인데 나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이 누가 있는가? 또한 아무리 가까운 사람이라도 직접 관련된 일이 아니면 자기 일처럼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으며 오히려 제 삼자처럼 본질은 덮어 둔채 적당히 타협하고 말더라” 고 했다. 그의 오랜 경험에서 나온 말일 것이다.

 

사실이 그렇다. 송상석 목사 생전에 뿐 아니라 사후 수십년이 지나오면서 그분과 관련지어 회자된 말들중에 터무니 없이 날조된 모략과 중상도 있었고 공적 기관이 저지른 어처구니 없는 사건도 있었지만 한번도 어느 누구도 대신 나서서 경위를 밝히고 책임을 지우는 일이 없었다. 모두 다 뻔히 알수 있는 일인데도 자기의 일이 아니니까 묵인하고 지나치게 되고 결국 이런 일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정설처럼 굳혀 지곤 했었다.

 

송상석 목사를 두고 터무니 없는 허위사실을 퍼뜨리며 악의에 찬 인신공격을 하는자가 있는가 하면 이를 두둔하며 확대 재생산 하는 사람들도 있었던 것이다.

유 모 목사라는 사람은 공개석상에서 송상석 목사가 일제시대 고등계 형사를 했고 독립운동가들과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교회 지도자들을 괴롭힌 경력이 있다고 했다. 그는 한술 더 떠서 송상석 목사가 1947년 만주 봉천으로 가서 박형룡 박사를 모셔올 때 국경을 통과하며 여러차례 검문을 당했으나 그가 소지하고 있었던 일본 형사의 신분증을 제시하여 위기를 넘기곤 했다고 전혀 상식에도 맞지 않는 소리를 하곤 했다.

차 모 교수라는 사람은 어느 특강하는 자리에서 지성인으로는 입에 담을수 없는 소리를 내뱉고 있었다. 그는 송상석 목사를 가리켜 “이사람은 기회주의자, 카멜리온 같은 변신술에 뛰어난 자” 등으로 표현했다. 그는 또 “송상석이 일본형사 시절 독립운동가나 그 가족들에게 가혹한 행위를 했던 것이 알려지고 통영, 고성 지방에 소문이 나서 숨어 다녔다. 1948년 반민족 특위의 활동으로 전국에 수배를 당하게 되자 신분을 감추기 위하여 이름도 바꾸고 절에 들어가 중이 되기도 했고, 또 신학교에 가서 목사가 되었다” 이처럼 전혀 근거도 없고 시차도 맞지않고 사리에도 어긋나는 허무맹랑한 소리를 한 자들이 뻐젓히 살아있고 그 동영상 자료도 아직까지 존재하고 있다.(참조:송병일씨가 보내온 동영상 3편) 참으로 이런 어처구니 없는 일들까지 한때나마 송상석 목사에 대한 공격 수단으로 쓰여 졌다는 것은 씁쓸하기 이를데 없다.

 

2006년9월 고신 신대원 설립 60주년 기념 행사때 박형룡 박사를 만주에서 모셔다 초대교장으로 추대하게 한 공로로 고 남영환 목사 유족들에게 감사패를 전달한 사건도 그중에 하나다.

이것이야 말로 엄연한 사실을 날조하여 역사적 오류로 남겨진 것이다. 이 일이 만일 의도적인 목적에 의해서 였다면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지은것이고, 무지로 인한 실수 였다면 학교의 공신력 뿐만 아니라 당사자에게도 오히려 불명예를 안겨 준 것이 된다.

 

이부분 정확한 자료를 소개할것이 있다.

1974년9월 경남법통노회 제100회 기념식에 내빈으로 참석한 박형룡 박사는 축사를 하면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 - 고려 신학교 설립과 운영에 있어서 출옥성도들의 주동에 그들을 존경하는 신앙동지 지도자들과 교회들의 협력이 크게 공효를 이루었다. 그 중에도 현 노회장이신 송상석목사의 비상히 희생적인 봉사를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1947년5월 중순 만주 영구로 가는 19톤짜리 목조 밀수선에 편승하고 황해를 모험 도항하여 봉천에서 박형룡 이 사람을 찾아 5개월만인 동년9월20일에 귀국, 동년 10월 고려신학교에 부임케 하였다. - 중략 - 당시 송상석 목사는 한국교회의 정통신학교육을 위하여 황해바다에 생명을 쏟아버릴 것을 각오하고 모험맹진 하였으니 그 교회, 신학교육을 위한 절륜(絶倫)의 충성은 경남노회와 고려신학교뿐 아니라 전 한국교회가 영세불망(永世不忘)하여야 될 일이며 그의 모험구조를 직접 받은 이 사람에게는 백골난망(白骨難忘)이며 결초보답(結草報答) 해야 할 은덕이다 - ”(경남노회(법통)100주년 기념화보집 p5)

 

 

2. 고소(告訴)와 반고소(反告訴)

 

초기 고신측 사람들의 뇌리에 송상석 이름에는 소송의 대명사로, 한상동 이름에는 소송과 상관없이 살아 온 사랑이나 화평의 인물로 각인되어 있었다.

송상석 목사의 경우 장로교단 분열로 인하여 파생된 문창교회의 재산권을 두고 1950년대 초반부터 20년 가까이 지루한 법정소송을 해 왔다. 그분과 대척점에 서 있는 한상동 목사의 경우 시무하던 초량교회를 내어 주고 절대다수의 교인들과 함께 삼일교회를 개척하였다.

전자와 후자를 놓고 단순비교를 하는 사람들은 막강한 권리를 내려놓고 맨땅에서 개척을 시도했던 한상동 목사는 부산에서 제일 큰 교회로 성장시킨 신령하고 은혜로운 지도자로 추앙하는 대신 장기간 법정투쟁을 계속했던 송상석 목사를 두고는 오랜기간 소송때문에 허비한 막대한 비용으로 예배당을 짓고도 남았을것이라며 은혜는 없고 법밖에 모르는 고집 불통의 사람이라고 혹평하곤 했다.

이런일 말고도 송상석 목사의 경우 여러차례 파수군 (把守軍) 에 게재한 박윤선 교장과의 논전도 그분을 고소 옹호자로 인식하기에 충분하였을 것이다.

이와같은 일반적 인식은 송상석 목사의 본의에 반대 되는 것으로 오해를 증폭시켜 왔다.

정리 하자면 송상석 목사는 고소론자도 반고소론자도 아니다 라는 것이 필자의 견해이다.

그분이 저술한 ‘법정소송과 종교재판’ 에는 신자간에 일어나는 송사에 대하여 성경적 원리에 입각하여 논리적으로 정리해 놓았고 또 해방후 한국교회의 교파분열로 인하여 본인이 직접 겪었던 사례들을 예시해 가며 전문가 적인 견해를 밝혀주고 있다. 간혹 신학자나 교회 지도자 중에 고린도전서 6장7절을 근거로 신자간 불신법정에 소송하는 것 자체를 반대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하나님의 일반은총 영역인 국가기관을 인정하는 마당에 정의와 질서유지의 도구인 사회법이나 소송자체를 거부하지 않는 것이 올바른 견해라고 보아왔다.

송상석 목사 에게 아켈리스건으로 작용하는 문창교회 소송건의 내막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라면 그분을 소송전문가나 고소옹호론자 라고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사실 문창교회 사건이 지루한 법정투쟁으로 이어졌지만 그 내막을 보면 처음부터 소송으로 가지않고 내부적으로 수습하려는 시도를 했고 송목사에 의해서 먼저 화해제안서를 제시했으나 상대측에서 거부하므로 어쩔수없이 법정 다툼이 이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교회분쟁의 특수성 때문에 최종심에서도 해결될수 없었던 문제가 결국은 송상석 목사의 제안대로 쌍방이 합의하여 타결된 결과를 보면 알 수가 있다.

소송문제와 관련하여 한상동 목사의 경우는 어떠했는가.

앞에서 언급했듯이 한상동 목사 에게는 신사참배를 거부했던 출옥성도의 명망이 있는데다 초량교회의 건물과 재산을 그대로 두고 빈손으로 나와서 개척을 시작하여 대형교회로 성장시켰기에 사랑과 은혜의 상징적인 인물로 부각되어 있었다.

그분은 교계와 신학교의 지도자로 활동하면서 법과 원칙에 근거하는 공적인 체계보다 신앙과 은혜, 또는 사랑과 평화를 표방한 나머지 공동체를 지탱하는 규범이나 질서를 흔들리게 한 경우가 많았다. 그런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고신역사에 굵직한 사건이나 중요한 사안을 두고 자기와 의견을 달리했던 사람 또는 정치적으로 대척점에 섰던 경우 이를 용납하거나 공존하지 못하고 결국 결별하게 했던 사례가 많이있다.

타교단 인사들이나 고신 교단에 몸담았다가 중간에 떠나간 사람들 중에도 한상동 목사를 아는 사람들 입에서 그분의 독선적 리더십을 비판하기도 하고 또 자기와 의견이 다른 사람을 포용하지 못하고 떠나가게 하는 편협한 인물이라고 혹평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무엇보다 송상석 목사와의 관계야 말로 고신의 성장과 발전에 공헌하여 다 같이 후세 사람들로 부터 오래도록 존경받아야 되고 하나님 나라에서 까지 영광의 동지자로 남아야 될 사이임에도 말년에 사회법정 소송이라는 최악의 방법을 동원하면서 목사면직 이라는 극단적 조치를 하고말았다.

이런 관점에서 생각할때 누구는 소송 옹호론자 이고 누구는 소송 반대론자라는 도식은 성립이 될 수 없고 또 지금와서 그런 문제의 시비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일이라고 본다.

세월이 지나고 인물도 떠나가고 상황도 많이 바뀌어 버린 지금 되돌아보면 한 시대를 휩쓸고 간 소용돌이와 격랑들이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이었는지 그 결과는 우리에게 무엇을 남겼는지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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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상석 목사와 김난출 사모

 

3. 반성도 없고 책임자도 없는 어두운역사

 

고신측 총회에서는 1970년대(1972-1976) 신학교와 교단의 권력투쟁이 격화되고 급기야 교단분열에 이르기까지 엄청난 진통과 파란을 겪게 되었는데 이런 일로 인하여 신앙의 정통과 생활의 순결을 표방하던 교단의 위상과 정체성에 엄청난 손상을 가져왔다.

1976년 고신교단이 제26회 총회를 기점으로 소위 고소측과 반고소측으로 분열되었다. 반고소측은 1년뒤 비슷한 명분으로 또 다시 분열하여 고려측(석원태 계) 총회가 따로 조직 되었는데 이후 제각기 신학교를 운영하며 목회자를 배출하는 등 교단의 행세를 해왔다. 반고소측 총회나 거기서 나누어진 고려측 총회도 똑같이 본래 고신총회의 회수를 그대로 사용했고 신학교도 졸업회수를 그대로 이어갔는데 양쪽 다 “고소측 총회가 제24회 총회결의의 공죄를 회개하고 번복할때는 언제라도 하나가 될수있다“는 합동조건을 내걸고 있었다. 결국 1982년 32회 총회때 반고소측 총회는 고소측과 합동을 하게되었는데 6년전 나누어질 때 목숨을 걸다시피 했던 본질문제 에는 유야무야로 넘어갔다. 1982년 제32회 총회에서 채택한 합동위원회 보고서 제2항에는 ”우리가 소송문제를 가지고 나누어진 것은 하나님 앞에 피차 죄송스러운 것이므로 하나 되기를 원하여 무조건 하나 되어 지기를 가결해 주실 것을 원합니다“ 라고 되어있다(경남법통노회100년사 P312)

반고소측 총회가 고소측총회와 합동이 된후에 남아 있던 반고소 고려측 에서는 저희들만이 성경진리를 파수하며 신앙의 절개를 지키는 유일한 총회라고 주장해 나왔다. 그렇지만 그쪽에서도 시차를 두고 점차 고신 본류로의 합동에 가세하면서 사실상 고신에서는 고소와 반고소의 의미는 사라저 갔고 이 문제는 한 시대 또는 인맥중심의 해프닝처럼 되어지고 말았다.

 

그렇다면 고신 역사에 반고소 운동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불신법정 소송문제가 교단의 분열을 가저 올 만큼 큰 이슈가 되고 신학적인 문제로 대두되어 진리논쟁에 까지 이르게 되었는데 그 시기 영향력있는 목회자들과 신학교 교수들까지 가세하여 신학과 신앙의 본질적인 대결로 몰아 갔지만 그 실상은 신학교 이사회의 내분과 교권싸움에 있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임이 들어났다. 총회 제23회와 24회는 ‘신자간 불신법정 소송문제’ 에 대한 총회결의가 대세에 따라 엎치락 뒤치락 했는가 하면 같은 조항을 놓고도 편리한대로 적용하는 등 일관성 없었던 총회의 입장이 이면의 실상을 말해주고 있었다.

이와같은 전후사정을 살펴볼 때 교단 행정을 책임진 실세들이 자기들의 권력문제나 이해관계에 따라 무고한 교회와 순진한 성도들을 희생시켜 왔다는 점이다. 참으로 ‘고래싸움에 새우가 등터진다’는 말은 여기에 해당되는 것임에 틀림이없다. 모두가 하나님 앞과 역사 앞에서 뼈저리게 회개하고 책임을 저야 할 일이 아닐수없다.

 

고신에서 나고 고신에서 자라 목사가 된 나는 소송문제로 야기된 교단의 분열과 합동의 격동기를 겪으며 누구보다 큰 기대와 상처를 다 지니고 있다. 그당시 경남 법통노회를 중심으로 총회와 행정을 단절하고 반고소 총회를 출범하려고 할때 다수의 사람들이 꼭 이렇게 까지 해야 되느냐며 간곡히 말려도 보았지만 지도층 사람들은 “형제끼리 갈라서는 것은 수족을 잘라내는 것 같은 아픔이나 이 길만이 진리를 파수하는 수단이기에 어떤 희생이 따르더라도 감행할 수밖에 없다”고 역설하였다. 그때 나는 그것이 옳은 길인줄 알았고 그 쟁쟁한 선배들의 관록과 정신에 매료되어 더욱 진취적이고 야심차게 지경을 넓혀 나가리라 생각하고 죽기살기로 매진하기도 했다. 그러다 얼마가 지나자 어느때 부터인가 겉으로는 쉬쉬하면서 속으로는 그토록 증오하던 고소측 사람들과 합동을 모색하는 분위기로 흐르고 있었다. 여기에는 소송이 비성경적 이라거나 특별재판국의 부당한 권징과 교권의 횡포에 대한 책임문제 같은 것은 논외로 하고 무조건 하나되는 것 만이 살길이라는 식으로 굳혀져 가는 것 같았다.

 

1980년 11월 송상석 목사가 세상을 떠나기 임박했을 무렵이다. 어느편으로 송목사님께서 꼭 하고싶은 말이 있다고 하면서 나에게 다녀 갔으면 좋겠다는 연락이 왔다. 나는 즉시 마포에 있는 따님 댁으로 갔더니 목사님은 기력이 쇠약하여 숨쉬기도 힘든 상태였는데 나의 손을 꼭 잡고 의미있는 당부를 하셨다. 그것은 두가지 내용이었다. 첫째는 제일문창교회 원로목사 집무실에 소장되어있는 자료들을 손목사가 맡아서 역사적인 기록으로 정리해 주면 좋겠다고 하셨다. 또한가지는 본론격인 고소측과의 합동문제였다. 자기는 머지않아 세상을 떠날 것인데 같은 형제끼리 싸우다 찢어진 상태로 어떻게 하나님 앞에 설수가 있겠는가. 그러니 하루라도 빨리 나누어진 형제가 하나 되도록 젊은 목사들의 마음을 모아서 동참해 달라는것이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연로하신 목사님의 이 마지막 당부를 거절하고 말았다. 나는 “그 당시 목사님께서 오직 성경진리를 파수하기 위한 일념으로 골육이 찢어지는 아픔을 감수할 수밖에 없는일이라고 역설하셨지 않습니까”하고 거부의사를 분명히 해 버렸다. 적어도 진리투쟁을 표방했던 반고소 운동이 아무 명분도 없는 합동을 한다는 것이 소신있는 목사들의 행동일수 없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때 목사님은 마지막 명언 곧 “진리를 붙잡는다고 화평을 포기했는데 지금와서 보니 진리도 놓치고 화평도 버린 결과가 되고말았다” 는 말을 남기셨다.

 

송상석 목사가 떠나 간지 2년후 1982년 9월 마산교회당에서 개최된 제32회 총회에서 고소측 총회와 합동하기로 가결하였다. 그때 나는 역사적인 합동결의 안을 의결할 때 총회 서기로 집무를 하고있었다. 전체적인 분위기는 합동결의가 대세였으나 교단분열 이후에 목사가 되었거나 외부에서 가입해온 목사들을 중심으로 젊은층 일부까지 반발하는 세력들도 있어서 긴장이 감돌았다. 사회하던 총회장이 가부를 물어 만장일치가 되었는데도 반대하는 세력의 눈치를 보며 가결 선언을 늦추기도했다. 물론 서기석에 있던 나도 아무런 의사표현을 하지않았다. 침묵은 묵시적 찬성에 해당한다. 회장의 가결이 선언되고 회중의 환호와 박수 소리가 터저 나오기도 했다. 그럴때 나는 손을들고 발언권을 얻어 발언대에 섰다. 그때까지 내가 앞장서서 반대발언을 해 주기를 기대하던 사람들 중에는 ‘지금와서 왠 뒷북이냐’는 식의 비웃는 눈으로 처다 보는 것 같았다.

“....6년전 진리파수를 표방하고 반고소 고려측 총회가 출범했으나 지금와서 조건없이 합동한다고 하니 착잡한 마음 금할수 없습니다. 다만 나누어진 형제가 하나되어야 한다는 대의명분을 내세우며 모두가 찬성하는 일에 차마 반대할수 없었습니다. 한가지 제안을 하고자 이 자리에 섰습니다. 그동안 이 일로 인하여 교회를 혼란하게 하고 순진한 교인들에게 상처를 입혔던일은 마땅히 책임을 저야 할것입니다. 나를 포함해서 그당시 목사와 장로들 모두가 회개하는 마음으로 자숙할 것을 결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나의 발언이 끝나자 장내는 잠시 숙연한 듯 말이 없었으나 누구도 찬성하는 사람없어서 소리없는 메아리가 되고 말았다.

말없는 다수 가운데 겉으로 박수를 쳤지만 속으로는 한없이 허탈하였고 그동안 우리는 헛개비를 보고 쫓아 다녔던가 싶은 비통한 마음도 들었을 것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목사의 언행에는 무거운 책임이 따른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선배들은 1960년 승동측과 합동했다가 3년뒤 전격적인 환원을 하고 그해 9월 남교회에서 모인 제13회 총회에서 이 일에 대한 책임을 지고 목사와 장로들이 자숙을 결의한바가 있었다. 성경전체 중에 고린도전서6장만이 유일한 진리인 것처럼 목숨걸고 지키겠다고 전면에 나섰던 사람들이라면 어떤 형태라도 책임지는 모습을 보여 주었어야 마땅했다.

 

4. 누가 분리주의자 인가

 

일반적으로 “고려파 분열의 중심에 송상석 목사가 있다”는 말을 하곤한다. 이 통념에 동의할 수가 없다.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고 도 하는데 그 말에도 동의 할수없다.

고신24회 총회가 특별재판국을 설치하고 경남법통노회의 다수를 권징한 것은 송상석 목사 문제가 핵심이었다는 것은 부인할수 없다. 그러나 26회 총회 부터 고소측과 정상화를 위한 위원회를 설치하고 꾸준히 합동교섭을 해 왔는데 거기에도 항상 송상석 목사가 걸림돌로 작용하여 그분 생전에는 불가능하다는 인식이 파다해 있었다.

그렇다면 정작 당사자인 송상석목사의 입장도 그랬을까? 이 부분 일반에 알려지지않은 사실이 있다. 송상석 목사 본인 입장에서는 고려신학교 설립과 발전에 이바지 한 일이나 이후에 일어난 어려운 고비마다 궂은일을 마다않고 수습하며 그야말로 멸사봉공(滅私奉公)으로 헌신 하여 발전시킨 교단이다. 일반적으로 송상석 목사를 고신의 세기둥(항상동,송상석,박윤선)중의 한축 이라고 말하지만 알고보면 법과 행정적 기반을 제도화 하고 장기적인 비젼을 제시하여 선진교단으로 발전하게 하는데는 독보적인 위치에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말년에 후배들로 부터 목사의 생명을 거두어 버리는 극단적 징벌을 받았으니 그 울분이야 오죽했을까 짐작하고도 남는다.

이와같은 인식은 고려신학교와 총회의 설립부터 성장하는 과정에 그분이 어떤 역할을 해 왔는지를 살펴보면 자명한 대답이 나온다.

우선 신학교와 관련된 일만 보아도 그렇다. 고신을 설립할 때 적어도 평양신학교의 정통성을 계승해야 된다는 명분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초대교장으로 박형룡박사를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본인이 직접 5개월동안이나 목숨을 걸고 황해를 도항하는 모험을 감행하여 만주 봉천에 있던 박형룡 박사를 모셔다 교장에 앉힌 것이다. 그뿐만 아니다 1960년 박윤선 교장이 신학교를 떠났을때와 그 후에도 여러차례 학교에 갈등과 알력이 있었지만 이를 극복하며 수습하여 공적 위상을 세우고 발전의 기틀을 이루어놓았다.

1960 승동측과의 합동을 하고 곧이어 한상동 목사 주도로 단행된 고신복교와 총회 환원으로 엄청난 혼란이 거듭 되었지만 그 많은 어려움을 무릎쓰고 뒤치닥 거리를 하며 총회의 안정을 도모해 왔던 것은 그분의 탁원한 지도력과 행정력이 있었기 때문이라는점은 부인할수가없다.

타교단 사람들의 눈에 비췬 평가중에 한상동 목사는 출옥성도의 명성과 혁명가적인 지도력을 행사하여 교단에 상징적 인물로 알려저 있지만 다른 한편 자기와 견해를 달리하는 사람과는 공존하지 못하고 떠나 가게 만들었다는 평을 듣는다. 송상석 목사 역시 자기 주장이 강하고 고집도 센 편이지만 사람을 내치거나 분열을 조장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목사가 되기전부터 YMCA를 중심으로 교육과 계몽운동을 전개하여 청소년 금주금연을 위한 법제정까지 얻어 내기도했다. 또 국내외 구분없이 문서운동과 언론활동에도 종횡무진 능력을 발휘하였으며 한국교회의 지도자들이나 사회 각계층의 인물들과 폭넓은 교우관계와 인맥을 넓혔던것은 그분의 포용력과 대범함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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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신의 내분이후 화합차원에서 송상석 이사장, 한상동 고려신학교 교장 취임을 기념하면서 찍은 사진. 뒷줄 좌에서 오병세 목사, 홍반식 목사, 이근삼 목사, 앞쪽 좌에서 송상석 목사, 한상동 목사

 

5. 제24회 총회 특별재판국 결의는 무효되어야

 

나는 3년전 이상규 교수의 <송상석과 그의 시대> 출간에 간여하게 되었다. 참으로 어렵사리 원고를 수집하여 교정을하고 여러번 힘든 과정을 거처 출판작업에 들어갈 무렵인데 미국에 있는 송상석 목사의 4남 송병일씨가 강력하게 반발하는 글을 보내왔다. 그는 처음 이교수가 자기 아버지에 관한 책을 내겠다고 했을 때 고맙게 생각하면서 큰 기대를 가졌었다고 했다. 그런데 편집된 내용을 보니 집필진 가운데 송상석 목사 에게 등을 돌렸거나 상처를 입힌 사람의 이름이 들어 있는 것을 보고 불만을 토로했다.

그는 제58회 고신총회가 경남노회의 헌의를 받아 송상석 목사를 사면하기로 결의 한것에도 강한 불만과 분노를 표출했다. 총회가 특별재판국을 설치하여 사문서 위조, 공금횡령, 총회불복종 등의 죄목으로 목사면직까지 단행 해 놓고 수십년이 지난 후 파렴치범 이나 다름없는 죄목을 그대로 둔채 마치 은전이나 베풀 듯이 용서한다는 뜻의 사면을 결정했다고 하니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다는 것이다. 평생을 목사로 살아온 원로에게 씻을수 없는 죄목을 공표하고 사형에 해당하는 목사 면직까지 시켜놓은 자들이 고작 ‘사면’이라는 한마디로 그 모든 것을 상쇄할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사실 그당시 총회에서 송상석 목사의 사면과 복권문제가 거론될 때 많은 논란이 있은 것으로 안다. 정당한 권징이었다면 반드시 당사자의 회개와 공적 고백이 따라야 된다는 논란도 있을법하다. 하지만 세상을 떠난지 오래 된 그분의 경우 사과나 고백은 당연히 있을수 없지만 생전에도 본인이 그 재판의 절차나 과정이 불법이었고 결과 또한 승복할수 없는 것으로 주장하고 있었다. 한때 고려파 신앙과 신학의 정체성까지 흔들어 놓았던 “신자간의 불신법정 소송”문제가 총회 전체의 뜨거운 감자였지만 결국 송상석 한사람 정죄하여 면직시키는것으로 논란의 종지부를 짓고는 흐지부지 되고 말았으니 더는 할말이 없게되었다.

 

고신총회 안에서 송상석 목사와 동시대를 살았던 인물들이나 그 이후의 사람들 누구도 그분을 향해서 정죄 하거나 용서할 정도의 사람은 없다고 생각한다. 그분이 교단에 끼친 공로나 업적은 차치하고라도 정말 법적으로나 도덕적으로 권징을 당하고 면직을 받을만큼 해악을 끼쳤다고 생각할수있을까. 오히려 그와 대척점에 섰던 한상동 목사나 그의 추종자들에 의해서 벌어졌던 중요한 사건들 중에는 교회법으로나 사회법으로 도저히 용서될 수 없는 중대한 범죄사실이 들어나곤했었다. 대표적인 예로 1967년에 있었던 사조이사단 사건의 경우 신앙적으로나 사법적으로 용납될수없은 엄청난 범죄였지만 송상석 목사는 불법을 조장하고 가담한자를 사법에 고발하거나 확대 시키지 않고 사과를 받는 것으로 수습하고 끝낸일이 있다. 누구보다도 법률지식과 사리에 밝은 송상석 목사측에서 그때마다 사직당국에 고발하고 권징으로 다스렸다면 총회가 편안하게 오늘까지 존속될수 있었을까.

손바닥으로 하늘 가리듯 변죽만 울릴것이 아니라 지금이라도 확실하게 본론을 짚고 나가야 될 것이다. 제23회 총회에서 불신법정 소송 문제에 대한 교단의 입장을 천명해 놓고 이듬해 다시 번복하여 특별재판국 설치와 송상석 면직까지 거사를 강행 했던것 아닌가. 지금이라도 제24회 총회의 결의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정하고 고쳐놓으면 다른 것은 저절로 원인 무효가 되는 것이다.

이 문제만큼은 언제든지 고신 총회가 한번은 풀고 가야 될 숙제라고 생각한다.

이 일은 필자를 비롯하여 그 시대를 살았고, 그 살벌한 대립의 현장을 목격하면서 그 분열의 소용돌이 휘말렸다가 아픈 상처를 경험해 본 사람들이라면 다같이 통감할수 있는 정확한 해법임이 분명하다.

한국교회는 지난날 공회가 잘못된 결의를 하여 역사적 과오를 남긴일이 있었지만 사후에 잘못을 시인하고 바로 잡게한 전통이 있다. 1946년 6월 12일 승동교회에서 열린 제32회 총회는 1938년 조선예수교 장로회 제27회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승인한 결의에 대하여 이를 총회가 저지른 범죄로 시인하고 취소결의를 한 사례가 있었다.

 

3년전 인천 초원교회에서 거행된 <송상석과 그의시대> 출판기념 예배에서 축사를 한 고신대신대원 신원하 원장은 송상석 목사와 관련된 사건을 두고 “우리 고신총회 역사에 대한 불편한 진실” 이라고 말 했다. 사실이 그렇다. 개혁주의 신앙은 언제든지 회개하고 새로운 출발을 강조한다. 아무리 세월이 지나고 환경이 바뀌어도 잘못된 것을 덮어놓고 뻔히 알면서 모른척 한다고 미화될수 는 없다. 그야말로 불편한 진실일 뿐이다. 불편한 진실은 어떤 경우에도 밝혀 져야 되고 언제든지 제자리에 돌려 놓아야만 하는 것이다.

 

1979년 여름 어느날 나는 마산 상남동 송상석 목사 자택을 방문하게 되었다. 그분의 역작 <한국절제교육 연구사료집>을 출간하고 친필 서명을 한 책을 전달하고자 부르셨던 것이다. 그날 긴 시간에 걸처 여러 가지 말씀을 하셨는데 그중에 한상동 목사에 대한 그분의 감정을 엿보게 하는 대목이 있었다. “누구는 꽃상여 차를 타고 수많은 인파의 환송을 받으면서 영광스럽게 떠나갔지만 나는 이 책 한권을 손에 들고 하나님앞에 서려고 한다” 고 하시는데 그 얼굴에 여러 가지 회한이 서려 있는 것 같았다. 그때가 한상동 목사 돌아가신지 3년반이나 되었지만 세상 떠난분을 들먹이면서 아직도 삭이지 못하고있는 감정이 묻어 나오는 것을 보았다.

1976년1월 한상동 목사가 돌아가시자 고신대학교 강당에서 총회장으로 성대하게 장례식을 거행 하였는데 그날 송도에서 서면을 거처 동래로 이어지는 장례행열에 엄청난 인파와 차량이 동원되어 부산이 생긴이래로 가장 큰 장례식이었다는 말이 나왔다.

 

오랜기간 송상석 연구에 몰두해 온 강종환 장로는 “송상석 목사의 재평가를 위한 제언”에서 “비록 송상석 목사에 대한 1974. 12. 6. 고신총회 특별재판국의 ‘목사면직’이라는 결과에 대하여 제58회 총회에서 ‘사면’을 결의하였지만 사면하였다고 역사적 사실이 바로 잡히는 것은 아니다” 라고 하였다(제1회 송상석기념포럼 p89) 옳은 지적이라고 생각한다.

근래에 들어 송상석목사에 관한 출판물이 나오고 그분에 대한 기념 사업들을 벌이는 것은 매우 고무적이고 기대할 일임에 틀림이없다. 그러나 당사자인 송상석 목사나 그분의 유족들 입장에서 보면 아무리 고인의 숨겨진 업적을 들어내고 그 이름을 높이 칭송해 준다고 한들 형사범으로 정죄하여 목사직을 거둔채로 세상을 떠나게 한 그 상처와 응어리는 삭여지거나 없어지지 않을것이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볼 때 지난날 고신 총회가 송상석 목사를 면직 처리한 일은 하루빨리 고쳐 놓아야 할 과제라고 본다. 그렇게 하는 것 만이 고인에 대한 올바른 도리이며 한맺힌 가족들의 상처를 조금이라도 풀어주는 일이 될 것이다.

 

차제에 송상석 목사 기념사업회가 벌이고 있는 사업들 중에 일차적인 목표를 송상석목사를 면직시킨 제24회 총회 결의를 번복하게 하는 것으로 그 방향을 잡아야 된다고 생각한다.

이 일은 결국 결자해지(結者解之)차원에서 총회가 풀어야만 되는 과제인 것이 확실하다.

송상석 목사가 세상을 떠나신지 44년, 총회가 특별재판국을 설치하여 면직을 시킨지 50년이 되었다. 반세기가 지나는동안 세대로 바뀌었고 주변의 상황도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지만 아직도 남아았는 이 상처와 앙금은 오늘을 사는 사람들이 반드시 풀고 가야될 역사적 책무임을 강조하고자 한다. 이렇게 함으로서 신앙의 정통과 생활의 순결을 표방해온 고신의 정통성과 권위를 회복하는것이며 또한 오고오는 후학들에게 자랑스러운 코람데오의 정신을 이어가게 하는 일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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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불편한 진실과 역사적 책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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