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6-03-12(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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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삼진 목사/미국 에반겔리아대 교수. 총회교육원장 역임, 저서로 《재미고신총회 40년》, 《고신교회 정신사 연구》 등이 있다. 《부산기독교 명감》 발굴

1945년 해방 당시 부산의 인구는 28만 명이었는데, 한국전쟁으로 피난민이 밀려오면서 급속도로 증가해 전쟁이 끝난 1954년에는 84만 명이 되었고, 1960년에는 116만 명이 되었으며 1964년에는 140만 명으로 급격히 늘어났다. 전쟁 후 많은 피난민들이 서울이나 고향으로 돌아갔지만, 돌아갈 곳이 없던 이북 출신들은 다수 부산에 정착했다. 그 시기의 부산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그림은 국제시장에서 볼 수 있다. 이북에서 집과 교회와 농토를 그대로 두고 떠나와 새로운 땅에서 새로운 삶을 개척해야 한 그들의 모습을 영화 〈국제시장〉은 잘 그려준다.


전쟁 직전 영도교회(현 제일영도교회) 한명동 목사는 교회에서 먼 거리 구역을 나누어 제2, 3, 4영도교회 설립 정책을 채택했는데, 한명동 목사도 부산남교회를 개척하면서 비슷한 시기에 네 교회가 분립되어 교회가 어려울 수 있었다. 그러나 교회 분립 후 1년이 채 되지 않아 한국전쟁이 일어나 수많은 피난민들이 부산으로 몰려왔고, 많은 사람들이 영도에 정착, 교회를 찾아오면서 그 자리가 다 채워졌다. 분립된 교회들도 빠르게 성장해, 제2영도교회는 2년 만에 교회당을 건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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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SFC 수양회 기념(1964)

 

60년 전, 1960년대 중반만해도 한국은 가난한 후진국이었다. 대도시에는 전기가 공급되었지만 전기가 정전을 반복했고, 대부분의 농어촌에는 전기가 공급되지 못했다. 북한은 수풍수력 발전소를 통해 전기가 생산되었고, 중공업이 발달해 1960년대 말까지 경제적인 수준이 남한보다 앞서 있었다. 19506월 한국전쟁이 일어나 3년 동안 온 나라가 처참한 전쟁으로 회복불능 상태가 되었고, 전쟁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고, 사회기반 시설도 복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1960년대의 한국사회는 역동적인 사회였다. 부정선거로 1960년에 4.19 학생혁명이 일어났고, 민주당 정권이 채 안정되기 전에 5.16 군사 쿠데타(1961)로 박정희 장군이 집권하면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강력하게 추진해 온 나라가 가난을 탈피하고자 하였다. 당시는 국민의 70% 이상이 농업, 임업, 수산업 등 1차 산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좋은 일자리가 없었던 때, 혁명정부는 미국의 지원을 거절당하고, 독일과 경제교류를 시작했다. 1962년 독일에 광부를 모집할 때 다수가 학력을 속이고 대학을 졸업한 사람들이 지원해 광부 5천 명을 뽑는데 약 4만 명이 지원하였고, 2천 명의 간호사를 뽑는데 2만 명이 지원할 정도였다. 그 시대에 산업화는 도시화를, 도시화는 교회성장을 이끌었다.


1964년에 서울에 구로공단이 조성되었고, 부산은 고무신과 섬유공장이 크게 번창하면서 농촌의 청년들이 도시로 밀려오기 시작했다. 오랜 세월 동안 오랫동안 찌들린 가난을 탈피하기 위해 새마을운동이 추진되고, 사람들은 ‘잘 살아보세’를 부르며 가난을 극복하고자 했다. 그 시절, 사람들은 보통 하루에 12시간씩 일을 했고, 근로기준법이 제정되었지만 그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열악한 노동현장에서 노동강도가 점차 가혹해지면서 ‘근로기준법 준수’를 내세운 전태일의 분신사건도 1972년에 일어났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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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60년 전 부산교계(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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