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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곤 목사] 다(多)문화·다(多)민족·통일(統一)시대의 한국교회 선교에 대한 제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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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11월 8일자 기사에 의하면 국내 거주 외국인 인구가 226만명을 기록했다고 합니다. 대한민국 전체 인구의 4.4% 수치입니다. 경제협력개발기구 OECD기준에 의하면 총 인구 중 외국인, 이민 2세, 귀화자 등 ‘이주배경인구’가 5%를 넘으면 다문화, 다인종 국가로 분류합니다. 2024년이 되면 외국인 또는 외국출신인구가 공식적으로 5%를 초과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즉, 2024년을 기점으로 대한민국은 더 이상 단일민족(One Nation) 국가가 아니라 공식적인 다문화국가, 다민족국가가 될 전망입니다.
이미 세계화(Globalization)의 추세에 따라 국기에 대한 맹세 문구도 바뀌었습니다. 1972년에 수정된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라는 문구가 2007년도 개정안에는 “자유롭고 정의로운 대한민국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로 바뀌었습니다. 단일민족사상에 근거한 ‘조국’과 ‘민족’이라는 표현대신에 ‘대한민국’으로 바뀐 것입니다. 이미 앞으로의 대한민국은 단일민족국가의 정체성 보다는 다양한 출신의 사람들이 하나의 국민이 되는 ‘대(大)한민국’을 전망했던 것입니다.
2008년 11월 미국 국가정보위원회(NIC)는 오는 2025년에 남북한이 통일될 가능성이 있다고 전망했습니다. 그러나 통일연구원(KINU) 2023 한반도 정세 전망 보고서에 따르면 여전히 남북관계가 개선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고 전망했습니다. 그러나 향후 5년안에, 북한체제가 무너지든지, 남북한이 통일이 되든지, 통일이 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불가항력적 상황에서 북한의 문이 열리게 되는 모습으로 변화가 일어날 것으로 전망하는 1998년 CIA 보고서의 ‘북한붕괴론’이 다시 조명을 받고 있습니다.
세계화시대 그리고 남북통일시대에 한국교회는 어떤 선교적 전략을 가지고 앞으로의 상황을 대비해야 할까요? 먼저 새터민 선교와 디아스포라 외국인 선교를 중심으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첫 번째로 새터민 선교입니다. 한국에도 다양한 나라의 사람들이 다양한 이유로 몰려들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우리가 먼저 주의깊게 살펴봐야 할 사람들은 탈북한 새터민들입니다. 헌법 3조에 의하면 북한의 주민들도 우리 대한민국 국민입니다. 그래서 탈북한 북한의 주민들에게도 대한민국정부는 합법적으로 대한민국 국민의 지위와 자격을 부여해 줍니다.
성경에는 성도가 가장 우선적으로 사랑을 실천해야 할 대상을 ‘형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요일3:10;4:20). 물론 여기에서 ‘형제’는 믿음으로 하나님안에서 한 가족이 된 ‘성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않으면 불신자보다 더 악하다는 바울사도의 경고도 함께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딤전5:8).
탈북민들은 같은 민족이며 같은 언어를 사용하고 있지만, 선교적 관점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고려인, 조선족들도 같은 동포들이지만 100여년이라는 세월동안 떨어져 지내다 보니 언어와 사상과 관습에 극복하기 어려운 차이점들이 많이 생겨납니다. 남북한도 다른 체제에서 70년 이상을 떨어져지내다 보니 같은 민족이라는 동질감보다는 이질감이 더 많아진 상황입니다. 또한 선교는 세상 나라의 사람들이 하나님나라로 들어오게 되는 영적(靈的)이민의 도구이기 때문에 언어와 문화적차이를 극복하기 위한 이해와 인내심이 더 많이 필요합니다.
2022년 6월 기준 한국으로 입국한 탈북민 수가 33,981명입니다. 사망자와 이민자를 제외하면 현재 약 2만 7천명의 탈북자가 거주 중인 것으로 추산됩니다. 한국교회는 이 탈북새터민들을 얼마나 잘 돌아보고 있을까요? 북한기독교총연합회가 발표한 '2023년 전국 탈북민교회 기본 현황'을 보면 올해 탈북민교회는 72개로 지난해보다 4곳 늘었습니다. 2000년 이전 2곳에 불과했던 남한 탈북민교회는 2000년대엔 18개, 2010년대 51개, 2020년대엔 19개가 들어섰습니다.
뉴코리아교회 정형신 목사는 “탈북민교회가 세워진 지역의 탈북민 거주 현황을 대조해보면 인구대비 교회 숫자는 제주도가 157명당 1개로 가장 높고, 경남이 1,082명당 1개로 가장 낮았다”고 말했습니다. 우리교회가 있는 부산, 경남지역엔 탈북민교회가 부산에 1개, 경남에 1개입니다. 탈북민선교에 대한 교회들의 관심은 증가하고 있으나 실제적으로 새터민 중심의 탈북민 선교센터와 교회가 필요한 상황입니다.
두 번째로 이주 외국인 선교입니다. 교통과 통신이 발달함에 따라 전세계가 일일(一日) 생활권이 되는 일이 가능해졌습니다. 아메리칸드림을 꿈꾸며 미국에 몰려든 많은 이민자들의 성공신화를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습니다. 때로는 전쟁이나 기근, 국가부도와 같은 불가항력적인 상황 때문에 베트남의 보트피플이나 우크라이나 난민들처럼 대규모 이민이 발생하기도 합니다.
부산 경남에 합법적으로 체류중인 외국인 인구가 20만명이 넘었습니다. 10년전에 5만명이 채 안되었으나 현재 한국인의 고령화와 저출산으로 인한 인구감소로 인해 외국인 인구가 급격하게 증가하고 있습니다. 대형교회 중심으로 영어예배나 한글학교를 운영하는 교회들이 있지만, 실제로 외국인들이 참여하는 예배는 거의 전무한 실정입니다.
일본의 고령화에 대해 이야기를 하지만, 더 심각한 것은 한국사회의 인구절벽입니다. 그 와중에 지속해서 인구가 늘어나는 계층이 다문화가정입니다. 2022년 통계청자료에 의하면 2022년 국제결혼이 17,000건으로 2021년보다 27.2% 증가했습니다. 국제결혼의 비중이 전체 커플의 11%를 넘어서고 있습니다. 이러한 다문화가정에 대한 정부의 교육, 경제적 지원등 여러 정책들이 있지만, 실제적으로 2세들의 교육과 국방의 의무, 정체성 문제에 대한 교회의 역할이 절실한 상황입니다.
외국인 노동자들의 장기체류도 증가하고 있습니다. 5년이상, 10년이상, 영구정착하는 외국인들이 증가하고 있습니다. 교회에서도 이들을 외국인이 아닌 대한민국에 함께 살아갈 이웃으로서의 인식을 가지고 선교적 전략을 세워야 합니다. 각 나라, 각 민족의 언어와 문화를 가진 현지 사역자, 지도자 양성 및 외국인 교회 개척, 설립이 필요합니다.
김해시에 네팔인 목사가 운영하는 외국인센터에 2-300명의 외국인들이 모이고 있습니다. 밀양에는 다카공동체같은 일부 모범적인 선교사례가 있긴 하지만, 수 많은 외국인들에게 각 나라와 각 민족의 언어로 복음을 증거하는 일에 지역 교회들의 더 많은 관심과 지원이 필요한 상황입니다.
마지막으로 다문화, 다민족, 통일시대의 디딤돌과 걸림돌 문제입니다. 한민족(韓民族)은 수 천년에 걸쳐 하나의 문화와 언어로 형성된 단일민족(單一民族)집단입니다. 현재 중국땅에서 수십개의 나라와 수백개의 민족들이 비교적 짧은 주기의 나라의 역사를 가지고 세워졌다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우리 조상들이 한 번 세운 나라는 수 백년, 거의 천년가까운 세월을 유지했습니다. 그것은 배타성이 아닌 다양성 속의 하나됨을 추구했기 때문입니다.
언어와 문화가 다른 다양한 나라의 외국인들이 우리나라에 들어와 있습니다. 로마에서는 로마의 법을 따라야 합니다. 비록 자신들의 출신과 언어와 문화가 다르다 하더라도 한국에서는 대한민국의 법을 따라야 할 뿐 아니라, 대한민국에 어느정도 함께 맞추어 살아야 할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법무부에서 운영하는 사회통합프로그램 같은 정부기관의 공신력있는 활동에도 참여해야 하지만, 민간외교차원에서 특히 교회에서 ‘한국어 학당’, ‘한글교실’ 같은 외국인을 위한 프로그램을 활성화 시켜야 합니다. 이것을 계기로 외국인들이 한국의 언어와 문화를 자연스럽게 익히도록 하고, 교회의 섬김과 헌신을 통한 선교적 열매도 기대해 볼 수 있습니다.
국제 외교는 상호주의 원칙이 적용됩니다. 국가간 등가인 것을 교환하거나 동일한 행동을 취하는 주의로 외교의 기본적 원리의 하나입니다. 이슬람권에서 자유롭게 복음을 전하거나 예배당을 합법적으로 세우는 일 등도 이에 해당합니다. 그러나 이슬람권에서는 법으로 기독교나 타종교 전도를 불법으로 금지시켜 놓았습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자신들의 기도할 권리, 선교할 권리, 모스크를 지을 권리등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상호호혜주의 원칙에 어긋납니다.
이러한 여러 이유들로 인해, 일본은 기독교 국가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상호 호혜주의 원칙을 지키지 않는 이슬람 이민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습니다. 한국교회도 무슬림들을 사랑하며 이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런 외교의 기본적인 원칙하에 이들을 우리 이웃으로 받아들이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경제적인 이유로 무분별하게 외국인들을 받아들이면 서구권에서 겪었던 사회적 갈등과 혼란을 우리도 동일하게 겪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그러나 또한 외국인들이 통일시대에 미치는 긍정적인 영향력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선교적으로 우리가 선교사를 보내기 힘든 지역에서 우리나라에 다양한 외국인들이 몰려오는 것은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공산권, 힌두교, 불교권, 이슬람권의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 또한 대한민국은 좌우(左右)대립, 동서(東西)대립등 지역감정과 지역불균형의 정치적, 경제적 갈등이 있습니다. 통일시대에 이 땅에 들어온 이민자와 외국인들로 인한 다극화 상황은 남한과 북한이라는 양극화의 긴장상태를 완화시켜줄 수 있는 좋은 대안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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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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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헌 목사] 학교를 포기하지 마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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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학교(브니엘예술고) 교문을 들어서면 돌비에 새겨진 교훈을 보게 된다. 우리 학교 교훈은 좀 특별하다. 무엇보다 아주 길다.
1. 나는 하나님과 사람과 자연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련다.
2. 나는 마음껏 자라며, 마음껏 생각하며, 마음껏 일하는 사람이 되련다.
3. 나는 웃는 자와 같이 웃고, 우는 자와 같이 우는 사람이 되련다.
4. 나는 조국과 인류가 나를 기다리고 있음을 잊지 않는다.
학생들은 교훈에 얼마나 관심을 기울이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우리 학교 교훈을 보는 순간 가슴이 뛰었다. 교훈은 그 학교의 정체성을 결정한다. 따라서 교훈을 통해 우리 학교가 어떤 정신에서 출발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60여 년의 시간이 흐르면서 여러 굴곡을 지나온 우리 학교지만, 다른 미션 스쿨과는 달리 아직도 종교라는 교과목을 통하여 신앙 교육을 하고 있고, 아이들이 싫어하든 좋아하든 상관없이 ‘중생회’(BORN AGAIN)라는 이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놀라운 것은 기독교에 대해 거의 안티 수준으로 부정적인 견해를 가진 학생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중생회 때마다 회심하는 아이들이 수십 명씩 나온다는 점이다. 자신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를 깨닫고,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며 항복하고 엎드리는 아이들을 통하여 하나님이 여전히 일하고 계시다는 것을 눈으로 보게 된다.
나는 학교에 부임한 첫날부터 지금까지, 매일 아침마다 책상 앞에 앉아서 이렇게 기도한다.
“하나님, 우리 브니엘이 이 땅에 있는 또 하나의 학교로 멈추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실 때에 유일한 학교로 사용되게 해 주십시오!”
나는 우리 학교 아이들이 학교의 교훈대로만 산다면 시대에 영향을 미치는 지도자가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우리 학교 학생뿐 아니라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이 우리 학교의 교훈대로만 살아도 이 땅에 미치는 영향력은 엄청날 것이다.
나는 다시 이 땅에 있는 미션 스쿨들이 설립 당시의 ‘처음 정신’으로 돌아가 신앙의 정체성을 다시 세워 나가기를 소망한다. 나는 아직 학교에 희망이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시대의 흐름상 종교 교육을 마음껏 할 수 있거나 학교에서 복음을 마음껏 전파할 수 있는 구조는 아니다. 이유는 학교의 생명은 진학의 결과에 달려 있기 때문에 종교교육이 본질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고등학교의 존재 목적이 단순히 대학 진학에만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학교는 진학만큼이나 중요한 기능이 있다. 바로 ‘삶의 변화’이다. 그리고 내가 모든 관심을 쏟는 것도 바로 이 부분이다. 나는 우리 학교에 온 아이들이 성적 향상과 함께, 다른 학교에서는 배우지 못하는 것을 가르쳐 주고 싶다. 그것은 ‘세상을 보는 눈’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이것이 기독교 세계관이이며 소명 의식이라는 것을 알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누구 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미션 스쿨에 속한 교사들만 해야 하는 일도 아니다. 한국 교회와 성도들이 같이 해야 한다. 과거 미션 스쿨들의 영광을 회복하고, 신앙의 전성기를 다시 맞이할 수 있도록 미션 스쿨을 위한 관심과 기도가 계속 이어져야 한다. 학원 선교는 학교만 하는 것이 아니라 지역 교회와 믿음의 가정이 같이 해야 한다.
나는 90퍼센트의 학생이 불행한 교육적 상황에서 90퍼센트 이상의 학생이 행복한 학교를 만들고 싶다. 다시 한 번 미션 스쿨의 영광을 회복하고 싶다.
최근 SNS 담벼락에 학교는 더 이상 소망이 없다는 목사님 한분의 글을 보았다. 아니다 학교가 소망이 없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문제이다. 교회가 학교를 위해서 어떤 수고를 했는지, 교회가 기독교사들을 위해서 어떤 격려와 힘이 되어 주었는지...비판만 하고 말로만 소망이 없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소망의 동산으로 만들 책임은 학교와 함께 교회에도 있는 것이다.
부탁드린다.
학교를 포기하지 마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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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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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창호 목사] 소금의 맛을 되찾아야 한국교회가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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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해 “너희는 세상의 소금(마5:13)”이라고 명했다. 세상에 감칠 맛을 만들어 내고 부패방지 역할을 요구하신 것이다. 8복을 설명하신 직후 천국시민 자격과 자질을 지닌 자들에게 강력하게 요구하신 역할이다. 반대부급 효과까지도 부언하셨다.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아무 쓸데없어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것이라고. 맛을 잃어버리면 쓸모없는 존재, 버려지는 존재, 사람들에게 밟히는 존재가 된다는 것이다. 이 말씀은 2천년 전 제자들에게 뿐 아니라, 오늘날 예수님의 제자임을 자처하는 교회와 기독교인들을 향한 말씀이라는 사실에 이의를 제기할 자가 없을 것이다.
한국갤럽이 2022년 2월부터 11월까지 만19세 이상 성인 남녀 9,182명을 직접 대면조사한 ‘2022 종교분포’ 결과를 목회데이터연구소가 분석해 발표한 내용에 의하면 기독교인 비율은 15%로 나타났다. 2012년도 23%, 2017년 20.3%, 2021년도 20%이던 것이 1년 사이에 갑자기 5%나 감소한 것이다. 한목협은 이들 중 기독교인라고 말하면서 교회에 출석하지 않는 가나안 성도를 29%로 보았는데, 이를 인구수로 환산하면 전체 기독교인 771만명 중 약 226만 명으로 추산되며, 따라서 실제 정기적으로 교회 출석하는 한국교회 교인은 545만 명 정도로 보는 것이 맞다고 했다.
주목해야 할 부분 중 하나는 기독교 인구 15% 가운데서 30대 청년이 15%, 20세 청년은 11%로서, 실제로 30대 이하는 26%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지난 7월에 발간한 한목협의 한국기독교리포트에 의하면 30대 이하 청년 48%가 코로나시기에 교회를 떠났으며, 그 가운데 42%는 교회로 다시 돌아갈 생각이 없다고 답했다. 다른 하나는 현재 자기가 출석하고 있는 교회가 이단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다니는 사람들이 6~12%%나 된다는 사실이다. 출석교인 545만명을 볼 때 약 48~66만여명이 이단교회에 속해 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사람들이 자기교회를 이단이라고 불러도 상관없다고 했다. 영적 분별력도 상실한 것이다. 이단교회 출석자들을 제외한다면 한국교회 출석교인은 실제로 500만명도 안될 수도 있다.
이렇게 급격하게 기독교인들이 줄어들게 된 원인은 무엇일까?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의 가장 큰 이유는 교회의 권위적인 문화가 싫다는 내용이었다. 교회 내에서 목사와 장로와 중직자들의 권위적인 모습과, 교인들의 배타적인 문화가 싫다는 것이다. 교회 내 청년들과 교회 밖 사람들에게 교회문화가 그렇게 보인다는 말이다. 청년들이 교회를 떠나면 한국교회의 미래가 사라지는 일이며, 세상이 교회를 불신하고 있으니 그들에게 어찌 복음을 전하겠는가?
문제는 소금이 제맛을 잃었기 때문이다. 인체생명을 유지시키는데 필요한 체내 소금양은 0.9%라고 한다. 생리식염수가 0.9%로 조정되는 이유이다. 음식이 부패되지 않을 정도의 소금 적정양은 5%라고 한다. 저장음식이 가능한 수준이다. 20%가 되면 거의 부패가 불가능한 수준이며, 80%상의 농도에서는 항구적으로 부패가 불가능하단다. 벌꿀이나 조청수준이다.
소금으로 칭해지는 한국기독교인이 15%라는 현실은 그래도 희망이 보이는 수준이다. 교회와 기독교인들은 세상으로부터 온유하고 겸손하다는 칭찬을 들어야만 한다. 교회지도자들은 권위적 태도를 과감히 내려놓아야 한다. 성도들은 순도 높은 말씀으로 분별력을 강화시키자. 교회의 경직되고 화석화된 배타적 문화는 바꾸자. 그래야 한국교회가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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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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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지일 교수] 연합인가, 야합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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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를 위한 연합’이 아니라 ‘사리사욕을 위한 야합’일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떨쳐낼 수 없다. 연합이라는 미명으로, 이단마저 수용하려는 연합기관의 통합 시도를 수긍하기 어렵고, 또한 연합의 기치를 전면에 내세우지만, 뒤로는 명분과 존중은 상실한 채, 독단과 독선으로 공익을 위한 연합사업을 주무르며 그르치는 행태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성령은 우리를 하나 되게 한다. 그런데 만약 연합이라는 미명으로 신앙고백의 본질을 훼손하거나, 교계의 분열을 조장한다면, 이는 ‘그리스도를 위한 연합’이 아니라 ‘사리사욕을 위한 야합’이다.
부산, 광주, 제주는 역사적으로 국내에서 교회연합운동이 가장 활성화된 곳들이다. 서울처럼 기독교 교세와 영향력이 강한 지역에서는 교파 및 교단 간 연합과 협력의 필요성이 그다지 절실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차별화된 역사적 경험을 공유하는 광주와 제주, 그리고 복음화율이 저조한 불교의 땅에서 고군분투하는 부산지역에서의 연대와 연합은 선택이 아니라 운명이다. 연합을 통해서만이 기독교의 존재감을 드러낼 수 있고, 사회적 순기능과 선한 영향력을 확대해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부산지역의 경우, WCC 문제로 지역 교계가 이견을 노출하고 갈등했던 상흔이 곳곳에 남아 여전히 작동하고 있다. 또한, 교계가 연합으로 주관하는 대표적인 사업이었던 광복동 트리 축제의 의미도 상처받고 퇴색되어, 이제는 이전의 위상을 유지하고 역할을 회복하기 어려운 형편이다. 게다가 부산지역 교계의 숙원사업이었던 기독교 역사박물관 건립 추진도 난항을 거듭하는 상황이라고 한다. 이런 소식들을 접할 때마다, 부산지역 기독교 연합운동에 대한 실망과 허탈함이 자꾸 스멀스멀 올라오는 것을 막을 길이 없다.
다행히 지역교회 후원과 기도로 운영되는 부산성시화 이단상담소의 초교파 이단 대처 활동에 참여하는 일은 가뭄 속의 단비와 같은 느낌이다. 퇴색되어 가는 연합정신의 중요성과 필요성을 지속적으로 일깨워주는 마치 선물과 같은 사역이다. 날로 심각해져 가는 이단사이비 문제를 생각하면, 교파와 교단을 초월한 부산지역의 초교파적인 이단 대처 노력이 고마울 뿐이다.
연합과 연대를 위해 필요한 것은 상호존중과 배려이다. 배려는 ‘내가 주고 싶은 것’이 아니라 ‘상대방에게 필요한 것’을 세밀하게 살펴 베푸는 행위이다. 존중과 배려의 마음은, 다가오는 추석 명절에 가족들과 한 상에 둘러앉아 맛있는 음식을 나누는 모습과 다르지 않다. 사는 곳도 다르고, 형편도 다르고, 생각도 다르지만, 함께 모여 음식을 나누고, 살아온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고, 우리보다 먼저 하나님 품에 안긴 사랑하는 가족들을 추모하며, 서로의 허물과 부족함을 용납하고 받아드리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때로는 의견 충돌이나 다툼이 있어도, 매년 다시 고향을 찾게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연합기관들의 명분 없는 경쟁과 다툼은 주변 사회의 냉소적인 비판을 초래하고, 반대로 선한 연대와 연합은 교회의 순기능적 정체성을 강화해주는 동시에, 복음의 본질 가운데 계속 머물 수 있도록 도와준다. ‘사리사욕을 위한 야합’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한 연합’을 위한 교계의 상호존중과 배려가 절실한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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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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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영광 대표] 오펜하이머의 원자폭탄을 압도하는 파괴적인 무기, 다름 아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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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북미에서 영화 <바비>가 커다란 흥행을 거두었다. 한국에서는 힘겹게 60만명의 관람객을 동원하는데 그쳤지만, 전세계 박스오피스에서 9월 4일 기준 13억 8100만 달러의 매출을 달성하며 올해 월드와이드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했다. 영화 <바비>는 정치적 올바름과 페미니즘과 관련된 메세지를 담고 있는 것으로 유명세를 떨치고 있다. 노골적으로 관객을 훈계하려 드는 장면으로 논란을 빚기도 했다. 이에 젠더 이데올로기의 문제를 꼬집은 다큐멘터리 <여자란 무엇인가? (What is a woman?)>로 유명한 맷 월시 감독은 영화 <바비>를 동시기에 상영중인 영화 <오펜하이머>와 비교하며 트위터에 “지금은 페미니즘이 원자폭탄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을 죽였다는 것을 기억하기 딱 좋은 때”라고 논평했다.
놀랍게도 맷 월시의 논평은 과장이 아니다. 페미니즘은 수많은 태아들을 죽였다. 빛을 보지도 못한 채 존귀하고 무고한 한 생명이 죽음을 맞이하는 것, 그것이 낙태의 현실이다. 태아는 수정 시점부터 지구상의 그 누구와도 구별되는 유일한 유전자를 가진다. 또 겨우 임신 6주차 즈음부터는 태아의 심장박동이 시작된다. 엄연한 생물학적 사실이다. 이러한 과학적 사실에 따라 미국의 많은 주는 심장박동이 확인된 이후 낙태를 금지하는 소위 심장박동법을 제정하여 태아를 살인하지 못하도록 법제화하고 있는 추세이다. 그러나 오늘도 페미니즘 진영은 ‘나의 몸은 내가 선택한다(My Body, My Choice)’라는 구호를 외치며, 태아는 세포덩어리일 뿐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심지어 후기 낙태의 합법화까지 밀어부치고 있는 모양새다. 개인의 자유와 권리, 물론 중요하지만 다른 사람의 생명을 빼앗으면서까지 자신의 권리를 주장할 수는 없다.
또한 페미니즘은 가족을 해체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차일드 트렌드(Child Trends)에 따르면 페미니즘이 등장하기 전인 1960년대 초에는 미국에서 한부모 가정에서 자라는 어린이가 9%에 불과했다. 하지만 2012년에는 그 수치가 30%까지 증가했다.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미국의 이혼율도 2배 이상 증가했다. 1세대 페미니즘이 여성인권 증진에 기여한 공로를 무시할 수는 없다. 하지만 공로가 있다고 무작정 미화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출발부터 불안했다. 페미니즘 운동은 우생학과 성해방을 주장하는 운동가들과 뒤엉키며 반가족적이고 반남성적인 기조가 강했다. 이후 2세대 페미니즘은 더욱 노골적으로 가족의 해체를 주장했다. 2세대 페미니스트들 중 한 명이었던 케이트 밀레는 그녀의 논문 ‘성 정치(Sexual Politics)’를 통해 “성 혁명은 전통적인 성적 억압의 종식을 요구한다. 특히 가부장적 일부일처 결혼을 가장 위협하는 동성애, 청소년기의 성관계, 혼전 및 혼외성관계 등을 금기시하는 것을 철폐하라”고 주장했다. 또한 그녀는 가족의 존재가 여성의 사회진출을 가로막는 장애물이라고 믿었다. 그녀를 포함한 대부분의 2세대 페미니스트들은 낙태의 열렬한 지지자이기도 했다.
현재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트랜스젠더리즘 역시 페미니즘의 탄생과 함께 등장하였다. 남성과 여성은 생식기만 다를 뿐 모든 면에서 실질적으로 동일하다고 처음으로 주장했던 사람들이 바로 페미니스트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모든 성역할은 일종의 고정관념이고 사회적으로 만들어졌다고 생각했다. 이것을 계승한 것이 바로 트랜스젠더 운동가들인 것이다. 페미니즘의 산물인 트랜스젠더리즘은 아이러니하게도 여성을 역차별하는 결과를 낳고 있다. 생물학적으로 남성인 트랜스젠더들이 여성 운동 대회에 참가해 메달을 휩쓸거나 탈의실, 화장실 등 여성의 공간을 침범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결국 페미니즘은 전 세계에 큰 파괴와 혼란을 가지고 왔다. 아래는 오펜하이머가 트리니티 핵실험에 대해 언급하며 힌두교 경전인 바가바드 기타의 한 구절을 인용한 것이다.
나는 이제 죽음이요, 세상의 파괴자가 되었다.
Now I am become Death, the destroyer of worlds
그러나 해당 대목에 더욱 잘 어울리는 것은 원자폭탄이 아닌 페미니즘인지 모른다. 대한민국도 페미니즘이라는 강력한 살상무기에 의해 초토화되고 있다. 특히 젊은 세대의 남녀갈등은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고, 결혼과 출산율 역시 바닥을 모른 채 감소하고 있다. 저출산과 대한민국 소멸의 해결책을 찾으려면 그 원인을 잘 파악해야 한다. 결정과 행동을 이끌어내는 것은 생각과 가치관이다. 남녀 갈등과 가정 해체를 부추기는 페미니즘 운동에 관심을 가지고 예의주시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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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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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만 교수] 행복한 사람이 되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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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들고 은퇴가 가까워지면서 여러 생각을 하게 된다. 지난 시간 생각하면 아쉽고 후회스러운 점 있지만 감사할 일들이 더 많다. 많이 모자란 사람이 그저 은혜로 여기까지 왔구나 싶다. 아울러 남은 시간 더 선하고 아름답게 살아보자고 다짐 한다. 그 가운데 요즘 들어 고대 헬레니즘 시대의 철학자 에피큐로스를 곧잘 생각한다.
에피큐로스(BC 341-BC 270)의 가르침은 대단히 직설적이고 분명하다. 곧 쾌락은 좋은 것이고, 삶의 목표는 가능한 즐겁고 행복하게 사는 데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인생의 기쁨과 쾌락을 저해하는 요소들을 우리 삶에서 떼어내려고 했다. 가령 신들이 있고 그들이 인간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생각은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한다. 신들의 심판과 저주를 생각하며 살면 누구도 행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렇게 조언한다. ‘신들이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설혹 있어도 세상일에 관여하지 않고 당신에게 관심도 없을 것이다. 그러니 신들 생각에 너무 휘둘리지 말고 각자 알아서 행복의 길을 찾으라.’ 더 나아가 그는 영혼도 내세도 부인한다. 이들은 몸이 죽으면 영혼(정신작용)도 끝나고 그것으로 끝이니 영혼이니 내세니 하는 데 골몰하여 지금 눈앞의 기쁨과 즐거움을 놓치지 말라고 조언한다.
에피큐로스의 이런 주장 때문에 그의 사유는 보통 쾌락주의(Hedonism)로 간주된다. 그런데 그가 말하는 쾌락주의는 두 가지 중요한 특징을 지닌다. 첫째, 이들이 말하는 쾌락은 모든 사람에게 개방되어 있는 쾌락이었다. 그는 귀족이나 부자 남성 같은 특권층 뿐 아니라 모든 사람이 행복을 누릴 권한이 있으며 사회 역시 이처럼 그 구성원 모두가 행복을 누릴 수 있도록 구성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또한 쾌락에도 등급이 있다고 보았다. 이들이 볼 때 맛있는 것을 먹고, 원하는 물건을 소유하며 마음에 드는 사람과 성관계를 맺는 것 역시 쾌락을 주지만 이런 종류의 쾌락은 일시적이고 열등한 쾌락이며 정말 중요한 것은 정신적이고 영적인 쾌락이다. 곧 이들은 몸의 고통이나 마음의 혼란으로부터 해방되어 평정을 누리는 것이 진정한 자유이고 진정한 쾌락이며 삶은 이런 높은 차원의 쾌락을 지향하며 살아야 한다고 가르쳤다.
필자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신도 없고 내세도 없다는 에피큐로스의 주장은 물론 동의하지 않는다. 하지만 인생은 행복하기 위해 있고, 행복에는 등급이 있으며 무엇보다도 누구도 차별 없이 모두 행복할 수 있어야 한다는 그의 주장에는 깊이 공감한다. 실상 주님이 이 땅에 오신 궁극적 이유가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딸답게 긍지있고 행복하게 살게 하려 하심 아닌가? 그래서 필자는 최근 들어 좀 더 행복하게 지낼 길은 무엇일까 생각하다가 취미 활동을 다시 시작했다. 기타를 다시 손에 잡았고 탁구를 치기 시작했다. 서툴지만 좋아하는 곡을 연주하고 마음 맞는 사람들과 함께 운동하고 친교를 나누니 즐겁고 행복하다. 그러면서 다짐한다. 먼저 내가 행복해야 행복한 설교, 행복한 강의를 할 수 있다고 말이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 역시 스스로 먼저 행복하여서 주변 사람들에게 행복을 전하는 분들이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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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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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현범목사] 정치화의 위기에 서 있는 한국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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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교수인 칼 트루먼은 동성애나 낙태 문제에 있어서는 보수적인 관점을 가지면서도 공평과 정의의 문제에 있어서 진보적인 관점을 견지하는 그리스도인들을 위해서 쓴 ‘진보 보수 기독교인’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내가 이 책을 쓰게 된 일차적인 이유는, 미국에서 복음주의 교회가 보수적 정당 정치와 기독교적 충성을 너무나 밀접하게 연결시킴으로써 복음주의 교회에 속한 많은 사람들, 특히 젊은이들이 교회를 등지는 위험을 초래하게 되었다는 나의 확신 때문이다.” 그가 지적하는바 오늘날 미국교회가 당면한 이런 문제는, 항상 미국교회를 본보기로 삼으려고 하는 한국교회에도 동일하게 나타나는 현상이다.
만약 어떤 그리스도인이 특정 정당의 정치를 기독교적인 것과 동일시하게 된다면, 그는 그 정당에 대한 지지를 주님께 대한 충성으로 간주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서 정치를 말하고 정치 행위를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정치가 아니라, 신앙 행위를 하고 있다고 착각할 것이다. 그가 목회자라면 설교 강단에서 정치 이야기하는 것을 하나님 말씀을 전한다고 생각하면서 교인들을 바른 신앙으로 일깨우고 있다고 확신할 것이다. 더 나아가 자기처럼 하지 않는 사람은 정치적 견해가 다르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에 문제가 있다고 여길 것이다. 이것이 정치를 종교화하는 것인데, 이런 정치의 종교화는 교회의 정치화로 귀결되기 마련이다.
그동안 정교분리를 강조하면서 정치를 신앙과 무관하게 여겼던 한국교회는 오늘날 큰 변화를 겪고 있다. 작년에 만났던 한 선교사에게서 들은 이야기가 그것을 실감하게 해준다. 몇 년 전만 해도 그가 한국을 방문하면 만나는 목회자마다 주로 목회나 선교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 그런데 이번에 와서 놀란 것은 그 목회자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열심히 정치 이야기를 하더라는 것이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그들 스스로가 정치를 말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담임목사들이 목회에 관해 정보를 나누는 단톡방에 어떤 목사가 정치 이야기를 자꾸 올렸다. 한 분이 참다못해 ‘이 방은 정치가 아니라 목회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곳입니다’라고 하자, 이어서 올라온 답글은 ‘나는 정치가 아니라 신앙에 관해 말하는 것입니다’였다. 이런 사고에서 더 이상 대화가 가능할까? 나는 단톡방에 정치 이야기를 올린 것보다 이런 사고방식이 더 심각한 문제라 생각했다. 우리는 지금 교회 안에 이런 왜곡된 확신에 사로잡힌 사람들을 많이 보게 된다.
이런 사람들이 주로 모인 다양한 기독교 연합회는 선거철만 되면 아무런 가책이나 문제의식 없이 특정 정당이나 후보를 지지하는 성명서를 기독교의 이름으로 신문에 올린다. 본인들은 이것을 기독교를 위한 사명이라 여길지 모르나, 실상은 교회를 타락시키는 행위임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허락한 국가 안에 살고 있기에 정치와 무관할 수 없고, 무관해서도 안 된다. 성경은 그리스도인이 세상 국가에 대해서 가져야 할 올바른 태도를 가르치고 있고, 정치적인 책임과 아울러 예언자적인 사명도 명하고 있다. 그런데 그 국가와 교회의 관계, 공적 신앙이라는 것이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기독교 역사에서 국가와의 관계를 바르게 세우지 못함으로 인해 교회가 타락하는 일들은 항상 반복되었다. 중세 가톨릭은 말할 나위도 없지만, 유럽제국의 개신교회들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특별히 독일교회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그들은 극우 정당인 나치가 집권했을 때 이것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면서 적극 환영했고, 히틀러를 하나님이 독일교회를 위해 보낸 지도자라고 추켜세우며 지지했다. “나치즘은 실증적인 기독교이고, 히틀러(나치)는 이제 하나님의 영과 의지가 독일 민족의 교회를 향하는 길이다.”(‘독일 신앙인의 고백’ 중) 이들은 정치를 기독교화하면서 정당에 대한 지지를 하나님에 대한 신앙으로 간주한 것이다. 독일교회가 보여준 이런 왜곡된 현상은 그 양상이 조금씩 다르지만 지금도 세계 도처에서 반복되고 있다. 트루먼은 미국교회의 문제 역시 정치를 너무 종교적으로 다루는 데 있다고 말한다.
정치는 선과 악의 싸움이 아니다. 아직 죄가 관영하는 세상에서 어떤 정치이념도 성경의 가르침과 동일시될 수 없고 오히려 그 진리 앞에서 다 상대적인 것에 불과하다. 좀 더 나은 정치와 좀 더 나쁜 정치가 있고 좀 더 나은 정치이념과 좀 더 못한 것이 있을 뿐이다. 민주 진영을 대표할만한 정치인 윈스턴 처칠은 민주주의는 나쁜 체제이지만 지금까지 시도해본 다른 어떤 체제보다 낫다고 했다. 그런 것이다.
이제 한국교회는 현실 정치에서 조금 물러나 거리를 둘 필요가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순전한 말씀에 의거해 모든 정당을 초월한 사회비판적인 본연의 자리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 특정 정당이나 이념을 기독교 진리와 너무 밀접하게 연결하는 것이야말로, 이와는 생각이 다른 사람들, 더 나아가 양식 있는 사람들을 교회에서 멀어지게 하는 일이다. 더 나아가 이런 교회의 정치화는 결국에 가서는 복음의 본질을 훼손하면서 교회를 타락시킨다는 사실을 깊이 숙고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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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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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영 목사] 노동의 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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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와 조선은 1,000년 이상 신분제도가 정착되어서 하층민이 상층의 신분을 갖는다는 것은 운명적으로 불가능했다. 조선시대 여성의 경우는 ‘남존여비’ 사상으로 사회 진출마저 막혀 있었다. 그러다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친일파가 득세하고 나라가 무너졌으니 관직이 삭탈 당하고 창씨개명까지 강요당하면서 서서히 신분제도가 허물어졌고, 6·25 전쟁으로 강토가 폐허가 되자 신분과 빈부격차라는 것은 해체되다시피 했다. 더구나 대한민국, 민(民)이 주인인 세상이 됐으니 신분제도는 박물관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국가재건과 함께 일자리 기회와 자식들 공부를 위하여 도시화가 촉진되면서 판잣집, 행상, 공사판 일용직, 파출부를 하면서도 도시로 몰려들었다. 땀, 노동, 노력, 공부를 하면 누구든지 신분을 상승시킬 수 있는 경쟁의 시대를 만들었다.
철학자 베르그송은 인간을 도구를 사용할 줄 아는 ‘호모 파베르’(Homo Faber)라고 정의하였다. 동물과는 달리 인간은 도구를 개발함으로 문화를 창조하며 발전시켰다는 뜻이다. 도구는 인간을 ‘노동하는 인간’으로 만들었다. 동물에게는 노동이 있겠지만 생존을 위한 노동이지 사람과 같은 보람과 의미, 재화 축적과 즐거움의 노동은 아니다.
크리스천들이 노동을 하나님의 징벌 혹은 인간의 죄의 댓가라고 보는데 이것은 잘못이다. 물론 선악과를 먹은 후에 창세기 3:16-19에 의하면 땅이 저주를 받아서 엉겅퀴와 가시를 내고 이마에 땀을 흘리고 해산의 고통이 따랐다. 그러나 인간 타락 이전에 인간을 지으신 후 창조주가 처음으로 주신 말씀은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 1:28)는 것이었다. 정복하고 다스리는 일(사명)을 주셨고, 창 2:15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며’라고 하였다. ‘경작’은 히브리어로 「아바드」(일하다, 봉사하다, 섬기다, 노동하다), ‘지키다’는 히브리어로 「샤마르」(보호하다, 지키다)라는 뜻이다.
이렇게 하나님은 범죄하기 전에 이미 인간에게 노동을 명하셨다. 범죄 이후에 그 노동이 괴롭고 힘들게 됐을 뿐이다. 현대의 무한경쟁 사회에서 크리스천들이 주중에 열심히 일하고 주일을 지키느라 수고가 많다. 그럼에도 우리는 일하는 기쁨, 일터가 있음에 감사, 노동의 가치와 신성, 나아가서 종교개혁자들이 외친 직업소명론(천직)을 깨달아 단순히 재화를 얻기 위하여 일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 5:17)는 말씀처럼, 노동 자체가 목적이 아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일하는 인생으로, 땀 흘리는 기쁨, 봉사하는 삶으로 살아가자. ‘네가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시 12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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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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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병학 목사] ‘신화적 폭력’에 맞서는 ‘신적 폭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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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은 1, 2, 3차원으로 분류되는데, ‘직접적인 힘으로 제압하는 권력’인 1차원적 권력과 ‘법이라는 간접적 힘’으로 통치하는 2차원적 권력, 그리고 ‘설득과 영향력으로 부지불식간에 작용’하는 3차원적 권력이 그것이다.” 『3차원적 권력론』(나남, 1992)이라는 책에서 영국의 정치 이론가인 스티븐 룩스 교수의 권력에 관한 정의이다. 사실 권력이란, ‘다른 사람의 의사에 관계없이 자신의 의사를 관철시킬 수 있는 힘’이기도 하며, ‘다양한 의견을 모아 하나로 일치시키기 위해 나타난 것’으로 양면성을 보여준다. 이렇게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우리 일상생활 주변에 ‘다양하게/극단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바로 권력이다. 우리는 ‘군부독재’와 ‘검찰 지배’, 그리고 ‘언론의 편향성’으로 이 3가지 권력을 맛보았고 경험하고 있다.
그렇다면 극단적으로 권력이 오용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특히 불의한 권력의 폭력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가? 독일의 문예비평가 발터 벤야민은 『폭력이란 무엇인가』(난장이, 2011)에서 ‘신적 폭력’과 ‘신화적 폭력’을 구분하며 신적 폭력을 지지하는데, “신적 폭력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그래야 모호함을 피할 수 있다.”라고 말한다. 여기서 신화적 폭력의 ‘신화’는 그리스 신화를 가리키고, 신적 폭력의 ‘신’은 유대교의 신, 곧 여호와 하나님을 가리킨다.
먼저 신화적 폭력을 설명하기 위해 베냐민은 그리스 신화 속의 ‘니오베 이야기’를 사례로 든다. 테베의 왕비 니오베는 아들, 딸 각각 일곱 명을 두었고 그들을 무척 자랑스러워했다. 따라서 니오베는 자신이 레토(Leto) 여신보다 더 훌륭하다고 뽐낸 불경죄를 저질렀다. 아들 아폴론과 딸 아르테미스 한 명씩밖에 없었던 레토는 화가 나서 두 자녀로 하여금 니오베의 아들, 딸들을 죽이게 하였다. 결국 자식을 모두 잃은 니오베는 울며 세월을 보내다 돌이 되고 말았다는 신화인데, 여기서 레토의 분노가 바로 신화적 폭력이다. 법 정립적이고 경계 설정의 폭력이다.
반면, 베냐민이 예를 든 신적 폭력의 사례는 구약 민수기의 ‘고라의 반역’이다. 고라는 모세의 사촌이었으나, 지휘관 이백오십 명과 함께 모세의 지도력에 반기를 들었다. 모세가 교만하고 독선적이라는 것이 반기의 명분이었으나, 사실은 같은 레위 지파 후손으로서 모세에게만 영광이 돌아가는 데 대한 질투가 숨어 있었다. 이것은 모세에게 권위를 준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반역이다. 따라서 모세가 공정한 심판을 요청하자, 여호와는 땅을 가르고 불길을 솟아 오르게 해 고라의 무리를 한꺼번에 소멸했다(민 16:32-35). 이것이 신적 폭력이다.
그렇다면 ‘신화적 폭력’과 ‘신적 폭력’의 차이는 무엇인가? 베냐민은 “신화적 폭력이 법 정립적이라면, 신적 폭력은 법 파괴적이고, 신화적 폭력이 경계들을 설정한다면, 신적 폭력은 경계를 파괴한다.”라고 말한다. 곧, 지배를 구축하고 유지하려는 법 정립적이고 경계 설정의 폭력인 데 반해, 신적 폭력은 그런 법을 파괴하고 해체하는 폭력인 것이다. 따라서 베냐민은 이 신적 폭력을 ‘순수한 폭력’이라고 옹호하였다. 신화적 폭력이 생명체를 희생시킴으로 자족하지만, 신적 폭력은 생명체를 위해, 생명체를 구현하기 위해 생명을 희생시키기 때문이다. 오늘 신화적 폭력으로 변질된 1, 2, 3차원 권력의 폭력에 맞서 그리스도인의 신적 폭력을 묻는 우리 시대가 참 비극적이고 서글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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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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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길원 목사] 내면의 배고픔, ‘외로움과 고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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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23일은 유엔이 정한 ‘국제 과부(寡婦)의 날’이다. 국제 과부의 날은 2010년 유엔이 정했다. 인도 펀잡 지방 출신 기업인 라즈 룸바(Raj Loomba, 1943~)가 자신의 어머니를 기려 만들었다. 과부였던 어머니는 자신을 비롯 7남매를 길러냈다. 그가 설립한 ‘룸바 재단’에 따르면 설립 당시인 2015년 기준, 전 세계 과부가 2억 5,900만 명이었다. 그들의 손에 의해 5억 8,500만 명의 자녀들이 양육을 받았다. 그들 과부 중 1억 1,500만 명이 가난 때문에 생존의 위협을 당한다.
이들 과부를 넘어서 지구촌은 또 다른 가난, ‘내면의 배고픔(외로움과 고립)’을 겪고 있다. 고령층이 그들이다. 거기에다 1인 가구도 있다. 우리나라만 해도 30% 가까운 사람들이 항상 또는 자주 외로움을 느낀다는 통계가 여럿이다. 세상은 초연결사회로 치닫고 있지만 여전히 모든 인간은 ‘외딴섬’처럼 살아가고 있다. 알베르 코엔은 장편소설〈내 어머니의 책>의 첫 문장을 이렇게 쓴다. “사람은 누구나 외로운 존재이고, 남의 일에는 아랑곳하지 않으며, 저마다의 괴로움은 황량하고 쓸쓸한 섬과도 같다.”
미국 공중보건 서비스단의 보고에 의하면 외로움과 고립에 시달리는 이들이 질병에 걸릴 확률이 매우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심장병에 걸릴 확률이 29% 더 높다. 뇌졸중은 32%, 치매는 50% 더 크다. 노화 속도는 1년 8개월 더 빨랐고 인지능력은 20% 더 빨리 저하됐다. 보고서 작성을 주도한 비벡 머시 단장은 외로움이 하루 담배 15개비만큼 해롭다며 외로움과 고립을 공중보건 정책의 우선순위에 놓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지금까지 외로움과 고립으로 인한 ‘내면의 배고픔’은 개인의 몫으로 치부되었다. 하지만 외로움으로 인한 치매 등 건강 문제가 증가되었다. 업무 효율 저하를 넘어서 자살 및 고독사가 증가하면서 사회문제로 대두되었다. 국가 차원의 국민 돌봄이 필요해졌다.
영국은 2018년 1월, 세계 최초로 ‘외로움부 장관(Minister for Loneliness)’직을 신설했다. 인간이 가진 고독과 소외에서 비롯되는 외로움을 줄이는 일이 의료비는 물론 교통사고와 범죄를 줄인다. 자살 예방의 최선책이 된다. 2021년 일본은 ‘고독·고립 담당 장관’을 임명하고 총리관저 내각관방에 고독·고립 대책실을 출범시켰다.
외로움 시장이 커지면서 반려 로봇 상용화도 눈앞에 다가와 있다. 이미 많은 과학자들이 ‘궁극의 공감기계’라 불리는 VR로 세상을 더 낫게 만드는 방법을 연구해왔다. 한마디로 하면 세상은 ‘외로움’과 전쟁 중이다. 반려동물이 늘고 있다. 위로에 대한 갈망이다. 위로를 준 반려동물도 천국에 같이 갈 수 있느냐는 질문과 상담이 늘었다고 한다. 이런 세태 속에서 교회는 이들의 외로움과 고립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일까? 믿음 없는 소리라고만 치부하고 애써 외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구약성경 신명기에서는 ‘3대 약자’가 자주 언급된다. ‘고아’, ‘과부’, ‘나그네’가 그들이다. 이들뿐만 아니라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학대하지 말고 돌봐야 할 것을 강조한다. 율법서만이 아니다. 예언자들 메시지에도 이런 정신은 자주 언급된다. 4계명의 안식일 법은 대표적인 약자 보호법이나 다를 바 없다. 요즘 말로 하면 ‘약자와의 동행’이다. 신약성경으로 눈길을 돌리면 과부들에게도 적극적인 주문을 한다. “참 과부로서 외로운 자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 주야로 항상 간구와 기도를 하거니와”(딤전 5:5)
영국의 경제학자 노리나 허츠는 외로움을 ‘몸과 마음에 깊은 상흔을 남기는 질병’으로 정의했다. 하나님은 이 질병에 대해 어떤 차방을 가지고 계신 걸까?
“하나님은 외로운 사람들을 위해 가정을 이루시고 사슬에 묶인 사람들을 풀어 주신다.”(시 68:6, 우리말) 개역개정은 “고독한 자들은 ‘가족’과 함께 살게 하시며”로 번역했다.
가정의 달이다. ‘가정을 교회처럼, 교회를 가정처럼’이 헛구호가 되지 않도록 저들의 목소리에 귀기울이자. 저들의 요구는 딱 하나다.
“외로운 영혼을 품어다오.”
오늘따라 시편 기자의 간구가 가슴을 울린다.
“주님, 나를 돌아다보시고, 나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십시오. 나는 외롭고 괴롭습니다.
원수가 내 마음에 고통을 더하니, 나를 이 아픔에서 건져 주십시오.
내 괴로움과 근심을 살펴 주십시오.”(시 25:16~22, 표준새번역)
어린이 주일, 어버이 주일, 부부 주일... 교회의 시간이 다시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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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5-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