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1-07-30(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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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병학 목사]위치지정적 세계관
    현대 종교학계의 큰 별인 시카고 대학의 종교학자 조너선 스미스는 『자리 잡기: 의례 내의 이론을 찾아서』(이학사, 2009)에서 ‘위치지정적 세계관(locative worldview)’이라는 말을 소개합니다. 곧,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정해진 자기 자리’에 있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경계를 넘거나, 권위에 도전하거나, 나아가 공동체에서 배제된 ‘이상한 존재’들이 ‘정상적인 사람들’의 세상 속으로 들어오는 것을 반대합니다. 왜냐하면 기존의 질서를 해치는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공동체 내의 질서는 ‘신적인 권위’에 의해 정해진 성스러운 것입니다. 만약 이 질서가 무너져 혼란이 일어나기 시작하면 공동체가 무너지고, 나아가 온 세상이, 온 우주가 무너지기 때문에 모든 것은 정해진 자기 자리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스미스는 자리에 대한 인간의 이해가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 사회적인 의미를 지닌다는 것을 밝혀냈습니다. 그리고 이 사회적인 의미는, 아주 중요한데 권력의 문제로 귀결됩니다. 중요한 것은 이렇게 표면적으로는 종교적이지만 내적으로는 권력에 의해 구성된 자리의 이미지는 이데올로기적인 것이어서, 현실과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가령 스미스가 잘 분석하였듯이, 성경 에스겔서에 나오는 제사장 에스겔의 환상에서 묘사되는 도시와 사원(예루살렘 성전)은, 그 당시 제사장들이 추구한 권력의 공간 배치를 형상화한 꿈의 사원이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바빌로니아 사원 텍스트, 위네바고족(북아메리카 인디언)의 부족 세계관 등은 종전의 연구에서라면(엘리아데의 ‘성스러움’의 관점) 우주의 질서를 보여주는 종교적이고 이상적인 세계관으로 언급되었겠지만, 스미스는 이들의 세계관이 보여주는 것은 통치자의 권력의 언어로 이루어진 것이지, 민중의 현실에서는 해당되지 않는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따라서 스미스는 책의 부제와 같이 ‘의례 내의 이론’을 찾아냅니다. 그것은 곧 ‘의례 내의 자리들 간에는 구조주의적인 관계성’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의례 내에 존재하는 체계성’, ‘언어적인 구조’를 뜻합니다. 스미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자리들 간에 맺어진 체계성은 옮겨질 수 있고, 다른 말로 번역할 수 있다.” 이러한 구조주의적인 논의를 바탕으로 스미스는 종교사에 대한 기발한 해석을 제시합니다. 예를 들어 유대교의 ‘예루살렘 성지의 체계’라는 공간적 구조가 기독교로 옮겨오면서 ‘전례의 교회력’이라는 시간적인 구조로 ‘번역’되었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인들과 유대인들이 현실적으로 예루살렘이라는 성스러운 공간에 접근 불가능하게 되었을 때, 그들은 예루살렘 내에 존재하던 체계성을 ‘옮겨 오는’ 의례적 해결책을 모색한 것입니다. 그 결과 유대교는 ‘미슈나(Mishnah)’라는 규범의 체계가, 기독교에서는 ‘교회력’이라는 시간적 체계가 발달했다는 것이 스미스의 주장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변화된 시대에 기독교의 교회력은 어떻게 어디로 옮겨져야 할까요? 유대교처럼 규범적 체계로 번역되고 옮겨져야 할까요? 제가 보기에는 ‘위드-코로나 시대’에 온-오프, All-라인 공간과 규범 체계로 번역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위치지정적 세계관’에서 ‘위치지정’을 확장시켜야 할 것입니다. 하늘/땅, 정상/비정상, 남/녀, 인간/동물, 어른/어린이, 나이든 세대/젊은 세대, 동/서 할 것 없이 모두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통일되어야 할 것입니다. 에베소에 보내는 편지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엡 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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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1-07-23
  • [이선복 교수]교회와 세금, 그리고 국가의 상(像)
    2021년 국회예산정책처 자료에 의하면 우리나라의 지난 한해 조세수입은 373조원으로 전년대비 2조원이 증가하여 별 특이점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내용을 조금 더 보면 법인세(-17조원)와 부가가치세(-6조원)가 감소하고, 소득세(+10조원)와 지방세(+6조원)가 이를 메꾸어 주는 바람직하지 못한 구조로 진행되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기업의 이익이나 재화거래 등 생산성과 연관된 조세수입은 줄고, 국민 개인이 부담해야 하는 조세만 더 증가하였기 때문이다. 세금(tax)이란 국가나 지방공공단체가 필요한 재원 등을 충당하기 위해 국민의 재산과 소득, 소비로부터 특별한 보상 없이 조세를 강제적으로 징수하는 절차를 말한다. 필자는 1개월 전 현행 세법의 구조를 살펴보고, 교회 세금과의 관계를 정리해 학회에 발표한 적이 있다. 세법의 내용이 복잡하고 방대하여, 교회 목회자나 실무자가 충분히 숙지하기가 어렵다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세금은 국세와 지방세로 분류된다. 교회의 경우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기관이 아니므로, 고유목적에 따라 활동을 하는 경우 헌금 등에 따른 소득세와 법인세가 면제된다. 그러나 반대로 수익을 창출하는 행위를 하거나, 소유하는 토지, 건물을 3년 이상 고유목적에 사용하지 않고 다른 용도로 사용하거나 매각하는 경우 취득세와 등록세를 소급해 납부해야 함은 물론 양도소득세까지 물어야 한다. 갑자기 세금 폭탄을 맞고, 교회가 법원에서 충돌하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교회가 지역의 이웃들과 소통을 나누기 위해 시작한 카페나 스포츠 시설 또는 학사관 등이 선한 취지와 다르게 조세 문제에서 논쟁이 대상이 될 수 있음을 주의할 필요가 있다. 또 현행 세법은 사택에 대하여 담임목사 사택 1건만 면세를 허용하고, 부목사 사택 또는 관리인이 교회내 시설에 거주할 경우에도 고유목적 활동에서 벗어난 것으로 간주해 조세를 부과하고 있다. 영어선교원, 공원묘지도 마찬가지이다. 나아가 부가가치세의 경우는 더욱 그렇다. 재화 구입시에 지불한 매입세액에서 매출세액을 차감해 납세액을 산출하나, 교회의 경우 매출세액이 대부분 없고 매입세액을 납부해야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특히 교회 차량의 경우 취득세, 등록세, 부가가치세, 재산세 모두 납부할 필요가 있다. 교회는 세상을 향해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한다. 누가복음 20장에 예수님은 세금에 대해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하셨다. 서기관들의 질문 의도를 넘어 세상 질서에 대해서도 존중하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도 교회 지도자와 실무담당자는 세금에 대해 충분히 이해를 하고, 성실히 납세의무를 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국가는 국가대로 배려의 노력이 필요하다. 최근 우리나라 조세부담률이 20.0%를 넘어 OECD 평균에 가까이 가려하고 있다.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에 따른 전국민재난 지원금을 포함, 기본소득이 정책으로 정해질 경우 놀라운 수치로 조세부담률이 상승할 것이다. 그러나 국가의 경제정책은 항상 시장의 상황을 분석하고 배려할 줄 알아야 한다. 구약 아모스서는 나라가 부패한 가운데 얼마나 백성을 과도하게 착취하였는가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신약의 삭개오 또한 부패한 세리로 묘사되고 있다. 우리의 상황은 어떠한가? 국가는 국민의 상황을 배려하고 살필 수 있어야 한다. 또 교회의 경우에도 일정 부분 조세혜택을 부여하고 있는 것은 맞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국가가 지나친 규제를 통해 교회가 할 수 있는 진정한 의미의 선한 사역들을 방해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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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1-07-09
  • [이성구 목사]한국교회, 이제 다시 거대담론을 이끌어야 한다.
    코로나 팬데믹도 바꾸지 못하는 함정이 되어버린 이념 코로나19 사태가 일 년을 훨씬 넘어서면서 한국사회와 교회는 이전에 경험하지 못한 상황을 극복하느라 안간힘을 쓰고 있다. 집권세력은 어떻게 하든 국민들을 안심시켜야 하는 상황이라 자화자찬이라는 비난을 감수하면서라도 긍정적인 면을 부각시키려 안간힘을 쓰고 있지만 정부의 정책을 가차 없이 비판하는 사람들이 부지기수다. 사상과 이념의 문제로 귀결되면서 압도적인 지지를 자랑하던 정부와 집권당이 쩔쩔매고 있다. 우왕좌왕하면서도 정작 청와대는 자기 이념에 매몰된 모습이다. 코로나에 눌려버린 교회 이런 정치현장의 혼돈과 함께 코로나 감염 사태에 교회에서의 모임이 자주 관련되면서 한국교회 전체가 엄청난 압력을 받아왔고, 1년 이상 예배가 정상화되지 않으면서 긴장감이 높아지고 있다. 교회학교의 문이 닫히면서 불신가정의 아이들은 씨가 말라버렸고, 교회도 새신자를 거의 볼 수 없게 되었다. 이 상황이 향후 한국교회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는 가늠조차 할 수 없다. 예배의 위기는 신앙의 위기로 치달을 수밖에 없고, 결국은 얼마 지나지 않아 교회를 흔드는 요소가 될 수 있다. 출산율감소, 세속화의 가속 등으로 코로나 이전에 이미 시작된 주일학교의 위기는 코로나로 인하여 돌이킬 수 없는 위험요소가 될 전망이다. 다시 거대담론으로 강력한 도전을 시작해야 한다 이쯤에서 코로나로 흐트러진 한국 사회 속에서 오늘 교회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리는 코로나가 닥치기 전부터 문 대통령이 선포한 대로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세상’에 살게 되면서 세상이 제기하는 논제에 그냥 함몰되어 허우적거린 느낌이다. 둑이 터져버린 한국 사회와 교회의 혼란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를 깊이 있게 분석하여 제대로 그 원인을 들추어내고 처방을 제시하는 소망의 소리가 되지 못하였다. 우리 사회와 교회가 지향해 가야 할 방향을 거대담론으로 풀어내는 책임을 다하지 못하였다. 136년 전 복음이 처음 전파되고 교회가 세워지기 시작하면서 교회는 어둠의 땅을 진정한 소망과 빛의 세계로 탈바꿈하는 구원과 해방의 대역사를 이끌었다. 일제강점기인 1919년 교회가 3월 만세운동을 주도하면서 복음이 민족의 진정한 해방과 구원의 길이라는 사실을 역사 앞에 몸으로 증명하였다. 건국에 이은 6.25 전쟁과 그 극복과정에서, 이승만 박사와 같은 발군의 실력을 가진 지도자들을 배출한 한국교회가 공산주의를 배격하고 자유 민주주의 국가를 건설이라는 민족적 담론을 구체화는 데 앞장서 왔다. 이제 다시 한국교회는 심하게 멍들어있는 우리 사회에 새로운 희망을 보여줄 거대담론을 생산해 내야 한다. 여기서 1908년 개인적인 영적 각성을 계기로 사회변화를 추구한 스위스 출신 미국의 루터교회 목사인 프랭크 부크만(Frank Buchman)을 생각해 보자. 그의 영적 지도력은 1921년 ‘Oxford Group'이라는 변혁 운동 그룹을 탄생시켰고, 1930년대 중반에는 ’Moral Re-Armament(MRA) 도덕재무장운동‘을 일으키기에 이르렀다. 2차 세계대전 후 군사재무장을 서두르는 서구세계를 향하여 ’도덕적 영적 재무장‘을 우선해야 한다는 운동을 세차게 펼쳐 많은 영향을 끼쳤고, 1960~70년대는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 평화운동을 강력하게 펼치기도 하였다. 지금은 그 영향력이 미미해지기는 하지만 여전히 곳곳에서 ’Initiatives of Change(IofC) 변화 주도‘라는 이름으로 움직이고 있다. “hate-free, fear-free, greed-free world'” 미움, 두려움, 탐욕에서 자유로운 세상과 같은 거대담론으로 한 시대 변화를 추구한 MRA 운동이 명칭을 바꾸어 가며 사회변혁을 위한 거대담론을 이어가고 있다. 여전히 미움 다툼 두려움 탐욕으로 가득 찬 오늘의 한국사회를 바꾸어내야 한다. 전체주의, 무조건 평등주의, 개인에게 주어진 은사의 개발이 아니라 청년시절부터 퍼주기 복지에 익숙하게 만드는 세상은 성경이 보여주는 하나님의 나라 모습이 아니다. ’믿음 소망 사랑‘의 세계. 서로를 한없이 신뢰하고, 갈등과 탐욕의 세상을 훌쩍 뛰어넘는 소망의 나라를 이루며, 완전한 사랑으로 하나 되는 에덴동산. 그런 나라를 향한 꿈을 보여주고 실천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교회. 그런 교회를 세우는 거대 담론으로 강력한 도전을 감행하기를 소원한다.
    • 오피니언
    • 정론
    2021-06-25
  • [안동철 목사]성도의 품격
    2012년 한 방송사를 통해 <신사의 품격>이라는 드라마가 방송되어 큰 인기를 얻었다. 그래서일까? 드라마가 방송된 이후 많은 패러디가 나왔다. 아빠의 품격, 엄마의 품격, 숙녀의 품격, 시험의 품격, 교사의 품격, 학생의 품격 등. ‘품격’은 어디에 붙여도 좋은 말을 만들 수 있다. 그럼 이런 말은 어떤가? ‘성도의 품격’. 성도는 당연히 품격을 갖추어야 하기에 아주 멋진 말이다. 이때 성도가 마땅히 갖추어야 할 품격은 무엇일까? 사도 바울은 말한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성도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아야 한다.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어야 한다(엡 4:22-24). 최근 한 교계 지도자와 이런저런 대화를 하다가 놀라운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한 지역 교회 지도자 그룹 단체 대화방에서 코로나 19 백신을 맞아서는 안 된다는 글이 올라왔다는 것이다. 백신의 안전성 문제 때문에 이런 글을 올렸다면 그래도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백신을 거부하는 이유를 백신 속에 사람을 제어하는 성분이 들어있고, 그래서 이것을 맞게 되면 백신을 주입한 집단에 의해 통제된다는 것이었다. 안타까운 것은 이런 글에 많은 분이 맞장구를 치며 백신 접종을 거부하는 운동을 벌이고 있다는 것이었다. 단체 단톡방에서 주고받는 대화의 문제의 심각성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조금만 확인해 보면 거짓인 정보를 사람들이 퍼 나른다. 언젠가는 중동 지역에서 이슬람 과격분자가 기독교인들을 처형한다고 급히 중보기도를 부탁하는 문자가 날라왔다. 너무 안타까운 소식에 많은 사람에게 그 소식을 전하고 기도를 요청했는데 뒤에 확인해 보니 몇 년 전 내용이었고, 그것도 각색하여 보낸 거짓 글이었다. 기도와 거짓이 콜라보 되는 정말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특별히 성도들의 단체 대화방에 자신의 정치적인 주장을 올리는 것은 성도의 품격을 무너뜨리는 행동이다. 자신은 그것이 옳다는 신념으로 올리는 것이겠지만 이것은 반대편에 선 사람을 배려하지 않는 무례한 행동이다. 어차피 우리 사회는 51:49의 생각으로 나눠진 사회이지 않은가? 한쪽 편에 선 정치적인 생각을 주장하게 되면 반대편에 선 사람들은 불쾌하게 되고, 결국 갈등이 일어나게 된다. 성도가 불화할 때 누가 가장 좋아할 것인가? 우리의 원수 마귀이지 않은가? 성도의 품격을 상실한 또 다른 현장들도 있다. 어떤 교계 모임에 초대되어 간 적이 있다. 그날 설교한 분은 성경 한 구절 읽고는 본문의 말씀과는 전혀 상관없는 극단적 한쪽 편 입장의 정치 이야기를 거짓된 정보를 섞어가며 설교 시간 내내 말하는 것이었다. 자신의 반대편에 선 사람들을 향해서는 막말과 욕설을 섞어가면서 말이다. 몇 분이 견디지 못하고 결국 그 자리를 이탈했다. 도저히 성도의 품격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하나님의 백성인 성도는 성도다운 품격을 지켜야 한다. 진리의 영이신 성령님을 모신 성도의 입에서 거짓이라니! 마귀의 별명이 거짓의 아비이지 않은가? (요 8:44) 이솝 우화에서 늑대가 나타났다고 계속해서 거짓말을 하다가 실제로 늑대가 나타났을 때 당하게 되는 결과를 알지 않는가? 특별히 교회 지도자의 입을 통해 나온 거짓된 말은 하나님 말씀의 권위를 실추시키고 만다. 교회의 지도력을 상실하게 만들고, 결국 세상 사람들의 조롱거리가 되고 만다. 성도와 교회는 죽음의 말을 거부하고 살리는 말을 해야 한다. 성도의 품격은 진리와 생명으로 나타나야 한다. 죽음의 말을 거부하고 진리에 기반한 생명을 노래해야 한다. 그리고 주님의 평화를 이루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사도 바울이 한 말을 유념하자.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롬 12:18).]
    • 오피니언
    • 정론
    2021-06-11
  • [김영일 목사]적어도 거짓은 ‘정도(正道)’ 는 아니다!
    ‘우리 사회에 과연 정도(正道)란 것이 있는가?’ 라는 질문 앞에, 필자는 한참 동안 멍하게 서 있었다. 정도는 있다. 그런데 그 정도를 가는 사람과 상황은 찾아보기 힘든 시대임은 분명한 것으로 보인다. 이 사회가 이렇게 몸살을 앓고 있는 것을 보면 분명 그렇게 보인다. 신앙의 길에도 정도가 있어야 하는데, 이미 그 정도는 찾아보기 쉽지 않는 상황이 되었다. 오히려 절대로 가지 말아야 할 길로서의 ‘금도(禁道)’를 자연스럽게 넘나드는 것이, 지혜인 양 되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답답함을 느낄 때가 종종 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정하신 원리가 있다. 그런 원리들은 신앙과 불신앙에 상관없이 인간세상의 근본원리이기 때문에 반드시 지켜야 한다. 가령 창조의 질서는 인간이 그것을 순리로 받아들여 끝까지 지킬 때, 그것이 인간 스스로에게 가장 바른 길이 된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그것을 어길 때 인간의 세상에 스스로 재앙을 초래하게 될 수도 있다. 하나님이 정하신 그 원리, 인간이 반드시 걸어야 할 그 길, 그 정도(正道)를 걸어가야 참 복을 누릴 수 있음을 절대 잊어서는 안 된다. 최근 들어 소위 지도자들이라는 입법부에 속한 자들 중에 이런 하나님의 창조의 원리를 거스르는 악법들을 제정하려는 시도들을, 여러 차례 거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적으로 시도하고 있으며, 힘있는 자들에 의해 제정될 가능성을 많이 갖고 있다. 사회학적으로, 의학적으로도 분명한 문제를 지니고 있음을 알면서도, 소수의 인권을 보호한다는 주장을 펼치면서 이를 시도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주장은 역시 정도를 거스르는 주장이다. ‘정도’ 의 피해자들이라면, 그 피해를 인정해주면서 그들이 그 정도를 걷도록 도와주는 것이 옳은 방편인데, 정도가 아닌 자들의 인권을 주장하면 금도를 정도로 받아들이는 주장은 틀린 주장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속해 있는 그 어떤 영역에서든지 바람직한 방향으로서의 정도는 있다. 교회정치에도 정도는 있다. 그 정도와 온전히 일치하는 삶을 살기는 쉬지 않겠지만, 그 정도를 가려고 노력하는 시도는 우리들에게 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일종의 기득권을 가지고 있는 자들은, 정도라고 하더라도 그 길보다는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려는 시도를 늘 하고 있다. 필자는 그 여러 가지 중에 딱 한 가지만을 지적한다면, ‘거짓말’, ‘음해’ 로 타인을 폄훼하는 것은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된다. 특히 성경을 근간으로 살아가는 신앙인이라면 그것은 아주 분명해야 한다. 특히 그 직위가 목사라면 더욱 그래야 한다. 기득권을 버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 기득권에 침해를 받게 되면, 그 새로운 고침은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는 생각을 누구나 가지고 있다. 그 와중에 기득권의 피해에 대해 악감정을 가진 자들은, 사자처럼 자신의 발톱은 숨기고, 제 삼자를 동원하여 거짓말과 이상한 음해성 발언을 퍼뜨리므로, 한 사람, 또는 한 단체를 완전히 훼파하려는 그런 일들을 신앙인이라는 이름으로 하고 있다면 그것은 정말 무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조금만 내려놓는다면, 그 새로움의 시기가 지금이어야 하고, 그 새로움의 시기가 나로부터라면 좋겠다는 마음을 갖게 된다. 그러나 기득권을 내려놓지 못한다면, 다른 사람이나 다른 기회는 상관없이 자신만은 피해를 입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갖게 되고, 그 기득권 사수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으로 나타나게 된다. ‘정도(正道)’ 는 본인이 손해를 보더라도 하나님의 자녀로 반드시 살아내어야 할 당위성을 지니는 것이다. 적어도 없는 말을 만들어, 잘 짜여진 소설 한 편으로, 사람을 감동시켜 매도하는 그런 악한 일들은 그리스도인에게는 없어야만 할 것이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아주 한 부분의 정도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필자는 목사로서 이런저런 교회 안팎에서 일어나는 교계관련의 여러 가지 일들을 직·간접적으로 접하게 된다. 그 일의 가치유무를 떠나서, 아주 잘 지어진 그럴듯한 스토리들이 사람들을 현혹하는, 비정상적인 일들을 보면서, 적어도 이 일은 정도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정도와 금도의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사사로운 이익의 개입이 아주 큰 역할을 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누구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당당하고, 또 기득권을 내려놓을 마음을 당당하게 가질 때 교회의 정도, 하나님 나라의 정도는 우리 가운데 충만하게 나타나리라 믿는다. 이런 사회, 이런 교회가 우리 가운데 가득해지기를 진심으로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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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1-05-21
  • [홍민기 목사]함께 즐거워하고 함께 울자
    알베르 카뮈가 쓴 페스트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도시가 전염병으로 셧다운 되는 배경으로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상황과 비슷합니다. 등장 인물 중 파늘루 신부는 이 모든 것이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외칩니다. 그 공포 속에서 자신의 신념을 다하기 위해 싸우는 의사 리외, 외면하다 결국 자원보건대에 참여하게 되는 랑베르, 가족을 잃은 슬픔을 봉사로 대신하는 그랑등의 이야기입니다. 사람들은 고통 속에 절망하고 아파하지만 소설은 테스트의 끝을 등장시키며 끝납니다. 하나님은 고통을 창조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죄로 어그러져 있습니다. 그리고 고통과 아픔은 코로나를 통해 더욱 세상을 힘들게 했습니다. 사회가 나뉘어지고 교회가 흔들리고 사람들을 서로를 신뢰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세상의 빛입니다. 교회는 이웃과 함께 울고 함께 즐거워하며 소망을 선포해야 합니다. 이제 백신을 바라보며 코로나에서 해방될 날을 소망하는 시간에 더욱 이웃을 돌보는 교회가 되어야겠습니다. 고통과 아픔이 널려 있습니다. 삶이라는 여정 속에 고통이라는 계단을 매번 올라갈 수밖에 없습니다. 코로나뿐만 아니라 인생의 여정 속에 아픔과 절망의 시간을 보내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초대교회는 로마 시대에 전염병이 널리 퍼졌을 때 종교인들이 심판이라 하며 떠날 때도 그리스도인들이 병자들과 함께하고 살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위기에 더욱 능력을 발하여 아픈 환자들을 돌보고 그들을 먹였습니다. 지금 우리 교회가 할 일은 힘들고 지쳐서 더 이상 일어날 소망이 없는 이웃들과 함께 우는 것입니다. 함께 흘리는 진정한 눈물이 그들의 아픔을 씻기는 작은 소망이 될 수 있습니다. 고통과 아픔 중에 우리가 도움이 될 수가 있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그저 함께하는 것. 그 외에는 큰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그러나 함께 즐거워하고 함께 우는 진심은 언제든지 통합니다. 그리고 그 일은 우리가 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박해를 받는다고 할지라도 저주로 맞서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것은 놀라운 능력이 됩니다.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는 말씀을 기억하고 선한 능력을 베푸는 교회가 되길 소망합니다. 질병과 아픔 속에 있는 이웃을 가슴으로 품는 것 영적으로 아픈 이웃을 가슴으로 품고 복음을 전하는 것 아픔이 우리를 쓰러지지 않게 하려면 서로의 허리를 붙잡는 것 그래서 함께 살아내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쉽게 비난하지 말고 가슴으로 끌어안아 봅시다. 기억나는 이웃을 품고 전화하고 밥을 사고 사랑을 베풉니다. 용기를 주고 사랑을 거저 베풉니다. 주님의 사람이 구체적으로 우리의 삶 속에 드러나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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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1-05-07
  • [김정환 사무총장]창조 질서의 회복-지구의 시간을 회복시키는 일
    인간은 끊임없는 탐욕으로 지구의 시간을 단축하고 있다. 폭염과 혹한, 폭우 등 자연재해와 특히 작년부터 올해까지 우리의 일상을 바꾸어 버린 코로나19의 경험은 우리의 삶을 다시 돌아보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 모든 시작이 인간의 탐욕으로 인한 무분별한 생태계 파괴와 무절제가 가져온 기후 위기에 기인한 것임을 모두가 공감하면서 지내고 있는 요즘이다. 기후 위기는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위배하는 인간의 중심의 탐욕과 무한경쟁의 결과이며 개발과 성장만을 추구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시기에 최근 일본에서는 방사능 오염수의 해양 방류를 결정하였다. 체르노빌과 후쿠시마 사태로 인한 방사능 물질의 축척과 기후 위기로 인한 폭염과 혹서, 장마 등의 피해는 어린이와 여성으로 대표되는 사회경제적 약자에게 더욱 치명적이다. 고농도의 방사능 오염수를 바다에 방류하는 것은 일본 국민과 주변국의 현재 생명을 위협하는 것은 물론이며, 세대를 거쳐 인류 전체를 죽음으로 몰아넣는 행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무분별한 개발과 성장이 아닌 다르게 살기를 통해 인종과 세대, 빈부와 성별의 차별 없이 이 땅의 모든 생명체가 어우러져 공존하는 세상을 만들어야 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고 책임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보시니 좋더라’ 하셨던 세상에서 청지기로서의 사명을 받은 우리들의 무책임과 방조는 창조의 질서를 파괴시키고 있다.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셨던 안전하고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또 생존권을 위협받지 않는 지구를 미래세대에서 물려주기 위해 새로운 변화가 필요한 시기이다. 이러한 시기에 우리 그리스도인은 창조하신 세상을 잘 다스리라고 하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생태 정의를 실현하고 공동체와 사회 속에서 정의로운 전환을 이루어 내는 주체가 되어야 할 것이다. 매년 4월 22일은 지구에 사는 우리에게는 특별한 날 중 하루이다. 1969년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발생한 해상 원유 유출 사고를 계기로 시작된 이후 2009년부터 우리나라도 ‘지구의 날’을 맞아 소등행사 등 다양한 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올해도 지구의 날을 맞이하여 세계적으로 행사가 진행될 예정이다. 부산에서도 ‘탄소중립 실천을 위한 원년의 해’로 망가져 가는 지구를 다시 회복시키기 위한 일들을 진행할 것이다. “탄소중립(Net Zero)” 이란 화석연료 등으로 배출되는 온실가스를 최대한 줄이고 불가피하게 배출된 탄소는 그에 상응하는 조치(나무를 심거나 청정에너지 전환 등)를 통해 실질적인 탄소 배출량이 0이 되도록 하는 것이다. 2018년 UN 산하의 지구온난화 1.5C〫 특별보고서에 지구의 온도 상승을 인류의 생존한계선인 평균 1.5C〫 이하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2050년까지 탄소중립 상태가 되어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사회 모든 분야에서 과감한 온실 감축이 필요하다고 강조하고 있다. 부산YWCA에서도 지역사회 시민사회단체와 연대하여 기후위기 대응과 온실가스 감축을 위한 정책을 제안하는 일을 계속해 나갈 뿐 아니라 매월 회원과 함께하는 생활 속 실천 운동으로 ‘기후위기 대응을 위한 실천 운동’을 전개하며 창조질서 보전을 위한 활동을 해 나가고 있다. 교회도 교인들과 함께 화석연료의 안락함을 위해 선택했던 삶의 방식을 변화시켜나가는 일에 앞장서야 할 것이다. 덜 경쟁하고 덜 먹고 덜 쓰는 삶의 방식과 이를 위한 불편함이 생명을 살리는 일이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실생활에서 탄소제로를 위한 다양한 활동을 실천해 나가야 할 것이다. 또 미세먼지 걱정 없는 푸른 하늘과 사계절을 제대로 누릴 수 있는 쾌적한 환경에서 살 권리를 요구하는 일에 목소리를 함께 내도록 교인들을 독려해야 한다. 이와 함께 에너지를 만드는 전 과정이 탄소를 발생시키는 핵발전에너지가 아닌 하나님이 주신 태양과 바람과 물을 이용한 지속 가능한 에너지를 제도화하도록 정부에 촉구하고 기후위기 대응을 위한 정책을 요구하는 일에 그리스도인의 목소리를 담아내야 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청지기로서의 사명을 조금이라도 행하는 길이 아닐까? 얼마 남지 않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지구의 시간을 다시 돌이키는 방법이 아닐까?
    • 오피니언
    • 정론
    2021-04-26
  • [탁지일 교수]담대하게 거침없이 정면승부
    다종교 한국사회의 사이비종교 검증시스템은 긍정적으로 작동해왔다. 종교간 갈등으로 인해 심각한 내전(內戰)으로까지 치닫는 국가들과는 달리, 우리나라에는 다수의 종교들이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는 토양이 오래전부터 조성되어 왔다. 특히 신흥종교의 경우, 사회적 역기능이 노출될 때는 스스로 소멸해 나아가도록 통제하거나 유도하고, 순기능적 역할을 할 경우에는 관용적인 태도를 가지고 지켜보는 지혜를 발휘해왔다. 신천지와 같이 거짓말과 위장에 능한 사이비 집단들이 이 땅에 발붙이기 어려운 이유도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다. 즉 검증된 종교에게는 관용과 지속가능한 여건이 제공되지만, 역기능적 행태를 노출하는 경우에는 사회적 지탄의 대상이 되고 소멸하곤 했다. 천부교, 동방교, 영생교, JMS, 구원파, 신천지 등이 그 대표적인 사례들이다. 한국사회에서 종교적 역할을 인정받기 위해서는 공개성과 투명성이 중요하다. 하지만 이단사이비 집단들은, 정체와 교리를 공개적이고 투명하게 노출하기보다는, 오히려 거짓말과 위장을 통해 세력을 확장하거나 사리사욕을 채운다. 신천지는 그들의 거짓말을 ‘모략’이라는 이름으로 합리화하여, 교회와 사회를 교란시켜왔다. 신천지가 사회적으로 지탄받고 고립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기독교 신앙고백은 공개적이고 투명하다. 우리가 누구인지, 우리가 무엇을 믿는지, 그리고 우리가 무엇을 하려는 지를 명료하게 선언한다. 신실한 기독교인은 언제어디서나 자신의 정체성을 결코 숨긴 적이 없다. 세상이 기독교를 수용하면, 선한 영향력을 전하기 위해 헌신했고, 만약 세상이 기독교를 거부하면, 박해와 순교를 무릅쓰고 신앙을 지켰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결코 기독교인임을 숨긴 적이 없다. 기독교인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롬1:16). 로마군인의 감시 하에 낯선 환경 속에 지내야만 했던 바울이었지만, 복음에 대해 궁금한 이들이 찾아오면, 눈치를 보거나 위축됨 없이 “담대하게 거침없이”(행 28:31) 하나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를 변증했다. 코로나 팬데믹 속에서 기독교인들은 이중고를 겪고 있다. 교회 안으로는, 마음 편히 예배할 수도 없고, 교제할 수도 없는 환경이 주어졌고, 밖으로는 기독교에 대한 부정적 시선들로 인해 부담스러운 상황이 되었다. 게다가 이단사이비들의 행태는 기독교의 사회적 이미지를 더욱 추락시키고 있다. 코로나19와 같은 역병으로 인한 신앙공동체의 고난은 오늘만의 일은 아니다. 기독교역사에 나타난 신실한 신앙의 선배들은, 역병과 고난 속에서도 말씀(케리그마)과 교제(코이노니아)와 봉사(디아코니아)를 포기하지 않았으며, 어떤 상황에서도 결코 자신의 기독교적 정체성을 감춘 적이 없다. 기독교 신앙고백은 불확실한 위기의 시대에 더욱 빛났다. 스데반의 순교이후 흩어진 기독교인들은 가는 곳마다 공개적인 복음전도를 멈추지 않았다. 초대교회의 수많은 순교자들은 죽음 앞에서도 당당하게 자신들이 신앙고백을 이어갔다. 콜레라 역병으로 고통 받던 구한말의 선교사들과 신앙인들은 이웃을 위해 헌신하며,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했다. 세상이 불안정하고 불확실할수록, 기독교인들은 담대하고 거침없는 정면승부는 빛이 난다. 복음의 정면승부, 교회와 이단을 분별하고, 교회와 세상을 구분하는 시금석이며, 오늘 한국교회에 주어진 과제이다.
    • 오피니언
    • 정론
    2021-04-09
  • [송길원 목사] 철없는 그리스도인들을 위하여
    ‘사시사철’의 한자어는 ‘四時四철’이다. ‘철’만 순우리말이다. 사람들은 ‘철’을 모르는 사람들을 ‘철부지(철不知)’라고 한다. ‘철모르는 사람’ ‘철없는 사람’이라 하면 때를 모르는 사람을 이른다. 나이가 들었다고 철드는 건 아니다. 그래서 나이 값을 못하는 이를 ‘철딱서니 없다’고 한다. 교회 안에도 철없는 사람들로 수두룩하다. 24절기를 모르고 사는 이들을 ‘철모르는 사람’이라 하듯 교회 절기를 모르는 교인들도 철없는 교인들이 맞다. 절기를 지칭하는 모헤드는 ‘정한 날’, ‘정한 시간’, ‘정한 절기’라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특별한 시간’이다. ‘하나님과 만나는 신성한 약속’이 절기다. 절기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을 만난다. 폰 알멘은 「예배- 그 신학과 실천」에서 “교회력을 준수하는 것은 자신이 고백하는 믿음의 시금석이고, 자신의 믿음에 대한 분명한 증거”라고 말한다. 그런데 교회는 절기교육이 없다. 철없는 교인들로 가득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20세기 스코틀랜드 장로교회는 교회력은 ‘그리스도 중심의 절기’로 신앙생활에 매우 유익하다고 판단하여 이를 회복시킨다. 대림절, 성탄절, 주현절은 메시아를 갈망하는 하나님의 백성, 그리스도의 탄생, 그리고 천천히 그분이 온 세상의 왕으로 드러나는 이야기다. 사순절, 부활절, 오순절은 그리스도가 받으신 시험, 타락한 세상에서의 삶, 고난, 죽음, 부활, 승천 그리고 그 뒤에 이어진 성령의 오심과 교회의 탄생에 관한 이야기다. 그렇다면 지금의 사순절을 어떻게 보내야 할까? 최근 <메멘토모리 기독시민연대>는 ‘유쾌한 반란’으로 메멘토모리 커피(Coffee)를 내놓았다. 뚱딴지같지만 흥미를 넘어선 깊은 신학이 담겨 있다. 신약학자 벤 워더링턴(Ben Witherington)은 커피 문화를 창조한 것이 스타벅스가 아닌 교회라고 지적한다. 처음 커피를 발명한 사람은 에디오피아의 수도승이었다. 카푸치노(cappuccino)라는 단어는 이탈리아 카푸친(Capuchin) 수도승들의 의복에 사용되었던 갈색의 색조를 지칭한다.(티시 해리슨 워런의 <오늘이라는 예배> 참고) 카푸친 수도회는 성 프란치스코가 설립한 작은 형제회의 독립된 분파 중 하나였다. 프란치스코의 가르침을 더 완벽하게 수행하기 위해 세상과 결별한다. 기도와 가난 겸손을 지향한다. 전염병자들을 돕는데 상상할 수 없는 용기를 보인다. 무엇이 이런 용기를 주었을까? 카푸친 수도회의 본원을 들어서면 지하 납골당이 있다. 십자가도 전등도 테이블도 죄다 해골로 꾸며져 있다. 1599년부터 1920년대까지의 카푸친 출신 수도사들의 유골 4000여구가 동원된다. 수도사들은 서로 마주치면 ‘메멘토 모리’로 인사를 나누었다. ‘죽음을 묵상하라’는 의미였다. 사순절은 재의 수요일로 출발한다. 이날 종려나무 가지를 태운 재(ashes)를 이마에 바르며 선언한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지니라.”(창 3:19) 인간은 본질적으로 흙이다. 인류의 첫 사람이 ‘붉은 흙’의 아담이다. 라틴어 ‘호모(homo)’는 ‘흙’이란 의미를 지닌 ‘후무스(humus)’에서 왔다. 흙을 실감나게 경험할 수 있는 것이 뜻밖에도 커피다. 커피는 결국 흙의 맛이어서다. 입으로 느껴지는 쓰고 달고 신 맛의 감각이 아니다. 커피가 자라난 흙의 맛이 난다. 그 때 커피를 제대로 즐긴다고 말한다. 어디 그 뿐인가? Coffee를 한자어를 파자(破字)하듯 풀이하면 ‘Christ offers forgiveness for everyone everywhere.’(그리스도께서는 어느 곳의 누구라도 용서하십니다)가 된다. 이미 전 세계인의 필수품이 되어 하루에 80억 잔이 소모된다는 커피, 커피와 함께 죽음을 성찰하며 죄를 뉘우치고 그리스도의 용서를 새길 수는 없을까? 40일 동안 예수님의 수난을 묵상하며 기도와 금식, 참회의 시간을 보내는데 이보다 더 좋은 도구는 없을 듯하다. 크리스마스트리로 성탄을 온 세상에 퍼뜨렸듯이 커피로 사순절의 소중한 절기와 의미를 알릴 수 없을까? 철없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메멘토모리 커피>가 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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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1-03-26
  • [천종호 장로]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의 인정은 올바른 신앙의 출발점
    인간에게는 두 가지 근본 전제가 주어져 있는데, 그 첫 번째는 인간이 피창조적 존재라는 것이고, 두 번째는 인간이 공동체적 존재라는 것이다. 인간이 피창조적 존재라는 것은 인간을 만든 창조주가 있다는 뜻이고, 인간이 공동체적 존재라는 것은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 타자와의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 두 가지 전제는 인간 정체성의 근본일 뿐 아니라 기독교인 정체성의 근본이기도 하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이 두 가지 근본을 부정한다. 특히, 창조주 하나님의 존재에 관해 올바르지 못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 먼저, 무신론자들이 있다. 진화론을 필두로 하는 무신론자들은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우주만물은 ‘우연’과 ‘필연(우연에서 비롯된 자연법칙)’의 조합이 만들어낸 산물에 불과하다고 한다. 두 번째로, 신(神)의 내재성만 인정하는 견해가 있다. 이들을 우리는 범신론자(汎神論者)라고 하는데, 범신론자는 우주만물을 초월해 있는 신은 없고 우주만물 안에 내재하고 있는 신만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신이 산과 바위와 강과 바다와 나무와 풀과 동물과 인간 안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스토아철학, 불교, 힌두교, 현대 포스터모더니즘시대의 영성주의자들이 주장하고 있는 바이다. 세 번째로, 신의 초월성을 강조하는 견해가 있다. 이들은 신이 우주만물과 인간과 자연법칙을 만드신 다음에는 더 이상 인간이나 우주만물의 질서에 개입하시지 않는다는 견해이다. 이들 중에는 이데아 세계와 현실 세계를 구분하여 이데아 세계만이 진실한 세계라는 플라톤주의자, 영의 세계와 육의 세계를 엄격히 구분하여 영의 세계만이 선하다는 영지주의자, 신이 우주만물을 창조하였으나 그 이후의 우주만물에 대한 인격적인 섭리는 인정하지 않고 자연법칙과 인간의 이성을 통해 우주만물의 운행을 맡겨 버렸다는 이신론자(理神論者), 신플라톤주의의 영향을 받은 이슬람교, 하나님이 우주대폭발(big bang)을 일으키시고 진화의 법칙을 제정하신 이후 140억 년 동안 우주만물의 질서에 개입하지 않았다는 진화적 창조론자가 있다. 우리는 우주만물을 만드신 하나님이 자신의 창조물을 초월하실 뿐만 아니라 우주만물에 내재하시는 존재이심을 고백한다. 초월적 하나님은 인간으로서는 감히 근접조차 할 수 없는 존재로서의 하나님을 말한다. 초월적 하나님의 가장 고유한 특성은 ‘거룩성’이고, 거룩성에는 심판이 필연적으로 따른다. 한편, 내재적 하나님은 우주만물과 인간 세상에 사랑으로 섭리를 펼치시는 존재를 말한다. 내재적 하나님의 가장 선명한 형태는 예수님이 인간으로서 인간의 땅에 오신 것이다. 이를 ‘임마누엘의 하나님’이라고 한다. 내재적 하나님에게는 사랑이 필연이다. 심판을 통과한 피조물들에게는 탕자를 얼싸안고 가락지까지 끼워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기다리고 있다. 그런데 최근 들어 ‘하나님이 죽었다’는 근대 계몽주의사상과 ‘우주와 성경’이라는 ‘텍스트’에 대한 해석권이 저자인 하나님께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있다는 포스터모더니즘사상에 의해 기독교신앙이 심각하게 오염되어 있다. 기독교 신학과 삶의 태도에 있어 예수님이 성자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에 불과하다고 주장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죄는 인간에 대한 악으로, 죄의 결과는 인간 본성의 상실이 아니라 인간에게 해로운 질병으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의 추구는 인간의 자아에 대한 지향으로, 하나님의 심판은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 하나님의 섭리는 인간의 자율로, 성도의 인격은 인간으로서의 성격(개성)으로, 기도는 명상으로, 죄사함을 통한 인간 본성의 회복을 구하는 기독교적 영성은 인간의 심리적 위안을 얻기 위한 현대적 영성으로, 신학은 심리학이나 상담학으로 대체해 버리는 경향이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것이 그 증거다. 하지만 이러한 경향은 하나님의 초월성을 명시적이지는 않지만 실질적으로 부정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인간의 ‘심리’ 속에 가두어 버림으로써 하나님의 내재성마저도 부정하는 것이 되고, 결국에는 입으로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만 실질적으로는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는 결과에 이르게 한다. 이러한 사태를 계속 두고 볼 수만은 없다. 무너진 주의 제단을 다시 수축하여 닥쳐 올 위기의 세대를 철저하게 준비해야 한다. 올바른 신학과 신앙은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을 동시에 그리고 실질적으로 인정하는 것을 바탕으로 함을 잊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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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1-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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