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2-01-2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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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기현 목사] 태초에
    새해니, 뭐니 하는 것에 시큰둥한 이들이 있다. 어제와 오늘이 무엇이 다르며, 작년과 올해가 어떻게 구분되겠나. 나 역시 그렇다. 다를 것 하나 없다. 똑같다. 괜히 요란 떨 것 없다. 그럴수록 남는 것은 허탈함 뿐. 실망만 더 커진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인위적으로 제정한 새해 첫날에 의미가 없지 않다. 왜 그런가? 그것은 요한복음 1장 1절의 첫 단어가 입증한다. “태초에” 아니 2022년을 맞이하는 것에도 토를 다는 이들이 허다한데, 웬 고려적 이야기도 아니고 원시 시대로 돌아가느냐고 타박할는지 모르겠다. 요한복음 1장 1절부터 5절을 읽어보면, 성경을 조금이라도 아는 이들은 데자뷔를 느낄 것이다. 많이 들었고 보았던 본문이다. 신년 첫날만 되면 펼치던, 올해는 꼭 성경 일독하리라 마음먹고 열었던 그 본문, 바로 창세기 1장 1절이고, 좀 더 넓게 펼치면 창세기 1장 전체다. ‘태초에’로 시작하고, 천지창조를 이야기하는 바로 그 성경 말이다. 그렇다. 사도 요한의 의도는 예수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창세기 1장에 기대고, 끌어와서 자신이 말하는 바를 강화하고 논증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태초의 바로 그분이고, 창조주이기에, 지금도 창조자라고. 두어 해 전부터 나는 한나 아렌트를 틈틈이 읽고 있다. ‘악의 평범성’으로 잘 알려진 이 정치철학자는 곳곳에서 ‘탄생성’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하나의 정치 공동체가 이전과는 다른, 즉 나치즘과 전체주의, 아우슈비츠와는 무한한 질적인 차이를 지닌 새로운 공동체로 태어나기 위한 그녀의 염원이 담긴 말이다. 끝도 없이 뱅뱅 도는 시간 속에서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궁구했다. 그 단어는 성 아우구스티누스에게서 온 것이다. 그렇게 연원을 추적하면 성경에서 나온 개념이 ‘탄생성’이고 명확하게 짚는다면, 창세기 1장 1절과 요한복음 1장 1절의 이 단어, ‘태초에’이다. 사도 요한이 말하려는 바는, 태초, 즉 시작점이 있다는 것이다. 진정한 의미의 ‘창조’가 인류 역사와 공동체, 그리고 개인에게 가능하다, 현실적이다, 그렇게 말한다. 다만, 조건이 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시작을 가능케 하는 원동력과 설계도는 예수이다. 그냥 예수라고 하면 안 된다. 특정해야 한다. 구체적으로 손가락으로 특정한 대상을 가리켜야 한다. 저것은 아니고 바로 이것이라고 하는 그것을 지시해야 한다. 예수라는 인격 앞에 어떤 단어를 붙이든가, 아니면 ‘=’ 부호를 사용해야 한다. 예수 = ??일까? 그렇다. 예수 = 말씀이다. 말씀인 예수이다. 그리고 여기서 말은 인간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이다. 기독교인들에게 하나님이 세상을 어떻게 창조하셨나요? 라고 물으면 열이면 열, ‘말씀요’라고 한다. 말씀을 듣는 것을 성서가 그토록 강조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성경을 낭송하는 것, 묵상하는 것, 암송하는 것, 바로 그것이 우리에게 새로운 시간을 부여한다. 말씀인 예수를, 말씀 = 예수를 주야로 묵상할 때, 내 삶에, 내 공동체가 재탄생한다. 성경을 읽기로 마음먹고, 묵상하는 바로 그날이 새해 첫날이고, 태초의 그날이다.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도 태초의 시간이다. 돌고 도는 시간이 아니라 날마다 새로운 시간을 선물로 받고자 하는 이에게 단 하나의 선택과 결정은 성경 묵상이다. 아, 태초의 그 날이 오늘이었구나. 잘 읽자! 잘 살자!! (요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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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1-07
  • [강규철 장로] 성탄의 추억
    12월이 오면 나이 많은 성도들이 추억 저편으로 기억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성탄절과 새벽송입니다. 그냥 국밥 한 그릇 먹고 성도들의 집을 방문하여 캐롤을 부르고 따뜻한 단술을 대접 받고 사탕 한 꾸러미를 받아오는 것만은 아닐 것입니다. 이는 많은 성도들의 가슴속에 간직한 로망이었으며 소중한 추억일 것입니다. 어린 시절의 교회 생활은 바로 성탄절에 관한 것이 아마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할 것입니다. 한 달 전부터 성탄 트리를 만들고 교회 안팎으로 장식을 하고 새벽송을 할 때 들고 다닐 별모양의 등과 십자가 등을 만들었습니다. 게다가 주일학교 어린이들은 성탄 축하 찬양과 성극 등을 준비하느라 매일 저녁 예배당이 북적거렸습니다. 우리 모두의 마음이 한껏 부풀었으며 즐거웠던 시간들이었습니다. 성탄전야에 중고생들에게는 잊지 못할 추억이 있었습니다. 바로 선물교환입니다. 마음에 드는 선물을 받은 학생들은 싱글벙글 하지만 그렇지 않은 학생들은 마음이 상하기도 합니다. 그래도 또다시 내년을 기다려지는 것은 모두의 마음일 것입니다. 크리스마스 시즌이 되면 우리 모두의 축복의 시간들이었습니다. 거리마다 울려 퍼지는 캐롤송을 들으며 한 해를 마무리하는 온 가정이 즐거워하는 국민 전체의 축제였습니다. 새벽송을 돌 때 성도들의 가정만 방문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밤새워 수고하시는 파출소, 소방서 등 관공서를 찾아 캐롤을 부르며 선물을 드리고 ‘메리 크리스마스’를 전하기도 하였습니다. 저는 예배당의 종소리가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습니다. 특히 어스름한 저녁놀에 울려 퍼지는 종소리는 마치 고된 하루를 마치고 돌아가는 피곤한 육신과 영혼을 어루만져 주는 안식과 위로의 종소리였습니다. 무엇보다 성탄절에 울리는 탄일종소리는 이 땅에 우리를 구원하실 구주가 오셨으며 평화의 왕이 오셨음을 알려주는 기쁨의 종소리였습니다. 그래서 크리스마스 시즌에 주고받는 카드에는 주로 눈 덮인 시골 조그마한 교회와 종각의 풍경이 그려져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언젠가부터 종소리가 챠임벨로 바뀌고 그 챠임벨 소리가 소음이라 하여 사라지면서 성탄의 기쁨과 추억도 점점 사라져 갔습니다. 지금은 교회의 상징 중 하나였던 종각이 있는 교회는 찾아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땡그랑 땡그랑 울리던 그 종소리를 생각하면 가슴이 저려 옵니다. 그래도 12월이 되면 거리마다 볼 수 있는 구세군의 자선냄비와 종소리가 그나마 우리의 마음을 위로해 주고 있습니다. 온 세상을 구원할 구세주가 태어나신 날, 그로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에게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즐거이 맞이하면서 우리의 아이들이 이런 아름다운 추억을 갖게 되길 두 손 모아 간절히 기도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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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2-17
  • [김영일 목사] 버려야 할 ‘꼰대’, 지켜야 할 ‘꼰대’
    최근 우리사회가 급속한 변화를 추구하면서 생겨나서 부정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것이 있다. 그런 많은 말들 중에 소위 말하는 ‘꼰대’ 라는 것이 있다. 이 ‘꼰대’ 라는 말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그 의미는 ‘꼰대’ 는 은어로 ‘늙은이’, 학생들의 은어로는 ‘선생님’을 의미한다고 나와 있다. 이로 보면 우리가 지금 사용하고 있는 의미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이며, 이를 분명히 하려면, ‘꼰대질’ 이라는 말의 의미를 살펴보면 분명해진다. ‘기성세대가 자신의 경험을 일반화하여 젊은 사람에게 어떤 생각이나 행동방식 따위를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행위를 속되게 이르는 말’ 이라고 되어 있는 데서, 소위 ‘꼰대’ 라는 것은, 현장감각을 잃은 체 자신의 생각을 강요하는 고루한 사람을 일컫는 말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런 면에서 이 ‘꼰대’ 라는 말은 다분이 우리들에게 부정적으로 다가오는 것이 현실이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으로부터 이 ‘꼰대’ 라는 말은, ‘되어서는 안 되는 어떤 이미지’ 를 분명히 하고 있다는 것을 부정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이런 면에서 필자 역시 이 ‘꼰대’ 가 없는 세상을 살았으면 하는 마음이 다분히 있다. 필자 역시 이 ‘꼰대’ 라는 말을 분명히 좋아하지 않는 단어의 목록에 들어있음도 사실이다. 여기서 잠시 생각하고 넘어가고 싶다. 어릴 때 필자 역시, 선생님 중에서 강하게 생활규범을 강조하면서, 바른 이미지의 어떤 표상들을 제시하면서 일러주던 선생님을 향하여, 시대감각이 뒤떨어진 분이고, 뒤돌아서 가시는 선생님의 뒤에다 들리지 않는 소리로, 수없이 ‘꼰대’ 라는 소리를 외치곤 했었다. 그 당시 필자의 기준에는 그 선생님은 너무나 답답하신 분이었고, ‘저렇게 인생을 살아서는 안 되는 분’ 이라는 이미지를 끊임없이 새기곤 했었다. 얼마 전 옛친구를 만나 담소하던 중, 필자는 문득 친구의 아버지가 생각났다. 가끔 놀러가는 필자를 앉혀두고, 장시간 이런저런 좋은 지도의 말씀들을 들려주시던, 그 아버지가 떠올랐다. 친구의 아버지를 만나는 것 때문에 친구네 가기가 발길이 참 무거웠었다. 또 잡히면 한두 시간은 족히 들어야 하는 잔소리에, 친구네 놀러갈 때는 꼭 아버지가 계신가를 확인하곤 하였었다. 바로 제게는 지독한 ‘꼰대’ 였었다. 그런데 왜 그분들이 그리워지는 것인가? 답답하게, 그리고 접미사 하나까지 빠뜨리지 않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주시면서, 필자의 숨이 막히게 했던 그분들이 그립다. 어투까지 기억나며, ‘그리 살았어야 했었는데...’ 를 되내이며, 가슴이 먹먹해지도록 그리운 것은, 그런 선생님을, 그런 친구 아버지를 둔 필자만의 생각이며 삶일까? 바로 그 필자의 ‘꼰대’ 들이 산 바로 그 삶이, 필자가 걸어가지 않은 삶이었기에 이토록 미안해지는 것은 왜일까? ‘꼰대’ 가 그립다. 지금 우리시대에 비록 정해진 틀 때문에 답답하고 힘든 것은 있지만, ‘이것이 제대로 된 길이야. 이것만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야 해. 이 진리를 따라 살지 않으면 망할 수 있다.’ 며, 폐부에 깊은숨을 토하면서 알려주는 ‘꼰대’, 바로 그 ‘꼰대’ 들이 있는가? 완전한 정답은 아니어도, 적어도 인생을 살면서, 그 인생에서 나름대로 얻은 진리를 전해주면서, 삶의 확신, 인생의 철학을 전수해주던 그런 ‘꼰대’ 가 지금 이 시대에 있는가? 우리의 삶에서 마냥 뒷방늙은이 신세로 몰아 넣어버리며, 앞뒤 돌아보지도 않는 체 빛의 속도로 달려가는 이 시대적 상황에서, 그런 깊은 철학을 가진 진정한 ‘꼰대’ 를 지켜야 하지는 않을까? 그렇다고 모든 면에 ‘꼰대’ 가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순간순간 우리들에게 살아져야 할 삶에서 ‘꼰대질’, 그야말로 버려져야 할 것들이 많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한 줌도 안 되는 권력과 권위, 아무 가치도 없는 기득권을 끝까지 주장하며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가치없는 ‘꼰대’ 와 ‘꼰대질’ 은 반드시 제거되어야 할 것이다. 지식에 있어서도 새롭게 일어나는 신진학자들을, 그동안 자신의 업적에만 매몰되어 막으려는 선배학자들이 무시한다면 그것이 ‘꼰대질’ 이며, 건강한 주장들이라고 하더라도 자신의 이익에 배치된다고 하여, 그 주장들을 발로 밟아버리는 것은 대표적으로 축출되어야 할 ‘꼰대질’ 인 것이다. 이런 것들이 자리잡고 있는 한, 시대적인 발전은 결코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깊은 삶의 철학, 인생의 깊은 의미, 그리고 우리 모두가 추구해야 할 절대적 가치를 고수하는 진정한 이 시대의 ‘꼰대’ 들은 우리가 반드시 지켜내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의 삶을 고루하게 만들고, 별 가치없는 몇몇의 권위의식과 기득권 주장 같은 생각들은 우리 가운데서 반드시 제거해 내어야 할 ‘꼰대질’ 일 것이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이런 무가치한 꼰대질을 이야기하면서, 반드시 지켜야 할 이 시대의 진정한 ‘꼰대’ 까지 버리면, 이 시대는 바람에 날려가는 초개같이 가벼워져, 어디로, 무엇을 위해 나아가야 하는지 그 방향까지 잃어버리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시대에 반드시 지켜야 할 진정한 ‘꼰대’ 와, 가차없이 버려야 할 ‘꼰대’를 잘 구별하여 세워가는 삶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 시대에 좌표가 없이 방황하는 가치기준을 분명하게 세워주는 존경받는 ‘꼰대’ 들을 충분히 인정하고, 뿌리뽑아야 하는 기득권 주장에 매몰된 ‘꼰대’ 는 축출하여, 균형감각이 살아있는 아름다운 세상, 살기좋은 세상을 만들어가는데 모두 눈을 떠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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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2-03
  • [김태영 목사] 인격의 크기와 신앙의 깊이
    근대로 넘어오기 전에 서양에서는 신분제도가 있었고 마차가 교통수단이었다. 말이 끄는 마차에도 1등석부터 3등석까지 있던 시절이다. 지금도 비행기를 타면 퍼스트 클래스석, 비즈니스석, 이코노미석이 있는 것을 연상하면 된다. 달리던 마차가 고장 나거나 진흙탕에 빠지면 3등석 사람은 내려서 마부와 함께 마차를 끌어내고, 2등석은 내려서 지켜보고, 1등석은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고 한다. 요즘 기준으로 보면 황당하다 못해서 갑질로 비난을 받을 일이다. 사회에서 명망 있고 직장에서 높은 직급을 가지고 있으면 그것이 곧 인격의 크기라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다. 인격은 계급과는 상관없다. 교회에서도 목사, 장로, 노회장, 총회장이 되면 신앙의 깊이가 깊을까? 그럴 수도 있으나 나의 경험으로는 집사님 중에 본 받을만한 한결같은 신앙으로 교회를 섬기는 분들이 많다. 직분과 신앙이 비례되는 것은 아니다. 산상 보훈 중에 ‘세상의 소금과 빛’에 대한 교훈은 교회는 교회로서, 기독인은 기독인으로서의 정체성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는 말씀이다. 소금의 기능이란 아주 간단하다. 짠 맛을 내는 것이다. 그 맛을 잃으면 버려지게 된다. 소금다움이란 짠 맛으로서의 역할을 의미한다. 설탕 없이도 밥 먹을 수 있지만 소금 없이는 밥 먹기가 힘들다. 간이 안 되어 있으니 무슨 맛이 있겠는가. 소금이라도 자연산 천일염과 맛소금은 다르다. ‘짜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맛소금은 인공조미료(MSG)를 배합하여 감칠맛까지 더하여 음식점 요리에 많이 사용되었지만 요즘은 건강을 따지다보니 맛소금은 외면하고 미네랄이 풍부한 자연산이 대세다. 교회 강단의 설교자들은 성경을 깊이 묵상하고 연구하고 기도해서 자연산 천일염을 공급하려고 힘을 써야 하는데 성도들의 입맛을 맞추려고 온갖 MSG를 첨가해서 성공, 소원성취, 믿습니까, 아멘 유도 발언등 기복이 섞여서 말씀의 원래 의미(맛)는 사라지고 강단이 세속화되어 만담과 농담을 늘여놓는다면 어디에서 교회와 성도의 정체성을 찾을 수 있겠는가. 강단이 영적 성숙은 커녕 미숙자를 양산하고 있지 않은지 성찰하자. 어릴 적 여름 방학 때는 한 밤중에 어디를 가든지 반딧불을 쉽게 볼 수 있었다. ‘나 여기 있소!’ 하고 존재감으로 반짝였다. 요즘은 세상이 워낙 밝으니 그 반딧불조차 사라지고 말았다. 주님은 우리들에게 ‘세상의 빛이 되어라’고 하셨는데 등대와 등불은 못되더라도 반딧불 정도라도 비추어야 할 텐데 혹시 반딧불 빛마저 잃고 어둠에 어둠을 보태지는 않는가를 돌아보게 된다. 희미하나마 작은 빛이 기독인의 존재감이다. 신앙의 연수를 자랑하는 만큼 신앙의 깊이가 있는지를 돌아보자. 중직과 요직이라는 직분에서의 자부심을 느끼는 것만큼 인격의 크기를 가지고 있는지 성찰하자. 소금과 빛의 정체성을 지니고 어디를 가든지 무엇을 하든지 천일염 소금과 반딧불 빛이 되는 삶을 살아가자. 별 빛을 따라 페르시아에서 베들레헴 마구간까지 인도함을 받은 동방박사들을 생각하는 성탄 계절이 다가왔다. 새벽별이신 주님을 따라 한걸음씩 나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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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1-19
  • [안동철 목사]오징어 게임에 비친 기독교
    우리나라의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인 ‘오징어 게임’의 열풍이 식기는커녕 더욱 거세지고 있다. 넷플릭스가 공급되는 전 세계 83개국 모두에서 1등을 했다. 이는 넷플릭스 사상 처음이라고 한다. 처음 이 이야기를 듣고 참 기뻤다. BTS와 블랙핑크, 그리고 기생충에 이어 한류의 바람을 전 세계에 알린 쾌거라고 생각했다. 어린 시절 코흘리개 동무와 함께 했던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딱지치기’, ‘달고나’, ‘구슬치기’, ‘오징어 달구지’와 같은 게임을 소재로 한 드라마에 전 세계 사람들이 환호할 줄 생각지도 못했다. 그래서 궁금함 반, 기대감 반으로 오징어 게임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이 시리즈를 보는 동안 왜 이 시리즈에 세계적인 열풍이 일어난 것인지 알게 되었다. 1편을 보기 시작하면 마지막 9편까지 보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잘 만들어진 드라마임이 분명했다. 물론 공중파 방송에서는 절대 나올 수 없는 폭력적이고, 잔인하며, 선정적인 장면과 끊임없이 나오는 욕설이 너무 불편했지만 말이다. 그러나 이 시리즈가 더욱 나를 불편하게 했던 것은 드라마의 처음인 1편부터 마지막 9편까지 쉴 새 없이 나오는 반기독교적 장면 때문이었다. 비웃음거리가 된 십자가와 전도, 기도와 용서에 대한 왜곡된 시선, 희생하는 사람과 대비된 사기꾼화 된 기독교인의 모습이 끊임없이 나왔다. 시리즈 9편을 다 본 후 망연자실하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오징어 게임을 보며 사람들은 하나님과 기독교에 대해 어떤 시각을 가질까?” “혹시 드라마 속 기독교의 모습을 한국 기독교의 진짜 모습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나의 불편함과 당혹감은 한국 교회의 기둥이 무너지는 것은 아닌가라는 공포심으로 변했다. 얼마 전 CGNTV에서 ‘안녕히 계세요, 하나님’이라는 특집 다큐멘터리를 방송했다. 제목이 충격적이었다. ‘안녕하세요, 하나님’이 아닌 ‘안녕히 계세요, 하나님’이라니! 아무튼 이 다큐멘터리는 교회를 다녔지만 이제는 교회를 떠나고, 더 이상 교회로 오지 않는 청소년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그들의 눈에 비친 교회와 기독교는 더 이상 찾아오기 싫은, 매력을 잃은 공동체였다. 어떻게 하면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까?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피 묻은 십자가의 복음의 비밀을 우리 성도, 특히 다음세대 자녀들에게 잘 전해야 한다. 오징어 게임이 조롱하는 십자가가 세상의 모든 것을 파하는 능력이 됨을 멋지게 전해야 한다. 우리의 울타리 안에 있는 사람들이 이런 반기독교적인 문화에 동화되어서는 안 되니 말이다. 그런 후 세상에 비친 기독교의 모습이 어떤 지 반성해야 한다. 오징어 게임에 세상이 환호하는 것은 그만큼 세상 사람들의 눈에 비친 교회와 성도의 모습이 부정적이라는 것이 아닐까? 우리 주님이 보여주신 희생과 낮아지심, 약자의 친구가 되는 길이 아닌 화려함과 세상적 성공, 힘을 통해 세상을 지배하려는 모습으로 교회를 혐오의 대상으로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이미지 대변신이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필요한 것은 연합이다.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것은 나 혼자 힘으로는 안 된다. 한 교회만으로는 이 복잡하고 심각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모두가 함께 함으로만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 부정적인 의미에서 사람과 돈으로 세력화하여 힘을 자랑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들은 조롱하지만 영광스러운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 하나가 되어 문제를 풀어야 한다. 위기다! 그러나 위기는 기회의 또 다른 말이다. 현재 문제의 위기감을 인식하고, 이것을 문제로 볼 수만 있다면 해결책을 찾을 수 있다. 더 늦어지기 전 함께 기도하고, 머리를 맞대고, 손을 잡고 나가자.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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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1-05
  • [탁지일 교수]매켄지와 데이비스 선교사를 그리며
    1998년 토론토대학교에서 열린 캐나다장로교의 공식적인 한국선교 100주년 기념예배에 참석했다. 한국 파송 선교사들과 가족들이 함께 한 은혜로운 예배였다. 예배 말미에 모두 함께 일어나 부른 찬송이 인상적이었다. “어디든지 예수 나를 이끌면”이란 찬송이었다. “어디든지 예수 함께 가려네... 어디를 가든지 겁낼 것 없네. 어디든지 예수 함께 가려네.” 캐나다장로교회의 첫 순교 선교사 윌리엄 매켄지(William J. Mckenzie, 1861~1895)가 가장 좋아했던 찬송이었다는 사실을 후일 알게 되었다. 매켄지 선교사는 우리나라 첫 자생적 신앙공동체인 소래교회의 초대목사였으며, 조선에 온지 1년 반 만에 하나님 품에 안겼다. 하지만 매켄지의 순교는, 선교의 새로운 시작이었다. 1898년 캐나다장로교회는 5인의 첫 공식 선교사를 조선에 파송해, 함경도 원산, 함흥, 성진 지역을 중심으로 본격적인 선교를 시작한다. 캐나다장로회 선교사들은 조선에만 머물지 않고, 흩어지는 조선인들을 시베리아, 만주, 일본까지 따라가 헌신적인 선교사역을 펼쳤다. 황해도 장연 소래교회 인근에 묻혔지만, 지금은 무덤의 흔적조차 알 수 없는 윌리엄 매켄지 선교사는 캐나다교회의 조선선교를 위한 한 알의 밀알이었다. 2003년 부산장신대학교 설립 50주년을 준비하던 중, 「소명」이란 제하의 오래된 교지(校誌)에서 호주선교사 서두화(Alan Stuart, 1926생 95세)란 이름을 발견한 것이 호주교회의 부산경남지역 선교에 관심을 갖게 된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부산장신대학교 교장이었던 서두화 선교사님과의 만남은 오늘까지도 이어지고 있는데, 후학들을 위한 책도 보내주시고, 학생들을 위한 따뜻한 격려도 아끼지 않으신다. 서 선교사님과 부산장신대의 이야기는 호주교회의 첫 순교 선교사 헨리 데이비스(J. Henry Davies, 1856~1890)로부터 시작한다. 데이비스 선교사는 부산지역 선교를 위해 도보로 여행하던 중 얻은 질병으로 인해, 조선에 도착한지 6개월 만에 하나님 품에 안겼다. 하지만 데이비스의 순교는, 선교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1891년 호주교회는 5인의 첫 공식 선교사를 조선에 파송해, 경상남도 부산, 마산, 진주, 통영, 거창 지역을 중심으로 선교를 감당해 나아갔다. 데이비스 선교사는 현재 부산 중구 동광동 복병산 중턱에 묻혔고, 6.25전쟁 등으로 인한 변화 속에서 무덤의 행방은 알 수 없지만, 헨리 데이비스 선교사는 호주교회의 부산경남지역 선교를 위한 한 알의 밀알이 되었다. 캐나다와 호주 선교회는 선교정책과 사역 면에서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기독교 중심인 평양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동북단 함경도와 동남단 경상남도 지역을 맡아 선교했다. 캐나다선교회는 일제의 가혹한 수탈이 자행되었던 함경도의 신앙인들과 깊은 유대감을 형성했으며, 호주선교회는 일제 침략의 관문이 되어버린 불교의 땅 경상남도에서 복음, 의료, 교육 선교에 헌신했다. 미국 장감선교회에 비해 상대적으로 열악한 형편의 캐나다와 호주 선교회였지만, 선교사들의 순전함과 헌신은 신실한 신앙인의 표상으로 오늘날까지 잔잔한 감동을 전해주고 있다. 한국교회사 관련 강의를 할 때마다, 매켄지와 데이비스의 이야기를 신학생들에게 들려준다. 특히 신학대학원 목회자 후보생들에게는, 매켄지와 데이비스 같은 ‘하나님의 백성’ 그리고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가기를 부탁한다. 참된 스승보다 반면교사가 더 많다고 느껴지는 세상을 살아가는 오늘, 매켄지와 데이비스 선교사가 더욱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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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0-22
  • [송길원 목사]다시 벤허(Ben-Hur)를 보다
    서기 26년 로마 제국, 예루살렘의 명문가 귀족 ‘유다 벤허(찰턴 헤스턴)’는 한 순간에 노예로 전락한다. 어린 시절의 절친 ‘메살라(스티븐 보이드)’의 배신이었다. 무너진 지위와 가족을 되찾기 위한 목숨 건 대결이 시작된다. 중추절, 다시 ‘벤허’를 보았다. 해상 전투에 이은 전차경주의 장엄한 모습은 손에 땀을 쥐게 한다. 스펙터클하다. 지축을 흔드는 요란한 말밥굽 소리, 거품을 뿜어내는 말의 거친 호흡,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장면들, 그리고는 끝내 월계관을 머리에 쓰는 역전의 장면들은 말 그대로 서스펜스다. 가슴이 뻥 뚫릴 만큼 시원하다. 나는 영화의 또 다른 장면을 주목했다. # 장면 하나. ‘둥 둥 둥 둥’ 유대 청년 벤허도 북소리에 맞추어 노를 저었다. 한 순간 사령관과 벤허의 눈길이 마주친다. 사령관이 묻는다. “여기에 온지 얼마나 되었느냐?” 이글거리는 벤허의 눈, 답한다. “네 놈의 달력으론 2년 내 달력으론 20년이다” 바로 그 순간, 사령관이 말한다. “저놈은 노예가 아니라 자유혼을 가진 놈이다. 놓아주라” 가슴 찡한 장면이다. # 장면 둘. 벤허는 갤리선에서 발이 묶인 채 노를 젓는다. 실제 노잡이는 노예가 아닌 자유민을 썼다. 노 젓기는 숙련된 기술이 필요했다. 노예에게 강제로 맡길 일이 아니었다. 노가 엉켰다가는 큰 일이었다. 갤리선은 평소엔 바람으로 움직이는 범선이다. 하지만 전투가 닥치면 돛을 접는다. 지중해의 변덕스러운 바람이 싸움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노잡이들의 실력은 이때 드러난다. 숙련된 노잡이는 돛을 접을 때와 펼 때를 안다. # 장면 셋. 메살라와 로마에 ‘복수’에 성공한다. 하지만 여전히 괴로워한다. 갈등하는 벤허에게 던지는 에스더의 말을 추적해 보라. “개가 개를 낳고, 피는 피를 낳는다. 죽음은 죽음을 가져온다. 탐욕은 탐욕을 낳는다.” “당신이 마치 메살라가 된 것 같다.” 주인공 벤허는 메살라와 싸우는 것이 아니다. 자신 속에 있는 괴물과의 싸움이었다. 타오르는 보복과 증오, 원망이 있다. 영화의 앵글을 바꾸어 보라. 보복과 용서의 처절한 싸움은 더 흥미진진하다. 끝내 벤허는 그리스도가 보여준 용서를 따른다. 고백한다. “(그 분이) 내 손에 칼을 빼앗아 갔다.” 그 분은 로마 황제가 아닌 그리스도였다. 영화는 남북전쟁의 영웅인 루 월리스 장군이 쓴 소설 ‘벤허:그리스도의 이야기’를 원작으로 한다. 내 속에도 자리 잡고 있는 ‘보복’이란 무서운 괴물이 있다. 나는 종종 복수에 몸을 떤다. 잠에서도 싸운다. 난 그런 내가 무섭다. 엔딩 자막이 흐르는 순간, 나도 모르게 두 손을 모은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And forgive us our debts, as we forgive our debtors.) 추석에 가족들과 만남에서 입은 상처가 있다면 벤허를 시청하며 ‘용서’를 구해볼 수는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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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0-01
  • [송시섭 교수]끌림과 쏠림
    한 지역 작가의 글 속에서 ‘마음이 끌리는 대로 살고 싶다’는 구절을 읽은 적이 있다. 아마도 마음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정말 하고 싶은 일로 인생을 채우고 싶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이런 말을 듣는 어르신들의 입장에서는 ‘인생을 내 맘대로 살 수 있나’하고 고개를 갸우뚱하시겠지만, 자라나는 젊은 세대에겐 ‘마음이 끌리는 대로 살라’는 조언은 꼭 필요한 잠언(箴言)이다. 공식적인 직장생활이 10년밖에 남아 있지 않음을 알게 된 무렵, 난 조용히 자신에게 다짐했다. ‘정말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참으로 써보고 싶은 글을 쓰겠다’는 약속이었다. 그렇게 마음을 먹어서인지 주변에 보이는 사람들이, 그리고 사건들이 다르게 다가온다. 그간 읽었던 자료들이, 사 모아두었던 책들이 하나의 주제로 나를 몰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고, 그 동안의 경험들이 하나의 주제를 향해 나를 ‘이끄는’ 느낌, 아니 내가 ‘끌려가는’ 느낌을 갖게 되는 요즘이다. (이 주제를 옆에 있는 아내에게 이야기했더니 눈을 동그랗게 뜬다.) 아무튼 이 나이쯤 되어 아이들에게 아버지로서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마음이 끌리는 대로 살라’는 주문이다. 전도서(Ecclesiastes)에도 큰 전제가 있긴 하지만 ‘청년이여 네 어린 때를 즐거워하며 네 청년의 날들을 마음에 기뻐하여 마음에 원하는 길들과 네 눈이 보는 대로 행하라’고 권면하고 있지 않은가. 어릴 때 이런 삶을 갖지 못한 젊은이는 늘 누군가의 지도와 인도가 없이는 방향을 설정하지 못하고, 설정된 방향마저도 제 힘으로 내딛지 못하고, 자신만의 걸음을 걷지 못한다. 하지만 어린 시절부터 마음 가득한 기쁨을 안고, 마음에 원하는 길들을 행했던 이들은 참으로 행복한 자들이리라. 여기서 말하는 ‘기쁨’과 ‘원함’이 ‘방탕’과 ‘탐욕’은 아닐 터이기 때문이다. 교육을 주업(主業)으로 하면서 살아가는 하루하루의 주된 관심은 ‘누가 공부를 잘 하는가’이다. 여기서 공부(工夫)란 단지 시험을 위한 공부가 아니라, 일평생 무언가를 끊임없이 탐구하고 고민하고 이를 정리해보고자 하는 자세를 말한다. 달리 말하자면 인생 전체가 무언가에 ‘끌림’이 있는 사람들이 누군가 하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과 만나는 일은 즐겁고 행복하다. 그들과 나눈 대화에선 꼭 무언가는 배운다. 반면 참으로 안타까운 학생들도 있다. 끊임없이 무언가에 ‘쏠려’ 다니는 사람들이다. 누군가의 방법이 좋다고 하는 말에 혹해서 지금까지 자신이 쌓아왔던 노력을 하루아침에 내팽개치고 이 사람의 조언, 저 사람의 방법론을 기웃거리며 살아간다. 이른바 ‘늘 대세를 따르는’ ‘쏠림’의 사람을 만나면 이내 대화가 끊어지고, 무미건조한 세상이야기만 잔뜩 하게 된다. 니체가 그랬다던가. ‘만인이 좋아하는 책에서는 언제나 불쾌한 냄새가 난다’고. 인공지능이 판칠 것으로 예상되는 미래에도 살아남을 수 있는 꼭 필요한 인재는 누구일까. 끊임없는 호기심을 갖고 평생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매진하면서 비록 큰돈을 벌지 못해도, 크게 성공한 기업을 일구지 못했다 하더라도 늘 미소와 땀으로 얼굴을 채우는 사람들일 것이다. 그들에겐 금메달은 ‘끌려서’ 도달한 끝 지점에 놓여있는 작은 선물에 불과하지, 결코 그들의 삶의 목표이자, 전부가 아니다. 그런 사람들에겐 대통령이란 자리도 이웃의 삶을 위한 헌신의 ‘즐거움’의 끝자락에 걸려있는 흰 줄이지, 사람들을 몰고 다니는 위세와 세력이 아니다. 자신의 삶 근처를 환히 비추는 사람들, 자신이 몸담고 있는 조직과 지역을 어제보다 좀 더 아름답게 만들었던 사람들, 그들이 우리의 금메달리스트요, 우리의 대통령이다. 삼수(三修), 사수(四修)를 해서라도 대통령이 되어야 직성이 풀린다는 정치인들, 돈이 된다면 어떤 형태의 장사도 마다하지 않는 문어발식 기업가들을 만날 때, 난 그런 사람들에게 끌리지 않는다. 점점 더 나만의 끌림이 없고, 점점 더 그들의 쏠림만 있는 세상, 늘 이웃과 동고동락했던 친근한 동장님, 동네의 작은 사랑방이 되었던 빵가게가 사라져 버린 앞으로의 대한민국이 우리의 다음 세대에게 끌림이 있을지 의문이다. 정말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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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9-03
  • [강규철 장로]하나님의 뜻과 나의 뜻
    교회의 지도자들이 가장 많이 하는 말 중에 하나가 ‘하나님의 뜻이다’ 일 것입니다. 교회의 현안 문제를 결정할 때 흔히 ‘기도 합시다’ 하고는 얼마 후 결정을 하고는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합니다. 어느 누구도 이의를 내지 말라는 뜻입니다. 아무리 그 결과가 잘못 되어도 말입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어느 교회에서 새로운 목사님을 청빙하였습니다. 치열한 경쟁을 뚫고 한 목사님이 결정되었고 당회는 전교인들에게 하나님께서 우리교회에 보내주신 하나님의 종이라고 소개했습니다. 그러다 얼마 후 당회는 그 목사님을 강제 사임을 시켰습니다. 이유야 얼마든지 만들 수 있겠지요. 그런데 그들이 언급했던 ‘하나님께서 보낸 종’을 쫓아 내보내면 두 가지 문제점이 생긴다는 것을 간과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큰 실수를 하신 것으로 오해될 수 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런 문제 있는 목사를 그 교회에 보낼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께서 보낸 종을 마음대로 쫓아낼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제법 큰 교회에서 담임목사를 청빙하는 광고를 내었습니다. 이를 본 작은 교회 목사님이 신청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청빙이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몰래 하였지만 이를 알게 된 그 교회 성도들은 당연히 반대를 하겠지요. 이럴 때 많이 하는 말이 기도를 해보고 결정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는 하나님께서 그곳으로 가라고 하신다며 본 교회를 떠나 큰 교회로 부임합니다. 위의 두 가지 내용은 유사한 면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제 마음대로 해석하고 왜곡하는 것입니다. 이는 개인의 뜻을 하나님의 뜻으로 애서 포장한 것입니다. 바로 사람들이 스스로 결정하고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뜻이고 이를 하나님께서 하셨다고 책임전가를 한 모양새가 된 것입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뜻을 가장 잘 알고 지킬려고 한 분이 계십니다.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자기의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얼마나 전심으로 기도하셨는지 피땀을 흘릴 정도로 하셨습니다. 그로인해 그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수치와 고통을 겪으시고 종내에는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를 믿는 성도들이라면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교회의 지도자들은 너무나 쉽게 ‘기도해보겠다’ ‘하나님의 뜻이다’라고 말합니다. 십계명에는 하나님의 이름을 망녕되이 일컫지 말라 하셨습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로 세운 것입니다. 교회의 결정, 특히 당회의 중대한 결정을 하게 될 때는 우선적으로 ‘하나님의 마음’ ‘교회의 덕’ ‘성도의 마음’을 신중하게 헤아려야 할 것입니다. 물론 자신의 뜻이 위의 것과 부합하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은 것이 문제이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몸소 낮은 곳에서 ‘섬김의 본과 순종의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밤새워 기도하며 우는 자와 함께 울고 슬퍼하는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모습을 따라 가다보면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가를 분별 하게 되겠지요. 오늘의 한국교회는 내외적으로 엄청난 위기의순간이라고 합니다. 이럴 때에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려 교회와 성도들을 겸손히 섬기고 헌신하는 교회의 지도자들이 많이 나오길 간절히 소망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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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8-13
  • [최병학 목사]위치지정적 세계관
    현대 종교학계의 큰 별인 시카고 대학의 종교학자 조너선 스미스는 『자리 잡기: 의례 내의 이론을 찾아서』(이학사, 2009)에서 ‘위치지정적 세계관(locative worldview)’이라는 말을 소개합니다. 곧,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정해진 자기 자리’에 있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경계를 넘거나, 권위에 도전하거나, 나아가 공동체에서 배제된 ‘이상한 존재’들이 ‘정상적인 사람들’의 세상 속으로 들어오는 것을 반대합니다. 왜냐하면 기존의 질서를 해치는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공동체 내의 질서는 ‘신적인 권위’에 의해 정해진 성스러운 것입니다. 만약 이 질서가 무너져 혼란이 일어나기 시작하면 공동체가 무너지고, 나아가 온 세상이, 온 우주가 무너지기 때문에 모든 것은 정해진 자기 자리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스미스는 자리에 대한 인간의 이해가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 사회적인 의미를 지닌다는 것을 밝혀냈습니다. 그리고 이 사회적인 의미는, 아주 중요한데 권력의 문제로 귀결됩니다. 중요한 것은 이렇게 표면적으로는 종교적이지만 내적으로는 권력에 의해 구성된 자리의 이미지는 이데올로기적인 것이어서, 현실과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가령 스미스가 잘 분석하였듯이, 성경 에스겔서에 나오는 제사장 에스겔의 환상에서 묘사되는 도시와 사원(예루살렘 성전)은, 그 당시 제사장들이 추구한 권력의 공간 배치를 형상화한 꿈의 사원이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바빌로니아 사원 텍스트, 위네바고족(북아메리카 인디언)의 부족 세계관 등은 종전의 연구에서라면(엘리아데의 ‘성스러움’의 관점) 우주의 질서를 보여주는 종교적이고 이상적인 세계관으로 언급되었겠지만, 스미스는 이들의 세계관이 보여주는 것은 통치자의 권력의 언어로 이루어진 것이지, 민중의 현실에서는 해당되지 않는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따라서 스미스는 책의 부제와 같이 ‘의례 내의 이론’을 찾아냅니다. 그것은 곧 ‘의례 내의 자리들 간에는 구조주의적인 관계성’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의례 내에 존재하는 체계성’, ‘언어적인 구조’를 뜻합니다. 스미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자리들 간에 맺어진 체계성은 옮겨질 수 있고, 다른 말로 번역할 수 있다.” 이러한 구조주의적인 논의를 바탕으로 스미스는 종교사에 대한 기발한 해석을 제시합니다. 예를 들어 유대교의 ‘예루살렘 성지의 체계’라는 공간적 구조가 기독교로 옮겨오면서 ‘전례의 교회력’이라는 시간적인 구조로 ‘번역’되었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인들과 유대인들이 현실적으로 예루살렘이라는 성스러운 공간에 접근 불가능하게 되었을 때, 그들은 예루살렘 내에 존재하던 체계성을 ‘옮겨 오는’ 의례적 해결책을 모색한 것입니다. 그 결과 유대교는 ‘미슈나(Mishnah)’라는 규범의 체계가, 기독교에서는 ‘교회력’이라는 시간적 체계가 발달했다는 것이 스미스의 주장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변화된 시대에 기독교의 교회력은 어떻게 어디로 옮겨져야 할까요? 유대교처럼 규범적 체계로 번역되고 옮겨져야 할까요? 제가 보기에는 ‘위드-코로나 시대’에 온-오프, All-라인 공간과 규범 체계로 번역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위치지정적 세계관’에서 ‘위치지정’을 확장시켜야 할 것입니다. 하늘/땅, 정상/비정상, 남/녀, 인간/동물, 어른/어린이, 나이든 세대/젊은 세대, 동/서 할 것 없이 모두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통일되어야 할 것입니다. 에베소에 보내는 편지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엡 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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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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