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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종문 목사] 칼빈주의 오대 강령: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과 은혜의 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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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주의 오대 강령(TULIP)은 1618-1619년 도르트 총회에서 아르미니안주의에 반박하며 확립된 교리로서, 이는 구원에서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과 은혜를 강조하며, 인간이 타락한 존재임을 인정하고 구원의 모든 과정이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로 이루어진다고 선언한다.
첫째, 전적 타락(Total Depravity)은 인간이 아담의 타락으로 인해 본성이 완전히 부패하여 스스로 하나님을 찾거나 구원을 받을 능력을 상실했음을 의미한다. 인간의 영적 상태는 완전한 무능력에 놓여 있으며, 이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받을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인간은 선함을 선택할 자유조차 없다는 점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절대적임을 깨닫게 된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도다”(로마서 3:10-11).
둘째, 무조건적 선택(Unconditional Election)은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자신의 주권적 뜻에 따라 구원받을 자들을 조건 없이 선택하셨음을 강조한다. 이 선택은 인간의 공로나 선행과 무관하며,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뜻에 근거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선택은 인간의 어떠한 행위에도 종속되지 않는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에베소서 1:4).
셋째, 제한 속죄(Limited Atonement)**는 그리스도의 속죄가 모든 인류를 위한 잠재적 가능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자들을 위한 실제적이고 확실한 구원을 이루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의 희생은 선택받은 자들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이루어졌으며, 그들에게만 효과적으로 적용된다.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요한복음 10:15).
넷째, 불가항력적 은혜(Irresistible Grace)는 하나님의 은혜가 선택받은 자들의 마음을 변화시키며, 회개와 믿음으로 반드시 끌어낸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성령은 인간의 저항을 극복하고 하나님의 구원을 성취하도록 역사하며, 이는 하나님의 은혜가 실패하지 않는다는 절대성을 드러낸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요한복음 6:37).
다섯째, 성도의 견인(Perseverance of the Saints)은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성도가 끝까지 믿음을 지키며 구원을 완성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구원이 인간의 의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에 의해 유지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선택받은 성도는 하나님의 주권 아래 영원히 구원을 보장받는다.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요한복음 10:28).
칼빈주의 오대 강령은 각 항목이 논리적으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으며, 하나의 완전한 구원 교리로 작동한다. 전적 타락은 인간의 무능력을 강조하며, 무조건적 선택과 제한 속죄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주권성과 확실성을 보여준다. 불가항력적 은혜는 하나님의 은혜가 반드시 성취됨을 선언하고, 성도의 견인은 구원의 영원한 안전성을 보장한다.
이 다섯 강령은 인간의 공로를 배제하고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달려 있음을 선언한다. 이는 성도들에게 소망과 확신을 제공하며, 하나님의 주권과 사랑을 높이는 교리로 작용한다. 칼빈주의 오대 강령은 단순히 신학적 논리를 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신앙의 핵심으로서 오늘날에도 깊은 감동과 도전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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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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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길원 목사] 가족의 경계와 새로운 패러다임: 2024년 한국 가족 이슈를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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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은 한국 사회에서 가족이라는 주제가 논의의 중심에 섰던 해였다. 비혼 출산, 동성혼 논쟁, 초혼 연령의 상승 등 전통의 가족 개념에 도전하는 현상이 주목받았다. 이러한 변화는 우리 사회가 직면한 저출산, 고령화, 가족 다양성의 확대라는 과제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배우 정우성과 모델 문가비가 결혼하지 않고 아이를 양육하겠다고 발표한 사건은 비혼 출산에 대한 논란을 촉발했다. 한국에서 비혼 출산 비율은 5% 미만으로, 여전히 전통의 가족 구조가 강하게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OECD 평균 비혼 출산율 41.9%에 비하면, 한국 사회의 인식은 분명 변화의 기로에 서 있다.
비혼 출산을 둘러싼 논의는 단지 개인의 선택 문제가 아니다. 사회의 지원 체계와 법 제도의 문제로 이어진다. 정치권이 논의 중인 연대관계등록제와 동거혼제는 이러한 변화에 대한 대응이다. 그러나 이러한 제도의 도입이 전통 가족의 해체를 가속화할 것인지, 아니면 새로운 형태의 가족을 인정하는 진전일지는 여전히 논쟁 중이다.
10월 27일, 서울에서 열린 대규모 연합예배는 동성혼 합법화와 차별금지법 제정에 대한 반대 목소리를 보여준 상징이었다. 동성 커플의 건강보험 피부양자 자격을 인정한 판결 이후, 전통가족 개념을 옹호하는 기독교계의 반발은 더욱 거세졌다.
동성혼을 둘러싼 논의는 단지 법적 권리의 문제가 아니다. 가족의 정의를 재구성하고, 새로운 형태의 결합이 사회 안정성을 보장할 수 있는지에 대한 신학의 질문을 제기한다. 동시에 동성 커플과 그 자녀의 권리를 보호하면서도, 전통 가치를 존중할 수 있는 균형점을 찾는 것은 중요한 과제가 된다.
2023년 남성의 초혼 연령은 34.0세, 여성은 31.5세로 꾸준히 상승하고 있다. 이는 사회 경제 요인과 개인의 결혼관 변화로 인한 현상이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는 결혼과 출산의 지연으로 이어져 저출산 문제를 심화시키고 있다. 정치권에서는 ‘저출산’을 ‘저출생’이란 용어를 바꾸며 책임 소재를 재조명하고 있다. 하지만 용어 변경이 근본적 해결책이 될 수는 없다. 한국 사회는 출산과 육아의 부담을 줄이고, 결혼하지 않아도 안정된 양육 환경을 보장할 수 있는 정책 지원이 필요하다.
다문화 가정과 한부모 가정의 증가는 가족 형태의 다양성을 보여준다. 2024년 정부는 한부모 가정 지원 정책을 강화하며 이들의 안정된 생활을 도모하고 있다. 다문화 가정의 확대는 한국 사회의 문화 다양성을 촉진하지만, 동시에 언어와 정체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추가 지원이 요구된다.
이와 같은 2024년의 가족 이슈들은 기존의 전통 가족 모델이 새로운 형태로 전환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비혼, 동성혼, 한부모, 다문화 가정 등 다양한 가족 형태는 이제 주변부가 아니라 중심부로 다가오고 있다.
교회는 이러한 변화 속에서도 가족 본질의 의미와 가치를 되새기는 역할을 해야 한다. ‘가정을 가정되게 하라’는 메시지는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전통 가치를 지키는 한편, 새로운 가족 모델을 포용하는 방안까지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가족은 단순히 개인의 결합이 아니라 사회적 안정과 지속 가능성을 지탱하는 핵심이다. 2024년 한국 사회는 가족의 정의와 경계가 확장되는 중요한 전환점을 맞았다. 변화는 불가피하지만, 그 속에서 균형을 유지하고, 전통과 현대를 아우르는 새로운 가족 모델을 구축하는 것은 우리 모두의 과제가 될 것이다. 벌써 2025년을 기다리며 기대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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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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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창호 목사] 엘리트 탈북청년들을 위한 선교전략이 시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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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부가 보도한 자료에 따르면 2024년 6월 현재 한국에 입국한 탈북민은 34,183 명이다. 2023년 한 해 동안 196명, 올해 1월부터 6월까지 6개월간 105명이 추가로 입국되었다. 코로나 사태 직전이던 2019년에 1,047 명이던 것이, 코로나가 발생하자 조중국경이 폐쇄되면서 2020년에 229명으로 급격하게 줄더니, 2021년 63명, 2022년 67명까지 감소하다가 코로나사태가 진정되면서 2023년도에 196명으로 늘어났다. 전년도에 대비 약 3배 가깝게 증가된 수치이다.
하지만 압록강과 두만강을 잇는 조중 국경지역은 여전히 폐쇄되어 있고, 중국 내 탈북자들 입지는 악화일로에 있다. 최첨단 IT기술을 동원한 중국공안의 탈북자 색출과 검거는 고도화 되었다. 붙잡힌 탈북자들은 현장에서 즉시 구속되고 대부분 강제북송된다. 중국정부는 한국정부의 탈북자 강제북송 금지 요청이나, 유엔인권위의 경고 따위에는 눈 하나 꿈쩍도 안한다. 백약이 무효이다. 따라서 북한에서 중국으로, 중국에서 제3국으로 탈출하는 이전의 루트는 사실상 막혔다고 보는 것이 정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이어지는 탈북행렬은 무슨 영문인가?
믿을만한 소식통에 의하면 2023년 196명 가운데 90여명이 북한내 엘리트 간부와 그 자녀들, 장마당 신흥 돈주들, 북한정권 보위부 고급 간부들, 외교관들, 북한인민군 장성급들도 포함되어 있다. 이들은 배를 구입하여 서해와 동해를 통해 탈북하거나, 해외공관에서 제3국으로 조용히 잠입하여 탈출하거나, 러시아 출장 중 모스크바 유엔사무소로 직접 진입하여 망명 입국하는 경우도 있다.
전에 없었던 북한 내 사회지도급 엘리트 인사들이 새로운 루트를 통해 대거 탈북하고 있는 것이다. 얼마 전 필자가 만난 30대 초반 탈북청년도 평양 명문대학 출신에 부모가 둘 다 북한 고위직에 있다고 말했다. 그는 현재 한국 최고의 대학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데, 북한 노동당 내 고급정보를 다루는 연구원으로 일하다 한국의 발전상과 선진된 모습을 확인하고 자유를 찾아 용기를 내어 탈북한 케이스다.
그의 말에 의하면, 북한 젊은이들 대부분은 다양한 외부루트를 통해 이미 한국이 북한과 비교도 안될 정도로 선진화된 나라라는 정보를 익히 알고 있으며, 기회만 닿으면 북한을 탈출하려고 준비하고 있는 자들이 생각보다 많다고 한다. 전에 없던 북한의 엘리트 청년 탈북민들이 한국에 밀려올 조짐이 보이는 것이다. 이들은 더 이상 먹을 것이 없거나, 삶의 고통을 피하여 오는 자들이 아니다. 자유와 미래를 향한 또 다른 비전을 품은 새로운 세대들이다. 한국교회와 성도들, 그리고 북한선교를 주사역의 장으로 갖고 있는 선교단체들은, 증가하고 있는 북한 젊은 엘리트 탈북민들을 효과 있게 선교하여 복음의 도구로 쓰임받게 할 수 있는 고도화 전략을 세워야만 한다. 이들은 북한 내부 엘리트층들과의 연결고리를 갖고 있는 중요한 자원들이다. 그들이 원하는 전공과 관심분야를 살펴 장려하고 계발시켜 미래 북한 복음화의 일꾼들로 쓰임받을 수 있게 해야한다. 한국교회는 이들도 품어야 한다. 시급하고 진지하게 구체적인 전략을 고민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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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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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종 교수] 그리스도인과 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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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생어무위(福生於無爲) 이환생어다욕(而患生於多慾)’이라는 말이 있다. ‘전한(前漢)’시대(BC 200-8)의 학자 ‘한영(韓嬰)’의 저술인 ‘한시외전(韓詩外傳)’에 나오는 표현으로 ‘복은 욕심을 내지 않는 것에서 생겨나고, 염려는 욕심이 많은 것에서 비롯된다’는 뜻이다. 사람이 마음먹기에 따라 행복할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욕심을 부리지 않으면 누구나 행복할 수 있다는 말로도 들린다. 정말 인간이 욕심을 내지 않고, 모든 것에 자족하는 마음을 가지면 행복할 수 있는 것일까?
현대인들은 대부분 행복하기를 갈망한다. 행복이 삶의 목표가 되기도 한다. 행복해지고 싶은 인간의 욕망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럼에도 자신이 행복하다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다. 유엔산하자문기구인 ‘지속가능발전해법네트워크’에서는 매년 140여 국가를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하고 그 결과를 기초로 행복지수를 산출하여 순위를 발표한다. 2024년에는 10점 만점에 7.741점을 받은 핀란드가 행복지수가 가장 높은 국가로 발표되었다. 우리나라는 6.058점으로 52위에 랭크되었다. 2021년에는 5.845점으로 62위, 2022년에는 5.935점으로 59위, 2023년에는 57위였다. 전체적으로 행복 지수가 나아지고 있지만, OECD 국가들 가운데서는 거의 최하위권에 해당한다. 이 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국민들은 그다지 행복하지 않은 셈이다.
사실 ‘행복’이란 매우 주관적인 감정으로 기준을 정하는 것이 쉽지 않다. 현대 심리학에서 행복은 기본적으로 ‘쾌락’을 의미한다. 이 ‘쾌락’은 개인의 만족감이나 긍정적인 감정에 초점을 맞춘다. 내가 만족스러우면 행복하다고 느끼게 된다. 이런 생각을 쉽게 확인하는 방법은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당신은 언제 행복한가?’라고 질문해 보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원하는 것을 이루었을 때’ 혹은 ‘기대하지 않았던 결과를 얻었을 때’라고 답할 가능성이 높다. 행복학을 연구하는 연세대 서은국 교수는 내가 즐거움을 느끼면 행복하다고 말한다. 행복의 기준이 개인이 되어야 함을 강조하는 입장이다. 그렇다면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고, 소유하면 정말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행복에 대해 근원적 질문을 던진 대표적인 철학자는 ‘아리스토텔레스’이다. 그는 이성을 통해 인간의 탁월함을 나타냄으로써 인간다움을 추구하고 최고의 상태에 이르는 것을 행복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인간의 삶의 목적이 행복이라고 말하면서 행복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라고 가르쳤다. 하지만, 나의 행복이 누군가의 희생과 고통 위에 만들어지는 것이라면 과연 우리는 이 행복을 올바른 삶의 목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런 점에서 현대 사회가 추구하는 행복을 성경적이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자신의 만족과 즐거움을 우선적으로 추구하기 때문이다.
성경에는 행복에 대한 언급보다 평화에 대한 가르침이 압도적이다. 성경은 나의 마음을 다스리고 욕심에서 벗어나 만족하는 삶을 추구하면 행복해질 수 있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성경은 개인의 행복보다는 함께 누리는 평화에 주목한다. 평화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에이레네’이고 히브리어는 ‘샬롬’이다. 신구약 성경은 ‘평화’에 대한 가르침으로 가득하다. 나아가 성경은 우리가 행복한 사람이 되기보다 ‘평화를 가져오는 사람(peacemaker)’이 되라고 가르친다. 우리 시대의 행복은 개인적이지만, 성경이 말하는 평화는 관계적이다. 그리스도인은 나의 행복이 최고의 가치인 시대를 살지만 자신만의 행복을 추구하기 보다 함께 평화를 누리는 삶을 소망하는 사람이다.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고, 그 평화를 사람들과 함께 누리는 것이 그리스도인을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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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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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헌 목사] 지역교회와 미션스쿨의 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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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는 매력적인 선교지이다. 오늘날 교회와 기독교인들이 사회 속에서 감당해야 할 사명 중 하나는 다음 세대에 신앙을 전수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학교는 매우 중요한 선교지 중 하나이다. 학생들이 하루의 대부분을 보내며, 지식과 인성을 형성하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학교는 신앙의 가르침이 배제된 채, 세속적인 가치관과 인본주의적 교육이 주된 흐름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학교를 선교지로 바라보는 시각은 교회와 기독교인들에게 새로운 도전이자 기회의 장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2008년부터 브니엘고등학교에 교목으로 부임하여 17년의 시간이 흘렀다. 17년 학교 사역 기간동안 글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놀라운 사역의 결과물들이 있었다. 하지만 사역의 결과들은 교목실 단독으로만 해낼 수 있는 일들이 아니었다.
2008년 학교 부임과 동시에 이삭교회 교육 목사로 고등부를 맡아서 겸직을 하게 되었다. 2008년부터 2016년까지 9년의 사역기간동안 이삭교회는 본교회 교역자요, 지역학교 교목인 나를 전적으로 믿고 최선의 후원을 해주었었다.
당시 이삭교회 담임목사님이셨던 정진섭 목사님은 당회와 교회의 허락을 얻어 매년 4천만 원(?)여의 재정을 들여서 이삭교회와 금정구 자원봉사센터와 브니엘고등학교가 연합으로 지역의 홀로 어르신들의 도시락 반찬을 매주 배달해 주는 봉사 프로그램을 운영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 재정과 반찬 만드는 봉사는 이삭교회가 맡아 주었고, 홀로 어르신들 선정과 봉사 시간 부여 행정은 금정구 자원봉사센터가, 그리고 만들어진 도시락 배달은 브니엘고등학교 1학년 60명, 2학년 60명 학생이 격주로 홀로 어르신들을 찾아서 배달해 주는 봉사를 7년 동안 후원해 주었다. 이를 통해 브니엘고등학교 사랑의 도시락 봉사자 학생들은 졸업 때까지 평균 120시간 정도의 봉사 시간을 부여받아 졸업하게 되었다. 단순히 봉사 시간만 부여받은 것이 아니다. 이것은 단순히 인성교육과 입시결과에만 영향을 준 것이 아니라 교회에 대한 시각변화와 나아가서는 기독교에 대한 자세가 바뀌어지는 결과들로 이어졌다.
사랑의 도시락 봉사를 했던 학생 중 서울대에 합격한 제자가 자신이 받은 장학금을 불교 신자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대학 진학이 이삭교회 사랑의 도시락 봉사로 인한 것이라는 고백을 담아 편지까지 적어서 교회에 헌금을 한 일도 있었다.
2018년부터는 브니엘예술고등학교에 전보 와서 7년째 근무하고 있다. 이 기간에 브니엘예술고등학교는 학교 채플 장소를 학교 인근 함께하는교회(담임 황동한 목사)당에서 3년간 장소사용허락을 얻어 사용했었다. 이유는 교회를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아이들이 이런 기회를 통해서라도 교회를 출입해 보는 경험을 주고자 함이었다. 교회가 공간을 내어주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월요일 같은 경우는 모든 교역자가 쉬는 날인데 휴일을 반납하고 뒤처리할 것이 많은 학생 채플 공간으로 대여하는 것은 교회의 결단이 아니면 쉬운 일은 아니었다.
2024년 우리 학교 채플은 지역교회인 제자들교회(담임 김규환 목사)와 연합으로 진행하고 있다. 월간 채플이라는 이름으로 드려지는 매월 첫 주 채플에 제자들교회는 청소년부 사역자를 메신저로 그리고 매월 아이들의 먹거리를(매월 30여만 원 지출) 우리 학생들에게 조건 없이 제공해주고 있다. 채플을 섬긴다고 해서 우리 학교 아이들이 제자들교회에 출석하는 것이 아님에도 지역교회의 사명이 지역 미션스쿨을 돕는 것이라는 사명으로 섬겨주고 있다.
우리 학교 비전 홀에서는 주일마다 2021년에 개척한 브릿지교회(담임 이성근 목사)가 예배를 드리고 있다. 브릿지교회 역시 우리 학교가 필요한 것들을 언제든지 채우기 위해 살피고 있다.
결국 미션스쿨은 혼자 존재하는 곳이 아니다. 지역교회와 지역학교가 함께 할 때 미션스쿨들이 버틸 힘을 가지고 버텨나갈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사랑과 섬김을 받은 아이들은 개독교라고 부르던 것이 어느 순간부터 개독이 아니라 기독으로 바뀌게 된다. 복음은 말로만 전해지는 것이 아니다. 지금 아이들에게 더더욱 그렇다. 복음은 말이 아니라 삶이며, 복음은 들려지는 소리로 인해 그 영향력은 더 커지게 되는 것이다. 지역교회들이 눈을 조금만 돌려서 주변의 미션스쿨들과 교회 안의 기독교사들을 잘 격려해 주었으면 한다. 다음 세대가 없다고 말만 하는 것이 아니라 다음 세대가 일어날 수 있는 근원지인 학교를 포기하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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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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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병학 목사] 메두사의 웃음은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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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페미니즘’을 대표하는 세 학자가 있습니다. 뤼스 이리가레(벨기에 출신), 줄리아 크리스테바(불가리아), 그리고 엘렌 식수(알제리)입니다. 글쓰기를 매우 중요하게 여긴 포스트 구조주의자들입니다. 특히 식수는 『메두사의 웃음』(1975)을 통해 여성적 글쓰기를 페미니즘 실천 전략으로 제시합니다. 그녀의 말을 들어볼까요? “메두사를 보기 위해서는 정면에서 그녀를 바라보는 것으로 충분하다. 메두사, 그녀는 치명적인 존재가 아니다. 그녀는 아름답다. 그리고 그녀는 웃고 있다.”
프로이트는 여성이 거세되었다는 자신의 이론을 설명하기 위해 페르세우스와 메두사의 신화를 선택합니다. 그의 논문 「메두사의 머리」에서 그는 몸부림치는 뱀으로 이루어진 머리카락이 달린 메두사의 머리는 거세된 여성 성기의 상징이라고 주장합니다. 따라서 여성은 남근이 거세되었기 때문에 공포를 불러일으킨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남성이 여성에게 거세의 상상적 힘을 부여했기 때문에 여성을 공포스럽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닌가요?
이를 위해 식수는 해체철학자 자크 데리다의 ‘로고스중심주의’ 논의를 받아들여 거꾸로 뒤집습니다. 로고스중심주의가 남근중심주의를 낳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남근중심주의가 로고스중심주의를 낳는다는 것입니다. 식수가 보기에 남근중심주의는 ‘여성성’이라는 미지의 대륙에 대해 남성이 느끼는 두려움의 산물입니다. 따라서 『메두사의 웃음』에서 식수는 메두사의 얼굴을 보는 자를 모두 돌로 만드는 ‘메두사 신화’가 남성의 두려움을 보여준다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두려움이 남근중심주의를 낳고 이 남근중심주의가 로고스중심주의를 낳는 것입니다.
결국, 이 로고스중심주의적 이분법을 깨뜨려야만 여성이 남성의 식민지 상태에서 해방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식수는 여기에 라캉에게서 얻은 ‘상징계(언어로 이루어진 상징적 질서, 곧 우리가 사는 세계)’라는 통찰을 더 합니다. 결국, 로고스중심주의는 상징계의 언어 구조 안에서 작동합니다. 따라서 남근중심주의/로고스중심주의를 깨뜨리려면 상징질서, 언어 질서를 바꿔야 합니다. 이때 등장하는 것이 바로 ‘여성적 글쓰기’입니다. 이러한 여성적 글쓰기는 남성적 언어 구조를 바꾸는 실천 전략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성적 글쓰기의 구체적인 모습은 무엇인가요? 식수가 보기에 여성적 글쓰기에는 남성적 글쓰기가 지탱해온 억압적인 질서를 해체하는 해방의 힘이 깃들어 있는 것입니다. 기존 전통과 다른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 내는 글쓰기입니다. 자기 안에 있는 타자성, 곧 여성성을 발견하는 글쓰기입니다. 성서에 나오는 예언자들의 예언이 여성적 글쓰기라고 할 수 있겠죠? 따라서 이때 식수가 말하는 여성성과 남성성은 생물학적으로 규정된 성에 한정되지 않습니다. 여성적 글쓰기를 감행한 남성 작가로 식수는 셰익스피어를 거명하기도 합니다.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전통과는 다른 것을 해낸 시인들이 있다. 사랑을 사랑할 수 있는 남성들, 그래서 타자들을 사랑하고 타자들을 원할 수 있었던 남성들이 바로 여성적 글쓰기를 실천한 남성들이다.”
셰익스피어의 글쓰기는 관습에 저항한 주인공들을 보여줍니다(물론, 이것을 욕망으로 볼 수 있겠지만). 이 남성들은 자기 안에서 타자 곧 여성성을 발견해 회복한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보면 식수의 여성적 글쓰기는 여성과 남성을 모두 인간으로 해방하는 실천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 앞에 아름다운 메두사가 있습니다. 잃어버릴 것이 많은 이들은 메두사를 똑바로 보지 못합니다. 무수한 권력자, 남성들이 그렇습니다. 무언가가 너무 소중하면 그것을 잃을까 두려워 다른 것을 똑바로 ‘보지 않기/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성적 글쓰기를 감행하는 남성은 보기 싫은 것도 열심히 봅니다. 보기 거북하면 물러서서 보고 그리고 또 생각해야 합니다. 결국, 그것은 고대 세계의 위대한 어머니 여신이자 지혜의 여신인 메티스의 딸 메두사를 제대로 보는 것입니다. 돌이 될까 두렵나요? 아닙니다. 마음을 비우고 남근중심의 상징계를 벗어버리면 돌이 아니라, 참 지혜를 얻을 것입니다. 똑바로 보고 편견 없이 보고 제대로 보세요. 놀라운 세상이 열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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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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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현범 목사] 사회학적 상상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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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세상과 분리된 깊은 숲속이 아니라 세상 한가운데 세워졌다. 그리고 그 세상은 개개인이 모래알처럼 흩어져서 살아가는 곳이 아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남자와 여자로 만들어 사회적 존재로 시작하게 한 세상은 다양한 사회로 구성되어 갔다. 그 사회를 크게 두 가지로 나눈다면, 사회학자 퇴니스의 말처럼 이익 추구와 상관없는 친족, 이웃, 종교 집단 등의 ‘공동체’(Gemeinschaft)와 회사나 정당 등 이익을 목적으로 한 ‘결사체’(Gesellschaft)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모두를 포괄하는 국가라는 복합체가 있다. 그래서 신학자 요더는 성경이 말하는 세상은 실질적으로는 국가를 가리키는 것이라 했다.
이곳은 개인과 달리 사회구조와 시스템이 있고 그것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하는 이념(이데올로기)이 있다. 우리는 삼권분립, 자유와 인권, 자유 무역, 시장과 물가 그리고 의료보험, 복지혜택 등을 말하지만, 그러한 사회구조와 시스템들은 민주주의, 자유주의, 자본주의, 사회주의, 그리고 오늘날의 신자유주의 등 다양한 이념들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은 이 땅에 임한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면서 동시에 세상 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가고 있다. 그들이 모여 형성된 교회 공동체 또한 이 사회의 빛과 소금으로 세워졌다. 그 말은 모이는 교회라는 조직체가 사랑과 의와 성결의 모습으로 세상에 선한 도전을 주어야 한다는 뜻임과 동시에, 흩어지는 교회로서 교인 각 사람이 자신이 몸담은 사회 속에서 선한 영향력을 미치면서 복음의 증인으로 살아야 한다는 말이다.
이를 위해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속해있는 사회를 잘 알고 이해해야 한다. 사회를 이해할수록 우리는 어떤 사건이나 현상을 개인적인 관점만이 아니라, 사회적 관점을 갖고 보다 객관적으로 이해하게 된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처한 빈곤의 원인이 그 자신에게 있기도 하지만, 사회구조나 정치가 직간접적인 원인이 되기도 한다. 1996년에 라이프매거진에 나이키 축구공을 바느질하는 12세의 파키스탄 소년 사진이 실렸다. 그는 하루 10시간씩 217일을 일해야 나이키 신발 하나를 살 수 있을만큼 저임금에 혹사당하고 있었다. 이를 계기로 나이키 불매운동이 일어났고, 사람들은 제 3 세계 가난의 원인이 이윤추구에만 혈안이 된 기업들과 유통구조에도 있음을 보게 되었다. 오직 복음만을 전하기 위해 아프리카 코트디부아르로 간 한 선교사는 시간이 지나면서 그 나라의 가난과 정치적인 혼란의 배후에 자신의 이속만 챙기려고 하는 과거 식민지 종주국인 프랑스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미국의 사회학자 밀스는 인간과 사회, 개인의 일생과 역사, 자아와 세계 사이의 상호작용을 파악하는 능력을 ‘사회학적 상상력’(sociological imagination)으로 부르고, 이것이 빈약할수록 사람들은 일상적인 삶의 모습을 개인적인 것으로만 간주하면서 역사적 변동과 사회구조적, 제도적 모순과 연결하여 생각하지 못한다고 했다.
우리나라의 다양한 집단 가운데 이 사회학적 상상력이 가장 빈곤한 곳이 교회가 아닐까 한다. 우리의 신앙이 너무 개인과 교회의 울타리 안에 갇혀있고, 그 울타리 넘어 세상을 어둠의 영역으로 여기면서 무관심하다 보니, 역사와 사회에 대한 이해가 빈곤하다. 더 나아가 사회구조를 뒷받침하는 여러 다양한 이념들에 대해서는 더욱 이해가 부족하다 보니, 오히려 특정한 정치 경제적 이념을 성경의 가르침과 일치시키며 신앙적 확신으로 삼는 우를 범하게 된다.
인간 삶의 모든 영역이 만유의 주재이신 그리스도의 것이라 했던 카이퍼의 말처럼, 교회뿐 아니라 사회 역시 우리 주님의 통치 영역이다. 그 사회를 주님의 뜻에 합당하게 보다 의로운 사회, 평화로운 사회, 건강한 사회로 만들어 가야 할 책임이 그의 제자들에게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보다 더 풍부한 사회학적 상상력을 배양해서 우리 사회를 객관적으로 올바르게 이해하고 주님이 원하는 방향으로 개혁시켜 나갈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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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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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지일 교수] 인터콥과 다락방, 데칼코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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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를 내세우는 다락방, 그리고 ‘선교’에 집착하는 인터콥에서 거의 동시에 연이은 탈퇴자들이 나오고 있다. 오랜 기간 다락방과 인터콥에서 헌신적으로 활동했던 목회자들과 선교사들이 모든 기득권을 버리고 회한(悔恨) 속에 탈퇴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인터콥의 경우, 지난 2024년 3월부터 5월까지 인터콥 선교사 300여 명이 탈퇴했다고 한다. 전체 인터콥 선교사의 20%에 이르는 수치다. 인터콥에 몸담고 가족과 함께 선교 오지에서 활동하던 이들의 주된 탈퇴 이유는, 인터콥 설립자이자 본부장인 최바울 및 그의 가족과 관련된 재정 문제, 즉 재산 사유화의 문제 때문으로 알려졌다.
인터콥의 공적 자산이, 최바울 본부장 가족에 의해 사유화되고 있으며, 또한 부인과 자녀가 인터콥 주요 요직에 포진된 것도, 불만 요인으로 나타나고 있다. 인터콥 선교사들이 세계 곳곳의 위험지역에서 가족들과 힘든 선교 활동을 해 나아가는 동안, 최바울 본부장과 가족들은 안전한 한국에서 풍요롭게 살며, 재산을 사유화하고 있다는 의혹이 신빙성 있게 제기되고 있다.
다락방도 비슷한 형편이다. 지난 7월 16일 다락방 탈퇴 목회자와 사모 40여 명의 한국교회에 사죄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탈퇴의 주된 이유는 다락방 내 핵심 간부들의 성범죄가 계기가 되었으며, 이를 통해 다락방 교리의 오류를 깨달았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이와 함께 다락방의 건축헌금과 목적헌금 명세를 공개하라고 요구했다.
인터콥과 다락방 모두 처음에는 순수한 전도와 헌신적인 선교운동으로 시작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현재는 설립자의 사리사욕과 비윤리적 행태로 인한 내부적 혼란과 분열을 겪고 있다. 평생을 혹은 인생의 황금기를 인터콥과 다락방에서 보낸 목회자와 선교사들의 자괴감이 얼마나 클지 짐작하기도 어렵다.
인터콥과 다락방은 가장 많은 교단으로부터 공식적인 문제 제기를 받아왔다. 인터콥에 대해서 통합(예의 주시, 참여 자제), 합동(교류 단절), 합신(참여 금지, 교류 금지, 이단), 고신(초청 금지, 참여 금지, 심각한 이단성을 가진 불건전 단체), 기성(경계 대상), 기침(불건전 단체), 기하성(예의 주시, 참여 금지) 교단의 공식적인 결의가 있었으며, 다락방도 고려(비성경성), 고신(불건전 운동, 이단), 통합(사이비성), 합동(이단), 기성(사이비운동), 기침(이단성), 기감(이단), 기하성(이단) 교단의 공식적인 규정이 있었다. 하지만 인터콥과 다락방은, 자신들의 문제는 이단성이 아니라, 기성교회의 질시와 투기 때문이라고 공공연히 주장해왔다.
하지만 최근 인터콥과 다락방 소속 선교사들과 목회자들의 탈퇴를 보며, 한국교회의 우려와 염려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었음을 발견하게 된다. 인터콥은, 교회를 신앙의 중심으로 이해하기보다, 인터콥 비전스쿨이나 단기선교 참가자를 모집하는 공간으로 이용하는 한편, 인터콥 활동에 대한 참여도를 기준으로 영적 수준을 판단하면서, 교회의 전통적인 질서를 무력화하고, 교회의 분열을 조장했다. 또한, 다락방 전도 운동이 도입된 국내외 교단이나 교회에서도 다수의 분열이 조장되었으며, 소속 교회를 위해 헌신하도록 이끌기보다, 교회 밖의 렘넌트 활동과 모임에 참여하도록 강조했다.
성령은 우리를 하나 되게 한다. 과연 교회의 분열을 초래하는 인터콥 선교와 다락방 전도 운동을 성령의 역사로 볼 수 있을까? 선교단체의 재정을 편취 혹은 사유화하고, 전도 운동을 명분으로 성과 돈을 노린다면, 이는 ‘하나님 나라를 위한 사역’이 아니라 ‘사리사욕을 위한 사업’에 지나지 않는다.
용기를 가지고 인터콥과 다락방을 탈퇴한 선교사들과 목회자들이, 2차 가해의 대상이 되지 않도록, 그리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다시 한번 헌신적으로 사역할 수 있도록, 한국교회의 관용과 관심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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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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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대우 교수] 장로교회의 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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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로는 구약의 이스라엘에도 신약의 교회에도 있었다. 구약성경의 장로는 나이가 많고 통치능력을 갖춘 사람이라면 신약성경의 장로 요건은 신앙이 깊고 통치능력을 갖춘 사람을 의미한다. 신약교회에서 장로는 유대교 전통의 용어인 반면에 장로와 동일한 의미의 감독은 로마제국의 명칭이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교회 장로들을 밀레도로 불러서 고별설교를 하면서 그들을 “감독”으로 지칭하기 때문에 장로와 감독은 동의어다.(행 19:17-38)
또한 바울은 신약교회의 감독 즉 장로를 주요 업무에 따라 두 종류 즉 “잘 다스리는 장로”와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장로로 구분한다(딤전 5:17). 다스리는 장로는 흔히 우리가 부르는 장로에 해당하고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장로는 오늘날 목사에 해당한다. 목사든 장로든 초대교회에서는 모두 하나님의 종으로 동일한 교회의 사역자를 의미한다. 바울은 그들 모두를 교회가 마땅히 존경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성경의 감독 즉 장로로서 목사와 장로는 2세기경부터 감독인 주교와 장로로 확실하게 나뉜다. 감독은 공적 지도자로서 교회를 책임지고 목회하는 사제인데 반하여 장로는 교회 행정을 담당하는 사무 행정가다. 장로는 교회의 통일성을 위해 감독에게 순종해야 한다. 이것은 장로가 감독과 동등하지 않다는 증거이자 서열화를 암시한다. “감독(주교) 없이는 교회도 없다.”
3세기 교회는 확실하게 위계적 감독제도로 보인다. 장로들도 사도직을 계승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들이 감독을 따르는 한에서만 그렇다. 점차 감독이 절대적 권위를 갖게 됨으로써 장로의 자리는 점차 역사 속으로 사라지기 시작하는데, 결국 로마의 감독 즉 교황 중심의 중세교회에서는 장로 직분이 흔적도 없이 자취를 감추고 만다.
중세 천년 동안 사라진 장로 직분을 부활시킨 것은 개혁파 종교개혁자들이다. 오늘날 장로교회는 16세기 종교개혁, 특히 칼빈의 제네바 종교개혁으로부터 유래한다. 칼빈이 장로제도의 이론을 체계화한 인물이라면 장로교회의 기초를 놓은 인물은 스트라스부르의 종교개혁자 마르틴 부써(Martin Bucer)다. 칼빈은 가시적 교회 즉 지상교회에 관한 많은 것들을 부써에게서 배웠다. 하지만 장로교회는 부써교회도 칼빈교회도, 심지어 낙스교회도 아니다.
부써와 칼빈의 가르침에 영향을 받아 세워진 교회에는 요한 낙스(John Knox)의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에 뿌리를 둔 전 세계의 모든 장로교회뿐만 아니라, 프랑스의 위그노교회와 네덜란드 개혁교회, 그리고 독일의 개혁교회 등 대륙의 교회들도 포함된다. 칼빈의 제네바 종교개혁과 낙스의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의 가장 큰 차이점은 하나는 일개 도시 단위의 종교개혁이고 다른 하나는 국가 단위의 종교개혁이라는 사실에 있다.
제네바교회의 정치제도는 가깝게는 프랑스 위그노교회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는데, 프랑스 개혁교회와 네덜란드 개혁교회는 국가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각 도시나 마을에 개별적으로 교회를 설립하고 그 후에 일정 지역 내의 교회들이 연합하여 노회를 구성하는 형태였다. 다시 말하면 도시교회인 제네바교회와도 다르고 국가교회인 스코틀랜드교회와도 다른 모습이었다. 프랑스 개혁교회는 16세기 후반에, 네덜란드는 17세기 중반에 특정 지역의 유일한 교회형태로 인정받고 자리를 잡게 되었다.
오늘날 장로교회는 로마교회, 영국국교회, 감리교회, 회중교회, 침례교회, 루터교회 등과 확연하게 구분된다. 장로교회라는 이름의 기원은 스코틀랜드 장로교회다. 그렇다면 스코틀랜드 장로교회를 알아야 장로교회를 안다고 할 수 있다.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의 특징은 1560년의 제1 스코틀랜드 교회치리서와 1578년의 제2 스코틀랜드 교회치리서, 그리고 1645년의 웨스트민스터 정치질서에 잘 나타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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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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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철 목사] 특별하고 유능한 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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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에 독일을 다녀왔다. 자녀들이 출석하는 독일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면서 내가 사는 시대가 얼마나 편리한 시대인지 다시한번 체감했다. 독일어는 고등학교 때 제2외국어로 잠깐 배운게 전부인 내가 통역 없이 설교자의 메시지를 60~70%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번역기 앱을 켜고 독일어를 한글로 번역해 달라고 설정하고 음성을 선택하고 나니 스피커를 통해 나오는 독일어를 한글 텍스트로 바로 번역해 주었다. 여행 중에도 언어로 인한 불편함이 많이 줄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식당 메뉴판이 어느 나라 말이든 상관없이 카메라로 찍어 번역을 요청하면 그 음식이 어떤 종류인지 금방 알 수 있었다. 종 종 재미난 번역도 있긴 했지만 음식메뉴를 이해하는데 아무런 불편이 없었다. 한글 지원이 안 되는 박물관이나 관광지 표지판 등 이 기능 하나로 그 내용을 이해할 수 있었다. 마치 내가 모든 언어가 능통한 비서를 한 명 대동하고 다니는 듯 했다.
최근 우리가 가장 많이 듣는 단어 중 하나가 인공지능이라 불리는 AI이다. Open AI.사가 대화 전문 인공지능 챗봇인 ChatGPT를 발표한 이후에 세계는 AI전쟁에 돌입했다. 요즘 나오는 대부분의 물건에는 AI라는 말을 붙여서 나올 정도이다. 필자는 AI 특히 ChatGPT를 아주 다양한 분야에서 활용하고 있다. 내가 가진 한계를 넘어 내가 필요한 부분에 언제든지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유능한 비서를 월 20$에 고용하여 함께 일하고 있다.
AI 비서는 나에게 여러 가지로 도움을 준다.
첫 번째는 성경구절 인용을 풍성하게 해 준다.
인터넷이 나오기 전 목회자들은 수권에 이르는 성구사전을 두고 내가 필요한 구절을 찾았다. 인터넷 검색기능이 활성화 되면서 이제는 데이터베이스로 구축된 앱을 통해 내가 필요로 하는 구절을 검색하여 사용한다. 하지만 앱을 통한 검색의 기본은 정확하게 그 단어를 알아야 한다. 단어가 정확하지 않으면 내가 어렴풋이 아는 구절을 인용할 수 없다. 하지만 내 AI비서는 단어를 몰라도 그 구절 속에 이런 어떤 어떤 의미를 가진 구절을 구절을 찾아달라고 요구하면 금방 여러 개의 구절을 내 앞에 뿌려준다.
두 번째는 내가 필요한 그림을 그려준다.
이전에는 성경공부나 설교를 준비하다가 내가 원하는 그림이 있는데 인터넷 검색을 통해서 마음에 드는 그림을 찾지 못하면 더 이상 방법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AI비서에게 그림을 그려 달라고 요구한다. 처음에는 그려준 그림에서 이 부분만 빼고 싶어서 다시 시키면 기존의 그림은 온데 간데 없고 또 새로운 그림을 그려 주었다. 그런데 요즘은 유능해져서 그려준 그림에서 일부분만 수정하는 기능까지 구현해 준다. 심지어 요즘은 한국사람으로 표현해 달라고 하는 요구까지 받아서 처리해 준다.
세 번째 원어에 대한 도움도 준다.
설교 준비를 하다 보면 한글로 번역된 단어에 대하여 같은 원어로 사용된 것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성경에서 지금 내가 보는 이 단어와 같은 의미로 사용된 것을 찾는 일은 쉽지 않은 작업이다. 그런데 AI 비서는 그리 어렵지 않게 찾아준다. 특정 성경구절을 원어로 표시하고 각 단어의 의미를 설명해 봐라고 하면 몇 초안에 그 답을 제공한다. 진짜 똑똑한 비서이다.
AI비서에게 다양한 분야에서 많은 도움을 받고 있다. 특히 나의 전문사역인 컴퓨터선교 사역을 위해 필요한 웹사이트와 프로그램까지도 이 비서는 도와준다.
1989년부터 컴퓨터 선교 사역을 하면서 느낀 것은 기독교계는 새로운 문화가 나오면 부정적인 접근에 익숙하다는 것이다. 분명 AI도 양날의 칼처럼 음양이 존재한다. 그 부분들은 사용하는 사람이 잘 분별하고 사용하면 된다. 몇 개월이라도 AI비서를 고용하여 다양한 분야에서 활용해 보라고 권한다. 분명 내가 부족한 많은 영역에서 도움을 줄 것이라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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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