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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병학 목사] 메두사의 웃음은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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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페미니즘’을 대표하는 세 학자가 있습니다. 뤼스 이리가레(벨기에 출신), 줄리아 크리스테바(불가리아), 그리고 엘렌 식수(알제리)입니다. 글쓰기를 매우 중요하게 여긴 포스트 구조주의자들입니다. 특히 식수는 『메두사의 웃음』(1975)을 통해 여성적 글쓰기를 페미니즘 실천 전략으로 제시합니다. 그녀의 말을 들어볼까요? “메두사를 보기 위해서는 정면에서 그녀를 바라보는 것으로 충분하다. 메두사, 그녀는 치명적인 존재가 아니다. 그녀는 아름답다. 그리고 그녀는 웃고 있다.”
프로이트는 여성이 거세되었다는 자신의 이론을 설명하기 위해 페르세우스와 메두사의 신화를 선택합니다. 그의 논문 「메두사의 머리」에서 그는 몸부림치는 뱀으로 이루어진 머리카락이 달린 메두사의 머리는 거세된 여성 성기의 상징이라고 주장합니다. 따라서 여성은 남근이 거세되었기 때문에 공포를 불러일으킨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남성이 여성에게 거세의 상상적 힘을 부여했기 때문에 여성을 공포스럽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닌가요?
이를 위해 식수는 해체철학자 자크 데리다의 ‘로고스중심주의’ 논의를 받아들여 거꾸로 뒤집습니다. 로고스중심주의가 남근중심주의를 낳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남근중심주의가 로고스중심주의를 낳는다는 것입니다. 식수가 보기에 남근중심주의는 ‘여성성’이라는 미지의 대륙에 대해 남성이 느끼는 두려움의 산물입니다. 따라서 『메두사의 웃음』에서 식수는 메두사의 얼굴을 보는 자를 모두 돌로 만드는 ‘메두사 신화’가 남성의 두려움을 보여준다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두려움이 남근중심주의를 낳고 이 남근중심주의가 로고스중심주의를 낳는 것입니다.
결국, 이 로고스중심주의적 이분법을 깨뜨려야만 여성이 남성의 식민지 상태에서 해방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식수는 여기에 라캉에게서 얻은 ‘상징계(언어로 이루어진 상징적 질서, 곧 우리가 사는 세계)’라는 통찰을 더 합니다. 결국, 로고스중심주의는 상징계의 언어 구조 안에서 작동합니다. 따라서 남근중심주의/로고스중심주의를 깨뜨리려면 상징질서, 언어 질서를 바꿔야 합니다. 이때 등장하는 것이 바로 ‘여성적 글쓰기’입니다. 이러한 여성적 글쓰기는 남성적 언어 구조를 바꾸는 실천 전략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성적 글쓰기의 구체적인 모습은 무엇인가요? 식수가 보기에 여성적 글쓰기에는 남성적 글쓰기가 지탱해온 억압적인 질서를 해체하는 해방의 힘이 깃들어 있는 것입니다. 기존 전통과 다른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 내는 글쓰기입니다. 자기 안에 있는 타자성, 곧 여성성을 발견하는 글쓰기입니다. 성서에 나오는 예언자들의 예언이 여성적 글쓰기라고 할 수 있겠죠? 따라서 이때 식수가 말하는 여성성과 남성성은 생물학적으로 규정된 성에 한정되지 않습니다. 여성적 글쓰기를 감행한 남성 작가로 식수는 셰익스피어를 거명하기도 합니다.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전통과는 다른 것을 해낸 시인들이 있다. 사랑을 사랑할 수 있는 남성들, 그래서 타자들을 사랑하고 타자들을 원할 수 있었던 남성들이 바로 여성적 글쓰기를 실천한 남성들이다.”
셰익스피어의 글쓰기는 관습에 저항한 주인공들을 보여줍니다(물론, 이것을 욕망으로 볼 수 있겠지만). 이 남성들은 자기 안에서 타자 곧 여성성을 발견해 회복한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보면 식수의 여성적 글쓰기는 여성과 남성을 모두 인간으로 해방하는 실천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 앞에 아름다운 메두사가 있습니다. 잃어버릴 것이 많은 이들은 메두사를 똑바로 보지 못합니다. 무수한 권력자, 남성들이 그렇습니다. 무언가가 너무 소중하면 그것을 잃을까 두려워 다른 것을 똑바로 ‘보지 않기/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성적 글쓰기를 감행하는 남성은 보기 싫은 것도 열심히 봅니다. 보기 거북하면 물러서서 보고 그리고 또 생각해야 합니다. 결국, 그것은 고대 세계의 위대한 어머니 여신이자 지혜의 여신인 메티스의 딸 메두사를 제대로 보는 것입니다. 돌이 될까 두렵나요? 아닙니다. 마음을 비우고 남근중심의 상징계를 벗어버리면 돌이 아니라, 참 지혜를 얻을 것입니다. 똑바로 보고 편견 없이 보고 제대로 보세요. 놀라운 세상이 열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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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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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현범 목사] 사회학적 상상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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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세상과 분리된 깊은 숲속이 아니라 세상 한가운데 세워졌다. 그리고 그 세상은 개개인이 모래알처럼 흩어져서 살아가는 곳이 아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남자와 여자로 만들어 사회적 존재로 시작하게 한 세상은 다양한 사회로 구성되어 갔다. 그 사회를 크게 두 가지로 나눈다면, 사회학자 퇴니스의 말처럼 이익 추구와 상관없는 친족, 이웃, 종교 집단 등의 ‘공동체’(Gemeinschaft)와 회사나 정당 등 이익을 목적으로 한 ‘결사체’(Gesellschaft)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모두를 포괄하는 국가라는 복합체가 있다. 그래서 신학자 요더는 성경이 말하는 세상은 실질적으로는 국가를 가리키는 것이라 했다.
이곳은 개인과 달리 사회구조와 시스템이 있고 그것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하는 이념(이데올로기)이 있다. 우리는 삼권분립, 자유와 인권, 자유 무역, 시장과 물가 그리고 의료보험, 복지혜택 등을 말하지만, 그러한 사회구조와 시스템들은 민주주의, 자유주의, 자본주의, 사회주의, 그리고 오늘날의 신자유주의 등 다양한 이념들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은 이 땅에 임한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면서 동시에 세상 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가고 있다. 그들이 모여 형성된 교회 공동체 또한 이 사회의 빛과 소금으로 세워졌다. 그 말은 모이는 교회라는 조직체가 사랑과 의와 성결의 모습으로 세상에 선한 도전을 주어야 한다는 뜻임과 동시에, 흩어지는 교회로서 교인 각 사람이 자신이 몸담은 사회 속에서 선한 영향력을 미치면서 복음의 증인으로 살아야 한다는 말이다.
이를 위해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속해있는 사회를 잘 알고 이해해야 한다. 사회를 이해할수록 우리는 어떤 사건이나 현상을 개인적인 관점만이 아니라, 사회적 관점을 갖고 보다 객관적으로 이해하게 된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처한 빈곤의 원인이 그 자신에게 있기도 하지만, 사회구조나 정치가 직간접적인 원인이 되기도 한다. 1996년에 라이프매거진에 나이키 축구공을 바느질하는 12세의 파키스탄 소년 사진이 실렸다. 그는 하루 10시간씩 217일을 일해야 나이키 신발 하나를 살 수 있을만큼 저임금에 혹사당하고 있었다. 이를 계기로 나이키 불매운동이 일어났고, 사람들은 제 3 세계 가난의 원인이 이윤추구에만 혈안이 된 기업들과 유통구조에도 있음을 보게 되었다. 오직 복음만을 전하기 위해 아프리카 코트디부아르로 간 한 선교사는 시간이 지나면서 그 나라의 가난과 정치적인 혼란의 배후에 자신의 이속만 챙기려고 하는 과거 식민지 종주국인 프랑스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미국의 사회학자 밀스는 인간과 사회, 개인의 일생과 역사, 자아와 세계 사이의 상호작용을 파악하는 능력을 ‘사회학적 상상력’(sociological imagination)으로 부르고, 이것이 빈약할수록 사람들은 일상적인 삶의 모습을 개인적인 것으로만 간주하면서 역사적 변동과 사회구조적, 제도적 모순과 연결하여 생각하지 못한다고 했다.
우리나라의 다양한 집단 가운데 이 사회학적 상상력이 가장 빈곤한 곳이 교회가 아닐까 한다. 우리의 신앙이 너무 개인과 교회의 울타리 안에 갇혀있고, 그 울타리 넘어 세상을 어둠의 영역으로 여기면서 무관심하다 보니, 역사와 사회에 대한 이해가 빈곤하다. 더 나아가 사회구조를 뒷받침하는 여러 다양한 이념들에 대해서는 더욱 이해가 부족하다 보니, 오히려 특정한 정치 경제적 이념을 성경의 가르침과 일치시키며 신앙적 확신으로 삼는 우를 범하게 된다.
인간 삶의 모든 영역이 만유의 주재이신 그리스도의 것이라 했던 카이퍼의 말처럼, 교회뿐 아니라 사회 역시 우리 주님의 통치 영역이다. 그 사회를 주님의 뜻에 합당하게 보다 의로운 사회, 평화로운 사회, 건강한 사회로 만들어 가야 할 책임이 그의 제자들에게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보다 더 풍부한 사회학적 상상력을 배양해서 우리 사회를 객관적으로 올바르게 이해하고 주님이 원하는 방향으로 개혁시켜 나갈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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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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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지일 교수] 인터콥과 다락방, 데칼코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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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를 내세우는 다락방, 그리고 ‘선교’에 집착하는 인터콥에서 거의 동시에 연이은 탈퇴자들이 나오고 있다. 오랜 기간 다락방과 인터콥에서 헌신적으로 활동했던 목회자들과 선교사들이 모든 기득권을 버리고 회한(悔恨) 속에 탈퇴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인터콥의 경우, 지난 2024년 3월부터 5월까지 인터콥 선교사 300여 명이 탈퇴했다고 한다. 전체 인터콥 선교사의 20%에 이르는 수치다. 인터콥에 몸담고 가족과 함께 선교 오지에서 활동하던 이들의 주된 탈퇴 이유는, 인터콥 설립자이자 본부장인 최바울 및 그의 가족과 관련된 재정 문제, 즉 재산 사유화의 문제 때문으로 알려졌다.
인터콥의 공적 자산이, 최바울 본부장 가족에 의해 사유화되고 있으며, 또한 부인과 자녀가 인터콥 주요 요직에 포진된 것도, 불만 요인으로 나타나고 있다. 인터콥 선교사들이 세계 곳곳의 위험지역에서 가족들과 힘든 선교 활동을 해 나아가는 동안, 최바울 본부장과 가족들은 안전한 한국에서 풍요롭게 살며, 재산을 사유화하고 있다는 의혹이 신빙성 있게 제기되고 있다.
다락방도 비슷한 형편이다. 지난 7월 16일 다락방 탈퇴 목회자와 사모 40여 명의 한국교회에 사죄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탈퇴의 주된 이유는 다락방 내 핵심 간부들의 성범죄가 계기가 되었으며, 이를 통해 다락방 교리의 오류를 깨달았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이와 함께 다락방의 건축헌금과 목적헌금 명세를 공개하라고 요구했다.
인터콥과 다락방 모두 처음에는 순수한 전도와 헌신적인 선교운동으로 시작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현재는 설립자의 사리사욕과 비윤리적 행태로 인한 내부적 혼란과 분열을 겪고 있다. 평생을 혹은 인생의 황금기를 인터콥과 다락방에서 보낸 목회자와 선교사들의 자괴감이 얼마나 클지 짐작하기도 어렵다.
인터콥과 다락방은 가장 많은 교단으로부터 공식적인 문제 제기를 받아왔다. 인터콥에 대해서 통합(예의 주시, 참여 자제), 합동(교류 단절), 합신(참여 금지, 교류 금지, 이단), 고신(초청 금지, 참여 금지, 심각한 이단성을 가진 불건전 단체), 기성(경계 대상), 기침(불건전 단체), 기하성(예의 주시, 참여 금지) 교단의 공식적인 결의가 있었으며, 다락방도 고려(비성경성), 고신(불건전 운동, 이단), 통합(사이비성), 합동(이단), 기성(사이비운동), 기침(이단성), 기감(이단), 기하성(이단) 교단의 공식적인 규정이 있었다. 하지만 인터콥과 다락방은, 자신들의 문제는 이단성이 아니라, 기성교회의 질시와 투기 때문이라고 공공연히 주장해왔다.
하지만 최근 인터콥과 다락방 소속 선교사들과 목회자들의 탈퇴를 보며, 한국교회의 우려와 염려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었음을 발견하게 된다. 인터콥은, 교회를 신앙의 중심으로 이해하기보다, 인터콥 비전스쿨이나 단기선교 참가자를 모집하는 공간으로 이용하는 한편, 인터콥 활동에 대한 참여도를 기준으로 영적 수준을 판단하면서, 교회의 전통적인 질서를 무력화하고, 교회의 분열을 조장했다. 또한, 다락방 전도 운동이 도입된 국내외 교단이나 교회에서도 다수의 분열이 조장되었으며, 소속 교회를 위해 헌신하도록 이끌기보다, 교회 밖의 렘넌트 활동과 모임에 참여하도록 강조했다.
성령은 우리를 하나 되게 한다. 과연 교회의 분열을 초래하는 인터콥 선교와 다락방 전도 운동을 성령의 역사로 볼 수 있을까? 선교단체의 재정을 편취 혹은 사유화하고, 전도 운동을 명분으로 성과 돈을 노린다면, 이는 ‘하나님 나라를 위한 사역’이 아니라 ‘사리사욕을 위한 사업’에 지나지 않는다.
용기를 가지고 인터콥과 다락방을 탈퇴한 선교사들과 목회자들이, 2차 가해의 대상이 되지 않도록, 그리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다시 한번 헌신적으로 사역할 수 있도록, 한국교회의 관용과 관심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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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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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대우 교수] 장로교회의 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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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로는 구약의 이스라엘에도 신약의 교회에도 있었다. 구약성경의 장로는 나이가 많고 통치능력을 갖춘 사람이라면 신약성경의 장로 요건은 신앙이 깊고 통치능력을 갖춘 사람을 의미한다. 신약교회에서 장로는 유대교 전통의 용어인 반면에 장로와 동일한 의미의 감독은 로마제국의 명칭이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교회 장로들을 밀레도로 불러서 고별설교를 하면서 그들을 “감독”으로 지칭하기 때문에 장로와 감독은 동의어다.(행 19:17-38)
또한 바울은 신약교회의 감독 즉 장로를 주요 업무에 따라 두 종류 즉 “잘 다스리는 장로”와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장로로 구분한다(딤전 5:17). 다스리는 장로는 흔히 우리가 부르는 장로에 해당하고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장로는 오늘날 목사에 해당한다. 목사든 장로든 초대교회에서는 모두 하나님의 종으로 동일한 교회의 사역자를 의미한다. 바울은 그들 모두를 교회가 마땅히 존경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성경의 감독 즉 장로로서 목사와 장로는 2세기경부터 감독인 주교와 장로로 확실하게 나뉜다. 감독은 공적 지도자로서 교회를 책임지고 목회하는 사제인데 반하여 장로는 교회 행정을 담당하는 사무 행정가다. 장로는 교회의 통일성을 위해 감독에게 순종해야 한다. 이것은 장로가 감독과 동등하지 않다는 증거이자 서열화를 암시한다. “감독(주교) 없이는 교회도 없다.”
3세기 교회는 확실하게 위계적 감독제도로 보인다. 장로들도 사도직을 계승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들이 감독을 따르는 한에서만 그렇다. 점차 감독이 절대적 권위를 갖게 됨으로써 장로의 자리는 점차 역사 속으로 사라지기 시작하는데, 결국 로마의 감독 즉 교황 중심의 중세교회에서는 장로 직분이 흔적도 없이 자취를 감추고 만다.
중세 천년 동안 사라진 장로 직분을 부활시킨 것은 개혁파 종교개혁자들이다. 오늘날 장로교회는 16세기 종교개혁, 특히 칼빈의 제네바 종교개혁으로부터 유래한다. 칼빈이 장로제도의 이론을 체계화한 인물이라면 장로교회의 기초를 놓은 인물은 스트라스부르의 종교개혁자 마르틴 부써(Martin Bucer)다. 칼빈은 가시적 교회 즉 지상교회에 관한 많은 것들을 부써에게서 배웠다. 하지만 장로교회는 부써교회도 칼빈교회도, 심지어 낙스교회도 아니다.
부써와 칼빈의 가르침에 영향을 받아 세워진 교회에는 요한 낙스(John Knox)의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에 뿌리를 둔 전 세계의 모든 장로교회뿐만 아니라, 프랑스의 위그노교회와 네덜란드 개혁교회, 그리고 독일의 개혁교회 등 대륙의 교회들도 포함된다. 칼빈의 제네바 종교개혁과 낙스의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의 가장 큰 차이점은 하나는 일개 도시 단위의 종교개혁이고 다른 하나는 국가 단위의 종교개혁이라는 사실에 있다.
제네바교회의 정치제도는 가깝게는 프랑스 위그노교회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는데, 프랑스 개혁교회와 네덜란드 개혁교회는 국가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각 도시나 마을에 개별적으로 교회를 설립하고 그 후에 일정 지역 내의 교회들이 연합하여 노회를 구성하는 형태였다. 다시 말하면 도시교회인 제네바교회와도 다르고 국가교회인 스코틀랜드교회와도 다른 모습이었다. 프랑스 개혁교회는 16세기 후반에, 네덜란드는 17세기 중반에 특정 지역의 유일한 교회형태로 인정받고 자리를 잡게 되었다.
오늘날 장로교회는 로마교회, 영국국교회, 감리교회, 회중교회, 침례교회, 루터교회 등과 확연하게 구분된다. 장로교회라는 이름의 기원은 스코틀랜드 장로교회다. 그렇다면 스코틀랜드 장로교회를 알아야 장로교회를 안다고 할 수 있다.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의 특징은 1560년의 제1 스코틀랜드 교회치리서와 1578년의 제2 스코틀랜드 교회치리서, 그리고 1645년의 웨스트민스터 정치질서에 잘 나타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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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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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철 목사] 특별하고 유능한 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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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에 독일을 다녀왔다. 자녀들이 출석하는 독일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면서 내가 사는 시대가 얼마나 편리한 시대인지 다시한번 체감했다. 독일어는 고등학교 때 제2외국어로 잠깐 배운게 전부인 내가 통역 없이 설교자의 메시지를 60~70%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번역기 앱을 켜고 독일어를 한글로 번역해 달라고 설정하고 음성을 선택하고 나니 스피커를 통해 나오는 독일어를 한글 텍스트로 바로 번역해 주었다. 여행 중에도 언어로 인한 불편함이 많이 줄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식당 메뉴판이 어느 나라 말이든 상관없이 카메라로 찍어 번역을 요청하면 그 음식이 어떤 종류인지 금방 알 수 있었다. 종 종 재미난 번역도 있긴 했지만 음식메뉴를 이해하는데 아무런 불편이 없었다. 한글 지원이 안 되는 박물관이나 관광지 표지판 등 이 기능 하나로 그 내용을 이해할 수 있었다. 마치 내가 모든 언어가 능통한 비서를 한 명 대동하고 다니는 듯 했다.
최근 우리가 가장 많이 듣는 단어 중 하나가 인공지능이라 불리는 AI이다. Open AI.사가 대화 전문 인공지능 챗봇인 ChatGPT를 발표한 이후에 세계는 AI전쟁에 돌입했다. 요즘 나오는 대부분의 물건에는 AI라는 말을 붙여서 나올 정도이다. 필자는 AI 특히 ChatGPT를 아주 다양한 분야에서 활용하고 있다. 내가 가진 한계를 넘어 내가 필요한 부분에 언제든지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유능한 비서를 월 20$에 고용하여 함께 일하고 있다.
AI 비서는 나에게 여러 가지로 도움을 준다.
첫 번째는 성경구절 인용을 풍성하게 해 준다.
인터넷이 나오기 전 목회자들은 수권에 이르는 성구사전을 두고 내가 필요한 구절을 찾았다. 인터넷 검색기능이 활성화 되면서 이제는 데이터베이스로 구축된 앱을 통해 내가 필요로 하는 구절을 검색하여 사용한다. 하지만 앱을 통한 검색의 기본은 정확하게 그 단어를 알아야 한다. 단어가 정확하지 않으면 내가 어렴풋이 아는 구절을 인용할 수 없다. 하지만 내 AI비서는 단어를 몰라도 그 구절 속에 이런 어떤 어떤 의미를 가진 구절을 구절을 찾아달라고 요구하면 금방 여러 개의 구절을 내 앞에 뿌려준다.
두 번째는 내가 필요한 그림을 그려준다.
이전에는 성경공부나 설교를 준비하다가 내가 원하는 그림이 있는데 인터넷 검색을 통해서 마음에 드는 그림을 찾지 못하면 더 이상 방법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AI비서에게 그림을 그려 달라고 요구한다. 처음에는 그려준 그림에서 이 부분만 빼고 싶어서 다시 시키면 기존의 그림은 온데 간데 없고 또 새로운 그림을 그려 주었다. 그런데 요즘은 유능해져서 그려준 그림에서 일부분만 수정하는 기능까지 구현해 준다. 심지어 요즘은 한국사람으로 표현해 달라고 하는 요구까지 받아서 처리해 준다.
세 번째 원어에 대한 도움도 준다.
설교 준비를 하다 보면 한글로 번역된 단어에 대하여 같은 원어로 사용된 것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성경에서 지금 내가 보는 이 단어와 같은 의미로 사용된 것을 찾는 일은 쉽지 않은 작업이다. 그런데 AI 비서는 그리 어렵지 않게 찾아준다. 특정 성경구절을 원어로 표시하고 각 단어의 의미를 설명해 봐라고 하면 몇 초안에 그 답을 제공한다. 진짜 똑똑한 비서이다.
AI비서에게 다양한 분야에서 많은 도움을 받고 있다. 특히 나의 전문사역인 컴퓨터선교 사역을 위해 필요한 웹사이트와 프로그램까지도 이 비서는 도와준다.
1989년부터 컴퓨터 선교 사역을 하면서 느낀 것은 기독교계는 새로운 문화가 나오면 부정적인 접근에 익숙하다는 것이다. 분명 AI도 양날의 칼처럼 음양이 존재한다. 그 부분들은 사용하는 사람이 잘 분별하고 사용하면 된다. 몇 개월이라도 AI비서를 고용하여 다양한 분야에서 활용해 보라고 권한다. 분명 내가 부족한 많은 영역에서 도움을 줄 것이라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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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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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종문 목사] 개혁주의 교리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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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와 눈이 하늘로부터 내려서 그리로 되돌아가지 아니하고 땅을 적셔서 소출이 나게 하며 싹이 나게 하여 파종하는 자에게는 종자를 주며 먹는 자에게는 양식을 줌과 같이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이와 같이 헛되이 내게로 되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기뻐하는 뜻을 이루며 내가 보낸 일에 형통하리라.”(이사야 55:10-11)
위필드가 말하는 “복음주의”는 본질적으로 독일의 루터파가 개신교 종교개혁 시기에 이 용어를 처음 사용하기 시작했을 때 의미한 바, 즉 복음 위에 세워진 교회, 예수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운동을 통한 구원의 좋은 소식을 뜻한다. 위필드는 복음은 하나님이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행하신 일을 선포할 경우에만 좋은 소식이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복음은 은혜의 교리와 운명을 같이 한다.
은혜교리라는 말은 16세기 말에 네덜란드에서 발전한 신학에 대한 반응으로 신학자 야코뷔스 아르미니우스(1560-1609)와 관련이 있었다. 아르미니우스와 그의 추종자들은 자유로우며 그 결과 자기 결정적인 인간의 의지를 강조했고, 이 교리 특별히 예수님이 오직 택함 받은 이들 하나님이 선택하신 이들을 위해서만 죽으셨다는 가르침을 부정하게 되었다. 이러한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의 신학적 일탈에 대응하기 위해 도르트총회(1618-1619)가 소집되었고 거기서 오늘날 튤립(TULIP) 또는 칼빈주의 5대 강령으로 알려진 다섯가지 은혜의 교리에 대한 고전적 요약이 담긴 도르트 총회 신경이 나왔다.
튤립(TULIP)이란 일종의 약어로 이 단어의 각 철자는 가장 논쟁거리가 된 교리들, 즉 전적부패(Total depravity), 무조건적 선택(Unconditional election), 제한 속죄(Limited Atonement), 불가항력적 은혜(Irresistible Grace), 성도의 견인(Perseverance of saints)을 뜻한다.
이 교리들은 인간 안에 존재한다고 생각될 수 있는 어떤 영적인 선에서도 확신을 두게 하기 때문에 중요하다. 이 교리들은 칼빈주의의 가장 순수한 표현을 이루지만 칼빈이 이 교리들을 고안해 낸 것도 아니고 이 교리들이 종교개혁 시기에 그의 사상만의 특징도 아니다. 이 교리들은 칼빈주의의 가장 순수한 표현을 이루지만 칼빈이 이 교리들을 고안해 낸 것도 아니고 이 교리들이 종교개혁 시기에 그의 사상만의 특징도 아니다. 인본주의에서 인간은 자신의 삶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고, 자신의 잠재력을 충분히 발달시킬 수 있는 자아실현적 존재이다.
이러한 전제를 기반으로 한 인간의 삶은 자신이 자기애의 대상이 되며, 자기애는 행복한 삶의 동기가 된다. 그 결과 불완전한 자아의 완성에 대한 열망으로 인하여 치열한 경쟁으로 자신을 몰아가며, 극도의 이기적 합리주의 속에서 불가피하게 스스로 자유선택과 자유의지를 파괴해 가는 자기모순적 관념에 빠지게 된다. 성경적 관점에서 자아는 인본주의와 정반대의 개념을 갖는다. 인간의 자아는 절대적인 개혁(reformation)이 필요한 대상이며, 삶의 요체는 자기를 부인하는 십자가의 삶이다. 마 16:24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이기적 인간은 불변의 진리와 대면하는 순간 그 진리와 더불어 이타적 존재로 거듭나며, 참된 진리를 추구할 때 비로소 영혼과 삶의 조화를 경험하게 된다. 위와 같이 신본주의와 인본주의는 근본적으로 통합될 수 없는 개념이다. 인간은 말씀에서 멀어지면서부터 자신의 본성에 따라 움직이게 되며 삶의 목적은 욕구에 의해 동기화된다. 자신을 향한 인간본성의 방향을 절대불변의 진리로 향하게 하는 것은 초대교회, 속 사도시대, 중세, 근대 그리고 현대로 이어지는 교회의 소명이었다. 그리고 참다운 신앙공동체의 모습은 오직 말씀으로 전인격적인 성장과 변화를 통하여 예수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는(롬 12:1-2, 엡 4:13, 신 6:4-9) 신앙 교육이 온전하게 행하여진 교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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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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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일재 교수] 4.10, 22대 총선의 결과가 남긴 숙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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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하지 않은 총선이 어디 있을까만 이번 4·10 총선은 그 어느 때보다 민감하였다. 야권은 임기가 3년도 더 남은 대통령을 탄핵하겠다며 정권심판론을 내세웠고 여당은 일하는 대통령을 만들자고 야당심판론과 정권안정론을 폈다. 결과적으로 국민은 야당의 손을 들어 주었다. 국민의 선택은 언제나 옳다고 하지만 보수정치를 지지하는 사람들로서는 아쉬움이 크다. 허나 겸허하게 결과를 받아들이면서 이번 총선이 남긴 숙제를 몇가지 생각해 보고자 한다.
먼저 윤석열 대통령과 여당은 국정 운영 스타일을 바꾸는 노력을 더 하여야 한다. 비록 정책방향이 옳아도 접근 방법이 국민에게 부담스러우면 외면당한다. 그동안 안보외교 및 노동 개혁 등 국민들이 지지한 정책도 적지 않지만 대통령의 소통 부재와 독선의 이미지가 유권자의 외면을 받았다. 조속히 당정의 인적쇄신과 더불어 야당과의 대화와 소통을 해나가야 한다.
192석 거대 야당군이 된 민주당과 야당들도 막중한 책무를 느껴야 한다. 국회의 입법 지원 없이 윤석열 대통령 혼자 임기 3년을 끌어 갈 수가 없다. 야당의 도움이 절실하다. 민주당과 야당들도 협조할 것은 해야 한다. 더 이상 국회를 특정인의 방탄과 특검 등 정쟁으로 일삼고 대통령이 거부할 수밖에 없는 법안을 다수의 힘으로 밀어부쳐서는 안된다. 정치적 유불리를 떠나 대한민국을 위한 정책은 수용하고 협치하는 자세를 보여야 하는 것이다.
국회의원은 국민의 대표다. 그렇다면 국민의 눈높이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이어선 안 된다. 작은 흠집이나 도덕적 흠결도 안 된다는 게 국민의 눈높이다. 그러나 이번 선거에서 범죄혐의자나 재판 중인 범법자가 당을 만들고 총선에 출마해 국민의 대표가 되어버린 황당한 일이 실제로 나타났다. 불법 부동산 투기꾼 및 윤리적으로 파탄난 자들까지 국회의원이 되었다. 국회가 이런 자들의 놀이터요 도피처가 되어버린 셈이다.
여기에는 준연동형 비례대표제가 한 역할을 했다. 비례대표제는 원래 지역구에 출마하기 어려운 소외층이나 전문가층을 배려한 전국구로 출발하였는데, 지난 정부 때 느닷없이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만들어 제대로 검증도 안 된 사람들이 국회에 들어가는 문으로 변질되어 버렸다. 앞으로 이 잘못된 선거제도를 바로 잡아야 한다. 거대 다수당이 된 민주당과 야권이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를 쉽사리 고치지는 않겠지만, 선거전에 이미 종래의 병립형으로 돌아가자는 여야간 논의도 있었으니 이제 국민들이 나서서 다음 선거전에 바로 잡을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요구하고 압박하여야 한다.
국가적 과제는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경제도, 외교도, 안보도 모두 벅차고 중요한 과제다. 지금 세계는 국가이익을 둘러싼 무한 경쟁이 진행중이다. 주먹구구식으로 접근하거나 단순 덧셈과 뺄셈으로는 대응이 안 된다. 예컨대 돈 풀어 경제 살리는 표퓰리즘이나 “셰셰(謝謝)” 하면서 외교하고, 평화 타령하면서 안보를 대충 다뤄서는 안 되는 것이다.
우리나라가 이 정도 수준까지 올라온 바탕은 우리 국민의 땀과 피와 눈물이었다. 이 좋은 나라를 결코 후퇴시킬 수는 없다. 국가 발전을 가져오는 원동력은 국민의 노력과 역량이지만 그것을 극대화 하여 경제, 사회, 복지, 외교 등 제도와 정책으로 끌어 가는 것은 정치의 역할이다. 정치는 사람이 하는 것이다. 이번에 선출된 국회의원들이 이 정치의 사명을 잘 인식하여 대한민국을 글로벌 중심국가로 탄탄하게 이끌어 주기를 강하게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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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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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철봉 목사] 거듭되는 교황의 실언과 오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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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지도자 특히 영적 지도자의 책임감의 무거움에 대하여 매우 강한 어조로 경고하고 있다. 영적 혜안과 통찰력이 턱없이 부족한 자가 무리를 인도한다면 양자 모두 구렁텅이에 빠지게 된다. 이런 자가 지도자 노릇을 하면 천국 문을 닫아버려서 자신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한다. 교인 한 사람을 얻기 위하여 나름 노력하여 생겨나면 오히려 자신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기도 한다. 지도자는 여간 깨어있지 아니하면 회중들의 시선을 의식하여 잔과 대접의 겉을 깨끗이 하는 즉 외양을 그럴듯하게 꾸미느라 신경 많이 쓰다보니 막상 자기 내면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해질 수 있다. 누구든 자기 내면을 깨끗이 해야 겉도 깨끗해질 수 있다. 지도자들은 권력과 명성으로 치장되다보니 외양은 회를 칠해놓은 무덤처럼 아름답게 보이지만 그럴수록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게 된다.
예수님께서는 정체성을 상실하여 영적 지도력이 혼돈을 거듭하고 있는 지도자들을 향하여 아주 엄중하게 경고하신다.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마 23:33)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기점으로 하여 출발한 기독교 역사는 2천년을 맞고 있다. 기독교회 시작 445년 만에 ‘교황’이라는 칭호가 버젓이 사용된다. 그 해 6월 6일, 황제 Valentianus 3세는 로마 제국의 수도 로마에 위치한 교회(성 베드로 교회)를 담임하는 Leo 1세 감독에게 ①로마 교회 감독은 베드로의 후계자이다. ②성령의 특별한 보호에 의하여 ②로마제국의 수도에 위치한 교회의 감독이라는 비중을 감안하여 「교황 칭호를 허락하노라」는 칙령을 내린다.
알렉산드리아 교회, 프랑스 지역 교회 감독들은 로마 교회 감독이 단지 제국의 수도 로마에 위치해 있다고 해서 ‘감독의 동등성’을 무사하고 <로마교회 감독 수위권>을 주장하는 것은 성경적으로나 상식에 맞지 않으므로 엄중히 반대한다고 저항하였으나 세속 황제라는 절대 권력의 비호를 이길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이태리 볼로냐 교회 감독을 비롯하여 절대 다수의 교회 감독들은 대세에 편승하여 교황제도를 옹호하였다. 그 결과 급기야는 Gregory 1세 교황에게는 「대교황. 大敎皇」이라는 칭호까지 붙여주었다(AD 590). 이렇게 하여 로마교황은 세속 황제들과 ‘성직과 왕직’우열 다툼을 하면서 인류 역사를 호령해왔다. 그러다보니 교황의 한마디 말, 사용하는 단어 하나가 엄청난 위력을 갖게 되고 급기야 교황의 발언, 성경해석, 발표문은 ‘신적 권위’를 가지기 시작하였다. 하나님이 주시는 권위가 아님은 물론이지만 로마교 성직자들이 그렇게 분위기를 만들어 갔으며 동시에 세속 나라의 황제들과 왕들도 그 분위기에 눈 감아주거나 힘을 실어주었다. 급기야는 1870년 7월 8일, 교황 비오(pius) 9세가 주재한 제 1차 바티간 공의회에서는 “교황은 실수하지 않는다. 오류를 범하지 아니한다”라고 하는 「교황 무오류성」을 결의, 채택하였다. 이것이 교황을 신격화(神格化)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이번에 ‘무오류 하다’는 로마교황 프란시스코는 두 가지 분명한 실언(失言)을 하였다.
첫 번째는 지난 해(2023년 12월) 연말 성탄 축하 발표를 하면서 바티칸 광장에 운집한 무리를 향하여 “동성애 커플을 축복하노라”고 공표(公表)하였다. 한국 천주교는 많이 난감하였던지 2개월 동안 숙고, 고민하다가 이번 3월 초에 교황의 그 발표문과 동일한 내용을 공표하였다. 실언하지 않는다는 교황이 성경의 가르침(롬 1:26~27)과 정면 배치되는 주장을 공표하였으니 이 일을 어찌한단 말인가? 통재로다. 두 번째는 얼마 전(2024년 3월 10일) 스위스 방송(RTS)과의 대담에서 “우크라이나 젤렌스키 대통령은 전쟁 상황을 보며 국민을 생각하여 백기를 들고 협상할 수 있어야 하고 그럴 때 가장 용감한 사람이 된다고 믿는다. 상황이 더 나빠지기 전에 ‘협상하는 것’을 부끄러워 하지 말라”
참 어리석고 무지한 실언이다. 침략자 러시아의 푸틴을 향해 책망하면서 ‘무조건 철군하라’고 강권해도 모자랄 판에 이런 해괴한 말을 하다니... 당신들이 굳게 신봉하는 <교황 무오류성>이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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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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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환 사무총장] ‘보시니 참 좋았다’ 하셨던 생명의 세상을 다시 향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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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11일이면 후쿠시마 핵사고가 일어난 지 벌써 13년이 됩니다. 아직도 지진과 쓰나미에 휩쓸려가는 사람과 집, 불과 연기에 뒤덮인 원자력발전소의 모습이 트라우마처럼 우리의 뇌리에 남아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고 자연과 재산의 피해를 입은 채 방치되어 있는 곳, 아직도 고향인 그곳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아파하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후쿠시마를 기억합니다. 그리고 지금 그 핵사고로 인한 저장된 핵오염수가 해양 투기를 시작하여 바다를 따라 흐르며 해양 생태계, 우리의 생명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2011년 이후 한국의 시민사회는 후쿠시마 핵사고를 교훈 삼아 핵 없는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 계속 재생에너지로 전환하기 위한 목소리를 높여 왔습니다. 그럼에도 현재의 대한민국은 수명이 다한 핵발전소를 계속 가동하려 하고 원전의 신규건설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일본의 핵오염수 투기조차도 용인해 버리고 있습니다.
2024년 새해 첫날 전해진 일본 혼슈 중부 노토반도를 강타한 7.6규모의 지진은 우리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습니다. 속보를 통해 언론으로 전해지는 인명과 재산의 피해는 다시 한번 우리를 돌아보게 하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우리나라는 지진으로부터 안전한가? 세계 최고의 원전 밀집을 보이고 있는 대한민국의 원전은 이러한 강진을 견뎌낼 수 있을까? 그것에 대해서는 선뜻 그렇다고 답할 이는 없을 것입니다. 2016년 9월 12일 국내 지진 관측 이래 사상 최대인 규모인 5.8의 강진이 경주 일대에서 발생했고, 1년 뒤인 2017년 11월 16일 사상 2번째 규모의 5.4 포항지진이 발생했습니다. 그 뒤로도 크고 작은 지진이 계속 한반도에서 발생하고 있어 이제 더 이상 대한민국은 지진으로부터 안전한 지대가 아니라는 사실을 전 국민은 온몸으로 느꼈습니다.
규모 4~5이상의 지진이 잇달아 발생한 동해 남부 해안지역에 18기나 되는 핵발전소와 그 반경 30km 이내에 살아가고 있는 수백만 주민들은 지진이 원전 사고로 이어질까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수명이 끝난 핵발전소를 계속 가동하려고 하고 지역주민들과는 제대로된 소통 없이 원전부지 내에 핵폐기장을 설치하려고 하는 정부 당국과 한국수력원자력에 대하여 시민, 특히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창조세상의 청지기로서의 사명을 다하며 국민의 안전보다 더 중요한 것인 무엇인지를 강력하게 묻고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행동해야 할 것입니다.
핵발전은 방사능 위험뿐만 아니라, 지역 간 불평등, 핵폐기물 처리라는 거대한 숙제, 초고압 송전탑으로 인한 주민의 고통, 지역공동체의 파괴 등 수많은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다시는 후쿠시마의 고통을 경험하지 않기 위해서, 지역 주민의 안전과 지구가 안고 있는 온실가스와 기후재난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고리2호기와 같이 수명이 다한 원전의 불을 완전히 끄는 일과 함께 기후 위기를 초래하는 탄소중심의 에너지 체제에서 위기를 극복하고 지속가능한 사회를 만들어낼 에너지 체제로 바꾸는 것이 먼저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태양과 바람과 물을 이용한 에너지로 변화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안전한 사회로의 전환을 만들어낼 분명한 대안이며 하나님께서 만드시고 보시니 좋았다고 하신 그 창조세계, 생명의 세상을 향해 다시 나아가는 그리스도인의 길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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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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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영광 대표] 대한민국은 진정으로 저출산을 우려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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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초까지 100만명을 넘어서던 연간 출생아 수는 지속적으로 줄어들어 1990년대에는 60만명대까지 감소했다. 이 때까지는 합계출산율도 1.4명 정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문제는 하향세가 이 즈음에서 멈춰 안정되지 않을까 짐작했던 예상과는 달리 출생률이 끝도 없이 감소하고 있다는 점이다. 심지어 가속화되고 있는 모습까지 관찰된다. 2002년부터 2012년까지의 연간 출생아 수는 50만명에서 48만명으로 약 2만명이 감소했다. 그런데 그 이후 2012년부터 2022년까지는 연간 출생아 수가 48만명에서 25만명까지 23만명이 감소했다. 비율로 따지면 지난 10년동안 출생아 수가 반토막이 난 것이다. 합계출산율은 0.78명, 인류 역사상 최저 출산율을 기록하고 있다. 더 이상 떨어질 곳이 없으니 올해만큼은 반등하리라던 기대는 매년 속절없이 무너졌고 올해도 마찬가지였다. 2023년 합계출산율 통계는 아직 공식적으로 발표되진 않았지만, 연말까지 누적된 통계를 바탕으로 0.72명 정도가 될 것이라고 예상된다. 국가 소멸이라는 단어가 결코 농담이 아닌 것이다.
위기라고 얼마나 떠들고 있는지와는 별개로, 대한민국이 정말로 저출산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는지에 대해서 상당한 의구심이 든다. 결혼하고 이제 막 아이들을 키워나가고 있는 입장에서, 결혼과 출산을 장려하는 정책이나 문화가 부족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하나의 예를 들어보자. 미국의 경우, 결혼을 하면 소득세율 구간이 2배가 늘어난다. 예를 들어 싱글일 때에는 연간 소득 5천만원을 기점으로 소득세율이 12%에서 22%로 상승하는데, 결혼 후에는 부부 소득을 합산하여 5천만원의 두 배인 1억원을 기점으로 소득세율이 22%로 상승하게 된다. 특히 외벌이 가정의 경우, 소득세가 수십 퍼센트 줄어드는 효과를 볼 수 있다. 맞벌이 가정의 경우에도 소득세 절감 혜택이 적지 않다. 출산 후 부부 중 한 명이 육아에 전념하느라 일하지 못하는 경우에도 자연스럽게 소득세 감면 혜택 효과가 생기게 되기도 한다. 반면 우리나라는 결혼을 하면 세제 혜택은 커녕 오히려 세금을 더 내야 하거나 복지 혜택을 받지 못하게 된다. 부부 합산 소득이 6천만원을 넘어 저금리 주택 자금 대출, 저금리 전세 대출을 받지 못하거나, 다주택 규제로 세금을 왕창 물어야 하는 경우가 생기는 것이다. 이로 인해 우습게도 ‘위장 미혼’이 늘기도 했다. 그나마 현 정부가 발빠르게 대응하여 올해부터는 결혼 후에는 복지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소득 상한이 두 배가 된다. 칭찬할 만한 부분이다. 적어도 결혼을 한다고 손해를 보지는 않도록 정책을 조정해 나가야 할 것이다.
한가지 조심할 점이 있다. 결혼을 장려하는 것과 출산을 장려하는 것은 비슷해 보이지만 엄연히 서로 다르기도 하다는 점이다. 물론 결혼을 해야 출산도 하겠지만, 결혼을 한다고 해서 꼭 출산을 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남녀 갈등이 심화되고 출산에 대한 인식이 나빠지며 딩크족 (DINK, Double Income No Kid), 소위 맞벌이를 하되 자녀는 갖지 않기를 원하는 청년 세대들도 상당히 많아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단순 ‘결혼신고’를 장려하는 것은 직접적으로 저출산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 오히려 출산 장려 정책을 펼치면 출산 혜택을 받기 위해서 어차피 결혼을 해야 하기 때문에 결혼도 덩달아 장려하는 효과가 부가적으로 생기는 것이다. 즉, 결혼보다는 가급적 출산을 장려하는 것이 더 효율적인 국가 재정 분배일 수 있다.
연말 정산 시즌이다. 인적 공제를 늘리는 것도 출산 장려 정책에 해당한다. 2008년 이명박 정부에서 1인당 150만원으로 상향시킨 인적 소득공제는 물가 상승과는 무관하게 지난 15년간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인적공제를 대폭 늘리는 것도 고려해볼만 하다. 현재의 복지 제도처럼 신혼부부라고 무작정 저금리 전세 대출을 제공하는 것보다는 그 재정을 아껴 자녀를 출산한 가정에 자녀 수에 따라 대출 금리를 낮춰주는 정책이 더 나을 수도 있다. 혹은 굳이 정부 지원금을 주택 시장에 밀어넣어 부동산 가격 상승을 야기하는 것보다, 복잡할 것도 없이 다른 복잡한 부동산 관련 복지 정책들은 과감하게 축소하고 자녀 수에 따라 부모에게 자녀수당을 지급하는 것이 더 나을 수 있다. 가정마다 분유값이든 생활비든 부동산 대출 이자든 각 가정의 상황에 맞게 가장 필요한 곳에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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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2-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