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2-11-25(금)

오피니언
Home >  오피니언

실시간 오피니언 기사

  • 트리축제는 역사속으로....(?)
    부산지역 겨울철 대표축제로 자리매김했던 크리스마스트리문화축제가 사라질 위기에 놓여 있다. 최근 경찰청이 업무상횡령과 지방재정법위반 혐의로 부산기독교총연합회 관계자 3명을 검찰에 송치했다. 문제는 이들 3명은 2017년 트리축제에 관련된 혐의로 송치되었는데, 경찰청에 사건을 진정한 관계자들은 “2018년 이후 사건이 더 크다”고 진술 하고 있어 추가 송치될 가능성이 큰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결국 금년 트리축제는 부산중구청이 직접 주관한다. 그런데 중구청은 최근 입찰공고를 통해 ‘2022년 광복로 빛 축제(가칭) 빛 시설물 설치운영 용역’ 입찰공고를 발표했는데, 비록 가칭이지만 ‘트리축제’가 아닌 ‘빛 축제’로 명칭을 변경한 것. 여기에 종교색체를 띄지 말 것을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중구청 트리축제 담당자는 ‘내년에도 중구청이 직접 주관하는가’ 질문에 “내년 축제는 검토된 것이 없다”고 원론적인 답변을 해 왔지만, 사실상 기독교계와 선을 긋는 움직임이 포착되고 있다. 교계 일부에서는 “힘들게 얻은 트리축제인데, 관리를 잘못해서 이 지경이 되었다”며 “교계안에서도 자성의 목소리와 함께 분명한 책임이 따라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편, 부산기독교총연합회 관계자는 모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사실이 아니다. 경찰 조사가 끝나지 않았고, 검찰조사도 남아있다”며 혐의를 강하게 부인한 것으로 알려졌다.
    • 오피니언
    • 기자수첩
    • 광야의 소리
    2022-11-04
  • 복음병원 노동조합 쟁의행위 83.9%로 가결
    민주노총 복음병원 지부가 10일 총파업을 예고한 가운데, 조합원들의 대상으로 한 ‘2022년 임단협 쟁의행위 찬/반 투표’가 10월 31일(월)부터 11월 2일(수)까지 진행됐다. 여기서 조합원들의 반대가 많았을 경우 사실상 10일 총파업은 철회되지만, 투표결과 조합원 83.9%의 찬성으로 쟁의행위가 가결됐다. 이번 투표는 전체 조합원 1,457명(휴직자, 한국노총 조합원 포함)가운데 1,146명(78.7%)이 투표에 참석했으며, 이중 962명(83.9%)이 쟁의행위에 찬성했다. 반면 180명(15.7%)이 반대했고, 무효는 4표로 집계됐다. 현재 복음병원은 ‘의료기관 인증평가’와 ‘상급종합병원 재진입 평가’를 앞두고 있어, 이번 총파업이 진행될 경우 병원에 회복하기 힘든 막대한 손해가 예상된다. 때문에 학교법인 이사회(이사장 김종철 목사) 중심으로 파업만은 막아보려는 노력들이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복음병원 노동조합은 오는 9일 오후 6시 병원 6동 로비에서 전 조합원이 참석한 가운데 파업전야제를 개최하고, 다음날 10일 오전 6시 30분부터 총파업에 들어갈 예정이다.
    • 오피니언
    • 기자수첩
    • 광야의 소리
    2022-11-04
  • [목회자칼럼] 확증 편향(선택적 사고)
    “한국교회, 분열과 함께 확증 편향 회개해야…” 지난 달, 우연히 본 기독교 신문의 헤드라인입니다. 저 한 문장 중 ‘확증 편향’이라는 낯설지 않은 단어가 나의 눈길을 사로잡았습니다.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마음’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정신’ ‘나와 너를 넘어 우리라는 공동체성’ 등 기독교가 추구하는 가치는 결코 확증 편향과 같이 있을 수 없는데, 한국교회가 확증 편향 속에 있다고 하니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 되었나, 막막함이 차올랐습니다. 확증 편향은 자신의 신념, 가치, 판단과 부합하는 정보에만 주목하고 그 외에는 다 무시하는 ‘선택적 심리’를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내가 믿고 싶은 것만 믿으며 그 외에 것들은 보지도 듣지도 않는 태도를 일컫습니다. 몇 해 전부터 현대인의 모습을 지칭하는 단어로 ‘확증 편향’이 등장했고, 지금은 우리나라 사람들의 대표적인 특징으로 확증 편향을 꼽고 있습니다. 자기가 원하는 정보만 취합하고 다른 것들은 무시해버리는 현상이 일부가 아닌 대부분의 사람에게서 나타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고 보니, 확증 편향의 시대가 맞는 것 같습니다. 부모와 자녀를 보면 부모는 자녀의 마음을 이해하기 보다는 자기에게 유리한 정보를 취합해 자녀에게 강요하고, 자녀 또한 부모의 말을 들어 고치려 하기 보다는 자기 입장을 타당하게 해 줄 근거 찾기에 급급합니다. 부모와 자녀 관계에서도 서로 이기려고 하는 모습 속에서 확증 편향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갈등 구조인 보수와 진보도 마찬가지입니다. 보수는 진보의 말을 들을 생각도 없이 오로지 보수쪽 의견을 듣고, 그 의견을 더 많이 취합하므로 자신들의 신념을 강화시킵니다. 진보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진보에게 유리한 내용들만 골라 골라 자신들의 신념의 탑을 쌓습니다. 우리나라 보수와 진보는 확증 편향의 정확한 사례로, 이들을 보면 절대 하나 될 수 없고, 끝까지 자신의 길이 진리인 것 마냥 목소리를 낼 것이 확실합니다. 사회가 이럴 때, 교회는 어떨까요? 교회는 확증 편향과는 거리가 멀게 자신의 의견을 양보하고 다른 사람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함께 하려고 애쓸까요? 같은 교회에서 같이 예배드리며 같이 소그룹 나눔을 하는 교인들도 몇몇 성도들은 “말씀이 최고이기 때문에 무조건 말씀 중심으로 가야 한다”고 말하고 또, 어느 성도들은 “봉사를 통해 섬기는 것이 최고이기 때문에 식당봉사, 성가대 봉사 등을 열심히 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 정도 수준이면 그래도 괜찮은데, “나는 기도원파이다. 나는 성령파이다. 나는 직통계시파이다” 등으로 확증 편향을 가지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이런 성도들은 자신이 믿는 방법만이 진리라는 확신을 갖고, 다른 방법은 믿음이 없는 것처럼 무시하고 수긍을 하지 않습니다. 세상의 사고방식인 확증 편향이 교회 안까지 깊숙이 들어와 성도가 판단하고 결정하는데 혼란을 주고 있습니다. 이미 선택적 사고에 붙잡혀 있는 체계 속에,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 번째, “내 생각이 잘못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요즘에는 자기가 틀렸다고 말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이 다양해짐으로 너도 나도 자기가 가진 정보는 다 맞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이 내게 “너가 잘못됐어”라고 지적하면, 잘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당연한 사실이지만, 우리의 생각은 항상 잘못될 수 있습니다. 어제 내가 알던 것이 오늘 잘못된 사실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자만이나 독선은 패망의 지름길입니다. 항상 내가 틀릴 수 있다고 가정하며 상대방을 이해하고 대화해야 할 것입니다. 두 번째, ‘변화되려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내가 원하는 것만 받아들이고, 내가 듣고 싶은 것만 듣는 확증 편향 속에서는 변화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변화는 나의 잘못을 고치려는 결단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마음을 열고, 다른 사람의 생각도 받아들이는 유연함을 가질 때 확증 편향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세 번째, ‘발전하는 자세와 태도’입니다. 자기 주장만 내세우는 부모와 자녀 사이에 참된 교제가 있을까요? 자기 신념만이 진리라고 우기는 정치 집단 속에 합의와 타협은 있을까요? 내가 가진 신앙만이 참된 믿음이라 고집하는 성도에게 성령의 하나됨이 있을까요? 이처럼 확증 편향적 자세는 고립, 대립, 경쟁만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이와 반대로 발전하는 자세와 태도가 필요합니다. 이제 세상이 말하는 확증 편향을 잠시 내려놓고, 다시 예수님이 원하는 가치고 돌아가야 합니다. 자발적인 순종과, 다른 이들을 향한 환대의 정신이야말로 이 시대가 필요로 하는 성숙한 모습이 아닐까 싶습니다.
    • 오피니언
    • 칼럼
    • 목회자칼럼
    2022-11-04
  • 현대교회 임직식 이대로 괜찮은가?
    지난 9월 25일 주일 부산시 사하구 괴정동에 위치한 D교회 권사, 집사, 장로 임직 예식에 초청받아 참석하고 왔다. 이때까지 임직식을 수없이 참여하고 보았지만 14쪽 순서지에 담겨 있는 예식 내용이 놀라웠다. 아마 순서 맡은 목사들도 놀랍고 얼떨떨했을 것이고 참여한 초청인들도 처음보는 광경에 신기해 하는 모습이었다.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위하였지 담임목사의 이름 한자도 없었다. 오로지 임직 예식은 ‘하나님의 부르심과 택정함을 입은 이들을 하나님과 교회 앞에 세우는 경건하고 거룩한 의식’이라고 표현하는 듯했다. 이 예식은 그야말로 구약에서 시작하여 다양한 전통으로 내려오다가 신약시대 초대교회로부터 오늘날 직제의 근원이 형성되었다고 소개하는 글만 담겨 있었다. 따라서 성경적 근거와 교회 전통과 믿음의 결단에 따라서 이렇게 임직 예식을 거행한다는 간단한 소개글이 첫 장에 실려 있었다. 예배의 부름에서 부터 기원, 참회기도, 용서 확인 다음이 영광송이 오르간 반주로 울려 퍼질 때 참석한 성도는 물론 임직 받는 분들의 경건함과 거룩함이 십자가 앞에 서 있는 듯 경건 그 자체였다. 찬송은 연달아 두 번씩이나 부르고 공동기도는 회중 전체가 올리고 난 다음에야 맡은 순서자가 다시 기도한 다음에 다시 기도를 다같이 했다. 이 때까지는 “무슨 기도를 두번씩이나 연달아 하는가. 아! 시간 오래 걸리겠구나”하고 생각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는데 모두들 엄숙한 모습에 거룩하고 경건함이 더하여지는 분위기였다. 사회를 맡은 분은 아예 다음 순서자 소개 없이 순서대로 진행하니 시간도 절약되었고 말씀선포는 6분으로 짧게 하라는 사전 양해를 주어 간단히 했다. 문제의 특이한 사항이 발생한 것이 임직자들의 서약이 끝나자마자, 안수 및 축복기도를 하는데 담임목사는 임직자들의 머리에 일일이 기름을 붓고 순서 맡은 분들이 단상에서 내려와 임직자들 머리에 손을 얹고 축복기도를 하는데 왠만하면 장로임직자부터 시작되기 일반인데 이 전통을 깨고 교회에서 가장 헌신과 심방 많이 하는 권사부터 안수집사 다음에 장로가 제일 꼴찌로 하는 것이 눈에 띄었다. 또 가운 착의를 장로들과 담임이 손수 입혀 주는 것이 가장 돋보였다. 그리고 또 놀라운 점은 임직예식순서에 성찬예식을 거행하는 것이었다. ‘성찬식’에 초대하는 순서에 임하고는 분병, 분잔을 하고 감사기도, 찬송하고 교회 소식을 선임 시무장로가 하고 나서는 또 찬송을 부르는 찬송이 무려 임직전체 6번씩이나 하여 오직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Soli Deo Gloria) 모습이었다. 이렇게 임직 받은 임직자들은 교회 성도는 물론 담임목사에게 순종을 성도들은 세워진 임직자들에게 존경과 순종을 이어갈 때 교회는 저절로 부흥과 약진이 거듭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로교 임직예식이 이렇게 변화를 시도 했으면 어떨까 한번 이런 모델을 소개해 보았다. 특히 임직자들의 약력이나 이력은 생략하고 사진과 함께 교회를 어떻게 섬기겠다는 소신만 소개하는 이 임직예식이 통합측뿐만 아니라 장로교 전체 교회들이 이같은 변화를 시도 해봤으면 제안하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 한편 김해에 있는 128년의 역사를 가진 김해교회 임직식을 지난 10월 23일 주일 다녀왔다. 그래도 역사와 전통이 있는 장로교의 규례에 때라 원로장로 추대가 가장 먼저 순서에 넣고 노회를 초월하여 평북노회 원로를 세워 설교를 했다. 부산노회 장로원로회 회장인 필자가 축사를 했다. 이 예식은 그 다음이 장로 임직이고, 다음은 안수집사이고, 다음은 권사를 안수했다. 과연 장로임직순서가 제일 마직막에 넣는 것이 옳은 것인지 축하하러 온 성도들이나 임직자 입장에서 보면 교회에서 가장 많이 헌신하고 병든 성도들은 돌아보고 기도하고 섬기는 쪽이 권사라고 볼 때 권사임직이 제일 무게가 있고 뜻이 있었다. 장로들은 꼴찌라도 교회 어른들 지도자 장로들은 성도들 위에 군림하는 요즘 형태를 무너뜨리게 하고 가장 겸손해서 교인들을 섬기는 것이 옳지 않을까? 어느 쪽이 먼저인지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초대교회에서의 임직은 어떻게 했을까? 권사 임직은 성경에도 없을 정도로 여성을 낮추게 되었지만 21세기를 살아가는 오늘의 현대판 한국교회는 너무 비대하여 지도자가 되면 일반 성도들 위에 군림하듯 어깨 힘을 주고 교회 주인인양 좌우해 온 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나 심방과 이웃을 돌보고 그들의 친구가 되고 가까이 한 예수는 그들의 편이었고 마리아와 마르다를 보고는 권사 취임을 먼저 세워 주는 것도 나쁘지 않다. 그런데도 요즘 여성들의 파워가 강해 여전도회연합회나 교회 안의 권사들 모임에는 보이지 않게 교회에 영향권 행사를 주도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임직할 때 권사 서약선서와는 정반대로 행동하는 교회 권사들을 볼 때 여성파워 행사를 주도하려고 하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이지 의문이 든다. 권사 임직 순서를 가장 먼저 세워준다면 더욱 활개칠 것이 눈에 선하다. 물론 남여 평등사상을 가지고 교회 헌신해야지 직분이 무슨 세상 권력인양 실세를 도모 한다면 임직 정신을 저버리는 결과가 된다. 그래서 초대교회 시대에 여성들은 조용하라고 했던가? 선한 행실의 증거가 있어 혹은 자녀를 양육하며 혹은 나그네를 대접하며 혹은 성도들의 발을 씻기며 혹은 환란 당한 자를 구제하며 혹은 모든 선한 일을 행한 자라야 할 것이요. 디모데전서 5장 10절
    • 오피니언
    • 기자수첩
    • 역사현장
    2022-11-04
  • [부산기독교이야기] 전쟁기 부산 교계: 부산에 온 유대인 군목3
    한국에서 전쟁이 발발하자 일본에서 복무 중이던 밀턴 로젠 랍비는 1950년 11월 5일 주일 이른 아침 제너럴 하세(General Hasse)호로 요코하마를 출발하여 한국으로 향하게 된다. 그 배에는 미군 1천명 이상의 장교와 사병이 타고 있었다. 이틀 후 7일에는 일본 남부의 나가사키현의 사세보(世保, Sasebo) 항에 도착했다. 여기서 다시 1천명이 탑승하여 한국으로 향해 11월 10일 인천항에 도착했다. 로젠이 Der Morgen Zhornal (Jewish Morning Herald)에 기고한 보고에 의하면 인천에 도착한 새벽 3시부터 낮 11시까지 8시간 동안 작은 선박으로 병사들의 상륙을 도왔다고 한다. 한국의 겨울이지만 이날은 맑고 따뜻했으나 큰 건물은 파괴되어 있었고 여기 저기 벽돌들이 흩어져 있고 거리는 정비되지 않은 어설픈 상태였다고 했다. 이날 처음 만난 한국인들은 남자이든 여자이든 흰옷을 입고 있었는데 가난과 배고픔이 베여 있는 슬픈 눈빛이었다고 기록했다. 인천항에서 군 기지로 이동은 기차를 이용했는데, 군인들은 손을 흔드는 한국인들에게 창문으로 캔디와 담배를 던져 주었다. 기지에 도착했으나 허름한 건물이었고 침대가 없어 한국인들이 짚으로 만든 침대 비슷한 것을 만들어 주었고 거기서 군용 리쿠사쿠로 휴식을 취했다. 숙소에서 제일 먼저 한 일은 DDT로 소독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식사를 못해 극도로 배가 고팠는데, 돼지고기가 나와 유대인이었던 밀턴 로젠은 채소와 과일, 그리고 커피만 마셨다고 한다. 이곳에 체류하는 동안 한국인 남녀 어른과 어린아이들이 힘을 모아 캠프를 급조했다고 한다. 로젠과 미군병사들은 일단 인천항으로 입항했는데, 알몬드 장군(General Almond) 휘하의 원산의 10군단으로 배속되어 이동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장비와 무기 이동이 우선순위였다. 그래서 예정된 날에 원산으로 이동하지 못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후에 알고 보니 그것은 군사기밀이었는데 실제로는 목적지가 원산이 아니라 부산이었다고 한다. 로젠이 신문에 쓴 보고를 보면, 부산까지는 기차로 이동하게 되는데, 기차는 더럽고 성한 곳 없이 지저분했다. 무엇보다도 한국인 피난민들로 들끓었는데, 미군이 음식을 준비하면 어린 아이들이 몰려와 빈 캉통이라도 주워 먹으려고 경쟁했고, 아이들의 얼굴에는 지치고 고통스런 아픔이 서려 있었다고 기록했다. 인천에서 부산까지는 350마일, 곧 560km인데 주야로 며칠이 걸렸다. 문제는 추워서 잠을 잘 수 없었다고 한다. 북한 게릴라의 공격 또한 염려되어 두려웠다. 두려움을 이기는 방법은 잠을 자는 것인데, 쉬 잠을 잘 수 없었다고 한다. 부산으로 이동하는 병사들 가운데서는 이미 북쪽에서 전선에서 싸웠던 이들이 있었고 어떤 이는 상처를 보여주었고 상처난 전투당시의 옷을 그대로 입고 있어 전선의 치열함을 알 수 있었다. 부산으로 이동하는 중 기차가 정차하면 키가 작고 바싹 마른 아이들이 잡다한 물건을 가지고 차에 올라 팔아달라고 조르는데, 로젠 군목은 “나는 나의 생애에서 이처럼 열정적이고 도전적으로 물건을 파는 이들을 본 적이 없다”고 기록했다. 13살 정도로 보이는 아이가 돈을 가지고 미국 담배, 캔디, 껌을 사고자 했다. 담배 한 갑은 1200원(약 3달라), 껌은 한통이 6백원으로 거래되었다고 한다. 이동하는 동안 일본어를 아는 한국인과 어렵게 대화했는데, 북한의 집은 파괴되고 재산을 강탈당하여 대구로 내려 가는 중이라고 했는데, 유대인들에 대해 조금 알고 있어서 신기했고, 한국인들은 유대인들은 다 부자인 줄로 착가하고 있다고 썼다. 유대인 군목 밀턴 로젠 랍비가 부산에 도착한 것은 1950년 12월이었다. 부산은 인민군의 공격을 받지 않는 것이었고, 철도도 무사했다고 기록했다. 부산역에서 군 캠프로 이동하는데 바싹 마른 아이들이 자기들 보다 세배 이상 무거운 짐을 나르고, 날씬한 여자들도 머리에 짐을 이고 두 손으로 가방을 들고 어깨에도 가방을 두르고 짐을 나르는데 놀라울 뿐이었다고 한다. 유대인 군목은 일단 부산으로 왔으나 약 일 주일 후 원산으로 가게 되어 있었다. 그는 저녁마다 부산 거리를 다니며 부산 사람들을 보았는데, 부산은 옛것과 새것이 뒤섞인 도시라고 생각했다. 지게를 지고 다니는 이들이 있는가하면 현대적인 복장이나 물품들이 유통되고 있음을 보았기 때문이다. 로젠의 눈에 비친 부산은 도둑들이 설치는 도시였다. 군용품이 가게에서 거래되고 있었다. 또 미국 영국 인도 캐나다인 등 여러 종족의 사람들을 접할 수 있었는데, 특히 인도군인들은 수염을 기르고 있었고 잘 다려진 군복이 흥미로웠다고 기록했다. 로젠은 8일간 부산 생활을 경험하고 9일째 되는 날 부산을 떠나도록 명령을 받고 있었다. 이번에는 LST를 이용하게 되었다. 그가 다른 병사들과 무기 탱크 트럭 등 장비를 싣고 출발을 준비하고 있을 바로 그 때 중공군이 개입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 오피니언
    • 칼럼
    • 부산기독교이야기
    2022-11-04
  • [탁지일 교수] ‘하이브리드 이단’과 ‘K 이단’의 시대
    코로나 팬데믹은 국내외 이단 문제의 역사적 변곡점이 되었다. 코로나 이전에는 대면 포교가 일반적이었지만, 코로나 발생 이후에는 온라인을 기반으로 이단들의 미혹이 본격화되었고, 최근에는 전통적인 대면 포교와 온라인을 혼합한 하이브리드 형태로 진화되고 있다. 시공간을 초월한 미혹의 시대, 즉 ‘하이브리드 이단’의 세상이 열렸다. 그리고 하이브리드 이단은 한류의 날개를 단 ‘K 이단’의 모습으로 진화하며 세계 곳곳으로 침투하고 있다. 교회의 이단 대처도 업그레이드가 필요한 시점이 되었다. 전통적인 이단 예방교육과 함께, 온라인 대응도 시급하다. 이단들의 고퀄리티, 즉 고화질과 고음질의 동영상이 유튜브를 뒤덮고 있고, 심지어 콘텐츠 구성과 완성도까지 높아 청소년과 청년대학생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게다가 정체를 감추고 위장해 접근하기 때문에 피해는 점점 확산하는 추세이다. 신천지는 전통적인 모략 포교를 진행하는 한편, 온라인으로 포교, 교리 교육, 신도 통제를 병행하고 있다. 거짓말의 끈을 놓지 않는 동시에, 노골적인 커밍아웃을 통해, 오히려 우리를 당황스럽게 만들고 있다. 언론매체에서는 '신천지자원봉사단’을 ‘SCJ 자원봉사단’이라고 눈가림하고 선전에 열을 올리고 있다. 그나저나 한때는 신천지 비판에 열을 올리며 실리를 챙기던 주요 언론들이, 이제는 신천지 선전을 통해 다시 돈벌이에 열을 올리고 있으니, 후안무치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최근 하나님의교회도 전통적인 거리 포교와 함께 온라인 홍보에 집중하고 있다. 특히 요즘 ‘어머니 하나님’을 선전하는 30~40대 여성 신도들이 곳곳을 누비고 있다. 거리청소는 물론이고 자연재해 지역에는 어김없이 나타나 활발한 구제 활동을 벌이며, ‘선한 이웃 코스프레’에 여념이 없다. 하나님의교회는 온라인 홍보에 막대한 재정을 투입하고 있다. 세계 거의 모든 언어로 된 홈페이지를 운영하는 한편, 실시간 업데이트를 통해 곳곳에 세련된 미혹의 덫을 설치하면서 가장 파급력 높은 K 이단으로 등장했다. 박옥수 구원파 경우도 국내외 활동이 활발하다. 그동안 중단되었던 월드캠프를 올해부터 다시 대면으로 진행했고, 마인드교육을 내세워 국내외 공교육 현장을 공략하고 있다. 특히 해외 교육 관련 정부 기관들과 활발한 MOU 체결을 맺고 있다. IYF의 경우, 국내 캠퍼스 활동으로부터 해외 자원봉사에 이르기까지 대표적인 K 이단으로 국내외에서 광폭 행보를 보이고 있다. 온라인 홍보를 통한 포교 활동이 대면 만남과 집회로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하이브리드 홍보와 포교도 나름 정착된 것으로 보인다. 이단들은 시대적 트렌드에 민감하다. 도움이 될 만한 것은 무엇이든 신속하게 벤치마킹하고 스스로에 맞게 업그레이드한다. 문화적 키워드를 선점한 후, 정보기술력을 앞세워 포교 대상자를 공략한다. 교회의 선제 대응이 필요한 시점이다. 사후약방문식의 수동적 대처로는 이단 피해를 막기에는 역부족이다. 한 걸음 앞선 응전이 필요하다. 복음의 전래와 정착 시기에, 교회는 가장 선진적인 문화 도입과 선도적인 정보 제공으로 사회적 순기능을 감당했다. 하지만 이제는 사회의 정보기술은 물론이고 이단들의 콘텐츠조차 따라가기 벅찬 시대가 되었다. 심지어, 사회를 걱정하던 교회가, 역으로 사회의 염려를 한 몸에 받는 매우 당혹스러운 상황이 연출되고 있다. 경제력, 정보력, 기술력을 앞세운 하이브리드 이단의 시대, 한류를 이용해 세계화를 시도하는 K 이단의 시대, 교회의 경쟁력 강화를 위해 오히려 ‘복음의 순전함’ 즉 ‘신앙적 기본과 상식’으로 돌아가는 역발상적 접근이 필요하다. 세상의 방법으로 이단과 경쟁하기보다, 오히려 성경적 방법으로 하나님의 백성 그리고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자긍심과 자존감을 회복하는 것이 더욱 시급하다. 복음의 순전함을 소유하고, 복음의 능력에 온전히 의지하는 것이, 온 시대를 초월한 교회의 생존전략이었음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 오피니언
    • 정론
    2022-11-04
  • [서임중칼럼] 지도자의 언행
    일찍이 나의 목회철학은 언행일치(言行一致) 학행일치(學行一致), 신행일치(信行一致)의 절차탁마(切磋琢磨)를 통해 ‘너의 유익을 위한 행동하는 나의 삶’이었다. 걸어 나온 길을 돌아보면 이 삶을 살기 위해 가히 몸부림을 친듯한데 원하는 만큼 살지만은 못한 것 같아 古稀의 중반에 이르러서도 마음이 가볍지 않다. 그래도 마음만은 늘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다짐을 하면서 목사로서 오늘도 전국에 산재한 작은 교회를 향해 말씀사역 길을 행보한다. 이제는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육신의 아픔도 하나 더 품었기에 운전도 더 벅차고 잠자리도 불편하며 기력도 하루가 다르게 쇠진하는 것을 느끼지만 오늘도 감사로 절차탁마의 삶을 다듬는다. 작금에 대통령의 비속어 논란으로 세간이 시끄럽다. 범인들의 말이었다면 관심도 없을 일이지만 지도자의 언행이라 주목을 받는다. ‘비속어를 사용했느냐 안 했느냐? 언론사가 짜깁기를 했느냐 안 했느냐?’는 결국 고소 고발에 이르고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다. 마땅히 국민들이 들어야할 대통령의 첫 해외순방 성과에 관해서는 그 어디에서도 들을 수가 없다. 본질과 비본질이 뒤틀린 논쟁으로 국격은 걸레가 된 듯하다. 요즘 들어 더더욱 살기 힘든 백성들을 좁쌀만큼도 생각하지 않는, 마지막 보루라는 언론의 행태와 당리당략에 허우적거리는 정치권을 향해 분노를 넘어 허탈한 마음이다. 소망조차 보이지를 않는다. 전직 대통령 중에 발음이 정확하지 않은 분이 계셨다. 그 분에 관한 에피소드가 많이 알려져 있다. 어느 날 한 도시에서 연설을 하게 되었다. “여러분! 나는 이 도시를 유명한 강간(관광)도시로 만들겠습니다.” 그러자 대통령을 수행했던 외무장관이 깜짝 놀라 용어 수정을 말씀 드렸다. “대통령님! 강간 도시가 아니라 관광 도시입니다” 그러자 대통령께서는 자존심 상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씀 하셨단다. “애무(외무)장관은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고 애무(외무)나 잘 하세요.” 사실관계를 떠나 이 같은 상황에서도 국민들은 그냥 파안대소하고 너나없이 대통령의 말에 대하여 달리 마음을 두지 않았다. 요즘 같으면 탄핵하라고 소란을 피웠을 지도 모를 일이다. 리더는 말과 행동이 명확해야 하는 것을 일깨우는 이야기다. 웃기는 언행일치(言行一致) 사건 이야기가 생각난다. 2004년 11월 18일자 한국경제신문에 웃지 못 할 기사가 실렸다. 「빌린 돈은 갚지 말라.」는 책을 출판한 저자 차모 씨가 구속 수감 된 이야기다. 차 씨는 경영컨설팅을 하는 사람인데, 요리조리 둘러대며 남의 돈 18억을 빌려 쓰고 중국으로 도주를 했다. 그런 그가 아내가 암으로 입원을 하게 되자 귀국했다가 체포되어 구치소에 수감된 건이다. ‘빌린 돈은 갚지 말라’고 책을 쓰고 자기가 그 말대로 행한 웃기는 언행일치 사건인데, 이런 경우를 두고 당시 네티즌들은 “진짜 언행일치의 사람”이라고 댓글을 달았던 유명한 에피소드다. 갈라디아서 2:14절에는 우리가 주목할 말씀이 있다.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따르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 사도 바울이 게바를 책망하는 말씀으로써 그리스도인은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해야 한다는 교훈이다. “목사가, 장로가, 목사답게 장로답게 살지 못하면서 교인들에게 그리스도인답게 살라고 하느냐?”로 문장을 바꾸어 읽으면서 나는 소름이 돋았다. 간담이 서늘해지는 말씀이다. 지도자의 언행을 다시금 일깨우는 교훈이다. 「왜 부모의 권위는 소중한가?」를 출간한 제임스 돕슨(James C Dobson)의 <Bringing Up Boys>가 있다. 이 책에서 돕슨은 “미국은 아버지의 몰락으로 무너졌다”고 역설했다. 이유는 지난 30~40년간 페미니스트(feminist)가 남녀가 똑같다는 논리아래 남성성(男姓性)과 여성성(女姓性)은 학습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역설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연스럽게 남자아이용 완구와 여자아이용 완구의 구분은 모호해졌고, 그 결과 가정에서 남자의 모델이 없다 보니 아버지의 몰락으로 이어지고 따라서 가정도 무너지게 되었다는 주장이다. 이 흐름은 이미 한국에서도 정착되고 있다. 우리가 알거니와 생태학적 심리학으로 볼 때 남성과 여성은 성 호르몬이 분명히 다르다. 진정한 남성은 희생할 줄 알며 책임성이 있고 가족을 위하여 스스로를 포기할 줄 알며 그래서 가장(家長)의 책무를 수행한다. 그런데 이 아버지의 위치가 없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를 중심으로 뜻있는 기관 단체는 그 단초가 되는 성차별금지법을 반대하는 것이다. 교회를 들여다보자. 언제부터인가 한국 교회에 당회장의 위치가 모호해 지고 있다고 우려를 한다. 당회장의 자리가 없어져 가고 있다. 이것이 교회의 몰락을 예고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무슨 말인가? 지도자는 지도자의 자리에 있어야 하고 지도자다운 말을 해야 하며 지도자다운 행동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리할 때 그 공동체가 힘이 있고 공동체 전체가 건강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교회가 이 기능과 권위와 능력을 잃어가고 있음은 그 원인행위가 지도자 자신에게 있지는 않은지 뒤돌아봄이 있어야 한다. “야옹거리며 우는 고양이는 쥐를 잡을 수 없다.”는 말이 있다. 말이 많으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 마디 말도 쓸모 있는 말이어야 하고 가치 있는 말이어야 한다. 살다보면 한 마디 더 말할 시간은 있어도, 그 한 마디를 취소할 시간은 쉽게 오지 않는다. 아무리 사소한 말도 가장 중요한 말을 하는 것처럼 하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말이 말을 낳는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안다. 말 한마디로 복도 부르고 화도 불러온다. 생각 없이 욱하는 감정으로 불쑥 내뱉은 말은 평생 주워 담을 수도 없다. 아름다운 말이 아름다운 삶을 이끈다. 나의 말이 곧 나의 삶이다. 그래서 말에 실수가 없으면 온전하다고 야고보 사도가 가르쳤다. 지도자의 언행은 그 무게가 그래서 다른 것이다.
    • 오피니언
    • 칼럼
    • 서임중 칼럼
    2022-10-20
  • [성서연구] 천국에 관심없는 교회
    자기 나라가 아닌 타국의 국민이 되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미국 국적을 얻는 것만 어려운 게 아니라, 다른 나라 사람들이 대한민국 국적을 얻는 것도 어렵습니다. 이미 영주권을 가진 사람을 전제로 말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대한민국 영주권자이면서 5년 이상 계속 한국에 거주하고 있을 것, 둘째, 경제적 요건으로 6천 만원 이상의 부동산 혹은 금융자산을 가지고 있고, 일정한 직업 혹은 소득이 있을 것, 셋째, 사회통합 프로그램 귀화용 종합시험 및 면접심사를 통과할 것, 넷째, 큰 범죄를 저지른 전력이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많은 서류를 제출하고, 2년 이상을 기다려야 합니다. 대한민국 국민인 것을 감사하면서 나라를 사랑해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정말 이상한 나라가 있습니다. 그것은 천국입니다. 천국이 왜 이상한 나라일까요? 우선 천국은 땅에 있지 않고 하늘에 있습니다. 그래서 하늘나라입니다. 또 천국은 사람이 다스리지 않고 하나님께서 통치하십니다. 사람이 다스리는 나라들은 너무 많은 문제가 있습니다. 그 사람이 독재자일 수도 있고, 무능할 수도 있고, 갈등만 유발할 수도 있습니다. 나쁘거나 무능한 통치가 때문에 고통받는 백성들이 정말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최고의 통치자이십니다. 또 천국은 영원한 나라입니다. 지금까지 땅에는 무수한 나라가 있었지만, 모두 사라지고, 새 나라가 생기곤 했습니다. 각 나라마다 나라를 위협하는 세력을 국가반란죄 등으로 처벌하지만, 그렇게 해도 나라들은 언젠가는 사라질 것입니다. 그리고 새 나라가 생길 것입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생긴 이래도 수천 년 이상을 조금의 변화도 없이 유지되는 나라는 없습니다. 그러나 천국은 영원히 변함없는 나라입니다. 또 천국이 이상한 나라인 이유는 백성이 되는 자격 때문입니다. 본문은 천국의 백성이 되는 조건을 말씀하는데, 그 조건을 한 가지만 말씀합니다. 그 유일한 조건은 회개입니다. 마태복음 4장 17절은 이렇습니다.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 예수님께서는 메시아로서 천국을 선포하셨습니다. 천국 백성이 되길 원하는 사람들을 모집하셨습니다. 천국 백성이 되려면 반드시 예수님을 통해야 합니다. 천국으로 가는 유일한 통로는 예수님이시고, 예수님께서는 단 하나의 조건으로 회개를 요구하십니다. 회개가 무엇일까요? 회개란 땅의 나라 백성으로 살았던 과거를 청산하는 것입니다. 땅의 나라의 욕망과 부정한 모든 것을 청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천국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오직 땅의 나라를 위해, 땅의 나라의 방식대로 살았습니다. 그 삶의 대부분이 천국의 원리와 반대였습니다. 그러므로 천국의 백성이 되려면 땅의 나라 백성으로 살던 과거의 삶의 방식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벗어나 천국의 백성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게 회개입니다. 교회는 천국에 가겠다고 예수님께 신청서를 제출한 사람들이 모여 있는 임시 처소입니다. 그런데 정말 이상합니다. 천국에 가겠다고 신청서를 제출한 사람들이 모였는데도 천국 이야기를 별로 하지 않습니다. 교회의 지도자들도, 일반 성도들도 땅의 나라 이야기만 합니다. 하나님을 통해 땅의 나라에서 잘 사는 방법을 연구합니다. 신청서는 냈지만, 별로 천국에 가고 싶지 않은 표정입니다. <드디어 허가증이 나왔으니, 천국으로 가세요>라고 할까봐 겁을 내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정말 이상한 것은 회개하지 않는 것입니다. 신청선를 낸 사람들을 대상으로 정밀 심사를 하는데, 그게 회개입니다. 신청서는 냈지만, 회개는 하지 않기 때문에 천국 백성으로 합격할 가능성이 없습니다. 교회에서도 여전히 땅의 나라 방식으로 삽니다. 그래서 교회도 이상합니다. 천국에 가고 싶은 사람들이 모였다고 하는데, 별로 천국에 가고 싶지 않은 것처럼 행동하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 천국 이야기만 하면 사람들이 웃습니다. 회개를 말하면 어리석다고 합니다. 땅의 나라 원리대로 행동하는 사람이 중요한 일을 맡기도 합니다. 어떠세요? 천국에 정말 가고 싶으신가요? 정말 그렇다면 회개해야 합니다. 교회를 보지 말고, 예수님을 보아야 합니다. 머지 않아 천국이 정말 간절히 바랄 순간이 올 것입니다.
    • 오피니언
    • 칼럼
    • 성서연구
    2022-10-14
  • [시사칼럼] 바이든 고개 들어 날리면 고개 들지마
    작년 연말 미국에서 흥미로운 영화 한 편이 개봉됩니다. 굳이 구분하자면 블랙코미디 장르라고 할 수 있고, 그래서인지 한국에서는 별달리 재미를 보지 못한 작품이었습니다. 내용을 간략하게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지방의 무명대학 천문학과 박사 과정의 디비아스키는(제니퍼 로렌스) 에베레스트 크기의 혜성을 하나 발견하는데, 궤도와 속도를 계산해보니 6개월 후 지구와 충돌할 예정입니다. 화들짝 놀란 그녀는 랜들 민디 교수에게(무려 디카프리오), 박사는 정보기관과 대통령에게 그리고 나중에는 언론에까지, 이 사실을 알렸지만 재선에 목을 맨 대통령은(메릴 스티립!) 의도적으로 이들을 무시하면서 비밀리에 숨기기 바쁘고 언론도 기업도 교만과 잇속에 물들어 저마다의 이유로 진실을 외면합니다. 마침내 운명의 시간이 다가왔습니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세상이 두 파의 사람들로 나뉩니다. “고개 들어”(look up)파와 “고개 들지 마(don't look up)”파로 말입니다. 누가 이겼을까요? 참고로 영화 제목은 ‘돈 룩 업’(Don't look up)입니다. 거듭 말하지만 이 영화는 한국에서 흥행에 참패했습니다. 그런데 영화를 내리고 난 후 약 6개월이 지난 현재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일들이 이 땅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발단은 역시 앞선 영화가 개봉된 미국에서였습니다. 한국의 대통령이 뉴욕을 방문해서 미국 대통령이 주관하는 글로벌펀드 재정회의에 참석했고, 나오는 길에 측근을 향해 무심결에 던진 한 마디가(정확하게 27글자로 이루어진 한 문장) 한 방송국 카메라에 잡히는 바람에 난리가 났습니다. 언론은 보도하고 당국은 반박하면서 처음에는 도대체 무슨 말을 했는지 여부가 전 국민의 관심사였습니다만, 며칠이 지나면서 반전이 일어나 보도자제요청을 어기면서까지 국익을 해치는 보도를 감행했다는 이유로 방송사에 대한 항의가 이어졌고 이 때문에 언론탄압 문제까지 대두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런데 무엇보다 가장 흥미진진한 부분은 따로 있습니다. 말한 본인조차도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는 이 문장의 뒷부분에 과연 현직 미합중국 대통령의 이름이 나오느냐 그렇지 않다면 일설에 따라 다른 말이 그렇게 들렸던가 하는 문제입니다. 결국 세상은 두 쪽이 나고 말았습니다. “바이든”파와 “날리면”파로 말입니다. 자, 이제 각각의 둘들을 비교하고 연결시켜 봅시다. 먼저 사실을 제기한 쪽은 “고개들어”파와 “바이든”파였고, 뒤에 반론을 제기하거나 묵살하려고 한 쪽은 “고개들지마”파와 “날리면”파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고개들어-바이든”파와 “고개들지마-날리면”파의 짝을 만들어 볼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흑백논리만으로 재단(裁斷)할 수 없는 곳이 세상입니다. “고개들어-날리면”파와 “고개들지마-바이든”파가 나타나지 말라는 법이 없습니다. 순서대로 편의상 ‘가, 나, 다, 라’의 기호를 붙여보겠습니다. 먼저 “가”와 “나”파는 어떤 의미에서 순수한 사람들의 집단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물을 바라보는 이들의 입장에는 적어도 일관성이 존재합니다. 순수한 진보나 순수한 보수를 자처하는 사람들이라고나 할까요? 다음 “다”와 “라”파는 사안마다 절묘하게 융통성(?)을 발휘하는 사람들의 집단이라 할 수 있습니다. 때로는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사람들이라고 볼 여지도 존재합니다. “다”와 비슷한 부류를 굳이 생각해 본다면 이른바 ‘태극기 보수’쯤 되지 않을까요? “라”와 비슷한 부류를 굳이 찾아본다면 이른바 ‘수박’쯤 되지 않을까요? 언어학자 소쉬르(1857-1913)에 따르면 기호(sign)는 기표(signifie)와 기의(signifian)의 결합입니다. 이러한 고전파 언어학에 따르면 바이든은 바이든이고 날리면은 날리면이지 바이든이 날리면이 되고 날리면이 바이든이 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자크 데리다(1939-2004)는 이러한 구조를 “해체”(deconstuction)하면서 본질적으로 다르게 보이는 이면에도 유사한 동질성이 있다며 “차연”(defférrance) 이론을 주창하여 일대 혁신을 이뤘습니다. “차연”(差延)이란 ‘차이’와 ‘연기’를 의도적으로 합성한 개념입니다. 만일 데리다가 살아있다면 아마도 ‘조금 만 더 들어가 보면(들어 보면?) 바이든이 날리면이고 날리면이 바이든이며 바이든이든 날리면이든 별반 차이가 없다’고 한 마디 날리지 않았을까요? 하지만 예수님은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긴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나니 이러므로 너희가 어두운 데서 말한 모든 것이 광명한 데서 들리고 너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속삭인 그것을 사람들이 지붕 위에서 전파되리라”(눅 12:2-3) 하셨습니다. 이중으로 “감추”(칼립토)고 “숨긴”(크립토) 진실도 언젠가는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그러니 이제 소모적인 논쟁은 그만하고, 바이든이든 날리면이든 힘을 합쳐 산적한 현안들부터 해결해 나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 오피니언
    • 칼럼
    • 시사칼럼
    2022-10-14
  • [은혜의말씀] 십계명을 주신 이유(출 20:1~3)
    하나님은 애굽에서 비참하게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해 내어 자유를 주시고 그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아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그 새로운 신분에 걸맞게 살아갈 수 있도록 삶의 지침을 주셨는데, 그것이 바로 십계명입니다. 십계명 하면, 우리가 오해하는 부분이 있는데 신약시대에는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을 받지만, 구약시대에는 계명을 지킴으로 구원받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아니지요! 십계명은 구원을 얻기 위해 필요한 것이 아니라, 구원받은 자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기 위한 기본적인 언약인 것입니다.(엡 2:8,9) 또 하나는, 지금은 신약시대이므로 은혜로 구원을 받았으니 율법은 더 이상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 사역을 완성하신 우리 주님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주신 십계명보다 더 엄격한 윤리의식을 산상수훈에서 가르치고 있습니다.(마 5:16,17) 마지막으로, 또 하나의 오해는 십계명은 우리의 자유를 속박하기 위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하여 보십시오. 나라마다 법(法)이 있습니다. 그러면 왜 법이 있는 것입니까? 그것은 국민을 얽어매고 자유를 빼앗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국민을 보고하고 국민의 삶을 윤택하게 하기 위하여 법이 있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계명이란 인간을 속박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를 사랑하시고 보호하시기 위하여 주신 하나님의 보호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십계명이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1. 하나님 자신을 보여주십니다.(1절)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우리가 ‘하나님’이라고 할 때 눈에 보이지도 않고 막연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말씀을 보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 수 있습니다. 말씀은 하나님을 보여주고, 하나님을 만나게 해줍니다. 십계명 말씀을 주신 것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여주시는 계시입니다.(요 1:14) 2. 그러면 말씀으로 찾아오신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2절) 여기서 우리의 실체와 하나님의 실존을 말씀해 줍니다. 우리는 어떤 존재입니까? 종 되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긍휼의 하나님은 모세를 보내서 그들을 구원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아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구원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친히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하셨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허물과 죄를 죽은 죄인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님이 친히 우리를 위해서 육신의 몸을 입고 오셨고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목숨을 버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예수님만이 나의 죄를 십자가에서 감당하여 주셨습니다. 3. 마지막으로 이제 우리는 그 하나님을 어떻게 섬겨야 합니까?(3절) 하나님만을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성을 맺는데 가장 중요한 것도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계명은 인간에게 삶의 우선순위를 바로 가르쳐 줍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인간이 하나님만 섬기는 것이 행복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삶의 우선은 하나님입니다.(신 6:4,5)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면서도, 이 말씀 가운데 담겨진 신앙이나 생활이 없다면 우리는 더 이상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하나님만을 사랑하고 섬기는 것입니다. 그 은혜만을 목말라 하는 것입니다.
    • 오피니언
    • 칼럼
    • 은혜의 말씀
    2022-10-14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