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5-02-13(목)

오피니언
Home >  오피니언

실시간 오피니언 기사

  • [이상규 교수의 역사탐색] 감부열 선교사(1)
    감부열(甘富悅)로 알려진 아치볼드 캠벨(Archibold Campbell, 1890-1977) 선교사는 여러 일화를 남긴 선교사였고, 그의 여러 가족이 한국 선교사로 일했던 한국선교 가족이었다. 그의 형 에드워드 캠벨(Edward Campbell, 甘茂悅, 1887-?), 여동생 메리(Mary Cross Campbell, 1892-1969)도 한국선교사였고, 이종사존 마리안 킨슬러(Marian Kinsler)와 헬렌 킨슬러(Helen Kinsler)도 한국 선교사였다. 감부열은 1890년 9월 28일 필라델피아에서 에디슨 캠벨과 애니 런던 사이의 차남으로 출생했다. 1913년 6월 시에틀의 와싱턴대학을 졸업하고 문학사 학위를 얻은 그는 곧바로 프린스톤신학교에 진학하여 3년간 수학하고 1916년 신학사 학위(BD)를 받았다. 그해 9월에는 헬렌 막스웰 오트(安惠理, Helen Maxwell Ott, 1888-1972)와 혼인했다. 한달 후인 10월 24일 미국북장로교 시아틀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한국선교사로 파송되어 12월 9일 부인과 함께 한국 땅을 밟았다. 2년 앞서 1914년에 내한했던 형과 누이 동생 부부는 선천과 청주에서 각각 사역하고 있어 한국이 낯설지 않았다. 내한한 감부열은 평안북도 강계 선교부로 배속되어 1917년 2월부터 평안북도 강계군 강계읍에 정주하면서 강계를 중심으로 평안북도 북부지역, 곧 산서(山西)노회 지역의 강계, 후창, 장진, 자성, 위원 등지의 교회를 관할했다. 1918년부터는 지역교회 순회와 관리 외에도 강계읍의 명신소학교와 영실학교 교사로 활동했다. 1924년 6월에는 안식년으로 미국으로 돌아가 펜실베니아대학교애서 교육학을 공부하고 문학석사(MA)학위를 얻었고, 1925년 다시 임지로 돌아와 영실학교 교장으로 일했다. 이 영실학교는 1931년까지 77명의 졸업생을 배출했고, 이 당시 재학생 80명 가운데 85%가 기독신자였다고 한다. 그 졸업생 중의 한 사람이 신사참배 거부로 투옥되고 해방과 함께 석방되었던 서정환 이었다. 그는 감부열 선교사의 특별한 관심과 사랑을 받았던 학생이었다. 강계선교부에서 일할 때 감부열은 1930년 8월 동료 선교사들과 백두산탐사여행을 다녔는데, 사울세브란스병원의 부츠, 연희전문학교의 피셔, 남감리회의 에머릭, 성서공회의 홉스, 서울의 사업가 모리스 등은 회령선교부의 맥밀란과 만나 두만강 무산에서 출발하고, 감부열은 계레지병원의 바이람, 한국을 방문한 장인 오트와 함께 압록강 혜산진을 출발하였는데 두 팀이 산지연에서 합류하여 백두산을 등반했다고 한다. 감부열은 여름휴가 때 백두산 정상을 오르곤 했는데, 백두산 생태계를 촬영하여 1931년 6월 25일 선천기독청년회관에서 ‘백두산 실사회’를 개최한 일도 있다고 한다. 그런데 감부열은 수영도 좋아하여 백두산 천지(天池)를 가로 질러 수영했던 사람은 오직 3사람 뿐이었는데, 그중 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천지는 신성시 되던 곳인데, 수면은 해발 2,257m, 면적은 9.165 km2, 둘레는 14.4 km이고, 평균 깊이는 213.43m라고 한다. 백두산 천지를 가로질러 가려면 동서 길이가 3.54km, 남북으로는 4.5km라고 하는데, 결코 쉽지 않은 거리였다. 무엇보다도 수온이 낮고 수압이 높아 수영하기 어려웠으나 감부열은 그렇게 했다고 한다. 1932년과 1933년 두 번째 안식년을 보냈다. 다시 임지로 돌아왔을 때는 일제의 군국주의가 심화되면서 1935년부터는 신사참배를 강요하기 시작했다. 선교학교는 신사참배를 하면서 학교를 유지하던지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학교를 폐쇄하던지 양자택일을 강요받고 있었다. 북장로교는 이론과 격한 토론이 있었지만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학교를 폐쇄하기로 했다. 결국 영실학교도 1938년 폐쇄되었고, 남아 있던 재학생은 일단 선천의 신성중학교로 보냈다. 감부열은 교장직에서 물러났고, 산서노회의 80여 교회를 돌보며 교인들을 격려하고 성경을 가르치고 집회를 인도했다. 그러다가 1940년 6월, 세 번째 안식년을 맞아 미국으로 돌아갔으나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일본이 하와이 진주만을 공격하여 미일관계가 악화되었고 대동아전쟁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 오피니언
    • 칼럼
    • 이상규교수의 역사탐색
    2024-10-18
  • [전영헌 목사] 지역교회와 미션스쿨의 연합
    학교는 매력적인 선교지이다. 오늘날 교회와 기독교인들이 사회 속에서 감당해야 할 사명 중 하나는 다음 세대에 신앙을 전수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학교는 매우 중요한 선교지 중 하나이다. 학생들이 하루의 대부분을 보내며, 지식과 인성을 형성하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학교는 신앙의 가르침이 배제된 채, 세속적인 가치관과 인본주의적 교육이 주된 흐름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학교를 선교지로 바라보는 시각은 교회와 기독교인들에게 새로운 도전이자 기회의 장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2008년부터 브니엘고등학교에 교목으로 부임하여 17년의 시간이 흘렀다. 17년 학교 사역 기간동안 글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놀라운 사역의 결과물들이 있었다. 하지만 사역의 결과들은 교목실 단독으로만 해낼 수 있는 일들이 아니었다. 2008년 학교 부임과 동시에 이삭교회 교육 목사로 고등부를 맡아서 겸직을 하게 되었다. 2008년부터 2016년까지 9년의 사역기간동안 이삭교회는 본교회 교역자요, 지역학교 교목인 나를 전적으로 믿고 최선의 후원을 해주었었다. 당시 이삭교회 담임목사님이셨던 정진섭 목사님은 당회와 교회의 허락을 얻어 매년 4천만 원(?)여의 재정을 들여서 이삭교회와 금정구 자원봉사센터와 브니엘고등학교가 연합으로 지역의 홀로 어르신들의 도시락 반찬을 매주 배달해 주는 봉사 프로그램을 운영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 재정과 반찬 만드는 봉사는 이삭교회가 맡아 주었고, 홀로 어르신들 선정과 봉사 시간 부여 행정은 금정구 자원봉사센터가, 그리고 만들어진 도시락 배달은 브니엘고등학교 1학년 60명, 2학년 60명 학생이 격주로 홀로 어르신들을 찾아서 배달해 주는 봉사를 7년 동안 후원해 주었다. 이를 통해 브니엘고등학교 사랑의 도시락 봉사자 학생들은 졸업 때까지 평균 120시간 정도의 봉사 시간을 부여받아 졸업하게 되었다. 단순히 봉사 시간만 부여받은 것이 아니다. 이것은 단순히 인성교육과 입시결과에만 영향을 준 것이 아니라 교회에 대한 시각변화와 나아가서는 기독교에 대한 자세가 바뀌어지는 결과들로 이어졌다. 사랑의 도시락 봉사를 했던 학생 중 서울대에 합격한 제자가 자신이 받은 장학금을 불교 신자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대학 진학이 이삭교회 사랑의 도시락 봉사로 인한 것이라는 고백을 담아 편지까지 적어서 교회에 헌금을 한 일도 있었다. 2018년부터는 브니엘예술고등학교에 전보 와서 7년째 근무하고 있다. 이 기간에 브니엘예술고등학교는 학교 채플 장소를 학교 인근 함께하는교회(담임 황동한 목사)당에서 3년간 장소사용허락을 얻어 사용했었다. 이유는 교회를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아이들이 이런 기회를 통해서라도 교회를 출입해 보는 경험을 주고자 함이었다. 교회가 공간을 내어주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월요일 같은 경우는 모든 교역자가 쉬는 날인데 휴일을 반납하고 뒤처리할 것이 많은 학생 채플 공간으로 대여하는 것은 교회의 결단이 아니면 쉬운 일은 아니었다. 2024년 우리 학교 채플은 지역교회인 제자들교회(담임 김규환 목사)와 연합으로 진행하고 있다. 월간 채플이라는 이름으로 드려지는 매월 첫 주 채플에 제자들교회는 청소년부 사역자를 메신저로 그리고 매월 아이들의 먹거리를(매월 30여만 원 지출) 우리 학생들에게 조건 없이 제공해주고 있다. 채플을 섬긴다고 해서 우리 학교 아이들이 제자들교회에 출석하는 것이 아님에도 지역교회의 사명이 지역 미션스쿨을 돕는 것이라는 사명으로 섬겨주고 있다. 우리 학교 비전 홀에서는 주일마다 2021년에 개척한 브릿지교회(담임 이성근 목사)가 예배를 드리고 있다. 브릿지교회 역시 우리 학교가 필요한 것들을 언제든지 채우기 위해 살피고 있다. 결국 미션스쿨은 혼자 존재하는 곳이 아니다. 지역교회와 지역학교가 함께 할 때 미션스쿨들이 버틸 힘을 가지고 버텨나갈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사랑과 섬김을 받은 아이들은 개독교라고 부르던 것이 어느 순간부터 개독이 아니라 기독으로 바뀌게 된다. 복음은 말로만 전해지는 것이 아니다. 지금 아이들에게 더더욱 그렇다. 복음은 말이 아니라 삶이며, 복음은 들려지는 소리로 인해 그 영향력은 더 커지게 되는 것이다. 지역교회들이 눈을 조금만 돌려서 주변의 미션스쿨들과 교회 안의 기독교사들을 잘 격려해 주었으면 한다. 다음 세대가 없다고 말만 하는 것이 아니라 다음 세대가 일어날 수 있는 근원지인 학교를 포기하지 않기를 바란다.
    • 오피니언
    • 정론
    2024-10-18
  • [은혜의 말씀] 플랜 B (본문 창세기 25 : 23)
    우리가 어떤 계획을 세울 때는 A안이 있고, 그대로 안 될 경우를 대비한 대응책이나 또 다른 계획을 플랜B라고 한다. 잠언에 보면 사람이 마음으로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구원역사는 드라마틱하다. 하나님의 스카웃은 길거리 캐스팅이 많다. 주께서 사람을 부르실 때는 외모를 보시지 않고 중심을 보신다. 그래서 B급 인생도 가망이 있다. 결핍, 부족, 연약한 자들은 자기 스스로를 B급 인생이라고 자조적으로 생각하며 낙망하기 쉽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고아, 과부, 소자, 약한 자, 병든 자, 세리, 창기를 멸시치 않으신다. 성경에서 장자를 중요시 하지만 의외로 차자가 쓰임 받은 경우가 많다. 다윗은 여덟째요, 모세는 셋째요, 아벨은 둘째요, 야곱도 둘째다. 하나님의 뜻은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는 것이다. 장자인 에서는 익숙한 사냥꾼이고 털이 많은 상남자 스타일이다. 거기에 비해 야곱은 조용한 자요, 거의 계집아이 같은 분위기였다. 에서는 따놓은 장자권을 가볍게 여기다가 뺏겼지만 야곱은 일생을 통하여 장자권을 쟁취해 나아갔다. 엄마 뱃속에서부터 싸웠고(뼛속까지 장자), 형님 발을 붙잡고서라도 지기 싫어했고(이기는 습관), 팥죽 한 그릇을 가지고 장자권을 샀고, 얍복 강에서 씨름을 할 때는 포기하지 않고 질 수 없는 싸움을 했다(이긴 자). 그래서 이름도 바뀌고, 사기꾼이 사랑꾼이 되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오지랖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고 복잡한 집안 구조인 열두 아들이 열두 지파가 되어 야곱의 축복을 이루었다. 대중가요에서 싸이는 B급 감성이라고 하는 스타일을 가지고 ‘강남스타일’을 불렀고 세계를 놀라게 했다. 규격화된 딱딱한 모습이 아니라 먼저 망가져서 무겁지 않고 가볍고 재밌는 모습이 편하고 좋다. 세례 요한의 주제는 나는 망하고 예수는 흥하는 것이다. 주께서 길거리 캐스팅을 하실 때도 베들레헴 들판의 다윗, 바벨론 포로수용소의 다니엘, 미디안 광야의 모세, 애굽 감옥의 요셉, 갈릴리 바닷가의 베드로를 부르셨다. 모두 중심이 아니라 주변 언저리였다. 메이저가 아닌 마이너였다. 주류가 아닌 비주류다. 예루살렘 다운타운이 아니라 저주받은 사마리아에서 선한 사람이 나온다. 당시 최고 양반이라고 자처한 바리새인, 고관대작을 차지한 사두개인, 성경박사인 서기관들이 아니라 역사의 아웃사이더들, 외인부대, OB팀, B급 인생들을 들어 쓰셨다. 하나님께는 외모, 스펙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본질, 중심을 보신다. 달란트 비유에서도 적은 일에 충성된 자에게 많은 것을 맡기신다. 소박한 데서 대박이 터지고, 평범한 데서 비범함이 나온다. 병든 자식이 효도한다. 똑똑한 자식은 나라에서 데려가고, 돈 많은 자식은 장모가 데려가기 때문이다. 평신도들이 사역을 잘한다. 고물가 시대에 "못난이"상품, "B급"상품, "못생긴 농산물", "부끄러운 과일과 채소", "못난이 감자", "못난이 수산물"이 인기가 있다. 때깔이 좋은 과일은 농약을 치지 않고서는 나올 수가 없고, 색깔도 꾀죄죄하고 크기도 모양도 볼품없는 과일이 무농약에 진짜배기인 경우가 많다. 예수님은 고운 모양도 아름다운 풍채도 없으셨다. B는 Best의 약자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A급이 아니라, B급 인생이라도 들어 쓰신다. 그러니 우리에게도, 누구에게도 소망이 있다. 지치고 상한 채 무기력에 빠지지 말고, 주여 내가 여기 있사오니 나를 들어 써주시옵소서 하고 나아가자.
    • 오피니언
    • 칼럼
    • 은혜의 말씀
    2024-09-30
  • “한국기독신문 아니에요?”
    26일 오후 본보에 확인을 원하는 전화가 수차례 걸려왔다. 과거 본보가 ‘A교단 교단지 사장에 대한 여러 의혹 보도’를 한 것이 있느냐는 질문들이었다. 뜬금없이 이런 질문을 받은 이유에 대해 알아보니, B언론사가 보도한 ‘(기자수첩)에반겔리아 박사학위는 무슨 돈으로?’라는 보도 때문이었다. 내용 중 “의혹이 한 기독 신문에 의해 제기됐다”는 문구가 오해를 불러 일으켰기 때문. 모 장로는 “의혹이 한(국) 기독 신문에 의해 제기됐다고 판단했다. B 언론사에서 실수로 ‘국’자를 빼먹었다고 생각했다”고 말했고, 다른 이들도 “순간적으로 빠르게 읽다보니 한국기독신문으로 착각했다”, “다른 기독신문에 아무리 찾아도 보도 내용을 확인할 수 없어서 한국기독신문이 아닐까 생각했다”고 전한 사람도 있었다. 결국 (이 기사를 읽은)다수가 오해를 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본보가 이 보도 내용에 대해 취재 해 보았다. B언론사의 보도 내용의 핵심은 첫째, A 교단 교단지 사장이 73회 총회에서 연임을 할 당시 에반겔리아대학교 박사과정이 이력에 추가되었는데, 2022년 2월 에반겔리아대학교 입학당시 전후로 교단지에 입학광고가 수차례 나갔고, 현재까지 광고료가 입금되지 않고 있어 에반겔리아 박사학위는 무슨 돈으로 공부를 했는지에 대한 의혹보도를 한 매체(여기서는 ‘한 기독 신문’으로 표현)가 보도를 했다는 것과 두 번째는 지난 9월 24일 유지재단 이사장 및 이사 이취임식 후 첫 이사회에서 재단 감사에 의해 위 내용이 제기됐고, 유지재단 이사회 언론분과가 조사에 나섰다는 게 내용의 핵심이다. 하지만 본보가 취재한 내용은 사실과 다른 점이 있었다. A 교단 교단지 사장은 “(B언론사)보도 내용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에반겔리아가 (광고료 입금)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이 팩트다. 광고국장에서 수차례 수금을 지시했는데, 당시 광고국장인 구00이 수금을 못했고, 후임인 서00 광고국장이 들어와 일부 수금을 했고, 현재 300만원이 남아있으며, 연말까지 다 송금하겠다고 에반겔리아에서 약속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총회유지재단 이사회 언론분과에서 위 내용에 대해 조사를 시작했다는 내용도 사실과 다른 것으로 확인했다. 유지재단 이사인 C 장로는 “이취임식 후 첫날이라 상견례 자리였다. 대출연장건과 유치원 교사 임명건 등이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신임 이사들을 소개하고 인사하는 자리였다. 언론사 사장에 대한 논의는 전혀 없었고, 언론분과에서 조사를 시작했다는 보도도 사실과 다르다”고 확인해 줬다. 혹시나 해서 총회유지재단 이사장이며 교단 총회장인 정태진 목사에게도 위 같은 내용을 질의했다. 총회장은 단호하게 “그런 결정을 한 적이 없습니다”고 답변을 보내왔다. 본보로 오해를 낳았고, 처음 이 내용을 보도한 언론(한 기독 신문)은 뉴스00이라는 매체다. 서울에 본사를 둔 인터넷 언론이다. 그런데 이 언론은 ‘기독신문’이라고 볼 수 없다. 일부 교계 뉴스들이 눈에 띄지만, 대부분이 정치와 사회, 문화에 대한 보도가 주를 이루는 일반언론이다.
    • 오피니언
    • 기자수첩
    2024-09-27
  • [성서연구] '자기 곳'으로 돌아갔더라
    우리나라에 <찔레꽃>이란 같은 이름의 노래가 세 곡이나 있습니다. 그중 하나가 <박태준> 작곡의 동요인 <가을밤>의 곡에 <이원수> 선생이 가사를 붙인 곡입니다. 이 곡은 엄마 생각을 간절하게 합니다. 이 곡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엄마 일 가는 길에 하얀 찔레꽃 / 찔레꽃 하얀 잎은 맛도 좋지 / 배고픈 날 가만히 따 먹었다오 / 엄마 엄마 부르며 따 먹었다오> 얼마 전 부모님 살던 집에 갈 일이 있었습니다. 부모님이 간절히 그리웠습니다. 그때는 거기가 집이었습니다. 체온을 느끼며 함께했습니다. 늙고 연약해지셔도 부모님은 부모님이셨습니다. 그런데 이젠 다 안 계십니다. 손자가 태어났을 때도 알려드릴 부모님이 안 계시다는 것에 눈물이 났습니다. 부모님의 부재는 집의 상실로 다가왔습니다. 종종 나중에 어디서 살아야 할지 생각해 보곤 합니다. 근 삼십여 년 살았던 부산, 강을 좋아하니 북한강이나 남한강변, 산을 좋아하니 공기 좋은 설악산 근처, 아니면 아들이 사는 울산 근처, 혹은 아직 할 일이 있을지 모르니 서울 근처에 살아야 하나 생각해 보곤 합니다. 그러나 어디도 흡족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마음이 가지 않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마음이 가지 않는 큰 이유는 부모님이 안 계시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흔히 생존의 조건으로 의식주를 말합니다. 그중에서 <주>는 단순한 집이 아닙니다. 사람은 흔들리는 나그네입니다. 집은 인생을 붙들어주는 것은 마음 붙일 곳입니다. 그곳은 집 이상입니다. 고대광실이라도 마음이 가지 않으면 인생을 붙들어주지 못합니다. 초가삼간이라도 마음이 가는 곳이라면 행복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에게도 그런 곳이 있었습니다. 창세기 18장 33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아브라함과 말씀을 마치시고 가시니 아브라함도 자기 곳으로 돌아갔더라> 여기 <곳>이란 <마콤>이란 히브리어인데, 여러 가지로 번역되었습니다. 『NIV성경』은 이라 했고, 『쉬운성경』은 <자기 집>으로, 『현대인의성경』은 <자기천막>으로, 『새번역성경』은 <자기가 사는 곳>으로 번역했습니다. 아브라함의 <자기 곳>은 어떤 곳이었을까요? 그가 살던 마므레는 예루살렘에서 남쪽으로 35킬로 정도 남쪽에 위치한 헤브론 근처로 보입니다. 그의 주거 형태는 장막이었습니다. 그는 거기서 소돔을 멸망시키러 가는 하나님의 사자들을 만나 대접했고, 하나님의 사자들은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이삭을 낳을 것을 예고했습니다. 그 후 그들이 소돔성으로 떠날 때 아브라함은 따라가며 전송했습니다. 창세기 18장 16절을 보면 <그 사람들이 거기서 일어나서 소돔으로 향하고 아브라함은 그들을 전송하러 함께 나가니라>고 했습니다. 그곳에서 아브라함의 장마까지는 제법 거리가 있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적어도 몇 분 정도 걸어야 할 거리가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아브라함의 장막은 어떠했을까요? 그곳에는 아내 사라와 종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거기 하나님께서 계셨을 것입니다. 일찍이 조카 롯이 소돔 방향으로 떠난 후 아브라함은 그대로 빈들에 남았는데, 그때 하나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창세기 13장 후반부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장막은 불편했지만, 하나님과 함께하는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롯은 잘 지어진 성읍 안에서 살았으나, 유황불에 멸망했고, 아브라함의 장막은 안전했습니다. 소돔이 멸망하던 날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사자들을 전송하던 곳에서 소돔의 멸망을 바라보았습니다. 창세기 19장 27~28절입니다. <아브라함이 그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여호와 앞에 서 있던 곳에 이르러 소돔과 고모라와 그 온 지역을 향하여 눈을 들어 연기가 옹기 가마의 연기같이 치솟음을 보았더라> 우리의 <곳>은 어떤 곳인가요? 우리의 <곳>도 하나님을 뵙는 곳이 되길 원합니다. 요한복음 8장에는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둘러싼 이야기가 나오는데, 예수님께서는 그녀를 용서하시고 변화시키신 반면에, 바리새인들은 그녀를 이용해서 예수님을 겁박했습니다. 그 이유는 바리새인들은 그 전날 분노한 채로 <자기 집>으로 갔고, 예수님께서는 <감람산>으로 가셔서 기도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곳>이 어떤 곳인가에 따라 장차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까지 결정될 것입니다. 삶의 처소를 하나님 안에서 경건하게 가꾸는 성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 오피니언
    • 칼럼
    • 성서연구
    2024-09-13
  • [소강석칼럼] 저도 옳고, 그분들도 옳았습니다
    지난 7월 초 강원도 오색그린야드에서 아침 9시부터 저녁 9시 반까지 단 한 시간도 안 빠지고 교역자 워크숍에 참여를 했습니다. 그냥 참여만 한 것이 아니고, 모든 강의를 하고 거기에 대한 반응을 보며 워크숍을 인도한다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때 평소 존경하는 목사님 몇 분을 만났습니다. 그분들은 부부 간에 한 주간 동안 쉬러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 중 한 분의 목사님이 “역시 소 목사님은 젊고 은혜가 충만하시네요. 오늘 하루로 끝납니까?” “아닙니다. 2박 3일 동안 계속합니다.” “예, 그러시군요.” 다음 날 커피숍에서 거기 오신 모든 분들이 함께 차를 마시고 있었습니다. 저는 응당 가서 인사를 드렸지요. 그중에 한 분이 이런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소 목사님, 쉬엄쉬엄하세요. 우리가 시간이 남아서 놀러 온 것이 아닙니다. 휴식을 하고 재충전을 하러 온 것입니다. 소 목사님 그러다가 반드시 탈진이 오거나 쓰러집니다.” “예, 그 말씀 유념하겠습니다.” 저는 또 수련회 현장으로 올라와야 했습니다. 그런데 저녁식사 후에 또 그분들과 마주했습니다. 오색그린야드라는 공간이 입구는 하나고 좁지 않습니까? “목사님, 우리하고 식사는 함께 못하더라도 차라도 한 잔 마십시다. 우리는 내일 OO호실에서 보이차를 마십니다. 9시 반까지만 오시면 됩니다. 목사님이 한 시간 빠진다고 달라질 게 뭐가 있습니까?” “예, 알겠습니다. 노력해 보겠습니다.” 저는 사실 저녁 타임 끝나고 시원한 주전골도 한번 못 걸어봤거든요. 점심 먹고 1km 남짓 걷다 오는 게 전부였습니다. 사실 저녁 타임 끝나고 얼마든지 걸을 수 있습니다. 최소한 용소폭포까지는 걷다가 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행여라도 제 마음이 해이해지고 나태할까 봐 걷지를 못했습니다. 저는 오로지 체인 리액션을 생각하다가 어떻게든지 다음 날을 위해 빨리 잠자는 일밖에 없었습니다. 몸이 피곤하고 어깨가 수천 킬로, 수만 킬로처럼 짓눌려도, 이것은 담임목사만이 누리는 특권이자 고통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저는 결국 그 차담 모임에 참석하지 못하였고, 지금도 그분들께 죄송한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그 이후 저는 신혼부부들을 위한 ‘피어라 봄’을 진행하였고, 장년여름수련회를 인도했습니다. 여름수련회가 끝나자 저는 탈진이 왔고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었습니다. 다행히 재빠르게 이재훈 의료목사님(다건연세내과 원장)이 링거를 놔주셨고, 김용선 장로님(성빈한의원 원장)이 보약을 지어 주셔서, 그나마 어느 정도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즘 피곤을 느낄 때마다 자꾸만 그분들 말씀이 생각이 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때 당시로써는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저의 생각도 옳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분들의 말씀이 격언처럼 들렸지만, 저의 행동도 절대로 틀리지 않았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리고 후회하지도 않습니다. 어쩌면 그런 기회가 다시 온다 해도, 저는 저의 생각대로 밀어붙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얼마 전 한국교회 큰 지도자이신 목사님께서 저에게 해주신 말씀이 기억납니다. “나나 소 목사는 솔직히 서자 출신 아닌가? 서자가 받은 은혜와 적자로 생각하는 사람이 받은 은혜는 결이 다르지 않는가. 소 목사나 나나 비록 서자 출신이지만 맨손으로 개척을 해서 교회 부흥을 이룬 사람은 적자하고 결이 다르지 않는가. 우리가 할 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뜻에 순종, 충성하고 헌신하는 것이네. 나도 목회를 하면서 단 한 해도 안식년을 가져본 적이 없네. 서자에게 무슨 안식이 필요하겠는가. 우리는 오로지 하나님께 울먹이며 죽도록 충성만 할 뿐이라네.”
    • 오피니언
    • 칼럼
    • 소강석 칼럼
    2024-09-13
  • [시사칼럼] 저출생문제 어떻게 할 것인가
    한국의 저출생문제는 주지의 사실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대안은 무엇입니까? 크게 두 가지 전략이 있겠습니다. 하나는 현재의 인구 수준을 유지하는 전략입니다. 적령기의 미혼남녀에게 결혼과 출산을 장려하는 정책은 이런 거시적 전략의 바탕 위에 서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하면 정작 당사자들로부터 들려오는 반응은 한결 같습니다. ‘또 아이 낳으라는 얘기야?’ 저출생문제를 다루는 대부분의 보도나 연구의 결과가 대개 이러한 ‘결혼-출산의 독려’로 끝이 났으니 그럴 만도 합니다. 또 하나는 인구 감소를 당연시하고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가자는 전략입니다. 전자에 관해서는 이미 많은 논의가 존재하니 여기서는 후자를 먼저 다루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지금의 인구도 많으니 앞으로 더 줄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인류가 인구적, 경제적으로 축소하는 쪽으로 나아갈 필요가 있고, 그렇게 할 수 있으며, 또한 그것이야말로 인류에게 복음이다. 다만 그러기 위해서는 앞으로 300여 년간 축소 과정이 파멸적이지 않는 경로를 더듬어 가야하는데, 결코 쉽지만은 않은 길이다.” 일본의 월간 <세카이(世界)>의 특집 ‘사피엔스 감소-인류사의 전환점’에 ‘제로성장경제와 자본주의’라는 제목의 글을 기고한 오노즈카 도모지(小野塚知二) 도쿄대 대학원 경제학연구과 교수의 말입니다(한승동, 피렌체의 식탁, 2021. 8. 24). 한국에도 이러한 견해에 동조하는 이들이 늘고 있습니다. 『절반세대가 온다』(현암사, 2023)의 저자들도 그러합니다. 여기서 “절반세대”란 막연한 개념이 아니라 출생아 100만 시대(1970년)에서 절반인 49만 대로 떨어진 2002년생과 다시 그 절반(24만)이 되어버린 2022년생을 가리키는 용어입니다. 첫 번째 절반세대부터 향후 성장하는 과정에서 한국사회에 어마어마한 충격파를 던질 수밖에 없는 현실입니다. 최슬기 한국개발연구원 국제정책대학원 교수는 “이들이 군에 입대하고 직장인이 되는 3~5년 뒤 병력 부족과 구인난 등 사회적 충격이 본격화될 것”이라며 “현 인구로는 기존사회를 운영할 수 없는 만큼, (이제) 사회적 시스템을 바꿔야 하는 시대가 왔다.”고 진단합니다(절반세대가 온다, 39). 일리가 있습니다. 첫 번째 절반세대도 그러하다면 그 절반밖에 안 되는 두 번째 절반세대가 본격적으로 활동하는 시대에는 어떠하겠습니까? 그러나 현재 인구의 절반만으로도 운용할 수 있는 전혀 새로운 사회를 만든다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부족한 인구를 자연출생이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보충하는 방안을 강구하는 일이 어쩌면 더 현실적일 수도 있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하나의 대안으로 부상하고 있는 것이 ‘이민’입니다. 사실 이민은 미래의 대안이라기보다 작금의 현실입니다. ‘외국인 노동자가 없는 마을을 상상이나 할 수 있겠습니까? 생각만 해도 아찔합니다!’(경기 포천의 어느 농부의 말) 법무부는 벌써 외국인 근로자 선발 요건 완화와 인원 증가를 위한 숙련기능인력 제도 개선책을 내놓았고(2023년 9월), 외국인 계절근로자의 최대 체류 기간마저 5개월에서 최장 8개월로 늘린 바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연간 11만 명 이상의 인원이 이렇게 끊임없이 한국사회로 유입되지만 때가 되면 그대로 다 빠져나간다는데 있습니다. 필요한 인력자원을 한국사회에서 받아들이려면 필수적인 요소가 바로 ‘이민청’의 신설입니다. 작년 12월 법무부는 출입국·이민관리청 신설 방안을 마련했지만 법제상으로는 아직 답보 상태에 있다 합니다. 사실 법이나 제도를 바꿔서만 되는 일도 아닙니다. 그 어느 국가보다도 단일민족의식이 강한 우리 사회의 특성 상 인식과 아비투스(habitus)의 대전환이 일어나야만 ‘이민’이 근본적인 대안으로 부상할 수 있을 겁니다. 어쩌면 가장 현실적이면서도 바람직한 대안이 하나 더 있습니다. 디아스포라 한인들을 데려오는 방안입니다. 명승환 인하대 행정학과 교수와 같은 이들도 같은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한국에 사람이 없다. 재외동포가 한국에 돌아와야 한다. 이들을 따뜻하게 맞아주고 한국을 사랑할 수 있게 해야 한다.”(매일경제, 2024년 9월 6일) 재외동포는 숫자만도 750만 명 가까이 추산할 만큼 엄청난 잠재력을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종교 등 여타 이유로 받아들이기 어렵게 여기는 다른 민족에 비해 부작용도 적습니다. 작년 6월 ‘재외동포청’이 ‘이민청’에 앞서 출범한 이유도 이런 부분에서 기인합니다. 치열한 유치 경쟁 끝에 재외동포청이 들어선 인천의 경우 벌써 ‘재외동포 지원 조례’를 만들어서 공포하는 빠른 행보를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멉니다. 본국의 한인들이 디아스포라 2, 3세대 한인들을 바라보는 시각 자체도 변화가 있어야 하겠고, 이들이 한국사회에 정착하는 것을 어렵게 하는 각종 규제나 장벽도 필요하다면 제거해 주어야 하고, 자녀 돌봄이나 교육과 같이 민감한 사안들도 적절하게 조율해야 합니다. 자, 이제 모두 지혜를 모으고 힘을 합쳐야 할 때입니다. 언제나처럼 위기를 극복하고 국난을 발판 삼아 새로운 도약을 이루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 오피니언
    • 칼럼
    • 시사칼럼
    2024-09-13
  • [이상규 교수의 역사탐색] 부산경남지방에서의 서양음악3
    부산지방에서 서양음악은 초기 설립된 교회를 통해 선교사들의 지도로 찬양대를 중심으로 전파되었다는 점을 지적했는데, 이번에는 북장로교 선교부와 초량교회 중심으로 소개하고자 한다. 부산에 온 첫 북장로교 선교사인 윌리엄 베어드의 부인 애니(Annie Baird, 1864-1916)는 음악 애호가였다. 캔자스 주의 토피카 출신인 그는 피아노나 오르간을 연주할 수 있었고, 한강 이남에서 최초로 ‘예수사랑하심’을 번역했다는 점을 앞에서 지적한 바 있다. 애니는 다섯 자녀를 출산했는데, 첫째 딸과 넷째 아들을 한국에서 잃었다. 그는 남편과 함께 1891년 1월 29일 부산으로 입국하여 서울에 체류하던 중 그해 9월 초 부산으로 이주하여 부산지부를 개척했다. 1892년 7월 5일에는 첫 아이 낸시 로즈(Nancy Rose)를 출산했는데, 1894년 5월 13일 두 돌도 채우지 못하고 뇌막척수염으로 사망했다. 이때의 아픔을 노래한 것이 지금 찬송가 387장에 수록된 “멀리멀리 갔더니 처량하며 곤하여”라는 가사이다(그의 넷째 아들 아더 팰리스는 1901년 12월 5일 평양에서 출생했는데 두 돌이 되기 전인 1903년 1월 18일 평양에서 사망했다). 이를 시작으로 애니는 여러 찬송가 가사를 썼다. 애니가 작시하거나 번역한 찬송가가 ‘찬미가’(1895, 1897)에는 10편, ‘찬셩시’(1898)에는 28편이 게재되었고, 1905년판 ‘찬셩시’에는 58편이 게재되었다. 전체 151편 중 38%에 해당한다. 1983년의 통일찬송가에는 30편이 수록되었고,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찬송가에는 두 곡, 고 “나는 갈길 모르니”(375)와 “멀리멀리 갔더니”(387)가 실려 있다. 윌리엄 베어드는 1895년 1월 부산에 한문서당(Chinese School)이라는 남자학교를 열었는데, 학생 수는 25명 정도였다. 애니는 이 학교에서 풍금을 가지고 음악을 가르쳤다. 베어드는 선교편지에서 이렇게 썼다. “아내 애니가 찬송가를 가르쳐서 학생들의 마음을 사로 잡았다.”고. 서양음악은 선교사들을 통해 교회나 기독교 학교 중심으로 소개되었음을 알 수 있다. 앞에서 소개했지만 부산에서의 첫 피아노는 북장로교 선교사 사보담(William Sidebotham) 부인 에피(Effie)의 것이었다. 그들이 1900년 11월 대구지부에서 부산지부로 이동함에 따라 피아노도 부산의 서양식 악기가 되었고, 부산에서의 서양음악의 보급에 크게 기여하였다. 초량교회에서의 예배, 찬양대의 활동은 사실상 서양음악의 보급이었다. 흥미로운 사실은 호주선교사이자 일신여학교 교장이었던 위대서(Muriel Withers)가 초량교회 찬양대를 지도했다는 점이다. 그는 1918년 내한했고, 1923년부터 부산에서 일했는데 자신이 속한 부산진교회 찬양대 운영에도 많은 도움을 주었지만, 1930년대 초량교회 찬양대를 지도하였다. 당시 초량교회 이약신 목사는 1931년 9월 말 부임하였는데, 그도 음악에 소질이 있었고 성악에 재능있어 공예배에 특송을 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특히 그는 진주에서 시무할 당시부터 호주 선교사들과 긴밀했다. 이런 관계로 호주 선교부의 위대서 교장이 초량교회 찬양대를 지도하게 된 것이다. 1934년 6월 당시 초량교회 찬양대원은 20여명이었다. 이때의 상황을 보여주는 사진 한 장이 남아 있다. 이상과 같이, 교회를 통한 선교사들의 활동으로 서양음악이 소개되었고, 부산지역의 여러 교회에 찬양대가 조직되었다. 그래서 1934년 말에는 60여 명으로 구성된 부산지역 교회연합 찬양대를 구성하였고, 그해 12월 25일에는 부산시청에서 성탄절 기념찬양대회를 개최했다.(사진) 이때 음악회를 주도하고 찬양대를 지휘한 이가 호주선교사 허대시(Daisy Hocking)였다. 부산진교회와 초량교회가 주축이 되었을 것으로 보이지만 제일영도교회, 수안교회, 항서교회, 대연교회, 초읍교회 등도 동참했을 것이다. 기독교회는 양약 전파의 주된 통로였다.
    • 오피니언
    • 칼럼
    • 이상규교수의 역사탐색
    2024-09-13
  • [위드애] 장애(인)에 대한 인식전환이 필요할 때
    태어날 때부터 (뇌병변)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나는 스무 살 때에 왼쪽 팔과 다리가 마비되는 편마비장애를 하나 더 갖게 되었다. 즉 태어날 때부터 지금까지 장애를 갖고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장애인 당사자로 살아간다고 해서 누구나 장애(인)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살아가는 것은 아니다. 내가 그러했다. 그러다가 경기도 의정부에 있을 때에 장애인교회를 섬기면서 장애(인)에 대해서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관련 책들을 통하여 스스로 배웠고, 여전히 책을 통하여 배우고 있다. 그런데 이론 관련 책은 대부분 평균값이기에 이론만을 가지고 현실과 접목시키는 일에는 한계가 있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최근 몇 달 사이에 내가 알고 있는 장애(인)와 관련된 올바른 지식을 얻고 확인하기 위해서 두 가지 활동에 참여했는데, 하나는 ‘장애인식개선교육’ 강사양성과정 수강이었고(현재는 강사로 위촉), 또 하나는 ‘누누서포터즈’ 활동이다. ‘장애인식개선교육’은 내게 있어서 장애 이해에 대한 부족함이 있음을 알게 해주었으며, 장애인 당사자이면서도 장애인 차별을 뜻하는 용어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사용하고 있는 내 자신을 돌아보게 해주었다. 그리고 서포터즈 활동은 현재진행형으로 장애인과 비장애인들이 함께 하는 활동인데, 서포터즈로 활동하면서 책에서는 알지 못하고, 발견하지 못하고, 느끼지 못한 것들을 이들과 교제를 나누며 알아가고 있고, 발견하고 있고, 느끼고 있다. 그러면서 이론도 중요하지만 함께 하는 삶이 더 중요함을 인식하고 있다. 현재 규모가 있는 교회들은 교회 안에 ‘장애인부’서가 있는데, 그 교회와 부서들에게 궁금한 것이 있다. 장애인부서를 맡고 있고 함께 하는 교역자나 교사들은 그(장애인)들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는지, 그(장애인)들에 대해서 알려고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지, 또한 장애인부서를 둔 교회 성도들은 그(장애인)들을 볼 때에 여전히 불쌍한 시선으로 바라보는지, 그들을 향한 섣부른 위로로 그들에게 오히려 상처를 주고 있지 않은지, 그도 아니면 그들이 교회 안에는 있지만 아예 그들에게 관심조차 가지고 있지 않은지... 만약 그리하고 있다면 목사이자 장애인 당사자로서 마음이 무거울 것 같다. 세상은 장애인의 대한 차별적인 용어나 편견을 줄이고 모든 사람이 어울려 살아갈 수 있도록 이론교육을 하고 체험교육을 시행한지 오래되었다. 그런데 교회는 여전히 '장애인식개선교육' 의무대상에서 제외되어있으니, 이러한 교육에 대해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있고, 그저 매년 4월 20일을 전후로 장애인주일을 지키는 것으로, 또는 부활주일이나 성탄주일에 물질로 돕는 일을 함으로 교회가 그들을 위해 해야 할 일을 다 했다 하며 스스로 만족하는 선에서 머물러 있지는 않은지 돌아봐야 한다. 물론 이런 것도 필요하지만 이제는 장애(인)에 대한 인식전환이 필요할 때라 생각한다. 그들에 대해 일반적이고 주관적으로 생각하고 때에 맞춰 물질로만 돕는 방법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들에 대해 올바르게 알아 실수를 줄여가고 그들과 함께 할 방법을 모색해야 할 때가 아닌지 교회와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깊게 생각해 볼 때이다.
    • 오피니언
    • 칼럼
    • 위드애(with 愛)
    2024-09-13
  • [은혜의말씀] 5중 축복 (빌립보서 4:19)
    사도 바울이 감옥 안에서 깨달은 5가지 축복이 있다. 복음을 전하다 매를 맞고 깊은 감옥에 갇혀서 발에 착고를 차고도 한밤중에 인생넋두리를 한 것이 아니라, 찬송을 불렀다.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해도 새털처럼 자유롭게 주 안에서 기뻐했다. 처자식도 없고 머리 둘 곳 하나 없었지만, 복음을 전파하는 데에는 담대하게 거침없이 나아갔다. 1. 나의 하나님이 내게 주시는 맞춤형 축복 하나님은 도매도 잘 하시고 소매도 잘 하신다. 우주 만물을 다스리시지만 작은 아이의 신음소리를 들으시고 응답하신다. 병을 치료 할 때 표적치료를 하듯이 나의 아픔을 아시고 맞추어서 치료해 주신다. 다른 사람들이 다 복을 받고 내가 망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천하를 얻고도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을까? 우리의 합심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은 나의 개인적인 기도도 외면치 않으신다. 주께서는 무리를 돌봐주시지만 한 사람도 소홀히 대하지 않으신다. 여러분과 가정과 교회와 나라의 하나님! 내 아버지, 내 하나님이 축복해 주신다. 2.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얻는 축복 바울 신학의 핵심은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복이다. 바울은 감옥 안에 갇혀 있었지만 주 안에서 기뻐하였다. 성도는 어디에 있든지 주님의 날개 아래, 손길 안에 있는 것이다. 탐스러운 포도나무의 비밀은 그 가지가 줄기 안에 붙어있어야 되는 것이다. 가지가 줄기를 떠나면 반드시 죽는다. 포도나무 가지가 붙어있을 때 본체이신 그리스도께로부터 모든 것을 공급받기 때문이다. 예수 안에 모든 것이 있다. 물을 떠난 물고기가 살 수 없듯이 주를 떠나서는 구원이 없다. 주 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 두 마음을 품지 말고 양다리를 걸치지 말고 경계선을 지나 주 안에 거하라. 3. 영광 가운데 풍성한 축복 성화의 마지막 단계는 영화롭게 되는 것이다. 천국은 가장 영광스러운 곳이다. 천국의 영광, 복음의 권능, 예배의 감격, 구원의 즐거움을 누리자. 우리 주님은 쩨쩨하신 분이 아니고 풍성하신 분이다. 차고 넘치게 응답하시는 분이다. 기대이상으로 기도응답을 하시는 분이다. 하나님은 당신을 선대하시고 후대하시는 분이시다. 4. 나의 모든 쓸 것을 아시고 주시는 복 나를 지으신 하나님은 나의 나 됨을 가장 잘 아신다. 스케일이 있으면서도 디테일이 있는 하나님이시기에, 나의 쓸 것과 필요를 다 아시고 흡족한 은혜를 주신다. 사람들은 누구도 각양의 필요를 맞추어서 다 채워 줄 수가 없다. 주님만이 내게 꼭 필요한 것을 아시고, 날마다 때마다 일마다 채워주신다. 초대교회가 행복했던 것은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었기 때문이다. 5. 충만하게 채우시는 복 허기진 내 영혼의 빈 곳을 주께서 채우시기 전에는 방황이 멈추지 않는다. 오직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라. 교회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해야 된다. 나라는 공평과 정의가 세워져야 된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내 은혜가 족하도다. 절박함으로 구하면 주께서 채우신다.
    • 오피니언
    • 칼럼
    • 은혜의 말씀
    2024-09-13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