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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홍목사의 다음세대 이야기]가정이여, 두려워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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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한 이사야 41장 11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두려워하지 말라.” 하십니다. 이 말씀은 나라를 잃고 이방 땅에 포로로 끌려간 이스라엘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고향도, 성전도, 미래도 보이지 않던 그들에게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오늘날 우리의 가정도 역시 지금 두려움에 충만해요. 그런 우리에게 하나님은 다시 한 번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럼 오늘날 우리의 가정은 왜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까요?
1. 하나님의 임재가 문제보다 훨씬 크기 때문입니다.
우리 가족은 항상 문제가 많아 보여요. 그래서 우리는 늘 우울해요. 내 문제가 너무 크니까. 우리는 항상 남의 아버지, 어머니가 부럽고 남의 자녀들이 예뻐보여요. 내게도 저런 가족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싶어요. 그런데 주님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와 함께함이라”고 말씀하는 건 가족이 되어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또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라고 하세요. 우리 인생에서 가장 놀랄만한 일은 우리에게 찾아온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고 내 하나님이 되어 주신다는 진짜 사건이에요. 내가 뭐라고, 우리 가정이 뭐라고 하나님은 나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고 우리 가정을 찾아오셔서 문제투성이, 아픔투성이인 우리를 끌어안으십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 인생에서 가장 힘든 순간은 문제가 커지는 순간이 아니라 내가 작아지고 혼자라고 느껴지는 순간입니다. 문제가 사라지고 해결되는 것보다 더 큰 은혜는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이 시간이 너무 좋아서 문제가 주는 아픔이 줄어들고 문제를 견뎌낼 힘이 생겨요.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시니까 조금 불편하고 부족한 내 삶이 견딜만한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한 가정은 문제가 없는 가정이 아닙니다. 두려움보다 하나님의 임재가 더 큰 가정입니다.
2. 성령님이 우리를 도우심이 가장 큰 보장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은 안정형 가정보다 역기능적 가정이 참 많습니다. 가정 안에서 상처를 받고 서로 아픔을 주면서 살아요. 그래서 가정을 떠나 벗어나는 게 꿈인 자녀들도 많아요. 계속 흔들리며 사는 거에요. 그렇다면 하나님은 우리의 삶 가운데로 걸어 들어오셔서 무엇을 하실까요? 우리가 이 세상의 풍파가운데서 굳세어지도록 참으로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성도는 환경이 나아질 것을 기대하며 사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도움을 기대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돕겠다고 약속의 실체는 바로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주신 것입니다. 보혜사라는 말의 뜻이 바로 '곁에서 돕는 분'입니다. 성령님은 단순히 우리 곁에 계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를 때 대신 간구하시고, 진리로 우리를 인도하시며,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언해 주십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두려움을 불어넣어서 더 많은 물건을 사게 하고 더 많은 보장을 준비하게 합니다. 더 큰 집을 사고 더 빛나는 명품을 사면 나의 두려움이 사라질 거라고 말해요. 더 많은 사람을 사귀고 더 힘을 기르면 나의 미래는 든든할 거라고 말해요. 하지만 성령충만한 가정은 그렇게 준비되지 않습니다. 성령 하나님이 우리 가정에 오시도록 매일 매일 성령님을 초대하는 거에요.
3. 예수님이 우리를 끝까지 붙들어 주심이 가장 귀한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내가 하나님을 잘 믿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내가 하나님을 잘 붙드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이미 붙들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날은 믿음이 좋습니다. 어떤 날은 기도도 잘 됩니다. 그러나 어떤 날은 낙심하고, 흔들리고, 기도조차 나오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때도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네가 나를 놓쳐도 나는 너를 놓지 않는다.”
우리가 하나님의 손을 놓고 뿌리쳤을 때에도 예수님은 우리를 놓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십자가까지 가셨습니다. 우리가 붙들 만한 가치가 있어서가 아니라 끝까지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물론 오늘 당장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을 수도 있습니다. 자녀가 하루아침에 변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병이 금방 낫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성령 충만한 가정은 결과보다 하나님의 동행을 붙드는 가정입니다. 아픔가운데 두려워하기보다 주의 임재를 바라보는 가정, 하나님이 도우심을 믿고 의지하는 가정, 하나님의 붙잡아주심을 기대하며 감사하는 우리 가정이 바로 두려워하지 않고 승리하는, 성령 충만한 가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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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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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건축칼럼]유럽의 공동화 현상이 주는 공간의 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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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의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가지고 있는 유럽의 교회와 성당은 이미 공동화되어 교회의 본질적 기능을 상실한 지 오래되었다. 이런 현상은 한국 교회 건축에서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현대는 하루가 과거 수년간의 시간을 변화시키고 있다. 인공지능과 로봇 산업은 그 사이클을 더 가속화시키고 있음을 지금 우리는 보고 있다.
유럽의 교회가 공동화되는 원인은 우리에게 반면교사가 될 것이다. 사회적 요인은 별도로 하고, 건축과 공간적 측면에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유럽의 교회는 공간의 구조가 예배 중심 공간으로 편중되어 있다. 전체 연면적 중에서 예배 공간이 70퍼센트 전후를 점유하고 있다. 모든 공간의 중심이 본당 위주로 건축되어 있다. 현대 사회의 다양한 문화적·사회적 요구를 수용할 수 없는 구조이다. 지역사회와도 전혀 소통할 수 없는 구조이다. 이것이 공동화의 주된 요인이다.
둘째, 지역사회와 연결되지 못한 공간 기능이다. 교회가 위치한 지역과 소통하거나 근린센터로서의 기능이 부재하다. 그 이유는 본당 위주로 공간이 편중되어 있어 지역과 함께하거나 소통할 수 있는 여지가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셋째, 과도한 외관의 상징 체계이다. 교회라는 인지성을 시각적인 측면에서 해결했다. 과도한 종합이다. 지붕, 스테인드글라스의 확실한 입면 등은 건축물의 유지·보수에 많은 비용을 지출하게 했고, 공간이나 기능의 효율성은 오히려 더 약화시켰다. 교회라는 상징은 눈에 보이는 것에서 공간의 체험으로 바뀌어야 한다. 종교적 건축물은 공간이 주는 느낌과 분위기, 공간의 경험에서 오는 거룩성이 더 본질적이기 때문이다. 크기의 압도에서 오는 상징성의 표현은 중세 시대의 종교 건축이 주는 특징이다. 우리는 아직도 건축에서 우리 교회가 더 랜드마크적 스케일을 추구하고 있다.
건축을 계획하고 준비하는 과정이라면 무엇보다 건축 후에 교회가 공동화 현상에 직면하지 않는 방안에 대한 연구가 선행되어야 한다.
공간을 계획하고 용도와 기능의 분배를 계획할 때 본당의 비중을 줄이고, 교회와 지역사회가 유기적으로 연합되는 측면에서 고려해야 한다.
본당은 40퍼센트 미만, 지역사회와 소통하는 공간은 30퍼센트, 교육 공간은 30퍼센트의 균형 있는 공간 배분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그다음에 세부적 용도와 기능이 수립되어야 우리 교회는 지속 성장이 가능한 교회로 기능할 것이다. 지금보다 10년, 20년을 보고 계획하는 안목의 확장성을 고려할 시점이다. 많은 물질과 수고로 건축된 교회가 정체되는 이 역설은 공동화가 주는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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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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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규교수의 역사탐색]엑소몰로게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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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교회 역사에서 맞닥뜨리는 흥미로운 단어 중의 하나는 엑소몰로게시스(Ἐξομολόγησις)라는 용어이다. ‘공개 참회’ 혹은 ‘공개적인 회개’라는 뜻이다. 이 단어는 두 개의 접두사, 하나의 어근, 그리고 명사화 접미사로 구성되어 있다. 따져 보면 이 단어는 ‘...로부터 밖으로’ 라는 의미를 지닌 ex-(ἐξ)와 ‘같은’ 혹은 ‘동일한’의 의미를 지닌 접두사 호모(homo-, ὁμο-), 그리고 ‘말하다’(원형동사 λέγω)라는 뜻의 로그(log, λογ- )에 접미사 시스(sis, -σις)가 결합되어 있는데 현대적 의미로 해석하면 내가 지은 죄나 잘못을 밖으로 드러내 말한다는 의미인데, 공개참회(public penance)를 의미하는 단어였다. 이를 라틴어에서는 exomologesis로 쓰고 있다. 이 용어는 초대교회적 상황에서 사용되었는데, 2세기 라틴교부인 테르툴리아누스(Tertullianus, 160~220)가 203년 저술한 ‘참회론’(De poenitentia)에서 찾아볼 수 있다. 포에니텐치아(Poenitentia)가 개별 참회(Private Penance)를 의미했다면, 엑소몰로게시스는 공적 참회를 의미했다.
당시 교회는 세례 후에 범한 배교, 간음, 살인과 같은 대죄(중죄)는 용서받을 수 있는 기회가 한 번뿐인데, 그것은 ‘공개적인 참회’를 통해서 가능하다고 가르쳤다. 이 공개적인 참회를 엑소몰로게시스라고 불렀다. 테르툴리아누스는 몬타누스 이단으로 기운 시기에 쓴 『정결론 De pudicitia』에서는 배교, 간음, 살인과 같은 중죄는 교회가 용서해줄 수 있는 권한을 벗어난 범죄라고 주장하기도 했지만, 당시 교회는 엑소몰로게시스를 통해 용서받을 수 있는데 세례받은 후에는 오직 한번만 가능하다고 했으나 실제로는 한번으로 제한되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엑소몰로게시스는 어떻게 행해졌을까? 참회자는 공동체 앞에서 거친 베옷을 입고 머리에 재를 뒤집어쓰고 일정기간 금식하며 죄를 자백해야 했다. 때로는 참회의 의미로 성도들이 회집하는 집회소 출입구에 엎드려 있으면 출입하는 성도들이 참회자를 밟고 지나도록 했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세례를 구원의 방주로 비유했는데 방주가 파선당할 수 있다고 보았고 이때 엑소몰로게시스가 널빤지와 같은 역할을 하여 마지막 구원의 기회가 된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엑소몰로게시스가 행해졌던 사례는 데키우스(Decius) 박해 이후였다. 249년 봄 황제가 된 데키우스는 250년 1월부터 기독교를 모질게 박해했으나 251년 6월 트라키아를 침공한 동게르만계 고트족에 맞서 싸우다가 아브리투스 전투에서 아들과 함께 전사했다. 이로서 박해는 끝나고 잠시 평화를 누렸다. 그런데 박해시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배교했던 이들이 다시 교회로 돌아오고자 했다. 감독이었던 키프리아누스는 배교했던 이들이라 할찌라도 교회는 엑소몰로게시스의 과정을 거쳐 이들을 받아드릴 수 있다고 보았다. 물론 죄의 경중에 따라서 참회 기간이나 참회 정도를 달리했다. 이때 노바투스로 시작된 노바티안들(Novantian)은 배교한 자를 받아들이는 교회는 참된 교회일 수 없다며 교회를 분리하여 분파운동을 벌였다. 이들은 지상의 교회는 배교자를 사면할 수 있는 권리가 없고, 배교자를 받아드리는 것은 교회의 거룩성을 훼손하는 일이라고 주장했다.
유사한 사례가 디오클레티아누스 박해후에도 재현되었다. 303년 다시 대박해가 시작되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군대 내 신자 숙청을 시작으로 교회당 파괴, 성경 소각, 성직자 투옥 등 기독교 말살정책을 폈다. 뿐만 아니라 모든 신자들에게 황제숭배와 우상숭배를 강요하는 등 조직적인 박해를 가했다. 이때 상당한 정도의 배교자가 발생했다. 그러다가 다시 평화를 누리게 되었을 때 배교자들이 다시 교회로 돌아왔다. 이때 교회는 엑소몰게시스를 통해 배교한 이들이라도 교회가 받아드릴 수 있다고 보았다. 아우구스티누스도 같은 생각이었다. 당시 네 단계의 엑소몰게시스를 시행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첫 번째 단계는 예배당에 입장하지 못하고, 밖에서 베옷을 입고 서서 들어가는 성도들에게 눈물로 기도를 부탁하는 우는 자로서 3~4년을 보내게 했다. 두 번째 단계는 예배당 현관까지 들어와 성경봉독과 설교는 듣게 하였으나 기도에는 참여할 수 없는 3년, 세 번째 단계는 예배당 안으로 들어와 회중과 함께 무릎 꿇고 참회 기도를 할 수 있으나 성찬에는 참여하지 못했다. 이 기간이 7년이었다. 4번째 단계는 예배의 모든 과정에 동참하고 성찬에 참여할 수 있었다.
배교했던 성직자들 또한 엑소몰로게시를 거쳐 성찬을 베풀 수 있는 권한을 회복할 수 있었다. 이런 환경에서 일어난 운동이 도나투스로부터 시작된 도나티스트운동(Donatists)이었다. 이들은 배교한 성직자들의 복권을 반대하고, 배교한 전력이 있는 이들이 집례하는 세례와 성찬을 인정하지 않았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들의 분리주의적 완전주의적 교회관에 반대하면서 “교회는 알곡과 가라지가 심판날까지 함께 썪여 있는 곳”이라고 하면서 도나티스트들을 반대했다. 심지어는 국가의 공권력을 동원하여 이들을 진압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를 계기로 아우구스티누스는 성례의 효력은 집례자의 거룩에 기초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 이후 ‘엑소몰로게시스’는 서서히 사라지고 오늘의 로마교의 고해성사로 발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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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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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칼럼]AI 시대에 성도와 교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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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는 지금 인공지능(AI)이라는 문명의 전환기를 맞이하고 있다. 산업혁명이 인간의 노동을 변화시켰고, 정보혁명이 인간의 소통 방식을 바꾸었다면, AI는 인간의 사고와 판단의 영역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실질적으로 필자도 설교 원고를 마무리하거나 칼럼의 문장을 정리할 때 인공지능의 도움을 받는다. 따라서 AI는 교육, 경제, 의료, 문화는 물론 종교 생활에도 적
지 않은 영향을 주고 있다. 이처럼 전환기의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기대와 두려움이 공존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기독교인은 기술의 발전 앞에서 지나치게 불안해하거나 맹목적으로 의존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역사의 주관자는 인간의 기술이 아니라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성도들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창 1:1)고 고백한다. 그러므로 역사의 시작과 끝이 하나님의 손에 있기에 우리는 어떤 시대를 만나든 믿음으로 살아갈 수 있다.
AI 시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정보가 아니라 지혜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AI를 통해 수많은 정보를 손쉽게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정보가 많다고 해서 반드시 지혜로운 것은 아니다. AI는 자료를 제공할 수는 있지만 무엇이 옳고 그른지,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지 분별하는 능력까지 줄 수는 없다. 최근 가짜 뉴스와 딥페이크 영상이 사회적 문제로 떠오르는
것도 같은 이유이다. 기술이 발전할수록 진실을 분별하는 영적 통찰력은 더욱 중요해진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세상의 정보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하며 영적 분별력을 키워야 한다.
또한 성도들은 문명이 주는 편리함 속에서도 영성을 잃지 말아야 한다. AI의 가장 큰 장점은 편리함이다. 그러나 신앙은 편리함만으로 성장하지 않는다. 기도와 말씀 묵상, 예배와 섬김은 시간을 투자하고 인내하는 과정을 통해 깊어진다. AI가 설교 자료를 정리해 줄 수는 있지만 기도를 대신할 수는 없다. 성경을 요약해 줄 수는 있지만 성령의 감동을 대신할 수는 없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기술이 아니라 믿음을 통해 세워진다. 따라서 AI를 유용한 도구로 사용할 수는 있지만 결코 하나님을 대신하는 자리에 둘 수도 없고, 두어서는 안 된다.
AI 시대일수록 인간의 존엄성은 더욱 중요해진다. 인공지능은 계산하고 분석하며 인간의 언어를 흉내 낼 수 있다. 그러나 사랑하고 희생하며 공감하는 것은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하셨다고 말씀한다. 인간의 가치는 능력이나 생산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에 있다. 예수님께서는 병든 자를 만나 주셨고, 죄인의 눈물
을 받아 주셨으며, 외로운 사람들의 친구가 되어 주셨다. 이러한 사랑과 공감은 어떤 기술도 대신할 수 없다. 그러므로 교회는 AI 시대일수록 더욱 사람을 소중히 여기고 사랑을 실천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따라서 교회의 공동체성은 더욱 중요해질 것이다. 현대인들은 다양한 네트워크에 연결되어 있지만 정작 깊은 관계는 잃어가고 있다. 온라인 소통은 늘어나지만 외로움은 줄어들지 않는다. 이러한 시대에 교회는 함께 예배하고, 기도하며, 울고 웃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초대교회가 세상을 변화시킨 힘은 뛰어난 기술이 아니라 사랑의 공동체성에 있었다. AI가 발전할수록 교회는 더욱 따뜻한 공동체로 세워져야 한다. 사람이 보여야 한다.
또 교회는 AI를 무조건 거부할 필요도 없다. 하나님은 기술과 문화를 복음 전파의 도구로 사용하셨다. 인쇄술과 방송과 인터넷의 효용성과 확장성은 선교의 지평을 넓혔다. 중요한 것은 기술이 아니라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의 가치관과 목적이다. 교회는 기술을 두려워하기보다 성경적 가치관을 따라 선용해야 한다. AI 시대에도 인간은 여전히 죄인이며 하나님의 은혜를 필요로 한다. AI가 정보는 제공하나 용서는 할 수 없다. 사람의 질문에는 대답하나 영혼은 구원할 수 없다. 인간 존재의 가장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답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
AI가 세상을 바꾸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AI의 문화를 생성하는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것은 여전히 복음이다. 기술은 끝없이 발전하고 변화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 세상이 인공지능의 능력에 감탄할 때, 성도들은 하나님의 지혜를 의지해야 한다. 사람들이 기술의 미래를 말할 때, 성도들은 하나님의 나라와 부활과 영생을 노래해야 한다.
AI 시대를 살아가는 성도들과 교회의 사명은 분명하다. 기술을 두려워하지도, 우상화하지도 말고,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로 선용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어떤 시대에도 변하지 않는 복음을 붙들고 하나님과 더욱 깊은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결국 미래를 결정하는 것은 기술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이다. 이것이 AI 시대에도 교회가 흔들리지 않는 이유이며, 세상
가운데 존재해야 하는 이유이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사 40:8)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히 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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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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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법특강]요한 낙스는 왜 교회법을 ‘권징서’라고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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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장로교회는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16세기 종교개혁 당시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의 지도자 중 한 사람은 요한 낙스(John Knox, 1513-1572)다. 그는 본래 로마 천주교회의 사제였으나 스위스 제네바에서 목회하는 요한 칼빈에게 배웠고, 제네바에 있는 영국 피난민교회 목사로 봉사했다. 그 요한 낙스가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의 기틀이 되는 <제1권징서>를 만들었다. ‘요한’ 이름이 들어가는 다른 5명 요한과 함께 영국 메리 여왕의 치세 동안 제네바의 영국인 피난민교회에서 사용하던 <제네바 기도서>(Genevan Form of Prayers)를 기초로 개정해서 만든 <제1권징서>는 1560년 스코틀랜드교회 총회에서 승인되었다.
제1권징서는 총9장이다. 제1장은 복음에 반대되는 모든 교리는 철저히 금지되어야 한다는 것을, 제2장은 세례와 성만찬의 성례, 제3항은 우상숭배 폐지, 제4항은 목사직과 목사의 적법한 선출, 제5장은 목사의 사례비와 교회의 재산분배, 제6장은 교회의 재산, 제7장은 교회의 권징, 제8장은 장로와 집사의 선출, 제9장은 교회의 정책(설교와 성경해석, 혼인, 장례 등)을 각각 다룬다.
스코틀랜드 장로교회 교회법을 ‘권징서’라고 부르는 만큼 <제1권징서>는 ‘교회적인 권징’(Discipline)을 중요하게 여겼다. “선한 법과 그 법을 엄격하게 시행하지 않고서는 국가가 번영하거나 오래 유지할 수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 세상의 칼이 간과하거나 벌하지 못하는 잘못을 책망하고 교정하는 교회적인 권징의 질서 없이는 하나님의 교회가 순수함에 이를 수도 없고 지킬 수도 없다.” 예를 들면 술취함, 무절제, 위증, 가난한 사람에 대한 억압, 저울과 자로 속이는 일, 중상모략 등의 일은 교회가 마땅히 다루고 반드시 벌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로마천주교회의 영향으로 지금 교회 안에서 악이 엄격히 처벌되지 않고 있음을 개탄하며, 하나님의 교회는 이 모든 자, 세상의 칼이 처벌해야 할 마땅한 자들까지도 징계해서 공적으로 회개할 때까지 기도와 성례에 참여하지 못하게 하라고 지적한다. 또 <제1권징서>는 권징이 신중하게 진행되도록 권징의 절차를 자세하게 말한다. 범죄가 은밀하고 소수에게만 알려져 있고, 의혹의 단계일 때는 개인적으로 모든 악의 모양에서 멀리하도록 권고하라고 한다. 그러나 범죄가 공개적이고 간음, 술주정, 싸움, 비속한 욕설, 저주와 같이 가증스러운 범죄일 때는 치리회(당회) 앞에 소환하라고 한다. 만약 그가 진심으로 회개하면 교회는 받아들여야 한다. 언제든지 죄인이 진심으로 회개하고 악한 길에서 돌이키면 하나님은 그가 범한 죄악을 하나라도 기억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겔 18:21-22, 33:14-16). 그런데 만약 그가 회개하지 않고 완고할 때 당사자 이름을 공개하지 않은 채 교회 앞에 알리고 마음이 감동해서 진정으로 회개하도록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도록 부탁해야 한다. 그래도 회개하지 않는다면 두 번째 주일까지 교회 앞에 광고하나, 세 번째 주일에도 회개하지 않는다면 치리회를 통해 출교를 공포해야 한다. 출교가 공포된 후에는 가족을 제외하고 교인은 그와 교제하지 못하도록 했다.
<제1권징서>는 어떤 신분의 사람이든지 다스리는 자든 다스림을 받은 자든, 설교자든 가장 가난한 사람이든 죄를 범했을 경우 모두 권징에 순종해야 함을 말한다. 교회의 눈과 입은 일관되고 비난받아서는 안 되기에 특히 목사의 생활과 대화는 부지런히 연단되어야 한다. <제1권징서>는 목사를 도와 권징의 일을 담당할 치리회를 언급한다. 이 말은 치리회의 가장 큰 일은 권징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목사와 장로와 함께 집사도 치리회 회원으로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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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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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연구]자기 죄를 자복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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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날 세례 요한이 유대 광야에 나타나 죄를 책망하면서 회개를 촉구하는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그 말씀의 권세는 대단했습니다. 사람들의 굳고 교만한 마음이 부서져 내렸고, 거룩한 충격을 받은 사람들은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라고 물었습니다. 군인과 세리까지 가슴을 치며 탄식했습니다. 요한은 <회개에 합당한 열매>, 즉 변화된 삶을 요구했고, 결단하는 이들에게 요단강에서 세례를 주었습니다. 당시 요한은 온 유대를 충격과 기대로 가득 채웠습니다. 요한의 권위가 대단했기 때문에 예루살렘의 사람들도 혹시 그가 오시리라고 예언된 메시아인가 생각했을 정도였습니다. 요한복음 1장 19절입니다.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네가 누구냐 물을 때에 요한의 증언이 이러하니라> 이게 요한의 능력이었습니다.
이 대목에 눈길을 끄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은 요한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이 <자기 죄를 자복했다>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1장 5절입니다.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다 나아가 자기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라> 이 말씀을 읽을 때 성령님께서 깨닫게 하시는 게 있었습니다. 그것은 오늘 우리는 <자기 죄는 자복하지 않고, 남의 죄나, 공동체의 죄만 언급>한다는 것입니다.
교회에서나 교계 연합 모임 등에서 회개하는 기도를 드릴 때가 많습니다. 그때 자칫 우리는 대한민국의 죄, 한국교회의 죄 등을 고백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거기 우리 자신의 죄는 빠져 있다는 것입니다. 공동체의 죄를 자백하지만, 그것은 <자백>이라기보다는 단순한 <언급> 혹은 분노한 <고발>일 때가 많습니다. 자백은 마음을 찢고 탄식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다시는 그렇게 하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로 우리를 하나님께 드릴 때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공동체의 죄를 언급할 때는 객관적 사실을 약간의 분노와 염려로 언급하는 데 그칠 때가 많습니다. 이렇게 할 때 영적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는 남을 비판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자신은 의인이 되는 것입니다. <한국교회의 죄를 용서하소서>라고 기도할 때, 은근히 <나는 그렇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건 큰 문제입니다. 세례 요한의 말씀을 들은 이들은 <자기 죄>를 자복했습니다. 남의 죄나, 공동체의 죄는 아무리 자복해도 구원에 이르지 못합니다. 죄의 용서와 구원은 자기 죄를 고백할 때, 우리 각자에게 주어지는 은혜입니다.
1907년의 평양대부흥운동은 사실은 <대회개운동>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하디 선교사에서 시작한 회개가 원산을 거쳐 평양으로 이어졌고, 그것이 장대현교회를 중심으로 거대한 회개 운동으로 이어졌기 때문입니다. 당시 장로였던 길선주 목사께서 자신이 친구가 임종하면서 가족을 돌보아 달라며 맡긴 돈을 가진 일을 회개하는 등 많은 이들의 회개가 이어졌습니다. 그 결과로 성도의 숫자가 늘었습니다. 부흥은 의도된 것이 아니라, 회개에 대한 자연적 결과였습니다. 이에 비해 2007년에 있었던 평양대부흥 100주년 행사들은 회개가 빠진 채 부흥만을 원하여 의도적으로 기획된 면이 있습니다. 이는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습니다.
느헤미야도 우리에게 중요한 것을 보여줍니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온 이들을 통하여 예루살렘에 비록 성전이 세워지긴 했지만, 성 자체는 황폐한 채로 방치되어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 후 그는 그 일이 마치 자신과 자신의 가문의 죄인 듯이 회개했습니다. 느헤미야 1장 6~7절입니다. <6 이제 종이 주의 종들인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주야로 기도하오며 우리 이스라엘 자손이 주께 범죄한 죄들을 자복하오니 주는 귀를 기울이시며 눈을 여시사 종의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나와 내 아버지의 집이 범죄하여 7 주를 향하여 크게 악을 행하여 주께서 주의 종 모세에게 명령하신 계명과 율례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였나이다> 예루살렘이 무너진 것은 느헤미야가 살던 때를 기준으로 백년도 훨씬 더 된 일이었지만, 그는 이것을 자신과 자기 집안의 죄 때문으로 이해했습니다.
기억합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자기 죄>를 자백하길 원하십니다. 그게 참 회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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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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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임중 칼럼]수심정념(守心正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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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문호 도스토예프스키는 인간의 마음을 “하나님의 신과 악마가 싸우는 전쟁터”라고 표현하며, 무엇보다 타락한 마음을 새롭게 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역설했다. 에머슨은 우리의 내면에 천사와 미치광이가 공존한다고 했고, 데모크리토스는 행복과 불행이 모두 마음속에 있다고 말했다. 그래서 공자는 세심정혼(洗心精魂), 곧 마음을 씻고 혼을 맑게 하라고 가르쳤다. 우리가 살아가며 가장 먼저 해야 할 일 역시 마음을 관리하는 것이다.
『대학』에는 “心不在焉이면 視而不見이며 聽而不聞이요 食而不知其味니라”라는 가르침이 있다. 마음이 그 자리에 있지 않으면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으며, 먹어도 맛을 알지 못한다는 뜻이다.
마음이 천하면 사람도 천해지고, 마음이 고상하면 모든 것이 아름답고 고상해진다. 마음이 없는 사람은 허수아비나 빈집과 다를 바 없다. 마음이 바르면 생활도 바르고, 마음이 비뚤면 생활도 비뚤어진다. 마음은 모든 행위의 근본이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마음에서 시작된다. 욕을 하든, 선한 일을 하든, 작은 일을 하든, 큰일을 하든 마음이 먼저 움직인다. 말 한마디, 행동 하나도 모두 마음의 표현이다. 그래서 잠언 4장 23절은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고 말한다. 이것이 바로 수심정념(守心正念)이다.
우리는 살아가며 수많은 말을 듣는다. 아름다운 말, 가슴 아픈 말, 이해할 수 없는 말, 눈물겹도록 고마운 말, 억울한 말, 위로의 말…. 그 말들을 통해 누가 나를 위하는지, 누가 나를 괴롭게 하는지, 누가 나를 염려하는지, 타인의 마음을 읽게 된다.
그러면서 문득 하나님은 우리의 말을 어떻게 들으실까 생각해 보았다. 하루에도 수천만 마디 말을 쏟아내는 우리인데, 그 말은 곧 우리의 마음이다. 하나님은 그런 우리의 마음을 어떻게 보고 계실까.
그래서 이런 결론에 이른다. “하나님이 내 마음에 계시다면 그보다 귀한 것은 없구나.” 그러나 때때로 내 마음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순간을 느낄 때가 있다. 내가 하는 말과 행동을 돌아보면 금방 알 수 있다. 바울이 우리의 몸을 성령이 거하시는 전이라고 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래서 무엇보다 귀한 것이 우리의 마음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음을 높은 곳에 둔다. 자기 자신과의 관계에서는 그것이 희망이 되고 긍지가 되니 좋은 일이다. 그러나 타인과의 관계에서는 조심해야 한다. 마음을 높이 두는 것이 자칫 교만으로 변질되기 쉽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은 마음을 낮추라고 권한다. 이는 자기 자신이 아니라 타인과의 관계에서 지혜롭게 살아가는 길이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프라이드(pride)가 있다. 자존심은 자기 자신에게는 매우 소중하다. 자존심 없이 살아가는 것은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타인과의 관계에서는 그 프라이드를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한다. 왜냐하면 두 가지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는, 다른 사람이 나보다 나아 보일 때 프라이드가 질투로 변질되기 쉽고, 또 하나는, 다른 사람이 나보다 낮아 보일 때 프라이드가 교만으로 변하기 쉽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관계 개념’이며, 좋은 관계를 위해서는 마음을 잘 관리해야 한다. 이것이 수심정념이다. 나는 마흔의 나이에 목사가 되었다. 나이 많은 전도사로 사역할 때, 젊은 목사들에게서 낭패스러운 일을 겪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지금 생각해도 苦笑가 난다.
어느 날 목회자들과 식사를 하게 되었는데, 무심코 목사님들과 같은 식탁에 앉으려 하자 한 목사님이 언짢은 표정으로 말했다. “전도사가 어떻게 목사님들 식탁에 앉느냐, 밖에서 식사하라.”
순간 얼굴이 화끈거리고 한겨울인데도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몇몇 목사님들이 그 목사님을 핀잔하며 괜찮다고 했지만, 나는 조용히 밖으로 나와 식사를 했다. 그 사건은 내가 목사가 된 이후 수심정념을 결단하게 한 계기가 되었고, 낮은 마음으로 인간관계를 바라보게 한 소중한 교훈이 되었다.
봄은 아지랑이를 타고 오고, 여름은 소나기를 타고 오며, 가을은 고추잠자리를 타고 오고, 겨울은 눈서리를 타고 온다고 한다. 그렇다면 우리의 일상 속 행복과 축복은 무엇을 타고 올까. 바로 우리의 입술을 타고 온다. 이 입술을 통해 축복도 들어오고, 저주도 들어온다. 또한 이 입술을 통해 축복도 나가고, 저주도 나간다.
그래서 야고보는 “사람이 다 실수가 있으나 말에 실수가 없으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했다. 모든 짐승과 곤충도 길들일 수 있지만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으니, 쉬지 않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라고 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루를 살더라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말을 할 수 있는 입술이 되기를 기도한다. 축복은 입술을 통해 오고, 저주 또한 입술을 통해 온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축복을 불러오는 입술이 되기를 소망한다. 그것이 생명이 있는 말이다.
나는 오늘 어떤 말을 하고 있는가?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잠 1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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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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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의말씀]신앙의 유산을 물려주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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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신앙의 유산을 물려주는 일에 성공하려면 어떤 믿음을 가져야 할까요?
첫째, 날마다 진보하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라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참 감동적인 표현입니다. 야곱은 믿음으로 살았고, 믿음으로 죽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으로 죽는 것은 큰 복입니다. 그러나 평생을 자기 뜻대로 살다가 마지막 순간에 갑자기 믿음으로 죽을 수는 없습니다. 죽음은 갑자기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죽음은 살아온 삶의 결론입니다. 그래서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잘 보낸 하루가 편안한 저녁의 잠자리를 가져다주듯, 잘 보낸 일생만이 편안한 죽음을 선물한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죽으려면 먼저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둘째, 주님의 뜻을 수용하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야곱은 여러 가지 면에서 불완전한 인격의 소유자이었지만, 마침내 아버지 이삭의 신앙 유산을 받아서 하나님의 뜻을 소중히 여기는 인생을 살았고, 마침내 그 소중한 신앙의 유산을 자손들에게 남길 수 있었습니다. 참된 믿음은 하나님의 뜻을 수용하는 것입니다. 자기 뜻대로 되는 것이 복된 인생이 아니라, 선하신 하나님의 뜻대로 되는 것이 복인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들은 하나님이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가르쳐 주시고, 기도할 때 성령의 감동으로 깨닫게 하시고, 신앙의 사람들과의 대화와 환경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보면서도 자꾸만 자기 뜻대로 하려고 고집을 부립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방황과 고통과 환란만이 기다릴 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잠깐은 고통스럽고, 손해를 보는 것 같아도 그 길이 바로 복된 길임을 믿으십시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서 하나님의 복을 받는 모습을 자녀들에게 보여 주십시오. 그래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믿음을 유산으로 물려주는 일에 꼭 성공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러면 여러분, 우리가 신앙의 유산을 물려주는 일에 성공하려면 어떤 믿음을 가져야 할까요? 셋째, 하나님을 경배하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믿음의 사람 야곱은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을 경배하며 아름다운 최후를 맞이했던 복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야곱이 그의 인생 마지막에 비로소 예배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야곱의 일생을 추적해 보면, 야곱 인생의 강점은 예배였습니다. 야곱은 많은 약점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가 평생을 통해 예배만큼은 결코 소홀히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어떤 분을 마음을 다해 믿고 있다면, 그를 높이고 찬양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닙니까? 전능하시고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을 향한 야곱의 믿음은 예배로 나타난 것입니다. 야곱은 살아서도 하나님을 예배했고, 죽어가면서도 하나님을 예배했습니다.
야곱은 완벽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실수도 했습니다. 넘어지기도 했습니다. 실패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믿음이 자랐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배웠습니다. 예배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녀들에게 믿음을 유산으로 남겼습니다. 돈은 남겨도 사라집니다. 재산은 남겨도 없어집니다. 그러나 믿음은 다음 세대를 살립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신앙의 역전승을 거둡시다. 끝까지 자라는 믿음을 남깁시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믿음을 남깁시다. 예배하는 믿음을 남깁시다. 그래서 언젠가 우리 자녀들이 이렇게 고백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부모님이 내게 남겨준 가장 큰 유산은 믿음이었습니다.”, “우리 부모님이 남긴 가장 귀한 유산은 예배였습니다.”, “우리 부모님이 내게 보여 준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이었습니다.” 이 믿음을 유산으로 남기는 성도님들 모두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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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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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적경영학개론]ESG와 지속가능경영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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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년 ‘ESG와 지속가능경영’이란 이름이 주목을 받고 있다. 기업이 단순한 이윤 창출을 넘어 장기적 관점에서 ‘환경(Environment)’과 ‘사회적 책임(Social)’의 역할을 수행하고, ‘투명한 지배구조(Governance)’를 갖출 때 더욱 지속적 경영이 가능하다는 의미이다. 또 실제 상장기업의 경우 매년마다 ESG(지속가능경영)보고서를 작성해 공시하며, 자본시장을 통해 그 기업가치를 평가받고 있다. 그러면 성경은 이러한 ESG에 대해 어떻게 기록하고 있는가? 본 칼럼은 다음 3개의 관점에서 그 성경적 경영의 의미를 제시하고자 한다.
첫째는 환경(Environment) 문제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형상에 따라 인간을 창조하시며, 모든 피조물을 다스릴 권한을 주시고 이 환경과 생태계를 아름답게 지키게 하셨다. 즉 창조질서의 보전 자체가 성경적 명령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여호와 하나님이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어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창2:15)“, 여기서 '지키게'란 히브리어 '솨마르(Shamar)'란 의미로 '보호하다, 파수하다, 아끼다'란 뜻이다. 즉 창조 질서인 생태계를 지키고 보전함은 아담 이후 모든 그리스도인이 해야 할 당연한 하나님의 명령임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환경은 인류의 교만과 이윤을 극대화하고자 하는 탐심이 도를 넘어, 기후 위기와 생태계 파괴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환경의 보전은 단순히 탄소 배출권을 사고파는 규제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모두의 노력이 필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기후변화와 수자원, 자원순환을 축으로 탄소중립 등에 대해 기업이 어떠한 노력을 하고 있는지 매년 재무적 영향의 공시를 요구하는 것은 의미있는 일로 여겨진다.
둘째는 사회적 책임(Social)이다. 성경은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고 공의를 실천하도록 하고 있다. 성경적 기업의 목표는 단순한 이윤추구나 자본증식을 넘어, 이웃과 사회를 통해 하나님 나라의 의를 구하는 가치를 창출할 수 있어야 한다. 좋은 품질의 제품을 생산해 사회에 공급하고, 일자리를 창출하고, 이윤을 통해 국가 재정에 기여함으로, 이 땅 가운데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는 강력한 도구 역할을 해야 한다. 성경은 ”너희가 땅에서 곡식을 거둘 때에 밭 모퉁이까지 다 거두지 말고 떨어진 이삭도 줍지 말며 포도원의 열매를 다 따지 말며, 포도원에 떨어진 열매도 줍지 말고 가난한 사람과 거류민을 위하여 버려두라(레19:9-10)“하고 있다. 어려운 이웃을 돕고 구제에도 힘을 쓰도록 경제적 정의를 선언한 것이다. 따라서 성경적 기업은 단지 이윤추구를 위해 공급망을 독점하거나 노동자와 거래처를 착취하는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 또 시장경제를 기초로 주주의 권리를 존중하되, 다양한 이해관계자(Stakeholder)를 배려할 수 있어야 한다. 아울러 그런 의미에서 기업의 고용과 노동, 재무구조, 사회공헌, 제품 품질안전 등에 대한 공시는 의미있는 성과로 연결될 수가 있다.
셋째는 지배구조(Governance)이다. 성경은 기업의 투명성과 정직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강조하고 있다. 성경적 기업은 그 지향하는 성장과 목표를 이루기 위해 모인 다수의 사람들로 구성된 조직 공동체이다. 대주주에 의한 독단적인 의사결정이나 횡령, 불법 승계 등의 지배구조를 안고 기업은 지속가능경영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성경적 기업의 경영자는 아브라함과 언약 관계를 맺은 하나님께서 그 신실하심을 나타내셨듯이 노동자와의 계약관계를 바르게 하고, 노동자는 주께 대하듯 경영자와 신뢰관계를 형성해야 한다. 또한 "속이는 저울은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나 공평한 추는 그가 기뻐하시느니라(잠 11:1)‘.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코람데오(Coram Deo)의 정신에 따라 지배구조에 대한 신뢰 관계를 형성해야 할 것이다. 또 이를 위해 이사회의 의사결정 과정을 투명하게 하고, 준법과 윤리경영 상황 등을 공시함은 의미있는 일로 여겨진다.
결론적으로, 오늘날 현대 경영환경은 ‘ESG와 지속가능경영’이란 이름으로 기업의 본래 활동인 생산 판매 과정을 넘어 환경과 사회적 책임, 지배구조를 위해 노력하며, 또 그 성과 결과를 공시하도록 요청되고 있다. 물론 필자도 때로는 이러한 규제가 숨막히게 느껴질 때도 있다. 그러나 긍정적 측면, 특히 성경적 관점에서 보면 이는 본래 하나님께서 모든 기독경영인들에게 부어 주신 소명이었구나 하는 생각에 다다르면 이 또한 은혜로 느껴짐을 발견하게 된다. ESG를 통해 지속가능경영을 실천하고, 또 그리스도께서 부어주시는 은혜를 누리는 기독경영인이 더욱 많아지길 기도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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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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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칼럼]그리스도인과 투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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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선거일이 다가옵니다. 선거는 투표를 전제합니다. 일반적인 투표에는 보통·직접·평등·비밀의 네 가지 원칙이 존재합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으로 투표하는데 있어서 고려해야 할 특별한 규범이나 준칙은 있을까요? 이 부분을 다루는 신학자는 흔치 않습니다. 실제로 흑인참정권 운동에 참여했던 라인홀드 니버는 투표를 억압받는 약자들이 행사할 수 있는 ‘정치적 압박’(political pressure)의 일환으로 보았습니다. 본회퍼는 이론보다 실천으로 보여주었는데, 1932년 총선에 기독교인마저 대부분 민족주의와 광기에 싸여 나치당(NSDAP)을 지지할 때 온건파이자 국제유대를 강조하던 가톨릭중앙당(Central Party)에게 표를 던졌고, 이듬해 열린 선거에서도 나치파가 아니라 고백교회에 투표해달라고 직접 발로 뛰며 캠페인을 벌리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동시대 활동했던 헬무트 틸리케는 자신의 책에서 그리스도인에게 투표란 어떤 의미인지를 다음과 같이 언급한 바 있습니다(Theological Ethics, volume 2, 620-621). 오늘 우리 상황에도 시사하는 바가 있지 않겠습니까?
첫째, 투표장에서 마주하는 ‘죄의 연대성’입니다. “그리스도인이 투표함 앞에 설 때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기독교적 대안을 선택할 수 없다는 비극적인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타락한 세상(Fallen World)의 정치 구조 속에서 우리가 마주하는 선택지들은 ‘절대 선’과 ‘절대 악’의 대결이 아닌, 죄로 물든 역사 속에서 얽혀 있는 다양한 수준의 상대적 악들의 나열일 뿐이다. 따라서 투표는 나의 도덕적 순결함을 증명하는 자리가 아니라, 이 세상의 타락에 나 역시 동참하고 있음을 고백하는 ‘죄의 연대성’을 확인하는 자리다.” 그래서 투표하는 그리스도인은 슬픔과 책임을 느낄 수밖에 없다고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는 어떠합니까? 투표하면서 슬퍼해 보셨습니까? 투표하면서 양심의 가책을 느껴 보셨나요?
둘째, 영적 순결주의 유혹을 피해야 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완벽하게 선한 후보가 없다’거나 ‘정치는 본질적으로 더러운 것’이라는 이유로 투표를 거부하고 정치를 방관하는 영적 순결주의(Purism)의 유혹에 빠지곤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손에 피나 흙을 묻히지 않고 자신의 신앙적 청렴함을 지켰다고 착각한다. 그러나 이는 철저한 기만이다. 그러한 침묵은 현실에서 더 파괴적이고 잔인한 악이 승리하도록 방치하고 묵인하는 결과를 낳는다. 손을 씻고 뒤로 물러서는 행위(본디오 빌라도식 회피) 역시 세상의 악을 심화시키는 죄에 능동적으로 가담하는 것과 다름없다.” 지선은 대선이나 총선보다 투표율이 저조할 때가 많습니다(56.8-60.2-50.9%). 정작 내가 사는 땅에서 흙을 안 묻히려는 사람이 많습니다. 소금과 빛의 사명을 가진 그리스도인이라면 지방선거에서 훨씬 더 투표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셋째, 이성적 분별과 결단이 필요합니다. “누구도 하나님의 통치를 완벽하게 대리할 수 없음을 인지하면서도, ‘어떤 대안이 이 사회의 붕괴를 막아줄까’ 혹은 ‘어떤 선택이 고통받는 이웃의 생존과 인간 존엄성을 조금이라도 더 보호할 것인가’를 냉철하게 따져봐야 한다. 이런 분별은 종교적 광신이나 맹목적·이념적 교조주의로는 불가능하다. 루터의 말처럼 세상 왕국을 다스리는 도구는 복음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이성’과 ‘공의’이기 때문이다. 유권자로서 그리스도인은 선동적 구호와 공포 마케팅을 걷어내고, 현실의 질서와 평화를 유지하는 데 기여할 가장 합리적인 대안에 비극적이고 엄숙한 한 표를 행사해야 한다.” 하지만 오늘날 정치적 우상화나 감성적 선동주의가 크게 작용하는 모습들을 많이 관찰합니다. 지방선거는 특히나 지역을 섬길 일꾼을 뽑는 기회입니다. 지역에 대한 애착과 성실과 신뢰 같은 가치들을 바탕으로 합리적 선택이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넷째, 용서의 은혜 아래 행하는 정치적 고백입니다. “결국 기독교인의 투표는 최선의 영웅을 뽑는 축제가 아니라, 죄의 세상 속에서 덜 해로운 길을 찾아내려는 괴롭고 무거운 결단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 비극적인 선택을 과감하게 감당할 수 있는 이유는, 우리의 구원이 정치적 승패에 달려 있지 않으며, 우리의 불완전한 결단조차 덮으시는 하나님의 용서와 은혜(Justification)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완전하지 않은 후보에게 투표하지만, 그 불완전한 선택 속에서도 역사에 참여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한다. 그리스도인은 양심의 가책 속에서도 용기 있게 표를 던지며, 동시에 이 땅의 정치가 가질 수밖에 없는 한계를 늘 겸손히 인정해야 한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슬픔과 불안을 딛고, 비판적 성찰과 합리적 선택으로, 성숙한 책임 의식과 무엇보다 사명감을 가지고 투표에 임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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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5-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