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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앞으로 한국교회 5년, 미래를 좌우한다
    이번 주일이 11월 셋째주일. 어김없이 찾아오는 추수감사절 절기이다. 성탄절 바로 한달 전에 다가오는 추수감사절기는 기독교에서 기쁜 절기요, 크리스천들에게는 여기까지 인도해 주시고 지켜주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너무나 고마운 절기이다. 아무도 내일 일을 모르게 살아간다. 다만 오늘 현실에 충실할 뿐이다. 그래서 추수감사절기가 우리에게 지난 상반기 거의 1년 가깝게 지켜주셔서 더욱 소중하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야 한다. 필자는 거의 80년 시대를 살아보니 더욱 생명 연장을 준 하나님께 감사할 뿐이다. 70대는 70킬로로 달리고 80대는 80킬로로 달리고 있어 세월은 유수와 같으니 감사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성을 가진 인간으로서는 도리가 아니다. 뉴스를 볼 때마다 세계도처에서 사건 사고가 일어나고 위험한 날이 하루도 멀다하고 일어나는데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으리요. 지나 온 과거는 교계언론을 접할 때 마다 퍽 좋지않은 뉴스거리로 지면을 채워 왔지만 이제 남은 여생은 굿뉴스로 복음적인 소식을 전하고 싶은 것이 나의 솔직한 심정이다. 필자는 새로운 역사의 현장을 사실있는 그대로 쓸 때마다 몇 일을 두고 무엇을 기록할까? 생각이 깊어져 간다. 그래서 한국교회 미래 예측 시나리오를 기록할 때면 여러 책들과 연구해서 구축해 놓은 많은 글들의 맥락을 살피고 큰 제목을 선정한다. 제목 주제와 연관된 부분을 선정하여 집중적으로 검토한 다음 새로운 변화와 미래 징후 또는 새로운 힘의 등장 여부를 모니터링하여 정보를 업데이트하고 예측 시나리오를 최적화한 다음 본격적인 집필에 들어 간다. 한국교회 20~21세기 역사가운데 가장 성장하여 사회로부터 신뢰와 파워가 강했던 시기가 1973년 여의도 광장 집회였다. “오직 소망은 그리스도”란 주제 아래 대단원의 합창이 여의도 광장을 수놓을 그 당시만 해도 빌리그래함 목사가 세계50개국 나라를 집회한 가운데 여의도집회가 최대의 성과였다고 할 정도였다. 수백만이 넘는 인파가 몰려 들어도 질서 정연하게 자리 잡고 마칠 때에도 조용히 쓰레기 하나씩 줍고 퇴출하는 한국교회의 성숙도를 보여줘 일반 사회로부터 한국교회 파워를 과시했다. 1973년 5월 30일 ~ 6월 3일까지 여의도 군용지인 5.16광장에서 한경직 목사를 대회장으로 전도집회를 매일 50여 만명, 연인원 32만명이 모인 가운데 17개 교단이 연합한 초교파 대형 전도집회는 20세기 기적을 이룬 한국교회의 대단한 집회였다. 집회 이후 매년 10% 이상의 경제 성장과 높은 교육열을 가진 한국에서 매 10년마다 배가 되는 한국교회 성장속도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했다. 이 이후로 한국교회가 세계 선교의 중심이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래함 목사는 대회 전 28일 백낙준 고문과 한경직 대회장과 함께 박정희 대통령을 방문하고 성경전서 1권을 선물하면서 “한국은 비록 정치·경제적으로는 강대국은 아니지만 정신적인 면에서는 세계적인 강대국”임을 강조하고 나서 대통령을 위해 함께 기도했다. 그 당시만 해도 10월 유신독재가 시퍼렇던 시절인데도 박정희는 여의도집회를 허락했다는 것이 너무나 의아하면서도 감사했다. 그래서 아마 대한민국이 경제 10위권과 선진국 대열에 진입했을런지도 모른다. 최근 미국에서 발간되는 외교 전문지 ‘Foreign Policy’가 2040년대에 세계를 주도할 4나라를 선정해 발표했다. 독일, 미국, 터키, 한국을 들었다. 한국을 2040년대 세계 주도국으로 선정한 이유는 이러하다. 첫째는 열정과 부지런한 국민성이다. 분단국가이면서도 자원빈곤 국가인데도 국민들이 남다른 열정과 근면성을 갖고 있어 발전 돼 왔다. 바로 새마을정신. 둘째는 남다른 자녀 교육열을 들고 있다. 부모들은 온갖 희생을 해서라도 자녀들만은 가르친다며 고등교육을 받은 전문가 집단이라고 지적했다. 셋째는 높은 기술력, 산업화, 민주화, 정보화를 거치면서 6위권의 경제대국이 되었고 이제 IT 강국이 되었다. 개발 연구비는 세계 1위다. 가전제품, 조선, 원전, 자동차, 반도체, 방위산업, 의료기술 등은 세계 초일류 수준이다. 영화, 음악, 축구, 골프, 음식도 세계 일류였다. 넷째는, 해외 동포들과의 연결망이 잘 되어 있다. 지난 IMF 사태 때에도 해외 동포들이 30억불을 모금해 지원해 주었다. 한국을 미래 선도국으로 견인차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주목할 것은 다섯째이다. 활발한 한국 기독교의 성장 가능성이 돋보였다. 신앙은 한국 근대를 추진하는 영적, 정신적, 도덕적 기반이 되고 있다는 점이다. 세계 두 번째로 선교사를 많이 보내면서 선교사들의 연결망도 중요한 세계화의 자산이다. 최근 US뉴스에서도 2022년 세계 국가순위를 발표했는데 미국, 중국, 러시아, 독일, 영국, 한국, 프랑스, 일본의 순서다. 이것만 보아도, 한국교회 앞으로 5년 안에 미래 21세기 전반부 운명을 가를 수있는 희망이 보인다는 것이다. 지금은 한국교회가 반토막 나고 코로나로 추락할 때이지만 그 한 많은 일제 36년 속국과 6.25 고난과 수많은 외침의 역경을 겪어 온 이스라엘 민족과 같이 다시 일어서는 놀라운 기운이 싹트고 있다. 다음 세대들의 젊은 청년들의 신앙 열정이 말해 주고 있다. 전국 15,000여 교회가 참여하고 오륜교회가 주최하는 ‘다니엘기도회’는 잠자고 있던 청년들과 성도들을 깊은 잠에서 일깨웠다. 한국교회 앞으로 5년, 70년대 대부흥이 다시 일어나느냐, 그렇지 않고 그냥 주저앉고 이대로 추락하느냐는 앞으로 5년 안에 좌우될 것이라고 전망하는 미래신학자들이 많다. 아자아자 한국교회여! 다시 일어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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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1-25
  • [송길원 목사] 임종실, 임종돌봄이 필요하다
    조르주와 안느, 음악가 출신의 80대 부부다. 평온한 노후를 보내고 있던 어느 날, 아내 안느에게 갑작스런 뇌경색이 덮친다. 다정한 노부부의 일상은 한순간에 무너져 내린다. 시간이 흐를수록 상태는 점점 악화된다. 수술후유증으로 오른쪽 편마비가 찾아든다. 스스로 배변을 해결할 수 없다. 몸을 씻을 수도 없다. 음식은커녕 물조차 삼키기가 어렵다. 서서히 말라간다. 말조차 어렵다. 딸과 사위는 입원을 시키자고 제안한다. 하지만 아내의 뜻은 아니다. 남편 조르주는 병원에 보내지 않겠다는 약속을 지키게 해달라는 아내와 실랑이를 벌이다 자신도 모르게 아내의 뺨을 후려갈긴다. 상황은 처절하다. 결국 아내를 베개로 눌러 질식사시킨다. 조르주는 죽은 아내를 꽃으로 장식하고, 방문을 테이프로 봉인한다. 장문의 편지를 남겨놓고 사라진다. 딸이 아빠⸱엄마를 찾았을 때 잠긴 문 뒤로 엄마의 시신은 꽃에 둘러싸인 채 썩고 있었다. 2012년 칸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미하엘 하네케 감독의 <아무르>의 줄거리다. 영화는 끊임없이 묻는다. “죽음이란 무엇인가?” “당신은 어떻게 죽음을 맞이하고 싶은가?” 나라면 무엇이라 답할 수 있을까? 안타깝게도 우리네 삶은 ‘맞이하고 싶은 죽음’과는 거리가 먼 죽음을 맞이한다. 연간 사망자 30만 명 가운데 80% 이상이 요양시설과 종합병원 응급실ㆍ중환자실을 오가다 그 쳇바퀴 어딘가에서 죽음을 맞는다. 4명 중 3명꼴이다. 정든 집에서 가족들의 손을 잡고 떠나는 죽음은 전설이 되었다. 66~83세까지 17년, 삶의 5분의 1을 각종 질병에 시달린다. 사망 직전 1년의 의료비가 평생 쓴 의료비를 웃돌기도 한다.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주렁주렁 기계장치를 달게 된다. 사지가 포승줄에 결박당하듯 묶이기도 한다. 콧줄로 영양 공급을 받으며 고통 속에 서서히 죽어간다. 우리나라 ‘최빈도 죽음’의 풍경이다. 연명치료를 받지 않겠다는 사전의향서를 작성한 사람은 130만 명이다. 3년 새 6배로 늘었다. 하지만 전 국민의 3%에 불과하다. 통증을 줄여주는 완화의료센터를 이용하기도 어렵다. 매년 8만 명이 암으로 숨진다. 호스피스 병상은 1,500개도 되지 않는다. 암 환자의 호스피스 이용률은 23%에 그쳤다. 의료강국의 이면은 의외로 어둡다. 반지하 방만이 아니다. 잠시 병원으로 시선을 돌려보자. 병원에는 응급실에서 입원실, 수술실, 회복실, 재활치료실... 숱한 방들로 가득 차 있다. 장례식장으로 내려가 보자. 안내실, 추모실, 접객실, 휴게실, 안치실.... 그런데 정작 있어야 방이 보이지를 않는다. ‘임종실’, 의료진은 죽음이 눈앞에 다가와 있다는 것을 안다. 더 이상 의료행위가 도움이 되지 않을 때, 죽음을 눈앞에 둔 이들이 가족과 함께 임종을 그들을 임종실에서 가족들과 함께 머물며 죽음을 맞이하게 도울 수는 없을까? 현재 우리나라는 빅 파이브에 해당하는 대학병원들조차 한둘 정도의 임종실을 두고 있을 뿐이다. 종합병원은 아예 없다. 우선 돈이 안 된다. 코로나 상황 속에서 감염과 방역 규칙에 따른 운영지침도 없다. 제도와 법령준비도 필요하다. 결국 ‘편안한 죽음’을 원하지만 기대와 달리 대부분이 ‘고독사’로 세상을 뜬다. 곁에 가족은 없다. 의료진이 임종을 지켜보는 경우는 희귀하다. 신음소리를 내는 또 다른 환자 옆에서 가족의 이름조차 부르지 못하고 조용히 눈을 감는다. 곁에 가족이 있다 해도 소리 내 울지도 못한다. 다른 환자들에게 방해가 될까 봐 눈치를 살피지 않을 수 없다. 아무르의 영화 이야기가 프랑스만의 이야기일까? 최근 대한민국 국회에도 조력 존엄사법이 제출되었다. 말이 존엄사지 속을 들여다보면 조력 존엄사는 의사조력 ‘자살을 통한 안락사’이다. 이런 법안이 법안 통과를 원하는 사람들이 80%가 넘는다는 설문조사 결과를 근거로 한다. 어쩌다 죽음마저도 여론조사를 따라야 하는 세상이 된 것일까? 임종실이 있으면 달라진다. 더 이상 눈치 보지 않아도 된다. 환자가 좋아하는 노래를 틀어줄 수 있고 함께 부를 수도 있다. 못다 한 사랑고백을 나눌 수 있다. 멋진 엔딩파티를 준비할 수도 있다. 이때 세족식을 할 수 있다면 더 좋겠다. 고인이 남기는 말이 유훈이 되고 고인에게 건네는 사랑의 말이 위로가 되는....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장면이 떠오른다. 존 H. 밀러 대위는 라이언에게 말한다. “라이언 꼭 살아서 돌아가. 잘 살아야 돼” 어느 날, 가족들과 함께 밀러 대위의 무덤을 찾은 라이언이 말한다. “가족과 같이 왔습니다. 오고 싶어 해서요. 여기 오면 기분이 어떨까 생각했습니다. 다리에서 하신 말씀을 매일 생각했죠. 최대한 잘 살려고 노력했고 그런대로 잘 살아왔습니다. 최소한 대위님의 눈에 대위님의 희생이 헛되지 않아 보였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아내에게 말한다. “여보, 훌륭히 살았다고 말해줘” 아내가 답한다. “물론이죠” 다시 라이언이 말한다. “내가 좋은 사람이었다고 말해줘” “당신은 훌륭해요” 나는 많은 돌봄 가운데 ‘임종 돌봄’이야말로 가장 아름답고 고귀한 것이라 여긴다. 기독병원들이 먼저 나설 수는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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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2-11-25
  • [부산기독교이야기] 전쟁기 부산 교계: 부산에 온 유대인 군목4
    앞에서 유대인 군목인 밀턴 로젠이 1950년 12월 부산에 왔다는 점을 소개했는데, 그가 유대인 군목으로 전쟁에 참가했다는 점은 미군병사들 가운데 유대인 병사가 있었다는 의미이다. 그가 12월 25일자로 쓴 글에 보면 12월 25일 이전에 부산으로 왔고 부산에 체류한 기간은 2주 정도라고 한다. 부산에 대한 그의 인상은 좋은 편이 아니었다. 야간에 이동할 경우 부랑자를 만날 수 있고, 도둑이 많다고 했다. 심지어는 천개의 눈을 가졌어도 도둑맞기 일쑤라고 했다. 또 부산은 어두운 도시라고 썼다. 전기 보다는 등유나 석유 램프를 많이 쓰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이 점은 당연한 일이었다. 전시 부산 인구의 급속한 증가로 전기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특히 로젠은 한국은 사회적으로 도덕이나 사회규범이 엄격함에도 불구하고 동성애자가 많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 점은 수긍하기 어렵다. 동성 간의 친밀한 교류를 동성애자로 오인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짧은 기간 부산에서 체류했던 로젠은 부산을 떠나 원산으로 이동하게 된다. 중공군이 개입했기 때문이었다. 로젠은 이렇게 썼다. “중공군이 개입했고, 우리가 전선으로 이동한다는 소식은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솔직히 원산으로 가고 싶지 않았다. 이제 전선에서 가장 가까운 곳의 군목이 되는 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중공군이 개입하게 된 것은 10월 19일이었지만 사실은 이보다 앞서 2일 마오쩌둥이 출병을 결심했고, 10월 4-5일의 중앙정치국 확대회의에서 출병을 결정하였고 이를 김일성에게 통보하였다. 이런 결정이 있기까지의 과정을 보면 이미 이전부터 전쟁에 개입을 준비해 왔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미군이 38선을 돌파하였기 때문에 중국이 동북의 안전을 위해 불가피하게 참전했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미군이 38선을 돌파한 것은 10월 3일이었고, 중국은 이보다 앞서 전쟁 개입을 결정했기 때문이다. 중공군의 개입은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전세가 시시각각으로 변화되었고, 전투병력이 후방에서 안주할 수 없었기에 로젠 또한 부산을 떠나 원산으로 이동하게 된 것이다. 여기서 잠시 6.25 전쟁의 전개과정을 소개하면, 전쟁 과정은 흔히 네 시기로 구분하는데, 6월 25일 인민군이 전면적으로 남침하여 4일 만에 서울을 점령하고 경상도 일부 지역을 제외한 전 국토를 점령한 시기가 첫 번째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서울을 장악한 인민군은 바로 남하하지 않고 3일 동안 서울에 체류했는데, 이 기간 동안 국군은 전력을 정비 할 수 있었고, 낙동강 전선을 강고하게 구축하여 인민군의 공세를 막아낼 수 있었다. 한편 유엔안전보장 이사회는 북한의 남침을 침략전쟁으로 규정하고 미국 주도 아래 유엔군 결성을 승인하여 유엔군의 참전이 이루어진 시기라고 할 수 있다, 두 번째 시기는 9월 15일 유엔군이 인천상륙을 계시하여 성공하고 9월 28일 서울을 수복하고 38선을 넘어 북진하여 북한 지역으로 진격하였다. 중국은 유엔군이 38선을 넘으면 전쟁에 개입할 수밖에 없다는 입장이었는데, 맥아더 유엔군 총사령이 북진을 강행하여 10월 19일 평양을 점령하였고 10월 26일에 이르러 압록강 인근까지 진격하였다. 세 번째 시기는 북한의 요청을 받은 중국군 13병단의 압록강 도하와 전쟁에 참전하면서 전세가 역전된 시기였다. 중공군의 대대적인 공세로 유엔군과 국군은 평양, 흥남 등지에서 철수하게 되고, 서울이 중국군에게 빼앗기게 되자 이른바 ‘1.4후퇴’라는 또 하나의 시련을 겪게 된다. 이후 국군이 다시 되찾은 뒤 38도선 일대에서 치열한 공방전이 전개되는 시기라고 할 수 있다. 네 번째 시기는 휴전회담이 시작되어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체결되기까지의 기간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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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 부산기독교이야기
    2022-11-25
  • [소강석칼럼] “간절함이 없는 자리, 핑계뿐”
    저는 지금까지 수많은 집회와 세미나를 해왔습니다. 어쩌면 저만큼 많은 연합집회와 목회자 세미나를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특별히 흰돌산기도원에서 4천 명이 모여 2박 3일 동안 했던 목회자 세미나, 또 양수리수양관에서 있었던 그 유명한 한신목회세미나에 단골 강사로 갔습니다. 그리고 각 교단과 신대원에서 하는 세미나나 특강을 셀 수 없이 다녔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교회에서 2,500여명의 목회자들이 모인 생명나무 목회 컨퍼런스를 몇 번을 하였습니다. 작년에도 600여 명의 미자립교회 목사님들을 초청해서 위드 코로나 세미나를 하며 1인당 백만 원 이상을 드리며 섬겼습니다. 그런데 이번만큼 간절한 마음을 가져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 간절한 마음을 갖고 세미나 원고도 제가 다 작성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원고를 부교역자들에게 돌리고, 몇 분의 전문가에게 보내서 보완할 것 있으면 보완의 의견을 좀 달라고 했습니다. 물론 그분들이 보완해 준 부분도 있지만, 보완할 것이 없을 정도로 원고 내용이 충실하고 원고만 봐도 가슴에 전율이 온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저는 원고를 보고 또 보면서 부족한 부분은 빨간펜으로 체크를 하였습니다. 머릿속에 다 들어있는 내용인데도 원고를 또 보고 또 보았습니다. 왜 제가 이렇게 간절한 마음을 갖게 되는가 생각을 해보니까, 가장 어려운 때 성도들의 땀과 눈물이 젖어 있는 헌금으로 컨퍼런스를 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말이 그렇지 500명이 넘는 미자립 교회에 100만 원씩 지원금을 준다는 것이 보통 교회가 할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거기에 들어가는 행정비, 광고비 하면 더 많은 돈이 들어가는데 제가 간절한 마음을 안 가질 수가 없지요. 또 미자립교회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어떻게 하면 코로나 후유증을 극복하고 초토화된 예배를 회복하며 교회를 세울 것인가”, 이런 기대감을 갖고 온 자립교회 목사님들을 생각하니까 간절함이 안 생길 수가 없었습니다. 저의 이 간절함 때문이었는지 몰라도 목사님들이 저녁 7시가 다 되어가는 데도 거의 한 사람도 꿈쩍하지 않고 끝까지 경청을 하였습니다. 자립교회 목사님들도 교회 세움에 대한 간절한 열망이 있었고 절박함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저는 강의 초두에서 이 세상에 새로운 교회는 하나도 없다고 그랬습니다. 이 땅에는 진정한 모델 교회도 없다고 그랬습니다. 진정한 모델 교회는 어뉴 처치(Anew Church), 즉 성경적 원형교회 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우리 새에덴교회도 모델 교회가 될 수 없고 전혀 새로운 교회가 될 수 없다고 했습니다. 다만 이번 세미나를 통해서 성경적 원형 교회로 가기 위해 새에덴교회가 어떻게 최선을 다했고 몸부림 쳤는가를 말씀드리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팬데믹의 후유증을 극복하고 함께 우리의 공적 교회를 세워갈 수 있는가를 나누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간절함이 있으면 그 어떤 역경 속에서도 길이 보이고 방법이 보이고, 얼마든지 하이 콘셉트를 가지고 창의적 목회를 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 간절함과 절박함이 없으면 맨날 핑계만 댄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과연 코로나 팬데믹 때 얼마나 간절함을 가졌었던가요. 지금도 얼마나 간절함을 가지고 있는가요. 하나님을 향한 간절함, 성도를 향한 간절함, 교회 세움을 향한 간절함이 얼마나 있는가요.” 제가 목사님들께 묻고 되물으면서 찬양을 인도했습니다. 원래 부교육자들에게는 약 30분씩 강의 시간을 주기로 했는데, 제가 워낙 인심이 좋아가지고 “여유를 갖고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50분도 하고, 어떤 분은 1시간도 하셨습니다. 그러다보니 막상 제가 강의를 마무리를 할 때 시간에 쫓기는 것입니다. 제가 넉넉하게 마무리를 하고 자세히 강의를 해야 되는데 시간에 쫓겼습니다. 그렇다고 8시, 9시까지 붙들어둘 수도 없는 것이고요. 제가 만약에 3, 40분을 더 활용했더라면 마지막에 찬송도 하고 기도회도 하면서 목사님들의 눈이 눈물로 흠뻑 젖고 흐르도록 할 수 있었는데 시간에 쫓겨서 그렇게 하지 못하고 아쉽게 마무리를 하였습니다. 더구나 박주옥 음악목사님도 목사님들 앞에서 노래를 한곡하기를 원해서 그 희망도 들어주고, 또 청소년오케스트라의 연주 시간도 드린 것입니다. 결국 제 강의 시간을 다 할애해 준 것이죠. 물론, 아쉬움이 있는 만큼 저는 강의에 열변을 토하였습니다. 마치 따발총처럼 말을 쏟아내고 입술에 모터를 단 것처럼, 긴박한 강의, 간절함이 넘치는 강의를 하게 되었습니다. 저의 강의 시간이 축소되어서 아쉽기는 하지만, 그래도 절박하고 간절한 심정이 다 전달이 됐습니다. 그리고 알아들을 것 다 알아들었다고 위로를 해주는 분들이 있었습니다. 그런 말씀을 듣고 다시 생각해 봤습니다. “간절함이 있는 곳은 길과 방법이 보이고 간절함이 없는 자리에는 핑계뿐이라고.” 부디 이번 세미나를 통해서 교회 세움을 향하여 헌신한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큰 은혜가 임하고, 참석한 모든 목회자들에게 간절함의 나비 효과가 더 크게 일어났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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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강석 칼럼
    2022-11-04
  • [시사칼럼] 새로운 자본주의(C-Capitalism)가 필요하다
    프랑스 화가 테오도르 제리코(Théodore Géricault, 1791-1824)는 1819년 <메두사호의 뗏목(Le Radeau de la Méduse)>을 발표합니다. 한 때 나폴레옹을 태우기도 했다는 전함 메두사호가 아프리카 세네갈 연안에서 좌초(坐礁)한 실제 사건을 소재로 삼았습니다. 부자와 귀족들은 구명정을 타고 탈출한 반면 나머지 150명 가까운 승객들은 버림을 받았고 급조한 뗏목에서 2주일을 견뎌야 했습니다. 동료의 시신을 먹으면서까지 버텼건만 생존자는 불과 15명에 불과했습니다. 그림에 고스란히 담겨있는 당시의 참상은 이제 막 기지개를 켜기 시작한 자본주의의 위험성에 대한 예고편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마르크스는 이러한 자본주의를 비판하며 “공산주의 유령이 유럽을 배회하고 있다”는 선전포고를 날렸습니다(1848, Manifest der Kommunistischen Partei). 이후 불황 등으로 위기에 처한 자본주의는 그러나 극적으로 변신에 성공합니다. 정부가 적극적으로 개입하면서 복지제도 등이 마련되었고, “수정자본주의”라고도 부르는 <자본주의 2.0> 시대가 도래한 것입니다. 세계대전 이후 시작된 냉전 시대를 지나며 자본주의는 전 세계를 전장(戰場)으로 치열한 쟁투를 벌이면서도 승승장구를 거듭합니다. 그러나 1970년대 석유파동을 겪고 또 실업율과 인플레이션이 동반 상승하는 새로운 현상으로 인해 또 다시 위기를 맞았습니다. 이 때 자본주의는 ‘신자유주의’를 새로운 이념과 도구로 삼고 한 번 더 변신을 꾀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소련연방을 비롯한 공산주의 체제들이 일거에 몰락했기 때문입니다. 기업인이자 저술가인 피터 반스(Peter Barnes)는 이를 <자본주의 3.0>(2006)이라 불렀습니다. 적수가 없어져버린 자본주의는 그러나 점차 괴물로 진화되어 갔습니다. 최근 한국에서 일어난 사건 하나만 보더라도 그러합니다. ‘SPC 불매운동’을 알고 있습니까? 지난 10월 15일, 평택의 제빵공장에서 일하던 20대 초반 여성 노동자가 기계에 끼어 숨지는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그런데도 사측은 현장을 일부 천으로만 가린 채 계속해서 공장을 가동했고, 시민들의 분노가 이 지점에서 폭발해 해당 기업의 제품에 대한 불매운동이 벌어지기에 이르렀습니다. 마케팅학의 대가 필립 코틀러(Philip Kotler)는 이러한 형태의 자본주의를 “기업자본주의(Corporation Capitalism)”라 불렀습니다(Confronting Capitalism, 2015). 2008년 미국 발 금융위기가 전 세계를 강타하면서 알게 된 투기적 금융자본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카지노(Casino) 자본주의”, 최근 전기자동차 보조금철폐조치에서도 알 수 있는 미국 위주의 “카우보이(Cowboy) 자본주의”, 정부와 기업과 유착 관계로 인해 시장을 왜곡하고 불공정을 양산하는 “정실(Crony) 자본주의” 개념들이 연이어 등장했습니다. 날로 심각해지는 양극화나 환경문제 등으로 인해 자본주의는 어느 때보다 심각한 위기에 직면한 듯 보였습니다. 경제평론가인 아나톨 칼레츠키(Anatole Kaletsky)가 <자본주의 4.0>을 들고 나온 때도 바로 이 무렵입니다. 그는 동명의 저서에서 구체적인 전략이나 정책을 제시한다기보다는, 자본주의는 현존하는 위기를 결국은 잘 극복하고 다시 회생하리라는 희망적인 예언을 내놓았습니다. 그렇다면 앞으로 전개될 새로운 자본주의는 어떤 모습일까요? 코틀러는 인간이 중심이 되는 “인간적(Humanistic) 자본주의”나 “인도적(Humane) 자본주의”, 이를 위한 “포용적(Inclusive) 자본주의”와 “건강한(Healthy) 자본주의”를 표방하면서, “깨어 있는(Conscious) 자본주의”와 “온정적(Compassionate) 자본주의”라는 개념들을 제시했습니다. 지난 이백 년 동안 자본주의는 끈질긴 생명력을 보여주었습니다. 그 힘의 근거는 뭐니 해도 ‘변화’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안주하고 집착했다면 자본주의는 벌써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렸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앞으로는 또 어떤 모습으로 변신할까요? 윤리적인 색채를 가미한 전술했던 두 개의 ‘C-자본주의’에 더해, ‘회개하는(Contrite) 자본주의’와 자본-노동과 국가-시민이 서로 ‘협력하는(Collaborative) 자본주의’ 그리고 개발과 환경이 ‘양립가능한(Compatible) 자본주의’라는 또 다른 ‘C-자본주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를 소망해 봅니다. 아울러 우리 스스로는 외국의 자본이나 시류에 휩쓸리지 않는, ‘한국인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Corea Capitalism)’를 모색하고 만들어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이니, 물질자본이 아니라 영적자본, 궁극적으로는 자본주의가 아니라 예수주의를 지향하는 ‘성경적 자본주의(Cannon Capitalism)’ 중심으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하고 살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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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1-04
  • [은혜의말씀] 하나님이 거하실 집(출 25:8~9)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께 받은 두 가지 메시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십계명이고, 또 하나는 성막입니다. 십계명이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가 어떻게 구별된 거룩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가에 대한 답이라면, 성막은 죄인인 우리가 어떻게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아갈 것인가에 대한 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거할 성소(거룩한 장소)를 지으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리고 성소의 모양과 규격, 만드는 방법까지 세세하게 알려주십니다. 성소는 하나님께서 직접 계획하신 거룩한 장소였기 때문에, 인간이 인식할 수 있는 하나님의 모형이자 그림자입니다. 나아가 성소는 그 자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은혜를 담고 있습니다. 오늘은 성막 건립의 이유와 건축 과정에 대해 말씀드리려 합니다. 먼저, 하나님께서 성막을 지으라고 말씀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거하시기 위해서입니다.(8절) 하나님은 어디 계십니까? 하나님은 모든 곳에 계시지만, 또 한편으로 특별한 장소를 택하여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이 땅에 오셔서 우리와 함께 거하시겠다는 말씀하십니다. 그곳이 바로 성막입니다. 그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그곳이 바로 우리 안입니다.(요1:14) 우리의 예배는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입니다. 우리의 몸은 하나님을 모신 성전입니다.(고전3:16) 우리의 매일은 하나님과 함께하는 거룩한 성일입니다. 2. 죄인을 만나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만약 모세가 시내산에서 십계명만 가지고 내려 왔다면,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가고 하나님을 만날 희망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막은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축복의 미팅 장소입니다. 그래서 회막이라 부릅니다. 인간이 죄를 범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 들어가기만 하면,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죄인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들어가기만 하면 됩니다.(고후5:17) 교회는 죄인이 하나님을 만나게 하려고 하나님께서 세상에 세우신 집입니다. 둘째, 성막은 어떻게 지어야 합니까? 1. 하나님이 지시한 대로 지어야 합니다.(9절) 성막은 아무렇게나 지으면 안 됩니다. 왜요? 성막 하나하나에 하나님의 교훈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람의 생각대로 짓지 말고, 하나님의 명령대로 지으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신앙생활이 하나님의 뜻을 얼마나 이해하고, 성경의 지식을 얼마나 아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에 얼마나 잘 순종하느냐가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보여주신 것은 바로 성경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말씀대로 믿고, 말씀대로 살아가야 합니다. 2. 헌신의 예물을 통해 지어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성막의 모든 것을 계획하셨지만, 백성들의 헌신을 통하여 이 역사를 이루시겠다고 하십니다. 한마디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일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일에 동역자로 세우신 것입니다.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지고, 우리를 통해 교회가 세워집니다. 그러니 여러분, 하나님의 일에 최고의 헌신을 드리시기 바랍니다. 최고의 기도를 드리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헌신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일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동역자로 일하십시오! 저는 모든 성도님들이, 하나님의 일에 기쁜 마음으로 자원하여 드리는 헌신자가 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받으시고 큰 은혜를 내려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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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1-04
  • [교회음악칼럼] 교회음악의 새로운 이해 3
    지난번에 이어서 말씀을 중심으로 보다 디테일하게 어떻게 찬양할 것인가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한다. 먼저 언제 찬양을 할까? 야고보서(5:13)는 찬양하고 싶을 때, 시편(42:5)은 찬양하고 싶지 않을 때 그리고 시편(57:8) 새벽에, 시편(119:62) 저녁에 찬양하라고 한다. 즉 찬양의 삶 살 것을 권고하고 있는 것이다. 구약에서 보면 레위인들은 24시간 하나님을 섬겼고(찬양, 예배), 신약 히브리서(13:15)에서는 항상 찬양의 제사를 드리게 하려고 우리를 부르셨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하박국 선지자의 노래(합3:17-18)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할 것이다. 바로 우리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든지 감사의 찬미를 드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사실이다. 어디에서 드려야 할까? 시편149:5, 시편113:3에서는 어디에서나 드려야 한다고 한다. 또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의 모임 가운데 드리는 찬양을 좋아하신다고 하셨다.(시22:22,25, 시26:8,12, 시27:4, 시35:18, 시68:24-26, 시69:9, 시107:32, 시122:1) 나아가 모든 나라와 백성들 앞에서 찬양해야 한다고도 했다.(시96:3, 시40:3) 여기서 확인할 수 있듯이 하나님께서는 성도들 뿐 아니라 당신의 영화롭고 위대한 역사가 불신자들을 포함한 만민들, 온 땅위에 충만하게 선포되기를 원하신다는 것이다. 어떻게 드려야 할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법대로 선포되거나 표현되어야 한다. 이것이 매우 중요하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이사야서에서 나의 찬송을 부르라고 하셨다는 것을 기억할 것이다. 쉽게 표현하면 하나님의 주파수에 우리가 맞추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렇지 않으면 잡음이 되어 전달이 되지 않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자원하는 마음으로(시103:1, 시42:5-6), 진심으로 사랑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뿐만 아니라 집중하여 드려야 함이 마땅하다는 것을 기억해야한다.(출15:26, 창22장, 겔48:35) 무엇으로 드릴까? 입술로(시119:171), 마음으로(시13:5), 춤추며(시149:3, 시150:4), 손뼉 치며(시47:3), 영혼으로(시103:1), 악기들로(시150:3-4, 시15:16) 만군의 주요 전능자를 모든 것을 동원하여 찬양해야 한다. 다윗이 찬양한 것을 우리의 모범으로 삼을 수 있는데 그는 즐겁게(삼하6:15, 삼하6:16, 삼하6:21) 힘을 다하여(대상13:8, 대상16:5) 또 큰소리로(대상16:42, 대상15:16) 날마다(삼상18:10) 신령한 노래(대상25:1-3)로 감사의 찬양(대상16:4)을 드렸는데 우리도 날마다 순간마다 이와 같이 찬양하는 삶을 살아드림으로 하나님께서 간섭하시고 베푸시는 선한 인도하심을 받으며 살아가는 이 시대에 신실하고 복된 그리스도인들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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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1-04
  • [분홍목사의다음세대이야기] 코로나 이후 설교에도 변화가 필요하다
    코로나19 이후 교회가 다시 모여서 예배하는 것이 가능할까, 하는 두려움이 생길 정도로 모임이 어려워졌다. 그래서 교회 안에 다음세대나 새 가족들이 유입되는 것도 너무나 힘든 상황이 되었다. 그러나 위기가 곧 기회라고 했던가. 이러한 절체절명의 위기는 한국교회 안에 오래도록 고착화된 예배와 설교 형태에 변화를 가져오는 계기가 되었다. 이에 대해서 새로운 설교학 운동의 바탕에서 현대설교의 변화를 강조하는 장신대 총장이자 설교학 교수인 김운용은 그의 저서 『새롭게 설교하기』(Rethinking Preaching)에서 이제 지금까지의 설교학적 전통과 이슈들에 대한 “재숙고”(re-thinking)와 설교 사역의 재구성(re-forming)이 필요하다고 강조한 바 있다. 이처럼 새 가족의 초청과 정착을 위해서 보다 새롭고 도전적인 설교와 예배의 형태에 대한 변화가 필요한 때임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필자는 부산 성민교회에 부임하여 7년여의 사역을 해오면서 코로나19 이후 주일 설교형태를 ‘이미지 전개형 설교’로 바꾸고 예배에 ‘이미지 전개형 광고’를 도입했다. 이러한 변화는 다음세대와 함께 교회를 찾는 젊은 부모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가족단위의 새 가족 등록을 늘리는 효과를 가져왔다. 가정에서 온라인으로 예배를 드릴 때도 전세대가 함께 예배하는 데 부담을 느끼지 않게 되었고 예배와 설교에 대한 관심이 점점 더 커지게 되었다. 그럼 필자가 새로운 대안으로 제시하는 이미지 전개형 설교와 광고란 무엇인지 알아보자. 이미지 전개형 설교란? 이미지 전개형 설교란, 설교자가 영상매체 등을 이용해서 회중에게 이미지를 보여주면서 마치 책을 넘기듯이 한 장씩 전개해 나가면서 은혜를 함께 나누는 방식의 설교이다. 이 설교는 청중의 내적 심상으로서의 이미지의 활용을 강조하는 현대의 설교학적 흐름에서 출발하지만 여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가서 방법론적인 면에서는 차이가 있다. 이미 많은 설교학자들이 설교의 전달에 있어서 ‘더욱 효과적이고, 호소력이 있기 위해서는 “시각적 이미지”를 위해 눈에 그려볼 수 있는 다채롭고 풍요로운 언어,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언어가 사용되어야 한다.’는 주장에 따라서 설교에 시각적 요소를 가미하거나 강조하는 노력을 해 왔다. 그러나 이미지 전개형 설교는 단순히 언어 사용에 있어서 이미지적 요소를 넣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눈에 보이는 시각적인 이미지를 회중들의 눈앞에 계속해서 펼쳐나가듯 제시하면서 동시에 설교자의 언어로 이미지를 해석하면서 설교를 풀어나간다는 점에서 기존의 설교 전달방식과 큰 차이가 있다고 하겠다. 물론 예전에도 설교를 시작하면서 한 두 장의 이미지를 보여주면서 회중들을 주목시키고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설교들이 있었다. 그러나 이미지 전개형 설교는 단순히 몇 장의 이미지를 서두에 동원하는 것이 아니라 서론에서 결론까지 계속해서 이미지를 보여주면서 설교의 내용을 이미지로 제시하고 이미지와 함께 고민하고 이미지를 통해서 풀어가는 형태의 설교이다. 이 이미지 속에는 문자 텍스트나 변형된 이미지, 영상과 소리도 포함된다. 이러한 설교 방식의 필요성은 교회를 처음 나온 다음세대들이나 새 신자들이 부담 없이 설교를 듣고 예배에 참여하게 된다는 점이다. 새 신자들은 성경에 대한 지식도 거의 없고 기독교적 용어에도 익숙하지 않다. 그런 이들에게 성령이나 성막, 제사장, 사마리아인, 도피성 등의 설교 용어는 독해가 불가능한 외국어에 가깝다. 하지만 이러한 단어들을 이미지와 텍스트로 구성된 화면을 통해서 보여주면서 설명하면 훨씬 더 이해가 잘 되고 메시지를 납득할 수 있다. 또한 코로나19 이후 온라인예배가 많이 드려지면서 가정에서 텔레비전이나 컴퓨터 화면을 통해서 예배하는 가정들은 부모와 자녀가 함께 앉아서 예배에 참여하는 비율이 높아졌다. 이 때 어린 자녀들은 이해하기 어려운 설교자의 설교를 들으며 인내해야 하는데, 특히나 30여 분간의 시간 동안 화면으로 설교자 얼굴만 바라보며 듣는 설교는 집중력을 떨어뜨리기 쉽다. 이럴 때 이미지를 잘 활용해서 설교를 전달하면 어린 자녀들도 설교 내용에 호기심을 가지고 끝까지 설교를 듣고 말씀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는 효과가 있다. 물론 오늘날의 목회자들은 설교의 부담이 크고 돌아서면 설교라고 할 정도로 해야 할 설교도 많다. 그래서 구두로만 설교해도 원고작성에 시간이 많이 들고 준비에 어려움이 많은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이럴 때일수록 더욱 듣고 싶은 설교, 찾게 되는 설교는 비교적 적은 것이 현실이다. 그만큼 더욱 설교의 준비와 전달에 정성과 준비가 필요한 때인 것이다. 이미지 전개형 설교를 도입해서 새 가족들과 다음세대를 배려하는 설교를 준비해 보자. 당장 교회의 분위기가 바뀌는 것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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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분홍목사의 다음세대 이야기
    2022-11-04
  • [다음세대칼럼] 참된 영적 스승
    필자는 5대째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하지만 중3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내가 왜 교회를 다녀야 하는가에 대한 의문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방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제가 오늘 이 자리에 있기까지 수많은 스승들이 계셨습니다. 우리가 스승이라고 말할 때 지식을 가르치는 학교의 선생님을 말할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는 생명의 말씀을 선포하는 목회자들이 스승이십니다. 성도들의 존경과 신임으로 임직을 한 중직자들도 스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회학교에서 가르쳐 주시는 교사들도 스승이십니다. 무엇보다 가정에서 양육해 주시던 부모님께서도 엄격하게 스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필자에게는 수많은 스승들이 계셔서 제가 이 자리에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던 가르치는 스승의 입장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런 스승들이 기독교계에 많을 때 교회 안에서 다음세대가 잘 성장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영적 스승들이 가져야 할 중요한 태도가 무엇일까요? 먼저, 아버지의 마음으로 사랑을 가르쳐야 합니다. 디모데전서 1장 18절에서 ‘아들 디모데야’라고 편지하고 있습니다. 디모데전서 1장 2절에서도 ‘믿음 안에서 참 아들 된 디모데에게’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를 형식적인 관계가 아니라 부모와 자녀의 관계로 보고 있습니다. 우리가 만나는 모든 다음세대를 바라보는 스승의 태도는 바로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아무리 좋은 지식을 전하고, 좋은 환경을 제공해도 사랑이 없는 교육은 헛수고입니다. 오늘날 많은 부모가 있습니다. 많은 스승들이 있습니다. 많은 영적 지도자들이 있지만 현실은 참 어둡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 4장 15절 말씀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버지는 많지 않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복음으로써 너희를 낳았다’라고 기록합니다. 사도 바울은 해산의 수고를 통하여 자녀를 낳는 심정으로 제자를 양육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아버지의 마음으로 가르쳐야 합니다. 필자가 만나는 청소년들은 위기 청소년들이 많습니다. 이 청소년들을 지도하다보면 지독히 말을 듣지 않는 청소년들도 있습니다. 때로는 열매를 거두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지치고 힘들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으로 아버지의 마음으로 하면 다시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가장 좋은 스승은 바로 아버지의 심정으로 양육하는 자입니다.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영적 스승은 아버지의 심정으로 양육하는 스승입니다. 두 번째, 아버지의 마음으로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3장 16절과 17절은 하나님 말씀만이 모든 사람을 온전하게 한다고 합니다. 우리의 지식과 경험을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교육의 교재는 바로 성경 말씀입니다. 분명히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을 온전하게 만든다는 것을 믿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실생활에서는 다음세대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훈련하는 것에 너무 소홀히 여기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는 모두 좋은 대학 진학과 연봉이 높은 곳에 취업하는 것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단순한 학교의 성적보다는 생명의 말씀이 더 소중함을 깨우쳐주어야 합니다. 단순한 대학 진학보다 믿음의 비전을 키우고, 노력하는 것이 훨씬 중요함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래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임을 깨우쳐 주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믿음의 본을 보이는 부모, 교사,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다음세대에게 말씀을 읽는 모습, 묵상하는 모습, 말씀대로 살아가고자 몸부림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보여주어야 합니다. 순간순간 진리의 말씀을 따라서 순종하는 믿음의 모습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잘 가르치는 영적 스승이 되길 간절히 바랍니다. 참 스승을 찾아보기 힘든 시대에 참 제자의 모습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우리가 참 스승, 하나님이 찾으시는 영적 스승의 역할을 잘 감당할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다음세대가 세워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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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1-04
  • [신앙교육나침반] 코로나 키즈와 함께 하는 추수감사절
    마스크를 착용하는 것이 불편하지 않은 걸 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코로나로 인해 뒤바뀐 세상이 이제는 자연스러운 일상이 된 거 같습니다. 그러나 절대로 간과하면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다음세대는 우리의 생각 그 이상으로, 코로나로 인해 잃어버린 것이 많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빠르게 흡수하여 성장하는 다음세대들에게, 코로나 펜데믹은 그들에게 큰 구멍을 남겼습니다. 펜데믹으로 인한 깊은 두려움과 불안감은 이 아이들의 몸과 영혼에 고스란히 흡수되어, 자해와 자살과 같은 극단적 방식으로 표현되기도 하고, 우울감과 무기력 같이 침습력 강한 방식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코로나시대를 살아가는 다음세대는 내면의 불안과 두려움을 견디기 위해 자신의 몸을 아프게 하고, 좀 더 자극적이고, 좀 더 가학적인 것을 찾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의 다음세대가 극도의 두려움과 불안에 떨고 있습니다. 아이들의 작은 한숨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지 말아주십시오. 아이들의 작은 한숨은 불안과 두려움을 삼켜내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내뱉는 소심한 외침, ‘힘들어요. 도와주세요!’입니다. 지금 이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하나님 안에서만 가능한 것, ‘환경을 초월한 감사와 찬송’입니다. 올해 추수감사절은 코로나 펜데믹이라는 고통의 터널을 지나는 교회의 다음 세대에게 전혀 감흥이 없는 절기일지 모르겠습니다. ‘이 힘들고 두려운 터널 속에서 무엇을 감사하라는 거지? 이렇게 힘든데, 어떻게 감사할 수 있지?’ 교회는 추수감사절 예배와 프로그램을 통해서 이 아이들에게 분명히 전해주어야 합니다. “우리가 고통스러운 터널 속에서 감사와 찬양을 드릴 수 있는 이유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속에서 평소보다 더욱 강하게 자신의 양을 붙잡고 지키시는 목자 하나님이 함께하시기 때문이란다.” 교회의 모든 세대가 한 자리에 모여서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예배와 놀이시간을 마련해보십시오. 불안하여 떠는 다음세대들이 하나님이 주시는 놀라운 감사의 능력을 받아서 힘차게 일어서게 될 것입니다. 온 세대가 가을 열매를 이용해서 즐겁게 감사할 수 있는 감사의 송축 놀이 세 가지를 소개해드리겠습니다. ❶ 앗싸! 감사!: 밤이나 도토리를 높이 던지면서 “앗싸!”라고 외치고, 종이컵으로 “감사!”라고 말하며 받습니다. 혼자 받기 또는 두 사람이 주고받기를 할 수 있습니다. ❷ 감사의 파워: 불평을 상징하는 종이컵을 세웁니다. 이때 종이컵 안쪽에 1-10까지 점수를 적습니다. 감사의 가을열매를 던져서 넘어뜨리거나, 테이블 위에서 진행할 경우 손가락으로 열매를 튕겨서 불평을 테이블 아래로 떨어뜨립니다. ❸ 송축해: 빈 계란박스 안에 감사이름, 감사장소, 감사물건, 감사추억, 감사음식과 같은 주제를 적습니다. 박스 안에 작은 도토리나 콩을 넣고 흔든 후에, 뚜껑을 열어서 감사열매가 들어간 곳의 내용을 보고 감사를 고백해봅니다. 올해 추수감사절에는 이 땅의 모든 교회가 코로나 펜데믹으로 인해 불안과 두려움에 떨고 있는 다음세대와 함께, 감사와 송축을 통한 치료와 회복을 경험하시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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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앙교육 나침반
    2022-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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