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Home >  오피니언
실시간 오피니언 기사
-
-
[이상규교수의 역사탐색] 공산주의자가 된 최문식 목사
-
-
기독교 목사들 가운데 사회주의자 혹은 공산주의자가 있었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기독교와 무신론 공산주의가 동시에 동가적으로 한 사람의 내면에 공존할 수 있을까? ‘황금 송아지’(The Golden Cow)라는 책을 쓴 존 화이트(John White)는 인간은 하나님을 섬기든지 아니면 하나님 아닌 어떤 피조물을 섬기든지 그 어느 하나만을 섬기도록 지음 받은 존재라고 말한 바 있다. 즉 하나님과 하나님 아닌 어떤 것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도 무신론적이고 반기독교적인 공산주의자가 될 수 있을까? 그런데 실제로 한국에는 공산주의를 신봉하는 목사들이 없지 않았다. 존 화이트의 주장에 근거한다면 이들 좌익 공산주의를 신봉하는 목사는 진실된 의미의 목사라고 볼 수 없다. 그 한 사람이 최문식 목사였다.
최문식의 행적은 6.25전쟁기에 그 실체를 드러냈다. 1950년 6월 28일 북한군이 서울로 입성하자 친북조직인 ‘기독교민주동맹’이 결성되었다. 위원장은 김창준(金昌俊) 목사였다. 평남 강서 출신으로 숭실학교와 일본 아오야마 가꾸인(靑山學院) 출신인 그는 감리교 목사였고, 1919년 3.1운동 당시에는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이었다. 1924년에는 미국 유학을 하고 1926년 귀국하였는데 해방 이후 좌익운동에 가담했던 인물이었다. 그는 기독교의 인민군 환영대회를 준비했는데 이 환영대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장로교 대표가 바로 최문식(崔文植, 1905-?)이었다(민경배, “해방70년과 남북통일의 문제,” 「개혁논총」 36호<2015>, 22).
최문식은 1939년 3월 28일자로 평양신학교 34회로 졸업했다. 일반적 관례로 본다면 1936년 4월 입학한 것으로 보이고, 신사참배 문제로 1938년 1학기를 끝으로 평양신학교가 사실상 폐교되었기에 졸업식을 하지 못하고 통신으로 졸업장이 수여된 경우였다. 그의 동기들이 경남지방의 한대식, 이수필, 주상수 등이고 장준하의 아버지 장석인, 합동측의 지도자가 되는 김윤찬, 통합측의 총회장이 되는 김종대 등이 동기였고, 공산주의자가 되는 이재복도 그의 동기였다. 최문식의 행적은 해방 이후 드러나게 되지만 그는 이미 사회주의 혹은 공산주의적으로 경도되어 있었다. 그는 1923년 11월 평양 숭실전문학교 재학 중 무정부주의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된 바 있었고, 1930년 7월에는 조선청년동맹 평남연합회 집행위원장으로 활동했고, 1932년 9월에는 대구노동자협의회 결성에 참여하고, 조합정리부와 종교부를 담당했다. 대구노동자협의회는 앞에서 언급한 이재복, 조홍기, 김병창 등 기독교인들이 중심이 된 혁명적 대중운동 결사체였다. 이런 상황에서 평양신학교에서 수학하였으나 목회 이력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광복 후에는 조선건국준비위원회 경북지부 결성에 참여하는 한편, 조선인민당 대구지부 간부를 역임하였고, 1945년 10월에는 경북도인민위원회 결성에 참여하고 부위원장 겸 내정부장이 되었다(한국학중앙연구원, 향토문화전자대전). 이처럼 그는 사회주의 혹은 공산주의 운동에 가담한 전력이 있다.
그러다가 최문식은 1946년 10월 대구의 철도파업이라는 폭동을 배후 조종하고 이에 가담한다. 미군정기인 1946년 9월 조선공산당의 주도하에 전국적으로 노동자들이 파업투쟁을 일으켰는데, 9월 23일 부산지역 철도 노동자의 파업 투쟁을 시작으로 9월 24일부터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의 주도로 각 산업별 노동조합이 연대투쟁에 들어갔는데, 10월 1일에는 대구폭동사건으로 번져갔던 것이다. 대구 폭동은 인명 피해가 적지 않아 커다란 사회적인 문제가 되었고 치안상 큰 혼란을 야기하였다. 대구 폭동은, 해방 이후 정판사 사건, 1948년의 여수 순천 반란 사건, 제주 4·3사건과 함께 해방 이후 남한사회를 혼란으로 몰고 갔던 커다란 사건이었다. 이 사건에 연류된 이들이 이재복, 최문식 같은 목사들이었다.
이 일로 최문식은 제5관구 경찰서에 구금되었고, 이후 10월 항쟁을 배후 조종한 혐의로 징역 3년형(5년 형이라는 설도 있음)을 언도 받고 마포형무소에 수감 되었다. 그러나 그의 고향 친구로 후에 YMCA 총무로 일하게 되는 김태묵 목사가 당시 미군정청 고위 관리로 있어서 그의 도움으로 석방될 수 있었다. 그러나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가 출범하자 발생한 여수 순천 반란사건으로 다시 구금되었다가 6·25 전쟁이 발발하고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하게 되자 석방되었다. 그리고는 서울에서 김일성 장군 환영대회라는 것을 조직하고 가담했다. 이런 충성에도 불구하고, 한국학중앙연구원의 대구역사문화대전에 의하면, 마포형무소 복역 당시 전향 발언을 한 것이 알려지면서 북한 당국에 끌려다니다가 행방불명되었다고 한다. 목사직을 버리고 좌익 친북 활동에 목숨 걸었으나 결국 그들에 의해 버려진 존재가 된 것이다.
-
2025-02-07
-
-
[목회자칼럼] 사모는 누구인가?
-
-
교회에 직분이 아닌 직분을 가진 한 사람이 있다. 바로 사모다. 임명을 받은 것도 아니고, 교회의 조직이나 교단의 헌법에도 없는 참 어색한 이름이다. 사실 아무런 실권도 없는데 성도들의 요청과 요구는 너무 많다. 교회의 그 어떤 조직이나 회의에도 들어가지를 못한다. 남녀기관의 회원도, 제직도, 당회원도 아니다. 아무리 해가 바뀌어도 봉사직에 지원할 수가 없다. 더욱이나 선출직에는 아예 피택과 선택의 자리에 접근조차 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에서 하지 않는 일은 거의 없다. 성도들도 교회의 모든 일에 사모가 다 참여하기를 원한다.
남편인 목사는 사명자로 부름을 받고, 신학교를 나오고, 정규직으로서의 훈련도 긴 시간 동안 받았다. 그러나 사모는 사모 신학교를 나온 것도,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것도 아니다. 한 남자를 만나서 결혼을 했는데 그 남자가 신학교를 가고 목회자가 되었다. 아니면 신학교를 졸업한 남자를 만났는데 목사였다. 그러니까 사모는 소명도, 부르심도 아닌 상태에서 결혼과 동시에 그냥 성도들이 사모라고 부르는 자리에 있게 된 것이다. 여자 부교역자의 남편은 자신의 아내가 부임한 교회에 출석하지 않고, 원래 자신이 다니던 교회에 출석하면서 직분을 감당해도 큰 문제가 없다. 그러나 남자 부교역자의 아내는 남편이 사역하는 교회에 함께 다녀야 한다.
사모가 청년 시절에는 그 교회에서 촉망받는 젊은이였고, 또래의 무리 가운데서 제일 신앙이 좋은 사람 중의 한 명이었다. 그런데 사모가 되면 재능과 은사에 관계없이 자의적으로 할 수 있는 교회의 봉사직은 없다. 봉사자가 없는 사역의 빈자리를 채우거나 결석하는 봉사자의 뒷자리를 감당해야 한다. 자녀들을 양육할 수 있을 정도의 사례를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사모가 직장에 다니면 성도들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아니 정죄하고 비난하는 공동체도 있다.
교회 안에서 처신하기도 정말 어렵다. 교회마다 요구하는 내용이나 수준이 다 다르다. 열심히 공동체에 참석하면 나댄다거나 설친다고 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사모가 왜 있는지 모르겠다고 한다. 말을 조금 많이 하면 입만 살았다고 하고, 말이 없으면 꿔다 둔 보리 자루라고 말한다. 심방을 가서 세 번 칭찬하면 사모가 가지고 싶어서 계속 말한다고 하고, 칭찬하지 않으면 성도의 삶에 관심이 없다고 말한다. 봉사를 열심히 하면 성도들의 자리를 빼앗는다고 하고, 봉사를 안 하면 놀고먹는다고 한다. 옷을 잘 차려입으면 사치한다고 하고, 검소하게 입으면 자신에게 관심이 없는 사람이고 폄하한다. 교인들과 조금 친하게 지내면 자기 사람 만든다고 하고, 친하게 지내지 않으면 사교성이 없다고 말한다. 자녀들이 교회에서 떠들면 가정교육이 엉망이라고 말하고, 엄격하게 훈육하면 사랑이 없다고 말한다. 목사인 남편이 목양을 잘하면 무슨 복이 저리도 많아서라고 하고, 남편이 목회를 잘못하면 도대체 사모는 뭐 하느냐고 말한다. 남편이 목양을 잘하면 남편의 실력이고 목양을 잘못하면 사모는 자신의 부족함 같아서 늘 마음이 아프고 냉가슴을 앓는다. 사모의 몸이 자주 아프면 기도하지도 않고 목사의 목회에 방해가 된다고 하고, 건강하면 아픈 사람들의 삶을 공감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한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그래서 사모는 오늘도 마음과 정신과 육체가 아프다. 젊은 시절의 자존감이 사라졌다. 평생에 축복을 선포하고 기도했는데 소수를 제외하면 정작 사모는 가난하다. 교회에서 어쩌면 그냥 시간을 보내는지도 모른다. 남편의 목회가 끝나는 시간을 기다리면서. 물론 교회에 물의를 일으키고, 성도들을 시험 들게 하고, 남편의 목회를 힘들게 하는, 위의 경우에 해당되지 않는 사모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모는 교회와 목회와 남편에게서 소외 된 채 외롭고도 힘든, 사명과 사랑과 동역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참 외로운 사람들이다. 그들에게 힘내라는 말 대신에 그냥 사랑과 긍휼의 눈으로 가만히 쳐다봐 주면 참 좋겠다.
-
2025-02-07
-
-
예배는 정치 행위의 수단이 아니다
-
-
“민주당과 이재명의 패악질에 침묵하는 것은 교회의 직무유기이다”(1월12일), “작은 행동 위대한 역사 이재명은 끝났다!”(1월19일), “기도하는 백성이 있으므로 이재명은 끝이다!”(1월26일) 위의 문구들이 어디서 나왔는지 알고 있는가! 여당의 민주당 비판 발언 혹은 탄핵 반대 시위에서나 볼 수 있음직한 문구가 다름 아닌 세계로교회 1월 12일부터 26일까지의 각각 주일 2부 예배 설교 제목이다. 세계로교회 손현보 목사가 어느 순간부터 작심하고 야당의 비판자가 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지난 12월 3일 계엄 이후 탄핵 집회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시기부터 세계로교회에서 공식적인 유튜브 채널을 통해 올라오는 영상 내용을 분석해보면 예배 시간에 정치적인 발언의 수위가 점점 높아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급기야 설교 중에 자신이 발언을 하면 성도들이 “이재명은 끝이다”라는 구호를 여러 번 외치게 하는 모습이 공개되어 충격을 주고 있다.
손현보 목사가 어떤 사람인가! 지난 코로나때 정부가 방역 차원에서 모든 교회들에게 비대면 예배 방침을 내렸을 때, “목숨을 걸고 예배를 사수해야 한다”며 기자 회견을 하고 정부의 지침에 대응하여 대면 예배를 드렸던 사람이다. 당시 코로나 상황을 잠시 덮어두더라도 예배를 향한 그의 열정에 대해서는 많은 목회자들이 진심으로 받아들였다. 그런데, 요즘 그가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한다는 그 예배 시간에 하고 있는 발언들은 과연 그 때 그 하나님을 찬양하고 올리는 예배가 맞는지 의심이 든다.
예배는 정치 집회의 장이 아니다. 예배는 자신의 정치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사람들을 설득하는 도구가 아니다. 예배가 무엇인지는 예장 고신 손현보 목사가 누구보다 잘 알 것이라 생각한다. 그가 여러 문제에도 불구하고 10.27 집회나 세이브코리아의 중심이 되어 교회 밖에서 활동을 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할지라도 세상과 구별되어야 할 교회에서, 하나님만 높임 받으셔야 할 예배 시간을 정치적 선동의 자리로 삼아서는 안된다.
점점 높아지는 수위에 교단은 물론 지역을 넘어 전국의 목회자들이 우려와 염려, 개탄의 심정으로 세계로교회와 손현보 목사를 지켜보고 있다. 이제라도 손현보 목사는 예배 시간에 정치 행위를 그만두기 바란다. 초등부 아이들, 중고등부 청소년들이 함께 드리는 주일2부 예배 때, 정치적 발언들을 멈추기 바란다. 더 깊은 수렁에 빠지기 전에 지금의 정치 행위를 돌이켜 다시 하나님만 높임 받는, 순수한 예배자의 모습으로 돌아오기를 간곡히 당부드린다.
-
2025-02-07
-
-
기독시민을 위한 행동지침
-
-
한국교회가 혼란스럽다. 진영 논리를 잣대로 목회자의 설교를 비판하는 것은 물론 집회에서 폭력을 선동하는 일까지 벌어지고 있다. 나와 정치적 견해와 생각이 다르더라도 서로 존중하고 이해하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지적을 곱씹어 볼 때이다.
최근 기독교윤리실천운동본부가 ‘극한 정치적 갈등 속에 있는 기독시민을 위한 행동지침’을 발표했다. ‘9가지 안되는 점’과 ‘9가지의 해야 될 점’을 나열하고 있다.
9가지 안되는 점은 ▲자신의 주장을 폭력을 통해 관철하려고 해서는 안된다 ▲정치적 입장이 다르다고 상대방을 혐오하거나 악마화해서는 안된다 ▲특정 유튜브 방송이나 SNS에 몰입하며 과신해서는 안된다 ▲카톡 내용에 대한 사실 확인 없이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해서는 안됩니다 ▲헌법 기관의 판결을 비판할 수 있지만 부정해서는 안된다 ▲국가 기관의 정당한 법 집행을 방해하면 안된다 ▲돈을 받고 정치 집회에 참여해서는 안된다 ▲설교나 대표 기도 시간에 정치적 입장을 과도하게 표현해서는 안된다 ▲현실 정치에 과몰입하여 정치의 한계에 대한 인식과 영원에 대한 소망을 놓쳐서는 안된다.
반면 해야 될 9가지는 ▲자신의 정치적 의견을 평화적으로 표현하며,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대화를 하자 ▲정치적 입장이 다른 사람들도 이 나라의 한 구성원임을 기억하자 ▲정치적 입장이 다른 언론이나 개인 방송들도 함께 시청하자 ▲카톡이나 SNS를 통해 얻은 정보는 신문과 방송 등 매체를 통해 사실 확인을 하자 ▲나의 확신과 신념이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지 않는지 주의하자 ▲헌법 기관의 판결을 존중하자 ▲근거없는 음모른을 경계하자 ▲교회와 일상에서 덕을 세우기를 힘쓰며,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윤리적 실천을 하자 ▲하나님의 공의가 실현되고 약자가 보호받는 나라가 되도록 하자.
행동지침의 실천을 통해 ‘편 가르기’가 아닌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성숙함’을 나타내는 기독시민이 되기를 당부드린다.
-
2025-02-07
-
-
[김철봉 목사] 금수강산 대한민국을 보전하라
-
-
오천년 유구한 역사를 살아온 우리 한민족이었다. 조상들이 삶의 터전으로 자리잡은 한반도는 그리 크고 넓은 땅은 아니었으나 우리 민족이 옹기종기 오순도순 터를 잡고 살아가기에는 아담하면서도 옹골차기가 그지없는 말 그대로 금수강산이었다. 중국과 국경을 맞대는 북쪽의 압록강, 두만강 그리고 맨 남쪽으로 흘러내리는 낙동강, 섬진강 그리고 한강, 금강, 대동강, 임진강이 이 땅의 흙을 비옥하게 만들었다. 북쪽에 우뚝 솟은 백두산과 남쪽 끝 제주도에 불룩 솟은 한라산, 그리고 셀 수 없이 솟아오른 산봉우리들... 실로 한반도의 강과 산들은 비단으로 수를 놓은 듯이 아름답고 화려하고 기름진 강산이다. 그뿐인가? 한반도의 삼면을 둘러싼 동해, 서해, 남해 바다는 특유의 맛깔나고 풍부한 어족을 품고 있어서 한반도의 백성들 입맛을 세계 최고 수준으로 만들어 주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너무나 뚜렷한 사계절과 아름답기가 빼어난 우리의 금수강산은 이 땅에서 수천년동안 뿌리 내리고 살아온 한민족으로 하여금 지구촌 어느 민족도 흉내낼 수 없는 독특하면서도 뛰어난 문화를 일구어내는 쾌거를 선사하였다.
금상첨화(錦上添花)로 이 아름다운 한반도 한민족에게 예수 그리스도 생명의 복음이 전래되었다. 옛적부터 신앙심이 깊고 천우신조(天佑神助)를 의식하면서 천제(天祭)를 신실하게 올려오던 우리 민족에게 성경을 통하여 설명되는 유일신 하나님 신앙은 큰 거부감 없이 좋은 반향을 일으켰다. 이스라엘 땅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의 죄를 한 몸에 짊어지시고 예루살렘 골고다 언덕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시므로 이루어진 인류 대속(代贖)이라는 생명의 복음은 이천년 기독교 선교역사가 전진하던 중 우리 한반도에서 특별히 환영 받으면서 꽃을 피웠다. 참으로 하나님이 허락하신 각별한 사랑이요 은총이었다.
참으로 사랑스럽고 소중한 생명의 복음을 받아서 품고있는 교회, 그 복음은 하늘로부터 주어진 신비이지만 이 복음을 담고있는 교회는 이 땅에 위치한다. 땅위에 있는 교회(그리스도인)로서 가장 이상적인 환경은 어떤 것일까?
성경은 이렇게 답한다.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함으로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라”(딤전2:2)
오늘의 한국교회가 건전하고 왕성하게 믿음의 역사(役事)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를 이루고 있음은 일제 시대 환난과 박해를 견뎌낸 후 1945.8.15. 해방과 더불어 우리나라가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으로 출발하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해방과 독립이라는 최고의 선물을 동시에 함께 받았음에도 한반도의 북쪽은 공산주의를 채택하였으므르 눈으로 볼 수 있는 가견적(可見的) 교회는 사라지고 말았다. 사탄은 한반도 전체를 장악할 요량으로 우리 남한에도 공산주의가 극성을 부렸다. 에덴동산에서 완전 거짓말로 아담과 하와를 달콤하게 유혹하여 넘어뜨리는데 성공하여 재미를 보았던 사탄은 거짓말과 선전선동에 탁월한 공산주의자들 때문에 한때는 우리 남쪽 백성들도 70%가 공산주의(또는 사회주의) 체제로 나라를 세워도 좋을 것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고 하니 참으로 모골이 송연해지는 위기의 시절이었다.
그러나 이 땅을 향하신 하나님의 기쁘신 뜻이 계셨기에 자유민주주의 이념과 가치를 깊이 있게 확실히 공부한 이승만 박사를 비롯한 기독교 선각자들이 사상과 이념적 혼돈시대를 수습하면서 하나님의 크신 은혜로 오늘의 대한민국을 세웠다. 그렇다. 자유와 인간존중(인권)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을 따라 창조하신 인간에게 허락하신 최고의 가치요 선물이다. 이 토대 위에서 대한민국은 해방 이후 80여년만에 세계가 놀라고 감동하는 참 아름다운 나라로 발전 성장하였다. 세상에~ 국민1인당 소득이 일본을 추월하다니! 그러나 말이다. 우리 모두 신32:15,16을 읽고 묵상해보자. “그런데 여수룬이 기름지매 발로 찼도다. 네가 살찌고 비대하고 윤택하매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을 버리고 자기를 구원하신 반석을 업신여겼도다. 그들이 다른 신으로 그의 질투를 일으키며 가증한 것으로 그의 진노를 격발하였도다.”
지금 대한민국 사회는 어떠한가? 윤리, 도덕, 체면, 양심, 상식, 예절의 바탕 위에서 5천년간 꾸준하게 이어오던 그 동방예의지국이 맞는가? 어른에게 묻고, 아비의 말에 청종하던 그 겸손함이 있는가?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던 그때의 겸비함과 간절함이 있는가? 하나님의 창조질서와, 인간 내면에 자리잡고 있는 양심과 상식이 정상적으로 작동되고 있는가? 건강하고 성숙한 사회 공동체를 유지 발전시켜 나가는데 절대 필수적인 자유와 인권, 민주주의를 온전하게 지켜나갈 의지와 희생의 자세가 돼 있는가? 세계가 경탄하고 부러워하고 박수하고 축하하면서 주목하는 대한민국에 동성애, 종북 종중, 무신론적 사회주의 미화, 무섭게 파고드는 마약과 도박, 특히 사이비 정치인들의 거짓말 선전 선동... 어이가 없다.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백성은 멸망할 짐승과 같다고 성경은 경고하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신앙과 지혜가 혼돈에 빠져있을 때 사무엘 선지자는 “지나온 날 하나님께서 너희를 위하여 행하신 그 큰 일을 생각하여 ~ 나라를 새롭게 하자. 만일 너희가 여전히 악을 행하면 너희와 너희 왕이 다 멸망하리라”고 호소하고 경고하였다.
집이 낡고 망가지면 당장 손보고 수리하고 고쳐서 새 집으로 재건축하는 것이 마땅하듯이 우리 모두 정신을 차려서 나라를 새롭게 하자. 옛것이라 하여 결코 무시하지 말고 소중한 전통들을 지켜가고 유익하고 참신한 새것들은 받아들이면서 하나님이 보우하사 아름다운 금수강산 우리나라 대한민국을 부디 단단하게 보전(保全)하자.
-
2025-02-07
-
-
[교회법 특강] 교회법(法)과 교회 건설(建設)
-
-
교회법이 교회 건설과 깊은 관련이 있음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교회 건설과 교회 세우기가 교회법(교회질서, 교회규정)보다 더 높은 상위(上位)에 있다. 생소하게 들릴 수 있는 ‘교회 건설’ ‘교회 세우기’ 개념은 성경에서 나왔다. 교회가 건물이나 집, 성전, 건축물에 비교되면서 ‘건설’이라는 말이 특별히 사용되었다. 예를 들면 고린도전서 3장(9-17절), 에베소서 2장(20-22절)이 대표적이다. 이 말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오이코도메인’(oikodomein, to build up, 세우다), ‘오이코도메이’(oikodomee, building up, 세움)인데 각각 동사와 명사로 사용되었다. 이 용어는 대부분 교회와 관련해서 교회 건설 혹은 교회 세우기의 뜻으로 사용되었다.
고린도전서 14장은 공예배에서 지켜야 할 ‘질서’ ‘품위’를 강조하고 있다. 40절을 보면 다음과 같이 말씀한다: “모든 것을 품위 있게 하고 질서 있게 하라.” 고린도 교회에 공예배에서 방언이나 통역, 예언과 같은 은사가 있었으나 질서와 품위 대신 무질서가 있었다. 그 결과 교회에 화평과는 거리가 먼 모습이 있었다. 33절에서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시오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고 한 것에서 이 사실을 어느 정도 추정할 수 있다. 여기 나오는 ‘질서’ ‘무질서’ ‘품위’ ‘화평’은 좁게는 교회의 공예배 맥락에서 나온 용어들이지만, 넓게 본다면 비단 공예배 뿐 아니라 ‘교회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해당한다(26절은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고 한다).
그런데 공예배에서 지켜야 할 질서와 품위를 권면하는 고린도전서 14장에 ‘세운다’는 뜻의 ‘오이코도메인’ 용어가 나온다(4, 5, 12, 26)! 한글성경(개역개정)은 원문성경에는 나오지 않는 ‘덕’이라는 말을 삽입하여 그 뜻이 이상하게 되었다: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4절), “교회의 덕을 세우지 아니하면”(5절),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12절). 다행히 최신 영어 성경 ESV는 ‘덕’이라는 말은 빼고 ‘교회를 세운다’(builds up the church, 4절)로 번역을 잘했다. 26절은 위 세 구절과 달리 ‘교회’라는 말이 없이 그냥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고 하고 있지만 고린도전서 14장 전체 맥락을 볼 때 이는 ‘개인’이나 ‘몇 사람’의 덕이 아니라 ‘교회’의 덕임을 충분히 알 수 있다.
따라서 교회에서 특히 공예배와 법에서 우리가 제일 먼저 목표로 것은 무엇보다 ‘교회 건설’ ‘교회 세우기’이다. 강조점은 ‘개인’ 세우기가 아니라 ‘교회’ 세우기에 있다. 한글성경은 ‘덕’이라는 불필요한 말을 첨가하여 번역함으로써 마치 공예배와 질서가 개인의 덕을 세우는 것처럼 만들었다. 교회 역사에 나타난 17, 18세기 독일의 경건주의 운동은 교회론적 맥락을 무시하고 개인의 경건과 덕을 세우는 것만을 주장했는데, 여기 ‘교회 세우기(교회건설)’ 뜻으로 교회론적 맥락에서 사용된 ‘오이코도메오’를 순전히 개인의 덕을 함양하고 교화하는 뜻을 가진 “edify”(개인의 덕을 교화하다)로 바꾸어 버렸다.
교회에서 법(질서)의 목적은 화평(33)을 통한 교회 건설이다. 질서를 위한 질서, 법을 위한 법이 아니다. 장로교회 선진들은 공예배 질서에 관한 <예배지침>(The Directory for the Public Worship of God, 1645년)을 작성했다. 근데 예배지침 표지에 고린도전서 14장, 이미 위에서 언급된 구절이 나온다. 26절(“모든 것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과 40절(“모든 것을 품위 있게 하고 질서 있게 하라”이다. 이들은 고린도전서 14장에 나오는 공예배의 질서를 교회 세우기와 연결했고 그래서 위 구절을 첫 페이지에 기록했다.
-
2025-02-07
-
-
[서임중칼럼] 아직도 사용할 수 있다
-
-
새해가 밝았다. 나라 안팎은 혼돈 그 자체다. 무안공항 사고로 올해는 새해맞이 행사도 대부분 취소되고 179명의 귀한 생명의 사망뉴스 보도를 통해 새해벽두부터 아프고 슬픈 소식에 마음이 우울하다. 그렇게 2025년 새해가 시작되었다. 설상가상으로 대통령 탄핵이라는 정치적 핵폭탄이 헌법재판소에서 언제 어떻게 터질 것인가에 온 국민은 좌불안석인데 광화문과 여의도에서는 밤낮없이 찬반 시위로 홍역을 앓고 있다. 국태민안의 보루가 되어야 할 여의도 1번지는 어느 하루도 삼류정치의 쌈박질하지 않는 날이 없다. 아프다. 슬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 같이 늙어가는 별 볼 일 없는 사람이지만 그래도 마지막 희망의 줄을 놓지 않고 쉬지 않고 하는 것이 있다. 기도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이 나라 이 민족을 지켜주시리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2025년도 그렇게 하루하루 열리고 닫힌다. 그러면서 나는 오늘도 말씀 사역자로 농어촌 산골 개척교회를 향해 걸음을 옮긴다.
송구영신 예배로 시작한 2025년 새해 첫날은 감림산기도원에서 신년 축복 성회로 시작되었다. 대성전을 가득 메운 성도들을 보면서 울컥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새해 첫날에 기도원에 올라와 기도하는 성도들의 젖은 눈을 보면서 내 마음이 젖었다. 성도들의 목이 터지라고 부르짖는 기도 소리에 거룩한 소름이 돋았다. 설교는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 주는 것임을 알기에 그들을 향해 하나님의 마음을 그림처럼 그려 보여 주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고, 2025년도 여전히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여러분과 함께하신다고 선포했다.
젊은 청년이 조용히 다가와 “목사님 저 한 번만 안아 주시면 안돼요?” 한다. 23세의 손자 같은 청년이다. 조용히 내 품에 안아주니 품에 안겨 헉헉거리면서 울었다. 그러면서 한마디 한다. “목사님 대한민국이 아파요.” 순간 천둥소리를 듣는 느낌이었다. 귀도 마음도 가슴도 먹먹했다. 그 언젠가 TV 연속극에서 “아프냐, 나도 아프다.”라는 말이 떠올랐다. 할말을 잃은 나는 “그래, 기도하자.”라는 한마디 밖에는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하루 종일, 아니 지금도 내 영혼은 그 청년의 젖은 목소리에 아픔이 가시지 않는다.
몇 년 전 시골교회 목사님이 부흥회 강사 초청을 하셨다. 일정이 나오지 않아 정중하게 거절했더니 전화로 내게 들려주는 한마디에 내 마음은 얼어붙은 느낌이었다. “우리 교회 78세 할머니가 서목사님 방송 설교를 듣고 제게 찾아와 ‘죽기 전에 그분 설교를 직접 한번 듣고 천국 갔으면 원이 없겠다’라고 하셨습니다. 한 시간도 좋으니 허락해 주시면 안 됩니까?” 이리저리 일정 조정하여 주일 1일 집회를 약속하고 갔다. 우리 부부를 포함하여 13명이 예배를 드렸다. 강사를 바라보는 대부분의 연로하신 성도님들의 눈은 주님을 바라보는 혈루증 여인을 느끼게 했다. 많이 울었다. 그 1일 집회만큼 은혜와 감동을 마음에 담은 집회는 없다고 지금도 고백한다.
오래전 일이지만 점심을 먹으면서 아내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국을 더 먹겠다고 하였더니 아내는 국자에 국을 떠 국그릇에 보충해 주었다. 그런데 국자는 신혼 시절에 샀던 것으로 손잡이가 휘어져 있는 것이었고 오랫동안 사용하다 보니 닳아 있었다. “여보, 인제 그만 사용하고 새것으로 바꾸지.”라는 무심코 하는 말에 아내는 “아직은 더 쓸 수 있잖아요.”라는 대답을 했다. 그 순간 뭔지 모를 부끄러움에 얼굴이 붉어졌고 손잡이가 휘어진 국자를 통해 많은 생각을 했다. 그렇게 사용하는 것은 비단 국자뿐이 아니다. 성도님들이 선물로 주신 좋은 것들도 많지만 목사관에는 신구 문화가 공존되어 있는 살림살이들이다. 버리자니 사연도 있거니와 아깝고, 사용하자니 불편한 것들이 어디 국자 하나뿐이겠는가? 손잡이가 부러진 국자를 보면서 인생도 목회도 생각해 보았다. 그러면서 ‘계륵’(鷄肋)의 교훈과 타산지석(他山之石)의 깨우침을 다시금 생각했다.
‘鷄肋’이란 말은 쓸모는 별로 없으나 버리기는 아까운 사물의 비유로 사용되는 용어로서 진서(晉書) 유령전(劉伶傳)과 후한서(後漢書) 양수전(楊修傳)에 나오는 말이다. 진(晉)나라 초기에 죽림칠현 가운데 ‘유령’(劉伶)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어느 날 유령이 술에 만취가 되어 행인과 말다툼을 벌였다. 상대가 주먹을 치켜들고 달려들자, 유령이 점잖게 한마디 건넸다. “보시다시피 계륵(鷄肋, 닭갈비란 뜻)처럼 빈약한 몸이라 그대의 주먹을 받아들이지 못할 것 같소.” 그러자 상대방이 엉겁결에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는 이야기에서 계륵이 상용되었다.
他山之石이란 다른 산의 거친 쓸모없는 돌이라도 옥(玉)을 가는 데에 소용이 된다는 뜻으로 시경(詩經)에 나오는 말로서 이 말은 쓸모없는 것이라도 쓰기에 따라 유용한 것이 될 수 있음을 비유한 말이다. 돌(石)을 소인에 비유하고 옥(玉)을 군자에 비유할 때 군자도 소인에 의하여 수양과 학덕(學德)을 쌓아 나갈 수 있음을 이를 때 타산지석이라는 말을 사용하기도 한다.
인생을 살면서 강자에게 굽실거리고 약자에게 군림하는 졸부의 삶을 엮어 갈 것이 아니라 작은 것, 쓸모없어 보이는 것 하나라도 소중히 여길 수 있는 마음을 지닐 때 그 삶을 더욱 넓고 깊고 고고(高高)해지는 것이다. 우리 주변에는 부러진 국자 같은 상황이 언제나 있기 마련이고 이를 소중히 사용할 수 있는 넉넉함이 우리의 삶에 있을 때 그 삶은 더욱 아름다운 것이 될 것이다.
내 나이 팔순을 눈앞에 두고 있다. 은퇴 이후에도 한해 60여 교회 초청을 받아 말씀 사역을 한다. 불편한 잠자리와 음식, 교통수단 어느 것 하나 여의찮지만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고 방지일 목사님이 101세의 고령에 포항중앙교회 주일설교를 인도하신 후 안수기도 해 주실 때 “서목사님은 녹슬어 못 쓰는 목사가 아니고 닳아서 못 쓰는 목사가 되게 하옵소서.”라는 기도의 응답이 오늘 나의 삶이 되고 있다. 부러지고 닳아버린 국자 같은 나 자신을 돌아보면서 오늘도 하나님이 나를 향해 “아직은 사용할 수 있다.”라고 하시는 말씀을 들으면서 감사함으로 다음 마을을 향해 걸음을 옮긴다.
-
2025-01-10
-
-
[성서연구] 하나님의 영이 계십니다
-
-
새해를 맞이하여 반갑게 인사하면서 복 많이 받으시라고 인사를 건넵니다. 그러나 마음이 가볍지는 않습니다. 과거에 볼 수 없었던 정치 사회적 혼란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대통령의 계엄령 선포와 해지, 그 뒤를 이어 나온 대통령 탄핵과 대통령 권한 대행인 총리의 탄핵, 그리고 대통령과 주변 사람들을 내란 세력으로 규정하여 체포하려는 시도 등으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현직 대통령을 체포하기 위해 경찰이 집중되어 경호처와 대치하는 모습이 전 세계에 생중계로 나가는 것은 정말 국가적 수치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와중에 야당 지도자는 여러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고, 남북 관계도 그 어느 때보다 경색되어 있고, 북한군은 우크라이나 전쟁에 파병되어 죽어가고 있습니다. 한국교회도 침체 국면을 벗지 못하고, 창조 질서를 부정하는 세력과 맞서야 하는 등, 그 어느 것 하나도 마음이 가벼운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본문 말씀은 우리에게 소망을 줍니다. 소망은 하나님에게서 옵니다. 본문은 창조 전의 상태를 말씀합니다. 첫째, 혼돈입니다. 카오스, 즉 무질서의 상태였습니다. 둘째, 공허였습니다. 존재하는 것 같지만 아무것도 없는 텅 빈 상태였습니다. 셋째, 흑암이었습니다. 캄캄한 세상이었습니다. 이런 중첩된 절망의 상황에 하나님의 영이 운행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영은 이 모든 것을 놀랍게 바꾸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혼돈에 질서를 가져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주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우주는 코스모스입니다. 코스모스에는 ‘질서’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은 정교한 질서의 메카니즘입니다. 일 년 사시가, 계절의 변화, 밤과 낮의 뒤바뀜, 파종하여 추수하기까지의 자연의 응답이 정교합니다. 산천초목이 정확히 때를 알고 반응합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공허를 채우셔서 충만하게 하셨습니다. 창조 세계는 가득 채워진 충만의 세계입니다. 하늘과 땅, 바다와 육지 어디에나 놀랍고 아름다운 것들이 가득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마르지 않는 샘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공허한 세상을 온갖 아름다운 것으로 가득 채우셨으나, 부족이 없습니다. 요한복음 1장 16절은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충만은 온 세상을 충만하게 하셨습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흑암에 빛을 가져오셨습니다. 하나님의 첫 창조가 빛입니다. 빛이 존재하는 순간, 어둠은 사라졌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주님을 만나기 전에 마니교에 심취했습니다. 그는 마음속의 악을 몰아내기 원했으나, 마니교 지도자인 파우스트는 빛이 있으면 어둠이 당연히 있으니, 어쩔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는 실망하여 마니교를 떠나 회의론에 빠졌습니다. 그 후 그는 주님 안에서 해결책을 발견했습니다. 빛이 밝혀지는 순간, 어둠은 사라진다는 일원론을 깨달은 것입니다. 주님의 빛이 영혼에 밝혀지는 순간, 어둠은 물러갑니다. 그는 로마서 13장의 말씀을 통해 빛이신 그리스도께로 나왔습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혼돈도 물러가고, 공허도 채워지고, 흑암도 빛으로 사라졌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운행하시면 모든 것이 바뀝니다. 지금 우리 상황을 타개하고 변화시킬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계시다면, 우리의 혼돈과 공허와 어둠은 물러갈 것입니다.
새해가 되었습니다. 더욱 하나님의 영이 역사하시길 사모해야 합니다. 오순절 성령 운동과 같은 차원에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근원적인 역사의 차원에서 성령님의 역사를 사모해야 합니다. 성령님 안에서 한국교회가 질서를 갖길 원합니다. 하나님만 영화롭게 하길 원합니다. 모든 성도가 그 앞에 무릎 꿇길 원합니다. 우리의 공허와 부족을 성령께서 채우시길 원합니다. 예배당의 빈 공허함을 성도들로 채워주시길 빕니다. 우리 안의 어둠이 물러가고 기쁨과 감사의 빛으로 충만하길 원합니다. 주여, 주의 영으로 우리 안에서 역사하소서!
-
2025-01-10
-
-
[시사칼럼] 새해에는 카나리아처럼
-
-
어떤 신년 조찬 모임에서 한 목사님이 짧은 인사말 속에 흥미로운 이야기를 하나 들려주셨습니다. ‘카나리아’라는 새에 관한 것이었는데, 알고 보니 무척 유명한 이야기였습니다. 옛날 광부들이 작업할 때면 이 카나리아를 데리고 광산 안으로 들어갔다고 합니다. 공기나 호흡에 무척 민감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단 카나리아가 어떤 새인지 찾아보았더니 미국의 워너브라더스사가 자랑하는 캐릭터인 ‘트위티(Tweety)’의 실제 모델이었습니다. 크기는 15cm 내외로 수명은 12~15년 정도이며, 사람 손에 길러진 지가 400년이 넘는답니다. 분당 호흡수가 60~80회요(사람은 12~20회) 심장 박동수는 분당 300회에서 많게는 1,000회까지라(사람은 60~100회), 폐에서 기체 교환이 매우 빠르게 일어나므로 인해 호흡 효율이 100%(사람은 30%) 가까운 생명체입니다. 대기의 상태가 좋지 않으면 금방 반응을 보인다는 뜻입니다. 광부들이 애지중지했던 이유도 여기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야말로 카나리아 같은 존재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세상이 얼마나 오염되고 혼탁한지 알게 해 주는 척도(尺度) 역할을 감당하는 그런 존재 말입니다. 이미 성경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마 5:13, 14)고 하셨습니다. 어딘가 혹은 무언가에 뿌려져서 그곳 혹은 그것의 부패와 변질을 방지하는 역할을 하는 존재라는 뜻이겠지요. 온통 캄캄한 어둠뿐인 어딘가 혹은 무언가를 비추어서 그곳 혹은 그것에 뭐가 있는지 어떻게 되었는지를 밝히는 존재라는 의미겠지요. 카나리아는 광부들의 건강을 지켜주고 때로 목숨을 구해주었습니다. 그렇다면 교회 역시 세상을 대해 그런 역할을 감당해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현실은 어떨까요? 예수께서는 이어서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고 하셨습니다. 당시 하나님의 백성을 자처하는 자들은 맛을 잃어버린 소금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입니다. ‘사마리인의 비유’(누가복음 10장)를 보면 짐작할 수 있습니다. 강도 만난 사람이 피를 흘리며 길가에 쓰러져 있는데 아무도 돌봐주지 않는 모습입니다. 지나가는 사람 중에는 제사장도 있었고 레위인도 등장합니다. 지도자만 그런 것도 아니었습니다. 불의한 권력자였던 헤롯이 아무리 악독한 일을 자행해도 그러면 안 된다고 용감하게 외치는 자가 없었습니다. 우상숭배가 만연하고 참된 경건이 실종되었어도 자복하고 통회하며 회개를 부르짖는 자들은 극소수에 불과했습니다. 거룩해야 하는 성전을 장사꾼의 소굴로 만들어 놓은 자들에 당당하게 맞서서 그 불의한 권세에 도전하는 자들이 없었습니다.
우리는 어떠합니까? 사람들은 더 이상 말씀 듣기를 사모하거나 말씀의 권위 앞에 고개를 숙이지 않습니다. 세상의 학문과 특히 발달한 과학은 성경의 가치를 폄하하고 경시하는 경향과 풍조를 양산합니다. 사람들은 더 이상 진중하게 열정을 쏟아 기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모습을 발견하기 어려운 시대가 되었습니다. 경건이 사라지는 오늘날 교회가 맞이한 가장 두려운 이 위기 앞에서 우리는 어떤 역할을 감당하고 있나요? 각종 우상이 오직 하나님만 송축하고 경배하는 신앙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무속이 판을 치고 사이비 신앙이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가는 세상입니다. 거짓의 영들이 횡행하며 거짓 선지자 같은 무리들이 미쳐 날뛰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상숭배를 지적하고 사이비들을 향해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이 없습니다. 정의와 공법 대신 불의와 무법이 강물 같이 흐르고 공정과 상식 대신 불공정과 몰상식이 폭포수 같이 밀려와도 대항하는 사람을 찾기 어렵지 않습니까?
옛날 광부들이 탄광에 들어갔을 때 카나리아가 울지 않으면 뛰쳐나와 목숨을 구했다고 합니다. 일산화탄소 등의 유해가스가 발생했다는 의미였기 때문입니다. 만일 교회가 울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세상의 숱한 영혼들이 영적 생명을 잃지 않겠습니까? 만일 교회가 피리를 불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수많은 사람들이 멸망의 낭떠러지를 향해 그대로 나아가지 않겠습니까? 새해에는 정말 그리스도인라면 신령한 카나리아가 되어 세상을 깨우는 노래를 부릅시다. 신령한 카나리아가 되어 수많은 영혼이 깨어나도록 실컷 울어줍시다. 그래서 사람들의 진짜 목숨을 살리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정말 예뻐하고 사랑하는 그런 성도의 모습을 되찾는 해가 되기를 바랍니다.
-
2025-01-10
-
-
[은혜의말씀] 자족하는 마음 (빌립보서 4:10~14)
-
-
성경에 나오는 한 시대에 쓰임 받은 사람들을 보면 역설적인 삶을 산 경우가 많다. 다윗이 10년을 피난생활하며 지은 시편에서 “여호와가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고 했다. 하박국 선지자도 이것저것 없는 것 천지인데 하나님 한 분만으로 즐거워하고 만족한다고 했다. 사도 바울은 옥중 서신에서 사방으로 우겨 쌈을 당하면서도 크게 기뻐하였다. 처자식도 없고 집도 없이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궁핍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자족하기를 배웠고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고 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어떤 괴로움도 감당 할 수 있다고 고백하였다.
예수님께서 베다니 나사로의 집에 방문하셨을 때 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 말씀을 들었고 초청자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하여 예수님께 동생 마리아가 자기 일을 돕도록 하라고 예수님께 요청했다. 예수님께서는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고 하였다. 마리아는 좋은 편, 말씀 듣는 것을 선택하여 칭찬받았지만 마르다는 일을 많이 하고도 예수님께 책망을 받았다. 여러 가지를 하면서 분주, 복잡한 가운데 원망하는 것보다 한 가지만이라도 족해야 한다(눅10:39~42). 마음을 여러 가지로 갈라치기 하지 말고 중요한 한 가지에 집중하라.
삶의 우선순위를 잘 택해서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면 모든 것이 더하여진다.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라 한 날의 괴로움은 그날로 족하니라(마6:33~34). 우선순위를 놓치고 바쁘다고 피곤하다고 급하다고 이것저것 하다보면 삶이 엉망진창이 되고 교통정리가 안 된다.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고 지나간 과거를 곱씹지 마라. 한 날의 즐거움이 아니라 괴로움도 족한 줄로 알면, 이 또한 지나가리라. 지금이 구원의 날이요, 지금이 은혜 받을 만한 때이다.
요셉은 어릴 때 엄마가 죽고 열 명의 형들에게 미움을 받아 노예로 팔려갔지만 배신감에 치를 떨고 대인기피증, 피해망상증에 시달리지 않았다. 그 주인이 볼 때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았고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다. 애굽의 바로왕은 요셉이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것을 보았다. 모두에게 버림받았지만 주님의 강력한 임재와 은총을 받아서 용모가 아름답게 되고 예수님을 가장 닮은 자가 되었다. 하나님 한 분 만을 의지하는 믿음이 있으니 어떠한 상황 가운데서도 한이 맺히지 않고 흥이 일어났다.
고통의 때를 지난 후 내게 남는 것은 무엇인가? 스트레스, 내면의 상처, 트라우마 이런 것들을 남기지 않아야 한다. 어려울 때, 힘들 때 말씀의 인도를 받아 잘 지나가면 이후의 인생은 하나님이 책임져주신다.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아니하고 때가 차면 하나님이 채워주신다. 노후대책은 밑 빠진 독, 터진 웅덩이를 파서 물질을 쌓아 놓는 것이 아니라 자족하는 마음이면 충분하다. 요셉이 7년 대기근을 잘 지난 것이 아니라 7년 대풍년 때 흥청망청 하지 않아서 대기근의 고비를 잘 넘긴 것이다.
받은 선물 가지고 속상해 하지 말고 선물을 주신 이를 기억하라. 없는 것 때문에 열등감, 패배감에 빠지지 말고, 있는 것 때문에 자만하며 시건방을 떨지 마라. 주님 한 분으로 만족하며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
2025-0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