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11-29(금)

오피니언
Home >  오피니언

실시간 오피니언 기사

  • ‘교회 다닌다’는 사실을 숨기는 청소년들
    목회데이터연구소가 최근 기독 청소년 5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 ‘학교에서 크리스천임을 드러내고 신앙 얘기를 하는 편’이라는 응답이 43%로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고, ‘교회에 다니는 것을 말하는 것이 꺼려짐’, ‘기독교인이라는 것 때문에 비난이나 놀림을 받은 적이 있음’이라고 응답한 비율도 각각 19%, 17%로 조사됐다. 이에 대해 목회데이터연구소측은 “크리스천임을 드러내는 것에 떳떳하지 못하고, 심지어 기독교인이라는 사실이 친구들 사이에 비난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점은 그만큼 기독교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가 학교 문화권에서도 작용하고 있음을 보여준 것”이라고 분석했다. 또 기독 청소년들에게 신앙적으로 큰 영향을 미치는 인물은 목회자가 아닌 어머니 인 것으로 나타났다. ‘신앙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사람이 누구인가’라는 조사에서 ‘어머니(30%)’를 꼽은 청소년들이 가장 많았고, ‘지도 목회자/사역자(25%)’, ‘아버지(14%)’, ‘교회 친구/선후배(10%)’, ‘교회학교 선생님(8%)’, ‘학교 친구/선후배(5%)’, ‘형제 자매(4%)’ 등의 순으로 조사됐다.
    • 오피니언
    • 기자수첩
    • 광야의 소리
    2024-08-16
  • 정명석 추가 구속
    JMS 정명석이 항소심 재판을 받고 있는 가운데, 구속 심문을 마친 뒤 도주우려로 인해 추가 구속됐다. 국민일보 보도에 따르면 정명석은 지난 15일이 항소심 구속기간 만료였으나, ‘불구속 상태일 경우 도주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추가 구속영장이 발부됐다. 구속기간은 2개월 단위로 2차에 한해 갱신할 수 있어 최대 6개월 연장이 가능하다. 1999년 정명석은 여신도 성추문 사건에 휘말리자 해외 도피 생활을 전전했다. 2007년 5월 중국 경찰에 의해 검거되어 10개월간 조사를 받다가 한국과 중국 간의 범죄인 인도조약에 따라 2008년 2월 한국에 들어와 강간치상, 강간, 강제추행 등으로 징역 10년을 선고받았다. 2018년 2월 형 만료로 대전교도소에서 전자발찌를 차고 출소했으나 불과 4년 만인 2022년 또다시 여신도를 성폭행하고 강제 추행한 혐의로 고소를 당했다. 정명석은 1심에서 징역 23년을 선고받고 현재 항소심 재판을 받고 있는 상황이다. 과거 해외 도피 생활을 한 이력이 지금에 와서 ‘추가 구속’으로 귀결되었다는 반응이 지배적이다. 정씨는 22일 항소심 6차 공판이 예정되어 있다.
    • 오피니언
    • 기자수첩
    • 광야의 소리
    2024-08-16
  • 나의 교계 언론 55년 ..
    “우연이 모이면 필연이 되고 필연이 모이면 역사가 된다”고 한 말은 대한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김구가 사형 집행 사흘 전 고종 황제에만 부여된 낡고 처음 설치된 전화기로 사형 집행을 정지하라는 고종의 한 통의 전화가 그의 일생을 바꿔 놓았다. 생전에 언론이란 낱말도 생소한 언론과는 거리가 먼 맨땅에서 헤딩하는 것이나 다름없이 첫 발을 딛고 시작한 교계 언론 초년생이었던 1969년 8월 초여름 날 삼복 더위 속에서 우연한 교계 지인(이관동씨)의 소개로 광복동 입구에 위치한 작은 3층 자리 건물 안에 마련된 ‘교회연합신보 부산지사’ 수습기자로 들어 갔다가 6개월 만에 현재 동서대학의 전신인 부산실업전문학교 교장 장성만 목사에게 학교 탐방 취재 목적으로 방문하여 취재한 다음 차를 나누는 시간에 장 목사님이 잘 아는 김연준 장로(한양대학 설립자이자 그의 부인 백경숙 여사가 교회연합신보 이사장 겸 발행인)에게 소개 추천장을 써 준 관계로 서울에 직접 본사 방문 후 지금의 (주)기독교신문 사장 장충협 장로로부터 부산 주재 기자 발령을 받은 것이 첫 교계 기자의 출발점이었다. 정말 우연한 계기가 필연으로 역사의 현실적인 삶의 변화로 55년 세월의 오늘까지 이어 온 것이다. 지자제로 지방화 시대 열었던 1995년 4월 11일 ‘부산기독교신문’으로 첫 교계 지방지 신문 발행으로 부산 코모도호텔에서 지금의 명예이사장 박선제 목사를 창간 축하 예배 설교자로 장충협 교회연합신문 사장의 축사와 당시 부산시장 문정수 시장의 축사, 부산교계 인사 150여명 내빈들이 참석하여 거창하게 지방화 시대를 열었던 부산 교계신문 창간호를 발행했다. 그 후 몇 년 뒤 신문 제호를 부울경을 커버할 뿐아니라 한국교회 전 지역을 배포하는 의미에서 신문 제호를 ‘한국기독신문’으로 바꿔 발행하여 지금은 인터넷 신문과 종이 신문을 동시에 발행한지 무릇 29년이 흘렀다. 이제 나이도 80세를 넘겨 한계가 와서 아들(신상준 국장)에게 회사 운영권을 넘겨주고 조용히 지나간 교계의 역사 현장 칼럼만 쓰면서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다. 연재 된 ‘역사의 현장’ 1권, 2권과 ‘부산예수’란 연재물을 책으로 출판하였다. 은성교회 장로 시무 18년 은퇴 후 주일 날은 1부 9시 예배 드리고 2부 11시는 집 근처 개척교회나 다름없는 작은 교회(부민드림교회)를 은퇴장로로서 조용히 출석하며 자리를 메우며 신앙 생활을 하고 있다. 지난 7월 마지막 주일은 ‘시련과 성숙’(야고보 1:1~4)이란 제목으로 8월 4일 첫째 주일 주기철 목사(고신대 신학 교수)가 맡아 설교하는 제목은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않으시는 하나님’(야고보 1:5~8) 제목으로 설교하시는데 주목사 자신이 10년 동안 영국 유학 생활동안 온갖 고생과 알바로 시련을 겪어 온 과정을 지낸 젊은 시절을 연상하면서 “시련은 헛된 것이 아니고 믿음을 테스트하는 것이며 이를 통과하면 성숙과 인내가 주어 진다”는 메시지가 나의 과거 힘들었던 생각이 주마등처럼 지나가는 듯했다. 보편적으로 교계신문 발행은 종합대학 기독교 대학이나 대형교회에서 운영을 하는 경향이 있어도 일개의 개인이 운영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는 일인데도 용하게 29년의 세월을 견디어 온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요 뒤에서 헌신과 숨은 뒷바라지를 한 아내 김해옥 권사의 지원과 가족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늦은 70대에 우연히 부산디지털대학교 사회복지학과 전공을 배운 결과 요양보호사 자격증과 상담심리자격증을 취득한 덕에 척추 협착증 수술로 아픈 아내를 케어하는 일과로 보내고 있는 것도 하나님께 감사한 일이고 우연이 필연이 된 역사의 현실이 담겨있는 것이다. 시련은 야고보가 말해듯이 기쁨으로 여기며 성숙단계로 이어 간다는 것이 진리인 것을 여든이 되었어야 깨닫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지혜’가 아니겠는가? 모 일간지에 실린 기사 중에 기자와 나눈 대화가 인상 깊었다. 코로나 백신으로 노벨 생의학상을 2023년 받은 커털린 커리코 헝거리 세게트 대학 교수는 “실험을 통해 단서를 찾아가는 과학자는 마치 형사 콜롬보처럼 계속 질문하고 추적하는 것이 과학자 직업과 같다” 말한 것처럼 그는 코로나19. 모더나, 화이자 백신을 개발하기 전까지 미국 페실메니아대에서 주임 교수로부터 괄시 받고 교수에서 연구원으로 강등 되어 실험실에서 강제 폐쇄되는 수모를 받아가면서도 원망도 후회도 없이 기쁨으로 견디어 왔다는 그의 진실한 고백이 감동을 주었다. 비전공자로 교계 언론에 몸담아 온 지난 55년은 보잘것없은 도전 정신이었고, 앞만 바라보고 작지만 꾸준한 인내와 습관이 인생을 바꾸어 준다는 교훈을 인생 후반절에야 알았지만 기자 생활을 하면서 각계 각층에서 목회에 성공한 대형교회 목사와 기업에 성공한 기독인들을 만날 수 있었다. 교계 언론 생활에서 쳐진 것은 물질이 아니고 교계의 인맥이었고 그들의 열정으로 확실한 목표를 갖고 시간과 인맥을 관리하면서 열정적으로 살아가는 주인공들을 추적하며 역사의 현장에 담기로 마음 먹고 써 온 것이 29년 세월이 흘렀다. 비록 물질은 벌지 못해도 한국교계의 역사적인 과거와 현재를 보면서 미래를 전망할 수 있는 안목이 나에게 주어졌던 것이다. 그 흔적들을 담은 ‘부산노회 장로 70주년사’(통합)를 집필할 수 있었고 여러 교계 인사들의 자서전, 회고록을 쓸 수 있는 여유를 주는 것만이라도 감사할 수 있었다. 한번 뿐인 내 인생 이제까지 소홀했던 가정과 가족을 돌보며 잘못했던 과거를 회상하며 새벽제단에서 하나님께 회개하는 것과 한국교회가 처음 사랑을 회복하는 데 꾸준히 기도하는 길 밖에 없었다. 원망도 후회도 없이 무서운 현실의 삶 속에서 남은 인생은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것 밖에 없지 않겠는가?
    • 오피니언
    • 기자수첩
    • 역사현장
    2024-08-16
  • [목회자칼럼] 새롭게 시작하는 힘
    비행기는 이륙해 하늘을 날 때 가장 많은 에너지를 사용한다고 합니다. 출발과 시작이 그만큼 어렵다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생각하는 방식과 성격이 다르지만 첫 발을 내딛을 때 너무 많은 고민과 염려로 시작조차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인생은 늘 시작입니다. 자발적으로 시작하지 않으면 떠밀려서라도 시작하는 게 인생의 걸음입니다. 망설이고 안될 것이라는 핑계 때문에 행동으로 옮기기 힘든 시작. 작심삼일로 끝날 것 같아 도전하기 시작. 그러나 의외로 시작하는 사람에게는 힘이 있습니다. 시작하기 전까지는 수많은 고민들로 힘이 빠지지만 막상 시작하고 그 일을 이어가면 할 수 있는 힘이 생기고, 시행착오와 실수를 통해 발전하는 나를 만나게 됩니다. 시작을 멈추게 하는 불안, 게으름, 과거의 습관을 버리로 일단 시작해봅시다. 일단 같이 출발해봅시다. 시작하는 순간 뭔가 달라져있을 것입니다. 첫째, 시작하면 새로운 일을 넘어 새로운 희망이 생깁니다. 주위에 365일 다이어트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다이어트를 한다고 말은 하지만 식단, 운동 그 어느것하나 제대로 하지 않고 매번 걱정만 합니다. “해야 하는데... 해야 하는데...” 이런 사람들은 착각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말을 했으니 실천하고 있다고. 공부하는 학생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실제로는 책상 앞에 앉아 있기만 하면서 공부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학생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시작하려면, 일단 움직여야 합니다. 거대한 것이 아닌 사소한 것들이라도 시작해야 새로운 일이 생기고, 새로운 희망도 생깁니다. 처음부터 거창한 책을 만들 수는 없습니다. 자주 글을 쓰는 실천을 할 때, “나도 작가가 되지 않을까?”라는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둘째, 실천할 때 흔적이 남습니다. 문을 열어야 볼 수 있고, 담은 넘어가야 나갈 수 있습니다. 시작하지 않으면 아주 작은 기회조차 얻을 수 없습니다. 저 망망대해를 지나는 배를 본 적이 있습니까? 배를 지나는 자리마다 물결의 흔적이 남습니다. 저 끝이 보이지 않는 산을 오르는 사람들을 본 적이 있습니까? 산을 오르는 땅을 밟는 자리마다 발자국의 흔적이 남습니다. 윤동주 시인은 어두운 시절을 시로 남겼기에 그의 흔적을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내가 오늘을 “그냥 보내고 있는지” 아니면, “무언가를 시작하고 실천하고 있는지”는 돌아서서 나의 흔적이 남았는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셋째, 바라보고 있다고 되어지지 않습니다. 밀가루만 본다고 빵이 되지 않습니다. 강물을 바라보고만 있다고 건널 수는 없습니다. 숲을 이루기 위해서는 오늘 작은 나무 한 그루라도 심어야 합니다. 시작해야 시간 속에 존재하고, 시작해야 생명이 보입니다. 시작해야 오늘의 열정이 식어지지 않으니, 결국 시작이 반입니다. 넷째, 시작의 두려움이 무엇입니까? 변하는 세싱입니다. 이미 세상은 달려가고 있습니다. 나도 같이 출발해서 변하고 있습니다. 두려움이 가득한 나의 모습을 보면 감히 시작할 엄두조차 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누군가에게 손을 뻗어 도움을 요청해야 합니다. 바로 우리 주님입니다. 연약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우리의 손을 잡아 주시며 무엇이든 할 수 있게 새 힘을 주시는 분이 바로 우리 주님입니다. 바로 그 주님에게 나의 미래를 맡긴다면 시작도 출발도 거침없이 내딛을 수 있을 것입니다. 다섯째, 일을 시작해야 경험이 생깁니다. 시작은 도전입니다. 시작은 미래의 모를 일에 대한 모험입니다. 미래는 알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과 동행해봅시다. 같이 경험해봅시다. 같이 경험할 때 하나님과 친밀하게 됩니다. 하나님과 동행할 때 역동성이 생깁니다. 순종이 무엇인줄 알고 음성이 무엇인줄 알게 됩니다. 이제 시작할 수 있는 용기가 생겼습니까! 다시 기억하십시오. 시작이 반이자, 시작이 곧 희망입니다. 주님 안에서 용기를 가지고 시작할 때 그 분이 하시는 일을 기대해보십시오. 그렇게 하면, 내가 알지 못하는 하나님 나라가 내 안에서 확장되고 있을 것입니다.
    • 오피니언
    • 칼럼
    • 목회자칼럼
    2024-08-16
  • [이상규 교수의 역사탐색] 부산경남지방에서의 서양음악2
    부산 경남지방에서 서양음악 전파에 기여한 두 교회는 부산진교회와 초량교회였다. 물론 두 교회 다음으로 설립된 제일영도교회나 항서교회 등도 기여한 바 있지만 첫 두 교회의 역할은 상대적으로 컸다. 우선 호주장로교 선교부 중심으로 소개하면, 호주선교부 제2진 5명은 1891년 10월 12일 입국하게 되는데 이들은 1892년 봄 부산시 동구 좌천동으로 이주하여 한옥에 거주하면서 집회를 시작했다 이것이 부산진교회의 시작이었다. 호주 여선교사 중에 1892년 8월 3일 내한한 베시 무어(Bessie Moore)는 오르간을 연주할 수 있고 음악적 소양이 깊었던 여성으로 부산진교회에서 풍금 반주자로 활동했다. 정확하게 언제 부산진교회에 풍금을 설치하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1893년에는 반주용 악기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예배용으로 찬양 반주로 그리고 일신여학교 음악 수업에 사용되었는데 현재까지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풍금으로는 일신병원 내의 메캔지 기념관에 보관되어 있는 39건 풍금이다. 그 후 교육용으로 일신여학교에서 사용한 풍금이 61건 풍금인데, 현재 일신여학교 기념관에 보관되어 있다. 왕길지 선교사는 교회 음악 발전에도 영향을 끼친 인물인데 그는 1900년 10월 29일 내한하여 11월 4일 부산진교회 첫 예배에 참석했는데, 이때 풍금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이 있다. 그해 12월 9일 새로 매입한 한옥에서 첫 예배를 드렸는데, 이날 자 일기에서 왕길지 목사는 공간이 좁아 4,5명 앉을 수 있는 자리를 오르간이 차지할 수 없다고 말하면서 오르간을 밖으로 내어놓고 예배드린 일을 말하고 있다. 1900년 당시 예배를 위한 서양 악기 풍금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왕길지는 음악적 재능을 인정받아 후일 장로교공의회의 찬송가위원으로 활동했고, 마틴 루터가 1529년에 작시 작곡한 ‘내주는 강한 성이요’(Ein feste Burg)를 한국어로 번역하여 1905년 판 ‘찬셩시’에 수록되게 했다. 이 찬송은 1935년판 신편창송가에 다시 실리게 된다. 그는 피아노, 오르간, 바이올린을 연주할 수 있었고, 개인적으로 자신의 풍금을 갖고 있었다. 그가 한국에서 은퇴하고 1937년 3월 호주 멜버른으로 귀국할 때 한국에서 사용하던 그 풍금을 가지고 돌아갔는데, 1987년 나는 이 풍금을 본 일이 있다. 꼭 50면이 지난 때였다. 그의 아들이 멜버른대학 주변인 파크빌 82번지 스토리 가(82 Story St, Parkville)에 살고 있었는데, 나는 그의 집을 방문하고 왕길지 선교사가 늘 연주했던 그 빛바랜 풍금을 볼 수 있었다. 세어보지는 않았으나 61건 정도의 크기로 보였다. 그 이후 양악 보급에 크게 기여한 호주선교사가 1905년 4월 내한한 켈리, 1913년 내한하여 진주와 마산에서 일한 안란애(A. W. Allen)와 1916년에 내한한 허대시(D. Hocking), 그리고 1918년에 입국한 위대서(M. Withers) 등이었다. 켈리는 음악적 소양을 갖춘 여성으로 오르간 연주자이기도 했는데 1912년에는 매켄지(매견시)와 혼인하게 된다. 안란애는 멜버른대학에서 음악, 특히 피아노를 전공한 목사로서 진주광림학교와 마산 창신학교 교장을 역임했다. 그가 창신학교에서 일할 당시 7가지 악기로 구성된 기악단을 만들고 연주회를 열었는데, 이것이 마산에서의 첫 서양악기의 소개였다고 한다. 그는 매일 아침 정한 시간에 하루도 빠짐없이 피아노를 연주했다. 사람들은 그 피아노 소리를 들으며 시간을 추정했다. 그런데 어느 하루 그의 연주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이상하게 여긴 주민들이 그의 집을 방문했을 때 그는 심장마비로 죽어 있었다. 미혼 목사로 혼자 살았기에 그의 주변에 사람이 없었다. 응급 조치를 받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날이 1934년 7월 26일이었다. 허대시는 음악에 깊은 식견을 가진 여성으로서 부산 마산 통영에서 교회 한양대를 지도하고 서양음악을 소개했다. 위대서는 처음에는 마산에서 짧은 기간 일했으나 1923년부터 한국을 떠나던 1941년까지 일신여학교 교장으로 일하면서 부산진교회 찬양대를 지도하고 반주자로 활동하기도 했다. 이런 여러 사람의 영향으로 1920년 7월 부산진교회에는 ‘청년찬양대’가 조직되고, 대원들은 일본에서 구입한 여러 악기를 소지하고 있었다. 청년찬양대의 음악 지도자가 허대시 선교사였다. 그래서 1921년 4월 초에는 첫 번째 음악회가, 그해 12월 9,10일에는 두 번째 음악회가, 1922년 6월 8일에는 세 번째 음악회가 개최되었다. 이때의 일은 ‘동아일보’(2021. 12.16, 1922. 6.5, 14)에 보도되었다. 이때 피아노, 풍금, 바이올린, 만도린 등이 악기가 동원되었다. 따지고 보면, 부산경남에서 일했던 초기 선교사들에 의해 교회 찬양대를 통하여 서양음악이 소개된 것이다.
    • 오피니언
    • 칼럼
    • 이상규교수의 역사탐색
    2024-08-16
  • [최현범 목사] 사회학적 상상력
    교회는 세상과 분리된 깊은 숲속이 아니라 세상 한가운데 세워졌다. 그리고 그 세상은 개개인이 모래알처럼 흩어져서 살아가는 곳이 아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남자와 여자로 만들어 사회적 존재로 시작하게 한 세상은 다양한 사회로 구성되어 갔다. 그 사회를 크게 두 가지로 나눈다면, 사회학자 퇴니스의 말처럼 이익 추구와 상관없는 친족, 이웃, 종교 집단 등의 ‘공동체’(Gemeinschaft)와 회사나 정당 등 이익을 목적으로 한 ‘결사체’(Gesellschaft)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모두를 포괄하는 국가라는 복합체가 있다. 그래서 신학자 요더는 성경이 말하는 세상은 실질적으로는 국가를 가리키는 것이라 했다. 이곳은 개인과 달리 사회구조와 시스템이 있고 그것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하는 이념(이데올로기)이 있다. 우리는 삼권분립, 자유와 인권, 자유 무역, 시장과 물가 그리고 의료보험, 복지혜택 등을 말하지만, 그러한 사회구조와 시스템들은 민주주의, 자유주의, 자본주의, 사회주의, 그리고 오늘날의 신자유주의 등 다양한 이념들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은 이 땅에 임한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면서 동시에 세상 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가고 있다. 그들이 모여 형성된 교회 공동체 또한 이 사회의 빛과 소금으로 세워졌다. 그 말은 모이는 교회라는 조직체가 사랑과 의와 성결의 모습으로 세상에 선한 도전을 주어야 한다는 뜻임과 동시에, 흩어지는 교회로서 교인 각 사람이 자신이 몸담은 사회 속에서 선한 영향력을 미치면서 복음의 증인으로 살아야 한다는 말이다. 이를 위해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속해있는 사회를 잘 알고 이해해야 한다. 사회를 이해할수록 우리는 어떤 사건이나 현상을 개인적인 관점만이 아니라, 사회적 관점을 갖고 보다 객관적으로 이해하게 된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처한 빈곤의 원인이 그 자신에게 있기도 하지만, 사회구조나 정치가 직간접적인 원인이 되기도 한다. 1996년에 라이프매거진에 나이키 축구공을 바느질하는 12세의 파키스탄 소년 사진이 실렸다. 그는 하루 10시간씩 217일을 일해야 나이키 신발 하나를 살 수 있을만큼 저임금에 혹사당하고 있었다. 이를 계기로 나이키 불매운동이 일어났고, 사람들은 제 3 세계 가난의 원인이 이윤추구에만 혈안이 된 기업들과 유통구조에도 있음을 보게 되었다. 오직 복음만을 전하기 위해 아프리카 코트디부아르로 간 한 선교사는 시간이 지나면서 그 나라의 가난과 정치적인 혼란의 배후에 자신의 이속만 챙기려고 하는 과거 식민지 종주국인 프랑스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미국의 사회학자 밀스는 인간과 사회, 개인의 일생과 역사, 자아와 세계 사이의 상호작용을 파악하는 능력을 ‘사회학적 상상력’(sociological imagination)으로 부르고, 이것이 빈약할수록 사람들은 일상적인 삶의 모습을 개인적인 것으로만 간주하면서 역사적 변동과 사회구조적, 제도적 모순과 연결하여 생각하지 못한다고 했다. 우리나라의 다양한 집단 가운데 이 사회학적 상상력이 가장 빈곤한 곳이 교회가 아닐까 한다. 우리의 신앙이 너무 개인과 교회의 울타리 안에 갇혀있고, 그 울타리 넘어 세상을 어둠의 영역으로 여기면서 무관심하다 보니, 역사와 사회에 대한 이해가 빈곤하다. 더 나아가 사회구조를 뒷받침하는 여러 다양한 이념들에 대해서는 더욱 이해가 부족하다 보니, 오히려 특정한 정치 경제적 이념을 성경의 가르침과 일치시키며 신앙적 확신으로 삼는 우를 범하게 된다. 인간 삶의 모든 영역이 만유의 주재이신 그리스도의 것이라 했던 카이퍼의 말처럼, 교회뿐 아니라 사회 역시 우리 주님의 통치 영역이다. 그 사회를 주님의 뜻에 합당하게 보다 의로운 사회, 평화로운 사회, 건강한 사회로 만들어 가야 할 책임이 그의 제자들에게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보다 더 풍부한 사회학적 상상력을 배양해서 우리 사회를 객관적으로 올바르게 이해하고 주님이 원하는 방향으로 개혁시켜 나갈 수 있기를 바란다.
    • 오피니언
    • 정론
    2024-08-16
  • [성서연구] 끝나는 것과 계속되는 것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습니다. 영원이란 단어는 오직 하나님께만 해당합니다. 죄가 들어온 후 사람의 모든 것은 유 한함에 갇혔습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일시적인 것입니다. 언젠가 요양병원에 심방을 갔습니다. 그곳에서 어느 교회 장로님을 만났습니다. 연세가 구순이신 장로님은 움직이지 못하고, 의식도 미약한 가운데 다른 이들의 손에 인생을 맡긴 채 누워 있었습니다. 상당한 재력가에 박사님이라고 하는 장로님에게는 남은 게 별로 없었습니다. 절반 정도 남은 베지밀 박스에, 기저귀 두어 세트, 그분 이름이 적힌 빨대가 달린 플라스틱 물병, 갑 티슈 서너 개가 전부였습니다. 그분이 입은 환자복은 나중에 누군가 다른 이의 몸을 가져 주겠지요. 간호사님과 돌보미들은 그분이 신체가 커서 씻기고 옷을 입히는 게 힘들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장로님은 몸조차 남에게 맡겨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이게 우리의 상황인데, 영원이 우리에게 가당하기나 하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유한한 우리에게 하나님의 영원을 허락하셨습니다. 전도서 3장 11절은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다는 것은 우리가 영원한 하나님과 연결되도록 허락하셨다는 뜻입니다. 이제 우리에게는 두 가지 선택이 있습니다. 하나는 현세적이고 일시적인 것을 향해 사는 삶입니다. 다른 하나는 영원을 향하여 사는 삶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사두개파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사두개파는 사독의 후예로서 성전을 장악한 제사장의 무리를 지칭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내세나 부활을 부인하고, 현세만 인정했습니다. 현세만 인정하다 보니, 그들은 현세에서 성공하는 것을 최고의 목표로 삼았습니다. 이들이 예수님께 후손이 없이 죽은 한 남자의 아내가 남편의 여섯 동생과 모두 결혼한 후 다 죽었으니, 부활이 있다면 여인은 누구의 아내가 되어야 하느냐는 엉뚱한 질문을 한 이유도 이들이 부활과 내세를 부인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늘날도 사두개파처럼 사는 사람이 대부분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만 바라봅니다. 현세에 매달려 삽니다. 보이지 않는 가치, 영원한 가치에 관심이 없습니다. 이런 이들은 대개 돈과 지위와 건강과 쾌락만 추구합니다. 한국교회를 병들게 한 기복주의 신앙 역시 이런 맥락에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영원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자신의 생애에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영원한 가치를 따라 살아야 합니다. 본문을 보면 야곱이 그러했습니다. 야곱은 130세에 애굽으로 이주했습니다. 야곱이 애굽에 간 이유는 죽은 줄 알았던 요셉이 살아있을 뿐 아니라, 애굽에서 총리가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무서운 흉년이 두 번째 덮쳤을 때, 야곱의 모든 가족은 애굽으로 이주했습니다. 야곱은 애굽에서 십 칠 년을 살았습니다. 본문은 야곱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요셉에게 남긴 말씀입니다. 그는 <나는 죽으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사 너희를 인도하여 너희 조상의 땅으로 돌아가게 하시려니와>라고 했습니다. 야곱은 자신은 죽는다고 했습니다. 자신의 유한함을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서 계속 이어가실 일, 즉 그의 후손에게 가나안을 주실 일을 언급했습니다. 자신은 유한한지만, 하나님의 일은 계속 이어질 것을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유한합니다. 우리 인생은 머지않아 끝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영원하시고, 당신의 일을 계속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짧은 인생을 하나님의 영원하신 일을 위해 드려야 합니다.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기 위해 헌신하는 일, 선한 일을 위해 물질을 드림으로써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는 일, 우리 유한한 시간을 사랑에 쏟는 일은 매우 소중합니다. 어떤 교회에서 집회를 하면서 그 교회 역사를 감명 깊게 들었습니다. 초대 목사님에 이어 여러분의 목사님들이 이어 교회를 섬겼고, 모두 하나님의 부름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그 교회는 건재하고, 여전히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사람은 떠났지만, 그 교회를 통해 예배를 받으시고, 사람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는 여전합니다. 우리도 영원히 이어질 일에 우리를 드려야 하겠습니다.
    • 오피니언
    • 칼럼
    • 성서연구
    2024-07-26
  • [소강석칼럼] “잠을 자도 체리, 꿈을 꿔도 체리.”
    지난주 월요일부터 수요일까지 하반기 교역자 워크숍이 있었습니다. 이번 워크숍 주제는 ‘체인 리액션(chain reaction, 연쇄 반응)’이었습니다. 체인 리액션은 원료가 되는 화합물에서 생성물이 얻어지는 과정이 몇 가지 소반응의 조합으로 성립하고, 하나의 반응(연쇄 개시반응)이 시작되면 그 생성물(라디칼, 이온 등)이 다음 반응을 일으켜서 연쇄적으로 진행되는 반응을 말합니다. 저는 이걸 이렇게 설명을 했습니다. 하나의 눈덩이가 다른 눈덩이와 뭉쳐서 큰 눈덩이가 되고, 그 큰 눈덩이들이 구르고 뭉쳐서 눈사태를 일으키는 것으로 말입니다. 즉 엔트로피(entropy, 높은 에너지, 높은 확률) 법칙으로 설명을 했습니다. 워크숍 주제를 체인 리액션으로 정한 이유는, 지금의 새에덴교회에 머물고 싶지 않고, 오늘의 새에덴교회라는 성 안에 갇히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저는 교역자들에게 강의를 통해 “어떻게 우리가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하반기에 거룩한 눈사태를 일으키고 거룩한 생명과 부흥의 연쇄 반응을 일으킬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조별로 발표를 하게 하였습니다. 토의와 발표는 첫날 밤부터 시작해 다음 날 밤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사실 부교역자도 힘들었겠지만, 전체를 총괄하고 지휘하는 담임목사 입장에서는 얼마나 힘이 들었겠습니까? 어떤 분들은 저녁에 워크숍이 끝나고 주전골 계곡을 걷기도 하고 온천 사우나를 하기도 했으며 스크린 야구도 했다고 들었습니다. 강원도에 가서 계곡 길을 걷고 온천도 즐기고 스크린 골프나 야구를 한다는 게 얼마나 낭만적입니까? 저도 이런 낭만을 즐기고 싶었습니다. 제가 누구보다 산을 좋아하고 계곡을 좋아하는 사람이기 때문이죠. 그래서 점심 먹고 한 15분 정도 걷고 오긴 했어요. 그런데 옆에 함께 걷던 선 목사님이 “저녁 워크숍이 끝나고 주전골 계곡 끝까지 걸어가 볼 수 없습니까?”라고 했지만, 저는 그럴 만한 여유가 없었습니다. 제가 늦게 잠들면 다음 날 워크숍을 인도할 능력이 떨어질 것 같아서 일찌감치 약을 먹고 잠을 청했습니다. 사실 아침 9시부터 저녁 9시 30분까지 앉아서 워크숍을 이끈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입니까? 그것도 체리(체인 리액션의 줄임말)를 중심으로 하는 것이니 말입니다. 그런데 잠을 청했지만, 이따금씩 꿈을 꾸고 또 잠에서 깨어날 때는 계속 ‘체리’ 생각만 나는 것입니다. 잠을 자도 ‘체리’, 꿈을 꿔도 ‘체리’ 생각만 났습니다. 그렇게 잠을 청했기 때문에 제가 마지막 통성기도 시간까지 잘 끝맺을 수 있었습니다. 마지막 끝나고 나서라도 주전골 계곡을 걷고 싶었지만, 춘천에 들러야 하는 일정 때문에 그마저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오색에서 춘천으로 가는 길, 또 춘천에서 교회로 오는 길에 마지막 수련회 7강과 8강 설교를 준비했습니다. 교회에 돌아와서도 ‘체리’라는 단어가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교역자 워크숍을 다시 한 번 하고 싶었습니다. 정말 주중에 하룻저녁이라도 다시 모여서 더 토의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저도 어린 시절부터 공부하기보다는 놀기를 좋아했고, 사춘기 시절에는 문학소년 내지는 낭만 가객을 꿈꾸기도 했습니다. 특별히 이번 워크숍 전후로 저는 이 ‘체리’가 주는 부담감과 설렘이 가득가득 밀려오는 것입니다. 마치 가슴 속에 밀물이 밀려오는 것처럼 '체리'의 물결이 파도처럼 밀려왔습니다. 어떨 때는 부담감으로, 어떨 때는 설렘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래서 얼마든지 강원도에 가서 낭만적 시간을 보낼 수도 있었는데 그럴 환경이 못 될 뿐만 아니라 제 스스로가 자제를 한 거죠. ‘체리’가 주는 부담감과 설렘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담임목사의 자리는 낭만보다 부담감이 더 크고, 현재의 즐거움보다 미래의 설렘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에도 ‘체리’라는 단어가 머릿속에 맴돌고 있습니다. 제가 오색을 떠나면서 다짐했던 것이 있습니다. “장년 여름수련회를 마치고 나서는 반드시 오색을 한 번 찾아오리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몇몇 사람과 그 기나긴 주전골 계곡을 걸어보겠다고 말입니다. 그 다짐이 지켜질지, 안 지켜질지는 모르지만, 저는 반드시 여름수련회를 마치고 주전골에 12폭포까지 걷고 오리라고 다짐해 봤습니다. 물론 ‘체리’가 주는 부담감과 설렘이 어느 정도 해결된 것을 전제로 하고 말입니다. 부디 후반기 사역에는 우리 새에덴교회에 ‘체리’의 바람, ‘체리’의 파도가 일어나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나 ‘체리’의 바람과 파도가 불어올수록 담임목사의 자리는 더 고독하고 짊어져야 할 십자가는 더 무거울지도 모르겠습니다.
    • 오피니언
    • 칼럼
    • 소강석 칼럼
    2024-07-26
  • [위드애] 사회적 약자들에게도 ‘마당’을 내어줄 의향이 있는가?
    2023년 6월, 시각장애를 가진 김예지 국회의원이 대정부 질문에서 했던 연설이 화두가 된 적이 있다. 그 연설문을 요약하면, 코이라고 불리는 물고기를 작은 어항 속에 넣어두면 크기가 10cm를 넘지 않지만 수족관에서는 30cm까지, 그리고 강물에서는 1m가 넘게 자란다. 즉, 우리 사회는 아직도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들의 기회와 가능성, 그리고 성장을 가로막는 어항과 수족관이 있으니, 이런 어항과 수족관을 깨고 국민이 기회의 균등 속에서 재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도록 정부가 더욱 적극적으로 강물이 돼주시기를 기대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른 바, 환경에 따라 성장의 크기가 달라진다는 ‘코이의 법칙’이다. 필자는 이 연설을 접하면서 ‘코이’라는 물고기가 다름 아닌 필자임을 느꼈다. 필자는 1980년 생으로 선천성 뇌성마비장애를 갖고 있으며, 전동휠체어를 이용하는 목사다. 그리고 40여 년 가까운 세월을 경기도 의정부에서 가족들과 함께 지내오다가, 2년 전에 부모와 가족을 떠나 부산으로 와 홀로 거주하고 있다. 내가 부산으로 간다고 했을 때, 부모님은 극구 반대하셨다. 부모로서는 당연한 반응이었다. 아무것도 정해진 것이 없었으니까. 그럼에도 부모님을 설득하여 부산으로 왔다. 필자에게 성경말씀(창12:1)을 언급하시면서 부산으로 오게 만든 두 분이 계신다. 그 두 분이 나누신 대화를 한 분이 SNS에 올리셔서 이곳에 옮겨본다. “얼마 전에 ○○○목사와 식사하며 교제하며, 무슨 얘기를 하다가 유한영 목사 얘길 했습니다. 그때에 제가 ‘고맙다’고 하니 ○목사님이 그랬지요. 자신은 한 일이 없다고... 그래서 제가 그랬지요. “마당을 내어주지 않았습니까?” 그것이 참 귀합니다. 놀 수 있고, 일할 수 있는 마당을 내어 주는 것... 그것을 ○목사님은 유한영 목사에게 내어주었습니다. 보십시오. 지금 유한영 목사는 그 마당에서 정말 즐겁게 놀면서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잘 해나가고 있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보기 좋은지 모릅니다.” 부산으로 온 지 2년, 내 모습은 내가 봐도 놀라울 정도로 바뀌었다. 거기에는 내 노력도 있었겠지만 그 보다는 나그네이고 이방인인 나를 세대로교회 성도들과 많은 사람들이 환대해 주었다. 그러면서 놀 수 있도록 마당을 내어주었다. 그 마당에서 나는 즐겁게 할 일을 찾게 되고, 교회를 넘어 활동하기 시작했다. 최근에는 ‘장애인식개선교육강사’ 양성과정에 최종합격했다. 사람들은 가끔 내게 묻는다. “목사님! 부산으로 오시기를 참 잘하셨죠?”라고. 이 말에 난 1초에 망설임도 없이 “네. 100% 잘한 것 같아요”라고 답한다. 40여 년 간 살았던 곳이 어항이었다면, 2년 째 살고 있는 부산은 수족관을 넘어 강물이다. 나는 그 강물 속에서 즐겁게 헤엄치며 무럭무럭 성장하고 있고, 이제는 강물을 넘어 바다로 나아가려고 준비 중이다. 세상은 장애인을 포함하여 사회적 약자들을 겉모습으로만 판단하고 그들에게 기회를 잘 주지 않는다. 필자도 두 분을 포함하여 환대해 준 많은 분들이 없었다면 부산에서의 삶이 힘들고 외로웠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가진 역량과 내가 무얼하고 싶은지도 몰랐을 것이다. 아마 다시 유턴했을 수도. 그러나 많은 분들이 장애를 가진 나를 겉모습으로만 판단하지 않았기에 적지 않은 나이임에도 새로운 터전에서 성장하고 있는 것이 아닐는지... 많은 교회들이 가진 자, 비장애인, 젊은이들뿐만 아니라, 사회적 약자들에게도 그들이 가진 역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마당을 내어주기를 소망해본다.
    • 오피니언
    • 칼럼
    • 위드애(with 愛)
    2024-07-26
  • [다음세대칼럼] 살고 싶어서 죽고 싶은 아이들, 그리고 교회
    이른 시간일 수 있는 아침 7시 전화가 울렸습니다. “어머니. 왜 그러세요? 무슨 일이예요?” 전화기 너머로 알 수 없는 비명에 가까운 소리가 아침의 고요함을 깨웠습니다. “큰 일 났어. 정은이가 죽었대. 조금 전에 아파트 화단에서 발견됐다고...” 저는 믿기기 않는 소식을 직접 확인이라도 해야 할 듯이 달려갔습니다. 5개월 전에 아파트 옥상에서 자살소동을 벌였던 정은이가 끝내 극단적인 선택을 했습니다. 지난 봄 이후 정은이는 둥지에서 기본적인 생활과 학교생활은 무난하게 해왔기에 안심하고 있었는데... 가끔 감정의 기복이나 컨디션의 난조로 보이기도 했고 갑작스런 복통을 호소하여 염려를 하기는 했지만 더 자해나 자살충동은 느끼지 않고 밝은 모습으로 지내왔기에 더욱 충격이었습니다. 퇴소를 열흘 앞두고. 집으로 돌아가서 잘 생활하겠다며 다짐했었는데..... 믿기 힘든 소식은 현장에 도착해서야 현실로 다가왔습니다. 전날 정은이는 집 근처 병원치료 후 다음날 등교를 위해 외박을 허락받아 집에서 있는데 밤 11시에 친구들을 만난다고 잠시 나간 후 소식이 없었습니다. 정은이의 엄마와 오빠가 동네를 다 돌아다녔지만 찾지 못했고 아침에 경찰로부터 전화를 받게 된 것입니다. 다급하게 현장에 가서 정은이 시신을 확인한 후 둥지로 연락을 했지만 충격으로 제대로 대화가 안되었던 것입니다. 경찰이 아파트 CCTV 등을 조사한 결과 정은이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순간적인 판단력이 흐려진 가운데 혼자 아파트 출입문에 들어가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으로 판정되었습니다. “센터장님! 정은이는 17년 동안 힘든 시간을 살았어요. 그래도 마지막을 둥지에서 지내면서 많이 웃고 밝아지고 좋은 경험하며 행복한 시간을 보내었어요. 찍은 사진도 제일 많구요. 정은이의 마지막 가는 길도 꼭 챙겨주세요” 정은이 어머니는 따따이에게 장례식을 부탁했고, 저는 둥지 아이들과 정은이의 장례를 맡아서 진행하게 되었다. 정은이를 기억하는 많은 친구들과 둥지의 가족들이 정은이의 마지막 길을 함께 해주었습니다. 당장이라도 “학교 다녀왔습니다”라며 정은이가 밝게 인사하면서 저쪽에서 들어올 것만 같은데 마음 아프게 그 곳은 정은이의 장례식장이었습니다. 충분히 슬퍼할 겨를도 없이 충격 속에 3일간 장례를 치르고 2019년 7월 7일 오전 7시 정은이의 시신을 화장하고 추모공원에 봉안하였습니다. 17년의 짧은 생애 동안 힘들고 어려운 시간 보내다가 둥지에서 상담과 치료를 받으며 처음 입소 때보다 안정적인 모습을 보여 왔었기에 아쉬움이 컸습니다. 아쉬움과 안타까움의 자살소식은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통계청이 올해 1월 잠정 집계한 자살 사망자는 1300명으로 지난해 같은 달보다 32.3% 급증했다고 합니다. 교회 안은 어떨까요. 매년 2600여명 전도의 기독교인들이 자살로 사망한다고 추정된다는 자료를 본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자살을 죄로 여겨 교회 안에서 자살 문제를 수면 위로 올리지 않고 이 때문에 예방과 대응이 미흡하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교회에서도 자살예방교육을 할 수 있도록 부산에서 작은 움직임이 생기고 있습니다. OECD 국가 42개국 가운데 우리나라 자살률이 압도적으로 1위라고 합니다. 더욱이 전국 8대 특광역시 중 부산이 1위로 가장 심각한 상황입니다. 특히 청소년자살문제는 계속 높아지는 위급한 상황입니다. 살아주어 고맙다고 말하고 싶은 어른들이 모여 함께 고민하는 시간을 마련했습니다. ‘살고 싶어서 죽고 싶은 아이들. 그리고 교회’ 이런 제목으로 생명존중세미나가 6월 19일 수요일 오후4시 동래제일교회(미남역)에서 열립니다. “저 내버려 두세요. 내 맘대로 할거예요”라는 반항은 “저 좀 관심가져주세요”라는 애교로 들을 수 있는 귀가 필요합니다. “정말 죽고 싶어요”라는 말이 “제발 살려주세요”라는 소리로 들을 수 있는 귀가 필요합니다. 오늘도 사느냐 죽느냐로 고민하는 청소년들에게 “괜찮니?”라고 물을 수 있는 어른들이 어느 때보다도 더 필요합니다.
    • 오피니언
    • 다음세대
    • 다음세대 칼럼
    2024-07-26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