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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사칼럼] 주여 우리에게 평화를 주소서
    이제 코로나사태는 진정국면에 들어섰지만 다른 측면으로 세상은 또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자이언트스텝(giant step)’이라 일컬어지는 미국 연준(Fed)의 금리인상조치가 있었고 ‘애그플레이션(agflation)’이라 불리는 물가상승현상이 세계를 강타하고 있는 중입니다. 부도사태에 직면한 국가들이 속출하고 있고, 곳곳에서 시위와 폭동과 내전과 전쟁의 위협이 감지되고 있습니다. 미국의 정치문화평론가인 데이비드 브룩스는 이러한 상황들을 다음과 같이 진단합니다. “지금은 아주 흔치 않은 시기입니다... 이 상황을 설명하려고 제가 고른 키워드는 불안정상태(precarity)입니다. 사람들은 이미 아주 불안정하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소득은 들쑥날쑥했고, 고용 상태는 불확실했으며, 이제 건강마저 위험에 처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대안 개념으로 “안전(security)”을 강조합니다. 하지만 어떤 “안전”인가가 중요합니다. 역사상 가장 안전해 보였던 시기는 로마제국의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로마제국의 안전은 뭐니 해도 강력한 군대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래서 ‘팍스 로마나(Pax Romana)’ 곧 ‘로마의 평화’라는 말이 탄생했는데, 이 평화를 지탱하는 힘은 다름 아닌 강력한 군대였습니다. 하지만 같은 로마 시대에 오신 예수께서는 전혀 다른 평화이자 보다 본질적이고 진정한 평화를 이 땅 가운데 구현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팍스 크리스티(Pax Christi)’ 곧 ‘그리스도의 평화’라는 개념입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로 모든 담과 장벽을 허무셨고, 정복이 아니라 정복당하심으로, 지배가 아니라 지배당하심으로, 승리가 아니라 패배 당하심으로, 땅에서 진정한 평화를 이루셨고 스스로 평화의 왕이 되셨습니다. “평안(평화)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요 14:27),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평화)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요 16:33). 1207년 아시스라는 곳에 살던 25세의 청년 프란치스코(1182-1226)는 어느 날 십자가 밑에서 신성한 음성을 듣습니다. “내 교회를 다시 지어라!” 그래서 맨손으로 흙과 돌을 나르며 교회를 보수(補修)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이 말씀은 몰락 위기에 처한 세상을 위해 역시 부패해버린 교회를 향한 혁신의 명령이었습니다. 뒤늦게 이를 깨달은 그는 ‘탁발수도회(mendicant Orders)’를 창설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표방한 바는 본질로 돌아가 ‘청빈, 겸손, 소박’의 삶을 몸소 실천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당시 본연의 사명을 저버렸던 교회가 심각하게 앓고 있던 병폐에 대한 가장 획기적인 처방이었습니다. 비록 ‘개혁’이란 말은 한 마디도 쓰지 않았지만, 그렇게 그는 무너져 가는 교회와 곪아가고 있던 세상에 신선한 충격파를 던지는 거룩한 개혁가가 되었습니다. 한번은 병을 앓고 있는 거지의 모습을 한 신비로운 존재의 방문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 만남을 통해 깨달은 바로 남긴 기도가 유명한 ‘평화의 기도’입니다. “주님, 저를 당신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신앙을, 그릇됨이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두움에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가져오는 자 되게 하소서.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고,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하여주소서.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써 용서받으며,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당시뿐만 아니라 이후 역사상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기도문을 의지했는지 모릅니다. 그렇게 그는 세력이나 군대가 아니라 평화를 통해 교회를 바꾸고 세상을 변화시켰습니다. 그 어느 때보다 평화가 절실한 시점입니다. 저 멀리서는 전쟁의 포성소리가 아직도 끊이지 않고 있고, 점차 그 전선이 확대되려 하고 있습니다. 사방에서 평화를 깨뜨리며 아우성치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그래서 더욱 그리스도의 평화가 절실합니다. “땅에서는 기뻐하신 사람들 가운데 평화로다”(눅 2:14)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주여, 이 땅에 당신의 평화를 이루어 주소서!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엡 2:14-15)라 하지 않았습니까? 주여, 우리의 마음에 당신의 평화가 가득하게 하소서, 우리 사이에 당신의 평화가 이루어지게 하소서, 그 일을 위해서라면 오 주여, 우리를 당신의 평화의 도구로 사용하여 주소서, 간절한 이 기도를 들어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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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6-24
  • [은혜의말씀] 애굽에 내린 재앙(5) - 우박 (출9:22~26)
    지금까지 하나님은 여섯 번이나 바로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도 바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고 불순종하고 있습니다. 일곱 번이나 같은 말씀을 전하여도 바로는 조금도 변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바로를 한 번에 끝내시지 않고 계속 기회를 주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답은 두 가지입니다. 먼저, 긍휼의 하나님을 알라는 것입니다.(14절) 하나님은 계속되는 재앙을 통해 바로가 하나님을 알고 두려워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악인에게 조차 오래 참으시고, 긍휼을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바로와 같은 자에게도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라면, 하물며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에게는 얼마나 더 큰 은혜를 베풀어 주시겠습니까? 우리에게 아무리 큰 시련과 시험이 온다 할지라도 반드시 피할 길을 주시고, 우리가 기도의 무릎으로 나아가면 반드시 구원의 손길을 펼쳐 주시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또 하나는 바로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를 보라는 것입니다. 바로의 이러한 교만과 불순종이 우리 믿는 자의 거울이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도 이런 성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고, 내 생각과 내 뜻대로 살고 싶은 욕구가 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의 부패한 본성을 깨닫고, 우리의 의와 우리의 노력이 아닌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오라 부르시는 것입니다. 일곱 번째 재앙의 독특한 점은 재앙을 면할 수 있는 길을 함께 주셨다는 것입니다.(19절) 그런데 여기서 두 종류의 사람으로 분리가 일어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한쪽은 하나님의 말씀을 두려워하는 자들이고, 다른 한쪽은 하나님의 말씀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들입니다.(20, 21절) 결과는 어떻게 되지요? 결국 결과는 자신의 선택에 대한 책임입니다. 여러분 분명히 기억하십시오. 우리를 살리는 것은 자신을 얼마만큼 잘 보호하고 있는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에 달려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를 보호하고 지켜주는 것은 우리 자신의 노력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께 붙어 있는 것이 우리를 살리는 길인 줄 믿습니다. 자, 드디어 모세가 하늘을 향해 손을 들자, 우박과 함께 천둥 번개가 애굽 온 땅을 어지럽게 합니다.(23, 24절) 하늘에서 불이 내려 땅을 달리는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이것은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입니다. 그런데 구약에만 이러한 우박의 심판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치 않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최후의 심판을 하십니다.(계 16장) 우리가 마지막 심판을 피할 수 있는 길은 무엇입니까? 바로 구별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영접하고 믿음으로, 마지막 심판에서 구원받는 것입니다.(25절) 우리 안에 구원의 이름, 예수 그리스도가 있으면 우리는 마지막 심판에서 구별되어, 영원한 지옥이 아니라 영원한 천국으로 옮겨지는 줄 믿습니다. 바로는 일시적으로 자신의 죄를 인정합니다.(27절) 그러나 이 고백은 진실된 회개가 아니라, 죽음의 위협에서 나온 일시적인 반응이요, 하나님을 속이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진정한 변화가 없는 삶은 회개가 아닙니다. 진정한 회개는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하는 것입니다. 불의한 삶에서 돌이켜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실천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삶의 변화를 기대하고 계십니다. 모든 성도님들은, 진정한 순종으로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삶을 사시길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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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6-24
  • [교회음악] 한국교회 예배음악의 갱신과 회복을 소망하며(2)
    오늘날 희미해져가는 예배와 찬양의 소중함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어쩌면 이러한 부분에 대한 지적을 무척 부담스러운 판단쯤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피할 수 없는 현실임을 인정하지 않으면 새로워질 방법은 찾기 힘들다. 기본적으로 인간의 한계는 종합적으로, 복합적으로 생각한다고는 하나 그렇지 못하고 편협하거나 단편적인 자기중심적 사고를 할 수밖에 없는 존재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것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향한 예배와 찬양에 관하여서는 끊임없는 고민과 변화를 해 나가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원하시는 예배와 찬양이 있다. 어떻게 하면 그러한 예배와 찬양을 드릴 수 있을까? 정확한 답은 성경에 있다.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다. 하나님께서 이 모든 의식행위 즉 예배와 찬양을 위하여, 이것을 제대로 바르게 행할 수 있도록 아예 한 지파를 통째로 그 일에만 전념토록 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했으면 한다. 하나님께서는 피조물들이 당신을 예배하고 찬양하는 것을 얼마나 귀하게 또 중하게 여기시고 좋아하셨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성경의 많은 부분에서 하나님을 향한 예배와 찬양(다양한)을 강조하고 이를 행할 것을 권고하시고 명령하셨는데 사실 이것 또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임을 조금이라도 이해해야 한다. 이것을 바르고 진실되게 행하였을 때 인간이 얻게 되는 것이 너무나도 크고 많다는 사실이다. 인간에게 주어진 마땅한 의무이자 책임인데 더할 수 없는 축복이 된다는 말이다. 따라서 예배만 잘 이뤄진다면 속된 표현일지 모르나 개인은 물론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만사형통이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다르게 표현하면 거룩한 백성으로 풍성함을 누리며 우아하게 이 땅위를 살아가게 된다는 말이다. 잠깐 시간을 되돌아보면 음악적으로 바로크시대, 고전시대를 지나면서 예배에도, 그 속에서 행해지는 음악 즉 찬양의 경향도 많은 변화와 함께 시대적 흐름을 따라 자연스럽게(?) 이어져왔다. 의식에서나 음악의 스타일이 많이 바뀌어졌음을 충분히 인지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낭만시대를 거치고 현대에 와서는 더 급격한 변화를 맞게 된다. 문제는 이 모든 일들로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고, 우리의 삶이 영적으로 윤택하여졌으며, 믿는 자의 수가 나날이 더하여지고, 세상은 주의 뜻대로 바르고, 정의롭고, 평안하여졌는가? 그 반대의 시간들이 흐르고 있음에 주목하고 긴장하는 것이다. 축약한 시대현상의 요약이지만 실로 수많은 일들이 교회공동체 내외로 일어났다. 긍정적인 일들도 있었지만 부정적이고 교회답지 못한 사건들도 실로 많았다. 지금으로서는 한마디로 교회의 선한 영향력을 거의 상실했을 정도가 아닌가 생각되어지는 상황이다. 종교개혁시대의 예배를 잠시 들여다보면 이들의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이 어떠했는지 단적으로 느낄 수 있는데, 혹이라도 하나님을 만홀히 여길까 고심한 흔적들을 볼 수 있다. 하나님과 영적 코드가 맞지 않는 것이 그럴듯한 탈을 하고 교회공동체로 들어와 전체를 오염시키는 일이 역사적으로 많이 있었다. 매우 중요한 문제로 심각성을 가지고 오늘날 반듯이 유념하고 경성하여 주의해야할 일이다. 영적으로 죽고 사는 문제가 아닌가? 지금 곰곰이 생각해 보면 보기에 따라 이해와 해석의 차이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으나 분명한 사실은 종교개혁자들이 영적으로 매우 지혜롭고, 맑았음은 능히 짐작할 수가 있다. 생각해 보라. 어떻게 그들이 죽음을 불사하고 그 어렵고 힘든 사명에 뛰어들 수 있었을까? 신실한 예배자들이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라 확신한다. 예배가운데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그분이 주시는 힘과 능력을 받았으니 무엇이 무섭고 두려웠겠는가? 오늘날 우리는 어떤가? 너무나 나약하고, 맥없고, 힘없는 크리스챤들은 혹 아닌가? 이 시대에도 변화와 개혁이 필요하다. 아니 지속되고, 계속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특별히 예배와 찬양의 갱신은 반듯이 있어야겠다. 그런 의미에서 예배형식의 변화를 포함한 예배 속 음악의 사용도 심도있게 고려되어야 하겠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어떤 변화가 가능할까? 어떻게 하면 모든 교인들이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집중할 수 있을까? 성령께서 주시는 지혜가 절실하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 베푸시기를 소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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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6-24
  • [분홍목사의 다음세대이야기] 가정을 교회로 만드는 가정예배(3)
    지난 호에 이어서 성민교회 가정예배의 순서를 계속 알아보겠습니다. 5) 말씀 나누기 – 이 시간은 가정 안에서 신앙의 권위를 갖는 부모님 중 한 사람이 맡도록 합니다. 담임목회자가 직접 그 주의 장년예배 설교내용을 요약해서 순서지에 싣고, 가족 중 엄마나 아빠가 순서지를 참고해서 자신이 직접 주일예배 시간에 정리한 설교내용을 중심으로 말씀을 전합니다. 이 때 말씀을 전하는 부모세대는 단순히 설교내용을 요약하기보다 자신이 이 말씀을 통해 받은 은혜를 나누고 말씀에 대한 결단과 다짐을 고백하게 합니다. 이를 통해 자녀들은 부모들이 예배시간에 하나님 말씀을 통해서 어떤 은혜를 받고 신앙이 성장해가는 지를 알 수 있고 이를 전승하게 됩니다. 이 시간을 위해서 말씀을 전하는 담당자는 주일 설교를 여러 번 반복해서 듣고 그 내용을 숙지하게 됩니다. 또한 부모세대는 주일에 받은 설교의 은혜를 더욱 선명하게 깨닫게 되고 다음세대는 부모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시간을 갖습니다. 또한 이 시간의 유익은 가족들이 세대를 초월해서 함께 공유하는 영적 지식을 얻을 수 있다는 점과 주일학교 예배만 참여하던 자녀들이 장년들이 드리는 주일 공예배와 연결점을 가지게 되어서 성년이 되면 자연스럽게 장년예배를 드리는 예배자로 참여하게 된다는 점입니다. 가족들이 영적인 끈으로 묶일 때 서로를 더욱 의미있게 생각하고 바라보게 됩니다. 6) 축복기도 – 매주 새로운 내용의 축복기도문을 실어줍니다. 어떤 주는 아버지가 자녀를 축복하기도 하고 어떤 주는 자녀들이 어머니를 축복하기도 합니다. 부부가 서로를 축복하거나 형제와 자매들이 서로를 축복하기도 합니다. 매달 첫 주는 새로운 한 달을 시작하면서 기대와 소망을 담아 한 목소리로 서로를 축복하며 다같이 기도하는 시간을 갖습니다. 이 때 가족들이 서로 손을 잡고 오른쪽이나 왼쪽으로 돌아가면서 옆 사람을 위해 기도해주는 것도 좋습니다. 부모만 자녀를 위해 축복하는 것이 아니라 자녀가 부모를 위해서 축복하는 기도시간도 서로에게 위로와 소망이 되고 큰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시간은 가족들이 우리 가정의 미래를 하나님의 손에 맡기는 것이 가장 큰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계획대로 모든 일이 진행되지는 않습니다. 때론 어려움이 찾아오고 우리의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고 해도 하나님께서 능히 이겨낼 힘과 용기를 주시도록 기도하는 가운데 우리 가정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게 되고 어려움을 이겨낼 믿음을 다시 한 번 다지게 됩니다. 7) 포옹과 덕담 – 함께 예배한 가족들을 바라보며 손을 내밀어 축복하고 서로 안아주면서 사랑을 고백하는 고백을 나눕니다. “4월이 가고 5월이 와요. 새로운 소망을 가져요!”, “가정의 달, 나의 최고의 기쁨은 당시의 웃음이에요!” 등의 덕담을 나눕니다. 이 시간을 통해서 가족들을 서로를 바라보며 한 번 더 웃음지는 시간을 갖고 서로의 관계를 화목하게 만들어 갑니다. 8) 주기도문 –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로 예배를 마칩니다. 때로는 아버지가 자녀의 머리나 어깨에 손을 올리고 축복기도를 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축복의 시간은 부모의 사랑과 관심이 하나님이 허락하신 가정의 울타리 안에서 자녀에게 온전히 향하고 있음을 자녀에게 전달해주는 시간이 됩니다. 현대의 가정들이 갖는 가장 큰 어려움은 부모와 자녀가 단절되어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녀에게 문제가 생기고 나서야 부모들은 급하게 문제를 해결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문제가 생기기 전에 평소에 부모의 사랑을 자녀에게 표현하는 것입니다. 가정예배는 이렇게 지속적으로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 쏟을 수 있고 마음을 표현하는 자리가 됩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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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분홍목사의 다음세대 이야기
    2022-06-24
  • [신앙교육나침반] 교회공동체와 가정공동체가 연합하는 오렌지 파워!
    교회의 소명은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의 빛을 비추는 것으로, 노란색과 연관 지을 수 있다. 가정은 뜨거운 관계 속에서 서로 사랑하여 하나 되는 소명을 지닌다는 점에서 빨간색과 연관 지을 수 있다. 각각의 색깔이 선명해서일까? 교회와 가정은 안타깝게도 하나의 영향력이 강조되면 다른 하나의 영향력이 축소되며, 대립관계를 보이는 경우가 많았다. 만약 이 둘이 하나가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노란색과 빨간색이 연합될 때 새로운 오렌지색이 창출되듯이, 교회와 가정의 연합은 상상하지 못한 새로운 영향력과 힘을 발휘하게 된다.코로나 펜데믹으로 인하여 다음세대들은 약 2년 동안 교회 공동체를 경험하지 못하였다. 아이들은 하루의 시간동안에도 놀라운 성장발달이 이루어진다. 아이들은 2년의 시간 동안 펜데믹 환경으로부터 매우 강력한 메시지를 흡수하였다. 그것은 바로, 공동체를 향한 거부감과 공포심이다. 현재 코로나 키즈들에게 공동체란, 전염되는 곳, 불안한 곳, 힘든 곳으로 각인되어 있다. 이 아이들을 그대로 두면 어떻게 될까? 하나님이 허락하신 가정공동체와 교회공동체를 건강하고 아름답게 세우는 일을 자연스럽게 기피하며 고립과 단절을 선택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이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그 어느 때보다, 교회와 가정의 연합을 통해 발현되는 강력한 영향력이다. 지금까지 교회는 다음세대의 영적성장을 위한 모든 책임과 주도권을 차지하면서, 부모들을 신앙교육에 무력하고 수동적인 존재로 만들었다. 교회가 부모에게 요구한 역할이라고는, 자녀를 교회에 잘 데려오면 되는 것이었다. 교회는 ‘어떻게 하면 아이들에게 하나님을 전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아이들을 교회로 오게 해서 이 프로그램을 활성화시킬 수 있을까’를 고민하며 그것을 위한 교육과정과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일에 열심이었다. 그러나 오렌지 사고를 한다면, 모든 방향은 완전히 달라져야 한다. 교회가 가정과 연합하여 다음세대에게 새로운 영향력을 발휘하기로 결정한다면 이렇게 고민하기 시작한다. ‘어떻게 하면 부모가 자녀에게 하나님을 전할 수 있게 할까?’, ‘가정에서 부모가 자녀에게 복음을 어떤 방법으로 전할 수 있게 할까?’, ‘이 신앙교육 프로그램이 가정에서 어떻게 하면 활성화될 수 있을까?’ 모세는 신명기 6장에서 가나안 정착생활에서 믿음의 자녀들을 타락한 세상으로부터 지킬 수 있는 것은 ‘부모’라고 분명히 기록하였다. 그리고 모세는 그 누구보다 부모가 자녀의 영적 리더가 되어야 한다고 강력하게 도전하고 명령하였다. 현대를 살아가는 수많은 기독 가정의 부모들은 자신들을 영적 리더로 세워줄 교회를 필요로 한다. 만일 교회가 없다면, 가정의 부모들은 영적 리더로 세워져야 할 사명을 느끼지 못한 채 무력하게 쓰러져 있을 것이며, 설령 일어선다 해도 다른 복음을 전할 위험에 빠지게 된다. 따라서 교회와 가정은 반드시 연합하여야 한다. 그것만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겨주신 다음세대를 지키고 보존하는 길이다.자녀들은 교회 공동체와 가정 공동체가 하나가 되어 만든 예배와 프로그램을 통하여 그 어디에서도 경험하지 못한 형통함을 누리게 될 것이다. 자녀들은 오렌지 빛을 발하는 예배와 프로그램을 경험하는 자리에서 비로소 교회공동체의 참 사랑과 위로를 겅험하게 되며, 자신이 이 교회공동체의 거룩한 성도라는 정체성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3년 만에 허락된 여름사역의 시간은 기적이다. 교회는 이제 가정과 함께 가야 한다. 부모들에게 신앙교육의 주도권을 회복하기 위한 프로그램을 마련하고, 가정과 교회가 하나 된 공동체 속에서 우리의 자녀들이 거룩한 공동체의 사랑과 위로를 경험하는 시간을 선물해야 한다. 그것만이 우리의 다음세대들을 지키고 보존하는 길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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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앙교육 나침반
    2022-06-24
  • [좌충우돌크리스천자녀양육기] 옥수수가 익어가는 계절, 우리는 밤마다 옥수수를 먹으며 책을 읽는다
    여름이 기다려지는 수많은 이유 중 하나는 옥수수 때문이다. 내가 유독 옥수수를 좋아해서 7-8월 우리집 냄비는 옥수수 찌는 일로 늘 바쁘다. 그래서 그런지 여름이면 아이들 손에 항상 옥수수를 쥐어줬다. 돌 지나서 이것 저것 어른 음식을 먹기 시작할 때부터 옥수수를 주며 야금 야금 씹어 먹게 만들었고, 야외 놀이터나 바닷가에 갈 때도 빠지지 않는 간식이 옥수수였다. 언제 어디서든 맛있게 먹을 수 있지만, 옥수수가 가장 맛있을 때는 바로 여름 늦은 밤 시원한 밤바람과 함께 책을 읽으며 아삭 아삭 씹을 때이다. 우리집 4명의 아이들 역시, 내가 옥수수를 삶아 식탁에 올려 두면 샤워를 하고 나와 읽을 책을 들고 식탁으로 모여든다. 한 손에는 옥수수, 한 손에는 책. 여름 밤 이 광경을 보고 있자면, 어른들이 말하는 “밥을 안 먹어도 배가 부르다”는 말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알 것 같다. 옥수수같이 쑥쑥 자라는 아이들이 건강한 음식을 맛있게 먹으며 상상의 나래를 펴는 책을 읽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그저 흐뭇하고, 그저 감사하며, 그저 행복하기만 하다. 옥수수가 맛있게 익어가는 계절이다. 놀이동산, 바닷가 등으로 열심히 놀러 다니다가 일주일에 두세 번 즈음은 밤에 옥수수를 먹으며 가족들과 함께 있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가족들과 함께 평안함을 느끼는 그 밤이 아이들의 정서가 안정되고 생각이 자라는 시간 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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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좌충우돌 크리스천 자녀 양육기
    2022-06-24
  • 성전건축 놓고 교회와 건설사와의 대립
    최근 몇몇 언론을 통해 부산시 동래구 소재 A 교회와 B 건설사간의 첨예한 대립이 세상에 알려졌다. 언론에 보도된 B 건설사의 주장을 살펴보면 A 교회의 장로 한명이 설계 및 감리를 맡아 208번의 설계변경과 17차례 도면 변경을 했고, 엎친데 덮친격으로 코로나19로 인한 경제대란과 러시아 전쟁으로 자재비 폭등, 레미콘 건설노조 파업 등이 교회 신축현장에 영향을 미쳤고, 건축자재비와 인건비 증가로 하청업체 부도와 적자가 이어졌다는 것. 결국 건설사는 22억원의 손해가 발생했다며 공사비 증액을 요구하고 공사를 중단한 상태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교회가 일방적으로 계약을 해지, 그 피해는 더 늘어나고 있다고 주장했다. 반면, 교회측은 “설계미숙이라면 어려운 건축심의와 건축허가를 통과 할 수 없다”며 “매주 하는 현장 주간 회의시에 지적, 건의되는 미세한 수정 부분을 즉각 신속하게 반영한 횟수가 많았다는 것이고, 이는 현장의 목소리를 그때 그때 바로 반영했다는 의미이지 무슨 설계도면을 상당부분 변경하는 것과 같은 설계변경이 그렇게 많이 이루어졌다는 것은 아니다”고 반박했다. 또 코로나 경제대란과 러시아전쟁 자재비 폭등 주장에 대해서도 “러시아 전쟁으로 인한 자재비 폭등이 국내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 것은 올해 3월 중순경부터인데, B 건설사는 3월 17일부터 이미 공사를 중단했으므로 러시아 전쟁으로 인한 자재비 폭등과는 전혀 무관하다”고 입장을 알려왔다. ‘교회측의 일방적 계약해지’ 주장에 대해서도 “B 건설사는 공사중단을 볼모로 자기들이 22억원의 손해가 발생했다면서 그 금액을 증액해주지 않으면 공사를 재개하지 않겠다고 버티며 2개월 이상 공사가 중단되는 바람에 교회로서는 피해를 줄이기 위해 부득이 계약해지를 할 수 밖에 없었다”고 알려왔다. 이런 가운데 B 건설사는 지난 8일부터 유치권 행사 절차에 돌입했다. 이 과정에서 A교회 성도들과 마찰도 일어나고 있는 상황. A 교회 담임목사는 “당초 3월 18일이 준공일인데, 현재로서는 금년 내 공사가 마무리 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 B 건설사 크레인 등이 공사현장에 남아 있어서 새로운 시공사를 선정해도 공사를 할 수 없는 상황”이라며 “교회입장에서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난처한 상황에 직면해 있다”고 입장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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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6-24
  • 교수평의회, 임시총회에서 ‘이사소환’ 요청 결의
    고신대 교수평의회가 지난 17일 임시총회를 열고 고려학원 이사소환 요청을 결의했다. 이날 일부 교수들이 ‘이사소환은 학교를 더 어렵게 할 수 있다’고 반대의견을 제기했지만, 투표결과 총 35명의 교수들 가운데 찬성 25표, 반대 10표로 총회에 이사소환을 요청키로 결정했다. 교수평의회 의장 이영수 교수는 “정식 공문으로 총회에 이사소환을 요청할 계획이다. 만약 우리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다음 차례로)교육부를 찾아갈 수 밖에 없다.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고 말했다. 한편, 이날 임시총회에서는 총장의 ‘대학발전 경영 계획’에 대한 교수들의 설문조사 결과 발표와 총장 취임식 당시 부적절한 인사 소개에 대한 ‘성명서 발표’ 등을 결의했다. 평의회측은 조만간 내용들을 공개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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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6-24
  • 나의 마지막 수업을 어떻게 마무리 할것인가?
    72년 전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날 때 내 나이 겨우 8살이었고 경남 고성에서 외가가 있는 통영 사량도 섬으로 피난을 떠났다. 초등학교 1학년생이 무엇을 알겠는가? 전쟁이 왜 일어났는가를 생각조차 못했던 어린 나이에 부모 따라 섬으로 피난 갔던 시절이 겨우 생각난다. 이제 80대 초반 무엇을 하고 살아야 하나? 나는 매일 새벽 4시 30분 잠자리에서 일어난다. 바로 묵상하면서 시편 23편 여호와는 나의 목자이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외우고 나서는 나름대로 하루 시작의 기도를 한다. 그리고 주기도문으로 자리에서 나가 5시 정각에 CBSTV로 한국교회 유명한 명설교가인 고 옥한흠 목사의 예수 제자 훈련을, 이동원 목사의 ‘천로역정’ 새벽영상 설교를 30분간 듣는다. 때로는 이웃 교회에 나가 새벽기도회에 참석하고 바로 가까운 헬스장에 가서 한시간 체력 단련을 한 후 조기 목욕을 빠짐없이 하고 집으로 돌아와 식사준비를 한다. 그런데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70대 초기에 우연히 부산디저털대학에 입학하여 졸업할 때까지 온라인으로 수업받고 노인복지사에 도전을 하여 노인복지사 2급 자격을 취득했다. 뜻밖에도 집사람이 척추로 인해 도저히 잘 걷지도 못하고 고생하는 바람에 노인복지 케어를 아내를 위해 하게 될 줄이야 생각도 못했는데 잘 케어할 수 있어 좋았다. 청소, 밥, 빨래, 찬거리는 옆에서 시키는대로 하여 완성하고 이것 저것 다 해 낸다. 다만 마트에 나가 찬거리를 위해 카트에 의지하여 조금씩 걸을 수 있는 운동을 하고 있다. 남자가 여성의 몫을 하고 있으니 아내의 심정을 이해하고 이때까지 남편을 위해 젊었을 때 얼마나 많은 헌신을 했는지 만분지 일이라도 보답하는 의미에서 묵묵히 가정 사역을 하고 있다. 이것이 하루를 보내는 내 일과이고 일정이다. 요즘은 회사에 한 두 번씩 나가고는 아들에게 편집, 취재를 맡겨 버렸다. 요즘 집에서는 손수 성경을 필사하고 있다. 노트 한 장 정도이니 진도는 나가지 않는다. 구약 예레미야 32장을 써내려 가고 있다. 성경 66권 중 가장 긴 장은 시편 119편이다. 67, 91절은 영혼과 삶이 담겨있는 구절이다. 몇 년 전 경기도 가평에 있는 침례교 이동원 목사가 설립해 놓은 “천로역정” 실물과 같은 코스를 답사한 적이 있다. 영국의 용접공 아들 ‘존 번연’이 기록한 천로역정의 테마는 그야말로 우리들의 삶의 긴 여정을 기록해 놓았다. 초등학교를 겨우 졸업한 존 번연은 실제 영국에는 매년 전쟁의 참상이 끝나지 않았다. 바로 실제 겪은 전쟁의 참상을 기록해 놓은 실화이다. 우리 인간이 이땅에 태어나서부터 겪어야 할 고난의 연속이자 그 고난으로부터 헤쳐나올 과정이 바로 시편 119편으로 잘 표현되고 기록되고 있다. 한편의 삶의 드라마가 천로역정에 묘사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난 당하는 것이 내게 유익이다고 하는 그는 고백에서부터 재판에서 12년의 선고로 11년간의 감옥생활로 복역하고 석방되어 나온다. 불안과 고통의 긴 터널을 지나면서 우리는 그 어느 분도 고난을 경험하게 되지 않으면 그는 바른 삶을 살았다 할 수 없다. 그 고난이 내게 유익을 가져다 준 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나서는 구원을 받은 우리들은 무한한 고난 뒤에 유익과 은혜에 감사하게 된다. 그 어느 세상에서 맛 볼 수 없는 평화가 유익이 된다는 것이 우리 삶 속에서 일생을 보내고 다시 주님 품으로 귀환한다. 고 이어령 전 문공부 장관은 70세에 변호사인 딸의 죽음을 보고는 예수를 믿어 그의 “마지막 수업”이란 책에서 인생은 파노라마가 아닌 한 컷의 프레임이 “엄마가 그만 놀고 들어 와 밥 먹어” 어릴 때 엄마가 밥이고 간에 생명으로 그만 놀고 죽음이 있는 생명으로 오라고 부르는 모태의 귀환하는, 어머니 품으로 5월에 핀 장미처럼 가장 아름답고 찬란한 대낮에 장미밭 한복판에 죽음이 있고 죽음의 자리는 낭떠러지가 아닌 고향 본향이 있다고 찬양한 그의 마지막 고백처럼 우리도 역시 마지막 수업을 듣고 있지 않는가? 어차피 인간은 고향 엄마품으로 가는데 무얼 그렇게 아웅다웅하고 살고 있는지. 결국 이어령씨처럼 마지막엔 하늘 나라 본향에서 엄마가 “애야 그만하고 오너라”고 하나님이 부르시면 갈 것인데, 왜 그토록 명예가 그렇게도 좋아서 딱 쥐고 내어 놓지 않을까? 부기총, 부교총에서 섬기는 교계 지도자들은 마음을 비우고 하나로 합칠 때를 기다리고 있다. 부산시나 일반 공무계에도 왜 기독교가 서로 반목하고 갈등하는지 진절머리가 난다고 한다. 부산 교회로부터 신뢰는 다 떨어졌는데도 갖고 내어 놓지 않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이어령 씨로부터 이 책을 기록한 기자는 매주 화요일마다 ‘삶 속의 죽음’ 혹은 ‘죽음 곁의 삶’이라는 커리클럼의 독특한 과외가 시작되고 ‘라스트 인터뷰’라는 형식으로 진행됐다. 가장 지성이 풍부한 이어령 씨의 마지막 수업의 결론으로 기자는 어떤 기도를 하십니까?라는 질문에 답하기를 “지금은 병을 고쳐 달라는 기도는 안해요. 역사적으로 부활의 기적은 오로지 예수 한분 뿐이니까. 나의 기도는 어느날 문득 눈 떠지지 않게 해주세요.” 종교가 있던 없던, 죽음의 과정에서 신의 선물을 알고 죽는 사람과 모르고 죽는 사람은 천지 차이”라고 하나님을 알고 구원을 받고 하늘 나라 천국에서 다시 만나는 기쁨을 넌지시 알려 주는 전도가 바로 그의 마지막 수업의 핵심이었다. 우리는 매일 마지막 수업은 없다고 생활하지만 70대가 넘어 가면 언젠가 마지막 수업을 받을 날이 올 것이다. 그것이 병원에서든, 요양원이든 집에서 눈 감을 때 처럼 “조용히 자는 잠에 가게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하는 수업을 받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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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6-24
  • [목회자칼럼] 감정과 행동 사이에는 ( 괄호 )가 있다
    신약과 구약 사이에는 신구약 중간사가 있고, 눈과 눈 사이에는 미간이 있다. 그렇다면 사건과 행동 사이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감정과 행동 사이에 무엇이 있는지 알기 위해서는 먼저 감정에 대해 이해할 필요가 있다. 회사를 마치고 막 집으로 돌아온 남편이 들어오자마자 아내에게 짜증을 내면서 투정을 부린다. 이런 상황일 경우, 아내의 행동은 크게 두 가지 정도로 나타난다. 하나는 “아니, 하루 종일 밖에서 잘 있다가 집에 오자마자 아무런 이유 없이 왜 짜증을 내요? 내가 집에서 얼마나 힘들었는지도 모르고... 내가 당신의 짜증을 받아주는 사람이에요?”라며 오히려 더 큰 소리로 화를 내는 경우이고, 또 다른 하나는 “회사에서 속상한 일이 있었는가보네요. 일단 내가 준비한 맛있는 저녁 먹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차근차근 이야기 해봐요”라며 남편의 마음을 읽고 감정을 풀어주는 경우이다. 전자의 경우, 아내가 더 큰 소리로 화를 내자 남편은 마음의 문과 함께 자신의 방문도 닫아버리며 화가 난 행동을 보였고, 후자의 경우, 감정이 풀어지자 다시 온화한 모습으로 아내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다시 일상의 저녁으로 돌아왔다. 이 예시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바로 감정을 받아주면 행동이 달라진다는 사실이다. 물질, 시간과 같은 환경이 달라져서가 아니라 단지 화나고 억울한 감정을 읽어주고 풀어주는 것만으로도 행동이 달라짐을 알 수 있다. 의미치료(logo therapy)의 주창자는 빅터 플랭크는 자신의 책 ‘죽음의 수용소’에서 자극과 반응 사이에는 공간이 있고, 그 공간에는 반응을 선택할 힘, 자유 의지 등의 선택이 있으며 우리가 성숙해 가는 과정에 행복이 결정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다시 처음에 던져진 명제 앞에 돌아가 생각해보자. 빅터 플랭크가 말한 것처럼 자극과 반응 사이에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수많은 것들이 있고, 결국 그 선택으로 인해 인간이 행복해 진다면, 감정과 행동 사이 역시 선택이 존재해 그 선택으로 우리 인생이 달라질 수 있다. 어린 자녀를 키우는 엄마가 온 종일 아이 기저귀를 갈아주고 분유를 먹이며 자신의 시간은 전혀 없이 아이를 위해 희생하며 “내가 왜 이런 고생을 사서 하지?” “앞으로 내 인생은 어떻게 될까?” “평생 이렇게 살아야 하나?” 등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복잡해 질 때, 즉 슬픔과 절망이라는 감정과 앞으로 살아야 할 행동 그 사이에는 자신이 택할 수 있는 선택 사항이 수없이 많이 있다. 슬프기 때문에 ‘더 슬퍼하고 더 괴로워 할’ 것을 택하면 행동 또한 나아지지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슬프고 절망적이기 때문에 오히려 ‘지금 이 상황을 이겨내기 위해 발전적인 무언가를 할 것’을 택하면 행동 또한 건설적인 방향으로 바뀔 것이다. 감정을 떼어낸 후, 현재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수많은 선택들을 생각한 후, 행동을 내린다면, 즉 감정과 행동 사이에 선택을 넣고 그 선택에 따라 행동이 결정되어진다면 해결의 실마리가 보일 것이다. 나는 젊은 시절, ‘청소년 교육과 치유’란 뜻을 세웠다. 그리고 어떤 상황 앞에 감정과 행동 사이에 갈등할 때마다 청소년의 뜻을 생각한다. 목회가 힘들어 쉬고 싶을 때에도 ‘청소년 교육과 치유’라는 선택을 생각하고, 앞을 향해 한창 달려가고 있을 때도 틈틈이 ‘청소년 교육과 치유’라는 선택을 돌이켜본다. 결국, 이 선택이 상황을 뛰어 넘어 내일을 바라볼 수 있게 만든 힘의 원동력이었다. 여러분들은 어떠한가? 감정과 행동 사이에 있는 이 괄호( )가 여러분들의 내일을 결정지을 수 있음을 알고 바른 선택의 분별력을 가지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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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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