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5-02-07(금)

오피니언
Home >  오피니언

실시간 오피니언 기사

  • [김영종 교수] 그리스도인과 행복
    ‘복생어무위(福生於無爲) 이환생어다욕(而患生於多慾)’이라는 말이 있다. ‘전한(前漢)’시대(BC 200-8)의 학자 ‘한영(韓嬰)’의 저술인 ‘한시외전(韓詩外傳)’에 나오는 표현으로 ‘복은 욕심을 내지 않는 것에서 생겨나고, 염려는 욕심이 많은 것에서 비롯된다’는 뜻이다. 사람이 마음먹기에 따라 행복할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욕심을 부리지 않으면 누구나 행복할 수 있다는 말로도 들린다. 정말 인간이 욕심을 내지 않고, 모든 것에 자족하는 마음을 가지면 행복할 수 있는 것일까? 현대인들은 대부분 행복하기를 갈망한다. 행복이 삶의 목표가 되기도 한다. 행복해지고 싶은 인간의 욕망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럼에도 자신이 행복하다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다. 유엔산하자문기구인 ‘지속가능발전해법네트워크’에서는 매년 140여 국가를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하고 그 결과를 기초로 행복지수를 산출하여 순위를 발표한다. 2024년에는 10점 만점에 7.741점을 받은 핀란드가 행복지수가 가장 높은 국가로 발표되었다. 우리나라는 6.058점으로 52위에 랭크되었다. 2021년에는 5.845점으로 62위, 2022년에는 5.935점으로 59위, 2023년에는 57위였다. 전체적으로 행복 지수가 나아지고 있지만, OECD 국가들 가운데서는 거의 최하위권에 해당한다. 이 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국민들은 그다지 행복하지 않은 셈이다. 사실 ‘행복’이란 매우 주관적인 감정으로 기준을 정하는 것이 쉽지 않다. 현대 심리학에서 행복은 기본적으로 ‘쾌락’을 의미한다. 이 ‘쾌락’은 개인의 만족감이나 긍정적인 감정에 초점을 맞춘다. 내가 만족스러우면 행복하다고 느끼게 된다. 이런 생각을 쉽게 확인하는 방법은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당신은 언제 행복한가?’라고 질문해 보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원하는 것을 이루었을 때’ 혹은 ‘기대하지 않았던 결과를 얻었을 때’라고 답할 가능성이 높다. 행복학을 연구하는 연세대 서은국 교수는 내가 즐거움을 느끼면 행복하다고 말한다. 행복의 기준이 개인이 되어야 함을 강조하는 입장이다. 그렇다면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고, 소유하면 정말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행복에 대해 근원적 질문을 던진 대표적인 철학자는 ‘아리스토텔레스’이다. 그는 이성을 통해 인간의 탁월함을 나타냄으로써 인간다움을 추구하고 최고의 상태에 이르는 것을 행복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인간의 삶의 목적이 행복이라고 말하면서 행복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라고 가르쳤다. 하지만, 나의 행복이 누군가의 희생과 고통 위에 만들어지는 것이라면 과연 우리는 이 행복을 올바른 삶의 목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런 점에서 현대 사회가 추구하는 행복을 성경적이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자신의 만족과 즐거움을 우선적으로 추구하기 때문이다. 성경에는 행복에 대한 언급보다 평화에 대한 가르침이 압도적이다. 성경은 나의 마음을 다스리고 욕심에서 벗어나 만족하는 삶을 추구하면 행복해질 수 있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성경은 개인의 행복보다는 함께 누리는 평화에 주목한다. 평화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에이레네’이고 히브리어는 ‘샬롬’이다. 신구약 성경은 ‘평화’에 대한 가르침으로 가득하다. 나아가 성경은 우리가 행복한 사람이 되기보다 ‘평화를 가져오는 사람(peacemaker)’이 되라고 가르친다. 우리 시대의 행복은 개인적이지만, 성경이 말하는 평화는 관계적이다. 그리스도인은 나의 행복이 최고의 가치인 시대를 살지만 자신만의 행복을 추구하기 보다 함께 평화를 누리는 삶을 소망하는 사람이다.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고, 그 평화를 사람들과 함께 누리는 것이 그리스도인을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이다.
    • 오피니언
    • 정론
    2024-11-08
  • [서임중칼럼] 그림자의 교훈
    청년기에 교회에서 연로하신 담임 전도사님과 장로님과 예배당 뜰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던 중 장로님이 말없이 내 몸을 옆으로 밀어내셨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끝내고 전도사님이 사택으로 들어가신 후 장로님이 제 손을 잡고 조용히 건네주시는 말씀을 하셨다. “서 선생, 주의 종의 그림자를 밟아서는 안 돼. 따라가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내가 전도사님의 그림자를 밟고 있는 것을 보신 장로님이 일깨워 주신 말씀이었다. 나는 그때의 일을 잊지 못한다. 그리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어른 공경에 대한 마음 자세를 잃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살아왔다. 그림자를 따르는 것은 좋지만 그림자를 밟아서는 안 되는 교훈은 목회 사역에서는 물론 내 실존의 의미와 삶에도 중요한 교훈이 되었다. 오래전 프랑스 작가 ‘아델베르트 폰 사미소’(Chamisso Adelbert von)의 ‘피터 술래밀의 놀라운 이야기’<Peter Schlemihls wundersame Geschichte>(최문규 옮김;그림자를 판 사나이)를 읽었다. 슐레밀은 가난한 청년으로서 하루는 어두컴컴한 부둣가를 거닐다가 이상한 사나이를 만난다. 그 사나이는 무슨 물건이든지 다 끄집어낼 수 있는 신비한 주머니를 슐레밀에게 내밀면서 슐레밀의 그림자와 바꾸자고 제안을 한 것이다. 가난하게 생활하던 슐레밀은 별생각도 없이 자신의 그림자를 그 신비한 주머니와 바꾸게 된다. 순간 그 사나이는 음흉한 미소를 띠고 그 주머니를 건네주고 슐레밀의 그림자를 아주 익숙한 솜씨로 돌돌 말아 자루에 넣고 사라져 버렸다. 그 사나이는 악마였다. 그림자를 주머니와 바꾼 슐레밀은 그 후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사람들의 의혹을 받게 되고 놀림을 당하고 곤욕을 치르게 되면서 점점 주위 사람들로부터 고립되어 자기 방에 들어앉아 혼자가 된다. 밤에는 사십 자루의 초를 방 전체에 켜놓고도 마음이 편치 않아 불안하고 초조함으로 밤을 지새우게 된다. 사랑하던 여인과도 그림자 사건이 알려지게 되면서 헤어지게 되고 실연의 쓰라림을 경험해야 했다. 주머니에서 필요한 모든 것을 다 끄집어낼지라도 이미 그 주머니는 삶의 아무런 의미를 주지 못하게 되었다. 슐레밀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다시 자신의 그림자를 되찾으려 하지만 악마는 음흉한 미소를 띠고 이번에는 그림자를 돌려주는 대신 슐레밀의 영혼을 요구한다. 슐레밀은 자신의 그림자와 바꾼 신비한 주머니를 던져버리고 광산으로 들어가 고된 일을 하면서 번민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을 친다. 그러다가 결국 말년에 세계를 돌아다니다가 친구 사밋소에게 이런 말을 남기고 죽는다. “친구, 사람들 틈에서 살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그림자를 사랑해야 하네.” 그림자란 직접 접촉할 수 없지만, 인간 본연의 소유물임을 교훈한다. 있을 때는 그다지 의미가 없는 것 같아도 그것이 없어지면, 그것을 하찮게 여기면 절실하게 필요해지는 것을 일깨운다. 그것은 국가, 가족일 수 있고 신앙이며 양심이며 명분일 수도 있다. 비록 그림자는 팔았지만 자신의 근본인 영혼은 팔지않고 자유로운 삶을 택했던 주인공을 통해 삶의 가치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게 된다. 오늘을 살아가는 많은 사람이 슐레밀처럼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림자 정도는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치부하고 당장 눈앞의 필요한 것을 얻기 위하여 그림자를 팔아버리는 경우들이 있다. 어쩌면 에서에게 있어서 장자라는 명분쯤은 지금 당장 아무 의미도 없어 보였고 그래서 눈앞의 팥죽 한 그릇이 더욱 소중했는지 모르지만, 그래서 야곱에게 장자의 명분을 팥죽 한 그릇과 바꾸어 버렸다. 눈앞의 팥죽보다는 명분과 가치를 존중했던 야곱은 장자의 명분을 소중히 여겨 팥죽 한 그릇을 기꺼이 에서에게 건네 줄 수 있었으며 그것은 야곱의 일생을 결정하는 축복의 계기가 되었다. 삼손이 ‘나실인’의 명분을 들릴라의 무릎보다 간과하였고, 발람이 모압왕이 제공하는 ‘물질적인 삯’을 예언자의 명분보다 귀히 여겼고, 고라의 권력욕이 역할의 명분을 패역으로 몰락시켰고, 가룟 유다는 지고한 예수 제자의 명분을 은 30과 바꾸었다. 그리고 이들에 대한 성경의 말씀은 준엄하다. “화 있을진저 이 사람들이여, 가인의 길에 행하였으며, 삯을 위하여 발람의 어그러진 길로 몰려갔으며, 고라의 패역을 따라 멸망을 받았도다.” 얼마나 소름 돋는 말씀인가. 그림자의 소중한 이치를 모르는 열매없는 가을 나무요 자기 수치의 거품을 뿜는 바다의 거친 물결 같은 삶을 그림처럼 그려내는 교훈이다. 여의도 1번지의 선량(選良)들의 모습을 보면서 그림자의 교훈을 생각한다. 국회의원이라는 존귀한 명분을 개인적인 소욕과 당리적인 이해타산에 팔아버리고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지고한 정치철학을 짓밟고 <나의, 나에 의한, 나를 위한> 국민의 이맛살을 찌푸리게 하는 것도 볼썽사나운 오늘의 모습이다. 어디 그뿐이랴. 은퇴 이후 한주도 쉼 없이 전국 방방곡곡 세계 여러 나라 초청을 받고 말씀 사역을 하는 동안 보이고 들리고 경험하는 일상에서 유다서에 기록된 경고메시지를 간과하고 명분보다는 실리(實利)에 낭패스러운 삶을 연주하는 지도자들의 행태는 주님의 아픔이기 전에 공동체의 슬픔이 되기도 한다. 교회에서 받은 직분은 세상의 그 어떤 직분과 비교할 수 없는 존귀한 사명이며 더할 나위 없는 명분이다. 그 명분을 개인적인 소욕에 더럽히고 그 명분을 이해타산에 팔아버리면서 주님의 교회를 카오스 현상으로 만들어 간다면 그것이 유다서에 경고한 주님의 말씀이 고스란히 나의 열매가 된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비록 그림자일지라도 주의 종의 그림자를 밟아서는 안 된다는 장로님의 가르침이 새삼 생각난다. 아프고 벅찬 삶의 여정에서도 ‘목사’라는 이름을 더럽히지 않으려 가히 몸부림하면서 눈앞의 이익보다는 명분을 생명처럼 여기면서 내 존재의 의미를 깨닫고 그를 실증하는 삶을 엮어내는 삶을 살아가면서 오늘도 그림자의 교훈을 묵상한다.
    • 오피니언
    • 칼럼
    • 서임중 칼럼
    2024-10-18
  • [성서연구] 그들이 모르는 것들
    가룟 유다는 은 삼십에 스승이신 예수님을 팔아넘겼습니다. 아마 그는 예수님께서 위기에 몰리시면 그 엄청난 능력으로 적들을 이기고 나오실 줄 기대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어린양처럼 모진 수욕과 고통을 참으셨고, 가야바 법정에서 있었던 산헤드린공회에서 사형에 해당하는 정죄를 받고 총독 빌라도에게 넘겨지셨습니다. 그 과정을 본 가룟 유다는 절망했습니다. 예상을 빗나갔기 때문입니다. 그는 은 삼십을 대제사장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주면서 자신이 무죄한 피를 범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자신들과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하면서 유다가 책임져야 한다고 했습니다. 유다는 그 은을 성도에 던져 넣고 목매어 죽었습니다. 이때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보인 반응이 문제입니다. 그들은 유다가 던진 은 삼십을 핏값이라 부정하게 생각하여 성전고에 두는 게 옳지 않다고 하면서 그것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묘지를 삼았습니다. 그런데 이 모습에서 그들이 모르는 게 있었습니다. 첫째 그들은 성전을 거룩하게 하는 분은 하나님이심을 몰랐습니다. 성전이 거룩한 것은 성전 건물이나, 드나드는 사람이나, 성전을 관리하는 제사장들이 거룩하거나, 드려지는 예물이 거룩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성전이 성전인 이유는 하나님께서 거룩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마치 깨끗한 예물만 성전고에 두기 때문에, 다시 말해 거룩한 자신들이 성전을 거룩하게 관리하기 때문에 거룩한 것처럼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둘째, 그들은 성전을 거룩하게 하기는커녕 그들이야말로 가장 악한 죄인임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을 찾아온 유다를 외면하면서 책임지라는 식으로 말했습니다. 물론 유다가 예수님을 판 것은 큰 죄입니다. 그러나 그 죄의 판을 깐 것은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죽일 생각을 하던 차에 유다가 어리석게 걸려든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피를 흘린 자들은 바로 그들이었습니다. 유다의 은 삼십을 핏값이라고 했지만, 정작 예수님의 피에 대한 책임은 그들에게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유다보다 더 악한 자는 그들이었지만, 그들은 자신들은 죄인이 아닌 것처럼 착각했습니다. 이 착각은 결국 그들을 멸망으로 인도했습니다. 셋째, 그들은 자신들도 나그네임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권력과 부를 거머쥐고 성전을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모든 백성이 그들 앞에 머리를 숙였습니다. 그들은 은 삼십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묘지를 만들었습니다. 이런 행동의 배후에는 자신들은 죄인도, 나그네도 아니라는 생각이 깔려 있습니다. 예루살렘을 찾아온 순례자들은 나그네이지만, 자신들은 예루살렘의 주인으로서, 언제까지라도 부귀영화를 누릴 것처럼 착각했습니다. 그러나 이건 무서운 착각입니다. 그들 역시 나그네입니다. 머지않아 하나님께서 부르시면 떠날 자들입니다. 그들은 단지 예루살렘에 머무는 나그네일 뿐입니다. 본문의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당시 유대 사회, 특히 예루살렘에서 기득권층이요, 권력자들이었습니다. 오늘로 비유한다면 기성 교회의 지도자들에 해당하는 면이 있습니다. 자칫 우리도 이들처럼 착각에 빠질 수 있습니다. 다른 이들은 죄인이지만, 자신은 죄인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이들은 나그네지만, 자신은 나그네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이는 추하지만, 자신들은 성전을 거룩하게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먼저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죄인입니다. 우리 역시 나그네입니다. 우리 역시 무수한 상처를 내고, 마음의 피를 흘리게 하면서 삽니다. 예수님 앞에 가장 먼저 회개해야 할 자는 우리 자신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이 모든 것을 자신에게서 찾을 때 시작됩니다. 자신이 죄인이요, 나그네요, 피 흘리는 자임을 알 때, 예수님의 복음이 능력으로 다가옵니다. 한국교회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처럼 굳어졌습니다. 상대를 향한 유다라고 비방합니다. 이제 우리를 돌아볼 때입니다. 주께서 우리를 새롭게 하시길 빕니다.
    • 오피니언
    • 칼럼
    • 성서연구
    2024-10-18
  • [시사칼럼]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의 의미, 봉준호와 비교하여
    지난 10월 10일 스웨덴 스톡홀름의 스웨덴 아카데미는 한국의 한강 작가를 2024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발표했습니다. 개인적으로도 비할 바 없는 영예겠지만 한국에서는 처음일 뿐만 아니라 아시아 여성으로서도 최초요 역대 두 번째 최연소 수상이라는 점 등 여러 가지 기록을 갈아치운 역사적 의미가 있는 사건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번 소설가 한강의 노벨상 수상은 2020년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이 아카데미상을 받았을 때와 아래와 같은 몇 가지 모습에서 무척 닮아 있습니다. 첫째,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보편적인 것이라는 진리를 재확인시켜주었다는 점에서 그러합니다. 봉준호 감독은 수상자로서 소감을 발표하는 자리에서 명장 마틴 스콜세지에게 경의를 표하며 그에게서 배웠다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습니다.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이다(The most personal is the most creative)’. 대단한 환호가 쏟아졌고 평단의 찬사가 이어졌지만 정작 스콜세지 감독은 그런 말을 직접적으로 한 적은 없다지요? 대신 로랑 티라르가 쓴 「거장의 노트를 훔치다」에는 “영화의 관점이 명확하고 개인적일수록 그 영화의 예술성이 높아진다고 생각한다”는 스콜세지의 말이 실렸다고는 합니다(조준형, 연합뉴스, 2020. 2. 11). 봉준호 감독의 아카데미 수상작은 한국의 작은 일상을 지극히 사실적으로 다루면서 한국 고유의 풍자와 해학을 가미했는데도 세계적인 지지를 이끌어냈습니다. 한강이 다루는 글들도 개인적인 경험을 토대로 한 작품이 많고, 더군다나 한국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일들을 소재로 하는 경우가 다수인데도 세계사적이고 보편적인 지지를 얻었다는 점에서 유사합니다. 개인적이지만 예술성이 높을 수 있고, 한국적이지만 보편적일 수 있다는 사실이 던지는 시사는 결코 평범하지 않습니다. 둘째, 자막과 번역의 한계를 유월(踰越)했다는 점에서 그러합니다. 역시 봉준호가 남긴 명언이 하나 있습니다. “1인치 자막이라는 장벽을 뛰어넘으면 여러분(미국인)은 훨씬 더 좋은 영화를 즐길 수 있다”(2020. 1. 5,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자국 영화를 선호하면서 외국 영화를 보려면 감수해야 하는 자막을 그는 “1인치 장벽”이라 불렀는데, 봉 감독이 이룩한 작지만 위대한 성취가 하나 있다면 바로 이 장벽의 일부를 허무는 데 일조했다는 업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강 작가의 노벨상 수상도 비슷한 측면이 있습니다. 그간 우리는 얼마나 번역 타령을 해댔습니까? 유독 탁월하다고 자부하는 우리 민족의 문학적 감수성에도 불구하고 노벨문학상 하나를 받지 못하는 이유의 상당 부분을 번역 문제로 치부해 오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이번 한강 작가의 수상으로 말미암아 이제는 더 이상 번역도 또 하나의 장벽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이 여실하게 증명되었습니다. 번역이 아니라 내용이 얼마나 독창적이면서도 보편성을 획득할 수 있느냐, 봉준호와 한강은 바로 이러한 면이 문학이나 영화뿐만 아니라 모든 분야에서 가장 중요하다는 일종의 도전(challenge)을 우리 모두에게 안겨주면서 각자의 반응(response)을 촉구하고 있기도 합니다. 셋째, 가부장제(paternalism)의 혁신적 파괴라는 점에서 그러합니다. 뉴욕타임스는 노벨문학상 발표가 난 지 하루만에 “한강의 노벨상 수상이 한국의 최고의 문화적 업적으로 널리 기념됐지만, 한강 작가와 다른 여성 작가들이 대표하는 것은 여전히 뿌리 깊게 가부장적이고 종종 여성 혐오적인 한국 문화에 대한 저항의 한 형태”라는 논평을 내놓았습니다. 여기서는 남성중심주의나 권위주의를 가리키지만, 가부장제라는 개념은 더 확장 적용이 가능합니다. 한강과 봉준호는 이전에 소위 ‘블랙리스트’에 나란히 이름이 올랐습니다. 2016년 당시 특검팀은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진상조사 및 제도개선 위원회 백서”를 통해 그런 사실이 있음을 공식적으로 확인해 준 바 있습니다. 문화나 예술을 마치 부모처럼 이래라 저래라 간섭할 수 있다는 생각 자체가 가부장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소설이나 영화는 단지 픽션일 뿐인데, 여전히 소재를 문제 삼고 방향성을 지적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시대착오적인 발상입니다. 그런데 돌아보면 우리 일상에도 그런 잔재들이 많습니다. ‘한 발자국 가까이’나 ‘휴지는 휴지통에’라는 문구들을 생각해 보세요. 전 국민이 모두 이런 지시를 하나하나 받아야 하는 어린아이가 아니지 않습니까? 노벨상위원회가 어째서 고은이나 황석영이 아니라 한강에게 상을 안겨주었는지를 우리 모두 다 같이 한 번 진지하게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 오피니언
    • 칼럼
    • 시사칼럼
    2024-10-18
  • [은혜의 말씀] 플랜B (창세기 25:23)
    우리가 어떤 계획을 세울 때는 A안이 있고, 그대로 안 될 경우를 대비한 대응책이나 또 다른 계획을 플랜B라고 한다. 잠언에 보면 사람이 마음으로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구원역사는 드라마틱하다. 하나님의 스카웃은 길거리 캐스팅이 많다. 주께서 사람을 부르실 때는 외모를 보시지 않고 중심을 보신다. 그래서 B급 인생도 가망이 있다. 결핍, 부족, 연약한 자들은 자기 스스로를 B급 인생이라고 자조적으로 생각하며 낙망하기 쉽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고아, 과부, 소자, 약한 자, 병든 자, 세리, 창기를 멸시치 않으신다. 성경에서 장자를 중요시 하지만 의외로 차자가 쓰임 받은 경우가 많다. 다윗은 여덟째요, 모세는 셋째요, 아벨은 둘째요, 야곱도 둘째다. 하나님의 뜻은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는 것이다. 장자인 에서는 익숙한 사냥꾼이고 털이 많은 상남자 스타일이다. 거기에 비해 야곱은 조용한 자요, 거의 계집아이 같은 분위기였다. 에서는 따놓은 장자권을 가볍게 여기다가 뺏겼지만 야곱은 일생을 통하여 장자권을 쟁취해 나아갔다. 엄마 뱃속에서부터 싸웠고(뼛속까지 장자), 형님 발을 붙잡고서라도 지기 싫어했고(이기는 습관), 팥죽 한 그릇을 가지고 장자권을 샀고, 얍복 강에서 씨름을 할 때는 포기하지 않고 질 수 없는 싸움을 했다(이긴 자). 그래서 이름도 바뀌고, 사기꾼이 사랑꾼이 되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오지랖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고 복잡한 집안 구조인 열두 아들이 열두 지파가 되어 야곱의 축복을 이루었다. 대중가요에서 싸이는 B급 감성이라고 하는 스타일을 가지고 ‘강남스타일’을 불렀고 세계를 놀라게 했다. 규격화된 딱딱한 모습이 아니라 먼저 망가져서 무겁지 않고 가볍고 재밌는 모습이 편하고 좋다. 세례 요한의 주제는 나는 망하고 예수는 흥하는 것이다. 주께서 길거리 캐스팅을 하실 때도 베들레헴 들판의 다윗, 바벨론 포로수용소의 다니엘, 미디안 광야의 모세, 애굽 감옥의 요셉, 갈릴리 바닷가의 베드로를 부르셨다. 모두 중심이 아니라 주변 언저리였다. 메이저가 아닌 마이너였다. 주류가 아닌 비주류다. 예루살렘 다운타운이 아니라 저주받은 사마리아에서 선한 사람이 나온다. 당시 최고 양반이라고 자처한 바리새인, 고관대작을 차지한 사두개인, 성경박사인 서기관들이 아니라 역사의 아웃사이더들, 외인부대, OB팀, B급 인생들을 들어 쓰셨다. 하나님께는 외모, 스펙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본질, 중심을 보신다. 달란트 비유에서도 적은 일에 충성된 자에게 많은 것을 맡기신다. 소박한 데서 대박이 터지고, 평범한 데서 비범함이 나온다. 병든 자식이 효도한다. 똑똑한 자식은 나라에서 데려가고, 돈 많은 자식은 장모가 데려가기 때문이다. 평신도들이 사역을 잘한다. 고물가 시대에 "못난이"상품, "B급"상품, "못생긴 농산물", "부끄러운 과일과 채소", "못난이 감자", "못난이 수산물"이 인기가 있다. 때깔이 좋은 과일은 농약을 치지 않고서는 나올 수가 없고, 색깔도 꾀죄죄하고 크기도 모양도 볼품없는 과일이 무농약에 진짜배기인 경우가 많다. 예수님은 고운 모양도 아름다운 풍채도 없으셨다. B는 Best의 약자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A급이 아니라, B급 인생이라도 들어 쓰신다. 그러니 우리에게도, 누구에게도 소망이 있다. 지치고 상한 채 무기력에 빠지지 말고, 주여 내가 여기 있사오니 나를 들어 써주시옵소서 하고 나아가자.
    • 오피니언
    • 칼럼
    • 은혜의 말씀
    2024-10-18
  • [신앙교육나침반] 3040세대를 지키기 위한 핵심 전략 '2025 HUG FAMILY!'
    대한민국은 지금 <트랜드>열풍입니다. 현재의 특별한 양상을 분석하고 아는것이 모두에게 참 필요하고 유용합니다. 한국교회 역시 현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을 한 영혼도 놓치지 않기 위해, 매 해 바뀌는 트랜드를 분석한 책과 세미나에 주목하며, 열심히 공부하는 중입니다. 특별히 최근 들어 한국교회는 3040세대와 그들의 가정에 관심을 기울입니다. 코로나 펜데믹 이후 가장 많이 잃어버린 세대가 바로 3040세대이며, 이들은 바로 다음세대의 부모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교회가 밀레니얼 세대라고 불리는 이들의 독특한 트랜드와 심리적 특성을 파악하고, 이들에 맞는 목회를 펼치고자 야심차게 <3040 사역 위원회>와 같은 사역부서를 신설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교회의 <3040 사역 위원회>는 무엇을 토대로 목회 전략을 세우십니까? “밀레니얼세대는 이래요, 통계수치가 이렇고, 이 책이 이렇다고 하고, 이들의 심리상태가 이래요, 그래서 우리 교회는 이래야해요!” 혹시 귀교회가 이와 같은 현재의 트랜드에 주목하며, 목회전략을 세우고 있습니까? 이러한 방식의 목회전략은 매우 허술하고 위험합니다. 한국교회는 다음세대 가정에 대한 트랜드에 주목하기 이전에, 수천년이 지나도 변함없는 본질을 우선 찾아야 합니다. 주님이 창조하시고 설계하신 본질을 모른채 트랜드만 쫒아가면 매우 위험해집니다. 100년도에도, 2024년도에도, 3000년에도 변하지않을 본질은 성경에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향기나무교육개발원은 지난 10월 12일 해운대제일교회에서 <2025 HUG FAMILY>세미나를 주최하였습니다. 본 세미나는 트랜드를 앞세워 강조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3040세대가정을 향한 수천년이 지나도 변함없는 성경적인 본질을 세워드렸습니다. 그러한 본질의 기반위에 트랜드는 참고로 알려드렸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한국교회 뿐아니라 세계 선교지 가정을 회심케하고 하나되게 한 복음놀이를 직접 온 몸으로 경험하였습니다. 세미나의 결론은 “HUG FAMILY!”입니다. 3040 다음세대 가정은 마음과 마음이 연결되는 순수한 사랑의 관계(Harmony), 온 세대 한 몸 교회 공동체(Unity)의 경험을 통한 강력한 소속감, 교회와 가정에서 온몸으로 경험하는 강력한 복음(Gospel)이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결과는 어땠을까요? 부산지역 세미나에 참여한 70여명의 목회자와 교사, 부모들이 모두 함께 울고 웃으며 은혜와 감동을 경험하였습니다. 10월 21일은 용인 향상교회에서 <2025 HUG FAMILY> 세미나가 열립니다. 이번 세미나를 통하여 <교회를 위한 교회>로만 달려가는 걸음이 <가정을 위한 교회>로 전환되기를 소망합니다. 교회가 교회의 성장과 부흥을 위해서만 달려가는 것이 아니라, 가정의 일상이 교회로 서도록 믿음의 부모를 일깨우고 훈련하며, 아프고 쓰러진 가정을 복음의 능력으로 일으켜세우는 <교회다운 교회>로 세워지길 기도합니다. 수많은 후기 가운데, 부산지역 세미나 스텝으로 참여한 분의 후기를 공유드립니다. 하나님이 선택한 최고의 미디어(하나님을 나타내는 하나님의 미디어)는 가정이다. 우리 가정은 어떠한가 돌아보게 하시고, 경건한 가정을 소망한 나의 발걸음이 헛되지 않았음에 감격 흐르는 눈물은 STAFF인줄도 잊게 하시네. ‘일상에서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게 해다오!’라는 주님의 당부! 마지막 SEED 볼트는 우리의 가정이다. 거룩한 씨가 보존되게 하라 하시는 하나님의 열심을 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이 말씀을 듣게 하시려고 날 보내셨네. “Home is Church!”
    • 오피니언
    • 다음세대
    • 신앙교육 나침반
    2024-10-18
  • [다음세대칼럼]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스위스의 사상가 카알 힐티(Carl Hilty)라는 분이 쓴 ‘행복론’이라는 책이 있다. 이 분이 쓴 책에서 행복의 첫 번째 조건으로 감사를 말한다. 감사를 잃어버리면, 아무리 좋은 환경 속에서도 행복할 수 없다는 것이다. 반대로 감사할 수 있다면, 아무리 나쁜 환경 속에서도 행복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지난 5월에 발표된 ‘2024 아동행복지수’ 결과를 보면 우리 아동·청소년의 행복지수가 총점 100점 만점에 45.3점으로 OECD 22개국 중 꼴찌를 기록한 바 있다. 이전보다 환경은 좋아졌고, 이전보다 국민소득이 높아지고 있으나 아동·청소년은 행복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바로 감사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조건과 상황은 행복할 것 같은데, 행복하지 못한 이유가 바로 감사하지 못하며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사람들과 다른 점들이 여럿 있다. 그 중에 하나가 감사를 잘한다는 것이다. 하루를 감사로 시작한다. 식사할 때도 먼저 감사 기도를 드리고 밥을 먹는다. 예배드릴 때마다 감사의 찬양을 부른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사람들보다 더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보다 더 풍성한 삶을 살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정말 이 세상에서 행복을 누리고 사는가? 감사의 삶을 통해 더 풍성한 삶을 사는가?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러면 무엇을 감사하며 살 것인가? 골로새서 2장 6절과 7절 말씀에 보면 그리스도인의 감사가 남달라야 한다고 말씀한다. 우선 감사의 내용이 달라야 한다는 것이다. 6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것을 감사하라는 말씀이다. 이 말씀은 사도 바울이 자신이 체험한 것을 기초로 말한 것이다. 원래 사도 바울은 유대교에 심취했던 사람이다. 유대교에 충성을 다하기 위해 기독교를 박해하는 일에 앞장섰던 사람이다. 그러던 중에 다메섹 도상에서 전격적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예수를 만나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며 살았다. 그래서 예수를 만나려 하지 않았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게 된 것이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찾아오신 것이다. 예수님을 만난 후에 세례를 받았고 예수의 사도가 되었다. 물론 바울이 원한 바도 아니고 그렇게 하고 싶다고 기도한 것도 아니다.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만나주신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자기가 예수를 믿게 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골로새서 2장에서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다고 말하는 것이다. 돌이켜 보면 이 모든 것이 은혜이고, 자신에게 이것보다 감사할 것이 없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비단 사도 바울뿐이 아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다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예수를 믿게 된 것은 우리가 원해서 그리고 우리가 노력해서 된 것이 아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래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다고 말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것을 감사해야 한다. 우리가 예수 믿게 된 것 이것보다 더 감사할 것이 없다. 우리가 함께 예배하는 것보다 더 감사할 것이 없다. 왜냐하면, 죄로 죽을 수밖에 없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세상 떠날 때 저 천국에 갈 수 있기 때문이다. 또, 7절 말씀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믿음의 뿌리를 내리며 믿음이 자라도록 이끌어 주심에 감사하라는 것이다. 마치 부모가 자녀를 나은 뒤에 잘 양육하여 성인이 되도록 뒷바라지를 한다. 그렇듯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예수 믿은 뒤에 믿음이 자라도록 우리를 이끌어 주신다. 그래서 성숙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살도록 이끌어 주신다. 이 또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감사해야 할 제목이다. 이제 한국교회가 전통적으로 지켜 왔던 추수감사절이 다가온다. 우리는 늘 감사의 제목을 상황과 환경에서 찾는다. 하지만 성숙한 믿음은 우리가 예수 믿게 된 것을 감사하는 삶이다. 어떠한 불이익 가운데서도 믿음의 고백과 감사가 있기를 바란다. 우리 다음 세대가 행복하려면 감사의 삶이 우선 되어야 한다. 이번 추수감사절에는 우리 다음 세대에게 감사함이 넘치게 되는 삶을 전수하게 되길 간절히 소망한다.
    • 오피니언
    • 다음세대
    • 다음세대 칼럼
    2024-10-18
  • [분홍목사의 다음세대이야기]다음세대를 교회전도지 표지모델로
    여러분의 교회는 전도하는 교회입니까? 요즈음 많은 교회가 전도에 목숨을 겁니다. 그만큼 오늘날은 복음을 들고 나가 전하지 않으면,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복음을 전해 듣기가 어려운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교회마다 전도특공대를 만들고 전도지를 만들어서 교회 주변 지역을 다니면서 전도를 열심히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생각보다 전도가 쉽지 않다는 데 있습니다. 전도지를 나눠줘도 거리의 행인들은 흘낏 한 번 보고는 던져 버리기 일쑤고, 제대로 읽어 보지도 않습니다. 휴지나 물티슈, 생수나 사탕 등을 끼워서 선물로 줘보지만 받지도 않는 사람들이 대부분이고 받아도 바로 곁에 두고 가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나마 받아가는 사람들도 별로 고마워하지 않는 모습입니다. 그런 모습을 바라보면 전도하는 사람도 기운이 빠져 버리기 쉽습니다. 과연 이런 전도가 효과가 있는 것인지 의구심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전도, 어떻게 달라져야 할까요? 저희 교회는 이런 고민 끝에 다른 교회에 없는 저희 교회만의 전도지를 만들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설교 한 편이 담긴 미니설교집입니다. 지난 달 저희 교회 주일예배 시간에 선포된 설교 가운데 한 편을 골라서 미니 설교집을 만듭니다. 보통 32페이지 정도가 됩니다. 살짝 볼륨감이 느껴지는 정도의 소책자가 됩니다. 이렇게 소책자로 만들어서 주면 받는 사람이 바로 버리는 일이 줄어듭니다. 과연 어떤 내용이 담겨 있는지 궁금증을 가지고 펼쳐서 읽어보게 됩니다. 특히 버스를 기다리면서, 누군가 약속한 일행을 기다리면서 이 미니 설교집을 읽고 계신 분들을 저희 교회 주변에서는 자주 마주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점은 전도지 표지 모델을 저희 교회 다음세대 아이들이 직접 한다는 것입니다. 그 달의 다음세대 부서 활동 사진 중에서 가장 표정이 좋은 우리 아이들의 모습을 골라서 표지로 담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가득 받아서 활짝 웃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다보면 저희도 모르게 웃음이 지어집니다. 저희는 이런 식으로 전도지를 한 달에 천 부씩 만듭니다. 한 달에 천 부를 찍어서 교회 인근 사하구 지역에 나눠줍니다. 그러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교회 인근 주민들의 인식이 달라집니다. 저희 교회 주변 모든 사하구 구민들의 머릿속에 성민교회 그러면 좋은 교회라는 인식이 생깁니다. 왜 좋은 교회일까요? 성민교회는 다음 세대가 많고 행복한 교회니까. 이게 자연스럽게 사람들의 뇌리에 박혀서 공식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여러분의 교회는 좋은 교회입니까? 아멘. 당연히 그럴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두 번째 질문을 드립니다. “왜 좋은 교회입니까?” 이렇게 물으면 조금은 생각을 해야 답하실 수 있을 겁니다. 이러면 안 됩니다. 우리 교회가 좋은 교회인 이유가 여러분의 머릿속에, 그리고 입술의 고백으로 분명해야 합니다. 저희 교회의 전도지가 지역주민들에게 성민교회가 좋은 교회인 이유는 다음 세대가 많고 행복한 교회이기 때문이다, 라는 인식을 심어주었기 때문에 생긴 현상이 있습니다. 교회 주변에 어느 가정이 이사를 왔는데 그 집에 자녀가 있다면 주변 이웃분들이 자기도 모르게 “성민교회 가시겠어요? 성민교회라고 좋은 교회가 있는데.” 라고 전도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전도한 분이 반드시 저희 교회 교인이셨을까요? 아닙니다. 제가 전도한 분을 물어보면 “저희 옆집 세탁소 아저씨요” 하십니다. “어? 그분 딴 교회 나가는데!” 이렇게 되는 거예요. 가서 물어보죠. “아니, 집사님! 집사님은 다른 교회 다니시는데 그 새로 이사 온 가정을 왜 우리 교회로 보내셨어요?” 그랬더니 그분이 아무렇지 않게 하는 말이 이랬습니다. “애가 있어서요. 애가 있으면 성민교회 가는 거 아닙니까?” 너무 자연스럽게 말씀하셔서 저도 놀랐습니다. 어떤 가정은 이웃 구멍가게 아저씨가 전도했어요. 그런데 그 집 사장님은 교회도 안 다니는 분이에요. 그래서 제가 찾아가서 물어봅니다. “사장님, 왜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그랬더니 그 분이 아무렇지 않게 “애가 있으니까요. 애가 있으면 성민교회 가는 거 아니에요?” 이렇게 답을 하셨습니다. 이게 완전히 공식이 된 겁니다. 그러니까 이 전도지, 다음세대가 표지모델이 되는 전도지가 왜 중요하냐면 이게 온 교회의 이미지가 되고, 주변 주민들의 마음과 생각을 움직이는 힘이 되기 때문입니다. 고작 한 달에 천 부에 불과하지만 이 천 부가 매달 지속적으로 뿌려지면 사람들의 인식이 달라지는 겁니다. 그래서 아이가 있는 가정은 저희 교회로 인도해 오고, 그 아이 때문에 행복하니까 부모가 더 행복하고, 그 부모가 또 전도하고, 또 전도하고, 또 전도하는 선순환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교회에서도 한번 시도해 보세요. 다음세대가 표지모델이 되는 전도지, 교회의 이미지를 바꿀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입니다.
    • 오피니언
    • 다음세대
    • 분홍목사의 다음세대 이야기
    2024-10-18
  • 10월 부마 민중 항쟁 사건이 오늘에 미친 영향은...
    지금으로부터 45년전 10월 부마항쟁이 있기까지의 비하인드 스토리는 여러 형태로 전개 되지만 실제 당시 눈과 귀로, 피부로 와닿았던 민주인사는 거의 하늘나라로 갔다. 금년 10월 16일은 (재)부마민주항쟁기념재단 제3대 이사장에 박상도 이사장(전 부산YNCA 이사장)이 새로 취임했다. 박 이사장이 필자에게 모처럼 연락이 왔다. 축하인사와 함께 박이사장 왈 “형님 지금 그때 당시 부산중부교회 관계했던 청년들과 재야 인사들 대부분이 하늘 나라에 가고 형님과 저만 이렇게 살아 있습니다”라고 말할 때 하나님께 생명과 호흡을 연장시켜 주신 만군의 주 여호와께 거듭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구나 부마민주항쟁 기념일은 국가가 10월 16일 행자부 주관으로 부산시청 광장에서 거행되고 있다. 10월 부마 민주항쟁은 어떻게 전개 되었나? 오늘날 대한민국에 민주주의 꽃을 피게 한 것은 부마민주항쟁이란 씨앗이 뿌려졌기에 싹이 나고 열매를 맺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45년전 1979년 10월 암울했던 군사독재와 유신정권을 종식시켰던 것이 부산과 마산 민주인사들의 피 맺힌 몸부림과 희생의 제물이 된 민주 인사들이었다. 관계했던 주요 인사들 대부분은 지금 하늘 나라에서 이 나라를 지켜 보고 있을 것이다. 부산중부교회(당시 기장교단 경남노회 소속) 담임했던 고 최성묵 목사와 심응섭 목사(부산중부교회 직전 담임), 고 임기윤 목사(기감, 제일감리교회 담임), 고 김광일 변호사(부산중앙교회 장로 당시), 고 이흥록 변호사(카톨릭 평신도), 송기인 신부 (남천성당 주임신부 당시), 고 김동수 장로(부산영락교회, 부산대학병원 교수 의사), 고 우창웅 장로(부산진교회 장로, 부산교육대 해직교수), 박상도 이사장(부산중부교회 집사, 부산YMCA 이사장 역임), 고 유기선 장로(당시 부산영락교회 장로, 유기선의원 원장), 김정광 목사(당시 부산YMCA 총무), 김형기 목사(당시 부산중부교회 집사. 부산Y 간사), 차선각 목사(KFCF 간사) 등 부산중부교회 청년 대학생 및 문부식, 김은숙(고인, 당시 부산중부교회 주일학교 교사, 고신대 교육학과, 신학과 학생, 미문화원 방화사건 관련 주동자), 김희욱 집사(양서협동조합 총무. 부산영락교회 집사). 잘 훈련된 부산중부교회 기독청년 대학생 고 김영일, 이태원, 조성삼 장로(당시 청년. 작고) 20~30여명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된 대학생 청년들이었다. 무엇보다 부산도시산업선교회 총무로 맨 앞에서 나섰던 박상도 이사장. 이를 뒤에서 물질과 변호로 법적 뒷받침을 해 주었던 김광일 변호사, 민주인사들을 결집시켰던 대부 고 최성묵 목사(부산YMCA 총무, 부산중부교회 담임)가 없었다면 물거품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부마 항쟁의 불씨는 보잘 것 없는 부산 중구 보수동 헌책방 골목 2층 벽돌 건물에 자리 잡고있던 부산 중부교회. 이 교회에서 매주 1~2차례씩 민주인사 석방 기도회로 부산 대학가 당국과 온 경찰서 정보과 형사, 정보부 부산 분실 관계자, 보안사 삼일공사 기관원들이 총 동원 하다싶이 매일 주시하고 관찰한 곳이 이곳 부산중부교회 요시찰지로 여겨왔다. 필자는 이곳에서 근 10여년 간 집사 평신도로서 주일학교 부장으로 지켜 보고 온 산 증인으로 남아 있었던 교계신문(교회연합신보) 기자로 활동했다. 김광일 변호사를 교회연합신보 신문지사장으로 모시고 있던 관계로 더욱 이들의 재야 활동을 일일이 주시하고 가슴에 담아 두고 기록하고 있었다. 언론 통제로 기사화 할 수도 없었던 시절이라 메모하는 수밖에 없었다. 보안사 담당팀장으로부터 부산중부교회를 나와 다른 교회로 가지 않으면 친동생이 육사(27기) 연대장 대령에서 장군 별자리는 달 수 없다는 협박과 회유로 할 수없이 지금의 부산 은성교회로 교회를 옮길 수밖에 없었다. 이를 뒷날에 ‘부산 예수. 한국교회 역사의 현장’이란 책에 수록하고 발간한 것 밖에 별 도리가 없었다. 이곳 부산중부교회야말로 수도권에서 일어난 재야 인사들의 탄압사건은 하루, 이틀 만에 모두 정보가 알려져 있을 만큼 부산 재야 인사들의 고향이자 민주화 성지였다. 중부교회는 부산 민권운동의 원동력이자 민권운동 소식을 접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 구실을 한 정보 산실이기도 했다. 동시에 부산 YMCA가 뒤에서 밀어 주고 함께 힘을 모아 준 것도 연합적인 공유로 지렛대 역할을 감당해 민주항쟁을 이루어 낸 합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이들 재야 기독인사들 대부분이 하늘나라로 가고 없지만 지금도 살아 활동하는 박상도 이사장이 부산민주항쟁기념재단 이사장(3년간, 직무)을 할 수 있는 것이 모두 다 과거 몸으로 헌신 한 결과이고 열매라 할 수 있다. 오늘날 민주화를 이루게 했던 부산 민주항쟁은 영원토록 자유대한민국에 길이 남을 자랑스런 역사의 대명사로 자리 잡아 갈 것이다. 당시 대한민국의 정치적 인물(김대중, 김영삼 장로)들은 부산중부교회와 깊은 연관성을 갖고 있었다. 김대중씨가 진주교도소에 수감되어 있을 때도 이를 면회하러 간 인사도 중부교회 청년들이고 김영삼 장로가 재야 운동의 근원지 부산중부교회 배후에서 기도회를 열어 주고 영적 힘을 실어 주어, 국회의원 출마했던 부산 서구, 중구 지역 민중들이 지원하고 밀어준 혜택을 가장 많이 본 인물이 김영삼 장로이다. 서구 대신동교회(여동생, 동서 출석), 남부민중앙교회(손상률 목사 담임)도 2003년 10월 21일 부산롯데호텔에서 김영삼 장로 초청 부산 기독교계 지도자 간담회를 열어 준 것도 부산 교계 지도자들이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부산 교계 숨은 역할과 결집도 가능했다고 볼 수 있다. 45년이 지난 오늘날 부마 민중항쟁의 일지는 지금도 여전히 진행한다는 것이 역사적 영향권을 행사하며 살아 숨 쉬고 있는 산 표징이기도 하다
    • 오피니언
    • 기자수첩
    • 역사현장
    2024-10-18
  • [목회자칼럼] 인공 지능 시대에 목회를
    MZ세대를 지나 알파 세대(Alpha generation) 시대가 온다. (아이패드가 출시된) 2010년 이후 출생된 젊은이들을 알파세대라 부른다. 유치원을 가기 전부터 리모컨과 핸드폰, 키즈 유튜브를 입맛대로 골라보는 아이들, 어린이 맞춤형 키즈 카페에서 노는 아이들, 디지털 기기를 자기 몸처럼 자연스럽게 다루는 아이들에게 문자, 글자보다 영상이 훨씬 익숙하고 자연스럽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프랑스의 미술 평론가 모리스 드니는 세 개의 사과가 있다고 말한다. 첫째 이브의 사과, 둘째 뉴턴의 사과, 셋째로는 폴 세잔의 사과를 말하는데 여기에 스티브 잡스가 아이패드를 출시한 후 애플의 한 입 베어 물고 난 후의 사과 모양 로고가 네번째 사과라고 평가했다. 알파세대를 이해하기 위해 우선 자녀, 부모, 교시를 이야기한 후 목회자를 이야기 하고자 한다. 첫째 알파세대의 자녀는 1. 메타버스의 증강현실이 실체화 된다. 상상속의 세상과 현장이 하나가 되는 것이다. Zoom(줌) 교실 속에서 선생님과 친구들과 함께 이야기도 나누고 수업도 같이 한다. 원격 수업이 끝나고 나면 집에서 엄마가 주는 밥을 먹고 게임을 하며 친구와 논다. 2. 디지털 기계가 너무 익숙한 아이들이 게임을 즐기며 온라인과 오프라인 세상을 왔다 갔다 한다. 3차원 가상세계, 즉 증강현실, 가상세계, 거울세계, 라이프로깅, 4가지 개념으로 이해된다. 3. 아이들은 가상세계, 현실세계의 구분 없이 살아간다. 실제의 삶에서 누리는 자유를 갖고 있다. 전 세계를 아주 간단하게 연결하고 누린다. 4. 나와 타인이 함께 공존하며 관계없이 단편적 캐릭터로 여기면서 경험한다. 5. 그러므로 인간관계를 맺기 힘들어하며 기다림과 인내와 윤리적인 것들을 힘들어한다. 6. 장점은 창조성과 놀이를 같이 갖고 있어(예술성) 미래를 지배하는 것도 있지만 단점으로는 인간관계의 정을 이해하기 힘들다. 둘째 부모 입장에서는 1. 1980~2000년 교육을 받은 기성부모세대는 경험해보지 않은 자녀를 볼 때 이해하기 힘들다. 경험해 보고 싶은 욕구도 있지만 두렵기도 하다. 2. 노력하면 된다는 노력결과중독사회에서 성장했기에 성공하지 않으면 못 살아간다는 강박을 갖고 살아간다. 자녀에게 강요하다 보면 더 심한 충돌과 회의감을 느낄 것이다. 3. 성공과 결과에 대한 실패와 책임감 모두를 제도적 관점에서 살피지 않고 개인에게만 돌리는 사회와 마주칠 것이다. 4. “알랭 드 보통”이 말하기를, 성공에 대한 주관적 잣대를 갖게 될 때 우리를 병들게 하는 성장주의, 결과주의에서 벗어나 만족의 새 길을 찾을 수 있다. 셋째 교사 입장에서 1. 디지털 시대의 세상에서 단점과 문제도 있지만 장점인 미래에 대한 무한한 가능성도 이야기 해야 한다. 2. 이제 지식의 교육에서 벗어나 참 지혜의 교육을 찾아갈 때가 되었다. 입시위주의 교육에서 벗어나 정서를 이해하는 교육으로 변화해야한다. 3. 이성적이고 냉철한 합리적 사고에서 상황과 감정과 정서를 같이 가는 성숙한 교육관을 다시 찾을 때가 되었다. 이제 사회도 논리성과 함께 그 맥락을 읽는 직관성의 지혜도 같이 성숙할 때다. 넷째 목회자로서 1. 과연 우리는 자녀, 부모, 교사 모두를 이해하고 품을 그릇과 이해력이 준비되어있는가? 38년 동안 청소년 사역을 한 나 자신도 요즘 이해하기 힘들다. 2. 선택하여 책임지는 것에 자신 스스로 심리적으로 많은 부담감을 갖고 있는 이 때에 그들의 고독과 외로움, 갈등을 안고 설교와 목회를 해야 한다. 3. 우리의 인생은 누군가의 계획대로 되어가지 않는다. 어떻게 미래를 전망하든 가족의 소중함과 권위의 역할을 계속 가르쳐야 한다. 오늘보다 좀 더 나은 내일의 대한민국 사회를 기대하며 한국 교회의 미래를 알파세대에 기대해본다.
    • 오피니언
    • 칼럼
    • 목회자칼럼
    2024-10-18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