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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성철 목사] 특별하고 유능한 비서
    지난달에 독일을 다녀왔다. 자녀들이 출석하는 독일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면서 내가 사는 시대가 얼마나 편리한 시대인지 다시한번 체감했다. 독일어는 고등학교 때 제2외국어로 잠깐 배운게 전부인 내가 통역 없이 설교자의 메시지를 60~70%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번역기 앱을 켜고 독일어를 한글로 번역해 달라고 설정하고 음성을 선택하고 나니 스피커를 통해 나오는 독일어를 한글 텍스트로 바로 번역해 주었다. 여행 중에도 언어로 인한 불편함이 많이 줄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식당 메뉴판이 어느 나라 말이든 상관없이 카메라로 찍어 번역을 요청하면 그 음식이 어떤 종류인지 금방 알 수 있었다. 종 종 재미난 번역도 있긴 했지만 음식메뉴를 이해하는데 아무런 불편이 없었다. 한글 지원이 안 되는 박물관이나 관광지 표지판 등 이 기능 하나로 그 내용을 이해할 수 있었다. 마치 내가 모든 언어가 능통한 비서를 한 명 대동하고 다니는 듯 했다. 최근 우리가 가장 많이 듣는 단어 중 하나가 인공지능이라 불리는 AI이다. Open AI.사가 대화 전문 인공지능 챗봇인 ChatGPT를 발표한 이후에 세계는 AI전쟁에 돌입했다. 요즘 나오는 대부분의 물건에는 AI라는 말을 붙여서 나올 정도이다. 필자는 AI 특히 ChatGPT를 아주 다양한 분야에서 활용하고 있다. 내가 가진 한계를 넘어 내가 필요한 부분에 언제든지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유능한 비서를 월 20$에 고용하여 함께 일하고 있다. AI 비서는 나에게 여러 가지로 도움을 준다. 첫 번째는 성경구절 인용을 풍성하게 해 준다. 인터넷이 나오기 전 목회자들은 수권에 이르는 성구사전을 두고 내가 필요한 구절을 찾았다. 인터넷 검색기능이 활성화 되면서 이제는 데이터베이스로 구축된 앱을 통해 내가 필요로 하는 구절을 검색하여 사용한다. 하지만 앱을 통한 검색의 기본은 정확하게 그 단어를 알아야 한다. 단어가 정확하지 않으면 내가 어렴풋이 아는 구절을 인용할 수 없다. 하지만 내 AI비서는 단어를 몰라도 그 구절 속에 이런 어떤 어떤 의미를 가진 구절을 구절을 찾아달라고 요구하면 금방 여러 개의 구절을 내 앞에 뿌려준다. 두 번째는 내가 필요한 그림을 그려준다. 이전에는 성경공부나 설교를 준비하다가 내가 원하는 그림이 있는데 인터넷 검색을 통해서 마음에 드는 그림을 찾지 못하면 더 이상 방법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AI비서에게 그림을 그려 달라고 요구한다. 처음에는 그려준 그림에서 이 부분만 빼고 싶어서 다시 시키면 기존의 그림은 온데 간데 없고 또 새로운 그림을 그려 주었다. 그런데 요즘은 유능해져서 그려준 그림에서 일부분만 수정하는 기능까지 구현해 준다. 심지어 요즘은 한국사람으로 표현해 달라고 하는 요구까지 받아서 처리해 준다. 세 번째 원어에 대한 도움도 준다. 설교 준비를 하다 보면 한글로 번역된 단어에 대하여 같은 원어로 사용된 것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성경에서 지금 내가 보는 이 단어와 같은 의미로 사용된 것을 찾는 일은 쉽지 않은 작업이다. 그런데 AI 비서는 그리 어렵지 않게 찾아준다. 특정 성경구절을 원어로 표시하고 각 단어의 의미를 설명해 봐라고 하면 몇 초안에 그 답을 제공한다. 진짜 똑똑한 비서이다. AI비서에게 다양한 분야에서 많은 도움을 받고 있다. 특히 나의 전문사역인 컴퓨터선교 사역을 위해 필요한 웹사이트와 프로그램까지도 이 비서는 도와준다. 1989년부터 컴퓨터 선교 사역을 하면서 느낀 것은 기독교계는 새로운 문화가 나오면 부정적인 접근에 익숙하다는 것이다. 분명 AI도 양날의 칼처럼 음양이 존재한다. 그 부분들은 사용하는 사람이 잘 분별하고 사용하면 된다. 몇 개월이라도 AI비서를 고용하여 다양한 분야에서 활용해 보라고 권한다. 분명 내가 부족한 많은 영역에서 도움을 줄 것이라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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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4-06-14
  • [서임중칼럼] 인연(因緣)을 생각한다
    누구에게나 잊을 수 없는 인연(因緣)이 있다. 그것이 선연(善緣)이든 악연(惡緣)이든 다를 바 없다. 지혜로운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악연은 빨리 잊고 선연은 곱씹으면서 살아간다. 나에게도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는 선연(善緣)이 있다. 그것이 나의 오늘을 있게 한 토양(土壤)이었다. 그래서 인연을 들숨과 날숨으로 내 삶을 호흡하면서 여기까지 왔다. 그 어느 관계도 하나님의 섭리 울타리를 벗어난 것이 없기에 인연은 내 삶의 들숨과 날숨이 되어 오늘을 살게 한다. 사계절처럼 오고 가는 인연을 굳이 악연을 붙잡고 헐떡거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선연을 붙잡고 일출과 일몰의 아름다움처럼 삶을 다듬어 가는 사람도 있다. 5월이 되면 더욱 인연(因緣)을 생각한다. 일상이 그래야 하지만 그래도 5월은 더욱 부모님이 생각나고 스승과의 인연이 생각나고 친구와의 인연이 생각난다. 초근목피(草根木皮)의 삶에서도 자식을 위한 부모의 본능적인 양육은 평생 곱씹어도 모자랄 사랑이다. 오늘의 내 자리매김을 생각할수록 스승의 가르침은 내 삶의 영양소다. 팍팍한 삶을 살아가면서도 미소를 짓게 해 주는 친구는 삶의 활력소다. 마흔이 넘어 목사로 임직받은 후 어느 날 집에 오신 엄마에게 “엄마 젖 먹고 싶다.” 할 때 “야야 징그럽다.” 하시면서도 마흔이 된 자식에게 젖을 물리시고 내 머리를 어루만지면서 “목사 한다고 얼마나 고생 많겠나” 하시면서 눈물짓는 어머니를 바라보면서 “이 젖 때문에 5남매가 이 세상에 살고 있지”하면서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릴 때 말없이 내 머리를 어루만지셨던 어머니였다. 그 엄마 마음으로 나는 평생 교인들에게 젖먹이는 모심목회(母心牧會)를 했다. 우리 부부를 약혼주례 결혼주례 하신 고 김기수 목사님은 내 목회의 토양(土壤)이었다. 목사님이 소천하시는 그 해까지 35년 동안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우리 부부는 결혼기념일에 분수에 맞게 최선을 다하여 감사한 마음으로 선물을 준비하여 목사님을 찾아 축복기도를 받는 것이 결혼기념일 행사였다. 그리고 오늘도 나는 스승의 가르침을 흐트러트리지 않고 목회의 정도(正道)로 정행(正行)을 했다. 얼마 전, 정장복 총장님의 부음(訃音)을 받았을 때 믿기지 않았다. 지난해도 어김없이 내외분을 모시고 식사하시면서 “나 죽기 전 고향교회 부흥회 한 번 인도하라.”고 말씀하시고 올 4월에 일정을 약속하고 함께 고향교회를 방문하리라 기뻐하시면서 친히 점심을 사 주셨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어르신이 마지막 부탁하신 부흥사경회를 인도했다. 기차를 타고 1시간 넘게 광주로 가서, 광주에서 마중 나온 목사님 차를 타고 2시간 완도로 가서, 완도에서 다시 1시간 배를 타고 청산도에 도착하여 3일 동안 자비량 집회를 인도했다. 평생 신언전달자(神言傳達者)를 가르치신 스승님에게 “설교는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주는 것이 저의 설교의 정의입니다. 그렇게 해도 괜찮겠습니까?”라고 교훈을 받고자 진언(眞言)할 때 기뻐하시면서 “청출어람 청어람이로다” 하시면서 “그래도 설교는 <신언전달(神言傳達)>이다”라고 파안대소하셨다. 그 가르침 때문에 강단에 설 때마다 그 말씀을 되새김질했다. 이제 총장님은 천국 가시고 그 가르침이 내 목양의 토양(土壤)이 된다. 일본에 하시모토 다카오 장로님이 계신다. 나에게는 더 없는 친구다. 부인 요시애 다카오 장로님의 지극한 내조로 장로임직을 받고 선한일에 부하고 교회를 세우는 야긴과 보아스처럼 성직을 수행하시는 분이다. 친구의 인연을 맺어온 지 20여 년이 되었다. 나의 삶은 섬김과 나눔과 베풂으로 2등 하기 싫은 마음가짐으로 평생 살아왔는데 하시모토 장로님 내외분에게는 이기지 못하고 언제나 2등의 삶으로 오늘도 우정(友情)을 맺고 살아간다. 아름다운 인연은 가시적인 것이 아니라 불가시적인 마음이 근원이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보이지 않지만 어쩔 수 없이 보여지는 것이 사랑이다. 그것이 때로는 언어로 때로는 삶으로 때로는 물질로 가시화된다. 그래서 얼굴은 마음의 거울이고 말은 생각의 표현이다. 사랑은 묻어둘 수 없고 묻히는 것 또한 아니다. 어쩔 수 없이 섬김과 나눔과 베풂으로 연주되는 것이다. 그것이 사랑이다. 이제 고희의 마지막 날들을 계수하면서 다시금 인연(因緣)을 생각한다. 인간사 어찌 선연(善緣)만 있으랴. 살아가노라면 악연(惡緣)도 맺어지는 것이 사람 살아가는 이치라면 오늘을 살아가면서 진정 축복받은 삶이란 악연도 선연으로 바꾸는 삶이리라. 그것이 어이 마음대로 되겠는가만 그래도 섬김과 나눔과 베풂으로 살아가노라면 아름다운 인연이 엮어지리라. 고희의 삶을 살면서 잠간 멈추고 뒤돌아보면서 나와 인연을 갖고 있는 수많은 사람을 회고해 본다. 인연의 여정에서 경애(敬愛)는 고사하고 왜곡과 망각과 배신이 명확할지라도 그것조차도 절차탁마(切磋琢磨)의 삶을 통해 둥글게 다듬어 내면서 나는 어제를 살아왔고 오늘을 살아간다. 김광규님의 아름다운 글의 표현이 생각난다. 경애(敬愛)를, 빗속을 걸어가는 법이라 했다. 그러면서 ‘사랑은 기꺼이 사람들 사이로 들어가는 길이며, 사람에게 젖어 드는 일’라고 했다. 이 얼마나 깊은 사고(思考)의 표현인가. 얼마 남지 않은 세월을 살맛 나는 인연으로 하루를 엮어가면서 내가 후일 천국에 이른 후 나의 후학들이 나와의 인연을 어떻게 이야기할까, 생각하면서 오늘도 선연(善緣)의 삶을 기도하면서 고린도전서 13장의 첫 구절을 마음 깊이 읊조린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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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17
  • [성서연구] 시간을 해석함
    1992년에 개봉한 <흐르는 강물처럼>이란 영화가 있습니다. 전 시카고대학 교수인 노먼 맥클레인(1902~1990)이 자신의 가족사를 토대로 1976년에 시카고대학 출판부에서 펴낸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입니다. 소설은 출간되자마자 베스트셀러가 되었으나, 영화는 그다지 큰 흥행은 하지 못했습니다. 1900년대 초, 스코틀랜드 출신 장로교 목사인 리버런드 맥클레인은 아내와 아들 노만과 폴과 함께 몬타주 강가의 교회를 목회하면서 강에서 플라이낚시를 즐기며 삽니다. 신중하고 지적인 노만과 동적이고 자유분방한 폴은 어린 시절부터 기질이 다릅니다. 영화는 긴 세월이 흐르는 동안 가족이 어떻게 변해가는지를 보여줍니다. 후에 작은아들 폴이 불의의 사고로 죽고, 가족은 슬픔에 잠깁니다. 오랜 세월이 흐른 후, 노먼은 강물처럼 흘러간 세월과 함께 흐른 가족사를 회상하며 깊은 상념에 잠깁니다. 시간은 흐르는 강물과 같습니다. 인생도 시간과 함께 흐릅니다. 인생은 시간과 함께 그 모습이 끊임없이 변해갑니다. 아기가 어린이가 되고, 어린이가 청소년이 되고, 그 후 청년, 중장년을 거쳐 하류인 노년기를 맞습니다. 그후엔 바다라고 할 하나님의 품으로 흘러 들어갑니다. 바쁘게 살면서 시간의 흐름을 잊기 쉽습니다. 시간의 흐름을 예민하게 깨닫고 반응하는 데 인생의 지혜가 있습니다. 모세는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시 90:12). 우선 시간이 흐른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 시간의 포착이 중요합니다. 시간의 흐름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 같지만, 종종 보일 때가 있습니다. 주일 1부 예배부터 찬양 예배까지 드리는 동안에 강단 꽃을 통해 시간을 느낍니다. 1부 예배 때는 봉오리였던 꽃이 3부 예배 즈음엔 약간 벌어지더니, 5부 예배 시간에는 상당히 벌어집니다. 그러다가 수요기도회 즈음에 활짝 피어있던 꽃은 금요기도회 때면 이미 시들어갑니다. 꽃을 통해 시간의 흐름을 봅니다. 시간의 포착은 경건한 긴장을 가져옵니다. 그 흐름은 언젠가 우리를 마지막 시간 앞에 세울 것입니다. 인생의 유한함과 그 소중함을 깨닫게 해 줍니다. 그래서 스쳐 가는 순간이 눈물겹도록 귀합니다. 다윗은 시편 144편 4절에서 <그의 날은 지나가는 그림자같으니이다>라고 했는데, 유대인들은 이 그림자를 <새의 그림자>라고 했습니다. 새가 날아가면서 남기는 그림자는 얼마나 순간적일까요? 인생이 그렇다는 말이겠습니다. 또 시간은 해석을 요구합니다. 눈을 떠서 새벽임을 알았다면, 그다음에는 해석이 필요합니다. 즉 새벽이 요구하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새벽은 새로운 날이 되었으니, 일어나라고 속삭입니다. 이게 해석입니다. 해가 중천에 떠도 여전히 침대에 누워 있다면 시간을 잘못 해석하는 것입니다. 청년일 때, 중년일 때, 노년일 때, 자신의 시간을 어떻게 이해하고 해석하는지에 따라 인생의 내용은 결정됩니다. 지난 2천여 년의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걸출한 그리스도인 중 한 명인 아우구스티누스(354~430)는 영혼의 갈등이 심하던 어느 날 아이들의 노랫소리를 들었습니다. 노래 가사는 <들어서 읽으라, 들어서 읽으라, tole lege! tole lege!>는 것이었고, 그는 충동적으로 집에 들어가 펼쳐진 책을 들어 읽었는데, 그 말씀이 로마서 13장 11절 이하의 말씀이었습니다.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 말씀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시간을 해석해 주었습니다. 이 일로 인해 그는 깊은 영혼의 잠에서 깨어 일어나 하나님의 아들로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2024년도 벌써 다섯 달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지난 시간을 어떻게 살았는지 돌아볼 때입니다. 그리고 남은 시간을 어떻게 살지 가늠해 볼 때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현재라는 시간을 해석해야 합니다. 무엇을 해야 할지 결정해야 합니다. 흐르는 시간을 포착하는 것, 그리고 해석하는 것에 실패한다면, 결국에는 인생을 실패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시간은 행동을 촉구합니다. 깰 때가 되었다는 해석을 얻었다면, 이젠 떨쳐 일어나야 합니다. 아름다운 결단과 행동은 시간을 빛나게 만들 것이고, 인생도 아름다워질 것입니다. 다시 허리띠를 졸라매고, 하루하루를 의미 있는 날로 살길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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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17
  • [은혜의말씀] 그리스도의 향기 (고후 2:14–15)
    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동·식물은 저마다의 독특한 냄새를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동물의 왕국을 보면, 동물들이 자기만의 독특한 냄새로 자기의 영역을 표시하기도 하고, 다른 짐승에게 자기 존재를 알리기도 합니다. 나아가 우리 사람들도 저마다의 독특한 냄새가 있습니다. 이처럼 냄새라는 것은 그만의 독특한 자기 정체성을 드러내며, 그의 존재를 알리는 역할을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 성도로서 우리를 나타내는 냄새는 무엇일까요? 바울은 자신을 어디서나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그리스도의 향기’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15절) 우리도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도록 세우신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1. 왜 우리가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었습니까? 우리는 본래 죄의 냄새, 사망의 냄새를 가지고 태어난 존재입니다. 다시말해 우리는 악취를 풍기는 죄인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허물과 죄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습니다.(엡 2:4,5) 죄의 냄새, 사망의 냄새로 가득했던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사랑을 통하여 의의 냄새, 생명의 냄새로 바꾸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 성도들은 생각을 해도 의로운 생각, 말을 해도 축복의 말, 사랑의 말, 격려의 말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 안에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2. 우리가 그리스도의 향기라면, 향기로서의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14절) 바울은 각 처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는 삶을 살았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일이 바울에게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도록 세우신 사명자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거하는 모든 곳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해야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예수 안에서의 참 기쁨이 무엇인지, 구원이 무엇인지, 천국이 무엇인지 알게 해야 합니다. 이제 이일을 통하여 사망의 냄새에 찌들려 살던 그들에게 생명의 향기,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를 선물해야 합니다. 향기는 숨어있거나 감춰져 있으면 안 됩니다. 널리 뿌려지고 퍼져야 향기 자체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향기를 뿜어내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고, 그 향기를 맡는 사람들이 복음의 꿀을 먹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그 영혼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향기를 찾으십니다. 모양만 있다고 신자가 아니라 예수의 능력이 있고, 예수의 향기가 있는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날마다 여러분의 심령에 그리스도로 가득 채우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여러분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가 이 땅에 만발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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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17
  • [시사칼럼] 라인 사태와 디지털 국유화
    한 때 자국 내 외국기업 혹은 다국적기업의 자원 독점 및 수탈을 막기 위해 주로 개발도상국에서 국유화 조치를 감행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이를테면 1974년 베네수엘라는 50년 간 부여했던 미국철강회사들의 철광채광권을 국유화한다면서 국내 외국기업은 소유주식의 80%를 베네수엘라 투자가들에게 매각하여 국영기업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발표한 바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조치들은 대단한 저항과 수많은 논란을 야기했지만, 국가의 주권적 행위인지라 국제사회에서 뚜렷한 해결책과 원만한 합의점을 찾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시장자본주의가 범세계적으로 확산되면서 차츰 자취를 감추어가던 국유화조치가 최근 들어 다시 부활의 조짐을 보이고 있습니다. 다만 이전 세기와 사뭇 다른 점은 동일한 ‘자원민족주의(Resource Nationalism)’를 이론적 배경으로 내세우면서 과거에 그렇지 않았던 국가들이나 지금은 경제대국이라 할 수 있는 나라들 역시 유사한 조치를 감행하는 현상에 있습니다. 먼저 새천년 시대에 접어들면서 전격적으로 실시된 중남미 일대의 국유화 조치를 살펴보겠습니다. 2006년 5월 1일 볼리비아 정부는 석유 · 가스 산업을 국유화하는 내용을 담은 포고령을 발표합니다. 2009년 5월 8일 베네수엘라의 차베스 정부 역시 마라카이보 호수 유역에서 활동하고 있던 60여 개의 국내외 석유서비스기업 자산을 국유화하는 조치를 단행하였습니다. 2012년 아르헨티나의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대통령 또한 자국 내 최대 다국적에너지기업인 YFP 국유화를 선언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 최근 전쟁 중인 러시아 정부가 이와 관련하여 깜짝 놀랄만한 발언들을 쏟아내어 화제입니다. 지난 4월 12일 러시아 하원이 자국 내 외국인투자회사의 국유화와 관련된 법안을 발의하여 심의 중에 있고 조만간 그 입법 여부가 결정될 예정이라는 보도가 있었습니다(법률신문 5. 16). 한 때 사회주의 진영의 종주국이자 최고의 산업국이던 러시아가 이런 조치를 발표한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합니다. 러시아만이 아닙니다. 세계 제2의 경제대국을 자처하는 중국도 최근 몇 년 간 상당히 주목할 만한 비정상적인 경제적 조치들을 단행한 바 있습니다. 독특한 화학적, 전기적 특성을 띠어 미사일을 비롯한 각종 첨단 장치에 필수적인 17종 원소를 통칭하는 “희토류(稀土類, Rare Earth Resources)”라는 말이 최근 수년 간 엄청나게 회자되지 않았습니까? 최대의 매장량을 자랑하는 중국이 2010년부터 희토류를 일종의 ‘자원 무기(Resource Weapon)’로 만들어서 우호적인 국가에만 수출하고 대립하거나 자신들을 제재하는 나라들에는 수출을 금지하기 일쑤였기 때문입니다. 이전의 자원민족주의는 석유나 가스 등 자원에 국한되었고 주로 국유화조치가 문제였다면, 지금은 희토류뿐만 아니라 니켈이나 리튬 같은 자원으로 대상이 확장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양상 또한 생산량 제한이나 선별적 수출과 같이 다양화되고 있어 문제입니다. 특히 화석연료의 사용을 자제하자는 세계적인 추세에 맞추어 그 중요성이 급증하고 있는 탄소중립 필수자원의 공급망을 관리하는 방식(SCM, Supply Chain Management)을 활용하고 나서기 시작하면서 더욱 문제가 복잡해지고 커졌습니다. 그러던 차에 최근에 상기한 자원민족주의의 신종 형태로 등장하여, 우리나라가 거기 엮여서 그 자체로도 문제인데다 이를 둘러싼 국론조차 대립하고 분열되어 더욱 심각한 근심거리가 되고 있는 현상이 하나 있습니다. 일본 내에서 메신저 역할을 전담하다시피 하고 있는 온라인서비스 ‘라인’을 둘러싼 일본 정부의 일종의 국유화 시도가 그러합니다. 물론 이전에도 이른바 ‘플랫폼 데이터 규제’ 조치가 미국이나 유럽연합 그리고 일본이나 중국에서 이루어져 왔습니다. 하지만 이는 미국 내에서 중국 산 ‘틱톡’ 앱의 퇴출 방안과 이에 대항하여 중국이 취한 자국 내 미국 동종 플랫폼의 사용 금지 조치 등에 국한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 일본 정부는 개인 정보 유출을 이유로 한국 기업 네이버에 라인야후 지분을 매각하도록 압박하고 있습니다. 이 소식을 접한 우리나라 일각에서는 굴종외교라며 정치화하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고 반면 반일몰이라며 경제논리에 맡겨야 한다는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들도 생겼습니다. 그러나 이번 사태는 우리 자신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조치를 통해 앞으로 ‘디지털 국유화(Digital Nationalization)’ 내지는 ‘온라인 자원무기화(Online Resource Weaponization)’가 더욱 기승을 부리지 않을까 우려합니다. 영토나 주권을 배경으로 하던 시대와는 그 결을 달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국경도 없고 장벽도 없는 인터넷 세계를 자국의 이익을 위해 혼란에 빠뜨리고자 하는 시도는 옳지 못합니다. 부디 이번 사태로 인해 디지털 세상의 자유와 정의가 흔들리지 않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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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17
  • [분홍목사의 다음세대이야기] 믿음의 하인리히 법칙
    20세기 초, 인류는 산업의 발전을 경험하면서 눈부신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하지만 그러는 동안에 큰 사고도 많이 일어나서 수많은 사람들이 산업 현장에서 죽거나 다치는 등의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1931년도 미국의 보험 설계사였던 윌리엄 하인리히가 찾아낸 ‘하인리히 법칙’이 있습니다. 그는 산업 현장의 사고에 대해서 ‘1:29:300’이라는 비율을 제시합니다. 이 법칙은 ‘중대형 사고 1: 경미한 사고 29: 사고의 징후 300’으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산업 현장에서 사람이 죽고 크게 다치는 정도의 아주 심각한 중대사고 한 건이 벌어질 때, 그 일은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난 사고가 아니라는 겁니다. 하인리히의 연구에 따르면 이미 그 전에 같은 건으로 경상자가 29명 나왔었는데 사람들이 대수롭지 않게 여겨서 이 일이 커져서 큰 사고로 이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욱 충격적인 사실은 이 큰 사고가 나기 전, 가벼운 사고가 29건 일어나는 동안 이미 이 사고의 징후는 이미 300번이나 있었다는 겁니다. 사람들이 “어? 이거 사고 날 것 같은데! 사고 날 것 같은데!”하는데도 이를 가벼이 여겨 고치지 않고, 그래도 괜찮을 것 같아서 특별히 돈이나 시간을 들여서 보수하지 않고 손을 보지 않으니까 그러다보니 “어? 또 사고 났는데!” 하면서 그 자리에서 예상되었던 사고가 생겨났고, 결국 그것이 쌓이다보니 사람이 죽고 회사와 사회에도 큰 손해를 끼치는 중상해 사건이 일어난다는 겁니다. 우리가 이 하인리히 법칙을 통해서 알 수 있는 사실은 세상이 뒤흔들리는 커다란 사건은 반드시 그 이전에 수많은 징조와 징후를 통해서 간파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조금만 더 관심을 가지고 우리 주변을 바라본다면 우리는 미리 우리의 위기를 대비할 수 있고 그에 따른 삶의 변화를 준비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징조와 징후가 산업현장만의 이야기일까요? 이는 우리의 믿음에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의 일들을 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숭배하고 세상의 편에 서게 된 것은 어쩌다 갑자기 한 번에 이루어진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 전에 분명히 많은 징후가 있었습니다. 그들이 믿음을 가볍게 여기는 적어도 29번의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졌고, 돌이켜보면 그 전에 벌써 300여 번의 번성과 돈과 성공에 집착하여 그것을 하나님처럼 섬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잘못된 모습들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한 번에 하나님을 떠나지는 않지만, 돈이 귀하게 여겨지고 하나님보다 돈이 좋아질 때 빨리 우리의 마음을 돌이켜야 합니다. 마태복음 16장 2~3절에서 예수님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날씨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 당시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하나님을 잘 알고 섬기는 종교인들이라고 자처하면서도 이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처한 믿음의 위기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로마의 압제 속에서 고통당하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얼마나 간절히 메시야를 사모하며 기도하는지 그들은 전혀 알지 못한채 자신의 입장을 세우기에만 열을 올렸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믿음의 제 자리를 찾기 위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징조와 표적을 잘 알아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바르게 믿는 믿음을 다음세대에게 전해줄 수 있을까요? 하인리히의 법칙을 이제는 이것을 믿음의 법칙으로 바꿔볼 수 있습니다. 믿음의 온전한 승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도 한 번에 쉽게 찾아오지 않습니다. 그 전에 적어도 29번의 물질과 시간의 회개가 있어야 합니다. 바른 물질 사용의 회개가 있어야 하고 바른 시간 사용에 회개가 있어야만 우리는 온전한 믿음의 승리를 거둘 수 있는데, 그걸 위해서 그 전에 많이 필요하고, 매일매일 필요한 건 바로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것, 즉 내 필요와 내 욕심을 조금 더 내려놓고 내 주위를 돌아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갈 때 비로소 우리는 물질에 대해 자유할 수 있고, 시간에 대해 자유할 수 있고, 하나님을 마음으로 모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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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분홍목사의 다음세대 이야기
    2024-05-17
  • [다음세대칼럼] 주님의 가치를 추구하라
    필자는 청소년 사역을 하고 있다. 소위 말하는 위기 청소년 사역이다. 가정 밖 청소년을 집으로 돌려보내고, 학교 안 가는 청소년들을 학교로 돌려보내는 사역을 한다. 자주 이런 질문을 받는다. 한 건당 얼마를 받는지 물어본다. 필자는 매우 당당하게 말한다. 돈을 받는게 아니라 돈을 지불하면서 그 일을 한다고 말한다. 그러면 많은 사람들이 되묻는다. 그럼 왜 하는지 물어본다. 세상 사람들은 돈에 가치를 두고 살기에 이런 질문을 한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의 가치를 추구하면서 살아간다. 어떤 사람은 물질을 추구하고, 어떤 사람은 명예를 추구하고, 어떤 사람은 인생의 즐거움을 추구하기도 한다. 그러나 세상의 것들은 다 사라지고 말 것들이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가치는 영원한 것이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이 세상에 오직 예수님밖에는 없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따르고, 예수님을 위해 사는 인생보다 더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인생은 이 세상에 없는 것이다. 필자는 이런 이유로 이 사역을 한다. 거리에 버려진 아이들을 돌보는 사역, 이것이야말로 정말 예수님을 위해 사는 인생이다. 가난하고 힘없고 소외된 사람들을 주님께로 인도하는 일이 정말 가치 있는 인생을 사는 것이다. 빌립보서를 쓴 사도 바울도 보면 예수님을 위해 자신의 인생을 바쳤던 사람이었다. 그는 평생 독신으로 살면서 복음을 전했고, 신약성경 가운데 13권을 썼고, 나중에는 로마에서 순교까지 당했다. 이런 삶의 모습들이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이상하게 보이고, 불쌍하게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교회의 역사를 보면 사도 바울처럼 예수님이라는 가치를 추구하면서 살았던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모른다. 그리고 우리도 그 역사의 대열 안에 같이 서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자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그러면 예수님이라는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들의 특징은 무엇인가? 필자는 오늘 이 부분에 대해서 두 가지 관점에서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한다. 먼저, 예수님을 추구하는 사람의 특징은 주안에서 기뻐한다는 것이다. 빌립보서 3장 1절은 이렇게 기록한다. “끝으로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너희에게는 안전하니라.”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주 안에서 기뻐하라고 권면하고 있다. 이 말은 우리가 언제든지 주 안에서 기쁨을 누려야 한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말미암아 죽음의 문제를 해결해주셨기 때문이다. 우리는 본래 죄로 인해 마땅히 죽었어야 할 사람들이다. 마치 죽은 지 너무 오래 되어서 바싹 마른 뼈와 같이 우리는 죄와 허물로 이미 사망 선고가 내려진 사람들이었다. 우리에게는 미래가 없었고 오직 죽음만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우리를 위해 예수님께서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고 그 결과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 그래서 우리는 기뻐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우리 안에 기쁨이 없다고 한다면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얼마나 놀라운 일을 행하셨는지를 모르는 사람이다. 다른 사람이 구원을 얻은 것이 아니다. 바로 내가 그렇게 구원을 얻은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마땅히 주 안에서 기뻐해야 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두 번째로, 예수님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특징은 부활의 삶을 산다는 것이다. 빌립보서 3장 10절과 11절 말씀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사도 바울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한다고 말씀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말씀을 보면 바울이 부활을 얼마나 간절하게 소망하고 있었는지 알 수 있다. 고린도전서 15:20절 말씀은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예수님께서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 다시 말하면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다는 말씀은 우리도 죽은 다음 예수님처럼 부활할 것이라는 사실을 의미하고 있다. 우리가 죽은 다음 다시 부활할 것이라는 사실은 이 땅을 사는 우리에게 얼마나 소망이 되는 말씀인지 모른다. 왜냐하면, 이 땅에서의 죽음이 마지막이 아니라, 새로운 삶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이 땅에서부터 부활의 삶을 경험할 수 있는가? 그것은 우리의 옛사람이 죽는 것이다. 부활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몸이 죽어야 하듯이, 우리의 옛 성품, 옛 습관, 옛날 욕심들이 다 죽을 때 우리는 이 땅에서부터 부활의 삶을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이 땅에서 살면서 힘쓰고 노력해야 할 것들이 많이 있지만, 무엇보다 우리는 이 땅에서 부활의 삶을 살도록 힘쓰고 노력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 땅의 것들은 우리가 죽고 난 다음 모두 다 사라지고 말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부활의 삶을 살기 위해 애쓰고 노력한 모든 것들은 저 하늘나라에까지 남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예수님이라는 가장 중요한 가치를 허락해 주셨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예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언제나 주 안에서 기뻐하고, 날마다 부활의 삶을 살기 위해 힘쓰고 노력해야 한다. 우리 다음 세대가 세상의 가치를 따라 살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주님의 가치를 따라 기뻐하고, 부활을 소망하며 살게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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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17
  • [신앙교육나침반] 바빠도 힘들어도 자녀에게 복음을 전합니다!
    하나님은 타락한 세상속에서 자녀세대를 잃어버리지 않기 위한 핵심전략을 분명하게 알려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신명기 6장의 쉐마 명령에 나옵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신명기 6:5-7)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생활을 마치고, 가나안에서의 화려하고 바쁜 정착생활을 앞두고 있습니다. 광야는 날마다 구름기둥과 불기동, 만나와 메추라기 등 살아계신 하나님을 생생하게 경험할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가나안은 완전히 다릅니다. 정신없이 바쁘고 분주한 삶속에서는 하나님을 떠올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가나안 정착생활 속에서도 우리의 자녀들이 하나님을 떠올릴 수 있는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세워야겠다고 결단하셨습니다. 가나안에 세운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무엇일까요? 바로 ‘부모’입니다. 그런데 조건이 있습니다. 날마다 마음을 다해 뜻을 다해 힘을 다해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전하는 부모여야 합니다! 하나님으로 충전된 부모는 악한 세상으로부터 자녀를 지키는 든든한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됩니다. 지금 수많은 우리의 자녀세대의 뇌는 하나님을 떠올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작은 몸집의 아이들이 여러 종류의 학원가방을 메고 분주하게 하루를 살고 있습니다. 영어단어를 외우고, 수학문제를 풀고, 태권도를 배우고, 피아노를 배우면서 하루하루를 바쁘게 보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떠올릴 여유는 없습니다. 너무 바쁘거든요. 그러한 시간속에서 자녀들의 영혼은 더욱 깊은 잠에 빠지게 됩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자녀들의 영혼은 돌처럼 굳어서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에 무감각한 자로 성장합니다. 자녀들에게 시급하게 필요한 것은 더욱 강력한 복음입니다. 잠자는 영혼을 깨울 초강력 복음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네!’. ‘하나님이 함께하시는구나!’,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시는구나!’, ‘하나님이 나의 생명이구나!’, ‘하나님이 나의 빛이구나!’를 감탄할 수 있는 일상이 필요합니다. 부모는 자녀들에게 생각 그 이상의 위대한 영향력이 있는 존재입니다. 부모의 무표정이 지속되면, 자녀의 얼굴이 굳어집니다. 부모의 미소가 지속되면, 자녀의 얼굴에 미소가 가득해집니다. 그래서 초강력 복음을 전파할 수 있는 최고의 통로는 하나님으로 충전된 부모입니다. 향기나무교육개발원은 부모를 통해서 자녀에게 복음이 리듬있게 전파되기를 바라며, <복음놀이리부트50> 책을 출간하였습니다. 이 책에는 부모가 자녀에게 꼭 들려주어야 할 50가지의 복음과 복음놀이가 담겨 있습니다. 바쁘고 분주한 삶이지만, 등교전이나 잠자리에 들기 전에 자녀에게 복음을 읽어주면 됩니다. 시간이 좀 더 있다면, 복음의 내용과 연결된 복음놀이를 간단하게 합니다. 부모가 자녀의 영혼을 사랑으로 부둥켜안고 전하는 복음은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복음입니다. 바쁘고 분주한 삶속에서 우리의 부모들이 자녀에게 복음을 강력하고 리듬있게 전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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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앙교육 나침반
    2024-05-17
  • 위기의식 느끼는 침례교단
    침례교단이 총회장과 제1부총회장의 직무가 법원에 의해 정지되면서 교단 안팎에서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다. 지난 4월 30일 서울남부지방법원은 제1부총회장 선거 무효확인 소송에서 본안 판결 확정시까지 홍석훈 제1부총회장의 직무를 정지한다고 판결했다. 그리고 직무대행자로 총회 총무 김일엽 목사를 선임했다. 여기에 캄선교회 대표의 믿기 힘든 일들이 폭로되면서 심각성을 더해가고 있다. 당사자가 모든 책임을 지고 대표직에서 물러나고, 교단도 탈퇴했지만, 그 휴유증은 당분간 계속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또 교단이 직영하고 있는 한국침례신학대학교(총장 피영민 목사)가 대학기관인증평가에서도 쉽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다. 전임교원확보율 64%가 중요한 지표인데, 교육부 고시 전에 교원확보가 어렵게 됐기 때문이다. 교단안에서는 “대의원들이 교단을 살리기 위해 보다 냉철하고 객관적인 기준을 마련하기 위한 목소리를 낼 때”, “규약과 각 기관과 위원회의 정관과 내규 또한 논란의 여지가 있는 내용들을 논의해 교단의 환골탈퇴 할 수 있는 길을 마련” 등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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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야의 소리
    2024-05-17
  • 연합의지 나타낸 한교총
    한국교회총연합이 지난 14일 연합운동공로자 초청 오찬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 말씀을 전한 이철 감독회장은 “한교총을 중심으로 연합을 잘 하고 있지만, 아직 한기총과 한교연이 남아있다. 가능한 통합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참석한 이들에게 협력을 당부했다. 환영인사에 나선 장종현 대표회장도 “한국교회 연합과 일치를 위해 힘써주신 모든 목사님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여러분의 수고가 헛되지 않도록 한국교회 연합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하겠다”고 말했다. 또 “교파 교리 문제로 분열을 거듭한 한국교회 역사는 매우 부끄러운 일”이라며 “한국기독교총연합회 한국교회연합 등 연합기관이 하나가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약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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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야의 소리
    2024-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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