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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상규교수의역사탐색]일제가 만든 종교통제법 포교규칙
    일제는 1910년 8월 29일 한국을 강점한 이후 1945년 8월 15일까지 35년간 우리나라를 지배했는데, 각종 법률과 규정, 혹은 제령(制令)을 통해 조선을 통제했고 기독교회를 탄압했다. 1910년 8월 29일 제령 1호로 발표된 ‘조선에 있어서 법령의 효력에 관하여’에서 대한제국 시대, 특히 통감부 시대 법의 대부분을 계승하였다. 한국 민중의 항일 저항운동을 규제하기 위한 ‘보안법’(保安法, 1907), ‘경찰범처벌령’(警察犯處罰令, 1908), ‘범죄즉결령’(犯罪卽決令, 1909) 등이 그것이다. 병탄 이후 경찰범처벌령은 ‘경찰범처벌규칙’(1912)으로, 범죄즉결령(1910)은 같은 이름으로 더욱 규제와 처벌이 강화되었다. 조선인에 한하여 적용되었던 조선태형령(朝鮮笞刑令, 1912년 제정, 1920년 폐지)는 조선인 탄압법으로 악용된 악법 중의 악법이었다. 이 법은 일본인의 자의적 판단에 의해 반일적인 언행은 모두 태형의 대상이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기독교회에 대한 통제법이 제정되었는데, 그것이 ‘포교규칙’(布敎規則)이었다. 1915년 8월 16일 공포된 ‘포교규칙’은 조선 교회의 신앙과 사상, 종교 활동까지 통제하려는 의도에서 제정되었다. 1898년 일본의회에 상정되었던 종교법이 그 모델이었다. 전문 15조와 부칙으로 구성된 이 법안은 일본에서는 종교계의 반발이 심해 제정되지 못했으나 식민지 조선에서는 제령 83호로 공포되었다. 이 포교 규칙은 크게 포교 활동의 허가제와 종교단체에 대한 엄격한 감시를 골자로 하고 있었다. 주요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제1조 (종교의 정의): 본령(本令)에서 ‘종교’라 함은 신도(神道), 불교 및 기독교를 말한다. 제2조 (포교자 신고): 종교 포교에 종사하고자 하는 자는 명칭, 포교 방법, 교의 요령 등을 갖추어 조선총독에게 신고해야 한다. 제3조 (포교 관리자): 일본의 신도나 불교 종파가 포교할 때는 ‘포교 관리자’를 두어 총독의 인가를 받아야 한다. 제4조 (감독권): 조선총독은 포교 방법이나 포교 관리자가 부적당하다고 인정될 때는 그 변경을 명령할 수 있다. 제6조 (시설 설립 허가): 교회, 사찰, 포교소 등을 설립할 때는 명칭, 위치, 부지, 유지 방법 등을 적어 총독의 인가를 받아야 한다. 제9조 (보고 의무): 포교 관리자나 주지는 매년 포교 상황과 신도수 등을 보고해야 한다. 제12조 (정지 및 폐쇄): 포교자가 안녕질서를 방해하거나 포교 목적에 위반되는 행위를 했다고 인정될 때는 포교를 정지하거나 포교소를 폐쇄할 수 있다 등이다. 이 포교규칙을 보면, 포교자 신고제 및 허가제로 규정하여 포교하고자 하는 자는 반드시 성명, 주소, 포교 방법 등을 총독부에 신고하게 했고(제2조), 교당이나 포교소 설립을 통제하였다. 즉 사찰, 교회, 성당 등을 세울 때는 명칭, 위치, 부지 면적 등을 상세히 적어 총독의 허가를 받아야 했다(제9조). 뿐만 아니라, 신도수의 변동이나 포교 실적, 예산집행 내역 등을 정기적으로 보고하도록 강제했다. 이런 규정 때문에 포교자에게는 포교자 자격을 획득해야 했고 이를 증명할 수 있는 자격증이 해 종교기관장에 의해 발부되었다. 또 포교자의 이동, 거주자 변경시 이를 조선총독에게 보고해야 했다. 이런 보고 규정보다 더 심각한 제재는 포교를 중지하거나 폐쇄할 수 있게 규정한 점이다. 비록 ‘안녕질서를 해치거나 포교의 목적에 위반된다고 판단할 경우’라고 명시했으나 이는 자의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조항으로서 교회를 폐쇄하거나 포교, 곧 전도 활동을 금지할 수 있게 규정한 것이다(제12조). 이는 종교의 자유나 자율성을 인정하지 않고 종교활동을 ‘행정적 허가’의 대상으로 만들어 국가 권력의 통제하에 둔 것이다. 즉 기독교회를 비롯한 종교단체의 종교활동, 인사권과 재산을 장악하여 종교인들이 총독부의 지시에 순응하게 만든 것이다. 이 법은 삼일운동 이후 선교사들의 요구를 일부 수용하여 1920년 4월 7일 ‘개정포교규칙’이란 이름으로 개정되었다. 교회당 설립의 경우 총독부의 허가를 의무화했으나 신고제로 완화되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이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교회당에서 안녕질서를 문란케 할 우려가 있다고 인정할 때는 그 사용의 정지 또는 금지를 명할 수 있게 했다(제9조). 이런 이유로 교회별 신도수, 신도수의 증감을 매년 신고하도록 했고, 각종 교회 집회와 설교를 감시하고 통제하게 된 것이다. ‘포교규칙’은 교회를 폐쇄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마련한 것으로서 한국교회를 탄압하기 위한 규정이었다. 그런데 최근 이런 포교규칙과 비슷한 아니 더 심각한 입법 시도가 한국교회에 커다란 위협이 되고 있다. 다름 아닌 민법 개정안인데, 표면적으로는 법인격 남용방지를 내세우고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종교단체의 자유를 크게 위축시킬 수 있는 독소조항이 포함되어 있다. 특히 개정안 38조 2항을 보면, 행정공무원이 법원의 영장 없이도 법인 사무소에 출입하여 장부와 서류를 검사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두고 있다. 이는 헌법상 영장주의 원칙을 위배하는 것으로 수사기관이 아닌 행정부가 종교단체를 감시하고 통제할 수 있는 초법적 권한을 갖게 된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이 법이 제정되면 종교활동이 위축되고 교회나 종교법인도 폐쇄될 수 있다는 점에서 ‘종교법인강제해산법’, 혹은 ‘교회폐쇄법’으로 인식되고 있는 상황이다. 이는 일제 때의 포교규칙과 같은 악법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한국교계는 주목하고 있다. - 이상규, 백석대학교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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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상규교수의 역사탐색
    2026-03-26
  • [교회건축칼럼]재개발지역 교회의 지속성상
    재개발지역으로 교회가 이전되면 많은 변화가 일어난다. 기존의 성도의 구성이 젊은 연령계층으로 바뀌게 되며 세대의 구성도 핵가족형태의 주거단지로 변화되어진다. 교회는 기존의 성도와 환경으로 생각하면 성장의 방향과 내용에서 큰 혼란을 겪게된다. 재개발지역의 교회는 입주민의 다양한 필요 충족여건에 교회가 어떻게 반응하느냐가 지속성장의 관건이 될 수 있다. 크게 핵심적 내용을 다음과 같이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재개발 후 입주할 새로운 주민이나 세대는 단순히 종교시설로서의 교회보다는 그들의 삶의 질을 풍요롭게 보완하는 공간으로 기능해야한다. 예를들면 공유공간의 개방을 더 적극적으로하여 열린교회의 이미지를 나타내야한다. 카페나 어린이도서관, 엄마와 함께하는 키즈카페는 아파트 입주민이 가장 필요한 공간이다. 공동육아 나눔터는 신규 젊은 입주민의 부부가 자연스럽게 교회로 진입하게하는 전략이다. 둘째. 도시재개발 지역에 문화공간의 격조를 높인 교회의 다양한 공간들은 근린문화센터로서 교회의 이미지를 상승시킬 수 있다. 야외공간이나 옥상공간등은 밀도높은 아파트 단지의 근린공원과 같은 쉼과 휴게의 광장으로 인식될 수 있다. 신축아파트의 주축인 젊은 부모들을 위해 전문적인 영유아 프로그램과 부모 상담치유 세미나와 같은 프로그램은 차별적인 교회의 성장동력으로 기능할 수 있다. 셋째. 아파트 단지내의 청소년 공간은 그들의 커뮤니티 센터의 기능을 잘 수행할 수 있다. 스터디카페나 청소년 탁구장, 청업비전 공유 오피스처럼 그들의 장래 진로나 전문상담을 제공하므로서 교회가 그들의 미래에 대해 같이 고민하고 함께한다는 이미지를 부여하는 것은 고립되어가는 청소년들에게 소망의 공간으로 작용할 수 있을것이다. 넷째, 재개발지역의 교회 모습은 기존의 교회이미지나 형태에서 탈피하며 문화센터나 미술관처럼 부담없는 이미지를 제공하므로서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다. 종교시설같지 않은 교회이미지의 환경 디자인은 특히 젊은 입주민이 더 선호하는 교회 형태일 것이다. 기존의 아파트 단지의 부대시설과 차별화되는 공간과 프로그램의 배치는 재개발지역에 다른 교회나 종교시설과 경쟁우위를 점유할 수 있으며 지속성장의 기회요소가 될 것이다. 교회건축 시작전에 교회공간의 주중활성화 방안을 고려하여 평일에 더 활기찬 교회를 구상하고 스토리텔링에 의한 열린 공간으로 재개발 지역의 밀착형 교회를 생각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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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3-26
  • [성서연구]산 자의 장례식
    미치 앨봄(Mitch Albom)이 쓴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이란 책이 있습니다. 모리 슈워츠는 브랜다이스 대학에서 사회학과 사회심리학을 가르친 교수입니다. 미치는 모리 교수의 제자입니다. 미치는 대학을 졸업한 후 정신없이 바쁘게 사느라고 교수님을 찾아가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TV에서 모리 교수의 인터뷰를 보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교수는 많이 늙었을 뿐 아니라, 루게릭병으로 서서히 죽어가는 중이었습니다. 미치는 교수님을 찾아갔고, 그 후 교수님이 죽음을 맞이하기까지 화요일마다 찾아가서 인생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 화요일의 인생 강의는 모두 열 네 번에 걸쳐 이루어졌고, 책으로 출판되어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이 책에 인상적인 이야기가 나옵니다. 몸이 서서히 굳어가던 어느 날 모리 교수는 친구의 장례식에 참석했습니다. 거기서 교수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 이유는 친구의 죽음 때문이 아니라, 조문객들이 관 위에 꽃을 놓으며 작별의 인사를 해도 정작 그 친구는 하나도 듣지 못한다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돌아온 교수는 자신이 아직 살아있을 때 자신의 장례식을 앞당겨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정다운 이들을 불렀고, 사람들은 그가 아직 지각이 있을 때 마지막 작별의 인사를 나누면서 눈물로 포옹하였습니다. 모리 교수는 미리 죽은 사람이고, 그의 장례식은 산 사람의 장례식이었습니다. 그 후 모리는 다가오는 죽음을 정면으로 응시하면서 그 소중한 시간을 새롭게 살았습니다. 이 책은 떠나는 자와 남는 자, 삶과 죽음에 대한 많은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모리 교수만 미리 앞당겨 죽은 사람이 아닙니다. 바울 사도도 미리 죽은 사람이었습니다. 갈라디아 2장 20절을 보면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바울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함께 못 박혔고, 거기서 죽었습니다. 거기서 죽은 것은 바울의 옛사람이었습니다. 한때 그는 복음의 원수요, 핍박자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 옛사람은 죽었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5장 20절에서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고 고백합니다. 그 이후의 삶은 새로운 삶이었습니다. 옛사람은 십자가에서 죽었고, 이제부터는 새 사람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때는 <바울>이란 이름으로 사는 게 아니라, <예수님>의 이름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는 계속 고백합니다.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과거의 바울은 죽고, 새로운 바울이 생겨난 것입니다. 사실 그는 과거엔 <사울>이었습니다. 그 사울은 이미 죽었습니다. 그리고 이젠 바울로 새롭게 사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도 앞당겨 죽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자신에게 사망 선고를 내려야 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사망 확인을 해야 합니다. 무엇이 죽어야 할까요? 욕망, 교만, 세상에 붙은 모든 것들이 죽어야 하고, 죽었음을 확인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옛사람의 삶에 대한 장례식을 거행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정과 욕심을 다 죽이고,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살아야 합니다. 중세의 베네딕트 수도원에서는 수도사가 되려는 사람에게 산 사람의 장례식을 거행하였습니다. 수도사가 되기로 서원한 사람이 관속에 눕습니다. 그 위에 하얀 관보가 덮입니다. 죽음을 알리는 종소리가 무겁게 울려 퍼집니다. 사방은 캄캄하고, 침묵만 흐릅니다. 한 사람이 죽는 순간입니다. 얼마 후 침묵을 깨고 말씀이 울려 퍼집니다.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네게 비취시리라> 그 후 부활절 찬송이 울려 퍼지면서 관보가 벗겨집니다. 관속에 들어가 있던 사람이 나옵니다. 그리고 외칩니다. <내가 죽지 않고 살아서 여호와의 행사를 선포하리로다> 무슨 말일까요? <이제 나는 죽었다가 다시 살았으니, 이제부터는 주님만 위해서 살겠습니다>라는 고백입니다. 그 후 수도사의 옷을 입힙니다. 그 후 그는 <나는 그때 이미 죽었다. 이제부터는 주님을 향하여, 생명을 향하여, 천국을 향하여 산다>고 확인하고 평생을 살게 됩니다. 죽고 다시 사는 삶이 우리 모두에게 있길 기원합니다. 이게 장차 누릴 부활을 내다보는 성도가 땅에서 미리 누리는 진정한 부활의 축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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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3-26
  • [성경적경영학개론]기업의 본질(2)
    성경적 관점의 기업(Enterprise)이란 본질적으로 하나님이 부여하신 창조적 능력을 발휘하여 필요로 하는 제품을 생산해 가치를 창출함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비즈니스 공동체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초기 기독교 역사를 보면 비즈니스는 신앙과 불편한 관계로 여겨져 왔다. 초대 교부 터툴리안(Tertullian, 155~240)은 ‘상거래가 하나님의 종들에게 적합하지 않음’을 단언하였다. 기독교 신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어거스틴(Augustine, 354~430) 조차도 ‘비즈니스를 악’으로 보았다. 또 이러한 현상은 오늘날의 목회 현장에서도 발견된다. 그 이유는 돈이 갖는 탐심과 맘모니즘(Mammonism)의 속성도 있지만, 비즈니스 현장이 치열하여 바른 신앙을 병행하기가 어렵다는 인식이 있기 때문이다. 필자는 지난 한주 학생들과 회계윤리 수업을 통해 ‘비즈니스와 기독교윤리’에 대해 토론을 나누었다. 내용은 비즈니스 현장이 우리가 기대하는 기독교적 윤리와 달리, 이익을 위해 상대를 속이고 이용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과장 광고가 범람하고, 황금률(눅6:31)과 같은 미덕을 찾아보기가 힘들다. 정직한 기업이 손실을 보는 연구 결과가 소개되었다. 그러면 정직은 무익한 것인가? 비즈니스는 악한 것인가? 이에 대해 미국 남가주대(USC) 교수이자 목사인 달라스 윌라드(Dallas Willard)는 비즈니스의 본질이 '이윤'이 아닌 '섬김'에 있음을 강조하였다. 좋은 제품을 생산해 소비자에 공급하고, 의미있는 일자리를 창출하고, 기업이 시장을 통해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조직적이고 효율적인 도구'가 될 수 있음을 제시하였다. 즉 기업은 단순히 물건을 만들어 이익을 추구하는 조직을 넘어, 정직과 절제, 성실, 배려 등 기독교적 덕목을 경영현장에서 실천할 수 있는 성화의 장이 될수 있다는 점이다. 믿음으로 의롭다 칭함을 받은 그리스도인이 성화(Sanctification)된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듯, 이를 경영현장에 적용한 것이다. . 그리고 기독교 윤리학자인 로크 반 웬스빈 시커(Louke van Wensveen Siker)는 유명한 리처드 니버(H. Richard Niebuhr)의 고전 ‘그리스도와 문화’의 유형론을 비즈니스에 적용하여 다음 5개를 제시하였다. 비즈니스와 신앙, 그리스도의 관계는 어떤 것일까? 필자는 이 칼럼을 통해 많은 크리스천 경영자가 이를 자신의 기업에 적용해 평가해 보기를 추천한다. 첫째는 비즈니스와 신앙의 대립관계이다. 2개의 요소가 완전히 분리되었다. 둘째는 비즈니스와 신앙이 일치하여 조화를 이룬 관계로, 좋은 윤리가 좋은 비즈니스 결과를 가져다 준다는 인식이다. 셋째는 비즈니스 위의 신앙으로, 하나님의 창조 질서는 인정하나 비즈니스 현장에서 기준을 찾는 관계이다. 넷째는 비즈니스와 신앙의 역설적 관계로, 두가지 모두 취함으로 긴장을 갖는다. 다섯째는 비즈니스를 변혁해 가는 신앙의 관계로, 비즈니스 내의 악을 직시하면서 구속의 관점에서 그리스도의 주권이 회복될 수 있도록 변혁을 추구해 가는 상황이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며 ‘빛과 소금(마 5:13-16)’의 삶을 살기를 원하셨다. 또 하나님은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레 11:45)’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거룩한 삶을 살기를 원하셨다. 또한 우리가 잘못을 범하였을 때 번제와 소제 제사를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를 화목하게 함은 물론 사람과의 관계, 타인에게 손해를 입혔을 때에도 그에 준하는 속건제(레 6:1-7)를 통해 제사를 드리도록 하였다. 이는 모든 경영자가 일반적인 기업윤리를 넘어 바르고 고결한(Beyond Integrity) 경영을 하도록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요청이다. 또 이러한 일들을 해결하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대속의 몸으로 십자가에 못밖혀 죽기까지 하셨다.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2026년 우리나라 전체 사업체수는 약 635만개이다. 국민의 50%가 넘는 2,573만명이 그 기업에 종사하며 경제활동을 하며 삶을 살아가고 있다. 성경적 기반에 따라 경영을 하는 기업이 너무나 귀하고 소중한 시대이다. 곧 부활주일이다. 부활의 소망에 따라 기업과 세상을 아름답게 변혁시키는 기업 경영자, 그리고 또 이를 격려하며 힘이 되어 주는 영적 멘토들이 이 땅의 교회 가운데 가득 일어나길 기도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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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3-26
  • [시사칼럼]우리 사이에 중재자가 없구나
    점입가경(漸入佳境)입니다. 지금 중동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 말입니다. 2월 말 미국과 이스라엘이 이란에 기습공격을 감행하면서 시작된 전선(戰線)이 사우디, 아랍에미레이트, 레바논 등 인접국들까지 확산일로에 있습니다. 대부분 산유국들이다 보니 유가가 급등하면서 세계경제가 휘청거리는데, 핵무기보유국까지 포함되어 있어서 자칫 핵전쟁이라도 일어나면 어떡하나 하는 심각한 우려까지 커져갑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하나 있습니다. 왜 적극적으로 중재에 나서는 존재가 하나도 없을까요? 1973년 10월에 이집트와 시리아가 연합해서 이스라엘을 침공했던 제4차 중동전쟁은 발발한 지 16일 만에 휴전협정을 체결하고 끝났습니다. 당시 전쟁당사자들 사이에서 맹활약했던 인물이 헨리 키신저(Henry Kissinger, 1923-2023) 미국 외무장관이었습니다. 미국이 중재자로 나선 까닭은 여럿 있었겠지만 그래도 명실상부 세계최강대국으로서 평화를 위한 거중조정자(mediator for Good)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부인하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이번 전쟁은 미국 자신이 평화의 파괴자(destructor of peace)로 나섰으니 일인자의 중재를 기대하기도 어렵지 않겠습니까? 역사적으로 보면 의외로 이러한 중재자 역할을 교황이 감당하곤 했습니다. 제국 간 투쟁이 본격화되면서 세계분할을 두고 스페인과 포르투칼이 당시 교황 알렉산드르 6세에게 중재를 요청할 정도였으니까요(1493년). 하지만 1, 2차 세계대전은 그런 중재력마저 무력화시키고 말았습니다. 최근 들어서도 미국과 쿠바 간 협정이라든지 특히 한국과 쿠바의 수교를 로마교황청이 중재했다는 보도가 나오기도 했습니다만, 그러나 이번 중동전쟁을 둘러싸고 평화를 위한 전쟁 종식과 생명을 위한 살상 금지를 호소하는 교황의 목소리는(그래도 연일 호소하고 촉구하고 있습니다) 여전히 큰 힘은 발휘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와 이슬람의 대립이라는 점, 교황의 출신 자체가 미국이라는 점 등이 더한 악재로 작용하겠지요. 국제연합은 무얼 하고 있을까요? 이럴 때 활동하라고 그래도 인류가 집단지성을 사용해서 만들어낸 단체가 아니었습니까? 제2대 유엔사무총장(1953-1961)이었던 스웨덴 출신의 다그 함마르셸드(Dag Hammarskjöld, 1901-1961)는 몸을 사리지 않고 지구촌 곳곳의 분쟁 지역을 직접 방문해서 중재를 시도한 사실로 유명합니다. 결국 아프리카의 콩고 사태에 뛰어들어 해당 지역을 지나다가 헬기 추락 사고로 사망한 그의 존재는 이후에도 많은 사람들의 가슴에서 분노와 복수의 총칼을 내려놓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유엔의 중재도 빛을 잃었습니다. 이번 전쟁도 마찬가지입니다. 벌써 4년째인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하나를 감당하지 못한 유엔의 역할을 기대하는 자체가 하나의 낭만일지 모르겠습니다. 최근 국내 상황을 지켜보면서도 비슷한 생각을 가져 보았습니다. 굴곡진 한국현대사의 고비마다 중재의 고초를 마다하지 않았던 종교계의 어른들이 계셨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중재를 부탁드릴 분들을 찾기가 어렵고, 중재를 자처하고 나서는 분들마저 만날 수가 없는 상황입니다. 문득 욥의 고백이 떠오르는 이유겠지요. “우리 사이에 손을 얹을 판결자도 없구나”(욥 9:33). ‘변론하다’(사 1:18)라는 의미도 있기 때문에 ‘중재자’라 해도 좋을 그런 존재를 사람들 사이에서 찾을 길이 없다는 푸념 섞인 목소리였습니다. 그래서 욥은 하늘을 바라봅니다. “지금 나의 증인이 하늘에 계시고 나의 중보자가 높은 데 계시니라”(욥 16:19). 그러면서 하늘에 계신 분이 우리 사이를 “중재”해 주시면 좋겠고(욥 16:21), “나의 대속자”(욥 19:25)가 되어 주시면 좋겠다는 소원을 피력합니다. 세월이 흘렀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이 없음을 보시며 중재자가 없음을 이상히 여기셨으므로”(사 59:16), 마침내 우리 가운데 진정한 중재자를 보내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약속을 이렇게 이루시지 않았습니까?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딤전 2:5). 그러니 ‘주여, 우리 사이를 중재해 주소서, 평화의 중보가 되어 주소서’ 이렇게 기도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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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3-26
  • [서임중칼럼]어두움에서 빛으로!
    트리나 폴리스의 동화 ‘꽃들에게 희망을’에는 두 마리 애벌레가 생의 의미를 찾아가는 여정이 그려져 있다. 줄무늬 애벌레와 노란 애벌레는 진리를 발견하고, 그 진리를 몸으로 체험하며 마침내 아름다운 나비가 된다. 애벌레였던 그들이 어둠과 고통의 시간을 지나 꽃들에게 희망을 주는 나비로 변화했다는 이 작품의 메시지는 분명하다. 그들은 더 이상 어제의 애벌레가 아니라, 새로운 존재로서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어두움에서 빛으로의 전환이며, 부활의 은총이자 부활 신앙의 삶이다. 어두움이란 무엇인가? 앞을 보지 못하니 분간할 수 없다.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구별하지 못하고, 아름다움과 추함도 판단할 수 없다. 혼란이며 죄악이고, 사망이며 무덤이다. 미움, 갈등, 원망과 불평, 불의와 더러움, 타협… 이 모든 것은 마귀가 지배하는 영역이다. 그러나 빛은 어떠한가? 앞을 볼 수 있기에 모든 것을 분별할 수 있다. 따뜻하며 생명을 살린다. 죄와 불의를 죽이고 질서를 세운다. 빛은 사랑이고 용서이며 기쁨이고 생명이다. 부활은 바로 이 어둠에서 빛으로의 전환이다. 불안의 어둠에서 평안의 빛으로, 근심의 어둠에서 기쁨의 빛으로, 미움의 어둠에서 사랑의 빛으로, 죽음의 어둠에서 생명의 빛으로, 절망의 어둠에서 소망의 빛으로 옮겨지는 것이다. 이것이 막달라 마리아에게 주어진 주님의 부활의 은총이며,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주어지는 은혜다. 오늘 우리의 현실은 어떠한가? 약육강식의 국제 정세 속에서 세계는 혼란에 빠져 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미국과 이란의 충돌로 세계는 어두움 속에 있다. 국내 상황도 마찬가지다. 정치권은 여야를 막론하고 당리당략에 치우쳐 백성의 고통을 듣지 못한다. 경제는 불투명하고, 교육 현장은 혼란스럽고, 사회는 부패의 냄새를 풍기고 있다. 질서를 외치지만 혼란은 반복되고, 권력은 하나님을 얽매려 하며, 불의는 하나님의 뜻을 훼손하려 든다. 교회조차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인간의 소리가 높아지고, 사역자들은 선지자적 삶이 아니라 생계를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고 있다는 탄식이 들려온다. 이 어둠의 역사를 밀어내고 빛이 비추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바로 어둠에서 빛으로의 전환이다. 교회의 어둠이 빛으로 바뀌면 사회도 빛으로 전환된다. 사회가 밝아지면 역사가 밝아진다. 이것이 부활의 은총이다. 사울 왕은 다윗을 미워했기에 그의 마음은 악신으로 인해 늘 괴로웠다. 그러나 다윗은 사울을 사랑했기에 오히려 그를 치료하는 사람이 되었다. 사울은 어둠 속에 살았지만, 다윗은 어둠에서 빛으로 전환된 삶을 살았다. 사도 바울도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자신의 그림자를 보지 못했다. 그림자가 없다는 것은 어둠 속에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빛 되신 예수님을 만났을 때 그는 비로소 자신의 그림자를 보았다. 그 순간 그는 자신을 보게 되었고, 만삭되지 못해 난 자요 죄인 중의 괴수라는 고백을 할 수 있었다. 이것이 빛과 그림자의 신비로운 이치다. 오늘날도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사울처럼 자신의 그림자를 보지 못한 채 살아가는 이들이 많다. 그림자는 빛이 있을 때만 보인다. 그 빛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예수님이 없는 마음과 삶은 이미 어두움이며, 그 속에서는 온갖 불의와 악이 드러날 뿐 아니라 그러한 행위를 옳다고 여기는 왜곡까지 나타난다(롬 1:28~32). 예수님이 계셔야 나의 그림자를 볼 수 있다. 나의 그림자를 볼 수 있어야 빛의 자녀로 살아갈 수 있다. 옛날 최희준 씨의 유행가 ‘빛과 그리고 그림자’가 있었다. <사랑은 나의 행복, 사랑은 나의 불행, 사랑하는 내 마음은 빛과 그리고 그림자> 허스키한 목소리로 눈을 지긋이 감고, 표정 하나에 메시지를 담아 노래하던 그의 모습이 새삼 떠오른다. 빛이 있어야 그림자가 있다. 빛과 그림자는 공존한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사랑을 하게 된다. 사랑을 함으로써 보잘것없는 풀잎 하나, 나뭇잎 하나, 무심코 맞았던 바람에도 관심을 갖게 되며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그래서 사랑은 덧니처럼 감출 수 없는 것이라고 했다. 사랑의 의미를 명쾌하게 설명한 것은 ‘에리히 프롬’ (Erich Fromm)이다. 프롬은 <사랑의 기술, The art of loving>이라는 명저를 쓰면서 다섯 가지의 사랑의 속성을 정의하였는데 곧 관심, 존중, 책임감, 이해, 그리고 먼저 주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랑이 우리를 활동적인 인간으로 만는다. 곧 변화의 시작은 사랑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무관심했던 사람이 따뜻한 관심의 사람으로 변화되고, 남을 무시하던 사람이 존중하는 사람으로 변화되고, 무책임하던 사람이 책임 있는 삶으로 변화되고, 이해심이 부족하던 사람이 이해심이 많은 사람으로 생활하게 되고, 이기적인 삶에 길들여 살던 사람이 주는 자의 삶을 살게 된다. 이것이 부활신앙이고 어두움에서 빛으로 전환된 삶이다.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 8:12)”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엡 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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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3-26
  • [소강석칼럼]“소 목사의 휴민트(HUMINT)”
    저는 신학교를 졸업하고 부목사로 써주는 교회가 없어서 교회를 개척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당시 신학교에서 교회 개척학에 대해서 가르쳐 주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당시에는 교회 개척학이라는 책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신학교를 다니던 시절에 강남에 있는 광림교회에서 세계적인 교회 성장학 교수인 피터 와그너를 초청하여 교회 개척과 성장론을 강의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신학교 수업을 빠지고 2박 3일 동안 세미나에 참석했습니다. 피터 와그너에 의하면 교회 성장은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야 하지만, 인간이 해야 할 일을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뭐냐 하면, 목회자가 교회를 개척할 지역부터 선정하고 그 지역에 대한 조사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지역 주민들이 원하는 욕구 진단을 파악해서 거기에 맞춰서 전도도 하고 설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여러 지역교회를 탐방하여 성공하는 목회자와 실패하는 목회자들에 대한 인터뷰를 하거나 그 이유에 대한 연구를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를 찾아가는 것은 쉽지만 그 교회 목사님을 1대1로 만나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열심히 노력한 결과 100여 명에 가까운 목회자를 만났고 수백 개의 교회를 방문하였습니다. 목회자를 못 만나고 주일 공예배에 참석하지 못해도 몇 주간의 주보를 보고 휴민트 작업을 하였습니다. 휴민트(HUMINT)란 사람(Human)과 정보(Intelligence)를 합성한 말로 사람을 통해 수집한 정보를 뜻합니다. 제가 보니까 성공하는 목회자와 교회는 설교부터 다르고 예배 분위기부터 달랐습니다. 아니, 예배에 성령의 임재가 느껴지고 설교에 역동성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부흥하지 않는 교회는 숫자가 적어서 그런지 몰라도 설교도 그저 그렇고 예배 분위기도 그저 그런 걸 보았습니다. 설교를 유심히 들으려고 하는데도 제 귀에 도대체 들려오지를 않는 것입니다. 대형교회 목회자는 개인적으로 만날래야 만날 수가 없었지만, 역시 대형교회는 예배 분위기가 다르고 설교가 달랐습니다. 그런데 대형교회 중에서 딱 한 분을 뵐 수가 있었는데 고 옥한흠 목사님이었습니다. 저희 신학교 동기 처제가 옥한흠 목사님의 비서로 있었기 때문에 그분을 통해서 몇 사람들과 함께 옥 목사님을 뵐 수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서울에서 신학교를 다닐 때 수요일이면 사랑의교회를 자주 다녔습니다. 그 후로도 옥 목사님은 가끔 뵐 때가 있었습니다. 제가 알기로 옥 목사님은 부지런한 독서광이자 설교 준비에 빈틈이 없을 정도로 거의 완벽하게 준비를 하시는 분이셨습니다. 만날 때마다 이렇게 물어보셨습니다. “맨땅에서 교회를 개척했는데 교회가 좀 부흥하고 있나요?” “예. 많이 부흥하고 있진 않지만 그래도 몇백 명은 모이고 있습니다. 그 후 저는 분당으로 교회를 신축해서 당시로서 개척 성공 신화를 이룬 사람으로 알려졌습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옥한흠 목사님께서는 비서를 시켜서 제 설교 테이프를 구해다가 들으셨다고 합니다. 뒤늦게 안 용어이지만 이 역시 존경하는 옥한흠 목사님의 휴민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 역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설교를 들어봤겠습니까? 그리고 개척 이후에도 정말 부흥하는 교회를 탐방하고 목사님들을 인터뷰한 적이 있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내린 잠정 결론은 역시 목회자에게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야 하고 성령 충만한 영성, 살아있는 설교, 그리고 성도를 향한 태도가 결정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도 한국의 대표적인 교회 중에 하나가 되었습니다. 아니 개척 목회자로서는 최대형 교회를 섬기고 있습니다. 저는 대형교회 목회자로만 자리매김한 것이 아니라 일찍부터 한국교회 공교회성을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포괄적 차별금지법을 비롯한 교회 생태계를 위협하는 반기독교 악법을 막아내는 데 앞장을 섰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광화문이나 여의도에 가서 집회를 하기보다는 전략적 휴민트를 통하여 해당 관계자들을 만나 설득하고 이해를 시켰습니다. 코로나 시기에 제가 한교총 대표회장을 할 때도 휴민트를 통한 코로나의 상황을 예측하고 무조건 현장 예배만 강행한 것이 아니라 루터와 칼빈처럼 소수의 현장 예배를 지키면서도 쿼런틴 시스템(격리 제도), 요즘 말로 하면 화상 줌이나 온라인 예배 등으로 이원화 전략을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한국교회 지도자들에게 이렇게 설득했습니다. “우리가 잠시만 찬란한 바보가 됩시다. 잠시만 허들링 처치가 되게 합시다. 그러면 국민들은 한국교회를 고맙게 생각할 것이고 코로나가 끝난 이후에는 더 신앙적 갈망이 생기고 교회를 영혼의 토포필리아로 생각하여 교회는 회복 탄력성을 더 얻게 될 것입니다.” 물론 반대를 하는 분들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회적 지탄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언론에서는 그런 어두운 면도 보도를 하였지만 찬란한 바보, 허들링 처치를 더 인상 깊게 보도 하였습니다. 지난 목요일에 ‘휴민트’라는 영화를 봤는데 저의 지나온 삶이 한 편의 영화처럼 떠올랐습니다. 휴민트 영화가 액션을 넘어 인간을 통한 정보, 신뢰, 인간애를 보여 주었듯이 저도 끊임없는 영적 휴민트를 통하여 제 자신을 발전시키고 성도들을 섬기며 새에덴교회를 굳게 지키며 더 부흥시켜 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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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2-27
  • [성서연구]있으라 하시니 있었고
    하나님의 창조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것(creatio ex nihilo)입니다. 한자로 <유>는 <있을 유>로서 <있음>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유>자가 붙으면, <있다>는 의미가 됩니다. <유의미, 有意味>라는 말은 <의미가 있다>는 뜻입니다. <유리, 有利>는 말은 <이익이 있다>는 뜻이지요. <있다>는 것은 긍정의 의미입니다. <있음>의 반대는 <없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기 전 상태는 아무 것도 없는, 무의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랬더니 <빛이 있었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없던 곳에 빛이 있은 후,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았습니다. 없음보다 있음이 아름답습니다. 없음은 슬픔입니다. 집은 있는데, 살림살이가 하나도 없이 텅 빈 방, 살림살이는 있는데, 기다리는 사람이 없는 집은 허전합니다. 하나님은 있게 하십니다. 반면에 사탄은 있는 것을 없게 합니다. 하나님은 채워 주시고, 사탄은 있던 것도 사라지게 만듭니다. 아버지 재산을 받아 집을 나간 탕자에게 재산을 준 분은 아버지입니다. 그런데 그 재산을 잃고 빈털터리가 되게 한 것은 그를 타락의 영으로 이끈 사탄입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한 사람은 하나님을 닮습니다. 이런 사람은 없어서 고통 받는 곳에 있게 하는 열매를 맺습니다. 이런 사람은 자기 것을 가지고 와서 채웁니다. 있게 합니다. <있어요.>라고 말합니다. <있을 겁니다.>라고 말하여 사람들을 격려합니다. 이런 사람은 긍정적입니다. 그러나 사단의 영에 끌리는 사람은 있어도 없다고 말합니다. 있는 것도 없게 합니다. <없을 겁니다.>라고 말하여 사람들을 낙망하게 만듭니다. 이런 사람은 부정적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데스 바네아에서 정탐꾼을 보냈을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열 명은 없는 것만 말했습니다. 적들처럼 강하지도 못하고, 신체가 우람하지도 못하다면서, 없는 것을 부각시켜 백성을 낙심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있는 것을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시기 때문에 이길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컵에 물이 절반쯤 있을 때, 말하는 법이 두 가지입니다. 어떤 사람은 <물이 반 밖에 없다>고 하면서 없는 것을 부각시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물이 반이나 있다>고 하면서 있는 것에 눈길을 줍니다. 목회하면서 여러 종류의 사람을 만났습니다. 목회자에게 고마운 사람은 있는 것을 말씀하는 이들입니다. <목사님, 우리 교회는 기도하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꼬마들이 많습니다. 열정 있는 성도가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이들은 큰 힘이 됩니다. 교회에 긍정의 바람을 불어넣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이것도 없고, 저것도 없다면서, 그래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이런 이들은 교회를 힘들게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있는 하는 성령으로 주신 말씀>입니다. <빛이 있으라>고 말씀하시니, <빛이 있었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창조란 <있게 하는 역사>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있게 하시는 성령님의 역사를 믿는다면, 우리도 있게 하는 사람으로 살아야 합니다. 있는 것을 발견하고, 있을 것을 믿고 살아야 합니다. 술주정뱅이 아버지가 살림을 부수고, 가족을 구타하는 가정에서 불우하게 사는 소녀가 있었습니다. 그녀의 담임인 <앨리스 팔머>는 어린이들에게 <각자의 집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을 가져오기>라는 숙제를 냈습니다. 그리고 선생님은 그 가난한 소녀 때문에 밤새 그런 숙제를 낸 것을 후회했습니다. 다음날 어린이들은 예쁜 인형, 장난감 등을 가지고 와서 자랑했습니다. 가난한 소녀의 차례가 되었습니다. 소녀는 말했습니다. <우리 집에는 가져올 물건은 없어요. 그러나 오늘 아침 눈을 떴을 때, 내 팔을 베고 자는 동생의 금발이 아침 햇살에 찬란하게 빛나는 것을 보았어요>라고 말했습니다. 선생님은 소녀를 칭찬했습니다. <평생 네 주변에서 잘 찾아보면 하나님이 주신 아름다운 것이 반드시 어딘가에 있을 거다. 그것 찾아내며 살라>고 당부했습니다. 소녀는 큰 사업가로 성공했습니다. 없는 것에 슬퍼하지 않고, 있는 것을 찾으며 산 결과였습니다. 있게 하시는 하나님의 영은 이 봄에 겨울 동안에 텅 비었던 산하를 다시 푸름으로 채우실 것입니다. 있게 하시는 성령님 안에서, 있게 하는 사람으로 살길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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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2-27
  • [성경적 경영학개론] ① 서문
    ‘성경적 경영학개론(Principles of Biblical Business Administration; P-BBA)’이라는 주제로 칼럼을 시작한다. 월1회, 1년을 목표로 연재를 이어갔으면 한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경제 환경이 정상화되었다. 그럼에도 기업을 둘러싼 경영환경은 어느 때보다도 복잡하고 불확실하다. AI와 디지털 전환이라는 거대한 플랫폼은 물론, 많은 크리스천 경영자들이 이윤 극대화와 무한 경쟁이란 세속적 가치관 속에서 여전히 신앙과 현실의 긴장을 마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경적 경영학이란 무엇일까? 본 칼럼은 기업의 목적과 인간의 가치, 그리고 재화의 흐름을 성경 원리에 따라 창조주 하나님의 질서 안에서 탐구하는 학문적·실천적 체계로 정의하며 글을 시작하고자 한다. 미국의 복음주의 신학자이자 목회자인 제임스 패커(J.I. Packer, 1926–2020)는 그리스도인이 기업경영을 하는 목적을 다음과 같이 체계화하였다. 첫째, 경영은 단순히 부를 창출하는 과정을 넘어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수행하는 소명으로, 이윤 극대화의 경제적 가치를 넘어 신앙적 가치를 통합한다. 둘째,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는 경영(Glorifying God)으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시장을 통해 새로운 기업가치를 창출한다. 셋째,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봉사 경영(Service to Neighbors)으로, 구성원을 생산의 수단 아닌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격체로 대우하고 고객과의 관계에서도 신뢰할 수 있는 경영을 한다. 넷째, 성화의 경영(Sanctification in Business)으로 경영자가 경험하는 고민과 의사결정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는 성화의 도구 역할을 한다. 다섯째, 청지기적 사명(Stewardship)의 실천 경영으로 위탁된 자원을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관리하여 사회 유익과 복음을 위해 사용한다. 즉 패커는 기업의 주인이 하나님이라는 절대 주권과 더불어,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적이 하나님의 영화롭게 하는데 있음을 제시한 종교개혁자 존 칼뱅(John Calvin, 1509–1564)은 물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 1647)과 일치하는 기업경영론을 제시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들 사상은 앞으로 본 칼럼이 개혁 신앙의 토대위에 글을 집필해 가는데 있어서도 중요한 근간이 될 것이다. 본 칼럼은 ‘경영학원론’과는 다른 ‘경영학개론’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이는 경영에 대한 지식을 자세히 전달하는 것보다, 일련의 경영학의 큰 흐름속에서 이를 기독교 신앙과 연결한 신학적 통찰의 제시에 더 큰 의미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1998년 학위를 취득하고 필자가 지금의 대학 경영학부에 재직한지 28년이 되어 간다. 아울러 그동안 로고스경영학회 학술지 <로고스경영연구> 편집위원장 3년 업무를 마치고, 올해부터 학회장으로 봉사하게 되었다. 본 칼럼은 2002년에 설립된 로고스경영학회의 논문을 일부 반영하고 있다. 또 기독경영연구원(KOCAM)의 축적된 이슈와 한국기독인실업인회(CBMC)의 활동을 포함한 경영사례도 반영할 예정이다. 주요 참고문헌은 리처드 츄닝(Richard Chewning)의 <기업경영과 성경적 원리>, 스콧 레이(Scott B. Rae)와 켄만 웡(Ken Man-Wong)의 <비즈니스 윤리와 지속가능 경영>, 개혁주의학술원의 <칼빈과 사회> 등이 있다. 이 칼럼의 논리는 영리 목적의 기업에만 국한하지 않는다. 국가와 가정, 사회 그리고 교회 등 신앙생활의 주체가 되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다양하게 활용될 수도 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잠언16:9)’. 스스로 자문해 보길 바란다. ‘나는 지금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는 성경적 경영의 삶을 살고 있는가’ 그리고 함께 칼럼을 출발해 갔으면 한다. * 문의: sblee6@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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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2-27
  • [시사칼럼]봄동비빔밥과 라캉의 욕망론
    한동안 ‘두쫀쿠’(두바이쫀득쿠키) 열풍이 불더니 이제는 ‘봄동비빔밥’이 대유행입니다. 최근 썸트렌드(Sometrend)의 빅데이터 집계 결과 지난달 13일부터 한 달 동안 ‘봄동비빔밥’ 언급량이 작년 같은 기간 대비 540% 이상 치솟았다고 합니다(세계일보). 구글트렌드 검색 추이에서도 동일한 검색어의 관심도가 한 달 사이에 15에서 100으로 최고치를 찍었답니다(한국경제신문). 검색은 구매를 촉발했습니다. 공급이 수요보다 모자라는 상황입니다. 당연히 가격도 올라 불과 1주 만에 32% 상승했고 전년 대비로는 78% 올랐답니다(서울시농수산식품공사). 호들갑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벌써 ‘봄동 대란’이란 말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두쫀쿠’에 열광하며 ‘두쫀쿠 지도’를 제작하고 ‘두케팅’이란 신조어를 만들기까지 하면서 가히 ‘두쫀쿠 신드롬’에 빠져 있던 사람들이 갑자기 봄동 기차로 갈아탄 느낌입니다. 어느 전문 매거진은 ‘두쫀쿠→봄동비빔밥’의 갑작스런 환승 이유를 몇 가지로 분석했습니다(푸슬레터). 우선 낮은 레시피 장벽입니다. 봄동도 결국 배추인지라 누구에게나 겉절이로 무쳐내는 일이 낯설거나 어렵지가 않고 모양을 꾸미거나 참기름을 제외하면 특별한 첨가물이 필요한 것도 아니라서 단번에 일반 가정의 식탁을 휘어잡는 장악력을 발휘했다는 것입니다. 한편 두쫀쿠는 점점 가격이 올라 나중에는 한 알이 만원에 육박하는 미친 인플레를 보여주었는데, 봄동은 아무리 올랐다지만 3~4천 원이면 4인 가정이 한 끼를 해결할 수 있는 반전의 가성비를 보여주었다는 사실입니다. 게다가 지도까지 나올 정도로 구매하기 어렵던 두쫀쿠와 달리 인근 마트에 가면 언제든지 구할 수 있는 접근성 또한 봄동의 돌풍에 단단히 한몫을 했다고 보았습니다. 우리 가족도 봄동비빔밥을 여러 번 맛있게 먹었을 정도니까요. 그러나 둘은 비록 확연히 다른 먹을거리지만 순식간에 국민 음식이 되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이들 열풍은 일종의 루틴을 따르는데, 일단 셀럽들이 소개하여 화제가 되고 이후 인플루언서들이 가세하면서 폭발적으로 확대재생산되는 과정을 거칩니다. 요즘 용어로 정의한다면 ‘알고리즘에 의한 따라하기’라 하겠지만, 근본적으로는 ‘욕망’에서 기인하는 현상이라고 해야 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조차도 성경을 인용하면서(요일 2:16) 인간을 욕망의 존재로 간주하고, “내게 네가 욕망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말해준다면, 나는 네가 어떤 존재인지를 말해주겠다”고 한 바 있습니다(고백록 3권). 그런데 내가 무엇을 욕망하는지 분명하고 확실하게 알 수 있나요? 현대의 욕망에 관한 심리학적 이론들은 바로 이 지점을 파고듭니다. 자크 라캉은 욕망의 개념에 관해 ‘전염’(프로이트)이나 ‘모방’(르네 지라르)을 넘어서 아예 ‘주체의 욕망은 곧 타자의 욕망’이라 선언했습니다. 그럴듯한 주장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봄동 먹고 싶다’고 스스로 생각한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대부분은 유튜브 같은 매체를 통해서 식욕을 느꼈을 텐데, 그렇다면 타자의 욕망이 나(주체)의 욕망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을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라캉 식의 ‘욕망의 전이’나 ‘상상적(상징적) 동일시’에는 긍정적인 측면도 있겠지만 부정적인 측면도 존재합니다. 첫째, 무기력과 약점이나 죄의식을 타자와 공유할 수 있습니다. 부정적 욕망은 감염역이 강합니다. 집단적으로 동일시 과정을 거치면서 자기도 모르게 그릇된 애국주의나 인종차별주의 혹은 극우나 극좌 같은 편향된 사상에 물들기도 합니다. 둘째, ‘인간은 타인의 욕망을 욕망한다’(l'homme désire le désir de l'Autre)는 라캉의 명제는 필연적으로 타인을 향한 경쟁심과 시기·질투를 동반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실제로 욕망이 분쟁의 불씨인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셋째, 주체의 요구와 타자의 요구가 딱 맞아떨어기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따라서 끊임없는 욕구 불만과 채워지지 않는 갈증에 시달리게 마련입니다. 넷째, 주체성의 상실이라고 하는 가장 본질적인 문제입니다. 싸르트르가 ‘타자의 눈은 지옥’이라(닫힌 방) 말한 이유도 여기 있습니다. 전통적 신학은 이런 욕망을 ‘뒤틀린 사랑’이라 했습니다. 그리고 해결책을 신의 은총에서 구했습니다. 타인의 욕망은 나를 만족시킬 수 없습니다. 타인의 신앙도 결코 나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건강에도 좋은 제철음식인 봄동비빔밥은 맛있게 드시되, 누구에게나 혹은 무엇에게든 나의 정체성을 뺏기지 말고, 특히 자기 신앙을 지키는 모두가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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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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