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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서연구] 안식, 하나님의 마지막 창조
    감리교의 창시자인 요한 웨슬리는 한순간도 아까워하면서 열심히 살았습니다. 그는 <마차를 기다리느라고 10분을 영원히 상실했다. 오. 이 상실을 어디서 보상받을 것인가!>라고 탄식하기도 했습니다. 최선을 다해 바쁘게 사는 사람의 말입니다. 현대 생활은 매우 분주하고 피곤합니다. 그러다 보니 휴가를 애타게 기다리게 되었고, 그것은 평소 생활이 그만큼 피곤하다는 반증입니다. 그러다 모처럼 휴식이 오면 나사 풀린 기계처럼 됩니다. 사고와 범죄가 급증하고, 문란해집니다. 성경은 안식이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라고 말씀합니다. 창세기 2장 2절을 보면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라고 되어있습니다. 이 말씀은 <일곱째 날에 끝났다>는 것입니다. 좀 이상합니다. 창조가 여섯째 날에 끝나지 않고 일곱째 날에도 계속되었다는 말이니까요. 그렇다면 일곱째 날에 창조된 것은 무엇일까요? 이에 대해 11세기의 유명한 랍비였던 <이챠크>는 하나님께서 일곱째 날에 <메누하, 혹은 사바 쓰>를 만드셨다고 했습니다. 메누하는 안식입니다. 안식일을 사바쓰라고 부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일곱째 날 맨 마지막으로 안식을 만드시고, 안식을 누리셨습니다. 엿새 동안 만드신 만물에 안식이 첨가되자 창조가 완성되었습니다. 안식은 창조의 마침표요, 꽃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휴식은 목적이 아니며, 노동으로 돌아가기 위해 힘을 축적하는 것일 뿐>이라고 했는데, 이렇게 되면 노동이 최고이고, 휴식은 노동을 위한 수단일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서는 안식 자체가 목적입니다. 노동을 위한 안식이 아니라, 안식을 위해서 노동하는 것입니다. 제7일은 나머지 6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엿새가 제7일을 위해서 존재합니다. 게다가 하나님은 일곱째 날을 <거룩하게> 하셨습니다. 창세기 2장 3절을 보면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것이나 거룩하게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이 거룩하게 하신 것들은 매주 중요한 것들인데, 예를 들어서 이스라엘 백성들, 그리고 성전을 거룩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것들보다 먼저 거룩하게 하신 것은 <안식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날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안식을 무시하면 안 됩니다. 안식 없는 인생은 미완성입니다. 안식 없는 성공은 불쌍합니다. 그런데 안식 없는 가정이 많습니다.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부모님께 가장 원하는 것을 조사했더니, 50% 이상이 <싸우지 않으면 좋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중세 수도원 규율은 엄격했습니다. 새벽에 기상해서 여덟 번 기도하고, 몇 시간의 성경 읽는 시간이 있고, 각자의 특기대로 노동했습니다. 그리고는 밤늦게 잠자리에 듭니다. 그들은 육체를 피곤하게 할수록 훌륭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심지어 채찍으로 자기 몸을 때리기도 했습니다. 가장 조용하고 쉼이 있을 것 같은 수도 생활에도 안식이 부족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안식을 주시는 분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안식의 나라입니다. 안식을 무시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가 필요 없다고 말하는 셈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필요 없는 사람은 지옥에나 갈 사람인 셈입니다. 그래서 안식일을 범하는 것은 사형에 해당하는 죄였습니다. 그러나 안식을 사랑하여 안식일을 잘 지키면 복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어떤 마음으로 안식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첫째는 안식을 주시는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도 칠 일에는 쉬셨음을 기억하면서, 하나님 안에서 안식해야 합니다. 둘째는 신명기 5장 15절의 말씀처럼 애굽에서의 구원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노예였던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지지 않으셨다면 안식은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약하면 창조주 하나님, 구원자 하나님을 기억할 때 참 안식이 주어집니다. 그러기에 하나님 없는 안식은 저주일 뿐입니다. 세상 안식에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기 때문에, 방종과 쾌락의 추구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서의 안식은 영원과 연결되어 우리를 거룩하게 하고 참 평안으로 인도합니다. 올 여름 휴가철을 맞이하여 하나님 안에서 참 안식을 맛보길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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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7-21
  • [시사칼럼] 대기의 강
    최근에 하늘에도 강이 생겼다는 사실을 알고 계신가요? “하늘에 흐르는 ‘대기(大氣)의 강’이 최근 물난리의 원인” 같은 기사를 부쩍 많이 대합니다. 여기서 “대기의 강”(Atmosphere River)이 바로 하늘에 생긴 강입니다. 열대 지방에서 발생한 수증기가 좁고 길게 마치 강을 이룬 것처럼 상공에 모여 있기 때문에 붙은 이름입니다. “좁고 길게”라고 했지만 사실은 길이만 해도 2,000km 이상이고 너비도 수백km에 이를 때가 많습니다. 미국 하와이부터 서부 캘리포니아까지 이어지는 대기의 강이 대표적입니다. 떠다니는 강이나 마찬가지라 상공의 강한 기류를 타고 이동이 가능하고 그러다가 어느 순간 엄청난 비를 쏟아냅니다. 대기의 강의 길이와 수량은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입니다. 기상관측위성에서 포착한 것들 중에는 중국 대륙 동부에서 북미 대륙 서부까지 10,000km 이상 길게 형성된 경우도 있었습니다.(나일 강 6,650km) 또한 웬만한 대기의 강 하나가 지구상에서 가장 긴 강들보다 더 많은 양의 물을 운반할 수 있다고 알려졌습니다. 과학자들이 측정한 바에 따르면 아마존 강의 2배, 미시시피 강의 15배나 되는 양의 물을 품은 대기의 강도 존재했다고 합니다. 그 위력이 어느 정도인지를 잘 알려주는 사건이 작년 8월에 발생했습니다. 미국 텍사스 일대에 대기의 강으로 인해 하루 동안 2,300mm 가량의 비가 내려 데스벨리(Death Valley) 지역까지 천 년 만에 물에 잠기는 대홍수가 일어났습니다. 여름과 비에 국한되지도 않습니다. 올해 초에는 캘리포니아를 3개월 동안 총 서른 번 이상이나 대기의 강이 덮쳐서 폭우와 함께 기록적인 폭설이 내리기도 했습니다. 한반도도 예외가 아닙니다. 지난 2020년 여름에 관측 사상 최장(54일)의 비가 내려 섬진강이 범람하고 수십 명이 목숨을 잃었는데, 대기의 강 때문에 일어난 현상이었습니다. 그리고 올해 다시 동일한 원리로 많은 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벌써 기록적인 강수량 수치가 속속 나타났습니다. 전북 익산에 하루 388mm, 충남 청양에 누적 강수량 580mm, 그리고 전국 누적 강수량(16일 현재 511.7mm) 역시 기상청이 집계를 시작한 1973년 이래로 최고를 기록했습니다. 집중적으로 내린 엄청난 양의 빗물을 감당하지 못하고 충북 괴산댐에서는 ‘월류(越流)’가 발생해서 수천 명의 주민들이 대피하기도 했습니다. 수문을 통해 강물을 방출하는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물이 댐 위로 흘러서 넘쳤다는 뜻입니다. 미처 대비할 틈도 없이 급격하게 불어난 물로 인해 인근의 미호 제방이 터지면서 순식간에 침수되어 십여 명이 안타깝게 목숨을 잃은 오송의 지하차도 사고는 생각할수록 가슴이 아픕니다. 그런데 더 심각한 문제는 기후 위기로 “대기의 강” 현상이 점점 더 심각해지고 있다는데 있습니다. 지구의 평균 기온은 지난 40년 간 계속 상승하고 있습니다. 2011년부터 2020년까지 10년 동안 지구의 평균 기온은 지난 세기와 비교할 때 1.09도가 올랐는데, 지금 추이대로 간다면 21세기 말까지 4도 이상이 되리라고 추정합니다. 기후변화학회에 따르면 온도가 1도 오르면 대기 중 수증기량이 약 7% 늘어난다고 합니다. 지금 이대로 간다면 앞으로 생길 대기의 강의 위력은 어떠하겠습니까? 한국의 경우에도 전술한 기간 동안 전체 평균 기온이 1.8도가 올랐고, 수도권의 경우에는 2.8도나 상승했다고 합니다. 이대로라면 갈수록 비가 내리는 기간이나 강수량이 지금보다 더 증가하지 않겠습니까? 2015년 12월 12일에 채택된 파리기후협정은 이런 현상들과 관련하여 지구의 평균 기온이 산업화 이전보다 2도 이상 올라가면 안 되고 온실가스 배출량과 흡수량의 균형을 맞추어야 한다는 두 가지 중요한 원칙을 세웠습니다. 이에 따라 IPCC(기후변화에 관한 정부간 협의체)는 2018년 10월 6일 한국에서 <지구온난화 1.5도>라는 특별보고서를 채택하였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각국의 입장과 자국의 이해관계로 인해 앞길이 험난해 보입니다.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면 이 율법 책에 기록하지 아니한 질병과 모든 재앙을 네가 멸망하기까지 여호와께서 네게 내리실 것이니”(신 28:15, 61). 다시는 물로 인류를 심판하진 않는다고 약속하셨지만, 그래도 이제는 창조주의 준엄한 경고를 모두 함께 심각하게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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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7-21
  • [은혜의말씀] 그의 옷에 손만 대어도(막 5:25-34)
    열두 해를 혈류증을 앓고 있는 한 여인이 있습니다. 혈류증이란 하혈을 하는 부인병입니다. 12년 동안 치료라는 치료는 다 받아 보았지만, 차도는 없고 오히려 점점 더 심해져갑니다. 이제는 병원비도 다 떨어지고, 병은 더 심해져가고, 그럴 때 그 절망감을 어찌 말로다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더군다나 그 당시 그런 병은 단순한 질병이 아니라, 무언가 죄를 지어서 그렇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그런 병에 걸린 사람은 성 밖으로 쫓겨나서, 혼자 머물러야 했습니다. 사회(가족)로부터 철저하게 ‘격리’를 당하는 것입니다. 절망도 이런 절망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기적이 일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을 만나 병 고침을 얻는 상상할 수 없는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더 이상 소망이 없는 줄 알았는데, 완전히 끝난 줄 알았는데, ‘새 생명’을 얻게 된 것입니다. 자, 그러면 이 여인 어떻게 이런 기적을 체험할 수 있었을까요? 포기하지 믿음 때문입니다. (27절) 나사렛 예수가 ‘능력과 이적’을 행한다는 소문입니다. 그 소문을 듣고, 예수님을 만나러 나아온 것입니다. 이 ‘듣고’라는 단어가 중요합니다. 위대한 ‘구원의 역사’는 들음에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여인의 운명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의 소문을 듣는 자마다 삶이 바뀔 것입니다. 왜요? 예수가 복음이기 때문입니다. 이 여인은 여전히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배워야 할 점이 그것입니다. 무슨 일을 당해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희망을 붙드는 것이 기적의 출발점입니다. 특히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사람은 결코 절망해서는 안 됩니다. 모든 성도님들은, 어떤 절망의 순간에도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 여러분 되시길 축복합니다. 그러면 반드시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시작될 것입니다. 2. 믿음의 손으로 주님을 붙들었기 때문입니다. (28절) 소문을 듣고, 어떻게 했습니까? 예수님을 향해서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예수의 옷자락을 만졌습니다. 믿음으로 예수님의 옷자락을 붙든 것입니다. 예수님의 옷자락만 붙들어도 나을 수 있다는 믿음으로 나아온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의 믿음이 무엇입니까? 사실 여기에서 드러난 이 여인은 믿음은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보면 굉장히 소극적이고, 아주 작은 믿음입니다. 그런데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주님이 그것을 믿음으로 여겨주셨기 때문입니다.(34절) 중요한 것은, 이런 허물투성이인 여인에게 주님이 어떻게 반응하셨는가? 하는 점입니다. 주님은 있는 모습 그대로 여인을 받아주셨습니다. 그것이 은혜고, 그것이 복음입니다. 예수님이 여인을 찾으시는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옷에 접촉이 일어났다고 모든 사람에게 역사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작은 믿음이지만 나아갈 때 역사가 일어납니다. 주님은 간절함으로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영혼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오늘도 많은 사람이 주님께 나아오지만, 어떤 모습, 어떤 마음으로 찾아왔는지를 다 아십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우리의 고독과 슬픔 속에 얼마든지 들어오시는 분이십니다. 말씀을 마무리하면서, 한 가지 더 보아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본문의 이야기를 보면, 혈루증 여인이 주님에게로 다가간 것은 맞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어쩌면 주님께서 그 여인을 향해 다가가고 계신 것은 아니었을까요? 12년 동안 고통과 절망 속에 눈물 흘려야 했던 한 영혼을 향해 주님은 사랑의 발걸음을 옮기고 계셨던 것입니다. 주님은 고통 속에 있는 자들에게 기꺼이 다가가시는 분이십니다. 주님은 지금도 당신의 힘든 인생 한가운데로 걸어가고 계십니다. 여러분이 조금이라도 마음을 열기만 한다면, 절대 무시하지 않으시고 무한한 사랑을 베푸십니다. 주님의 옷자락만이라도 만지고자 하는 심정으로 나아온다면 주님은 한없는 사랑을 베풀어 주십니다. 그 여인을 향해 말씀하셨던 선포가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선포되길 바랍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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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7-21
  • [교회음악칼럼] 찬송(예배)하며 사는 사람들 6
    어김없이 올해도 장마철을 지나고 있다. 원하진 않지만 여전히 어려움을 겪는 이웃들의 소식을 뉴스를 통해 접하게 된다. 반갑지 않고 피하고 싶은 일들이 해마다 반복되지만 크게 달라지는 것은 별로 없어 보인다. 하나님의 섭리 앞에서 외소하기 짝이 없는 우리를 모습을 날마다 확인할 뿐이다. 그런데 항상 느끼는 일이지만 이러한 재난이 일어날 때 마다 요란을 떨며 대책을 강구하고 다시는 반복적으로 당하지 않을 것처럼 다짐을 하지만 시간이 조금만 지나면 너무 쉬이 잊어버리고 또다시 옛 이야기처럼 되어 버린다는 사실이다. 마치 고난 중에 열심히 기도하며 찾았던 주님을 시간이 지나며 간절함도 열정도 식어져버리는 우리의 비겁함을 보는 듯, 실로 출애굽 하여 광야를 헤매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과 딱히 다를 바 없음에 민망한 마음으로 회개하며 자신을 다시금 돌아보게 된다. 이런 형편없는 모습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랑의 끈을 놓지 않으시고 포기하지도 아니하시는 좋으신 하나님을 찬양한다. 한때 유명가수요 작곡가였던 어느 목사님의 간증이다. 인생에서 가장 심각한 고난 중에 있을 때, 그것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열심히 사역하며 결국 목사안수까지 받았는데 그 시기에 찾아온 너무도 힘든 상황을 맞아 절박한 심정으로 하나님의 도우심과 구원해 주시기를 간절히 간구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하나님으로 받은 질문은 오히려 너가 나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느냐? 였다고 한다. 깊이 자신을 되돌아보는 가운데 그러지 못한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고 한다. 당연히 목사님의 신앙과 사역의 페러다임은 바뀌었고 늘 이 원초적인 질문에 반응하고 응답하는 방향으로 전환되었다고 한다. 이렇듯 극한고난을 통하여서라도 사랑하는 당신의 백성들을 간섭하시고 선하게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와 은혜를 감사하며 노래로 고백하는 것을 들었다. 시대의 급격한 변화와 자연의 섭리를 통한 하나님의 역사를 어찌 우매한 인생들이 일일이 알아서 준비하고, 대비하여 피할 수 있겠는가? 더구나 인간의 영혼이 극도로 피폐해지고 파괴되어져가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자신은 물론 주변을 돌아보며 애통하는 마음을 가질 뿐만 아니라 우리의 우리 됨을 인정하고 겸손하게 가장 중요한 질문이자 계명인 “너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라는 말씀을 날마다 기억하며 진실 된 예배자로 살아갈 필요가 절실한 시간이다. 사랑하는 신실한 주의 백성들을 통하여 이 땅위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고 강력하게 선포되기를 원한다. 살아있는 예배와 진실 된 찬송이 끊임없이 생명력 있게 드려지기를 소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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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7-21
  • [목회자칼럼] 색다른 은혜(망각의 은혜)
    학교 다닐 때 꼭 이런 친구가 있었다. “나, 이번 기말고사, 공부할 시간이 너무 없어서 외우지도 못하고 한 번 읽기만 했어” 그런데, 막상 시험을 치면 90점 혹은 100점. 나는 시험 범위를 몇 번이고 읽고 외워도 80점이고, 영어 단어는 외운 후 돌아서면 잊어버리곤 했는데 한 번 스윽 훑고 시험을 쳤는데도 90점 이상이 나오는 친구가 있었다. 그런 친구들을 보면 정말 부러웠다. 어린 시절부터 성인이 될 때까지 ‘기억력’ 좋은 것은 곧 좋은 성적과 성공의 보장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천재들의 소유물인 기억력을 갖고 싶었다. 세월이 흘러 나이가 들어보니, 나에게는 기억력과는 정반대의 은혜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바로 ‘잊어버림의 은혜’ ‘망각의 은혜’이다. 인간에게는 기억하는 능력의 축복도 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잊어버리는 은혜의 축복도 있다. 망각이라는 은혜가 없었다면, 우리는 수많은 스트레스 상황 속에서 이상행동과 정신질환으로 어지럽고 혼란스런 세상 속에 놓여지게 될 것이다. 그렇기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색다른 은혜는 바로 ‘망각’이라는 선물이다. [망각의 즐거움]이란 책을 쓴 임희택은 대한스트레스학회 정회원으로 스트레스 전문센터를 운영 중이다. 스트레스와 관련된 칼럼을 쓰고, 철학 심리학 인지 과학 등으로 밝혀낸 망각과 몰입의 기술을 소개한다. 그는 망각은 필요 없는 스트레스에 정신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에너지를 현재에 집중시킬 수 있게 도와준다고 말한다. 그렇다고 이 책은 모든 기억을 잊어버리라고 말하지 않는다. 단순히 마음 비우기, 명상 용법 등을 다루는 것도 아니다. 망각의 필요성을 인문학으로 접근해 독자들을 설득시키고 동시에 몰입하는 기술을 알려준다. “기억을 다스리는 자가 행복해진다” “현대 사회의 모든 심리적 고통은 기억에서 온다” 물질의 음과 양이 있듯, 인간도 기억과 망각 모두 필요하다. 심을 때가 있고 거둘 때가 있으며, 달릴 때가 있고 멈출 때가 있다. 그리고 때로는 기억하는 힘보다 망각하는 힘이 더욱 중요하다. 행복을 기억할 수는 있지만, 망각 없이는 결단코 행복을 얻을 수 없다. 이런 면에서 기억이 축복과 진리라면 망각도 축복과 진리이다. 그러나, 인간의 상처는 이런 원리들을 거슬러 반대로 한다. 꼭 기억해야 할 것은 잊어버리고, 오히려 꼭 잊어야 할 것들을 기억한다. 신앙인으로 내가 죄인인 것, 구원받은 은혜는 꼭 기억해야 하는데, 이런 사실들을 때때로 잊으면서 기도 응답 받지 못한 것, 공동체로부터 받은 상처는 아주 작은 것까지 다 기억하고 있다. 인간은 하루도 수 천 가지, 수 만 가지 생각을 한다. 그런데 이 가운데 90% 이상이 일어나지도 않을, 걱정할 필요도 없는, 망상 같은 생각이라도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생각들을 멈추거나 잊고, 은혜의 기억들을 간직하며 사명자로 살아야하지 않을까? 성경은 모세라는 인물을 통해 우리에게 기억과 망각에 대한 교훈을 제시한다. 모세는 과거의 영광도 많았지만, 영광만큼 아픔 또한 많았던 인물이다. 왕궁에서 왕자로서의 삶을 살았지만, 그 영광을 잊고 민족의 지도자로 부름 받았다. 부름 받은 후, 광야에서의 40년을 보내며 자신의 상처는 잊고, 하나님의 은혜와 부르심은 기억하며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했다. 모세는 사명의 사람이었고, 사명을 통해 ‘기억의 은혜’와 ‘망각의 은혜’를 잘 사용해 위대한 지도가가 되었다. 내가 속한 공동체를 한번 돌아보자. 잊어야 할 상처와 아픔에 묶여 여전히 한걸음도 나서지 못하고 있는 지체가 있지는 않은가? 혹은 수많은 상처와 고난을 겪었지만 그 경험을 자신의 자양분 삼아 은혜의 기억으로 사명자의 삶을 살아가는 지체가 있지는 않은가? 우리는 망각을 넘어 새로운 미래의 소망, 날 부르신 사랑과 은혜를 기억하며 나에게 맡겨주신 사명에 집중해야 한다. 그럴 때, 하나님의 은혜가 내 속에서 샘솟듯 흘러나게 될 것이다. 과거 상처와 아픔에 대한 망각의 은혜가 다시 미래를 향한 사랑과 소망의 항구로 인도할 것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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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7-21
  • [이상규교수의 역사탐색] 독립운동가 박보렴 여사
    우리에게 알려져 있지 않는 인물 중에 우리의 주목을 끄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중의 한 사람이 여성 독립운동가 박보렴(朴寶奩, 1897-1984) 여사이다. 부산시 동구 범일동에서 박기만과 양주련의 4남매 중 막내로 1897년 11월 8일 출생했는데 박성애 목사의 막내 동생이었다. 박성애(朴晟愛) 목사는 심취명, 정덕생에 이어 부산경남지방 3번째 한국인 목사로 커를 선교사와 같이 호주 장로교 선교부 진주 지부를 개척한 인물이자 진주교회와 항서교회, 제일영도교회, 진주 반성교회 등에서 시무했다. 범일동에 살던 박보렴 여사는 8살 때인 1905년 10월 오빠를 따라 진주로 이주하여 기독교교육을 받았다. 오빠의 도움으로 진주 광림학교(후에 시원여학교)에서 수학했다. 광림학교는 진주 지방 첫 근대학교였는데, 같이 공부했던 동료인 천연희의 회고(<하와이 사진신부 천연희 이야기>)에 의하면, 박보렴은 학업성적이 우수하여 항상 1등을 했고 천연희 자신은 늘 2등을 했다고 한다. 독립운동에 관여하고 후일 의사가 되는 한규상(韓圭相)도 광림학교 동료였고 한규상의 부인 박덕실(朴德實)은 박보렴의 광림학교 후배로서 이들은 광림학교가 배출한 유명 인사들이다. 광림학교를 졸업한 박보렴은 박덕실과 더불어 광림학교 교사로 일했다. 이 기간 박덕실과 함께 대한애국부인회와 대한적십자회 진주 지부에 가입하여 활동했는데, 박보렴은 올케인 김순복(박성애 목사의 부인)의 뒤를 이어 제2대 진주지부장을 역임했다. 그런데 서울의 대한애국부인회 한양본부의 활동이 발각되어 진주에 있던 박보렴 여사는 올케인 김순복 여사, 그리고 박덕실과 함께 일경에 체포되었으나 증거 불충분으로 기소유예로 석방되었다. 체포당시 문서에는 박보교(朴寶喬)로 잘못 기재 되어 있는데, 이는 법원 서기가 렴(奩)을 교(喬)로 잘못 읽은 오기로 보인다. 검거 서류의 오기 때문에 대한애국부인회와 대한적십자회 검거자 명단에서도 다른 이름으로 기재되어 있어 박보렴 여사는 독립운동에 관여한 것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독립유공자로 추서되지 못하고 있다. 박보렴은 신앙생활에도 모범을 보여 조숙모인 김덕례(둘째 오빠인 박자룡의 부인)과 함께 진주교회 첫 권사로 임명되기도 했다. 그런데, 진주교회에서 목회하던 오빠 박성애 목사가 1920년 창원의 창원교회로 이동하게 되자 박보렴도 창원으로 이주하였다. 1921년 6월 27일에는 마산여자야학교에서 ‘마산여자청년회’가 창립될 때 강복순, 김복래, 김필선, 박필련 등과 같이 창립발기인으로 참여하는 등 사회활동 혹은 청년활동에도 적극적으로 관여하였다. 창원에서 지내던 중 신학 공부에 뜻을 두고 일본 고베여자신학교로 유학하였고, 졸업 후 1928년부터 1933년까지 오사까 한인교회에서 전도사로 활동했다. 그 후 서울 성북동에서 목장을 경영하던 조카(박성애 목사의 아들) 박은조(朴殷祚)와 함께 생활하며 감리교 석교교회(현 서대문구 천연동)를 비롯하여 몇몇 교회에서 시무하였다. 해방 후에는 임영신(任永信) 여사와 더불어 ‘대한여자국민당’을 창당하고 부당수가 되어 정계에서 활약했다. 대한여자애국당은 1945년 8월 17일 창당된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정당이었는데, 5.16 이후 해체되었다. 이처럼 일제하에서는 독립운동에 투신하고 해방 후에는 사회 운동에 참여했던 박보렴 여사는 6.25 전쟁 당시 남편과 함께 북한군에 납북되었다. 남편 김기우(金基禹, 1911-?)은 당시 서울대학교 약학대학장이었다. 박보렴의 혼인 시기는 분명하게 알 수 없으나 남편 김기우는 아동문학가 마해송(馬海松)의 누님의 아들이었다. 경기도 개풍군 남면 수우리에서 출생한 김기우는 독학으로 조선약제사 시험에 합격하여 조선총독부 위생시험소에 근무하던 중 1941년 금강제약 전용순(全用淳) 사장의 후원으로 일본 동경제국대학 약학과에서 유학하고 서울의 경성약전, 곧 서울약대의 교수(1949-1950) 겸 학장서리로 근무하던 중 자택인 종로구 관훈동 84번지 11호에서 납치되었다. 슬하에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그가 김우종(金宇鐘)이다. 그는 서울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공대 화공과에 입학하여 1958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12회)한 후 1959년 도미하여 Carnegie Mellon에서 화공학 박사 및 수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스토니브룩 대학교(Stony Brook University)에서 35년간 응용수학과 교수로, 그리고 대학원 과정 책임자로 근무했다. 2004년 뇌암으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그의 부인 장유경은 연세대학교 상대학장을 지낸 장희창 교수의 딸인데, 이화여중 1학년 때인 1963년 미국 줄리아드에 유학하였고, 졸업 후에는 스토니부룩 학교(Stony Brook School)에서 교사로 일했다. 장희창 교수도 6.25 때 납북되었다. 그런데 북한으로 끌려간 김기우는 북한에서 조소앙(趙素昻), 엄항섭(嚴恒燮) 등과 더불어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집행위원으로 활동했는데, 다시 돌아오지 못하고 북에서 사망했고 북한에서 사망한 남측 저명인사 묘역인 평양 용성구역 용궁1동에 안장되었다고 한다. 그곳에는 62인의 저명인사가 묻혀 있다고 한다. 박보렴 여사는 독립운동가로 그리고 여성 지도자로 일생을 헌신했으나 그의 후손들은 그 시대의 과제를 위해 헌신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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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7-21
  • [서임중칼럼] 사람이 사람답다는 것
    인간이 동물과 다른 것은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을 닮은 존재로 창조된 피조물이라는 것이다. 무한한 가능성이 있고 무진장의 가치가 있으며 유일한 독특성이 있다. 이것을 깨닫게 되면 무엇을 하든 좌절하지 않고 하고자 하는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회사에서 신입사원을 채용하는 면접시험 때에 까만 점 하나를 찍은 백지 한 장을 벽에 붙여 놓고 무엇이 보이냐고 시험관이 묻는다. 그 때 대부분의 응시자는 까만 점이 보인다고 답을 한다. 그러나 몇 사람은 백지가 보인다고 답을 하였다. 면접관이 말하기를 “여러분은 왜 이 작은 점 하나는 보면서 이 큰 백지는 보지 못하는가?”라고 교훈하였다. 인생의 싸움에서 패배하는 사람은 흔히 자신의 과거를 본다. 줄곧 남만 따라 다니는 사람은 늘 사방을 두리번거리고, 무슨 일을 하다가 중도 하차하는 사람은 언제나 자신의 눈 한 치 앞만 본다. 그런가하면 자신감이 없는 사람은 항상 모든 사물을 대강 보고, 좌절과 절망을 잘하는 사람은 상황을 깊이 보려고 하지 않는다. 보는 것도 훈련이다. “무엇을 보느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물으셨던 질문을 새삼 되새겨본다. 영어 속담에 ‘The parade passes and dogs bark(행렬은 지나가고 개들은 짓는다)’는 말이 있다. 일하는 사람과 비평하는 사람이 따로 있다는 뜻도 되고, 몇몇 말꾼들이 시끄럽게 해도 역사의 행진은 멈추지 않는다는 뜻이 담긴 속담이기도하다. 역사의 키를 잡고 이끌어 가는 사람은 떠버리가 아니라 자기의 길을 조용히 걸어가는 사람이다. 신학교수 ‘버클러’ 박사가 학교에서 재직할 때 시각 장애를 가진 학생이 헬라어 최고점을 받았다고 한다. 그에게 최고점을 받을 수 있었던 비결을 묻자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립보서4:13).”고 대답을 했다. 나는 스무 살에 예수님을 영접했고, 서른이 넘어 야간 대학을 다녔으며, 나이 사십이 되어 목사 안수를 받았다. 많은 동역자들이 “어떻게 그렇게 늦게 신학을 하였는데 목회 성공을 하게 되었느냐”고 묻곤 한다. 그때마다 나는 긍정적 삶의 교훈을 이야기한다. ‘목회는 성공’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지만 10년 늦게 출발하면서 오늘에 이르도록 행복한 목회를 할 수 있었던 힘은 시편 18편 1절이었다.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하나님이 나의 힘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확신이 들었을 때 나는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존귀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기에 오늘에 이르도록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아픔과 고달픔이 밀려올 때도 원망, 불평, 비판, 정죄 대신 감사로 달음질했다. 신학교 시절 먹지 못하고 병들어 쓰러질 때 나는 나의 존재에 대하여 회의(懷疑)를 느꼈었다. 내가 벌레만도 못한 존재라는 사실 앞에 통곡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런 절박한 상황에도 어둠을 밀어내는 빛의 말씀이 들려오면 나는 다시 내 존재에 대한 기쁨에 몸을 떨며 감격했다.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이사야43:1).” 내가 하나님의 것이 된 것, 나를 구속하신 하나님이 나를 지명하여 불렀다는 사실, 그 앞에서 나는 무가치한 존재가 아님을 깨달았다. 나는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하나님의 자녀 됨을 확신하면서 삶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병든 몸은 강건하게 되었고 가난한 삶은 마음의 부요에서부터 삶의 부요로 나아가게 되었다. 그 누가 자신의 눈을 1억 원에 팔며, 그 누가 자신의 심장을 10억에 팔겠는가. 누가 자신의 사지백체를 나누어 수 천 만원, 수 억 원에 팔겠는가? 역설하면 이미 내 몸은 가치로 환산할 수 없는 무진장의 가치 자체라는 말이다. 게다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이기에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다는 주님의 말씀이 있지 않은가. 이를 묵상하면 오늘도 내일도 날마다 감사와 기쁨으로 살아갈 수 있다. 나의 칼럼 가운데 인간의 성품론이 있다. 보편적으로 인간의 성품을 도형화 하면 △ □ ○ 형으로 분류할 수 있다. △형의 사람은 성품이 급하면서 솔직하다. □ 형의 성품은 느긋하면서 미련하며, ○형의 성품은 온화하고 유약한 편이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더불어 살아가면서 선호하는 성품은 물론 ○형 성품일 것이다. 어느 목회자가 △성품의 교인에게 너무 시달려 “왜 하나님은 예수 믿는 사람의 성품을 하나같이 ○성품으로 변화시키지 않으실까?”라고 탄식을 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이 △ □ ○ 세 성품을 하나님께서 만드셨다는 사실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 모든 성품이 어느 하나 좋고 나쁠 수 없는 하나같이 하나님의 걸작품이라는 것이다. 생각 해 보라. 교인들의 성품이 모두 △형이면 날마다 자기주장이 앞서 시끄러울 것이다. 모두 □형이라면? 그러면 답답해서 지쳐 나가떨어질 것이다. 만약 모두가 ○형이라면 추진력이 없어 어느 것도 진행되기 어려울 것이다. 어떤 일이 전개될 때 △성품의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밀어붙이면 □성품은 다시 한 번 생각하는 느긋함으로 일의 내용을 검토할 수 있고, ○성품은 순종형이라 일을 시작하면 잘 협력하여 무슨 일이든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가는 것이다. 이렇듯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은 선하고 아름다워 버릴 것이 없다.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의 작품이라는 것이다. 그것을 깨달을 때 인간관계는 아름답게 연결되어진다. 거기서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인 이해와 용서, 관용과 사랑이 실천될 수 있다. 내가 잘났든 못났든, 많이 배웠든 배우지 못했든, 지식이 뛰어나든 모자라든, 돈이 많든 적든 그런 것은 문제가 아니다. 나는 세상에 단 하나뿐인 하나님이 만드신 목적 있는 존재다. 그러므로 감사할 것밖에 없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며 창조 섭리에 순복하는 삶, 그것이 아름다운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그것이 사람이 사람답다는 것이다. 사람이 사람답지 못하다는 말은 무엇이겠는가? 바로 짐승과 다를 바 없다는 말씀이다.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과 같으니라(시편4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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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6-30
  • [성서연구] 누가 하나님 나라에서 떡을 먹는가
    어느날 예수님께서는 샤람들이 높은 자리에 앉으려 하는 것을 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낮은 자리에 앉으라고 하셨습니다. 처음부터 높은 자리에 앉았다가 낮은 자리로 옮기게 되면 망신스럽지만, 낮은 자리에 앉았다가 높은 자리로 옮기면 영광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낮은 자 의식, 약한 자 의식을 가지고 살라는 말씀입니다. 낮은 자, 약한 자 의식을 가지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강자가 되려고 합니다. 그래야 세상에서 인정받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는 약자가 되고 싶은 마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는 약자를 사랑하시고, 은혜를 베푸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잔치를 베풀려면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고, 가난한 자들과 저는 자들과 맹인들을 청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야 그들이 갚지 못하고, 나중에 천국에서 주님께서 갚으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하셨을 때 예수님과 함께 먹던 어떤 이가 감격하여 화답했습니다. <무릇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는 복되도다>(15) 예수님께서는 이 사람의 말을 들으시고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베풀고 많은 사람을 정중하게 청했지만, 아무도 오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밭을 샀기 때문에, 소를 샀기 때문에, 장가들었기 때문에 올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들이 밭과 소를 사고, 장가들 수 있는 이유는 여건이 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강자이기 때문입니다. 강한 자는 주인의 초대에 응하지 않습니다. 화가 난 주인은 종을 보내서 길거리에서 연약한 자들을 청해 오도록 했습니다. <종이 돌아와 주인에게 그대로 고하니 이에 집주인이 노하여 그 종에게 이르되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맹인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 하니라>(21) 결국 그 잔치의 떡을 먹는 영광은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맹인들과 저는 자들에게 주어졌습니다. 여기 잔치는 천국 잔치를 말합니다. 요한계시록 19장 9절을 보면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고 또 내게 말하되 이것은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라 하기로>라고 했습니다. 천국 잔치에서 떡을 먹는 영광은 약자들의 몫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떡을 먹길 원한다면 약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세상과 하나님 나라의 차이입니다. 세상에서는 강자가 떡을 먹고 약자는 그 아래서 부스러기를 얻습니다.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를 보면 부자는 날마다 잔치를 즐기지만, 병든 거지 나사로는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구걸합니다. 비참합니다. 그러나 죽은 후에 하나님 나라에서는 역전되었습니다. 부자는 음부에 떨어지고,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에 안겼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떡을 먹는 영광은 나사로의 몫이었습니다. 강자는 교만하여 하나님 은혜를 사모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약자는 유일한 희망을 하나님께 둡니다. 기도가 간절합니다. 눈물로 매달립니다. 그래서 기적은 약자에게 일어납니다. 제가 살아온 과거를 보아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기적적인 은혜를 경험한 때는 제가 가장 약했을 때입니다. 많아 아팠을 때, 교회가 힘들었을 때였습니다. 그럴 때 기도는 간절했고, 하나님께서는 기적처럼 응답하셨습니다. 점점 편안해지고, 모든 것이 형통할 때 느끼는 두려움은 저도 모르게 강자가 되어 하나님 은혜를 간절히 사모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심각한 병입니다. 이런 이들에게는 아무런 기적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자기가 차린 상에서, 자신이 만든 떡을 먹느라고 하나님 나라의 떡을 먹을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이었으나, 늘 약자의 의식으로 하나님께 매달렸습니다, 시편 여러 곳에서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니>, <나는 가난하고 슬프오니>라고 기도했습니다. 기억합시다. 예수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를 부르셨지, 남에게 짐을 지우고 거들먹거리는 자를 부르지 않으셨습니다. 약자, 그는 하나님 나라에 가까운 사람이요, 그 떡을 맛볼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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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6-30
  • [시사칼럼] 뱅크런과 처치런
    며칠 전 “사이버 뱅크런, 우리는 안전한가”란 제목의 금융 포럼이 서울 중구 은행회관에서 개최되었습니다. 지난 3월에 미국 내 자산 기준 16위 규모의 실리콘밸리은행(SVB) 은행이 ‘디지털 뱅크런’ 현상으로 인해 단 36시간 만에 파산한 충격적인 사건의 여파였습니다. 여기서 “뱅크런(Bank-run)”이란 예금 대량 인출 사태 곧 어떤 이유로 인해 은행이 부실해져 예치된 돈을 모두 되돌려줄 수 없다는 소문이 돌면서 그 은행 앞으로 예금주들이 먼저 돈을 되찾기 위해 달려가는 현상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리고 ‘사이버 뱅크런’ 혹은 ‘디지털 뱅크런’은 직접 은행에 가지 않아도 얼마든지 입출금은 물론이요 주식이나 대출 같은 각종 금융 거래가 가능한 시대에 파격적으로 등장한 새로운 개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실리콘밸리은행(SVB)에 돈을 맡긴 예금주들이 당일 금융기관이 문을 닫는 시간까지 예금 인출을 시도한 금액은 420억 달러(약 55조 6,000억)에 달했습니다. 우뚝 서기까지 40년이 걸린 은행이 그렇게 고작 하루 만에 파산해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번 사태의 근원적인 이유로 금리 인상과 경기 침체를 꼽습니다. 2022년 3월 이후 미연방준비위원회는 10회 연속으로 금리를 인상했고, 안정적인 자산이라 여겼던 미국 국채 가격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여기 집중적으로 투자했던 SVB 은행이 엄청난 손실을 입었습니다. 하지만 또 다른 원인으로 비보장성 예금 비율을 거론합니다. 은행 위기가 발생했을 때 보험으로 보장해 줄 수 있는 예금이 있는데, 미국은 현재 25만 달러(약 3억 2,700원)가 상한선입니다. 문제는 실리콘밸리의 스타트업 기업들이 주로 거래하는 SVB 경우 비보장성 예금 비율이 93.9%를 차지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만일의 경우 다 잃어버릴 수도 있는 고액의 예금주들이 너도 나도 돈을 빼는 바람에 대규모 뱅크런 사태가 발생해 버렸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한국의 예금보호한도는 얼마일까요? 최근 SVB 사태의 영향으로 2001년 이후 5,000만원으로 묶여 있던 것을 1억 이상으로 상향 조정하는 안을 예금보호공사를 중심으로 논의하고 있는 정부는 늦어도 8월까지는 결론을 낸다고 했으니 기다려 볼 일입니다. 뱅크런은 우리나라와 전혀 무관한 경제 현상이 아닙니다. 2011년 저축은행 문제가 공론화되면서 금융당국이 일부 부실 저축은행에 대해 영업정지 결정을 내리자 예금주들이 일제히 은행으로 쇄도하여 2월 21일 하루에만 전국에서 약 5,000억 가까운 돈이 인출되면서 대혼란에 빠졌습니다. 이 과정에서 보호한도를 초과하는 예금주들은 물론이요 높은 금리를 보장하는 유혹에 넘어가 후순위채권으로라도 가입하고자 했던 많은 서민층이 큰 피해를 보았습니다. 한국의 저축은행 사태는 거슬러 가면 2008년 당시 일주일 만에 500억 달러(약 65조)가 빠지는 뱅크런 속에 파산하고 범세계적인 금융 공황을 야기한 리먼 사태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금번 실리콘밸리은행 파산 역시 파급력이 대단했습니다. 사고 발생 이틀 만에 뉴욕 시그니처은행도 폐쇄조치를 당했고 며칠 뒤에는 자산 규모로 세계 9위에 해당하는 글로벌투자은행 크레디스위스에서도 주가가 폭락하면서 뱅크런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다 보니 벌써 이로 인한 한국 금융권의 위기를 주장하는 견해들이 앞 다투어 등장하고 있습니다. 뱅크런(bank-run)을 생각하다 보니 갑자기 ‘처치런(church-run)’을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예금주들이 은행에서 돈을 빼듯 신자들이 교회에서 발을 빼는 현상을 이렇게 부를 수 있지 않을까요? 가나안 성도와 노마드 신자의 증가는 새삼스럽지 아니합니다. 최근에는 무종교인의 비율마저 폭등하는 바,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가 지난 3월 조사한 바에 따르면 국민의 63%가 특히 조사 대상 가운데 30대는 75.5% 그리고 20대는 80.9%가 자신을 무종교인이라고 답했다고 합니다. 더군다나 코로나 팬데믹으로 말미암아 많은 교회가 인터넷 등으로 운신의 변화를 꾀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사이버(디지털) 처치런’이 일어날 가능성도 높아지지 않겠습니까? 마우스 하나로 클릭 한두 번만으로도 얼마든지 교회를 떠날 수 있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뱅크런이나 처치런 사태의 핵심은 공히 ‘신뢰’에 있습니다. 은행이 신뢰를 잃으면 예금주가 떠나갑니다. 교회가 신뢰를 잃으면 신자가 떠나갑니다. 교회는 지금 신뢰를 많이 잃었습니다. 지금도 세습이나 물질 혹은 성 문제 등으로 신뢰를 급격하게 잃고 있는 중입니다. 계속 이러다간 돌이킬 수 없는 처치런 현상이 발생하여 교회도 영적 파산 상태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러니 무엇보다도 지금은 무너진 교회의 신뢰를 회복해야 합니다. 중지를 모아야 할 때입니다. 시급합니다. 기나 긴 시간도 각오해야 합니다. Gott hilfe u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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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6-30
  • [은혜의말씀] 잠잠하라
    우리가 신앙생활 하면서 누리는 복이 많이 있지만, 그중에 가장 큰 복이 ‘평안’의 복이 아닐까요? 아무리 재물이 있어도, 명예가 있어도, 평안이 없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매일의 삶 속에서 평안을 누리고 계십니까? 오늘 본문을 보면, 평안을 잃어버린 제자들의 모습이 나옵니다. 예수님과 함께 갈릴리바다를 건너가던 제자들의 배에 ‘광풍’이 불어 닥쳤습니다. 파도가 사정없이 들이치고, 배는 추풍낙엽처럼 요동치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두려움에 사로잡혀 ‘비명’을 지르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우리도 인생을 살다 보면, 뜻하지 않은 광풍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자 그럴 때, 어떻게 하면 나를 짓누르는 ‘불안과 두려움’에서 해방될 수 있을까요?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주님이 배에 함께 계심에도 광풍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나면, 만사가 형통하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알듯이, 신앙생활 하면서도 어려움이 다가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 광풍을 어떤 시각으로 볼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는 풍랑 속에서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예수님이 함께 계심을 보아야 합니다.(36절) 지금, 제자들의 잘못이 무엇입니까? 주님이 배에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들이치는 파도만 보고, 함께 계시는 주님은 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 그 현실에만 시선을 고정시키면, 우리는 위축 당합니다. 우리는 낙심합니다. 그럴 때 여러분, 보려고만 하지 말고, 들으려고 하세요. 무얼 들어야 합니까? 주님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이 시련과 역경의 현장 속에서 주님의 뜻은 무엇일까? 주님의 음성을 들어 보세요.(사 41:10) 인생의 광풍은 내 경험과 지식으로 극복될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바라보고, 그분의 말씀을 들으므로 극복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제자들이 두려워 떨고 있는 것이 잘못인 이유가 또 있습니다. 갈릴리바다를 건너가자고 하신 것은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래서 ‘순종’해서 가는 길이라면 잘못될 것이 없습니다. 이 광풍도 그분의 계획의 한 부분일 수가 있습니다. 제자들은 이 사건을 통하여 예수님에 대해 새롭게 깨닫게 된 것입니다.(41절) 다시 말하면, 이 광풍으로 인하여 제자들의 믿음이 한층 더 견고하게 서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은 주무시던 예수님을 깨우지만, 사실은 예수님이 제자들을 깨우신 것이었습니다. 자고 있던 제자들의 믿음을 흔들어 깨우신 것입니다. 2. 예수님을 깨우는 것입니다. 즉 기도하는 것입니다.(38절) 염려와 두려움을 떨쳐버리는 ‘최고의 비결’은 기도입니다. 빌 4:6절은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순간에도 감사함으로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주님이 주시는 평강을 맛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눈에 보이는 상황에 눈을 감으면, 우리 주님은 하늘의 평안을 보여 주실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라갈 때도 광풍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광풍 앞에서 너무 당황하지 마십시오. 위기의 때가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할 수 있는 좋은 때입니다. 광풍 속에 주님이 함께 계심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기도로 주님을 깨우십시오. 그러면, 광풍이 극복되는 놀라운 역사가 여러분의 삶 속에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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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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