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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서연구] 편하게 사는 사람들(?)
    최근에 제가 속한 교단의 갈등이 깊어지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교회들이 화합하고 평안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정의가 이루어지기 위하여, 사회가 존경할만한 교회가 되기 위하여, 교회의 정치적 합의와 결정이 성경의 정신에 따를 수 있게 되도록 늘 기도해 왔습니다. 그러나 교회의 현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정치적 영향력을 가진 이들의 이해타산에 따라서 모든 것이 결정되는 것 같아서 안타까웠습니다. 그 과정에서 갈등을 막기 위해 몇몇 교회가 나름대로 합리적이라 여겨지는 의견을 제안한 일이 있었습니다. 저도 그중 한 명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후 어떤 분이 반박문을 내셨는데, 거기 <지금까지 편하게 목회한 이들이 갑자기 나섰다>는 표현이 있었습니다. 그분의 의견은 지금까지 편하게 살고, 편하게 목회한 사람들이 갑자기 나서서 의견을 제시하는 것이 눈에 거슬린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분의 의견의 옮고 그름을 말씀드리려는 게 아닙니다. 이 글은 말씀을 묵상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갑자기 나서서>란 부분은 동의하지 않습니다. 갑자기 나선 게 아니기 때문이지요. 말은 하지 않았지만, 오래전부터 한국교회를 위해 기도는 드렸고, 성실히 회원의 의무를 다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니 갑자기 나선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편하게 목회한 이들>이란 말은 반박할 수 없고, 반박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그분의 말씀이 맞기 때문입니다. 함께 의견을 제시한 분들은 규모가 있는 교회의 목사님들이었습니다. 신학생이 된 이후 신학대학원을 무사히 마쳤고, 부수적인 학업을 이어갈 기회도 있었고, 늦지 않게 결혼하여 가정도 꾸렸습니다. 교육전도사 시절 이후 지금까지 목회지가 없어서 쉰 적도 없고, 목회 과정에서 파국을 경험한 적도 없었습니다. 평탄하게 걸어왔습니다. 그리고 안정된 교회에서 목회하기 때문에 헐벗고 굶주린 적도 없었습니다. 성도들의 감당하기 어려운 사랑을 받으면서 배부르게 지난 게 사실입니다. 그러니 그분의 <편하게 목회한 이들>이란 말이 하나도 틀리지 않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놀고먹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새벽부터 밤까지 분주하게 살았습니다. 집에 돌아와 앉기가 무섭게 책상에 앉아 말씀을 준비했습니다. 교회를 떠나 있지 않은 모든 날에 새벽기도회를 직접 인도했습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휴가를 가 본 적도 없고, 가족과 해외여행을 위해 비행기를 탄 적도 한 번도 없었습니다. 이런저런 일을 위해 온 주머니를 털어 건축헌금을 비롯한 다양한 특별헌금을 했습니다. 지금도 새벽 서너 시에 일어나 준비하고, 매 주일에 다섯 번 설교하고, 평일에도 많이 설교합니다. 어려운 교회들이 요청하는 집회도 시간만 되면 거절하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쉴 틈이 없이 분주하게 충성한다고 자부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변명해도 저는 편하게 사는 사람일 뿐입니다. 복음 때문에 감옥에 갇힌 적도 없고, 욕을 먹은 적도 없습니다. 굶은 적도 없고, 당장 예배당 임대료를 내지 못해 길거리로 나앉은 적도 없습니다. 어려운 선교지에서 최선을 다하시는 선교사님이나 농어촌의 힘든 사역지를 온몸으로 지켜내는 분들에 비하면 호사를 누립니다. 그래서 이번 일로 인해 다시 한 번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주님 앞에서 편하게 사는 사람으로 여겨지면 안 된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의 말씀을 떠올려 봅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는 말씀을 마음에 담고 더 치열하고 열심히 살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편할 수 있어도 조금 덜 편하게 사는 법을 터득하려고 생각합니다. 감리교 창시자인 웨슬리는 젊었을 때 60불로 한 달을 살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노후에 경제적으로 많은 여유가 생긴 후에도 여전히 60불로 살았다고 합니다. 이런 노력을 통해 웨슬리는 편하게 사는 목사의 굴레를 벗을 수 있었던 것이지요. 우리 모두 날마다 자신을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주님의 뒤를 따르는 일에 최선을 다하길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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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9-08
  • [시사칼럼] 우아한 거짓말
    “우아한 거짓말”은 『완득이』의 작가로 유명한 김려령이 2009년 쓴 소설이면서 2014년 동명으로 상영된 영화 제목이기도 합니다. 거짓말에도 여러 종류가 있겠지만, ‘새빨간 거짓말’이나 ‘선의의 거짓말’같이 조금은 익숙해진 말과 달리 “우아한 거짓말”이란 도대체 어떤 의미일까요? 소설의 첫머리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내일을 준비하던 천지가 오늘 죽었다.” 여기서 “천지”는 한 소녀의 이름입니다. 그녀는 평범한 가정의 둘째로 학교에서 소위 ‘왕따’를 당하다가 결국 극단적인 선택을 하고 말았습니다. 힘든 나날을 보내면서도 홀로 생계를 책임지고 있는 엄마에게도 무심하기만 한 언니 만지에게도 그 누구에게도 속내 한번 털어놓지 못하고 끝없이 ‘난 외롭지 않아, 난 슬프지 않아’ 자신에게 되뇌던 그 말을 작가는 “우아한 거짓말”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발표된 지 꽤 지난 이 작품을 다시 꺼내든 이유는 최근 서이초등학교를 비롯한 몇몇 젊은 교사들의 비극적인 사건들 때문입니다. 어떤 분이 이런 글을 올렸습니다. “요즘에는 교사도 학교를 떠난다. 죽지 않으려면 교단을 떠나야 한다는 말이 농담 같지 않은 시대다.”(방구석도서관) 하지만 죽을 만큼 힘이 들면서도 스스로를 우아한 거짓말로 위로하며 지옥처럼 고단한 일상을 살아가는 이들이 어찌 그들뿐이겠습니까? 작품 속에는 화연이란 소녀가 등장합니다. 이 아이는 천지의 유일한 친구였습니다,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그러나 실제로 화연은 본인을 친구라 믿고 있던 천지를 조정하고 있었습니다. 사실이 아닌 말을 하며 천지와 친구 사이를 이간질하고, 자기 외에는 친구가 존재하지 않도록 천지 주변을 정리하고, 본인이 원하는 것을 천지를 통해 얻고 아예 천지를 소유하고자 합니다. 천성이 악해서 그런 것 같지는 않습니다. 천지가 죽고 난 후 화연은 자기가 따돌림의 대상으로 전락하여 천지처럼 힘들어 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화연은 어릴 적 아픈 경험(학대)으로 인한 우울증과 외로움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천지에게 그랬을까요? 그렇다면 이런 경우도 “우아한 거짓말”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최근 일본의 오염물질 해상투기로 나라가 무척 시끄럽습니다. 그런데 일각에서는 ‘오염수’가 아니라 ‘오염처리수’라고 부르자는 주장을 제기합니다. 국민들을 비상식적이고 비과학적인 선동으로부터 보호하려는 취지라고 합니다만, 일본의 그릇된 행태에 반대하지 못한 자신들의 치부를 감추려는 의도는 없을까요? 더군다나 수많은 사람들의 생계와 안전이 달려있으니 결코 우아한 거짓말이라고도 할 수가 없겠습니다. 또 다른 등장인물들도 있습니다. 천지의 사정을 충분히 알 수 있었지만 알려 하지 않았고 무심하게 지나쳤으며 의도적으로 회피했던 이들입니다. 천지의 언니 만지와 엄마 그리고 미라라는 아이가 그러합니다. 이들은 모두 저마다의 이유로 진실을 외면하고 혹은 방관하며 ‘넌 최고야’ 혹은 ‘너희가 내겐 신(神)이야’와 같은 역시 일종의 우아한 거짓말을 하며 살아갑니다. 이런 식의 언사는 당사자는 물론 실체적 진실의 규명에 별반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최근 불거지고 있는 독립운동가 논쟁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학교 다니면서 고군분투하셨던 독립군 이야기를 듣고 자랐습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그들이 대한민국 군대의 얼굴로 세우기에는 합당하지 않다고 하는 사람들이 생겼습니다. 모두 다 알고 있는 사실을 교묘한 논리로 뒤엎으려 하는 가운데 온갖 말들이 난무합니다. 누군가 니체에게 거짓말을 하자 그는 이렇게 말하며 불같이 화를 냈다고 합니다. “내가 이렇게 화를 내는 것은 지금 자네의 거짓말 때문이 아니라네. 이제부터 자네를 신뢰할 수 없기 때문이야.” 그렇습니다. 신뢰를 파괴하고 진리의 근간을 흔들기 마련인 거짓말은 그 어떤 것이든 우아하게 또는 아름답게 포장될 수 없습니다.(매일경제, 성동찬) 천지는 자기 손으로 소중하게 짠 붉은색 털실로 감싼 다섯 개의 메시지를 남겼습니다. 언니에게, 엄마에게, 화연에게, 미라에게, 마지막으로 누군가에게 남긴 용서와 화해의 메시지였습니다. 유일하게 우아한 거짓말을 남기지 않은 사람, 마지막 메시지는 그런 자신에게 남긴 정직한 목소리였지요. “마지막 남은 두툼한 털실 뭉치는, 나에게 주었습니다. 내가 나를 용서하지 않고 가면, 내가 너무 가엾습니다. 그리고 시립도서관 2층 아무도 손대지 않는 책 사이에 끼워놓았습니다. 같이 있어 외로운 것보다 차라리 혼자 있어 외로운 것이 나았던 그런 곳입니다.” 지금 우리도 이런저런 합리화로 치장된 우아한 거짓말을 하며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진리를 직시하고 말하는 용기를 가지고 용서하며 화해하며 차라리 투박한 진실 속에서 살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나는 진리다’(요 14:6)라고 외치셨던 예수를 믿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면 더욱 그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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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9-08
  • [은혜의말씀] 하나님의 계명, 사람의 전통(막 7:1-14)
    오늘 말씀을 보면, 바리새인들이 ‘전통’에 빠져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떡을 먹을 때 손을 씻지 않는다고 비난합니다. 유대교에서는 떡을 뗄 때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올리는데, 그때는 반드시 먼저 손을 씻게 되어있었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면서 그 정신은 희미해지고, 손을 씻는 형식만 남게 되었습니다. 형식을 어떻게 지키느냐에 굉장히 신경을 쓰게 되었습니다. 사람이 만들어 낸 전통이 말씀의 본질을 대신할 위험이 있습니다. 전통이 진리로 둔갑해 버릴 수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에게 신앙의 참 내용은 사라지고, 형식만 남아있는 전통주의는 없습니까? ‘우리는 옛날에는 다 이렇게 했다.’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지금, 어떤 삶을 사느냐가 훨씬 더 중요합니다. 지금 나의 모습이 성경이 아니라 전통에 따라 움직이고 있다면, 어떻게 하든지 그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야 합니다. 자 그러면, 어떻게 하면 그럴 수 있을까요? 1. 내 신앙이 성경적인가 전통적인가 분명히 해야 합니다.(10-13절) 예수님께서 ‘고르반’이라는 제도를 예로 들고 계십니다. ‘고르반’이란 가난한 사람이 하나님께 연보를 드리는 바람에 부모를 봉양할 돈이 없습니다. 그러면, 그런 사람은 부모를 잘 모시지 못해도 양해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가면서, 그 고르반을 악용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부모를 봉양하기 싫으니까 고르반을 핑계 삼아, 나는 하나님께 연보를 드렸기 때문에 부모를 모시지 않아도 된다고 강변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악한 마음으로 고르반이라는 것을 교묘하게 포장하는 그들의 위선을 엄중하게 책망하십니다. 우리가 전통에 집착하다 보면, 성경의 본 의미를 소홀히 하게 될 수가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전통이 다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전통을 강조하는 것까지는 좋은데, 전통이 성경보다 더 강조되어서는 안 됩니다. 어느 순간 이것이 “우리 교회 전통이야!”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성경이 뭐라고 말씀하는가?” 입니다. 2. 우리의 내면을 점검해야 합니다.(21-23절) 우리가 다루어야 하는 것은 언제나 내면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마음을 다루기보다 외적인 활동에 더 치우쳐 있습니다. 마음속에 깊이 뿌리내린 죄를 그대로 둔 채 다른 것에 몰두합니다. 그게 바리새인들의 모습이었습니다. 주님은 나의 마음의 창고에 들어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묻고 계십니다. 무엇을 얼마나 열심히 하고 있는지,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겉모양에 속지 않아야 합니다.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일까를 너무 의식하지 마십시오. 그러므로 무엇을 하고 있는가보다 그 일을 하고 있을 때마다 내면의 동기를 묻고 또 물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중심에 서야 합니다. 나를 사로잡고 있는 것이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되어야 하고,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경험이 날마다 일어날 때, 사람들로부터 칭송받고자 하는 욕망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추구할 신앙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오직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예수님을 통해 여러분의 인생이 변하고, 구원을 체험하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인생이 바뀌는 놀라운 체험을 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그리고 그분의 말씀이 날마다 여러분의 삶 속에서 역동적으로 움직이며, 여러분의 삶에 놀라운 자유와 능력으로 살아가는 모든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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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9-08
  • [교회음악칼럼] 찬송(예배)하며 사는 사람들 7
    누구나 인정하듯 너무도 복잡하고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정치, 경제, 사회, 교육, 문화 등 사회 전반이 다 힘들어 하는 것 같다. 크리스천들의 역할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한 것 같다. 무슨 대단한 역할이 아니라 조용히 자기 자리에서 빛과 소금의 사명을 감당하라는 주의 뜻을 실천하는 그것이다. 그러나 이조차 연약한 우리가 쉬이 감당할 수 없다면 약한 나로 강하게 하시는 주께 구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으며 이 땅위에서의 본분을 다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살다 보면 알게 돼 일러주지 않아도 너나 나나 모두 다 어리석다는 것을 살다 보면 알게 돼 알면 웃음이 나지 우리 모두 얼마나 바보처럼 사는지 잠시 왔다 가는 인생 잠시 머물다 갈 세상 백년도 힘든 것을 천년을 살 것처럼 살다 보면 알게 돼 버린다는 의미를 내가 가진 것들이 모두 부질없다는 것을 살다 보면 알게 돼 알면 이미 늦어도 너나 나나 모두 다 미련하다는 것을 살다 보면 알게 돼 알면 이미 늦어도 그런대로 살만한 세상이라는 것을 잠시 스쳐가는 청춘 훌쩍 가버린 세월 백년도 힘든 것을 천년을 살 것처럼 살다 보면 알게 돼 비운다는 의미를 내가 가진 것들이 모두 꿈이었다는 것을 모두 꿈이었다는 것을 철들면 죽는다는 속된 말이 있다. 바꿔 말하면 죽기 전에는 철이 들지 않는다는 말이다. 우리네 인간들은 주를 인하여 구원받아 성도가 되고 성화의 길을 걸어간다. 짧은 시간에 성화되어 거룩한 삶을 살아가면 좋겠는데 유감스럽게도 그렇지 못한 것 같다. 안타깝지만 사실이고 현실인 것이 분명하다. 위의 시는 한국의 유명 대중가수가 부른 노랫말이다. 인생 후반기를 살아가면서 뒤를 돌아보니 잠언서를 비롯한 많은 성경구절들이 저 노랫말과 오버랩 되면서 너무 마음에 와 닿았다. 마지막 가사 꿈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세상적인 욕망과 욕심 그리고 그렇게 놓지 못하고 붙잡으려 몸부림쳤던 그 모든 것들이 다 부질없는 것들이었음을 설명하는 것 같다.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이 땅을 떠나는 많은 세상 사람들의 한결같은 모습은 미련과 회한, 부질없음과 허무함에 아쉬움의 눈물을 흘리며 인생의 덧없음을 온 몸으로 고백하며 생을 마감한다. 그렇지만 우리네 성도들의 결국과는 많이 다르다. 주를 시인하고 믿는 자들의 꿈은 이제껏 놓지 못했던 세상의 모든 것들을 겸손히 주 앞에 내려놓고 기쁨과 감사함으로 찬송하며 천국을 향하여 나아가기에 그렇다. 이 얼마나 귀하고 복된 축복인가? 우리 입술에 노래가 계속되어야할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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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9-08
  • [목회자칼럼] 고장 난 나침반은 떨지 않는다
    며칠 전, 책상 정리를 하다 서랍 깊숙한 곳에 넣어 두었던 나침반을 발견했습니다. 요즘에는 핸드폰으로 길도 찾고, 방향을 알려주는 앱도 있지만 불과 몇 년 전만 하더라도 먼 길 여행을 떠날 때, 등산을 할 때에는 방향을 알려주는 나침반이 필수였습니다. 예전에는 즐겨 썼는데 어느 순간부터 쓸 일이 없어진 나침반을 발견하곤 반가운 마음에 이리저리 방향을 맞춰보니 고장이 났는지 바늘 끝이 떨지 않고 멈춰 있었습니다. 나침반은 바늘 끝을 떨고 있음으로 나침반의 사명을 감당합니다. 그러나 고장이 난 나침반은 더 이상 떨림이 없습니다. 오랫동안 서랍 속에 묵혀 두어 고장이 난 나침반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목회도, 내 사명도 어쩌면 나침반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계속되는 떨림으로 나침반이 만들어진 목적, 즉 방향을 맞추는 것에 최선을 다하듯 나 또한 끊임없는 고민과 갈등으로 목회와 사명을 감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끔은 너무 많은 고민과 갈등들이 목회를 더 힘들게 하는 게 아닌가라는 우려도 하지만 고장 난 나침반을 보며 나의 갈등과 고민이 바로 살아있는 증거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오헨리의 소설 ‘마지막 잎새’의 존시는 재능 있는 화가이지만 폐렴에 걸려 삶의 의욕을 모두 잃었습니다. 그녀는 침대에 누워 빈 벽을 보며 창밖 벽에 붙어 있는 담쟁이덩굴의 잎을 세고 있습니다. 마지막 잎사귀가 떨어지면 자신도 죽을 것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어느날 폭풍이 온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존시는 폭풍과 함께 마지막 잎새가 떨어지면 자신도 죽게 될 것이라 생각하고 더 우울함 속에 갈등을 겪습니다. 마음 속 저 깊은 곳에 웅크리고 있는 살고 싶은 마음, 하지만 살 수 없다는 현실 앞에 폭풍의 밤을 보낸 후, 다음날 떨어지지 않은 잎새를 보며(물론 어느 화가의 그림이지만...) 삶의 의지를 되찾습니다. 마지막 잎새의 존시처럼 때로는 내 안에 갈등을 통해 내가 살아있음을 느끼고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발견하기도 합니다. “과연 주님이 원하시는 방향은 무엇일까?” “어느 경계까지가 주님이 하시는 일이고, 또 어느 경계까지가 내가 하는 일일까?” 나는 오늘도 갈등 속에 떨고 있습니다. “건강한 교회를 세우기 위해 지금까지 달려왔는데, 신앙의 회복은 무엇이고, 또 참된 치유는 무엇일까?” “목회자로서 내가 추구하는 것은 주님의 뜻과 합한 것일까?” 나는 오늘도 흔들리며 떨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성경의 인물들 중에서도 나와 비슷한 갈등을 겪은 인물이 있었음을 발견합니다. 구약의 광야길에서 여호수아와 갈렙은 이스라엘 백성과 생각이 달랐습니다. 남들은 모두 이 방향이라고 하는데, 둘만 저 방향이라고 하니 얼마나 많은 갈등과 떨림이 있었을까요? 신약의 바울을 보니 선교여행을 떠나며 동역자들과의 갈등, 복음을 전할 때 그 지역 사람들과의 갈등들을 통해 수많은 떨림이 있었을 것입니다. 여호수아와 갈렙 그리고 바울은 갈등이 있었기에 자신들의 사역을 잘 감당할 수 있었고, 떨림이 있었기에 늘 분별하는 자세로 사명을 이어갈 수 있었을 것입니다. 아마 여러분의 삶도 저와 혹은 성경의 인물들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매일 하나님의 자녀라는 정체성으로 살아가려고 애쓰지만 갈등과 떨림이 늘 동전의 양면처럼 붙어 있습니다. 부모로서 자녀를 양육할 때 무한한 사랑으로 수용해야 할 범위와 훈계와 절제를 가르치는 경계의 갈등, 공동체가 나의 사적인 영역까지 침범할 때, 어디까지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 삶의 터전인 직장과 교회 사이에서의 시간 분배 갈등 등 나침반이 떨리듯 우리는 수많은 떨림 속에 놓여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또 이런 갈등들이 있지는 않나요?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사명을 감당한다고 목소리는 높이지만, 교회의 양적 부흥을 갈망하는 마음과 질적 성숙을 추구하는 두 마음의 갈등, 인정받고 유명해지고 싶은 솔직한 내면의 갈망과 오늘의 삶에 만족하며 자족할 줄 아는 갈망의 갈등, 목회자로서 목회에 전념하고 싶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해 이중직을 해야 하는 상황의 갈등 등 목회자로서의 갈등이 있습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고장 난 나침반은 떨지 않듯, 우리가 지금 수많은 고민과 갈등 속에 영혼이 떨고 있다면, 이는 분명 내 삶이 고장 나지 않았다는 증거요, 살아 숨 쉬며 사명을 감당하고 있다는 확신일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가요? 방향을 알려주는 나침반처럼 갈등 속에 떨고 있나요? 아니면 고장 난 나침반처럼 멈추어져 있나요? 뜨거운 여름을 보내며 자신에게 질문을 던져보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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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9-08
  • [이상규 교수의 역사탐색] 기도로 출범한 구미위원부와 이대위 목사
    1948년 5월 10일 선거를 통해 198명의 제헌국회의원을 선출하고, 5월 31일 오전 10시 구 중앙청 회의실에서 대한민국 국회를 개원했을 때 임시의장이었던 이승만은 서울 종로 갑구에서 당선된 이윤명 목사에게 기도를 부탁한 일은 널리 알려져 있다. “이 우주와 만물을 창조하시고 인간의 역사를 섭리하시는 하나님이시여, 이 민족을 돌아보시고 이 땅에 축복하셔서 감사에 넘치는 오늘이 있게 하심을 주님께 저희들은 성심으로 감사하나이다”로 시작되는 이 기도문은 대한민국 공문서 1호라고 할 수 있는 국회속기록 제일 앞 부부분에 기제 되어 있다. 공식 순서에도 없는 기도를 부탁한 것은 “종교사상이 무엇이든지 누구나 오늘을 당해가지고 사람의 힘으로만 된 것이라고 우리가 자랑할 수 없을 것이라”는 이승만의 신앙적 확신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런 정사(政事)에 앞선 이승만의 기도요청이 처음이 아니라는 사실이 최근 김정민 박사에 의해 공개되었다. 연세대학교에서 이승만 연구로 박사학위를 수득한 김정민 박사는 「월드뷰」 2023년 4월호에 기고한 “대한민국임시정부 독립외교의 시작은 기도였다”라는 글에서 1919년 8월 27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외교를 전담했던 구미위원부 출범식에서도 이승만은 이대위 목사에게 기도를 요청했다고 한다. “이대위 박사께서 목사로서 기도로 구미위원부 창립식을 열어주시겠습니다.” 이 요청에 따라 이대위 목사는 회의에 앞서 1,854자에 이르는 긴 기도로 회의를 시작했다고 한다. 영문으로 기록된 이 기도문 전문이 김정민 박사에 의해 번역되어 위의 잡지에 처음으로 공개되었다. 3.1운동 이후 독립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고 국내외에서 명칭을 달리하는 여러 개의 임시정부가 조직되었는데, 1919년 9월 11일에는 국내외 7개의 임시정부들이 통합되어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개편되었다. 초대 대통령은 이승만이었고, 이후 김구, 이승만, 박은식 등이 임정의 수반을 거쳤다. 그런데 통합된 임시정부가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선출하기 약 2주일 전인 1919년 8월 25일 이승만은 한성정부(漢城政府) 집정관 총재 자격으로 구미위원부(Korean Commission)를 설치했다. 민족의 대표성을 지닌 외교기관의 출범이 시급하다고 본 것이다. 위원장은 김규식이었고 위원은 송헌주와 이대위였다. 그런데 이 구미위원부가 공식 출범하게 된 8월 27일 공식적인 회의에 앞서 이승만은 이대위 목사에게 시작하는 기도를 요청한 것이다. 이런 점을 보면 이승만에게는 역사의 주관자는 하나님이라는 확신과 기독교 이념에 기초한 건국 이상을 지닌 분임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때 기도했던 이대위(李大爲, David Lee, 1878-1928) 목사는 어떤 인물이었을까? 김정민 박사에 의하면 이대위는 1878년 평안북도 강서에서 출생하였으니 이승만 보다 3살 아래였다. 일찍이 기독교를 받아드리고 유학차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때는 1903년이었다. 이때부터 동포사회에 관심을 가지고 단합을 모색했고, 1905년 4월에는 민족운동 기관인 공립협회 설립을 주도하였다. 이런 와중에서도 학업에 정진하여 1908년 포틀랜드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6월 22일 샌프란시스코로 돌아왔고, 그해 가을 UC 버클리대학교 역사학과에 입학하였다. 이때부터 이대위는 <공립신보>, <대도>, <신한민보> 등에 글을 발표하는 한편 민족운동을 전개하였다. 1909년 2월에는 국민회의 설립에 관여하였고, 1910년 1월에는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 부회장으로 국민회의의 기초를 닦았다. 그해 일본이 조선을 강점하자 애국동맹단을 조직하여 저항하였다. 그런데 그가 신학공부를 시작하기도 전인 1911년 2월 32살의 나이로 상황한인(감리)교회 전도사로 부임했다. 윤병구 전도사의 후임이었다. 이때부터 50세가 되는 1928년 6월 세상을 떠날 때까지 17년 간 이교회에서 목회자로 활동했다. 그런데 1912년에는 집사목사(deacon) 안수를 받았고, 1913년 5월 14일에는 버클리대학교를 졸업했다. 이 대학에서 한국인 최초로 학사학위(Social Science)를 받았다고 한다. 1918년 4월 25일에는 산 안셀모에 있는 센프란시스코신학교를 졸업하고 신학사 학위를 받았다. 1918년의 일이었다. 그해 10월 10일에는 미국남감리교 태평양 연회에서 드 보세(Du Bose) 감독에게 '장로목사'(elder) 안수를 받았다. 이처럼 면학과 목회활동과 함께, <대도>와 <신한민보>의 주필로서의 문필활동, 그리고 민족 독립운동에도 깊이 관여하였다. 그래서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 총회장으로 선임되었고, 1919년 3월 미국에서 독립선언서에도 이승만 안창호 박용만 등과 같이 서명하였고, 1919년 8월에는 구미위원부 위원으로 선임되었다. 그래서 그 출법식에 대표기도하게 된 것이다. 이승만은 제헌국회 개원식에서만이 아니라 임시정부 시절에도 기도로 회무를 시작하였고, 이를 통해 이대위라는 한 인물과 조우하게 된다. 그러기에 역사연구란 사건과 인물과의 만남(encounter)이라 하지 않았던가! (2023.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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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상규교수의 역사탐색
    2023-09-08
  • [서임중칼럼] 진실과 사실과 왜곡의 줄타기
    유구무언(有口無言)이란 입이 있어도 할 말이 없다는 뜻이다. 너무도 과분한 은혜를 입을 때도 그렇고, 기가 막혀 어처구니없는 일을 당할 때도 그렇고, 잘못을 저지르고 사실이 드러날 때도 그렇다. 살아가노라면 진실과 사실과 왜곡에 혼돈되어 정사(正邪)를 분별 못 하고 우(愚)를 범할 때가 있다. 요셉이 보디발 장군 아내의 유혹을 거절하고 감옥에 갔을 때의 당시 상황에 접근해 보면 어떤 사람은 노예 주제에 분수를 모르고 주인마님을 엿보다가 옥살이한다고 진실을 왜곡하여 비난하고, 어떤 사람은 요셉이 주인마님 방에서 황급히 뛰쳐나오는 것은 사실이 아니냐고 역설한다. 그런데도 요셉은 어떤 변명도 항변도 하지 않았으니 사실일 것이라고 비난을 더 한다. 그러나 그 사건의 진실은 하나님과 요셉과 보디발의 아내만 아는 것인데 보디발의 아내가 왜곡하여 보디발에게 이야기하여 요셉이 감옥에 가게 된 왜곡의 대표적 사건이다. 세상 방법의 법리적 결론은 왜곡이 진실을 이긴 것 같다. 약자로서의 요셉은 강자로서의 보디발의 아내를 이길 수 없었다. 그래서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이 회자한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할 것은 하나님은 이 상황을 다 보고 계신다는 것이며, 진실은 반드시 밝혀진다는 것이다. 네델란드의 국립박물관에 소장된 루벤스의 작품 <simon과 pero> 명화(名畫)가 있다. 그림의 내용을 모르면 춘화도 같다고 왜곡한다. 그림의 내용으로서는 노인이 젊은 여인의 젖을 물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그 그림의 진실은 아사(餓死)로 죽어가는 아버지를 향한 딸의 지극한 효성의 마음을 표현한 루벤스의 작품이다. 진실을 알기 전에는 사실로 평가하고 더 나아가 왜곡하여 비난하게 되지만 진실을 알고 나면 숙연해지는 것이다. 은퇴 후 9년을 지나면서 전국 600여 교회 부흥사경회를 인도했다. 크고 작은, 도시와 농어촌, 산골과 개척교회를 다니면서 듣고 보고 느낀, 지상교회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분쟁이었다. 그 중심에는 언제나 드러나지 않은 진실과 함께 사실과 왜곡의 줄타기로 인한 것이 대부분이다. 은혜와 평강으로 거룩한 동행을 노래하던 교회가 한 순간에 분쟁으로 벌판이 되어가고, 헐뜯고 비방하는 아귀다툼이 되고, 결국에는 산산조각이 난 그릇처럼 되는 것을 본다. 그 분쟁의 중심에는 진실을 추구하는 의지는 찾아볼 수 없고, 사실과 왜곡의 줄타기로 인하여 벌판이 되어가는 것이다. 지금도 유명인들의 경찰, 검찰 조사와 관련된 보도가 항상 쏟아지고 있다. 유튜버들은 자기 입맛에 맞추어서 내용을 퍼 나르는데 객관적인 측면에서 볼 때 사실과 왜곡의 줄타기를 보는 것 같다. 진실은 법정에서 마무리되지만, 법리적으로 진실이라고 마무리된 사건도 몇 년, 몇십 년이 지난 후 그 사건의 진실이 밝혀지면서 억울하게 옥살이한 예도 우리는 언론을 통하여 접한다. A 목사의 경우, 예산위원회 예산 당회 제직회 공동의회를 통과하여 집행한 특별항목의 지출을 횡령이라고 SNS를 통해 유포되어 A 목사를 바라보는 대부분 사람의 시선이 차갑고, 그 아름답던 인간관계가 뒤틀려진 상황에서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기막힌 일을 당했다. 진실은 모든 회의의 기록이 있고, 사실은 그 금액이 집행되었고, 왜곡은 횡령이라는 단어로 A 목사를 죄인으로 만들고 공동체는 벌판이 되어갔다는 것이다. 결론은 모든 것이 왜곡으로 드러나고 진실이 밝혀졌지만, 그동안 A 목사가 겪어야 했던 고통과 그로 인한 교회의 혼란과 그 가족들이 받아야 했던 아픔은 그 누구도 보상하지 않았다. 진실은 언젠가는 드러난다. B 장로의 경우, 개인 사업을 하면서 예배당 건축위원장의 직무를 맡아 교회 건축을 하면서 장로님 개인 돈을 더 많이 들여 건축하였는데, 건축비 횡령으로 고발되어 구치소에 갇히었다. 법정에서 판결로 마무리된 일이지만 진실은 건축비 중 5천만 원을 어음 처리를 위해 당회장에게 허락받고 며칠 사용하였는데 이 사실을 횡령으로 소위 광고지를 예배당 안에 뿌리는 그것이 발단되어 결국 법정으로 가게 되었다. 그런데 어처구니없는 것은 담임목사가 증인석에서 진실보다 교회 상황에 얽매여 5천만 원 사용을 모른다고 하여 B 장로는 피고인으로 재판정에 서야 했다. 재판 결과는 반대로 진실이 밝혀지면서 장로는 억울함이 벗겨지고 대신 목사가 위증으로 처벌받게 된 사건이었다. 진실은 장로가 건축을 위해 최선을 다한 헌신이었고, 사실은 5천만 원을 며칠 사용한 것이고, 왜곡은 그것을 뒤집어 찌라시를 만들어서 뿌리고 담임목사가 거기에 맞추어 동조함으로 교회가 풍비박산이 된 것이다. 그런데도 B 장로는 탄원서를 써서 담임목사의 위증에 대한 처벌을 선처해 달라고 판사에게 간청했다. 그리고 사건이 마무리 된 후 B장로는 조용히 그 교회를 떠났다. 유구무언이다. 진실과 사실과 왜곡의 줄타기다. 더 중요한 것은 이러한 상황에 접근방법을 분석해 보면 대부분 사람은 진실은 고사하고 사실 확인도 없이 왜곡에 관심을 더 두고 비난하고 정죄한다는 것이다. 그 대부분의 이유는 이해관계로 진실과 사실과 왜곡의 줄타기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분명한 것이 있다. 진실은 반드시 밝혀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진실이 밝혀지기까지 그 이해관계 당사자로서는 그 상황의 여정이 여간 힘든 것이 아니지만 그것이 인간관계의 보편적이라면 극복하는 지혜를 요셉과 다윗을 통해 배워야 한다. 즉 아프지만 침묵하며 자기의 삶을 아는 것은 자기 자신과 하나님뿐임을 확신하는 마음가짐에서 어둠에서 빛으로의 전환을 믿고 대처하며 인내하는 것이다. 요셉도 그랬고, 다윗도 그랬고, 사도 바울도 그랬다. 어쩌면 소나기가 쏟아질 때는 비를 피하지 말고 맞으라는 교훈이리라. 필자의 저서 가운데 <성도입니까?>가 있다. 세례받고 교적부에 등재되면 교인이 된다. 사전적으로 말하면 종교를 믿는 사람이다. 성도는 사전적으로 말하면 기독교 신자의 존칭, 천주교에서는 특히 공덕이 높은 신자라고 표기한다. 제자는 스승에게서 가르침을 받는 사람이다. 그런데 교인도 성도도 제자도 진실과 사실과 왜곡의 줄타기를 한다. 나는 어떤 줄타기를 하고 있는가? 진실은 묻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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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8-18
  • [성서연구] 시세를 아는 사람들
    역대상은 읽기 어려운 성경으로 인식됩니다. 족보부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족보에서 시작된 역대상은 11장에 오면 다윗이 왕이 된 것을 알리고, 다윗을 도운 용사들을 거명합니다. 12장에는 다윗의 편에 가담한 사람들을 나열합니다. 다윗이 왕이 되는 과정은 단순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사울의 장군이요, 사위였지만, 사울은 그를 정적으로 인식하여 죽이려고 시도했고, 다윗은 여러 해 동안 도망자로 살아야 했습니다. 후에 사울이 블레셋과 전쟁 중 전사한 후에도 다윗이 곧바로 왕이 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우선 헤브론에서 유다 지파의 왕이 되었는데, 이는 다윗이 유다 지파였기 때문입니다. 나머지 지파들은 모두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을 왕으로 받들었습니다. 칠년 육 개월 동안 이스라엘에는 두 명의 왕이 있었던 셈입니다. 이런 상황이 사무엘하 2장 8~11절에 나옵니다. <8 사울의 군사령관 넬의 아들 아브넬이 이미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을 데리고 마하나임으로 건너가 9 길르앗과 아술과 이스르엘과 에브라임과 베냐민과 온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았더라 10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이 이스라엘 왕이 될 때에 나이가 사십 세이며 두 해 동안 왕위에 있으니라 유다 족속은 다윗을 따르니 11 다윗이 헤브론에서 유다 족속의 왕이 된 날 수는 칠 년 육 개월이더라> 그런데 다윗과 사울의 가문의 긴 전쟁과 대립의 와중에 점점 다윗에게로 오는 사람이 많아졌습니다. 사무엘하 3장 1절을 보면 이에 대해 <사울의 집과 다윗의 집 사이에 전쟁이 오래매 다윗은 점점 강하여 가고 사울의 집은 점점 약하여 가니라>고 했습니다. 역대상 12장에는 이 무렵 다윗에게로 온 사람들을 나열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 중에 잇사갈 자손 중에 이백 명이 다윗에게로 왔는데, 본문이 이들에 대한 언급입니다. 본문을 보면 <잇사갈 자손 중에서 시세를 알고 이스라엘이 마땅히 행할 것을 아는 우두머리가 이백 명이니 그들은 그 모든 형제를 통솔하는 자이며>라고 했습니다. 여기 <시세를 알고>란 대목이 나옵니다. 『NIV성경』에서는 <understand the times>라고 했고, 『쉬운성경』에서는 <때를 분간할 줄 아는>이라고 번역했습니다. 『현대인의성경』은 <그 시대의 흐름을 이해하고>라고 번역했습니다. 모든 사람은 시대의 자녀입니다. 특정 시대에 태어나 시대의 영향을 받으며 삽니다. 시대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어진 시대에 올바른 삶의 열매를 맺으려면 시세를 아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때에 대해 전도서 3장 1~8절은 유명하지요. <1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 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 2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3 죽일 때가 있고 치료할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4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 5 돌을 던져 버릴 때가 있고 돌을 거둘 때가 있으며 안을 때가 있고 안는 일을 멀리 할 때가 있으며 6 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으며 7 찢을 때가 있고 꿰맬 때가 있으며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으며 8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느니라> 때를 모르는 사람은 어리석은 처신을 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2023년은 한국교회 성도들에게 어떤 때일까요? 올해는 광복 78주년이며, 한국전쟁의 정전협정 70주년입니다. 아직 우리는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로 고통당하고 있고, 전쟁 위협은 점증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창조질서를 거부하는 동성애를 비롯한 성적 지향의 문제로 사회가 어지럽고, 흉기를 들고 불특정 다수를 공격하는 말기적 증세를 보고 있습니다. 자연 파괴로 인한 기후 이상은 우리를 막다른 골목으로 몰고 있습니다. 교회의 타락과 부패는 우리를 힘들게 합니다. 우리도 시세를 분별할 때가 왔습니다. 지금은 더 이상 게으를 때가 아닙니다. 눈앞의 일에만 매달릴 때가 아닙니다. 개인의 작은 이익을 추구할 때가 아닙니다. 평소처럼 행동할 때가 아닙니다. 우리 자신에게 비상 상황을 선포할 때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신랑을 빼앗긴 날과 같아서 금식할 때입니다. 지금은 잘못된 다수가 아닌, 의로운 소수와 뜻을 함께할 때입니다. 우리 모두 깨어 일어나야 하겠습니다. 다시 허리띠를 동여매고, 출발선에 서야 합니다. 다시 새벽을 깨워야 합니다. 정신을 차리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야 합니다. 우리 모두 시세를 아는 현명한 성도가 되길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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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8-18
  • [시사칼럼] 더 이상 금모으기 없는 세상을 꿈꾸며
    말도 많고 탈도 많던 국제새만금잼버리대회가 무수한 얘깃거리를 양산하면서 마침내 끝이 났습니다. 그 가운데 돌연 ‘금모으기운동’이 소환이 되어 많은 이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지요. 시설 및 여타 준비 소홀과 태풍으로 인한 기상악화로 인해 야영을 비롯한 본래 행사가 조기종료가 되면서 수만 명에 이르는 참가자들을 위한 후속조치가 문제로 대두되었을 때, 집권여당의 정책위의장이라는 사람이 느닷없이 “금반지 정신으로 돌아가면 못할 게 없다”는 취지의 발언을 남겼기 때문입니다. 역시 여당의 한 국회의원은 일부 멤버가 군 복무 중인 비티에스(BTS)를 동원하자는 발언으로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고 있는 또 다른 가수 몇이 참가하는 케이팝(K-pop) 콘서트가 열려 행사의 대미를 장식하면서 다시없을 잼버리로 역사에 길이 남게 되었습니다. 결과적으로 대한민국은 색다른 금모으기운동의 모습을 한 차례 더 보여주었습니다. 대기업들 특히 삼성은 음료와 의료진 심지어 신입사원까지 투입했고, 엘지와 포스코 그리고 현대그룹 등이 각종 물품과 인원을 지원했으며, 이마트와 파리바게트 등 유통업계도 이에 질세라 뛰어들었고, 대한상공회의소와 전국경제인연합회도 이런저런 후원에 나섰습니다. 종교계도 가만있지 않았습니다. 대형교회를 중심으로 숙소 지원에 나섰고, 사찰 또한 템플스테이 같은 다양한 문화콘텐츠를 제공했습니다. 무엇보다 국가적 위기 순간에 거짓말처럼 등장하는 대한국민들의 감동적인 사연이 이어졌습니다. 대원들을 알아보고 마치 자기 잘못인 양 ‘미안하다’를 거듭하며 물이라도 한 병 건네고 과자를 사 주며 물건이나 음식 값을 깎아주고 보듬어주고 두드려주고 위로하고 격려하는 가슴 뭉클한 시민들이 속출하면서 ‘아, 대한민국~!’ 가슴 벅찬 구호를 거리마다 소리 없이 울려 퍼지게 하는 장관을 연출했습니다. 원래 금모으기운동의 시작은 1907년 국채보상운동이 효시입니다. 일단 남성들 중심으로 3개월간 금연하며 모은 돈으로 나라 빚을 갚자는 움직임이 일어났는데, 보다 더 대범한 여성들이 가락지와 패물을 모으자는 운동을 일으켰다 합니다. 남녀노소 신분고하 종교신앙을 막론하고 전국민이 참여하여 심지어는 도적떼까지 모인 금붙이들을 훔치기는커녕 자신들 것까지 보탰다는 전설 같은 일화들이 넘쳐납니다. 1997년 11월 국제통화금융(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하면서 나라가 또 다시 부채의 위기에 몰리자 우리 국민들이 보여주었던 모습도 장엄했습니다. 차고 다니던 목걸이나 가락지는 물론 장롱에 두었던 돌반지나 심지어 우승메달까지 금으로 된 것이면 무엇이든 자발적으로 내놓는 시민들의 발걸음이 금물결이 되어 방방곡곡을 수놓았습니다. 그 결과 이듬해 1월에서 4월까지 석 달 동안 미국 자유의 여신상 무게와 같은 225톤의 금이 걷혔다고 했습니다(경향, 구혜영). 어쩌면 금보다도 더 귀한 무언가를 모은 사건도 잊을 수 없습니다. 2007년 12월 삼성중공업 소속 선단과 홍콩 선적의 유조선이 충돌하여 원유 12,547리터가 유출되면서 순식간에 태안 앞바다가 기름으로 뒤덮이는 대참사가 발생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지금까지도 믿기지 않는 놀라운 일이 이후 벌어졌지요. 어느 순간부터 전국 각지에서 다양한 연령과 직업을 가진 시민들이 자원봉사자로 나서서 양동이로 기름을 퍼 나르고 흡착포나 헌 옷가지 등으로 바위나 토사에 묻은 기름을 직접 닦아내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참여한 인원이 물경 123만 명에 이르렀고, 그들이 손에 손을 잡고 어깨에 어깨를 이어 시커먼 바닷가를 가로지르며 만들어냈던 ‘인간띠’는 그 어떤 화가가 그린 선이나 획보다 더 눈부시고 아름다웠습니다. 복구에 수십 년도 모자란다던 내외신의 평가가 무색하게 국민들의 고귀한 땀방울들로 씻긴 바다는 불과 10년 만에 제 모습을 되찾았다고 했습니다. 그래도, 그래도 말입니다. 이제는 이런 소망을 가져봅니다. 더 이상 금모으기 운동 따위는 필요 없는 세상이 되면 좋겠다고, 누군가 책임 있는 자들이 저지른 과오의 결과 초래된 재앙을 순진무구한 시민들이 대신 나서서 감당해야 하는 그런 일들은 이번 잔치(“잼버리” 뜻)가 마지막이면 좋겠다는 그런 소망 말입니다. 한국만의 상황도 아닌 것이, 성경에도 일종의 금모으기 운동들이 등장합니다! 예수께서는 목자를 잃은 양같이 고생하던 백성들을 애(腸)를 태우며(스플랑크니조마이, 막 6:34) 바라보셨는데, 그런 와중에도 성전을 위해 가진 바 전부인 두 렙돈을 내놓은 과부를 칭찬하셨고(눅 21:4), 배고픈 사람들을 위해 자기 도시락을 아끼지 않고 기꺼이 내놓은 소년을 영원히 기억되도록 하셨습니다(요 6:9). 반면에 나라를 엉망으로 만들어놓고도 호의호식하던 무리들을 거침없이 “독사의 자식들”이라 부르셨고(마 12:34), 교인이라 하면서도 불의에 가담할 뿐 도무지 책임의식조차 없는 자들을 “회칠한 무덤”이라고 준엄하게 꾸짖으셨습니다(마 23:27). 분명히 그런 자들이 다시는 등장하지 않고 그런 일들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그래서 착하기만 한 백성들로 하여금 더 이상 짐을 지게 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엄중한 경고의 말씀이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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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8-18
  • [은혜의말씀] 우리의 작은 헌신으로(막 6:34-43)
    오늘 본문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오병이어’ 기적입니다.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남자만 오천 명이 먹고, 12 바구니가 남았다는 것입니다. 34절을 보면, 예수님은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다고 합니다. 불쌍히 여긴다는 것은 ‘가벼운 동정심’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고통 하는 곳에 깊이 들어가, 그 사람과 함께 고통을 나눈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의 아픔을 아시고, 우리와 함께해 주시는 사랑과 긍휼의 주님이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해는 저물어가고, 제자들도 많은 무리로 인해 걱정이 앞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나아와 무리를 보내어 자기들이 뭔가를 사 먹도록 하자고 제안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뭐라고 하십니까?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하십니다. 여러분, 이 사고의 차이를 보십시오. 제자들은 자신들과는 상관없는 일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다르십니다. 그들의 고통을 함께 지라는 것입니다. 사랑은 짐을 져 주는 것입니다. 말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함께 아파해 주고, 함께 눈물을 흘려주고, 함께 짐을 져 주는 것입니다. 앞으로 우리 교회는 빈들에 처한 사람들과 함께 짐을 지기 위해, 사랑의 마음으로 달려 나가는 일에 힘을 써야 할 것입니다. 자, 예수님의 말씀에 제자들이 다시 질문합니다. ‘우리가 가서 이백 데나리온의 떡을 사다 먹이리까’ 제자들은 이것은 도저히 안 되는 일이라며, 단정 짓고 있습니다. 제자들의 실수가 무엇입니까? 그들은 자기 안에 있는 자원만을 보았습니다. 그 자원을 가지고, 계산만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는 안되지요. 자기의 능력만을 볼 것이 아니라, 주님을 의지해야지요. 그런데, 제자들만 탓할 것이 아닙니다. 우리도 어려운 문제에 부딪치면 어떻게 합니까? 머리 굴리기 바쁘지 않습니까? 사람 찾아다니기 바쁘고, 이리저리 끌어 막기 바쁘고 그러지 않습니까? 그 순간 주님께 모든 것을 의탁하고 기도하십니까? 주님을 놓치면, 그때부터는 제자들같이 ‘부족합니다, 안 됩니다.’ 하게 됩니다. 부족할 그때가 바로 믿음의 눈으로, 살아 역사하시는 주님을 바라보아야 할 때입니다. 여러분, 주님의 일은 내 자원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 한 분만을 바라봅시다. 주님이 공급해주실 것입니다. 주님과 제자들의 대화를 통해 배우는 교훈은, 우리의 인생에 부족함과 어려움이 있을 때, 우리의 상황이 아니라 주님의 계획이 무엇인지 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 대답을 가지고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답이 무엇인지 물어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에 제자들이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구해왔습니다. 그것은 어린아이의 한 끼 도시락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것을 받아 축사하시고, 떼어주십니다. 그랬더니, 떼어도 떼어도 끝없이 양이 늘어납니다. 남자만 5천 명이 배부르게 먹고도, 12 바구니가 남았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우리가 빈들에 처한 사람들을 위해 함께 짐을 진다면, 필요한 자원은 우리 주님이 책임져주신다는 말이지요. 우리 주님이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채워주신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을 보면, 이 오병이어를 드린 소년이 나옵니다. 이 아이는 작은 자기 도시락을 주님께 바친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 드릴 때, 그 음식은 작은 것이 아니라, 기적의 산실이 되었습니다. 한 아이가 드린 오병이어가 주님의 손으로 옮겨지는 순간, 땅의 일이 하늘의 사건으로 변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탁월한 능력이나 은사가 없어도, 겸손히 순종하고자 애 써는 그 열심을 주님은 귀하게 보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작지만 큰 헌신이 주님의 손에 들려져 큰 역사가 일어날 줄 믿습니다. 우리 교회도 조용하게 교회와 주님의 일에 헌신하는 신실한 일꾼들이 많아지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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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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