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빅토리아장로교회의 한국선교는 1889년 10월 데이비스(Joseph Henry Davies, 1856-1890)와 그의 누나 메리(Mary, 1853-1941)의 내한으로 시작되었다. 데이비스 남매는 1889년 10월 2일 부산을 거쳐 4일 제물포에 도착하였고, 5일 서울로 이동하였다. 서울에서는 언더우드와 함께 지내며 조선말을 공부했고, 내한 5개월이 지난 1890년 3월 14일에는 누나 메리는 서울에 남겨둔채 남쪽으로 전도여행을 떠나 약 20일간 483km의 여행을 마치고 목적지 부산에 도착했으나 여행 도중 천연두에 감명되었고 폐렴까지 겹쳐 부산 도착 다음 날인 1890년 4월 5일, 3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첫 선교사의 예기치 못한 죽음으로 큰 충격을 받은 호주교회는 후속 선교사 파송을 결의하고, 1891년 5명의 제2진 선교사를 다시 한국으로 파송했는데, 그들의 매카이 목사(J. H. Mackay)와 그 부인 사라(Sarah), 그리고 멘지스(Belle Menzies), 퍼셋(Mary Fawcett), 진 페리(Jean Perry, 1863-1935) 등 세 사람의 미혼 여선교사들이었다.
즉 진 페리는 호주 빅토리아장로교회 여전도회연합회(PWMU)가 조선에 파송한 제2진 선교사 5명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는 본래 1863년 영국 런던 근교 세인트 메리스 크래이(St. Mary’s Cray)에서 출생했는데 19세가 되던 1882년 부모를 따라 호주 퀸즈랜드로 이민하였고, 가족과 함께 생활하던 중 1891년 여전도회연합회 파송으로 내한하게 된 것이다. 페리는 동료 4사람과 함께 1891년 9월 5일 시드니를 출발하여 40여 일간의 긴 여행을 마치고 1891년 10월 12일 부산에 도착했다. 이때부터 진 페리는 호주 빅토리아장로교 소속 선교사로 일하게 된다. 그런데 페리는 호주빅토리아장로교 소속 선교사로 약 2년 6개월간 일한 후 1895년 6월 말로 호주장로교 여전도회연합회 선교사직을 사임했다. 그가 사임한 이유는 교리적인 문제에 있어서 플리머스 구룹의 입장을 따랐기 때문이었다. 부산을 떠나 일본으로 갔던 페리는 7월 1일자로 장로교회의 특정교리에 대한 견해차를 수용할 수 없다는 이유로 일본에서 사임서를 보낸 것이다. 이 사임서는 두 달 후인 1895년 9월 1일 멜버른의 여전도회연합회 접수되었다. 여전도회연합회는 페리의 사임에 대해 매우 당황했고 그의 사임서를 수리하지 않고 임명 자체를 종료하는 방식을 선택했다.
그런데 이보다 중요한 것은 그가 호주장로교 선교부를 떠난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필자는 이 점에 대해 궁금하여 여러 문헌을 검토하였으나 단지 ‘신학적 견해 차이 때문’이라는 기록뿐이었다. 그렇다면 견해차가 무엇이었을까? 북장로교의 사무엘 마펫의 기록을 보면 그 ‘신학적 견해차’를 알 수 있는데, 마펫이 엘린우드에게 보낸 1895년 8월 21일자 편지에서 페리가 호주장로교 선교부를 떠난 것은, “그가 일본을 한 차례 여행하면서 몇 사람과 접촉했는데, 플리머스 형제단에 가입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장로교에 속했던 페리는 반교권적 반성직주의를 지향하되 원시 교회를 이상으로 여기는 플리머스 형제단에 매력을 느꼈고 결국 호주장로교 선교부를 떠나기로 한 것이다. 신학적 차이는 결국 교회관의 차이였다고 할 수 있다. 호주 선교부를 떠난 그는 일본에서 1896년 9월 호주로 돌아가 선교 후원자를 찾아 지원을 호소하고, 다시 내한하여 서울에서 엘렌 패쉬(Ellen Pash)라는 여성과 새로운 선교사역을 시작했다. 엘렌은 일본에서 만난 여성인데, 영국 켐브리지 길턴대학(Girton College) 출신으로 인도에서 사역하던 중 건강 때문에 일본으로 가 요양하고 있었다. 이때 일본을 방문한 페리와 만나게 된 것이다. 많은 점에서 의견을 같이했던 이들은 걸인, 유랑자 혹은 고아와 맹인 소년 소녀들을 위해 독립적으로 사역하기로 하고 두 사람은 1897년 ‘영국복음주의선교회’(BEM: British Evangelistic Mission)를 조직했다. 이들이 서대문 밖 정동에서 시작한 첫 사업이 고아원(孤兒園, Garden for Lonely Children) 사업이었다. 이때 영국에 있는 친구들의 재정지원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1899년에는 맹인들을 위한 ‘훈민학당’을 설립하고 점자교육을 실시했다. 이처럼 페리는 고아와 맹인, 여성 등 사회적 약자들을 위해 1915년까지 사역하고 52세의 나이로 은퇴했다. 곽안련(C. A. Clark) 선교사에 의하면, 페리는 1915년 한국에서 은퇴할 때 고아원과 모든 구호 시설들을 구세군에게 넘겨주었다고 한다. 한국에서 은퇴하고 노후를 보내던 페리는 72세 때인 1935년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페리는 문필력을 겸한 인물로 한국 체재기에 한국선교와 관련된 Chilgoopie The Glad,
The Man in Grey: or More About Korea, Uncle Mac The Missionary: or more News from Korea, True Stories by a British Missionary Woman, Twenty Years a Korean Missionary와 같은 여러 권의 책을 출판했는데, 초기 한국사회와 한국교회적 상황을 헤아려볼 수 있는 수중한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