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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임중 칼럼]수심정념(守心正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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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문호 도스토예프스키는 인간의 마음을 “하나님의 신과 악마가 싸우는 전쟁터”라고 표현하며, 무엇보다 타락한 마음을 새롭게 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역설했다. 에머슨은 우리의 내면에 천사와 미치광이가 공존한다고 했고, 데모크리토스는 행복과 불행이 모두 마음속에 있다고 말했다. 그래서 공자는 세심정혼(洗心精魂), 곧 마음을 씻고 혼을 맑게 하라고 가르쳤다. 우리가 살아가며 가장 먼저 해야 할 일 역시 마음을 관리하는 것이다.
『대학』에는 “心不在焉이면 視而不見이며 聽而不聞이요 食而不知其味니라”라는 가르침이 있다. 마음이 그 자리에 있지 않으면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으며, 먹어도 맛을 알지 못한다는 뜻이다.
마음이 천하면 사람도 천해지고, 마음이 고상하면 모든 것이 아름답고 고상해진다. 마음이 없는 사람은 허수아비나 빈집과 다를 바 없다. 마음이 바르면 생활도 바르고, 마음이 비뚤면 생활도 비뚤어진다. 마음은 모든 행위의 근본이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마음에서 시작된다. 욕을 하든, 선한 일을 하든, 작은 일을 하든, 큰일을 하든 마음이 먼저 움직인다. 말 한마디, 행동 하나도 모두 마음의 표현이다. 그래서 잠언 4장 23절은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고 말한다. 이것이 바로 수심정념(守心正念)이다.
우리는 살아가며 수많은 말을 듣는다. 아름다운 말, 가슴 아픈 말, 이해할 수 없는 말, 눈물겹도록 고마운 말, 억울한 말, 위로의 말…. 그 말들을 통해 누가 나를 위하는지, 누가 나를 괴롭게 하는지, 누가 나를 염려하는지, 타인의 마음을 읽게 된다.
그러면서 문득 하나님은 우리의 말을 어떻게 들으실까 생각해 보았다. 하루에도 수천만 마디 말을 쏟아내는 우리인데, 그 말은 곧 우리의 마음이다. 하나님은 그런 우리의 마음을 어떻게 보고 계실까.
그래서 이런 결론에 이른다. “하나님이 내 마음에 계시다면 그보다 귀한 것은 없구나.” 그러나 때때로 내 마음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순간을 느낄 때가 있다. 내가 하는 말과 행동을 돌아보면 금방 알 수 있다. 바울이 우리의 몸을 성령이 거하시는 전이라고 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래서 무엇보다 귀한 것이 우리의 마음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음을 높은 곳에 둔다. 자기 자신과의 관계에서는 그것이 희망이 되고 긍지가 되니 좋은 일이다. 그러나 타인과의 관계에서는 조심해야 한다. 마음을 높이 두는 것이 자칫 교만으로 변질되기 쉽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은 마음을 낮추라고 권한다. 이는 자기 자신이 아니라 타인과의 관계에서 지혜롭게 살아가는 길이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프라이드(pride)가 있다. 자존심은 자기 자신에게는 매우 소중하다. 자존심 없이 살아가는 것은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타인과의 관계에서는 그 프라이드를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한다. 왜냐하면 두 가지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는, 다른 사람이 나보다 나아 보일 때 프라이드가 질투로 변질되기 쉽고, 또 하나는, 다른 사람이 나보다 낮아 보일 때 프라이드가 교만으로 변하기 쉽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관계 개념’이며, 좋은 관계를 위해서는 마음을 잘 관리해야 한다. 이것이 수심정념이다. 나는 마흔의 나이에 목사가 되었다. 나이 많은 전도사로 사역할 때, 젊은 목사들에게서 낭패스러운 일을 겪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지금 생각해도 苦笑가 난다.
어느 날 목회자들과 식사를 하게 되었는데, 무심코 목사님들과 같은 식탁에 앉으려 하자 한 목사님이 언짢은 표정으로 말했다. “전도사가 어떻게 목사님들 식탁에 앉느냐, 밖에서 식사하라.”
순간 얼굴이 화끈거리고 한겨울인데도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몇몇 목사님들이 그 목사님을 핀잔하며 괜찮다고 했지만, 나는 조용히 밖으로 나와 식사를 했다. 그 사건은 내가 목사가 된 이후 수심정념을 결단하게 한 계기가 되었고, 낮은 마음으로 인간관계를 바라보게 한 소중한 교훈이 되었다.
봄은 아지랑이를 타고 오고, 여름은 소나기를 타고 오며, 가을은 고추잠자리를 타고 오고, 겨울은 눈서리를 타고 온다고 한다. 그렇다면 우리의 일상 속 행복과 축복은 무엇을 타고 올까. 바로 우리의 입술을 타고 온다. 이 입술을 통해 축복도 들어오고, 저주도 들어온다. 또한 이 입술을 통해 축복도 나가고, 저주도 나간다.
그래서 야고보는 “사람이 다 실수가 있으나 말에 실수가 없으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했다. 모든 짐승과 곤충도 길들일 수 있지만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으니, 쉬지 않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라고 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루를 살더라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말을 할 수 있는 입술이 되기를 기도한다. 축복은 입술을 통해 오고, 저주 또한 입술을 통해 온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축복을 불러오는 입술이 되기를 소망한다. 그것이 생명이 있는 말이다.
나는 오늘 어떤 말을 하고 있는가?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잠 1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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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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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의말씀]신앙의 유산을 물려주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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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신앙의 유산을 물려주는 일에 성공하려면 어떤 믿음을 가져야 할까요?
첫째, 날마다 진보하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라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참 감동적인 표현입니다. 야곱은 믿음으로 살았고, 믿음으로 죽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으로 죽는 것은 큰 복입니다. 그러나 평생을 자기 뜻대로 살다가 마지막 순간에 갑자기 믿음으로 죽을 수는 없습니다. 죽음은 갑자기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죽음은 살아온 삶의 결론입니다. 그래서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잘 보낸 하루가 편안한 저녁의 잠자리를 가져다주듯, 잘 보낸 일생만이 편안한 죽음을 선물한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죽으려면 먼저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둘째, 주님의 뜻을 수용하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야곱은 여러 가지 면에서 불완전한 인격의 소유자이었지만, 마침내 아버지 이삭의 신앙 유산을 받아서 하나님의 뜻을 소중히 여기는 인생을 살았고, 마침내 그 소중한 신앙의 유산을 자손들에게 남길 수 있었습니다. 참된 믿음은 하나님의 뜻을 수용하는 것입니다. 자기 뜻대로 되는 것이 복된 인생이 아니라, 선하신 하나님의 뜻대로 되는 것이 복인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들은 하나님이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가르쳐 주시고, 기도할 때 성령의 감동으로 깨닫게 하시고, 신앙의 사람들과의 대화와 환경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보면서도 자꾸만 자기 뜻대로 하려고 고집을 부립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방황과 고통과 환란만이 기다릴 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잠깐은 고통스럽고, 손해를 보는 것 같아도 그 길이 바로 복된 길임을 믿으십시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서 하나님의 복을 받는 모습을 자녀들에게 보여 주십시오. 그래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믿음을 유산으로 물려주는 일에 꼭 성공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러면 여러분, 우리가 신앙의 유산을 물려주는 일에 성공하려면 어떤 믿음을 가져야 할까요? 셋째, 하나님을 경배하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믿음의 사람 야곱은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을 경배하며 아름다운 최후를 맞이했던 복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야곱이 그의 인생 마지막에 비로소 예배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야곱의 일생을 추적해 보면, 야곱 인생의 강점은 예배였습니다. 야곱은 많은 약점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가 평생을 통해 예배만큼은 결코 소홀히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어떤 분을 마음을 다해 믿고 있다면, 그를 높이고 찬양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닙니까? 전능하시고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을 향한 야곱의 믿음은 예배로 나타난 것입니다. 야곱은 살아서도 하나님을 예배했고, 죽어가면서도 하나님을 예배했습니다.
야곱은 완벽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실수도 했습니다. 넘어지기도 했습니다. 실패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믿음이 자랐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배웠습니다. 예배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녀들에게 믿음을 유산으로 남겼습니다. 돈은 남겨도 사라집니다. 재산은 남겨도 없어집니다. 그러나 믿음은 다음 세대를 살립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신앙의 역전승을 거둡시다. 끝까지 자라는 믿음을 남깁시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믿음을 남깁시다. 예배하는 믿음을 남깁시다. 그래서 언젠가 우리 자녀들이 이렇게 고백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부모님이 내게 남겨준 가장 큰 유산은 믿음이었습니다.”, “우리 부모님이 남긴 가장 귀한 유산은 예배였습니다.”, “우리 부모님이 내게 보여 준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이었습니다.” 이 믿음을 유산으로 남기는 성도님들 모두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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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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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적경영학개론]ESG와 지속가능경영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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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년 ‘ESG와 지속가능경영’이란 이름이 주목을 받고 있다. 기업이 단순한 이윤 창출을 넘어 장기적 관점에서 ‘환경(Environment)’과 ‘사회적 책임(Social)’의 역할을 수행하고, ‘투명한 지배구조(Governance)’를 갖출 때 더욱 지속적 경영이 가능하다는 의미이다. 또 실제 상장기업의 경우 매년마다 ESG(지속가능경영)보고서를 작성해 공시하며, 자본시장을 통해 그 기업가치를 평가받고 있다. 그러면 성경은 이러한 ESG에 대해 어떻게 기록하고 있는가? 본 칼럼은 다음 3개의 관점에서 그 성경적 경영의 의미를 제시하고자 한다.
첫째는 환경(Environment) 문제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형상에 따라 인간을 창조하시며, 모든 피조물을 다스릴 권한을 주시고 이 환경과 생태계를 아름답게 지키게 하셨다. 즉 창조질서의 보전 자체가 성경적 명령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여호와 하나님이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어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창2:15)“, 여기서 '지키게'란 히브리어 '솨마르(Shamar)'란 의미로 '보호하다, 파수하다, 아끼다'란 뜻이다. 즉 창조 질서인 생태계를 지키고 보전함은 아담 이후 모든 그리스도인이 해야 할 당연한 하나님의 명령임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환경은 인류의 교만과 이윤을 극대화하고자 하는 탐심이 도를 넘어, 기후 위기와 생태계 파괴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환경의 보전은 단순히 탄소 배출권을 사고파는 규제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모두의 노력이 필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기후변화와 수자원, 자원순환을 축으로 탄소중립 등에 대해 기업이 어떠한 노력을 하고 있는지 매년 재무적 영향의 공시를 요구하는 것은 의미있는 일로 여겨진다.
둘째는 사회적 책임(Social)이다. 성경은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고 공의를 실천하도록 하고 있다. 성경적 기업의 목표는 단순한 이윤추구나 자본증식을 넘어, 이웃과 사회를 통해 하나님 나라의 의를 구하는 가치를 창출할 수 있어야 한다. 좋은 품질의 제품을 생산해 사회에 공급하고, 일자리를 창출하고, 이윤을 통해 국가 재정에 기여함으로, 이 땅 가운데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는 강력한 도구 역할을 해야 한다. 성경은 ”너희가 땅에서 곡식을 거둘 때에 밭 모퉁이까지 다 거두지 말고 떨어진 이삭도 줍지 말며 포도원의 열매를 다 따지 말며, 포도원에 떨어진 열매도 줍지 말고 가난한 사람과 거류민을 위하여 버려두라(레19:9-10)“하고 있다. 어려운 이웃을 돕고 구제에도 힘을 쓰도록 경제적 정의를 선언한 것이다. 따라서 성경적 기업은 단지 이윤추구를 위해 공급망을 독점하거나 노동자와 거래처를 착취하는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 또 시장경제를 기초로 주주의 권리를 존중하되, 다양한 이해관계자(Stakeholder)를 배려할 수 있어야 한다. 아울러 그런 의미에서 기업의 고용과 노동, 재무구조, 사회공헌, 제품 품질안전 등에 대한 공시는 의미있는 성과로 연결될 수가 있다.
셋째는 지배구조(Governance)이다. 성경은 기업의 투명성과 정직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강조하고 있다. 성경적 기업은 그 지향하는 성장과 목표를 이루기 위해 모인 다수의 사람들로 구성된 조직 공동체이다. 대주주에 의한 독단적인 의사결정이나 횡령, 불법 승계 등의 지배구조를 안고 기업은 지속가능경영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성경적 기업의 경영자는 아브라함과 언약 관계를 맺은 하나님께서 그 신실하심을 나타내셨듯이 노동자와의 계약관계를 바르게 하고, 노동자는 주께 대하듯 경영자와 신뢰관계를 형성해야 한다. 또한 "속이는 저울은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나 공평한 추는 그가 기뻐하시느니라(잠 11:1)‘.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코람데오(Coram Deo)의 정신에 따라 지배구조에 대한 신뢰 관계를 형성해야 할 것이다. 또 이를 위해 이사회의 의사결정 과정을 투명하게 하고, 준법과 윤리경영 상황 등을 공시함은 의미있는 일로 여겨진다.
결론적으로, 오늘날 현대 경영환경은 ‘ESG와 지속가능경영’이란 이름으로 기업의 본래 활동인 생산 판매 과정을 넘어 환경과 사회적 책임, 지배구조를 위해 노력하며, 또 그 성과 결과를 공시하도록 요청되고 있다. 물론 필자도 때로는 이러한 규제가 숨막히게 느껴질 때도 있다. 그러나 긍정적 측면, 특히 성경적 관점에서 보면 이는 본래 하나님께서 모든 기독경영인들에게 부어 주신 소명이었구나 하는 생각에 다다르면 이 또한 은혜로 느껴짐을 발견하게 된다. ESG를 통해 지속가능경영을 실천하고, 또 그리스도께서 부어주시는 은혜를 누리는 기독경영인이 더욱 많아지길 기도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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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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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칼럼]그리스도인과 투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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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선거일이 다가옵니다. 선거는 투표를 전제합니다. 일반적인 투표에는 보통·직접·평등·비밀의 네 가지 원칙이 존재합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으로 투표하는데 있어서 고려해야 할 특별한 규범이나 준칙은 있을까요? 이 부분을 다루는 신학자는 흔치 않습니다. 실제로 흑인참정권 운동에 참여했던 라인홀드 니버는 투표를 억압받는 약자들이 행사할 수 있는 ‘정치적 압박’(political pressure)의 일환으로 보았습니다. 본회퍼는 이론보다 실천으로 보여주었는데, 1932년 총선에 기독교인마저 대부분 민족주의와 광기에 싸여 나치당(NSDAP)을 지지할 때 온건파이자 국제유대를 강조하던 가톨릭중앙당(Central Party)에게 표를 던졌고, 이듬해 열린 선거에서도 나치파가 아니라 고백교회에 투표해달라고 직접 발로 뛰며 캠페인을 벌리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동시대 활동했던 헬무트 틸리케는 자신의 책에서 그리스도인에게 투표란 어떤 의미인지를 다음과 같이 언급한 바 있습니다(Theological Ethics, volume 2, 620-621). 오늘 우리 상황에도 시사하는 바가 있지 않겠습니까?
첫째, 투표장에서 마주하는 ‘죄의 연대성’입니다. “그리스도인이 투표함 앞에 설 때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기독교적 대안을 선택할 수 없다는 비극적인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타락한 세상(Fallen World)의 정치 구조 속에서 우리가 마주하는 선택지들은 ‘절대 선’과 ‘절대 악’의 대결이 아닌, 죄로 물든 역사 속에서 얽혀 있는 다양한 수준의 상대적 악들의 나열일 뿐이다. 따라서 투표는 나의 도덕적 순결함을 증명하는 자리가 아니라, 이 세상의 타락에 나 역시 동참하고 있음을 고백하는 ‘죄의 연대성’을 확인하는 자리다.” 그래서 투표하는 그리스도인은 슬픔과 책임을 느낄 수밖에 없다고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는 어떠합니까? 투표하면서 슬퍼해 보셨습니까? 투표하면서 양심의 가책을 느껴 보셨나요?
둘째, 영적 순결주의 유혹을 피해야 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완벽하게 선한 후보가 없다’거나 ‘정치는 본질적으로 더러운 것’이라는 이유로 투표를 거부하고 정치를 방관하는 영적 순결주의(Purism)의 유혹에 빠지곤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손에 피나 흙을 묻히지 않고 자신의 신앙적 청렴함을 지켰다고 착각한다. 그러나 이는 철저한 기만이다. 그러한 침묵은 현실에서 더 파괴적이고 잔인한 악이 승리하도록 방치하고 묵인하는 결과를 낳는다. 손을 씻고 뒤로 물러서는 행위(본디오 빌라도식 회피) 역시 세상의 악을 심화시키는 죄에 능동적으로 가담하는 것과 다름없다.” 지선은 대선이나 총선보다 투표율이 저조할 때가 많습니다(56.8-60.2-50.9%). 정작 내가 사는 땅에서 흙을 안 묻히려는 사람이 많습니다. 소금과 빛의 사명을 가진 그리스도인이라면 지방선거에서 훨씬 더 투표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셋째, 이성적 분별과 결단이 필요합니다. “누구도 하나님의 통치를 완벽하게 대리할 수 없음을 인지하면서도, ‘어떤 대안이 이 사회의 붕괴를 막아줄까’ 혹은 ‘어떤 선택이 고통받는 이웃의 생존과 인간 존엄성을 조금이라도 더 보호할 것인가’를 냉철하게 따져봐야 한다. 이런 분별은 종교적 광신이나 맹목적·이념적 교조주의로는 불가능하다. 루터의 말처럼 세상 왕국을 다스리는 도구는 복음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이성’과 ‘공의’이기 때문이다. 유권자로서 그리스도인은 선동적 구호와 공포 마케팅을 걷어내고, 현실의 질서와 평화를 유지하는 데 기여할 가장 합리적인 대안에 비극적이고 엄숙한 한 표를 행사해야 한다.” 하지만 오늘날 정치적 우상화나 감성적 선동주의가 크게 작용하는 모습들을 많이 관찰합니다. 지방선거는 특히나 지역을 섬길 일꾼을 뽑는 기회입니다. 지역에 대한 애착과 성실과 신뢰 같은 가치들을 바탕으로 합리적 선택이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넷째, 용서의 은혜 아래 행하는 정치적 고백입니다. “결국 기독교인의 투표는 최선의 영웅을 뽑는 축제가 아니라, 죄의 세상 속에서 덜 해로운 길을 찾아내려는 괴롭고 무거운 결단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 비극적인 선택을 과감하게 감당할 수 있는 이유는, 우리의 구원이 정치적 승패에 달려 있지 않으며, 우리의 불완전한 결단조차 덮으시는 하나님의 용서와 은혜(Justification)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완전하지 않은 후보에게 투표하지만, 그 불완전한 선택 속에서도 역사에 참여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한다. 그리스도인은 양심의 가책 속에서도 용기 있게 표를 던지며, 동시에 이 땅의 정치가 가질 수밖에 없는 한계를 늘 겸손히 인정해야 한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슬픔과 불안을 딛고, 비판적 성찰과 합리적 선택으로, 성숙한 책임 의식과 무엇보다 사명감을 가지고 투표에 임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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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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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건축칼럼]인공지능과 교회건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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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는 최근 인공지능, 로봇, 반도체가 시대정신인 것처럼 범람하고 있다. 하루가 다르게 혁신되는 현대의 속도감은 빛처럼 빨라 따라갈 수 없을 정도이다. 이런 환경 속에서 교회건축은 어떻게 진화되어 가고 있는지를 생각하고 미래를 예측하는 것도 교회 성장에 많은 통찰력을 제공한다.
첫째, 인공지능 시대의 교회건축은 단순히 편리한 건축물을 짓는 것에서 벗어나 AI라는 첨단 도구를 통해 건축 비용과 공간적 비효율성을 제거하는 데 노력해야 한다. AI는 건설 현장에서 인력을 전반적으로 자동화하고 통합하는 시도를 가능하게 할 것이다. 몇 년 후에는 세상의 모든 분야에서 로봇이 사람을 대체할 것이라고 일론 머스크가 수차례 경고한 바 있다.
그러나 AI는 시대를 변화시키는 하나의 도구에 불과하다. 복잡하고 분주한 세상 속에서 오히려 더욱 하나님을 깊이 만나고 체험하는 영적 안식처의 구축이 필요하다.
둘째, 인공지능이 교회건축에 적극적으로 도입될 때 기술적 효율성에만 치중하다 보면 교회 고유의 영성 공간이 퇴색될 수 있다. AI는 도구일 뿐이며, 공간의 중심은 여전히 하나님의 임재와 공동체의 교제로 강조되어야 한다.
또한 하이브리드 플랫폼으로서 교회 공간 구조와 기능을 고민해야 하며, 지역사회의 구원의 방주로서 교회 공간의 본질을 더욱 확장시켜 나가야 한다. 건축 계획 단계나 실행 단계에서 AI는 공간의 기능, 주차 수요 예측, 에너지 총량 및 절감, 유지관리비 절감, 지능형 공간 형태 등의 데이터 분석을 통해 더욱 경제적이고 효율적인 건축 플래닝을 가능하게 할 수 있다.
셋째, AI 기반의 건물 정보 모델링(BIM) 등은 시공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오류나 자재 낭비 등을 사전에 방지하는 데에도 많은 도움이 될 것으로 예측된다. 건물이 완공된 이후에도 AI 시스템이 노후화, 구조 안전, 가스 및 전기 안전 등을 실시간으로 모니터링하여 중소형 교회도 적은 관리 인력으로 안전하게 교회를 유지·보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AI 환경이 지나친 과학기술 유토피아를 제시함으로써 자칫 인간의 역할과 기능, 일자리 감소, 전문가들의 비전문화와 같은 역기능을 초래할 수 있다. 그런 순기능과 역기능 사이에서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창조의 권능과 권위를 절대적 가치로 높여 드리는 지혜가 요청된다.
성경의 관점에서 본 AI는 에스겔서의 마른 뼈 환상에서 보듯, 사망에서 생명으로 회복되는 생명 중심의 유토피아를 지향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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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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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규교수의 역사탐색]파트로누스와 클리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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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성경을 연구하거나 공부할 때 꼭 필요한 한 가지는 헬라-로마사회의 역사나 제도, 사회 구조를 이해하는 것이다. 기독교는 로마제국이라는 정치적 환경에서 배태되었기 때문에 그 시대의 사회 문화 환경을 이해하는 것은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성경을 이해하는데 필요한 로마 사회구조 중의 한 가지가 파트로누스와 클리엔스라는 상호관계였다.
라틴어 파트로누스(patronus)는 ‘보호자,’ ‘후원자’ 혹은 ‘후견인’으로 번역될 수 있는데, 아버지를 뜻하는 라틴어 파테르(pater)에서 유래했다. 로마에서는 귀족이나 유력한 신분의 사람이 평민이나 노예와 사회적 계약 관계를 맺고 상호 도움을 주는 제도였다. 이 제도를 클리엔텔라(Clientela)라고 불렀다. 파트로누스는 영어로 Patron으로 번역된다. 반면에 클리엔스(cliens) ‘피보호자’ 혹은 ‘가속인’으로 번역되는데, 이들은 파트로누스에게 선거나 투표 등에서 정치적 지지를 보내거나 노동력을 제공하거나 도움을 베풀고 그 대신 파트로누스로부터 법적인 보호를 받거나 경제적 도움을 받는다. 이 클리엔스는 영어로 Client로 번역된다. 그래서 파트로누스와 클리엔스는 영어로 말하면 Patron과 Client의 관계라고 할 수 있다. 정리하면, 프트로누스는 클리엔스로부터 지지를 받고 노동력을 제공받는 한편 클리엔스를 법적으로 보호해 주고 경제적 후원을 제공하는 그런 상호관계를 의미한다. 설명이 충분하다고 믿지만 부연한다면 이렇다. 지방선거를 앞두고 있는데, 지자체장 출마자들이 유세를 하게 되면 출마자가 중앙에 서고 그 휘하에서 그를 돕는 선거요원들이 출마자 주변에 도열하여 지지를 호소하고 선거를 돕는다. 이럴 경우 출마자는 파트로누스가 되고, 출마자 휘하의 선거요원들은 클리엔스가 된다. 클리엔스는 프트로누스를 지지하고 노동력을 제공하지만 파트로누스는 클리엔스를 보호하고 경제적 도움을 제공해야 한다.
파트로누스와 클리엔스의 관계는 어디까지나 사적이나 관계였다. 그러나 파트로누스가 공적이 지위에 오르면 클리엔스가 자연스럽게 하급 공무원 같은 역할을 하게 된다. 이와 같은로마 사회에서의 파트로누스와 클리엔스관계를 새롭게 조망하여 로마사연구에서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한 이가 19세기 독일의 로마사학자 데오도어 몸젠(Theodor Monmsen, 1817-1903)이었다. 몸젠은 역사학자로서 유일하게 ‘로마사’(Römische Geschichte)라는 저술을 통해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인물이다.
그렇다면 파트로누스와 클리엔스 개념을 하는 것은 신약성경을 이해하는데 어떤 유익이 있을까? 한가지 실예만 제시하고자 한다. 로마서 16장 1절과 2절을 보면 ‘뵈뵈’라는 인물이 나온다. 겐그레아 교회의 집사였던 그는 고린도에서 바울이 쓴 편지 ‘로마서’를 고린도에서 1400km 떨어진 로마교회에 전달한 여성이었는데, 바울은 2절에서 이렇게 말한다. “너희가 주 안에서 성도들의 합당한 예절로 그를 영접하고 무엇이든지 그에게 소용되는 바를 도와줄찌니, 이는 그가 여러 사람과 나의 보호자가 되었음이니라.” 마지막 부분에서 바울은 뵈뵈가 ‘여러 사람과 나의 보호자가 되었다’라고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보호자’가 바로 파트로누스였다는 말이다. 반면에 여러 사람과 바울은 뵈뵈의 클리엔스였다. 뵈뵈는 성경에서 오직 단 한 번 언급되는 인물인데(롬16:1-2), 그 이름은 ‘순수함’이란 의미이다. 그가, “여러 사람과 바울의 ‘보호자’가 되었다”(롬16:2)고 했는데, NIV에서는 “she has been a great help to many people, including me.”로 번역했지만 정확한 번역이라고 볼 수 없다. 우리 성경 개역개정판의 ‘보호자’라는 번역 또한 원의를 충분히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 성경에서 ‘보호자’라는 말로 번역된 헬라어는 프로스타티스(προστάτις, 남성의 경우는 προστάτής)인데, 문자적으로는 “...앞에 서다”는 뜻이지만 후견인(patroness, 남성의 경우는 Patron)이란 뜻이다. 라틴어로 말하면 파트로누스였다는 말이다. 반면에 여러 사람과 바울은 뵈뵈의 클리엔스였음을 알 수 있다. 앞에서 설명한 로마 사회의 파트로누스, 클리엔스 제도를 이해한다면, 뵈뵈는 신학자들 혹은 성경주석가들이 말하는 바처럼 뵈뵈는 가난한 과부가 아니라, 독립적 부양능력을 지닌 여성으로서 바울의 여행 경비를 부담하는 등 바울과 그 동역자들을 재정적으로 후원하고 지원했던 여성이었음을 알 수 있다. 뵈뵈는 고린도에서 로마까지 여행하고 로마의 성도들에게 ‘로마서’를 전달했는데, 이것은 그에게 정도 재산이 있었고, 사회적으로 비천한 신분의 여성이 아니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종합적으로 고려해 볼 때 바울과 그 동역자들의 파트로누스였던 뵈뵈는 바울 공동체의 중심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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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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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칼럼]바람이 없으면 연은 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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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최남단에는 키웨스트(Key West)라는 섬이 있습니다. 끝없이 이어진 바닷길을 따라가다 보면 도착하는 그곳에는 세계적인 작가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집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집을 방문하며 묻습니다. “왜 그는 세상의 중심이 아니라 저 먼 바다 끝에서 살고자 했을까?” 물론 따뜻한 기후와 낚시를 사랑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의 작품과 마지막 삶을 생각하면 어딘가 인간 존재의 깊은 허무와 외로움이 느껴집니다.
헤밍웨이의 대표작인 『노인과 바다』를 보면 늙은 어부 산티아고는 목숨을 걸고 거대한 청새치를 잡습니다. 그러나 사투 끝에 겨우 끌고 온 고기는 상어 떼에게 다 뜯겨 버리고 앙상한 뼈만 남습니다. 많은 문학평론가들은 그 장면 속에서 헤밍웨이 자신의 모습을 봅니다. 성공했지만 공허했고,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지만 마음의 평안을 얻지 못했던 한 인간의 모습 말입니다. 결국 그는 깊은 허무 속에서 스스로 삶을 마감했습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 역시 비슷한 모습이 아닐까요? 사람들은 더 많이 가지면 행복할 줄 압니다. 더 성공하면 불안이 사라질 줄 압니다. 더 인정받으면 외롭지 않을 줄 압니다. 그러나 AI가 세상을 빠르게 바꾸는 시대 속에서 사람들의 불안은 오히려 더 깊어지고 있습니다.
“나는 앞으로도 필요한 존재일까?”
“내 자녀는 이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나는 점점 쓸모 없어지는 것이 아닐까?”
사람들은 웃고 이야기하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는 점점 더 외롭고 두려워합니다. 기술은 발전하는데 인간의 마음은 점점 메말라 갑니다. 이전보다 훨씬 풍요롭고 편리한 시대가 되었는데, 정작 사람의 영혼은 더 고립되어 갑니다.
독일에서 활동하는 철학자 한병철은 이런 시대를 ‘피로사회’라고 불렀습니다. 끊임없이 자신을 증명해야 한다는 압박 속에서 인간이 자기 자신을 소진하며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오늘 우리는 쉬지 못합니다. 멈추지 못합니다. 뒤처질까 두렵기 때문입니다. 남보다 못할까 불안하기 때문입니다.
구약학자인 류호준 교수는 성령님의 역사를 ‘연’에 비유했습니다. 연을 날리려면 연이 필요하고, 실과 얼레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은 따로 있습니다. 바로 바람입니다. 물론 바람이 없어도 사람은 연을 들고 열심히 뛸 수 있습니다. 잠깐은 연을 떠올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숨이 차고 지치면 연은 다시 떨어집니다. 바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의 인생도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는 평생 열심히 뛰며 살아갑니다. 더 잘하려고 합니다. 더 인정받으려고 합니다. 더 버티려고 합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깨닫습니다. 내 힘만으로는 끝까지 날 수 없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성령의 바람이 필요합니다.
사도행전은 성령님이 오실 때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행 2:2)가 있었다고 합니다. 성령님은 지친 인생을 다시 날게 하시는 하나님의 바람입니다. 두려움 속에 다락방에 숨어 있던 제자들이 다시 세상 앞으로 걸어 나오게 된 것도, 실패했던 베드로가 다시 복음을 전하게 된 것도 성령의 바람 때문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우리에게 더 높이 올라가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다르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내려오셨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성령님께서 지치고 메마른 인생 위에 바람처럼 찾아오신다고 말입니다.
혹시 오늘 많이 지쳐 있습니까? 열심히 살아왔는데 마음이 텅 빈 것 같습니까? 웃고는 있지만 사실은 두렵습니까? 그렇다면 기억하십시오. 연은 자기 힘으로 나는 것이 아니라 바람을 타고 납니다. 우리 인생도 그렇습니다. 성령의 바람이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우십니다. 그리고 그 성령의 바람은 오늘도 지치고 메마른 우리 인생 위에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불어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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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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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법특강]프랑스의 위그노는 교회정치에 무엇을 담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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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개혁교회 신자를 가리켜서 위그노라 부른다. 16세기 종교개혁 때 프랑스의 위그노는 신앙 때문에 심한 박해를 받은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1572년 성 바돌로매 축일에 프랑스 전역에서 약 7만 명의 위그노가 순교당했다. 그런데 그 위그노가 박해 중에 만든 교회정치가 있다. 곧 <프랑스교회권징서>(Discipline ecclésiastique des Églises réformées de France)>이다.
16세기 중엽 프랑스교회는 프랑스 출신 종교개혁가 칼빈의 영향을 받아 개혁신앙이 빠르게 확산했다. 마침내 1559년 프랑스 파리에서 최초의 총회가 열려 신앙고백서와(갈리아 신앙고백), 교회권징서를 채택했다. 박해가 기승을 부리고 있었음에도 곳곳에 세워지는 지역교회들은 예배와 교리, 질서 등에서 하나가 될 필요를 느꼈다. 그렇게 해서 교회권징서가 작성되었다.
40조로 구성된 프랑스개혁교회의 교회권징서는 도대체 어떤 내용을 담았을까? 혼인을 다루는 34-38조를 제외하면 모두 직분과 치리회, 권징을 다루고 있다. 위그노는 이를 통해 어떤 교회를 꿈꾸었을까? 이는 오늘 우리 한국교회에 어떤 교훈을 주는 것일까?
첫째, 반(反)교권주의를 선언했다(1조). 교회권징서 제1조는 이들에게 하나의 선언과 같다. “어떤 교회도 다른 교회 위에 군림하지 못하며, 어떤 목사가 다른 목사 위에, 어떤 장로도 다른 장로 위에, 어떤 집사도 다른 집사 위에 군림하거나 부당한 교권을 행사할 수 없다.” 이는 명백히 당시 로마천주교회는 물론 교회 안에 있는 모든 형태의 교권주의를 반대하는 고백이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교회의 유일한 머리요, 어떤 직분도 다른 직분 위에, 어떤 교회도 다른 교회 위에, 어떤 치리회도 다른 치리회 위에 군림할 수 없음을 분명히 했다. 이 1조는 여러 나라 교회정치에 영향을 끼쳤다.
둘째, 감독정치를 거부하고, 장로회 정치를 채택했다. 각 교회는 목사나 유력한 개인이 아니라 장로들의 회인 치리회에 의해 다스려짐을 천명했다. 그 치리회는 당회, 시찰회, 노회, 총회로 불린다. 이 네 개 치리회를 온전히 둔 것은 프랑스개혁교회의 교회권징서가 최초이다. 칼빈이 목회한 제네바교회의 교회법령에도 총회는 없었다. 제네바는 국가가 아니라 하나의 도시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치리회를 다룰 때 총회가 가장 먼저 나오고 이어서 대회, 그리고 노회, 당회로 열거된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 순서는 지역교회와 당회의 역할을 무시하려는 것이 아니라, 박해 중에도 공동의 질서를 통해 하나의 공교회를 지향한 것을 잘 보여준다.
셋째, 지역교회의 당회에 목사와 장로는 물론 집사가 들어가 있다(24조). 제네바교회와 다르게 집사를 당회원으로 여겼다. 직분의 동등을 아주 강조했다. 집사는 심지어 시찰회, 노회, 총회에 총대로 갈 수 있었다.
넷째, 프랑스교회권징서는 전체 40개 조항 중 무려 8개 조항에서 권징(勸懲)을 다루고 있다. 위그노들은 권징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래서 자신들의 교회질서를 ‘권징서’라고 이름을 붙였다. 특히 직분자, 그중에서 목사의 범죄에 대한 권징을 강조했다. 행실은 물론, 다른 교훈을 가르치거나 당회가 말씀에 근거하여 제시하는 권면을 지키지 않을 때도 권징을 했다. 사회적 추문을 일으켜서 사회법을 따라 형벌을 받은 자는 목사직을 박탈했다. 그러나 최종 판결은 노회에 맡겼다.
다섯째, 목사의 호칭을 “말씀의 봉사자”(Minister of the Word)로 했다(10조). 목사의 주된 직무를 말씀으로 교회를 봉사하는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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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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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의말씀]서로 사랑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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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자주 사랑을 이야기합니다. 교회에서도 사랑을 말하고, 가정에서도 사랑을 말하고, 사회에서도 사랑을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조금만 정직해지면 이렇게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은 알지만, 정작 사랑하며 사는 것은 정말 어렵다.”
그런데 예수님은 단순히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서로 사랑하라.”고 사랑의 기준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예수님의 사랑은 어떤 사랑입니까? 조건이 없는 무조건적인 사랑입니다. 십자가에서 자신을 송두리째 내어주시는 희생하는 사랑입니다. 한순간 사랑하다가 그만두는 사랑이 아니라 끝까지, 변함없이 포기하지 않는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런 사랑을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할 때마다 힘이 듭니다. “미워하지 말라.”고 하시면 그래도 어떻게 해볼 수 있을 것 같은데, “예수님처럼 사랑하라.”는 말씀은 너무 수준이 높아서 해볼 자신이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래도 더 노력해야지, 더 사랑하며 살아야지” 그렇게 말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노력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경험에서 흘러나오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랑해야 하기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사랑받았기 때문에 사랑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받은 우리가 예수님처럼 서로 사랑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 서로 위로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현장에서 정신을 잃고 돌아온 제자들을 한 번 상상해 보십시오. 그들은 다 실패자입니다. 다 배신자요, 겁쟁이였습니다. 제자들은 자신을 지탱하기 어려울 정도로 심한 상처와 좌절을 겪고 있었습니다. 그때 제자들에게 정말 필요한 것이 있었다면, 그것은 따뜻한 한마디의 위로와 격려였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정말 지치고 낙심한 사람에게 따뜻한 위로의 한마디보다 더 큰 사랑은 없습니다.
“헨리 나우웬”은 “위로”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위로는 외로운 사람과 함께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위로는 마음을 쓰며 돌보는 일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다. 위로는 고통을 가져가 버리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함께 있으면서 ‘당신은 혼자가 아닙니다. 내가 당신과 함께 있습니다. 우리는 함께 고통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두려워하지 마세요.’라는 의미의 말 한마디를 하는 것이다. 참으로 우리들 모두는 위로를 주고받아야 할 나약한 존재들이다.”
둘째, 서로 용서해야 합니다.
여러분, 서로 용서해야 합니다. 용서하지 못하면 마음의 상처가 응어리가 되어 남아있게 됩니다. 그 응어리는 어려움이 생길 때 드러나게 되어서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우리 가정과 공동체를 깨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서로 용서하며 살아야 합니다. 아무리 못나고 무능한 남편이라도 용서하십시오.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아내라고 해도 용서하시길 바랍니다. 나에게 상처를 준 부모라도 용서하고 품어보십시오. 부모의 가슴을 아프게 한 불효한 자식이지만 용서하고 축복해 보십시오. 그러면 우리가 어려움 속에서도 서로 웃으며 극복해 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용서가 사랑입니다. 서로 용서하는 것이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예수님의 사랑을 받은 우리가 예수님처럼 서로 사랑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셋째, 서로 인내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족 간에 어려움이 있어도 잘 참아야 합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워도 잘 참아야 합니다. 그러면서 서로 격려하는 것입니다. ‘여보, 하나님께서 반드시 우리를 도와주실 거야. 하나님께 기도하고, 뭐든지 하라고 하시는 것이 있다면 한번 해 봐요. 조금만 인내하고 고생하면 다시 일어서게 될 거예요.’ 이렇게 말하면서 서로 인내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어려움 가운데서도 우리 가정이 행복과 웃음을 되찾게 될 것입니다. 저는 오늘 우리가 서로 사랑하라는 주님의 명령을 따르기 위해서 꼭 실천 할 세 가지를 말씀드렸습니다. 서로 위로하고, 서로 용서하고, 서로 인내하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를 계속,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실천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모두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놀라운 사랑이 은혜를 받읍시다. 그 깊고 높은 사랑을 더 많이 경험합시다. 그리고 그 주님의 사랑과 은혜로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서로 사랑합시다. 그래서 주님을 알고, 주님의 참 제자로 살아갑시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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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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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연구]하나님의 안배를 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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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야는 북 왕국 이스라엘의 선지자로서 아합왕과 왕비 이세벨이 다스리던 암흑시대에 활동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변화산에서 영광스럽게 변화되셨을 때, 모세와 함께 있었던 인물입니다. 흔히 모세는 율법을 대표하고, 엘리야는 선지자를 대표한다고 말합니다. 두 사람은 구약 성경을 대표하는 인물이라 하겠습니다. 더구나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우상의 선지자 팔백오십 명과 대결을 벌여 여호와만이 참 하나님이심을 선포한 인물이기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기도에 불로 응답하셨습니다. 우리는 그를 갈멜산의 영웅이라 부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를 영웅이라 하지 않습니다. 야고보서 5장 17절은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그가 우리와 같은 연약한 사람이라는 증거가 열왕기상 19장에 나옵니다. 이세벨 왕비는 갈멜산에서 자신이 지지하는 우상의 선지자들이 죽은 것에 크게 분노했습니다. 그는 사람을 보내 엘리야를 위협했습니다. 19장 2절입니다. <이세벨이 사신을 엘리야에게 보내어 이르되 내가 내일 이맘때에는 반드시 네 생명을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생명과 같게 하리라 그렇게 하지 아니하면 신들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림이 마땅하니라 한지라> 저는 이때 이세벨이 사신을 보낼 게 아니라, 자객을 보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세벨이 사신을 보낼 생각밖에 하지 못한 것은 하나님께서 엘리야의 생명을 지키시기 위함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우리처럼 연약한 사람이었기에, 이세벨의 위협만으로도 크게 낙심했습니다. 그는 차라리 죽기를 구하는 지경에 떨어졌습니다. 그는 광야로 들어가 로뎀나무 아래 앉아서 죽기를 구했습니다. 19장 4절입니다. <자기 자신은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가서 한 로뎀나무 아래에 앉아서 자기가 죽기를 원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하고>
이때 하나님께서는 그를 위로하고 격려하여 호렙산으로 보내셨습니다. 그러면서 그를 다시 추스르셔서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엘리야에게 맡긴 사명은 사람을 세우게 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끄시는 안배를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의 왕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 부분은 좀 이상합니다. 후에 하사엘은 북 이스라엘을 침략하여 힘들게 했습니다. 아람은 이스라엘의 적인데, 하나님께서는 왜 하사엘을 세우게 하셨을까요? 저는 하사엘을 통해 북 이스라엘을 징벌하시려는 것이었다고 여겨집니다. 하사엘은 하나님의 채찍이었습니다.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위해 하사엘 같은 사람을 세운다고 생각합니다. 악한 통치자는 하나님께서 이 시대를 징벌하려고 준비한 하사엘 같은 채찍이 아닐까요?
또 하나님께서는 예후를 기름부어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예후는 아합 가문을 심판했습니다. 사실 아합 가문을 심판하는 것은 엘리야의 몫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이세벨의 위협에 굴할 것이 아니라, 이세벨과 맞서 아합의 가문을 무너뜨렸어야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엘리야가 낙심했기에 그 일은 예후에게 돌아갔습니다.
또 엘리사를 세워 엘리야의 후계자로 삼게 하셨습니다. 엘리야 이후에도 하나님의 뜻을 전할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후에 엘리사는 엘리야의 능력으로 북 이스라엘의 등불이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는 바알에게 입맞추지 않은 칠천 명을 남길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지금도 하사엘 같이 폭력으로 세상을 힘들게 하는 자가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예후처럼 악한 세력을 벌하고 새 역사를 이루는 이도 있습니다. 엘리야나 엘리사처럼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주의 종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아무리 힘들어도 믿음을 버리지 않고, 하나님만 섬기는 칠천 명 같은 성도가 있습니다. 이들 모두의 배후에 하나님께서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열방 위에 계셔서 모든 일을 안배하시고, 다스리십니다. 분명한 것은 인간사의 배후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입니다. 모든 일은 하나님 안에서 결정되고 이루어질 것입니다. 역사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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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4-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