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최남단에는 키웨스트(Key West)라는 섬이 있습니다. 끝없이 이어진 바닷길을 따라가다 보면 도착하는 그곳에는 세계적인 작가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집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집을 방문하며 묻습니다. “왜 그는 세상의 중심이 아니라 저 먼 바다 끝에서 살고자 했을까?” 물론 따뜻한 기후와 낚시를 사랑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의 작품과 마지막 삶을 생각하면 어딘가 인간 존재의 깊은 허무와 외로움이 느껴집니다.
헤밍웨이의 대표작인 『노인과 바다』를 보면 늙은 어부 산티아고는 목숨을 걸고 거대한 청새치를 잡습니다. 그러나 사투 끝에 겨우 끌고 온 고기는 상어 떼에게 다 뜯겨 버리고 앙상한 뼈만 남습니다. 많은 문학평론가들은 그 장면 속에서 헤밍웨이 자신의 모습을 봅니다. 성공했지만 공허했고,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지만 마음의 평안을 얻지 못했던 한 인간의 모습 말입니다. 결국 그는 깊은 허무 속에서 스스로 삶을 마감했습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 역시 비슷한 모습이 아닐까요? 사람들은 더 많이 가지면 행복할 줄 압니다. 더 성공하면 불안이 사라질 줄 압니다. 더 인정받으면 외롭지 않을 줄 압니다. 그러나 AI가 세상을 빠르게 바꾸는 시대 속에서 사람들의 불안은 오히려 더 깊어지고 있습니다.
“나는 앞으로도 필요한 존재일까?”
“내 자녀는 이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나는 점점 쓸모 없어지는 것이 아닐까?”
사람들은 웃고 이야기하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는 점점 더 외롭고 두려워합니다. 기술은 발전하는데 인간의 마음은 점점 메말라 갑니다. 이전보다 훨씬 풍요롭고 편리한 시대가 되었는데, 정작 사람의 영혼은 더 고립되어 갑니다.
독일에서 활동하는 철학자 한병철은 이런 시대를 ‘피로사회’라고 불렀습니다. 끊임없이 자신을 증명해야 한다는 압박 속에서 인간이 자기 자신을 소진하며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오늘 우리는 쉬지 못합니다. 멈추지 못합니다. 뒤처질까 두렵기 때문입니다. 남보다 못할까 불안하기 때문입니다.
구약학자인 류호준 교수는 성령님의 역사를 ‘연’에 비유했습니다. 연을 날리려면 연이 필요하고, 실과 얼레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은 따로 있습니다. 바로 바람입니다. 물론 바람이 없어도 사람은 연을 들고 열심히 뛸 수 있습니다. 잠깐은 연을 떠올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숨이 차고 지치면 연은 다시 떨어집니다. 바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의 인생도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는 평생 열심히 뛰며 살아갑니다. 더 잘하려고 합니다. 더 인정받으려고 합니다. 더 버티려고 합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깨닫습니다. 내 힘만으로는 끝까지 날 수 없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성령의 바람이 필요합니다.
사도행전은 성령님이 오실 때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행 2:2)가 있었다고 합니다. 성령님은 지친 인생을 다시 날게 하시는 하나님의 바람입니다. 두려움 속에 다락방에 숨어 있던 제자들이 다시 세상 앞으로 걸어 나오게 된 것도, 실패했던 베드로가 다시 복음을 전하게 된 것도 성령의 바람 때문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우리에게 더 높이 올라가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다르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내려오셨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성령님께서 지치고 메마른 인생 위에 바람처럼 찾아오신다고 말입니다.
혹시 오늘 많이 지쳐 있습니까? 열심히 살아왔는데 마음이 텅 빈 것 같습니까? 웃고는 있지만 사실은 두렵습니까? 그렇다면 기억하십시오. 연은 자기 힘으로 나는 것이 아니라 바람을 타고 납니다. 우리 인생도 그렇습니다. 성령의 바람이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우십니다. 그리고 그 성령의 바람은 오늘도 지치고 메마른 우리 인생 위에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불어오고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