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누구를 위해 죽으셨나요?”라는 묻는 세례문답 목사에게 “우리 며느리 위해 죽으셨지요”라고 대답했다는 일화는 우리에게 널리 알려져 있고, 부흥 집회를 인도하는 설교자들에 의해 광범위하게 회자되었다. 그런데 그 일화의 진원지가 경남 진주의 진주교회였다는 점을 아는 이들이 많지 않다. 경남 산청군 단성면 정대리 유원영(柳遠榮)의 딸로 출생하여 진주에서 성장한 유수점(柳壽点, 1893.10.20-1997.3.2)씨는 23세가 되던 1916년 3월 3일 안영호(安英鎬, 1897.3.30-1966.8.30)와 혼인하여 진주군 봉래동 38번지에서 살고 있었다. 진주교회당 인접한 곳에서 살게 된 유수점은 자연스럽게 진주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했고 기독교 신앙을 받아드리게 된다. 이때는 커를 선교사가 본국으로 돌아가고 알렌 목사, 곧 안란애 선교사가 담임하고 있을 때였다. 선교사의 가르침을 받으며 신앙생활을 하게 된 유수점은 1917년경 세례를 받았고 진주교회 세례교인이 되었다. 1918년 11월에는 한국인 박성애 목사가 안란애 선교사와 더불어 위임동사목사로 일하게 된다.
점차 신앙의 도리를 깨닫게 된 그는 그때부터 주변 가족들에게 전도하기 시작했다. 그가 시급하게 여긴 전도 대상은 시모(媤母) 윤성순(尹聖順)이었다. 당시 시어머니는 50살이 넘은 나이로 그 당시로는 할머니였다. 평소에도 며느리의 예를 다했지만 전도할 마음으로 더욱 시모를 공경했고, 그의 영혼을 위해 기도했다. 그러던 중 시어머니도 차츰차츰 마음 문이 열리기 시작했고 며느리의 청에 못 이겨 진주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했다. 기독교에 대해 무심했을 뿐만 아니라 서양종교라고 무시했던 시어머니가 진주교회에 출석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놀라운 변화였다. 그렇게 하여 약 6개월이 지나고, 윤성순 할머니는 어렵게 학습 문답을 받았다. ‘학습’이라고 하지만 기독교 교리에 대한 이해가 많이 부족한 상태였다. 그로부터 다시 6개월이 지난 후 세례를 받게 되었다. 본인의 자원이라기보다는 며느리 유수점의 강권에 못 이겨 세례를 받게 된 것이다. 수세일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확인하기 어렵지만 1919년에서 1920년 어간이었다. 이때 며느리 유수점 집사는 박성애 목사의 세례문답에 대비하여 시어머니에게 세례문답을 준비하면서 이런 저런 예상질문을 가지고 시어머니를 도와주었다. “어머니, 목사님이 ‘예수님이 누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었는가’라고 물으면 나를 위해 죽으셨다고 말하세요.” 그리고 ‘누구 죄 때문에 죽으셨느냐’고 물으면 ‘내 죄 때문에 죽으셨다’라고 대답하면 된다고 일러 주었다. 이런 준비를 거쳐 실제로 세례문답을 받게 되었다. 윤성순 할머니를 비롯한 세례지원자들은 교회당에 모였고, 문답위원은 안란애 선교사와 박성애 목사, 그리고 박영숙 장로였다. 예상했던 바대로 박성애 목사는 윤성순 할머니에게 물었다. “죄 없으신 예수님은 십자가상에서 죽으셨지요?” “네, 그렇다고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누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까?” 이때 윤성순 할머니는 자신 있게 대답했다. “네, 저의 며느리 죄 때문에 죽었지요.” 며느리가 ‘내 죄 때문에 죽었다’ 라고 대답하라 했기에 윤선순 할머니는 그것을 ‘며느리 죄 때문이라’고 대답한 것이다.
세례문답 위원들은 웃음을 참지 못했으나 윤성순 할머니는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이때의 세례문답 이야기는 재미있는 일화로 회자되기 시작했고 부흥사들의 입을 통해 진주에서 경상도 지방으로, 그리고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이 문답 이야기는 바로 진주교회 세례문답식에서 있었던 일이었다. 윤성순 할머니는 여러가지로 부족했지만 세례 신자가 되었고, 며느리 유수점 집사는 그 후에도 열심히 교회를 위해 헌신했다.
유수점 집사는 4남 3녀 곧 7남매를 두었는데, 이들은 다 믿음으로 성장했고, 교회 장로 혹은 권사, 그리고 집사가 되어 충성스럽게 교회를 위해 봉사했다. 유수점 집사의 장남 안성제(安聖濟, 1922.7.25-1981. 3.20) 집사는 진주교회에서 유아세례를 받았고, 1943년 1월 5일 하동 고전 출신인 정상채(鄭尙采, 1925-2003)와 혼인했다. 성장한 후에는 배영초등학교 교사로, 그리고 교무주임으로 일하면서 진주교회 성가대장으로 혹은 성가대 지휘자로 봉사했다. 1959년에는 직장을 따라 부산으로 이주하여 범천교회에 출석했다. 그의 부인 정상채는 범천교회 초대 권사가 되었다. 안성제 집사의 아들이 안동상(安東相, 1947- ) 장로(울산동부교회), 안봉상장로(울산미포교회), 딸이 안행숙 사모(부산제3영도교회 정우진 원로목사 부인)이다. 진주교회에 출석하던 유수점 집사는 후에 막내딸이 살고있는 경남 사전시 곤양읍의 곤양교회로 이명하여 1979년 1월 2일 곤양교회 초대권사가 되었다. 후에는 딸 안정애가 살고 있는 울산으로 옮겨가 울산남부교회에 출석하면서 신앙생활을 계속하던 중 1997년 3월 2일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