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다섯에 신학을 시작해 3년간 수학한 뒤, 마흔 살에 목사 안수를 받은 그날 아침, 아버지와 나눈 대화는 아직도 내 가슴에서 불꽃처럼 타오른다. “나는 평생 농사를 지으며 모든 이치를 농심(農心)으로 해석하고 살아왔다. 통감(通鑑)의 지혜로 목사로서 이치를 벗어나지 말아라.”
나는 여기서 MIPO(Ministry-Input-Process-Output)목회를 디자인했고, 목회철학으로 삼았다. 그리고 그것을 절차탁마 목회(切磋琢磨 牧會)라 정의했다.
포항중앙교회에서 목회가 꽃피우고 향기를 발하며 열매를 맺어갈 때, 조금은 힘이 있을 때 농어촌 산골 개척교회를 섬기고 싶은 마음에 조기 은퇴를 선언했다. 은퇴 후 11년 동안 쉼 없이 부흥사경회를 인도했다. 해외까지 자비량 집회를 인도하며, 파주에서 해남까지 수차례 순회하면서 한국교회의 실상을 보고 듣고 경험했다. 그 과정에서 초대교회 믿음의 선배들의 삶이 얼마나 훌륭했는지를 새삼 깨닫게 되었고, 작금의 목회현장은 목회(牧會)가 아니라 목회(凩會)가 되어가는 것을 보면서 엎드림의 시간이 깊어지면서 눈물이 난다.
목회자의 삶이란 언제나 그렇듯,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충만하여 나눔과 베풂이 있는 따뜻한 가슴으로 감격하는 목회를 할 수 있어야 한다. 목자는 양을 알고, 양은 목자의 음성을 듣는 푸름이 드리워진 목장을 가꾸어야 한다. 고통받는 사람들의 위로의 노래가 되는 목회, 나를 필요로 하는 곳에 내가 있고, 책망받을 때 감사할 수 있는 마음, 미워함이 있을 때 기도하는 마음, 괴롭힘이 있을 때 사랑하는 마음으로 엮어내는 목회, 걸음마다 아름다움의 윤기가 흐르고, 감격할 줄 아는 눈물로 마르지 않는 눈, 세미하게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귀, 꺼지지 않는 사랑으로 불타는 가슴, 많은 이들의 아픔을 쓸어안고도 남을 넓은 가슴으로 목회를 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을 한마디로 함축하면 ‘절차탁마(切磋琢磨)의 통감목회(通鑑牧會)’다. 절차탁마는 자르고 갈고, 쪼고 닦는다는 뜻으로, 인격도 그렇고 인생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목회에 필요한 교훈이라 생각되었다. 여기서 각론으로 통감목회를 세웠다. 통감목회는 역사(歷史)를 거울로 보는 혜안과, 하나님의 섭리를 보는 영안(靈眼), 그리고 작은 자를 예수님처럼 볼 수 있는 심안(心眼)을 열고 목회하는 것이다. 통감목회의 내용을 들여다보면 예수님의 마음이 보인다.
첫째는 모심(母心)의 목회다. 모심에는 애심(愛心), 성심(誠心), 관심(關心)이 자리 잡고 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0장에서 강도와 삯꾼과 목자의 교훈을 말씀하셨는데, 모심은 목자에게 있지 강도나 삯꾼에게는 없다. 그들은 모심의 흉내는 낼 수 있지만, 성심과 애심과 관심의 기본이 내재하지 않는다. 일의 경중을 가릴 줄 알고, 사물의 앞뒤를 분별하며, 분수와 염치를 알고, 인내와 절제를 통한 사무량심(四無量心)의 마음에서 연출되는 측은지심(惻隱之心)을 목회의 바탕에 깔고 있다. 이것이 또한 모심목회(母心牧會)다. 모심목회는 지각 있는 행동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목회의 기경(起耕)이다.
둘째는 농심(農心)의 목회다. 한 해의 농사를 위한 기경(起耕), 씨뿌림, 가꿈, 거둠의 함축된 용어가 농심이다. 농부의 농심으로 목회할 때, 그 목회 현장은 참으로 윤택하고 아름다움이 열매 맺게 된다. 그 아름다움은 거둠의 시간까지 말할 수 없는 땀과 수고가 전제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목회의 씨뿌림이다.
농사는 항상 추수의 기쁨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일 년 내내 논과 밭을 갈고, 씨를 뿌리고, 심고, 잡초를 제거하고, 농약을 살포하며, 한여름 내내 비지땀 흘리며 일한다. 수확을 앞두고 풍수해로 인해 모든 것을 잃었을 때도 농부는 포기하지 않는다. 쓰나미처럼 휩쓸고 지나간 들판의 돌을 치우고, 다시 논밭을 일구어 다음 해 농사를 준비한다. 오늘의 아픔을 내일의 희망으로 다시 일어서는 것이 농심이다.
셋째는 예심(藝心)의 목회다. 농심이 씨뿌림이라면, 예심은 가꿈이다. 교인 한 사람 한 사람을 향한 목사의 마음이 예술가의 심정이 되는 것이 예심목회다. 다양한 화선지에 그림과 글씨를 통해 명작품을 만드는 화가의 마음으로, 다양한 돌을 가지고 걸작품을 만들어내는 조각가의 마음으로, 교인 한 사람 한 사람을 거룩한 성도로 빚어가는 목회를 예심목회라 한다. 어찌 걸작품만 나오랴, 때로는 쓸모없는 졸작품이 나오기도 하지만 예심에는 절차탁마가 기본이 된다.
넷째는 시심(施心)의 목회다. 목회의 기본 틀은 나눔과 베풂이다. 그것은 예수님의 구체적 사역이며, 전도와 구제, 봉사로 나타난다. 여기서 이해와 관용, 용서와 사랑이 연출되는 복음의 생활이 가능하다. 시심(施心)은 성령님의 마음이다. 낮아질 수 있어야 하고, 겸손함이 있어야 하며, 사랑함이 있어야 가능한 것이 시심이다. 시심목회는 마태복음 25장 40절이 기본이 되어야 한다.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는 이치를 깨달아야 한다. 지극히 작은 자는 비교법이 아니라 창조법에서 해석되어야 하며, 누가복음 10장의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에서 작은 자의 개념을 주님은 설명해 주셨다. 즉, ‘지금 나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다.
나는 은퇴 후 12년 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전국 교회를 다니며 여전히 절차탁마의 목회를 하고 있다. 작금의 목회현장은 목회(牧會)가 아니라 목회(凩會)가 되어가는 것을 보면서 아파한다. 은퇴 전에는 한 교회의 담임목회를 했지만, 은퇴 후에는 부흥사경회 강사로 초청받아 모든 교회 강단에 서는 그 시간마다 담임목사의 마음이 된다. 그리고 절차탁마의 이치로 말씀을 대언한다. 그 매 순간이 통감목회 현장이 된다. 그곳에 모심과 농심, 예심과 시심으로 성심을 다하고, 또 다음 마을을 향하여 주님의 나귀가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