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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송우 교수] 한국교회의 생태계 회복을 위하여
    한국교회의 성장은 세계 선교역사에서 드문 경우로 평가된다. 짧은 기간 동안 교회와 교인수의 증가가 폭발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 한국교회의 모습은 이런 긍정적 평가와는 다른 선상에 놓여 있다. 한국 사회 속에서 교회의 위상은 끝없이 추락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개척교회를 세우는 일도 갈수록 힘들어지고 있다. 그 결과 교인의 규모가 큰 교회와 그렇지 못한 교회로 양분되면서, 교회 생태계의 파괴 또한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다. 작은 교회 운동이 일고 있지만 크고 거대한 것에 매몰된, 근대의 가치관에서 벗어나지 못한, 한국교회는 작은 교회가 설 자리를 앗아가고 있다. 소위 대형교회는 더 대형화되어가고 있고, 소규모의 교회는 점차 그 수가 줄어들고 있다. 여기에는 기존신자들의 교회 수평 이동도 한 몫을 하고 있다. 그저 교회 출석만으로 만족하는 대형교회로 이동하고 있는 것이다. 신자들의 타성화된 교회생활의 편의주의가 낳은 결과이다. 문제는 교회의 대형화가 한국 교회의 생태계를 엄청나게 파괴하고 있다는 점이다. 성경은 교회를 사람의 몸에 비유하고 있다. 몸은 각 지체들이 서로 연결되어 소통하고, 유기체를 이룸으로써 살아 있는 생명체가 된다. 교회는 신앙을 고백한 자들이 하나의 몸을 이루어 나가는 특별한 공동체이다. 하나의 교회는 이러한 유기체성을 언제나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 손가락 한 부분에 상처가 나서 아프면, 몸 전체에 아픔이 전해져 온 몸에 아픔이 느껴지듯이 교회 공동체는 한 구성원의 아픔과 기쁨을 하나의 몸처럼 감지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교회의 유기체성이 지닌 본질이다. 교회 구성원들이 한 사람의 아픔과 기쁨을 전적으로 감지하고 나눌 수 없는 수를 넘어선다면, 교회의 본질은 유지되기 힘들다. 초대교회가 가정 교회 중심이었음을 기억한다면, 이 원리는 자연스럽게 이해된다. 가정교회로 출발한 초기 예루살렘 교회가 거대한 몸으로 변해가기 시작하자, 핍박을 통해 디아스포라 상태로 흩어졌다. 이렇게 된 연유를 여러 가지 시각에서 해석할 수 있다. 선교사적 의미에서 긍정적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러나 교회가 거대한 조직으로 변하면, 교회의 본질을 유지할 수 없다는 사실은 자명하다. 현대에 와서, 교회의 규모가 늘어나면서, 교회에는 경영의 원리가 도입되었다. 담임목사 외에 소위 부목사나 협동목사제도가 일반화되어, 한 교회에 여러 목회자들이 함께 교회를 섬기는 형태로 변했다. 많은 교인들을 관리하기 위한 일종의 교회경영이 시작된 것이다. 교회에 경영원리가 작동하면서, 교회는 변질되기 시작했다. 경영원리의 핵심은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이익을 남기는 데 있다. 교회는 결코 경영을 통해 이익을 추구하는 집단체가 아니다. 교회의 궁극적 목적은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데 있다. 하나님의 사랑의 극대화가 교회의 본질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자기 유익을 구하는 데 있지 않고, 자신을 버리는 것이다. 이런 사랑의 훈련소가 교회 공동체이다. 교회에 경영의 원리가 작동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사랑을 훈련할 수 있는 적정수를 넘어섰다는 증거이다. 한 목회자를 중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하고, 훈련하며, 이를 세상에서 실천할 수 있는 교회 공동체의 수가 한 교회의 적정수라는 말이다. 한 몸으로 인식할 수 있는 작은 규모의 교회 단위들이 모여, 우주적 차원의 한 교회를 이루는 것이 교회의 주인인 하나님의 뜻이 아닐까? 한국교회의 개혁은 소위 대규모의 교회들이 스스로 작은 교회로 나누어지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이것이 교회 속에 자리한 경영의 원리를 포기하고, 사랑의 원리를 쫒아 가는 첫걸음이다. 이것이야말로 작은 교회들이 다양하게 생존하면서 한국교회의 생태계를 회복하는 첩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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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18-11-12
  • [박용성 목사] 다음세대 교육은 부모교육이다
    한국 교회 곳곳에서 다음세대를 살려야 된다고 외치고 있다. 다음세대의 중요성과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그 방법과 대책에 있어서 뚜렷한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하는 실정이다. 한국 교회 다음세대는 1980년대까지만 해도 성장을 거듭해 왔다. 그러나 1990년대 접어들면서 정체기를 맞았다. 그리고 2000년대 들어 감소 현상을 겪고 있다. 가면 갈수록 교회 내에서 다음세대를 찾아보기가 힘이 든다. 이대로 가다가는 앞으로 다음세대가 없어지는 교회가 늘어갈 것이다. 그러면 다음세대가 잘 성장하려면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 목회자의 관심과 교회의 지원이 있으면 해결되는 것인가? 무엇보다도 다음세대가 잘 성장하려면 좋은 부모가 있어야 한다. 모세는 장성하여 이스라엘의 위대한 지도자가 되었다. 누가 모세를 가르쳤는가? 그가 배운 것은 애굽의 문화와 정치이다. 바로 왕궁에서 그는 애굽의 지도자로서의 수업을 받았다. 그런데 그는 엉뚱하게도 애굽의 지도자가 아닌 당시 애굽 사람들의 노예였던 이스라엘 민족의 지도자가 되었다. 물론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이루어진 일이다. 하지만 교육학적으로 볼 때 그가 받은 교육의 영향이다. 모세가 이스라엘 사람으로서 받은 교육은 바로 왕의 궁중에서 유모의 신분으로 자신을 돌보았던 친모로부터 받은 교육이다. 나일강에 목욕하러 왔던 바로의 공주는 아이 하나가 바구니에 담겨 떠내려오는 것을 보고 물에서 건져 올렸다. 공주는 그 아이를 자신의 양 아들로 삼고 그를 키우기 위해 유모를 구했는데 그가 바로 모세의 친모였다. 공주는 젖을 뗄 때 까지 모세를 맡겼다. 이 때가 모세의 교육 중 가장 중요한 시기였다. 하나님은 모세의 일생에 가장 중요한 시기를 바로 왕의 궁중에서 애굽 사람들에게 맡기지 않으셨다.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 여자 그것도 모세의 친모의 손에 맡겨졌다. 모세는 젖 먹는 시기 동안 어머니의 품에서 “너는 이스라엘 사람이다. 너는 하나님의 백성이다. 너는 애굽인이 아니다.” 라는 말을 들었을 것이다. 자기 정체성 교육을 제대로 받은 것이다. 사람이 어떤 시기에 어떤 교육을 받는가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또한, 누구에게 교육을 받는가 하는 것도 중요하다. 모세에게는 가장 훌륭한 교사가 있었다. 그 교사는 바로 모세의 모친이다. 가장 훌륭한 교사는 부모이다. 어린 시절부터 하나님의 백성임을 나타내는 정체성 교육을 제대로 해야 한다. 이런 측면에서 다음세대 교육의 승부는 부모교육에서부터 시작한다. 모세가 중요한 시기에 친모의 손에서 이스라엘의 영적인 교육을 받으면서 자랐던 것처럼 우리 다음세대의 교육을 부모가 감당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부모교육을 제대로 받아서 부모가 되지 않았다. 영적인 교육보다는 세상의 교육과 가치관을 따라서 자녀를 양육한다. 신앙과 삶이 다른 부모의 모습을 보고 다음세대는 자란다. 그렇게 될 때 우리에게 다음세대에 대한 희망은 사라진다. 한국교회의 다음세대를 세우는 일은 매우 중요하고 시급하다. 이 중요하고 시급한 문제를 부모가 감당해야 한다. 교회는 다음세대를 세우기 위해 부모교육에서부터 차근차근 풀어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한국교회의 미래는 불투명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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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18-10-29
  • [송시섭 교수] 같은 사건, 다른 시각
    최근 ‘가짜뉴스’(fake news)에 대한 국무총리의 의법처리발언이후 국감에서도 인터넷상의 ‘허위조작정보’를 둘러싼 논쟁이 뜨겁다. 여당에서는 타인의 명예와 권리보장이 필요하다는 주장이고, 야당은 정부에 비판적인 언론에 대한 재갈물리기가 아니냐는 의구심을 제기했다. 언론 및 표현의 자유란 근대시민사회의 여론분출구로서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와 관련되어 있는 기본권이다. 하지만 인터넷 시대를 맞이하여서는 그 행사의 범위가 확대되어 새로운 문제점들을 던져주고 있다. 모든 자유가 그렇듯 이들 자유도 공동체 내에서 타인과의 공동생활을 가능하게 하고 다른 헌법과 법질서를 위태롭게 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이고, 그것이 형법이나 정보통신망법등이 존재하는 이유다. 그러나 최근 한 일간신문이 제기한 ‘기독교 가짜뉴스’ 논란은 우리들의 고민을 깊게 한다. 한 선교단체를 가짜뉴스공장이라고 지목한 일간신문 기획기사의 핵심적인 근거는 그 단체가 정확한 ‘사실확인’(fact check)을 거치지 않은 기사를 배포하거나, 심지어 의도적으로 왜곡된 사실들을 짜깁기 하여 허위정보를 유포하는 ‘공장’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나아가 정치세력과의 연결을 통해 금전적인 거래까지 시도했다는 의혹제기였다. 이에 대하여 ‘가짜뉴스배포자’로 지목된 사람들은 단체를 결성하고 이는 자신들에 대한 심각한 명예훼손이며 국가인권정책기본계획(NAP)·혐오표현금지법·차별금지법 제정 반대 활동 등 정부정책에 반대하는 자신들을 일정한 프레임을 설정하여 재갈을 물리려는 움직임 중 하나라고 주장하고, 가짜뉴스의 온상은 오히려 그 일간신문이며, 자신들은 그 어떠한 정치권과의 연계도 없었다고 주장한다. 한 가지 사실, 똑 같은 상황을 두고 바라보는 시각이 서로 다를 수 있다. 시간이 흐르고 보다 명확한 사실이 밝혀지기를 바라면서 현 상황을 바라보면서 드는 생각들을 기독교 내부자의 입장에서 몇 가지 제시해보고자 한다. 우선, 기독교단체가 복음적인 시각으로 사회적 이슈들에 관심을 갖는 것은 필요하고 바람직하다. 하지만 기독교를 표방한 그룹이나 단체가 특정한 정치이념과 연결되는 것은 조심해야 한다. 특정 정당과의 연결은 오히려 교회의 운신의 폭을 좁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향후 조사 등을 통해 이 부분이 명확히 정리되길 바란다. 또한 사회의 여러 이슈들을 하나의 잣대로만 판단하는 것에 오류가 있을 수도 있다는 염려다. 사회적으로 논란이 뜨거운 인권, 동성애, 난민 같은 이슈들은 그 유형이 유사해 보이지만 동일한 접근과 해결방법이 존재하는 것은 아닐 수 있기 때문이다. 보다 폭넓은 전문가들의 참여가 요구되는 지점이고, 기독교계내의 ‘공론화위원회’같은 것이 필요한 이유다. 더불어 우리 기독교인들도 가짜뉴스감별에 대한 기준이 필요하다. 먼저 기사를 만들어내는 사람과 단체의 배경도 살펴보고, 최소한 두 세 개 이상의 기사를 서로 비교하면서 너무 자극적이거나 선동적인 문구에는 조심할 필요가 있다. 끝으로 우린 뉴스를 단지 ‘팩트체크’로만 볼 수 없는 사람들이다. 건전한 신앙과 보편적인 신학의 바탕위에서 다른 사건들을 같은 시각에서 바라볼 수 있는 지혜를 갖출 필요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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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18-10-15
  • [강규철 장로]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는 믿음
    이 할머니는 올해 85세입니다. 예수를 믿은 지 이제 5년이 되었습니다, 철저한 유학자 집안에서 태어나 유교사상으로 양육되었는데 언니가 일찍 불교에 출가하여 비구니가 되는 영향으로 불교를 믿었습니다. 그는 자녀들을 모두 결혼시키고 시골에서 혼자 살던 중 위암이 발견되어 수술을 받고 난 후 그는 부산으로 와서 예수를 믿는 집안에 시집 간 큰 딸네 집에서 함께 생활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주일이 되면 온 식구가 교회를 가는데 그는 적적한 집안에 하루 종일 혼자 지냈습니다. 무엇보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떨칠 수가 없었습니다. 또한 가족 간의 대화가 단절되는 것도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습니다. 쇠약한 몸으로 하루하루 사는 것이 아무런 낙이 없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딸에게 ‘내가 살기 위해서라도 예수를 믿어야 겠다’고 말하고는 먼저 간 남편이 묻혀있는 선산으로 가서 술을 한잔 부어주며 ‘이제부터 내가 예수를 믿어 제사를 지낼 수 없다’며 양해를 구했습니다. 그리고는 언니, 동생 등 친지에게 자신이 예수를 믿는다고 선언을 했습니다. 당연히 엄청난 반발이 있었지만 그는 열심히 교회를 다니면서 예수를 믿으려고 노력했습니다. 세례를 받았습니다. 교회로 부터 세례기념으로 성경책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그는 귀한 책을 받았으니 읽어야 한다며 매일 성경을 읽었는데 그 해가 지나기 전에 완독을 했습니다. 그 후로도 계속 성경을 읽고 있습니다. 그는 항상 깨끗한 새 돈을 준비하여 헌금을 하였습니다. 언젠가 부터는 자녀들로부터 받는 용돈과 구청에서 하는 취로사업에서 일하며 받는 지원금에서 십일조를 바치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삶도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불안하고 두려웠던 삶이 예수를 믿고 난 후 감사함이 넘치고 남을 돌아보는 여유도 생겼습니다. 그는 식사 때마다 감사의 기도를 진심으로 합니다. 또한 교회와 목사님과 어려움에 처한 성도들을 위한 기도를 매일 하고 있습니다. 그는 목사님을 선생님이라 생각합니다. 좋은 말씀으로 자신을 가르쳐주며 이끌어 주시니 존경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는 교회의 분란을 야기하는 교인들을 이해 할 수 없다고 합니다. 자신을 가르치는 선생님을 욕하고 대적하는 것은 사람의 도리가 아니라고 합니다. 이제는 암 수술을 두 번이나 받았지만 매 순간이 너무나 감사하고 행복하다고 합니다. 그는 주일날 교회에 가서 예배드리며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여러 성도들을 만나는 것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고 합니다. 그는 자신의 평생에 지금이 가장 행복하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눈을 뜨고 걸을 수 있으면 그는 교회에 가겠다고 합니다. 그가 예수를 믿으며 사는 삶은 초창기 한국교회의 순수했던 성도들의 삶과 거의 닮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예수를 믿어도 정말 똑 부러지게 믿고 있습니다. 그는 남산제일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권순한 성도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되리라’고 우리에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이왕이면 예수를 제대로 믿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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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18-09-21
  • [김충만 목사] 사울 주의보(注意報)
    베냐민 지파 기스의 아들인 사울은 40세에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 되어 왕정시대를 연다(삼상 9:1-2, 10:1, 13:1; 행 13:21). 이미 신명기에서 모세를 통해 예고된 왕의 제도(신 17:14-20)가 “우리에게 왕을 주어 우리를 다스리게 하라”(삼상 8:6a)는 이스라엘의 요구에 대해 결국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통해 허락하시는 흐름으로 응답되는 셈이다(삼상 8:10-22). 한편 사울왕정 40년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제1기는 그가 왕으로 부르심을 받는 시기부터 다윗이 첫 번 기름부음을 받기 전까지다(삼상 8-15장). 제2기는 다윗이 첫 번 기름부음을 받는 때부터 그가 블레셋과의 길보아전투에서 전사하는 때까지다(삼상 16-31장). 이쯤에서 사울왕정이 요동치는 사무엘상 16장이 사울 왕위 중 어느 시점이 되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이에 대해 사무엘기는 특별한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그런데 사무엘상 16장에서 첫 번 기름부음을 받는 다윗의 나이를 추론해 보면 대략 사울왕정의 파국을 알 수 있다. 다윗은 이새의 8번째 아들이다. 그가 첫 번 기름부음을 받은 후 바로 이어지는 블레셋(골리앗)과의 전쟁에 형들 중 위 3명이 출전한다. 율법은 20세 이상을 전쟁에 참여한다고 보는 바 그렇다면 형제가 모두 연년생이라는 가정(假定)하에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볼 수 있다. 넷째 형은 20세에 몇 달 부족하고, 다섯째가 19세, 여섯째가 18세, 일곱째가 17세, 그럼 여덟째 다윗은 16세가 된다. 자, 다윗은 30세에 두 번째 기름부음을 받고 유다 지파의 왕으로 7년 반을 다스린다(삼하 2:4, 5:4-5). 그렇다면 소년 다윗이 16세에 사울의 뒤를 잇는 이스라엘의 왕으로 예선되는 첫 번 기름부음을 받았을 때가 사울의 나이 66세, 즉 사울왕위로는 26년이 되는 해다. 이로 보건데 사울왕정 제1기는 26년, 제2기는 14년이 되는 셈이다. 사울은 40세에 “스스로를 작게 여길 그 때에”(삼상 15:17)에 왕으로 부르심을 받았다. 놀라운 것은 그때 그에게 ‘여호와의 신’이 임함으로서 새사람과 새마음을 따라 왕으로서의 소명의 길에 들어섰다는 점이다(삼상 10:10, 11:6). 그런데 사실상 왕조가 바뀌고야마는 사무엘상 16장에서, 그러니까 그의 왕위 26년 어간에 마침내 ‘여호와의 신’이 사울에게서 떠난다(삼상 16:14). 사울행전 40년의 역사 가운데 제1기인 26년이라는 기나긴 시간 동안 어떻든 ‘여호와의 신’이 사울 위에 임하여 있었다. 그런데 그가 성령 안에서 한 일이 무엇인가. 전쟁(아말렉전투)에서의 ‘승리’(불순종)가 오히려 사울의 ‘실패’(폐위)를 앞당길 뿐이었다. 동시에 성령 안에 살았으나 성경의 평가는 그가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삼상 15:23)라고 단언한다. 참담하다. 한편 이어지는 제2기는 ‘여호와의 신’(성령) 없이 왕놀이만으로 무려 14년 동안을 연명한다. 결국 40년 동안 ‘여호와의 신’ 안에서의 26년은 여호와의 말씀을 버리고 살았고, ‘여호와의 신’ 없는 14년은 오직 다윗 죽이기에 목숨을 걸었다. 그렇다면 여호와의 신이 임재 중일 때나, 성령이 부재 중일 때나 그의 40년은 맛 잃은 소금과 같았을 뿐 아닌가. 신약은 예수를 주(主)라 시인하면 다 성령 안에 있다 하신다(고전 12:3). 그런데 그러고도 고린도서가 전하는 고린도교회는 그 모양 그 꼴이었다. 사울왕위 40년과 고린도교회가 중첩되는 이유다. 그럼 나 자신이나,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한국교회는 어떤가. 사울 주의보(注意報) 앞에 무릎 꿇고 은혜 한 모금 갈망하다가 여기까지 왔다. 나 역시 겉사람으로도 속사람으로도 사울왕처럼 신앙놀이 중인 건 아닐까. 내 안에 여호와의 신이 거하심에도 그러는 것인가, 아니면 이미 사울처럼 여호와의 신이 부재 중이라서 그러는 것인가: “성령을 소멸하지 말며”(살전 5:19). 참 두렵다. 성령 안에 있었으나 왕위 2년만에 버림 받은 왕으로(삼상 13:13-14), 더욱 그런 왕으로 38년을 성령을 넘나들며 왕놀이한 사울! 자꾸 사울과 겹쳐지는 게 좀 불안하다. 이 말세의 영적 주의보(靈的 注意報)의 답을 조금이나마 알기에 더 그럴지도 모른다. 그래서 더 아프고 시리다. 주 앞에 서는 날이 곧이다. 그날이 오고 있다. 오, 마라나타!(Maranatha, Our Lord has come; 고전 16:22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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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9-10
  • [문춘근 목사] 작은 교회가 아름답지 아니한가!
    한국 교회가 참으로 걱정스럽다는 얘기는 단지 우리의 내부적 우려가 아니다. 공적인 미디어에서조차 우려하는 뉴스를 쏟아내는 지경에 이르렀다. 참으로 난감하다. 특히 메가처치, 초대형교회들로 인해 하나님 나라 복음을 담고 있는 일반 교회까지 함께 의심과 비판과 멸시의 대상으로 치부되고 있으니 말이다. 나는 책임이 없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참된 교회되기를 포기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어찌해야 하는 것일까? 참된 교회니 좋은 교회에 대해 논하는 것에 너무 지쳐서 10년 전에 아무런 계획이나 재정준비도 없이 교회를 시작했다. 왜냐하면 교회를 개혁(reform)하려고 20대부터 40대 중반까지 지역교회 몇 군데를 거치면서 몸부림 쳐 보았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 같았다. 그래서 어떤 계기로 그냥 교회를 형성(form)하기로 한 것이다. MH 공법, 즉 맨 땅에 헤딩하듯우리 부부까지 합해서 단 6명으로 시작했다. 그리고 10년이 흘렀다. 망하지 않고 버티게 해주신 주의 은혜가 얼마나 크신지. 앞으로 아 자리를 빌어 작은 교회의 사랑스러움과 아름다움을 이야기하려 한다. 이번 글에서는 개척초기부터 오늘까지 함께 한 고2 여성도가 지난 10주년 기념주일에 나눈 소감 편지글로 대신하려 한다. 작은 교회의 아름다움에 대한 발칙한 상상력이 일어나기를 기대한다: “사귐의 교회 10주년을 맞아 제가 이 자리에 설 수 있음에 감사드립니다. 8살 꼬마였던 제가 이 교회에서 10년을 보내 어느덧 고2, 18살이 된 것이 제가 다 신기하네요. 사실 어렸을 적엔 제 의지와는 상관없이 교회를 옮기게 되었지만. 지금은 어머니, 아버지께 ‘그때 선택 잘 하셨다고’ 말씀 드리고 싶어요. 초등학교 1학년이던 저는 이쁨과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랐습니다. 다른 큰 교회에선 제가 누군지, 제 이름이 뭔지 다들 몰랐지만 우리교회에서 만큼은 사랑을 독차지 하고 자랐던 것 같습니다. 초등학교 시절 내내 저는 교회 모임이 항상 기다려졌고 설레었습니다. (중간 생략) 마치 저를 한 완성된 인격체로 대해 주시는 것 같았습니다. 어린아이라고 무시하기 일쑤인 우리 세상에서 내 존재가 인정받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런 유년시절은 행복하고 사랑받던 기억으로 가득 채워졌습니다. 머리가 커지면서 저는 교회에서 자존감을 키웠습니다. 교회 행사가 있을 때면 피아노 발표, 노래 부르기 심지어는 5분기도회 인도까지 시켜주셨습니다. 그러다 사귐의 교회 어린 ‘권사’라는 호칭도 하사받았습니다. 저는 기뻤습니다. ‘나는 이렇게 인정받는 존재이구나’ ‘사랑받을 자격이 있나보다’하며 어른들과 함께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누구나 시련은 있습니다. 저에게 제일 큰 시련은 한동안 또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어른들을 어려워하지 않는 저였지만 또래가 없다는 것은 좀 힘든 일이더군요.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먼저 말거는 청소년을 어른들이 귀찮아하진 않을까 하는 걱정에 사로잡히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3배로 부흥하여 청소년부가 세 명이나 되니 참 감사한 일이죠. 누가 저에게 ‘교회 어디 다니냐’고 묻는다면 저는 우리 교회 자랑을 한참 늘어놓을 것입니다. 규모는 작지만 참 서로 친하다고. 소외된 이가 많은 세상에서 페리코레시스를 실천하는 공동체가 바로 우리 교회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10년의 세월이 저에게 교회에 대한 자긍심을 불어 넣어주었습니다. 저는 이제까지 사귐의 교회에서 자랐고, 성장했습니다. 10주년은 교회에게도 저에게도 의미 있는 날입니다. 진심으로 축하하고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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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9-07
  • [안동철 목사]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성도가 그립다
    현재 서구 교회의 모습이 ‘후기 기독교 시대’(Post Christianity Times)와 같다는 책을 읽은 적이 있다. 아마도 이런 용어를 사용한 사람은 우리 시대의 사상과 문화 등을 관통하는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에서 힌트를 얻은 것 같다. 서구의 문명은 기독교를 배제하고는 설명이 불가하다. 그것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기독교는 서구 문명의 근저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하나님을 말하고, 성경과 신앙의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실제로는 하나님을 무시하거나 하나님을 하나의 장식품 정도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마치 기독교의 상징인 십자가 목걸이를 목에 걸고는 있으나 전혀 복음과 상관없는 삶을 사는 사람과 같이 말이다. 그 결과 더 이상 교인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더욱 심각한 것은 거룩함이 가득해야 할 교계와 교회의 중직자들에게도 이런 모습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2018 한국교회목회자윤리위원회 발표회에서 손봉호 교수는 김진홍 목사의 지적을 언급하며 그의 말이 사실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것 같다고 지적했다. 김진홍 목사는 “한국교회 목회자의 약 10%는 절도요 강도와 같은 자들이고, 50-60%는 삯꾼들이며, 다만 30-40%만이 선한 목자이다”고 했다. 필자는 이 말을 계속해서 되씹으면서 최근 교계와 교회 지도자의 모습을 보며 나 자신이 혹시 강도와 절도, 삯꾼은 아닌지 돌아보고 있다. 이런 중 출애굽기 1장에 등장하는 히브리 산파 십브라와 부아를 보면서 큰 도전과 함께 위기에 처한 한국교회와 성도가 살길을 찾게 되었다. 사실 이것은 너무나 기초적이고 근본적인 접근법이어서 좀 더 깊은 이야기를 더 해야 하지 않느냐는 망설임도 있었지만 생각하면 할수록 답은 멀리 있지 않고 쉬운 곳에 있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히브리 산파 십브라와 부아가 누군가? 학자들에 의하면 이들은 애굽의 바로 왕에 의해 고용된 이방인으로 히브리 여인의 출산을 도운 사람으로 본다. 처음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의 번성을 억제할 목적으로 고용된 사람이다. 그러나 이들이 어떤 과정을 거친지는 확실치 않지만 당시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이집트의 왕인 바로가 “너희는 히브리 여인을 위하여 해산을 도울 때에 그 자리를 살펴서 아들이거든 그를 죽이고, 딸이거든 살려두라”(출 1:16)는 명령을 거부했다. “지금으로부터 3500여 년 전, 왕의 명령을 거부한다?” 사실 그것은 목숨을 건 선택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인간 왕을 두려워하기보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더 두려워하였다(출 1:17, 21). 이런 그들의 용감한 선택은 결국 출애굽의 영웅인 모세를 이 땅에 태어날 수 있게 했으며, 또한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오지 못하게 하려는 사탄의 계략을 박살나게 했다. 이 일에 십브라와 부아가 아름답게 사용된 것이다. 하나님은 3,500여 년이 지난 오늘도 이런 사람을 찾고 있다고 믿는다. 종교인이 아닌 뼛속 깊은 곳까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에 목숨 거는 하나님의 사람이 지금 필요하다. 만약 교회가 이런 다음세대를 길러낼 수만 있다면 한국 교회는 소망이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필자는 35도를 웃도는 폭염이 계속되는 이 때 시원한 얼음냉수와 같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성도 한 사람이 정말 그립다!
    • 오피니언
    • 정론
    2018-08-13
  • [탁지일 교수] 남북해빙기 이단문제
    남북한 해빙기를 일면 불안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남북교류의 활성화는 곧 북한과 중국 동북3성에 거점을 확보하고 활동하는 한국 이단들의 영향력 확대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단 대처의 관점에서, ‘남북갈등의 완화’는 ‘이단위기의 심화’로 이어질 수 있다. 첫째, 1992년 문선명과 김일성의 만남 이후, 통일교는 북한진출의 광폭 행보를 이어오고 있다. 문선명의 고향인 평안북도 정주 생가터에 ‘정주평화공원’이 세워졌고, 이곳을 찾는 통일교 신도들의 성지순례가 이어지고 있다. 평양 중심에는 북한에서 최대 흑자를 올린 통일교 소유 ‘보통강호텔’이 있고, 건너편에는 ‘통일교평양가정교회’가 위치한 ‘세계평화센터’가 있다. 2013년 말에는 통일교가 70% 지분을 확보하고 있던 ‘평화자동차’를 북한에 무상 양도하고, 그 대가로 북한 전역을 아우르는 유통망을 허가받았다는 소식도 있다. 개성을 중심으로 한 남한기업의 대북사업은 제한적이고 불안정하지만, 통일교 대북사업은 흔들림 없이 안정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게다가 매년 문선명의 생일에는, 대낮 서울 한복판 최고급 호텔에서,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이 보내는 산삼과 풍산개 등의 선물이 통일교에 전달되었다. 통일교의 대북진출은 지금 치외법권 지역에서 본격화되고 있다. 둘째, 남북평화 국면의 조성은, 중국 동북 3성에서 활동하고 있는 한국 이단들의 북한 진출을 용이하게 만들 전망이다. 지린성, 랴오닝성, 헤이룽장성 등 동북 3성은 조선족 동포들이 집중적으로 거주하는 지역이며, 중국 이단들이 다수 발흥한 지역이다. 현재 이곳에는 신천지, 하나님의교회, 구원파를 비롯한 대부분의 한국 이단들이 공격적인 포교활동을 펼치고 있으며, 조선족 신도들을 통해 중국 전역으로 확산되고 있다. 동북 3성은 중국과 북한 진출을 위한 한국 이단들의 베이스캠프가 되었다. 이들 한국 이단들의 무분별한 포교활동으로 인해 위기감을 느낀 중국 정부가 한국선교사들을 정기적으로 추방하고 있다고 한다. 남북교류의 활성화는 한국 이단들에게 북한과 중국 포교를 위한 절호의 기회를 제공할 전망이다. 셋째, 국내에 거주하는 북한 이탈 주민과 조선족 동포들에 대한 이단들의 접근도 예의주시할 필요가 있다. 남한에서 불확실하고 불안정한 시기를 보내고 있는 이들에게, 이단들은 거절하기 힘든 도움의 손길을 주며 다가서고 있다. 남북교류가 본격화된 후, 이들이 고향으로 돌아가 가족과 지인들을 대상으로 포교활동을 하게 된다면, 북한과 동북 3성에서 한국 이단들의 영향력은 더욱 커질 것이다. 국내 거주 새터민들과 조선족 동포들을 위한 전략적 차원에서의 선교가 진행되어야 한다. 남한, 북한, 동북 3성을 잇는 ‘실크로드’가 ‘이단루트’가 되는 위기의 순간이 다가오는 것은 아닌지 염려된다. 무엇보다 한국교회의 연합적 이단 대처가 아쉽다. 이단들은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북한에 진출하고 있는 반면, 한국교회는 경쟁적이고 낭만적으로 통일문제에 접근하고 있다. 북한선교는 보여주기식 통일운동을 넘어, 이단 대처 활동과 병행하여 치밀하고 전략적으로 전개되어야 한다. 불교와 천주교와는 달리, 한국교회의 사분오열된 연합운동은 이단 대처 전선의 혼란으로 고스란히 나타나고 있다. ‘그리스도를 위한 연합’이 아니라 ‘사리사욕을 위한 야합’을 자행하며, 교권장악과 정적제거의 수단으로 이단 문제가 악용되는 한, 효과적인 이단 대처는 요원하다. 남북갈등의 완화는 이단위기의 심화로 이어질 수 있다. 한 세기 전 부흥의 불길이 일어났던 ‘동방의 예루살렘’평양으로 한국교회가 다시 복음을 들고 찾아가는 날, 이미 그곳에 안정적으로 정착해 있는 이단들과 피할 수 없는 거룩한 싸움을 시작해야 하는 폭풍전야에 한국교회는 서 있다.
    • 오피니언
    • 정론
    2018-07-23
  • "사랑합니다""미안합니다""고맙습니다"를 배워야 할 이유
    우리가 경험하는 현실은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때로는 성취욕을 주기도 하지만 때로는 좌절감을 맛보게 하기도 합니다. 성공한 사람을 보고 자신의 무능함과 실패를 좌절로 이어감으로써 자신과 자신이 속한 공동체를 함께 어려운 상황으로 몰고 가기도 합니다. 제한적 가치를 지닌 것을 가지고자 서로 다툴 때에 사람들은 가장 중요한 것을 잃어버립니다. 그것은 바로 삶의 이유와 목적입니다. 어쩌면 냉혹한 현실은 수단과 목적을 섞어 버림으로써 삶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올바름의 결과로 누릴 수 있는 즐거움을 빼앗아 갔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는 결과 중심주의의 모습입니다. 즉 비교하며 살고, 때로는 비교 당하는 삶에 너무 익숙한 나머지 자신만이 지닌 선물의 가치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또한 세상은 점점 누구나 똑같이 어떤 수준에 도달해야 한다는 이상한 평등(?)의 사상에 사로 잡혀 있습니다. 그 결과 부모는 아이들을 각각의 모습이 아닌 사회의 기대치가 요구하는 형태로 바꾸고자 하고 청년들이나 직장인들도 예외는 아닌 듯합니다. 그 결과 자신만이 지닌 아름다움과 행복을 뒤로 하고 모두가 똑같이 가져야 하고 누려야 하는 행복(?)의 신기루를 찾아 여정을 떠나고 있습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인생의 끝자락에 가서야 알게 됩니다. 그 행복이 바로 자신에게 있었다는 평범한 진리를 말입니다. 이는 마치 성악가 조수미씨의 노래를 들은 한 사람이 더 이상 자신은 노래를 부를 수 없다고 생각하고 조수미씨처럼 부를 수 있는 방법을 찾아 떠나는 것과 같습니다. 그에게는 그의 소리가 있듯이 자신에게는 자신만의 음색과 세계가 있는데도 말입니다. 이러한 평범한 진리를 놓치는 순간 그는 제한된 가치를 지닌 현실적 물건(때로는 성공을 포함하여)이 삶의 전부를 대변해 줄 것 같은 유혹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그 신기루를 찾아 떠나게 되고 정작 자신에게 이미 주어졌던 행복은 버리게 됩니다. 그 여정의 마지막을 즐거운 결말로 끝내고 싶어 하는 것이 모두의 바람이지만 현실은 정반대일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렇다면 우린 이제 무엇을 먼저 해야 할까요? 우린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한 노력부터 시작해야 할 것 같습니다. 소유보다 사람을 먼저 생각하고 배려하는 법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또한 제한된 가치보다 무한한 가치를 지녔으나 값없이 공급하는 자연에 감사하는 법을 먼저 가져야 할 것 입니다. 그리고 내일의 허상을 버리고 오늘의 삶에 감사하는 지극히 소박한 마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무엇보다 비교가 주는 두려움을 벗어버리고 다른 사람을 자신보다 좋게 여기는 넉넉한 마음을 가지도록 해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을 잘 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요? 물론입니다. 그것은 바로 다른 사람을 향하여 “사랑합니다”라고 말하는 평화의 법을 배우고, 자신의 실수에 대하여 그 자리에서 “미안합니다”라는 자신의 서투름을 인정하는 법을 익히고, 또한 조그마한 것에도 “고맙습니다”라고 함으로써 나눔의 의미를 채워가는 법을 배우고 실천함으로써 가능합니다. 참 쉬운 말임에도 실천하기는 녹녹치 않습니다. 그 이유는 우린 자신과 다른 사람에게 폐쇄적인 삶을 사는데 너무 익숙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의 말과 조건 없이 안아줌으로써도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우리는 이를 위해 사랑의 말과 안아 주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이웃들에게 가르쳐 줌으로써 함께 생명을 존중하는 사회를 만들어 갈 수 있습니다. 세상은 제한된 가치(물건, 성공 등)를 소유하는 방법에 대하여 수많은 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무한한 가치를 가진 생명에 대하여는 마치 저절로 따라 오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정말 그럴까요? 실제는 반대입니다. 무한한 가치를 먼저 알아야 비로소 제한된 가치의 바른 의미도 알게 되고 제대로 누릴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가 무엇을 먼저 교육해야 할지는 자명한 일입니다.
    • 오피니언
    • 정론
    2018-07-09
  • [김재호 교수]부흥과 작은 예수
    역사는 언제나 진리를 왜곡해 왔다. 시간의 흐름 속에 하나님의 진리는 죽은 정통신앙으로 대체되고, 교회에는 생명을 잃어버린 종교인들로 넘쳐난다. 한국의 대학 청년들의 복음화율이 3% 이하가 되었다. 인간적인 눈으로 보면 하나님의 나라를 회복할 가능성이 없어 보인다. 지금 물질적으로 풍요해졌지만, 영적으로는 깊은 어둠의 상태이다. 이삭은 그의 가족, 종들, 그리고 가축들까지 목이 말라 죽게 되었을 때, 새 우물을 파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 아브라함이 팠던 우물을 생각해 냈다. 흔적도 없이 사라진 우물 자리를 찾아내고 블레셋이 버린 각종 쓰레기와 폐기물들로 채워진 그 우물을 다시 파냈다. 거기에는 여전히 맑은 샘이 흐르고 있었다. 우리에게는 부흥이 필요하다. 그러나 마틴로이드 존스는 단언하였다. “하나님의 본질적 진리가 재발견되지 않고 부흥이 일어난 예는 없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2007년 부흥의 우물로 우리의 역사에서 완전히 잊혀진 “윤인구(부산대 초대총장)를 세상에 드러내라”라는 마음을 주셨다. 나는 그를 탐구하여 다큐를 만들어 나갔다. 그는 일제강점기 일본 메이지 신학학사, 미국 프린스턴 신학석사, 영국 에든버러 신학박사과정을 공부한 우리나라 근대 최고의 신학자였다. 부산대 초대, 연세대 3대 총장을 역임했다. 조선신학원, 장신대, 부산대, 부산교대, 소정교회와 광복교회를 설립하였다. 나는 그를 통해 하나님의 사람이 꿈꾸고 노래하며,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며, 고난을 이기고 마침내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임하게 하는 것을 보았다. 하나님 기뻐하시는 참 교육과 참 스승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영적 가뭄이 극심한 이 시대에 바로 진리의 샘을 맛본 것이었다. 1년 동안 눈물과 기도로 윤인구의 다큐멘터리 ‘하늘열고 광명을”을 제작하고 발표하였다. 그 과정에서 나는 개인적 부흥을 경험했다. 아인슈타인은 “순수하고 아름다운 개인의 본보기 삶” 만이 유일하게 우리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했다. 윤인구가 나에게 그런 존재였다. 우리 중 많은 사람이 꿈꾸는 ‘물이 바다 덮음같이 여호와를 인정하는 것이 가득한 부흥’은 결과적 부흥이다. 그것을 꿈꾸는 자는 반드시 그 부흥의 과정 특히 그 과정에 더 깊이 마음을 두어야 한다. 부흥의 시작은 한 사람이 부흥을 경험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주변으로 부흥이 연쇄반응을 일으키며 펴져 나가는 것이다. 다큐 제작 인터뷰 과정에서 “윤인구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김기열은 거침없이 대답했다. “윤인구는 작은 예수야!” 부흥은 작은 예수들을 일으킨다, 이전처럼 살 수 없는 새로운 존재가 되고, 그를 통해 복음의 강력한 능력이 역사하여, 또 다른 작은 예수를 일으키는 것이다. 이 시대가 전하는 빛바랜 기독교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가 뚝뚝 떨어지는 선혈 낭자한 복음의 현장에서 자신의 삶을 다 바쳐 오직 믿음으로 다음세대를 살려낸 우리의 선배와 선조들의 이야기가 바로 우리의 부흥의 우물이다. 거기에서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내가 작은 예수로 변화되어야 한다. 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고 그들의 시체들은 일어나리이다 티끌에 누운 자들아 너희는 깨어 노래하라 주의 이슬은 빛난 이슬이니 땅이 죽은 자들을 내놓으리로다 _이사야 26:19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노래를 잃어버렸다. 아니 영이 죽어 있었다고 말해야할지 모른다. 주께서 티끌에 누운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깨어 노래하라!” 노래는 나를 살리고, 노래를 듣는 자를 살린다. 이제 땅이 죽은 자를 내어 놓는 역사가 나를 통해 나타나야 한다. 작은 예수! (참고 https://www.revival-well.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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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18-0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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