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강연
Home >  기고/강연 >  기고
실시간 기고 기사
-
-
[기고] 21대 국회와 차별금지법
-
-
4.15총선을 통해 여당이 180석의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개헌을 제외한 모든 입법을 할 수 있는 거대 여당이 만들어진 것이다. 21대 국회가 개원되기 전인데 벌써 여당 인사들은 각종 입법을 예고하고 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정의.평화위원회가 4월16일 발표한 입장문에서 “제21대 국회는 차별금지법을 조속히 제정, 시행하는 ‘평등국회’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 21대 국회에서도 우리 기독교계의 초미의 관심사가 ‘차별금지법’이 될 것으로 예상한다.
차별금지법은 2007년 제17대 국회에서 처음 발의된 이래로 새로 출범하는 국회마다 발의되고 있으나, 기독교계를 중심으로 동성애를 문제 삼으며 반대함으로 지금까지 통과되지 못하였다. 차별금지법은 2007년 12월 12일 노무현 정부가 ‘차별금지법안’을 만들어 법제사법위원회에 상정한 것을 시작으로, 2011년 12월 2일 민주노동당 권영길 의원 등 10명이 ‘차별금지법안’ 발의, 2012년 11월 6일 통합진보당 김재연 의원 등 10명이 ‘차별금지법안’ 발의하였으나 국회 임기만료로 폐기되었다. 2013년 2월 12일 민주통합당 김한길 의원 등 51명이 ‘차별금지법안’을 발의하였고, 같은 해 2월 20일 민주통합당 최원식 의원 등 12명도 ‘차별금지법’을 발의하였으나 보수기독교의 반대로 본회의에서 철회하였다.
차별금지법을 만들려는 시도는 이렇게 국회의원들만의 몫은 아니었다. 소위 대권 잠룡이라 일컫는 인사들이나 진보지식인들의 끊임없는 요구이기도 하다. 그리고 유엔인권이사회, 유엔 경제사회문화적권리위원회, 유엔 국가별인권상황정기검토(UPR) 심의 등 국제사회에서도 끊임없이 대한민국에 인종, 성별, 성적지향, 성별 정체성, HIV 감염 등의 차별금지 사유의 항목이 들어가는 ‘차별금지법’ 제정을 촉구. 권고하는 상황이다.
위와 같은 국내외의 흐름 속에서 21대 국회에서도 ‘차별금지법’의 발의는 반드시 있을 것으로 예상이 된다. 위키백과에서는 이제까지 ‘차별금지법’이 통과되지 못한 것이 “보수 기독교계의 집단 협박 및 항의 전화”, “보수 기독교계의 압력” 때문이라고 하고 있다. 지금까지의 방법으로는 21대 국회에서 ‘차별금지법’을 막기가 힘들거나 불가능할 상황이라고 예측된다.
어떻게 할 것인가? 세 가지를 제안하고 싶다.
첫째, 대응팀(task force team)을 만들자. 한국교회언론회(4월17일)는 “기독교의 가치관과 활동을 제한하는 많은 법률들이 거대 여당을 통하여 끊임없이 제정될 것으로 보인다.”고 예상하고 있다. 이런 예견을 앞두고 전직 기독국회의원, 법률가, 행정가, 교수, 신학자, 목회자, 언론인, 시민운동가 등 입법에 관한 전문적인 분들로 구성된 교파를 초월한 범기독교적인 대응팀을 만들어야 한다. 가능하면 현직에 있고, 사명감을 가진 경륜 있는 국회의원과 보좌관이 직접 대응팀원이 되거나, 자문위원이 되면 발의 이전단계부터 대응전략을 모색하기에 용이 할 것이다.
둘째, 대안을 제시하자. 국회의원이 ‘차별금지법’을 발의하여 입법 예고하면 무조건 반대하며 폐기를 외쳐서는 안 된다. 대응팀에서 발의된 법안에서 기독교의 가치관에 반하거나, 기독교의 활동을 제한할 가능성이 있는 사항들을 면밀하게 찾아내고, 대안을 마련하여 수정을 요청해야 한다. 그리고 교회에도 그 내용을 빠른 시간에 알려 공유하여야 한다.
셋째, 조직적인 대응을 하자. 합리적인 대안을 제시함에도 입법을 강행할 때에는 교회를 통해 전체 기독교인들이 연대 서명을 하여 국회와 언론에 전달함으로 의사표시를 하여야 한다. 그런데도 ‘차별금지법’이 통과되면, 수정법률안을 만들어 통과될 때까지 조직적인 운동을 해야 할 것이다.
-
2020-05-12
-
-
[기고] 초기 기독교는 전염병에 어떻게 대처했을까?
-
-
▲ 이상규 교수(백석대 석좌교수, 고신대 명예교수)
우리가 대역병(大疫病) 혹은 전염병을 말하면 중세기 특히 14세기의 흑사병을 생각한다. 그것이 대역병이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이런 유의 질병은 그 시대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전염병은 초대교회 시대에도 창궐하여 교회가 심각한 어려움에 처하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우리 시대에도 끊이지 않고 발병하여 인류 사회에 심각한 위협이 되고 있다. 1918년의 스페인독감 이후만 보더라도 1957년의 아시아독감, 1968년의 홍콩독감, 2002~2003년 사스, 2003~2009년의 조류독감, 2009년의 신종 플루, 2015년의 메르스 등이고 최근(2019-2020)에는 중국 후베이성 무한(武汉)에서 시작된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가 창궐하고 있다. 이런 질병이 창궐할 때 그 시대 교회는 어떻게 대처했을까? 이런 호기심을 가지고 이번에는 초대교회 시대의 역병과 교회의 대응에 대해 소개하고자 한다.
첫 번째 역병(165-180)
첫 3세기 동안의 초기교회 시대에는 크게 두 차례의 국제적인 전염병이 발병했다. 첫 번째 경우가 2세기 중엽, 곧 165년 겨울에 발생한 역병이었다. 마르크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 121-180) 황제 치하에서 근동 실루기아에서 베르스의 군부대에서 발병한 이 역병은 180년까지 15년간 로마제국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이 역병이 안토니우스 역병(Antonine Plague)인데, 이 병의 확산을 목격하고 기록한 그리스 의사의 이름을 따 ‘갈레노스 역병’(Plague of Galen)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역병은 골(Gaul)로 그리고 라인강을 따라 확산되었고, 원정에서 돌아온 군인들에 의해 동부의 로마 제국으로도 전파되었다. 고대 사회는 통계에 무관심하여 정확한 사망자를 알 수 없으나 윌리엄 맥닐(William McNeill)은 로마제국 인구의 4분지 1이상이 목숨을 잃었다고 추정한다. 매우 높은 치사율이었음을 알 수 있다. 미국의 세균학자이자 의사학자인 한스 진저(Hans Zinsser, 1878-1940)는 “사망자가 많아 이탈리아의 도시와 마을이 공동화되고 황폐화 되었다”고 썼다. 이 역병은 일, 이년 정도로 유행하다가 종식된 것이 아니라 무려 15년간 지속되었고 166년 이전에 중국에까지 전파되었기 때문에 사태가 매우 심각했다. 황제 아울렐리우스 자신도 이 역병으로 180년 3월 17일 사망했다. 흔히 지병의 악화가 사인이었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이 역병으로 고생하던 중 비엔나에서 사망한 것이다. 그의 시신은 테베레 강변의 하드리아누스 영묘에 안치되었다. 한스 진저는 이것이 서구사회에 최초로 등장한 천연두였을 것으로 추측한다. 엄청난 인구가 유실되자 인력난에 허덕이게 되었고, 사회적 혼란은 가중되었다.
두 번째 역병(249-262)
두 번째 발병은 249년 시작되어 251년 창궐하기 시작했다. 262년까지 계속된 이때의 전염병은 도시와 농촌으로까지 파급되었는데 이번의 역병은 홍역이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키프리아누스 역병’이라고 불리는 이 질병은 천연두나 홍역을 경험해 보지 못한 지역에서는 면역력의 부재로 피해가 컸고 치사율도 높았다. 이때 로마시에서만 하루에 5천명이 죽었다는 보고가 있다고 맥닐은 주장하고 있다. 그런가하면 알렉산드리아에서는 인구의 3분지 2가 죽음을 맞았을 것으로 보우크(A. Boak)는 추정했다. 이때의 역병에 대해서는 기독교 관련 여러 기록이 남아 있는데, 카르타고의 주교 키프리아누스는, “우리 가운데 많은 이가 이 전염병과 흑사병으로 죽어가고 있다”고 썼다. 몇 년 후 알렉산드리아의 주교 디오니시우스는 부활절 설교에서 “청천벽력처럼 그 어떤 재앙보다도 공포스러운 존재인 이 질병이 임했다”고 탄식했을 정도였다.
기독교회의 대처
문제는 이런 역병이 창궐했을 때 기독교회는 어떤 태도를 취했을까? 그리고 교회에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 종교의 가치는 위난한 상황에서 유효한 역할을 통해 드러나는데 이 당시 대역병의 현실에서 종교는 두 가지 질문에 답해야 했다. 첫 째는 왜 이런 재앙이 일어났는가 하는 재앙의 원인에 대한 설명이었고, 다른 하나는 재앙에 어떻게 대응해야하는가에 대한 모범을 제시해야 한다. 자연과학과 의학이 발전한 오늘에는 그것을 종교가 답해야 한다고 여기지 않았지만 초대교회 당시는 사람들은 종교가 답해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
그런데 당시 이방종교는 이 질문에 답하지 못했다. 알 수 없는 불안에 대한 유일한 해답이 도피였다. 그래서 이교의 사제들은 피신했고 고위층 관리들이나 부유한 이들은 도시를 떠나 안전한 곳으로 피신했다. 이교도들은 환자 스스로 알아서 살아남아야 한다고 보아 격리만이 최상의 도피였다. 물론 그 어느 곳도 안전하지 않았으나 도피가 최상의 대책이라고 여겼다. 부모는 자녀를 버렸고, 자녀도 부모를 버렸다. 돌보지 못한 자녀들과 연로한 부모들이 회생의 가능성이 고려되지 못한 채 보호 받지 못하고 죽음을 맞았다.
그렇다면 교회는 어떠했을까? 이때의 역병에 대처 했던 교회 지도자들의 여러 기록이 남아 있는데, 당시 교회는 모든 질병은 근본적으로 인간의 죄 때문이라고 보았고, 도피가 최상의 길이 아니라 보살핌과 배려라는 사랑으로 질병을 극복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이 점이 이방종교와 그 신봉자들과의 현격한 차이였다. 이때는 데시우스(Decius, 재위 249-51) 황제 치하에서 기독교가 조직적인 박해를 받고 있을 때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적 가치를 드러내고자 했다. 알렉산드리아의 감독이었던 디오니시우스(Dionysius of Alexandria, c. 200- c. 265)는, “이교도들은 처음 질병이 발생하자 아픈 자를 내쫓았고, 가장 가까이 이는 자들이 먼저 도망쳤고, 병든 자가 죽기도 전에 거리에 버려지고 매장하지 않는 시신을 흙처럼 취급했다. 그들은 이렇게 함으로서 치명적인 질병의 확산을 막고자 했으나 아무리 몸부림쳐도 도망치기 어렵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고 말하면서 그리스도인들은 이들과 달랐다고 말한다.
즉 그리스도인들은 역병의 현장에서도 사랑의 시혜자이고자 했다. 자기만 살겠다고 도피하는 현실에서도 도피가 최선의 선택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도리어 감염된 이들을 사랑으로 보살폈고 소생할 수 있도록 도움을 베풀었다. 도움을 베풀되, 교회 밖의 이방인들에게도 동일했다. 키프리아누스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자비하심을 설명하면서, “우리가 단지 우리(그리스도인)들만을 소중히 여기고 우리끼리만 자비를 베푼다면 그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지만, 세리나 이교도들이 하는 것 이상으로 선으로 악을 이기고, 하나님께서 관용을 베푸신 것 같이 관용을 베풀고, 원수조차도 사랑하며, 주님께서 권고하신 대로 핍박하는 자의 구원을 위해서 기도한다면 우리는 온전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변함없이 태양을 떠오르게 하시며, 비를 내리셔서 씨앗들을 기르시고 이러한 모든 선하심을 그의 백성들에게 보이실 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에게도 그렇게 하신다. 만일 누가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한다면 그 사람은 아버지를 본받아야 함이 마땅하지 않은가?” 키프리안은 전염병이 돌고 있는 위험한 상황에서도 그리스도인들에게 사랑을 실천하라고 가르친 것이다.
역병이 절정에 달하던 260년 디오니시우스는 부활절 설교에서 이렇게 설교했다. “우리 형제 그리스도인 대부분은 무한한 사랑과 충성심을 보여 주었으며 한시라도 몸을 사리지 않고 상대방을 배려하는 데 온 힘을 쏟았습니다. 그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아픈 자를 보살폈고, 그들의 모든 필요를 채워 주었고 주님 안에서 그들을 섬겼습니다. 그리고 병자들과 함께 평안과 기쁨 속에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들은 환자로부터 병이 감염되자 그 아픔을 받아들이고 고통을 감내했습니다. 많은 이들이 다른 이들을 간호하고 치유하다가 사망을 자신에게로 옮겨와 대신 죽음을 맞았습니다.”
자신이 감염될 수 있고 또 죽음의 위험 속에서도 형제 사랑을 실천했는데 이는 이교도들이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생겨난 단어가 ‘파라볼라노이 παραβολάνοι’ 곧 ‘위험을 무릎쓰는 자들’이라는 단어였다. 3세기 당시 기독교 공동체에서 파라볼라노이라는 칭호가 있었다는 사실은 기독교가 위난자들에게 자기희생적 사랑을 실천했다는 중요한 증거였다. 디오니시우는 그리스도인들이 이렇게 사랑을 실천한 대가로 죽음을 맞았고, 또 이런 사랑을 실천했던 장로나 집사 혹은 평신도들이 있었다고 말하면서 이들이야 말로 순교자와 다를 바 없다고 설교했다. 이런 점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후일 ‘사랑은 영혼의 손’(Love is the hand of the soul)이라고 말한 것이다.
기독교에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
키프리아누스나 디오니시우스, 그리고 역사가인 유세비우스 등은 이런 역병이 기독교의 확산에 영향을 주었다고 보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병든 자를 간호하고 위난한 이들에게 도움을 베푼 결과로 죽음을 맞기도 했으나, 모든 치료가 중단된 상태에서 기본적인 간호만으로도 사망률을 현저히 낮출 수가 있었다고 의사학자 맥닐은 주장한다. 물과 음식을 제공하는 것만으로도 쇠약해진 이들의 건강을 회복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방 종교 신봉자들에 비해 기독교 공동체의 생존율이 월등히 높았고, 또 그리스도인들이 베푼 형제애적 사랑은, 이교 숭배자들의 마음을 열어 기존 종교를 폐기하고 새로운 종교를 수용하는 변화, 곧 기독교로의 개종이라는 종교적 이행(移行)이 이루어져 기독교의 성공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정치적으로 볼 때 이런 질병이 로마제국 쇠퇴의 출발점이 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에드워드 로밀리 보크(Author. E. R. Boak, 1888-1962)와 역사가들은 계속되는 일련의 역병의 발발로 인구가 감소하였고, 모자라는 군인을 농부와 지역 공무원으로 충당하였기 때문에 식량 생산량도 감소하였다. 또 도시와 농촌 등 행정 지원 부족으로 야만인 침략을 막는 로마제국의 역량이 약화되었다고 지적했다. 자연재해나 역병이 역사의 변화를 초래하지만, 이런 대 변역의 와중에서 기독교는 절망한 민중들에게 소망을 주었다. 현세적이든 내세적이든 상관없이.
-
2020-03-27
-
-
[한국교회언론회 논평] 군을 무너트리는 행위는 좌시할 수 없다
-
-
그 동안 군인권을 빌미로 우리 사회에 자주 등장하던 군인권센터 임태훈 소장이 시민단체인 바른군인권연구소(대표 김영길)와 자유와인권연구소(대표 고영일)로부터 지난 8일 “군사기밀 보호법 및 무고/명예훼손 혐의”로 서울중앙지방검찰청에 고발당한 사실이 밝혀졌다. 또 임 소장의 국방부 군인 복무정책 심의위원회 위원 해촉을 촉구하는 요청도 하고 있다. 그 고발의 주된 내용은, 두 단체가 낸 성명서에 의하면, 임 소장이 지난 2018년 12월 소위 계엄령 문건이라며 폭로한 사건으로, 기무사령관을 지낸 이재수 전 사령관을 죽음으로 내 모는 계기가 된 사건과, 2018년 7월 박찬주 대장에게 소위 ‘공관병 갑질 사건’으로 프레임을 씌워, 대한민국 군대의 4성 장군의 명예를 심각하게 훼손한 것을 들고 있다. 또 2017년 11월에 국방부가 군인들의 복무 주요 정책을 다루는 정책위원회 심의 위원에 임 소장을 위촉한 것은 잘못이기 때문에 이를 해촉해야 한다는 것이다. 보통 이 위원회의 심의 위원에 해당하는 사람은, 군대에서 3성 장군급(차관급)으로 하는데, 임 소장은 2004년 군형법 92조 6(항문성교 금지)을 이유로 군대 입영을 거부하여, 헌법 제39조 ‘국방의 의무’를 위반한 사람으로, 이런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고발 내용은 첫째는 형법 제156조의 ‘무고죄’ 조항인데, 임 소장은 피해자 박찬주로 하여금 형사 처벌을 받게 할 목적으로, 공무소인 국방부 종합민원실에 피해자에 대하여 허위의 사실을 신고하였다고 본 것이다. 둘째는 ‘명예를 훼손’하였다고 보고 있다. 임 소장은 피해자(박찬주 대장)가 공관 비품을 절취하였다고 언론 기관에 보도 자료를 배포하는 방식으로 허위사실을 적시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피해자에 대한 무혐의 처분이 난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언론에 허위 사실을 적시함으로, 피해자에 대한 적개심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다. 세 번째는 군사기밀 보호법 위반행위이다. 소장(訴狀)에서는 임 소장의 소위 계엄령 문건 유출은, 기무사가 작성한 문건이라면 군사기밀보호법상의 군사기밀을 일반에 누설한 경우로 군사기밀 보호법을 위반한 경우에 해당하고, 피고발인이 작성하여 생성한 문건이라면 공문서 위조 및 동행사죄에 해당한다는 주장이다. 군인권센터는 지난 2009년에 임태훈 소장에 의하여 설립된 시민단체로 국방부와는 상관이 없다고 하고 있으나, 2012년 민주당 비례 대표에 공천 신청을 한 적도 있고, 또 2017년 11월에는 국방부가 군인들의 복무 주요 정책을 다루는 정책위원회 심의 위원에 위촉되기도 하여, 정치적으로 편향된 시민단체라는 지적을 받아 온 바 있다.이 단체는 나름대로 군대 내 인권을 개선한다고 하여 출발했지만, 2017년 계엄령 모의 사건의 조현천 전 기무사령관에 대한 현상금을 내건 건이 법에 어긋난 ‘모금 활동’을 벌여서 논란이 되기도 하였다.거기에다 이번에 시민단체인 바른군인권연구소와 자유와인권연구소로부터 “군사기밀 보호법 및 무고/명예훼손 혐의”로 서울중앙지방검찰청에 고발당한 사건은, 임 소장이 과도하며 과욕에 의한 폭로성 행위가 문제점으로 보여진다. 군인권을 위한 활동도 필요하지만, 피의(被疑) 대상자를 억울하게 하고, 국가의 기밀을 비전문가 입장에서 함부로 폭로하는 것은 매우 조심해야 할 문제이다. 군인권센터는 지난 10년간 활동에서 시민단체로써 상당히 알려졌다. 그것은 그만큼 책임감과 정확성을 가지고 일을 해야 한다는 요구이기도 하다. 이번에 고발 사건을 검찰에 접수한 바른군인권연구소와 자유와인권연구소가 발표한 성명서에 보면, 군대의 생명은 보안과 군기이며, 군인은 명예를 생명과 같이 여기는데, 이에 대하여 (군인권센터는) 군에 대한 불신과 장군의 명예를 더럽히는 치욕스러움을 가져다주었다는 것이다. 군대는 국가 안보의 최후 보루이며,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켜주는 아주 막중한 역할을 하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군인권센터가 무리한 활동을 통하여 군을 무력화 시키고 군의 명예를 실추시키는데 ‘갑질’ 행동을 한 것이 법률적 판단으로 잘못이 드러나면, 이에 대하여 무거운 책임을 져야 한다. 무엇이든지 세우는 것은 어렵다. 그러나 무너트리는 것은 순식간이다. 우리 군의 기강과 명예, 수고와 희생을 세우는 것은 민/군 서로 간의 노력이 있어야 한다. 그만큼 안보 문제는 중요하다. 만약에라도 군을 무력화시키는 것은 곧 국가를 해체하는 것과 다름 아니다. 군이 무너지고 국가가 해체된다면 누구에게 유익이 되며 누구에게 피해가 되겠는가?
-
2019-11-14
-
-
[기고] 약산이 6,25의 원흉인가?
-
-
약산(若山)이 약산(龠散)되었다고 마구 짓밟지 마라!
약산 김원봉 의열단단장에 대한 논란이 많다. 약산의 처조카 이었기에 관심을 가지고 보면 한두 가지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다. 대부분 글깨나 쓴다는 논객들이요 교수들이다. 정치인들도 몇 마디씩 한 것을 보면 그저 한숨만 나온다. 그래도 독립운동사에서는 산(若山)이 되어 한 산맥을 이루었는데 언제부터인가 약산(龠:피리 약,散:쓸모없는 산) 즉“쓸모없는 피리”가 되었다고 내동댕이치고 발로 짓밟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오고 있다.
먼저 역사를 바로알고 평가하자! 겉으로 나타난 어떤 사실 하나만 가지고 단순하게 말하지 말고, 그 당시의 역사적인 정황을 알고 평가하자는 것이다. 하나의 예술작품도 진지하게 분석하면서 평가하는데 한 인물을 가볍게 단정 지어버리는 우를 범하지 말자.
약산을 심지어“6.25의 원흉”,“6.25남침에서 핵심역할을 했던”,“6.25전쟁의 1등공신으로 훈장”, 모 당 대변인은”북한정권수립의 공훈자 한국전쟁 중 대한민국 국군을 많이 죽인댓가로 김일성 훈장을 받은“, 그 당 대표는 독립군을 괴롭힌 간도특성대 출신 모 장군을 찾아가 약산을“6.25남침의 주범가운데 한 명”, 모 신문사설에는“6.25남침에도 공을 쌓았다고 훈장까지 받았다”고 단정하였다. 거기다 댓글 쓴 것을 보면 더 가관이다. 장단을 맞추어 춤을 추며 풍악을 울리는 소리가 듣길 정도이다.
그러면 약산이 흔히 말하는 6.25전쟁의 주범이고 원흉인가?
김일성이 빨치산 동료들을 감시 보고하는 프락치 역할로 소련군부의 신임을 얻어 1945년 9월초에 소련 극동전선군 제88독립보병여단의 애송이 대위가 스탈린에게 북한 지도자로 발탁되었다. 그 여단은 만주 빨치산 출신 조선인들이다. 이들이 조국을 떠난 지 오래되어 해방후에 귀국하면서 국내에 기반이 없으므로 소련군에 업혀 귀국한다. 나중에 김일성이 북한 실세가 될 때 북한의 핵심세력으로 발판을 구축한다.“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비록下.중앙일보.1993.”에 김일성이“빨치산그룹을 중심으로 소련파가 당과 군대를 장악케 하고 연안파에 내각의 요직을 맡기며 ~ 자신의 수족인 빨치산파와 소련파로 하여금 당과 군대를 장악케 한 것은 사회주의 국가에선 정부보다 우위에 있는 것이 당이며 그 다음이 군대이기 때문이다”라 밝혀주고 있다. 약산은 1948년 4월에 남북협상으로 늦게 북으로 갔다. 9월에 북한내각구성에 보면 군이나 당 실권에서 밀려나 명목상 한직인 “국가검열상”이 되었다.
김일성은 군의 실권은 빨치산출신 인민집단군총사령관인 최용건에게“민족보위상”을 맡긴다. 그리고 군의 핵심자리에는 유성철에게 인민군 작정국장을 맡겼다. 소련이 북한을 통치하려니 김일성도 못 믿어 소련에 있는 지식이 있는 고려인 200여 명을 5차에 걸쳐 북한으로 데려온다. 이들을 소련파라 한다. 북한의 권력은 빨치산을 거친 제88여단 출신과 소련파가 핵심요직을 장악한 실세들이 된다.
이제 김일성은 자기세력중심으로 권력구조를 구축해놓고 눈을 남한으로 돌린다. 그리하여 1950년 3월 30일 ~ 4월 25일까지 박헌영과 같이 스탈린을 찾아가 남침허가를 받고, 5월에는 중국으로가 마오쩌둥을 만나 우리는 2~3주안에 남한점령을 끝낼 것이라고 장담했다. 그 후 소련 군사고문단은 남침작전 계획을 인민군 총참모장 강건에게 넘겨 1950년 6월 25일에 남침을 개시하여 한반도에는 비극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약산은 북한에서 그의 세력이 없다. 조선의용대 출신들은 해방 후에 거의 다 흩어졌고, 한글학자인 정치력이 없는 김두봉의 연안파와 협력하지만 그 핵심세력에는 밀린다. 나중에 인민공화당으로 독자세력을 구축한다. 그러나 김일성 세력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는 끝까지 “조선로동당(공산당)”에는 가입하지 않는다. 이러한 북한의 정치판도에서 약산이“전쟁의 원흉”이 되고 전쟁에 참가하여“국군을 많이 죽일 수 있는”위치가 아니라는 것이다. 1952년 3월 19일에 공훈을 받은 것은“국가훈장 1급 최고훈장”이 아닌 1951년 조선인민공화국 군사위원회평북도 전권대표로 있을 때 평북지역 보리파종실적이 우수하다고 인민회의상임위원장 김두봉이 준“로력훈장”이다. 전쟁도 끝나지 안했는데“전쟁공로훈장”을 받았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1953년 7월 27일 오전 10시에 판문점에서 휴전협정이 체결되었다.
전쟁 후에 김일성은 스탈린에게 3일 만에 끝낸다고 호언장담했던 전쟁이 실패하게 되자“시베리아의 유형을 면치 못하리라고 자포자기하고 있었다고”임은(북조선창설주역.김일성왕조著)은 말해주고 있다. 그는 전쟁실패로 군 장성 70여명이 숙청을 당했는데 전쟁공훈자는 최현이라고 한다. 최현은 빨치산출신으로 한글도 제대로 쓸 줄 모르는 무학자이다. 그는 전쟁 후에는 승승장구하여 인민무력부장까지 지냈다. 북한에서 군의 모든 실권은 빨치산출신들이 장악했는데 약산이“6.25의 원흉”이고“6.25전쟁의 1등 공신으로 훈장”을 받았다는 것은 그 당시 북한 정황을 전혀 모르고 하는 말이다.
전쟁이 나면 남한에 잔존한 남로당 20만이 대환영 할 것이라 장담했던 박헌영의 말이 공수포가 되어버리자 김일성은 전쟁실패의 책임을 뒤집어 씌어 평양에 있는“미제간첩”으로 죄목을 붙여 처형했다. 약산도 신변의 위협을 느껴 탈북(?)하려다 발각되어 역시 중국 장제스의“간첩”이라는 죄명으로 숙청되어 가족 모두 사라졌다. 약산의 죽음은 아무도 모른다.
20대 초반부터 조국해방독립을 위해 활동한 약산(若山)이다. 한때는 서슬이 푸른 일제경찰도 약산을 수배하기 위해 최고의 현상금을 걸고 수십 년간 뒤쫓았으나“산 같이”흔들림 없는 약산(若山)이었다. 오히려 우리 동포가 약산을“쓸모없는 피리”같은 약산(龠散)으로 만들어 버렸다.
금년은 약산을 중심으로 조직된“의열단”창단 100주년을 맞이하게 되었다.
쓸모없는 피리가 된“약산(龠散)”을 다시“약산(若山)”의 자리로 세워볼 수 없을까?
이번기회에 산산조각으로 갈라진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하나로 묶어, 지난날 조국독립을 위해 목숨 바쳐 희생한 선열들의 유지(遺志)를 이 땅에 이루어나가도록 다 함께 힘써보자!
지금은 기독교의 성령강림절기이다. 바울은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지키라"(엡4:3)라 말씀하셨다. 이번 절기에 우리 민족의 분열된 생각과 마음을 하나 되게 해달라고 간구하자!
▲ 박의영 목사(전 경성대학교 교목. 박문희 박차정 의사 유족)
-
2019-08-23
-
-
“다음세대를 살리고 돕는 힐링 전문가”
-
-
(재)21세기포럼(이사장 홍순모 장로) 비전100인위원회(위원장 이선복 교수, 동서대)가 주최한 제8회 부산지역 청소년청년 비전 컨테스트에서 청소년부 대상을 수상한 작품입니다.
세상은 다음세대들을 망가뜨리기 딱 좋은 환경과 공간인 듯합니다. 이런 세상 속에서 저는 하나님을 믿는 크리스천으로 살아가고 있고, 많은 다음세대들은 그리스도의 참된 사랑을 모른 체 절망하고 고통스러워합니다. 하나님은 저에게 이런 세상의 모습을 깨닫게 해주셨고, 다음세대들을 살리고 특별히, 어린아이들의 삶에 그리스도의 사랑을 심겨주는 사람이 되리라는 마음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1. 비전수립의 계기와 과정들
저는 어린 아이들과 함께 있는 시간이 너무나도 행복합니다. 그래서 어린이집 봉사, 고아원 봉사 등 어린 아이들이 있는 곳에서 자원 봉사를 많이 해왔고, 특별히 4년 전부터 저희 수영로교회와 러브부산에서 주최/주관하여 요트경기장에서 열리는 ‘어린이 대축제’ 행사에서 빠짐없이 하루 종일 봉사하며 섬겨왔습니다. 사랑스런 아이들을 돌보는 것이 다른 것들보다 더 즐겁고 행복해서 저는 아이들을 위해 뭔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중학교 3학년 말부터 저의 진로와 비전으로 만들기 위해 깊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솔직하게 저는 이 비전이 그리 확실하진 않았습니다. 그런데 저의 생각을 변화시키고 이 비전을 확실하게 해준 사건 중 하나는 작년 2018년 여름방학, 늘 그래왔듯 수영로교회 고등부 수련회에 참여한 후에 조금 쉬고 싶었지만 이어서 곧바로 진행된 ‘이웃교회 수련회’에서 저는 피아노 건반으로 그 곳에서 섬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참고로 ‘이웃교회 수련회’는 저희 수영로교회에서 주관하는 미자립교회 청소년들을 위한 수련회인데, 교회의 재정적 어려움 때문에 혹은, 다음세대들의 수가 작은 교회들을 위해서 2박3일 동안 1,2차에 걸쳐 저희 수영로교회가 모든 수련회를 기획하고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청소년캠프입니다. 그때 저는 취학아동과 청소년 중 취학아동부서에서 피아노 반주를 섬기게 되었고, 초등학교 4학년인 남자아이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제가 이 아이에게 관심을 가지게 된 건 둘째 날 저녁집회 때였습니다. 제가 그 어린 아이에게 관심을 가진 이유는 하나님의 임재가 강력한 이 저녁 집회 기도회에서 유일하게 혼자 처음부터 끝까지 일어서서 주님께 부르짖으며 기도하는 아이였기 때문입니다. 수련회가 끝나는 셋째날 아침 시간, 물을 먹기 위해 잠시 내려온 그 아이를 저는 만나게 되었고, 그 아이에게 어제 밤에 본 그 모습에 대해 칭찬을 한 후 질문 하나를 던졌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예배드릴 수 있었어? 무슨 교회 다니니?” 그 아이는 저와 옆에 계신 선생님들을 보며 “하나님이 힘 주셨어요. 그리고 할머니랑 저랑 온 거에요”라고 대답했습니다. 저는 그 말을 들은 순간 마치 망치로 뒤통수를 맞은 듯했고 그때 어린 아이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어린 아이도 그에 맞게 사용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게 된 저는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과 부활의 생명복음을 가지고 예수님의 심장으로 세상을 변화시키고 세상에서 지치고 힘겨워하고 상처받는 다음세대 영혼들을 살리고 치유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비전을 꿈꾸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사건은 앞 사건과 똑같이 작년 여름, 저는 포항에 있는 한동대학교에서 진행하는 G-impact캠프(2박3일)에 참여했습니다. 처음엔 친구 없이 혼자 가는 캠프라 정말 가기 싫었었는데 저의 예상과는 다르게 하나님은 특별한 동역자들을 저에게 붙여 주셨고 제가 평생에 뵙고 싶어 했던 이지선 교수님의 강연을 듣고 만남으로써 상담심리에 관해, 사회복지에 관해 깊게 공부하고 배워서 제대로 된 실력을 쌓아 다음세대들과 지역사회의 다른 사람에게 제가 가진 은사와 재능을 아낌없이 베푸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결단할 수 있는 시간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이 캠프를 갔을 때 가장 인상 깊었던 문구가 있는데, “배워서 남 주자”라는 문구입니다. 처음 이 문구를 한동대학교에서 보았을 땐 그냥 멋진 말이라고만 생각했는데 계속 이 문구를 보면 볼수록 ‘아, 나도 열심히 배워서 다음세대들에게 베푸는 사람이 되고 싶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곳에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저를 다음세대들을 살리는 곳에 사용해 주세요. 주님의 어린 자녀들을 살리고, 이 사회를 변화시키고 고치는 곳에 나를 사용해 주세요. 주의 심장으로 섬기는 리더가 되게 해 주세요.”
2. 미래의 비전을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인 계획
앞으로 저는 지금처럼 교회에서 다음세대들을 위해 섬길 수 있는 기회들이 생긴다면 그 곳에서 자원함으로 봉사하며 제가 받은 하나님의 사랑을 몸소 보여주는 사람이 될 것이며 지금 제가 있는 이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공부하고 배워서 저를 필요로 하는 그 곳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사람이 되고자 합니다.
특별히 저는 현재 상담 심리나 사회 복지학과를 선택하여 조금 더 사회 사람들에 대한 지식을 넓히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습니다. 왜 아동 복지나 아동 교육이 아니냐는 생각이 드실 수도 있습니다. 사실 아동 복지와 교육에 대해 배우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상담 심리나 사회 복지에서는 아동 심리 뿐만 아니라 노인, 임상, 중독 등 다양한 심리학을 배울 수 있고, 아동 복지 말고도 지역사회, 국제사회, 학교사회 등 아주 폭넓게 배울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서 저는 그 2개의 과를 공부하고자 열심히 준비하는 과정에 있습니다.
또, 아동, 심리, 복지에 관한 다양한 책들을 찾아가며 더 많은 정보를 얻고자 노력하고 있고, 다양한 봉사들도 더 많이 해볼 계획에 있습니다. 특별히 이번 년도에도 이웃교회 수련회에 참여해 봉사할 것이며, 어린이집과 유치원을 방문해 어린 아이들을 돕는 일에 참여할 계획입니다.
마지막으로, 현재 제가 섬기고 있는 수영로교회 유년부 찬양팀 아이들에게 찬양의 기쁨과 감사를 더 열심히 가르치고, Q.T나 암송 등 아이들에게 쉽고 재미있게 성경을 풀어 설명할 수 있도록 노력 중에 있습니다.
3.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나의 모습들
모태 신앙으로 살아온 저는 하나님을 제대로 만나기 전에는 세상 사람들과 다를 바 없이 교만한 사람이었고 저의 능력을 믿으며 살았으며 특히 예배 부분에 있어서는 수련회나 다른 집회에 참석하면 마치 다윗이 하나님의 언약궤가 예루살렘에 들어올 때 바지가 내려간 줄 모를 정도로 하나님을 찬양했던 것처럼 저 또한 그렇게 찬양하며 하나님께 나아갔지만 정작 주일예배나 적은 인원이 모여 드리는 예배에서는 그냥 대충 드리고 마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작년 겨울 고등부수련회를 통해 저는 하나님의 놀라우시고 넓으시고 깊으신 사랑을 체험하였습니다. 그때 저를 변화시킨 하나님의 말씀은 바로 “그래도 사랑한다, 화영아”였습니다. 먼지보다 더 작고 쉽게 하나님을 버리고 살아가던 저를 보시며 이렇게 말씀하셨고, 저는 그 자리에서 바로 무릎을 꿇고 펑펑 울며 하나님께 회개했습니다. 이 수련회가 끝나고 나서, 저의 예배 태도는 완전히 뒤집히는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주님을 대충 찬양하던 저는 주일예배도 수련회에 참석 한 것처럼 열정적으로 주님을 기쁘게 찬양하게 되었고 그런 저를 쳐다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후에 저는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내내 교회에서 하는 6개월짜리 제자훈련과정을 밟으며 저의 신앙이 더 잘 자라고 성장하는 기회를 만들었고, 지금은 고등부 찬양팀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리는 피아노 반주자로 섬기는 일에 힘쓰고 있습니다. 또, 유년부 아이들과 함께 어린 아이의 모습으로 하나님께 함께 예배도 드리고 있습니다.
학교에서는 믿는 크리스천 학생으로서 매일 점심시간 열리는 기도회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힘쓰고 있습니다. 특별히 중학생 때 기도장을 맡으며 학교 기도회의 중요성을 알게 된 후, 학교에서도 주님을 예배하고 기도할 수 있음을 깨닫게 되었고 기도장으로서 기도회를 인도하고 리드하는 일을 하게 되었고 고등학교에 와서도 꾸준히 그 자리로 나아가려고 노력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기 참 어려울 때도 많았습니다. 동성애를 옹호하는 반 아이들 사이에서 그리스도인의 자리를 지키는 것이 쉽지 않았고, 매주 금요일마다 드리는 금요철야 예배를 가는 것을 알고 저를 놀리며 비난하는 아이들 등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저를 응원해 주시던 한 전도사님께서 낙망하고 좌절해 있는 저에게 시편 34편 18-20절 말씀 “18.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 하시고 충심으로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 19.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의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 20. 그의 모든 뼈를 보호하심이여 그 중에서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도다”를 알려주시며 그리스도인은 고난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 고난 가운데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맛본 사람이 진짜 그리스도인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고난을 크게 생각하기보다 그 고난을 통해 나를 단련하시는 하나님을 먼저 바라보는 힘을 기르기 위해 이 말씀을 지금까지도 매일 묵상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
2019-06-07
-
-
나의 꿈, 나의 비전
-
-
(재)21세기포럼(이사장 홍순모 장로) 비전100인위원회(위원장 이선복 교수, 동서대)가 주최한 제8회 부산지역 청소년청년 비전 컨테스트에서 대학청년부 대상을 수상한 작품입니다.
무교집안에서 자란 저에게 꿈과 비전이란 단순히 어떤 직업을 가지는 것 그 이상의 의미로 다가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저는 중학교 시절 옆자리에 앉은 친구가 찬양을 하며 즐거워하는 모습에 반해 교회에 따라가기 시작했고, 크고 작은 기도응답을 받으며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그분의 크신 사랑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믿음이라는 큰 선물을 통해 불평하고 짜증내던 저의 삶이 감사와 사랑이 넘치는 삶으로 변하였고, 내 입술의 말과 생각 또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들로 채워졌습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나의 비전을 찾고 그 뜻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비전이란 나의 성공과 욕심만을 위함이 아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나의 소원과 하나님의 소원이 일치할 때 비로소 나의 비전이라 말할 수 있고, 그 비전은 반드시 하나님의 도우심과 함께하심을 통해 이루어 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의 빌립보서 2장 13절 말씀과 함께 하나님의 행하심을 경험하고 비전이 이루어지는 삶을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학창시절 낙상사고를 당해 허리를 다쳐 수개월간 입원치료를 받은 적이 있었는데, 그 때 제가 깨달았던 것은 의료종사자들의 일이 아프고 연약한 사람들을 도와주는 데에 큰 힘이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후로 의료 전문직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부산가톨릭대학교 방사선학과에 진학하였습니다. 4학년이 될 때까지 특별한 꿈과 비전은 없었습니다. 어쩌면 그 때 저의 비전은 단순히 방사선사가 되는 것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은 각자의 때에 맞게 비전을 깨닫게 하시는 것 같습니다. 감사하게도 하나님이 주신 제 마음에 첫 번째 소원은 유학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날씨 좋은 봄날, 하루는 같은 과 친구에게 한 선배의 이야기를 전해 들었는데 그 내용은 저에게는 적잖은 충격이었습니다. 그 선배는 가난한 환경에서 자랐지만 혼자 호주에 가서 스스로 학비를 벌어 남쪽도시 멜버른에 있는 RMIT 대학교에 진학하여 공부를 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하루 종일 제 머릿속에는 온통 유학에 관한 생각뿐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끄신 전공을 살려 교육자가 되고 싶었고, 더 넓은 시야를 가지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일주일 동안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저도 너무 유학하고 싶은데 우리 집은 너무 가난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가라 하시면 가고 싶습니다. 응답해 주세요”라고 밤마다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주 주일 아침 예배당 앞자리에 기대하는 마음으로 말씀을 들으러 갔습니다. 류태영 박사님의 ‘언제까지나 나는 꿈꾸는 청년이고 싶다’라는 제목의 책을 소개하며 목사님의 말씀이 시작되었습니다. 이 책은 가난하지만 하나님이 주신 기회와 도우심을 통해 저 멀리 덴마크에서 유학을 성공적으로 마치신 한 박사님이 쓰신 책이었습니다. 너무도 구체적으로 말씀하시는 기도의 응답에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저에게 미디안 군대와의 싸움에서 승리한 기드온 300용사의 말씀을 하시며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능치 못하심이 없다는 믿음을 주셨습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하신 말씀도 함께하며 믿음을 가지고 기도하며 영어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작은 것도 하나님께 묻고 구하며 호주에 갈 준비를 차근차근 하였습니다. 졸업 후 아르바이트를 해 호주에 갈 비용을 모았습니다. 주위에서는 저에게 “네가 무슨 아브라함이냐? 겁도 없냐?”고 많이들 물었습니다. 하나님 주신 응답을 생각하면 마음이 평안하다가도 그런 질문을 받을 때엔 또 제 마음은 한없이 요동친 적이 많습니다. 하지만 그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다시금 “함께하자, 같이가자”고 말씀해주셨습니다. 졸업 후 9월에 저는 고작 현금 700불과 편도티켓 한 장만 가지고 시드니행 비행기에 올랐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하나님이 주신 믿음과 도우심 없이는 갈 엄두도 못 낼 상황이었던 것 같습니다. 실제로 하나님은 제가 도착한지 일주일 만에 직장을 구하게 해주셨고, 안전하게 지낼 집도 구해주시고 훌륭한 목사님도 만나게 해주셨습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을 경험하며 제 믿음도 조금씩 자라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의 감사함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제가 호주에 간 목적은 ‘공부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전공한 방사선학을 조금 더 넓은 시야를 가지고 배우고 보다 더 크게 쓰임 받고 싶었습니다. 대학교수가 되어 학생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제 삶을 증거하고 싶었습니다. 시드니대학교 방사선학과에 진학해 공부하고 싶었고 제가 자란 환경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하나님이 하시면 할 수 있다고 굳게 믿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나를 도우신다는 것을 믿지 않는 부모님과 친구들에게 전하고 싶고 눈으로 직접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구해진 직장을 통해 2천만원의 학비를 모은다는 것은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비자 만료기간이 다가올수록 지금 당장 공부를 시켜주실 것이라는 편협한 나의 생각은 오히려 저를 힘들게 하였고 간절히 기다리던 기회는 오지 않았습니다. 학교입학을 위한 영어시험 점수까지 준비했지만 무용지물이었고, 결국 1년 3개월 만에 한국에 다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현실에 부딪힌 저는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했고 지금까지 이끌어주신 하나님의 일하심이 언제 있었던 일이었냐는 듯 잊어버리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 과정을 통해 하나님의 타이밍과 나의 타이밍이 충분히 다를 수 있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내가 원하는 때가 아닌 가장 좋은 때에 하나님께서 다시 인도해주실 것이라 믿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기회가 올 때 놓치는 일이 없도록 지금도 꾸준히 영어공부와 전공공부를 틈틈이 하고 있습니다.
실망과 좌절하는 마음으로 한국에 돌아올 때 하나님께서는 시편37편 5-6절 말씀으로 위로해주셨습니다.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라는 말씀으로 낙담했던 마음을 다시 일으켜 저를 인도하셨고 지금은 여성병원에서 태아정밀초음파를 배우고 있습니다. 이 또한 하나님께서 주신 기회라 생각하며 감사한 마음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내가 생각하고 계획했던 일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지만, 10년 전, 5년 전에 지금의 나와 그때의 나를 상상할 수 없었던 것처럼 앞으로의 나의 삶도 감히 하나님께 맡기고자 합니다. 태아정밀초음파를 배우며 제가 갖게 된 또 다른 마음의 소원은 의료선교입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태아정밀초음파가 시행된 기한은 10년정도 되었고, 정부에서 수가지원을 해줄 정도로 임상에서 태아정밀초음파는 크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앞으로 더욱 더 발전되는 의료장비와 전문지식을 통해 초음파검사는 보편화되어지고 그 중요성이 높아질 것으로 사료됩니다. 초음파를 하다보면 아기들이 자라면서 크고 작은 기형을 갖게 되는 경우들을 종종 보게 됩니다. 작게는 손가락기형, 구개구순열 등이 있고 크게는 태어나자마자 생명에 영향을 끼치는 심장기형들도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이러한 것들을 통해 각자에게 주시는 신호나 사명이 있는 줄로 알지만 산전에 꼭 알아야하는 심장기형을 진단받지 못하고 태어나는 아기들은 수술할 기회조차 얻지 못하는 안타까운 일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아기가 힘들뿐만 아니라 부모님의 마음도 한없이 슬프고 죄책감에 스스로 아파하는 것을 봅니다. 하나님께서 제게 주신 이 기회를 통해 의료지원을 받지 못하는 열악한 환경에서 봉사하고 싶습니다. 금전적으로 부족하다는 이유로 이러한 어려운 일들을 겪지 않도록 제가 배운 것들을 나누고 싶습니다. 언어공부를 꾸준히 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기회가 있다면 잘 펼쳐나가고자 합니다. 하나님은 택하신 우리 모두에게 전도의 사명을 주셨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배운 전공과 기술을 이용하여 전문적인 의료선교를 할 수 있는 날이 하루 빨리 오기를 소원합니다. 이를 통해 복음을 들을 기회가 없거나 하나님을 알지만 멀리하는 자들이 하나님께 돌아오는 일이 일어나길 바랍니다.
하나님이 주신 비전들을 찾고 깨닫는데 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고 그 가운데 다양하고 많은 기도와 응답들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저는 이 꿈과 비전들을 제 힘이 아닌 하나님과 함께 이루고자 합니다. 일상에서도 부르심을 받은 자녀답게 살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삶속에서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가지 못한다면 나의 비전은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단순한 야망에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교회에서는 현재 셀모임 장을 맡으며 또래 청년들과 성경공부 모임을 인도하고 있습니다. 이 역할을 통해 말씀의 힘이 얼마나 강한지 깊이 깨닫게 되었고, 말씀만이 나의 삶을 지탱하고 세워간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내가 믿음이 좋거나 잘하여서 장으로 세우신게 아니라 부족한 나를 그 사랑으로 더 채우시기 위해 세우셨음을 잊지 않고 이 시간들을 통해 더 온전한 자로 서길 바랍니다. 아무리 내가 가진 지혜와 능력이 크다하여도 하나님과 함께 하지 않는다면 나의 비전은 세상 사람들이 이룬 것들과 다를 것이 없다 생각합니다. 셀모임을 기도로 시작하여 기도로 마치는 것처럼 주신 비전을 위한 것도 구별된 모습으로 늘 기도로 시작하여 기도로 이루어내길 바랍니다.
나의 실력과 능력치도 최대로 끌어올려 하나님께 크게 쓰임받는 자가 되고 싶습니다. 믿음과 삶을 살아내는 실력이 같아져서 세상에 나아가 당당하고 자신감 있는 리더가 될 것입니다. 결국 나의 최종적인 목표는 나의 성공과 부를 이루는 것이 아닌 살아계신 하나님을 증거하고 그 사랑을 전하는 데에 있을 것입니다. 세상 속에 망가진 부분들을 회복시키기 위해 내게 주어진 작은 역할까지 잘 감당해 낼 것입니다. 물론 실수하고 넘어질 때가 있겠지만, 그때마다 다시 하나님과 함께 일어나 걸어갈 것입니다. 앞으로도 나의 부족한 지혜로는 절대 알 수 없는 하나님의 놀랍고 크신 계획을 기대하고 기도하며 기다릴 것입니다.
-
2019-06-07
-
-
[기고] “3.1운동 100주년을 보내면서”
-
-
지난 3월 1일은 1919년에 일어난 3.1운동 100주년 기념일이었습니다. 그동안 교회들은 이 운동에 개신교회가 큰 역할을 했다는 것에 고무되면서도, 교회가 국가사회문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는 역사적인 사실을 지금의 목회방향과 연결시키는 것에서 불편해 했습니다. 그래서 매년 찾아오는 3.1운동에 다소 소극적이었는데, 다행히 올해는 많은 교회들이 적극적으로 이와 관련된 기념행사를 가졌습니다. 100주년이라는 의미도 있겠지만, 뭔가 달리진 정치적인 분위기의 영향도 아닌가 싶습니다.
어쨌든 보수나 진보를 떠나 3.1운동은 한국 역사 뿐 아니라, 짧은 개신교역사에 있어서도 매우 의미심장한 일입니다. 이제부터라도 매년 돌아오는 3.1운동의 올바른 의미를 돌이키고 기념할 뿐 아니라, 우리의 신앙과 삶의 자리에 적용하는 자세를 갖기를 희망합니다.
한국개신교회는 130년의 짧은 역사에서 세계 기독교사에 남을 만한 부흥과 성장을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세계교회에 모범이 될 만한 일들과 아울러 다양한 시행착오도 겪었습니다. 한국교회를 이해하려고 할 때에 간과해서는 안 되는 두 가지 역사적 사건이 있습니다. 그 하나는 평양대부흥운동입니다. 1907년 평양에서 시작된 성령운동은 회개를 통한 성결운동에서 시작하면서 사경회를 통한 말씀공부와 기도로 건강한 영성운동을 일으켰고, 여기서 더 나아가 100만인 구령 등의 전도운동으로 이어졌습니다. 이것은 그야말로 20년밖에 안 되는 어린 개신교회가 한국사회에 뿌리내리는데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또 다른 하나는 1919년에 일어난 3·1운동입니다. 을사조약과 한일합방 등 암울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성령운동은 자칫 역사를 외면하고 사회현실에서 도피하는 신앙운동으로 흘러가기가 쉬웠습니다. 오늘날 많은 성령운동에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그런 길로 가지 않았습니다. 이미 1907년에 기독교지도자 안창호와 이승훈 등은 서북지역(평안도)을 중심으로 신민회를 만들어 항일운동을 벌렸고, 이것을 눈의 가시처럼 생각한 일제는 한일합방이 된지 2년 후인 1912년 이들에게 총독살해음모라는 없는 죄를 뒤집어 씌워 105인 사건을 일으켰습니다. 이때 유죄선고를 받은 105인 중 92명이 개신교인이었다는 사실이 당시 교인들의 신앙의 성격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1919년 전국적으로 일어난 3.1 독립만세운동의 중심에도 개신교가 있었습니다. 독립선언문에 서명한 33인중 16명이 개신교인이었고, 전국의 교회당이 만세운동의 전초기지로 사용되는 등 한국개신교회는 3.1운동에 가장 앞장서는 집단이었습니다. 이에 따라 많은 기독교인들이 희생을 당했고, 많은 교회당이 파괴되었습니다.
평양대부흥운동과 3.1운동은 보수와 진보가 나뉘어져서 일어난 운동이 아니었습니다. 이 3.1 운동에 앞장선 사람 중에는 길선주 목사와 같이 평양대부흥운동의 주류에 있던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이것을 통해서 진정한 성령운동은 하나님나라 운동이요, 역사와 민족의 문제에 책임 있게 행동하는 신앙운동임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나 3.1운동에서 실패한 이후, 교회는 사회와 역사의식을 가진 많은 지도자들을 잃어버렸고, 살아있는 권력에 대항하는 것이 얼마나 혹독한 값을 치러야 하는가를 직시했습니다. 그러면서 사회현실에서 물러서서 개인구원과 인격성장, 영적체험과 내세에 집중하게 되었고, 신앙생활은 주로 교회라는 울타리 안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대외적으로 우리의 신앙은 정치와 무관함을 선포하면서 일제통치에 순종적인 집단이 되었고 이로 인해 교회는 불의한 일제의 정치적인 도구로 전락하게 되었습니다. 교단 지도자들은 나선일체의 민족말살 정책을 적극 선전하고, 교인들에게 황국시민이 될 것을 가르쳤고, 일본이 일으키는 전쟁정책에 정당성을 부여했습니다. 많은 목회자들이 교회강단에서 설교를 통해 이것을 교인들에게 계몽했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일제말기에 가서는 신사참배를 신앙의 문제가 아닌 애국의 문제라고 합리화하면서 수용했고, 이로 인해 교회는 신앙의 본질까지 훼손되는 위기를 맞이하였습니다.
해방이후 개신교회가 신사참배 문제를 다룰 때에 신사참배를 했느냐 안했느냐, 참회하느냐 안하느냐는 논쟁에만 집중하면서 심지어 이 문제로 인해 교단이 갈라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다수의 교회지도자들과 교인들이 신사참배를 하게 된 보다 근본적인 원인을 간과하고 있음이 안타깝습니다. 그 근본적인 원인은 3.1운동 이후의 교회가 지향해온 이원론적인 신앙이었습니다. 이 이원론적인 신앙은 사회 국가의 일을 세상일로 치부하고 신앙에서 제외함으로, 결국 이신칭의 신앙만 지키면 세상일은 아무렇게나 되도 상관없다는 안일한 생각에 빠지게 한 것입니다. 그 결과 교회는 정의에 대한 분별력을 상실하고 국가권력에 맹종하는 집단이 되고 국가의 명령에 순응해서 신사참배를 받아들이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광복이후 70년간 한국교회의 전형적인 모습이 되었습니다. 한국교회는 정교분리와 철저한 이원론적인 신앙 아래서 모든 역량을 개인구원, 교회성장에만 집중시켜 커다란 부흥을 경험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교인들은 교회 울타리 밖의 세상을 막연히 마귀가 지배하고 심판받아 멸망할 곳으로 생각하면서, 세상을 조금 더 나은 세상, 조금 더 정의로운 세상으로 만드는 것에는 관심을 갖지 않았습니다. 자연히 교회는 우리 사회의 변화와 발전에 무관심하고 더 나아가 무책임했습니다. 일제 때와 마찬가지로 해방이후 대부분의 개신교회는 오랜 세월 독재정권에 의해서 자행된 온갖 불법과 불의 그리고 인권유린에 침묵하였고 교단지도자들은 그들의 왜곡된 통치 행위에 대해 정당성을 부여하면서 후견인 역할을 했습니다.
근간에 우리 사회가 보수와 진보 등 다양한 정권을 거치면서, 한국교회는 적어도 한 가지에 있어서는 일치해 가고 있습니다. 국가의 문제는 우리 신앙과 무관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적어도 이런 점에서 우리는 다시 3.1운동의 의미와 가치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들의 신앙은 당면한 사회문제를 책임 있게 끌어안았습니다. 이것은 옳은 것입니다. 그것이 독립의 문제이건, 민주화나 인권의 문제이건, 남북문제이건 우리는 세상국가가 하나님에 의해 세워지고 사용되는 기관임을 인정하고 그것을 바르게 세워가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전인격적인 그리스도인의 신앙을 지향한다면 그 속에 정치적인 책임을 갖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지난 2천년 기독교 국가에서 일어난 그릇된 문제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바로 교회의 정치화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 속에 담긴 올바른 국가의 길을 찾아내고 그것으로 때로 정치지도자들을 권면하고 책망하고 바르게 잡아주는 예언자적인 역할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세상 국가 사회가 그릇된 윤리와 이념을 좇아가거나 불의한 통치를 자행할 때에 비판하고 책망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당파성과 정치권력의 이해관계를 전제로 해서는 안 됩니다. 교회가 공공연히 어떤 정당이나 정치인을 비호하거나 이들이 권력을 잡을 수 있도록 후견 역할을 하는 것은, 세상과 구분되는 거룩한 교회의 본질을 파괴하는 행위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신앙양심 안에서 보수나 진보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정치행위를 상대적인 것으로 이해하지 않고, 도리어 신앙적인 차원으로 영화시켜서 절대시하는 것은, 성경말씀이 아니라 정치이념의 포로가 되어있는 위험한 모습입니다. 지난 2천년의 역사뿐 아니라, 근세 서양의 역사에서 교회가 이러한 과오를 얼마나 많이 저질렀는지 모릅니다.
3.1 운동 100주년을 보내면서 우리 믿음의 조상들이 지향했던 이 소중한 신앙과 행동을 보다 깊이 돌아보면서 계승해 나가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
2019-04-08
-
-
故 김태동 목사님을 추모하면서
-
-
▲ 故 김태동 목사
故 김태동 목사님은 1930년 경북 안동에서 태어나시고 사모님과 3남 1녀 손자, 손녀들을 두고 2018년 12월 17일 밤 8시 30분에 89세를 일기로 하나님이 계시는 천국으로 가셨습니다. 제가 김태동 목사님 곁에서 손발 노릇 그림자처럼 함께한 세월이 45년입니다. 그래서 목사님께서 은퇴하실 때에 목사님의 약력소개를 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행사시에 인사말, 설교, 격려사, 축사, 문서작성 초안을 부족한 사람에게 부탁하기까지 신뢰하였던 관계입니다. 그리고 교회나 노회에서 어려운 일이 있으면 저와 함께 상의하여 결정을 하는 관계이기도 하였습니다. 제가 동성교회에서 은퇴하기까지 38년간계속 시무할수 있었던 것도 노회, 총회, 연합운동에서 직책을 맡아 활동 할수 있었던 것은 목사님의 관심과 배려와 지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목사님 때문에 현재의 제가 있습니다. 얼마나 저를 사랑하고 아꼈는지,
부족한 종이 은퇴후 고신대 복음병원에 수개월간 입원하고 있을 때 4번이나 혼자서 지하철과 버스를 타고 병문안을 오기도 하였습니다. 목사님께서 병원 입·퇴원을 반복하실때에 부족한 사람은 기도하면서 감동이 오기를 만약 목사님이 돌아가시면 목사님의 장례식을 준총회장 수준으로 장례식을 치르도록 힘써야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왜냐하면 목사님께서 제83회 부총회장에 출마하셨을 때 투표에서는 앞섰는데 검표에서
부정이 있어 결국 부총회장을 하지 못하였습니다. 이 일 때문에 목사님이 많이 상심한 것을 옆에서 지켜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부족한 종이 요즈음 노회와의 불편한 관계로 적극적으로 힘쓰지 못하고 노회장(설교 부총회장 김태영 목사)으로 치루어지는 장례식 진행을 지켜만 보면서 서운한 마음이었습니다. 총회장을 지내신 친구분들도 오시게 해야 할 텐데.......목사님 부족한 사람을 이해해 주십시오.
그 아쉬운 마음에서 목사님을 추모하는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목사님이 너무 그리워서 살아계실 때 매일 생명의 양식을 카톡으로 보내 드리던
생명의 양식을 한 달이 지나도록 보내드리는데, 지금도 읽고 계시데요.
목사님은 안동사범학교를 졸업 후, 총회신학교를 졸업하시고 (3회 1953년)
경안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으시고, (1954년) 군목 으로 계시면서 1964년부터 구 반여교회에서 강단을 지키시다가 중령으로 예편하신 후 부산교회(현 예린교회) 시무를 시작하여 오직 부산교회만 36년 시무하시면서 교회를 3차례 건축 대형교회로 부흥시켰으며, 부산교회 원로목사로 노회 공로목사가 되기까지 부산노회와 부산동노회에서 활동하셨습니다.
1. 목사님의 신앙은 말씀에 뿌리를 내린 보수적이면서 개방적이며,
긍정적이며 포용적인 신앙이셨습니다.
2. 목사님은 효자이셨습니다.
어느 정도 효자이시냐하면 9순이 되시는 모친권사님에게
식사시 고기반찬을 숟가락위에 얹어 드릴 뿐 아니라
물으시는 말씀에 한번에 귀찮게 여기시지 않으시고
대답해 주실 정도로 효자 중에 효자이셨습니다.
3. 목사님은 발로 뛰는 목회를 하셨습니다.
대외활동이 아무리 바빠도 찾아가는 심방목회, 어려움 당한자,
병든 자, 병원에 입원한자, 개업, 입택, 이사 시에,
반드시 찾아가서 심방하고 기도하고 축복하는 목회를 하셨습니다.
4. 목사님은 너무 너무 자상하셨습니다.
교회에서 면담후 헤어질 때는 반드시 교회입구까지 나오셔서
손을 흔들어 주셨으며 함께 목사님 승용차를 타고 오다가 중간에
먼저 내리면 함께 내려서 인사하고 다시 자기 승용차를 타고 가셨습니다.
음식점이나 커피숍에서 많을 사람을 제끼고 돈을 먼저 내셨습니다.
전국각지 선·후배 교회, 단체마다의 길흉사에는 빠지지 않으셨습니다.
그동안 부조한 것을 합치면 수 억원은 될 것입니다.
5. 목사님은 사람만나는 것을 좋아하셨습니다.
사람을 좋아하셨고, 사람 만나는 것을 좋아하셨습니다.
사람이 많이 있는 곳에 있기를 좋아하셨습니다.
그래서 무슨 모임에도 빠지는 일이 없으셨습니다.
언제 어디서든지 만나자 하면 만나주셨습니다.
그래서 사람과의 관계가 원만하셨습니다.
그러면서도 관계를 분명히 해야 할 사람은 분명히 하시는 목사님이셨습니다.
6. 목사님은 부드러우면서도 강직하셨습니다.
부드럽기로는 양털처럼, 솜처럼 부드러워셨습니다.
그러나 강직할때는 아주 강직하셨습니다.
7. 목사님은 집념이 강하셨습니다.
어느 정도 집념이 강하시냐하면 한 평생을 총회장에 대한 꿈을 갖고 살아오신 목사
님께서 제83회 부총회장에 낙선된대에 대하여 총회선관위에 고소하여 재 검표한 결
과 당선후보에게 다른후보의 표가 61표가 산정된 것이 확인되어 부정선거 결과가 나
와 총회 재판국으로부터 선거무효 당선무효로 판결되었고
(그렇지 않으면 목사님의 1차에서 최득표가 됨)
그 후 국법에 재소했으나 국법에서도 부정선거를 인정했으나
이미 총회가 얼마남지 않은 상태에서 기각판결을 내렸습니다.
그 후 총회에 이 사건에 대해 청원서를 제출하기도 하였습니다.
이처럼 선거무효, 당선무효로 그 진상이 밝혀진 것은
목사님의 강한 집념 때문입니다.
8. 목사님은 일에 대한 욕심이 많으셨습니다.
어느정도 욕심이 많으시냐? 하면 무슨 직책이든지 맡기시면 적극적으로 맡으셨습니
다. 그래서 목사님의 경력이 무려 80여개가 됩니다. 그 만큼 힘과 능력이 있다는 증
거입니다. 이렇게 목사님은 일을 좋아하셨습니다.
9. 목사님은 개 교회 위주에서 연합적인 활동에 힘쓰셨습니다.
개 교회는 힘이 없다. 여러교회 여러교파가 합쳐야 힘이 있다고 하시면서 세계는 나
의 교구다 라는 말씀처럼 좁은 목회보다 폭 넓은 목회에 치중하셨습니다. 개 교회의
교인양육도 중요하지만 교단연합운동의 인재양성이 절실하다고 역설하셨습니다. 이
런 인품과 성품과 신앙과 정신을 가지셨기 때문에 많은 영역에서 활동할 수 있었습
니다. 그러면서도 쩨쩨하지 않고 선이 굵어 굵직굵직한 관심을 갖고 적극적으로 참
여 추진하는 열심히 있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의 경력 목사님의 살아온 발자취는
눈 부수실 정도로 다양하고 화려하고 찬란합니다.
그 많은 경력 중에 몇 가지 예를들면은
목사님의 군목활동입니다.
24세에 군목이 되셔서 육군중령으로 예편하시기까지 23년간의 군목시절에
특이할 만 것은 6.25사변에 참전 하였으며 전방 초소 위문을 시작으로 군 복음화를 시작하였으며 베트남전에 참전하여 생사를 하나님께 맡기고, 베트남장병을 위해
기도하며 신앙과 생명을 지켰으며 군 장병 3471명에게 세례를 주므로 당시 최다
세례로 세계언론을 떠들썩하게 하였으며 당시 기네스북에 기록될 뿐 아니라
대한민국의 군종활동의 기틀과 인식, 군선교, 군 복음화의 새로운 전환점을
가져오는 공로를 세우셨습니다.
노회, 총회 및 지역을 위해 활동하셨습니다.
노회적으로는 1980년 부산노회장을 역임하시고, 부산성서신학원장,
장로회 부산신학 이사장, 부산신학 교장, 이기풍 선교센터 건립
부산동노회 위원장, 기독교 케이블 TV 방송 부산동노회 위원장
을 역임하시고 총회적으로는 총회장이 되지 못한 아쉬움과 안타까움은 있지만
그래도 총회중심권에서 군 선교(군목부장), 농·어촌선교(위원장),
국내선교 (전도부장 국내선교부장), 총회창립 100주년 배가운동 운영위원장으로,
만사운동의 불씨를 지폈고, 총회 21세기 기독교 2천년 선교대회 대회장,
사이비이단 방어척결(사이비 대책 위원장), 신학교육부 실행위원 및
목사후보생 지도위원장으로 후배양성과 신학교육,
세계선교(세계선교부 선교사 인선위원) 전산망(전산망 운영위원장)을 도입하므로
총회 모든 업무를 전산화하게 하는 등 노회와 총회의 방향을 잡아가는데
기여하셨으며 지역적으로는 우리 총회의 동부지역 15 노회협의회를 창립하고,
초대회장으로 동부지역교회의 결속과 위상을 높이며, 의식을 갖게하며,
방향을 잡는데 기여하셨으며, 총회 21세기 및 부산·경남 장로교 대회 대회장으로
대회를 성공리에 가지므로 장로교단의 긍지와 자부심을 갖게 하는데 역량을 발휘
하셨습니다.
부산복음화 및 초교파 연합활동을 하셨습니다.
영남목회연구원 원장으로 부산·한국 목회자포럼회장으로
초교파 영남지역 목회자들의 목회정보제공과 자질향상을
위해 힘쓰셨으며, 경찰선교를 위해 부산경찰청교회를 설립하고 (2002)
부산시경 경목실장을 비롯하여 부산시경 교경협의회 초대회장,
전국시도 경목총회 회장으로 활동하셨으며
부산복음화협의회회장, 80년 세계복음화 대회 부산복음화 총무
94년 민족통일 부산복음화 대 성회 공동대회장,
부산복음화대회공동회장, 21세기 복음화운동 대회장
부산목회자 포럼 공동회장, 체육선교회 부산본부 부 총재
부산세계선교회 초대회장 (부산바울선교회 전신)
부산기독교 TV 추진위원회 부산대회장 [CBS]
북한선교협의회 11대 협동총무
부산지부 선교회 회장, 부산복음화 협의회 회장, 세계할렐루야 선교회
지도이사 해운대구 기독교 협의회 초대회장, 부산기독교 총연합회회장,
범죄예방 국민운동본부 민생치안 지도자 협의회 본부장
YMCA 건축위원회 상임회장,
기독교 재산관리법 제정추진위원회 부산대표회장,
기독교 공동시국 대책위원회 대표회장,
부산성시화운동 이사장, 은퇴하신 후에는 은퇴목사를 위한
초교파 은목교회를 설립하시고 (2000년)
통합교단 은퇴목사를 위한 목은교회를 설립하여 (2008년)
목은교회를 설립하여 초대회장으로 활동하셨으며
부산복음화운동본부 고문으로 활동하셨습니다.
마지막으로 전국 은퇴목사회 회장을 역임하시고, 은퇴목사를 위한 복지재단을 만드시는 것이 마지막 소원이었습니다.
부산시와 국가사회를 위해 활동하셨습니다.
해운대구 자문위원을 비롯하여, 부산시 자문위원,
부산시 질서를 위한 (부산시경 선진질서위원)
88 올림픽 및 장애인 올림픽 부산후원회장
법무부 사단법인 한성갱생 보호회 부산지부장
남·북 인간 띠 잇기대회 부산대표회장,
지구촌 지체장애인 초청 사랑대회 고문,
범죄예방 국민운동본부 민생치안 지도자 협의회 본부장
사랑의 장기기장 부산지부 이사장으로 활동하셨습니다.
목사님은 훈장, 감사장, 표창장을 많이 받으셨습니다.
베트남 참모 1등 공로훈장 (1968년),
베트남 전공 표창, 베트남 종군기장,
한국교회 100주년 본 교단 총회장 표창 (1984년, 2012년) 내무부, 통일원 장관 감사패 및 공로패 (1985년, 1986년)
대통령 표창장 (1992년)
한국기독교 환경대책협의회 환경대상 외에 감사패, 공로패 41회
표창장 12회를 수상할 정도로 교회와 노회와 총회와 사회와
국가를 위해시간과 마음과 몸과 정열을 쏟아 바친 생애를
살아오셨습니다. 목사님께서 교회와 노회와 총회, 국가 사회를 위해
살아오신 그 마음, 그 정열은 목사님의 흔적으로 남아있습니다.
그 흔적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목사님은 선한싸움을 싸우고 달려 갈길을 다 마치고
믿음을 지키셨으니 의로운 재판장께서 예비하신 의의 면류관과
큰 상급이 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제 목사님은 슬픔도
눈물도 아픔이 없는 주님 보좌 앞에서 기쁨과 즐거움과 편안한
마음으로 찬송을 부르실 것입니다. 언젠가 부족한 종도 하나님께서
부르시면 그때 천국에서 뵙기를 바라면서 환송 찬송을 불러드립니다.
저 건너편 강 언덕에 아름다운 낙원 있네 믿는 이 만 그 곳으로 가겠네
황금문을 들어가서 주님 함께 살리로다 너와 날 위해 황금 종 울린다
은 빛 바다 저 너머로 우리 모두 건너 가서 죄와 고통 모든 슬픔 잊겠네
예수님의 사랑 속에 영원토록 살리 로다 날 위해 황금종 울린다.
우리 일생 다 지나고 주의 품에 편히 쉴 때 나의 영혼 자유함을 얻겠네
괴로움 짐 모두 벗고 주와 함께 살리 로다 너와 날 위해 황금종 울린다
[후렴] 저 울리는 종소리와 천사들의 노랫소리 영광 일세 할렐루야 기쁘다
빛나는 저 강건너 아름 답고 영원한 곳 너와 날 위해 황금종 울린다.
2019년 2월 1일
▲ 김창영 목사(예장통합 부산동노회 공로목사)
-
2019-03-11
-
-
변화에 적응하는 한국교회
-
-
▲ 최석곤 장로(여수동광교회, 전 예장통합 여수노회장)
인생의 삶에는 소년기 청년기 노년기가 있다.
누구나 거쳐 가야할 인생의 삶의 여정이다.
우리가 처한 한국교회의 시기는 언제인가 우리가 한 번은 고민해 보아야 할 때가 아닌가 생각한다. 한국교회를 볼 때 긍정적이냐 부정적이냐 하는 판단에 매우 어렵게 생각하고 힘들어 하고 있다. 그러나 믿음을 가지고 있는 우리는 주님을 의지하는 믿음이 더욱 크다고 생각한다.
필자가 1995년 노회장로회수련회(예장통합 여수노회)에 변화에 적응하는 [장로인의 상]이라는 주제로 토론하고 발표를 했는데 장로 선배들로부터 많은 꾸중을 들었다. 한국교회 북한에 정통한 박완신장로를 모셔서 2000년대는 북한에 갈 수 있다는 말씀도 선배들로 부터의 꾸중의 또 한 대목이 되었다. 그리고 필자가 발제한 앞으로 한국교회의 변화를 예측하는 주제를 놓고 발표를 하면서 지도자는 미래를 예측 하는 판단력이 필요하다.
필자가 발제한 내용은
1) 외부적 환경 변화의 대응에 적응
가) 영상 미디어 문화의 변화
(영상예배 도입/컴퓨터 문화의 발전
나) 찬양 문화의 변화
(열린예배의 수용/복음찬양과 경건 찬양의 구분
다) 주 5일근무제도 근무 형태의 변화
(교회 예배의 형태의 변화/저녁예배/오후예배/가족예배의 변화)
2) 내부적 구조변화에 대응하라.
가) 임직자연령의 연소화와 소 교회 임직이동
나) 항존직의 과다현상과 교회의 직분의 계급화
다) 항존직 직무 연령과 근속관계 (70세)
라) 대형교회의 안착화 (출석교인으로 안주하는 현상)
마) 기독교의 종교화 현상 (성령운동의 소멸문제)
위와 같은 내용은 필자가 외국회사에 근무하면서 현상에 만족하지 않는 기업의 운영방식을 보고 2000년대에 한국교회의 다가오는 변화에 대한 예측을 해보고 23년이 지난 지금의 현실을 볼 때는 밀물처럼 다가온 한국교회의 현실이 아닌가 싶다.
필자가 1999년도에는 교회의 변화에 대한 대응으로
1) 교육관의 개방 활용 - 지역과의 개방유대관계유지
2) 교회종탑의 홍보용 - 지역주민의 알림터기능
3) 교회식당의 개방 - 식당개방운영
교회가 함께 변화하고 대응하는 3가지를 제시한 바가 있었다. 이것 또한 현실을 볼 때 마음이 아프다.
필자가 2013년 노회장(예장통합 여수노회)을 역임할 때 후배들이 지난 번 예측은 20년 후에 예측가 결과가 맞아 떨어졌는데 앞으로 10년 후는 어떻게 보느냐의 질문에
1) 대형교회가 쇠퇴한다.
2) 교회의 재정이 감소하고 사업이 축소된다.
3) 말씀의 존엄성과 축복론이 소멸된다.
4) 연합사업이 축소된다.
5) 원로와 은퇴제도가 교회의 발목을 잡는다.
6) 이단대처가 미흡하면 기존교회가 흔들린다.
크게 6가지를 나누어 보았다. 이제 그로부터 5년이 조금 지났는데 하나씩 걱정으로 남게 되었다. 그러면 예측만 할 것이 아니라 대응전략은 무엇이냐고 한다면 지금 부터가 문제다. 교회 하나 하나가 이것을 인식하고 내려놓음을 시작해야만 된다고 생각한다.
지도자로 책임진 모든 임직자가 위기의식을 갖고 지금 변화의 돌을 던져야 한다.
우리 스스로가 변화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해야 할 때다.
우리교회와 나는 괜찮다는 의식을 지금 즉시 버리고 다가올 다음세대에 물려줄 믿음의 유산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지금 나부터 우리가 함께 변화라고 내려놓음을 실천 할 때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새로운 한국 교회의 희망이 되고 빛이 되리라 생각하면서 우리 함께 가야할 길이기에 몇 자 적어본다 그리고 깊은 묵상을 가져본다.
-
2018-10-01
-
-
[기고] ‘이단 거점’으로 변한 ‘선교 중심’ 부산 동구
-
-
한 통의 상담전화가 걸려왔다, 동구 범일동에 위치한 한 건물에 대한 문의였다. 연수원으로 사용되던 이 건물에 최근 하얀 상의를 입은 젊은이들이 많이 몰려들고 있는데, 혹시 무슨 종교단체가 아니냐는 문의였다. 신천지 12지파 중 부산과 제주 지역을 담당하는 안드레지파의 본부 건물이었다.
「한국기독신문」과 부산성시화운동본부 이단상담소(권남궤 실장)에 따르면, 부산 동구 범일동의 옛 경남산업 연수원이 신천지 안드레지파 본부 건물로 용도 변경되었다고 한다. 2014년 연제구 연산동에 신축하려던 시도가 지역 주민들의 반대로 무산되자, 비밀리에 장소를 마련한 것이다.
한국전쟁과 함께 수많은 기독교이단들이 발흥한 부산은 여전히 이단들과의 첨예한 영적 전쟁터가 되고 있다. 한국의 대표적 이단인 통일교가 발흥한 동구 범일동에는 통일교 제1성지가 조성되어 있다. 동구 초량동 YMCA 건너편에는 JMS 정명석의 거점인 사ㅇ카페가 위치하고 있다. 이러한 동구에 한국교회 최대 골칫거리인 신천지가 그들의 거점을 마련한 것이다. 바야흐로 부산의 중심 동구가 이단의 중심이 된 것이다.
부산 동구는 부산경남지역 선교의 중심이다. 가장 오래 복음전도 역사의 상징인 부산진교회와 초량교회가 있으며, 교육선교와 3.1운동의 시발지인 부산진일신여학교가 있고, 의료선교의 중심인 일신기독병원이 있는 곳이다. 유서 깊은 ‘선교의 중심’이 ‘이단의 거점’으로 변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불안한 마음이다.
한국교회의 중심 평양과 서울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부산은, 이단들이 자유롭게 뿌리내리고 활동할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을 갖춘 곳이었다. 게다가 불교가 다수인 부산에서의 이단논쟁은 개신교 내의 밥그릇 싸움으로 비쳐지기 십상이었다. 안상홍과 장길자를 각각 하나님 아버지와 어머니로 믿는 국내 최대 규모 이단인 하나님의교회가 부산에서 생겨나 급성장하고 있으며, 박옥수 구원파의 IYF는 매년 여름 해운대에서 대규모 집회를 보란 듯이 열고 있다.
한편 이단대처의 중심이어야 할 부산의 기독교 연합기관들은 안일한 무관심과 내부 혼란으로 인해 효과적인 이단대처의 동력을 상실하고 있다. ‘사리사욕을 위한 야합’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한 연합’이 필요한 시기이다. 교파 간 갈등이나 교권에 대한 마음을 모두 내려놓고, 이단대처를 위한 연합전선의 구축이 시급하다.
효과적인 이단대처를 위한 각각의 역할이 있다. 연합기관은 이단들과의 영적전쟁의 전선을 구축하고, 각 교단은 소속 교회들과 교인들의 보호를 위한 자체적인 예방교육을 진행하고, 상담전문가는 이단피해의 회복과 재발방지를 위해 노력하고, 이단연구자는 이단의 정체와 폐해를 교회와 사회에 알려 경각심을 일깨우는 역할을 해야 한다. 이러한 노력이 하나로 모여 효과적인 이단대처가 이루어질 수 있다.
부산이 ‘이단의 거점’이 아닌 ‘선교의 중심’이 되기 위해, 교계 지도자들의 관심과 참여를 간곡히 부탁드리고 싶다. 소수의 이단 전문가나 상담자 혹은 언론의 노력만으로는 역부족이다. 부산 교계, 특히 동구 지역 교계 지도자들과 성도들의 관심이 간절히 요구된다. 선한 세력의 연대를 가능하게 할 수 있는 교계 지도자들의 희생적인 결단과 선도하는 지도력을 위해 모든 성도들이 간절히 기도할 때이다.
-
2018-1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