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소한 행복을 집이나 캠핑카에서 즐기는 일상, 먹는 즐거움을 만끽하는 모습, 마음 훈훈한 이야기가 들어있는 감동 콘텐츠가 코로나 역병의 시대에서 사랑받고 있다. 코로나로 인한 제한적인 삶의 현실 속에서, 쉽게 접하기 어려운 콘텐츠를 간접적으로 경험하며, 대리만족과 위로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모두가 힘든 역병의 시대, 각자의 자리에서 곳곳에 숨어있는 감사와 기쁨의 코드들을 애써 발견하며 희망의 싹을 틔우고 있다.
희망은 절망 속에서 피어난다. 중세 흑사병의 창궐은 중세교회의 무기력함을 노출해주었지만, 동시에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이 피어오를 수 있는 밑거름이 되었다. 구한말 콜레라의 창궐은 무기력하게 몰락하는 조선사회의 민낯을 드러나게 했지만, 동시에 새로운 희망으로 등장한 기독교의 영향력을 보여줄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선교사 알렌, 언더우드, 예이비슨과 기독교인들의 헌신적인 콜레라 방역과 퇴치 활동이 조선민족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다.
최근 인상적이고 통찰력 있는 강연을 들을 기회가 있었다. “키워드로 보는 포스트 코로나 세상”이라는 장제국 총장(동서대학교)의 <21세기포럼>에서의 주제 강연이었다. 대학 운영의 책임자로서 코로나 세상에서 바라보는 사회와 대학의 미래에 대한 분석이 설득력 있게 다가왔다. 장 총장이 제시한 키워드들을 가지고 ‘이단과 역병의 시대’를 살고 있는 교회에 적용해보고 싶었다.
첫 번째 키워드는 “거리두기”다. 나와 타인의 안전을 지키기 위한 사회적 거리두기가 적극 권장되고 있다. ‘밀폐’된 공간, ‘밀집’된 장소, ‘밀접’한 접촉 등 소위 3밀을 피하면, 감염을 대부분 피할 수 있다고 한다. 이단들도 친밀한 관계 형성을 통해 밀접 접촉을 시도하고, 그들만의 밀폐된 공간으로 유혹해 비성경적 감염에 노출되도록 만든다. 이를 위해 심지어 사전에 개인 정보를 취득한 후, 거짓말까지 동원해 맞춤형 미혹을 진행한다. 이단과 역병의 시대, 사회적 거리두기와 함께 ‘영적 거리두기’가 필요하다.
두 번째는, “자발적 고립”이다. 악수와 포옹은 친밀감의 표현이 아니라, 위협적인 행위가 되었고, 나의 영역 안으로 타인이 들어오는 것을 경계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개인주의와 함께, 국가적 차원의 폐쇄적인 경제적·정치적 이기주의가 자연스럽게 자리 잡았고, 비상식적인 분열과 편 가르기가 상식으로 둔갑해 자리 잡았다. 이단에 미혹되면 나타나는 현상과 다르지 않다. 이단에 의한 생활, 정보, 사고, 감정을 통제 당하면서 고립은 시작되고, 이는 가족과 지인들로부터의 자발적인 고립으로 이어지게 된다. 직장과 학교를 그만두거나 가출도 불사한다. ‘자발적 고립’은 이단의 통제를 훨씬 더 쉽게 수용하게 만든다.
세 번째는, “냉소와 조롱과 위선과 악성댓글이 만연한 자기중심적 내로남불”이다.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믿고 싶은 것만 믿는다. 편견이 소신으로 신념화되고, 거짓 정보마저도 진실로 받아드려 진다. 극단적 분열과 선전·선동이 합리화된다. 이단에 미혹될 경우에도, 인지적 왜곡, 오류, 선택이 동반된다. 이단은 성경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보는 비성경적인 눈’을 심어준다. 이를 통해 성경을 자의적·임의적 관점으로 읽고, 해석하고, 적용하도록 만든다. 첫 단추가 잘못 깨워진 옷처럼, 성경을 지속적으로 왜곡하고, 친밀한 주변 관계마저 단절하는 오류가 동반된다. 결국 가족과 교회와 세상을 비판하는데 집착하면서, 자신의 왜곡된 선택을 합리화하는 자기중심적 아웃사이더가 된다.
코로나로 인해 본격적인 “디지털 혁명의 시대”가 열렸다. 교회의 수준을 훨씬 뛰어넘은 세련된 이단콘텐츠가 온라인상에서 횡횡하고 있다. 온라인을 기반으로 한 이단들의 포교, 교육, 감시, 통제가 효과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디지털 세상은 우리의 삶을 편하고 윤택하게 만들었지만, 한편 국가나 경제 권력에 의해 개인과 신앙의 자유가 제한되는 "통제와 감시가 강화되는 시대"를 만들어졌다. 코로나 역병의 위기와 불안 속에서, 개인의 정보와 신앙의 자유가 합법적으로 통제되고 감시당하는 환경이, 우리가 만나게 될 뉴 노멀의 세상일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내 안에서 꿈틀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