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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 방사능의 미래를 알지 못했던 위대한 여성 과학자
    위인전을 다루는 영화의 방식 어느 사회에서나 위인전은 두 가지의 특성을 갖는다. 하나는 어린이들이 즐겨보는 교육적 성격을 고려하여 사회의 모범이 되고 윤리적으로 문제가 없는 무흠한 인물을 위인전에 올린다. 그러나 그것은 진실이 아니다. 전기작가는 편집과정에서 어린이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긍정적인 면을 강조하고 업적 위주로 기술한 결과 문제는 없고 위대함만을 부각하여 인물을 재창조하는 셈이다. 위인전의 또 하나의 특징은 위인전을 펴낸 사회가 지향하는 이데올로기를 반영한다는 점이다. 반공이 사회의 중요한 구호로 등장할 때는 6.25의 영웅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이 한국에서 펴낸 세계의 위인전집에 올랐는가 하면, 수출증대에 나라의 모든 것을 걸었을 때는 현대그룹의 정주영 회장이 아동을 위한 위인전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영화도 위인을 다루는 방식이 책과 다르지 않다. 21세기에 퀴리 부인에 대한 영화를 만든다면 과학의 가치와 여성의 역할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한 교육적이며 시대적인 상황과 무관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상업영화로서 관객을 모아야 하고 책과 경쟁해야 하는 구도가 명확해지면 영화는 다른 길을 갈 수밖에 없다. 그것은 장르(genre)의 특성을 갖는 일이다. 장르란 일종의 영화의 분류법으로 비슷한 내용이나 형식에 따라 영화들을 묶어 영화의 특성을 이해하는 방식이다. 역사적 위인들의 생을 조명하는 영화들은 드라마라는 장르 안에서 이해되며 주인공이 경험하는 사건을 다루는 가운데 인물의 성격을 조명하는 방식을 취하곤 한다. 이 과정에서 장르영화는 ‘반복과 변형’이라는 특유의 전개방식을 보여준다. 즉 관객이 이미 잘 알고 있는 위인에 대한 내용을 영화는 ‘반복’한다. 이것은 관객의 기대감을 충족시켜주는 역할을 한다. 이순신 장군의 영화를 보러 온 관객들은 임진왜란의 용맹스럽고 왜군을 물리치는 호쾌한 승전의 기쁨을 만끽하기 위해 온다는 사실을 상업영화는 외면할 수 없다. 그러나 관객이 알고 있는 것만을 묘사하는 영화는 새로울 게 없다는 판정을 받게 마련이다. 그래서 장르 영화는 ‘변형’이라는 전개방식을 따른다. ‘변형’은 관객이 미처 알지 못하거나 알았다 하더라도 잘못 알고 있는 것을 다룸으로써 관객의 예상을 뛰어넘는 전개방식이다. 관객은 뻔할 것 같은 영화로부터 새롭게 기대감을 갖게 되며 앞으로 영화가 어떻게 전개될지 호기심을 머금은 채 스크린을 응시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이 만든 <링컨>(2012)은 장르영화의 성격을 명확히 보여준다. 미국의 남북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흑인 노예를 해방시킨 위대한 미국의 16대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에 대한 관객의 기억들을 소환하여 스크린에 반복하여 펼치지만 똑같지는 않다. 스필버그는 링컨이 순수하고 정직하며 어떤 야망도 갖고 있지 않은 고결한 위인이라는 동화책에 나올 법한 이미지는 여지없이 깨뜨린다. 링컨은 의회에서 노예제를 완전히 폐지시키는 수정헌법 13조가 통과될 수 있도록 시간을 벌기 위해 반대편인 남부연합 대표들이 워싱턴에 들어오는 여정을 지연시키고, 심지어 자신의 법안에 반대표를 던질 생각인 야당 의원에게 관직을 제공하는 댓가로 찬성표를 얻어낸다. 다시 말하면 술수를 부리고 야당 의원을 매수하는 셈이다. 분명 관객의 예상을 뛰어넘는 ‘변형’된 링컨의 모습이 등장한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노예폐지와 같은 숭고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링컨의 행동이었음을 관객들은 깨달으며 링컨에 대한 기대감을 충족시키며 극장을 나서게 되는 것이다. 책으로는 알지 못했던 마리 퀴리 그렇다면 우리에게 익숙한 또 다른 위인 ‘마리 퀴리(Marie Skłodowska-Curie)’는 어떨까? 흔히 ‘퀴리 부인’으로 우리의 귀에 익숙하고 라듐 발견으로 노벨상을 받은 위대한 여성 과학자가 우리가 기억하는 위인전의 내용이지만, 그녀가 남성 중심의 학계에서 여성으로 치열하게 싸우는 한편으로 남자로부터 사랑을 갈구하는 여인의 이미지를 떠올릴 수 있는 사람은 이 영화가 나오기 전까지는 없었다. 이란 출신의 여성 감독 마르잔 사트라피 감독의 <마리 퀴리>(Radioactive, 2019)는 위인전이 미처 언급하지 못한 퀴리 부인의 빛과 그림자를 모두 담고 있는 영화를 연출함으로써 ‘반복과 변형’의 장르적 특성을 영화에 담아내는데 성공했다. 위인전에서는 알지 못했던 퀴리 부인의 이미지는 세 가지의 ‘변형’을 이루며 관객의 예측을 넘나든다. 첫째는 자신의 일에 관한한 거침없는 성격의 소유자임을 영화는 제시했다. 마리 퀴리(로자먼드 파이크)가 자신의 연구실에서 쫓겨나게 되었을 때 혈기를 부리는 모습은 다소 당황스럽다. 남성 중심의 위원들 앞에서 다소곳하게 앉아 있어야만 우리가 상상한 퀴리 부인의 이미지와 어울리는 것은 아니지만 자신의 연구를 위해서라면 남성들과 거침없이 맞붙는 투지는 위인전에서는 결코 나오지 않는 내용이다. 모든 분야에서 여성이 남성과 동등한 대접을 받지 못했던 시절임을 감안 한다면 혈기를 부리는 여성 과학자의 탄생은 남성 중심의 사회에도 얼마간의 책임이 있음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마리 퀴리는 연구실과 연구결과물을 독점하던 남성들에 대해 늘 경계심을 가졌던 것은 사실이었다. 1903년 자신의 연구 동료이자 남편인 피에르 퀴리(샘 라일리)와 공동으로 노벨상을 수상하게 되었을 때 자신이 직접 스웨덴에 가서 상을 받지 못하고 수상소감 또한 말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 그녀는 몹시 분노한다. 둘째는 우리가 아는 마리 퀴리가 있기까지 남편 피에르 퀴리의 역할을 새롭게 인식시킨 것도 영화가 제시한 새로운 점이었다. 연구실에서 쫓겨난 마리를 위해 새로운 연구실을 마련해주며 연구에 몰두할 수 있도록 도운 피에르가 없었다면 과연 퀴리 부인은 탄생할 수 있었을까? 사랑의 동반자로서 결혼하고 늘 마리 옆에서 함께했던 남편 피에르의 존재는 마리의 내면세계에 안정감과 사랑에 대한 충족을 가져옴으로써 위대한 여성 과학자의 탄생을 지켜볼 수 있었다. 남편 피에르가 마차에 치여 죽은 후 마리 퀴리가 남편의 동료이자 연구원이었던 남성과 자신의 집에서 사랑을 나누는 일은 아마도 이 영화를 본 관객들을 당황스럽게 만든 일이었다. 퀴리 부인의 어린 두 아이가 아빠 대신 낯선 남자와 침대에 함께 있는 엄마를 열린 문 사이로 지켜보는 장면은 정숙한 퀴리 부인의 이미지만을 갖고 있었던 관객의 예상을 여지없이 깨뜨리고 말기 때문이다. 유부남 연구원과 밀회를 즐겼지만 이내 그 아내로부터 욕을 들어야만 이 위대한 여성 과학자의 모습에서 우리는 결국 인간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를 깨닫게 된다. 개방적인 성의식을 가진 관객이라면 이 또한 마리 퀴리의 거침없는 성격과 성에 대한 주체적인 행동으로 여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남편이 죽은 후 사랑이 필요했다는 마담 퀴리의 고백은 자신의 성적 욕망에 대해서 솔직하고 담대한 현대적인 여성의 이미지로 다가설 수 있기 때문이다. 감독은 마리 퀴리가 감히 넘볼 수 없는 위인이라기 보다는 보통 사람과 다름없이 욕망을 가진 인간으로서 묘사하려는 의도를 읽을 수 있다. 그러나 성경적 관점에서 보자면 그것은 일찍이 다윗과 같은 위대한 왕이 성적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밧세바와 같은 유부녀와 정을 통했던 인간의 죄성과 연약함의 결과일 뿐이다. 다만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따라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주의 많은 긍휼을 따라 내 죄악을 지워 주소서’(시51:1)라며 회개의 기도를 한 반면 마리 퀴리는 기독교인이 아니란 점이 다를 뿐이다. 이 차이는 영원이라는 간격을 벌릴 수 있지만 말이다. 신앙없는 과학의 미래 영화는 기독교 신앙으로 인도되지 못한 과학자의 삶과 연구결과물이 가져올 허무함과 비극을 제시한다. 마리 퀴리는 남편 피에르가 죽은 후 정신적 혼란을 경험하며 그렇게도 강하게 자신을 떠받치고 있던 과학으로부터 이탈하는 경향도 보였다. 마리 퀴리는 죽은 남편을 만나기 위해 영매를 찾아 나선다. 남편의 손에 이끌리어 갔던 심령술 모임에서 영매는 베토벤의 혼령을 자신의 몸속으로 불러내어 피아노 연주를 했었다. 죽은 남편의 영혼을 불러내어 대화하려는 마리 퀴리의 행동은 결국 남편에 대한 진한 사랑과 더불어 아무리 노벨상을 받은 과학자라도 인생의 풀리지 않는 문제를 껴안고 살아가고 있으며 얼마든지 사이비 심령술에도 빠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영화는 병원 복도에서 이동 침대 위에서 지나간 자신의 삶을 떠올리는 동일한 장면으로 시작과 끝을 맺는다. 다만 끝맺음 부분에서 마리 퀴리는 자신의 방사능 연구가 가져올 미래의 방사능 유출과 관련된 비극적 사건의 예시를 함께 떠올린다. 1945년 히로시마 원폭투하와 1961년 네바다 사막에서의 공개된 핵실험, 그리고 가장 최근에 있었던 1986년 체르노빌 원전폭발의 장면들이 등장한다. 마리 퀴리 사후에 벌어진 핵과 방사능의 어두운 그림자는 그녀의 위대한 연구와 발견이 가져다 준 비극의 열매였다.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투하된 핵폭탄은 8만 명을 즉사시켰고, 방사선 피폭과 관련된 질병과 부상으로 14만 명이 이후에 죽었다. 인구 35만 명의 히로시마 시민 가운데 22만 명이 사라진 것이다. 네바다 사막의 핵실험장은 구경꾼을 불러 모으는 관광상품이 되었고, 체르노빌 원전 폭발사고로 방사능에 오염되어 사망한 사람이 백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미국의 일간지 USA 투데이는 보도했다. 마리 퀴리는 자신의 연구업적을 발표하는 자리에서 당당하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저는 이것을 이렇게 부릅니다. 방사능”. 이 영화의 원제목은 ‘방사능(Radioactive)’이다. 열정있는 과학자가 발견한 이 수고의 결과는 인류를 구원했는가? 아니면 파멸로 이끌고 있는가? 마리 퀴리는 알지 못했고 알 수도 없었다. 그래서 신앙이 없는 과학을 볼 때마다 물가에 뛰어노는 어린아이를 보는 것과 같은 심정을 감출 수가 없는 것은 필자만의 생각은 아닌 듯하다. 과학자들에게는 다윗의 기도가 필요한 때이다.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시 5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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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12-02
  • [영화] 약자의 연대가 만든 성장과 정의를 바라보다
    웃으면서 화내는 법을 아는 영화 20세기가 저물고 새로운 밀레니엄 시대를 맞이하면서 유럽의 영화전문가들은 지난 한 세기를 빛낸 영화를 꼽기 시작했다. 영화의 역사가 1895년 12월에 프랑스의 뤼미에르 형제에 의해 시작되었다는 것이 정설인 만큼 이제 막 100년을 넘긴 영화의 여정에서 한 세기를 빛낸 영화를 뽑는 일은 곧 세상 최고의 영화를 뜻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 최고의 영예는 찰리 채플린의 <모던 타임즈>(Modern Times, 1936)에게 돌아갔다. 나중에 채플린의 세 번째 부인이 된 여배우 플레트 고다르(Paulette Goddard)와 함께 열연한 <모던 타임즈>는 채플린의 사회 비판적 시각과 인간애 그리고 예술성이 코미디라는 장르 안에서 적절한 조화를 이룬 완벽한 작품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 커다란 톱니바퀴 속으로 들어가 나사를 조이는 주인공의 모습으로도 유명한 이 영화는 대공황기를 거치면서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외된 노동자와 기계의 부속품처럼 전락한 인간의 모습을 묘사함으로써 현대문명을 비판한 영화로 널리 알려졌다. 이 때문에 찰리 채플린은 사회주의자로 몰렸고 매카시즘( (McCarthyism)의 희생자가 되어 한동안 미국에서 활동할 수 없었다. 그러나 미국인뿐만 아니라 당시 소련을 포함한 전세계인들은 그의 영화에 열광했고 현대 기계문명과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이 어떠한 위기에 처할 수 있는지를 깨닫는 한편 주인공이 걷는 희망의 길에서 위로받을 수 있었다. 우리가 찰리 채플린과 <모던 타임즈>에 주목하는 것은 그의 뛰어난 사회문제 제기 능력 때문이다. 이기적인 부자와 절망스러울 만큼 가난한 사람들, 그리고 인간을 기계 부속품처럼 취급하는 심각한 현대사회의 문제들을 전혀 거부감없이 스크린에 올려놓을 뿐만 아니라 유쾌하고 재미있는 코미디적 발상을 통해 관객들을 몰입시키고 영화가 끝난 후에는 문제를 성찰케 하는 그의 뛰어난 영화 제작 기술은 감탄을 자아내게 만든다. 이종필 감독의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은 오랜만에 만나는 사회비판 의식을 갖춘 코미디 영화로써 만일 찰리 채플린이 한국에 태어났다면 다뤘을 법한 내용과 형식을 보여주고 있다. 여상 출신의 고졸 여사원에 대한 심각한 인사차별과 대기업 공장에서 독극물을 방류하는 바람에 피부병에 시달리는 마을 사람들, 그리고 한국기업을 헐값에 사들여 비싸게 되팔려는 다국적 투자회사의 횡포 등은 <모던 타임즈>에는 없지만 현대사회의 약소국 국민들이라면 경험했을 만한 심각한 내용들을 코믹하게 다루었다. 그것은 한마디로 웃으면서 화를 낼 줄도 아는 이중 커뮤니케이션의 화법을 구사할 줄 아는 능력을 말한다. 엄청 화를 낼 일임에도 불구하고 목청 높이고 핏대 울리면서 싸우지 않고 웃으면서 유쾌하게 관객에게 문제를 각인시키며 자신과 사회를 돌아보게 만들 수 있다면 채플린이 좋아할 만한 영화가 아닐까? 영어토익반 상고 졸업 여사원들의 빛나는 연대의식 IMF가 오기 전인 1995년, 대기업 삼진그룹에서 일하는 여상(女商) 출신의 입사 8년 차인 이자영(고아성)은 탁월한 업무 능력에도 불구하고 입사 동기인 정유나(이솜), 심보람(박혜수)과 함께 잔심부름과 인스턴트커피 타기의 달인이 되어가고 있었다. 고졸 사원이란 이유만으로 근무복을 입히고 승진에 차별을 두고 있는 회사는 마침내 여상 졸업 사원들에게 토익 600점을 넘기면 대리로 승진시킨다는 새로운 지침을 발표한다. 회사 내 여상 출신들이 강의실을 가득 채우며 토익 공부에 매진할 무렵 이자영은 회사 임원의 물건을 정리하러 간 공장에서 페놀을 방출하는 현장을 목격하게 된다. 회사에 보고를 하고 시정조치를 지켜보면서 지영은 페놀 방류가 사고가 아닌 회사의 의도적이란 사실에 심증을 굳히면서 유나와 보람과 함께 결정적 증거를 찾기 위한 탐색을 시작한다. 이야기의 전개 상황을 보면 영화는 대기업의 환경오염 실태를 사회에 알리는 전형적인 내부 고발의 형식을 갖고 있다. 회사는 페놀을 무단 방류했음에도 불구하고 주민에게는 마치 건강에 별다른 문제가 없는 것처럼 거짓말을 하고 적당히 보상하는 것으로 마무리를 지으려 한다. 여기서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이 할리우드 영화가 내부고발자를 다루는 방식과 다른 점이 발견할 수 있다. 미국 국방부 정보기관 NSA 직원 에드워드 스노든을 내세워 NSA가 각국 정상들에서 민간인에 이르기까지 통신 감청 시스템 프리즘(PRISM)을 사용해 감시하고 있음을 밝힌 사건을 그린 영화 <스노든>(2017)에서 주인공들은 매우 큰 갈등과 회유, 압박 등을 견디며 숨겨진 진실을 밝히는데 온 힘을 쏟는 모양새다.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의 주인공들은 다르다. 자신이 속한 회사가 건강에 심각한 위협을 초래하는 페놀을 유출했다는 사실을 언론에 알리기 위해 노심초사하거나 심각한 심리적 갈등을 스크린 위에 펼치기보다는 영어토익을 함께 공부하는 고졸 여직원들이 힘을 모아 진실을 밝히는데 초점을 두고 있다. 즉 그것은 위기의 상황에 대처하는 한국인의 연대의식이 할리우드와는 다르게 이 영화를 가치 있게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영어토익반의 고졸 여사원들은 페놀 방류사건의 뒤에 다국적 투자회사가 기업가치를 떨어트린 뒤에 헐값에 매수하려는 의도가 있음을 밝히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다. 영어를 못하는 바람에 영어를 배우는 처지임에도 불구하고 영어토익반 여사원들은 엄청난 분량의 영어 서류들을 나누어 번역하면서 기업매각의 증거들을 찾아낸다. 회사에서 가장 힘없고 급여도 적으며 남성 상사들의 편견에 시달려 온 고졸 여사원들이 궁극적으로 기업사냥꾼의 손에 회사가 넘어가지 못하도록 막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다는 사실은 한국인들이 연대의식을 통해 나라를 구한 역사에 대한 은유처럼 보인다. 임진왜란 때 왜적과 싸운 의병들이나 외세의 칩입에 항거한 동학농민들, 6.25 때의 학도병들과 4.19혁명 당시의 어린 학생들이 대거 참가한 일 등은 우리 민족이 약자의 연대를 통해 역사의 위기를 극복해왔음을 보여준다. 특히 약자의 연대는 강자의 일방적 횡포를 멈추게 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코로나 시대의 건강한 영화를 마주하다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은 건강한 영화다. 약간의 욕설과 호프집 장면이 나오는 바람에 12세 이상 관람가 등급을 받았지만 부조리한 현실에 좌절하지 않고 성장을 위해 노력하며 불의한 일에 항거하는 용기있는 인간상을 보여주고 있어서 나이 어린 사람에게조차 기독교의 선한 가치관을 제공해줄 수 있다. 첫째, 약자와 병자를 향한 감정이입에 성공한 주인공의 모습에서 우리는 육체적 건강의 가치가 공유되어야 함을 느낄 수 있다. 공장에서 방류된 페놀로 인해 마을 주민들이 피부병과 괴질 그리고 흉작의 고통 속에 있는 사실을 외면하지 않는 이자영의 캐릭터는 그리스도인이 지녀야 할 성격의 원형과도 같다.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롬12:5)는 말씀은 그리스도인이 세상의 마음을 얻는 비결이다. 갈등의 사회에서 고소와 고발, 폭력사태에 이르지 않는 비결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로마서 12장 5절을 실천하는 일이다. 감정의 공유는 마음을 하나로 만들고 문제의 원인에 보다 가까이 다가가 해결점을 쉽게 찾을 수 있게 만든다. 영화 속 이자영은 회사의 말단 사원으로 회사가 시키는 대로 오염에 따른 마을 주민들의 실태를 파악을 하고 보고하는 것으로 끝나면 되지만 주민들의 끝나지 않은 고통을 외면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녀는 주민의 고통이 자신의 마음에 와닿는 감정이입을 이루었던 까닭이다. 둘째, 상고출신의 여사원이라는 신분에 따른 차별을 극복하려는 사회적 건강이 영화 속에 존재한다. 고졸 사원들은 남들보다 일찌감치 사무실에 출근하여 청소하는 것으로 하루 일을 시작한다. 담배꽁초가 가득한 재떨이를 비우거나 상사의 담배 심부름도 그들의 몫이다. 대졸사원과 구분하기 위해 그들만의 유니폼을 입고 10년을 일해도 대리 승진을 할 수 없는 현실을 타파하기 위해 토익공부에 나서기도 한다. 영화의 배경이 1995년이라서 가능한 일일까? 그렇지 않다. 2020년의 현실에서도 적용되는 사항이다. 성경은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3:28)라고 말한다. 그리스도의 신앙 안에서 인종 간의 차이도 남녀 성별의 차이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 교회는 현실에 존재하는 집단 가운데 사회적으로 가장 건강한 집단이 되어야 한다. 셋째, 불의(不義) 앞에서 오래 고민하지 않고 용기를 갖고 도전하는 주인공들의 모습에서 정신적 건강이 어떤 것인지 영화는 보여준다. 학력이 정신적 건강을 담보하지는 못한다. 사회생활에서 정신적으로 건강함 사람의 특징은 자기 분야에 전문적 지식을 갖고 도덕적 행동을 통해 남의 손가락질을 받지 않는 사람들이다. 영화 속에서 이자영은 커피만 잘 타는 것이 아니라 본인이 속한 생산관리 3부의 서류철을 꿰뚫고 있다. 정유나는 자존감 높은 달변가로서 마케팅에 필요한 문구를 만드는데 재능을 발휘한다. 그리고 영화 속 3총사의 마지막 심보람은 비록 가짜 영수증을 메꾸는 회계부에서 일하지만 수학 올림피아드 우승에 빛나는 실력을 갖고 아무도 회계부정을 저지르지 못하도록 영수증 처리 자동화 시스템을 계획하고 있다. 이 세 사람의 행동에 전문성이 돋보이는 한편으로 불의가 없고 도덕이 더 해질 때 사회적 두려움은 사라지고 정신적으로 건강한 상태에 이르게 됨을 볼 수 있다. 넷째 영적인 건강은 관객의 몫이다.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은 세상 사람을 만날 수 있는 접촉점으로 훌륭하다. 그런데 영화 속 주인공들의 행동 속에는 기독교적인 가치관을 공유하는 것들이 제법 많다. 그들과 함께 영화를 보며 영화의 배경에 나타난 사회의 문제들이 기독교 안에서 잘 해결되고 있음을 가르칠 수 있어야 한다. 성경을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교리공부는이해되기 어렵지만,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에서 신분의 차별을 극복하는 일이나 연약한 자들이 하나님이 주시는 힘과 지혜를 따라 연대활동을 하거나 불의한 권력자와 맞서는 일들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사람들과 쉽게 공감대를 형성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기회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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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11-03
  • [영화]전쟁 영화 속에서 발견한 ‘선한 목자’
    U보트와 코로나19는 닮았다 영화는 항상 그 영화를 경험한 시대적 상황 가운데서 읽힌다. 과거 역사를 다룬 사극을 보느냐 혹은 미래의 공상과학 영화를 보느냐와 상관없이 영화는 그것을 보는 사람에게 현재적 의미를 전달하며 현재의 상황을 판단하고 행동하는 데 관여한다. 전 세계가 코로나19라는 공통의 적을 만나 싸우고 있는 현실에서 대중에게 주목받는 영화들은 그 장르나 내용에 상관없이 이 전염병으로 둘러싸인 현실을 인식하게 만드는 역할을 하고 있다. 좀비 영화 <반도>를 볼 때는 좀비처럼 급속히 번져가는 코로나 바이러스의 공포를 반영한다고 생각했고, 디즈니의 실사영화 <뮬란>을 볼 때는 오랑캐와 싸우는 여성 주인공 뮬란에게서 코로나 방역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우리나라의 방역청장을 보는 느낌을 받았다는 얘기가 전해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코로나19의 현실을 영화 속 배경에 대입시키는가 하면 난세의 위기로부터 우리를 구원할 영웅을 영화는 고대하게 만들고 있다. 톰 행크스가 이차대전 중 미해군의 함장으로 나오는 영화 <그레이 하운드>는 비록 그 배경이 78년 전에 일어난 일이라 할지라도 코로나19의 위기 속의 현대인들이 동의할 수 있는 현재적 의미 안에서 읽혀질 수 있다. 1942년 겨울, 손이 얼어붙을 것 같은 대서양 한복판에서 독일의 잠수함 U보트로부터 연합군 물자를 실은 37척의 상선을 보호하기 위해 크라우제 함장(톰 행크스)은 호위함 그레이 하운드의 지휘를 맡아 대서양을 횡단하여 영국으로 출항하게 된다. 북대서양의 위험지역(블랙 피트)은 독일군의 잠수함을 탐지해서 격침시키는 초계기의 보호지역으로부터 벗어나 있는 까닭에 오직 호위함의 음파탐지기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한계에 직면하고 만다. 영화 초반부에서 크라우제 함장은 U보트를 탐지하여 격침시키는 전과를 올려 병사들의 사기를 올렸지만, 이내 어둠 속에서 U보트의 공격으로 불타는 아군의 수송선을 목격할 수밖에 없는 두려움의 상황에 직면하고 만다. 이 영화를 보는 사람들은 U보트가 코로나19라는 바이러스의 실체를 은유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느낌을 받게 된다. 첫째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어딘가 숨어 있다가 갑자기 공격하여 생명의 위협을 준다는 점에서 이 둘은 비슷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 U보트는 잠수함 탐기 기술이 발달하지 못한 2차대전 중 연합군 함대와 상선단에 치명적인 위협을 가했다. 영화 속에도 등장하지만 독일은 U보트를 이용해 이른바 울프팩(wolfpack·이리떼) 작전을 펼쳤다. 바닷속에서 숨어서 기회를 엿보다가 연합군의 상선단이 나타나면 자기들끼리 정보를 교환하며 동시에 공격하는 방식으로 엄청난 피해를 입혔다. 당시 영국은 2330만 톤의 선박을 잃어버렸는데 이는 영국 경제를 몰락시킬만한 규모의 피해였다. 둘째, 연합군은 U보트의 기만전 때문에 그 위치와 정체를 파악하는데 어려움을 겪었다는 점도 코로나19와 비슷하다. 연합군의 구축함이 음파탐지기로 탐색한 U보트는 실제가 아니라 아이스박스만 한 크기의 기만체로 스크루처럼 작동하는 바람에 연합군 함정은 이를 U보트로 착각하여 엄청난 폭탄을 투하하게 되고 끝내는 탄약고를 비우게 하고는 엉뚱한 곳에서 상선을 공격하곤 했다. 자신과 비슷한 것을 만들어 혼란에 빠뜨리게 하는 전략인 셈이다. 현대의학이 바이러스에 대한 백신이나 치료약을 개발할 때 경험하는 가장 큰 어려움은 바이러스의 변이가 활발할 때다. 백신이나 치료제가 완성을 코앞에 둘 때면 변종 바이러스가 출현하여 이전에 연구한 결과들을 무용지물로 만들어 버리곤 한다. 바이러스의 기만전술인 셈이다. 셋째는 U보트는 야간에 호위함과 수송선단 사이로 침투하여 피아식별이 불가능하게 만드는 혼란전술을 펼치는데 이는 코로나19에서 겪는 사회갈등을 보는 듯하다. 즉 영화 속에서 호위함 그레이 하운드는 U보트를 공격하다 오히려 아군의 오인사격을 받고 만다. 아군이 아군을 공격하는 꼴이다. 지금 대한민국은 전국민이 코로나19와 싸우는 모양새 같지만 그 내부를 들여다보면 코로나19의 대책을 두고 정치인과 국민들이 분열되어 서로를 공격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정작 싸워야할 상대는 잊어버리고 아군끼리 싸우다 결국 코로나19가 퍼져가는데 좋은 일을 시켜주는 셈이다. 기도와 성경 인용이 자연스러운 할리우드 전쟁영화 <그레이 하운드>는 일반 전쟁영화이면서 동시에 기독교인들에게 신앙의 자부심을 느끼게 만드는 수작이다.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전쟁터로 향한 지휘관의 마음가짐과 전쟁에 임하는 기독교인의 자세가 기도와 성경 말씀을 통해 영화 곳곳에서 드러나기 때문이다. 영화는 첫 장면부터 크라우제 함장의 기도하는 모습으로 시작한다. 거친 파도를 가르며 전장으로 나가는 호위함의 함장실에서 그는 무릎을 꿇고 이렇게 기도한다. “주여! 악이 저를 지배할 수 없게 주의 천사를 제게 보내시어 저와 함께하소서. 아멘.” 목숨을 건 전쟁의 상황인 동시에 아직까지는 기독교신앙이 낯설지 않게 느껴졌던 시대인 것을 감안하면 영화제작자는 시대적 배경을 염두해 두고 함장의 기도를 소품처럼 처리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레이 하운드> 함장이 가진 신앙적 면모는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세밀히 그리고 확대해서 보여준다. 함장실 방안 거울에는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히13:8)는 성경 구절이 꽂혀있다. 또한 함장은 식사 때마다 기도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더욱 인상적인 것은 함장이 식사 기도를 할 때 음식을 가져온 흑인 조리장도 함께 기도하며 ‘아멘’으로 화답하는 점이다. 그 누구도 이 상황 속에서 어색함을 느끼는 사람은 없다. 오히려 함장의 신앙은 점점 함정 내에서 당연하게 여겨지면서 부하 장교인 부장 마저 함정의 전기관 고장을 보고할 때 성경 구절을 인용하는 일까지 벌어진다. “함장님, ‘밤이 오리니 그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입니다”(요9:4) 전기관이 고장나는 바람에 어둠 속에서 있어야 함을 설명할 때 부장은 그가 평소에 기억하던 성경 구절을 인용하고 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역시 처음 장면을 반복하며 함장의 기독교 세계관이 단순한 소품이 아니라 영화의 주제와 맥락을 같이함을 나타낸다. 함장은 고된 전투가 끝나고 호위 임무를 벗어나자 함장실에 들어가 침상 앞에 성경책을 놓고는 무릎 꿇고 기도한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시여, 이날을 영광스럽게 지켜주셔서 감사합니다. 당신의 손에 제 영혼과 몸을 맡깁니다. 아멘.” 영화는 이어서 시작 부분과 마찬가지로 히브리서 13장 8절의 성경 구절이 새겨진 메모를 비춘다. 기도와 성경으로 시작해서 동일한 장면으로 끝을 맺는 수미쌍관(首尾雙關)의 형식을 갖추고 있다. 이것은 완벽하게 기독교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일이다. 생각할수록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톰 행크스에게 무슨 일이라도 일어난 걸까? 톰 행크스와 성경적 영웅을 말하다 <그레이 하우드>에서 톰 행크스는 단지 개런티를 받는 주인공의 역할에 머문 것은 아니었다. 톰 행크스는 이 영화의 각본을 썼다. 주연 배우가 자신이 나올 영화의 각본을 썼다는 뜻이다. 영화가 제작되기 7년 전 톰은 우연히 C. S. 포레스터의 소설 ‘굿 셰퍼드(선한 목자)’를 읽고 영화화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그는 정성을 다해 썼고 쓰는 내내 각본의 내용이 영화 장면처럼 머리에 떠올랐음을 밝히기도 했다. 철저한 기독교 신앙인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4천만 달러짜리 전쟁영화의 주인공일 뿐만 아니라 각본에 참여했다는 사실은 이 영화가 자신의 세계관에 부합한다는 의미를 갖는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이다. 그렇다면 톰 행크스의 삶에 기독교 세계관이 영향을 주고 있다고 볼 것인가?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전조는 이미 나타난 적이 있다. 톰 행크스가 <그레이 하운드>를 찍기 직전의 영화는 미국의 공영방송 PBS의 어린이 프로그램 진행자 프레드 로저스(Fred Rogers) 목사의 인간미 넘치는 삶을 보여주는 <뷰티풀 데이 인 더 네이버후드>(A Beautiful Day in the Neighborhood, 2019)였다. 로저스 목사는 TV쇼 <로저스 아저씨의 이웃>(Mister Roger's Neighborhood)이라는 인기 프로그램을 통해 성경이 말하는 삶이 무엇인지를 어린이들에게 음악과 인형극 그리고 놀이로 가르친 사람이었다. 톰 행크스는 로저스 목사 역을 맡으면서 상처 입은 사람을 돌보고 어린이들의 친구가 되어 그들과 함께하는 친근한 이미지를 보여주었다. 톰 행크스가 과연 기독교 신앙에 얼마나 관심이 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인터넷에 소개된 톰 행크스의 공식적인 종교는 그리스 정교회로 알려져 있다. 그는 1988년 지금의 부인인 리타 윌슨과 재혼하며 아내의 가족들이 모두 믿고 있었던 그리스 정교회로 개종했다. 톰 행크스의 최근 영화들과 그의 신앙이 그리스 정교회와 연계되었다는 사실을 종합해보면 적어도 그가 생각하는 기독교 영웅의 이미지는 ‘선한 목자’로 귀결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요한복음 10장에 나오는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버릴 만큼 사랑과 돌봄 그리고 희생하는 존재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하기도 한다. 톰 행크스가 주연으로 등장한 영화들 가운데 <라이언 일병 구하기>(1998)의 밀러 대위나 <설리:허드슨 강의 기적>(2016)의 설런버거 기장, 그리고 <뷰티풀 데이 인 더 네이버후드>(2019)의 로저스 목사와 <그레이 하운드>의 크라우제 함장은 모두 ‘선한 목자’의 이미지를 가진 기독교적 영웅의 모습을 갖고 있다. 늑대처럼 달려드는 악으로부터 사람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뿐만 아니라 어느 누구도 상처받지 않도록 관심을 기울이고 돌보는 모습은 힘자랑하는 ‘어벤져스’의 영웅 보다는 성경에 나타난 ‘선한 목자’의 이미지에 가깝다. U보트가 넘나드는 죽음의 바다를 항해할 때 당시 수송선들이 호송함 그레이 하운드를 보며 의지하고 안심했을 모습을 생각하면 코로나19 가운데 대한민국 국민을 지켜줄 선한 목자를 찾게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그러면 우리에게 선한 목자는 있는가? 만일 생각이 나지 않는다면 당신이 선한 목자 역을 맡는 것은 어떨까? 코로나 시대에 성경적인 영웅의 등장을 우리는 간절히 바라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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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11-02
  • [영화] 세상은 목회자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돈과 신앙 사이에서의 갈등 2018년 부산국제영화제 초청작인 강동헌 감독의 <기도하는 남자>는 개척교회 목회자의 금전적 어려움과 이에 따른 파격적인 상상과 행동을 보여주는 바람에 화제를 모은 영화다. 금년 2월에는 극장 개봉에 성공했지만 1,661명의 관객을 동원하는데 그친 것은 당초 기대에 어긋난 일이었다. 아니 어쩌면 한국 목회자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가 노출되었던 까닭에 적은 관객이 본 것이 다행인지도 모른다. 다만 6월 서울국제사랑영화제에서 재조명 받으며 개척교회 목회자의 현실을 되짚어 보는 기회가 되었던 것은 그나마 의미 있었던 일이었다. 그렇다고 이 영화가 기독교 영화로서의 높은 가치를 인정받았다든지 아니면 일반 관객들이 좋아할 만한 대중성을 인정받았다는 뜻은 아니다. 왜냐하면 기독교 영화 같으면서도 뭔가 아닌 것 같고, 일반 영화라 하기에는 교회를 배경으로 목회자의 신앙관이 영화의 줄기를 형성하는 까닭에 기독교인이 봐야 하는 영화처럼 느껴져서 교회와 세상 가운데 어디에 위치해야 하는지 아리송하기만 한 까닭이다. 기독교 영화라면 어떤 갈등 속에서도 궁극적으로는 기독교의 가치관이 드러나야 하지만 이 영화는 갈수록 우리가 목회자에게 기대하는 신앙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쪽으로 가는 바람에 관객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든다. 그렇다고 한국교회를 향한 비판적 관점을 제기하여 회개와 회복을 촉구했던 신연식 감독의 <로마서 8:37>과 같은 부류의 영화에 속하는 것도 아니었다. 결국 <기도하는 남자>는 장모의 수술비를 마련하려는 목적이지만 돈에 집착한 개척교회 목회자가 일으킨 파국과 왜곡된 욕망을 그린 일반 영화로 볼 수 밖에 없다. 즉 이 영화는 목사 대신 다른 어떤 종류의 직업에 속한 사람을 대입해도 비숫한 그림이 나올 수 있는 영화란 사실이다. 태욱(박혁권)은 주일 예배 출석 성도가 5명에 불과한 개척교회 목사다. 하나님이 주시는 시련을 기도로 감당하며 하루 하루 견뎌내지만 밀린 월세에다 장모(남기애)의 간이식 수술비용이 당장 필요한 현실은 그를 대리운전 기사로 내몰았다. 5천만 원에 이르는 수술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그는 밤새 대리운전을 하고 교회에 와서 잠깐 눈을 붙이는 생활을 반복한다.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아내 정인(류현경) 또한 어떻게든 자신의 간을 어머니께 이식하는 수술이 진행될 수 있도록 열심히 일하지만 5천만 원은 고사하고 당장 2백만 원이 드는 검사비가 부담스러운 현실이다. 여기까지는 드라마의 전개 과정에서 아무런 문제가 없다. 기독교 영화 쪽으로 방향을 돌려 개척교회 목회자가 겪을 수 있는 경제적인 어려움의 현실을 조망하고 신앙과의 갈등을 묘사하며 이것이 자신의 신앙을 성장시키고 목회철학을 새롭게 정립하는 방향으로 설정된다면 훌륭한 기독교 영화로 남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기독교와 목회에 대한 이해의 부족 강동헌 감독은 두 가지의 치명적인 부족함을 안고 있다. 하나는 기독교 신앙 및 교회에 대한 이해와 경험이 없는 점이다. 그가 씨네21과의 인터뷰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어릴 때 여름성경학교에 몇 번 가본 게 교회 경험의 전부임을 밝혔고, 다만 영화감독의 삶이 개척교회 목사의 것과 비슷한 면이 있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대형교회가 아닌 개척교회 목회자와 영화감독 모두 경제적으로 어려운 가운데서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만을 갖고 돈에 대한 유혹과 갈등을 다루었던 셈이다. 그래도 영화에 나타난 개척교회에 대한 세밀한 묘사와 신앙의 정황에 대한 이해는 신학대학 출신의 제작부장의 도움을 받았음을 언급했다. 이것은 개척교회 목회자라면 한 번쯤 겪었을 법한 돈과 신앙 사이의 갈등을 목회에 대한 소명 가운데서 깊이 다루지 못하는 한계에 봉착하고 마는 결과를 가져왔다. 또 한 가지의 부족함은 처음 장편영화를 제작하는 데서 오는 창작에 대한 부담감이 대중성과 작품성 모두의 가치를 비켜가게 만들었다. 누구든지 처음 극장용 상업영화를 만드는 감독이라면 관객들이 많이 찾는 영화를 만들어서 대중성의 가치를 인정받고 싶은 한편으로 영화의 메시지나 완결성에서 비평가로부터 칭찬을 듣고 싶은 마음에 작품에 대한 욕심을 내게 마련이다. 이때 초보 감독이 저지르는 실수는 여기저기 여러 영화의 인상 깊은 장면이나 이야기를 가져다 뒤섞는 일이다. <기도하는 남자>의 전반부는 이미 전윤수 감독의 <베사메무초>(2001)에서 본듯한 장면들이 전개되었다. 빚보증을 잘못 서는 바람에 집을 날리게 될 처지가 된 남편(전광열)은 개인 투자자의 아내로부터 성적 유혹을 받는 한편, 1억을 빌리는 조건으로 아내(이미숙)는 성공한 사업가로 변신한 대학 선배로부터 잠자리를 요구받았었다. 아이들이 줄줄이 있는 가정에서 하루아침에 거리로 내몰릴 위기에 처한 가정의 부부라면 거절하기 힘든 유혹이었음이 분명하다. <기도하는 남자>의 감독은 5천만 원을 구하기 위해 성적 유혹을 받는 대상을 목사의 아내로 설정한 대신 목사는 유혹을 넘어 범죄를 도모하는 악인의 캐릭터로 자신만의 영화적 독창성을 구현해 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돈 때문에 성직자가 얼마나 야비하고 비인간적인 범죄자로 변신할 수 있는지를 보여줌으로써 이전의 어떤 영화에서도 볼 수 없었던 캐릭터를 구축하고 있는 것이다. 돈과 성에 사로잡힌 목회자의 정체성 <기도하는 남자>의 가장 흥미로운 장면은 태욱이 대리운전을 하다 술 취한 커플을 태우게 되는데 그들이 다름 아닌 대형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신학교 후배와 그의 내연녀였던 것. 아버지로부터 대형교회를 물려받은 후배 목사 동현은 태욱을 알아보고 애들 과자라도 사주라며 돈을 더 얹어주지만 손과 달리 입은 신학교 때 잘나가고 존경스러웠던 선배가 겨우 개척교회나 하면서 대리운전이나 하고 있느냐는 모멸감 섞인 말을 내뱉는 바람에 태욱은 마음에 상처를 입는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불륜의 현장을 들킨 동현은 거액의 현금을 제안하고 태욱은 상한 자존감과 장모의 수술비를 한꺼번에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게 된다. 이때부터 영화는 멋을 부린 조폭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장면들이 이어진다. 태욱은 캠코더로 동현의 불륜현장을 담아 장모 수술비에 필요한 5천만 원과 맞바꾸려다 동현이 고용한 일당들에게 납치되어 얻어맞고는 속옷 차림으로 인적이 드문 길에 버려진다. 태욱은 나중에 동현에게 자신이 당했던 방식 그대로 되돌려주는 한편으로 지금까지 문제의 발단이 된 장모를 청부 살해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실행 직전까지 가게 된다. 아직 영화를 보지 않은 사람들 앞에서 줄거리나 내용을 미리 알려주는 행위를 스포일러( spoiler)라 한다. 스포일러는 무단 복제 만큼이나 영화의 세계에서는 금지된 사항이다. 영화에 대한 흥미를 떨어뜨려서 관람을 회피하게 만드는 까닭에 예비관객이나 제작자에게 손해를 입힐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영화의 스포일러는 오히려 한국의 기독교인과 목회자들에게 어떤 영화인지를 보고 싶게 만드는 역작용을 일으킬 수 있다. 개척교회 목사로서 숨기고 살았던 감정을 토해내는 한편으로 못마땅한 일이 많지만 주위 사람들에게 화를 내지도 못한 채 억지 웃음을 지으며 살았던 평소 볼 수 없었던 목회자의 내면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세상이 목사를 바라보는 두 가지 방식 기독교 영화도 아니고 작품성 높은 세상 영화도 아닌데 굳이 <기도하는 남자>에 대한 글을 지면에 실은 이유가 무엇일까. 첫째는 영화 속의 목회자들의 이미지는 세상이 기독교 성직자들을 바라보는 시각을 반영하기 때문이며, 둘째는 코로나 19 사태 속에서 사회의 믿음을 져버리고 방역을 소홀히 여기다 확진자를 배출시킨 몇몇 교회와 목회자의 모습이 영화 중간중간에 떠오르기 때문이다. 영화는 상상력의 산물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현실의 바탕을 둔 상상력이며, 영화적 상상력은 개연성, 즉 그럴듯하다고 여겨질 때 관객의 이해를 기대할 수 있다. 즉 <기도하는 남자>에 등장한 두 목회자의 이미지는 감독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지만 어디까지나 현실이라는 바탕 위에서 창작된 인물이다. 이때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목사는 부자교회의 목사와 가난한 교회의 목사로 양분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세상 사람들은 부자교회 목사는 아버지를 잘 만난 덕에 고급 승용차를 타고 다니지만, 가난한 교회의 목사는 아무리 애를 써도 남의 차를 운전하는 대리기사를 벗어나기 힘든 상황이라 생각한다. 마치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큰 결점인 양극화 현상을 교회에도 적용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런데 더욱 중요한 사실은 교회를 바라보는 세상의 시선에는 큰 교회 목사와 작은 교회 목사 모두 윤리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보는 점이다. 대형교회 목사 동현은 성적으로 타락했고 개척교회 목사 태욱은 돈 때문에 범죄 저지르기를 서슴지 않는다. 동현은 선배 목사인 태욱에게 “나는 형을 동경했다”며 타락한 자신과 달리 이상적인 성직자가 한 사람쯤은 남아 있기를 기대하는 마음을 엿볼 수 있다. 영화 속 목회자는 세상의 기대를 여지없이 무너뜨렸다. 잘못된 목회자를 등장시킨 영화는 극장 밖을 나오면 잊어버릴 수나 있지만, 코로나 19의 전염지가 되어버린 교회와 세상의 걱정거리로 남은 목회자와 함께 살아야 하는 지금의 현실은 어쩌란 말인가! 한국교회는 과거의 신뢰를 회복할 수 있을까? 아니 이웃에게 주님의 사랑을 말하며 전도하는 일이 앞으로 가능하기나 할까? 영화를 보며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이 멸망을 앞에 둔 ‘소돔과 고모라’와 같다는 생각을 한 건 지나친 비약일까? 성경이 말하는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한 이유는 의인 열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창1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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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9-15
  • [영화] 영화 ‘반도’와 좀비의 시대를 살아가는 법
    한국영화계를 살리는 좀비 연상호 감독의 영화 <반도>가 개봉 일주일 만에 2백만 명의 관객을 돌파했다. 코로나19가 전국을 휩쓴 이후로 2백만 명의 스코어를 기록한 영화는 <반도>가 처음이다. 평소 같았다면 여름방학용 특수를 노린 블록버스터 영화 정도로 여겨졌을 법 하지만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 한국영화계가 심각한 침체 상태를 겪고 있는 상황 가운데서 일어난 일이라 극장가는 심폐소생술이라도 받은 듯 영화산업의 회생을 기대하는 분위기가 가득하다. 그도 그럴 것이 2020년 상반기 전체 관객 수가 지난해 대비 무려 70.3%나 감소한 데다 그나마도 코로나19로 인한 사회적 거리두기가 시작되기 전 영화들이 거둔 성적이 대부분이라서 <반도>에 거는 기대는 클 수밖에 없다. 두 가지 면에서 한국의 극장가는 <반도>를 주목하고 있다. 첫째는 사회적 거리 두기가 일상화된 상황에서 극장 내에서의 전염에 대한 관객의 두려움을 해소해줄 수 있는가에 일차적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정부는 코로나19의 예방책으로 ‘밀집, 밀접, 밀폐’ 등 ‘3밀’ 환경을 피할 것을 강력하게 권고하는 상황에서 일반 영화관들은 바로 ‘3밀’에 최적화된 환경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아직까지는 극장을 매개로 한 집단감염의 사례가 보고되고 있지 않지만 블록버스터 영화에 관객이 몰릴 경우 발생할 수 있는 위험성을 배제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반도>는 앞으로 코로나 시대에도 천만 관객 동원이 가능한가에 대한 궁금증을 해결할 수 있는 바로미터가 될 가능성이 높다. 둘째는 스트리밍 서비스(OTT)로 몰려간 관객의 입맛을 극장으로 되돌릴 수 있는지 여부가 <반도>에 달려 있다. 코로나19로 인해 집에만 갇혀 있던 영화 관객들을 위로한 것은 넷플릭스나 왓챠 같은 인터넷을 통해 영화를 볼 수 있는 스트리밍 서비스 업체들이었다. 넷플릭스와 경쟁하는 토종 스트리밍 서비스 업체인 왓챠만 하더라도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전용 온라인 상영관을 개설하여 9천여 건의 유료결제 티켓을 판매함으로써 코로나19로 인해 영화관을 찾지 못한 영화제 관객을 끌어들이는데 성공했다. 국제영화제에서만 볼 수 있는 영화들을 온라인으로 볼 수 있는 관객들이 과연 코로나 감염의 위험을 무릅쓰고 다시 극장을 찾을 것인가에 대한 판단 여부가 <반도>에 달려 있는 것이다. 좀비와 액션의 결합체, ‘반도’ <반도>는 연상호 감독이 만든 <부산행>(2016)과 <서울역>(2016)에 이어 좀비를 소재로 삼은 세 번째 영화다. <부산행>이 1157만 관객을 모으며 한국형 좀비라 일컬어지는 K-좀비를 탄생시킨 중심에 서 있다면, <서울역>은 애니메이션으로 <부산행>에 앞선 시점을 보여주는 프리퀄(Prequel)이 되고, <반도>는 <부산행>의 4년 뒤 모습을 보여주는 속편으로 시퀄(sequel)이 되는 셈이다. <반도>는 좀비의 세상으로 변한 서울을 배경으로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생존을 위한 투쟁과 욕망을 담았다. 한반도가 좀비로 뒤덮이는 것을 피해서 홍콩으로 도피했던 정석(강동원)은 일행과 함께 달러가 잔뜩 들어있는 트럭을 회수하기 위해 서울에 잠입하게 된다. 그러나 정석 일행은 조직화 된 집단을 이루며 살아가는 631부대를 이끄는 서 대위(구교환)와 황중사(김민재) 일행과 부딪히게 되면서 좀비와 인간성을 상실한 인간집단 양쪽으로부터 쫓기는 신세가 되고 만다. 마침 두 딸의 어머니이자 좀비는 물론 야만적 생존자들과도 싸우기를 주저하지 않는 여전사 민정(이정현)의 가족들을 만나 구사일생으로 위기를 모면하게 된다. <반도>는 인간과 사회의 총체적 위기를 다룬 종말적 세상의 모습을 그린 영화다. 좀비를 내세워 이목을 집중시켰던 <부산행>과는 달리 <반도>는 강동원을 내세워 액션으로 승부를 걸고 있는 점도 다르다. <반도>를 보며 디스토피아의 세계를 다룬 이전 영화들인 <매드맥스-분노의 도로>(2015)나 <일라이>(2010)를 비롯한 많은 영화들을 떠올리게 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할리우드가 만들어 낸 미래의 종말적 이미지로 부터 벗어나 독창적인 상상을 하기 보다는 대중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안전한 장르의 특성에 기대는 모습이다. 이미 K-좀비를 통해 한국형 좀비영화의 특징을 세상에 보여준 만큼 이번에는 세계화를 겨냥하여 사람들이 예측 가능한 종말적 세상의 모습들을 그림으로써 서로 다른 문화를 가진 세계인들을 이해시키려는 의도가 강하게 나타난다. <반도>가 개봉 전에 이미 185개국에 선판매되었고 개봉 당일 대만과 싱가폴, 베트남 등 아시아 주요국에서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하는 성과를 올릴 수 있었던 것도 좀비가 등장하는 액션물이라는 장르적 특성을 반영한 까닭이다. 코로나 시대와 닮은 좀비 영화 <반도>는 코로나19로 인해 웃을 수 있는 영화다. 코로나 바이러스와 좀비는 비슷한 면이 적지 않은 까닭에 관객의 현실적 공감대를 형성하는데 별 어려움이 없기 때문이다. 첫째는 좀비의 집단적 공격성과 빠르게 전파되는 특성은 코로나19의 전염력을 닮아 공포감을 현실화 시킨다. 한 두 명의 좀비가 아니라 수십 명에서 수백 명이 한꺼번에 달려드는 모습에서 관객들은 공포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코로나19가 세계를 강타한 지 반년이 지났지만 7월의 경우 신규 확진자가 하루 23만 명을 넘는 등 역대 최고 기록을 갱신하고 있는 중이다. 어느 영화나 좀비가 처음 물어뜯은 대상은 가족과 이웃들이다. 늘 옆에 있는 사랑하는 사람이 좀비가 되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장면은 가슴 아픈 일인 동시에 극도의 공포심을 유발시킨다. 코로나 바이러스의 감염경로 또한 이와 다르지 않다는 점에서 위기의 상황에서 위로와 힘이 되어줄 존재가 언제든 가장 무서운 존재로 돌변할 수 있다는 사실은 종말적 상황을 연상시키기에 충분하다. 둘째는 코로나19에 희생당하는 사람들과 권력자들의 면모는 좀비 영화에서처럼 극단적 대비를 이룬다. 넷플렉스를 통해 K-좀비 신드롬을 불러일킨 영화 <킹덤>시리즈에서 좀비가 된 사람들은 먹을 것이 없어서 인육을 먹다가 역병에 걸린 사람 가난한 양민들이다. 이들을 돌보고 이끌어야 할 권력자들은 도망을 가거나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채 양민들을 사지로 내몰아 버린다. <킹덤>을 쓴 김은희 작가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굶주림에 사체를 먹기 시작한 백성들을 이야기 전면에 세워 권력층의 부조리를 넘어 계급적 폐해를 그리는 데까지 나아갔다고 밝힌 것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셋째는 좀비는 퇴치되지 못한 채 함께 생존해야 하는 코로나19의 현실과 닯았다. 코로나19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라는 전문가들의 전망은 좀비와 함께 살아가야 하는 인간의 절망적인 모습으로 끝을 맺는 좀비 영화와 다르지 않다. 지금까지 나온 그 어떤 좀비 영화도 원래의 세상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보여준 일은 없다. <반도>의 사람들은 좀비와 싸우거나 좀비를 피해 달아날 뿐이다. 그리스도인은 좀비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좀비는 무엇보다도 자본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의 불안한 심리를 형상화한 이미지란 사실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현실 세계에서 좀비는 존재하지 않지만, 좀비같이 인간의 삶을 송두리째 빼앗아가는 잔혹한 자본의 논리는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 좀비보다 무서운 것이 인간이며, 돈에 눈이 먼 인간은 다른 인간들을 물어뜯고 자신처럼 돈의 노예로 만들어 버린다. 한국 최초의 좀비 관련 석사학위 논문인 이희수의 ‘현대사회의 초상으로서의 좀비’에서 저자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에 집착하고 돈을 끊임없이 소비함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현대인들의 모습이란 무차별적으로 인간을 뜯어 먹고, 웬만해서는 죽지 않는 좀비에 비유하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의 비인간적인 탐욕이 무서운 것은 영화 속 좀비처럼 그들의 속성을 지닌 치명적인 바이러스를 전파시킨다는 점에 있다. 좀비에게 물린 사람은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똑 같은 좀비가 되어 인육을 찾아 나선다. 전파와 감염이 주는 공포는 좀비가 은유하는 인간 탐욕의 결과가 결국에는 인간 세상을 파괴할 수 있다는 종말에 대한 이해로 발전시키고 있다. 좀비로 가득찬 세상을 향해 성경 말씀을 들려주는 일은 또 다른 코미디 영화를 만드는 일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좀비가 상징하는 자본주의 사회의 탐욕과 소비 그리고 그 속에서 불안하게 살아가는 현대인의 마음을 돌보는 일에는 하나님의 말씀 외에 다른 대안은 없어 보인다. 왜냐하면 성경은 인간이 죄로부터 문제가 시작되었으며 그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 한 불안은 계속될 수 밖에 없음을 명확히 지적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래의 종말적 상황을 다룬 영화 <일라이>(2010)에서처럼 성경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문명개화 능력도 가지고 있지 않은가! 먼저 자본주의 사회의 어두운 단면을 상징하는 탐욕스런 좀비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성경의 말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첫째 자족하는 법을 배우는 일은 우리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갈 때 좀비 같은 행태로부터 멀어지는 비결이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빌4:11-12) 자족이란 개인의 만족만을 의미하는 것이 하니라 내 인생을 돌보시는 하나님의 손길에 의탁하는데서 오는 영적 위로를 동반한다. 둘째, 그리스도의 평안에 거하는 삶은 좀비가 판치는 세상으로부터 불안감을 불식시킨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14:27) 영화 속에서 좀비는 어둠에 거하다가 빛과 소리에 공격적 반응을 보이며 언제 어디서든 부지불식간에 나타난다. 진리의 빛과 복음의 소리가 들리면 사정없이 물어뜯기 위해 달려드는 무신론이 팽배한 자본주의 시대를 사는 일은 두려울 수 밖 없는 인생인 것이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잃어버릴 때 나타나는 현상도 그것과 다르지 않다. 좀비로부터 도망다니거나 아니면 좀비가 될 수밖에 없는 영화 같은 세상에서의 참 평안과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찾을 수 밖에 없는 일이다.
    • 문화
    • 영화
    2020-08-07
  • [영화] 우리에게는 좋은 이웃이 필요하다
    공영방송에서 복음을 전하는 법 교회와 매스미디어는 애증의 관계를 맺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매스미디어가 현실세계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고 복음전파를 위한 활용가치 또한 높지만, 아울러 기독교 신앙에 부합하는 면모를 보여 주고 있지는 못한다고 보는 시각을 갖고 있다. 오늘날 매스미디어는 상업주의에 물드는 바람에 선정성과 폭력성뿐만 아니라 미움과 복수가 사랑과 정의로 위장한 모습 등은 기독교의 가치관과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경우가 적지 않은 까닭이다. 그렇다고 그리스도인들이 매스미디어에 완전히 등을 돌린 것은 아니었다. 문화명령(창1:28)과 선교명령(마28:19-20)에 따라서 어떻게든 매스미디어 속으로 들어가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 위한 시도를 멈춘 적은 없었다. 때에 따라서는 기독교 방송과 같은 대안문화를 개발하는 한편으로 미디어비평과 시청자운동 그리고 훌륭한 기독교 신앙으로 무장한 그리스도인들을 매스미디어 세계 속으로 보내 제작의 영역에서도 변화를 도모하기를 쉬지 않았다. 세속적 사회에서 매스미디어를 대하는 그리스도인의 가장 어려운 일 가운데 하나는 공영방송에서 복음을 드러내는 일이다. 예를 들어 KBS와 같은 공영방송에서 목회자가 나와서 예수 믿고 구원받아야 한다는 전도성 발언을 내보는 일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종교의 자유가 헌법적으로 보장받고 있지만 다종교 사회에서 다른 종교와의 형평성 논란을 일으키기 쉬운 까닭이다. 성탄절과 같은 기독교의 절기를 제외한다면 공영방송에서 기독교 신앙을 증거하는 모습을 찾아보기 어려운 이유이기도 하다. 이 어려움을 해결하는 방법 가운데 하나는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삶을 설교하거나 가르치지 않고 단지 보여 주는 일이다. 우리가 너무도 잘 아는 대로 성령의 열매 9가지는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갈5:22)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이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 때 나타나는 결과들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비기독교인들이라면 결코 거부할 수 없는 인간적 가치로 이해될 수 있다. 아무리 기독교에 대해 부정적 생각을 가진 시청자라도 TV에서 늘 마주하는 인물로부터 성령의 9가지 열매를 지켜볼 수 있다면 그 모습에 반하지 않을 수 있을까? 비록 그가 하나님이나 십자가에 대한 얘기를 하지 않더라도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이 왜 좋은지를 조금이나마 알 수 있지 않을까? 톰 행크스 주연의 최신작 <뷰티풀 데이 인 더 네이버후드>(A Beautiful Day in the Neighborhood, 2019)는 미국의 공영방송 PBS의 어린이 프로그램 진행자 프레드 로저스(Fred Rogers) 목사의 인간미 넘치는 삶을 보여주는 영화다. 그는 1968년부터 2001년까지 자신의 진행하는 TV쇼 <로저스 아저씨의 이웃>(Mister Roger's Neighborhood)이라는 인기 프로그램을 통해 성경이 말하는 삶이 무엇인지를 어린이들에게 음악과 인형극 그리고 놀이로 가르친 사람이었다. 로고스서원의 김기현 목사는 프레드 로저스 목사에 대해 “로저스 아저씨는 TV에서 한 번도 복음을 말한 적이 없었지만 한번도 복음을 전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고 한 것은 정말 그에 대한 탁월한 설명이 아닐 수 없다. 좋은 상담가 프레드 로저스 <뷰티풀 데이 인 더 네이버후드>는 한 인물에 대한 이야기를 외부 시선을 통해 보여 주며, 그 외부인마저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감동과 변화의 경험을 겪게 된다는 할리우드식 위인전의 형식을 갖고 있다. 에스콰이어 잡지사의 폭로기사 전문기자 로이드 보겔(매튜 리즈)은 회사로부터 어린이 프로그램 진행자로 유명한 프레드 로저스에 대한 취재지시를 받는다. 아무리 유명인이라도 겉과 속이 다를 수 있다고 생각하는 보겔은 냉소적으로 사회를 바라보는 자신의 시선을 이번에도 적용하려고 하지만 왠지 이 사람 만큼은 다른 느낌을 받기 시작한다. 친절한 이웃집 아저씨로 프로그램에 등장하는 캐릭터와 현실의 로저스는 구분이 안 될 만큼 똑같은 모습으로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인터뷰의 회수를 늘려갈 때마다 보겔은 로저스가 바라보는 세계관의 영향을 받으며 자신이 변화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기독교 문화관으로 보자면 좋은 영화는 선한 변화를 추구한다.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듯’(요2장) 문제의 인간이 온전한 삶으로 회복되는 모습이 기독교의 가치가 반영된 영화의 특징이다. 이 영화 또한 마찬가지다. 냉소적인 폭로전문기자 보겔은 어릴 적 가족을 두고 집을 나간 아버지에 대한 분노로 가득 찬 인물이다. 보겔의 아버지 제리(크리스 쿠퍼)는 자식들이 어렸을 때 다른 여자와 바람이 나서 집을 나갔고, 어린 보겔과 누이는 아버지가 없는 가운데 어머니의 임종을 지켜봐야 했다. 시간이 흘러 나이를 먹고 결혼을 해서 젖먹이를 둔 보겔이지만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을 찾아온 아버지에 대한 분노의 감정이 조금도 사라지지 않은 상태에서 성인 군자 같은 모습의 로저스를 만난 것이다. 물론 결과는 우리가 예상했듯이 보겔은 아버지 제리와 화해한다. 말기 암에 걸린 아버지는 죽음을 앞둔 침상에서 아들에게 용서를 구하고 보겔은 아버지를 받아들인다. 그러나 이 영화는 표면적으로는 단순하고 진부해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기독교가 고난과 상처받은 인생에 대해서 갖는 독특한 관점이 내재 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그것은 한마디로 프로이트의 심리학을 거부하고 성경이 고난과 인생에 대해서 갖는 감사의 심리가 일으킨 회복의 결과라고 말할 수 있다. 프로이트의 심리학을 보겔의 인생에 적용하자면 너무 간단하고 명확한 것처럼 보인다. 보겔이 사람과 사회를 대할 때 냉소적이고 비판적이며 무의식적으로 말투가 거친 것은 과거 아버지로부터 배반당하고 버려진 상처가 제대로 처리되지 못한 까닭이라는 결론을 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로저스는 보겔이 겪은 고난과 상처에 대해 전혀 다른 시각을 제공한다. 자신이 망가진 인생이라고 생각하는 보겔에 대해서 로저스는 이렇게 답한다. “나는 당신이 망가진 인생이라 생각하지 않아요. 신념이 강한 사람이라 생각해요. 옳은 것과 틀린 것을 구분할 줄 아는 사람이죠. 아버지와의 관계가 당신이 그렇게 성장하는데 도움을 줬다는 걸 기억해봐요. 지금 당신이 있도록 당신을 도와준거에요.” 이것은 고난 가운데도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 인생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나온 말이며, 과거 트라우마에 사로잡히지 않고 현재의 삶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알프레드 아들러(Alfred Adler) 심리학의 일부를 반영한다고도 볼 수 있다. 프로이트의 어깨 위에 앉았다는 평판을 받은 심리학자 아들러는 자신의 스승인 프로이트의 심리학을 뒤엎고 오늘날 긍정심리학의 출발이 된 개인심리학을 일으킨 사람이다. 그는 과거의 트라우마가 현재의 불행을 일으킨다는 프로이트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았다. 오히려 과거 경험(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안에서 목적에 맞는 수단을 찾아내는 것이 중요하고 경험에 부여한 의미에 따라 자신이 결정될 수 있다고 보았다. 아들러 심리학의 전부를 기독교 학문 안에서 받아들일 수는 없지만 그가 제시한 과거 경험에 대해서 의미를 부여한다고 했을 때 그것이 신앙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라면 그것은 사람을 온전케 하는 훌륭한 기독교 상담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좋은 이웃의 조건 영화 속에 나타난 프레드 로저스는 상처 입은 사람을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다. 정확히 말하자면 모든 사람이 특별하다고 믿기 때문에 자신의 삶에 들어 온 사람들을 향해 한사람 한사람 모두에게 집중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한다. 보겔이 로저스와의 첫 전화통화에서 놀란 것은 그가 전화하는 동안 자신을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사실이었다. 본인은 딴 짓하면서 전화를 받지만 로저스는 전화 한통화에도 상대방에게 집중하며 말 한마디를 놓치는 법이 없었다. 또한 보겔이 로저스의 스튜디어 촬영현장에서 본 것은 스탭들이 모두 기다리는 가운데서도 장애아동 앞에서 30분 씩이나 그와 마주하며 그의 느린 대답을 기다려주는 일이었다. 또한 그는 보겔과의 대화를 통해 자신이 프로그램 안에서 어린이들에게 죽음과 이혼 그리고 전쟁도 다룬다는 점을 언급한다. 어린이니까 고통의 문제를 회피시키는 것이 아니라 고통이 일으키는 감정에 휘말리지 않으면서 오히려 감정을 긍정적으로 다룰 수 있는 법을 아이들에게 가르친다는 사실을 밝혔다. 그는 대단히 뛰어난 기독교 교육자이며 상담가의 자질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결정적으로 이 영화는 기독교인이 세상 사람들과 다르게 과거를 돌아보며 현재의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훌륭한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부연설명을 하기 위해서는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이면서 보겔의 삶의 전환점이 되는 계기가 된 명장면을 소환하지 않을 수 없다. 로저스는 식당에서 보겔과 마주하며 1분 동안 지금 자신이 있기까지 우리를 사랑해 준 모든 사람을 떠올려 볼 것을 요청한다. 영화는 1분 동안 적막에 휩싸인 식당 내부와 마치 식당 안의 손님 모두가 로저스의 제안에 동참하며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는 분위기를 연출한다. 그리고 보겔은 미소를 짓는다. 치유가 일어나고 감사가 마음을 채우며 기쁨이 온 몸을 휘감는 순간이다. 보겔은 좋은 이웃을 만났다. 로저스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아버지를 미워하며 과거의 상처에 매달려 분노 속에서 일평생을 살았을지도 모른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들어 누가 이웃인지에 대해서(눅10:29-36) 말씀하셨다. 상처입은 사람을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는 이웃. 누구든 프레드 로저스 목사를 이웃으로 마주한다면 그날은 분명 아름다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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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6-24
  • [영화] 서울국제사랑영화제의 기적이야기
    우리가 기독교영화제를 기대하는 이유 코로나19의 난국 속에서 영화관은 관객의 발길이 끊긴 채 적막 속에 잠겼고 개봉을 앞둔 영화들은 상영 일정을 늦췄다. 새 영화를 보기 힘든 상황에서 관객들은 영화관 나들이 일정을 다시 미루어 버렸다. 영화관은 관객이 없으니 새 영화를 걸 엄두를 내지 못하고 관객은 새 영화가 없으니 영화관에 갈 생각이 없다. 한국 영화의 악순환은 이렇게 계속되는 중이다. 해마다 장미꽃 내음과 함께 시작했던 전주국제영화제도 코로나19의 여파를 비껴갈 수는 없었다. 개막은 예정대로 5월 28일에 하지만 온라인 상영을 통해 9월 20일까지 4개월간 개최하는 비대면영화제로 가닥을 잡았다. 한 해에 많게는 100개가 넘는 영화제가 열리는 영화제의 나라 대한민국에서 앞으로는 사람들로 북적이는 영화제를 기대하기란 쉽지 않을 전망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기독교영화제인 서울국제사랑영화제는 오프라인 개최를 결정했다. 6월 2일에서 7일까지 6일간 이화여대 ECC 삼성홀에서 개막식을 시작으로 대부분의 영화들은 기독교영화전문 상영관인 필름포럼에서 상영될 계획이다. 영화 상영 시 관람객 수를 예년 대비 3분의 1 수준으로 제한하고, 축하 연회나 영화인의 밤 등의 부대행사들을 열지 않기로 결정한 것은 바이러스 감염 전파의 위험요인을 줄이기 위한 방책으로 보인다. 코로나19 확진자 수가 안정된 상태에 이르고 생활방역으로 전환된 국면이 영화제의 오프라인 개최를 가능하게 만들었지만, 무엇보다도 한국교회가 온라인과 오프라인 예배를 진행하면서 보여준 신앙과 방역 모두를 함께 병행할 수 있다는 자신감 또한 기독교영화제를 가능케 만든 요인이라 할 수 있다. 배혜화 집행위원장은 기자간담회에서 “한 해도 영화제 준비가 쉬웠던 적이 없지만 이번 해에는 특히 어려웠다”고 고백하며, 정상적인 영화제 진행이 어려워진 만큼 이번 계기로 영화를 필요로 하는 이들 곁에 영화제가 직접 찾아갈 수 있도록 영화제의 방향 전환을 모색하고 있다고 밝혔다. 배위원장의 이 같은 언급은 코로나19의 어려움 가운데서도 열리는 기독교영화제가 앞으로 어떻게 교회와 사회를 향해 문화선교를 펼쳐야 하는가에 대한 숙제를 보여주고 있는 것에 다름 아니다. 적은 인원과 늘 부족한 예산, 그리고 코로나로 인해 쉽게 어울릴 수 없는 환경은 영화제를 직업으로 삼고 있지 않다면 포기하고 싶은 마음을 일으키지만, 개신교 인구가 천만 명에 가깝고 세계에서 영화를 가장 많이 보는 나라에서 기독교영화 한 번 제대로 볼 수 없는 문화를 만들 수는 없는 노릇이라 그 고민은 가슴에 와닿는다. 이것은 기적이다. 모든 것이 열약한 상태에서 서울국제사랑영화제란 이름으로 17년 동안 한국기독교영화의 구심점 역할을 해왔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이 간섭하신 기적이 아니라면 무엇이 기적이랴! 서울국제사랑영화제는 기적을 목격하는 현장이다. 영화를 통해 하나님이 인생을 어루만져주실 때 일어나는 기적들을 지켜볼 수 있는가 하면, 한국교회의 무관심 속에서도 오직 문화선교의 일념으로 기독교영화를 제작하고 배급하며 하나라도 더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려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음은 기독교영화제를 기다리는 이유이다. 상업주의와 선정성이 판치는 한국영화계에서 살아남은 기독교 영화인들 또한 기적의 생환자들이 아닐 수 없다. 기독교 가족영화라는 장르의 구조 2020년 서울국제사랑영화제에서 주목하는 영화 가운데 하나는 배우 출신의 여성 감독 록산 도슨(Roxann Dawson)이 연출한 <기적의 소년>이다. 원제목 ‘Breakthrough’가 ‘돌파’라는 뜻을 가진 것처럼 영화는 세상의 판단과 상관없이 신앙으로 죽음의 위기를 정면돌파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순도 100%의 기독교 영화로 기독교영화제가 아니라면 만나기 어려운 하나님이 베푸신 기적과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신앙을 여과 없이 다루고 있다. 14살 존 스미스는 농구에 몰두하는 여느 중학생과 다름없지만 어렸을 때 과테말라에서 입양된 이력을 숨기며 학창생활을 보내고 있다. 백인 엄마 조이스(크리시 메츠)의 관심과 사랑을 듬뿍 받고 있지만 이를 간섭으로 여기는 전형적인 십대 반항기가 한창인 나이다. 존은 어느 날 친구들과 함께 얼음이 언 호수에서 장난치던 중 얼음이 깨지는 바람에 차가운 물에 빠진 채 의식을 잃고 죽음의 위기에 직면하고 만다. 영화는 기독교 신앙에 바탕을 둔 가족영화의 전형적인 면모를 갖추고 있다. 그것은 7가지의 구조를 갖고 있는데, (1)신앙생활에 충실한 단란한 가족이라는 배경 (2)가족의 구성원에게 찾아온 인생의 위기 (3)가족의 간절한 기도와 수고 (4)교회 공동체와 이웃의 합력하는 모습 (5)소생의 기적 (6)본인과 주변인의 신앙성장 혹은 가치관의 변화 (7)하나님이 베푸신 기적에 대한 감사와 찬양으로 이루어져 있다. 교회에서 주인공 가족이 함께 예배를 드리고 식탁 위에서 손을 잡고 식사기도를 하며 일상의 즐거움을 누리는 모습은 전형적인 미국 크리스천 가정을 묘사할 때 흔히 사용하는 방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일반적인 기독교 가족 영화와 다른 점은 보다 사실적인 접근을 시도하는데 있다. 즉 신앙생활을 잘하는 가정이라면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 같지만 사실 소소한 갈등과 문제를 안고 있는 경우가 있지 않은가! 이 가정의 엄마와 아들 존에게는 각각 외적인 문제들이 있다. 존은 자신이 과테말라에 선교여행을 온 지금의 엄마로부터 입양되었다는 사실이 학교에 알려지는 것을 원치 않는다. 학교 수업시간에 가족력을 얘기하는 숙제를 일부러 하지 않으며 농구경기에서도 동료와 협력하기 보다는 개인플레이에 집중하는 독단적인 면모를 보이며 이 때문에 코치로부터 경고를 받기도 한다. 엄마 조이스는 누구보다도 신앙적인 열심을 보이지만 담임 목사인 제인슨 목사(토퍼 그레이스)의 외모나 예배 스타일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있다. 신세대들의 시각에 맞췄다고는 하지만 헤어스타일은 자유분방하고 예배시간에도 청바지 차림에 운동화를 신은 채 바다에 앉아 얘기하는 등 전통적인 설교자와는 거리가 먼 담임목사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 이러한 작은 갈등은 큰 갈등 즉 존이 의식불명의 상태에 이르렀을 때 이를 대하는 존의 학교 친구들과 제이슨 목사의 참 목회자로서의 애정 깊은 태도를 통해 해소되지만, 기독교영화가 은혜라는 이름으로 문제를 넘기지 않고 정확히 갈등의 핵심을 도출시키며 서로 간의 이해를 촉구하는 장면을 삽입한 일은 매우 현실적인 접근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일이다. 기적은 우리 곁에 영화는 물에 빠진 아이가 의식불명의 상태에 이르고 의학적으로 소생가능성이 희박한 상태에서 기도했더니 갑자기 깨어나더라 하는 단순하고 천편일률적인 간증 식의 이야기를 하기보다는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나는 과정에 집중하고 있다. 이것은 마치 ‘오병이어의 사건’(요6:1-15)에서 기적이 일어나기 전에 어떠한 일들이 있었는지를 살펴보는 일에 비유할 수 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모여들었지만 굶주려 있는 군중들의 상황과 이들을 먹이기 위해서는 어떠한 합리적인 대안이 없는 현실, 그리고 한 어린이가 주님께 바친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의 소박한 음식은 모두 기적이 갖는 의미를 형성하는데 필요한 사전 과정들인 셈이다. 마찬가지로 영화는 주인공에게 기적이 일어나기 전의 일들을 때로는 복선을 그리고 때로는 기도의 직접적인 언급을 통해 기적의 의미를 전달하고 있다. 첫째는 기적은 신앙이 없는 사람들을 위해 하나님 존재를 인식시키는 충격적인 사건임을 보여준다. 존을 구하기 위해 물속으로 뛰어든 소방관 토미 샤인(마이클 콜터)은 아무리 애를 써도 존을 찾을 수 없는 상황에서 포기하려던 순간 갑자기 ‘돌아가라!’는 음성을 듣고 존을 건져낸 일화를 고백한다. 구조 당시에는 소방대장의 소리인 줄 알았던 그는 자신만이 그 소리를 들었다는 사실을 알고는 거룩한 충격에 빠져버린다. 그는 구조 당시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이 아니었지만 영화 끝부분에서 존과 얘기하는 장면을 통해 그 음성의 주인공이 하나님이라는 확신을 가진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둘째는 위기의 상황에서 기적은 기도 가운데 일어남을 영화는 매우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 심폐소생술이 실패하고 의사는 아들과 작별의 인사를 나눌 것을 권유받은 상황에서 존의 엄마 조이스는 하나님께 온 힘을 다해 울부짖는 기도를 올린다. “성령님이시여, 지금 당신이 필요합니다. 존을 살려주세요. 주님, 제발 이러지 마세요. 제 아들을 구원할 성령님을 보내주세요. 제발요!” 온 병원에 울릴만큼 뼈 속 깊은 곳에서부터 울려 나오는 사랑과 믿음의 기도는 이 영화의 명장면으로 남아있다. 어머니 역할을 맡은 크리스 메츠(Chrissy Metz)는 100킬로가 훨씬 넘는 거구의 몸을 이끌고 혼신의 연기를 펼치고 있음을 관객들은 몸으로 느낄 수 있다. 그녀가 금년 92회 아카데미상 시상식에서 바로 이 영화의 주제곡인 “I'm Standing With You”를 불러 영화의 감동을 다시 한번 세상에 전한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었다. 셋째는 믿음으로 함께 연합할 때 일어나는 기적은 당사자를 포함 주변의 사람들을 변화시킨다. 존은 깨어난 후 자신을 구조한 소방관 토미로부터 “하나님이 있다면 널 위한 계획이 뭔지 몰라도 엄청 특별할 거야”란 말을 듣는다. 기적의 당사자가 자신에게 일어난 기적을 납득 하기 시작한 시점이다. 그는 농구팀에서 독불장군 슈터가 아니라 어시스트를 할 줄하는 협력자로 변신한다. 조이스 역시 밤을 새워 침상을 지켜주며 기도해 준 제이슨 목사를 이해하고 그와 격의 없는 관계로 변화한다. 무엇보다도 이 영화는 기적이란 여러 모양으로 돕는 손길의 참여 가운데 일어나는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사건임을 묘사하고 있다. 오병이어의 기적이 어린이의 작은 손으로부터 시작된 것 같이 죽어가는 생명을 살리는 기적이 있기까지 수고한 작은 손길들이 적지 않았음을 영화는 결코 놓치고 있지 않다. 제이슨 목사는 예배시간을 통해 기적에 동참해준 사람들을 호명하며 일으켜 세운다. 그런데 소방대원들과 병원관계자들만 일어난 것이 아니라 교회에서 혹은 집에서 기도한 사람을 일으켜 세웠을 때 예배당 안에 앉아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모두가 기적에 동참한 사람들이었다. 전형적인 할리우드식 엔딩이지만 괜찮다. 비록 열두 광주리만큼은 아니더라도 눈물은 객석을 적시기에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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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5-27
  • [영화] 영화 ‘부활’이 코로나19의 난국 속에서 갖는 의미
    고난의 계절을 맞이한 영화 코로나19의 난국 속에서 새로운 영화나 관객 모두 자취를 감추었다. 밀폐된 실내일수록 코로나19의 전파력이 위력을 발휘한다는 전문가의 진단은 영화관 좌석을 배정할 때 사회적 거리를 유지할 만큼 충분히 간격을 두고 객석을 지정했음에도 불구하고 관객을 모으는데 실패했다. 영화진흥위원회 통합전산망 집계에 따르면 전국 극장을 통 틀어 1일 관객 수는 2만 명대로 떨어지며 2004년 통합전산망 집계를 시작한 이후 역대 하루 최저치를 기록했다. 전국 513개 극장에 3,079개의 스크린이 있는 것을 생각하면 영화 1편을 하루 종일 틀어도 관객은 10명도 채 들지 않았다는 뜻이 된다. 아니나 다를까. CGV는 전국 직영점의 32%에 해당하는 35개 극장(전체 108곳) 영업을 임시 중단하고 문을 여는 극장조차도 일부 목 좋은 곳을 제외 하면 하루에 세 차례 밖에 영화를 틀지 않는 스크린 컷 오프(Screen cut off)를 실시하기 시작했다. 더 큰 문제는 코로나19 난국이 장기간 계속되면서 한국영화 산업계 전반에 장기간 미칠 영향이다. 지난 3월 25일 영화제작가협회를 비롯한 11개의 영화직능단체와 롯데시네마를 비롯한 멀티플렉스 영화관 사업주들은 ‘코로나19로 영화산업 붕괴 위기, 정부의 지원이 절실하다’는 제목의 성명을 발표했다. 영화제작단체들과 멀티플렉스 영화관 사업주들은 오랫동안 특정영화의 스크린 독과점 문제로 갈등을 빚어왔던 사이였다. 그런데 이번만큼은 뜻을 같이했다. 왜냐하면 한국 영화산업 전체 매출 가운데 영화관이 차지하는 비율이 약 80%에 이르는 상황에서 영화관에 관객이 없다면 영화산업은 몰락의 위기에 처할 수밖에 없음을 모두 잘 알고 있는 까닭이다. 영화관의 위기는 소비산업 전반이 위험한 상태에 처했음을 뜻하는 일이기도 하다. 멀티플렉스 영화관은 쇼핑을 촉진시키는 역할을 해왔기 때문이다. 즉 영화를 보러 온 관객들이 극장 주변의 식당이나 카페, 상점 등을 방문하여 자연스러운 소비활동이 이루어지는 까닭에 영화관의 위기는 지역 경제와 소상인들의 생존에도 큰 타격이 될 수밖에 없다. 1930년대 미국의 대공황시절에 호황을 누린 곳은 영화관 밖에 없었다. 가난과 실업이라는 현실적인 고통을 회피하기 위해 사람들은 영화관으로 몰려들었다. 그 당시 개봉된 영화들 속에는 실직자나 가난한 노동자와 같은 빈곤의 현실은 찾아볼 수 없었다. 대신 멋진 저택과 고급 승용차, 그리고 화려한 파티를 즐기는 상류층의 모습이 비춰졌다. 경제적인 곤란에 처한 사람들은 영화관 속에서나마 현실에서 벗어나 꿈을 꾸며 위로 받기를 원했던 것이다. 그런데 코로나 바이러스는 잠시나마 꿈을 꾸고 위로받을 수 있는 영화관마저 문 닫게 만들어버렸다. 사회적 거리를 통해 바이러스를 통제하려는 보건당국의 지침 속에서, 사람들은 집 밖으로 나오지 않고 있다. 문화 소비가 끊긴 현실을 바라보며 한국인들은 어디서 위로를 받아야 할까? 부활을 기다리는 기독교영화 부활절 전후로 개봉을 앞 둔 기독교영화는 네 편이 있었다. 지난 해 영화관을 감동의 눈물로 흠뻑 적시었던 <교회오빠>는 영화 검색어 순위 1위에 오르며 재개봉 날짜를 확정 지었지만 끝내 상영이 무산되고 말았다. 지난해 크리스마스 특집 다큐멘터리로 방영한 KBS의 <걸레성자 손정도>와 MBC의 <부활>도 극장판으로 확장하여 부활절 개봉을 준비하고 있었지만 이 역시 코로나19가 지나가기만을 기다려야 하는 형편이 되고 말았다. 2019년 국제사랑영화제 개막작으로 기대를 모았던 외국영화 <하나님과의 인터뷰>(An Interview with God, 2018)는 지난해 9월부터 개봉일 잡지 못한 채 표류하다 이번 부활절을 예약했지만 극장에서 관객을 만날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상황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특히 <순종>과 <제자, 옥한흠>을 연출한 김상철 감독의 <부활>은 제목이 뜻하는 대로 기독교 신앙의 중심을 잃은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 부활의 신앙을 나누고자 기획 때부터 부활절을 기다려 온 영화였다. <부활>은 2019년 12월 25일 새벽 1시에 MBC의 성탄특집으로 방영되어 동시간대의 평균 시청률의 10배가 넘는 대기록을 세운바 있었다. 제작진과 방송국 모두 크리스마스의 기적(?)을 경험했던 터라 이번 부활절에 거는 기대는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미스코리아 출신의 배우 이성혜와 김상철 감독의 페르소나 같은 존재인 배우 권오중, 그리고 췌장암 투병을 통해 죽음이 만만치 않은 대상임을 경험했던 이용규 선교사 등 세 사람이 인도의 바라나시(Varbnasi)를 시작으로 죽음의 순례를 떠나 이탈리아 로마의 카타콤( (catacomb)에서 왜 부활이 인생의 정답인지를 보여주었다. 바라나시는 힌두교와 불교 그리고 이슬람의 역사가 한 곳에 집중된 보기 드문 종교성지일 뿐만 아니라 지금도 갠지스강가에서는 시신을 태우며 환생을 기대하는 힌두교인들의 장례식을 볼 수 있어서 죽음에 대한 탐구를 하기에 매우 흥미로운 장소임에 분명하다. 이곳에서 기독교의 부활은 명확히 보이기 시작한다. 세계관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같은 세계관을 가진 사람끼리 모여 있을 때는 자신을 움직이는 세계관이 무엇인지 잘 드러나지 않지만, 다른 세계관을 가진 사람들 옆에 갔을 때는 분명하게 보인다는 사실이다. 왜 <부활>의 촬영장소가 예루살렘이 아니라 인도의 바라나시에서 시작했는지를 가늠할 수 있는 대목이다. 다른 세계관 속에 비춰진 죽음에 대한 이해를 뒤로하고 영화는 로마의 카타콤에서 죽음에 대한 해답을 찾는다. 로마시대 순교자들의 시신을 안치했던 지하무덤이자 박해를 피해 숨은 기독교인들의 예배장소이기도 했던 카타콤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 여러 층으로 수 킬로미터의 미로처럼 얽힌 통로를 파고 수 만 명의 그리스도를 따르던 신앙인들이 부활을 기다렸던 거룩한 장소는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이 말로만 얘기했던 예수님의 부활이 역사적인 사실일 뿐만 아니라 신앙적으로 어떻게 새롭게 이해되어져야 하는지를 가르쳐준다. 카타콤에 누인 사람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사람들을 목격한 사람들이며 또한 그들을 목격한 사람들은 우리가 그들의 목격자가 되어 살아있는 부활의 신앙이 살아나기를 기대하고 있다. 영화 <부활>의 가장 뛰어난 캐스팅은 미스코리아 출신의 이성혜와 비교문화학자인 이어령 교수를 등장시킨 일이다. 한국 최고의 미모를 자랑하는 여배우와 한국최고의 지성인이 생각하는 죽음과 부활이란 생각만 해도 그 조합에서 어떤 말들이 흘러나올지 기대감을 감출 수 없게 만든다. 이성혜는 “언젠가 나에게도 죽음이 찾아 올 텐데. 나는 어떤 마음으로 죽음 앞에 서있을까? 그러면 나는 어떻게 살아가야 될 것인가?”를 묻는다. 이어령은 죽음에 대한 호기심어린 눈망울 반짝이며 “나에게도 이 상흔이 없다. 상처는 있을지 몰라요”란 말로 부활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죽음 앞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답하고 있다. 예수님의 몸에 새겨진 십자가의 상흔, 스티그마(Stigma).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한 흔적 없이 세상풍파에 찌든 상처를 내밀며 기복신앙에 몰두하는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 남긴 노교수의 일침이 꼰대의 발언이 아닌 선배의 애정 깊은 충고로 다가오는 것은 그가 지금 아무런 의학적 처치 없이 죽음의 순례 길을 눈앞에 두고 있기 때문이리라. 부활신앙을 가진 사람 앞에 놓인 죽음의 길은 어떤 모양으로 인식되고 있는지 이 영화의 개봉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궁금하기만 하다. 새로운 플랫폼이 필요한 기독교영화 인터넷을 통한 온라인 서비스는 코로나19의 위기 상황에서 영화를 살리는 구원투수로 등장했다. 역사상 처음으로 온라인으로 주일 예배를 드리는 교회들이 늘어나기 시작했고, 대학에 이어서 초중고 학생들도 비대면 수업을 진행하기에 이르렀다. 코로나19에 대항하기 위한 사회적 격리와 사회적 거리를 두려는 문화 속에서도 한국인들이 비교적 잘 버텨내고 있는 것은 인터넷과 스마트폰으로도 얼마든지 소비활동이 가능한 초연결사회(超連結社會, hyper-connected society)를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백화점에서 동네 재래시장에 이르기까지 인터넷 주문이 일상화되고 신선식품 마저도 새벽배송이 이루어져 아침식탁에 오르는 초연결시대를 살아가는 한국의 소비자들은 비대면 소비문화를 살아가는데 별 어려움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 영화와 같은 문화를 소비하는 일 또한 마찬가지다. 미국의 유튜브나 넷플릭스, 그리고 디즈니와 애플TV 같은 인터넷으로 영화를 보는 스트리밍 서비스는 코로나19가 창궐할수록 찾는 사람들이 증가하여 바이러스만큼이나 급속히 확산되고 있다. 글로벌빅데이터연구소가 지난 2월 15일부터 25일까지 넷플릭스의 온라인 정보량을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지난 2월 22일 3,717건이었던 넷플릭스 정보량이 25일에는 5,070건으로 36.4%나 급증한 것으로 나타났다. 매일 3천 건 후반 대를 유지하던 일별 정보량은 코로나19 확진 환자가 증가하면서 동시에 폭발적인 소비가 일어난 것이다. 특히 중국을 제치고 코로나19 확진자수가 급속히 증가한 유럽의 경우 집밖으로 나오지 못한 사람들은 온라인 영상서비스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한꺼번에 접속자수가 늘어나자 넷플릭스는 일단 유럽에 한해서 인터넷 과부하로 인해 시스템이 다운될 것을 염려한 끝에 한 달간 화질을 낮추기로 결정했다. 최고의 영상을 제공한다는 자부심을 가진 넷플릭스가 스스로 서비스 품질을 저하시키는 전략을 쓸 만큼 세계인이 영화를 보는 방식에 큰 변화가 있음을 감지하고 있는 것이다. 즉 극장에 가지 않더라도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는 문화에 사람들은 점점 익숙해지고 있는 중이다. 이것은 기독교 영화에도 플랫폼의 변화가 필요로 함을 의미하는 일이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문화는 콘텐츠 싸움이라는 얘기를 쉽게 들을 수 있었다. 얼마나 양질의 내용이 들어있는가에 따라서 소비자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아무리 좋은 콘텐츠라 하더라도 지금처럼 집 밖으로 나가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 벌어진다면 결국 실내에서 대체할 수 있는 기술을 찾기 마련이다. 부활을 앞두고 정말 좋은 기독교영화들이 제작되었지만 극장에서 볼 수 없는 현실에서 우리는 플랫폼의 변화를 통해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야할 때이다. 한국의 젊은 기독교인들이 한국형 좀비영화 <킹덤>시리즈에 보인 관심의 십분의 일만 보인다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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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4-10
  • [영화] 누구의 신발 끈을 묶어줄 것인가?
    유대인의 영화사용법 유대인들은 영화사용법에 능통하다. 영화사 초창기부터 유대인들이 할리우드의 메이저 영화사들을 장악할 수 있었던 이유는 청교도사상을 갖고 있었던 기독교인들이 영화에 대한 관심을 내려놓은 틈새를 이용 영화사들을 설립했기 때문이었다. 미국의 청교도들은 영화를 시간과 돈을 낭비하게 할 뿐 신앙에 도움이 되지 않는 세속적인 문화로 여긴 반면 유대인들은 새로운 대중의 오락거리로 등장한 영화들 속에서 일치감치 돈 냄새를 맡았었다. 획기적인 오락거리인 영화에 대한 호기심으로 인해 대중들은 지갑을 열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람들의 눈과 귀를 사로잡을 수 있는 이야기는 무궁무진했고 적어도 TV가 등장하기 전까지 사람의 시각과 청각을 동시에 자극할 수 있는 매체는 영화가 유일했으니 말이다. 할리우드는 영화공장으로 불리며 영화가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미국경제의 버팀목으로 자리 잡을 수 있게 된 것은 유대인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영화에 대한 유대인의 천재성은 영화의 상업성 뒤에 감춰진 지식의 전달력과 설득력과 같은 영화의 영향력을 일찌감치 간파한데서도 찾을 수 있다. 일찍이 유대인들은 현대사의 변곡점을 이룬 두 가지 큰 사건에 연루되면서 영화의 영향력을 크게 깨달았다. 하나는 러시아혁명으로서 혁명을 성공시킨 레닌 옆에는 영화의 혁명가로 불렸던 세르게이 미하일 에이젠슈쩨인(Sergei M. Eisenstein)이 있었다. 교육을 받은 일이 없었던 러시아 농민과 노동자들 그리고 이들 보다 더 낮은 위치에 있었던 러시아의 유대인들은 에이젠슈쩨인의 영화를 통해 레닌의 사회주의 혁명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인식하며 공감할 수 있었다. 또 하나는 2차 세계대전으로 유대인 학살의 중심에 서있는 히틀러 또한 자신의 게르만 민족주의를 선전하는데 영화를 활용했다는 사실을 유대인들은 피해당사자의 입장에서 지켜볼 수 있었다. 히틀러에 대한 영웅적인 숭배를 일으키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던 당시의 선전영화들은 ‘히틀러의 연인’이란 별명을 가졌던 영화감독 레니 리펜슈탈(Leni Riefenstahl)이 히틀러를 밀착 수행하며 촬영한 결과였다. 역사적인 이 두 사건을 경험한 유대인들이 영화로부터 얻은 지혜는 영화야 말로 세상을 움직이는 힘이 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억울함을 풀어주는 최고의 변호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예루살렘 멸망이후 2천년 동안 세계를 떠돌며 냉대와 핍박의 세월을 살아 온 유대인들이 민족의 생존을 위해 선택한 발명품은 그들의 말을 온 세상에 들려줄 수 있는 꿈의 매체 영화였다. 밀레니얼 세대를 위한 홀로코스트 영화 2차 대전 중에 일어난 유대인 대학살의 비극을 다룬 영화들은 유대인의 핍박받는 역사를 가르치는 중요한 교육도구의 역할을 해왔다. 유대인 출신의 영화감독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화 <쉰들러 리스트>(1993)처럼 역사적 사실에 기초하여 유대인 대학살의 현장을 실감 있게 묘사함으로써 2차 대전의 실상을 경험하지 못한 세대에게 홀로코스트(Holocaust)가 실재 일어난 일이란 점과 아울러 학살당한 유대인에 대한 긍휼의 마음을 전세계인이 공유하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이제 <쉰들러 리스트>로는 부족한 실정이다.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극우주의와 이에 따른 인종주의적 행태는 반유대주의라는 망령의 얼굴을 다시 한 번 세상에 내밀게 만들었다. 2018년 미국 피츠버그의 유대교 회당에서는 총기난사 사건이 일어나 11명이 사망했는가하면, 이탈리아 로마의 정치사회경제연구소(EURISPES)가 펴낸 ‘이탈리아 2020 보고서’에 따르면 이탈리아 국민의 15.6%는 홀로코스트가 실재 일어나지 않았다고 여기는 것으로 집계됐다. 이는 2004년 같은 조사(2.7%) 때보다 6배로 급증한 수치다. 밀레니얼 세대들의 홀로코스트에 대한 인식은 더욱 희박하다. 2019년 1월, 세계 언론은 캐나다 젊은층의 62%가 홀로코스트에서 600만 명의 유대인이 학살당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는 통계를 보도하기도 했다. 유대인들이 자신의 핍박받은 역사를 대중에게 알려왔던 영화전략에도 새로운 세대가 공감할 수 있도록 변화가 필요한 시기가 찾아왔음이 분명하다. 이 때 유대인이 택한 영화는 <조조 래빗>이었다. 폴리네시아계 유대인 타이카 와이티티 (Taika Waititi) 감독의 영화 <조조 래빗>은 봉준호 감독이 <기생충>으로 4관왕의 위업을 달성하는 92회 아카데미의 현장에서 작품상을 포함 6개 부문의 후보에 오른 끝에 각색상을 수상했다. 프랑스 최고의 권위 있는 문학상인 ‘메디치 상’ 후보에 오른 작품이었던 크리스틴 뢰넨스(Christine Leunens)의 소설 <갇힌 하늘>(Caging Skies)을 영화화 하는데 성공한 공로를 인정받으며 아카데미 최고의 영화 후보에도 올랐던 것이다. <조조 래빗>은 학살의 잔혹성을 보여주며 이에 따른 유대인의 비극을 알려왔던 이전의 홀로코스트류의 영화와는 접근방법을 달리 한다. 홀로코스트 현장을 보여주기 보다는 그것을 가능케 만든 대중의 심리와 문화를 풍자적인 기법으로 만들었다. 홀로코스트 현장을 부인하는 시대에는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시대적 배경과 문화 그리고 인간심리를 묘사하는 일이 오히려 설득력이 있다고 감독은 판단하고 있는 듯하다. 영화는 2차 대전 중 히틀러를 추종하는 소년단인 히틀러 유겐트(Hitler Jugend)의 일원으로 인정받고 싶어 하는 열 살 독일소년의 심리를 유머있게 묘사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아빠 없이 엄마와 단 둘이서 생활하는 열 살 소년 조조(로만 그리핀 데이비스)는 히틀러 유겐트의 일원이 되어 군사훈련을 받지만 토끼를 죽이지 못하는 바람에 겁쟁이로 낙인찍히고 오히려 ‘조조 래빗’이라 불리며 놀림을 받고 만다. 그러나 그의 정신세계는 철저히 히틀러를 추종하고 있고 소외된 조조 앞에는 상상 속 친구인 히틀러(타이카 와이티티)가 나타나 위로의 말과 더불어 히틀러가 주장하는 반유대주의 정신을 강화시키곤 한다. 어린 아이에게 군입이 입는 제복을 입고 히틀러 부대의 일원이 되었다는 소속감은 히틀러의 주장을 맹목적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정신체계의 기틀로 작용한다. 오른손을 번쩍 치켜 올리고 ‘하일 히틀러’를 수없이 외치며 거리를 쏘다니는 조조의 모습에는 온전한 지식과 판단에 이르지 못한 결과로 피해자이며 가해자가 될 수밖에 없었던 역사의 연약한 대중의 모습이 담겨있다. 그러던 어느 날 조조는 2층 벽장 속에 숨어 있던 유대인 소녀 엘사(토마신 맥켄지)를 발견하고 갈등에 휩싸인다. 나치 친위대에 고발할 생각도 하지만 엄마 로지(스칼렛 요한슨)가 뜻밖에도 그녀를 보호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엄마를 잃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협력적인 동거를 택하고 만다. 이 때 나치즘에 흠뻑 빠진 조조의 생각에 변화를 가져온 것은 어머니 로지와 유대인 소녀 엘사라는 두 여성이 보여준 애정과 친밀감이다. 이들은 가족 간의 유대감을 형성하며 조조를 조금씩 나치즘으로부터 벗어나게 만든다. 특히 게시타포의 급습 때문에 얼떨결에 조조의 누나로 신분이 바뀌어버린 엘사를 보호하려는 조조의 모습에는 유대인과 나치는 절대 친구가 될 수 없다는 고정관념으로부터 벗어나 성장하는 인간의 모습이 담겨있다. 양심과 상식을 짓누르는 허황된 행동에는 반드시 원인이 있기 마련이며 온전한 사랑은 변화의 핵심이란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닫게 한다. 현실적이며 보편적인 공감대를 형성하라 영화 <조조 래빗>은 나치즘에 몰입한 열 살 소년의 성장기를 다루고 있다. 유대인들 머리에는 뿔이 나있고 짐승처럼 꼬리가 있으며 박쥐처럼 거꾸로 매달려 잠을 잔다고 믿는 주인공 아이의 모습은 과거 히틀러 독재 시대에만 있었던 생각은 아니다. 자신의 부조리한 권력과 잘못된 신념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정치와 종교, 경제 가릴 것 없이 인간사회는 희생양을 필요로 했고 이를 위해 온갖 거짓을 꾸며내어 희생을 정당화시키곤 했다. 다시 말해서 <조조 래빗>은 나치즘에 희생당하는 유대인의 특수적 상황을 세계인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인 현실로 인식되게 만드는데 성공한 것이다. 이를 위해 영화는 코믹한 풍자를 내세워 거짓말하는 권력을 조롱함으로써 관객에게는 카타르시스를 선사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조조 래빗>이 어리석음과 사랑이 공존하는 주인공의 행동을 통해 인간 성장에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상징을 통해 보여주었다는 것은 이 영화가 대단히 잘 만든 작품임을 드러낸다. 그것은 구두끈을 묶는 장면의 반복과 변화를 통한 상징이다. 영화 초반부에서 조조는 자신의 손으로 구두끈도 매지 못하는 어린 아이의 모습을 보인다. 엄마는 아들의 구두끈을 정성스럽게 매어주며 사랑을 표현한다. 그렇다. 세상에는 스스로의 힘으로는 신발 끈을 매지 못하는 사람들이 존재하며 그들은 누군가에 의지해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들이 잘못된 권력과 거짓에 농락당하지 않도록 우리는 사랑의 끈을 매어줄 필요가 있다. 영화 후반부에 조조는 죽은 엄마의 구두끈을 묶어준다. 비밀리에 나치에 저항운동을 해왔던 엄마가 거리의 광장에서 처형당한 모습에 충격을 받은 조조는 뜻밖에도 엄마의 시신 곁으로 다가가 풀어진 엄마의 구두끈을 매어준다. 사랑의 환원인 동시에 조조가 엄마의 의지를 깨닫고 성장하는 순간임을 보여준다. 또 하나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조조는 벽장에 숨어 지내던 유대인 소녀 엘사에게 전쟁이 끝났음을 알리며 그녀를 세상 밖으로 데려가기 위해 뜻밖에도 엘사의 신발 끈을 묶어준다. 그녀와 교감하며 함께 세상으로 나갈 만큼 성숙한 주인공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묘사한 대목이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고 또한 제자들에게 서로 발을 씻어주는 것이 옳다(요13:14)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단순한 섬김의 모본을 보여주신 것뿐만 아니라 교감하고 성장하는 인간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나타내신 현실적이며 보편적인 사랑의 표현이다. 영화 속에서 구두끈을 묶는 손길도 이와 같다. 어리석고 연약한 어린 아이와 같은 행동양식으로 가득 찬 세상이 성장하고 변화될 수 있도록 사랑의 신발 끈을 묶어주는 일이 우리에게는 필요해 보인다.
    • 문화
    • 영화
    2020-02-25
  • [영화] 세상에 눈높이를 맞춘 교황이야기
    종교가 영화를 만드는 방식 장르에 있어서 종교영화로 분류될 수 있는 영화들은 교리와 역사(사건) 그리고 인물 이 세 가지에 초점을 맞춰 제작되어 왔다. 교리는 종교가 주장하는 가치관을 드러내며, 역사는 종교가 현실사회 속에서 어떻게 대응해 왔는지를 보여주고, 인물은 종교가 추구하는 이상을 드러낸다. 그러나 종교영화 속에서 이 세 가지는 균등하게 배분되기 보다는 혼재되기도 하며 영화에 따라서는 강조점이 달라지게 마련이다. 기독교영화를 예로 들자면 기독교변증영화의 성격을 갖고 있는 <신은 죽지 않았다>(2014)는 대학 신입생이 무신론자인 철학교수에 맞서 하나님의 존재를 설명한다는 점에서 ‘교리’에 초점을 맞춘 기독교영화다. 반면 애니메이션 <켈스의 비밀>(2009)은 9세기 무렵 수도원에서 제작된 아일랜드의 국보 ‘켈스의 서(The Book of Kells)’라는 이름의 성경 제작 과정을 서사적으로 그려냈다는 점에서 ‘기독교 역사’에 무게를 두고 있다. 그러나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를 다룬 <루터>(2003) 같은 기독교영화들은 ‘역사’와 ‘인물’ 모두에게 초점을 맞춘 ‘역사 속 인물’을 보여주었고 세실 드밀 감독의 예수의 생애를 그린 <왕중왕>(1927)이나 <십계>(1956) 같은 성서영화들은 대개 ‘역사’와 ‘인물’ 그리고 ‘교리’가 함께 스크린에 투영되어 총체적으로 기독교신앙의 면모를 드러내었다. 종교영화 가운데서 가장 최근에 제작된 <두 교황>(The Two Popes, 2019)은 철저히 인물에 초점을 맞춘 가톨릭 영화다. 2005년 교황에 오른 베네딕토 16세와 그의 뒤를 이어 2013년 교황이 된 프란치스코 현 교황의 선출과정과 그들의 만남가운데서 일어났던 일화들을 모았다. 영화 제작 시점에서 살아있는 전·현직 교황 두 사람의 교황선출 과정을 하나의 이야기로 풀어냈을 뿐만 아니라 다큐멘터리가 아닌 드라마로 제작되어 배우가 현 교황 역을 맡아 밀도 높은 연기를 보여주었다는 점은 크게 화제가 되었다. 앤서니 홉킨스(베네딕토 16세 역)와 조너선 프라이스(프란치스코 교황 역)라는 관록 있는 세계적인 배우들을 내세워 교황 역을 맡긴 경우는 이번이 처음이다. 기독교 영화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역을 누가 맡느냐 하는 점은 배우의 평판과 이미지 등을 두루 고려하여 신중하게 선택하듯이 가톨릭교회의 수장인 교황 또한 아무에게나 맡길 수 없다는 점에서 이번 영화에서 교황 역을 맡은 배우들은 교황이 가진 권위와 영화가 추구하는 대중적 친밀감 모두에 부응할 수 있는 성공적인 캐스팅이라 할 수 있다. 다만 이 영화의 제작사가 넷플릭스(Netflix)란 사실은 관객의 호응도를 평가하는데 어렵게 만들었다. 넷플릭스의 영화들은 대부분 극장개봉이 아닌 스트리밍 서비스라는 새로운 플랫폼을 통해 인터넷으로 볼 수 있다. 즉 월 사용액을 지불한 넷플릭스 회원들이 TV나 컴퓨터 모니터 혹은 휴대폰으로 보는 방식을 택하고 있다. 그러나 영화의 제작비용이나 작품의 수준이 결코 극장상영용 영화들에 비해서 떨어지지 않으며 현 영화계에서 주목받는 연출자나 배우들이 대거 넷플릭스의 영화제작에 나서면서 넷플릭스의 신작영화들 가운데 주요영화들은 극장상영과 인터넷 상영이라는 두 가지 상영방식을 모두 택하고 있는 중이다. 이것은 인터넷 영화가 과연 전통적인 방식으로 제작 상영되는 영화들과 같을 수 없다는 전통을 고수하는 유수의 세계 영화제 관계자들의 반발을 무마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대중의 호기심을 보다 자극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2019년 12월 11일에 개봉한 <두 교황>의 공식 관객 수는 27,598명이다. 현 교황이 갖고 있는 대중적 인기에 비하면 결코 많은 수는 아니지만 넷플릭스를 통해 언제 어디서든 볼 수 있다는 인터넷 서비스의 장점은 이 영화의 대중적 영향력을 수치로 가늠하기 어렵게 만든다. ‘보여주고 싶은 교황’과 ‘보고 싶은 교황’ 종교영화의 연출 방법은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을 충분히 드러내는 것이 한 가지 방법이라면, 미처 알지 못했던 것을 터뜨리는 충격요법이 두 번째다. 두 방법 모두 영화의 흥행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기독교인들에게 익숙한 성경의 내용이나 기독교 문학작품의 영화화는 관객의 호기심을 떨어뜨릴 것 같지만 오히려 자신의 신앙과 경험을 재확인하고 학습하려는 의도를 가진 관객들이 적지 않은 까닭에 지금까지도 꾸준히 제작되고 있다. 사도 바울의 로마감옥 생활을 묘사한 <바울>(2018)이 27만 명이 넘는 기독교인 관객을 모아서 흥행에 성공했는가 하면 애니메이션 <천로역정:천국을 찾아서>(2019)는 무려 30만 명에 가까운 관객을 모아 역대 급 기독교영화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가톨릭 영화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두 교황>이 개봉되기 한 달 전 로마교황청이 직접 제작에 나선 다큐멘터리 <프란치스코 교황 : 맨 오브 히스 워드>(2018)가 한국의 극장에 상영되었다. 익히 잘 알려진 현 교황의 행적을 따라가며 교황의 육성이 담긴 메시지를 담은 영화지만 <두 교황> 보다 많은 39,138명의 관객을 모았다. 독일 영화의 거장 빔 벤더스 감독이 교황청의 의뢰를 받아 제작한 이 영화는 현 프란치스코 교황이 필리핀의 재해 현장과 지중해 난민캠프 등 가난과 고통이 있는 세계 곳곳을 다니며 메시지를 전하는 로드무비 형식으로 연출되었다. 고급 리무진 대신 소형 승용차를 타고 다니며 축구를 좋아하고 탱고를 즐기는 서민형의 소박한 교황의 이미지가 영화 속에는 고스란히 담겨 있다. 로마 교황청이 세계에 보여주고 싶은 교황의 모습인 셈이다. 그러나 <두 교황>은 신선한 충격을 관객에게 선사한다는 점에서 앞의 영화와는 다르다. 즉 세상이 보고 싶은 교황의 이야기를 보여주고 있다. 영화는 2005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죽음 때문에 세계 각국의 추기경들이 한자리에 모여 교황을 선출하는 선거를 일컫는 콘클라베(Conclave)로 시작한다. 빗장을 걸어 잠근 성시스티나 성당 안에서 교황 선출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우리는 말로만 들어왔을 뿐이다. 영화 또한 실제모습이 아닌 연출인 까닭에 콘클라베 전부를 보여주고 있지는 않지만 관객으로서는 보고 싶은 흥미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무엇보다도 2013년에 있었던 콘클라베는 종신직인 교황이 스스로 사퇴 후 진행되었다는 점에서 세상의 이목을 집중시켰었다. 새롭게 선출된 프란치스코 교황은 기독교 역사상 최초의 아메리카 대륙 출신 교황이면서, 최초의 예수회 출신이며, 또한 최초의 남반구 국가 출신이라는 ‘최초’의 수식어가 여럿 붙어있다. 영화는 이 최초를 가능하게 한 인물이 바로 전 교황이며 새로운 교황을 통해 새로운 시대에 부응하려는 바티칸의 의지가 담겨있음을 말하고 있다. 교황의 회개와 변화 <두 교황>은 전·현직 교황의 미묘한 갈등이 어떻게 창조적인 계승으로 이어지며 세계를 향한 변화의 발걸음으로 도약하는 지를 보여준다. 영화의 끝부분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이 되는 베르고글리오(조너선 프라이스)는 자신이 갖고 있는 아르헨티나의 추기경직을 사임하기 위해 교황 베네딕토 16세(앤서니 홉킨스)를 만난다. 베르고글리오는 어떻게든 교황의 사인을 받기 위해 서류를 내밀지만 베네딕토 16세는 오히려 자신의 사임 의사를 밝히며 베르고글리오에게 교황직을 권유하기에 이른다. “이런 난국이 있나. 내가 승낙해주지 않으면 당신은 교회에서 은퇴할 수 없고. 당신이 남기로 동의하지 않으면 난 사임할 수 없고.” 베네딕토 16세가 베르고글리오에게 교황이 되기를 권했던 이유는 그가 노쇠한 바람에 교황직을 수행할 만큼의 건강을 갖고 있지 않은 까닭도 있지만 교회는 변화가 필요하고 그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사람이 베르고글리오라는 확신 때문이었다. 베네딕토 16세는 보수적일 뿐만 아니라 오히려 교황의 전통을 강화시킨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낙태, 피임, 동성애 등에 대해 강하게 반대하고 있는 가톨릭교회의 전통적인 가르침을 고수해왔다. 현 프란치스코 교황 또한 가톨릭의 가르침을 따를 것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전 교황들과 다를 바 없지만 사랑과 긍휼이라는 자세를 취한다는 점에서는 분명 변화의 모습을 보여준다. 가장 지적인 수도단체인 예수회 소속이지만 가장 낮은 자리에서 가난한 자를 섬겼던 성프란치스코 성인의 이름을 딴 것은 현 교황이 과거와 다른 변화를 추구하고 있다는 예증인 셈이다. 또한 영화에서 두 교황이 서로에게 고해성사를 하는 모습은 관객들에게 큰 울림으로 다가오는 장면이기도 하다. 현 프란치스코 교황은 1970년대 아르헨티나의 군사독재정권이 국민과 교회를 탄압할 때 저항하지 않고 묵인했다는 비판을 받았었다. 영화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과거 문제가 된 사건을 흑백장면으로 처리하며 적지 않은 시간을 써가면서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교황은 무흠한 인물이 아니다. 그 역시 실수하고 때로는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입히며 살아온 과거가 있다. 그러나 교황은 회개했고 이를 영화를 통해 온 세상에 알리는 것에 주저하지 않았다. 그의 회개는 변화를 향한 첫걸음이었다. 갑자기 찾아온 교황 영화는 가톨릭의 홍보용으로만 볼 일이 아니다. 12억 명의 신자를 둔 가톨릭의 수장이 고백한 회개와 변화를 통해 현대인이 교회에 원하는 것이 무엇이며 그리스도인이 세상을 향해 가져야 할 자세가 무엇인지 정도는 알 필요가 있다. 영화가 사회를 비추는 거울과 같다는 사실은 새해에도 변함이 없음을 기억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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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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