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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칼럼]웃음과 미소로 행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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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웃는 사람이 건강한 사람이다. 건강하게 오래 살려면 자주 웃어야 한다. 웃으면 면역기능이 높아지고, 심장박동수가 2배로 늘어나며, 폐 속의 나쁜 공기가 신선한 공기로 빨리 바뀐다. 또 암과 세균을 처리하는 NK세포, 감마 인터페론, T세포, B세포 등이 증가한다. 스트레스는 면역체계를 무너뜨리지만, 웃음은 면역 체계를 증강시킨다. 웃음은 내장활동도 활성화시킨다.
배꼽 빠지게 웃는 웃음은 소화기능 향상과 무익한 균을 죽이는 치료 수단이 된다. 10분 동안 배꼽을 잡고 웃으면 30분 동안 힘차게 노를 젓는 것과 같은 내면의 운동효과가 있다.
슈바이처는 “우리 몸에는 완벽한 약국 하나가 있다. 그 약국에 만병통치약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웃음”이라고 했다. 우리 몸은 최고의 명약을 가지고 있다. 미국 루이빌 대학의 클리포드컨 교수는 “일부러 웃는 웃음도 자연스러운 웃음과 똑같은 효과를 낸다”고 한다. 억지로라도 웃으면 얼굴 근육과 내면의 주름이 펴지기에 10분을 크게 웃으면 2시간의 잠이 보상으로 주
어진다. 노먼 커즌즈는 “웃음은 유효기간이 없는 약이며 깊숙한 내면의 마사지”라고 했다. 버드란트 러셀이 ‘웃음은 세상의 약국에서 구할 수 없는 만병통치약’이라고 했다.
웃음은 전적으로 감성적인 뇌의 활동에 의한 것이다. 건강한 뇌와 몸을 가진 사람은 많이 웃는다. 뇌에 웃음회로가 있기 때문이다. 웃음은 15개의 안면 근육과 몸속에 있는 650개의 근육 가운데 203개를 움직이는 최고의 뇌 운동이다. 뇌는 우스운 소리만 들어도 웃을 준비를 한다. 인간의 뇌에는 모르핀에 버금가는 진통제, 마취제, 흥분제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엔도르핀이다. 이들은 상호 분자구조나 효과적인 면에서 거의 유사하다. 통증과 아픔을 견디게 하는 엔도르핀이 웃을 때 가장 많이 생성된다. 5분간 웃을 때 5백만 원 상당의 엔도르핀이 나온다.
박장대소를 하거나 허리가 끊어질 정도로 웃으면 통증이 찾아온다. 그런데 그 아픔은 결코 기분 나쁜 통증이 아니다. 아주 기분이 좋은 통증이며 매일 맛보고 싶은 통증이다. 실컷 웃고 나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눈물이 날 만큼 웃고 나면 아픔, 걱정, 슬픔이 사라진다. 삶의 문제는 그대로 있는데 마음의 상태가 달라진 것이다. 분노의 기저인 공포 좌절 절망 공포 고뇌는
암의 발생과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다. 반대로 웃음의 기저인 긍정 의욕, 희망, 환희 감격 애정은 치유, 건강, 활력을 증진시킨다. 노먼 커즌즈에 의하면, 지구상에 의학적으로 증명된 질병은 26가지다. 우리들이 가진 인체에는 이러한 질병들에 대한 자연치유적인 메카니즘이 있다. 이 메카니즘이 가장 활력적으로 작용할 때가 바로 웃을 때라는 것이다.
‘일소일소 일노일로, 소문만복래’처럼 행복의 기준 중에 하나가 웃음이다. “웃음이 넘친다”라는 말은 곧 행복한 삶을 영위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웃음과 행복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사람은 평생 50만 번 이상 웃는다. 하루 동안 성인은 8번, 어린이는 400번 정도 웃는다. 성인이 될수록 웃음은 줄어들고 행복은 감소한다. 웃음은 강한 전염성을 가지고 있다. 인간은 지구상
에서 유일하게 무리를 지어 웃는 동물이다. 나의 웃음이 타인을, 타인의 웃음이 나를 행복하게 한다. 1988년 3월 미국 캘리포니아 대학의 이차크 프리트 박사는 우리 몸속에 있는 웃음보를 발견했다. 이곳에서 웃음과 함께 유익한 호르몬 21가지를 방출한다. 따라서 웃음은 행복을 만드는 최고의 명약이며, 아름다운 얼굴을 만드는 최고의 화장품이다. 힘차게 웃으면서 하
루를 시작하면 활기차고 행복한 하루가 펼쳐진다. 행복하기에 웃은 것이 아니라 웃으니까 행복해지는 것이다. 웃음이 행복의 명약이라면 미소는 모두를 행복하게 하는 세상에 가장 아름다운 꽃이다. 2026년, 힘든 세상에서 웃음으로 건강하고 미소로 행복하길 소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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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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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규교수의 역사탐색]로저 윌리암스와 종교의 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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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의 자유는 우리 시대 화두가 되고 있다. 일반적으로 17세기 존 로크(1632-1704)가 종교의 자유를 말한 첫 인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이보다 앞서 초기 기독교 지도자들은 신교의 자유를 주장하고 관용을 요구한 바 있고, 17세기에도 존 로크보다 앞서 종교의 자유를 말한 이가 있었다. 그가 청교도 지도자였던 로저 윌리암스(Roger Williams, 1603-1683)였다. 우리 시대 그가 주목을 받는 것은 진정한 의미의 종교의 자유가 위협받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종교의 자유를 말할 때 이 말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니는데, 첫째는 신교(信敎)의 자유를 말한다. 신앙의 자유라는 말인데 어떤 종교를 선택하던지 선택하지 않을 수 있는 자유이고, 다른 하나는 종교행위의 자유인데, 내가 믿는바 종교적 요구를 실행할 수 있는 자유를 말한다. 전도나 선교, 주일학교 교육 등은 종교행위의 자유에 속한다. 이런 종교의 자유 문제를 가장 선명하게 제시하고 실행했던 인물이 로저 윌리암스였다.
1603년 12월 21일 영국 런던에서 출생한 로저 윌리암스는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신학과 고전 교육을 받고, 목사가 되었다. 처음에는 영국 국교회 목사로 활동하려고 했으나, 당시 교회 제도와 체제가 본래적 교회로부터에 이탈했다고 보아 청교도 신앙을 받아들이게 된다. 그는 청교도, 특히 분리파 청교도들의 교회가 보다 순수한 교회라고 여겼다. 그런데, 영국에서는 신앙의 자유를 누리기 어려운 현실이었고, 또 자신의 양심을 따라 믿고 말하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1631년 영국을 떠나 뉴 잉글랜드로 향했고, 매사추세츠만 식민지로 이주했다. 이곳은 청교도들이 성경적인 공동체를 세우기위해 건설한 식민지였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식민지 당국이 종교적 정통성을 강요하는 모습에 실망하여 갈등을 빚었다. 매사추세츠 식민지의 교회들은비록 영국을 떠나왔으나 여전히 영국국교회와 완전하게 단절되지 못한 상태였고 그것이 그에게는 불만이었다. 사실 로저 윌리암스는 완고하리만큼 분리주의적 성향이 깊은 인물이었기에 배타적 성향이 없지 않았다. 그는 본래 분리파 청교도였으나 침례교도로 전행했다. 그는 매사추세츠 식민지에서 두 가지 문제를 제기했다. 첫째는 교회와 국가의 분리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교회와 국가가 상호협력하여 하나의 기독교 사회를 만드는 것을 이상으로 여겼으나, 윌리암스는 교회와 국가가 한 몸처럼 엮이는 구조는 신앙의 본질을 훼손한다고 믿었고, 국가의 역할을 선명하게 제한했다. 어떤 종교, 어떤 예배, 어떤 교파에 속할 것인가의 문제는 국가가 간섭할 수 없는 영역으로 보았다. 두 번째는 토지문제에 의의를 제기했다. 영국인들이 왕의 특허권을 근거로 원주민의 땅을 무상으로 차지했는데, 윌리엄스는 원주민들에게 정당한 대가 없이 땅을 빼앗은 것은 불의라고 보았다. 그는 원주민들에 대한 정당한 보상을 주장했다.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볼 수 있지만 당시에는 정치-경제적인 문제가 포함된 민감한 문제였다. 이런 문제로 매사추세츠 정부는 1635년 10월 로저 윌리암스를 추방했다.
추방된 로저 위리암스는 원주민공동체와 교류하며 도움을 입었고, 원주민들에게 정당하게 땅을 매입하여 새로운 정착지를 건설했는데, 이곳이 바로 프로비던스(Providence)였다. 자신처럼 양심 때문에 고통받는 사람들, 기존 사회에서 밀려난 사람들을 위한 피난처가 세워졌다고 믿었다. 프로비던스는 후에 주변 지역과 함께 묶여 로드 아일랜드주로 발전했다. 그런데 프로비던스에서는 시민권(국가)과 종교는 엄격하게 분리되었고, 어떤 신앙, 어떤 종파에 속하든 속하지 않던 시민권을 누릴 수 있었고, 공공의 권리를 보장했다. 이런 ‘종교의 자유’는 당시 어떤 유럽 국가에서도 보기 힘든 것이었다. 로저 윌리암스가 말한 종교의 자유란 다음의 몇 가지로 말할 수 있는데, 첫째는 강제의 부재였다. 아무리 옳은 진리라고 할지라도 이를 강제해서는 안 된다고 믿었다. 둘째, 양심의 자유를 인정했다. 신학이니 사상이나 이념을 달리해도 그 개인의 양심을 인정하고 보호해야 한다고 믿었다. 셋째, 교회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국가와의 분리를 주장했다. 많은 이들은 국가가 교회를 도와주는 보호막이라고 여겼으나 윌리엄스는 국가가 교회를 도와줄 때 거기에는 언제나 숨겨진 의도가 있다고 보았다. 또 교회가 국가의 도움에 길들여지면 예언자적 선포를 불가능하게 된다고 보았다. 교회가 국가권력과 일정한 거리를 둘 때 순수하게 복음을 전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로저 윌리암스는 존 로크 보다 앞서 근대적 의미의 종교의 자유를 말하고 실행했던 선구자였다. 그의 사상은 존 로크와 같은 철학자에게, 그리고 토머스 제퍼슨 등 미국 건국 주역들이 종교의 자유를 헌법에 명시하는 데 영감을 주었다. 그가 도로를 만들 때 동물이 지나갈 수 있는 길을 만들어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던 첫 사람이었다. 17세기에 벌써 그런 주장을 했다는 점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현재 미국에서 일 년에 1억 마리의 새들이 유리창에 부딪처 죽고, 도로에서 자동차에 치여 죽는(Road kill) 동물의 수가 연간 3억6천5백마리에 달한다는 추정치를 볼 때 로저 윌리암스는 앞을 내다보는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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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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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의말씀]눈을 열어 보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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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 사람이 있고 닫힌 사람이 있다.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이 시작되는 골든타임에는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임하시고, 하늘로부터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소리가 있었다(마태복음3:16~17). 이 세 가지가 삶의 필요 충분 완전한 조건이다. 하늘 문이 열릴 때 신통, 인통, 물통, 사통, 밥통이 된다.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야고보서 1:17). 큰 복은 다 위로부터,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고 작은 복은 사람이 오두방정을 떨어 챙기는 것이다. “여호와께서 너를 위하여 하늘의 아름다운 보고를 여시사 네 땅에 때를 따라 비를 내리시고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주시리니”(신명기 28:12). 사람이 애를 쓴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주님께서 태의 문을 열어 주시고, 자녀의 앞길을 열어 주시고, 전도의 문을 열어 주실 때 복이 된다.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요한계시록 3:20). 예수님께서는 강제로 문을 열고 들어오시지 않고, 우리가 주의 음성을 듣고 마음 문을 활짝 열기까지 인격적으로 기다리신다. 아나니아가 안수할 때 사울의 눈에서 비늘같이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되었다(사도행전 9:18). 엘리사가 “그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하니” 그 청년의 눈을 여시매 불말과 불병거를 보았다(열왕기하 6:17). 요게벳은 모세를 낳고 그가 잘생긴 것을 보았다(출애굽기 2:2). 바나바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았다(사도행전 11:23). 아브라함은 자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많아지리라고 약속받았다(창세기 22:17).
말세에 늙은이도 꿈을 꾸고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다.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요엘 2:28). 스데반은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담대하였다.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사도행전 7:55~56).
하나님은 나귀의 눈도 열어 주시는데 발람은 못 보았으니 나귀, 짐승만도 못하였다. “나귀가 여호와의 사자가 칼을 빼어 손에 들고 길에 선 것을 보고 길에서 벗어나 밭으로 들어간지라 발람이 나귀를 길로 돌이키려고 채찍질하니”(민수기 22:23). 그의 말이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았던 사무엘도 다윗의 형들을 보고는 기름 부을 뻔하였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 좌절하고 낙심하여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는 그 눈이 밝아져 예수님을 알아보았다(누가복음 24:31).
하나님께서 누군가를 들어 쓰실 때에는 눈을 열어 보게 하신다.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 세상이 알지 못하는 것을 보고 깨닫게 하신다. Insight와 foresight, 즉 본질을 꿰뚫어 보는 통찰력과 미래를 내다보는 예견의 능력을 부어 주신다. 지금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가? 시력이 실력이다. 세상적인 것에서 눈을 떼고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며 하나님이 주시는 생생한 꿈을 따라 걸어가라. 닫힌 세상, 막힌 환경에서도 눈을 열어주시고 숨통을 틔워주시고 살 길을 보여주시는 주님을 따르고, 전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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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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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법특강]칼빈과 교회법: 이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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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종교개혁은 교회법을 수단으로 교회를 개혁했다. 개혁가 칼빈은 스위스 제네바교회에서 목회하며 교회법을 작성했다. 바로 제네바교회법령(1561년)이다. 근데 전체 173개 조항 중 56개 조항이 결혼에 관한 것이다. 여기에는 이혼에 관한 조항도 있다. 제네바교회는 특별히 이혼 조항을 통해 무엇을 개혁했을까?
첫째, 혼인 자체가 무효가 되는 경우를 먼저 말한다. 결혼 직후 한쪽이 신체적으로 성적 불구임을 알았을 때다. 이로 인해 혼인을 영위할 수 없다고 불평하고, 고백과 조사를 통해 참되다고 판단되면 혼인은 무효로 선포되었다.
둘째, 이혼할 수 있는 경우를 규정하고 있다. 먼저 한쪽이 다른 쪽의 성적 부정을 충분한 증거와 함께 고소하고 이혼을 요구할 때다. 그 전에 상대방을 용서하도록 권면할 수는 있다. 그러나 당사자의 뜻을 거슬러 강제로 그렇게 이혼을 요구할 권한은 없다고 못 박았다. 더 나아가 성적 부정과 관련해서 이혼을 허락해서는 안 되는 경우를 자세히 언급한다. 곧, 상대방의 명백한 과오로 인해 이 사람이 성적 부정을 저질렀다면, 그래서 성적 부정에 부부 둘 다 잘못이 있다고 판단될 때다. 또 한쪽이 이혼을 얻어낼 목적으로 기만하는 것이 밝혀지면 이혼은 허락해서는 안 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제네바교회법령은 이혼의 사유로 성적 부정만 말하고 있지 않다. 한쪽이 다른 쪽을 유기했을 때도 이혼을 허락했다. 남편이 고의가 아닌 무역 거래나 기타 이유로 여행을 가서 10년 이상 돌아오지 않을 때다. 또 고의로 유기하여 떠난 남편이 있을 때 아내는 부지런히 조사해서 그의 거처를 알아내어 6주 동안 돌아오라는 공지를 했음에도 오지 않을 때는 이혼을 허락했다. 상습적으로 아내를 버리고 여러 나라로 돌아다니는 남편이 있다면 두 번째는 구금 처벌에 처함과 동시에 다시는 이 일을 하지 않도록 경고하고, 그래도 또 아내를 버린다면 세 번째는 엄격하게 다루어서 그런 남편에게 매이지 않도록 이혼을 허용했다.
제네바교회법령의 이혼 규정은 칼빈의 동역자 개혁가 부써(1491-1551)에게서 영향을 받았다. 부써는 본래 수도사였으나 개혁가 루터를 만나 수도사 서약을 파기하고, 도망친 수녀 엘리자베트 질베라이젠과 혼인했다. 이후 혼인, 이혼, 독신 생활에 관한 글을 많이 썼다. 부써는 혼인은 깨어져서는 안 되며, 이혼은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것임을 강조한다. 따라서 혼인에 문제가 생겼을 때 교회와 국가는 쌍방을 화해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해결이 되지 않을 때는 이혼을 허락하여 새로운 배우자와 새로운 인생을 살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혼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살 수 없는 관계로부터 해방하여 의롭고 경건하게 살 수 있는 관계, 더 많이 사랑하면서 더 적게 죄를 짓는 관계로 나아가게 하는 단계라고 보았다. 이혼은 혼인의 본질과 목적인 부부의 사랑과 연합이 무너질 때 허용할 수 있다고 보았다. 부써는 나쁜 혼인으로 고통받는 사람(대부분 여성)의 입장에서 이혼 문제를 다루었다. 나쁜 고통 중에 고통받는 삶은 하나님이 의도한 것이 아니며, 여기서 해방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래서 재혼을 허락해서 새로운 인생을 살도록 시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런데 당시 로마교회의 혼인법은 이혼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혼인을 쌍방의 언약이 아니라, 절대로 깰 수 없는 ‘성례’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최악의 상황에서 식탁과 침대를 분리하는 것으로 해결하고자 하는 것을 부써는 이는 사탄의 술수라고 말한다. 부써는 간음의 문제는 한쪽이 성적 관계를 원함에도 다른 쪽이 이를 거절하면 이는 그가 간음죄를 짓게 한다고 보았다. 이외에 성적 불구. 유기(버림). 추방 형벌 시, 만성적 정신이상, 불치의 전염병, 과도한 폭력, 이단으로 정죄될 때도 이혼을 허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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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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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칼럼]권세 너머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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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한국교회는 정치적 사안 앞에서 지나치게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습니다. 어떤 성도님들은 특정 정치세력에 대한 지지를 신앙의 표현처럼 여기고, 또 다른 분들은 그 반대 입장을 정의로 주장하며 서로를 향한 비판과 정죄를 서슴지 않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정치적 구도가 신앙의 성숙 여부를 판단하는 기준처럼 오해되고, 교회 안에도 알게 모르게 ‘편 가르기’가 형성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런 흐름은 교회를 세상 속에서 고립시키고, 신앙 공동체를 좁은 울타리로 몰아넣는 ‘게토화 현상’을 심화시킬 위험이 있습니다.
이러한 시대 상황 속에서 우리가 다시 붙들어야 할 말씀이 바로 로마서 13장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 황제의 절대 권력 아래 살던 성도들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롬 13:1).
바울이 권세에 순종하라고 한 이유는 단순합니다. 당대의 통치자가 선하거나 공정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 권세 너머에서 일하시고 통치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종교개혁자 칼빈의 해석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그는 『기독교강요』에서 “모든 권력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며, 악한 통치자 역시 하나님의 섭리 아래 있는 도구”라고 말했습니다. 칼빈은 권세의 도덕성을 기준으로 순종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권세를 세우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시각이 성도에게 필요함을 강조했습니다. 이는 로마서 13장의 정신을 가장 신학적으로 정교하게 설명한 대목입니다.
물론 성경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악한 권세자의 명령에 순종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사도행전 5장에서 사도들은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행 5:29)고 분명히 선언합니다. 그러나 성도의 불순종은 세상의 저항과 같아서는 안 됩니다. 사도들은 권세자들을 향해 조롱이나 분노, 그리고 폭력으로 대응하지 않았고, 불순종으로 인해 오는 고난을 피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의 불순종은 정치적 투쟁이 아니라 신앙의 고백이었고, 하나님 중심의 선택이었습니다.
성도는 때로 정권과 통치자의 문제점을 볼 수 있습니다. 정책의 한계를 경험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잊지 말아야 할 근본 진리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권세 위에서 일하고 계시며, 그들을 ‘하나님의 사역자’와 ‘하나님의 일꾼’으로 사용하여 결국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신다는 사실입니다(롬 13:4,6). 이 관점을 놓치면 교회는 정치적 논쟁의 한복판에 서게 되고, 세상과 점점 더 멀어지는 신앙의 고립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진리를 잘 보여주는 인물이 다윗입니다. 그는 사울 왕의 부패와 불의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두 번이나 사울을 제거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붙잡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단 하나였습니다. “왕을 심판하실 분은 하나님 한 분이시다.” 다윗은 사울의 행위 너머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인간의 기준이나 정치적 유불리에 따라 판단하지 않았던 겁니다.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이 권세를 어떻게 사용하고 계시는가 하는 점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의 시선은 어디를 향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너무 쉽게 이 땅의 권세자들을 판단하고, 자신의 정치적 기준을 신앙의 잣대처럼 여길 때가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성경은 성도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 세상의 권세보다 더 큰 권세는 하나님께 있다. 그러니 사람을 바라보며 흔들리지 말고 하나님을 바라보라.”
정치적 혼란이 큰 시대일수록 성도는 더 조용히, 그러나 더욱 분명하게 하나님의 주권을 고백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시대를 다스리고 계시며, 우리가 보지 못하는 더 큰 계획을 이루어 가고 계십니다. 그 주권을 신뢰하는 것이 성도의 자세이며, 교회가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남는 유일한 길입니다.
한국교회가 다시 한 번 이 땅의 권세 너머에서 일하시는 하늘의 하나님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며, 신앙의 중심을 바로 세우는 공동체가 되기를 소망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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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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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규교수의 역사탐색]메이첸과 그리스도의 처녀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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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보수주의 신학자 메이첸은 우리에게 낮설지 않다. 우리 비슷한 세대는 메이첸의 헬라어교본으로 헬라어를 공부했으니 목사나 신학도 가운데 메이첸을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다. 또 해방 이후 교회재건운동이 일어나고 교회가 분쟁 가운데 분열로 치닫게 될 때 한부선 선교사와 그를 따르는 교회를 ‘메첸파’라고 불렀으니 그는 낯선 인물이 아니다. ‘메첸’으로 말하기도 싫었던지 ‘메추리파’라고 비하하기도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그가 ‘그리스도의 처녀탄생’이라는 저명한 책을 썼다는 점을 아는 이들은 많지 않을 것이다.
1881년 7월 28일 메릴랜드주 볼티모어에서 출생한 존 그레샴 메이첸(John Gresham Machen, 1881-1937)은 11살 때 라틴어를, 14살 때 헬라어를 공부하고 존 홉킨스대학에서 고전어와 불어, 독일어, 비교언어학, 역사, 철학, 경제학 등을 공부했다. 1902년 가을에는 프린스턴 신학교에 입학하여 신학을, 프린스턴 대학교에서는 철학을 공부했고, 다시 독일로 유학하여 마르부르크와 괴팅겐 대학교에서 수학하면서 자유주의 신학을 접하게 된다. 그가 마르부르크에서 자유주의 신학의 거두였던 빌헬름 헤르만(Wilhelm Herrmann)의 강의를 들었는데, 헤르만은 기독교의 본질을 예수의 도덕적 인격과 주관적 종교적 경험에서 찾고, 성경의 초자연적인 기적과 역사적 사실들을 부정하거나 재해석하는 신학자였다. 이런 환경에서 초기 기독교, 신약, 조직신학 등을 공부한 그는 자유주의 신학이 성경적 기독교와 완전히 다른 길을 가고 있음을 보게 되었고, 후일 자유주의와 싸우는 전투적인 보수주의 신학자가 된 것이다. 1906년 독일에서 귀국하여 프린스톤신학교에서 강의하기 시작했다, 1915년 5월에는 프린트스톤 신학교 정교수직에 취임했다. 1918년 제1차대전 막바지에 군복무를 자원하여 프랑스에서 약 1년간 복무하였고 다시 신학교로 복귀했다. 1921년에는 햄턴시드니대학으로부터 명예신학박사학위를 얻었다. 이 무렵 박형룡은 프린스톤에서 메이첸에게 배우게 된다. 즉 박형룡은 1923년 9월부터 1926년 5월까지 2년 8개월 간 프린스톤에서 수학하면서 신약성서 헬라어와 신약서론과 주해를 공부했다. 그런데 프린스톤 신학교가 1924년 1월의 어번선언을 전후하여 고등비평을 받아드리는 등 신학적으로 좌경화되자 메이첸은 프린스톤을 떠나 1929년 9월 25일자로 필라델피아에 새로운 신학교인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를 설립했다. 메이첸과 뜻을 같이했던 초대 교수들은 오스왈드 엘리스, 로버트 윌슨, 네드 스톤하우스, R. B. 카이퍼, 코넬리우스 반틸 등이었다.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를 설립하고 6개월이 지난 1930년 3월에 출판한 책이 ‘그리스도의 처녀탄생 The Virgin Birth of Christ’이라는 책이었다.
그가 이런 이런 책을 출판한 것은 20세기 초 미국과 유럽교회에 만연했던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응답이었다. 당시 유럽과 영미신학계에는 성경의 초자연적인 사건과 전통적인 기독교 교리를 이성주의와 과학적 방법론으로 비판하고 재해석하려는 자유주의 신학의 강력한 도전을 받고 있었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그리스도의 처녀 탄생과 같은 가르침을 신화적이거나 비역사적인 것으로 간주하였고, 예수 그리스도를 초자연적인 존재가 아니라 도덕적 교사 혹은 위대한 인간으로 해석했다. 특히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은 이성적으로 받아드릴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를 부인하고 그리스도의 신성도 부인하였다. 그리고 기독교를 단순한 윤리체계로 간주하고자 한 것이다. 이런 시대 풍조에 맞서 메이첸은 그리스도의 처녀탄생을 강력하게 변호하고, 이를 통해 그리스도의 무죄 잉태, 그리스도의 신성을 입증하고자 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처녀탄생을 거부하면 그의 십자가와 부활도 부인하게 되고 결국 기독교의 기본 교의 체계를 파괴하게 되기 때문에 메이첸은 이 책을 통해 기독교 신앙을 옹호하고 변증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처녀탄생에 대한 메이첸의 관심은 이 책의 출판보다 30년 앞선 1912년부터 표명되었다. 1912년 메이첸은 4편의 학술 논문을 발표하여 신약학자로서 공적으로 데뷔하게 되는데, 1편은 예수님과 바울과의 관계에 대한 논문이었고, 다른 3편은 예수의 처녀탄생에 관한 논문이었다. 그가 1923년에 출판한 ‘기독교와 자유주의 Christianity and Liberalism’에서도 동정녀 탄생은 중요한 주제였다. 그런데 이런 이전 연구를 토대로 동정녀 탄생이라는 특정 주제를 확장하고 심화하여 430쪽에 달하는 책으로 출판하게 된 것이다.
메이첸은 일생동안 자유주의와 싸웠고 성경적 기독교 신앙을 수호하는데 일생을 바쳤다. 1933년에는 장로교해외 독립선교부를 조직하여 회장으로 피택되었고, 1936년에는 북장로교로부터 면직 판결을 받게 된다. 그리하여 1936년 6월 그를 지지하는 동역자들과 함께 미국장로교를 조직했는데, 이 교회는 1939년 2월부터 정통장로교(OPC)로 개칭된다. 성경적 신앙을 지키기위해 고투했던 메이첸은 1937년 1월 1일 55세의 나이로 메이첸은 노스 다코다에서 급성 폐렴으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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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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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건축칼럼]재개발 재건축지역의 교회건축리스크 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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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기능구조개선과 토지의 효율적 관리의 측면에서 도시재개발 사업이 여러곳에서 진행되고있다. 교회도 불가피하게 정부의 도시정비 정책에 의해 재개발지역 지정으로 많은 혼란과 경제적 어려움도 겪고있다 재개발, 재건축지역 지정후에 교회가 조합과 협상이나 보상등에서 잘 진행되어야 하나 여러과정에서 어려움을 겪고있으며 교회는 큰 도전에 직면하게 된다.
교회가 이경우 우선 고려해야 할 핵심포인트는 다음과 같다.
첫째, 종교용지에 대한 우선 고려할 사항
대지의 정북방향에 위치한 도시시설 내용에 따라 건축시 일조권적용으로 건축물이 계단식으로 꺾여서 건축될 수 있으므로 이 점을 고려해야하며 대지의 경사도 유무에 따라 토목공사비증대가 발생된다. 교회가 조합에 반드시 요청해야할 내용은 토지를 평단하게 조성하여 제공해달라고 해야하며 이 경우 경사를 평탄하게 하기 위한 토목옹벽공사 범위를 조합측에 요청해야한다. 대지에 필수적인 오수오수처리 맨홀, 대지안전등은 가장 기초적인 협상 내용이다.
둘째, 인허가 진행의 내용
교회가 건축허가 신청시에 토지가 조합의 소유로 되기 때문에 교회는 조합의 대지사용승낙서로 허가 신청해야된다. 따라서 조합으로부터 대지사용승낙서를 받아야한다. 대지사용승낙사유에는 반드시 건축인허가, 지질조사, 사용승인 등의 인허가 명칭을 표기해야되며, 조합의 법인 인감증명서가 첨부되어야한다. 일부교회가 대지 사용승낙서를 나중에 요구하다보면 늦어지기도 하고 조합집행부가 변경되거나 할 경우 많은 어려움을 겪는다.
셋째, 건축비 대출에 따른 사용승인의 내용
대부분 교회가 대출로 건축되어진다. 재개발 재건축지역의 경우 준공은 임시사용승인으로 처리된다. 그 이유는 등기부등본의 정리시점이 아파트 사용승인과 맞물려져있기때문이다. 아파트 단지가 본 승인이 나야 종교용지의 건축도 완전승인 처리되며 이때 건축물의 등기부등본이 완료된다. 대출의 경우 등기부등본 구비가 되어야 되기 때문에 건축비 정산등에 대출이 필요할 경우 아파트 준공이 나야 교회대출도 된다는점을 유념해야한다. 대부분 건축공사 완료되면 대출이 된다고 생각되나 실제와는 다르다.
넷째, 인프라 시설의 내용
재개발 재건축의 단지는 기존건물이 철거되어지므로 기존의 상하수도, 오수, 우수 맨홀, 전기, 가스 인입로의 확보가 되어야 교회건축에 문제가 없게 되는데 대부분 교회부지와 아파트단지가 연결되어있으므로 아파트 시공사로부터 인프라 시설에 협조가 필요하게된다. 결국 조합이 협조해야된다. 조합과 협상과정에서 마찰이 있거나 비협조적인 관계가 구축되어지면 교회는 실제 시공과정에서 조합의 비협조로 어려움을 겪게된다. 진입로 설치, 공사용전기, 용수등에 어려움이 생기며 인허가 과정에서도 협조사항이 생기게된다.
재개발 재건축의 조합과의 관계도 협력관계로 관리해야하며 결국 아파트 입주민이 교회의 전도 대상자들이 된다는 점을 유념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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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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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의말씀]충성된 일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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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앞에서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고 칭찬 받는 사람은 과연 어떤 사람일까? 기독교 교육은 가르치는 것이 아니고 바라보는 것이다. 믿음이 좋은 선배를 만나면 본때가 생긴다. 눈이 열리고 가슴에 감동을 받고 깨달음의 은혜를 입으면 복음이 들어간다. 한 사람에게 복음이 전파되면 인생관이 바뀌고 가정이 변화되고 문화가 바뀌고 역사가 달라진다. 믿음, 소망, 사랑이 만나 아름다운 카리스마가 생긴다. 구약성경에서는 갈렙이 멋지고 신약성경에서는 바나바가 귀하다. 시대가 어지러울수록 그러한 리더십이 더욱 그립다.
바울의 편지를 보면 마지막 부분에서는 거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이것은 결국 사람 농사가 중요하고 인사가 만사이기 때문이다. 복 중에서도 인복이 중요하고, 꽃보다 아름다운 것이 사람이다. 바나바는 자기 밭을 팔아 사도들 앞에 갖다 놓은 사람으로, 향유옥합을 깨트리고 한 알의 밀알처럼 자기를 희생했다. 권위하는 자로서 권고, 위로, 상담을 잘하였다.
구약성경에서 모세의 엄마 요게벳이 셋째 아들을 낳고 아름다운 아이임을 알아보았듯이 바나바는 영안이 열려서 교회에 임한 하나님의 은혜를 보았다(사도행전 11:23). 바나바처럼 교회 안에서 부정적인 것을 보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는 것이 중요하다. 신앙생활은 바라봄의 법칙이고, ‘눈’싸움이 중요하다. 현실에서 나쁜 것을 보지 않고 신령한 것을 보는 영안이 필요하다. 하나님의 역사하심과 하나님의 영광을 볼 줄 알아야 한다.
바나바는 착하고 좋은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다. 그야말로 문무를 겸비하여 3종 세트가 갖추어진 사람이었다. 영성, 야성, 정성을 갖추었다. 바나바는 최초의 선교사이자 가장 성경적인 안디옥 교회의 최초의 담임목사였다. 그가 다소에 가서 당시 많은 사람들이 두려워하던 바울을 스카우트하고 신약교회 최고의 지도자로 길러냈다. 인재를 알아보고 발굴하고 길러내는 지도자였다. 어떤 사역을 계속 이어가려하면 다음 일꾼, 다음 지도자를 찾아서 세워야 된다. 또한 교회는 아직도 복음을 모르는 사람을 찾아서 전도해야 된다.
바나바는 관계중심적인 사람으로, 상처받고 실패하고 낙오된 자를 위로하고 일으켜준 사람이다. 마가는 바나바의 조카이고 바나바의 여동생이 마가의 어머니, 마리아다. 그 마리아가 다락방을 오픈해서 120명이 기도하다가 성령이 임하시고 초대교회가 탄생했다. 바나바 집안은 초대교회를 잉태한 인큐베이터 같은 역할을 하였다. 바나바 집안은 선교의 명가이다. 한 어머니, 요게벳 밑에서 대제사장 아론, 여선지 미리암, 지도자 모세가 태어났다. 라합 한 사람이 결단함으로 여리고가 진멸당할 때 온 집안이 구원 받았다.
브리스가와 아굴라 부부는 바늘과 실처럼 함께 나타난다. 사도바울의 마지막 목회서신인 디모데후서 4장에 가면 바울이 죽기 전에 바나바와 다투었던 일을 회고하는데, 화근이 되었던 마가를 ‘내게 유익한 자’라고 부르는 대목이 나온다. 바나바는 선교 여행에 실패한 조카를 데리고 고향 구브로로 가서 결국에는 그를 멋지고 유익한 자로 회복시켰다.
말이 안 통하는 시대에 소통의 달인이 되고, 갈등과 불화가 만연한 시대에 피스메이커가 되고, 어디를 가든지 쓰러진 사람을 세우는 상담자가 되라. 바나바처럼 복음의 선한 영향력을 퍼뜨리는 탁월한 일꾼이 되기를 힘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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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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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칼럼]우주 삼국지의 승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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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중국 국가항천국(CNSA)에서 발사한 달탐사선 창어(嫦娥) 6호는 달 뒷면 토양의 시료를 채취하여 귀환하는데 성공합니다. 인류 최초로 달 후면 착륙에 성공했던 2019년(창어4호)에 이어서 세계를 깜짝 놀라게 만든 놀라운 성과였습니다. 게다가 2035년 완공을 목표로 잡은 ‘국제 달 과학연구기지(ILRS)’ 건설 준비를 위해 내년과 후년 두 차례 더 또 다른 창어호를 쏘아 올릴 예정이라 하니 그 기세가 더욱 놀랍습니다. 한국도 이에 질세라 우주연구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습니다. 지난 11월 27일에는 누리호 4차 발사가 성공리에 이루어졌는데, 최초의 야간 발사요 최초의 민간 주도라는 점에서 의의가 컸습니다. 하지만 아직은 위성을 목표 궤도에 안착시키는 정도의 수준이라 미국에 이어 두 번째로 인류 달착륙을 시도하려는 중국에 뒤처진 느낌을 지울 수는 없는 실정입니다.
그러나 정작 마음이 더 바쁜 사람들이 있습니다. 일본입니다. 지난 12월 18일 혼슈 서부 와카야마현에서 시도된 민간기업 ‘스페이스원’의 ‘카이로스 2호’ 발사 시도도 다시 실패로 끝났기 때문입니다. 3월과 9월에 이미 두 차례 시도가 불발에 그친 일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패만 거듭하는 일본이라고 여겨서는 안 됩니다. 우주항공연구개발기구(JAXA(작사), Japan Aerospace Exploration Agency)를 중심으로 하는 정부주도형에서 벗어나 2019년 당시 신생기업이었던 ‘인터스텔라 테크놀로지스’가 세 차례 발사를 성공함으로써 완전히 자유로운 민간주도형 우주개발시대를 먼저 열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동북아시아라는 좁은 지경에서 어깨를 나란히 하며 엎치락뒤치락 치열한 경쟁을 펼쳐온 한중일이 이제는 ‘우주 개발’이라는 새로운 경쟁체제를 구축하려 합니다. 자, 이 새로운 ‘우주삼국지’의 승자는 누가 될까요?
흥미로운 점은 삼국이 발사체를 명명(命名)하는 방식입니다. 앞서 언급한 중국의 ‘창어’는 우리말로는 상아(嫦娥) 또는 항아(姮娥)라고 하며 중국 전설에서 달에 산다는 여신의 이름입니다. 공산주의를 고수하며 유물론을 신봉하는 국가에서 공공연하게 신(神)을 표방하다니, 저들은 도대체 어떤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걸까요? 반면 일본은 민간 주도로 돌아서서는 ‘엡실론’이란 우주발사체를 운영하다가 얼마 전부터 ‘카이로스’라는 이름으로 열심히 쏘아 올리고 있습니다. 둘 다 헬라어에서 유래했지만 전자는 알파벳 중 하나에 불과하나 후자는 그리스신화에서 제우스의 막내아들로 알려진 ‘기회의 신’ 혹은 ‘시간의 신’에 해당합니다. 일본이야 원래가 ‘신화의 나라’라 해도 무방할 터이니 의아할 것 없지만 그래도 미지의 영역을 향해서라면 신적인 무언가가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내심이 살짝 엿보이는 듯해 무척 흥미롭습니다. 그런 면에서 한국은 독특합니다. 첫 발사체는 우주발사기지가 있던 고흥의 나로도에서 이름을 따서 ‘나로호’라 불렀고, 이번에는 아마도 운율까지 고려해서인지 ‘누리호’가 되었습니다. 한국 특유의 해학미가 엿보이는 발상입니다.
과연 우주삼국지의 승자는 누가 되겠습니까? 하지만 이걸 기억해야 합니다. 우주는 한중일에 미국과 EU까지 다 합쳐도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광대합니다. 우주에는 1조 톤을 네 번 곱한 만큼의 물질이 있습니다. 관찰 가능한 우주에만도 1백만×1조×1조×1조×1조×1조×1조 개의 원소가 존재합니다. 별은 어떨까요? 이런 비유가 있습니다. “우주가 여러분의 거실이라면 은하는 그곳에 있는 가구이고 별은 그 위에 앉은 먼지 알갱이들이다. 거대 성운군은 소파가 되고 거대 인력체는 TV 스크린에 불과하다.”(리처드 스웬슨, ‘과학으로 만난 하나님’, 195) 그런 별의 수를 하나님이 정하셨다고 시편 기자는 일찍이 노래했습니다(시 147:4). 1998년 우주왕복선을 탔던 존 글렌은 “이러한 창조물을 올려다보면서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우주의 경험으로 나의 신앙은 더욱 굳건해졌습니다.”라는 인터뷰를 남긴 바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주삼국지의 승자는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 어떤 민간기업도 정부기구도 결코 이길 수 없는 존재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주권이 승리하십니다. 날이 갈수록 무한한 영광이 드러나게 하시고, 오랜 기다림 끝에 우리를 마침내 우둔함에서 건져주시며, 지극히 높은 피난처에서 영원한 안식에 들게 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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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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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연구]아름다운 예수님, 아름다운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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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모 교회에서 찬송가 478장을 부르게 되었습니다. <참 아름다워라 주님의 세계는 저 솔로몬의 옷보다 더 고운 백합화> 그날따라 하나님의 위대한 창조 세계가 가슴으로 밀려들어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중국군 지프차를 타고 새벽 다섯 시에 백두산 꼭대기에 올라 오래 기다려서 천지를 비롯한 온 세상을 붉게 물들이며 떠오르던 태양을 바라보던 감동이 밀려왔습니다. 그런가 하면 가까운 남산의 마음까지 노랗게, 붉게 울긋불긋 물들이던 단풍의 찬란한 아름다움이 가슴을 채웠습니다. 또 부모와 온 세상이 담겨 있는 아기들의 눈동자는 얼마나 맑습니까?
그런데 그날 저는 새로운 감동을 느꼈습니다. 창조 세계가 아름답다면, 그것을 창조하신 분은 얼마나 아름다울까를 생각했습니다. 창조 세계에는 하나님의 신성과 위대함이 배어 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아름다움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습니다.
성부 하나님께서는 성자 예수님을 세상에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성자 예수님은 요한복음 1장 1절 이하가 말씀하는 것처럼 성부 하나님과 함께 세상 창조에 함께하셨습니다. 그 분이 오셨습니다. 복음서의 예수님을 보십시오. 실로 아름답습니다. 병자, 가난한 자, 외로운 자, 귀신 들린 자, 심지어 죽은 자에게까지 예수님은 선하고 좋으신 주님이셨습니다. 그들을 품고, 일으키고, 낫게 하고, 살리셨습니다. 사랑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통해 세상에 보이신 하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내 주님 입으신 그 옷은 참 아름답도다 그 향기 내 맘에 사무쳐.....> 하나님께서는 천사 하나를 보내신 게 아닙니다. 최상의 존재, 하나님의 독생자를 보내셨습니다. 그분은 실로 아름답고, 최고입니다.
그런데 그 아름다운 분이 세상에 오실 때의 모습은 참 초라하셨습니다. 이사야 53장 2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가장 위대하고, 가장 아름다우신 성자께서 세상에 오셨는데, 왜 찬란한 영광의 모습이 아닌,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도록 오셨을까요? 여기에 복음의 위대함과 신비가 있습니다.
외국의 한 성도는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백만 대군이 변방을 지키고, 로마 황제 시저의 궁전에는 비파 소리 높고, 용사들이 은상을 자랑하던 때, 하나님은 그 아들을 베들레헴 언덕 위, 소와 양이 구유 안에 있는 여물을 찾고 있는 그곳에 내려 보내사 인류를 구원하는 길을 여셨다. 혁신은 항상 이렇게 임한다. 세상이 하나같이 혁신을 제왕과 군대에게 고대하고 있을 때에, 하나님은 가난한 갓난아기를 초가집에 내려 보내어 세상에 신기원을 여셨다>
이를 위해 예수님은 마구간에서 나셨을 뿐만 아니라,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가장 아름다운 분의 가장 초라한 모습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가장 초라한 십자가의 예수님을 가장 사랑합니다. 십자가의 예수님이 계셨기에 부활의 예수님도 계십니다. 우리의 구원도 있습니다.
이제 주님은 부활 승천하셨고, 세상에는 주님의 몸인 교회를 남기셨습니다. 이제는 창조 세계의 아름다움, 예수님을 통해 나타난 아름다움의 뒤를 이어 성도와 교회의 삶을 통해 아름다움이 나타나야 합니다. 『현대인의 성경』으로 에베소서 1장 22~23절을 봅니다. <22 그리고 하나님은 모든 것을 그리스도의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분을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습니다. 23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어디서나 모든 것을 넘치도록 채워 주시는 분이 계신 곳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을 세상에 보여야 할 그의 몸입니다.
겸손과 온유로, 참 사랑으로, 예수님께서 보이신 삶을 본받아 살아감으로써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향기가 되어야 합니다. 고린도후서 2장 15절은 이렇습니다. <우리는 구원 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가장 아름다운 예수님을 보내주신 성부 하나님께 감사하며, 우리도 세상에 아름다움을 드러내길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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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2-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