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19(화)
 

공동의 번영을 위한 아름다움의 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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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처 케어

마코토 후지무라 지음/백지윤 역/IVP

기독교의 오랜 사역으로 ‘영혼 돌봄’이 있고, 환경을 돌보는 ‘창조 세계 돌봄’ 운동개념이 곳곳에서 발아되어 꿈틀거리고 있듯, 문화적 창조를 전문으로 부름 받은 이들, 분화적 분열을 일으키는 사람들의 이해와 화해, 치유를 위해 마코토 후지무라 작가는 문화돌봄(culture care)이란 개념을 만들었다. 저자는 우리의 삶에 아름다움이 필요한가? 라는 질문에 온전한 인간이 되기를 갈망한다면 절대로 ‘그렇다’이다. 위대한 예술가이신 하나님은 아름다움의 원천이시다.

우리가 믿는 복음의 실재는 우리가 교회안에서만 행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과 모든 모든 인간의 창조성안에 이미 분명히 드러난 하나님의 임재에 대해서도 말한다. 교회가 어두운 것처럼 보이는 세상에서 우리는 그저 주일신앙을 지키면서 마치 그리스도께서 일주일의 나머지 시간에는 계시지 않는 것처럼 살수는 없다. 우리는 가장 어두운 곳에서, 심지어 우리가 하나님께 숨기고 싶은 영역에서도 은혜의 임재를 인정할 필요가 있다.

음악가, 화가, 건축가들은 ‘아름다움’이라는 ‘쓸모없음’이 뜻밖에도 실용성을 강조하는 우리의 삶을 살아 있게 만드는 생명력임을 알 것이다. 회의와 도발, 전위의 현대 미술 한복판에서, 마코토 후지무라는 화가로서 아름다움의 순수성을 선명하게 증명하고자 한다. 또한 그리스도인으로서 문화가 생성적 현장이 되도록 ‘돌보아야’ 하는 청지기적 소명을 인식하고, ‘돌봄’을 위한 실천적 대안을 망설임 없이 제안한다. 신앙과 작업, 예술의 현장에서 ‘영성’과 ‘아름다움’에 대해 고민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이 책은 생각을 자극하는 기댈 언덕이 될 것이다. 무엇보다 우리 시대의 예술이 교회로부터 ‘아름다움’으로 이해받지 못하는 때에, 한 그리스도인 예술가가 던진 ‘예술’과 ‘아름다움’이라는 주제가 참으로 반갑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라는 말씀을 폭력적으로만 해석하여 모든 사물을 정복하고 착취해 온 역사에, 새로운 반성이 일어나고 있다. ‘다스리라’로 번역된 히브리 동사 ‘라다’에는 ‘돌보다’라는 목자적 의미가 있다. 이 다스림은 착취나 정복이 아니라 샬롬의 세계를 향한 돌봄(Care)인 것이다. 문화를 돌봄으로 인식하기 시작하면, 이제 문화는 경쟁과 전쟁이 아니라 공동체의 영혼을 가꾸는 즐거운 정원으로 바뀐다. 우리는 이 책에서 에밀리 디킨슨과 빈센트 반 고흐가 예시하는 주변부와 소수자 문화의 중요성을 만나기도 한다. 꽃으로 시작하여 꽃으로 마무리하는 20개의 이야기, 상처 많은 이 시대에 삶의 균열을 돌보고 치료해 줄 아름답고 친절한 책이다.

 

기독교가 걸어온 길 앞으로 걸어갈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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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화 시대의 그리스도교

배덕만 지음/홍성사

코로나 바이러스가 중국우한에서 시작되어 두 달이 되기 전에 전 세계적으로 번져나가듯 서구에서 유입된 기독교는 거대하고 극적인 변화를 일으켜왔다. 아시아와 아프리카에 전파된 복음 은 20세기를 거치면서 비약적인 성장을 가져왔고 이제는 탈 서양화시대를 맞고 있다. 이 책에서 배덕만 교수는 20세기에 기독교는 어떤 모습으로 부흥과 변화를 경험해왔는지를 한국 역사신학자의 눈으로 평가하고 그 특징들을 신학을 전공하지 않은 독자라도 알기 쉽게 정리하였다.

18세기 계몽주의를 거치고 전 세계적으로 제국주의의 팽창과 정치적 이념의 급속한 생성기간에 기독교에도 엄청난 영향이 미쳤고 제국주의 확산이 선교의 부흥을 가져왔지만 명암이 함께 존재한다는 것, 20세기의 기독교역사를 통해 금세기 기독교의 방향을 잡아야 할 것을 역설한다. 근대 선교는 미국의 주도하에 제3세계를 중심으로 역동적으로 확장되어 마침내 세계종교로서 자신의 위치를 확고히 했고, 이런 변화는 오순절운동을 중심으로 한 성령운동과 복음주의 선교사들의 헌신적 사역, 운송 및 통신시설의 발달과 확장, 그리고 미국을 중심으로 한 자본주의 경제의 성장과 지원 때문에 가능했다고 진단한다. 유럽 교회를 중심으로 한 에큐메니컬 진영에서는 19세기 선교활동에 대한 진지한 반성을 토대로, ‘하나님 선교’라는 새로운 선교 개념을 도입했다. 또한 현재 오순절운동은 세계에서 가장 빠르고 역동적으로 성장, 변모하는 그리스도교운동이 되었는데 선교통계학자 데이비드 바렛과 토드 존슨에 따르면, 1970년 오순절 신자들은 6,700만 명이었으나 2010년 6억 1,400만 명으로 증가했고, 2025년에는 8억 명에 이를 것으로 예상된다고 한다. 그리스도교의 중심축이 유럽에서 제3세계로 이동하면서 오순절운동의 중심무대도 같은 경로를 따라 이동했다.

20세기 특징 중 하나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끝없는 반전과 변화의 기록이다. 자유주의 등장과 19세기에 출현한 마르크스주의의 영향 하에 반교회주의, 반성직주의 운동이 거세지면서 심각한 도전에 직면한 가톨릭이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통한 내적 변화와 개혁을 성공적으로 추진하고 있으며, 그동안 서방 중심의 다른 그리스도교들로부터 분리된 채 고립되어 왔던 동방 정교회가 세계교회들과 교류하며 새로운 환경에 편입되어온 과정도 잘 설명해준다.

아울러 현대에 선을 넘는 종교적 실험들이 다양한 형태의 분파주의 형태로 발흥하고 있음을 주목하고 이런 현상에 대한 평가와 전망도 아우르고 있다.

배덕만 교수는 기독연구원 느헤미야의 전임연구원이며 백향나무교회 담임목사이다.

 

우리는 ‘오늘’로 부름받았다!

오늘을 사는 이유 카르페 디엠, 시간의 의미를 기억하라오늘을 사는 이유 카르페 디엠, 시간의 의미를 기억하라.jpg

오스 기니스 지음/IVP

카르페 디엠, ‘오늘 여기서 행복하기를 바란다’라는 뜻을 가진 이 단어는 로마의 시인인 호라티우스가 사용한 문장이다. Carpe diem, quam minimum credula postero.(카르페 디엠, 쾀 미니뭄 크레둘라 포스테로) ‘오늘을 붙잡게, 내일이라는 말을 최소한만 믿고’

한번뿐인 우리 인생을 어떻게 살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하루를 충실히 살려고 노력한다. 우리 삶은 연속적인듯 하지만 근시안적이라서 과거를 잊을 뿐만 아니라 미래를 준비하지도 못하고, 아울러 현재 자신들이 부여 받은 소명을 단단히 붙잡지도 못한다. 부름 받은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의 모든 영역에 참여하고 하나님이 통치하는 그분의 나라에 충성하는 자들이다. 그럼에도 이 땅은 영원히 머물 곳이 아니다. 유일한, 의미심장한, 특별한 그것이 나에게 언약적 시간이 되고 있는 사람은 얼마나 행복한가. 인생은 짧지만, 우리는 우리의 잠재력을 최대한 개발하고, 인생을 최대한 선용하고, 하루하루를 붙잡도록 부름 받았다. 우리가 시간과 역사를 바라보는 성경의 관점을 따른다면, 인생은 의미를 제공하고 그 의미심장함이 인생의 짧음을 훨씬 능가하는 미래를 열어 준다. 시간은 순환적인 것 이상이고, 그 직선적 진행이 구성하는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중요하고 책임 있는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시간은 우리가 가장원하지만 가장 엉성하게 쓰는 것이지 않을까.

우리는 항상 공간적으로나 시간적으로나 “거류 외국인”이다. 망명자라는 인식을 늘 품고 우리의 궁극적 본향을 갈망하는 마음은 세속화에 대한 면역력의 중요한 부분이고, 앞으로 전진하는 소망과 함께 그리스도인다운 독특성과 신실함을 유지하는 방법이다.

이 책은 오늘하루를 생생하게 누리며 시간의 순례자로 걸어가는 희망찬 여정으로 독자들을 안내해 준다.

 

예수가 보여준 사랑의 공동체에서 길을 찾다!

천종호 판사의 선, 정의, 법.jpg천종호 판사의 선, 정의, 법      

천종호 지음/두란노

법이 정의가 되고 정의가 사랑이 되는 공동체를 꿈꾸는 호통판사 천종호.

우리사회가 정의로운 사회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제도를 잘 정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용기를 내어 정의를 실천할 수 있는 성품이 사회구성원들에게 뿌리 내리는 것이 중요다. 오랫동안 소년범들을 재판해온 저자는 소년범을 설득하고 갱생할 수 있도록 새로운 대안을 실천해온 분으로 잘 알려져 있다. 약자에게 사랑을 실천하는 사회는 인간의 존엄성을 지켜주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저자는 ‘인간을 인간답게 대우한다는 것은 인간을 그의 능력과 역량에 관계없이 존엄성을 해치지 않는 방식으로 대우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대우의 방식은 바로 존중과 배려다. 존중이란 인간을 그 능력이나 역량에 관계없이 그 존엄함을 인정하는 것이고, 배려란 인간마다 능력과 역량에서 차이를 보이므로 능력과 역량의 부족이나 결여로 인해 인간의 존엄성을 실현하기 어려운 사람에게는 그와 다른 처지에 있는 사람들의 배려를 통해 인간의 존엄성 실현에 부족함이 없게 해 주는 것을 의미한다.’라고 설명한다.

저자는 신뢰와 정직이라는 정의는 우리사회의 자본이라고 말한다. 판사초임시절 부부관계인 A가 B를 고소했고 이유는 B가 C와 부정행위를 저질렀다고 주장하며 위자료 청구를 했다는 것. 천 판사는 그들을 각각 소환하여 신문한 뒤 부정행위의 증거가 없다고 다독였다. 그날 귀가하는 늦은 밤 전철역 근처에서 두 사람이 팔짱을 끽고 걸어 가더라나...진실을 가려내는 것이 결코 쉽지 않으나 신뢰와 정직지수를 높여 주는 것이 판사의 몫이라고 주장한다.

 결국, 성품(덕)으로서의 정의는 인간에 대한 존중과 배려를 실현할 수 있는 내면의 성품 상태라고 할 것이다. 존중과 배려를 기반으로 하는 정의는 자기희생과 용서를 통해 완성되는 사랑의 출발점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정의의 공동체’에 발을 붙이고, ‘사랑의 공동체’를 지향하는 사람들이다.

 

초기 기독교인들의 생활방식은 어떠했을까?

회복력 있는 신앙.jpg회복력 있는 신앙

제럴드 L.싯처 지음/성서유니온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신앙이 가능할까? 코로나 이후에 과연 지금까지의 역동적인 교회모습이 가능할까? 신자들이 복음의 능력을 발휘해서 코로나 뒷수습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이 사회와 민족에게 희망과 대안을 갖고 제대로 섬기는 모습을 보일 것인지 궁금하고 기대가 된다.

이 책은 스태디셀러 반열에 오른 책 ‘하나님의 뜻’을 쓴 제랄드 싯처 교수의 최근작이다.

영성 작가인 동시에 탁월한 역사학자로서 저자는 초기 기독교인들이 고립(유대교)과 순응(로마 종교)이라는 양극단에서 ‘제3의 길’을 택하여, 로마제국 안에 살고 있으면서도 전 우주를 총괄하는 하나님 나라의 삶을 구현한 새로운 공동체를 이루었다는 것, 그러나 주후 313년 이전 로마 시대의 기독교와 마찬가지로, 오늘날은 다시 기독교가 세상의 주류 문화와 정신으로부터 이격되어 버린 탈기독교 시대라고 주장하고 있다. 어느새 한국사회에서 기독교는 기득권 종교가 되었고 큰소리치고 영향을 극대화하려고 몸부림치는 기득권 종교가 되어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저자는 서구교회들을 연구하여 다시금 회복 있는 신앙을 요청하지만 정작 한국교회가 초대교회가 보여 준 이 역설의 원리를 다시 필요하게 되었다는 것을 일깨워 준다.

저자의 관찰에 의하면 그리스도인과 로마인의 대조가 두드러졌다. 예를 들어, 키프리아누스는 그리스도인들이 같은 그리스도인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돌본다고 주장했다. 그는 “우리 편 사람들만 필요한 사랑의 관심을 받는다면 놀라울 게 없다. 선으로 악을 갚고 신과 같은 관용을 베풀며 원수를 사랑하는 것처럼, 세리나 이교도보다는 낫게 행동할 때에야 비로소 사람은 완벽해질 수 있다”라고 선언했다.

이 책에 나오는 초기 기독교 이야기를 통해 기독교신앙이 우리와 세상과 극명한 실천적 차이를 통해 진짜 제자들의 모습을 증명하는 신앙이 필요하다.

 

마을목회를 통해 세상을 살리는 교회

마을을마을을 일구는 농촌교회들.jpg일구는 농촌교회들

강기원 외 28인 공저/동연

우리나라의 농촌 풍경을 더욱 아름답게 해주는 것 중에 하나는 동네마다 마을을 품고 있는 듯한 교회모습이다. 어린 시절 농촌을 경험한 사람들은 시골교회와 애틋한 추억을 잊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농촌교회들이 텅 비어가고 노인들만 교회를 지켜가고 있는지 오래되었지만 여전히 이 교회들을 지켜나가는 헌신된 목회자들이 있다. 이들은 교회에 나오는 신자들만 사역의 대상이 아니라 마을을 품어내는 목회를 지향한다. 이들은 마을을 교회로, 주민을 교우들로 여긴다. 마을과 교회는 물과 물고기의 관계와 같기 때문이다. 한국교회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높지만 이들교회의 섬김의 사역을 통해 마을이 되살아나는 현장에는 새로운 희망의 싹들이 뜨고 이미 열매가 무성하기도 하다. 이 책속에는 마을목회의 사례 스물여덟 현장을 소개하고 있다. 각 마을의 형편에 맞는 다양한 목회는 생명농업, 문화지킴이, 노인복지, 역사와 전통을 지켜가는 부분까지 다양하다. 대 자본들이 마을을 잠식하는 것을 막아내고 마을 도서관, 고통받는 이웃들을 부둥켜 앉는 자리까지 함께 한다. 그야말로 마을을 변화시키고, 공동체를 복원하고, 복지를 세워가는 현장에 목회사역이 빛나고 있다. 마을목회이야기를 통해 농촌목회현장에서 기도하며 씨름하는 목회자들의 생생한 증언을 만나 보자.

 

사랑의 모조품들을 버리고 사고를 회복하는 참 모델

생각, 하나님 설계의 비밀생각, 하나님 설계의 비밀.jpg

티머시 R. 제닝스 지음/CUP

우리가 믿는 복음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할 뿐 아니라 한 인간을 총체적으로 회복하는 과정이다. 예수 그리스도께 마음을 드린 사람은 자신이 쓸모없다는 느낌, 낮은 자존감, 막연한 죄책감, 원한과 적개심, 의존 상태등 이런 부정적 생각 속에서 승리할 수 있는 능력을 발휘할 수 있고 하나님의 사랑 안에 쉼을 누릴 수 있다.

제닝스 박사는 레지던트 2차년도에 만난 그녀 때문에 자신의 삶에 큰 영향을 받게 되었다고 한다. 아주 슬프고 외로워 보였고 얼굴이 시름에 겨워 초췌했던 47세의 그녀는 자살방지를 위해 정신과 직원이 배치된 병동에 갇혀 지냈는데 보수적 기독교가정에서 자라오면서 성폭행과 강요된 회개를 종용받으며 불안과 욱하는 성질과 분노로 고통하고 있었다.

더 괴로운 문제는 따로 있었는데 그녀는 하나님이 두려워서 힘들어 했었다고 한다. 내가 학대당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을까? 이 환자의 상태를 면밀히 살펴보며 정신과 교수에게 보고하곤 했는데 어느 시점에서 이 교수는 이 사례는 정신과 영역을 벗어난 것이라는 것, 원목을 만나게 해주어도 회복되지 않는 그녀를 돕고 싶어 답을 찾기 위해 연구를 시작했고 이 책은 그 연구의 산물이다.

이 책의 집필과정에 다양한 예화들이 등장하는데 모두 실화이다. 이름과 상황을 약간 섞거나 바꾸었을 뿐 실제 치료한 환자들의 사례를 담았기에 신뢰할 만하며, 성경과 정신의학과 실제 사례를 바탕으로, 오랜 기간의 치열한 연구로 일구어진 열정의 열매다. 우리는 창조주이신 하나님이 인간의 생각도 설계하셨다고 믿는다.

이미 <뇌, 하나님 설계의 비밀>과 <마음, 하나님 설계의 비밀>로 널리 알려진 저자의 명저를 통해 사고와 뇌와 마음의 왜곡된 부분을 바로잡고 치유와 회복의 과정을 경험할 수 있다.

 

새롭게 만나는 성경속 여성들의 히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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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정 지음/옥당

우리 사회는 센 언니들의 전성시대를 맞았다. 나라를 빛내고 사회를 당당히 이끌어 오는 여성들의 파워는 요즘 정치계에서도 돋보인다. 그러나 아직 기독교계에서는 발아에서 성장까지 긴 여정의 과정속에 머물고 있다. 이 책은 고대 성경속에 담긴 여성들의 흔적을 찾아 책속에서 끄집어내어 화려하게 부활시킨 구미정 선생의 역작이다.

신화에서 역사 속으로 걸어 나온 여인들, 대개의 역사 기술이 그렇듯, 성경 역시 남성 중심적으로 전달되었기 때문에 여성의 이야기는 역사 속에 묻혀 있다. 이 때문에 성경 속 여성들은 감춰지고, 왜곡되고, 사라졌다. 저자는 가부장제 사회 문화 아래의 편파적인 역사 속에 감춰지고 왜곡되고 사라진 여성들을 찾아 그들의 삶을 현대의 시선으로 새롭게 조명한다.

성경 속 여성들은 우리가 피상적으로 알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수동적이지 않다. 억압적인 현실 앞에서 때론 복종해야 할 때도 있었지만, 결코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고 불의에 침묵하지도 않았다. 거리에서 몸을 파는 비천한 신분이었지만 목숨을 걸고 이스라엘의 정탐꾼을 살려준 라합, 모압 출신의 가난한 이주노동자였으나 다윗의 조상이 된 룻, 가나안에서 태평성대를 이끌었던 사사 드보라, 한낱 고아 소녀에 불과했으나 페르시아 제국의 왕후가 되어 자기 민족을 구했던 에스더 등이 그들이다.

전통 신학에서는 이브가 아담의 갈비뼈에서 나왔기 때문에 아담의 종속물 내지는 아담보다 열등한 존재라고, 더하여 어리석음으로 선악과 사건을 일으켜 원죄를 짓게 한 지탄의 대상이라고 가르쳤다. 그래서 이브는 오랜 동안 아담에게 예속된 수동적이고 순종적인 존재, 다음에는 아담을 꼬여낸 죄인의 이미지로 인식되었다.

이브는 정말 순종적이고 겸손한 부창부수(夫唱婦隨), 여필종부(女必從夫)의 기원일까? 그리고 이브는 정말 아담을 꼬여낸 죄인일까?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에 바탕한 남성 중심의 신학에서, 아담의 갈비뼈는 오랫동안 여성을 아담에게 봉사하도록 지어진 부수적인 존재로 해석하게 만든 근원 재료였다.

그러나 저자는 갈비뼈를 주었다는 것만으로 곧 아담이 이브 생명의 기원은 아니며, 따라서 그의 종속물이어야 할 근거는 되지 못한다고 말한다. 이브 역시 하나님의 신비로 지어졌고, 갈비뼈는 오히려 아담과 이브 간의 연대성과 동등성을 의미하는 재료로 볼 수 있다고 새롭게 해석한다. 이 책속에서 만나는 여성들의 이야기는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사회적으로 차별받고 억압받으면서도 자신의 느낌과 생각을 솔직하게 표현했던, 평범한 할머니, 어머니, 아주머니, 언니들, 다시 말해 ‘우리’의 이야기이며 용감한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책읽기에 힘을 불어 넣어주는 친절한 안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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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정진 지음/좋은씨앗

 현대인들은 ‘사색’은 하지 않고 ‘검색’하는 인종들로 급속히 변모하고 있다. 컴퓨터와 인공지능의 출현으로 이젠 생각하는 것까지도 컴퓨터에 맡기고 있다. 사고력 결핍은 고스란히 공동체의 질을 저하시키는 심각한 원인이 된다. 효율성이나 유용성이나 실용성만 강조하는 세상은 깊은 대화를 상실하고 비인간화를 가속시킬 뿐이며 이런 미래는 상상하기도 싫어진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인문학 읽기가 살아나고 있음은 반가운 일이다. 인문학은의 핵심은 고전을 읽으면서 오늘 우리시대에 필요한 지혜를 배우는 것이다. 오늘날 일어나는 문제들의 상당수는 과거의 역사속에서 배울 지혜를 전수받지 못할 결과이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학교나 기독모임들에서 인문학의 부흥을 기대한다.`

이 책은 그동안 기독대안학교와 홈 스쿨 코업 등에서 어린이들과 청소년에게 서양의 인문 고전을 가르쳐 왔던 저자가 서양고전을 기독교세계관으로 읽어내고자 시도한 책이다.

길가메쉬 서사시, 함무라비 법전, 오뒷세이아등 고대 문서들과 맥베스, 신곡, 반지의 제왕, C.S.루이스의 우리가 얼굴을 찾을 때까지 비교적 근대 작품까지 14편을 다룬다. 이미 청소년 공부방에서 나눠 본 경험 속에서 태어난 이 글들은 훌륭한 과거의 유산을 통해 광대한 숲에서 불어오는 진녹색의 공기를 마시도록 가슴을 열어준다. 실용서에 밀려 서양인문고전을 제대로 경험해 보지 못한 이들은 이 책의 안내를 받으며 서툴고 전문적이지 않더라도 충분히 독서를 시작할 수 있다. 독서는 해석하는 능력을 통해 깊어지는 것. 새해엔 고전읽기를 시작해보자.

 

불혹의 나이를 지나는 아담과 하와를 위로 하는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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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성환 지음/홍림 

제주 시인 서성환 목사가 시집 한권을 들고 세상살이 흔들리는 현장으로 찾아왔다.

치열한 사회와 교회 안에서 중추적인 책임이 지워졌으나 어디서도 변변한 위로나 격려를 받지 못한 채 그저 버텨내는 중년 남자들, 나이 들어가면서 껍데기만 남고 헛헛한 허깨비 아담들에게 시인은 수퍼맨의 비애를 위무하고 호주머니도 없었던 그분을 따라 자유를 만끽하자고 한다. 아울러 같은 상처, 같은 외로움에 놓인 이 시대 불혹과 지천명의 하와들에게 상상사랑에 설레이기 보다 조금씩 행복에 익숙해지자고 낮은 목소리로 위무한다. 승패가 불분명한 지리멸렬한 일상에서 아릿한 아쉬움을 뒤로하고 문득, 항상 거기 있어 말을 거는 산처럼 어느새 나의 마음 만져 다독이시는 그분의 손을 건네준다.

온갖 요구서만 가득한 중년에 뜻을 이루긴 고사하고 상처와 외로움을 공감해 주는 목자가 있다니 참 다행이다.

 “오로지 하나 뿐인 단 한 번뿐인/너도 너를 보듬고/나도 나를 보듬고/마침내 서로를

 모두 보듬는/흥그러운 아름다운 세상으로...”

서상환 목사를 만나면 그 특유한 낮고 느린 어투 속에 시어를 함유한 마법의 언어들에 빨려들어 간다. 손안에 가득한 열쇠꾸러미는 있지만 앞만 보고 여기가지 달려왔는데 어느 날 갑자기 마음이 울컥해 진다면, 나 아닌 다른 이름으로 불리우지만 진짜 하와이고 싶은 때가 지금이라면 시인을 만나보시라. 나는 믿고 있다. 시가 세상을 구원하리라는 것을

현재 제주시에서 ‘사랑하는교회’를 담임하는 시인은 그동안 두 권의 시집과 유럽선교사로 파송되었을 시기에 유럽영성공동체를 탐방하며 쓴 탐방기‘사랑이 피워낸 꽃’과 CCM가수인 강명식의 앨범에 수록된 ‘승리’등 여러 곡의 작시가 있다.

 

신앙언어, 바르게 사용함으로 교양을 높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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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성수 지음/예영커뮤니케이션

언어는 생각과 행동을 지배한다. 어떤 언어를 사용하는가에 따라 생각과 행동의 패턴이 달라지기도 한다. SNS소통이 활발해지면서 잘못된 언어 사용으로 인해 해프닝이 발생하기도 하고 평판에 치명적인 오점이 되기도 한다. 공동체마다 통용되는 특별한 언어가 있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저자는 교인들끼리만 통하는 언어를 ‘신앙 언어’로 규정했다. 하지만 신앙언어가 지닌 의미를 정확히 알지 못한 채 습관에 기대 사용하는 이들이 많다. 본래 뜻과 다르게 사용할 때도 있다. 바른 신앙언어는 건강한 교회를 만드는 첩경이다. 이 책에는 본질에 충실한 언어선택을 위해 60개의 신앙언어를 표본으로 삼아 바른 언어사용으로 안내한다.

흔히 교회 안에서 표어로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나 ‘하나님 나라 건설’이라는 표현을 많이 사용하는데 저자는 태클을 건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곳이다. 하나님의 뜻과 말씀이 현실로 나타나는 곳이다. 사람의 힘으로 확장할 수도 없고 또 세울 수도 없다.

혹여 하나님 나라를 빌미로 인간의 나라를 공고히 하려는 욕망은 아닐까? 교회 구성과 운영에 자신의 철학을 관철시키려는 숨은 의도는 없을까? 제국주의적인 신앙관이 우리 신앙에 침투한 것은 아닐까? 만일 그렇다면 이제는 더 이상 관용적인 표현이라고만 여길 수 없다. 신학적으로 오해의 소지가 많을 뿐만 아니라 인간의 잘못된 욕망을 드러내는 언어는 더 이상 사용하지 않아야 할 것을 주문한다.

‘예배는 드리는 걸까, 하는 걸까’같은 질문이 줄을 잇는다. ‘예배를 디자인하고 기획한다’는 언어에도 제동을 걸었다. “디자인하다 혹은 기획한다는 말을 (예배에) 사용한다면 그것은 순전히 인간의 행위 안에 (예배를) 제한하게 된다”는 것이다.

‘교회당일까, 성전일까’란 질문에 대한 해답도 이렇다. “만일 교회당을 성전이라 말하고 믿는다면 이는 오해에서 비롯한 결과다. 교회당과 성전을 동일시하면 교회당에서의 일만 거룩하고 그 밖에서의 일은 세속적이라 간주하게 된다. 또 목회자의 권위가 부당하게 커진다”고 우려를 했다. 하나님도 근심하는가? 왜 하나님이 아니라 예수를 믿는가? 인공지능 혹은 초지능은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가? 마리아는 하나님의 어머니인가 예수님의 어머니인가? 등등 교회 소그룹 모임에서 공부해봄직한 주제들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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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소물리에 김현호 대표(기쁨의집)가 추천하는 가을 책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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