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0-12-03(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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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 죽음으로 살아나는 신앙-영화 ‘교회 오빠’
    믿음의 선한 싸움을 지켜보다 한국죽음학회 회장을 역임한 이화여대의 최준식 교수는 한국인이 갖고 있는 죽음의 태도를 세 가지로 정리했다. 하나는 ‘외면’이다. 죽음을 바로 응대하지 못한 채 의식적으로 피하려는 태도가 한국인들에게는 있음을 지적한다. 죽음에 대해서 단 한 번도 진지하게 생각해본 일도 없을 뿐만 아니라, 죽음은 자신에게는 결코 일어나지 않을 일이라도 되는 듯 머릿속에서 죽음이란 단어를 떠올리지 않기 위해 죽음과 연관된 어떤 것도 마주하려 하지 않는다. 둘째는 ‘부정’이다. 죽음을 금기시하는 한국인의 태도는 어디서나 쉽게 발견된다. 은행에서 대기표를 뽑을 때 44번이 나오면 구겨서 휴지통에 버리는 사람들을 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아파트 엘리베이터 버튼에서 4자가 F로 둔갑하는 일은 낯설지 않다. 죽을 사(死)자와 발음이 같다는 이유로 아라비아 숫자 4가 얼마나 홀대를 받아왔던가(?). 그리 오래되지 않은 일이지만 혹시라도 집안에 부정 타는 일이 생길까봐 상가 집에 같다오면 집 앞에 소금을 뿌리는 일은 옛 사람들의 풍습이기 조차 했다. 셋째는 ‘혐오’다. 화장장이나 추모공원 등과 같은 죽음과 연관된 시설을 우리 사회에서는 혐오시설로 분류한다. 인간의 죽음을 처리하는 일은 애를 받는 산부인과의 존재처럼 생활의 일부로 받아들이기 보다는 결코 곁에 두어서는 안 될 것으로 여기고 이를 싫어한다. 객관적이거나 과학적 지식과 상관없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일으키는 부정적인 정서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리라. 그런데 이호경 감독의 영화 <교회 오빠> 는 최준식 교수가 얘기한 한국의 죽음의 태도를 모두 불식시킨다. 주인공은 죽음과 고통 앞에서 부정도 외면도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린다. 기독교 신앙인이 죽음을 바라보는 태도가 분명 세상 사람들의 그것과 다름을 이 영화는 생생히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교회 오빠> 2017년 12월 22일 ‘KBS 스페셜 앎’ 2부작으로 방영된 동명의 프로그램을 재촬영·편집하여 극장용 영화로 개봉한 다큐멘터리 영화다. 서른일곱 나이에 대장암 4기 판정을 받은 남편 이관희 집사와 림프종 4기 진단을 받은 아내 오은희 집사의 투병장면이 신앙 안에서 펼쳐지고 있다. 구약의 욥기의 진행 과정을 따라 영화는 욥과 주인공 이관희 집사의 신앙적 면모를 비교해 가면서 흥미로운 연출기법을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욥과 같은 알지 못하는 고난을 당했을 때 신앙인이 보이는 반응과 또한 신앙인으로서 마땅히 우리가 기대하는 반응 사이에 미묘한 갈등을 묘사하며 죽음 앞에 선 신앙의 어려움과 위대함을 전해주고 있다. 그것은 한마디로 믿음의 선한 싸움에 관한 이야기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받았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언을 하였도다’(딤전6:12) <교회 오빠>가 결국 말하고자 하는 것은 말기암의 고난 가운데서도 승리하는 믿음의 싸움이며, 이를 통해 많은 관객 앞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증인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교회 오빠>를 봐야하는 이유 <교회 오빠>는 개봉 일주일을 맞았을 때 다음 사이트에서 일간 영화 검색어 순위 3위에 오르기도 했다. 1위 <알라딘>과 2위 <악인전>에 이은 순위다. <어벤져스:엔드 게임>은 <교회 오빠> 다음 순서로 밀려나 있다. 관객 수도 3만 명을 넘어섰다. 역대 최고의 관객을 모은 외화 <어벤져스:엔드 게임>이 1천3백5십3만 명을 넘어선 것과 비교하면 너무 왜소해 보이지만 속사정은 다르다. 개봉 첫날 <어벤져스:엔드 게임>은 전국 2760개의 스크린에서 1만2545회 상영되었다. 하루에 1만 2545회가 상영되었다는 말은 한 번 상영에 10사람만 봐도 10만 2천 명이 훌쩍 넘는다는 뜻이 된다. 첫날 상영점유율은 80.9%, 좌석점유율은 85%로 역대급이다. <교회 오빠>는 상영하는 극장 보다 상영되지 않은 극장이 훨씬 많다. 극장에 걸리더라도 하루에 고작 1회 내지 2회가 전부다. 상영시간도 아침 첫 회 아니면 늦은 시간을 배정 받아 단단히 마음을 먹지 않는다면 <교회 오빠>를 만나기란 쉽지 않다. 극장에서 외면당하는 독립예술영화의 설움을 고스란히 받는 것 같아 가슴이 아프지만 지금까지 기독교영화가 한국 영화계에서 받아왔던 기대와 실망을 교차시킨다면 꼭 서럽게 생각할 만한 일도 아니다. 개봉 5일 만에 달성한 3만 관객이란 숫자는 서울의 대형 교회 출석 교인 수보다도 적다. 기독교영화를 제작하고 상영하는 실무자들은 항상 기대감을 갖고 출발한다. 한국의 기독교인의 10%만 볼 수 있다면 1백만 관객을 모을 수 있다고. 이런 얘기를 예전에 했다면 영화가 가진 작품성이나 예술성 혹은 오락성을 무시하고 무조건 신앙영화는 재미가 없더라도 보러가란 말이냐는 타박을 들을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교회 오빠> 만큼은 이에 대한 변명을 적극적으로 들을 필요가 있다. 첫째는 다큐멘터리라는 장르로서 <교회 오빠>의 작품성은 높이 평가할 수 있다. 말기암 환자의 투병생활과 부부애 그리고 신앙을 잃지 않고 죽음을 맞이하는 태도를 다루는 영화의 정서적 접근은 결코 신파적이 아니다. 눈물을 짜내기 위해 억지스런 연출 보다는 인생의 희노애락 가운데 다가오는 죽음을 신앙의 자연스러움 안에서 표현하고 있다. 만일 이호경 감독이 대중의 충격적인 시선을 한 몸에 받길 원했다면 암환자가 겪는 고통을 극대화 시켰을 것이고, 죽음으로 끝을 맺는 환자 보다는 신앙의 기적으로 회복되는 주인공을 택했을 것이다. 다큐멘터리는 근본적으로 소재주의를 택한다. 일상에서는 보기 힘든 정말 특이한 인물과 사건을 쫓아다니는 특성이 다큐멘터리에는 있다. 부부가 함께 암투병을 해야 하고 죽음 앞에서도 신앙의 의미를 포기하지 않는 주인공의 이야기는 기독교 영화의 훌륭한 소재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교회 오빠>는 분명 다큐멘터리 장르임에도 불구하고 드라마처럼 느껴진다는 사실이다. 다큐멘터리는 ‘생각하는 영화’로서의 장점이 있는 반면 드라마는 생각하는 순간 망해버리는 단점을 갖고 있다. 즉 드라마는 관객이 정신을 차릴 수 없도록 계속 자극적인 장면을 쏟아내야 한다. <교회 오빠>는 다큐멘터리로서 충분히 죽음에 맞서는 신앙을 생각하도록 만든다. 영화가 구약의 욥기를 따라 진행되며 중요한 욥기의 성경구절이 화면에 자막으로 나타날 때 마다 관객들은 그동안 신앙생활 가운데 배운 욥과 성경의 지식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기독교영화를 위한 변론 그런데 이 영화를 보고난 후 관객들은 마치 한편의 잘 만든 드라마를 본 느낌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흔히 다큐멘터리에서 나타나는 카메라 앞에 서는 주인공들은 일반인으로서의 어색한 모습은 나타나지 않는다. 마치 배우가 연기하는 것처럼 상황에 잘 녹아들고 있다. 이것은 ‘편집의 예술’이 <교회 오빠>에는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주인공은 연기를 하고 있지 않으며(만일 다큐멘터리의 주인공이 연기를 하려든다면 그것은 다큐멘터리의 본래적 성격을 잃어버리는 일이 되고 만다) 죽음의 상황은 연출된 것이 아니라 그의 삶에 일어난 현실일 뿐이다. 이 영화의 주인공을 맡은 이관희 집사는 이제 다른 영화에 다른 배역을 맡아 출연할 수 있는 드라마의 배우와는 다르다. 그는 오직 한 편의 영화에 인생의 가장 중요한 것을 보여주고 영화계를 은퇴한 셈이 되고 말았다. 감동이란 말은 영화의 오락성 안에서 발견되는 또 다른 대중의 가치를 말한다. 대중영화가 오락성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유는 일상생활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즐거움을 관객에게 제공할 수 있다고 믿는 까닭이다. 감동은 즐거움을 포함하여 다양한 감정을 분출시키는 가운데 일상의 기대감을 넘어서는 경험을 넘어설 때 쓰는 말이다. 아무도 기억하지 못한다고 생각한 자신의 생일에 느닷없이 서프라이즈 파티를 열어주는 동료들에게서 우리는 감동을 받는다. 대통령이 비를 맞으며 전사자를 맞이하기 위해 활주로에서 기다리는 장면은 우리를 감동시킨다. 죽음의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믿음을 지키는 평범한 집사의 마지막 시간은 감동적이다. 기독교영화가 재미없고 작품성이 떨어져서 보지 않는다는 얘기는 이제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대한민국에는 제대로 된 기독교영화가 없다는 애기는 이제 할 필요가 없다. 부산국제영화제나 칸영화제만큼은 아니더라도 대한민국에도 올해로 16회를 맞은 기독교영화제인 ‘국제 사랑 영화제’도 여전히 활동 중에 있다. 문제는 우리 자신에게 있을 뿐이다. 오직 우리의 신앙은 교회 안에만 머무르고 있을 뿐이며 영화가 문화계를 지배하는 세상에는 이르고 있지 못한 실정이다. 맛집에 찾아가기 위해 돈과 시간을 써 본 적이 있다면 <교회 오빠>를 찾아 영화관을 수소문 해볼 일이다. 훌륭한 설교 말씀을 찾아 유튜브를 뒤적여 본일 있다면 <교회 오빠>를 찾아 볼 일이다. 신앙의 감동은 25년 평론을 해온 기독교영화의 전문가가 보장해드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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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
    2019-05-27
  • 복음 위에서 교회 밖을 보는 안목 길러야
    기독교적 정의를 말한다 반쪽짜리 그리스도인은 가라! 저자는 하나님의 주권은 온 우주에 편만하다고 믿는 철저한 개혁주의자이다. 한국교회의 위기를 신앙과 삶이 괴리된 이분법적인 사고에 있다며, 신앙과 삶을 일치시키는 교회 울타리를 넘어선 통전적인 신앙과 실천을 강조한다. 윤리신학을 전공한 신학자답게 설교 30편이 수록된 이 책은 1부 교회의 울타리를 넘어선 신앙 제2부 하나님나라와 세상나라 제3부 세상의 소망인 교회 제4부 정의와 공의 제5부 맘몬과 환경, 평화와 통일로 다양하고 균형 있게 구성되어있다. 눈에 띄는 것은 한, 두 달에 한 번씩 평화, 정의, 경제, 통일, 다문화 등의 다양한 사회적 이슈를 다루는 저자의 영적, 지적인 통찰력이다. 교회에만 머물고 있는 반쪽짜리 소시민적 그리스도인에게 일독을 권한다. || 저자 최현범 목사는 중견교회인 부산중앙교회에서 16년째 목회 중인 목회자이다. 서울대와 총신대 신학대학원(M.div)에서 수학하고, 사랑의 교회에서 부목사로 사역하다 독일로 유학하여 보쿰대학교에서 조직신학과 기독교윤리로 신학박사(Th.D) 학위를 취득했다. 도르트문트제일교회를 담임하기도 했으며, 학위논문이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 대한 연구로 그의 관심은 교회와 일상의 삶이 분리된 이원론적 신앙을 극복하여 온전한 크리스천으로 세상을 변혁하는 일이다. 부산기윤실의 공동대표와 극동방송 시사칼럼 등의 사회적 활동에도 열심이다. 나침반, 2019. 13,000원. ◇ 같이 읽으면 좋은 책 《함께 살아가는 마을과 교회》 정재영 지음 / SFC 《복음의 공공성》 김근주 지음 / 비아토르 ▌좌담: 김길구 전 부산YMCA 사무총장, 김현호 기쁨의집 대표, 김형기 팔복교회 목사 통전적인 신학으로 프레임 전환 필요“개혁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져야 한다. - 이 칼빈의 가르침이야말로 선교 역사 한 세기를 넘긴 한국교회가 담아야할 중요한 메시지입니다. 이분법적이고 이원론적인 신학에서 벗어나 통전적인 신학으로의 프레임의 변화가 필요한 때입니다.” 김길구 이번 모임은 최현범 목사님을 모시고 최근에 출간된 설교집 《교회 울타리를 넘어서》에 대한 얘기를 나눠보겠습니다. 저는 존스토트 목사님의 유작 《제자도》를 읽는 기분이었습니다. 균형 잡힌 그리스도인의 매뉴얼 같은…저희도 설교집은 처음인데 목사님께서 굳이 설교집 형태로 내신 이유는?최현범 가볍지 않은 주제들인데 독자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평소에 익숙한 설교집으로 출간했습니다. 설교는 우선 쉬워야 하니까요.김형기 그게 어느 정도 성공한 것 같아요. 저도 설교자인데 이 설교집은 어려운 주제를 쉬우면서도 깊이 있게 영적, 지적, 정서적 필요를 다 아우르고 있어 매우 유익했습니다.김현호 저는 특히 4,5부의 정의와 공의, 맘몬과 환경, 평화와 통일 같은 평소 쉽게 접할 수 없는 주제들을 다루고 있어 큰 도전이 되었습니다.김길구 이 책을 쓴 동기일수 있는데 목사님은 머리말에서 ‘한국교회는 프레임의 변화가 필요하다! 고 하셨습니다. 이유는?최현범 위기 때문이죠. 과거에는 교회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가 교인들과 부딪히는 과정에서 생겼다면, 최근에는 재정, 세습, 성적일탈 및 수구적인 정치행태 등 공적인 영역으로 확산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로 인해 젊은이들의 이탈이 심각해요. 사회적 영향력도 예전만 못하고.김현호 목사님은 그 이유를 세상과 교회를 나누는 이원론적 신앙에서 찾으셨는데‥최현범 100년 전 얘기입니다만 3.1운동을 보세요. 교인이 국민의 1%에 불과했지만 나라의 큰 희망이었지요. 지금은 덩치만 커졌지 그렇지 못합니다. 한국초기의 교회는 영적인 부흥성장뿐 아니라 신분타파, 여성운동, 인권존중 등 당면한 사회의 문제를 끌어안고 민족의 현실과 유리되지 않은 채 사회발전의 견인차 역할을 했습니다.김형기 활화산처럼 분출했던 3.1운동이 일제의 총칼 앞에 좌절되자 그 공허한 마음을 이용도 목사 같은 분들의 신비주의적 신앙이 자리를 잡게 되고, 현실에 눈감은 내세지향적인 신앙으로 흐르게 되면서 사회성을 상실한 채 신앙이 개별화, 내면화 되고 말았어요. ‘생각하지 않는 죄’최현범 종교개혁 이후 유럽의 기독교 전통에는 세상과 교회의 관계에 대한 2가지 견해가 있어요. 전 우주적인 그리스도의 통치를 바탕으로 세상나라와 하나님나라를 분리하지 않은 칼빈의 <그리스도 주권설>과 정교분리를 주장한 루터의 <두 왕국설>이지요. 물론 루터는 세속권력을 끌어들여 무력을 행사하는 로마가톨릭교회나 정부로부터의 간섭을 피해 교회를 보호하려는 의도였지만 결과적으로 이러한 정교분리는 나중에 히틀러의 나치주의를 교회가 용인함으로써 유대인 학살과 제2차 세계대전의 단초를 제공했다는 평가도 듣게 됩니다. 김현호 1974년 WCC에 대항해서 복음주의권이 스위스 로잔에 모여서 사회참여를 통한 정의, 평화문제 등에 그리스도인의 사회참여를 선언했는데‥최현범 그때 한국교회는 1972년 유신정권의 출현으로 사회분위기가 사회참여라는 말조차 꺼내기 힘들었던 엄혹한 시절이라 엄두를 못 냈지요.김형기 1961년 독일 SS친위대장 히믈로의 오른팔이었던 ‘아이히만’이 600만 유대인 학살의 주범으로 사형 당하는 세기의 재판을 참관하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를 쓴 한나 아렌트의 예화를 드셨는데, 그런 세기의 학살자도 우리처럼 가족을 사랑하고, 직장에서는 무슨 일이든 시키는 대로 성실히 일하고, 교회생활도 잘하는 그저 평범한 이웃아저씨에 불과했다는 충격적인 예화가 가슴에 와 닿습니다.최현범 그런 평범한 사람이 왜 세기의 엽기적인 괴물이 되었을까요? 한나 아렌트는 그의 죄목을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생각하지 않는 죄’”라고 했습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교회 안에서는 거룩한 성도인데, 교회의 울타리만 넘으면 하나님과 무관한 삶을 살아요. 세상은 하나님이 아닌 마귀가 득세하는 죄악된 곳이니 세상의 원리에 타협하며 ‘이중윤리’로 사는 겁니다. 사회가 부패하니 정직하게 살다간 손해를 본다는 피해의식 때문이죠. 그러니 그리스도인과 세상사람을 구별할 수 없어요. 도리어 세상의 왜곡된 문화만 교회 안으로 들어와 더 혼탁해지죠. 동성애, 낙태 반대 등 개인윤리에 머물러 김현호 목사님은 현재의 개신교가 번영신학이나 기복신앙 등 영광신학에 물들어 있다고 하셨는데‥최현범 원래 이 말은 루터가 복음을 왜곡하여 면죄부를 파는 부패한 가톨릭의 신학을 영광의 신학, 그리고 교회갱신을 위해 고난을 받는 자신의 신학을 십자가 신학이라고 했는데 참 아이러니 한 것은 개혁을 앞세우며 시작한 개신교가 500년이 지난 오늘날 개혁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개신교가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위한 고난이 아닌 돈과 권력을 얻으려 하면서 일어난 일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해서 고난 받으며, 헌신과 섬김으로 세상에서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많은 십자가의 신학으로 돌아가야 합니다.김길구 한국의 교회는 그동안 정치적으로 무관심하다 최근에 일부가 정치화하는 경향이 있어요.최현범 3.1운동이후 대부분의 한국교회는 정교분리에 충실하여 정치적인 분야에서는 무관심과 중립으로 일관하다 노무현 정권에 이르러 자기목소리를 내기 시작했어요. 기독NGO를 조직하고 반정부집회를 열고, 설교대에서 목사가 정치적 발언도 해요. 한국교회의 정교분리는 사실상 폐기되었습니다. 다만 동성애, 낙태 반대 같은 개인윤리에 머물러 우리사회가 당면한 부의 불평등 등 사회구조적인 면에 소극적이란 점은 생각해 봐야죠.김현호 기독교윤리적 측면에서 이런 현상을 어떻게 봐야할까요?최현범 이 사회를 더 나은 사회로 만드는 것이 과연 신앙인들이 해야 할 일일까요? 저는 대학생 시절에 이런 고민 없이 살았어요. 온 나라가 민주화운동으로 떠들썩해도 이원론적 신앙에 갇혀 세상과 교회를 철저히 구분했지요. 오랜 시간이 지나고 목사가 되겠다고 총신대 신학대학원에 입학하니 군부독재가 저항에 굴복한 6.29 선언을 즈음하여 신학생들과 함께 저도 데모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학교는 물론 저에게도 놀라운 경험이었죠. 그후 이 문제를 깊이 고민했습니다. 유학을 결심하고 학위논문도 국가와 교회와의 관계에 대한 것을 썼지요. 그래서 얻은 결론은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일 뿐 아니라 세상의 주님이시다’ 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한손엔 성경을, 또 한손엔 신문을 들어야 합니다. 세상에서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통치가 더 확장되도록, 우리사회가 보다 정의롭고, 자유와 평등의 가치가 실현되어야합니다. 정의를 묻는다김길구 본문 중 ‘한국교회는 너무 오랫동안 성경 속의 정의를 가르치지 않았다’는 말이 인상적인데요? 수년전 마이클 샌들은 하버드대학 강의록 ‘정의란 무엇인가?’를 통하여 한국의 ‘정의론’에 불을 지폈는데 이 책이 미국에서는 10만부 정도 팔린 것에 비해 우리나라에서는 100만부가 넘는 장기베스트셀러가 되었어요. 그 이유를 ‘한국사회는 정의롭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서’라고 분석했는데‥ 과연 ‘기독교적 정의’는 무엇입니까?최현범 우리사회의 문제는 ‘공의의 부재’와 ‘정의의 실종’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에 수없이 등장하는 공의와 정의를 내가 용서받고 의롭게 되는 ‘칭의’로 바꾸는 경향이 있어요. 복음을 단순히 ‘어떻게 하면 내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라는 틀 속에 가둬버립니다. 평화라는 말도 마음의 평안으로 해석하고, 가난도 마음의 가난으로 이해하려고 해요. 그러다보니 평화와 빈곤의 문제를 우리와 무관한 일로 생각합니다. 이처럼 성경의 중요한 말씀들을 개인구원과 내면의 문제로 바꾸면 본래의 의미를 잃게 되겠죠. 성경이 말하는 정의는 비교적 명료합니다. 우선 공정한 재판입니다. 국가는 선과 악을 제대로 분별하여,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악은 벌주고, 선은 상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빈곤의 문제를 치유하라는 것입니다. 사회적 약자를 돌봐 더불어 사는 공동체를 만들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peacemaker로서 평화를 추구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이곳이 공정한 사회이며 기독교적 정의가 실현되고 있는지 반문해야 합니다. 주님의 통치가 세상 속에서 이루어지도록…김길구 수고하셨습니다. 다음 호에는 김형국 목사의 《하나님나라의 도전》이란 주제로 얘기해 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정리 : 김길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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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독교 교양 읽기
    2019-05-13
  • [영화] 예술이 신앙의 가치를 위협할 때
    난해하거나 인간적이거나 1970, 80년대 마틴 스콜세지(Martin Scorsese) 감독의 영화 <택시 드라이버>(1976)와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1988)의 각본을 써서 우리에게도 친숙한 폴 슈레이더(Paul Schrader)감독이 개성 넘치는 자신만의 영화를 들고 우리 곁으로 찾아왔다. 2천 년대에 들어와서도 꾸준히 작품 활동을 해왔지만 자신의 개성을 살린 영화를 만드는데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지는 못했었다. 공포영화에서 범죄와 스릴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대중성을 확보하려는 노력은 있었지만 그렇다고 흥행에 크게 성공하지도 못했고, 한 두 작품을 제외하고는 평론가들로부터 별다른 주목도 받지 못했다. 그의 특기는 종교적 감각을 활용한 부조리한 인간의 세계를 심미적인 감각으로 표현하는 일이다. 세계적인 논란을 일으켰던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의 시나리오를 집필하면서 그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의 꿈꾸는 듯한 환상 속에서 인간으로서의 삶을 살기 원하는 욕망과 십자가에 달려야 하는 운명가운데 갈등하는 모습을 그린 적이 있었다. 당연히 가톨릭을 포함하여 세계 교회들이 이 영화를 성토했고 상영반대 시위까지 벌어진 적이 있었다. 그의 최신작 <퍼스트 리폼드>(First Reformed)는 예수가 아닌 목사라는 성직자를 통해 다시 한 번 부조리한 인간의 욕망을 들추면서 어쩌면 그가 제일 잘 만들 수 있는 내용을 자신의 특기를 살려서 만든 자기 고유의 영화라 할 수 있다. 교회비판의 외형 속에 담긴 내면의 부조리 군목 출신으로 자신의 아들을 이라크 전쟁에서 잃어버린 에른스트 톨러 목사(에단 호크)는 250년 역사를 지닌 시골의 작은 교회 ‘퍼스트 리폼드 처치’의 담임목사로 부임한다. 화란의 개혁교단 출신의 이민자들이 세운 역사와 전통이 있는 교회지만 지금은 가끔씩 관광객들이 들려가고 주일이면 열 명도 채 안 되는 교인들이 와서 예배드리는 박물관식 교회가 되고 말았다. 대신 이 교회를 발판으로 인근 도시에 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형 예배당이 건축되어 ‘퍼스트 리폼드 처치’는 현대적인 모습으로 외형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그런데 이 조용한 시골교회의 목사 톨러는 여성신도인 메리(아만다 사이프리드)가 자신의 남편을 상담해달라는 부탁을 받으면서 그의 삶은 조용히 그러나 심각한 파국으로 치닫게 된다. 메리의 남편 마이클은 극렬한 환경주의자로 상담을 진행하던 중에 숲 속에서 자살을 하게 되고 톨러 목사는 메리를 위로하며 그녀에게 남다른 느낌을 받고 아울러 신비적인 경험조차 하게 된다. 툴러 목사는 대형 교회를 건축하는데 큰 기부를 한 에너지개발 업체 대표인 교회 성도로부터 환경주의자의 장례식에 성가대원 일부가 참석하고 노래한 것에 대한 불만을 제기하면서 모종의 결심을 하게 된다. 톨러 목사는 리폼드 처치의 설립 250주년 기념식을 준비하면서 마이클의 유품으로 나온 자살폭탄용 조끼를 입고 퍼스트 리폼드 처치에 들어가려던 중 메리가 있음을 알고 당황해 한다. 그러나 그는 토끼 울타리 용으로 사용했던 철조망을 몸에 감은 채 세제를 먹고 고통을 받으며 죽음에 이르는 길이 고난을 지고 가신 예수의 길을 따르는 것으로 생각하며 실행에 옮기려던 중 그를 찾아 온 메리와 마주치게 된다. 이 영화의 줄거리를 이렇게 설명하는 것은 단지 영화를 보지 못한 사람들을 위한 것일 뿐이다. 영화를 이미 본 사람들에게 이러한 줄거리 요약은 별 의미가 없다. <퍼스트 리폼드>는 논리적인 이야기 전개를 통해 관객을 설득하는 영화라기보다는 감독의 독특한 이미지 구성 방법에 의존하여 뭔가 부조리한 현실세계와 그것으로부터 해방을 원하는 인간의 심리를 영상이미지로 표현하기 때문이다. 즉 보면 알 수 있지만 말로 설명해서 이해시키기란 결코 쉽지 않은 영화인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영화를 독자들에게 이해시키기 위해 설명을 한다면 놓치지 말아야 할 중심 단어는 ‘부조리’에 있다. 부조리를 읽다 영화 <퍼스트 리폼드>를 교회나 기독교신앙의 경험을 갖고 있지 않은 관객이 본다면 정신이상 증세를 보인 목사의 테러미수 정도로 읽혀질 수 있다. 아들을 전쟁에서 잃은 상처를 회복하지 못한 채 정신적인 어려움을 겪는 성직자가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그는 자연파괴를 통해 돈을 번다고 믿는 에너지 기업이 후원하는 대형교회의 행사에 불만을 품고는 교회 행사에서 폭탄조끼를 터뜨려 자폭하려는 시도를 영화는 보여주는 까닭이다. 그래도 영화가 주는 메시지가 있을 것이란 생각에 곰곰이 따져보는 관객이라면 두 가지의 비판적 메시지를 발견할 수 있을지 모른다. 첫째는 환경파괴에 무관심한 현대교회에 대한 부정적 시선이며, 다른 하나는 기업화하는 대형교회에 대한 비판적인 메시지를 읽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두 가지는 영화를 통해 충분히 구현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영화가 전달하고자 하는 핵심 메시지는 아니다. 오히려 이 두 가지의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보다 중요한 다른 것을 전하려는 의도로 볼 수 있다. 즉 자살한 교회의 성도가 옛날 작은 교회에 출석한 환경운동가인 반면에 대형 교회를 건축하는데 기여한 성도는 환경파괴를 일으키는 에너지 기업의 대표란 점 말고는 구체적인 상황은 나타나 있지 않다. 에너지 기업의 대표가 교회에 다니면서 하나님이 창조한 세상을 얼마나 파괴하고 있으며 그 것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등에 대한 구체적인 묘사는 드러나지 않는다. 교회 또한 환경훼손에 무관심하거나 반성경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지 않다. 어쩌면 (이것은 필자가 현대교회에 너무 익숙한 탓일 수도 있으지 모르지만)영화는 단지 외형적 규모가 클 뿐이지 자본주의 사회에 익숙한 부자교인들도 다니는 보통의 평범한 교회의 모습만을 비출 뿐이다. 오히려 작은 리폼드 처치로부터 성장한 대형교회의 흑인 목사는 백인 툴러 목사를 청빙한 장본인이이며 동시에 그의 안위를 걱정하며 그가 행사를 마친 후에는 정신적인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도움을 줄 것을 제안하는 사려 깊은 목회자로 등장한다. 우리는 이 영화가 철저히 툴러 목사 개인의 삶과 신앙에 초점이 맞춰져 있음을 놓쳐서는 안된다. 즉 영화 제목은 ‘퍼스트 리폼드’이지만 내용은 어디까지나 교회가 아닌 이 교회의 담임목사인 툴러에게 집중되어 있는 것이다. 일기는 쓰지만 은혜를 구하는 데는 실패했다 정말 적막하고 어쩌면 수도원적 생활이 어울릴 것 같은 시골의 목사관에서 매일 일기를 쓰는 툴러 목사의 삶은 깊은 신앙으로 가는데 최적의 환경일 수 있다. 시끌벅적 시장 같이 시끄럽지 않으며 설교를 준비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도 가질 수 있고 주변 환경에 대한 불만이나 부족함이 있다면 얼마든지 개선하기 위한 시도도 가능하다. 비록 큰 교회의 지원을 받지만 그는 250년 된 교회의 담임목사이며 주님으로부터의 목회적 소명을 받은 것이 있다면 그것을 실천할 수 있는 여건은 조성되어 있다. 그러나 아울러 그는 아들을 전쟁터에서 잃고 아내와는 이혼한 상태에서 알코올 중독증세도 보이는 등 성직자로서 불안한 문제를 갖고 있다. 기도로 못한 이야기를 일기에 적는 다고 하지만 그가 무슨 기도를 하는지 관객들은 알지 못한다. 영화는 자신의 어려움을 신앙 안에서 극복하지 못한 채 외부의 문제에 대한 공격적이며 자기 파괴적인 행동을 순교로 착각하는 주인공의 모습을 보여준다. 즉 자신이 비판한 부조리한 세상을 닮아가고 있는 것이다. 툴러 목사를 이해하는 방법은 폴 슈레이더 감독이 시나리오를 쓴 영화 <택시 드라이버>의 주인공 트레비스(로버트 드 니로)를 떠올리는 일이다. 칸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받으며 문명화된 도시사회의 인간소외를 잘 그렸다는 평판을 받았지만, 핵심은 부조리한 세상에서 스스로를 영웅화된 이미지로 그려나갈 때 생기는 또 다른 부조리한 모습에 있다. 트레비스는 베트남 전쟁의 후유증에 시달리며 밤에만 운전하는 뉴욕의 택시 운전사다. 부패한 도시 뉴욕을 청산하겠다는 일념으로 그는 어린 여성을 성매매하는 포주들을 권총으로 쏴 죽인다. 악한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스스로 심판자 역할을 자처하지만 그것은 또 하나의 부조리를 발생시킬 뿐이다. 툴러 목사는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인정하지 못한’(딤후3:5) 인물을 대표한다. 겉으로는 환경을 생각하고 자본주의에 물든 기업형 교회를 비판하는 것 같지만 경건한 신앙의 기본인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을 닮는 데는 실패했다. 성직자로서 극렬한 환경주의자인 마이클에게 영향을 주기 보다는 오히려 그에게 영향을 받아 그가 계획했던 자살폭탄조끼를 입고 마는 부조리한 인간의 모습을 보인다. 주인공 툴러 목사는 자신과 주변의 교회, 그리고 성도들을 폭탄으로 제거되어야 할 부조리한 존재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세상은 멸망하고 말 것인가? 부조리한 세상을 구원할 존재를 영화는 놀랍게도 마이클의 미망인 메리로 상정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메리는 가톨릭의 성모 마리아와 같은 이름이며, 툴러 목사가 급히 자살폭탄 조끼를 벗어던졌던 이유도 메리가 교회 기념식에 참석한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거기다 그녀는 임신한 상태다. 메리와 그녀의 복중에 있는 아이는 툴러 목사로부터 보호받음으로써 결과론적으로 퍼스트 리폼드 교회에 있던 사람들은 살 수 있었다. 감독의 가톨릭 신앙이 작용했을 것으로 보는 이 같은 해석은 부조리한 세상의 왜곡된 구원의 모습이다. 툴러 목사는 멸망과 구원에 대한 인식을 환경주의자가 아닌 성경으로부터 얻어야 했고 그에게 필요한 것은 메리에 대한 체험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경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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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4-29
  • 교회를 경로로 요원의 불길처럼 전국에 파급
    한국에 얽힌 문제 삼일운동에서 해법찾아 지난 3월1일은 삼일운동 100주년 기념행사로 온 나라가 떠들썩했다. 교계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예배 중에 독립기념문을 낭독을 하는가 하면 교인들이 태극기를 흔들며 당시를 재현하기도 했다. 한 달이 지난 오늘은 어떤가? 삼천리 방방곡곡에 하나가 되어 메아리 친 외침이 무색하게 나라는 여전히 동강나고, 사회는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갈라져있다. 저자는 100년 전 일어난 이 운동의 정신을 세계열강의 외세에 맞선 독립운동이자 대중민주주의운동, 일제의 폭압에 맞선 비폭력 평화운동, 민족정신과 시대정신이 만나 한국근현대사의 중심과 뼈대를 이룬 운동으로 규정하면서, 한국근현대사의 정신과 철학의 꼭대기에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실타래처럼 얽기고 설긴 문제의 해법을 삼일정신에서 찾고 있다. || 저자 박재순은 어릴 때부터 새벽예배도 열심히 다닐 정도로 신앙생활에 열심이었다. 서울대학교에서 철학을 한신대학교에 편입하여 안병무 교수로부터 성서신학과 민중신학을 박봉랑 교수에게 바르트와 본회퍼를 배웠다. 한국신학연구소에서 국제성서주석서를 번역하였으며 대학시절부터 함석헌 선생의 씨알사상에 매료돼 씨알사상연구회 회장을 지내고 재단법인 씨알사상연구소를 설립한 이래 소장으로 재직하면서 씨알사상을 알리는 일을 평생의 소명으로 삼고 있다. 저서로는 《함석헌의 철학과 사상》 《한국생명신학의 모색》 《예수운동과 밥상공동체》등이 있다. 홍성사, 2015. 10,000원. ◇ 같이 읽으면 좋은 책 《3.1운동과 민족대표 16인》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엮음 《세상을 밝힌 한국기독교 저항사, 저항하는 그리스도인》 강성호 지음 / 복있는 사람 ▌좌담: 김길구 전 부산YMCA 사무총장, 김현호 기쁨의집 대표, 김형기 팔복교회 목사 기독교는 앞장섰고, 전국적으로 확산시켰다 “ 당시 기독교인은 한국인구 1,600만명 중 20만명에 불과했으나 수많은 지식인과 지도자들, 학생, 학교와 교회를 중심으로 삼일운동에 앞장섰고, 삼일운동을 전국적으로 확산시켰다.” 3.1운동은 기독교 민족운동 김길구 3.1운동 100주년기념사업으로 전국이 떠들썩할 때를 피해서 차분히 기독교적 의미를 되새겨 보자는 취지로 한 달 늦게 마련했습니다. 100주년을 맞았던 소회가 어떠했는지? 김형기 나라 안팎에서 여러 어려움에 직면한 시점에 맞이하는 100주년이라 더 많은 생각을 했어요. 기독교가 난국에 국민통합의 주역이었는데, 지금은 어떤 모습인지 스스로 반성하며 지냈습니다. 김현호 여러 분야에서 다양한 행사로 기념하는데 비해 기독교출판계는 삼일운동의 평가에 인색한 편이어서 아쉬웠습니다. 제대로 된 저술은 두어 권 밖에 없어서 선정하는데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김길구 목사님은 선정 작업을 할 때 적극적으로 이 책을 추천하시더니 막상 읽으시고는 많은 문제점을 지적하셨는데‥어떤 점이 문제였나요? 김형기 저자와는 친구사이인데 막상 기독교보다는 천도교의 영향력을 크게 평가했고, 결론 부분에서는 씨알사상에 편향된 느낌이 들었습니다. 신학자이기도 한데 3.1운동에 대한 구속사적 언급이 미흡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김현호 이 책은 교회사가 아닌 한국사의 맥락에서 이 운동의 정신과 철학을 말하고 있어요. 이 운동의 위대성은 위기의 국면에 종교의 차이를 넘어 온 백성과 기독교와 천도교와 불교가 하나가 되어 이룬 세계사적으로도 드믄 비폭력 평화운동이라는 점입니다. 김길구 삼일운동을 유영모, 함석헌 선생의 민(民)의 개념 즉 씨알들이 스스로 함께하면서 새로운 세상을 열려고 한 운동으로 보았는데, 이들은 한국적 언어로 기독교를 말하는 기독교사상가로서 기존의 교리에 억매이지 않아 일반교인들이 읽기에는 다소 불편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김형기 3.1운동은 민족사의 범주를 넘어서 세계사적 의미가 있는 대 사건입니다. 저자가 이 책에서 밝힌 바와 같이 중국의 5.4운동, 인도 간디의 비폭력 대영 항쟁과 필리핀, 베트남, 이집트의 민족운동에도 영향을 준 것입니다. 김현호 이 책은 2.8독립선언에 대한 언급 없이 바로 3.1운동으로 들어갔어요. 아시다시피 2.8독립선언은 적국 일본의 한복판 동경YMCA회관에서 기독교인들이 주동이 되고 춘원 이광수가 선언문은 썼지요. 김길구 저자는 당대의 천재라던 30세 최남선이 쓴 명문 3.1독립선언문의 작성에 영향을 끼친 이로 손병희 선생을 지목합니다. 그가 준 3대 지침은 평화적이고 온전하며 감정에 흐르지 않을 것과 둘째 동양의 평화를 위하여 조선의 독립이 필요하며, 민족자결과 자주독립의 전통을 바탕 한 정의와 인도에 입각한 운동을 강조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다음으로 기독교인인 안창호의 민족정신의 주체적 자각과 실천을 통해 국가주의를 넘어 세계평화를 지향한 교육입국운동도 영향을 끼쳤다고 합니다. 김형기 당시 우리나라에 온 선교사들은 청교도적인 신앙관을 가진 분들이었죠. 밖으로는 선교를 위하여 정·종분리를 주장했으나, 종교의 자유를 찾아 미국으로 이주한 선조들의 개척정신을 경험한 이들의 가르침은 나라를 빼앗긴 이 나라에 복음이 혁명적 힘으로 작용하여 강인한 독립심과 엄격한 도덕성, 부정에 대한 항거에 저항할 수 있는 추동력이 됐다는 평가도 있어요. 또한 주권재민과 공화정을 추구한 민주정신은 전적으로 기독교의 영향이었다고 봅니다. 김현호 성서는 어떤 면에서 저항의 책입니다. 구약성서는 이런 저항의 사례집이라고 할 만하지요. 이집트에 맞선 모세, 폭군으로 전락한 사울왕에 저항한 다윗처럼. 한국성도들은 당연히 일제의 침탈과 박해에 저항한다는 것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였지요. 독립선언문에 이름을 올린 33인 중 16명, 운동을 촉발한 48명 중에 그 절반이 교인들이었다는 사실이 말해준다고 봅니다. 김형기 그럼요. 기독교 십자가 신앙의 배경 없이 거국적 비폭력 대중항쟁은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물론 온 겨레가 함께한 거사였지요. 총독부의 축소된 통계에 따르더라도 시위에 참가한 인원이 전 국민이 1,600만 명이 채 안되었는데 200만 명이 넘고, 전국 36개의 군 가운데 35개 군에서 참가한 기록과 당시 선교사들의 리포트에 ‘예수를 믿는다는 말과 독립시위에 참가했다는 말은 지금 한국에서는 동의어로 쓰인다’ 고 보고할 정도였으니까요. 예수를 믿는 것과 독립시위는 동의어 김길구 조선왕조가 망하고 10년이 안된 시점에 일어났고 그것도 고종의 장례에 참여한 군중시위 이후 다시 과거의 군주제로 돌아가자는 움직임도 없이 비폭력 평화운동으로 공화정을 외치고 자유와 평등, 그리고 세계평화를 주장한 것은 대단한 선언이 아닐 수 없습니다. 김형기 그래서 저자는 한국근현대사의 꼭대기에 삼일운동이 있다는 것이지요. 위기의 시대에 우리민족의 정신과 열망이 가장 깊고 높이 들어나고 실현됐다는 주장입니다. 세계사에서 이런 예는 없었지요. 우리의 민족 지도자들이 100년 앞을 본 것이지요. 김현호 민족대표 33인 중 16명의 기독교인들의 면면을 보면 기독교와 천도교의 가교역할을 한 남강 이승훈, 가난과 싸우며 수형생활과 교회부흥을 이끈 이필주 목사, 권서인으로서 한국최초의 목사 7인중 한분인 양전백 목사, 대표적 영적 지도자 길선주 목사, 민족목회자 동오 신흥식, 대금업자에서 민족대표가 된 춘헌 이명룡 장로, 후에 기독교 친일의 상징이 된 정춘수, 조선에 YMCA운동과 투옥지사로서 선교사의 생을 다한 최성모 목사. 김형기 그 외에도 신앙적 결단으로 민족대표가 된 신석구 목사, 민족대표에서 임정요인으로 구국운동의 실천가 김병조 목사, 법정에서 대한이 독립하면 공화정부가 되고 열강의 대열에 서게 될 것이라고 한 유대여 목사, 동학에서 기독교로 귀의한 오화영 목사, 조선독립은 예수생명의 힘으로 된다고 한 근곡 박동완 목사, 당시엔 누구보다 열심이었지만 후에 친일파가 된 박희도 목사, 3.1운동 거사의 가교 입법위원 이갑성 선생, 북으로 간 김창준 목사였습니다. 김길구 3.1운동의 기독교 역할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도 있어요. 이를테면 손병희에게 거사자금 500원을 받은 것과 공식조직을 통해 3.1운동 참여를 공식적으로 결의한 사실도 없이 개인자격으로 참여했다든지 선교사의 반대로 거사 장소를 태화관으로 옮긴 일 등 입니다. 김현호 교회사학자 민경배 박사는 ‘기독교회가 이 운동의 근원적 통로요, 맥락이었다’고 주장하는 근거로 교회가 가진 국내의 뚜렷한 전국적 조직, 해외와의 유기적 네트워크를 통한 실질적 활동을 들고 있어요. 김형기 서명에 참가한 16명의 대표 중에 세분은 당일 참석을 못했고, 다른 종교와의 연대에 미온적인 기류도 있었지요. 천도교가 이전의 동학의 정신을 계승하였으니 서양 문물을 적대시하고, 서양에서 들어온 기독교에 대한 반감을 무시할 수 없었겠지만 나라를 위해서 하나가 되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직도 끝나지 않은 미완의 운동 김길구 흔히들 한 세기를 지난 3.1운동을 미완의 운동이라고 합니다. 무엇이 끝나지 않았을까요? 김현호 일제강점과 분단은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치와 약소국의 소홀한 내부개혁 때문이지요. 북핵사태를 보더라도 우리의 선택권은 매우 제한적이죠. 그런 면에서 우리민족의 자주적인 평화통일의 묵은 과제가 있습니다. 김형기 민족의 자주독립, 민주주의에 대한 갈망, 세계평화에 대한 우리의 비전을 천명한 3.1운동의 성공과 실패를 타산지석으로 삼아야겠죠. 교계가 갈등과 분열을 극복하고 하나 되어 우리 사회의 양극화를 극복하고, 평화통일을 이루어 반듯한 나라를 세우는 것이 이 시대의 과제가 아닐까요?. 김길구 이만열 교수는 ‘3.1운동은 기독교와 민족 운동의 두 가지 측면이 있다고 합니다. 기독교운동의 측면은 정의, 자유, 평화에 기초한 하나님 나라의 건설과 확대, 민족운동의 측면은 자유와 평등, 해방을 목표로 한 독립국가와 민족자주에 있다 고 했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다음은 저자인 최현범 목사님을 모시고 신간 《교회 울타리를 넘어서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정리: 김길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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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독교 교양 읽기
    2019-04-12
  • 선교와 사랑 사이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찾다
    새로운 기독교영화의 탄생 이보람 감독의 영화 <콜링>은 디지털 세대에게 어울리는 새로운 기독교영화다. 인터넷과 스마트폰에 익숙한 디지털 세대들에게는 비싼 관람료와 극장까지 가야하는 번거로움 대신에 와이파이가 되는 곳이면 어디서든 공짜로 볼 수 있는 영화가 우선 선택을 받게 마련이다. 이것은 그동안 기독교영화란 극장에서 상영되는 대형 성서영화라는 선입견을 가진 기독교인을 놀라게 하는 일인 동시에 문화의 변화에 크게 개의치 않았던 한국기독교영화계에 가히 새로운 바람을 일으킬 만한 일이란 점에서 주목받기에 합당하다. 적어도 두 가지 면에서 <콜링>은 새로운 변화를 보여준다. 첫째는 영화를 상영하는 플랫폼(platform)으로 일반 극장이나 DVD가 아닌 유튜브를 택했다는 것과 둘째는 젊은 기독교인들의 일상적인 삶과 고민을 다루었다는 점에서 그 변화는 물씬 느껴진다. 플랫폼의 변화는 디지털 시대가 한창 진행 중인 현시점에서도 가장 중요한 이슈가 되고 있다. 디지털 콘텐츠를 제작하는 기업의 입장에서는 어떤 플랫폼을 선택하느냐가 성패를 가늠한다할 만큼 핵심 문제로 떠오르고 있는 시점에서 <콜링>은 일반 영화관이나 DVD가 아닌 유튜브를 선택했다. 즉 영화라는 문화콘텐츠를 전달하는 플랫폼에는 영화관과 TV와 같은 전통적인 상영방식을 비롯하여 이제는 과거 유물이 된 VCR과 우리나라에서는 적극적인 호응을 끌어내는데 실패한 DVD가 있다. 또한 최근 각광받고 있는 IPTV나 인터넷을 통하여 원하는 영화를 선택해서 볼 수 있는 VOD 등도 영화를 볼 수 있는 플랫폼의 성격을 지닌다. 과거 영화의 경우 플랫폼은 원 소스 멀티 유즈(one-source multi-use) 시스템 안에서 이해되곤 했다. 즉 한 편의 영화를 만들어도 그것이 극장뿐만 아니라 DVD와 영화전문 케이블 TV 그리고 컴퓨터 게임과 책으로 까지 연계되어 다양하게 활용될 수 있다는 점에서 다양한 매체를 통해서 활용될 가치가 높다는 의미로 해석되어졌다. 그러나 오늘날 플랫폼은 스마트폰과 연계되어 정보콘텐츠를 디지털세계 안에서 전달받을 수 있는 시스템 환경을 말한다. 쉽게 말자하면 아마존이나 구글, 페이스북 등이 플랫폼에 해당한다. 유튜브나 인터넷 VOD는 가장 성장세가 빠른 영화의 플랫폼들이다. 영화진흥위원회가 밝힌 지난 해 한국인들의 영화관람 태도가 이를 증명한다. 2018년 극장을 찾은 관객의 수는 총 2억1,649만 명으로 1인당 영화관람 편수는 4.18회에 해당한다. 이것은 세계최고 수준의 영화관람 경향을 보이는 것으로 한국의 영화의 나라임을 증명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수치는 2017의 2억 1,987만 명 보다 약 3백만 명 이상 줄어든 수치이기도 하다. 그러면 한국의 영화에 대한 관심도가 떨어지는 것일까? 전혀 그렇지 않다. 극장을 찾는 관객 수는 줄어들었지만 극장입장권 판매액은 오히려 늘어났다. 이유는 극장관람료가 올랐기 때문이다. 평일 일반 영화를 관람비가 1만원이고 3D나 4D를 주말에 보려면 2만원을 줘야하는 현실은 주머니 사정이 열약한 학생들의 입장을 줄어들게 만든 주요한 원인이지만 전체관람료 수익은 증대시킨 또 다른 이유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관람료에 부담을 느낀 한국의 젊은층들이 대신 찾아간 곳은 넷플릭스(Netflix)를 볼 수 있는 인터넷 VOD시장이었다. 흔히 말하는 디지털 온라인시장의 규모는 극장관람료 수입이 감소한 것과는 다르게 상승세에 있다. 2017년 4,362억 원이었던 온라인 영화시장은 2018년 4,739억 원으로 8.6% 증가했다. 이것은 영화관객을 만날 수 있는 곳이 극장만이 아니며 특히 젊은 사람들에게 복음과 기독교의 가치를 전하기 위해서는 인터넷 세계와 유튜브 세상에 발을 옮겨놓을 수 있어야 함을 시사 하는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보람 감독의 영화 <콜링>이 유튜브를 놀이공원 삼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다가가려는 시도는 매우 적절한 문화선교의 모습이라 할 수 있다. 현실적 삶을 코믹하고 성경적으로 풀다 <콜링>이 이전의 기독교영화들과 다른 두 번째 면모는 작품의 내적인 표현방식에서 나타난다. 주제는 선교를 향한 하나님의 부름심과 응답을 다루고 있지만 묘사하는 방식은 매우 현대적이며 새롭다. 중고자동차 딜러로 일하는 재민(임재민)은 어느 날 자동차를 보러 온 시연(김시연)을 만나면서 새로운 사랑을 꿈꾼다. 예전에 좋아했지만 오랫동안 보지 못하는 동안 시연은 선교사로 활동하고 있었고 재민은 정직한 기독교인으로서 나름 열심히 살아가는 삶을 살고 있는 중이었다. 영화가 보여주는 재미는 선교사로의 부르심과 옛 사랑에 대한 성취 사이의 갈등 속에서 전개된다. 재민은 시연과의 사랑이 이루어진다면 하나님께서 시연이를 따라 선교사로 부르신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고, 만일 시연과 다른 인생을 산다면 그것은 선교사로 부르신 것이 아니라는 매우 감정적인 판단을 하고 있음을 영화는 보여준다. 교회에서 나름 진지한 신앙생활을 하지만 아울러 연애와 결혼에 대한 관심이 많을 수밖에 없는 청년들이 흔히 범하기 쉬운 실수를 영화는 갈등의 소재로 삼고 있다. 물론 영화는 정답도 제시한다. 선교는 선교이고 사랑은 사랑이지 선교를 사랑과 혼합시켜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혼잡케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영화는 관객에게 제시한다. 교회를 다니는 신실한 청년들의 고민 가운데 하나인 부르심 혹은 소명, 아니면 비전이라고 하는 것에 대한 매우 중요한 이야기를 철저히 현실적인 언어로 영화를 풀어나가고 있는 것이다. 특히 감독의 영화관이라 볼 수 있는 재미의 추구는 기독교영화도 디지털 세대들에게 먹혀 들어갈 수 있음을 보여준다. 주연은 묵직하고 진지하지만 주변 상황을 만들어가는 조연은 매우 코믹하다. 재민이 정직한 중고차딜러로서 방송을 타고 많은 수익을 올리고 있을 무렵 그가 인생의 중요한 결단을 내리는 장면에서 감독은 매우 코믹하게 묘사하고 있다. 사장은 재민에게 아메리카노 커피 투 샷을 건네주면서 격려하지만 재민은 회사를 그만두고 싶다며 사표를 제출한다. 사장: “왜 갑자기 그만두겠다는 거야. 혹시 자리가 마음에 안 들어? 최실장이 괴롭혀? 재민: “아닙니다.” 사장: “그럼 뭐야, 아메리카노가 맛이 없어? 재민: “그런 게 아니라 더 이상 차 파는 일을 하는 게 제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사장: “임실장, 정신차려 자네가 대한민국 중고차 딜러 중에서 최고야. 자네가 웬만한 딜러 다섯 명 여섯 명 보다 훨씬 많이 팔고 있어. 재민: “저는 이제 선교를 나가야 할 것 같습니다.” 사장: “그걸 왜 니가 해? 재민: “하나님께서 저를 선교사로 부르셨습니다.” 사장: “하, 하나님은 너를 중고차 딜러로 부르셨어!” 영화 연출자에게 가장 어려운 것 가운데 하나는 심오하고 중요한 얘기를 코믹하게 묘사하는 일이다. 신중하고 중차대한 일을 무거운 톤으로 연출하기란 어렵지 않다. 공포영화는 무섭게 만들고 멜로드라마는 달콤하게 묘사하듯 기독교영화라면 신앙의 결단을 내리는 장면에서 기품있고 은혜가 넘치는 느낌이 나도록 표현하면 될 것이란 생각을 영화는 뒤집는다. <콜링>은 결정적 순간에 코믹한 발상을 숨기지 않는다. 이것이야말로 디지털 세대가 좋아하는 쿨한 방식인 셈이다. 슬프다고 눈물을 흘릴 필요도 없고 잘됐다고 해서 박수치며 좋아하는 것은 너무 고전적이다. 인터넷 세대에게 진짜 멋진 사람은 중요한 순간에도 아무렇지 않은 듯, 무심하면서도 유머러스하게 대응하는 사람이다. 세상에서 한창 잘나가고 있을 때 사표를 쓰고 하나님의 소명임을 언급하며 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한 일은 얼마나 훌륭한 기독교인의 모습인가? 그러나 이를 진지하게 묘사했다면 관객은 곧 부담을 느끼고 말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기독교인이라면 선교에 대한 관심과 소명을 생각해야 하지만 자신에게 적용했을 부담을 느끼는 사람이 적지 않은 까닭이다. 이 때 주인공 주변의 인물들을 통한 코믹한 연출은 선교에 대한 부담을 덜어주고 가볍게 선교에 다가갈 수 있도록 의식을 전환시킨다. 유머는 두려움의 해독제란 사실을 아마도 이 영화의 감독은 잘 알고 있는 듯하다. 디지털 세대에게 유튜브로 다가가는 코믹한 기독교영화 <콜링>. 중요한 신앙의 주제를 이 시대의 언어로 풀어나가는 모습은 분명 미래 기독교영화의 전망을 밝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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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3-27
  • [기독교교양읽기46] 인간은 하나님을 인간욕망의 도우미로 전락 시켰다
    팀 켈러의 짝퉁 神 식별법 십계명 제1, 2 계명, 다른 신을 네게 두거나 섬기지 말며, 우상은 어떤 형상으로도 만들지 말라는 계명은 고대인들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닌 오늘을 사는 현대인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말씀이다. 다만 그 모양이 조금 바꿨을 뿐이다. 섹스와 돈, 끝없는 욕망에 대한 성취와 이를 위한 권력의 추구뿐 아니라 기독교로 둔갑한 문화의 가면을 쓴 짝퉁들이 할거하는 ‘우상공장’인 우리의 마음에서 가짜를 몰아내고 하나님을 제자리에 모셔야 한다. 저자는 이를 위하여 신학적, 성적, 종교적 및 문화적 우상 등 10가지의 우상의 유형과 이를 식별하는 방법 등을 소개하였다. 이를 위하여 친숙한 성경의 얘기의 재해석과 권말목록을 활용한 심도 깊은 Tip은 독자로 하여금 독서의 즐거움을 더하게 한다. || 저자 팀 켈러(Timdthy Keller)목사(67세)는 미국 맨해턴의 리디머 장로교회의 담임목사로 재직 하면서 약 6천명의 교인을 둔 교회로 성장시켰다. ‘21세기의 C.S.루이스’라는 찬사를 받을 만큼 기독교변증가로도 영향력이 큰 구도자 중심의 복음전도자였고, 리디머교회를 통해 센터처치론을 정립하였다. 지역을 섬기는 사회참여에 적극적으로 헌신하여 한국에서도 새로운 세대를 위한 모델로 폭넓은 독자층을 확보하고 있다. 지난해 7월 조기은퇴 하여 리디머교회를 3개 교회로 분립하는 10년 장기계획인 리디머교회의 도시교회 개척네트워크인 ‘시티 투 시티’ 프로그램에 동참하고 있다. 저서로는 《팀 켈러의 묵상》 《센터처치》 《탕부하나님》 등이 있다. 두란노, 2017. 14,000원. ◇ 같이 읽으면 좋은 책 《하나님을 말하다》 팀 켈러 지음 / 두란노 《우상의 시대 교회의 사명》톰 라이트 지음 / IVP 인간은 하나님을 인간욕망의 도우미로 전락 시켰다 ‘쾌락의 역설’, 내가 만든 신 ▌좌담: 김길구 전 부산YMCA 사무총장, 김현호 기쁨의집 대표, 김형기 팔복교회 목사 인간의 마음은 우상공장“우상이란 무엇인가? 무엇이든 당신에게 하나님보다 더 중요한 것이다. 무엇이든 하나님보다 더 크게 당신 마음과 생각을 차지하는 것이다.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것을 다른 데서 얻으려 한다면 그게 바로 우상이다.” 우상, 하나님보다 더 크게 생각하는 인간의 모든 시도김길구 21세기의 C.S.루이스라 불리는 팀 켈러의 《내가 만든 신》 입니다. 원제는 counterfeit gods입니다. 카운터핏은 가짜의, 모조의 라는 의미인데요, 저자는 도입부에서 우상, 생각보다 훨씬 더 위험하다는 경고의 말로 시작합니다. 김형기 ‘세상에는 실체보다 우상(偶像)이 더 많다’란 니이체의 말을 인용했는데 저자를 따라가다 보면 문득 가짜가 진짜를 대신하는 슈퍼리얼리티의 영화 <트루만쇼>의 거대한 가짜세트장에 내가 들어있다는 착각을 하게 됩니다. 우리가 과연 하나님을 제대로 믿고 있는가? 하는 질문과 함께‥김현호 당시 종교백화점 고대 근동 지방에는 많은 이방신들이 존재했습니다. 그래서 가짜인지 아닌지를 비교적 구분하기 쉬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책은 고대종교의 그런 이방신들과는 또 다른 현대인들의 위장된 신들을 얘기합니다.김길구 우상은 금이나 은, 돌과 목재 등으로 형상을 만들어 예배의 대상으로 삼는 것을 말하는데 사도 바울에 와서는 탐심 등 정신적 영역까지도 포함한 개념으로 확대됩니다.김형기 구약에서도 바벨론 백성을 향해 ‘자신들의 힘을 자신들의 신’으로 묘사한 하박국 선지자나 이스라엘이 애급과 앗수르를 상대로 맺은 보호조약을 우상숭배로 질타한 에스겔과 예레미야 선지자의 예도 있어요. 저자는 ‘하나님보다 더 크게 생각을 차지하는 것.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것을 다른 데서 찾으려는 인간의 모든 시도가 바로 내가 만든 신, 곧 우상숭배라고 합니다.김현호 저자의 지적처럼 무엇이든 우상이 될 수 있고, 좋은 것 일수록 더욱 그러기 쉽겠죠. 나의 평생소원, 사랑, 돈, 성취, 권력, 문화와 종교, 은혜 없는 복음도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최근 대중문화가 소비자 중심으로 발전하다보니까 사람들의 종교성에 편승하여 내 입맛에 맞게 신들을 만들어 내고 그것들을 사랑하고 믿고 따르는 것을 자랑스러워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목상이나 신상이 아니더라도, 이미 우리 마음속을 지배하는 가짜 신들이 널려 있습니다.전인격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과하지 않은 중요하고 사랑스런 것들이 바로 우상이 될 수 있다는 경종입니다. ▲ 팝아티스트의 거장 앤디 워홀作 <마를린 먼로> 복제화 된 이미지가 환한 미소에도 덧없이 느껴지는 것은 허상을 좇는 우리 삶이 투영됐기 때문일까? 내가 만든 신은 반드시 나를 배신한다!김길구 왜 이런 우상들이 횡횡할까요? 우리 삶의 자본주의화와도 관련이 있지 않을까요? 우리의 신앙마저도 내 필요를 충족시켜주는 도구가 됐다는 의미지요. 이런 체계에서 중요한 것은 욕구의 충족입니다. 우리의 신앙마저도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면서 예수를 닮아가는 제자로서의 삶이 아닌 종교소비자로 전락했기 때문입니다.김현호 교인들은 설교와 은혜의 소비자가 되고 목회자는 성도들을 온전케 하는 대신 그들의 니즈를 충족시켜주기 위하여 노력한다면 예수님의 제자도와는 거리가 멀어지겠죠.김길구 이 책은 각장 마다 우리에게 친숙한 성경인물의 얘기를 통하여 자신의 논리를 전개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평생소원, 야곱과 라헬과의 사랑이야기, 세리장 삭개오와 돈, 나아만과 성취, 느브갓네살과 권력, 요나를 통해온 문화와 종교가 그렇습니다. 팀 켈러는 다 아는 성경이야기를 새롭게 잘 풀어내는 재능이 있어요. 이 책의 장점이기도 하지만‥김형기 그중에서 인상적인 것은 사랑편에서 7년을 고생한 야곱에게 라헬대신 속임수를 쓴 레아와의 가상대화에서 야곱이 레아에게 “나는 어둠 속에서 라헬을 불렀는데 당신이 대답했어요. 왜지?”라고 묻자 레아는 “당신의 아버지는 어둠 속에서 에서를 불렀는데 당신이 대답했어요? 왜죠?”라고 되묻어 야곱의 분노가 잦아들었다는 랍비의 주해를 인용했는데, 곳곳에 통찰을 얻을 수 있어 유익한 글 읽기였습니다.김현호 저는 야곱이 원치 않은 결혼을 한 레아는 사랑을 받지 못한 체 장남 르우벤(본다), 둘째 시므온(듣는다), 셋째 레위(연합하다)를 낳고도 마음을 얻지 못했으나 후대에 그 자식들을 통해 예수를 낳게 되는 내러티브도 인상적이었습니다. 김형기 풍족한 소유와 소비는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표면적 우상숭배에서는 단호하기 쉬우나 숨겨진 내면의 근원적 우상숭배에 대해서는 통제하기가 더 힘듭니다. 거부인 록펠러, 포드, 카네기가 자선사업을 많이 했지만 돈이라는 마음 속 우상까지 제대로 제어했는지는 의문입니다. 김현호 은혜 없는 복음은 가짜하나님을 만든다는 지적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교리나 은사를 강조하다보면 은혜에 의존성이 상실되고 교리의 정확성에 의존하게 되지요.김길구 성취는 우리시대의 술이다. 개인적인 성공과 성취는 여느 우상보다 더 우리에게 우리자신이 신이라는 잘못된 확신을 주게 됩니다.김현호 작은 성공에 우쭐해서 거짓된 안정감을 느끼며, 자신을 왜곡해 보기 시작하고, 제한된 분야의 성공을 모든 분야의 전문가처럼 행세한다면 우선 성공을 우상으로 삼는 징후로 의심해 보아야 합니다. 내가 만든 우상, 그리고 그 식별법김길구 이 책 에필로그에 우상의 종류를 수록해 놓았는데 다 열거할 수 없겠고 그중 몇 개만 소개하면 우선 신학적 우상입니다. 교리적 오류는 하나님에 대한 신관을 심히 왜곡시켜 거짓 신을 만들게 되고요, 정치적·경제적 우상도 좌우파, 자유방임 등 어떤 단면을 절대화해 궁극의 해법을 삼거나 자유시장을 신격화 하거나 악마처럼 여기는 것도 우상이라고 볼 수 있고요.김현호 종교적 우상의 경우 도덕주의와 율법주의, 성공과 은사의 숭배, 종교를 빙자한 권력남용 등과 인종적·민족적 우상은 인종차별, 군국주의, 국수주의 등으로 민족적 자긍심도 지나쳐 적의나 압제로 변하면 우상이 됩니다.김형기 관계적 우상도 있는데요. 병적으로 의존하는 역기능적 가족관계, 부적절한 끌림, 자녀를 통한 대리인생을 사는 것 등이 해당됩니다. 관계에 대한 의무감, 집착 등이 지나치면 분별력을 잃어 양심을 거스리게 되지요. 성적 우상도 마찬가진데요. 포르노와 페티시즘 같은 중독은 친밀감과 수용을 약속할 뿐 실제로 가져다주지는 못합니다. 자신이나 파트너의 외모를 떠받드는 행위나 로맨틱한 이상주의자도 여기에 해당 되겠지요. 그리고 모든 ‘중독’도 우상의 또 다른 표현입니다.김길구 마지막으로 팀켈러의 우상퇴치법을 소개해 봅시다. 저자는 먼저 생각의 내용을 점검하라고 말합니다. 이를 위하여 대주교 윌리엄 템플이 ‘혼자 있을 때 하는 일이 곧 당신의 신앙이다.’이라는 말의 의미를 음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둘째로 ‘네 보물이 있는 곳에 네 마음도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근거로 돈을 어떻게 쓰는지 보라는 것입니다. 김형기 그리고 꾸준히 기도하라고 권면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장 통제하기 힘든 자기감정에 주목하라고 합니다. 말씀의 묵상과 기도의 생활화를 통하여 하나님을 중심에 모시지 않으면 계속 대상만 바뀔 뿐 우상의 통제 아래 놓이게 됩니다.김현호 팀 켈레는 세속적인 관심이나 욕구충족에만 관심이 있는 가짜들과 결별하고 래디컬하게 온전히 예수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의 길을 가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선택해야 합니다. 진짜냐 가짜냐?김형기 읽으면서 허구이긴 하지만 환타지 영화 <반지의 제왕>에서 탐욕에 물든 악의 군주 사우론에게 압도적인 악의 실체를 느꼈다면, 이 책에서는 우리의 내면에 꽈리 튼 탐욕의 실체와 문화와 종교로 교묘히 위장한 가짜우상들이 우리 삶의 전 영역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는 책이었습니다.김길구 수고하셨습니다. 이번호는 300쪽도 안 되는 작은 규격의 책이었습니다만 다룰 부분이 많아 토론이 상대적으로 적었습니다. 다음에는 3.1절 특집으로 씨알사상연구소 박재순소장의 《삼일운동의 정신과 철학》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수고했습니다. [정리: 김길구〕
    • 문화
    • 기독교 교양 읽기
    2019-03-14
  • [영화] 기독교인은 코미디영화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코미디와 경건한 신앙 영화로도 만들어진 움베르토 에코(Umberto Eco)의 소설 <장미의 이름>에는 중세의 가톨릭이 웃음에 대해 얼마나 부정적이었는지를 보여주는 사건이 제시된다. 1327년 이탈리아 북부의 베네딕트 수도회 소속의 한 수도원에서 일어난 연쇄살인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프란체스코 수도회 소속의 윌리엄 수사와 그의 조수 아드조가 등장한다. 죽은 수도사들마다 손가락과 혀에서 검은 잉크의 흔적을 발견한 윌리엄 수사는 그들이 모두 독살되었고 모종의 책과 연계되었음을 알아차린다. 수도원에서 결코 읽으면 안 되는 금서로 밝혀진 책은 다름 아닌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Poetics) 제2권이었다. 이 책은 인간을 웃게 만드는 희극에 관한 책이다. 그런데 수도원에서 두 번째로 나이가 많은 호르헤 수도사는 경건한 수도생활에 웃음은 결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왜냐하면 웃음은 두려움을 앗아가기 때문이다. 악마에 대한 두려움과 지옥으로 떨어질지 모른다는 공포감을 호르헤 수사는 신앙의 본질이라 여긴다. 즉 두려움이 없다면 신앙도 없고 하나님도 없는 만큼 두려움을 없애는 웃음은 신앙에서 결코 허용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호르헤는 응징의 차원에서 남몰래 시학 제2권을 읽는 수도사들이 침을 발라 책장을 넘기는 습관을 이용 책 귀퉁이마다 독을 발라놓았었다. 그는 독살의 장본인으로 밝혀지자 도서관에 불을 지르고 시학 2권을 씹어 먹으며 죽음을 맞이한다. <장미의 이름>은 중세의 어두운 문화적 분위기를 현대인에게 잘 전해준다. 웃음과 핏기를 잃어버리고 신앙이란 이름아래 무겁고 창백한 그림자가 수도원 안팎을 깊게 드리우고 있다. 수도원의 타락과 수도회와 교황간의 갈등과 같은 역사적이며 정치적인 이해관계는 행간 사이에 숨겨져 있다. 그러나 움베르토 에코가 소재로 채택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제2권은 현재 존재하지 않는다. 어디까지나 작가의 상상력으로 만들어진 책이다. 다만 지금 현존하는 시학 제1권 6장에는 “서사시와 희극에 관해서는 나중에 말해보도록 하고, 지금은 비극에서 관해서 논의해보자.”라는 언급이 나온다. 즉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을 먼저 쓰고 나중에 희극을 썼을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움베르토 에코는 바로 이 점에 착안 <장미의 이름>의 끝 장면처럼 시학 제2권이 사라진 연유를 중세 수도원의 엄숙한 분위기를 배경 삼아 상상력을 동원하여 해답을 내놓은 것이다. 그렇다면 현재 한국의 기독교문화는 웃음에 대해 어떤 판단을 내리고 있을까? 적어도 기독교 영화의 분야에서 웃음을 통해 관객에게 즐거움과 메시지를 주는 코미디 장르는 전무하다시피 하다. 지난 몇 년간 한국기독교영화의 주류로 자리 잡은 선교다큐멘터리 영화나 가뭄에 콩 나듯 등장한 드라마 장르에서 웃음은 배제되어 있었다. 신앙의 역사와 정체성 그리고 선교적 소명 등 매우 중요한 교회의 이슈를 다루었지만 웃음이 들어갈 틈은 없었다. 마치 기독교영화를 보면서 웃는 일은 불경건한 일이라고 생각한 듯 진중한 자세만이 요구될 뿐이었다. 권위의 붕괴에서 오는 웃음 이병헌 감독의 영화 <극한직업>은 코미디의 본질을 잘 살린 대중영화다. 설 연휴에는 온 가족이 마음 편하게 볼 수 있는 부담 없는 영화를 선택한다는 점에 착안하여 개봉시점도 매우 잘 선택했다. 거기다 맞대응할 만한 영화가 없었다는 것도 흥행에 큰 도움이 되었다. 그 바람에 <극한직업>은 불과 개봉 15일 만에 천만 관객을 훌쩍 뛰어 넘을 수 있었다. 영화는 마약범죄조직을 감시·소탕하기 위해 투입된 5명의 마약반 형사들이 작전상 치킨집을 인수하면서 벌어지는 해프닝이 코미디의 주요 장면을 구성한다. 치킨장사는 단지 범인을 잡기 위한 수단에 불과한 까닭에 수사에 집중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마형사(진선규)가 개발한 ‘수원 왕갈비맛 통닭’이 대박을 터뜨리면서 치킨집은 맛집으로 소문나게 되고 형사라는 본업은 오간데 없이 치킨 장사에 매달리게 되는 상황이 벌어진다. <극한직업>은 코미디의 종합선물세트다. 이병헌 감독 특유의 상대방을 비꼬는 언어감각이 살아있는 스크루볼 코미디(screwball comedy)의 형식이 주효하지만, 범인검거 현장에서 드러난 형사들의 과장되고 어설픈 행동들은 찰리 채플린이 했던 것처럼 슬랩스틱 코미디(slapstick comedy)의 연장선을 잇고 있다. 영화의 끝부분에서 확인할 수 있는 남녀 형사의 애정표현은 이 영화가 나름 로맨틱 코미디(romantic comedy)도 담아내고 있음을 보여준다. 한편 기독교 관점에서 <극한직업>은 왜 기독교 영화 제작자들이 코미디영화 제작을 꺼려하는지를 깨닫게 도와주기도 한다. 대중이 좋아하는 웃음유발의 특징들을 선뜻 수용하기 어렵다고 느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극한직업>에서 관객의 웃음을 유발하는 코미디의 요소의 핵심에는 ‘권위의 붕괴’에서 오는 카타르시스 효과가 자리하고 있다. 영화에서 ‘권위의 붕괴’란 선하든 악하든 한 사회에서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존재가 사회적 기대와는 다르게 행동하며, 그 행동이 일반 사람들과 같거나 그 보다 못할 때 나타나는 현상을 말한다. 영화에서 마약반 형사들은 강력범을 잡은 경찰에 대한 이미지와 기대감을 완전히 무너뜨린다. 비록 위장전술이긴 하지만 형사들이 치킨집 종업원으로 변신하며 좌충우돌하는 모습은 경찰에 대한 기대가 무너질 때 웃음이 유발되는 ‘권위의 붕괴’를 보여준다. “180도 기름에 대이고 칼에 베이고 얼마나 쓰라린 줄 알아? 아파. 지금 현재도 굉장히 쓰라린 상태야.” 마형사는 마약범을 잡다 몸을 다친 것이 아니라 닭을 튀기다 얻은 상처에 대한 얘기를 한다. 그의 얼굴은 닭을 잡을 때의 표정이 아닌 범인을 잡을 때의 비장함이 묻어난다. 범인이 아닌 닭을 잡는데 온 힘을 다 쏟는 형사의 모습에서 권위는 전복되고 만다. 마약반 형사들이 치킨집 운영에 정신이 팔린 것을 보며 고반장(류승룡)은 반원들에게 크게 한마디 한다. “정신 안차릴래. 우리가 지금 닭장사하는 거야? 야 그럼 이 참에 사표 쓰고 닭집을 차리던가!” 마약반의 책임자로서 이 같은 말에는 권위가 살아있음을 관객은 느낀다. 그러나 전화벨이 울리자 그의 말은 곧 변해버린다. “지금까지 이런 맛은 없었다. 이것은 갈비 인가 통닭인가, 네 수원왕갈비 통닭입니다.” 급 반전된 반장의 말과 억양에서 관객들은 권위의 붕괴가 가져오는 웃음을 만끽할 수 있다. 악당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극한직업>에 등장하는 마약조직의 보스인 이무배(신하균)나 테드창(오정세)이 잔인하고 포악한 범죄자의 모습만을 갖고 있지 않고 나긋나긋한 말투와 연예인 뺨치는 스타일로 등장한다. 심지어 헤어밴드와 노란 선글라스를 착용하고 나온 것은 악당으로서의 권력을 행사하는 이미지와는 어울리지 않는다. 이 영화에서는 악당들도 코믹 연기를 하고 있다. 무엇을 위해 권위를 버릴 것인가? ‘권위의 붕괴’는 곧 잘 조롱이나 폄하 혹은 풍자로 읽혀지다. 지배자의 권위를 앞세우며 독재 권력이 지배하던 시대에 대통령이 코미디 프로그램의 소재로 등장하는 것은 금지되었었다. 민주화를 지향하던 한 대통령은 자신을 코미디의 소재로 삼아도 좋다는 언급을 공식적으로 할 만큼 한국사회는 권위를 중요하게 생각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권위의 붕괴’로 얻는 것도 있다. 바로 대중적 친밀함이다. 그것은 새로운 소통방식이며 또 다른 리더십이기도 하다. 국민을 보호하는 역할로서 경찰은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한 존재이지만 경찰에게 친밀감을 느끼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러나 한국인에게 치킨집은 일상 그 자체다. 대표적인 서민음식이면서 퇴직 후 선택하는 1순위 직장이기도한 치킨집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친숙한 이웃으로 인식된다. <극한직업>에서 마약반 형사들이 치킨집에 몰두할 때 관객들은 권위의 붕괴에서 오는 웃음을 만끽할 수 있었다. 그런데 영화가 그것으로만 끝났다면 결코 천만 흥행을 달성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권위는 내려놓았지만 역할은 살아있었다. 결국 형사들은 악당들을 일망타진하는데 성공한다. 권위를 내세우기보다 자신의 본분을 잊지 않고 역할에 충실한 주인공들을 보며 관객들은 웃음과 더불어 도덕적 만족감을 함께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교회의 권위가 땅에 떨어졌다고 한탄하는 목소리를 심심찮게 듣게 된다. 세상이 교회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교회를 우습게 여긴다는 뜻에서 한 말일 것이다. 세상의 영향력을 주는 의미에서 권위를 되찾고 싶다면 권위 자체에 몰두하기 보다는 교회의 역할을 바로 세울 일이다. 소금의 권위를 쫓기 보다는 본래의 맛을 내는 역할(마5:13)에 초점을 맞추는 일이 필요하다. 사도 바울은 이미 코미디의 주인공처럼 자신이 망가지는 것을 기꺼이 허용한 사람이다. 왜 일까?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빌3: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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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2-20
  • [문화펼치기] ‘82년생 김지영’에게 ‘92년생 김지훈’이 말한다
    작년 2018년 말 문재인 정부에 대한 20대 남성들의 지지율이 급락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많은 이들이 궁금해 하고 있다. 20대 여성들의 높은 지지도와 비교되는 20대 남성 지지율 저하는 무슨 의미일까? 20대 남성들의 가치관이랄까, 아니면 그들의 고민과 상황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고맙게도 20대 남성들을 분석한 몇 가지 키워드가 있다. 그것은 곧, ‘프레카리아트’, ‘밀레니얼 세대’, ‘90년대생’, ‘밀레니엄 대학생’이다. 이것을 분석하면 20대 남성들의 가치관과 그들의 고민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1. 프레카리아트의 등장 먼저, 프레카리아트라는 말은 ‘불안정한 고용·노동 상황에 있는 노동자 집단’을 일컫는 말이다. 이탈리아어 ‘프레카리오(Precàrio, 불안정한)’와 ‘프롤레타리아트(Proletariat, 노동자 계급)’를 합성한 것이다. 직역하면 ‘불안정한 노동 계급’이란 뜻이다. 직업이 불안정하고 저임금을 받고 사회보장제도에서 배제된 사람들을 뜻한다. 한국의 삼포세대, 오포세대, ​칠포세대, N포세대 처럼 유럽에도 1,000유로 세대(Generazione 1000 euro)가 있다. 기본생활만이 가능한 수준인 월 1,000유로 정도를 벌기도 힘든 유럽의 20-30대를 말한다. 역시 일본에도 ‘사토리 세대(さとり世代)’가 있는데, ‘깨닫다, 득도하다’라는 뜻의 사토루(さとる)에서 나온 말로 일본의 오랜 경제 불황 속에서 성장하여 돈과 출세에 관심이 없는 일본의 20-30대를 말한다. 그리고 이들을 계급적으로 부를 때 ‘프레카리아트(Precariat)’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이러한 프레카리아트는 전 세계적으로 노동 시장이 유연해지면서 등장했다. 대개 일용직 등의 비정규직이나 파견직과 같은 간접노동 형태로 불안정한 직업을 가지고 있으며 별다른 직업 경력이 없고 안정적인 고용 전망이 없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대다수의 프레카리아트는 불안정한 고용·노동 상황으로 인해 저임금에 시달리며, 사회보험 가입 등에서도 법적·실질적으로 배제된다. 무엇보다 이들의 불안정성이 다음 세대까지 이어지며 일종의 계급으로 굳어지고 있어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다. 인싸(주류세력)들의 금수저-금수저의 계급 세습이 이들에게는 흙수저-흙수저의 불안정성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 20대 남성 지지율 저하의 의미? 2. ‘밀레니얼 세대’의 등장과 ‘90년대생’이 온다 ‘밀레니얼 세대(Millennial Generation)’는 1980년대 초에서 2000년대 초 사이에 출생하여 2007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사회생활을 시작한 세대로, 모바일 기기를 이용한 소통에 익숙한 사람들을 말한다. 이들은 시대의 아픔 속에서 문화적으로 ‘모자람이 주는 충족감’, ‘불완전함이 갖는 미학’에 매력을 느끼며 ‘낡고 보잘것없는 것’에서 정신적 충족감을 얻는다. 밀레니얼 세대를 좀 더 세분하여 90년대생들에 주목하여 보자. 임홍택은 『90년생이 온다』 (웨일북, 2018)에서 이렇게 말한다. “90년대생들의 의식은 기본적인 자아실현의 충족을 위해 힘쓰는 ‘유희 정신’에 기울어져 있다. 이념적 세계보다 연극적 세계가 더 중요하다. 물론 이들도 앞선 세대들과 마찬가지로 적자생존의 경쟁이 치열한 세상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그러나 이전 세대들과 다른 욕구를 가지고 있다는 점, 유희를 추구하며 살아간다는 점은 이들의 세계를 다르게 만든다. 이들은 스스로를 어떤 세대보다 자율적이고 주체적이라고 생각하고 살아갈 것이다.” 이 책은 1982년생인 저자가 1990년대에 출생한 신입 사원들과 소비자들을 접하며 받았던 충격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한 책이다. 90년대생들을 관찰하며 그들의 특징을 ‘간단, 재미, 정직’으로 정리해 준다. 그리고 90년생들이 생각하는 회사생활의 한 일면을 이렇게 들려준다. “회사에 헌신하면 헌신짝이 된다”, “충성의 대상이 꼭 회사여야 하나요?” 회사의 발전보다는 자신 개인의 발전 가능성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상사 눈치 안 보고 정시 출근과 퇴근을 하며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싫으면 관두는 것이 바로 이들의 특징이라는 것이다. 임홍택의 말을 들어 보자. “과거 70년대생과 그 이전 세대에게 충성심이라는 것은 단연 회사에 대한 것이었다. 하지만 90년대생에게 충성심은 단연 자기 자신과 본인의 미래에 대한 것이다. 충성의 대상이 다르고 그 의미도 다르니 갈등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때문에 90년대생들을 위한 조직 문화 개선 방안은 회사에 대한 충성심을 고취하는 것보다 자신들의 충성도에 회사가 어떻게 도움을 줄 수 있느냐에 방점이 찍혀야 한다.” 90년대생은 어려서부터 이미 인터넷에 능숙해지고 20대부터 모바일 라이프를 즐겨온 ‘앱 네이티브’이다. 모바일 환경에 익숙한 이들 90년대생들은 웹툰이나 온라인 게임, 인터넷 커뮤니티 등에서 생겨나는 신조어나 유머 소재들을 빠르게 확산시키고 있다. 따라서 오프라인과 온라인의 경계가 이들에게는 허물어졌다. 증강현실(AR)게임을 소재로 한 tvN 주말 드라마 <알람브라 궁전의 추억>은 드라마로 진출한 90년대생들의 세계관이다. 또한 종이보다 모바일 화면이 더 익숙한 90년대생은 온라인 게시물이 조금만 길어도 읽기를 거부하고, 그나마도 충분히 궁금증이 일지 않으면 제목과 댓글만으로 내용을 파악하고 넘겨버린다. 따라서 이들은 기승전결의 완결성을 가진 서사보다 맥락이 없고, 표현도 거칠고 어설픈 B급 감성에 열광한다. ‘참견(參見)’보다 ‘참여(參與)’에 긍정적인 세대인 것이다. 임홍택의 말이다. “새로운 세대는 참여라는 말에는 긍정적이지만 참견에 대해서는 부정적이다. 그 차이는 무엇일까? 참견의 사전적 의미는 ‘자기와 별로 관계없는 일이나 말 따위에 끼어들어 쓸데없이 아는 체하거나 이래라저래라 함’이고, 참여의 사전적 의미는 ‘어떤 일에 끼어들어 관계함’이다. 이 정의에 따르면 그들은 자기와 어느 정도 관계있는 일이나 말 등에 직접 나서고자 한다.”많은 90년대생들은 일과 삶의 균형을 중요하게 여기고, 일터에서도 즐거움을 잃지 않으려고 하며, 참여를 통해 인정 욕구를 충족하려고 한다. 그들은 회사가 평생 고용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헌신의 대상을 회사가 아니라, 자기 자신과 자신의 미래로 삼는다. 안정을 추구하는 공무원을 선호하는 한편, 창업의 길을 꿈꾸기도 하며 언제든 이직과 퇴사를 생각하기도 한다. 어느 쪽이든 그들은 사회적·경제적 환경에 적응하며 생존을 위해 각자 최선의 선택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기성세대는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생각하기 마련이고, 자신들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이들의 선택에 훈수를 두거나 참견을 하곤 한다. 그러나 임홍택은 기성세대의 ‘과거의 경험’이 더 이상 90년대생을 ‘판단할 근거’가 되지 못하는 세대라고 따끔하게 충고한다. 그래서 이들이 제일 싫어하는 상사의 모습이 ‘꼰대’인 것이다. 여기서 꼰대는 ‘전형적인 한국사회의 기성세대들’을 말한다. 기성세대들인 꼰대들은 무조건 가르치려 들고, 젊은 사람들을 야망 없고 패기 없고 조직에 안 맞는 나약한 인간으로 평가절하하면서 자기 말만 늘어놓는다. “한 때는 내가~!” “옛날에 우리 시절에는 말이야~!” 꼰대들은 양면적이다. 90년대생이 보기에 꼰대들은 이렇다. 알아서 하라고 해놓고 보고를 안 하면 야단을 치고, 원하는 것이 뭐냐고 물어보고 말하면 그건 들어줄 수가 없다고 하니 종잡을 수 없다. 꼰대들의 모임인 대한민국 사회도 마찬가지이다. ‘능력 최우선’이라 말해놓고는 뒤로 가서는 은근히 ‘서열’과 ‘계약조건’을 따진다. 3. 밀레니엄 대학생 걱정이다. 이제 서기 2000년에 태어난 이들이 올 3월 2019학번으로 대학에 입학하게 된다. 따라서 대학은 올해부터 21세기가 시작되는 것이다. 이들을 성공회대 사회학과 조효제 교수는 ‘밀레니엄 대학생’이라고 부른다. 조효제 교수의 말을 들어보자. “우선 밀레니엄 청소년들은 상충되는 두 흐름의 한복판에서 사회화를 거쳤다. 하나는 ‘이명박, 박근혜 시대’의 특징이었던 ‘경쟁’과 ‘실적주의’에 근거한 가치관의 내면화다. 모든 측면에서 ‘실력’과 ‘성적’ 순서로 보상이 주어지느냐를 면도칼처럼 따지는 것이 정당성의 기준이 되었다. 사회 전체에서 공정함이 제대로 발현될 수 있는 맥락이 소거된 채, 미시적이고 형식적인 공정성이 거의 이데올로기 수준에서 맹위를 떨치고 있다.” 놀랍다. 우리 기성세대는 잊고 있었지만, 밀레니엄 시대는 ‘이명박근혜 시대의 세례’를 받았다는 말이다. 그것은 곧, ‘경쟁’과 ‘실적위주(성적)’의 가치관이라는 것이다. 전체의 공정함보다 작은(자신에게 해당되는) 공정성에 물들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들의 특성은 또 있다. 조효제 교수의 말이다. “또 하나는 이들이 세월호와 탄핵을 거치면서 사회와 정치의 토대가 붕괴되는 것을 목격하고 체험했다는 사실이다. 이 사건들은 형성기의 청소년들에게 집단적·감정적 트라우마와 권위에 대한 냉소, 정치적 분노와 열광을 동시에 경험하게 하였다.” 세월호를 통해 정치가 소용없다는 것을, 동시에 탄핵을 통해 소용없는 정치가 무너지는 것을 역설적으로 보았던 세대가 바로 밀레니엄 세대라는 것이다. 사실 이 두 흐름은 인권의 측면에서는 모순적 형태로 나타난다. 가령 불공정에 극도로 민감한 태도로 인해 ‘정유라 입시부정’으로 촉발된 사건을 촛불혁명으로까지 상승시킨 세대가 곧, 우리 사회 시스템을 공짜로 악용하는 것처럼 보이는 난민 신청자들을 거부하는 세대라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미투 열풍’을 더해 성평등의 흐름으로 20대 여성보다 20대 남성들이 더 공정성에 민감해진 것이다. 한림대의 조형근 교수는 이렇게 분석한다. “평범한 20대 남성들도 재벌과 대형 교회의 세습에 분노한다. 조물주 위에 건물주가 있는 세상에 분노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누구보다 더 특권과 반칙에 반대한다. 이들의 보수화를 특권계급이나 노년 세대의 보수성과 동일시할 수 없는 대목이다. 이들이 양성평등 정책, 군 복무 가산점 폐지, 공공부문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등 진보적 정책에 분노하는 이유는 ‘개인들 간의 공정한 경쟁’의 기회를 빼앗는 반칙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학종’(학생부종합전형)에 분노하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대학 서열화보다는 정확하지 않은 대학 서열에 분노하는 세대다. 부모의 경제력이 인생을 좌우하는 데 반대하는 만큼이나 성별이 인생을 좌우하는 변수가 되는 데 분노한다. 남자라고 우대받는 시대를 살아본 적이 없는데, 남자라서 역차별 받는 시대에 살고 있다고 믿는다. ‘오직 점수로만!’이 이들의 슬로건이다. 경쟁은 계급, 성별, 인종 따위의 비개인적 요소와 무관하게 공정해야 하고, 그 결과와 책임 또한 개인에게 귀속되어야 한다는 믿음은 자유주의 정의론의 전형적 사고방식이다.” 20대의 말을 들어보자. 바른미래당 청년대변인인 김현동 대변인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 20대는 대한민국 역사에서 한 번도 볼 수 없었던 정체성과 생각을 공유하는 세대이다. 과거 대한민국에는 그 세대들이 공유하는 시대정신이 또렷이 있었다. ‘나의 가난을 자식들에게 물려주지 않겠다’라는 새마을 정신,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외치던 민주화 정신, ‘나를 희생해서 국가의 위기를 극복하자’는 생각을 기반으로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체제 극복을 이루어낸 금모으기 운동 정신 등이 그것이다. 그런데 저출산 위기, 다가온 통일 등 여러 가지 시대적 과제가 산적한 오늘날, 20대들은 뚜렷한 시대정신을 공유하고 있다고 보기 어렵다. ‘유교 사회주의’라는 표현으로도 설명이 가능할 정도의, 국가를 위해 개인을 희생하는 것이 얼마든지 정당화될 수 있었던 과거의 집단주의는 이제 해체 수순에 돌입하고 있다.” 따라서 평창올림픽 남북 단일팀 논란에서 20대의 대부분은 설사 이 팀이 남북 평화와 화해의 단초가 되는 길이라 할지라도, 열심히 노력한 선수를 엔트리에서 제외하는 것에 분노했던 것이다. 사실 남북 단일팀에서 60대 이상 강경보수의 분노는 ‘북’이라는 글자에 기인한 것이라면, 20대의 분노는 ‘단일팀’이라는 불공정에 의한 것이었다. 계속해서 김현동 대변인의 말을 들어보자. “오늘날 ‘성평등이 필요하다’라는 명제에 대해, 남녀는 서로 다른 시각을 바탕으로 보고 있다. … 20대 남성에게 성폭행 사건의 가해자는 내가 비난할 대상일 뿐, 책임과 잘못을 분담해야 할 동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의 연장선에서, 20대 남성에게 지난 남성중심주의 사회의 책임을 분담하라는 요구는 불공정함 그 자체로 받아들여진다. 쉽게 말해 ‘82년생 김지영’이 살던 세상의 부조리는 ‘92년생 김지훈’이 감당해야 할 책임이 아니라는 것이다. 결국 핵심은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공정함의 확립이다.” 그러나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공정함이 가능할까? 미시적 공정함은 거시적 측면에서는 불공정으로 드러나지는 않을까? 따라서 조효제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형식적 공정에 대한 집착을 실질적 공정에 대한 관심으로 확장하고, 개별 원자적인 반차별 감수성을 인도적 성격의 반차별 의식으로 이끌어야 할 과제를 우리는 지고 있다.” 어쩌면 포스트모더니즘의 세례를 받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도 해본다. 20대, 혹은 90년대생, 밀레니엄 세대들은 ‘전지구적’이고 ‘구조적인’ 문제에 대해 무관심하다. 아니, 아예 체념 하는듯한 태도를 보인다. 가령, 기후변화에 대해 숙명론적인 인식이 많고, 신자유주의에 의한 구조적 불평등 같은 문제에 대해서도 그리 크게 의식하지 않는다. 추상적인 문제 역시 귀찮아한다. 더욱이 ‘연대’와 ‘공동체’라는 의식은 저 멀리 사라진지 옛날이다. 너무 거대한 문제이기에 그 문제에 압도당하거나, 아니면 아예 눈을 감아버리는 것이다. 4. 희망의 인권과 새로운 혁명 그렇다고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다. 시간은 젊은 세대들에게 기회를 가져다준다. 임홍택의 말이다. “현재 우리나라도 일자리가 부족한 상태로, 이는 수요자인 기업에 유리한 시기다. 하지만 90년대생들이 구직 활동을 진행하는 이 시간을 지나, 2000년대 출생자들이 본격적으로 입사를 하게 되는 시점에는 일본과 같이 상황이 역전될 수 있다. 일자리보다 취업자가 적어지는 현상이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실제로 한국의 90년대 출생자는 687만 명, 2000년대 출생자는 496만 명이다. 우리나라의 기업들도 구직자들의 눈치를 봐야 할 시기가 올 수 있다.” 따라서 조효제 교수는 밀레니엄 대학생들에게 ‘희망의 인권’을 이야기해야 한다고 말한다. 들어보자. “앞으로 십년, 이십년 뒤엔 한반도 상황이 지금보다 훨씬 진전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 그때엔 이 땅의 모든 사람들―남북한 선주민과 이주자―을 아우르는 포괄적 인권이 우리 공동체의 본질적인 화두로 떠오를 것이다. 그 일을 해낼 주인공들, 능동적 희망의 인권을 실천할 밀레니엄 신입생들을 하루빨리 만나고 싶다.” 지금 프랑스는 노란 조끼를 입은 프레카리아트들이 최저임금과 연금 인상과 함께 외주화 금지, 비정규직 양산의 중지와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요구하고 있다. 1848년 6월 파리에 정치세력으로 무산계급(프롤레타리아트)이 탄생했다면 이제 2019년 프랑스의 노란조끼들의 반란은 정치세력으로서의 프레카리아트를 낳았다. 따라서 대한민국의 새로운 세상은 ‘촛불 혁명’ 다음에 전체(까지는 힘들다면, 적어도 약자들)의 공정함을 위해 연대하며 공동체의 선을 위해 노력하는 ‘밀레니얼 세대들의 혁명’으로 이어져야 할 것이다. ▲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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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2-20
  • 평범한 오늘이 영원을 향한 비범한 하루
    1세기 평범한 일상으로 본 그리스도인의 하루 로버트 뱅크스의 1편 《1세기 교회 예배이야기》에 이은 후속작으로 작년 8월 다른 나라에 앞서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출간되어 관심을 끌었습니다. 1편에 이어 2편도 본문 60쪽 안팎의 정말 얇은 책으로 소설과 삽화로 1세기 로마의 일상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담아 생동감이 느껴진다. 분량이 적다고 얕봤다는 큰 코 다친다. 다루는 주제가 다양하며 주제도 만만치 않아 심도 있는 논의와 논쟁이 필요하다. 그래서 소그룹 모임의 교재로도 유용해 보인다. 이 책을 간증으로 읽었다는 역자는 저서의 “나의 새로운 신앙이 내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설명할 최선의 방법은 가족과 일과사회생활이 뒤섞인 아주 전형적인 하루를 묘사하는 것“이라는 말에 필이 꽂혔단다. 그 일상이란 가족, 신분, 자녀, 학교, 옷, 목욕, 헤어스타일, 장식, 부적, 동성관계, 부부관계, 음담패설, 젠더, 직업, 신용, 가난과 부, 재난, 정치, 벤처, 금융업, 비즈니스협력, 직원 징계, QT, 구별과 어울림, 우상, 박해, 변화, 구제, 예배 등이다. 뱅크스가 안내하는 타임머신을 타고 따라가다 보면 우리에게 익숙한 일상도 있지만 낯선 1C 로마의 역사와 풍경, 그리고 문화를 만난다. 물론 문화탐방 하는 가벼운 기분만으론 안 된다. 그 시대적 배경이 폭군 네로가 기독교인 박해의 명분으로 써먹은 로마대화재를 전후한 살벌한 시기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책을 덮을 즈음 매일의 일상에서 생각 없이 소비하는 하루의 의미가 새롭게 다가온다. ‘나는 과연 그리스도인으로 하루를 살고 있는가?’ ◈ 《1세기 그리스도인의 하루 이야기》 || 저자 로버트 뱅크스(Robert Banks)는 케임브리지대학에서 신약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은 신학자로서, 다양한 분야에서 저술과 강연 활동을 하고 있다. 저서로는 《1세기 교회예배 이야기》 《바울의 공동체 사상》 《일상생활 속의 그리스도》 등이 있다. IVP, 2018. 6,000원. ◇ 같이 읽으면 좋은 책《1세기 교회예배 이야기》 / 로버트 뱅크스 / IVP《십자가와 부활을 사는 일상 영웅》 / 팀 체스터 / CUP 《일상, 하나님의 신비》 / 마이클 프로스트 / IVP《처음으로 기독교인이라 불렸던 사람들》 / 래리 허타도 / 이와우《로마와 그리스도교》 / 김덕수 / 홍성사 기독교 교양 읽기 Ⅱ 〈1〉 ▌좌담: 김길구 전 부산YMCA 사무총장, 김현호 기쁨의집 대표, 김형기 팔복교회 목사 2015년 3월부터 총 45회 연재된 기독교교양읽기가 Ⅱ로 새롭게 출발합니다. 그동안 수고하셨던 김수성 교수께서 개인사정으로 하차하시고, 경주 팔복교회 김형기 목사가 함께 합니다. 목사님은 서울대에서 교육학을, 장로교신학대학원과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에서 신학을 전공하셨으며 1970년 후반 부산에서 양서협동조합을 설립하여, 좋은 책읽기운동을 주도한 바 있습니다. 로마와 기독교 문화의 차이를 보여주는 책김길구 이 책은 본 코너 30회에 게재된 《1세기 교회예배 이야기》의 후속편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먼저 출간된 따끈따끈한 책으로 1편이 초대교회로의 회귀는 가능한가를 물었다면 이 책은 초대교인들의 하루 일상으로 우리를 초대하여 지금은 어떤지를 묻고 있습니다. 김형기 한 두 시간이면 다 읽을 수 있는 작은 책입니다만 내용은 결코 가볍지 않은 책입니다. 신약학자인 저자가 1세기 타임머신을 타고 신앙과 생활을 하나로 접목하는 life story를 소설형식을 빌어서 재현한 창의적인 시도가 돋보이는데 이를 통하여 성서에 기록된 말씀들이 생활과 동떨어진 말씀이 아닌 지금 이 시대의 말씀으로 되살아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김현호 소설의 배경인 네로의 기독교인 박해의 빌미가 된 로마대화재가 AD 64년에 일어났으니 이교도였던 주인공 푸블리우스가 기독교인으로 산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용기와 결단이 필요한 시기로 이들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네요.김길구 교세로 보면 12제자로 시작된 예수추종자들은 AD 40년경이 되면 1천 명이 되고 100년쯤 되면 1만 명 200년경에는 20만 명 300년에는 500~600만 명으로 증가합니다. 저자는 서문에서 “그리스도인들이 궁극적으로 ‘세상을 뒤엎을’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매일의 삶 속에서 구별된 삶의 방식을 개발했기 때문이었다”. 고 합니다. 그럼 일상의 삶 속에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과연 어떤 의미일까요?김형기 우리가 직면한 개개인의 기호부터 가정생활과 자녀교육, 직장생활, 그리고 사소한 일거수일투족까지 기독교적 세계관과 연결되어 있음을 인식하고 그 믿음에 걸 맞는 행동으로 실천하는 삶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김현호 갓 믿은 주인공은 그의 가정부터 변화시킵니다. 당시 수직적 문화의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아내와 자녀의 관계도 상호존중의 방식으로 바꾸고, 자녀들의 교육적 차별을 없애고 세상풍조를 따르지 않고 가정을 중심으로 신앙을 계승합니다. 특히 노예를 재산으로 여기며 육체적 언어적 폭력과 성적학대의 갑질문화에서 노예를 공정하고 정당하게 대해 함께 식사하고 별도의 숙소를 제공하는 등 의 파격적인 대우와 ‘여러해 전에 해방시킨 몇몇 노예를 확대가족’으로 묘사한 부분은 초대그리스도인들의 노예에 대한 전향적인 사고를 볼 수 있습니다.김형기 이 책은 철저한 고증을 통하여 당시의 사회상을 마치 드라마를 보듯 글과 삽화로 재현해 놓았는데‥당시의 의복, 목욕, 음식, 헤어스타일, 장식, 부적, 부부관계, 음담패설, 금융업 등의 깨알상식과 네로치세의 정치상황, 그리고 기독교인의 대처방법 등이 흥미롭네요. 특히 다신교 문화에서 가정 신단의 폐지와 로마인들의 남자 중심의 문란했던 성의식과 만연했던 동성애를 멀리한 것은 오늘 우리에게도 많은 시사점을 주고 있습니다.김현호 흥미로운 것은 만연했던 동성애의 원인을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특이한 성향의 성적 친밀감에서 찾지 않고 여성차별적 시각에서 접근했네요. “여기에 난제가 하나 있다. 우리문화에서는 남자가 이성보다도 동성과 더 깊은 관계를 가질 수 있다고 여긴다. (중략) 아내는 남자와 같은 지적 혹은 정서적 능력이 없으므로 완전한 우정이나 사랑을 발전시키는 건 불가능하다고 여긴다.”는 대목입니다. 이런 불평등한 남녀관계를 수평적인 관계로 인식하고 권장한 초대교회는 분명 시대를 앞서 갔다고 볼 수 있습니다. ▲ 바울은 로마에 있는 우리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미 우상에게 바친 고기를 먹을 수 있는 강한 믿음이 있는 사람들은 그들이 그것을 먹음으로써 믿음이 약화될 수도 있는 사람들을 배려해야 한다고 단호히 말한다. <1세기 그리스도인의 하루> 본문 50~51p 중 만찬회장의 모습 ‘세상을 뒤엎은 힘’은 믿음 안에서 구별된 삶김길구 ‘실천적 무신론자’라는 말이 있습니다. 입으로는 그리스도인인데 행동은 그렇지 못한 교인을 일컫는 말이지요. 이 50쪽 분량의 얇은 책을 읽는 동안 ‘나는 그렇지 않은지?를 되묻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이 책의 장점 같습니다.김형기 ‘나의 새로운 신앙이 내게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 설명할 최선은 방법은 가족과 일과 사회생활이 뒤섞인 아주 전형적인 하루를 묘사하는 것이다’란 말이 가슴에 와 닿는데요.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실천적 기독교인인지 아닌지를 구분하는 리트머스시험지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김현호 초대받은 만찬장에서 이루어지는 신격화된 황제에 대한 헌주는 하나님만을 섬기는 기독교인이나 유대인들에겐 지지도 부인도 할 수 없는 불편한 자리였을텐데 책속에서도 그 상황을 애매하게 묘사했더군요?김길구 동시대의 사도바울은 로마서에서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라고 했지만 성서 전체의 맥락으로 보면 불의한 권력에 대한 무조건적 복종을 만을 말하지 않아요. 당시의 초대교회는 세계최강의 제국 로마의 지배아래 흩어져 있는 소규모의 가정공동체 집단에 불과했고, 이들이 직면한 과제는 적대적인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바꿀 수 없는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것이 우선이었기 때문이 아닐까요?김형기 불의한 권력의 상징인 네로치세의 로마대화재와 기독교인들의 박해로 얘기를 옮겨 보지요. 우리가 흔히 얘기하듯 네로가 로마재개발을 위하여 일부로 방화를 하진 않았지만, 열흘간 계속된 화재로 제국의 수도인 인구 100만의 도시 중 절반이 연기로 사라졌습니다. 대참사로 흉흉해진 민심을 돌리기 위한 네로 황제의 선택은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화재의 주범으로 조작하여 많은 기독교인들희생되었습니다.김현호 유세비어스의 《교회사》에는 네로의 ‘비이성적인 광기’로 수천 명이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사도바울과 베드로가 순교했지요.김길구 반론도 있어요. 교회사가 출간 된 해가 312년으로 화재가 일어난 64년과 시차가 너무 커 다소 과장되었다는 설입니다. 당시의 로마지역의 기독교공동체는 3,000여명에 불과 했으며 교인들 중 10%선인 200~300명 정도의 신자들이 순교했다는 주장입니다.김현호 역사의 아이러니 중에 하나지만 이 박해 후에는 목표를 달성해서 그런지 네로의 박해도 시들해지고, 기독교인들의 누명도 벗겨지자 로마시민들 중에는 동정심도 생겨나면서 그리스도교가 더욱 왕성해 집니다. 순교의 피가 헛되지 않고 열매를 맺은 것이지요. 구제활동도 ‘예배’의 일환으로김길구 다시 돌아가서 참혹한 화재 현장에서 초대교인들이 박해 직전까지 구호활동을 펼치는 장면이 나옵니다.김현호 이 구제활동을 결의하기 위한 회의에서 구제사역을 ‘예배’의 일환으로 여기는 결의를 한 것입니다. 시편의 노래를 부르며 옷을 수집하여 나누어 주고, 음식을 주변 동네에 가서 나누어 주고… 김형기 선한사마리아인의 예처럼 이웃사랑 실천이라는 관점에서 봉사는 당연하게 받아드려졌을 것이고.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도 한몫했겠지요.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이야기》에 의하면 로마인들은 인근에 있는 국가들, 지성(知性)은 그리스인보다, 체력은 게르만족보다, 기술력은 에트루리아인보다, 경제력은 카르타고인보다 낮았음에도 불구하고 전쟁이 나면 상류층들이 먼저 나서는 희생정신, 그리고 기부정신과 활발한 사회공헌활동으로 평민들의 신뢰를 얻는 노블리스 오블리제 사회적 분위기가 최강의 나라를 만들었다고 했으니까요. - 끝으로 이 책의 부족한 면과 느낀 점 한마디씩 김형기 양도 적고 읽기도 편해 좋았습니다. 한정된 지면의 부족 때문이겠지만 그리스도인끼리의 토론과 대화의 부족, 개종에 따른 내면적 갈등과 심층묘사가 미흡했지 않았나 싶어요. 신앙과 생활을 접목시켜 우리자신을 돌아보게 하다는 면과 신선한 구상으로 신학적, 신앙적 주요 이슈들을 요약해서 잘 다뤄 그룹 활동교재로 활용하면 좋겠습니다.김현호 다 읽고 나니 크리스천의 하루는 하나님나라를 지어가는 과정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일상에서 복음의 가치를 어떻게 담을 건가를 진지하게 생각하는 성찰의 시간이었습니다. 김길구 장시간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다음에는 믿고 보는 톰 켈러의 《내가 만든 하나님》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수고했습니다. [정리: 김길구]
    • 문화
    • 기독교 교양 읽기
    2019-01-22
  • [영화] 죄와 어리석음으로 가득 찬 세상의 발견
    무책임함 부모를 고소한 12살 아들 레바논 빈민가에서 생활하는 자인(자인 알 라피아)은 자신의 출생일도 모른 채 일곱 식구와 살고 있다. 부모님이 멀쩡히 살아있지만 여동생 사하르(세드라 이잠)와 함께 길거리에서 주스도 팔고 상점에서 배달 일을 도우며 집안생계를 돕고 있다. 자인의 부모는 어린 아들이 약국을 돌며 사온 약품에서 항정신성 약물을 물에 녹이고는 옷가지에 묻혀 교도소 재소자들에게 몰래 넘기는 일을 할 뿐 정상적인 가족생계는 자인이 모두 떠맡고 있다. 심지어 생리를 시작한 여동생 사하르를 돌보는 일 조차 한 살 터울 오빠인 자인의 몫이다. 이쯤 되면 관객들은 이 집안이 단순히 가난한 정도가 아니라 자식을 돌보는 일에는 무책임한 부모에 대한 이해를 자연스레 갖게 될 수밖에 없다. 결국 주인공 자인은 부모가 여동생을 상인에게 돈을 받고 시집보낸 것에 대해 분노하고 집을 나와 거리를 떠돌기 시작한다. 일찍이 찰스 디킨스는 19세기 초 런던 슬럼가를 배경으로 한 소설 <올리버 트위스트>를 통해 소매치기 범죄 집단에 끌려가는 바람에 고초를 겪어야 했던 고아 소년의 이야기를 사실적으로 그려낸 일이 있었다. 그 이후 빈곤의 상황에 처한 어린 아이와 그를 둘러싼 사악한 어른들의 풍경은 영화에서 심심치 않게 다루는 소재가 되었다. 이러한 영화들은 대개 주인공 어린이가 처한 심각한 일탈과 위기의 상황을 부각시키는 한편으로 어린이를 이용해 먹은 악당에 대한 죄과를 드러내어 관객으로 하여금 정의의 편에서 심판하도록 마음을 부추기는 한편 어린이를 위기에서 구해내는 의인을 등장시킴으로써 어린이의 미래에 대한 소망을 보여주는 행복한 결말로 끝을 맺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영화 <가버나움>은 다르다. 자식을 낳을 줄만 알았지 키울 줄 모르는 무책임한 부모와 어떤 돌봄도 없이 거리에서 자란 어린이의 삶 속에서 우리는 되풀이 되는 죄와 어리석음을 발견하게 되는 까닭이다. 관객의 마음은 불편할 수밖에 없다. 대중영화에서 자식을 거리로 내몰며 앵벌이에 가까운 노동과 범죄행위를 부추기는 경우 그 부모는 대개 진짜 부모가 아닌 경우가 많았다. 정상적인 부모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보는 까닭이다. 적어도 영화 속에서 친부모라면 돈 때문에 자기 자식을 팔아넘기고 거리의 부랑아로 살도록 만들기는 보다는 빈곤의 현실을 안타가워하며 어떻게든 자식을 정상적으로 교육시키려는 열망을 드러내는 일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가버나움>의 부모는 자식에 대한 사랑은 존재하지 않으며 방관을 넘어서 생계를 유지하는데 이용하는 무책임한 면모를 여지없이 드러낸다. 아동학대에 해당하는 부모의 무책임한 행동에 대해서 자인은 부모를 법정에 고소한다. 왜 부모를 고소하는지 묻는 판사를 향해 자인은 지금까지 어떤 영화에서도 들어본 일이 없는 말을 남긴다. “태어나게 했으니까요. 이 끔찍한 세상에 태어나게 한 그들이니까요.” 이 영화의 제목이 ‘가버나움’인 이유가 납득되는 순간이다. 책망 받은 도시 가버나움 영화 <가버나움>은 기독교영화의 전형적인 모습과는 거리가 있다. 성경의 내용이나 가치관을 명확히 드러내기 보다는 오히려 성경이 비판하는 인간과 세상의 모습을 비추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이 영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경을 알아야 한다. 특히 예수님의 공생애 주요 사역지였던 갈릴리 인근의 ‘가버나움’이란 도시에 대한 예수님의 언행을 알고 보았을 때 비로소 영화를 통해서 감독이 의도하는 바를 읽어낼 수 있다. 사복음서에 등장하는 ‘가버나움’은 예수님의 주요 활동 무대였다. 이곳에서 예수님은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 마태 등 다섯 제자를 부르셨고(마4:13,18-22 9:9), 백부장의 종과 베드로의 장모, 그리고 네 사람이 메고 온 반신불수 병자 등에게 여러 이적을 행하셨다(마8:5,14, 9:1, 요6:55-59). 마태복음은 ‘본 동네’(his own town, 마9:1)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가버나움이 그 누구의 장소도 아닌 ‘예수님의 동네’였음을 기록하고 있다. 예수님의 복음이 전파되고 가장 많은 이적을 통해 하나님의 권능이 목격된 도시인만큼 ‘예수님의 동네’로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셨다. 뜻밖에도 가버나움은 예수님으로부터 저주스런 질책을 받은 도시였다. “예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행하신 고을들이 회개하지 아니하므로 그 때에 책망하시되 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이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라면 그 성이 오늘까지 있었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하시니라”(마11:20-24) 영화 <가버나움>은 가장 기적을 많이 목격한 도시가 책망의 대상으로 변한 상황을 현대적인 은유로 묘사하고 있다. 영화가 제시하는 기적은 생명성이다. 집을 나간 자인은 거리를 떠돌다 이디오피아 출신의 불법 체류 여성 라힐(요다노스 쉬페로우)의 돌봄을 받지만 경찰에 체포되고 만다. 자인은 라힐이 사라진 집에서 라힐의 젖먹이를 돌봐야 하는 신세가 되버리고 만다. 어쩌면 이 영화에서 관객이 가장 재미있게 느낄만한 장면이 바로 이 부분이다. 12살 집을 나간 어린이가 울며 겨자 먹는 심정으로 젖먹이 요나를 돌보는 모습은 기적에 가깝다. 그것은 생명에 대한 존엄과 가치가 인간성 안에 내재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순간이기도 하다. 그러나 생명으로 충만할 기적의 아이는 더 이상 어른들의 이기심과 무책임한 사회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채 그들의 행동을 모방하고 만다. 자인은 자신의 부모가 여동생을 결혼이란 명목으로 팔아넘겼듯이 아이의 아빠라고 추정되는 남자에게 젖먹이를 돈 받고 넘겨버리고 만다. 이 저주스런 행동의 결말은 법정에 서는 일이다. 자인은 시집간 여동생이 임신 끝에 죽은 사실을 알고 남편이 되는 남자를 칼로 찌르는 바람에 교도소에 가게 되고, 아동학대가 위법이란 사실을 알고 난 후에는 부모를 고소하는데 이른다. 나딘 라바키 감독은 자신이 태어난 나라 레바논의 현실이 성경의 ‘가버나움’과 다를 바 없음을 그렇게 묘사했다. ‘가버나움’을 보고 무엇을 할 것인가? 어린 아이가 처한 빈곤과 불의의 현실을 담은 영화를 만든 감독 가운데는 유난히 여성 감독이 많다. <가버나움>의 나딘 라바키 뿐만 아니라 우간다의 빈곤한 현실 속에서 체스우승을 꿈꾸는 어린이를 묘사한 <체스의 여왕>(2016, Queen of Katwe)의 미라 네어(Mira Nair) 감독 또한 여성 감독이다. 이 두 여성 감독은 여성 특유의 모성애를 발휘하여 사회의 약자인 어린이에게 가해지는 부조리한 현실을 고발하는 사회성 높은 영화를 만드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상업영화의 세계에서 매우 선정성 높은 묘사가 이루어질 수 있는 장면들이 순화되어 있는 것은 여성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결과로 볼 수도 있다. 영화 <가버나움>을 본 기독교인은 두 가지의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첫째는 회개에 대한 촉구다. 성경의 가버나움이 예수님께 책망을 받은 이유는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행하신 놀라운 이적을 보고 회당에서 가르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지만 그들은 회개하지 않았고 결국 저주의 말을 들어야 했다.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서 사역을 시작하셨을 때 하신 첫 번째 말씀도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4:17)였다. 회개하라는 말씀이 가버나움의 대중들에게 납득되고 실현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예수님은 가르치시고 수많은 이적을 보여주셨던 것이다. 둘째는 가버나움을 향한 구원사역에 대한 의지를 갖도록 촉구 받는 일이다. 영화에서 우리가 본 장면들은 모두 사실이다. 아니 현실은 이 보다 더 참혹할 수 있다. 마음이 불편할 수 있는 장면들이 대거 들어있는 이러한 영화들이 기독교인 관객에게 갖는 의미는 오직 한 가지다. 가서 그 영혼을 구하는 일이다. 영화의 끝 부분에는 교도소를 방문한 가톨릭 수녀들이 보여주는 위로의 찬양이 있고, 이슬람 사람들이 기도하는 장면이 있다. 감독은 자인에게 종교가 위로가 되지 못한 현실을 말하고 싶은 듯하다. 형식적인 종교행위는 어느 곳에서도 삶의 위로가 되지 못한다. 진정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말씀과 행동이 필요할 뿐이다. 이제 영화를 본 우리에게 남은 생각거리는 한기지 뿐이다. 현대사회에서 가버나움은 어디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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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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