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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화펼치기] ‘외로운 늑대’의 분노와 악의 발생사
    1. 영화 <암수살인>과 외로운 늑대 영화 <신과 함께>에서 저승사자 역을 완벽하게 소화한 배우 주지훈이 영화 <암수살인>(2018)에서 삭발투혼까지 감행하며 살인범의 연기를 완벽하게 재현했다. 피해자는 존재하지만, 신고도, 시체도, 수사도 없기 때문에 세상에는 알려지지 않았던 살인사건을 암수살인이라고 하는데, 2010년 부산에서 있었던 실화를 영화로 제작하였다고 한다. 영화의 첫 장면, 자갈치 한 식당에서 살인범 강태오(주지훈 분)는 형사 김형민(김윤석 분)에게 이렇게 이야기 한다. “일곱, 총 일곱 명입니다. 제가 죽인 사람들예.” 태오가 적어준 7개의 살인 리스트를 보고 직감적으로 사실임을 감지한 김형사는 “이거 못 믿으면 수사 못한다. 일단 무조건 믿고, 끝까지 의심하자.”라고 말하며 수사를 진행한다. 사실 태오가 추가 살인한 것은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던 살인사건이고, 김형사는 태오가 거짓말과 진실을 교묘하게 뒤섞으면서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지만 수사를 포기 하지 않는다. 부족한 증거로, 또한 공소시효가 끝나버리면 18년 형을 살고 나와도 50세가 되어 또 다시 살인을 할 태오를 잡고자 김형사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다. 마침내 김형사는 증거와 증인으로 태오의 범죄를 밝히고 태오는 무기징역을 선고 받지만, 융악하고 교활한 살인범 태오는 감옥에서 자살함으로 생을 마감한다. 태오는 왜 그랬을까? 왜 사람을 죽이고 반성하지 않고, 끝까지 악의 화신으로 남았을까? 어릴 때 50세 남성을 죽였다는 첫 번째 태오의 자백 리스트에 답이 있다. 아버지의 폭력에 고통당하는 남매, 그리고 중 3때 그 아버지를 죽인 태오와 그것을 모른 채 하는 고 2인 누나. 아버지의 폭력은 아들에게 유전되어 마침내 어른이 된 태오는 아버지와 같이 폭력을 휘두른다. 참을 수 없는 분노로 애인을 살해하고, 이어지는 행인과의 조그마한 마찰에도 살인을 계속한다. 그리고 풀려나고자 김형사에게 자신의 범죄를 말하며 증거불충분으로 감형, 혹은 무죄를 선고받고자 한다. 사실 분노는 인간이 가진 보편적 정서이지만, 순간적으로 화를 참지 못해 타인의 목숨을 빼앗은 행위는 통상적인 행위는 아니다. 그러나 최근 우리 사회에 이런 일이 잇따르고 있다. 2012년 서울 여의도 흉기 난동사건, 2014년 울산 버스정류장 살인사건, 2016년 서울 강남역 화장실 살인사건, 올 2018년 10월에 발생한 서울 강서구 PC방 살인사건, 부산 일가족 피살사건, 경남 거제의 폐지 줍는 여성을 젊은 청년이 살해한 사건 등은 분노에 의한 우발적 살인이었다. 그리고 전문가들의 분석에 따르면, 이 사건의 가해자 대부분은 대인관계가 원만치 않은 ‘외로운 늑대(lone wolf)’유형이라고 한다. 이들은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마음속에 담아둔 화를 적절히 해소하지 못해 범죄를 저질렀다고 한다. 폭력과 살인의 발생사, 곧 죄라는 것이 그저 악한 행위에만 국한되어 있는 것이라면, 교육과 도덕적인 갱신(나아가 약물을 통한 치료와 뇌구조 변경까지)을 통해서 교양을 증진시키고, 사회전체를 잘 정비된 법률로 통제하며 관리한다면 될 것이다. 그러나 태오는 감옥에서 종교적으로는 반야심경을 암송하고, 교육적으로는 법률을 공부하며, 역설적으로 법에 의해 무죄를 선고 받고자 한다. 법과 교육(종교까지)의 무용성을 잘 보여준다. 주변을 둘러보라. 지금 우리의 삶, 사회 환경, 그리고 국제 정치와 인류의 역사는 폭력과 이기심, 살인과 전쟁이 그치지 않고 있다. 죄는 마르지 않고 폭포수처럼 확산되고 있다. 따라서 비약은 있겠지만 영화 <암수살인>은 기독교 시각으로 보면 악의 실체와 발생사, 곧 원죄에 관한 영화이다. 2. 악의 실체 아우구스티누스는 악의 문제를 네 가지 관점에서 논하고 있다. 그것은 존재론적, 도덕적, 심미적, 그리고 종말론적 관점이다. 먼저, 존재론적 관점에서 악은 비존재요, 선의 결핍(privatio boni)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말한다. “악은 그 자체로 실체가 아니라, 다만 존재와 선의 결핍 상태이다.” 곧, 악이란 스스로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좋은 것이 자기완성에 도달하지 못한 실패(결핍)의 상태로 그림자처럼 따라 다니는 것이다. 태오의 환경이 그를 악하게 만들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반대로 “존재하는 모든 것은 다 선하다(Omnis natura bona est)”는 결론이 나온다. 따라서 하나님의 창조는 본래 좋았다는 것, 본래 악을 창조하지 않으신 좋으신 하나님이라는 측면에서는 긍정적이기는 하나, 이러한 악의 존재론적 이해는 역사 안에서 체험한 악의 실체를 설명하기에 부족하다고 볼 수 있다. 태오의 잔인성과 교활함은 단지 선의 결핍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역사 안에서 체험하는 악의 실체를 규명하기 위해 아우구스티누스는 두 번째로 악의 도덕적 관점을 이야기한다. 이것은 선한 의지의 결핍, 즉 악한 의지(voluntas mala) 또는 ‘탐욕(cupiditas)’이다. 곧, 악의 문제를 인간의 내면성에서 찾아 악을 도덕적, 경험적으로 선한 의지의 결핍으로 보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있다. 도덕적이지 않은 행위로써의 악이 있다면 그것과 상관없는 자연악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말한다. “도덕악은 인간의지의 왜곡이요, 자연악은 그 결과이다. 전자는 죄요, 후자는 죄에 대한 벌이다. 그러므로 모든 악은 죄이든지 혹은 죄에 대한 벌이든지 그 하나이다.” 여기서 아우구스티누스의 ‘시간론’과 ‘역사관’이 나오게 되는데,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말한다. “인간의 역사는 어리석은 사람이 하는 이야기처럼 줄거리나 의미가 없는 것이 아니라, 마치 전 세계의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지혜에 의하여 ‘공간적인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처럼, 인간 역사의 사건도 하나님의 섭리에 의하여 ‘시간적 조화’를 이루어 나가면서 최후의 완성을 향해 진행해 나간다.” 따라서 공간적인 조화의 측면에서 악의 문제는 세 번째 ‘심미적인 접근’이, 시간적인 조화의 측면에서는 네 번째 ‘종말론적인 접근’이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그럼, 세 번째 심미적인 접근은 무엇인가? 아우구스티누스는 세계를 밑에서 부분적으로 보지 않고 위에서, 곧 창조자의 견지에서 전체적으로 보려고 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세계를 부분적으로 보지 않고 전체적으로 보게 될 때 악으로 보였던 부분도 결국 전체적인 조화와 미에 공헌하는 요소들이 되고 만다.” 놀라운 통찰이다. 다시 말하면 이런 것이다. 스테인드글라스의 ‘검정색(만약 이것을 악이라고 한다면!)’을 부분적으로 보지 않고 전체적으로 보면 조화를 이루어 아름답다는 것이다. 『고백록』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말한다. “당신에겐 악이 정말 존재하고 있지 않습니다. 당신에게만 아니라 당신이 창조한 것을 전체적으로 볼 때 악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이 창조한 이 세계 밖에서 어떤 것이 침입하여 당신이 창조하신 이 질서를 파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창조한 일부분이 다른 것들과 조화되지 않아서 악인 듯이 보여도 또 다른 것들과는 조화되어 좋게 되고 또한 그 자체가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관점은 때로는 ‘전체를 위한 부분의 희생을 정당화하는’ 전체주의를 암시하듯이 느껴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아우구스티누스의 의도는 하나님의 섭리와 절대 주권을 우주(공간의 차원)에 적용하여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에 기초하고 있다. 곧, 시간과 역사 안에서 행해지는 인간의 악도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지혜와 섭리로 인도되어 결국 아름다운 조화가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악에 대한 종말론적 접근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시편 강해』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러므로 네가 무엇을 선택하든지 전능하신 자는 그것 때문에 자기의 뜻을 성취해 나가시는데 고난을 느끼지 않으신다.” 사실 인간이 아무리 악하게 행동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하나님의 뜻과 능력 밖에 있을 수는 없다. 우리 인간의 의식적, 무의식적 행동과 생각까지도 이용하여 자기의 뜻을 수행하시는 이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말한다. “인간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악용하지만 하나님은 인간의 악도 선용하신다.” 태오에게 면죄부를 주어 희생자의 울음이 그치지 않게 하는 것일까? 더 나아가 아우구스티누스는 『교리요강』에서 이렇게도 말한다. “하나님은 악이 존재하지 않도록 하기 보다는 악에서 선을 이루는 것이 더 좋다고 판단하셨다.” 이것은 역사에 있어서 선과 악의 대립을 통해서 역사의 미와 조화를 이룩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드러내려는 것이다. 이것이 『신국론』의 핵심이 된다. 이 세상에는 ‘신의 나라(Civitas Dei)’와 ‘세상나라(Civitas mundi)’가 서로 얽혀 있지만 결국 신의 나라가 승리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신의 나라는 이 세상나라에 참여하여 세상나라를 끊임없이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신국론』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림의 아름다움이 그 그림 속에 잘 표현된 그림자에 의하여 더 미화되는 것처럼 그것을 식별할 수 있는 눈을 가진 자에겐 이 우주의 미는 악을 행하는 죄인들에 의하여서도 더 증진된다.” 결국 『신국론』에 따르면 하나님은 종국에 가서는 인간이 알 수 없는 방법으로 악을 제어하시고 시간적이고 유한한 악으로부터 영원하고 무한한 선을 이룩하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악의 문제에 대한 종말론적인 해결이다. 태오가 자살함으로 악이 제어된 것인가? 아니면 무기징역을 선언함으로 정의는 구현된 것인가? 그러나 영화의 마지막 장면, 피해자의 사체를 찾기 위해 낙동강 생태공원의 아름다운 갈대밭을 수첩을 들고 걸어다니는 김형사의 모습은 어쩐지 씁쓸하다. “오지희, 어디있노? 니!?” 3. 악의 발생사: 원죄 따라서 김형사의 씁쓸한 모습의 원인은 악의 발생사로 ‘원죄(原罪)’를 논할 때 이해 될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창세기’에 등장하는 최초의 인류인 아담과 하와 이야기를 자신의 저작 『고백록』에서 해석하면서 그리스도교 교리의 근간이 된 원죄라는 개념을 만들었다. 원죄는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죄인인 아담이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들에게 자신의 성품을 유전시켰다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인류를 아담과 동일시하기에, 아담과 인류의 관계는 유대관계(또는 연대관계)이다. 따라서 아담의 범죄로 인류는 출생시 ‘죄의 총체(messa peccati)’에 가담한 실제적 죄인이 되는 것이다. 물론,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구원받는 ‘구속된 총체(messa redmata)’이기도 하다. 중요한 것은 아우구스티누스가 죄의 보편성의 원인을 ‘육체의 유혹’으로 보지 않고, ‘의지의 전도(the pervision of will)’로 본다는 점이다. 따라서 이에 대한 치유의 방법도 ‘은총의 절대성’뿐이라고 말한다.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하면 원죄는 단순한 죄책이 아니라 실제적인 죄이고, ‘모방(imitation)’이 아니라, 출산에 의해 생성되며, 원죄의 결과로 개인들에게는 무지, 육욕, 죽음이 초래되었다고 한다. 반면,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은 유아는 타락 이전의 아담과 같은 상태로 태어나며 원죄는 아담의 행위에 대한 ‘모방’이며 이러한 죄는 그리스도에 대한 모방, 곧 예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으로 제거될 수 있다고 한다. 아무튼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있어서 자유란 선을 선택하고 완수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한다. 그러나 타락한 인간은 결코 이 능력을 소유할 수 없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말한다. “자유의지는 포로가 될 것이므로 죄짓는 용도 외에는 쓸모가 없다. 만일 하나님의 도우시는 조치로 해방되지 않는다면, 의를 행하는데도 쓸모가 없다.” 사실 죄로 인한 하나님으로부터의 이탈은 인간의 의지를 왜곡시켰고, 진리에 대하여 눈이 멀었으며 육체에 굴복 당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인간에게 은총을 부어 주시어 믿음으로 무지를 정복하고, 사랑으로 자기중심을 대체하고, 소망을 통하여 죽음에 대하여 승리하게 하신다는 것이다. 영화로 시작했기에 영화로 결론을 내려 보자. 태오는 죄로 인해 하나님으로부터 이탈했으며 왜곡된 의지로 진리에 눈멀고, 육체에 굴복당한 것이다. 그가 자살하지 않고 ‘구속된 총체’로 가기엔 선의 결핍이 너무 심했던 것인가? 아니면 멸망할 바벨론 성이었기 때문일까? 답은 태오가 김형사에게 그토록 사주기를 바랬던 변색안경(선글라스)에 있다. 실내에서는 그냥 도수 없는 안경이지만, 실외에서는 빛을 차단하는 선글라스가 되는, 그 안경 말이다. 그리고 요한복음은 태오가 안경을 갖고 싶었던 이유를 이렇게 말해준다.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요1:5).”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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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11-12
  • [영화] 북한을 다룬 영화들이 달라졌다
    남북화해의 시대에 영화 속 북한을 보다 남과 북의 대통령이 벌써 두 번의 정상회담을 가졌다. 북미간의 핵협상도 계속 이루어지고 있는 현실에서 남북은 9·19 군사합의에 따라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의 비무장화를 진행 중에 있다. 공동경비구역 안에 있는 화기와 초소를 모두 철수하고 나면 다음 달 중에는 민간인 관광객들의 자유로운 왕래가 이뤄질 것으로 보인다. 박찬욱 감독의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가 제작된 지 꼭 18년 만의 일이다. 남북의 군인들이 만나서 초코파이를 나누어 먹고 닭싸움을 하는 장면은 진짜 현실이 될 것인가! 지금까지 북한을 다룬 영화의 원형적 요소는 박찬욱 감독의 <공동경비구역 JSA>(2000)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그것은 이영진 영화평론가가 말한 대로 ‘역사의 비극을 불러와 희극으로 치장하고, 결국엔 다시 비극으로 마무리하며 현재의 비극을 환기하는 플롯’의 반복이다. 군사분계선을 넘나들며 우정을 쌓아가던 남북의 네 명의 젊은 군인들이 등장하고, 제대를 앞두고 인사차 찾아간 북한 초소에 갑자기 들이닥친 북한군 간부로 인해 이 우정 어린 상황이 총격전으로 이어지며, 조사 중 주인공은 자살로 끝을 맺는 줄거리는 역사의 비극이 회상되고 다시 비극으로 마무리 짓는 구조를 보여준다. 그러나 남북화해 무드가 한창인 오늘날 우리가 북한을 다룬 영화들에서 가장 주목하는 것은 비극의 중간에 자리한 익살과 유머 그리고 이념을 넘어서는 인간애가 자리하고 있다는 점이다. 북한군 오경필 중사(송강호)를 필두로 중간 중간 코미디 영화에나 나올 법한 대사와 주인공의 익살스런 연기는 긴장감으로 일관된 상황을 이완시키는 청량제와 같은 역할을 한다. 만일 이 영화를 사건의 전모를 밝혀내는데 치중한 추리물로 갔었더라면 틀림없이 지금과 같은 좋은 반응은 얻지 못했으리라. 왜냐하면 <공동경비구역 JSA>의 포장방법은 휴머니즘인데 인간미의 결정적 요소는 분노나 복수에 있지 않고 웃음과 울음에 있는 까닭이다. 주인공 이병헌이 지뢰를 밟았을 때 이를 북한군 오경필이 제거해주는 상황은 웃음과 울음이 교차되는 이 영화의 상징적 장면이다. 이것은 마치 20세기 온 인류를 웃기는 한편 내적으로 울렸던 찰리 채플린의 휴머니즘이 주는 희비극의 가치를 재현한 것이다. 웃음만이 줄 수 있는 가벼움을 극복하면서도 울음이 던져주는 무거운 상황을 이 영화는 아슬아슬하게 교차시킴으로서 탈이데올로기의 시대를 맞아 젊은이들의 가벼움을 추구하는 감각적 성향과 의미를 추구하는 기성세대의 성향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었다. 남북의 갈등에서 부패와의 전쟁으로 지난 해 까지만 해도 남북의 상황은 최악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북한의 핵실험과 탄도미사일 발사 실험은 계속됐고 미국은 북한의 핵시설 공격에 대한 의도를 공공연하게 밝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영화는 달랐다. 반공을 앞세운 영화가 나올법한 상황이지만 한국영화는 북한 내부의 문제를 지적하면서도 아울러 남북 간의 협력모드를 전개시키고 있다. 그 중심에는 영화 <공조>와 <브아이피> 그리고 <공작>이 있다. 김성훈 감독의 <공조>는 위조지폐 동판을 훔쳐서 남한으로 잠적한 북한의 전직 특수부대 장교 차기성(김주혁)을 잡기 위해 남한에 온 북한 형사 림철령(현빈)과 그의 파트너가 되어 북한이 감추고 있는 수사의 진실을 캐내려는 남한의 어리바리한 형사 강진태(유해진)가 벌이는 공조수사를 다루고 있다. 영화는 남북 갈등이 아닌 공조 수사를 통한 남북의 믿음을 강조한다. 상대방의 비밀을 알아내고 감시하기 위해 서로의 휴대폰에 도청장치를 심어놓고 심지어 남한사정을 잘 모르는 림철영에게 수사관의 명패인양 성폭력전과자에게 채우는 전자발찌를 채우는 불신의 상황은 관객에게 웃음을 주는 코미디적 요소로 등장한다. 그러나 이것은 믿음을 잃어버린 남북의 상황에 대한 은유로도 읽혀지는 대목이기도 하다. 코미디와 액션 장르를 오가며 진행되는 이 영화에서 가장 주목할 만 한 점은 불신의 관계가 어떻게 믿음으로 발전할 수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 남한 형사의 집에서 가족들과 밥을 먹고 시간을 보내는 림철령은 남쪽 파트너에 대한 이해와 믿음의 높이를 쌓아간다. 마치 평양냉면이 남북의 공조에 어떻게 기여하고 있는가를 예측이라도 한 듯 함께 숙식을 같이 하는 가운데 신뢰가 형성이 되고 마침내 문제를 해결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 영화의 백미는 북한 요원으로 잘 생긴 현빈을 기용하고 남한 수사관으로 개성 있는 유해진을 앞세운 점이다. 이 같은 캐릭터의 반전을 이룬 영화를 즐기게 된 것은 분명 남한이 북한에 대해 갖는 높은 자신감 때문일 것이다. 박훈정 감독의 <브이아이피>(V,I.P.) 또한 남북의 갈등이 아닌 부패한 북한 권력자를 향한 정의를 묻고 국제관계의 복잡한 속내를 드러낸 새로운 유형의 북한관련 영화다. 북한 권력자의 외아들 김광일(이종석)을 기획탈북 시켜서 북한의 중국내 비밀계좌정보를 얻고자하는 국정원 요원 박재혁(장동건)이 한 축을 이루고 있고, 그의 의도와 상관없이 김광일이 한국과 홍콩에서 저지른 여성연쇄살인사건을 추적하는 남한 경찰 채이도(김명민)와 북한 보안성 요원 리대범(박희순)의 집요한 추적이 또 하나의 축을 이루면서 암흑가의 정서와 액션을 화면 가득 담고 있다. 이 영화의 박진감 넘치는 이야기는 두 축이 대립적 구도를 형성하며 갈등을 양산해내는 가운데 전개된다. 윤종빈 감독의 <공작>은 남북관계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남한권력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 담긴 영화다. 1990년대 활동했던 대북 공작원 흑금성의 간첩사건 실화를 다룬 이 영화는 남북경협에 대한 북한의 관심과 호의를 드러내는 한편으로 정권교체를 막기 위해 북한에 도발을 요청하는 남한 정부의 어이없는 행동을 폭로하고 있다. 이것은 반공영화나 부패한 북한 정권을 문제를 소재로 삼는 지금까지의 영화는 장르를 달리하는 일이다. 그동안 숨겨 온 대북공작의 비화를 서슴없이 드러낼 만큼 남한은 선이고 북한은 악이라는 이분법적인 사고가 어 이상 영화에는 통하지 않음을 나타낸다. 북한 주민이 아닌 권력을 문제 삼다 <공조>나 <브아이피>를 본 관객들은 영화의 이야기를 형성하는 여러 구조들 사이에서 뜻밖에도 공통된 몇 가지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 모든 북한 문제의 핵심은 권력 중심부의 문제란 사실이다. “북한이 나쁘다 혹은 북한이 문제다” 라고 말 할 때 ‘북한’이란 핵미사일을 개발하고 세계를 위협하는 북한의 핵심 권력집단을 의미할 뿐 북한 주민 대부분은 이와 관계없음을 알아야 한다. 오히려 <브아이피>에서 봤듯이 일반 주민들은 권력집단의 희생자이거나 생존하기 위해서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사람들에 불과하다. 둘째, 남북은 공통의 목표 안에서 협력할 수 있다는 점이다. 영화에서 리대범(박희순)의 원래 소속은 35호실 해외사업팀이다. 북한의 35호실은 북한의 대남공작기관으로 리대범은 간첩교육을 받고 공작원 임무를 수행하던 사람이었다. 그러던 그가 김광일 사건을 조사하다 함경북도 비료공장으로 좌천된 이후 남한에 와서 채이도 경감과 협력하는 관계로 변화하게 된다. 두 사람은 서로를 매우 까칠하게 대하지만 중요한 정보들이 오가는 것을 볼 수 있다. 셋째, 남북의 문제에는 항상 미국이 깊이 개입하고 있는 현실을 보여준다. 대부분 한국의 공권력은 미국 정보요원 앞에서 무기력하며 원하는 대로 할 수 없는 상황을 연출한다. 남북관계 개선이 북미정상회담에 달려있음이 자명한 현실에서 영화는 솔직함을 잃지 않는다. 영화는 관객이 보고 싶은 환상을 담아내며 인간 내면에 잠재된 욕망을 발현하는 도구이다. 남북이 힘을 합쳐 악당을 물리치고 공동의 선을 위해 남북이 손을 잡는 영화 속 장면은 비록 당장의 현실은 아니지만 간절히 원하는 미래의 모습일 수 있다.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며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않는’(사2:4) 장면은 얼마든지 영화에 등장해도 좋다. SF영화가 보여주듯 영화는 미래를 내다보는 기능이 있지 아니한가? 영화를 통해서라도 좋은 꿈을 계속 꾸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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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11-12
  • [기독교 교양 읽기 42] 초기 선교사들, 부산항으로 입국했다!
    부산 시각으로 본 한국 기독교 역사 이 책은 ‘부산에서 바라본 한국 기독교회사’라는 점을 내세운다. 그동안 대부분의 한국 기독교회사가 서울을 중심으로 씌어졌지만, 초기 선교사들이 이 땅에 첫발을 내디딘 곳이 부산임을 새삼 일깨운다. 여러 가지 이유로 발자국이 너무도 희미하여 찾기조차 어렵지만, 그들의 흔적을 하나씩 좇아 역사적 의미를 새롭게 한다.여기에 더하여 저자는 일제하 신사참배를 둘러싸고 배교와 순교의 갈림길에서 벌어졌던 목회자들의 ‘민낯’을 드러내 보이고, 이로 인해 해방 후 분열의 길로 갈 수밖에 없었던 역사적 아픔을 이야기한다. 이러한 역사적 질곡도 부산이 주요 무대가 되어 일어났다. 그럼에도 저자는 이 역사적 사실을 부정적으로만 보지 않고, 이로 인해 오히려 ‘불교 도시’ 부산에 복음의 씨앗을 더욱더 흩뿌리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며, 역사적 아이러니를 따듯한 시각으로 해석한다.또한 한국전쟁으로 인해 부산지역 기독교계에 나타난 두 가지 상반된 현상도 담담하게 풀어낸다. 북한지역에서 피란 내려온 교인들로 인해 부산경남지역의 교회가 오히려 더 발전할 기틀을 마련하게 된 점과, 다른 한편으로 이러한 시대적 사회 분위기와 환경으로 인해 부산이 다양한 이단이 발붙이고 발흥할 수 있는 요람이 된 점이다. ◈ 《다르게 다가서는 역사》 || 저자 탁지일은 캐나다 토론토대학교 세인트마이클칼리지에서 교회사 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고, 현재 부산장신대학교 교회사 교수로 재직하면서 월간 《현대종교》 이사장 겸 편집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는 《교회와 이단》 《찬송으로 듣는 교회사 이야기》 등이 있다. 예영커뮤니케이션, 2018. 13,000원. ◇ 같이 읽으면 좋은 책《호주선교사 맥켄지의 발자취》 / 헬렌 맥켄지 / 대한기독교서회《부산경남지방 기독교회의 선구자들》 / 이상규 / 고신대학교출판부 초기 선교사들, 부산항으로 입국했다!기존의 교회사는 객관적인 사실마저 소홀히 취급해 ▌좌담: 김길구, 김수성 경성대 초빙외래교수, 김현호 기쁨의집 기독교서점 대표▌특별손님: 탁지일 부산장신대 신학과 교수 “대부분의 한국교회사 서술에는 첫 상주 선교사 알렌이 조선으로 가기 위해 1884년 9월 14일 상해를 떠났다고 기술되어 있다. 하지만 알렌의 일기와 보고서에 따르면, 알렌은 9월 14일에 이미 조선 부산항에 도착해 있었다. 백낙준에서 시작된 이러한 오류는 … 1차 자료에 대한 재확인 없이 정설로 굳어져 왔다.” [본문 34쪽에서] ▲ 《다르게 다가서는 역사》는 부산에서 바라보면 한국의 교회사를 새로운 시각으로 볼 수 있음을 지적하는 책이다(왼쪽으로부터 김수성, 김현호, 탁지일 교수, 김길구). 초기선교사들의 부산항 입국은 팩트!김길구 오늘은 이 책의 저자 탁지일 교수님을 모시고 진행하겠습니다. 복잡한 퇴근시간에 여기까지 오시느라 고생하신 교수님께 먼저 감사드립니다(환영). 이 책 제목에 ‘다르게’라는 말을 사용했습니다. 다른 교회사와 어떤 점에서 차이가 나는지요?탁지일 한마디로 부산과 경남의 시각으로 바라본 기독교회사라는 점입니다. 여태까지 나온 교회사 대부분은 서울 중심 시각이었습니다. 각 교단에서 펴낸 역사책도 마찬가지입니다. 초기 선교사들은 거의 예외 없이 부산항을 통해 입국, 며칠 후 제물포항으로, 그리고 거기서 서울이나 평양 등으로 갔습니다. 그런데도 대부분의 교회사 책에는 이 객관적인 사실조차도 소홀히 취급하고 있습니다.김현호 부산에서 특별히 한 일이 없어서 그런 게 아닐까요?탁지일 대부분의 학자들이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정확한 자료는 없지만, 초기 선교사들이 부산항으로 들어온 후 부산사람들을 거의 만나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전혀 만나지 못했다고 단언할 수는 없습니다.김수성 이 책에서도 언급했듯이, 알렌의 일기를 보면 부산의 왜색 도시, 일본인들의 도시로 표현했습니다. 선교사들의 그런 인식이 영향을 미친 것은 아닐까요?탁지일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초기 선교사들이 부산항을 통해 이 땅에 발을 내디딘 것은 어느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 즉 팩트(fact)입니다. 이것은 사관(史觀)의 문제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어떤 교회사에는 선교사가 제물포항에 도착한 날짜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자칫, 본국이나 일본 등에서 바로 제물포항으로 입항해 서울로 간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김길구 제물포가 서울의 관문이었다면, 부산항은 조선의 관문이었죠. 그런데도 서울의 학자들은 제물포만 언급하고 있군요. 그런데 이 사실이 중요한 다른 이유가 있습니까?탁지일 제가 신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가장 힘들었던 부분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부산은 다른 지역에 비해 기독교세가 상당히 약한 곳입니다. 여기에 더하여 초기 선교를 공부할 수 있는 역사적 유적이나 유물이 거의 남아 있지 않습니다. 한마디로 부산의 신학생들은 물론, 기독교인들이 비빌 언덕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몇 년 전에 광복동 입구에 선교사들의 ‘입국 표지석’을 세운 것은 상당히 의미가 있습니다. 하디, 부산서의 고난이 부흥운동 촉발김현호 저는 캐나다 선교사인 로버트 하디가 원산부흥운동을 촉발하게 된 계기가, 부산 영도에서의 고난과 좌절에서 비롯되었다는 이야기를 관심 있게 보았습니다.탁지일 하디는 토론토대학교 의대를 졸업한 엘리트 의사로서 아내와 두 딸을 데리고 영도에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본국의 지원마저 끊기자 선교는커녕 직접 가족들의 생계비를 벌어야 했고, 영도의 거주지도 오가는 선교사들의 임시거처(road house)였습니다. 콜레라 등 전염병에 걸린 외국인 환자가 있으면 이곳에 격리 수용하기도 했고요.김수성 그렇더라도 부산에서의 어려움을 원산부흥운동과 연결하기에는 사실 관계가 부족한 것 같습니다.탁지일 한마디로 행간을 읽고 싶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가 원산에서 성경공부를 인도하다가 갑자기 공개적인 회개를 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연결고리를 찾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어느 구절이 그를 자극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성경구절에서 그는 부산에서의 고난과 역경을 떠올렸고, 그동안 남 탓만 하였던 자신을 되돌아보게 된 것이라고 유추할 수 있었습니다. 모든 것이 자신의 문제임을 고백한 것이지요.김길구 초기에 각 교단의 선교사들은 지역을 나눠 선교했습니다. 이러한 것이 신앙의 형태에 영향을 미쳤는가요? 탁지일 북쪽에서 선교했던 캐나다의 경우, 지역에 한정해서 선교한 것이 아니라 조선 사람들이 가는 곳이면 시베리아, 만주, 일본까지 따라갔고, 거기서 민족교육을 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이에 비해 북장로교는 주로 서울과 평양, 경북 지역의 관료층이나 양반층을 대상으로 선교했습니다. 이렇듯 선교부에 따라 신앙 형태도 어느 정도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한편, 이보다 더 관심을 끄는 것은 각 선교 교단과 담당한 지역이 서로 관련성이 있었던 점입니다. 남장로교의 경우 호남을 담당했는데 농업지역이라는 점, 북장로교와 북감리교가 담당한 서북지역은 상공업지역이라는 관련성이 있었습니다. 기독교 전래사를 상징하는 센터 필요김현호 부산경남지역은 호주 선교부가 담당했죠.탁지일 호주선교본부를 부산을 콕 집어 선교하기로 작정한 것은 헨리 데이비스의 순교와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선교를 위해 부산에 왔다가 다음날 죽음을 맞이한 그의 열정을 호주선교본부가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한 조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복병산 기슭에 있던 데이비스의 묘가 사라진 것입니다.김현호 197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데이비스의 묘비가 있었던 것으로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후 일대가 개발되면서 아예 사라졌다고 하더군요.탁지일 안타까운 일이죠. 이 일대를 중심으로 호주선교부의 기독교 전래사를 기념할 수 있는 센터를 교계에서 하나 만들었으면 하는 바람 간절합니다. 이런 센터는 역사성, 접근성, 연계성을 모두 고려해야 하는데, 데이비스의 묘가 있던 지역은 이 모두를 만족하는 입지라 할 수 있습니다.김길구 신사참배와 관련해 부산경남지역 교회가 전국적으로 얼마나 영향을 미쳤는가요?탁지일 지역마다 조금 차이는 있었습니다. 단적인 예로 평양 등 교회가 융성했던 곳은 신사참배 반대 분위기가 강했습니다. 이에 비해 서울과 같이 학교나 병원을 중심으로 선교하던 곳은 폐쇄를 피하기 위해 소극적으로나마 신사참배에 참여하였습니다. 그러나 부산경남은 적극적인 친일과 함께 이에 강력하게 저항하던 인물을 배출한 곳이기도 합니다.김수성 그래서 부산경남을 ‘배교와 순교의 땅’이라고 불렀군요.김현호 당시 호주선교부는 절대 반대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이 부산경남지역의 교회 확산에 영향을 미친 것은 아닐까요?탁지일 그럴 가능성도 있습니다. 당시 거창, 진주, 마산, 통영 등지에 산재해 있던 재산이 호주선교부가 일제에 의해 철수한 후 어디로 사라졌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이들 센터가 사라진 것은 분명히 선교에 마이너스 역할을 했을 겁니다. 부산, 이단 발흥에 좋은 조건 갖춘 곳김현호 신사참배 문제가 한편으로는 교단 분열이라는 결과를 낳기도 했죠. 그럼에도 이에 대한 참회의 모습은 찾기 어려운 것이 현실입니다.김길구 부산이 이단의 요람이라고 했는데 왜 그렇게 되었죠?탁지일 몇 가지 요인이 있습니다. 먼저 부산은 본래부터 불교세가 강한데 비해, 기독교는 한국전쟁으로 인해 유입된 교인으로 인해 갑자기 확산되는 등 기독교의 뿌리가 약하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이단이 생겨나더라도 일반시민들의 눈에는 차이가 없었고, 교세도 약하기 때문에 이를 통제할 힘도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이단이 발흥하기에 좋은 조건을 갖추게 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지금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김길구 상당히 의미 있는 지적인 것 같습니다.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만, 한정된 지면으로 인해 여기서 줄이겠습니다. 많은 교인들이 이 책을 읽음으로써 신(新)사도행전을 써내려가길 간절히 바랍니다. 다음에는 한국교회탐구센터에서 펴낸 《페미니즘 시대의 그리스도인》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겠습니다. 얼마 전 세계적으로 확산된 ‘미투’운동과 관련하여 관심을 가질만한 책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정리: 김수성]
    • 문화
    • 기독교 교양 읽기
    2018-10-29
  • [영화] 상처 입은 자의 치유자를 목격하다
    배우에서 신앙인 감독으로의 변신 추상미 감독의 예술 인생을 논할 때 뗄 수 없는 사람은 1970년대와 80년대 중반까지 충무로 연극계를 주름잡았던 그의 아버지 추송웅(1941~1985)이다. <빨간 피터의 고백>이란 모노드라마를 통해 원숭이가 바라본 인간세상의 부조리를 낱낱이 고발하는 연극은 대학가의 큰 화제였다. 프란츠 카프카의 원작 <학술원에 보내는 보고서>를 각색하여 올린 무대에서 추송웅은 원숭이 분장을 하며 특유의 익살스런 표정과 연기를 통해 예술에 허기진 한국의 청년들을 사로잡았었다. 실제로 이 모노드라마는 1977년 8월 20일, 객석이 130석도 안되는 삼일로 창고극장에서 첫 무대에 올라간 이래로 무려 482회나 지속된 공연을 통해 15만 2천명이라는 당시로서는 사상최대의 관객을 끌어 모은 무대 역사를 갖고 있다.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연기와 연출 그리고 기획의 다채로운 재능은 고스란히 딸 추상미에게 이어졌다. 아버지 추송웅이 <빨간 피터의 고백>에서 기획, 제작, 연출, 미술, 연기 등 1인 5역을 해낸 것처럼 딸 추상미 또한 기획과 연기 그리고 연출에 직접 나서는 영화를 제작함으로써 아버지의 유전자를 작동시키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추상미의 예술 인생에 큰 변화가 나타났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 그녀가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자신을 향한 시선은 방향을 바꿔 북녘 땅 하늘 아래서 고통 받는 어린 아이들을 향하기 시작했다. 고난의 행군 시절부터 나타났다는 북한의 ‘꽃제비들’. 국가의 돌봄은커녕 부모 없이 떠돌아다니며 아무거나 주워 먹다가 죽어버린 꽃제비들의 모습을 TV에서 본 추상미는 자신의 신앙과 예술이 가야할 방향을 깨닫기 시작했다. 깨달음은 행동으로 이어지고 신앙의 깊이가 더해지면 하나의 또렷한 실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지금도 남북 청년 모임인 ‘모자이크 공동체’를 이끌며 탈북청년들과 주일 오후 마다 예배를 드리고 북한을 위해 기도하는 그녀의 모습에는 아버지로 물려받은 예술 유전자를 작동시키는 새로운 동력으로 신앙이 작동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다큐멘터리 영화 <폴란드로 간 아이들>은 유명 배우가 신앙을 갖게 된 뒤 사회를 바라보는 달라진 시선을 예술로 승화시킨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아무도 몰랐던 그 아이들 추상미 감독의 <폴란드로 간 아이들>(2018)은 전형적인 다큐멘터리 형식을 그대로 보여준다. 소재주의를 택하여 우리가 전혀 알지 못했던 사실을 갑자기 스크린에 등장시키는 바람에 관객들을 깜짝 놀라게 만들고 깊은 감정의 우물로부터 눈물을 솟구치게 만들기 때문이다. 역사적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현장을 방문하고 관련자를 인터뷰하며 마침내 과거의 사진을 들춰내는 등의 일련의 작업은 일반 다큐멘터리의 형식을 따랐다. 그러나 다른 점이 하나있다면 감독은 연기자의 모습으로 등장할 뿐만 아니라 사건의 관찰자이며 또한 참여자로 등장한다. 즉 사건을 소개하고 편집하여 관객에게 전달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자신이 겪었던 상처를 이해하고 치유하는 행위에까지 이르게 함으로써 이 영화는 관객을 위한 영화인 동시에 자신을 위한 영화가 되도록 만들었다. 1951년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시절 1천5백 명에 이르는 전쟁고아들이 북한으로부터 소련을 거쳐 동유럽 폴란드에 보내졌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몸과 마음에 전쟁의 비극을 고스란히 안은 채 폴란드 바르샤바 외곽의 프와코비치에 도착한 아이들은 학교를 겸한 수용시설에서 1959년 북한으로 송환될 때까지 세상이 알지 못했던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추상미 감독은 국민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이 영화가 시작과 더불어 핵심이 무엇인지를 압축해서 전해주었다. “영화에 브로니스와프 코모로프스키 전 폴란드 대통령이 등장해요. 코모로프스키 전 대통령은 2013월 10월 방한 당시 박근혜 대통령에게 한국과의 인연을 이야기합니다. 북한 전쟁고아의 교사들 중 한 명이 자신의 어머니였고 피아노와 음악을 가르쳤다고 해요. 폴란드 교사들은 예수님의 사랑으로 보살폈고 아이들은 ‘엄마 아빠’라고 부르며 살갑게 대했답니다. 정이 많이 들었대요. 그래서 북한 아이들은 폴란드를 떠난 뒤에도 편지를 보내 왔답니다. 그런데 폴란드 교사들도 아픔이 있었어요. 북한 고아들 나이 즈음에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거든요. 교사 중엔 전쟁고아도 있었고요.”(국민일보 2018.3.31) 결혼 후 아기를 낳고 키우며 산후우울증도 겪었고 엄마로서의 삶을 사는 감독의 시선은 북한의 전쟁고아들에 대한 남다른 관심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그러나 영화는 뜻밖에도 관심의 시선을 전쟁고아가 아닌 이들을 돌보았던 폴란드 선생님에게로 향한다. 이것이야말로 이 영화의 가장 큰 장점이 아닐 수 없다. 과거 몰랐던 역사의 슬픈 사실을 가르쳐주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지만 비극과 슬픔을 위로했던 역사적 존재들을 스크린에 등장시키는 것은 기독교영화가 추구해야할 가치를 보여주는 일이 아닐 수 없는 까닭이다. 고통과 비극의 문제 많은 과거 역사를 들추는 일은 어쩌면 쉬운 일인지도 모른다. 그것을 통해 인간의 만행과 죄성을 낱낱이 드러내어 세상에 충격을 줄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비극 가운데서도 인간의 아름다움을 지켜주고 삶의 희망을 전해주는 존재를 보여주는 일은 쉽지 않다. 대중문화에 있어서 인간의 관심은 빛 보다는 어둠의 과거를 들춰내는데 눈길이 더 가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폴란드로 간 아이들>이 복음의 메시지를 내레이션을 통해 직접 전하지 않더라도 하나님의 마음을 담았다는 얘기를 들을 수 있는 것은 비극 속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는 희망과 위로가 따뜻하게 빛을 비춰주고 있는 까닭이다. 영화의 두 가지 미덕-치유와 통일 <폴란드로 간 아이들>이 아름다운 것은 두 가지의 현실을 성경적 이해 가운데 풀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첫째는 상처 입은 자가 어떻게 또 다른 상처 입은 자를 치유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이며, 다른 하나는 남북의 두 여자가 동행하면서 통일을 준비하는 그리스도인의 마음가짐에 적잖은 울림을 준다. 영화는 무엇보다도 한국의 전쟁고아들(북한이 보내온 아이들이지만 영화는 당시 전선이 한반도 전역에 걸쳐있었던 점을 생각하여 남한의 아이들도 포함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을 사랑으로 돌보는 폴란드 선생님에게 초점을 맞춘다. 지금 생존해 있는 전쟁고아들이 있다면 그들을 인터뷰했겠지만 그들의 행적은 순식간에 사라져버리고 지금은 단지 떠나는 아이들의 뒷모습을 지켜본 폴란드 선생님들만이 남아 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감독이 관객을 대신해서 제기한 가장 큰 질문은 생생한 답변으로 돌아온다. 왜 기생충을 한가득 몸속에 지닌 채 전쟁의 상흔으로 뒤범벅이 된 동양의 아이들을 사랑으로 돌보았을까? 아이들에게 원장님, 선생님이란 호칭 대신 엄마와 아빠로 부르게 하며 먹이고 가르치며 사랑으로 돌보는 폴란드 선생님들에게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이에 대한 대답은 헨리 나우웬(Henri J. M. Nouwen)의 책 제목이기도 한 ‘상처 입은 치유자(The Wounded Healer)’에게서 찾을 수 있다. ‘상처 입은 치유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말한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사53:5) 예수님의 십자가 상처는 인간을 죄로부터 구원하고 죄악의 상처로부터 회복시키는 역할을 한다. 폴란드 선생님들은 자신이 2차 세계대전으로부터 깊이 상처 입은 사람들임을 숨기지 않는다. 북한의 전쟁고아들이 도착하기 불과 몇 년 전만 하더라도 폴란드 사람들은 히틀러의 잔혹한 살육으로부터 몸과 마음에 큰 흉터를 갖게 되었었다. 그 깊은 상처들이 타인을 향한 공격으로 왜곡되지 않고 사랑으로 승화될 수 있었던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그러했기 때문이리라. 또 한가지 영화는 폴란드로 간 아이들을 뒤쫓는 여정에 추감독 혼자가 아닌 탈북소녀이자 배우를 꿈꾸는 이송을 동행시킨 사실에 우리는 이 영화의 미덕을 얘기할 수 있다. 차마 영화에서 말하지 못한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이송은 영화를 통해 내면의 상처에 조금씩 새살이 돋는 것을 느낀다. 남한으로 넘어 오기까지 얼마나 큰 시련이 있었는지를 관객들은 짐작만 할 뿐이다. 그러나 그 속에 희망이 있음을 우리는 깨닫는다. 통일에 대한 발걸음 바빠진 오늘날 남북이 갖고 있는 서로에 대한 상처가 분노와 적개심으로 드러나지 않고 이해와 용납을 발전하기 위해서는 상처 입은 자의 치유가 필요함을 말이다. 탈북자들의 역할이 주목받는 시대가 곧 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문화
    • 영화
    2018-10-15
  • [문화] 그들이 내 이름으로 거짓을 예언함이라!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하노라. 너희 중에 있는 선지자들에게와 점쟁이에게 미혹되지 말며 너희가 꾼 꿈도 곧이 듣고 믿지 말라. 내가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였어도 그들이 내 이름으로 거짓을 예언함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렘 29:8-9) 1. 거짓말 천국 지금 세계는 탈세계화(후기-지구화) 시대로 접어들었다. 영국의 유럽연합탈퇴(Brexit)와 미국 트럼프 시대의 개막은 보호주의적 패권과 국민국가적 배타주의의 표상으로 소통과 교류와 연대는 자국의 이익을 위해 무시되고, 세계는 이제 끝없는 이기적 욕망의 지평으로 치닫고 있다. 이것은 보호무역주의와 국가적으로는 대외고립주의에 대한 요구로 이민자와 교역 상대국에 대한 적대의식을 감정적으로 표출하고 있다. 이러한 주체의 욕망과 타자에 대한 배타성을 뒷받침하기 위해 진실과 사실은 폄하되고, 거짓과 사이비가 그 욕망의 헛된 전망을 정당화시킨다. 옥스퍼드 영어사전은 2016년 ‘올해의 단어’로 ‘탈진실(post-truth)’을 선정했으며 독일언어학회도 ‘탈사실(postfaktisch)’을 2016년의 독일어로 뽑았다. 바야흐로 탈세계화 시대는 탈진실의 사회를 이끌며 ‘거짓의 시대’를 개막시킨 것이다. 지금, 대한민국도 마찬가지이다. 지난 2018년 10월 5일 재판부는 횡령, 뇌물 등 16가지 혐의로 구속기소 된 이명박 전대통령(이하 MB)에게 징역 15년과 벌금 130억 원을 선고했다. 정계 입문 이래 20년 이상 국민을 속여 온 MB의 대국민 사기극이 이제야 막을 내리게 된 것이다. MB의 죄질이 박근혜 전대통령보다 더 나쁜 이유는 다스가 ‘법인화된 최순실’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개신교 장로로서 거짓말을 하였고, 신앙으로도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기는커녕 친인척과 측근들에게 범행과 책임을 전가한 파렴치범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거짓(false, lying)을 ‘하나님보다 자신을 주인으로 생각하는 교만한 마음’으로 본다. 이러한 거짓은 하나님을 배반하는 행위인 우상숭배, 복술, 주술과 관련해 사용되었으며, 하나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은 것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속여 예언하는 사람에게도 적용되었다(렘 29:8-9). 구약성서는 거짓 고소와 거짓 증거에 대해 경계의 대상으로 여긴다. 신약성서도 마찬가지이다. 거짓에 대해서는 강경한 입장을 취한다. 십계명의 8계명도 이렇게 선포한다. “거짓 증언을 하지 마라.” 그런데 지금 대한민국은 대통령부터 교회, 목회자, 개신교 단체에 이르기 까지 온 세상이 거짓말 천국이다. 2. 가짜뉴스(=허위정보) 가짜뉴스(fake news)는 2010년 중반에 등장했다. 최근 국내외 학계에서는 가짜뉴스라는 말 대신 ‘허위정보(disinformation)’로, 혹은 ‘거짓정보’로 용어를 변경해야 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래야만 가짜뉴스에서 풍기는 ‘그래도 언론적 행위’라는 이미지를 건져낼 수 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허위정보’가 100% 가짜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실이 함유되어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90%의 내용이 사실인 경우도 있다. 사실에 근거해야 일반 사람들이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허위정보’는 인과관계를 허위로 만들어내고 별개 사실들을 자의적으로 결합하여 결론을 비틀어 버린다. 악마는 디테일에 숨어 있기 때문이다. 에스더 기도 운동의 실체를 파헤친 <한겨레 신문> 탐사팀 김완 기자는 이렇게 말한다. “에스더 기도운동은 동성애에 대한 공포와 불안을 조장하고, 난민을 범죄와 연결지으려는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이 가짜뉴스들을 만들고 배포했습니다. 애초 탐사팀의 에스더에 대한 관심은 태극기 집회에 등장한 이스라엘기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 깃발을 추적하다 에스더를 만났습니다.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다는 선민론 속에서 그들은 세상과 ‘영적 전쟁’을 벌일 ‘인터넷 사역자’를 모집해 ‘지저스 아미’(Jesus Army=하나님의 군대)를 양성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무기가 바로 비틀어진 사실, 가짜뉴스였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하나님의 군대’, ‘십자군’이 아니라, 십자가가 필요한 시대이다. 개신교 단체의 ‘거룩의 지나친 잉여’가 ‘폭력의 과도한 풍성함’을 낳은 것이다. 2017년 8월 빌리그레이엄 센터 사무총장인 에드 스테쳐는 ‘가짜뉴스 세상에서 진리의 사람 되기(Being people of Truth in a world of fake news)’란 글에서 ‘가짜뉴스 대응법 4가지’를 소개하며 이렇게 말했다. “첫째, 당신이 확인할 수 없는 것은 공유하지 말라. 둘째, 진실함(integrity)을 지키라. 셋째, 당신이 공유하는 것이 사람들에 의해 인식될 수 있는지 확인하라. 넷째, 만약 당신이 문제의 일부라면 사과하라.” 가짜뉴스, 곧 허위정보는 영혼을 좀먹은 사탄의 음성이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사실을 왜곡할까? 건전한 보수 정치가 무너졌기 때문이다. 3. 무너진 보수주의, 극우로 치닷다 서교인문사회연구실 김현준 연구원은 한국 개신교의 극우 이념을 조사하며 이렇게 말한다. “기본적으로 개신교 보수주의는 반공주의와 근본주의를 그 핵심으로 하는데, 최근의 극우주의는 반공주의에 동성애 혐오, 여성혐오(반여성주의). 이슬람․이주민 혐오(인종주의)를 ‘가짜뉴스’로 추가하며, 혐오와 차별 주장을 공공성 담론으로 포장하기에 이른 것이다.” 김현준 연구원에 따르면 보수 우익 개신교의 역사는 이렇다. 1단계, 1970-80년대 ‘국가조찬기도회 정치’를 시작으로, 2단계, 1990년대 한국기독교총연합회의 ‘광장정치’와 기독당을 거쳐, 3단계, 2000년대 기독당과 기독교 뉴라이트라는 ‘전문적 사회운동조직’의 발전으로 이어지고, 마지막 4단계로, 2010년 전후 에스더 기도운동이라는 혐오와 차별 기반의 전방위적 세력으로 발전해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 보수와 극우 개신교의 발생사적 근원은 이승만 초대 대통령이라고 한다. 김현준 연구원의 말을 들어보자. “한국 기독교의 극우 이념 중심에는 ‘독실한 크리스천’ 이승만이 있다. 이승만은 오늘날 보수 우익 정치 세력 전체를 아우를 뿐만 아니라, 에스더 기도운동 네트워크 세력을 비롯한 이른바 ‘극우’ 세력이 재발견한 보수 이데올로기와 국가론적 비전의 기원이다.” 사실, 보수주의 개신교인들은 이승만 대통령을 ‘자유민주주의’와 ‘반공주의’, 그리고 ‘북진통일’로 규정되는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기독교적으로 세운 인물로 추종한다. 그러나 극우 민족주의 개신교인들은 좀 더 나아가 한국이 미국처럼 애초에 기독교 국가로 세워졌다고 생각하고 한민족이 ‘이스라엘’ 유태인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선민’임을 부각시킨다. (물론, 이것은 말세론자들의 144,000명만 구원한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러한 극우 민족주의 개신교인들의 믿음, 나아가 에스더 기도운동이 대중에게 유발시키려는 정서는 (정치적 주도권과 도덕적 우월성에 대한) ‘상대적 박탈감’과 ‘소외감’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감정을 통한 여론의 동원이다. 곧, ‘대중의 절망과 좌절-사회적 공포-증오와 공격’이 극우주의의 출현 과정인 것이다. 말세론이 위세를 떨쳤을 때는 ‘증오와 공격’ 대신 ‘포기와 무기력’이었는데, 최근의 극우주의는 공격성 레벨이 강화된 것이다. 사랑의 종교인 기독교가 혐오와 폭력을 부추기는 종교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그리고 놀라운 것은 촛불 혁명 이후 대중은 절망하기 않고, 희망으로 나가고 있다. 따라서 ‘대중의 절망과 좌절’은 ‘보수주의의 절망과 좌절’로 교체해야 한다. 아무튼 김현준 연구원은 이렇게 말한다. “극우 기독교 세력은 오늘날 저마다 고통스러운 현실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고통의 원인이 ‘사회적 소수자’ 때문이라고 선동한다. 그들이 만든 가짜뉴스가 그 혐오와 차별에 정당성을 부여해주고 있는 셈이다. 가짜뉴스와 반지성주의는 현실의 고통을 자양분 삼아, 한국 사회의 극우화를 재추동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세리, 죄인, 창녀, 병자들과 같은 사회적 소외자와 소수자를 찾으셨는데, 한기총과 기독당, 기독교 뉴라이트 운동, 에스더 기도운동도 사회적 소수자를 찾는다. 그러나 다른 점은 예수께서는 그들의 아픔을 위로하고, 치료하고자 찾으셨지만, 이들은(물론, 다 그렇다는 말은 아니다. 대부분의 복음주의 진영은 거짓뉴스와 결별하고 진솔한 신앙과 복음의 의미를 고민하고 있다.) 그들의 아픔을 짓밟고자 찾고 있다. 4. 보편적 해방과 대안적 사실 ‘탈진실’과 ‘탈사실’의 시대가 이끈 ‘거짓의 시대’는 ‘진실의 죽음’을 가져온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윤리 상대주의(Ethical Relativism)와 다원주의(Pluralism)가 여기에 일조했다고 볼 수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의 토대였던 진리를 해체하였고 개인의 개체화와 익명화는 거짓에 대한 민감성을 둔화시켰으며 인터넷 기술이 열어놓은 매체환경은 같은 의견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자신들만의 대안 사실을 믿는 분할된 ‘마이크로 공론장’을 만들어냈다. 중요한 것은 거짓을 사실로 믿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명백한 사실을 하나의 의견으로 강등시키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이다. 이처럼 사실의 신뢰성을 잠식하고 공론장을 왜곡하는 것은 결국은 민주주의의 토대를 무너뜨린다. 나아가 소통과 교류와 연대가 사라질 때 세계는 다시 위기에 처할 것이다. 진리의 상대성으로 말미암은 포스트모던 상대주의에 칸트와 헤겔을 통해 대안을 탐구하고 있는 슬라보이 지제크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보편적 해방이라는 새로운 인식론적 관점에서 진실을 재구성해야 한다.” 지제크에 의하면 진실의 죽음은 3가지 경로를 통해서 왔다고 한다. 첫째, 종교적․민족적 근본주의의 부상 둘째, 새로운 디지털 미디어의 등장 셋째, 포스트모더니즘적 해체주의와 역사적 상대주의의 유산이 그것이다. 첫째 근본주의자들은 합리적인 토론을 거부하고, 자신들의 주장을 전달하는 데 유리하기만 하다면 가차 없이 데이터를 조작한다. 극우 근본주의자들의 예는 앞서 언급했으니, 좌파에 대한 지제크의 말을 들어 보자. “정치적 올바름을 주장하는 좌파들은 자신들이 선호하는 약자에 대해 부정적인 뉴스가 나오면 이를 감추려 들거나 그런 뉴스를 내보내는 매체를 ‘이슬람 혐오적인 인종주의’라고 비난한다.” 둘째 새로운 디지털 미디어는 특정한 이데올로기적 이해관계로 공동체가 형성되기 때문에 온갖 음모와 주장이 아무런 제약 없이 유통이 된다(무수한 단체 카톡에 떠도는 허위 정보를 보라). 셋째 해체주의와 상대주의는 모든 사람에게 유효한 객관적 진실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믿음을 주었다. 그러나 자유주의자들은 팩트, 사실이라는 것이 엄연히 존재하고, ‘의견의 자유’와 ‘사실의 자유’는 구분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지제크는 ‘대안적 사실’이라는 해결책을 제시한다. 지제크의 말을 들어보자. “이른바 ‘데이터’라는 것은 방대하고 제대로 파악하기 어려운 영역이다. 우리는 언제나 특정한 이해의 지평에서 데이터에 접근하며, 어떤 데이터는 특권화하고 어떤 데이터는 누락된다. 우리의 역사가 바로 이런 것이다. 역사는 선별된 데이터를 엮어 일관된 서사로 만든 ‘이야기’지, 실제 일어난 일을 사진처럼 재현한 것이 아니다.” 지제크의 생각을 신학적으로 적용하면 이렇다. 성서를 보되, ‘보편적 해방’과 ‘대안적 사실’의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 그렇다. 성서의 무수한 이야기들은 보편적 해방의 사건이며 그 사건의 진술은 대안적 사실인 것이다. 오늘 가짜 뉴스에 빠진 근본주의자들은 좌파, 우파 할 것 없이 자신들만의 디지털 미디어를 통하여 ‘우리는 역사적 제약에서 한 발짝 벗어나 세상을 객관적으로 볼 수 없다’는 상대주의의 인식론에 기반 하여 오히려 자신들만의 정당성을 위하여 거짓을 퍼뜨린다. 거기에는 보편적 해방도 없고 대안적 사실도 없다. 쉽게 이야기해보자. 거기에는 생명이 없다. 사람이 사람답게 존중받는 세상! 생명이 생명답게 인정받는 세상! 그들에게는 그러한 생명이 없다는 말이다. 생명 되신 주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명은 바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라는 아주 간단한 보편적 해방의 관점이자, 이 불의한 세상에 대안적 사실이 된다. 일찌기 천재 시인 아르튀르 랭보는 이렇게 말했다. “사유는 세상의 속도보다 더 빨라야 한다.” 그렇다. 그래야만 세상 안에 팽배한 악의 세력들과 그나마 겨우 맞설 수 있지 않을까? 참된 신앙의 길은 ‘치열한 사유’와 ‘뜨거운 실천’에 있을 것이다. ▲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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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10-15
  • [기독교 교양 읽기 41]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고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앞으로 우리 삶은 어떻게 변해갈까? 저자는 이 책을 쓴 이유를 이렇게 이야기한다.“그동안 우리는 미래에 대한 논의를 주로 기술 환경 변화에 국한시켜왔다. 그 결과 어떤 기계가 새로 발명되고 우리가 어떤 환경에서 생활할지에 대해서면 논의해왔을 뿐, 기술과 환경의 변화가 인간 심리에 어떤 영향을 줄지에 대한 상상은 활발하지 않았다.” “… 인터넷과 스마트폰의 시대에, 이 변화 앞에 인간의 삶은 어떻게 변할까? 이런 질문들이 바로 이 책의 출발점이다.”그러면서 이전과는 너무도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사람들의 모습으로부터 시작하여, 가족의 새로운 모습, 넘쳐나는 정보와 표현으로 인한 갈등 양상, 기술과 의학이 발달함에 따라 오히려 심화되는 인간 소외 현상, 치유의 상업화와 융합종교의 탄생, 그리고 죽음을 대하는 새로운 방식에 이르기까지 우리 사회와 개개인에게까지 미칠 변화의 모습을 그려 보인다. 물론 기술에 대한 긍정적인 모습보다는 개인이나 사회에 미칠 부정적인 모습이 주를 이룸으로써 책을 읽는 내내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디스토피아적 모습을 막기 위한 사회적 노력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함을 강조하는 책이기도 하다. 여기에 더하여 저자는 이러한 변화에 대해 기존 종교가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를 묻는다.◈ 《다음 인간》 || 저자 이나미는 신경정신과 전문의로서 서울대에서 박사 학위를 딴 후, 뉴욕 융연구원에서 분석심리학 과정을 공부하고 유니언신학대학원에서 종교심리학을 공부했다. 저서로는 《융, 호랑이를 탄 한국인과 놀다》 《성경으로 배우는 심리학》 등이 있다. 시공사, 2014. 13,000원. ◇ 같이 읽으면 좋은 책《인공지능 시대, 인간을 묻다》 / 박일준 / 동연《한국에서 심리학자로 살아보니》 / 이나미 / 유노북스 ▌좌담: 김길구, 김수성 경성대 초빙외래교수, 김현호 기쁨의집 기독교서점 대표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더, 호세아, 요엘, 아모스, 요나, 미가, 나훔, 스바냐, 스가랴, 말라기 등의 예언서로 가득한 구약성경에서 요한의 예언서로 끝나는 신약성경에 이르기까지, 기독교의 핵심 정신은 하느님의 성스러운 계획이 어떻게 미래 세계에 실현되느냐를 보여주는 것이다. 예언서는 결국 미래를 위해 어떻게 현실을 준비할 것이냐에 대한 가르침으로 요약할 수 있다.” [‘에필로그’ 239쪽에서] ‘잉여 인간’으로 자조하는 젊은 세대김길구 올해 초에 《인공지능과 기독교 신앙》을 읽고서 변화하는 세상에 대해 살펴본 적이 있습니다. 그때는 세상의 변화, 사회적인 흐름을 언급했다면, 오늘 우리가 읽은 책은 이러한 변화가 개인에게는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를 전망한 것입니다. 특히 저자는 융의 분석심리학에 기초하여 ‘미래에 대한 상상’을 합니다만, 분명한 것은 부정적인 면이 많이 나타날 것이란 것입니다.김현호 첫 부분에서부터 젊은 층은 무감동, 무기력, 무관심에 젖어 살아갈 가능성이 높다고 봅니다. 정말 우울한 전망이죠. 몇 년 전에 한 취업사이트에서 20대들에게 ‘자신이 사회에 불필요한 사람이 되고 있다고 느낀 적 있습니까?’라는 질문을 던졌더니, 응답자 1744명의 67.1%, 특히 대학졸업생의 경우 70% 가까이가 “그렇다”고 응답했다고 합니다. 스스로를 ‘잉여 인간’으로 자조하고 있는 거죠.김수성 이들이 이렇게 의욕을 상실한 가운데 생활하게 되면 자칫 더 심각한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습니다. 일본에서는 ‘자유롭게 일하고 싶어서’ 아르바이트로 생활하는 젊은이들(프리터족)이 지금도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다고 합니다. 또한 스스로의 존재 가치를 느끼지 못하는 ‘구석방 폐인(히키코모리)’ 문제도 심각합니다.김길구 한마디로 ‘제대로 된’ 일자리가 없기 때문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갈수록 그런 일자리를 구하기는 더욱 힘들 것입니다. 한때 ‘고슴도치 신드롬’이라는 말이 유행한 적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서 상처를 받지 않기 위해 일정 거리를 유지하면서 살아가는 것을 일컫는 말이었습니다. 최근 젊은 층에서 나타나는 이런 현상은 ‘고슴도치 신드롬’이 심화된 모습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김현호 이런 상황에서도 일부에서는 오감 만족을 추구하는 현상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단적인 예로 ‘맛집’에 집중하거나, 최고급 디저트를 추구하는 경향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자랑하듯이 SNS에 부지런히 올리죠. 내적 충실보다는 겉으로 드러나는 것에 치중하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겁니다. ▲ 과학기술의 발달이 사회의 변화는 물론, 궁극적으로는 개개인에게까지 영향을 미칠 것이다. 그런데 그 전망이 부정적이라는데 심각한 문제가 있다. [사진은 영국의 ‘채널4’에서 방영하는 드라마 〈휴먼스〉 시즌2 광고화면] ‘가짜 가족’, R세대 등장과 양극화 현상김수성 또 하나 나타나는 현상 중 하나가 자발적 독신자가 갈수록 늘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미혼이 아니라 ‘비혼(非婚)’이란 말을 일반적으로 사용할 정도입니다. 뿐만 아니라 ‘반혼(半婚) 커플’이 늘어나고 있다는 뉴스도 나오고 있습니다. 우선 같이 살아보고 혼인신고 여부를 결정하겠다는 사람들입니다. 여기에 더하여 출산은 더욱 심각한 상태죠.김길구 한마디로 책임을 회피하고자 하는 경향으로도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모든 것이 불확실한 세상에서 책임질 일은 하지 않고, 혼자서 ‘속 편하게’ 지내고 싶다는 흐름이라 할 수 있겠죠. 이로 인해 기존의 가족 시스템이 붕괴하고, 1인 가구가 늘어나는 현상을 보이고 있습니다. 책에서 언급했듯 돈을 지급하고 계약을 맺는 ‘가짜 가족’이 생겨날 수도 있을 것입니다.김현호 제가 나가는 교회에서 독신자 셀을 맡고 있는데 갈수록 인원수가 늘어납니다. 그런데 이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얼핏 살펴보면, 스마트폰 등 디지털 기기로 끊임없이 소통하고, 취미나 공동관심사가 같은 사람들과 함께 동아리 활동을 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런 관계는 가족공동체와는 달리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끊을 수 있고 바꿀 수 있는 연결고리라는 것입니다, 대신 반려동물을 가족처럼 키우면서 살아가는 사람도 많습니다.김수성 일본을 비롯한 몇몇 국가에서는 감정로봇도 서서히 부각되고 있습니다. 특히 나이든 노인을 대상으로 이야기도 나누고 간단한 심부름도 할 수 있는 로봇입니다.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농어촌 노인들을 대상으로 시험가동을 한다는 뉴스가 나오기도 했습니다.김길구 앞으로 ‘R세대’가 등장할 것이라는 말이 실감나는 세상입니다. 모든 것을 로봇에 의존하는 세대라는 뜻입니다. 2015년부터 영국의 ‘채널4’에서 방영하고 있는 〈휴먼스(Humans)〉라는 드라마에서 비슷한 상황이 벌어집니다. 인공지능을 탑재한 로봇이 아이에게 책을 읽어주고, 식사를 준비하는가 하면, 가벼운 말상대가 되어주기도 합니다.김현호 그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인공적으로 만들어 부착한 팔이나 다리를 사람이 마음대로 제어할 수 있는 기술이 현실화되었다는 뉴스를 본 적이 있습니다. 교통사고로 두 팔을 모두 잃은 사람에게 부착한 인공 팔을 뇌에서 생각만으로 제어할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하반신 마비로 휠체어에 의존하는 사람들이 스스로 걸을 수 있도록 하는 인공 다리도 마찬가지입니다.김수성 문제는 이러한 모든 것이 돈에 좌우된다는 것이죠. 아무리 좋은 기계를 만들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살 돈이 없는 사람들은 그림의 떡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의료 서비스에도 극단적인 양극화 현상이 나타날 것입니다. 줄기세포 치료법 같은 것도 마찬가지라 할 수 있습니다. 교회가 예언자적 메시지를 선포할 때김길구 어떤 학자는 앞으로 탈종교 현상이 나타날 것이라고 주장하는 반면, 이 책에서는 융합종교가 나타날 것으로 전망합니다. 그러나 내용상으로는 같은 것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일체의 교리나 도덕성 등은 무시한 채 오로지 영성만을 추구하는 종교현상이 유행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지금도 서구사회에서는 이러한 현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영성을 힐링 방법의 하나로 인식하는 것이죠.김현호 디모데후서 3장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김수성 죽음에 관한 전망도 우리 교회가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부분입니다. 수명이 갈수록 길어짐으로써 나타날 존엄사 부분에 대한 논란은 차치하더라도, 앞으로 자살클럽이 지속적으로 늘어날 것이라는 부분에 대해서는 관심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김길구 모든 것이 자동화되고 인공지능과 로봇으로 대체되는 세상에서, 사람들이 할 일을 잃고 자칫 잉여 인간, 무욕 인간으로 전락한다면, 삶이 덧없어지는 것은 당연할 것입니다. 이럴수록 교회가 이들에게 희망과 함께 삶의 의미를 찾아주는 일에 앞장서야 할 것입니다.김수성 과학이 점점 신의 영역에까지 침범하는 현실입니다. 그러나 그 밑바닥에는 자본주의 논리가 숨어 있습니다. 가깝게는 우리 자녀들, 좀 더 멀리는 우리 손주들이 살아갈 세상이 이러하다면, 지금부터라도 스스로를 돌아봐야 할 것입니다.김현호 신구약 성경의 예언서가 단순히 다가올 미래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런 미래가 오지 않도록 현실을 준비하라는 경고의 의미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현재의 변화를 주의 깊게 보고 우리부터 그 경고에 귀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김길구 이 책을 읽으면서 우리가 한창 젊었을 때 입버릇처럼 되뇌었던,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6:33)’는 말씀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다음에는 부산장신대학교 탁지일 교수(교회사)가 쓴 《다르게 다가서는 역사》(예영커뮤니케이션, 2018)를 읽고 이야기를 나누겠습니다. 이 책은 부산을 중심으로 한 기독교회사입니다. 감사합니다. [정리: 김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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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독교 교양 읽기
    2018-09-21
  • [문화펼치기] ‘1984’에서 ‘멋진 신세계’로?
    1. 인터레그넘 시대의 불안 21세기 현재 세계화 시대를 가리켜 영국의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은 인터레그넘(interregnum, 최고지도자 부재기간)의 시대라고 말한다. 성서의 역사 가운데는 출애굽(과 사사시대까지) 시대로 볼 수 있다. 로마법에서 사용된 일종의 권력 이양기를 뜻하는 용어로 ‘지금까지 통치하던 왕이 사망했는데 아직 새로운 왕이 즉위하기 이전의 기간’을 의미한다. 애굽왕의 통치를 벗어나 새로운 왕(사사, 혹은 사울과 다윗 왕 등)이 나타나기 전까지 일종의 체제 변화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체제변화, 혹은 권력 이양기가 현재 세계화 시대에는 계속 진행된다는 것이다. 사실 세계화는 영토, 국민, 주권에 기반을 둔 국민국가 중심의 질서를 해체했다. 세계시장과 자본권력이 개인의 삶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지만 국민국가의 정치적 제도와 국민의 주권적 힘은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인터레그넘 시대가 계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재벌. 혹은 프랜차이즈 본사의 갑질은 묻지 않고 최저임금 인상으로 경제가 죽어가는 것처럼 조장하는 현상, 부동산 과열문제, 교육 현장 붕괴 및 학벌 사회의 문제 등에 관해 자본 권력과 결탁한 언론 권력이 우리 사회 구성원들에게 불합리한 영향을 미치고 있지만, 국가의 제도는 물론, 국민의 주권적 힘은 이를 마냥 쳐다만 보는 기이한 현상에 놓여있다. 인터레그넘 시대에 사람들은 저 창밖으로 스물스물 기어들어오는 불안을 맛보고 있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와 라캉의 지적 유산을 계승한 슬로베니아 출신의 철학자 레나타 살레츨은 『불안들』 (후마니타스, 2015)에서 세계화 시대, 혹은 후기 자본주의를 살고 있는 탈근대적 주체들의 불안을 분석하며 프로이트와 라캉의 이론을 빌어 이렇게 말한다. “불안이란 주체가 사회적 기대와 관련해 겪는 내면의 동요이다.” 명확한 현실은 아니지만, 사회 전체가 광기에 빠져 (가짜 뉴스는 이 광기의 시작이다) 이상한 비상식을 권유할 때 주체는 탈근대(획일성이 사라진 사회)를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면의 동요를 겪는다는 것이다. 사실 미디어는 끊임없이 위험들을 경고하고, 언론은 불안을 고조시켜 정치적으로 이용한다. 제약회사들은 온갖 항우울제를 팔아 번창하고, 기업들은 쇼핑으로 불안을 가라앉히라고 유혹한다. 이것은 일찍이 발터 벤야민이 자본주의적 모더니티의 절정인 19세기의 파리를 “판타스마고리아의 수도”라고 불렀던 것의 귀환이다. 판타스마고리아(phantasmagoria, 환영 또는 환상)는 카메라가 발견되기 전, 다양한 환영들을 볼 수 있는 기계인데, 벤야민은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이런 기계장치에서 현실의 사회적 과정을 분석하며 당대의 현실을 비판한다. 가령, 누가 어떤 목적을 가지고 환영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가에 주목하고, 환영 이미지를 생산하는지를 찾아내는 것이다. 그것은 곧 자본 권력(과 결탁한 언론 권력)이 평범한 일상과 상식적 인간에게 판타스마고리아를 주입하여 구별짓는, 구별짓기의 발생사를 파헤치는 일이다. ▲ 1984의 빅브라더 2. 자본(언론) 권력의 구별짓기 네가지 프랑스의 사회학자인 부르디외는『구별짓기: 문화와 취향의 사회학』(새물결, 2005)에서 4가지 자본을 소개한다. 곧, 경제자본, 문화자본, 사회자본, 상징자본으로 나눈다. 사실 부르디외는 발터 벤야민과 유사하게 사회적 관계를 단순히 경제적 자본논리(경제자본)로 설명하지는 않는다. 물론 경제자본이 매우 중요하고 결정적인 힘이 있긴 하지만, 경제적 자본 이외에 최소한 세 종류의 자본을 더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첫째, 문화자본은 가정환경이나 가정교육을 통해 개인에게 내면화된 고급스런 취향 및 언어능력, 인지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 학위나 학벌이 여기에 해당 된다. 곧 문화와 예술을 향유할 수 있는 미적 감각 그리고 사람들이 소장한 작품들을 의미한다. 둘째, 사회자본은 명문 대학에 들어가서 졸업장을 따거나 국가고시와 같은 시험제도를 통과해 얻는 자격 혹은 지위를 의미한다. 마지막으로 상징자본, 곧 사회관계자본은 문화자본과 사회자본을 얻는 과정에서 부수적으로 발생하는 ‘인맥’이다. 곧, 서울대 출신이나 판사, 검사, 의사처럼 실제 가치보다 높이 평가되고 과도하게 명예, 위신을 누리게 해 주는 상징적인 힘(정당화 메커니즘)을 뜻한다. 물론 부르디외가 주목하는 이 세 가지 자본들은 모두 경제자본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그러나 복권에 당첨된 벼락부자가 경제자본인 돈만으로 위 세 가지 자본을 저절로 확보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지속적인 시간과 여유가 있어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위 세 가지 자본들은 하류계층에서 상류계층으로 직접 진입하려는 벼락부자들을 막는 방어막이 되며 상류계층이 하류계층과 자신을 구별하는 구별짓기의 방편이 되는 것이다. 비록 경제적 자본은 상류사회와 비교해볼 때 결코 뒤지지 않지만, 신흥부자들은 상류사회가 가지는 아비투스(Habitus, 부르디외의 개념으로 인간 행위를 상징하는 무의식적 성향을 뜻한다. 이러한 아비투스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교육이다. 즉, 아비투스는 복잡한 교육체계를 통해 이루어지는 무의식적 사회화의 산물이라고 볼 수 있으며, 교육을 통해 상속된다), 특히 미적 취향을 공유할 수 없다. 부르디외는 이렇게 말한다. “미적 취향이 상류사회에 걸맞은 실천이나 상품으로 인도한다.” 곧, 상류계급이 선호하는 운동이나 행동 그리고 상품이 따로 있다는 말이다. 따라서 신흥부자들은 겉으로는 상류계급의 미적취향을 끊임없이 흉내 내려고 노력한다. 상류계급의 사람들은 하류계급 사람들이 쉽게 접근할 수 없다는 특성 때문에 (지금은 아니지만)골프나 고가의 외제 승용차, 핸드백을 구매하는 것이다. 이처럼 비싼 명품을 구입할 때, 상류계급 사람들이 의도하는 것은 자신들이 하류계급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스스로에게 그리고 타인에게 분명히 입증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립보서 2:5~8) 따라서 명품 차와 가방이 아니라, 종의 형체를 지니고 죽기까지 복종하심이 참된 그리스도인의 구별짓기라는 것을! 그러나 오늘날 미디어는 그리스도의 마음이 아니라, 미디어의 판타스마고리아를 따르라 한다. 상류층을 모방하도록 조장하며 그렇지 못한 이들에게 열등감을 심어준다. 조지 오웰의 『1984』가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의 옷을 입은 것이다. ▲ 멋진 신세계 책 3. 『1984』와 『멋진 신세계』 미디어 이론의 대표적인 학자로 마샬 맥루한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닐 포스트먼은『죽도록 즐기기』(굿인포메이션, 2009)에서 “디스토피아를 다룬 소설 조지 오웰의 『1984』와 올더스 헉슬리의『멋진 신세계』에서 오웰은 우리가 증오하는 것들이 우리를 몰락시킬 것을 두려워했고, 헉슬리는 우리가 좋아하는 것들이 우리를 몰락시킬 것을 두려워했다.”라고 말한다. 텔레비전 주도의 ‘쇼비즈니스 시대’는 인쇄매체 시대에 가능했던 이성적인 사회적 담론이 죽어가고 있다고 경고한 포스트먼은 “대중이 하찮은 일에 정신이 팔릴 때, 끊임없는 오락 활동을 문화적 삶으로 착각할 때, 진지한 공적 대화가 허튼소리로 전락할 때, 한마디로 국민이 관객이 되고 모든 공적 활동이 가벼운 희가극과 같이 변할 때 국가는 위기를 맞는다. 이때 문화의 사멸은 필연적이다.”라고 말한다. 결국 닐 포스트먼은 조지 오웰보다는 앨더스 헉슬리가 옳다는 입장이다. 조지 오웰은 『1984』에서 이렇게 말했다. “‘고통’(외부적 압박)을 통해 사람들을 통제한다. ‘1984’에서 우리는 외부나 압제에 지배당할 것을 두려워했다. 누군가 서적을 금지시킬까 두려워했다. 정보통제 상황을 두려워했다. 진실이 은폐될 것을 두려워했다. 통제로 인해 문화가 감옥이 될까 두려워했다.” (영화 <1987>은 이런 맥락에서 『1984』와 통한다.) 그러나 올더스 헉슬리는 『멋진 신세계』에서 이렇게 말한다. “‘즐거움’을 제공함으로써 사람들을 통제한다. 멋진 신세계에서는 차고 넘쳐 나는 정보와 지천에 깔린 오락거리로 인해 사고능력이 저하된 수동적인 존재가 될 것을 두려워했다. 우리가 좋아서 집착하는 것이 우리를 파멸시킬까봐 두려워했다. 굳이 서적을 금지할 만한 이유가 없어질까 두려워했다. 지나친 정보과잉으로 인해 우리가 수동적이고 이기적인 존재로 전락할까 봐 두려워했다. 서구 민주사회가 춤추며 꿈길 속을 헤매다 스스로 망각 속으로 빠져들어 나란히 속박 당하게 되리라 확신했다. 모순에 무감각하고 기술이 주는 재미에 중독된 대중에게 아무 것도 감출 필요가 없음을 간파했다.” 사실 디스토피아(dystopia)는 유토피아(utopia)의 반대말이다. 따라서 유토피아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이상향’이기에, 디스토피아는 ‘어두운 미래 또는 현실’이 된다. 커지는 빈부격차와 취업난, 무한경쟁을 부추기는 분위기, 해법이 보이지 않는 교육·부동산 문제 등을 배경으로 아이엠에프 경제위기 이후 우리나라의 문화 콘텐츠와 담론에서 디스토피아가 본격적으로 등장하였다. 어려웠지만 앞날에 대해선 낙관적이었던 과거 군사정권 시절(물론 고통스러웠지만)의 역동감 있는 문화 콘텐츠와 상반되는 문화적 흐름이다. 포스트먼에 의하면 디스토피아는 크게 셋으로 나눌 수 있다. ‘체제 디스토피아, 인간 디스토피아, 문명디스토피아’가 그것이다. 체제 디스토피아는 ‘개선이 거의 불가능한 억압적인 체제’와 관련된다. 국가와 거대자본은 물론이고, 실생활에서 고통을 느끼는 모든 분야가 그 대상이 된다. 인간 디스토피아는 인간 자체에 대한 불신과 환멸로 인한 디스토피아이다. 미시적이나, 사회 발전과 문명의 주체를 부정한다는 점에서 근본적인 디스토피아라고 할 수 있다. 문명 디스토피아는 현대 문명의 비관적인 전망과 연관돼 있다. 기후변화, 유전자 조작, 인공지능, 새 전염병, 외계인의 습격 등이 단골 소재가 된다. 지금 우리는 ‘체제 디스토피아’의 위기를 간신히 넘어 인간 디스토피아와 문명 디스토피아로 넘어가는 인터레그넘의 시대에 살고 있다. 1984(우리에겐 ‘1987’과 ‘촛불혁명’)을 넘어가지만 멋진 신세계가 이상하게 도래하고 있는 것이다. 이래저래 불행한 디스토피아임은 더 말할 나위 없다. 그러나 연민이 창밖으로 기어들어오는 불안의 뒤를 잇기에 아직 우리 인터레그넘 시대는 희망이 있다. 4. 연민, 구원의 세례 요한 정치 철학자인 시카고 대학 마사 누스바움 교수는 주요한 ‘인간의 기능적 능력 십계명’을 작성한 바 있다. 1. 생명(life): 정상적인 수명까지 살 수 있을 것. 2. 신체적 건강(bodily health): 좋은 건강에는 적절한 영양 공급, 적절한 주거, 건강한 재생산 기능을 포함한다. 3. 육체적 완전성(bodily integrity): 자유로운 장소 이동, 주권자로서 취급될 신체적 경계선을 지킬 것, 즉 성적 학대, 아동에 대한 성적 학대, 가정 내 폭력, 성적 만족과 임신의 문제에서 선택권을 가지는 문제를 포함하여 폭력으로부터 보호될 수 있을 것. 4. 감각, 상상력, 사상(senses, imagination and thought): 상상하고 사유하고 추론할 수 있는 감각 기관을 이용할 수 있는 것은 ‘진정한 인간의’ 길이고, 이 길은 적절한 교육에 의해서 길러지는 것이며, 결코 문자 위주의 기본적인 수학적, 과학적 훈련에 한하는 것은 아니다. 5. 감정(emotions): 자기 자신의 외부의 사물이나 사람들에게 애정을 가질 것, 우리를 사랑하고 배려하는 사람들을 사랑할 것. 6. 실천 이성(practical reason): 선 관념을 형성하고 자신의 삶을 계획하는 데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참여할 수 있을 것(양심의 자유 포함). 7. 협력 관계(affiliation):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살고 있고 그들에 대하여 관심을 보이고 인정하며 여러 형태의 사회적 상호 작용에 참여할 것. 8. 자연적 환경(other species): 동물, 식물, 기타 자연 세계와 관련하여 관심을 가지고 살 것. 9. 놀이(play): 웃고, 놀고, 여가 활동을 즐길 수 있을 것. 10. 자신의 환경에 대한 통제: 정치적으로 자신의 삶을 지배하는 정치적 선택에 효율적으로 참여할 수 있을 것, 물적·형식적으로가 아니라 실질적 기회를 통해서 재산을 유지할 수 있을 것. 여기서 연민에 관해 중요한 인간의 기능적 능력은 4~7계명이 된다. 감각과 감정을 통하여 실천 이성으로 협력 관계를 맺는 것이 올바른 인간의 기능이자 연민의 시작이라는 것이다. 좀 더 세밀하게 누스바움은 연민이 발현되기 위한 조건 네 가지를 말한다. “첫째, 상대방의 고통이 충분히 심각한 것이어야 한다. 둘째, 그 고통이 스스로가 아닌 타인에 의해 유발된 것이어야 한다. 셋째, 그 고통이 나의 삶에서도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되어야 한다. 넷째, 그 사건이 나의 행복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것이어야 한다.” 연민의 발현을 방해하는 세 개의 병리학적 감정에 대해서도 누스바움은 “첫째, 수치심은 자신의 잘못된 감정에 빠져 그가 자신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만든다. 둘째, 질투는 타인의 성취에 눈멀어 타인의 상실과 슬픔에 무감각하게 만든다. 셋째, 혐오감은 우리와 그들을 임의적으로 갈라 그들을 증오하도록 만든다.”라고 말한다. ‘나의 삶과 행복에 영향을 미치는 타인이 다른 타인에게 끼치는 충분히 심각한 고통’(가령, 이웃집에 강도가 들어 우리 집도 안전하지 못할 때)에 대해서 우리는 연민을 느끼지만, ‘수치심과 질투, 그리고 혐오감’(가령, 이웃집 사람에 대한 관계)은 우리로 하여금 연민을 느끼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연민만 있고 공정하지 못하다면, 자신의 손해를 감수하며 남을 돕지 않을 것이요, 공정하나 연민이 없으면 타인을 위할 아무런 일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공정과 연민은 양립하는 것이다. 사실 우리가 누군가를 돕기 위해서는 공정함과 연민을 동시에 필요로 한다. 즉 이성과 공감이 함께 작용할 때 우리는 타인을 이해하고 행동하는 도덕적 인간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오늘 많은 이들이 연민을 상실하고, 판타스마고리아에 빠져 살고 있다. 연민의 구원 열차가 지금 ‘1984’를 넘어 판타스마고리아의 ‘멋진 신세계’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향하여 기적 소리를 내며 달려오고 있다. 출애굽의 목적이 가나안이었다면, 가나안에서의 삶의 목적은 연민과 공정의 평등 공동체였다. 이것을 상실한 이스라엘은 다시 바벨론의 포로로 고통을 받았다. 올바른 목적이 없을 때 그 고통은 이토록 심각하건만, 우리는 이 과도기 시대에, 인간과 문명 디스토피아 시대에 목적 없이 사는 것이 아니라, 타자에 대한 연민과 공정으로 살아야 할 것이다. 어린왕자도 이렇게 충고했다. “사람들은 모두들 똑같이 급행열차를 타고 어디론가 가지만 무얼 찾아가는지는 몰라. 그러니까 어디를 가야 할지 몰라서 갈팡질팡하고 제자리만 빙빙 돌고 하는 거야.” ▲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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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9-10
  • [영화] 아파트와 살인 목격자의 침묵을 통한 한국사회 비판
    범죄스릴러물의 역동적 구조 일상생활에 대한 예리한 시각을 가진 조규장 감독이 <그날의 분위기>(2015)와 같은 로맨스장르에서 이번에는 사회비판적인 영화를 만들었다. 그의 첫 장편영화인 <낙타는 말했다>(2008)를 통해 사회적 성공과는 거리 먼 비루한 인간의 모습을 세밀하게 담았다면 이번에는 한국사회의 집단 이기주의와 보신주의(保身主義)에 대한 면밀한 관찰을 통해 각성을 촉구하고 나섰다. 아내와 어린 딸을 둔 평범한 직장인 상훈(이성민)은 새벽에 살려달라는 비명소리를 듣고 다가간 아파트 창문 너머로 살인현장을 목격하게 된다. 범죄현장의 목격자로서 경찰에 신고하면 될 것 같은 단순한 일은 그만 살인자와 눈이 마주치게 되면서 어렵게 꼬이기 시작한다. 살인자와 목격자가 서로 자신의 존재를 노출하게 된 상황이 벌어지고 만 것이다. 영화는 이때 살인자 보다는 목격자의 위치에서 심리를 전개시킨다. 정의로운 시민의 한사람으로서 경찰에 신고할 것인가, 아니면 혹시라도 있을지 모를 살인자의 표적이 되어 자신과 가족을 위험에 빠뜨릴 것인가. 상훈은 마음이 복잡해지기 시작한다. 단순 범죄물이 범죄 심리극으로서 발전하는 과정에 중요한 것은 사건을 바라보는 주체가 겪는 갈등의 성격에 달려있다. 일반적으로 범죄물은 범인과 수사관 그리고 피해자 혹은 피해관계자라는 삼각구도 속에서 진행된다. 수사를 담당하는 형사의 입장이라면 수사관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기 어려운 상황을 전개시켜서 심리적 갈등을 조장하게 된다. 승진에 목을 걸고 있거나 집안의 어려움이 있는 수사관이 범죄자 혹은 범죄자와 연관된 사람들과 모종의 거래 과정에서 겪게 되는 심리적 갈등이 전개되는 경우가 많다. 범죄자의 입장이라면 자신이 범죄를 저지를 수밖에 없는 상황이 밑바탕에 깔려있다. 불우한 어린 시절 겪었던 개인적 고통이나 인격모독을 당한 일, 혹은 사랑하는 가족의 희생 등의 과거사를 전개시키면서 범죄자의 심리적 갈등을 표출시킨다. 범죄 피해자를 사건의 주체로 등장시키는 경우는 가해자의 밀도 있는 관계를 조명시키면서 피해자가 되기까지의 과거사가 전개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때 피해자는 죽음을 통해 가해자와의 갈등을 해소시키면서 문제를 마무리 하곤 한다. 그런데 목격자가 사건의 주체로 등장하게 될 경우 영화는 철저히 다층적인 심리극으로 갈 수 밖에 없다. 자신과 가족이 피해를 보지 않기 위해서 범죄자나 수사관과의 관계를 저울질 하게 되는 상황이 벌어진다. 이 때 범죄 목격자가 흔히 겪는 심리적 갈등은 거래관계 대상자와의 불신으로부터 비롯된다. 경찰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지 못하는 이유는 경찰이 자신과 가족을 지켜준다는 확신을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영화 <목격자>에서도 오직 한사람의 수사관(김상호)을 제외한 다른 경찰들은 엉뚱한 수사를 하고 있거나 심지어 범죄자의 공격을 받기도 한다. 범죄자의 암묵적인 거래 역시 불안하지 않을 수 없다. 과연 범죄자가 자신의 신분을 명확히 파악하고 있는지 알아야 하며, 범죄자에 대해서 침묵을 지키는 일이 자신과 가족의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는 길인지 확신할 수 없는 것이다. <목격자>의 주인공 상훈이 택한 것은 경찰이라는 공권력이나 범죄자 모두를 불신한 상태에서 스스로 가족을 지키는 쪽이었다. 가장의 책임을 다하겠다는 개인의 신념은 사회에 대한 불신이 클수록 더욱 강해지는 법이다. 아파트는 어쩌다 이기적인 공간이 되었을까? 범죄현장 목격자의 심리를 다룬 <목격자>가 관객의 마음에 깊이 새겨질 수 있는 이유는 범죄현장이 한국인의 생활공간인 아파트 단지 한복판이기 때문이다. 한밤중에 벌어진 일이라고는 하지만 늘 사람이 다니는 아파트 단지 안에서 살인마가 잔인하게 사람을 칼로 찔러 죽였음에도 불구하고 목격자가 나타나지 않는 영화 속 설정은 어쩌면 사실일 지도 모른다는 공감대가 관객들 사이에서는 형성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현대 한국사회에서 아파트는 흔히 단절된 공간의 상징으로 묘사되고 있음을 누구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앞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며 관심도 없다. 이사 온 날 떡을 돌리는 풍속이 사라진지 오래고 앞집의 사정이란 다만 내부 인테리어 공사를 할 때 엘리베이터나 복도 게시판에 공사한다는 사실을 알리는 쪽지 정도로만 알 수 있을 뿐이다. 그것도 이웃이 직접 작성하기 보다는 인테리어 업체에서 붙이는 경우가 이제는 태반이지만 말이다. 문제는 소통이 결여되고 이웃공동체로서의 의식이 결여된 생활공간인 아파트가 한국인의 가장 일반화된 생활공간이란 사실이다. 2017년 11월 기준으로 대한민국의 아파트는 전체 주택의 60.6%인 1038만호에 이른다. 가히 아파트는 한국의 대표하는 주거공간인 셈이다. 일상적인 삶의 중심이자 가족의 거처 공간인 아파트는 성냥갑 혹은 닭장으로 비유되는 독특한 건축구조와 특유의 폐쇄성 때문에 공포영화의 단골 소재로 등장하기도 한다. 즉 산장이나 바다 한가운데 있는 보트에서 살인사건을 다룰 경우 일상의 공간과는 유리되어 있는 까닭에 호기심을 불러일으킬 수는 있어도 현실감은 떨어지게 마련이다. 그러나 아파트에서 일어난 범죄일 경우 현실감은 살아날 수 있다. 그 이유는 아파트가 범죄를 일으키는 환경에 적합한 구조를 갖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이웃의 일에는 무관심하고 도무지 자기 외에는 생각하지 않는 지독한 개인주의가 팽배해있고, 조금이라도 손해 보지 않으려는 이기적인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공간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영화 <목격자>는 살인범을 목격했음에도 불구하고 함구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비춰준다. 관객을 더욱 흥분시키는 이유는 영화 속 주인공처럼 가족의 안전을 걱정하기 보다는 아파트값이 떨어질 것을 염려한 부녀회장의 행동 때문이었다. 아파트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이 TV뉴스를 통해 보도되는 것이 걱정스럽고 경찰의 탐문수사에 협조를 거부하는 주민들의 행동 속에는 자본주의 사회의 지독한 이기주의가 도사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아파트 값을 올려 받기 위해서 부동산중개소와 주민들이 담합을 하는 현실에서 사람의 목숨 보다 중요한 것이 아파트 집값인 것이다. 침묵과 응징 범죄에 침묵했을 때 오히려 범죄자에 쫒기는 신세가 되어버린다는 영화 <목격자>의 이야기는 이미 사회심리학에서 연구한 내용을 답습하고 있다. 흔히 ‘방관자 효과(Bystander Effect)’라 불리는 제노비스 신드롬(Genovese Syndrome)은 집단이 속해 있는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는 책임감이 분산되는 바람에 일에 개입하기 보다는 상관하지 않고 옆에서 지켜보기만 하는 현상을 해설해주고 있다. 즉 내가 아니더라도 다른 사람들이 알아서 할 거란 생각으로 방관상태에 머무르고 만다는 얘기다. 영화는 아파트에 거주하는 방관자들을 응징하는 결말을 보여준다. 폭우가 쏟아지며 아파트 인근에 있는 산이 무너지는 바람에 토사가 아파트 앞으로 밀려오는 장면은 감독이 이웃의 고통에 대해 방관자로 사는 현대인들을 향해 내던지는 일종의 경고장 같은 것이다. 이미 영화 전반부에 주인공을 통해 아파트 축대가 산사태로 무너질 것이 언급되었지만 부녀회장은 집값 외에는 관심이 없다. 더욱 놀라운 것은 주인공과 범인과의 격투가 벌어진 아파트 뒷산이 연쇄살인범이 사체를 묻어 놓은 장소임이 드러나는 일이다. 아파트로 밀려오는 흙더미 속에 유골들이 드러나는 일은 마치 방관자들을 향해 침묵의 결과가 죽음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누가복음 10장에는 ‘선한 사마리아인’에 대한 비유가 등장한다. 이 비유는 ‘내 이웃이 누군인가’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으로 이루어진다. 강도를 만나 옷이 벗겨지고 맞아서 거의 죽은 상태로 버려진 피해자를 목격한 사람들의 이야기인 것이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방관자로서의 모습을 보여주고 사마리아인은 참된 이웃이 누구인지를 나타낸다. 나는 과연 누군가의 이웃이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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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9-10
  • 가을에 나의 서가를 풍성하게 해줄 좋은 책들
    만남-한길 가는 교육운동가 송인수의 예수를 만난 사람들 송인수 지음/303쪽/IVP ‘사교육걱정없는세상’공동대표인 교육운동가 송인수 선생이 낸 설교집. 공립학교 교사로 13년간 아이들을 가르치다가 퇴직하고 좋은교사운동 대표를 지내다 지금은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을 창립하여 대한민국의 교육개혁을 일궈가는 저자는 세상의 고통에 응답하는 평신도 중심의 아주 작은 교회 ‘산아래교회’를 섬기고 있다. 복음서를 통해 예수를 만난사람들 아홉 사람의 이야기와 진정한 신앙이란 무엇인지를 질문하는 여섯 개의 주제를 담고 있는 이 책은 예수를 인격적으로 만난 사람들이 어떤 결단을 통해 반응했는지를 감명 깊게 소개한다. 사춘기를 지나던 큰 아들과 성경 공부를 시작하면서 성경에 새롭게 눈떴고, 두 아들을 키우며 ‘육체적’ 부모에서 ‘정신적’ 부모로 거듭났다고 말하는 그는 “신자는 사람에게 의존하지 않고 오직 주 예수께만 의존하는 독립적 존재”임을 강조하고 교회의 본질은 목회자나 예배당이 아닌 ‘타자지향성’에 있다고 믿는다. 성경을 읽다가 누구나 한번쯤 의문했을 법한 본문을 끈질기게 묻고 상상력을 발휘하여 오늘 이 시대 고민을 정면 돌파한다. 저자는 예수님을 찾아왔던 부자청년의 설교에서 자신의 부르심에 대한 응답을 이렇게 소개한다. ‘그때 제가 버려야 할 모든 것은 안정된 직업이었습니다. 부르심이 분명했기에 안정된 직업을 버리고 그분을 따라나섰습니다. 불안한 미래에 대해 아내에게 마음을 털어놓았을 때 아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보, 산 한 모퉁이를 돌아야 그 다음이 보이는 것 아닌가요? 퇴직 후에 주어지는 보장된 삶을 생각하지 말고 일단 나서 보지요.’ 저자의 신실한 신앙의 고백과 체험이 말씀을 따라 나선 이들에게 용기를 준다. 성경이 신학 이론의 원전이 아니라 생동하는 내러티브임을 실감하게 해 주는 아주 특별한 책이다. 꼼짝할 수 없는 내게 오셔서 윤석언,박수민 지음/224쪽/포이에마 고난을 용광로로 녹여 낸 용광로와 같은 이야기, 특수 스티커를 붙인 안경을 쓰고서 모니터를 응시하며 눈으로 자음과 모음을 하나하나 입력해 기록한 윤석언씨의 병상일기이다. 스물셋의 나이에 당한 교통사고로 27년째 목 아래가 마비된 전신장애인이 되어 요양원에서 지내고 있지만 하루의 호흡조차 보장할 수 없는 육신으로 매 순간을 주님과 동행하고, 쉬 잠들지 못하는 불면의 시간조차 다른 이들을 위해 기도하는 한 그리스도인의 소망과, 일상의 작디작은 일들 속에서 경험한 하늘의 은총, 친구와 나눈 우정의 기록을 담았다. 몸이 회복되어 자리에서 일어나기를 바랐으나,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육신의 고통으로 ‘나를 그만 하나님 품으로 데려 가달라’고 호소하지만 그 기도조차 이루어지지 않던 날들 속에 기적처럼 찾아온 하나님의 사랑, 그를 품어 주는 우정을 만나며 새로운 소명에 눈떴다. 그는 온라인으로 목회학 석사과정을 공부하며 선교사가 되는 꿈을 꾸고 있다. 문서선교의 꿈이다. 이 책은 그 꿈의 첫 결실이다. 윤석언의 친구 박수민은 한 선교단체의 자비량 사역자이다. 막 결혼해 가정을 꾸린 1998년, 평신도 선교사로 헌신하여 폴란드로 건너갔고, 그곳에서 세 아이를 낳아 키웠다. 주중에는 한국 무역회사에서 직장생활을 하고 주말에는 자비량 선교사로 현지 젊은이들과 예배하고 있다. 미국 월드미션대학에서 목회학 석사과정 중에 만난 윤석언 형제를 알게 되어 그와 이메일로 교제하며 서로를 격려해왔고, 2년 동안 2천회가 넘는 그 우정 어린 동행의 기록이 이 책의 2부에 실려 있다. 결국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이들의 우정이 한 인생에게 생의 희망을 부풀게 하고 역경을 이기게 한다. 1세기 교회 이야기 로버트 뱅크스 지음/75쪽/IVP 초대교회로 돌아가자고 한다. 그럼 우리가 지향점으로 삼는 초대교회는 어떤 모습일까? 신약성서의 사도행전이나 서신서에 나타난 대로 교회가 세워진다면 오늘날의 교회와는 매우 다른 모습이 될 것이다. 이 책에는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이끄는 가정교회의 모습이 그려지고 있다. 성경도 교회당도 없던 때, 목사도 없고 예배 형태도 갖추지 못했던 1세기 교회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이 책은 단순한 초대교회 및 가정교회 안내서가 아니다. 교회의 본질이 역동적으로 드러난 살아 있는 교회의 모습을 통해 교회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 주는 책이다. 한자리에서 한 시간이면 읽을 작은 책속에 교회가 담아야 할 매우 다양한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 준다. 종과 주인, 여자와 남자, 가난한 자와 부자, 아이와 어른과 노인, 가족과 독신, 해방과 자유, 세상과 교회, 직업 소명과 신분, 성만찬과 세례, 논쟁과 조정, 상황과 말씀, 식사와 성찬, 일상과 초월, 공간과 시간, 의외성과 규칙성, 참여와 권위, 본질과 형식, 치료와 치유,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덩치만 크지 단조롭기 그지없는 오늘날의 어떤 대형 교회보다도 소수로 이루어진 이 작은 공동체에서 우리가 오랫동안 잃어버린 교회의 본질과 다양하고 풍성한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는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교회를 믿는다. 교회는 나가거나 안 나가는 곳이 아니라 매 순간 갱신하며 새롭게 태어나는 생명체다. 푸블리우스와 함께 2천 년 전 로마에서 모였던 원초적 교회의 방문자가 되어 오늘의 교회를 위한 상상력과 확 신을 길어 올리기를 바란다. 그들은 휴머니스트였다- 조선의 역사가 된 이방인, 시민사회를 열다 하희정 지음/319쪽/15000원/꽃자리 1세기 초대교회 성도들을 일컬어 세상은 ‘그 길을 걷는 사람들’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복음서에 보면 길 위에서 제자들이 스승이신 예수님께 이렇게 묻는다. “쿠오바디스” 어디로 가십니까 라는 뜻이다. 2018년 한국에서 세상이 길 잃은 교회를 향해 묻고 있습니다. “지금 당신들은 어디로 가는가?” 우리나라가 아직 조선이란 이름으로 존재했을 때 외국의 여인들은 이 조선을 위험한 나라로 여겨 발도 디디지 않았을 때 기꺼이 조선으로 걸어와서 일생을 불살랐던 여인들이 있었다. 또한 세계열강들의 이해 관계 속에 크게 흔들리던 조선을 찾아와 조선왕조를 마감하고 근대 시민사회로 진입할 수 있도록 학교를 세우고 개인의 인격적 존엄을 일깨워주며 무지와 전염병과 고단한 삶속으로 들어가 함께해준 소중한 선교사들이 있었다. 저자는 이 책에서는 12인의 선교사를 소개하며 특히 여선교사들도 동일한 볼름으로 소개하고 있다. 특히 그동안 내한 선교사에 대한 연구와 저술이 많았으나, 대부분 ‘선교’라는 특정 주제 속에서 그들의 복음전파와 의료 및 교육 활동을 다루었지만 이 책에서는 이들의 내면 깊은 곳에 꿈틀거리고 있는 인류 보편의 휴머니즘의 관점에서 이들의 삶을 그려내고 있음이 특징이라 하겠다. 이들 선교사들이 기독교적 휴머니즘에 녹아 있었기에 이방인의 경계를 넘어서서 ‘조선의 역사’로 수용될 수 있었다는 것을 배울 수 있다. 기독교는 타종교로부터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제럴드 맥더모트 지음/311쪽/IVP 한국은 세계에서도 종교간 분쟁이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 몇 안 되는 다종교 사회이다. 근대 개화기에 기독교가 한국사회에 전파될 때 당시의 주류종교인 불교와 유교가 그 품을 열어줌으로서 큰 저항 없이 우리사회와 접목될 수 있었고 이로 인해 비교적 타종교와 더불어 영역을 지켜주고 양해해줌으로서 평화를 지켜온 셈이다. 하지만 근래 사회 전반이나 개인의 삶에서 크고 작은 종교적 갈등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 되고 있다. 만약 사회적 상황이 변한다면 언제라도 그 갈등이 폭력화될 여지가 있다. 이 책이 우리사회에 종교들 간의 파괴적 적대감을 줄이고 서로를 존중해 줄 수 있는 교양을 제공해 준다. 저자는 기독교 신앙이 타종교로부터 배울 수 있다고 말한다. 저자는 “최종구원의 여부”가 아니라 “계시의 속성”이라는 맥락에서 그리스도인이 다른 종교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 조언을 제시하고 있다. 자신의 신앙에 충실하면서도 다른 신앙의 소유자들을 포용하려 하는 이중의 과제를 균형 잡힌 시각에서 풀어가는 것, 친구나 가족 중에는 다른 종교와 신앙을 가진 분들이 많은 우리 사회 속에서 내 신앙이 소중한 만큼 다른 이들의 신앙도 소중하다고 느끼지만,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해야 할지 마땅한 지침이 없어 고민하던 열린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책은 좋은 지침서가 될 수 있다. 순간을 소유하라-흔들리지 않고 사는 법 칼 렌츠 지음/295쪽/움직이는서재 이 책의 저자는 뉴욕 힐송교회를 이끌고 있는 칼렌츠 목사이다. 1978년생 미국 버지니아 태생인 칼렌츠는 헤어스타일 옷차림부터 남다르다. 신실한 기독교가정에서 자랐지만 청소년기에 농구에 올인하면서 하나님과 멀어졌던 그가 노스캘로라이나 주립대학에서 인생의 항로를 재점검하고 하나님께 헌신했다. 청소년기까지 농구 선수가 꿈이었던 칼 렌츠 목사는 스키니 진이나 찢어진 청바지를 즐겨 입으며 일반의 고정관념을 깨고 젊은이들과 공감하며 그들을 예배 앞으로 이끌어 들인다. 한국교회에도 젊은 세대들과 소통하기 위해 노력하는 목회자들이 있지만 젊은 세대와의 공감능력 저하는 지금 한국교회의 과제가 되고 있다. 뉴욕도 다르지 않지만 칼렌츠 목사는 욕망에 이끌려 이리저리 흔들리며 살기 쉬운 젊은이들을 잡아 주는 설교 메시지를 함께 전달하는 방식으로, 젊은이들에게 ‘교회는 재미없고 따분한 곳이 아니라, 내 삶을 긍정적으로 변화시키고, 잠들어 있던 나의 영성을 깨워 나의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게 하는 곳’이라는 인식을 심어주는 데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 책은 평소 뉴욕의 20~30대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칼 렌츠 목사 설교에서 가장 핵심적인 메시지인 ‘순간을 소유하라OWN THE MOMENT’에 관한 내용을 에세이식으로 풀어낸 것이다. 기독교적인 용어를 거의 사용하지 않으며, 목사가 할 수 있는 뻔한 이야기로 흘러가지 않고 호소력 있는 시나리오 방식으로 메시지를 전달한다는 특징이 차별성이라 하겠다. “노잼!”이라며 교회로 올 생각조차 하지 않는 젊은 세대들에게 “예배가 이렇게 즐거운 일이네!”라고 탄성을 지르도록 해야 된다면 이 책이 자극제가 될 것 같다. 세계관적 설교-창조, 일상, 공공의 복음을 회복하라 전성민 지음/371쪽/한국성서유니온 밴쿠버기독교세계관대학원 학장이며 세계관과 구약학 교수로 재직 중인 저자는 그리스도인이 성경을 읽는다는 것을 이렇게 정의한다.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것은 나의 세계관과 성경 저자가 제시하는 세계관을 충돌시키고, 그것이 나의 세계관을 변화시키도록 나를 내어 놓는 것이다.” 성실한 성경읽기는 읽는 독자의 세계관을 변화시키도록 요구하며 이 성경을 설교하는 설교자들은 세계관을 변화시키는 설교(세계관적 설교)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 그리고 그 관심은 설교를 전하는 이나 듣는 이가 얼마나 세계관적인가?”하는 질문 앞에 직면한다. 세계관적 설교는 무엇일까? 그것은 먼저 성경 본문이 어떤 세계관을 전제로 기록되었으며 독자들이 어떤 세계관을 가지도록 도전하는가에 관심을 둔 설교다. 따라서 청중의 세계관 변화(마음과 몸의 참된 돌이킴)를 목적으로 한다. 또한 세계관과 관련된 주제를 다루는 설교이기도 하다. 이 책은 그러한 관심과 필요에 의해 쓰였다. 세계관적 설교의 세 가지 특징은 예를 들어 창세기 설교본문일 때,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일차적으로 주어졌던 창세기 말씀이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 강력한 도전을 줄 수 있는 것은 창세기 1장에 담긴 서술된 세계관과 규범적 세계관을 구별했기 때문이다. 이 둘을 구별하지 못할 때, 하나님이 온 우주를 창조하셨다는 장엄한 선언을 달이 광명체라고 우기는 난센스로 격하시키고 만다. 여기서 서술적 세계관을 걸러내는 것은 역사적 배경 탐구의 한 측면이며, 본문의 역사적 배경을 살피는 해석은 모든 설교의 기초가 되어야 한다. 또한 창조를 간과하고 일상성과 공공성을 잃어버려 이원론적이고 사사로워진 기독교는 성경의 기독교가 아니다. 그렇기에 모든 설교는 바른 창조 이해를 통해 복음의 일상성과 공공성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라고 정리한다. 바로 설교자가 자신이 생각하는 단편이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틀 전체의 변화를 바라는 것이야말로 모든 설교의 목표가 되어야 하는 것이며, 모든 설교는 넓은 의미에서 세계관적 설교여야 한다는 것. 이 책에는 1부-창조의 복음, 2부-일상의 복음, 3부-공공의 복음으로 총 23편의 설교학 강의가 실려있다.
    • 문화
    • 도서
    2018-08-28
  • [문화] 당신들의? 우리들의! 대한민국
    1. 모기들이 반대한다고 에프킬라 안칩니까? 2018년 7월 23일 노회찬 정의당 의원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노의원에 관해 도올 김용옥 선생은 이렇게 말했다. “저는 원래 노회찬이라고 그럴 때 그게 노나라 노(魯) 자예요. 그 노나라가 공자 나라라고요. 그래서 노회찬을 항상 보면 공자같이 생겼다. 사람이 너그럽고 좀 품위가 있게 넓게 생겼잖아요. 참 공자 같은 사람이다. 이런 생각을 내가 항상 했고. 회(會) 자라는 게 항상 사람을 모은다 그런 의미겠거든요. 이문회우(以文會友)라든가 그런 우리 동양의 고전에도 그런 말들이 많지만. 사람을 주변으로 잘 모으고 그리고 그들을 아주 설득시키는 데 귀재고.” 노나라의 공자와 같이, 진보 정당의 원내 정당 진입을 위해 힘써 왔고, 그럼으로 약자들의 목소리가 법을 통해 제대로 대변되기를 힘썼던, 그렇게 사람들을 모았던 사람이라는 뜻이다. 기독교에도 상당한 식견이 있는 도올 선생은 또 이렇게도 말한다. “그런데 이 사람의 특징이 말이죠. 우리 시대의 예수라고 생각했어요. 마가복음에 보면 예수라는 사람은 입 뻥긋 하면 다 비유였다 그러거든. 비유가 아니면 말하지 않았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라든가 겨자씨의 비유라든가 수없는 비유가 있습니다. 강도를 만난 비유라든가 이 모든 그 수많은 비유를 쓰는 데 사실 달인이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이해를 못하고 그게 무슨 하늘의 무슨 하나님의 말씀으로 아는데 예수가 그 비유의 달인이었다는 의미는 예수가 바로 ‘민중의 언어’를 쓸 줄 알았다는 거예요.” 촌철살인의 비유, 오늘날 예수가 이 땅에 오셨다면 울고 갈 비유들이 노회찬 의원의 입에서 나왔다. 가령, 문재인 정부의 공수처(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설치를 반대하는 자유한국당에 노의원은 이렇게 이야기 했다. “정확한 얘기죠. 아니, 동네파출소가 생긴다고 하니까 그 동네 폭력배들이 싫어하는 것과 똑같은 거죠. 모기들이 반대한다고 에프킬라 안 삽니까?” 2. 모기들의 대한민국, 번아웃 당하다! 『비굴의 시대』(한겨레출판사, 2014)에서 우리 시대 가장 급진적이고 예외적인 지식인인 박노자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지금 한국사회는) 전례 없는 더러운 시대이다.” 사회적 연대 의식은 증발하고, 저마다 자신과 몇 안 되는 피붙이들의 잇속만 추구하고, 타자의 아픔에 대한 공감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는 각자도생의 사회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다. 이제 ‘인간이 사라져가는 곳’이며, 정치적으로는 파시즘이 위세를 떨치고 있으며, 유신 때보다 더한 ‘공포를 먹고 사는 사회’라고 말한다(물론, 이것은 촛불혁명 이전의 대한민국이다. 그러나 촛불혁명 이후 얼마나 달라졌는가?). 이러한 모기들의 대한민국에서 인간들은 번아웃 당한다. 번아웃 증후군(Burnout Syndrome)은 오로지 한 가지 일에 몰두하던 사람이 신체적 혹은 정신적으로 모든 에너지가 소모돼 무기력증이나 자기혐오, 직무 거부 등에 빠지는 현상을 말한다. 쉽게 말해 완전한 소진을 의미한다. 대체로 능력을 인정받고 근면 성실한 사람일수록 일을 마다하지 않기에 번아웃에 빠질 확률이 크다. 이러한 번아웃은 개인의 문제이기 이전에 ‘문명의 질병’이다. 수익 갈증에 따른 고강도 생산체제, 늘어나는 노동시간, 갈수록 심화되는 무한 경쟁, 풀리지 않는 스트레스와 피로는 현대인을 방향 상실로 몰아가는 것이다. 따라서 번아웃은 인간과 노동이 맺고 있는 풍요로운 관계를 앗아가고, 그 자리에 의미 상실이라는 커다란 공백을 남겨 놓는다. 단순히 고된 노력에 대한 성취감만 사라져버린 것이 아니라 더 나아가 일에 대한 의미마저도 파괴하는 것이다. 사실 명예는 빼더라도 ‘권력과 황금’의 곁에 다가서기 위해, 이 과열 시스템에 동참하기 위해, 수많은 이들이 피로와 추락으로 내몰리고 있다. 왕 모기들은 번아웃으로 노동자들을 탈진시키고, 더 나아가 해고시킨다. 아직도 쌍용차 해고 노동자 100여명을 복직시키지 않는 것은 더 이상 노동자가 필요하지 않다고 선언했던 신자유주의적 기획을 거스리지 않고 싶은 기업의 논리이다. 시인 노혜경의 말처럼, “1997년 현대자동차가 시작한 구조조정이 2009년 쌍용차로 완결되었다고 만족스러워하는 ‘보이지 않는 손들’을 실망시키면 안 되기 때문”인 것이다. 따라서 우리 나라는 대통령은 몰아낼 수 있어도 노동자를 복직 시킬 수 는 없다. 인간의 노동 대신 기계와 금융이 지배하는 산업구조에서 사람이 설 자리는 애초에 없었기 때문이다. 왕 모기들에게 뜯기는 대한민국이다. 다시 도올 선생의 외침을 들어보자. “우리 사회는 기본적으로 이 노회찬의 목소리라고 하는 것은 이 문제를 해결해야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대기업들이 생각을 바꿔야 됩니다. 예수께서 천국이 가까웠으니 회개하라 했는데, 그게 원어로는 메타노이아라고 하는데, 생각을 바꾸라는 건 뉘우치라는 게 아니라, 너의 세계를 바라보는 눈을 좀 돌려라. 시각을 개조해라. 왜? 네가 개조하면 바로 천국이, 누구에게든지 천국이 온다. ‘kingdom of God is at hand’ 가까이 있다는 말이죠. 그거는 생각을 바꿔야 돼요. 그러니까 우리나라의 사회 진보를 위해서 대기업들이 생각을 바꿔야 됩니다. 그러면 최저임금 문제든 모든 걸 다 해결됩니다. 정권의 힘을 가지고 있는 자들은 절대적으로 진보, 보수를 막론하고 지금 이 대기업들의 횡포를 바로잡아야 합니다.” 그러나 모기들이 생각을 바꿀까? 회개할까? 낙타가 바늘구멍 통과하는 것이 차라리 더 쉬울 것이다. 3. 자유로운 기술과 행위, 그리고 협력 임마누엘 칸트는 『판단력 비판』에서 ‘산물의 생산을 목적으로 하는 모든 기술’에 관해 ‘봉사적 기술’과 ‘자유로운 기술’, 두 가지로 구분한다. 봉사적 기술은 ‘물질적 산물의 생산과 관계하며 욕구에 봉사하는 기술’이다. 기계론적 테두리를 벗어날 수 없으며 학습과 반복적 연마를 통해 숙련이 가능하다. 이러한 기술의 가치는 생산의 유용성의 정도에 따라 결정된다. 가령 장인적 기술, 수공업적 기술, 기계적 기술 등이 그 예라고 볼 수 있다. 반면 ‘자유로운 기술’은 ‘목적을 그 자신 속에 가지며 그리하여 그 자체로서 영원한 생명력을 가지는 기술’이다. 곧, 독자적이고 자유로운 기술을 뜻한다. 따라서 칸트는 “예술의 목적은 물질적 욕구에 대한 봉사도 아니고, 어떠한 철학적 종교적 관념에 대한 봉사도 아니다.”라고 말한다. 우리들의 대한민국은 자유로운 기술이 꽃피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거기에는 첼로를 사랑했던, 그리하여 모든 국민이 악기 하나 정도는 연주할 줄 아는 세상을 꿈꾸었던 고(故) 노회찬 의원의 미학적 정치의 멋도 깃들어 있다. 칸트는 이렇게 말했다. “미적 예술은 그 자체만으로도 합목적적인 표상 방식이며, 비록 목적은 없다 해도 사회적 전달을 위한 심의능력들의 문화를 촉진시키며, 이러한 미적 대상(표상)의 합목적성은 자의적 규칙들의 모든 구속으로부터 벗어나 있어, 마치 순수하게 자연의 산물인 듯 보여야 한다.” 예술은 자유로운 기술로서 과학적 인식의 법칙과도 무관하며 심지어 회화의 기하학적 법칙과 음악의 수학적 법칙으로부터도 해방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미적 예술은 필연적으로 천재의 예술이다. 천재는 예술작품을 통해 미를 구현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취미가 미를 판정하는 능력이라면 천재는 미를 산출하는 능력을 가진 이다. 예술작품은 ‘자유로운 기술’의 소산이기에 천재는 아무런 목적이나 의도 없이 자신이 가진 재능을 발휘한다. 봉사적 기술이 요구되고, 노동이 소외되고, 인간이 기계화되는 이때 노회찬이 그리던 우리들의 대한민국은 어디에 있을까? 구약성서의 노동 개념 두 가지인 아보다(aboda)와 멜라카(melaka)는 각각 ‘봉사’와 ‘보내심’에서 유래된 것이다. 따라서 노동은 ‘신에 대한 봉사’와 ‘신적 위임으로 보내심’이라는 뜻이 있다. 따라서 그리스적인 노동관인 ‘자연의 질서, 숙명, 고통’으로 이해하는 것과는 다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창조행위에 인간이 그의 노동으로 참여하는 동역의 의미인데, 이러한 동역이 개인의 일이 아니라 공동체에 위임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러한 맥락에서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2:20)” 하와가 창조되었다는 사실은 노동과 공동체의 관계를 잘 보여준다. 따라서 노동은 공동체 내에서 자기 동일성의 실현이 된다. 결코 타자와의 관계에서 경쟁이 아닌 것이다. 자유로운 기술에 기반한 협동과 공동 참여라는 노동, 자연에 대한 착취와 지배가 아닌 공존과 돌봄이라는 노동은 언제 가능할까? 독일의 여성 정치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한길사, 2017)에서 노동과 작업, 행위 3가지로 인간의 활동 유형을 나눈다. “‘노동(labor)’은 생존과 욕망 충족을 위해 행하는 육체의 동작이고, ‘작업(work)’은 자신의 재능을 발휘하여 일의 재미와 일정한 명예를 바라며 수행하는 제작 활동이며, ‘행위(action)’는 개인의 욕망과 필요를 넘어 공동체 속에서 어떤 대의를 위해 하는 행동이다.” 예를 들면, 직장에 다니는 목적이 단지 봉급을 받기 위해서라면 그것은 노동일뿐이며, 그 일에서 보람과 재미를 느낀다면 작업이 된다. 그리고 출퇴근 시간에 짬을 내어 봉사활동을 하거나 자신이 중요하다고 여기는 문제를 놓고 시위에 참여한다면 그것은 행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땅은 ‘노동’조차 어려운 나라가 되었다. 우리들의 대한민국은 노동이 행위로 바뀌기 까지 험난한 세월을 보내야만 하는 걸까? 『협력하는 종: 경쟁하는 인간에서 협력하는 인간이 되기까지』(한국경제신문사, 2016)에서 새뮤얼 보울스&허버트 긴티스는 이렇게 말한다. “협력에 관한 가장 간단하면서도 많은 실험 및 증거들에 의해 지지받고 있는 설명은, 사람들이 비슷한 심성을 갖는 사람들과 협력하는 것에서 기쁨을 얻거나 또는 그렇게 하는 것에 대해 도덕적 의무감을 느낀다는 것이다. 또한 사람은 타인의 협력에 무임승차해 이로부터 이득을 취하는 사람들을 처벌함으로써 기뻐하거나, 그렇게 하는 것을 도덕적인 의무로 여긴다. 무임승차자들은 때때로 죄의식을 느끼며, 타인들에 의해 제재를 받을 경우 수치심을 느끼기도 한다. 우리는 이러한 감정들을 모두 묶어 사회적 선호(social preference)라 부른다.” 진화생물학과 진화게임이론 연구 결과, 사람들이 이타적 협력을 지속시키는 것이 바로 ‘사회적 선호’ 때문인데, 이것은 오랜 진화의 역사 속에서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즉, 사회적 선호란 사람들이 비슷한 심성을 갖는 사람들과 협력하는 기쁨이나, 협력에 대해 느끼는 도덕적 의무감, 또는 협력에 무임승차한 사람들의 죄의식이나 제재를 받을 경우 느끼게 되는 수치심 등의 감정을 뜻한다. 사회적 선호가 확산될 수 있는 이유는 제도를 만들고 학습된 행위를 문화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인간 특유의 능력 때문이다. 그러나 대한민국에서 이러한 공교육은 무너졌다. 사실 대한민국에서 ‘남자의 일생’은 이렇다. 세 살 때는 신동, 예닐곱 살 때는 천재, 초등생 때까지도 수재, 입시 한두 번 겪으면 범부, 사회 나오면 둔재! 교육환경이나 훈련보다 중요한 것은 어린 시절의 인지능력과 성취감이 성공 여부를 좌우하는데, 제대로 된 공교육이 무너진 대한민국은 아직도 학과 점수에 아이들을 길들이고 있다. 그 결과 무임승차자들은 죄의식이 없고, 당당하다. 따라서 자유로운 기술을 통하여 행위하는 인간들의 협력이 당신들의 대한민국을 우리들의 대한민국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이다. 4. 당신들의 대한민국? 우리들의 대한민국 박노자의 대한민국은 이렇다. 노조의 지원을 받는 정당들이 국회 의석을 절반 정도를 차지하는 나라, 입사 때 여성이나 장애인이 ‘정상적인 남성’보다 더 유리한 평등의 나라, 노동운동가들이 감옥에 잡혀가지 않는 나라, 학생들이 교수를 만날 때 노르웨이처럼 동등한 인간으로서 웃으면서 악수할 수 있는 나라, 제국주의의 침략으로 완전히 폐허가 된 아프가니스탄에 각종 원조를 제공하는 일이 덴마크처럼 지성계의 가장 중대한 관심사가 될 수 있는 나라, 여성들이 손님의 냉면을 잘라주는 ‘음식집 아줌마’ 정도의 역할밖에 맡지 못하는 나라가 아닌 그런 대한민국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가야할 길은 무엇인가? 박노자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실존적 운동으로서의 사회주의인… (다시) 좌파의 길이다.” 현실 사회주의를 다시 일으키자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에 반대하는, 이른바 비자본주의적 삶의 방식을 대변할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해보는 것이다. 자본의 한계를 직시하고 거기서부터 새로운 대안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단순히 집권만을 위한 정당 운동이 아닌 폐허를 딛고 일어나 ‘인간으로 다시 거듭나고 뜻을 되찾기 위한 실존적 운동’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경계를 넘어서는 연대의 힘’만 있다면 못 이룰 것도 없다. 따라서 박노자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새로운 참사가 계속 일어나도 아무런 투쟁을 하지 않고 그대로 두는 것은 결국 역사 앞에서 커다란 죄를 짓는 일일 것이다.” 서론에 언급했던 노회찬 의원은 그 길을 가다 넘어졌다. 그의 유언은 이렇다. “나는 여기서 멈추지만 당은 당당히 앞으로 나아가길!” 다른 세상으로 가는 길에 동지 하나를 잃고 어깨에 더 무거운 짐이 올려지건만, 그리 힘들지 않음은 그의 웃음과 해학이 예수의 그 마음에 닿기에, 예수의 부활처럼 그도 부활하리라 생각하여 오늘도 당당히 앞으로 걸어간다. 노회찬 의원이 꿈꾸었던 대한민국을 향하여! ▲ 남부산용호교회 담임 * 이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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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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