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0-10-30(금)

문화
Home >  문화

실시간 문화 기사

  • [기독교 교양 읽기 29] “일터사역이 개인적 차원에서부터 사회적·제도적 차원으로 확산돼야”
    기독경영 실천하는 치과의사 이야기 참 별난 치과의사다. 일터를 사역지처럼 생각하고, 일하는 것을 목회처럼 하려고 한다. 지나치게 상업화되어 가는 의료 현실을 안타깝게 생각하여 신학대학원에 가서 종말론적 윤리를 공부했다. 그리고 그것을 바탕으로 현장에서 실천하려고 노력한다.그의 신앙고백이다. “주신 은혜대로 살고 싶다는 소망이 생기면서부터 의료 현장에서 관행처럼 해왔던 일들이 죄로 보이기 시작했다. 직원과 환자를 대하던 태도, 거래처를 다루던 거친 매너, 자신을 변호하기 위한 습관적인 변명과 과장 등 내 삶의 모든 부분이 내가 받은 은혜와는 접점을 전혀 찾을 수 없었다.”그가 변하기 시작했다. 먼저 직원들에게 그동안 군림했던 자세를 진정으로 사과하고, 함께 진료실을 청소하는 것으로부터 변화를 꾀했다. 그리고 진료실의 작은 부분 하나하나를 투명하게 만들려고 노력했다. 환자에 대해서도 손해를 보더라도 진실을 이야기하였다.그는 부활 신앙을 핵심으로 하여, 현재의 삶도 입으로만 아니라 행동으로 믿음을 실천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래서 지금은 손해를 보더라도 원칙을 지키고 숨기지 않고 사실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 중요하다. 진정성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이를 ‘기독 경영’이라고 한다. 모든 일을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한 가치와 원리에 따라 행하고, 하나님의 주권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오늘을 그날처럼》 || 저자 이철규는 개업한 치과의사로서,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에서 성경신학을 전공했다. 치과의 선교사로 중국에서 사역하기도 했고, 현재 치과의료선교회에서 활동하고 있다. 새물결플러스, 2017. 15,000원. ▌좌담: 김길구 전 부산YMCA 사무총장, 김수성 경성대 초빙외래교수, 김현호 기쁨의집 기독교서점 대표 “그릇의 앞면이 믿음이라면 그릇의 뒷면은 행동과 생활이라 할 수 있다. 앞면이 나를 쓰시고자 하는 주님과의 관계라면 뒷면은 내가 속한 공동체와의 관계다. 그릇을 앞뒤로 나눌 수 없듯이 믿음과 생활은 하나이고, 하나님 앞에서의 믿음은 삶의 현장에서 만나는 공동체 구성원들과의 관계를 통해 구현된다.” #일상생활에서 신학적 성찰 동반해야김길구 이 책의 전체적인 흐름은 ‘온전함’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 책의 저자는 개인생활은 물론이고 직장 등 모든 면에서 ‘온전한 기독교인으로서의 생활’을 실천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김현호 비슷한 말이지만 저는 ‘신실함’으로 표현하고 싶습니다. 이 책의 내용으로 보면, 그는 철저히 복음주의적 신앙인입니다. 그래서 복음주의적 신실함에 충실하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김수성 저자 스스로 ‘인테그리티(integrity)’를 이야기한 부분이 있죠. 서양 교육의 핵심 가치 중 하나라며, 우리말로 번역하기는 애매한데 자기는 ‘진정성’으로 받아들이고 싶다고 합니다. 온전함, 신실함, 진정성, 어느 것을 사용하든 같은 맥락의 용어인 것 같습니다.김길구 이 책은 일터 사역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먼저 ‘일터신학’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일터를 바라보는 시각이 몇 개 있는데, 일터신학은 기본적으로 일터와 선교현장을 별개로 보지 않습니다. 즉, 일터가 곧 선교현장이 된다는 입장입니다.김현호 폴 스티븐스 목사의 ‘노동신학’과도 연관이 될 것 같습니다. 그는 ‘망치를 든 목사’라는 말에 어울리게 일터와 목회에 구분을 두지 않고, 모든 일상생활 속에서 신학적 성찰을 동반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김길구 일터신학은 개신교의 구원론과 관련이 있습니다. 교회나 사제를 거치지 않고 개개인 누구나 예수님을 통해 직접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개인이 곧 교회가 되고, 그가 일하는 현장이 사역의 현장이 되는 것입니다.김현호 저자가 어려울 때마다 그를 버티게 해준 성경구절도 사변적이지 않고 실제적이라는 점도 눈에 띕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반적인 생각에서 점차 구체적이고 능동적인 성경구절을 떠올리게 됩니다. 아마도 그가 끊임없이 큐티와 성경공부를 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입니다.김길구 한편으로 저자의 변화과정을 보면 단계적인 성장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일과 신앙을 일치시키는 단계를 보면 ▷일을 선교사업의 일환으로 생각하는 단계, ▷일터에서 영성을 유지하는 단계, ▷도덕적이고 제도적인 변화를 모색하는 단계, ▷신학적 자기정체성 확립 단계로 나아갑니다. 저자 역시 이러한 변화 과정을 밟은 것으로 보입니다. ▲ 일터신학은 일터도 하나의 사역 공간임을 강조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온전함, 신실함, 진정성을 가져야 한다. [출처: knsfinancial.com] #교회가 ‘깨끗한 富’에 관심을 가져야김수성 가장 중요한 문제는 이러한 변화가 개인이나 하나의 일터에 그치지 않고, 사회적이고 제도적 변화로 널리 확산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김길구 최근 인기를 얻고 있는 공직자가 한 명 있죠. 최근 새로 선임된 공정거래위원장입니다. 그동안 우리 사회에 만연했던 소위 ‘갑질’을 없애기 위한 노력이 시민들에게 바람직하게 비쳐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동안 시민들을 분노케 했던 ‘땅콩 회항’을 비롯해 프렌차이즈 본부의 횡포 등을 바로잡겠다고 나선 것이 공감을 얻고 있습니다.김수성 그동안 부당한 대우를 당했던 가맹점들의 요구사항이 표면화되는 등 소위 생활민주주의가 부각되었기 때문이라 할 수 있겠죠. 거꾸로 생각하면 그만큼 우리 사회가 기득권층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김현호 사회의 갑질 못지않게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 교회에서의 갑질입니다. 직분을 가진 분들이나 교회에 오래 다니신 분들이 알게 모르게 갑질 행세를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로 인해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하던 분이나 새로 교회에 출석한 분들이 상처를 받는 일이 있습니다.김길구 교회의 기본적인 시각도 바뀌어야 할 때입니다. 그동안 교회는 열심히 출석하는 교인, 헌금을 잘 내는 교인을 ‘좋은 교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일터에서 어떻게 하는지에 대해서는 무관심했습니다. 도덕적 불감증, 갑질과 같이 일터에서의 문제점에 대해서는 모른 척했습니다. 또한 가끔 강단에서 예로 드는 록펠러나 카네기 같은 부호들에 대해서도 올바로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김수성 록펠러나 카네기는 당시 ‘황제’로 불렸죠. 소규모 기업은 물론, 사업을 확장하는데 방해가 되는 기업에 대해서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흡수합병했습니다. 소속 근로자 착취와 노동조합 방해도 다반사였습니다. 심지어 이들이 낸 헌금을 거절한 선교단체도 있을 정도였습니다. 김현호 저자가 원장으로서의 권한을 내려놓은 것이 좋은 사례가 될 것 같습니다. 그동안 직원들에게 권위적이었던 것을 진심으로 사과하고, 함께 진료실을 청소하고, 신입직원 선정에 직원들을 참여시켜 민주적으로 선발하는 등, 갑으로서의 권한을 모두 직원들과 함께 하였습니다.김길구 막스 베버가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이야기했던 ‘청부(淸富)’에 대해 우리 기독교회가 좀 더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사회적으로 개혁 프로그램이 진행되고 있는 현시점에서 기독교가 이에 앞장서야 합니다. #‘기독 경영’은 지속가능한 운동이다김수성 한편,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이 책의 저자는 유수한 대학 출신인데다, 직업도 안정적인 치과 원장입니다. 그래서 혼자서 결단만 내리면 충분히 일터사역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월급쟁이 직원들에게 일터사역을 하라고 한다면 가능할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회사에서 요구하는 사항을 ‘양심껏’ 처리할 수 있을까요?김길구 일터사역은 단순히 개인적인 차원에서가 아니라 사회적이고 제도적인 차원으로 확산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래서 교회가 크리스천 CEO들이 먼저 올바로 설 수 있도록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김현호 저자도 자기 병원에서의 일터사역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기독치과의사회 등 단체를 통해 사역을 널리 퍼뜨리고 있습니다. 개인적인 차원이라고 하기보다는 모든 치과의사들에게 이렇게 해야 하지 않느냐고 압력(?)을 넣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겁니다.김수성 저자가 하고 있는 사역도 경영학적인 측면에서 보면 이윤의 극대화에서 적정이윤으로, 기업의 사회적 책임으로 변화했던 것과 비슷한 것 같습니다. 신자유주의 물결로 인해 이런 긍정적인 흐름이 급격하게 퇴색하고, 자본주의 부정적인 측면이 더욱 부각되는 시대가 되기는 했지만….김현호 경영학적 흐름은 시대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으로 ‘기독 경영’을 한다면 그것은 지속가능한 운동이 될 것입니다. 생활에서부터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일터의 생활이 곧 예배의 차원으로까지 완성도를 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김길구 당장 우리 사회에 커다란 화두로 던져진 최저임금 1만원을 어떤 시각으로 보느냐도 이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음에는 초대교회의 집회 모습을 재구성한 로버트 뱅크스의 《1세기 교회 예배 이야기》(IVP, 2017)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수고했습니다. [정리: 김수성] ◇ 같이 읽으면 좋은 책 《일의 신학》 / 폴 스티븐스 / CUP 《월요일의 그리스도인》 / 최영수 / 생명의말씀사
    • 문화
    • 기독교 교양 읽기
    2017-08-07
  • [문화] 최병학 목사의 문화펼치기 29 : 핵
    1. 늑대를 잡는 법 에스키모인들은 늑대를 잡을 때 칼을 잘 갈아서 날카롭게 만든 다음 칼날에 동물의 피를 흠뻑 묻혀 얼린다. 그리고 날카로운 칼날이 위쪽으로 오도록 향하고 땅속에는 칼의 손잡이를 박아놓는다. 그러면 피 냄새를 맡은 늑대들이 와서 칼날을 핥는다. 얼어서 무감각해진 늑대의 혓바닥은 어느새 날카로운 칼날에 혀를 베이게 되고 늑대는 자신의 피 맛에 끌여 더욱더 빠른 속도로 칼날을 핥는다. 죽음에 이를 때까지 말이다. 피 냄새에 이끌려 이성을 잃는 순간 늑대의 일생은 끝나게 되는 것이다. 지난 박근혜 정부는 후쿠시마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핵발전소 정책을 펼쳤다. 2035년까지 원전을 현재 23기에서 최소한 39기 이상으로 늘리는 것을 뼈대로 한 에너지 정책을 공식화했던 것이다. 유럽연합 등 선진국들은 세계 최고의 핵 기술과 안전시스템을 자랑하는 일본의 후쿠시마 사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지만, 정작 일본의 이웃 나라인 대한민국은 태연하다. 국가권력과 야만적 기업가들에 의해 지속되는 핵발전소는 희망이 들어있는 판도라의 상자가 아니라, 인류가 손에 넣어서는 안 되는 두 번째 선악과이다. 따라서 후쿠시마 원전 사고(와 경주 지진)는 인류에게 보내는 하나님의 경고요, 지구생명의 경고이며, 칼날에 묻은 자신의 피를 핥는 어리석은 늑대와 같은 우리들에게 들려주는 마지막 음성이다. 다행스럽게도 지난달 6월 19일, 고리원전 1호기가 영구정지 됐다. 건설 중인 신고리 5,6호기도 잠정적으로 건설을 중단하고, 사회적 공론화를 거쳐 진행 여부를 결정하겠다고 한다. 문재인 정부 들어 그나마 탈원전 기조로 돌아선 것이 다행이다. 2. 핵분열과 방사능 자연계에 존재하는 모든 물질은 93가지 원소로 되어 있다. 가장 가벼운 것이 원자번호 1번인 수소이고, 가장 무거운 것은 원자번호 93번인 우라늄이다. 그 가운데에는 산소, 질소, 칼슘, 철, 알루미늄, 납, 금, 은 등이 있다. 우주가 탄생했던 빅뱅과 함께 원자번호 1번의 수소가 탄생했고, 높은 온도와 압력, 초신성 폭발 등의 과정을 통해 현재 우리의 세상을 이루고 있는 다양한 원자들이 태어났다. 이들 원소들은 상온에서 기체, 액체, 고체로 존재하는데, 서로 결합하여 물, 돌, 나무 등 온갖 생물과 무생물을 이루게 된 것이다. 그런데 우라늄이라는 원소는 방사선을 내뿜는다. 그리고 이러한 능력을 방사능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 비행기를 타거나 엑스레이를 촬영할 때 혹은 전자레인지 앞에만 있어도 방사선에 노출된다. 그러나 이러한 방사능으로 우리 몸이 피해를 입을 가능성은 지극히 낮다. 문제는 인공 방사능이다. 과학자들은 우라늄-235에 열중성자를 부딪치면, 많은 에너지가 발생하는 ‘핵분열 반응’을 발견하게 된다. 핵분열이란 원자핵이 중성자에 의해서 쪼개지면서 많은 열에너지가 발생하는데, 이러한 핵분열 반응은 이후 핵 연쇄반응을 통해 ‘핵발전’과 ‘핵무기의 기반’을 만들게 된다. 가령, 원자핵이 가지고 있는 에너지를 순간적으로 발산시키는 것이 핵무기이고, 그것을 천천히 발산시켜 전기에너지로 바꾸는 것이 핵발전인 것이다. 따라서 엄밀히 따져보면, 핵무기와 핵발전의 뿌리는 하나이다.¹ ▲ 핵분열의 원리 과학자들은 아프리카 가봉의 오클로(Oklo)에 있는 한 노천 우라늄 광산에서 수십만 년 동안 우라늄-235가 스스로 핵분열 했다고 본다. 그리고 그 핵분열이 멈춘 지 20억 년이 지난 후, 인간들은 1942년 미국 시카고 대학의 운동장 한구석에 최초로 인공 원자로를 설치했고, 사상 처음 핵분열에 따른 연쇄반응 실험을 성공시켰다. 그리고 인간들이 이러한 압도적인 힘인, 핵에너지로 가장 먼저 한 일이 ‘폭탄’을 만드는 일이었다. 1945년 7월 16일 미국 뉴멕시코 주의 ‘죽음의 여행’이라는 뜻을 가진 사막에서 첫 핵폭탄 실험이 실시되었고, 20일이 지난 45년 8월 6일 히로시마 상공에 리틀보이(소년)란 암호명의 두 번째 핵폭탄이 터졌고, 며칠 후 나가사키(원래 고쿠라에 투하 예정이었으나)에 팻맨(뚱보)이라는 세 번째 핵폭탄이 투하됐다. 각각 16만 명과 8만 명이 죽었는데, 놀라운 것은 원자폭탄 피해자의 10분의 1은 일제에 의해 강제로 끌려갔던 조센징(朝鮮人)들이었다. 이 분들과 그 자손들은 오늘도 사람들의 망각과 무관심 속에 고통 받으며 살아가고 있지만 전혀 소개되지도, 알려지지도 않았다. 아무튼 놀라운 것은 핵발전용 연료인 우라늄이나 플루토늄이 핵분열하는 과정에서 1천7백여 종에 달하는 방사능이 나온다는 것이다. 그중 20종은 인체에 특히 위험한 방사능이라고 할 수 있다. 대부분 인체에 세균이 침투하면 인체 면역 체계가 작동돼 스스로 방어하지만 방사능은 예외이다. 그리고 방사능은 암 발생률을 증가시키고 백혈병을 유발하고 각종 질환을 유발시킨다. 게다가 분열하는 염색체에 이상을 일으켜 돌연변이도 발생하게 만든다. 폭탄으로도 위협적이고 방사능으로도 치명적인 핵은 한마디로 제2의 선악과인 것이다. 침범할 때 엄청난 대가가 따르는! 3. 하늘의 불과 하나님의 경고 일본의 시민과학자 다카기 진자부로(高木人三郞)는 원자력을 ‘하늘의 불’로 본다. 절대로 지구상에서 태워야 하는 불이 아니라는 것이다. 밤하늘에 빛나는 별은 핵분열로 원자의 불이 타고 있다는 것이다. 핵분열이 별을 빛나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하늘의 빛, 빛나는 별빛은 모두 하늘의 불, 우주의 불이다. 그리고 이런 곳에서는 생물이 살 수 없다는 것이다. 사실 지구는 태고시대에 우주의 부스러기로 이루어졌는데, 생성되었을 당시는 많은 방사능을 가지고 있었다. 말하자면 하늘의 불이 남아, 지구에 죽음의 재가 가득 차 있었던 것이다. 지구는 이러한 타고 남은 찌꺼기로 만들어졌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처음에는 꽤 강한 방사능이 많이 남아 있어서 지구에 생물이 살 수 없었다. 아주 원시적인 생물이 생기는데 10억 년 정도가 걸린다. 그리고 방사능이 식은 후에야 마침내 생물이 살 수 있게 된다. 이렇게 생물이 살 수 있게 된 지구에 다시 인간은 인공적으로 새 방사능을 만들어서 방사능의 불을 일으킨 것이 바로 핵발전이다. 확실히 하늘의 불을 훔친 인간의 오만은 그 벌을 받게 되는데, 그리스 신화가 이것을 잘 보여준다. 제우스로부터 인간에게 불을 훔쳐다 준 프로메티우스는 매일 간이 독수리에게 쪼아 먹히는 형벌을 받는다. 어쩌면 우리 사회에 사람들의 간이 안 좋은 것은 모두 북한의 핵무기와 남한의 핵 발전 때문이 아닐까? 하늘의 불을 훔친 프로메테우스처럼?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네가 북두칠성의 별 떼를 한데 묶을 수 있으며, 오리온 성좌를 묶은 띠를 풀 수 있느냐? 네가 철을 따라서 성좌들을 이끌어 낼 수 있으며, 큰곰자리와 그 별 떼를 인도하여 낼 수 있느냐? 하늘을 다스리는 질서가 무엇인지 아느냐? 또 그런 법칙을 땅에 적용할 수 있느냐?(욥38:31-33)” 다카기 진자부로는 위에 인용한 욥기에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에 영감을 받았다. 욥은 이유 없이 고통을 받았다. 따라서 욥은 하나님께 항의를 한다. 그러자 폭풍이 몰아치는 가운데 하나님이 나타나 욥에게 묻는다. 핵심은 이것이다. 자연계는 인간이 만든 것도 아니고, 인간이 속속들이 아는 것도 아니다. 인간은 자연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신이 욥에게 묻는 다. 너는 그것을 아느냐고, 자연의 깊이, 자연의 균형을 아느냐고, 그런 것도 알지 못하면서 오만하게 그것을 개조하려 드는 인간에 대해 하나님은 엄중한 경고를 보내시는 것이다. 핵분열은 어쩌면 하나님의 영역을 넘어서는 인간의 오만, ‘죄’라고 볼 수 있다. 사실 기독교가 말하는 죄란 ‘인간이 자신의 유한성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지난 20세기 절반의 세계 신학사상을 지배한 신학자 칼 바르트도 “인간의 범죄는 단순히 자기 자신에 대한 오류, 자기소외, 자기중심성, 자기 폐쇄성만이 아니라, 광기와 영웅주의, 하나님의 영광의 찬탈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을 찬탈하고 그 스스로 하나님이 되려고 한다. 이러한 혼동 속에서 죄인은 자신을 거짓 신으로 만든다.”고 통찰했다. 성 어거스틴도 “죄란 인간이 신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모든 유형의 교만”이라고 말한다. 넘어서지 말아야 할 경계선이 있는 것이다. 설사 넘을 수 있어도 넘지 말아야 할 한계선이 있는 것이다. 그것을 넘어가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교만이고 오만이다. 따라서 핵개발은 현대판 선악과 사건이다. 한번 실수했는데, 또 다시 실수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때는 아담과 하와뿐이었지만, 지금은 집단 지성으로 좀 더 논의하고 지혜롭게 풀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핵은, 그것이 무기이든 발전이든 결코 평화와 양립할 수 없는 것이다. 팍스로마나, 팍스아메리카나도 안되지만, 팍스뉴클레우스(Pax Nucleus), ‘핵의 평화’도 안된다. 오직 ‘그리스도의 평화’만이 지구를 살릴 것이다. 팍스 크리스티(Pax Christi) 4. 핵과 핵발전에 대한 여러 가지 오해들 사람들은 핵발전을 ‘평화용’이라든지, ‘저탄소 청정에너지이며 기후변화의 대안’, 혹은 다른 에너지 보다 ‘안전’하다고 생각한다. 동시에 우리 인간은 끊임없이 ‘전기’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 때문에 핵발전을 계속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핵발전은 처음부터 군사적 이용, 즉 원자폭탄 개발을 위해 시작됐고, 수많은 나라들이 민간 핵발전이라는 덮개 아래서 핵무기를 개발했고, 하고 있다. 그리고 핵은 절대 깨끗하지도, 안전하지도, 싸지도 않다. 설사 발전부문에 국한해서 핵발전이 이산화탄소 발생량을 억제하는 효과가 있다 하더라도, 핵발전의 전 과정을 살펴보면 심각하다. 특히 우라늄의 채굴과 가공 및 농축과정에서 어마어마한 온실가스가 발생한다. 게다가 핵발전은 낭비가 심한, 대단히 비효율적인 에너지이다. 물리적으로 핵발전 과정에서는 핵분열에서 방출되는 에너지의 단 3분의 1만이 전력으로 전환되고 나머지 3분의 2는 섭씨 30도가 넘는 온배수 형태로 바다에 버려져 주변 생태계를 심각하게 오염시킨다. 핵 과학자들이나 핵 산업계 종사자들도 그것을 다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핵발전을 고집하는 이유가 있다. 바로 핵발전이 핵무기의 원료를 생산해주기 때문이다. 일본이 후쿠시마의 그 경험에도 불구하고, ‘핵발전 산업체제’를 유지하려고 힘쓰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핵발전과 핵무기는 동전의 양면이다. 물론 심각한 것은 우리가 끊임없이 전기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한국에서 핵발전소가 9기였던 1991년에 2,321킬로와트였던 1인당 전력소비량이 2005년에는 7,403킬로와트로 세배나 증가했고, 2010년에는 네배나 증가했다. 현재는 더 심각하다. 따라서 지금까지 핵발전이라는 전기의 풍요라는 ‘단맛’을 봤다면, 이제는 ‘핵발전소의 폐쇄’와 ‘핵폐기물 처리’라는 아주 힘들고 어쩌면 고통스러운 ‘쓴맛’을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 아이들과 미래 세대를 위해서 그래야 하기 때문이다.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서 핵발전소는 반드시 폐기, 건설 중단되어야 한다. 미래세대를 위해 지금 조금 불편해도 반드시 탈핵으로 나가야 한다. 대한민국은 지금 불면증 시대이다. 새벽 세시, 네시가 될 때까지 미친 듯 깜빡이는 술집들의 네온사인, 밤을 모르는 환한 밤거리, 열두시, 한시까지 꺼질 줄 모르는 심야학원의 불빛, 야간 자율학습을 하는 방방곡곡의 학교들. 밤늦은 시간까지 쉴 새 없이 돌아가는 냉방기와 난방기들. 밤에는 잠자면 될 것을. 십자가 네온사인도 11시-4시 까지는 꺼야 된다. 예수님도 주무셔야하지 않는가! 좀 아껴쓰고, 나눠쓰고, 덜 쓰고, 다시쓰고, 바꿔쓰는 그런 지혜가 필요할 때이다. 따라서 온전한 기독교인이라면, 온실가스 방출을 줄이기 위해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모든 일회용품의 사용을 삼가하고, 공장식 축산으로 고통 받는 동료 피조물들을 기억하면서 가급적 채식을 실천하는 일을 행하면서,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대규모로 파괴하는 잘못된 정책과 과학기술에 맞서 당당하게 예언자적 목소리를 발해야 할 것이다. -------------------------------------------------------------------------- 각주1) 핵발전소를 이야기할 때 먼저, 용어를 구별해야 한다. 일본과 한국에서는 마치 ‘핵’과 ‘원자력’이 서로 다른 것처럼 홍보되어 왔다. ‘반핵’은 옳지만 ‘반원자력’은 잘못된 주장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핵은 군사용이고, 원자력은 평화용인 것처럼 선전되었다. 따라서 북한의 핵은 문제지만, 남한의 원자력발전소는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둘 다 문제이다. 북한은 “핵무기와 함께 세계 그 어느 지역도 타격할 수 있는 최강의 ‘대륙간탄도로케트’를 보유한 핵강국이 되었다”고 발표를 하고, 남한은 탈핵 논의로, 사실상 남북 모두 “핵, 핵”거리고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원전이라는 대중적인 용어 대신, 정확한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 핵발전 이라는 용어를 사용해야 된다. 같은 이유로 방폐장(方廢場)이 아니라, 핵폐기장(核廢棄場)이라고 해야 한다. 최 병학 목사 (남부산용호교회 담임) *이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문화
    • 문화펼치기
    2017-07-24
  • [문화사역자를 소개합니다] 노신사 밴드
    화려한 의상, 세련된 무대 매너, 그리고 현란한 브라스밴드의 향연. 이 멋진 무대를 만들어 내는 <노신사밴드>는 교인뿐 아니라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들도 자리에서 일어나 춤을 추게 하는 팀입니다. 올해로 창단22주년을 맞는 <노신사밴드>는 대부분 70대의 어르신들 17명으로 구성된 브라스밴드(금관악기중심의 합주단)입니다. 원래 이름은 <데오빌로 뮤직>이었으나 2015년에 TV프로그램에서 우승하면서 <노신사밴드>로 더욱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단원 개개인이 워낙 오래전부터 악기를 전문적으로 연주하시던 분들입니다. KBS, MBC 전속 악단출신, 그리고 미8군 무대에서 연주하시던 경험으로, 다양한 레퍼토리를 가지고 있으며 연주의 수준도 매우 뛰어나 많은 곳에서 이들을 찾고 활발하게 공연활동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특히 이 팀은 매주 남포동거리, 광안리 등 부산의 대표적인 거리에서 <국밥콘서트> 라는 연주활동을 하는데, 이 공연에서 관객들이 조금씩 모아주는 성금으로 매주일 저녁 부산진역에서 노숙인들에게 식사를 대접을 하는 의미 있는 행사를 지속적으로 해오고 있습니다. 또한 교도소 사역에도 남다른 열정을 보여 1년에 6회, 지속적으로 교소도를 방문하여 재소자들에게 기쁨과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일반 공연계에서도 브라스밴드로 활동하는데 어려움이 많습니다. 부산지역의 작은 선교단체에서 이런 대규모의 브라스밴드를 유지하는 것은 남모르는 어려움이 많았으리라 짐작됩니다. 그럼에도 이 단체를 이끌어 가시는 강형식 목사님의 열정과 단원들의 한결같은 열정으로, 교계에는 수준 높은 기독음악을, 교회 밖에서는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하는 하나님의 귀한 도구로 사용되어지고 있습니다. 가끔은 공연 전에 많은 악기를 이동하고, 세팅하는 과정에서 단원들의 나이가 많은 관계로 힘들어하는 모습이 보이지만 한 번도 불평하지 않고, 기쁨으로 사역을 감당하는 모습을 볼 때 후배 사역자들에게 귀한 모범이 되고 있습니다. 노신사밴드의 활동이 더욱 많아져서 많은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역을 잘 감당하길 기도합니다. <부산,경남 기독문화 일정> 1. 노래하는 순례자 찬양팀 7월23일(주일)~24일(월) : 대연성결교회 중등부 수련회 찬양인도 7월26일(목)~27일(금) : 대동제일교회 부흥회 찬양인도 7월30일(주일)~8월2일(수) : 삼은대길교회 학생부 수련회 찬양인도 2. 노신사 밴드 7월22일(토) 오후6시 : 해운대 구남로 문화의 거리 음악공연 7월23일(주일) 오후2시 : (부산) 항서교회 3. 디아코노스(연극팀) 7월23일(주일) 오후2시 : 대연교회 7월24일(월) 오후4시 : 고신대학교 7월28일(금) 오전10시30분 : 성주제일교회 7월28일(금) 오후4시 : 울산온양교회 7월29일(토) 오후7시 : 기장군청소년수련관 7월30일(주일) 오후8시30분 : 목포청소년수련관 7월31일(월) 오전10시 : 경주켄싱턴리조트 4. 기독뮤지컬 <언제는 행복하지 않은 순간이 있었나요> 일시 : 2017.6.30.~8.13, 금(7시30분), 토(7시), 일(6시) 장소 : 디코소극장 (문의:070-7886-8232)
    • 문화
    • 문화사역자
    2017-07-24
  • [기독교 교양 읽기 28] “하나님은 우리가 즐거워할 때 더 크게 기뻐하는 분이시다!”
    ‘거룩한 쾌락’ 누리시길… 그동안 교회에서 부정적으로, 심지어는 죄악시했던 ‘쾌락’에 대한 생각을 180도 바꿔준다. 저자가 언급했던 내용을 그대로 제시하는 것만으로도 그 의도를 충분히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는 ‘거룩한 쾌락’을 누리기를 강조한다.■의무와 훈련만 말하는 복음은 하나님에게서 기쁨을 앗아간다. 하늘 아버지는 우리가 즐거워할 때 기뻐하시는 분이다. 우리의 즐거움은 그분이 상상을 초월하는 비싼 대가를 치르고 사주신 것이다.■우리는 쾌락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하나님과 멀어지는 것이다.■거룩함이야말로 쾌락의 가장 진정한 친구이다. ■복 자체도 은혜지만 그 복을 누리는 능력도 그분의 은혜라 할 수 있다.■당신에게 즐거운 일이라면 그 자체로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될 수 있다.■다들 긴 한 주간을 보내고 모인 교회에 건강한 웃음이 있다면 그 또한 큰 유익이 될 것이다.■우리는 쾌락에도 위계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맨 위에 하나님이 계시고 그밖에 다른 쾌락들에도 다 질서가 있다. 이 위계가 깨지거나 뒤틀리면 덜 중요한 쾌락들이 가장 중요한 쾌락을 상대로 싸움을 벌인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쾌락은 그리스도를 즐거워하는 것이다.◈ 《쾌락》 || 게리 토마스(Gary I. Thomas)는 ‘복음주의영성센터’ 설립자 및 대표로서 작가이자 사역자이다. 저서로 《영성에도 색깔이 있다》 등이 있다. 원제 Pure Pleasure(2009). 윤종석 역. CUP, 2012. 15,000원. ▲ 여유 있게 즐기는 한 끼의 맛있는 식사가 쾌락이 될 수도 있다. 기쁨은 없고 훈련만 있으면 결국 우리의 마음이 냉혹해지고 교만해져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게 된다. [Dinner. 출처: primer.com] ▌좌담: 김길구 전 부산YMCA 사무총장, 김수성 경성대 초빙외래교수, 김현호 기쁨의집 기독교서점 대표 “쾌락을 경멸하는 태도는 고차원의 영성이 아니라 오히려 교만한 죄이다. 쾌락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더 인식하게 하고, 그분께 더 깊이 감사하게 하고, 내세의 더 풍요로운 쾌락에 소망을 두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친히 설계하신 것이다.” - 제임스 패커. #당신의 ‘쾌락 필요지수’는 얼마인가?김길구 : 이 책의 저자 게리 토마스는 영성과 관련하여 널리 알려진 분입니다. 그런데 이 책에서는 ‘쾌락을 누리라’는 메시지를 던집니다. 그러면서 29쪽에 ‘쾌락 필요지수 진단지’를 만들어놓고는 스스로 한 번 테스트해보라고 권합니다.김현호 : 우리 모임에서 회원들을 상대로 테스트를 해본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대체로 외향적으로 살아가는 분은 지수가 높게 나오는 반면, 내성적인 분들은 낮게 나옵디다. 여기에 더하여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분들은 위험한 수준까지 떨어졌습니다.김수성 : 저는 이런 테스트는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해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위험한 수준이 나온 분들은 주로 어떤 일에 종사하는 분인가요?김현호 : 교회에서 목회를 하거나 사역을 하는 분들입니다. 이 책에서 언급하고 있듯이 이 분들은 가끔 쾌락의 시간을 가져야 할 필요가 절실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사역을 하는 분들이 스트레스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개인은 물론, 가정과 교회 전체에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김길구 : 저는 좀 낮게 나옵디다. 대체로 본인의 성격과 관계가 있는 것 같더군요. 그리고 사역을 하는 분들에게 그러한 결과가 나타나는 것은, 중세 이후 교회가 쾌락보다는 절제를 강조한 흐름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심지어 수도원에서는 경건성을 강조하기 위해 내적 기쁨까지도 절제하고 자학을 하는 경우도 있었죠. 이러한 흐름이 오늘날까지도 이어져 오는 것 같습니다.김수성 : 저는 이 책을 보면서 제목이 선정적이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습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쾌락’이라고 하면 긍정적 의미보다는 부정적 의미로 많이 사용되기 때문입니다. 원제는 ‘순수한 즐거움’ 또는 ‘순결한 즐거움’ 정도로 번역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김현호 : 우리가 살아오면서 이데올로기 등으로 인해 잃어버린 좋은 말이 많습니다. ‘동무’라는 말이 공산주의와 맞물리면서 거의 사용하지 않게 된 것과 같이, 쾌락이란 말도 ‘종교적 거룩’에 반하는 용어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말을 많이 사용해서 본래의 자리로 되돌려놓아야 한다는 생각을 합니다.김길구 : 저자가 인용한 성경 구절을 보면 시편이나 아가서 등이 많은데, 전도서 8장 15절에 “이에 내가 희락을 찬양하노니 이는 사람이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해 아래에는 없음이라.”는 구절에서 사용한 ‘희락’이라는 말이 어울릴 것도 같습니다.김수성 : 그게 상당히 적합한 단어일 것 같네요.김현호 : 히브리어 ‘마카리오스’라는 말에는 ‘쾌락이 넘쳐흐르는 삶을 누려라’라는 뜻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 쾌락이라는 말을 우리도 자주 사용하면 익숙해지리라 봅니다. #교회가 이제는 ‘쾌락’을 처방했으면김길구 : 이 책 첫머리에 양치식물 비유가 나옵니다. 양치식물은 고사리 같은 식물인데, 주로 경사진 곳에 많이 서식한다고 하는군요. 그래서 겉으로 보기에는 식물이 무성해서 위험을 느낄 수 없다고 합니다. 저자는 이럴 때 ‘주의하라’고 강조합니다. 즉, 밑으로 미끄러져 떨어지기 전에 자신을 돌아보라는 것입니다.김현호 :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흔히 놓치지 쉬운 소소한 즐거움을 무시하면 안 된다는 말인 것 같습니다. 앞에서 말씀했듯이 중세적 경건함이 개신교에는 청교도적 금욕주의로 이어져 그것이 우리나라에도 영향을 미친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오히려 생활 속의 쾌락마저도 억압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습니다.김수성 : 지난달에 읽었던 필립 얀시의 책에서도 이런 것이 강조되었죠. 특히 사역자들이 그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일을 계속하기 위해서는 가끔 ‘달콤한 시간’을 가져야 한다고. 이 책에서는 커피를 예로 듭니다. “사람들이 굶어 죽는 나라도 있는데 내가 어떻게 커피 한 잔에 3달러를 쓴단 말인가?”라며 강박관념에 시달리는 사람도 있지만, 일을 하는 사람에게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은 달콤한 휴식이라고.김길구 : ‘종교적 중독자’ 문제라 할 수 있습니다. 의무만을 생각하고 기쁨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이죠. 저는 ‘누리다’라는 말이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참 좋은 낱말인 것 같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가끔은 맛있는 음식의 즐거움을 누리고, 또한 자유를 누려야 새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의무에만 매몰되면 심각한 문제를 불러올 수 있죠.김현호 : 저자는 ‘쾌락의 비용은 낭비가 아니다’고 강조합니다. 교회가 이제는 ‘쾌락’을 처방하는 곳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사역자들이 즐겁게 일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성도들도 이러한 분위기를 유지할 수 있도록 동참해야겠죠.김수성 : 저는 한국 교회의 예배가 너무 경건을 강조함으로써 교인의 즐거움을 금기시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진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 앞에 나오는 것 자체가 기쁨이 되어야 하고, 예배가 축제의 장으로 승화될 수 있도록 예배 순서 등을 적절하게 조절했으면 좋겠습니다.김길구 : 교회는 개인의 기쁨을 나눔으로써 공동체의 기쁨이 되도록 하라는 말과 같은 맥락이라고 봅니다. 이 책에서 좋은 예가 하나 나옵니다. 목사 청빙위원회 일원으로 참석했을 때, 계속해서 인간의 죄성(罪性)과 회개를 촉구하는 설교만 하는 분을 거부했다는 것입니다. 강단에 선 목회자는 희망과 쾌락도 충분히 전파해야 한다는 것입니다.김현호 : 그런 의미에서 저는 교회의 절기에 따른 설교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절기에 따라 회개와 기쁨, 의무와 희망 등 균형 잡힌 메시지를 골고루 전달할 수 있으니까요. #하나님 나라 확장이 궁극적인 즐거움김길구 : 저자는 일상의 쾌락을 이야기하면서도 쾌락에도 위계가 있음을 강조합니다. 즉, 맨 위에 계신 하나님을 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쾌락이 중요하기는 해도 가장 중요한 것은 아니다. 쾌락을 우리가 통제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쾌락이 우리를 통제하게 된다고 경고합니다.김수성 : 우리가 누려야 할 쾌락을 ‘거룩한 쾌락’이라고 이름붙인 이유가 거기에 있다고 봅니다. 절제하지 못하면 쾌락 자체가 우상이 된다는 것이지요.김현호 : 균형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일과 쉼, 놀이 사이에 적절한 균형을 유지할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쾌락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또한 쾌락을 책임감 있게 수용하라는 말도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쾌락의 중요성을 이야기합니다. 세속적으로 이야기하는 쾌락과의 차이가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김길구 : 위르겐 몰트만은 “우리는 자신이 얻은 구원을 신나게 놀이로 수용해야 한다”면서도 “해방된 사람들 안에는 부활절의 웃음과 십자가의 슬픔이 둘 다 살아있다”라는 말로 균형을 이야기했습니다. 이런 균형을 유지하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것이 우리에게 궁극적인 즐거움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음에는 일터신앙을 이야기한 치과의사 이철규의 《오늘을 그날처럼》(새물결플러스, 2017)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수고했습니다. [정리: 김수성] ◇ 같이 읽으면 좋은 책 《7일간의 기쁨 회복》 / 김창현 / 이레서원 《하나님을 기뻐하라》 / 존 파이퍼 / 생명의말씀사
    • 문화
    • 기독교 교양 읽기
    2017-07-10
  • [문화사역자를 소개합니다] MOVE - 무용선교단
    인간이 가진 가장 순수한 표현도구인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려고 하는 MOVE는 1982년 창단되어 지금까지 국내·외를 활발하게 사역을 하고 있는 전문무용선교단입니다. 전주애 선교사가 무용전공하는 학생들을 가르치며 자연스럽게 그 학생들과 작품을 만들고 그 작품을 선보이며 창단된 MOVE는 부산의 기독교계뿐만 아니라 일반 무용계에서도 독보적인 자취를 남겼습니다. 힙합이라는 장르가 아주 생소한 1990년대에 국내에 최초로 힙합댄스라는 장르를 통해 기독교인뿐아니라 비기독교인들에게도 복음을 전하는 귀한 도구로 사용되어졌으며, 당시 많은 CCM 사역자와 함께 조화를 이루는 무대예술형태로 많은 관심과 반향을 일으키며 부산기독문화계에 획기적인 전환점을 마련한 팀이기도 합니다. 2000년대 초반에 경산의 어느 군부대에 갔을 때, 찬양팀이 찬양으로 마음을 열고 MOVE 팀이 힙합댄스로 군인들의 마음을 불태웠으며, 이어지는 말씀으로 많은 젊은 군인들에게 복음을 전했던 그 순간들을 필자는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으며, 몸으로 찬양하며 복음을 전하는 것이 얼마나 효과적인지 절감하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무브(MOVE)가 지향하며 나아가는 방향은 mission, worship, convention으로, 국내뿐 아니라 국외에서도 활동하면서 다른 선교팀 및 교회 등과 연계하거나 단일팀으로 초청 공연을 하기도 합니다. 전주애 선교사는 “항상 우리가 3~4년 앞서나가고, 많은 이들에게 새로운 우리의 춤을 보급하자”면서 늘 새로운 것들을 배우고 세상 문화보다 더 앞서나가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 단체가 돕는 교회도 많이 있으며 자체적으로 교역자들도 파송하여 그 사역의 범위를 넓혀가고 있습니다. 한편 세계 각처의 선교사들을 위해 간단한 플래시몹을 개발, 보급하여 언어가 다른 곳에서 효과적으로 복음을 전하는 방향들을 제시하기도 하여 많은 효과를 보고 있습니다. 기독교인들 사이에서도 <모세 이야기>, <돌아온 탕자> 등의 스토리로 표현할 때 많은 감동을 받기도 하는 이 MOVE의 공연이 보다 많은 기독교인들에게 알려지고, 또한 복음을 전하는 일에 더욱 많이 사용되어지길 기도합니다. <부산,경남 기독문화 일정> 1. 노래하는 순례자 찬양팀 7월23일(주일)~24일(월) : 대연성결교회 중등부 수련회 찬양인도 2. 모인 김인희 집사(찬양사역자) 7월14일(금) BTWJ방송 ‘4분음표’ 보이는 라디오 · 3. 디아코노스(연극팀) 7월9일(주일) 오전9시 : 마산동부교회 7월17일(월) 오후1시 : 여량중학교 7월23일(주일) 오후2시 : 대연교회
    • 문화
    • 문화사역자
    2017-07-10
  • [문화] 최병학 목사의 문화펼치기 28 : 민주주의
    1. 6월 항쟁 30주년, ‘대한민국 4.0시대’의 개막 2017년 6월 10일은 1987년 6월 항쟁 30주년을 맞는 해이자, 2016년 부터 이어진 촛불혁명과 더해져 그 의미가 남달랐다. 문재인 대통령은 기념식 연설에서 “더 넓고 더 깊고 더 단단한 민주주의를 만들어가야 한다.”고 했는데, 어느덧 대한민국은 민주주의 수입국에서 419, 518, 610, 촛불혁명을 통해 민주주의의 수출국이 된 것이다. 그리고 이제 대한민국의 4.0시대가 개막했다. ‘대한민국 1.0’은 1945년 광복과 더불어 열렸고, 남북으로 갈라진 반쪽짜리였다. ‘대한민국 2.0’은 60년대 들어 시작된 압축성장의 ‘산업화 시대’와 그 뒤를 이은 민주화 시대까지이다. 김대중-노무현 정부까지로 볼 수 있다. 사실 산업화 시대의 압축성장의 폐해는 심각했다. 몸과 정신의 괴리는 컸고, 사람다운 가치는 실종이 되었으며 분열과 차별은 당연시 되었고 배려와 공감은 사라졌다. 형식주의, 학벌주의, 외모지상주의, 금전과 권세 지향주의로 인해 사회의 공공성은 크게 훼손되었다. 여기에 사대주의가 끼어들어 엘리트 중심주의까지 판을 치게 되었다. 물론 경제가 성장한 긍정적인 측면도 있다. 그리고 이후 민주화 시대를 통해 산업화 시대의 폐해가 사라지는 듯 했다. 권위가 해체되고, 지역감정이 유보되고, 사회의 공공성이 강화된 것이다. 그러나 ‘이명박근혜’의 ‘대한민국 3.0’이 되자, 다시 대한민국은 1.0때의 반쪽짜리와 2.0의 산업화 시대만이 강화되었다. 결국 “이게 나라냐?”며 외쳐온 광장의 촛불들이 새로운 세상을 만들었다. 그것이 바로 ‘대한민국 4.0’이다. ‘청년실업, 노인빈곤, 남녀-세대-지역-문화-이념 갈등’을 넘어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는 자존감의 회복이, 생명이 생명답게 존중받는 생명의 가치가 그 핵심이 될 것이다. 2. 민주주의와 기독교 민주주의(democracy)의 어원은 그리스어 demos(민중)와 kratos(지배)의 합성어이다. 즉 ‘민중에 의한 지배’라는 뜻으로, 한자어 민주(民主)가 그 뜻을 잘 드러낸다. ‘백성이 주인’이라는 뜻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근대 이전의 국가들은 대부분 왕정이나 귀족정의 형태를 가지고 있었다. 즉 집단을 다스리는 주체가, 다시 말하면 권력을 가진 사람이 1인, 혹은 극소수에 불과한 정치 형태가 일반적이었으나, 민주주의는 다스리는 집단과 다스림을 받는 집단이 일치하 는¹, ‘치자(治者)가 곧 피치자(被治者)’인 정치 형태이다. 이후 근대 시민 혁명기에 다수의 민중은 피지배 계급이 아닌 정치의 주체로 자리를 잡게 되는데, 시민, 즉 국민 스스로 국가의 정책 결정에 참여하는 정치 체제인 민주주의가 발전하게 되었고, 오늘날 대부분의 국가에서 보편적으로 적용되고 있다. 중요한 것은 지배 계급의 억압과 착취로 개개인의 ‘자유’와 ‘평등’이 침해되는 것을 최소화함으로써 ‘인간의 존엄성을 수호’하는 것이 민주주의의 궁극적인 목적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 의미로 610항쟁과 촛불혁명은 민주주의의 참 뜻을 잘 내포하고 있다. 오늘날 이 민주적이라는 말이 생활 속으로 확장이 되어 민주적이라는 말은 집단 내에서 ‘건전한 비판’과 ‘타협’이 이루어지며, 타인에 대한 ‘관용’ 정신이 잘 발휘되고 있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진다. 물론 다수결이라는 의사 결정 방식도 우리 생활 속의 민주적인 요소의 하나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민주주의의 궁극적인 목적인, ‘인간의 존엄성 수호, 자유, 평등’의 측면에서 본다면 기독교와 민주주의는 상관이 있는 듯 보인다.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셨다는 측면에서 인간 최고의 존엄성 실현이 성서이며, 자유와 평등의 문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셔서 ‘신을 배반할 수 있도록 하신 것’(?)이야말로 최고의 자유가 아니겠는가? 마찬가지로 평등은 구약 이스라엘 선민공동체와 신약의 교회 공동체의 기본 원리라고 할 수 있다. 성서야 말로 민주주의의 교과서인 것이다. 3. 이스라엘 평등공동체 원래 이스라엘은 지파들이 모인 동맹체로서 자율적 기능을 가진 지파들이 야훼종교라는 이름 아래 평등주의적으로 결합된, 사회-문화적 공동체이다. 이들은 이집트 등 고대근동의 제국주의적 지배와 가나안 땅의 봉건적 착취구조에 저항하는 민중의 혁명으로 시작되었다. 고대 근동의 촛불혁명이라고나 할까, 아무튼 이러한 이스라엘의 구성원이 되는 조건은 야훼종교의 제의, 의식, 도덕적 훈련, 이데올로기에 대한 헌신과 사회경제적 법률들에 반영된 경제적 평등주의의 실천 등이 가장 큰 요건이었다. 오늘날의 ‘경제민화화’보다 세련된 가치였던 것이다. 그리고 매 7년마다의 계약 갱신을 위한 축제 때, 모든 지파회의를 통해서 토지의 재분배가 이루어졌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토지의 주인은 야훼뿐임을 철저히 믿었기 때문이다. “토지는 하나님의 것이고 사람은 하나님에게 몸 붙여 사는 식객에 불과하다.”(레위기 25장23절) 땅의 주인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토지는 개인이 함부로 팔아넘길 수 없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거역하는 행위가 되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가장 포악한 폭군 아합 왕마저도 처음에는 한 시골 노인 나봇의 포도원을 사들일 수조차 없었다.(열왕기상 21장 참조) 부득이한 경우 땅을 팔 수는 있었으나 가까운 친척이 사주어야 하며, 그렇지 못할 경우 희년 때까지만 기다리면 자동적으로 원래의 소유자에게 소유권이 되돌아오도록 규정한다.(레위기 25장) 민주적 평등공동체의 규현인 것이다. 또한 50년째마다 돌아오는 희년은 잉여재산을 상속하여 대를 이어 부가 집중되는 것을 막는 사회적 제도이다. 이스라엘은 이렇게 이중, 삼중적 토지제도를 통하여 사회의 부가 몇몇 사람에게 집중되는 것을 막았으며, 이것을 어기는 것을 야훼 하나님께 대한 반역으로 생각하여 엄격한 금기사항으로 여겼다. 이스라엘은 다시 말하면 하나님 앞에 평등한 공동체의 삶을 살도록 제도적으로 규정하고 보완한 신정국가라고 할 수 있다. 고대 근동의 다른 국가처럼 인간인 왕이 아니라, 야훼 하나님만이 이스라엘의 통치자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정착한 팔레스틴 땅은 왕을 중심으로 한 계급적 사회였으며 경제적 불평등의 사회였다. 게다가 해양민족인 블레셋(오늘날 팔레스틴 사람인)이 팔레스틴 지방에 최초로 철기문화를 들여와, 발달된 무기로 끊임없이 이스라엘 평등사회를 괴롭혔다. 내우외환(內憂外患)이라고, 이스라엘 지파 내부에서도 분쟁이 생긴다. 사사기 21장에 보면 가장 작은 지파인 베냐민 지파와 나머지 지파들과의 전쟁 이야기가 나오는데, 지파간의 이해관계에서 갈등이 생긴 것이다. 우리식으로 말하면 지역감정이 생긴 것이다. 그리고 이 지역감정은 그 지역 내부에 빈부격차는 물론 계급착취가 존재하는 상황에서 지파간 연대의식은 사라지고, 따라서 200년이나 생명을 유지해온 이 믿을 수 없는 민주적 평등공동체는 그 막을 내리게 된다. 그 결과 왕정이 성립이 된다. 4. 제한된 왕권: 사울 왕의 경우 그러나 이스라엘의 왕권은 주변국의 왕권과 상당히 달랐다. ‘제한된 왕권’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스라엘의 왕은 예언자에 의해 임명되었고 또한 폐위당하기도 하였다. 고대근동에서는 왕권이 세습에 의해 승계되는 것을 그 특징으로 하고 있지만, 이스라엘은 왕을 임명하고 폐위시키는 권한을 민중전통의 최후 보류인 야훼종교의 지도자에게 부여함으로 왕권이 절대권력이 되는 것을 제한하였다. 또한 왕의 권한은 군사적 임무로 제한되어 있었다. 따라서 이스라엘 초대 왕인 사울은 왕이라기보다는 블레셋에 대항하기 위한 군사적 총사령관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전쟁 선포도 왕의 권한이 아니라 종교지도자의 권한이었다. 그리고 왕의 통치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법에 근거해야 했다. 고대 근동의 왕들은 자기 자신이 입법자이기 때문에 왕의 통치 근거는 자신에게 있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법제정의 권한을 철저하게 야훼 하나님께 돌린다. 그리고 왕 역시 법아래 있는 존재로, 법을 두루마리에 베껴 항상 왕의 옆에 두고 읽고 그것을 실천해야 했다. 제한된 왕권을 통해 백성이 주인이 되는 사회를 만들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다윗을 통해 변질된다. 그나마 민주적인 평등공동체가 다윗으로 인해 왕의 지배를 받는 체제로 변질된 것이다. 5. 강화된 왕권: 다윗 왕의 경우 다윗은 사울 밑에 장군으로 있었는데, 골리앗 사건을 통해 출세를 한다. 권력욕이 있었던 다윗은 개인적인 목적으로 용병을 고용하여 사병 조직을 키웠다. 군내 사조직인 것이다. 이스라엘판 ‘하나회’, 혹은 ‘일자회’, ‘독사회’라고 할 수 있다. 원래 이스라엘 지파동맹체는 지파별 징병제도에 의해 운영되었기에 다윗의 개인 용병조직은 이스라엘에 낯선 것이었다. 아무튼 이렇게 권력욕에 취한 다윗이 사울에 의해 쫓기게 되자, 자신의 사병조직을 이끌고 적국인 블레셋의 성읍인 갓의 왕 아키스에게로 넘어가 무엇이든지 하겠다고 한다. 일제 시대에 일본에 충성을 서약한 것과 똑같다. 그러자 블레셋의 왕은 다윗에게 시글락이란 성읍을 다스리도록 내준다. 그런데, 이러한 다윗 주변에 사울 체제에서 소외당한 사람들이 모이게 된다. 그 유명한 아둘람 굴이다. 어떤 이는 이를 『수호지』의 ‘양산박’으로 비유하는데, 환란당한 자, 빚진 자, 원통한 자들이 모여서 그렇다는 것이다. 그러나 블레셋으로 망명한 다윗 주변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는 것은 이들이 사울체제에서 소외된 사람들이긴 했으나, 분명한 역사의식은 가지지 못한 민중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평등 공동체에 대한 애정도 없고, 단지 이기적인 목적을 달성하려는 의도로 다윗 주변에 모여들었던 것이다. 이렇게 힘을 가진 다윗은 막강한 군사력으로 헤브론을 장악하고 사유화했으며 자신의 사유지를 중심으로 마침내 유다지파의 왕으로 등극한다. 일종의 쿠데타이다. 이스라엘 지파동맹 체제에 대한 도전이며 반역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에 가만히 보면, 블레셋도 동의한다. 왜냐하면 다윗은 블레셋의 봉신이었기 때문에 블레셋의 승인 없이 다윗이 그러한 조치를 취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블레셋의 정책이 ‘분할하여 지배’하는 정책이기에, 이스라엘이 분단되는 것을 좋게 보았기 때문이다. 오늘날 한반도 주변 4대 강대국의 남북분할 정책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아무튼 다윗이 유다지파의 왕이 된지 7년 반의 세월이 지난후, 마침 사울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 지파동맹체의 지도자가 된 이스보셋과 그의 장군 아브넬 사이에 내분이 일어난다. 다윗은 내분을 틈타 아브넬을 꾀어 협상하는 척하다가 부하 요압장군의 손을 빌어 아브넬을 살해한다. 곧 이어 이스보셋도 원인 모를 자객에 의해 죽임을 당하게 된다. 성서는 표면상 아브넬과 이스보셋의 죽음에 대해 다윗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진행된 일임을 강조하는 듯 보이지만, 실제 사울의 친척이었던 시므이가 다윗에게 퍼부은 욕설에 따르면, 이스라엘 민중들은 피의 숙청과 폭력에 의해 통일 이스라엘의 왕이 된 다윗의 정당성을 의심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무엘하 16:8-9절에 시므이의 말이 잘 나와 있다. “꺼져라! 이 살인자야, 껴져라! 이 불한당 같은 놈아, 사울 일족을 죽이고 나라를 빼앗은 놈, 그 원수를 갚으시려고 이제 야훼께서 이 나라를 네 손에서 빼앗아 네 아들 압살롬의 손에 넘겨주신 것이다. 이 살인자야, 네가 이제 죄 없는 사람 죽인 죄를 받는 줄이나 알아라.” 그러나 민중들의 불만에도 불구하고, 북왕국의 장로들은 다윗의 힘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10.26 이후 전두환 장군의 위세와 같은 것이다. 더욱이 블레셋을 비롯한 외세의 위협이 극심한 상황에서 오랫동안 권력의 공백기를 겪을 수는 없었다. 따라서 다윗의 탁월한 군사적 지도력을 인정하여 계약을 체결한다. 다윗을 전체 이스라엘의 왕으로 옹립하게 되는 것이다. 이스라엘 평등 공동체가, 어쩌면 성서의 민주주의 전통이 다윗이라는 인물을 통해 무너지고 만 것이다. (이상의 다윗에 관한 ‘신명기 사가’의 관점은 ‘역대기 사가’의 관점에서는 180도 달라진다. 다윗의 장점만 부각시키는 것이다. 포로기 이후 고향에 돌아와 이스라엘 공동체를 재건해야할 역대기 사가의 관점에서 다윗-솔로몬 시대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6. 초대 교회 공동체의 대안 왕을 세워 왕을 통한 민족의 부강을 바랐으나, 세상의 왕이 이스라엘을 올바르게 다스릴 수 없다는 사실에 구약의 예언자(특히, 이사야)들은 메시야를 요청한다.² 그리고 그 메시야가 오셔서 성령을 통하여 새로운 민주적 평등 공동체를 세우는데, 그것이 바로 초대 교회 공동체이다. 사도행전 2장 44-47에 보면 초대 교회 민주적 평등 공동체의 모습이 잘 나와 있다. “믿는 사람은 모두 함께 지내며 그들의 모든 것을 공동 소유로 내어놓고 재산과 물건을 팔아서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만큼 나누어주었다. 그리고 한마음이 되어 날마다 열심히 성전에 모였으며 집집마다 돌아가며 같이 빵을 나누고 순수한 마음으로 기쁘게 음식을 함께 먹으며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이것을 보고 모든 사람이 그들을 우러러보게 되었다. 주께서는 구원받을 사람을 날마다 늘려주셔서 신도의 모임이 커갔다.” 역사상 현존했던 가장 아름다운 민주적이고 개방적인 공동체였다. 그러나 이후 기독교의 역사에서는 그렇지가 못했다. 기독교가 주류종교가 되면서, 권력에 봉사하거나, 스스로 권력으로 군림하는 지배이데올로기로 전락하고 말았던 것이다. 로마의 국교로 전락이 되면서 기독교가 제 힘을 잃어버린 것이다. 예수 믿으려면 목숨을 걸고 믿어야 되는데, 이제는 속된 말로, ‘개나, 소나’ 다 예수를 믿으니 타락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스라엘 평등공동체가 다윗-솔로몬이라는 왕정 체제에 의해 이념의 변질을 겪은 것처럼, 교회사에 있어서도 기독교의 원형이 굴절 된 것이다. 올해가 종교개혁 500주년이기도 하지만, 아드 폰테스(ad fontes) 곧 ‘근본으로 돌아가야’할 것이다. 그리고 그 근본은 정치적 민주, 사상적 자유, 공동체의 평등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 (각주) 1) 예외적으로 고대 그리스의 도시 국가인 아테네에서는 시민 전체가 참여하여 중요한 일을 결정하는 민회라는 의사 결정 기구가 존재했었는데, 그 민회에서 추첨제나 윤번제를 통하여 모든 시민이 공직에 나아갈 수 있었다. 오늘날의 민주주의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지만, 아테네에서 시민이란 성인 남자 자유민만을 의미하는 특수 계급으로, 여성, 노예, 외국인이 제외되었다는 점에서 제한적인 형태의 민주주의였다. 2)“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자금 이후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이사야 9:6) 최 병학 목사 (남부산용호교회 담임) *이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문화
    • 문화펼치기
    2017-06-26
  • [문화사역자를 소개합니다] 예수님만을 노래하고 싶은 소프라노 – 김후란
    지난 6월12일 오후7시, 대동교회에서 열린 기독문화연대 세미나의 오프닝 시간에 소프라노 김후란의 특별한 찬양이 있었습니다, 우아한 검정색 연주복을 차려입고 무대에 선 김후란은 보기드문 성량과 목소리로 <유 레이즈 미 업>, <나를 받으옵소서> 등을 발표하여 이 자라에 모인 많은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하였습니다. 소프라노 김후란은 부산이 자랑할만한 하나님을 깊이있게 찬양하는 사람입니다. 2000년대 초반에 경성대학교에서 성악을 전공한 김후란은 성악과는 많이 다른 R&B 라는 장르를 가지고 부산의 찬양사역분야에 등장을 하였습니다. 당시에 많은 젊은 찬양사역자들이 많이 있었으나 R&B장르의 사역자는 거의 없었던 시대상황이어서 큰 반향과 주목을 받으며 많은 젊은이들의 호응을 얻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음악적 실력이 너무 뛰어나 많은 팀들의 음반작업에 솔리스트로 동참하기도 하였고, <UP SET> 이라는 기독교밴드팀의 리더싱어로서 활동하면서 그 사역을 넗혀가기 시작하였습니다. 하지만 문화적으로 많이 보수적인 부산에서 R&B 장르를 이해하기 보다는 어색해 하는 부분들이 많았고, 성악을 하는 다른 분들의 따가운 시선을 이겨내야 하는 어려운 상황에서 결국은 R&B장르를 포기하고 성악가의 길로 돌아갔습니다. 이후 사회적으로는 인정을 많이 받아 부산의 큰 행사에 초대받아 노래부르기도 하고, 서울과 부산을 오가면서 성악가로서 입지를 다져나갔습니다. 하지만 부산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싶은 마음을 계속 간직한 김후란은 몇년전부터 <부산사모횃불합창단>을 지휘하며 자신의 기량을 하나님을 위해 다시 사용하기 시작하였고, 2006년부터 자비를 들여 <클래식음악연주단>을 만들어 부산지역에 좋은 음악공연을 선사하는 활동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제 다시 자신의 전공을 살려 R&B CCM가수 김후란이 아닌, 하나님만을 찬양하고 싶은 소프라노 김후란으로 새로 태어나 그 사역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교회에는 클래식을 전공한 많은 음악인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들이 주로 활동하는 무대는 교회밖입니다. 이제 소프라노 김후란과 같이 교회의 지원과 관심속에 많은 클래식을 연주하는 음악인들이 교회안에서 주님을 마음껏 찬양하는 일들이 많아지기를 소원합니다. <부산,경남 기독문화 일정> 1. 노래하는 순례자 찬양팀 6월25일(주일) 오후2시 : (울산)동산교회 7월2일(주일) 오전10시 : (김해)은현교회 총동원전도주일 7월2일(주일) 오후6시 : (경산)수송교육대 위문전도집회 2. 창작 뮤지컬 <길> - 성산 장기려 6월25일(주일) 오후5시 : 동래문화회관 대극장 3. 그리스도의 편지 찬양팀 6월25일(주일) 오전11시 : 태종대군인교회 7월2일 (주일) 오후3시30분 : 열린교회 4. 모인 김인희 집사(찬양사역자) 7월7일(금) 오후7시 : (통영)장평교회 찬양콘서트 7월14일(금) BTWJ방송 ‘4분음표’ 보이는 라디오 게스트 5. 디아코노스(연극팀) 7월9일(주일) 오전9시 : 마산동부교회
    • 문화
    • 문화사역자
    2017-06-26
  • [기독교 교양 읽기 27] 교회는 모두 비슷한 죄인들이 모인 곳이기에 서로 위로하고 곁길로 빠지지 않게 도와줘야
    교회 공동체는 가족과 닮았다 120쪽밖에 안 되는 얇은 책이다. 책 크기도 작다. 그런데 알차다. 내용도 옹골지고 필력도 뛰어나다.저자는 자신의 어린 시절 교회 이야기를 하며 교회와 교인들의 문제점을 드러낸다. 어렸을 때는 “교회는 파도가 넘실대는 거친 세상에서 나를 싣고 가는 구명보트”라고 생각했는데, 돌아보니 “우리는 은혜를 말하면서 율법으로 살았고, 사랑을 말하면서 미움을 흘렸다”고 회고한다. 그러면서 “전에 나는 비판적인 소비자 정신으로 교회를 대했고, 예배를 공연으로 보았다.” 하지만 “교회에서는 하나님이 예배의 관객”이시므로, “예배를 마치고 떠날 때 우리가 해야 할 질문은 ‘하나님이 기뻐하셨는가?’이다”라고 강조한다. 그리고 “교회로 다시 돌아오는 순례 여정에서 나는 교회의 역할이 중요한 정도가 아니라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배웠다”고 고백한다.이어서 ‘라살 스트리트 교회’에서 지역사회를 섬기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배웠고, ‘익명의 알코올 중독자 모임’에서 겸손과 절대 정직, 절대 의존의 필요성을 배웠다고 이야기한다. 그다지 필요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복음이 줄게 별로 없기 때문이다. 또한 교회 공동체는 가족과 같고, 통일성과 다양성이 균형을 이루는 곳이어야 한다며, 사역자가 현장에서 사역하는 중에 절망하지 않기 위해서는 무모한 책임감에서 벗어나 평온함을 유지해야 함도 강조한다.◈ 《교회, 나의 고민 나의 사랑》 || 필립 얀시는 영미권 최고의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복음주의를 대표하는 지성인이다. 저서로 《그들이 나를 살렸네》 등이 있다. 원제 Church: Why bother?(1998). IVP, 2010. 8,000원. ▌좌담: 김길구 전 부산YMCA 사무총장, 김수성 경성대 초빙외래교수, 김현호 기쁨의집 기독교서점 대표 저자 필립 얀시는 ‘나의 교회 방랑기’로 글을 시작한다. 순례 여정을 되돌아보면서, 자기와 교회 사이를 가로막은 장벽이 무엇인지 하나씩 찾아냈다. 첫째는 위선이었다고 고백한다. ‘교인이 다 나 같다면 교회가 어떻게 될까?’ 문득 이런 의문이 들었다고 한다. # 읽고서 ‘참 아름다운 책’이라는 느낌 김길구 : 이 책을 열면 첫머리에 의미심장한 저자의 인사말이 나옵니다. “전 세계적인 규모와 역동성을 자랑하는 한국교회에도 … 교회에 대한 회의에 빠진 젊은이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굳이 교회라는 조직에 소속될 필요가 있을까?’ ‘종교 없이도 영적인 삶은 살 수 있는 거 아닌가?’…”김현호 : 이 책은 우리나라에서는 2000년 1월에 출판되었습니다. 저는 그 다음해에 읽었는데, 상당한 도움을 받았습니다. 당시 저는 교회와 목회자들에 대한 실망으로 힘겨운 시간을 보낼 때였습니다. 저자의 솔직하고 속 깊은 이야기를 접하면서 교회를 다시 애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김수성 : 저는 읽으면서 ‘참 아름다운 책이다’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저자의 필력도 대단하지만, 그가 교회를 바라보는 시각이 너무도 따뜻했습니다. 좀 더 열심히 교회에 나가야겠다는 생각이 들게 하였습니다. 문제는 교회가 아니라 바로 ‘나’에게 있다는 것을 알게 해주었습니다.김길구 : “기독교는 삶이 수반되는 종교이며, 그 삶은 오직 공동체 안에서만 가능하다”는 말에 전적으로 동감하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공동체의 삶이 먼저 이루어지면 갈등 해결이나 평화가 더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수 있다는 스캇 펫의 말도 같은 의미이죠.김수성 : 저자가 언급했듯이, 전에는 비판적인 소비자 의식으로 교회를 대했고, 예배를 하나의 공연으로 본 것 같습니다. 그러니 불편하고 부족한 점만 눈에 띌 수밖에 없었죠.김현호 : 사실 오늘날 우리 한국교회의 모습이 통제된 환경과 경직된 문화, 정죄만 가득한 것으로 비쳐질 때가 적지 않습니다. 그러니 젊은이들에게는 숨이 콱 막힐 정도죠. 어디서도 진정성을 찾아보기 힘들다는 느낌에서 벗어나지 못해서 결국 ‘가나안 신자’로 교회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 같습니다.김길구 : 교회에서는 하나님이 예배의 관객이라는 말에 동감합니다. 그래서 예배를 마치고 나올 때, 우리가 무엇을 얻었는가가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할 예배를 드렸는가’를 돌이켜보아야 한다고 지적합니다. 초대교회가 국적, 인종, 계급, 나이, 성별을 초월해서 모였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기에 저자는 교회 공동체는 가족에 가깝다고 지적합니다. #교회가 공동체로서의 역할 감당해야김현호 : 저자가 소개한 러셀 스트리트 교회의 모습에서 그런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은 물론이고 노숙자들, 언제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를 사람들과도 함께 예배드리는 교회. 성찬식을 위해 기도하는 목사를 향해 럭비공을 던진 남자도 안고 가는 그런 교회입니다.김길구 : 헨리 나우헨이 공동체를 가리켜 ‘가장 함께 살기 싫은 사람들이 반드시 살고 있는 곳’이라고 정의한 것과 맥을 같이 하는 것 같습니다. 중요한 것은 교회 구성원 모두가 이런 공동체 정신으로 서로를 섬기고, 지역사회를 섬기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김현호 : 교회는 거름과 같다는 비유는 적절한 것 같습니다. 거름은 쌓아두면 온 동네에 악취를 풍기지만, 골고루 잘 뿌려주면 세상을 풍요롭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자는 교회의 성패를 가르는 중요한 요인 중 하나는 자원봉사라고 강조합니다.김수성 : 그 부분에서 문득 보카치오의 《데카메론》 첫날 둘째 이야기가 생각납디다. 한 유대인이 로마 교황청에 가서 그들의 부정부패를 보고서 오히려 기독교로 개종하고자 합니다. 그들의 부패한 모습에도 불구하고 신자가 더 불어나고, 성령이 더 찬연히 빛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교회 공동체가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잘 이야기하는 것 같습니다.김길구 : 유진 피터슨의 말처럼 교회에는 신비로움과 함께 어수선함도 대등하게 공존하는 것 같습니다. 오히려 이런 어수선함이 더 교회다운 모습이 아닐까요? 다 같은 죄인들이 모였기에 서로서로 위로하고 곁길로 빠지지 않도록 도와줄 수 있을 것입니다.김현호 : 교회 공동체의 참모습은 교우들이 사회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상처입고 무리로부터 배척당하는 영혼들을 감싸 안고자 노력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자기도 그러한 상처를 가지고 왔지만 서로를 생각하고 아껴주는 가운데 스스로도 치유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김수성 : 이 책을 가나안 신자들이나 교회와 자꾸 멀어지는 사람들에게 선물하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교회를 바라보는 시선이 조금씩 달라짐을 느낄 것 같습니다. 그리고 교회에서 선교훈련 못지않게 공동체훈련에 관심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김현호 : 사실 교회 구성원 상당수가 따뜻한 배려와 보살핌, 그리고 적절한 교육과 훈련을 통해 어른이 된 것이 아닙니다. 그냥 부딪치며 살다보니 어른이 된 것이지요. 당연히 세련되지 못하고 투박합니다. 자칫 상처를 받으면 교회를 벗어나려고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교회가 공동체로서의 역할을 감당해야만 가나안 신자도 줄일 수 있을 것입니다. #사역자들에게 충전할 기회 제공해야김길구 : 이 책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상처 입은 치유자가 치명상을 입지 쓰러지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라는 이야기도 의미심장합니다. 실제로 우리 주위에서 남의 아픔에 헌신하다가 오히려 자기가 축나서 중도에 포기하는 사례를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김현호 : ‘구세주 콤플렉스’에 빠져서는 안 된다고 경고합니다. 사람 자신을 먼저 생각해야 하는데, 그 사람의 고통을 다 떠맡으려는 증상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오히려 그 고통을 치유하려는 강박감에 시달리는 현상이지요. 김수성 : 존 던이 했던 말인데, 책 가운데 아주 명쾌한 말이 나옵디다. “다른 사람들의 십자가는 내 십자가가 아니다.”김길구 : 사역자들도 가끔은 값비싼 외식이나 음악회 등 ‘호강’을 누려야 한다고 지적합니다. 계속되는 고생과 외적 억압에서 벗어나 새로운 힘을 얻는 기회를 마련해야만 다시 일선에서 일할 수 있다는 주장이지요.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이러한 것을 잘못된 것으로만 치부하는 교인들의 시각도 바뀌어야 할 것입니다.김현호 : 이제 교회도 병원과 같이 영혼이 병들고 아픈 환자들이 득실대는 곳이라고 인식해야 합니다. 그곳에서 서로 위로하고 위안을 받으면서 위를 올려다보고 주위를 둘러봐야 할 것입니다.김수성 : 이 책 결론 부분에, 교회가 실패하고 과오를 범하는 이유는 바로 하나님의 영광에 미달할 수밖에 없는 인간들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고, 그것이 하나님이 감행하신 모험이라는 말이 강하게 와 닿더군요.김길구 오늘은 상당히 책에 충실하게 이야기를 나눈 것 같습니다. 다른 분에게 적극 권하고 싶은 책이라는 마음이 간절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다음에는 게리 토마스의 《쾌락, 하나님이 주신 순전한 즐거움》(CUP, 2012)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수고했습니다. [정리: 김수성] ▲ 교회 공동체는 하나의 기관이라기보다는 가족에 더 가깝다. 그렇기에 서로를 감싸주고 안아주는 곳이어야 한다. [Church-Self-Portrait. 출처: annaflowers.org] ◇ 같이 읽으면 좋은 책 《세상을 위한 교회, 세이비어 이야기》 / 엘리자베스 오코너 / IVP 《교회를 꿈꾼다》 / 김형국 / 포이에마
    • 문화
    • 기독교 교양 읽기
    2017-06-12
  • [문화사역자를 소개합니다] 드럼도 치고, 만화로 복음을 전하는 강신영 목사
    노래하는순례자찬양단이 집회장소에 도착했습니다. 악기를 나르던 키 작은 대머리 아저씨가 드럼에 가서 앉습니다. 신선한 충격입니까? 집회 중간에 율동시간에 나와서 율동을 인도합니다. 유아교육 전공자라서 잘 합니다. 충격이 크지요? 그런데 찬양단원이 이 분을 부를 때 ‘교수님’이라고 부릅니다. 대학에서 강의를 한답니다. 나중에 듣고 보니 웹툰 작가랍니다. 이렇게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캐릭터가 강신영 목사입니다. 목사님은 만화작가입니다. 처음에는 근육맨들이 나와서 치고받고 총 쏘고 부수는 만화를 그렸는데 나중에 자녀에게 보여주기도 꺼려지는 그림들이라 생각하니 더 이상 필요가 없어 그렸던 그림들을 다 모아 한 뼘 정도 되는 두께의 뭉치를 미련 없이 버렸습니다. 그러고 나니 마침 고교SFC알돌지에서 연재요청이 들어왔습니다. 저학년용 어린이매일성경에도 만화를 올렸었습니다. 갓피플닷컴에는 2000년부터 바이블카툰 코너를 연재중입니다. 작년부터 업데이트가 조금 뜸해졌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내용에 대한 책임감만 커지고 마음만 분주하여 잘 못 올리고 있지만 독자들께 죄송한 마음을 항상 가지고 있으니 조만간 그림으로 보답하겠다고 합니다. 또한 목사님은 드러머이기도 합니다. 노래하는 순례자 음악선교단 활동은 이동석 집사의 권유로 십여 년 했습니다. 열정과 기쁨으로 전국 곳곳의 크고 작은 집회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던 중에 친구가 하나 결신하고 세례를 받게 되었다기에 기뻐서 축하를 해주려고 보니 축하할 곡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6:3-4, 14의 말씀으로 세례축가를 썼습니다. 노래하는 순례자 음악선교단 2집 음반 ‘주님의 자녀’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지금은 목회를 하느라 찬양집회를 하러 같이 다니지는 못합니다. 뒤늦게 신학을 공부해서 기장에 있는 내리교회를 섬기고 있습니다. 미혹 많은 시대에 성경 잘 가르치고, 교리 바르게 가르치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유아교육을 전공했기에 대학에서 강의도 한동안 했었고, 유아 멀티미디어 교육, 교수매체, 교수방법에 관심이 많아 지금도 교육관련 강의나 상담은 가끔씩 하고 있습니다. 교육 관련 삽화도 종종 그렸고, 지금은 고신대학교 유아교육과에서 발행하는 아이사랑 지에 칼럼과 삽화를 올리고 있습니다. 이처럼 다방면에서 여러 모양으로 쓰임 받아서 앞으로도 좋은 열매 많이 맺기를 바랍니다. <강신영 목사 작품>
    • 문화
    • 문화사역자
    2017-06-12
  • [문화] 최병학 목사의 문화펼치기 27 - 노인
    일찍이 철학자 니체(F. W. Nietzsche)는 역사를 세 종류로 정리한 바 있다. 과거에 매달리는 ‘골동품적인 역사’, 미래의 비전을 정치적으로 고취시키는 ‘기념비적인 역사’, 그리고 마지막으로 ‘운명을 사랑(Amor Fati)’하는 마음으로 현재의 삶을 끌어안으려는 ‘비판적인 역사’이다. 여기서 니체는 골동품적 역사를 비판하는데, 그것은 과거의 회상에만 매달려 지금 살아 있는 삶, 뛰는 심장과 흐르는 피, 대지와 자연에 맞서는, 거친 살결 속에 있는 주름의 의미를 가진, 현재 우리 인간의 주체적 삶을 황폐하게 만들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1. 디멘티아(치매), 마음이 없는 상태 모든 사람은 늙는다. 이처럼 인생의 마지막 단계에 거쳐야 하는 자연스러운 퇴화 과정인 노망(老妄)은 노망(老忘)이다. 곧 늙어가면서 ‘잊는 것’이다. 사실 노인성 치매(dementia)의 라틴어 어원은 ‘마음이 없는 상태, de(without)+mens(mind)이다. 나이들어 늙으면 아기가 된다는 말도 같은 맥락이다. 사람들은 늙어가면서 기억의 망각과 신체 기능의 퇴화를 필연적 현상이자,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이제 치매는 질병의 하나로 생각되었다. 곧, 노망은 ‘과정과 현상’에 대한 표현이나, 치매는 ‘비정상과 치료’의 대상으로, 의학적 개입이 필요한 것으로 변했다. 한국 사회가 노령화 사회로 접어들면서, 가족 해체의 시대에 노망든 노인을 더 이상 가족이 감당하기 어렵게 되었기에 이제 ‘자연스러운 노망의 단계(기억의 망각 현상과 퇴화 현상)’를 ‘치료의 과정인 치매(공포를 동반하는 질병 현상)’로 호명하여, 대한민국의 어르신들은 그 말년이 상품화, 물화 되어버렸다. 노망과 망령든 노인은, 가족에게 귀찮고 돌보기 힘든 존재이지만, 그렇다고 병리적 존재인 환자는 아니다. 그러나 여기, 잊는 것을 잊어버린 이들이 있다. 2. 의인이며 동시에 죄인 19대 대선의 투표 결과로도 알 수 있지만 대한민국은 산업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 곧 보수와 진보 두 진영으로 확연하게 나뉘어져 있다. 이것은 정치적 분립을 넘어서는 문화적, 철학적, 나아가 신학적(신앙적) 대립을 내포한다. 삶에 임하는 자세, 타인과 관계를 맺는 방식, 개인과 국가의 관계에 대한 견해, 그리고 한국현대사에 대한 인식, 신과 종교의 의미 등 모든 면에서 두 진영은 서로 다르다. 유시민 작가의 『나의 한국현대사: 1959~2014, 55년의 기록』 (돌베개, 2014)는 산업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의 대립으로 한국현대사를 바라보는데, 사실 이 두 진영은 지금 역사 전쟁을 벌인다. 역사교과서 국정화 논쟁이 바로 그 최전선이다. 5·16을 기반으로 하는 산업화 세력은 한국 사회 모든 영역의 상층부를 장악한 채 단단하게 결속되어 있다. 거대 재벌, 대기업 경영자와 임원들, 저마다 종편방송을 거느린 거대신문 사주와 고위 간부들, 법원과 검찰, 군대와 경찰 등 합법적 국가폭력을 관리하고 집행하는 권력기관의 고위인사들, 그 신문과 방송에 출연하면서 부와 명성을 얻는 지식인들, 그리고 그 모두를 정치적으로 대표하는 새누리당이다(지금은 자유한국당). 그들은 자신들을 ‘근대화세력’, ‘산업화세력’, ‘보수세력’, ‘애국세력’으로 자처하지만 정치적 반대 진영에서는 ‘유신잔당’, ‘5공 잔재세력’, ‘특권세력’, ‘냉전세력’, 또는 ‘수구꼴통’이라고 부른다. 종교적으로는 강남기독교, 영남불교, 혹은 ‘종교적 근본주의자’들이다. 이들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지금까지 대한민국의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종교적 권력을 모두 장악하고 행사해왔다. 반면, 4·19와 5·18, 6월 항쟁을 잇는 이들을 민주화 세력이라고 할 수 있다. 스스로 ‘민주화세력’, ‘양심세력’, ‘진보세력’을 자처하지만 반대 진영에서는 ‘빨갱이’, ‘좌경용공’, ‘종북좌파’라고 불려지는 이 세력은 한국 사회 모든 영역의 낮은 곳에 흩어져 있다. 인권과 사회정의, 한반도 평화와 환경보호를 실현하려고 애쓰는 수많은 시민단체들, 노동조합, 협동조합, 언론운동단체를 포함하는 크고 작은 공동체들이다. 그들은 주로 온라인에서 소통하며 가끔 오프라인에서도 대규모로 결집해 대형 이벤트를 만들어낸다. 그들 중에 자기가 일하는 분야에서 권력과 돈을 가진 사람들은 별로 없다. 지속적으로 연대하거나 물질적 이익을 주고받지도 않는다. 오히려 자기네들끼리 심하게 다툰다. “보수는 부패로 망하고, 진보는 분열로 망한다.”라는 말은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나온다. 그리고 이러한 민주화 세력이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딱 10년 동안 정치권력 하나만을 장악한 적이 있다. 바로 김대중-노무현 정부 때이다. 그러나 경제권력과 언론권력 등 사회의 다른 모든 권력은 언제나 산업화 세력의 수중에 있었다. 아무튼 한국 현대사는 이 두 세력의 분투와 경쟁의 기록이다. 때로는 피가 강물처럼 흘렀던 싸움이 있었고, 이번 대선으로 끝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아직 그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가까운 미래에 종결될 가능성도 없어 보인다. 왜냐하면 국민들이 둘 모두를 인정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서로 적대적인 두 세력과 그들이 대표하는 두 시대를 모두 인정하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유시민 작가는 가능하다고 말한다. “나는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산업화시대와 민주화시대는 모두 우리의 과거다. 대한민국은 박정희의 시대와 김대중, 노무현의 시대를 거쳐 여기까지 왔다. 둘 중 하나만을 긍정한다면 역사와 현실의 절반을 부정해야 한다. 이것이 온전한 역사인식과 현실인식일 수는 없다. 색깔과 모양이 크게 다른 두 시대는 국민들의 내면에 이미 자리를 잡고 있다.” 사실 우리의 현대사가 ‘영광과 승리의 역사’라는 보수의 주장과 ‘불의와 오욕의 역사’라는 진보의 주장은 둘 다 옳다. 하지만 절반만 옳을 뿐이다. 교회사도 마찬가지이다. 분열된 것 자체가 가슴 아프지만, 이것도 교회의 역사이고, 때로는 하나 되기 위해 힘썼는데, 이것도 교회의 역사이다. 사람들은 대한민국을 ‘흉하면서 아름다운 나라’, ‘부끄러움과 분노, 긍지와 설렘’처럼 상충하는 감정을 동시에 느낀다. 역사도 마찬가지, 빛과 어둠이 공존하는 것이다. 인간 자체가 둘 모두를 가진 존재이기에, 역사도 마찬가지이다. 칭찬해야할 할 빛이 있고, 그 빛으로 인해 차츰 사라져갈 어둠이 있기에, 민족의 역사도 우리들의 인생도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것이다. 내 안에 아벨과 가인을 모두 가진 모습, 사도 바울도 로마서 7장 19절에서 이렇게 말한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의인이며 동시에 죄인(simul justus et peccator)’이라는 루터의 고백도 여기서 그리 멀지 않다. 중요한 것은 이처럼 모순된 존재에 대한 인식과 사랑, 그리고 모순된 존재들이 만들어가는 불완전한 사회와 세상을 정말 고민하며 읽어내고 대화와 소통으로 펼쳐나가는 것이다. 힘들고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포기하면 사람이 사람답게 존중받는 그런 세상은 결코 열리지 않을 것이다. 시지푸스가 다시 무의미한 바위를 굴려 올리기 위해 저 언덕 아래로 내려가며 신발끈을 조여 매듯이, 지금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그러한 인내일 것이다. 3. 노인+애국자=태극기 부대? 마크 트웨인은 ‘애국자란 자신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가장 큰 소리로 떠드는 사람들’이라고 한다. 오스카 와일드 역시 ‘애국심은 사악한 자의 미덕’이라고 말한다. 18세기의 문필가인 사무엘 존슨은 ‘애국심은 악당의 마지막 피난처’라고 말하며 미국의 문필가이자 환경운동가인 에드워드 애비는 “애국자는 정부에 맞서 자신의 나라를 지킬 준비가 돼 있어야 한다.”라고 말한다. 지난 몇 달 간, 국민이 정부로부터 나라를 걱정하며 지켜야했던 이 대한민국에서 애국심과 애국자라는 기표가 태극기를 타고, 유령처럼 떠돌고 있다. 그리고 그 유령의 실체는 노인들, 곧 어르신들이었다. ▲ 3월 1일 종로 도심을 메웠던 태극기집회 모습 태극기 부대의 어르신들, 그들에게 박정희 시대야말로 그들이 가장 빛나던 시절이었다. 공장 미싱 앞에서, 그리고 뜨거운 아랍의 사막에서, 독일의 탄광에서 자신들의 청춘을 다 보냈지만, 적어도 그때는 자신들이 사회의 주인공이었다는 생각이 있었다. 따라서 박정희 대통령과 그의 딸 박근혜 전 대통령을 부정하는 것은 곧 자신들의 청춘을, 나아가 자신들의 모든 삶을 부정하는 것과 같다.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어쩌면 성서에서 가장 비열하고 권력욕에 찬 인물이 다윗일진대(물론 그의 아들 솔로몬도 아버지 다윗 못지않게 탐욕과 정치적 술수에 능한 인물이었지만), 그런데 왜 다윗과 솔로몬 시대를,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리도 그리워하는가? 하다못해 메시야도 다윗의 후손 가운데서 나와야 하는가? 이런 뜻은 아닐까? 적어도 다윗, 솔로몬 시대에 우리 이스라엘 백성들이 “힘 좀 썼다”, “너희들 까불지 마라.” 이런 뜻? 따라서 태극기 어르신들에게 실질적인 팩트를 들이대는 것은 무의미하다. 그들의 내면에는 자신을 ‘산업역군’으로 불러준 지도자와 함께, 대한민국의 고도성장 시대를 이끌었다는 자부심, 혹은 환타지가 깔려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어르신들은 지금 세대의 새로운 생각들을 이해하고 인정하려고 들지 않는다. “네가 뭘 아냐? 까불지 마라”라는 것이다. 10·26을 생각하면 우는 어르신들이 있다. 이것은 박정희 대통령의 죽음이 슬퍼서만은 아니다.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면서 “나 정말 고생 많았다.”라는 것이다. 자신과 박정희 대통령을 동일시하는 것이다. 어쩌면 그 시대에 가장 고생한 사람들이 박정희 대통령의 죽음을 애도하고 박근혜 전대통령의 탄핵을 못 받아들인다는 사실은 당연 한 일이라 할 수 있다. 니체가 말한 과거의 기억에만 매달리는 골동품적인 역사의 산증거가 바로 태극기 어른신들이다. 따라서 기억에만 매달리면 인간은 인간이기를 멈추는 것이다. ‘신은 죽었다’라는 니체의 그 유명한 선언은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곧, ‘기억의 뿌리’, 혹은 ‘회상의 원인’이 되는 저 초월적인 모든 것(가령, 이데아적인 것)의 죽음이 바로 신은 죽었다는 명제로 표현되는 것이다. 근본주의적인 기독교 신자들에게 니체의 ‘신은 죽었다’라는 표현은 ‘박정희는 죽었다. 박근혜는 탄핵되었다’라는 말과 의미에 있어서 같은 것은 아닐까?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자신의 삶이, 신앙이, 일생이 모두 부정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니체는 지금 이 시간을 살아가는 삶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인간, 곧 과거에만 집착하거나 미래에만 매달리는 몽유적인 인간을 ‘역사적 인간’이라 부르고, 이러한 역사적 인간들이야말로 이 대지에서 불행한 삶을 살아갈 수 밖에 없다고 말한다. 4. 탈진실과 탈사실의 시대, 아모르 파티! ‘노인은 꿈을 꾸고 젊은이는 비전을 볼 것(요엘 3:28)’이라는 구약성서의 예언은 경제적으로 넉넉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노인과 젊은이가 기댈 수 있는 나라, 인생의 경륜자로서 노인의 꿈이 존중받고 새 세상을 갈망하는 젊은이들의 비전이 펼쳐지는 세상을 뜻한다. 지금 세계는 끝없는 이기적 욕망의 시대로 치닫고 있다¹. 이러한 욕망을 뒷받침하기 위해 진실과 사실은 폄하되고, 거짓과 사이비가 그 욕망의 헛된 전망을 정당화시킨다. 옥스퍼드 영어사전은 2016년 ‘올해의 단어’로 ‘탈진실(post-truth)’을 선정했다. 독일언어학회도 ‘탈사실(postfaktisch)’을 2016년의 독일어로 뽑았다. 바야흐로 세계는 탈진실의 사회와 동시에 ‘거짓의 시대’가 개막된 것이다. 물론 포스트모더니즘의 ‘윤리 상대주의(Ethical Relativism)’와 ‘다원주의(Pluralism)’가 여기에 일조했다고 볼 수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의 토대였던 진리를 해체하였고 개인의 개체화와 익명화는 거짓에 대한 민감성을 둔화시켰으며 인터넷 기술이 열어놓은 매체환경은 같은 의견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자신들만의 대안 사실을 믿는 분할된 ‘마이크로 공론장’을 만들어냈다. 중요한 것은 거짓을 사실로 믿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명백한 사실을 하나의 의견으로 강등시키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이다. 이처럼 사실의 신뢰성을 잠식하고 공론장을 왜곡하는 것은 결국은 민주주의의 토대를 무너뜨린다. 자신들만의 마이크로 공론장을 형성한 태극기 부대의 어르신들, 따라서 만일 어르신들이 행복해지려고 한다면 과거를 ‘망각’하고 현재를 ‘사랑’해야 할 것이다. 니체에 따르면 망각한다는 것은 이미 없는 과거와 아직 없는 미래를 뜻하며, 사랑해야 하는 것은 현재의 삶이다. 예수께서도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마 6:36).”로 말씀하셨다.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키팅 선생도 “까르페 디엠(carpe diem, 지금 이 순간을 즐겨라)”이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노인들이여, 마음은 없어도 사랑은 넘쳐나기를! (각주) 1 : 프랑스에서는 인종주의와 우파 민족주의를 주창하는 국민전선(the National Front)이, 독일은 유로존 해체와 이민자 유입을 반대하며 유럽 통합의 진행을 반대하는 대안독일당(the Alternatives of Germany)의 위세가, 이탈리아에서는 유럽회의주의 성향을 보여 온 오성운동(Movimento 5 Stelle)이, 스페인에서는 반긴축 정책을 선도하며 온라인 직접 민주주의를 주창해온 포데모스(Podemos)가, 네덜란드에서는 우익 대중주의, 반지구화, 반이슬람주의를 기치로 내건 자유당이, 노르웨이에서는 이민자 축소와 이슬람교 반대 등을 공약한 진보당이 힘을 얻고 있으며, 핀란드에서는 국수주의(nationalism)와 유럽회의주의를 주창하는 핀란드당이 세를 확장하고, 덴마크에서는 반이민 정책과 노인복지 확충을 내건 덴마크국민당이 급부상하고 있는 것도 이러한 욕망의 확장이라고 할 수 있다. 최 병학 목사 (남부산용호교회 담임) *이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문화
    • 문화펼치기
    2017-05-29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