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1-04-16(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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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 유배 속에서도 빛나는 인생을 만드는 세계관
    절망 속에서 낭비하지 않은 인생을 말하다 이준익 감독의 영화는 항상 유머를 동반한 교육적 가치가 빛난다. 피교육자의 시선을 사로잡으며 흥미진진한 교육방법을 추구하는 교육자라면 그리고 목회자라면 그의 영화만큼 좋은 시청각 교육자료는 없다. 영화 <사도>에서는 영조의 강압적인 교육열이 가져온 부정적 결과를 보며 가정교육의 현실을 되돌아볼 수 있었고, 백제(전라도)와 신라(경상도)의 결전을 보여준 <황산벌>에서는 사투리를 해석하지 못하는 바람에 백제를 공격하지 못하는 신라군의 우스꽝스러운 상황을 지켜보며 커뮤니케이션의 중요성을 인식할 수 있었다. <라디오 스타>(2006)와 <즐거운 인생>(2007)에서 <변산>(2018)에 이르는 현대물 또한 사회의 주변부에 머무르는 인물을 통해 어떻게 인생을 살아야 하는지를 이준익 감독은 유머 감각을 곁들이며 관객을 감동적인 교육의 현장으로 인도했다. 이 감독의 영화를 통한 의미의 전달 양식은 1959년생인 그의 나이가 말해주듯 자칫 ‘꼰대 이야기’로 들릴 듯하지만, 현대인이 잃어버린 혹은 필요로 하는 시대상의 가치와 맞물려 매우 품격있는 영화로 인식되곤 한다. 그의 최신작 <자산어보> 또한 마찬가지다. 정약전(丁若銓, 1758~1816)이 흑산도에서 16년간 귀양을 살면서 쓴 <자산어보>가 기록된 배경을 보여주면서 영화는 당시 국가적 지탄의 대상이었던 사학죄인의 남다른 행보를 보여주었다. 그것은 절망과 고독의 순간에도 빛날 수 있는 세계관의 결과이기도 하다. 절망적일 것 같은 흑산도의 유배 생활에서 정약전(설경구)은 사람과 바다를 발견한다. 영화에서 그는 주변을 돌아보고 이웃에 관심을 기울이는 일이야말로 절망과 고독을 이기는 비결임을 깨닫는다. 정약전은 서자출신의 젊은 어부인 창대(변요한)와 깊은 교류를 나누며 마을 사람들과 어울릴 뿐만 아니라 상것들이나 관심을 보일 물고기에 대한 호기심을 감추지 않는다. 아무리 죄인이라고는 하지만 유교 사회에서 중앙관직에 올랐던 양반이 비린내 나는 생선을 주무르고 갯벌을 헤집고 다닌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 괴상한 행동에 의문을 품은 창대를 향해 약전은 이렇게 말한다. “학처럼 사는 것도 좋으나 구정물, 흙탕물 다 묻어도 마다 않는 자산 같은 검은색 무명천으로 사는 것도 뜻이 있지 않겠느냐” 약전이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것은 단순히 물고기에 대한 호기심이 충만해서가 아니라 인간과 자연을 바라보는 세계관이 유교와는 달랐기 때문이다. 즉 바다와 물고기에 대한 관찰과 경험을 바탕으로 지식을 기록하려는 자세는 서학과 가톨릭의 영향을 받은 세계관의 결과이다. <자산어보>는 일종의 어류도감이다. 유교가 중심인 당시 상황에서 생물학자도 아닌 그가 나름대로의 분류법을 만들어 어류도감을 쓰는 이유는 서학으로부터 실용적인 지식의 가치를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한 자연세계에 대해 이해가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장약전과 동생 정약용은 가톨릭 신앙을 가졌었지만 후에 가톨릭과 결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정약전 연구가들은 그가 가톨릭 신앙을 떠난 이후에도 예수의 십자가구속과 같은 핵심 교리를 믿는 수준에는 이르지 못하지만 인격적이며 만물을 주재자인 하나님으로서의 천(天) 개념을 유지하였을 것으로 여기고 있다. 특히 천(天)이 만물을 짓고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평등적 인간성(仁)을 부여하였다는 생각을 여전히 갖고서 이를 유배 생활 가운데서도 적용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왜 정약용이 아닌 정약전일까? 정약전의 동생 정약용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에 비견될 만큼 조선 후기에 다양한 분야에 위대한 업적을 남긴 르네상스적인 인물이었다. 철학에서부터 유학과 법학, 의학, 건축 등 조선 후기에 살았던 실학자로서 일반적인 학자가 관심을 가졌을 분야뿐만 아니라 일반 백성들의 실생활에 도움이 될 만한 영역에도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여 탁월한 저서들을 남기기도 했다. 그가 남긴 500 여권의 저서들은 워낙 분야가 다양하고 방대한 내용을 가지고 있어서 아예 정약용을 학문의 중심에 놓고 그의 사상을 연구하는 다산학(茶山學)이 탄생할 정도다. 그렇다면 정약전(丁若銓)에 대한 세간의 인식은 어떨까? 역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가 정약용의 형이며 <자산어보>(玆山魚譜)의 저자라는 정도는 알 수 있을지 모른다. 그래도 정약용에 비하면 생소하기만 하다. 특히 정약용의 유배지인 강진에 비하면 정약전이 16년간 유배 시절을 보낸 흑산도는 지리적으로나 심리적으로 대중들에게는 거리감을 느끼게 만든다.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1993) 시리즈의 첫권인 ‘남도답사 일번지’에서 첫 번째로 꼽은 장소가 전남 강진이었고, 강진의 문화와 역사의 중심에는 정약용과 다산초당이 있었다. 그런데 흑산도는 목포에서 쾌속선을 타고도 2시간을 가야 하는 섬이고, 강진만큼 인기 관광지도 아니며 흑산도 홍어가 생각날 뿐 그 누구도 정약전을 흑산도와 연결지어 생각하는 사람들은 없다. 그런데 한국에서 대중적이며 의미있는 역사 영화를 잘 만들기로 소문난 이준익 감독은 강진의 정약용이 아니라 흑상도의 정약전을 택했다. 당연히 할 얘기도 많고 무엇보다도 관객들이 익히 잘 알고 있어서 정약용을 다루는 영화를 만든다면 흥행에도 도움이 될 가능성이 높은데 그는 정약용이 아닌 정약전을 취했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어디까지나 감독의 민초 중심의 역사관 때문이라 할 수 있다. 그가 전에 만든 역사 영화의 면모를 훑어보면 답은 금방 찾을 수 있다. <왕의 남자>(2005)로 시작하여 <황산벌>(2003)과 <평양성>(2011), <사도>(2015), 그리고 <동주>(2016)와 <박열>(2017) 등의 역사물을 만든 이준익 감독은 <자산어보>의 정약전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가 역사를 보는 시각 가운데 하나는 전면에 드러나지 않은 숨은 역사를 통해 현시대를 잘 들여다 돌아보는 일이다. 이준익 감독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과거 역사와 현재와 관계를 이렇게 설명했다. “역사는, 현재를 투영하거나 반영하는 것이다. 현재를 반영하지 않을 거면 사극을 왜 찍어야 하나? 과거의 이야기가 현재와 맞닿는지가 중요하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기록된 역사와 흥미진진한 왕과 권력 중심부에 있었던 인물을 통한 역사 외에도 기록되지 않았지만 혹은 표면에 드러나지 않지만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데 필요한 중요한 의미를 전해주는 역사가 존재한다는 사실에 이준익 감독은 카메라의 앵글을 맞춘다. 그로 인해 관객은 천편일률적인 역사가 아닌 새로운 역사를 이해하고 앞으로의 역사를 창출해나갈 수 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세대 차이 극복의 비결, 젊은 벗을 두었는가? 이준익 감독은 <자산어보>에 등장하는 정약전의 명대사로 “벗을 깊이 알면 내가 더 깊어진다”를 들었다. 이것은 약전이 창대의 스승 역할을 하면서 벗으로 살아갔던 유배 생활의 묘미를 표현한 말이기도 하다. “외울 줄밖에 모르는 공부가 나라를 망쳤다”라고 생각하는 약전과 어떻게든 유교 경전을 공부해서 출세를 원하는 창대는 가치관의 차이를 분명하게 드러낸다. 거기다 양반과 서얼이라는 신분의 차이는 물로 나이도 확연히 구분된다. 평생을 공부만 하던 선비와 물고기만을 잡아 온 어부 사이에서 공통점은 하나도 없어 보인다. 그런데 그들은 어떻게 벗이 되었으며 깊은 교감을 나누는 사이로 변했을까? 영화는 서로를 인정하며 자신의 필요를 채워줄 상대를 발견했기 때문임을 보여준다. 약전은 바다와 물고기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가진 창대를 인정하며 자신이 가진 실학 정신을 구현해간다. 창대는 약전이 비록 나라의 벌을 받는 사학죄인이지만 그의 학문의 깊이를 인정하고 자신이 필요로 하는 글공부를 도와줄 사람임을 알게 된다. 사대부는 어부와 함께 하지 않고 왕을 따르는 백성은 사학죄인을 가까이 해서는 안되지만 두 사람은 서로를 인정하고 서로의 공부를 돕는 관계로 나아가면서 서로의 인생의 발전을 꾀하게 되는 것이다. 이번에도 이준익 감독의 영화를 통해 교육자료를 얻게 되었다. 사회를 건강하게 만들고 교회를 성장시키데 <자산어보>는 어떻게 기여할 수 있을까? 한국사회와 교회가 당면한 심각한 문제 가운데 하나는 세대 간의 갈등이다. MZ세대(밀리니얼 세대와 1995년 이후에 태어난 Z세대)는 기성세대를 불신하고 기성세대는 이들이 자신의 가치관과 다르고 이해할 수 없는 세대라며 혀끝을 차고 있을 뿐이다. 교회는 특히 최첨단 기술 문명의 혜택을 받고 자란 MZ세대를 수용하는데 그 어려움이 더욱 심하다. 해결방안은 <자산어보>가 보여주었다. 세대도 다르고 가치관도 다른 두 사람이 어떻게 인생의 발전을 이루어가는가를 말이다. 영화에 초반부에 등장하는 약전과 창대 사이의 관계는 전혀 화합할 수 없는 갈등 덩어리였지만, 어느새 서로에게 벗과 스승의 관계로 새롭게 변했다는 사실에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입신양명의 꿈을 접고 고향으로 돌아온 창대가 약전이 쓴 <자산어보>를 붙잡고 우는 장면에서 결국 그들은 하나의 가치관으로 통일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신다(딤전2:4). 내 안에 하나님의 진리가 있다면 진리 안에서 새로운 세대와 하나 되는 기쁨을 누려야 하지 않겠는가? 문화가 다르고 외계인처럼 사는 것 같지만 MZ세대에게도 배울 것이 있고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교회는 가지고 있지 않은가! 약전이 유배 생활 중의 시선을 오직 자신에게만 집중했다면 그는 결코 행복하지도 않았고 <자산어보> 같은 위대한 자연과학서는 탄생하지 않았으리라. 흑산도에서 그의 눈길은 자신이 아닌 자신을 둘러싼 어부들과 바다를 향해 돌렸고 이를 통해 그는 자신의 사상을 실천하고 그를 따르는 제자를 만들었다는 사실을 기억할 일이다. 이제 돌아보자. 벗을 삼고 스승을 삼을 만한 사람이 누구인지 호기심을 가득 머금은 눈길을 가지고 주변을 돌아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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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4-09
  • [영화]한국계 미국 이주민의 삶에서 묻어나는 가족애와 기독교 신앙
    재미교포 감독이 딸에게 들려주는 자전적 이야기 당신은 사랑하는 딸에게 지나간 가족의 이야기를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알렉스 헤일리의 원작 소설 <뿌리>(Roots)처럼 연대기적 서술방식으로 아프리카 땅에 거주하던 먼 조상에서 시작해서 노예 시절을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가족사를 소상히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매우 긴 시간이 필요하며 영화로 제작한다면 시리즈물이 될 수밖에 없다. 많은 출연 인원이 필요하고 시대극에 따르는 분장과 세트 등 준비할 것도 많고 무엇보다도 제작비에 대한 부담이 클 수밖에 없다. 더구나 소설이건 영화건 긴 호흡이 필요한 콘텐츠 대하기를 버거워하는 Z세대인 딸아이가 긴 시간 동안 아버지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듣고 있을지도 의문이다. 재미교포인 정이삭 감독은 영리했다. 자신이 살아온 미국 이민자로서의 삶이 어떠했는지를 딸에게 들려주기 위해 그는 한 시대로 시간을 압축하는 대신에 많은 이야기와 의미를 담고 있는 상징물들을 집어넣어 이 문제를 해결했다. 깊이 있는 이야기가 넓게 펼쳐져 있는 것은 아니지만 어느 이야기를 하든 미국 이민자로서 가족을 향한 사랑이라는 결론에 도달하도록 짜임새를 갖췄다. 따라서 115분의 상영시간은 물 흐르듯 어느새 흘러가고 딸 아이의 가슴 속에는 한국인 이민역사 속에서 누구나 한 번쯤 듣고 보았을 법한 이야기가 가족애라는 이름으로 남아있게 되었다. 영화는 1980년대 미국의 시골이라 할 수 있는 아칸소로 이주해 온 재미교포 가정의 이사하는 모습으로부터 시작한다. 트레일러에 이삿짐을 가득 싣고 도착한 새로운 보금자리는 평원 위에 세워진 멋진 저택이 아니라 언제든 트럭이 끌고 갈 수 있는 이동주택, 즉 바퀴 달린 집이었다. 도시에서 쓴맛을 본 미국 이민자의 어려운 선택이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는 미국적이며 또한 고단한 한국인 이민자의 삶을 보여주는 상징으로 표현된다. 도시에서의 삶을 뒤로 한 채 농장을 일구며 성공을 꿈꾸는 제이콥(스티븐 연)은 아내 모니카(한예리)와 병아리감별사로 일을 하며 어린 남매를 키우고 있다. 병아리 똥구멍을 통해 암수를 구별하는 병아리감별사는 전문기술이 없는 한국인들이 미국이나 호주로 이민을 떠날 때 선택하는 인기직종 가운데 하나였다. 한국인의 눈썰미가 병아리 감별에 특화되어 있다는 소문은 진실인지 알 수 없으나 그것은 분명 우리의 이민역사에 기록된 일이었다. <미나리>는 주인공 가족이 일구는 땅 이야기와 어린 남매를 돌보기 위해 한국에서 건너 온 할머니 순자(윤여정)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이 가족이 겪는 갈등과 사랑을 말하고 있다. 즉 땅과 할머니는 영화적 재미의 요소이면서 동시에 장황해질 수 있는 가족 이야기를 압축시키는 역할을 한다. 미국 땅에서 자라나는 한국의 미나리 넓은 땅은 한국인이 미국에 대해서 갖는 첫인상이다. 손바닥만 한 땅이라고 말하는 한국과 달리 미국의 너른 땅에 마음껏 농사를 짓고 아이들을 교육시키려는 제이콥에게 닥친 시련은 물(농업용수)을 구하는 문제였다. 그는 미국 농부들이 흔히 하는 수맥 찾기(Dowsing) 방법을 비과학적이라고 생각하며 ‘머리를 쓰는 한국인’답게 직접 우물을 파지만 이내 말라버리고 만다. 물이 마른 땅은 인간을 고통스럽게 만들기 마련이다. 영화의 미학적 표현에서 물(水)은 매우 요긴하게 쓰인다. 인간의 삶에 필수적인 까닭에 불(火)과 더불어 갈등의 원인인 동시에 해결의 원초적이 방법이기 하다. 성경은 요한복음 4장에서 물질적인 물이 어떻게 영생의 의미로 치환되어 성경을 읽는 독자들의 마음에 깊이 박히게 되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4:14)하는 예수님의 말씀은 영화예술 속에서도 거듭 반복되는 미학적 표현이다. 한국에서 온 할머니 순자는 뇌졸중으로 인해 불편한 몸을 거두지 못하는 바람에 창고에 불을 내고 만다. 제이콥의 야망이 사라지는 순간이다. 가족을 위해서 미국의 촌에까지 와서 농장을 한다고 하지만 그 안에는 도시에서 살 때 같은 동포인 한인에게 받았던 상처로부터 도피하고자 하는 면과 자신의 욕심 때문에 아내 모니카(한예리)와의 갈등이 내재 되어 있었다. 그런데 어렵게 농사짓고 한인 상점에 판로를 개척하는 등의 노력이 잿더미가 되고 모습을 지켜봐야 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영화의 미학에서 불은 잘못된 것을 태우며 새롭게 만드는 정화(淨化)의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성경도 이를 지지하고 있다. ‘그 때에 그 스랍 중의 하나가 부젓가락으로 제단에서 집은 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그것을 내 입술에 대며 이르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사6:6-7) 제이콥의 욕심은 불로 인해 사라지고 이제 가족만이 남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삶이 망한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중심적 사고를 버리고 진정 가족을 위하는 새로운 삶의 시작을 뜻하는 일이다. 미나리는 원더풀! “미나리는 얼마나 좋은 건데. 미나리는 잡초처럼 아무 데서나 막 자라니까 누구든지 다 뽑아먹을 수 있어. 부자든 가난한 사람이든 다 뽑아먹고 건강해질 수 있어. 미나리는 김치에도 넣어 먹고 찌개에도 넣어 먹고 국에도 넣어 먹고. 미나리는 아플 때는 약도 되고. 미나리는 원더풀! 원더풀이란다” 할머니 순자가 딸의 가족을 위해 갖고 온 것은 고춧가루와 멸치만은 아니었다. 한국 이민자들의 삶을 다룬 그 어떤 영화에서도 볼 수 없는 미나리 씨앗을 가져와 개울가에 심었다. 순자는 미나리가 자라나는 것을 보고 어린 손자 데이빗(엘런 김)에게 미나리에 대한 얘기를 들려준다. 당연히 미나리는 미국의 이민자로 살아가는 한인 주인공 가족을 상징한다. 더 나아가서는 미국 사회에 새롭게 뿌리를 내리고 성장하는 한국의 이민자들을 뜻할 수도 있다. 이 영화를 본 미국 교포들이 웃고 울며 동감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농장에 물이 마르고 창고가 불타버리는 바람에 수확한 농산물이 못쓰게 되어도 물가에 심은 미나리는 쑥쑥 자라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영화는 마지막 장면에서 제이콥은 미나리가 풍성히 자라난 광경을 바라보며 아들의 손에 쥐어준다. “혼자서도 잘 자라네. 데이빗, 할머니가 좋은 자리를 찾으셨어. 맛있겠다!” 미나리를 통한 보이지 않는 할머니의 사랑과 한국인의 기질이 손자에게 전수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하다. 상업영화에 익숙한 관객이라면 이 장면에서 영화가 끝나는 것이 아쉽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창고가 불타고 농사를 다시 시작해야 하는 시점에서 할머니가 남긴 미나리를 팔아 주인공 가족이 이민 생활에서 성공했다는 얘기로 결말을 짓기를 원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영화가 왜 왜 78회 골든글로브 외국어영화상을 비롯하여 유수의 영화제를 휩쓸었는지를 곰곰이 생각해봐야 한다. 미나리를 팔아 부자가 되는 일은 한국의 한 특정인에게는 일어날 수 있는 일이지만 보편적이지는 않다. 그러나 미나리에 담긴 가족(할머니)의 사랑과 민족적 특이성을 통해 미국 사회에서 행복한 삶을 사는 일은 이민자들의 사회인 미국에서는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일이다. 모름지기 상을 받으려는 영화는 인종과 문화를 초월하는 보편적 가치가 내재 되어야 하는 법이다. 이민자의 신앙은 어디로 가는가? <미나리>는 기독교인 감독이 만들고 기독교인이 등장하는 보편적 정서를 가진 일반영화다. 해석에 따라서는 기독교의 가치가 은연중 표현된 영화로 볼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선교를 목적을 두고 만든 영화라고 보기는 어렵다. 여러 모양의 기독교인들이 등장하지만 신앙의 감동을 주는 인물이나, 불신앙자가 신앙인이 되는 변화의 모습이 나타나는 일반적인 기독교 영화와는 다른 까닭이다. 아내 모니카는 집에서 찬송가를 들으며 생활하고 아들이 잠들기 전 기도를 가르치는 매우 신실한 기독교인으로 등장한다. 남편 제이콥은 그다지 신앙에는 관심을 갖고 있지 않지만 가족을 따라 함께 예배에 참석하는 정도의 성의를 보인다. 이 영화가 기독교적인 평가를 내릴 때 흥미있게 작용하는 인물은 영화의 앞부분으로부터 끝날 때까지 제이콥의 농사일을 도와주는 미국인 폴이다. 그는 제이콥과 그의 땅을 축복하는 기도를 하고, 방언을 하며, 할머니가 뇌졸중을 쓰러진 이후에는 제이콥의 집에서 마귀를 쫓아내는 의식을 행하기도 한다. 주일이면 커다란 십자가를 어깨에 메고 걸어가는 바람에 교회에 다니는 아이들의 조롱을 받는 장면도 있다. 기독교인들이 혼란스러워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해석의 초점은 이민자들이 겪는 신앙생활의 현실을 이해하고 불안한 마음을 신앙에 의지하며 살아가는 이민자의 삶에 맞추는 일이다. 병아리 감별을 하면서 모니카는 먼저 온 한인으로부터 여기에 온 사람들은 한인교회가 없는 작은 동네로 온 것이라고 이야기를 듣는다. 교회로부터 상처를 받은 한국 이민자들의 현실을 나타내는 말이다. 그러나 아이가 심장병을 앓고 있고 뇌졸중으로 쓰러진 어머니를 앞에 두고 미지의 땅에서 불안한 삶을 살아갈 때 신앙은 폴과 같은 신비적인 신앙의 면모를 가진 사람을 거절하기 어렵다. 2005년도 조사에 따르면 재미 한국인의 70%는 교회에 다니는 것으로 보고되었다. 원래 한국에서부터 기독교인이었던 사람들이 이민을 간 경우도 많지만, 미국의 한인교회의 사회적 역할 때문에 적지 않은 이민자들이 기독교로 개종을 하기도 한다. 이것조차도 성령님의 인도하심과 은혜일 수 있다. 한국에서 건너 간 미국 이민자들의 낯설고 고단한 삶과 신앙 사이에는 깊은 상관관계가 있다는 것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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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3-05
  • [영화] 그리스도인 가정의 폭력과 내밀한 상처의 공개
    보고싶지 않은 현실을 보여주는 영화 이승원 감독의 독립영화 <세자매>를 보면 대한민국이 영화를 잘 만드는 나라란 사실이 눈에 들어온다. 세 자매 역할을 훌륭하게 소화해 낸 개성있는 여성 연기자들을 보유하고 있고, 저예산의 독립영화임에도 불구하고 개봉 6일 만에 5만 명이 넘는 관객들이 이 영화를 찾을 만큼 다양한 영화를 소비하는 훌륭한 관객들도 있다. 코로나의 어려움 가운데서 일군 성과라서 그 가치는 높이 평가받을 수 있다. 무엇보다도 화려하고 스케일이 큰 대형상업영화가 아닌 소소한 일상생활을 세밀히 묘사하며 삶의 성찰에 이르게 하는 작은 영화들을 제작할 수 있고 상영할 수 있는 능력을 보유한 점은 높이 평가를 받을 만한 일이다. 특히 대한민국에서는 영화가 오락적 가치만을 존중받는 것이 아니라 사회문제를 일깨우는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은 매우 고무적이다. <세자매>는 가족 드라마임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폭력 아래서 성장한 성인이 겪어야 하는 트라우마가 일상생활 가운데 묘사되는 영화라서 끝까지 앉아서 보는 일 자체가 감독이나 배우의 뛰어난 역량 없이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즉 고통의 시간을 의미 있게 만들지 않는다면 관객은 보고 싶지 않은 장면으로 가득 찬 영화를 보기 위해 돈과 시간을 쓰는 수고를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영화 <세 자매>는 어른으로 성장하여 각각 가정을 이루고 살아가는 세 여성에 대한 개별적 이야기의 조합으로 보이지만, 결말에 가서 문제의 근원이 된 아버지로부터 폭력을 겪으며 어린 시절을 보낸 공통된 과거의 기억을 복원한다는 점에서 관객이 끝까지 볼 수밖에 없는 영리한 구성방식을 취하고 있다. 관객들이 보고 싶지 않은 장면들은 세 자매가 각각 겪는 현실을 통해 나타난다. 첫째 희숙(김선영)은 고스족 차림의 기괴한 스타일에 몰입한 채 자신을 무시하고 반항적인 태도를 지닌 딸아이와 살고 있다. 남편은 가끔씩 나타나 돈만 뜯어 가는 채권자 같은 존재로서 영화에는 단 한 장면에만 등장할 뿐이다. 암진단을 받았지만 자기의 잘못인 것 같아서 누구에게도 얘기하지 못한 채 그저 미안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아갈 뿐이다. 둘째 미연(문소리)은 교수 남편을 두고 있고 본인은 교회 성가대 지휘자로 활동하며 겉으로는 가장 번듯한 생활을 하고 있다. 교회 생활에 열심이지만 남편이 같은 교회, 그것도 본인이 지휘하는 성가대 솔리스트인 여대생과 바람피우는 현장을 목격한 뒤로는 더욱 자신의 속마음과 감정이 외부에 노출되지 않도록 단속하느라 심한 내적 갈등에 휩싸이게 된다. 셋째, 미옥(장윤주)은 대학로 연극 작가로 활동하며 재혼인 남성과 결혼하여 살고 있지만 집필 작업이나 가정일 모두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술에 찌들어 살고 있다. 주변 사람들과 걸핏하면 시비가 붙고 아내나 엄마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도 알지 못한 채 도무지 대책이 서지 않는 삶을 술에 의지해서 살아갈 뿐이다. 이 세 자매가 보여주는 일상은 관객 누구도 마주하고 싶지 않은 인물과 사건들로 둘러싸여 있다. 그러나 그 원인을 따라가는 과거의 시간 속에서 우리는 진짜 해서도 안 되고 당해서도 안 되는 부정적 경험이 도사리고 있음을 알게 된다. 폭력적인 아버지를 지켜보는 절묘한 타이밍 영화 <세자매>와 정인이 사건이 교차하게 된 시점은 참으로 절묘하다. 16개월 된 입양아 정인이를 가혹하게 학대해 숨지게 한 사건을 관객들은 기억하면서 영화를 봐야 했으니 말이다. 특히 정인이의 양부모가 모두 기독교인이란 사실이 밝혀지면서 개신교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노골화되고 있는 가운데 관객들은 영화관 밖의 현실과 영화 속 장면들이 허구가 아닌 사실일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질 수 있다. 정인이의 양부모는 유명 기독교 대학 출신의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며 양부의 직업 또한 기독교방송국 직원인데다 정인이의 조부와 외조부 모두가 교회 목사인 것으로 알려지면서 기독교인이 일으킨 반사회적 행동에 세상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사랑을 말하는 기독교인이 남도 아닌 자식에게 어찌 그럴 수 있느냐라는 사회적 분노가 공감대를 형성할 만큼 확산하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말이다. 영화의 결말 부분에서 세 자매는 아버지의 생일잔치를 위해 자신들이 성장한 고향마을에 들어선다. 변하지 않고 자리를 지키는 옛 건물을 바라보면서 그들은 어린 시절 아버지의 폭력에 고통받았던 과거를 떠올리게 된다. 어머니를 때리고 밖에서 바람피워 데려온 큰 언니와 막내 남동생에 대한 매질이 유난히 심했던 아버지는 지금 교회의 장로가 되어 있었다. 영화는 과거의 전형적인 가부장주의적인 문화가 일반화된 상황에서 기독교인 가정도 예외가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이점은 영화에서 교회와 기독교 신앙생활의 적지 않은 부분이 배경으로 등장하지만 우리 사회의 전체적인 모습 또한 부조리함을 나타냄으로써 기독교를 비판하거나 폄훼하려는 의도가 있지 않음을 확인시켜준다. 어린 시절 둘째와 셋째는 아버지의 폭력을 피해 내복 바람으로 신발도 신지 못한 채 동네 가게로 피신하고 가게 안에 있던 손님들에게 경찰에 신고해줄 것을 부탁한다. 그러나 술 마시던 남자 손님으로부터 ‘아저씨가 쭈주바 사줄테니 그거 먹고 아버지한테 가서 잘못했다고 빌라’는 말을 들은 게 전부였다. 자녀에 대한 아버지의 학대가 용인되고 상처 입은 아이들의 미래는 눈곱만치도 생각하기 어려웠던 시절이었다. 이 영화의 가장 큰 장점은 가정폭력과 아동학대로부터 상처받은 인간이 성장 후에도 고통의 흔적을 갖고 살아가는 현실을 세밀히 묘사한 점과 그것이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에서 사과와 용서 없이는 치유되기 어렵다는 사실을 은연중 드러낸 점이다. 영화의 후반부에 이르도록 나타나지 않던 막내아들은 끝 장면에 이르렀을 때 자신의 존재를 크게 부각시키는 일을 저지르고 만다. 아버지의 생일잔치 때 어린 시절 아버지로부터 받은 학대의 곪은 상처가 결국 터지고 마는 것이다. 목사님이 초청되고 좋은 음식이 배열된 잔치 자리에서 막내아들은 아버지가 앉아 있는 식탁 위로 오줌을 싸는 바람에 난장판을 만들어 버리고 만다. 이쯤 되면 장로인 아버지는 문제의 심각성도 깨닫고 문제의 원인이 자신에게 있다는 사실도 깨달을 법도 하지만 아버지에게 그런 기색은 보이지 않는다. 단지 목사를 초청한 자리에서 자식에게 망신당하고 체면이 구겼다는 당황한 표정만이 역력할 뿐이다. 이제 이 영화의 명대사이자 성경적 관점에서 이 영화를 평가할 만한 가장 중요한 장면이 이어진다. 첫째 희숙의 골칫거리 딸의 입에서 터져 나온 한마디. “왜 어른들은 사과할 줄 모르는 거에요! 사과하세요!” <세자매>는 기독교 영화가 될 뻔했다 어떤 영화들은 순간의 묘사만 잘했더라면 기독교 명작으로 남을 뻔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세자매>가 그렇다. 마지막 결정적 장면에서 성경적 관점이 드러난다면 이전의 모든 장면들은 새롭게 해석되는 가운데 기독교 영화라는 위치를 부여받을 수 있게 되었을 텐데 그렇지 못한 점이 너무 아쉽다. <세자매>에서 장로인 아버지는 사과하라는 외손녀의 말을 듣고 세 딸과 막내아들 앞에서 그동안 저지른 죄에 대해 용서를 빌었다면 어땠을까? 자신이 배움이 적고 신앙이 모자라서 하나님이 보내주신 귀한 선물인 자식들을 때린 것에 대해 눈물로 회개했다면 이 영화의 판도는 달라졌을 것이다. 담임목사가 지켜보고 있는 자리에서 생일잔치가 난장판이 되어버리는 바람에 체면이 구겼다는 생각을 버리고 아버지로서 자식에 대한 사랑을 회복할 수 있는 일생일대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면 너무 교화적이란 평가를 받았을까? 어차피 <세자매>를 끌고 가는 힘의 중심에는 둘째 미연(문소리)이 있으며 영화는 미연의 신앙생활을 세밀히 묘사하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교회 성가대 지휘자로서의 사회적인 생활에서부터 가정 일상사에서도 신앙의 권위를 결코 잃지 않는 모습은 상반된 평가를 받게 된다. 식사 기도를 하지 못하는 자녀에게 훈계하는 모습은 신앙의 권위를 내세운 폭언처럼 들리기도 하지만 밥상머리에서 신앙교육을 시키는 가정이 많지 않다는 점에서 꼭 부정적으로만 볼 수도 없다. 십일조 봉투를 챙기며 남편이 받은 특강료에 대해서 말하는 것을 꼭 남편을 잡아먹지 못해 안달이 난 여자로 볼 수만도 없는 노릇이다. 남편과 바람 핀 성가대원과 머리끄덩이를 붙잡고 싸우기보다는 조용히 압박을 주어 일을 해결하려는 모습은 냉정한 태도일 뿐 위선적이라 말하기 어렵다. 다만 철야 기도회 자리에서 남편과 바람 핀 성가대원을 이불을 씌우고 발로 지긋이 밟는 행위는 부드러운 언행과 불일치를 이루며 이중적이란 평가를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신앙인의 이중적 행태는 폭력적인 아버지의 영향이라는 전제가 깔린다면 이해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세자매>는 둘째 미연의 집들이 예배 상황과 아버지의 생일축하연을 영화의 앞과 뒤에 배치함으로써 기독교인이지만 폭력적인 아버지 밑에서 자란 둘째 딸에게서도 학습되고 있음을 상기시킨다. 난장판이 되어버린 아버지의 생일파티에서 참고 참았던 아버지를 향한 분노를 쏟아내던 둘째 미연에게 셋째 미옥은 “언니 눈에서 아버지가 보인다”고 말한 것은 가부장적이며 권위주의적인 신앙인의 이중적인 태도가 자식에게까지 되물림 되어 나타날 수 있음을 나타낸다. 그러나 남편의 내연녀를 대하는 미연의 모습은 개인의 특수한 상황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 보았을 때 결국 이 영화의 주제가 성경적 가치를 품고 있는 가의 여부가 이 영화의 성경적 가치를 판단하는데 핵심이 될 수 있다. 장로인 아버지는 자녀들에게 용서를 비는 대신 유리창에 자신의 머리를 박고 피를 흘리는 것으로 마무리를 한다. 그것은 용서를 구하는 자의 태도가 아니다. 오히려 자식을 잘못 키웠다는 자책에 가까운 행동일 수 있다. <세자매>는 단편적이나마 신앙인의 가정과 교회의 모습을 조명한다. 기독교 신앙인과 교회의 허물을 보여주는 것 자체를 문제 삼을 수는 없다. 사실이 또한 그러하니 말이다. 그러나 문제의 해결방법은 달라야 한다. 단지 세 자매의 연대와 끈끈한 가족애가 문제해결 방법이 될수는 없다. 그것은 전형적인 휴머니즘 가족 드라마의 결말일 뿐이다. 기독교 영화의 상징적 특징은 완벽한 신앙인의 모습을 보여주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죄와 문제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과 사랑 안에서 회개와 용서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지의 여부에 달려있다. 아버지가 세 자매에게 용서를 구하고 회개하는 가운데 가족의 연합을 도모했다면 우리는 훌륭한 기독교 영화의 탄생을 목격할 수 있었으리라.
    • 문화
    • 영화
    2021-02-08
  • [영화] 갈릴리 혼인풍습에 담긴 예수 재림의 메시지
    CBS CINEMA가 보낸 위로의 선물 코로나19로 인해 한국 영화계가 고사 위기 직전까지 갔던 2020년도에도 기독교영화계는 의미 있는 족적을 남겼다. 김상철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부활: 그 증거>는 지난 12월 말 현재 2만9천3백 명이 넘는 관객 수를 기록했다. 일반 영화의 극장 관객 수가 20년 전으로 후퇴한 상황 속에서도 기독교 다큐멘터리 영화가 3만 명 가까운 스코어를 기록한 일은 매우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코로나로 인해 예배당 출입이 원활하지 못한 상황은 부활신앙을 조명했던 이 영화에 대한 기독교인의 관심을 촉발시켰다고 보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로마의 박해를 피해 지하동굴에 숨어서 신앙생활을 했던 카타콤(catacomb)의 생생한 영상은 고난 속에서도 신앙을 지켰던 순교자들의 삶이 코로나로 인해 고통받는 한국의 기독교인들에게 전해지면서 큰 도전을 주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기독교 영화를 제작하고 수입 배급도 하는 ‘CBS CINEMA’의 역할이 컸던 한 해였다. 6월에는 미국의 유명 CCM 밴드인 ‘머시미(Mercy Me)’ 리드 보컬 바트 밀라드 (Bart Millard)의 인생과 노래를 보여준 <아이 캔 온리 이매진>을 재개봉한 데 이어서 11월에는 어린아이의 순수한 믿음이 감동을 주는 가족영화 <아이 빌리브>를 극장에 걸었고, 가나의 혼인 잔치 이야기를 통해 예수님의 재림과 종말의 의미를 가르친 다큐멘터리 <가나의 혼인잔치:언약>의 극장상영에도 성공했다. 비록 수입영화이기는 하지만 한국의 기독교인들에게 적지 않은 감동과 영향을 줄 수 있는 영화란 점에서 2020년 기독교영화계가 암흑의 시간으로 빠져드는 것을 막아내는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그 가운데서도 브랜트 밀러 주니어 감독의 다큐멘터리 <가나의 혼인잔치:언약>(Before the Wrath, 2020)을 유튜브를 통해 일정 기간 무료로 공개한 일은 기독교 문화선교의 시대정신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뜻깊은 일이 아닐 수 없다. 영화관까지 직접 찾아가기 쉽지 않은 코로나19의 현실에 대한 대안으로 한국인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동영상 플랫폼을 통해 누구나 볼 수 있도록 공개했기 때문이다. 영화를 수입하거나 제작하는 입장에서 돈이 들어간 영화를 무료공개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영화를 돈을 버는 통로로만 생각하지 않는 사역자 정신은 하나님 말씀이 필요하고 성경에 대한 바른 이해가 절실한 시기에 기독교 영화를 과감히 대중의 품에 안길 수 있었다. 특히 웹2.0의 시대정신을 구현한다는 점에서도 현대의 문화 흐름에도 부합한다고 볼 수 있다. 웹2.0의 정신은 참여, 공유, 개방에 있다. 지식정보화 시대에는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자신만이 붙잡고 내놓지 않는다면 쌍방형 소통의 가치가 중요한 디지털 문화에 어울린다고 볼 수 없다. 아울러 무료공개의 시점이 크리스마스 전후 기간이란 점도 매우 의미가 있다. 코로나로 인해 전세계가 ‘고요한 밤’이 되어버린 성탄절에 맞추어 문화선교단체가 할 수 있는 최상의 선물을 제공한 까닭이다. 2020년 11월 26일에 개봉한 이 영화는 극장에서 1만3천 명이 넘는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전방위적인 사역이 필요한 시기임을 보여주는 예가 아닐 수 없다. 갈릴리 가나의 혼인풍습에 담긴 그리스도 재림 다큐멘터리 <가나의 혼인잔치:언약>은 성경에 예언된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이해와 각성을 촉진 시킨다.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 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행1:11)는 성경의 말씀처럼 부활하고 승천하신 예수님의 재림은 초대교회 교인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메시지였고, 그 이후로부터도 여전히 기독교인들의 신앙에 중요한 축을 이루어 왔다. 그러나 현대 기독교인의 신앙에서 재림은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한 채 시한부 종말론과 같은 이단의 교설만이 재림의 의미를 왜곡시키고 있을 뿐이었다. 1992년 다미선교회는 그해 10월 28일에 휴거(携擧) 현상이 나타나고 1999년에는 세상의 종말이 온다고 주장하여 파란을 일으켰지만 결국 이단이 퍼뜨린 해프닝으로 끝나고 말았다. 그러나 정상적인 교회에 끼친 그 후유증은 대단히 심각했다. 교회에서 종말론에 대한 설교는 자취를 감췄다. 기독교인은 분명 세상의 종말에 대한 믿음을 갖고 살아가야 하지만 성경의 바른 이해에 바탕을 둔 종말에 대한 설교를 듣기 어려운 세상에 살게 된 것이다. 영화 <가나의 혼인잔치:언약>은 종말에 나타날 현상으로 예수님의 재림과 휴거에 대한 이해를 성경에 나타난 갈릴리지방의 혼인풍습에 비유하여 설명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특히 ‘언제 예수님이 재림하시는지’에 대한 지금까지의 관심으로부터 ‘왜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가’와 같은 본질적인 접근과 해석을 보여줌으로써 기독교 대중의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이 영화는 예수님과 그 제자들이 갈릴리 사람이라는 것으로부터 착안하여 갈릴리지방에서 있었던 독특한 혼인풍습 속에 예수 재림에 대한 예언의 실마리를 심어놓았다고 얘기한다. 즉 예수님께서 왜 세상에 다시 오시는가에 대한 문제뿐만 아니라 휴거와 재림의 때에 대한 비밀 등을 이해하려면 갈릴리지방에서 행해진 혼인풍습을 먼저 아는 것이 우선임을 강조하고 있다. 영화 속에서 예수님의 재림과 연관된 갈릴리 혼인풍습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는 이미 초림하셨던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왜 재림하시는지에 대한 이해를 다루는 부분이다. 갈릴리의 혼인풍습은 신랑과 신부 사이의 결혼에 대한 언약이 이루어지는 과정이며 영화는 이를 드라마 형식으로 세밀히 묘사하고 있다. 신랑의 아버지가 아들과 함께 신부의 마을 어귀에서 증인들이 보는 앞에 혼인 서약서를 읽고 선포하는 일이며, 신랑이 주는 포도주를 신부가 받을 때 비로소 결혼에 대한 신부의 승낙이 이루어지는 일 등은 미처 우리가 알지 못했던 갈릴리의 결혼 풍습이었다. 특히 약혼과 결혼 사이에 적지 않은 시간의 간격이 있으며 약혼기간 동안 신랑은 신부와 함께 살 집을 준비한다는 사실에서 예수님의 승천과 재림 사이에 존재하는 시간의 간격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내 아버지 집에는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요14:2) 하는 말씀이 상응하는 대목이다. 둘째는 오직 하나님만이 예수님이 재림하는 날에 대해서 아는 것과 같이 영화는 신랑이 약혼을 끝내고 신부를 데리러 오는 날의 결정이 오직 신랑의 아버지에게 있음을 밝히고 있다. 신랑의 아버지가 아들 신랑에게 신부를 데려올 때가 되었음을 얘기하면 신랑은 곧장 나팔을 들고 밖으로 나가 마을 전체를 깨운다. 즉 결혼식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날 새벽이나 자정에 시작되는 것이다.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마24:36)는 성경 말씀은 정확히 갈릴리의 혼인풍습과 일치한다. 셋째는 휴거를 연상시키는 장면이 갈릴리 결혼 풍습에 있음을 설명하는 부분이다. 신랑이 나팔을 불어 동네를 깨우면 친구와 하객들 가운데 준비된 자들만이 일어나 마을을 빙빙돌며 신부의 집에 들어갈 채비를 하게 된다. 신부와 또한 준비된 들러리들이 신랑을 맞으러 나오고 신랑은 신부와 드디어 재회하게 되는 것이다. 이 때 신부는 그저 신랑을 따라서 집에 가는 것이 아니고 신랑의 친구가 내려놓은 가마에 올라타 들린 채로 신랑의 집으로 가게 된다. 갈릴리 사람들은 이 모습을 보고 신부가 공중에 들려 아버지 집에 간다고 표현함을 영화는 밝히고 있다.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살전4:17)는 말씀이 절묘하게 어우러지는 장면이 갈릴릴 결혼식에서 발견할 수 있다는 사실은 얼마나 놀라운가! 새해에 가장 먼저 볼 영화 미국에서 성경적 시각으로 영화를 평가하는 사이트 ‘Dove.org’는 이 영화를 목회자와 교사를 포함한 모든 기독교인들이 꼭 봐야 할 영화로 추천했다. 그것도 될 수 있는 한 빨리 이 영화를 볼 것을 권하고 있다. 기독교 영화를 촌각을 다투며 시급히 볼 것을 권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그러나 <가나의 혼인잔치:언약>라면 서둘러 봐야 한다는 데 동의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예수님 재림에 대해서 이토록 설득력 있는 해석을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들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언제 재림하실지 모르는 가운데서 신부 된 기독교인이 신랑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함을 배우는 일 만큼 중요하고 시급한 일이 어디 있을까? 신앙교육은 단순히 정보의 축적에 머무르지 않는다. 즉 신앙적인 행동에 이르도록 만든다. ‘등을 들고 신랑을 맞이하러 나간 열 처녀의 비유’(마25:1-13)에서처럼 슬기로운 자들로 살아가도록 영화는 관객의 마음을 부추긴다. 혹시 종말과 재림에 대해 가르치기를 두려워하는 교회 설교자나 교사가 있다면 이 영화의 도움을 받으면 된다. 비록 고고학자의 발굴 장면에서 사실성이 좀 떨어지고 예산의 한계 때문에 유명 배우를 캐스팅하지는 못했지만, 영화가 전하는 메시지는 이 모든 부족함을 상쇄시키고도 남음이 있다. 느슨해졌던 믿음의 끈을 단단히 매고 새해를 시작하는 기독교인이라면 첫 번째로 봐야 하는 영화가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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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1-07
  • [영화] 방사능의 미래를 알지 못했던 위대한 여성 과학자
    위인전을 다루는 영화의 방식 어느 사회에서나 위인전은 두 가지의 특성을 갖는다. 하나는 어린이들이 즐겨보는 교육적 성격을 고려하여 사회의 모범이 되고 윤리적으로 문제가 없는 무흠한 인물을 위인전에 올린다. 그러나 그것은 진실이 아니다. 전기작가는 편집과정에서 어린이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긍정적인 면을 강조하고 업적 위주로 기술한 결과 문제는 없고 위대함만을 부각하여 인물을 재창조하는 셈이다. 위인전의 또 하나의 특징은 위인전을 펴낸 사회가 지향하는 이데올로기를 반영한다는 점이다. 반공이 사회의 중요한 구호로 등장할 때는 6.25의 영웅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이 한국에서 펴낸 세계의 위인전집에 올랐는가 하면, 수출증대에 나라의 모든 것을 걸었을 때는 현대그룹의 정주영 회장이 아동을 위한 위인전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영화도 위인을 다루는 방식이 책과 다르지 않다. 21세기에 퀴리 부인에 대한 영화를 만든다면 과학의 가치와 여성의 역할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한 교육적이며 시대적인 상황과 무관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상업영화로서 관객을 모아야 하고 책과 경쟁해야 하는 구도가 명확해지면 영화는 다른 길을 갈 수밖에 없다. 그것은 장르(genre)의 특성을 갖는 일이다. 장르란 일종의 영화의 분류법으로 비슷한 내용이나 형식에 따라 영화들을 묶어 영화의 특성을 이해하는 방식이다. 역사적 위인들의 생을 조명하는 영화들은 드라마라는 장르 안에서 이해되며 주인공이 경험하는 사건을 다루는 가운데 인물의 성격을 조명하는 방식을 취하곤 한다. 이 과정에서 장르영화는 ‘반복과 변형’이라는 특유의 전개방식을 보여준다. 즉 관객이 이미 잘 알고 있는 위인에 대한 내용을 영화는 ‘반복’한다. 이것은 관객의 기대감을 충족시켜주는 역할을 한다. 이순신 장군의 영화를 보러 온 관객들은 임진왜란의 용맹스럽고 왜군을 물리치는 호쾌한 승전의 기쁨을 만끽하기 위해 온다는 사실을 상업영화는 외면할 수 없다. 그러나 관객이 알고 있는 것만을 묘사하는 영화는 새로울 게 없다는 판정을 받게 마련이다. 그래서 장르 영화는 ‘변형’이라는 전개방식을 따른다. ‘변형’은 관객이 미처 알지 못하거나 알았다 하더라도 잘못 알고 있는 것을 다룸으로써 관객의 예상을 뛰어넘는 전개방식이다. 관객은 뻔할 것 같은 영화로부터 새롭게 기대감을 갖게 되며 앞으로 영화가 어떻게 전개될지 호기심을 머금은 채 스크린을 응시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이 만든 <링컨>(2012)은 장르영화의 성격을 명확히 보여준다. 미국의 남북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흑인 노예를 해방시킨 위대한 미국의 16대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에 대한 관객의 기억들을 소환하여 스크린에 반복하여 펼치지만 똑같지는 않다. 스필버그는 링컨이 순수하고 정직하며 어떤 야망도 갖고 있지 않은 고결한 위인이라는 동화책에 나올 법한 이미지는 여지없이 깨뜨린다. 링컨은 의회에서 노예제를 완전히 폐지시키는 수정헌법 13조가 통과될 수 있도록 시간을 벌기 위해 반대편인 남부연합 대표들이 워싱턴에 들어오는 여정을 지연시키고, 심지어 자신의 법안에 반대표를 던질 생각인 야당 의원에게 관직을 제공하는 댓가로 찬성표를 얻어낸다. 다시 말하면 술수를 부리고 야당 의원을 매수하는 셈이다. 분명 관객의 예상을 뛰어넘는 ‘변형’된 링컨의 모습이 등장한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노예폐지와 같은 숭고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링컨의 행동이었음을 관객들은 깨달으며 링컨에 대한 기대감을 충족시키며 극장을 나서게 되는 것이다. 책으로는 알지 못했던 마리 퀴리 그렇다면 우리에게 익숙한 또 다른 위인 ‘마리 퀴리(Marie Skłodowska-Curie)’는 어떨까? 흔히 ‘퀴리 부인’으로 우리의 귀에 익숙하고 라듐 발견으로 노벨상을 받은 위대한 여성 과학자가 우리가 기억하는 위인전의 내용이지만, 그녀가 남성 중심의 학계에서 여성으로 치열하게 싸우는 한편으로 남자로부터 사랑을 갈구하는 여인의 이미지를 떠올릴 수 있는 사람은 이 영화가 나오기 전까지는 없었다. 이란 출신의 여성 감독 마르잔 사트라피 감독의 <마리 퀴리>(Radioactive, 2019)는 위인전이 미처 언급하지 못한 퀴리 부인의 빛과 그림자를 모두 담고 있는 영화를 연출함으로써 ‘반복과 변형’의 장르적 특성을 영화에 담아내는데 성공했다. 위인전에서는 알지 못했던 퀴리 부인의 이미지는 세 가지의 ‘변형’을 이루며 관객의 예측을 넘나든다. 첫째는 자신의 일에 관한한 거침없는 성격의 소유자임을 영화는 제시했다. 마리 퀴리(로자먼드 파이크)가 자신의 연구실에서 쫓겨나게 되었을 때 혈기를 부리는 모습은 다소 당황스럽다. 남성 중심의 위원들 앞에서 다소곳하게 앉아 있어야만 우리가 상상한 퀴리 부인의 이미지와 어울리는 것은 아니지만 자신의 연구를 위해서라면 남성들과 거침없이 맞붙는 투지는 위인전에서는 결코 나오지 않는 내용이다. 모든 분야에서 여성이 남성과 동등한 대접을 받지 못했던 시절임을 감안 한다면 혈기를 부리는 여성 과학자의 탄생은 남성 중심의 사회에도 얼마간의 책임이 있음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마리 퀴리는 연구실과 연구결과물을 독점하던 남성들에 대해 늘 경계심을 가졌던 것은 사실이었다. 1903년 자신의 연구 동료이자 남편인 피에르 퀴리(샘 라일리)와 공동으로 노벨상을 수상하게 되었을 때 자신이 직접 스웨덴에 가서 상을 받지 못하고 수상소감 또한 말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 그녀는 몹시 분노한다. 둘째는 우리가 아는 마리 퀴리가 있기까지 남편 피에르 퀴리의 역할을 새롭게 인식시킨 것도 영화가 제시한 새로운 점이었다. 연구실에서 쫓겨난 마리를 위해 새로운 연구실을 마련해주며 연구에 몰두할 수 있도록 도운 피에르가 없었다면 과연 퀴리 부인은 탄생할 수 있었을까? 사랑의 동반자로서 결혼하고 늘 마리 옆에서 함께했던 남편 피에르의 존재는 마리의 내면세계에 안정감과 사랑에 대한 충족을 가져옴으로써 위대한 여성 과학자의 탄생을 지켜볼 수 있었다. 남편 피에르가 마차에 치여 죽은 후 마리 퀴리가 남편의 동료이자 연구원이었던 남성과 자신의 집에서 사랑을 나누는 일은 아마도 이 영화를 본 관객들을 당황스럽게 만든 일이었다. 퀴리 부인의 어린 두 아이가 아빠 대신 낯선 남자와 침대에 함께 있는 엄마를 열린 문 사이로 지켜보는 장면은 정숙한 퀴리 부인의 이미지만을 갖고 있었던 관객의 예상을 여지없이 깨뜨리고 말기 때문이다. 유부남 연구원과 밀회를 즐겼지만 이내 그 아내로부터 욕을 들어야만 이 위대한 여성 과학자의 모습에서 우리는 결국 인간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를 깨닫게 된다. 개방적인 성의식을 가진 관객이라면 이 또한 마리 퀴리의 거침없는 성격과 성에 대한 주체적인 행동으로 여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남편이 죽은 후 사랑이 필요했다는 마담 퀴리의 고백은 자신의 성적 욕망에 대해서 솔직하고 담대한 현대적인 여성의 이미지로 다가설 수 있기 때문이다. 감독은 마리 퀴리가 감히 넘볼 수 없는 위인이라기 보다는 보통 사람과 다름없이 욕망을 가진 인간으로서 묘사하려는 의도를 읽을 수 있다. 그러나 성경적 관점에서 보자면 그것은 일찍이 다윗과 같은 위대한 왕이 성적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밧세바와 같은 유부녀와 정을 통했던 인간의 죄성과 연약함의 결과일 뿐이다. 다만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따라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주의 많은 긍휼을 따라 내 죄악을 지워 주소서’(시51:1)라며 회개의 기도를 한 반면 마리 퀴리는 기독교인이 아니란 점이 다를 뿐이다. 이 차이는 영원이라는 간격을 벌릴 수 있지만 말이다. 신앙없는 과학의 미래 영화는 기독교 신앙으로 인도되지 못한 과학자의 삶과 연구결과물이 가져올 허무함과 비극을 제시한다. 마리 퀴리는 남편 피에르가 죽은 후 정신적 혼란을 경험하며 그렇게도 강하게 자신을 떠받치고 있던 과학으로부터 이탈하는 경향도 보였다. 마리 퀴리는 죽은 남편을 만나기 위해 영매를 찾아 나선다. 남편의 손에 이끌리어 갔던 심령술 모임에서 영매는 베토벤의 혼령을 자신의 몸속으로 불러내어 피아노 연주를 했었다. 죽은 남편의 영혼을 불러내어 대화하려는 마리 퀴리의 행동은 결국 남편에 대한 진한 사랑과 더불어 아무리 노벨상을 받은 과학자라도 인생의 풀리지 않는 문제를 껴안고 살아가고 있으며 얼마든지 사이비 심령술에도 빠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영화는 병원 복도에서 이동 침대 위에서 지나간 자신의 삶을 떠올리는 동일한 장면으로 시작과 끝을 맺는다. 다만 끝맺음 부분에서 마리 퀴리는 자신의 방사능 연구가 가져올 미래의 방사능 유출과 관련된 비극적 사건의 예시를 함께 떠올린다. 1945년 히로시마 원폭투하와 1961년 네바다 사막에서의 공개된 핵실험, 그리고 가장 최근에 있었던 1986년 체르노빌 원전폭발의 장면들이 등장한다. 마리 퀴리 사후에 벌어진 핵과 방사능의 어두운 그림자는 그녀의 위대한 연구와 발견이 가져다 준 비극의 열매였다.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투하된 핵폭탄은 8만 명을 즉사시켰고, 방사선 피폭과 관련된 질병과 부상으로 14만 명이 이후에 죽었다. 인구 35만 명의 히로시마 시민 가운데 22만 명이 사라진 것이다. 네바다 사막의 핵실험장은 구경꾼을 불러 모으는 관광상품이 되었고, 체르노빌 원전 폭발사고로 방사능에 오염되어 사망한 사람이 백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미국의 일간지 USA 투데이는 보도했다. 마리 퀴리는 자신의 연구업적을 발표하는 자리에서 당당하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저는 이것을 이렇게 부릅니다. 방사능”. 이 영화의 원제목은 ‘방사능(Radioactive)’이다. 열정있는 과학자가 발견한 이 수고의 결과는 인류를 구원했는가? 아니면 파멸로 이끌고 있는가? 마리 퀴리는 알지 못했고 알 수도 없었다. 그래서 신앙이 없는 과학을 볼 때마다 물가에 뛰어노는 어린아이를 보는 것과 같은 심정을 감출 수가 없는 것은 필자만의 생각은 아닌 듯하다. 과학자들에게는 다윗의 기도가 필요한 때이다.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시 5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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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12-02
  • [영화] 약자의 연대가 만든 성장과 정의를 바라보다
    웃으면서 화내는 법을 아는 영화 20세기가 저물고 새로운 밀레니엄 시대를 맞이하면서 유럽의 영화전문가들은 지난 한 세기를 빛낸 영화를 꼽기 시작했다. 영화의 역사가 1895년 12월에 프랑스의 뤼미에르 형제에 의해 시작되었다는 것이 정설인 만큼 이제 막 100년을 넘긴 영화의 여정에서 한 세기를 빛낸 영화를 뽑는 일은 곧 세상 최고의 영화를 뜻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 최고의 영예는 찰리 채플린의 <모던 타임즈>(Modern Times, 1936)에게 돌아갔다. 나중에 채플린의 세 번째 부인이 된 여배우 플레트 고다르(Paulette Goddard)와 함께 열연한 <모던 타임즈>는 채플린의 사회 비판적 시각과 인간애 그리고 예술성이 코미디라는 장르 안에서 적절한 조화를 이룬 완벽한 작품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 커다란 톱니바퀴 속으로 들어가 나사를 조이는 주인공의 모습으로도 유명한 이 영화는 대공황기를 거치면서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외된 노동자와 기계의 부속품처럼 전락한 인간의 모습을 묘사함으로써 현대문명을 비판한 영화로 널리 알려졌다. 이 때문에 찰리 채플린은 사회주의자로 몰렸고 매카시즘( (McCarthyism)의 희생자가 되어 한동안 미국에서 활동할 수 없었다. 그러나 미국인뿐만 아니라 당시 소련을 포함한 전세계인들은 그의 영화에 열광했고 현대 기계문명과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이 어떠한 위기에 처할 수 있는지를 깨닫는 한편 주인공이 걷는 희망의 길에서 위로받을 수 있었다. 우리가 찰리 채플린과 <모던 타임즈>에 주목하는 것은 그의 뛰어난 사회문제 제기 능력 때문이다. 이기적인 부자와 절망스러울 만큼 가난한 사람들, 그리고 인간을 기계 부속품처럼 취급하는 심각한 현대사회의 문제들을 전혀 거부감없이 스크린에 올려놓을 뿐만 아니라 유쾌하고 재미있는 코미디적 발상을 통해 관객들을 몰입시키고 영화가 끝난 후에는 문제를 성찰케 하는 그의 뛰어난 영화 제작 기술은 감탄을 자아내게 만든다. 이종필 감독의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은 오랜만에 만나는 사회비판 의식을 갖춘 코미디 영화로써 만일 찰리 채플린이 한국에 태어났다면 다뤘을 법한 내용과 형식을 보여주고 있다. 여상 출신의 고졸 여사원에 대한 심각한 인사차별과 대기업 공장에서 독극물을 방류하는 바람에 피부병에 시달리는 마을 사람들, 그리고 한국기업을 헐값에 사들여 비싸게 되팔려는 다국적 투자회사의 횡포 등은 <모던 타임즈>에는 없지만 현대사회의 약소국 국민들이라면 경험했을 만한 심각한 내용들을 코믹하게 다루었다. 그것은 한마디로 웃으면서 화를 낼 줄도 아는 이중 커뮤니케이션의 화법을 구사할 줄 아는 능력을 말한다. 엄청 화를 낼 일임에도 불구하고 목청 높이고 핏대 울리면서 싸우지 않고 웃으면서 유쾌하게 관객에게 문제를 각인시키며 자신과 사회를 돌아보게 만들 수 있다면 채플린이 좋아할 만한 영화가 아닐까? 영어토익반 상고 졸업 여사원들의 빛나는 연대의식 IMF가 오기 전인 1995년, 대기업 삼진그룹에서 일하는 여상(女商) 출신의 입사 8년 차인 이자영(고아성)은 탁월한 업무 능력에도 불구하고 입사 동기인 정유나(이솜), 심보람(박혜수)과 함께 잔심부름과 인스턴트커피 타기의 달인이 되어가고 있었다. 고졸 사원이란 이유만으로 근무복을 입히고 승진에 차별을 두고 있는 회사는 마침내 여상 졸업 사원들에게 토익 600점을 넘기면 대리로 승진시킨다는 새로운 지침을 발표한다. 회사 내 여상 출신들이 강의실을 가득 채우며 토익 공부에 매진할 무렵 이자영은 회사 임원의 물건을 정리하러 간 공장에서 페놀을 방출하는 현장을 목격하게 된다. 회사에 보고를 하고 시정조치를 지켜보면서 지영은 페놀 방류가 사고가 아닌 회사의 의도적이란 사실에 심증을 굳히면서 유나와 보람과 함께 결정적 증거를 찾기 위한 탐색을 시작한다. 이야기의 전개 상황을 보면 영화는 대기업의 환경오염 실태를 사회에 알리는 전형적인 내부 고발의 형식을 갖고 있다. 회사는 페놀을 무단 방류했음에도 불구하고 주민에게는 마치 건강에 별다른 문제가 없는 것처럼 거짓말을 하고 적당히 보상하는 것으로 마무리를 지으려 한다. 여기서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이 할리우드 영화가 내부고발자를 다루는 방식과 다른 점이 발견할 수 있다. 미국 국방부 정보기관 NSA 직원 에드워드 스노든을 내세워 NSA가 각국 정상들에서 민간인에 이르기까지 통신 감청 시스템 프리즘(PRISM)을 사용해 감시하고 있음을 밝힌 사건을 그린 영화 <스노든>(2017)에서 주인공들은 매우 큰 갈등과 회유, 압박 등을 견디며 숨겨진 진실을 밝히는데 온 힘을 쏟는 모양새다.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의 주인공들은 다르다. 자신이 속한 회사가 건강에 심각한 위협을 초래하는 페놀을 유출했다는 사실을 언론에 알리기 위해 노심초사하거나 심각한 심리적 갈등을 스크린 위에 펼치기보다는 영어토익을 함께 공부하는 고졸 여직원들이 힘을 모아 진실을 밝히는데 초점을 두고 있다. 즉 그것은 위기의 상황에 대처하는 한국인의 연대의식이 할리우드와는 다르게 이 영화를 가치 있게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영어토익반의 고졸 여사원들은 페놀 방류사건의 뒤에 다국적 투자회사가 기업가치를 떨어트린 뒤에 헐값에 매수하려는 의도가 있음을 밝히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다. 영어를 못하는 바람에 영어를 배우는 처지임에도 불구하고 영어토익반 여사원들은 엄청난 분량의 영어 서류들을 나누어 번역하면서 기업매각의 증거들을 찾아낸다. 회사에서 가장 힘없고 급여도 적으며 남성 상사들의 편견에 시달려 온 고졸 여사원들이 궁극적으로 기업사냥꾼의 손에 회사가 넘어가지 못하도록 막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다는 사실은 한국인들이 연대의식을 통해 나라를 구한 역사에 대한 은유처럼 보인다. 임진왜란 때 왜적과 싸운 의병들이나 외세의 칩입에 항거한 동학농민들, 6.25 때의 학도병들과 4.19혁명 당시의 어린 학생들이 대거 참가한 일 등은 우리 민족이 약자의 연대를 통해 역사의 위기를 극복해왔음을 보여준다. 특히 약자의 연대는 강자의 일방적 횡포를 멈추게 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코로나 시대의 건강한 영화를 마주하다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은 건강한 영화다. 약간의 욕설과 호프집 장면이 나오는 바람에 12세 이상 관람가 등급을 받았지만 부조리한 현실에 좌절하지 않고 성장을 위해 노력하며 불의한 일에 항거하는 용기있는 인간상을 보여주고 있어서 나이 어린 사람에게조차 기독교의 선한 가치관을 제공해줄 수 있다. 첫째, 약자와 병자를 향한 감정이입에 성공한 주인공의 모습에서 우리는 육체적 건강의 가치가 공유되어야 함을 느낄 수 있다. 공장에서 방류된 페놀로 인해 마을 주민들이 피부병과 괴질 그리고 흉작의 고통 속에 있는 사실을 외면하지 않는 이자영의 캐릭터는 그리스도인이 지녀야 할 성격의 원형과도 같다.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롬12:5)는 말씀은 그리스도인이 세상의 마음을 얻는 비결이다. 갈등의 사회에서 고소와 고발, 폭력사태에 이르지 않는 비결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로마서 12장 5절을 실천하는 일이다. 감정의 공유는 마음을 하나로 만들고 문제의 원인에 보다 가까이 다가가 해결점을 쉽게 찾을 수 있게 만든다. 영화 속 이자영은 회사의 말단 사원으로 회사가 시키는 대로 오염에 따른 마을 주민들의 실태를 파악을 하고 보고하는 것으로 끝나면 되지만 주민들의 끝나지 않은 고통을 외면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녀는 주민의 고통이 자신의 마음에 와닿는 감정이입을 이루었던 까닭이다. 둘째, 상고출신의 여사원이라는 신분에 따른 차별을 극복하려는 사회적 건강이 영화 속에 존재한다. 고졸 사원들은 남들보다 일찌감치 사무실에 출근하여 청소하는 것으로 하루 일을 시작한다. 담배꽁초가 가득한 재떨이를 비우거나 상사의 담배 심부름도 그들의 몫이다. 대졸사원과 구분하기 위해 그들만의 유니폼을 입고 10년을 일해도 대리 승진을 할 수 없는 현실을 타파하기 위해 토익공부에 나서기도 한다. 영화의 배경이 1995년이라서 가능한 일일까? 그렇지 않다. 2020년의 현실에서도 적용되는 사항이다. 성경은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3:28)라고 말한다. 그리스도의 신앙 안에서 인종 간의 차이도 남녀 성별의 차이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 교회는 현실에 존재하는 집단 가운데 사회적으로 가장 건강한 집단이 되어야 한다. 셋째, 불의(不義) 앞에서 오래 고민하지 않고 용기를 갖고 도전하는 주인공들의 모습에서 정신적 건강이 어떤 것인지 영화는 보여준다. 학력이 정신적 건강을 담보하지는 못한다. 사회생활에서 정신적으로 건강함 사람의 특징은 자기 분야에 전문적 지식을 갖고 도덕적 행동을 통해 남의 손가락질을 받지 않는 사람들이다. 영화 속에서 이자영은 커피만 잘 타는 것이 아니라 본인이 속한 생산관리 3부의 서류철을 꿰뚫고 있다. 정유나는 자존감 높은 달변가로서 마케팅에 필요한 문구를 만드는데 재능을 발휘한다. 그리고 영화 속 3총사의 마지막 심보람은 비록 가짜 영수증을 메꾸는 회계부에서 일하지만 수학 올림피아드 우승에 빛나는 실력을 갖고 아무도 회계부정을 저지르지 못하도록 영수증 처리 자동화 시스템을 계획하고 있다. 이 세 사람의 행동에 전문성이 돋보이는 한편으로 불의가 없고 도덕이 더 해질 때 사회적 두려움은 사라지고 정신적으로 건강한 상태에 이르게 됨을 볼 수 있다. 넷째 영적인 건강은 관객의 몫이다.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은 세상 사람을 만날 수 있는 접촉점으로 훌륭하다. 그런데 영화 속 주인공들의 행동 속에는 기독교적인 가치관을 공유하는 것들이 제법 많다. 그들과 함께 영화를 보며 영화의 배경에 나타난 사회의 문제들이 기독교 안에서 잘 해결되고 있음을 가르칠 수 있어야 한다. 성경을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교리공부는이해되기 어렵지만,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에서 신분의 차별을 극복하는 일이나 연약한 자들이 하나님이 주시는 힘과 지혜를 따라 연대활동을 하거나 불의한 권력자와 맞서는 일들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사람들과 쉽게 공감대를 형성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기회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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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11-03
  • [영화]전쟁 영화 속에서 발견한 ‘선한 목자’
    U보트와 코로나19는 닮았다 영화는 항상 그 영화를 경험한 시대적 상황 가운데서 읽힌다. 과거 역사를 다룬 사극을 보느냐 혹은 미래의 공상과학 영화를 보느냐와 상관없이 영화는 그것을 보는 사람에게 현재적 의미를 전달하며 현재의 상황을 판단하고 행동하는 데 관여한다. 전 세계가 코로나19라는 공통의 적을 만나 싸우고 있는 현실에서 대중에게 주목받는 영화들은 그 장르나 내용에 상관없이 이 전염병으로 둘러싸인 현실을 인식하게 만드는 역할을 하고 있다. 좀비 영화 <반도>를 볼 때는 좀비처럼 급속히 번져가는 코로나 바이러스의 공포를 반영한다고 생각했고, 디즈니의 실사영화 <뮬란>을 볼 때는 오랑캐와 싸우는 여성 주인공 뮬란에게서 코로나 방역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우리나라의 방역청장을 보는 느낌을 받았다는 얘기가 전해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코로나19의 현실을 영화 속 배경에 대입시키는가 하면 난세의 위기로부터 우리를 구원할 영웅을 영화는 고대하게 만들고 있다. 톰 행크스가 이차대전 중 미해군의 함장으로 나오는 영화 <그레이 하운드>는 비록 그 배경이 78년 전에 일어난 일이라 할지라도 코로나19의 위기 속의 현대인들이 동의할 수 있는 현재적 의미 안에서 읽혀질 수 있다. 1942년 겨울, 손이 얼어붙을 것 같은 대서양 한복판에서 독일의 잠수함 U보트로부터 연합군 물자를 실은 37척의 상선을 보호하기 위해 크라우제 함장(톰 행크스)은 호위함 그레이 하운드의 지휘를 맡아 대서양을 횡단하여 영국으로 출항하게 된다. 북대서양의 위험지역(블랙 피트)은 독일군의 잠수함을 탐지해서 격침시키는 초계기의 보호지역으로부터 벗어나 있는 까닭에 오직 호위함의 음파탐지기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한계에 직면하고 만다. 영화 초반부에서 크라우제 함장은 U보트를 탐지하여 격침시키는 전과를 올려 병사들의 사기를 올렸지만, 이내 어둠 속에서 U보트의 공격으로 불타는 아군의 수송선을 목격할 수밖에 없는 두려움의 상황에 직면하고 만다. 이 영화를 보는 사람들은 U보트가 코로나19라는 바이러스의 실체를 은유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느낌을 받게 된다. 첫째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어딘가 숨어 있다가 갑자기 공격하여 생명의 위협을 준다는 점에서 이 둘은 비슷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 U보트는 잠수함 탐기 기술이 발달하지 못한 2차대전 중 연합군 함대와 상선단에 치명적인 위협을 가했다. 영화 속에도 등장하지만 독일은 U보트를 이용해 이른바 울프팩(wolfpack·이리떼) 작전을 펼쳤다. 바닷속에서 숨어서 기회를 엿보다가 연합군의 상선단이 나타나면 자기들끼리 정보를 교환하며 동시에 공격하는 방식으로 엄청난 피해를 입혔다. 당시 영국은 2330만 톤의 선박을 잃어버렸는데 이는 영국 경제를 몰락시킬만한 규모의 피해였다. 둘째, 연합군은 U보트의 기만전 때문에 그 위치와 정체를 파악하는데 어려움을 겪었다는 점도 코로나19와 비슷하다. 연합군의 구축함이 음파탐지기로 탐색한 U보트는 실제가 아니라 아이스박스만 한 크기의 기만체로 스크루처럼 작동하는 바람에 연합군 함정은 이를 U보트로 착각하여 엄청난 폭탄을 투하하게 되고 끝내는 탄약고를 비우게 하고는 엉뚱한 곳에서 상선을 공격하곤 했다. 자신과 비슷한 것을 만들어 혼란에 빠뜨리게 하는 전략인 셈이다. 현대의학이 바이러스에 대한 백신이나 치료약을 개발할 때 경험하는 가장 큰 어려움은 바이러스의 변이가 활발할 때다. 백신이나 치료제가 완성을 코앞에 둘 때면 변종 바이러스가 출현하여 이전에 연구한 결과들을 무용지물로 만들어 버리곤 한다. 바이러스의 기만전술인 셈이다. 셋째는 U보트는 야간에 호위함과 수송선단 사이로 침투하여 피아식별이 불가능하게 만드는 혼란전술을 펼치는데 이는 코로나19에서 겪는 사회갈등을 보는 듯하다. 즉 영화 속에서 호위함 그레이 하운드는 U보트를 공격하다 오히려 아군의 오인사격을 받고 만다. 아군이 아군을 공격하는 꼴이다. 지금 대한민국은 전국민이 코로나19와 싸우는 모양새 같지만 그 내부를 들여다보면 코로나19의 대책을 두고 정치인과 국민들이 분열되어 서로를 공격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정작 싸워야할 상대는 잊어버리고 아군끼리 싸우다 결국 코로나19가 퍼져가는데 좋은 일을 시켜주는 셈이다. 기도와 성경 인용이 자연스러운 할리우드 전쟁영화 <그레이 하운드>는 일반 전쟁영화이면서 동시에 기독교인들에게 신앙의 자부심을 느끼게 만드는 수작이다.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전쟁터로 향한 지휘관의 마음가짐과 전쟁에 임하는 기독교인의 자세가 기도와 성경 말씀을 통해 영화 곳곳에서 드러나기 때문이다. 영화는 첫 장면부터 크라우제 함장의 기도하는 모습으로 시작한다. 거친 파도를 가르며 전장으로 나가는 호위함의 함장실에서 그는 무릎을 꿇고 이렇게 기도한다. “주여! 악이 저를 지배할 수 없게 주의 천사를 제게 보내시어 저와 함께하소서. 아멘.” 목숨을 건 전쟁의 상황인 동시에 아직까지는 기독교신앙이 낯설지 않게 느껴졌던 시대인 것을 감안하면 영화제작자는 시대적 배경을 염두해 두고 함장의 기도를 소품처럼 처리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레이 하운드> 함장이 가진 신앙적 면모는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세밀히 그리고 확대해서 보여준다. 함장실 방안 거울에는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히13:8)는 성경 구절이 꽂혀있다. 또한 함장은 식사 때마다 기도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더욱 인상적인 것은 함장이 식사 기도를 할 때 음식을 가져온 흑인 조리장도 함께 기도하며 ‘아멘’으로 화답하는 점이다. 그 누구도 이 상황 속에서 어색함을 느끼는 사람은 없다. 오히려 함장의 신앙은 점점 함정 내에서 당연하게 여겨지면서 부하 장교인 부장 마저 함정의 전기관 고장을 보고할 때 성경 구절을 인용하는 일까지 벌어진다. “함장님, ‘밤이 오리니 그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입니다”(요9:4) 전기관이 고장나는 바람에 어둠 속에서 있어야 함을 설명할 때 부장은 그가 평소에 기억하던 성경 구절을 인용하고 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역시 처음 장면을 반복하며 함장의 기독교 세계관이 단순한 소품이 아니라 영화의 주제와 맥락을 같이함을 나타낸다. 함장은 고된 전투가 끝나고 호위 임무를 벗어나자 함장실에 들어가 침상 앞에 성경책을 놓고는 무릎 꿇고 기도한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시여, 이날을 영광스럽게 지켜주셔서 감사합니다. 당신의 손에 제 영혼과 몸을 맡깁니다. 아멘.” 영화는 이어서 시작 부분과 마찬가지로 히브리서 13장 8절의 성경 구절이 새겨진 메모를 비춘다. 기도와 성경으로 시작해서 동일한 장면으로 끝을 맺는 수미쌍관(首尾雙關)의 형식을 갖추고 있다. 이것은 완벽하게 기독교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일이다. 생각할수록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톰 행크스에게 무슨 일이라도 일어난 걸까? 톰 행크스와 성경적 영웅을 말하다 <그레이 하우드>에서 톰 행크스는 단지 개런티를 받는 주인공의 역할에 머문 것은 아니었다. 톰 행크스는 이 영화의 각본을 썼다. 주연 배우가 자신이 나올 영화의 각본을 썼다는 뜻이다. 영화가 제작되기 7년 전 톰은 우연히 C. S. 포레스터의 소설 ‘굿 셰퍼드(선한 목자)’를 읽고 영화화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그는 정성을 다해 썼고 쓰는 내내 각본의 내용이 영화 장면처럼 머리에 떠올랐음을 밝히기도 했다. 철저한 기독교 신앙인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4천만 달러짜리 전쟁영화의 주인공일 뿐만 아니라 각본에 참여했다는 사실은 이 영화가 자신의 세계관에 부합한다는 의미를 갖는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이다. 그렇다면 톰 행크스의 삶에 기독교 세계관이 영향을 주고 있다고 볼 것인가?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전조는 이미 나타난 적이 있다. 톰 행크스가 <그레이 하운드>를 찍기 직전의 영화는 미국의 공영방송 PBS의 어린이 프로그램 진행자 프레드 로저스(Fred Rogers) 목사의 인간미 넘치는 삶을 보여주는 <뷰티풀 데이 인 더 네이버후드>(A Beautiful Day in the Neighborhood, 2019)였다. 로저스 목사는 TV쇼 <로저스 아저씨의 이웃>(Mister Roger's Neighborhood)이라는 인기 프로그램을 통해 성경이 말하는 삶이 무엇인지를 어린이들에게 음악과 인형극 그리고 놀이로 가르친 사람이었다. 톰 행크스는 로저스 목사 역을 맡으면서 상처 입은 사람을 돌보고 어린이들의 친구가 되어 그들과 함께하는 친근한 이미지를 보여주었다. 톰 행크스가 과연 기독교 신앙에 얼마나 관심이 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인터넷에 소개된 톰 행크스의 공식적인 종교는 그리스 정교회로 알려져 있다. 그는 1988년 지금의 부인인 리타 윌슨과 재혼하며 아내의 가족들이 모두 믿고 있었던 그리스 정교회로 개종했다. 톰 행크스의 최근 영화들과 그의 신앙이 그리스 정교회와 연계되었다는 사실을 종합해보면 적어도 그가 생각하는 기독교 영웅의 이미지는 ‘선한 목자’로 귀결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요한복음 10장에 나오는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버릴 만큼 사랑과 돌봄 그리고 희생하는 존재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하기도 한다. 톰 행크스가 주연으로 등장한 영화들 가운데 <라이언 일병 구하기>(1998)의 밀러 대위나 <설리:허드슨 강의 기적>(2016)의 설런버거 기장, 그리고 <뷰티풀 데이 인 더 네이버후드>(2019)의 로저스 목사와 <그레이 하운드>의 크라우제 함장은 모두 ‘선한 목자’의 이미지를 가진 기독교적 영웅의 모습을 갖고 있다. 늑대처럼 달려드는 악으로부터 사람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뿐만 아니라 어느 누구도 상처받지 않도록 관심을 기울이고 돌보는 모습은 힘자랑하는 ‘어벤져스’의 영웅 보다는 성경에 나타난 ‘선한 목자’의 이미지에 가깝다. U보트가 넘나드는 죽음의 바다를 항해할 때 당시 수송선들이 호송함 그레이 하운드를 보며 의지하고 안심했을 모습을 생각하면 코로나19 가운데 대한민국 국민을 지켜줄 선한 목자를 찾게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그러면 우리에게 선한 목자는 있는가? 만일 생각이 나지 않는다면 당신이 선한 목자 역을 맡는 것은 어떨까? 코로나 시대에 성경적인 영웅의 등장을 우리는 간절히 바라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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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11-02
  • [영화] 세상은 목회자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돈과 신앙 사이에서의 갈등 2018년 부산국제영화제 초청작인 강동헌 감독의 <기도하는 남자>는 개척교회 목회자의 금전적 어려움과 이에 따른 파격적인 상상과 행동을 보여주는 바람에 화제를 모은 영화다. 금년 2월에는 극장 개봉에 성공했지만 1,661명의 관객을 동원하는데 그친 것은 당초 기대에 어긋난 일이었다. 아니 어쩌면 한국 목회자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가 노출되었던 까닭에 적은 관객이 본 것이 다행인지도 모른다. 다만 6월 서울국제사랑영화제에서 재조명 받으며 개척교회 목회자의 현실을 되짚어 보는 기회가 되었던 것은 그나마 의미 있었던 일이었다. 그렇다고 이 영화가 기독교 영화로서의 높은 가치를 인정받았다든지 아니면 일반 관객들이 좋아할 만한 대중성을 인정받았다는 뜻은 아니다. 왜냐하면 기독교 영화 같으면서도 뭔가 아닌 것 같고, 일반 영화라 하기에는 교회를 배경으로 목회자의 신앙관이 영화의 줄기를 형성하는 까닭에 기독교인이 봐야 하는 영화처럼 느껴져서 교회와 세상 가운데 어디에 위치해야 하는지 아리송하기만 한 까닭이다. 기독교 영화라면 어떤 갈등 속에서도 궁극적으로는 기독교의 가치관이 드러나야 하지만 이 영화는 갈수록 우리가 목회자에게 기대하는 신앙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쪽으로 가는 바람에 관객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든다. 그렇다고 한국교회를 향한 비판적 관점을 제기하여 회개와 회복을 촉구했던 신연식 감독의 <로마서 8:37>과 같은 부류의 영화에 속하는 것도 아니었다. 결국 <기도하는 남자>는 장모의 수술비를 마련하려는 목적이지만 돈에 집착한 개척교회 목회자가 일으킨 파국과 왜곡된 욕망을 그린 일반 영화로 볼 수 밖에 없다. 즉 이 영화는 목사 대신 다른 어떤 종류의 직업에 속한 사람을 대입해도 비숫한 그림이 나올 수 있는 영화란 사실이다. 태욱(박혁권)은 주일 예배 출석 성도가 5명에 불과한 개척교회 목사다. 하나님이 주시는 시련을 기도로 감당하며 하루 하루 견뎌내지만 밀린 월세에다 장모(남기애)의 간이식 수술비용이 당장 필요한 현실은 그를 대리운전 기사로 내몰았다. 5천만 원에 이르는 수술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그는 밤새 대리운전을 하고 교회에 와서 잠깐 눈을 붙이는 생활을 반복한다.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아내 정인(류현경) 또한 어떻게든 자신의 간을 어머니께 이식하는 수술이 진행될 수 있도록 열심히 일하지만 5천만 원은 고사하고 당장 2백만 원이 드는 검사비가 부담스러운 현실이다. 여기까지는 드라마의 전개 과정에서 아무런 문제가 없다. 기독교 영화 쪽으로 방향을 돌려 개척교회 목회자가 겪을 수 있는 경제적인 어려움의 현실을 조망하고 신앙과의 갈등을 묘사하며 이것이 자신의 신앙을 성장시키고 목회철학을 새롭게 정립하는 방향으로 설정된다면 훌륭한 기독교 영화로 남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기독교와 목회에 대한 이해의 부족 강동헌 감독은 두 가지의 치명적인 부족함을 안고 있다. 하나는 기독교 신앙 및 교회에 대한 이해와 경험이 없는 점이다. 그가 씨네21과의 인터뷰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어릴 때 여름성경학교에 몇 번 가본 게 교회 경험의 전부임을 밝혔고, 다만 영화감독의 삶이 개척교회 목사의 것과 비슷한 면이 있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대형교회가 아닌 개척교회 목회자와 영화감독 모두 경제적으로 어려운 가운데서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만을 갖고 돈에 대한 유혹과 갈등을 다루었던 셈이다. 그래도 영화에 나타난 개척교회에 대한 세밀한 묘사와 신앙의 정황에 대한 이해는 신학대학 출신의 제작부장의 도움을 받았음을 언급했다. 이것은 개척교회 목회자라면 한 번쯤 겪었을 법한 돈과 신앙 사이의 갈등을 목회에 대한 소명 가운데서 깊이 다루지 못하는 한계에 봉착하고 마는 결과를 가져왔다. 또 한 가지의 부족함은 처음 장편영화를 제작하는 데서 오는 창작에 대한 부담감이 대중성과 작품성 모두의 가치를 비켜가게 만들었다. 누구든지 처음 극장용 상업영화를 만드는 감독이라면 관객들이 많이 찾는 영화를 만들어서 대중성의 가치를 인정받고 싶은 한편으로 영화의 메시지나 완결성에서 비평가로부터 칭찬을 듣고 싶은 마음에 작품에 대한 욕심을 내게 마련이다. 이때 초보 감독이 저지르는 실수는 여기저기 여러 영화의 인상 깊은 장면이나 이야기를 가져다 뒤섞는 일이다. <기도하는 남자>의 전반부는 이미 전윤수 감독의 <베사메무초>(2001)에서 본듯한 장면들이 전개되었다. 빚보증을 잘못 서는 바람에 집을 날리게 될 처지가 된 남편(전광열)은 개인 투자자의 아내로부터 성적 유혹을 받는 한편, 1억을 빌리는 조건으로 아내(이미숙)는 성공한 사업가로 변신한 대학 선배로부터 잠자리를 요구받았었다. 아이들이 줄줄이 있는 가정에서 하루아침에 거리로 내몰릴 위기에 처한 가정의 부부라면 거절하기 힘든 유혹이었음이 분명하다. <기도하는 남자>의 감독은 5천만 원을 구하기 위해 성적 유혹을 받는 대상을 목사의 아내로 설정한 대신 목사는 유혹을 넘어 범죄를 도모하는 악인의 캐릭터로 자신만의 영화적 독창성을 구현해 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돈 때문에 성직자가 얼마나 야비하고 비인간적인 범죄자로 변신할 수 있는지를 보여줌으로써 이전의 어떤 영화에서도 볼 수 없었던 캐릭터를 구축하고 있는 것이다. 돈과 성에 사로잡힌 목회자의 정체성 <기도하는 남자>의 가장 흥미로운 장면은 태욱이 대리운전을 하다 술 취한 커플을 태우게 되는데 그들이 다름 아닌 대형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신학교 후배와 그의 내연녀였던 것. 아버지로부터 대형교회를 물려받은 후배 목사 동현은 태욱을 알아보고 애들 과자라도 사주라며 돈을 더 얹어주지만 손과 달리 입은 신학교 때 잘나가고 존경스러웠던 선배가 겨우 개척교회나 하면서 대리운전이나 하고 있느냐는 모멸감 섞인 말을 내뱉는 바람에 태욱은 마음에 상처를 입는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불륜의 현장을 들킨 동현은 거액의 현금을 제안하고 태욱은 상한 자존감과 장모의 수술비를 한꺼번에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게 된다. 이때부터 영화는 멋을 부린 조폭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장면들이 이어진다. 태욱은 캠코더로 동현의 불륜현장을 담아 장모 수술비에 필요한 5천만 원과 맞바꾸려다 동현이 고용한 일당들에게 납치되어 얻어맞고는 속옷 차림으로 인적이 드문 길에 버려진다. 태욱은 나중에 동현에게 자신이 당했던 방식 그대로 되돌려주는 한편으로 지금까지 문제의 발단이 된 장모를 청부 살해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실행 직전까지 가게 된다. 아직 영화를 보지 않은 사람들 앞에서 줄거리나 내용을 미리 알려주는 행위를 스포일러( spoiler)라 한다. 스포일러는 무단 복제 만큼이나 영화의 세계에서는 금지된 사항이다. 영화에 대한 흥미를 떨어뜨려서 관람을 회피하게 만드는 까닭에 예비관객이나 제작자에게 손해를 입힐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영화의 스포일러는 오히려 한국의 기독교인과 목회자들에게 어떤 영화인지를 보고 싶게 만드는 역작용을 일으킬 수 있다. 개척교회 목사로서 숨기고 살았던 감정을 토해내는 한편으로 못마땅한 일이 많지만 주위 사람들에게 화를 내지도 못한 채 억지 웃음을 지으며 살았던 평소 볼 수 없었던 목회자의 내면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세상이 목사를 바라보는 두 가지 방식 기독교 영화도 아니고 작품성 높은 세상 영화도 아닌데 굳이 <기도하는 남자>에 대한 글을 지면에 실은 이유가 무엇일까. 첫째는 영화 속의 목회자들의 이미지는 세상이 기독교 성직자들을 바라보는 시각을 반영하기 때문이며, 둘째는 코로나 19 사태 속에서 사회의 믿음을 져버리고 방역을 소홀히 여기다 확진자를 배출시킨 몇몇 교회와 목회자의 모습이 영화 중간중간에 떠오르기 때문이다. 영화는 상상력의 산물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현실의 바탕을 둔 상상력이며, 영화적 상상력은 개연성, 즉 그럴듯하다고 여겨질 때 관객의 이해를 기대할 수 있다. 즉 <기도하는 남자>에 등장한 두 목회자의 이미지는 감독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지만 어디까지나 현실이라는 바탕 위에서 창작된 인물이다. 이때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목사는 부자교회의 목사와 가난한 교회의 목사로 양분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세상 사람들은 부자교회 목사는 아버지를 잘 만난 덕에 고급 승용차를 타고 다니지만, 가난한 교회의 목사는 아무리 애를 써도 남의 차를 운전하는 대리기사를 벗어나기 힘든 상황이라 생각한다. 마치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큰 결점인 양극화 현상을 교회에도 적용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런데 더욱 중요한 사실은 교회를 바라보는 세상의 시선에는 큰 교회 목사와 작은 교회 목사 모두 윤리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보는 점이다. 대형교회 목사 동현은 성적으로 타락했고 개척교회 목사 태욱은 돈 때문에 범죄 저지르기를 서슴지 않는다. 동현은 선배 목사인 태욱에게 “나는 형을 동경했다”며 타락한 자신과 달리 이상적인 성직자가 한 사람쯤은 남아 있기를 기대하는 마음을 엿볼 수 있다. 영화 속 목회자는 세상의 기대를 여지없이 무너뜨렸다. 잘못된 목회자를 등장시킨 영화는 극장 밖을 나오면 잊어버릴 수나 있지만, 코로나 19의 전염지가 되어버린 교회와 세상의 걱정거리로 남은 목회자와 함께 살아야 하는 지금의 현실은 어쩌란 말인가! 한국교회는 과거의 신뢰를 회복할 수 있을까? 아니 이웃에게 주님의 사랑을 말하며 전도하는 일이 앞으로 가능하기나 할까? 영화를 보며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이 멸망을 앞에 둔 ‘소돔과 고모라’와 같다는 생각을 한 건 지나친 비약일까? 성경이 말하는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한 이유는 의인 열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창1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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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9-15
  • [영화] 영화 ‘반도’와 좀비의 시대를 살아가는 법
    한국영화계를 살리는 좀비 연상호 감독의 영화 <반도>가 개봉 일주일 만에 2백만 명의 관객을 돌파했다. 코로나19가 전국을 휩쓴 이후로 2백만 명의 스코어를 기록한 영화는 <반도>가 처음이다. 평소 같았다면 여름방학용 특수를 노린 블록버스터 영화 정도로 여겨졌을 법 하지만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 한국영화계가 심각한 침체 상태를 겪고 있는 상황 가운데서 일어난 일이라 극장가는 심폐소생술이라도 받은 듯 영화산업의 회생을 기대하는 분위기가 가득하다. 그도 그럴 것이 2020년 상반기 전체 관객 수가 지난해 대비 무려 70.3%나 감소한 데다 그나마도 코로나19로 인한 사회적 거리두기가 시작되기 전 영화들이 거둔 성적이 대부분이라서 <반도>에 거는 기대는 클 수밖에 없다. 두 가지 면에서 한국의 극장가는 <반도>를 주목하고 있다. 첫째는 사회적 거리 두기가 일상화된 상황에서 극장 내에서의 전염에 대한 관객의 두려움을 해소해줄 수 있는가에 일차적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정부는 코로나19의 예방책으로 ‘밀집, 밀접, 밀폐’ 등 ‘3밀’ 환경을 피할 것을 강력하게 권고하는 상황에서 일반 영화관들은 바로 ‘3밀’에 최적화된 환경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아직까지는 극장을 매개로 한 집단감염의 사례가 보고되고 있지 않지만 블록버스터 영화에 관객이 몰릴 경우 발생할 수 있는 위험성을 배제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반도>는 앞으로 코로나 시대에도 천만 관객 동원이 가능한가에 대한 궁금증을 해결할 수 있는 바로미터가 될 가능성이 높다. 둘째는 스트리밍 서비스(OTT)로 몰려간 관객의 입맛을 극장으로 되돌릴 수 있는지 여부가 <반도>에 달려 있다. 코로나19로 인해 집에만 갇혀 있던 영화 관객들을 위로한 것은 넷플릭스나 왓챠 같은 인터넷을 통해 영화를 볼 수 있는 스트리밍 서비스 업체들이었다. 넷플릭스와 경쟁하는 토종 스트리밍 서비스 업체인 왓챠만 하더라도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전용 온라인 상영관을 개설하여 9천여 건의 유료결제 티켓을 판매함으로써 코로나19로 인해 영화관을 찾지 못한 영화제 관객을 끌어들이는데 성공했다. 국제영화제에서만 볼 수 있는 영화들을 온라인으로 볼 수 있는 관객들이 과연 코로나 감염의 위험을 무릅쓰고 다시 극장을 찾을 것인가에 대한 판단 여부가 <반도>에 달려 있는 것이다. 좀비와 액션의 결합체, ‘반도’ <반도>는 연상호 감독이 만든 <부산행>(2016)과 <서울역>(2016)에 이어 좀비를 소재로 삼은 세 번째 영화다. <부산행>이 1157만 관객을 모으며 한국형 좀비라 일컬어지는 K-좀비를 탄생시킨 중심에 서 있다면, <서울역>은 애니메이션으로 <부산행>에 앞선 시점을 보여주는 프리퀄(Prequel)이 되고, <반도>는 <부산행>의 4년 뒤 모습을 보여주는 속편으로 시퀄(sequel)이 되는 셈이다. <반도>는 좀비의 세상으로 변한 서울을 배경으로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생존을 위한 투쟁과 욕망을 담았다. 한반도가 좀비로 뒤덮이는 것을 피해서 홍콩으로 도피했던 정석(강동원)은 일행과 함께 달러가 잔뜩 들어있는 트럭을 회수하기 위해 서울에 잠입하게 된다. 그러나 정석 일행은 조직화 된 집단을 이루며 살아가는 631부대를 이끄는 서 대위(구교환)와 황중사(김민재) 일행과 부딪히게 되면서 좀비와 인간성을 상실한 인간집단 양쪽으로부터 쫓기는 신세가 되고 만다. 마침 두 딸의 어머니이자 좀비는 물론 야만적 생존자들과도 싸우기를 주저하지 않는 여전사 민정(이정현)의 가족들을 만나 구사일생으로 위기를 모면하게 된다. <반도>는 인간과 사회의 총체적 위기를 다룬 종말적 세상의 모습을 그린 영화다. 좀비를 내세워 이목을 집중시켰던 <부산행>과는 달리 <반도>는 강동원을 내세워 액션으로 승부를 걸고 있는 점도 다르다. <반도>를 보며 디스토피아의 세계를 다룬 이전 영화들인 <매드맥스-분노의 도로>(2015)나 <일라이>(2010)를 비롯한 많은 영화들을 떠올리게 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할리우드가 만들어 낸 미래의 종말적 이미지로 부터 벗어나 독창적인 상상을 하기 보다는 대중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안전한 장르의 특성에 기대는 모습이다. 이미 K-좀비를 통해 한국형 좀비영화의 특징을 세상에 보여준 만큼 이번에는 세계화를 겨냥하여 사람들이 예측 가능한 종말적 세상의 모습들을 그림으로써 서로 다른 문화를 가진 세계인들을 이해시키려는 의도가 강하게 나타난다. <반도>가 개봉 전에 이미 185개국에 선판매되었고 개봉 당일 대만과 싱가폴, 베트남 등 아시아 주요국에서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하는 성과를 올릴 수 있었던 것도 좀비가 등장하는 액션물이라는 장르적 특성을 반영한 까닭이다. 코로나 시대와 닮은 좀비 영화 <반도>는 코로나19로 인해 웃을 수 있는 영화다. 코로나 바이러스와 좀비는 비슷한 면이 적지 않은 까닭에 관객의 현실적 공감대를 형성하는데 별 어려움이 없기 때문이다. 첫째는 좀비의 집단적 공격성과 빠르게 전파되는 특성은 코로나19의 전염력을 닮아 공포감을 현실화 시킨다. 한 두 명의 좀비가 아니라 수십 명에서 수백 명이 한꺼번에 달려드는 모습에서 관객들은 공포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코로나19가 세계를 강타한 지 반년이 지났지만 7월의 경우 신규 확진자가 하루 23만 명을 넘는 등 역대 최고 기록을 갱신하고 있는 중이다. 어느 영화나 좀비가 처음 물어뜯은 대상은 가족과 이웃들이다. 늘 옆에 있는 사랑하는 사람이 좀비가 되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장면은 가슴 아픈 일인 동시에 극도의 공포심을 유발시킨다. 코로나 바이러스의 감염경로 또한 이와 다르지 않다는 점에서 위기의 상황에서 위로와 힘이 되어줄 존재가 언제든 가장 무서운 존재로 돌변할 수 있다는 사실은 종말적 상황을 연상시키기에 충분하다. 둘째는 코로나19에 희생당하는 사람들과 권력자들의 면모는 좀비 영화에서처럼 극단적 대비를 이룬다. 넷플렉스를 통해 K-좀비 신드롬을 불러일킨 영화 <킹덤>시리즈에서 좀비가 된 사람들은 먹을 것이 없어서 인육을 먹다가 역병에 걸린 사람 가난한 양민들이다. 이들을 돌보고 이끌어야 할 권력자들은 도망을 가거나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채 양민들을 사지로 내몰아 버린다. <킹덤>을 쓴 김은희 작가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굶주림에 사체를 먹기 시작한 백성들을 이야기 전면에 세워 권력층의 부조리를 넘어 계급적 폐해를 그리는 데까지 나아갔다고 밝힌 것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셋째는 좀비는 퇴치되지 못한 채 함께 생존해야 하는 코로나19의 현실과 닯았다. 코로나19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라는 전문가들의 전망은 좀비와 함께 살아가야 하는 인간의 절망적인 모습으로 끝을 맺는 좀비 영화와 다르지 않다. 지금까지 나온 그 어떤 좀비 영화도 원래의 세상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보여준 일은 없다. <반도>의 사람들은 좀비와 싸우거나 좀비를 피해 달아날 뿐이다. 그리스도인은 좀비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좀비는 무엇보다도 자본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의 불안한 심리를 형상화한 이미지란 사실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현실 세계에서 좀비는 존재하지 않지만, 좀비같이 인간의 삶을 송두리째 빼앗아가는 잔혹한 자본의 논리는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 좀비보다 무서운 것이 인간이며, 돈에 눈이 먼 인간은 다른 인간들을 물어뜯고 자신처럼 돈의 노예로 만들어 버린다. 한국 최초의 좀비 관련 석사학위 논문인 이희수의 ‘현대사회의 초상으로서의 좀비’에서 저자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에 집착하고 돈을 끊임없이 소비함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현대인들의 모습이란 무차별적으로 인간을 뜯어 먹고, 웬만해서는 죽지 않는 좀비에 비유하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의 비인간적인 탐욕이 무서운 것은 영화 속 좀비처럼 그들의 속성을 지닌 치명적인 바이러스를 전파시킨다는 점에 있다. 좀비에게 물린 사람은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똑 같은 좀비가 되어 인육을 찾아 나선다. 전파와 감염이 주는 공포는 좀비가 은유하는 인간 탐욕의 결과가 결국에는 인간 세상을 파괴할 수 있다는 종말에 대한 이해로 발전시키고 있다. 좀비로 가득찬 세상을 향해 성경 말씀을 들려주는 일은 또 다른 코미디 영화를 만드는 일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좀비가 상징하는 자본주의 사회의 탐욕과 소비 그리고 그 속에서 불안하게 살아가는 현대인의 마음을 돌보는 일에는 하나님의 말씀 외에 다른 대안은 없어 보인다. 왜냐하면 성경은 인간이 죄로부터 문제가 시작되었으며 그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 한 불안은 계속될 수 밖에 없음을 명확히 지적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래의 종말적 상황을 다룬 영화 <일라이>(2010)에서처럼 성경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문명개화 능력도 가지고 있지 않은가! 먼저 자본주의 사회의 어두운 단면을 상징하는 탐욕스런 좀비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성경의 말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첫째 자족하는 법을 배우는 일은 우리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갈 때 좀비 같은 행태로부터 멀어지는 비결이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빌4:11-12) 자족이란 개인의 만족만을 의미하는 것이 하니라 내 인생을 돌보시는 하나님의 손길에 의탁하는데서 오는 영적 위로를 동반한다. 둘째, 그리스도의 평안에 거하는 삶은 좀비가 판치는 세상으로부터 불안감을 불식시킨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14:27) 영화 속에서 좀비는 어둠에 거하다가 빛과 소리에 공격적 반응을 보이며 언제 어디서든 부지불식간에 나타난다. 진리의 빛과 복음의 소리가 들리면 사정없이 물어뜯기 위해 달려드는 무신론이 팽배한 자본주의 시대를 사는 일은 두려울 수 밖 없는 인생인 것이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잃어버릴 때 나타나는 현상도 그것과 다르지 않다. 좀비로부터 도망다니거나 아니면 좀비가 될 수밖에 없는 영화 같은 세상에서의 참 평안과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찾을 수 밖에 없는 일이다.
    • 문화
    • 영화
    2020-08-07
  • [영화] 우리에게는 좋은 이웃이 필요하다
    공영방송에서 복음을 전하는 법 교회와 매스미디어는 애증의 관계를 맺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매스미디어가 현실세계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고 복음전파를 위한 활용가치 또한 높지만, 아울러 기독교 신앙에 부합하는 면모를 보여 주고 있지는 못한다고 보는 시각을 갖고 있다. 오늘날 매스미디어는 상업주의에 물드는 바람에 선정성과 폭력성뿐만 아니라 미움과 복수가 사랑과 정의로 위장한 모습 등은 기독교의 가치관과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경우가 적지 않은 까닭이다. 그렇다고 그리스도인들이 매스미디어에 완전히 등을 돌린 것은 아니었다. 문화명령(창1:28)과 선교명령(마28:19-20)에 따라서 어떻게든 매스미디어 속으로 들어가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 위한 시도를 멈춘 적은 없었다. 때에 따라서는 기독교 방송과 같은 대안문화를 개발하는 한편으로 미디어비평과 시청자운동 그리고 훌륭한 기독교 신앙으로 무장한 그리스도인들을 매스미디어 세계 속으로 보내 제작의 영역에서도 변화를 도모하기를 쉬지 않았다. 세속적 사회에서 매스미디어를 대하는 그리스도인의 가장 어려운 일 가운데 하나는 공영방송에서 복음을 드러내는 일이다. 예를 들어 KBS와 같은 공영방송에서 목회자가 나와서 예수 믿고 구원받아야 한다는 전도성 발언을 내보는 일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종교의 자유가 헌법적으로 보장받고 있지만 다종교 사회에서 다른 종교와의 형평성 논란을 일으키기 쉬운 까닭이다. 성탄절과 같은 기독교의 절기를 제외한다면 공영방송에서 기독교 신앙을 증거하는 모습을 찾아보기 어려운 이유이기도 하다. 이 어려움을 해결하는 방법 가운데 하나는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삶을 설교하거나 가르치지 않고 단지 보여 주는 일이다. 우리가 너무도 잘 아는 대로 성령의 열매 9가지는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갈5:22)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이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 때 나타나는 결과들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비기독교인들이라면 결코 거부할 수 없는 인간적 가치로 이해될 수 있다. 아무리 기독교에 대해 부정적 생각을 가진 시청자라도 TV에서 늘 마주하는 인물로부터 성령의 9가지 열매를 지켜볼 수 있다면 그 모습에 반하지 않을 수 있을까? 비록 그가 하나님이나 십자가에 대한 얘기를 하지 않더라도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이 왜 좋은지를 조금이나마 알 수 있지 않을까? 톰 행크스 주연의 최신작 <뷰티풀 데이 인 더 네이버후드>(A Beautiful Day in the Neighborhood, 2019)는 미국의 공영방송 PBS의 어린이 프로그램 진행자 프레드 로저스(Fred Rogers) 목사의 인간미 넘치는 삶을 보여주는 영화다. 그는 1968년부터 2001년까지 자신의 진행하는 TV쇼 <로저스 아저씨의 이웃>(Mister Roger's Neighborhood)이라는 인기 프로그램을 통해 성경이 말하는 삶이 무엇인지를 어린이들에게 음악과 인형극 그리고 놀이로 가르친 사람이었다. 로고스서원의 김기현 목사는 프레드 로저스 목사에 대해 “로저스 아저씨는 TV에서 한 번도 복음을 말한 적이 없었지만 한번도 복음을 전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고 한 것은 정말 그에 대한 탁월한 설명이 아닐 수 없다. 좋은 상담가 프레드 로저스 <뷰티풀 데이 인 더 네이버후드>는 한 인물에 대한 이야기를 외부 시선을 통해 보여 주며, 그 외부인마저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감동과 변화의 경험을 겪게 된다는 할리우드식 위인전의 형식을 갖고 있다. 에스콰이어 잡지사의 폭로기사 전문기자 로이드 보겔(매튜 리즈)은 회사로부터 어린이 프로그램 진행자로 유명한 프레드 로저스에 대한 취재지시를 받는다. 아무리 유명인이라도 겉과 속이 다를 수 있다고 생각하는 보겔은 냉소적으로 사회를 바라보는 자신의 시선을 이번에도 적용하려고 하지만 왠지 이 사람 만큼은 다른 느낌을 받기 시작한다. 친절한 이웃집 아저씨로 프로그램에 등장하는 캐릭터와 현실의 로저스는 구분이 안 될 만큼 똑같은 모습으로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인터뷰의 회수를 늘려갈 때마다 보겔은 로저스가 바라보는 세계관의 영향을 받으며 자신이 변화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기독교 문화관으로 보자면 좋은 영화는 선한 변화를 추구한다.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듯’(요2장) 문제의 인간이 온전한 삶으로 회복되는 모습이 기독교의 가치가 반영된 영화의 특징이다. 이 영화 또한 마찬가지다. 냉소적인 폭로전문기자 보겔은 어릴 적 가족을 두고 집을 나간 아버지에 대한 분노로 가득 찬 인물이다. 보겔의 아버지 제리(크리스 쿠퍼)는 자식들이 어렸을 때 다른 여자와 바람이 나서 집을 나갔고, 어린 보겔과 누이는 아버지가 없는 가운데 어머니의 임종을 지켜봐야 했다. 시간이 흘러 나이를 먹고 결혼을 해서 젖먹이를 둔 보겔이지만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을 찾아온 아버지에 대한 분노의 감정이 조금도 사라지지 않은 상태에서 성인 군자 같은 모습의 로저스를 만난 것이다. 물론 결과는 우리가 예상했듯이 보겔은 아버지 제리와 화해한다. 말기 암에 걸린 아버지는 죽음을 앞둔 침상에서 아들에게 용서를 구하고 보겔은 아버지를 받아들인다. 그러나 이 영화는 표면적으로는 단순하고 진부해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기독교가 고난과 상처받은 인생에 대해서 갖는 독특한 관점이 내재 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그것은 한마디로 프로이트의 심리학을 거부하고 성경이 고난과 인생에 대해서 갖는 감사의 심리가 일으킨 회복의 결과라고 말할 수 있다. 프로이트의 심리학을 보겔의 인생에 적용하자면 너무 간단하고 명확한 것처럼 보인다. 보겔이 사람과 사회를 대할 때 냉소적이고 비판적이며 무의식적으로 말투가 거친 것은 과거 아버지로부터 배반당하고 버려진 상처가 제대로 처리되지 못한 까닭이라는 결론을 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로저스는 보겔이 겪은 고난과 상처에 대해 전혀 다른 시각을 제공한다. 자신이 망가진 인생이라고 생각하는 보겔에 대해서 로저스는 이렇게 답한다. “나는 당신이 망가진 인생이라 생각하지 않아요. 신념이 강한 사람이라 생각해요. 옳은 것과 틀린 것을 구분할 줄 아는 사람이죠. 아버지와의 관계가 당신이 그렇게 성장하는데 도움을 줬다는 걸 기억해봐요. 지금 당신이 있도록 당신을 도와준거에요.” 이것은 고난 가운데도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 인생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나온 말이며, 과거 트라우마에 사로잡히지 않고 현재의 삶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알프레드 아들러(Alfred Adler) 심리학의 일부를 반영한다고도 볼 수 있다. 프로이트의 어깨 위에 앉았다는 평판을 받은 심리학자 아들러는 자신의 스승인 프로이트의 심리학을 뒤엎고 오늘날 긍정심리학의 출발이 된 개인심리학을 일으킨 사람이다. 그는 과거의 트라우마가 현재의 불행을 일으킨다는 프로이트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았다. 오히려 과거 경험(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안에서 목적에 맞는 수단을 찾아내는 것이 중요하고 경험에 부여한 의미에 따라 자신이 결정될 수 있다고 보았다. 아들러 심리학의 전부를 기독교 학문 안에서 받아들일 수는 없지만 그가 제시한 과거 경험에 대해서 의미를 부여한다고 했을 때 그것이 신앙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라면 그것은 사람을 온전케 하는 훌륭한 기독교 상담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좋은 이웃의 조건 영화 속에 나타난 프레드 로저스는 상처 입은 사람을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다. 정확히 말하자면 모든 사람이 특별하다고 믿기 때문에 자신의 삶에 들어 온 사람들을 향해 한사람 한사람 모두에게 집중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한다. 보겔이 로저스와의 첫 전화통화에서 놀란 것은 그가 전화하는 동안 자신을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사실이었다. 본인은 딴 짓하면서 전화를 받지만 로저스는 전화 한통화에도 상대방에게 집중하며 말 한마디를 놓치는 법이 없었다. 또한 보겔이 로저스의 스튜디어 촬영현장에서 본 것은 스탭들이 모두 기다리는 가운데서도 장애아동 앞에서 30분 씩이나 그와 마주하며 그의 느린 대답을 기다려주는 일이었다. 또한 그는 보겔과의 대화를 통해 자신이 프로그램 안에서 어린이들에게 죽음과 이혼 그리고 전쟁도 다룬다는 점을 언급한다. 어린이니까 고통의 문제를 회피시키는 것이 아니라 고통이 일으키는 감정에 휘말리지 않으면서 오히려 감정을 긍정적으로 다룰 수 있는 법을 아이들에게 가르친다는 사실을 밝혔다. 그는 대단히 뛰어난 기독교 교육자이며 상담가의 자질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결정적으로 이 영화는 기독교인이 세상 사람들과 다르게 과거를 돌아보며 현재의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훌륭한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부연설명을 하기 위해서는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이면서 보겔의 삶의 전환점이 되는 계기가 된 명장면을 소환하지 않을 수 없다. 로저스는 식당에서 보겔과 마주하며 1분 동안 지금 자신이 있기까지 우리를 사랑해 준 모든 사람을 떠올려 볼 것을 요청한다. 영화는 1분 동안 적막에 휩싸인 식당 내부와 마치 식당 안의 손님 모두가 로저스의 제안에 동참하며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는 분위기를 연출한다. 그리고 보겔은 미소를 짓는다. 치유가 일어나고 감사가 마음을 채우며 기쁨이 온 몸을 휘감는 순간이다. 보겔은 좋은 이웃을 만났다. 로저스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아버지를 미워하며 과거의 상처에 매달려 분노 속에서 일평생을 살았을지도 모른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들어 누가 이웃인지에 대해서(눅10:29-36) 말씀하셨다. 상처입은 사람을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는 이웃. 누구든 프레드 로저스 목사를 이웃으로 마주한다면 그날은 분명 아름다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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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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