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0-10-22(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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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목회자칼럼] 코로나를 담대하게 대응하라
    코로나 사태가 언제 끝날지 모르게 장기화 되니 사람들이 무기력증에 빠지고 영적으로 많이 위축되었다. 코로나 때문에 모든 것이 어려워졌다. 대면 예배가 중단되고 교회가 문을 닫고 한주 한주가 지나면서 끝모를 불안과 우울이 밀려온다. 참으로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라는 탄식이 저절로 나온다. 그렇다고 코로나 사태가 끝나기를 가만히 앉아서 기다릴수만은 없다. 요즘은 해가 뜨면 폭염이고 비가 오면 폭우이고 바람이 불면 태풍이고 눈을 뜨면 코로나라는 말이 있다.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복잡다난한 현실에서 무탈하게 하루하루를 지내기가 얼마나 어려운가? 믿음의 선배들은 위기의 때를 어떻게 감당했을까? 동방에서 가장 훌륭한 자였던 욥은 하루아침에 전 재산이 날아가고 다 큰 열 자녀들이 죽었지만 비보를 듣고 즉시 하나님 앞에 엎드려 예배하며 주신 자도 여호와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이심을 찬송하며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아니하였다. 끔찍한 소식을 듣고 자포자기하지 않았으며 사람 앞에 넋두리 하지 않고 사람 원망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예배하였으니 참으로 대단한 신앙인격이다. 구약 성경에서 가장 예수님을 닮은 요셉은 어려운 일들을 너무나 많이 겪었다. 인간관계를 한번도 성공해 보지 못하였다. 어릴 때 어머니가 동생을 낳다가 돌아가셨고 열 명의 친형들이 그를 미워하여 죽이려다가 돈을 받고 팔아버렸다. 보디발의 집에서 십년 동안 충성을 다한 후에 억울하게 누명을 쓱고 옥살이를 하였다. 감옥에서도 친구를 사겼지만 끝내 배신을 당하고 잊혀졌다. 성경은 그러한 요셉을 불통, 먹통, 막통이 아니라 형통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한 마디로 요셉은 적응력이 뛰어났다. 어릴때부터 예기치못한 돌발사태가 거듭 발생했지만 놀라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고 무서워하지 않고 닥치는대로 감당하였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지만 최악의 상황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감당치못할 시험은 없으니 일마다 때마다 감당했다. 세월이 흐른 후에 그의 얼굴은 일그러진 영웅이 아니라 용모가 빼어나고 아름답게 되었다. 현실에 최선을 다하고 현장의 달인이 되고 현재에 감사하면 현저한 클라스의 삶을 살수가 있다. 그런 사람은 현역에 은퇴가 없이 오래오래 길게길게 곱게곱게 넓게넓게 쓰임받는 것이다. 구약 성경에서 대표적인 선지자가 엘리야이다. 열심이 특심이었던 그도 한계 상황이 오고 탈진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자신을 죽이려는 자들을 피해 달아나다 기진맥진한 채 죽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때에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치유하시는 단계가 특이하다. 극심한 영적인 침체에 빠져서 자살을 하려고 하는 엘리야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셨다. 크고 강한 바람 가운데 계시지 않고 지진 가운데 계시지 않고 불 가운데에도 계시지 않고 세미한 소리로 오셨다. 엄청난 문제 앞에서 위대하신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그를 구원하실 줄 알았는데 하나님은 의외로 크고 강한 바람이나 지진이나 불이 아니라 속삭이듯이 부드러운 소리로 다가오셨다. 하나님의 도우심은 우리가 생각하는 방법이나 시간에 맞춰 오지 않고 세미하게 나타나기도 한다. 그 세미한 소리를 듣고 엘리야의 마음속에 근심과 고통, 두려움과 불안이 사라지고 다시 사명자가 되었다. 사도 바울은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고 하였다. 어떤 목사님은 회장을 만나거나 노숙자를 만나거나 누구를 만나든지 맞춤형 대화를 한다고 한다. 코로나 사태가 장기화되면서 단계별로 대처해야 된다. 큰 수술을 할때는 단번에 할 수가 없고 1차, 2차로 나누어서 원기를 돋우어 가며 해야 환자가 체력적으로 감당할 수가 있다. 모든 문제는 복합적이고 다중적인 면이 있다. 임시방편적으로 땜방을 한다거나 꼼수를 둔다거나 단세포적으로 반응해서는 안된다. 정신세계의 깊이와 넓이가 의식분화가 안된채로 단순무식해서는 복잡한 현실을 감당할 수가 없다. 좀더 촘촘하게 단계별로 선제대응해 나가야 된다. 인생은 단답형이 아니다. 어느 순간 길을 잃고 방황하기 쉽다. 한순간 분별력을 잃어버리고 피아간에 적을 구분하지 못하고 자중지란, 내부갈등, 내우외환에 빠질 수가 있다. 여러 요인을 찾아서 심층적이고 입체적으로 분석을 하고 다각도로 살펴본 후에 다양한 방식을 가지고 단계별로 대응하다보면 맞춤형의 대안이 도출되는 것이다. 지도자는 다섯개의 안경이 있어야 된다. 망원경을 가지고 십리 밖을 내다보고 쌍안경을 가지고 현실을 클로즈업해서 정확하게 분석하고 백미러를 통하여 뒤를 볼줄 알고 사이드 미러를 가지고 좌우를 살피고 현미경을 가지고 자기 자신을 정확하게 볼 줄 알아야 된다는 것이다. 현실은 시시각각 변한다. 정치는 생물이라고 하지 않는가? 역사는 수많은 돌발변수가 생기고 예측불허의 상황이 수시로 전개된다. 순간 순간 최선을 다하다보면 원칙이 생기고 세월이 지나면 매뉴얼이 만들어진다. 시차적응을 해야 된다. 골든타임, 하프타임, 파이널타임, 인저리타임이 있는데 어느 한 시간도 방심할 수가 없다. 결과보다 준비하는 과정이 중요하다. 열매만 따먹으려면 풋과일을 먹기 쉽지만 충실한 준비과정을 거치면 무르익은 과일을 먹을 수가 있다. 무슨 일이든지 속단하지 말고 성급하게 처리하지 말고 기도하며 기대하고 기다릴 때 기적이 일어난다. 수시모집에는 수시로 은혜를 받아야 된다. 후계자가 되기 위해서는 엘리사처럼 갑절의 영감을 받아야 된다. 약할 때는 백배의 결실을 얻어야 이삭처럼 마침내 왕성, 창대, 거부가 될수 있다. 코로나 블루가 와서 무기력해지고 우울할 때에는 속수무책으로 코로나가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수는 없다. 떨치고 일어나서 담대히 나아갈 때 동서남북, 전후좌우가 다 막혀 있어도 하늘문이 열리는 것이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 믿음의 선배들은 최악의 상황에서 최상을 살아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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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9-15
  • [성경인물탐구] 바울의 동역자요. 골로새 교회의 지도자 빌레몬
    빌레몬은 바울로부터 복음을 들은 뒤 복음 사역에 열심을 내었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대표적 사역이라면 그의 집을 예배 처소로 제공한 것입니다. 이리하여 골로새 교회는 빌레몬의 집에서부터 첫 출발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마치 예루살렘 교회가 마가 요한의 다락방에서, 빌립보 교회가 루디아의 집에서, 에베소 교회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부부의 가정집에서부터 시작된 것과 같습니다. 이처럼 초대 교회의 성도들은 복음을 듣고는 자기의 집을 예배 처소로 제공하는 것에서부터 신앙생활을 실천하였습니다. 실로 복음을 들은 자로서 마땅한 섬김과 헌신의 삶이라 하겠습니다. 이런 섬김과 헌신, 자기희생과 봉사의 삶이 바로 우리들의 삶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빌레몬은 사랑과 믿음이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빌레몬을 향해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했습니다. 그 감사의 내용은 빌레몬이 이웃에게 풍성한 사랑을 베풀고 또한 믿음의 선행이 뛰어나기 때문이라 하였습니다. 실로 빌레몬은 바울을 통해 주님의 크고 풍성하신 사랑과 은혜를 배웠습니다. 그리고 몸소 피부로 체험하고 행동하였습니다. 이런 말할 수 없는 주의 사랑을 입었기에 빌레몬은 그 사랑을 증거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웃을 향한 사랑의 실천이 바울의 귀에 들렸고, 바울은 이로 인해 날마다 하나님께 감사하였습니다. 정녕 주의 사랑을 입은 자는 이렇게 그 사랑을 이웃에게 전하고 실천하게 마련입니다. 또한 이것이야말로 그 사람의 참된 믿음을 증명하는 길이기도 합니다. 빌레몬은 골로새에서 이름난 갑부였습니다. 이런 사실은 그가 저택과 노예들을 소유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그렇지만 그는 이런 자신의 물질적 풍요를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만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빌레몬으로 말미암아 성도들의 마음이 평안과 위로를 얻었다고 크게 기뻐하였습니다. 즉 빌레몬이 이웃을 구제하는 일에 앞장섰다는 말입니다. 그 구체적 내용은 언급되지 않지만 믿음과 사랑의 사람 빌레몬은 틀림없이 이웃에게 구제를 베푸는 일에 인색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처럼 주의 복음을 들은 자는 세상 모든 것이 주의 것임을 깨닫고 재물을 자기 것이라 고집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소유를 가난한 이웃과 나누고 구제하는 일을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성도들은 이런 구제와 자선을 하는 사람이 되어야만 합니다. 또한 빌레몬서를 보면 바울은 대부분은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를 용서하라는 당부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당시 도망자 노예는 사형에 처해졌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바울은 오네시모를 용서하고 따뜻하게 대우해 달라고 당부했습니다. 그리고 빌레몬 역시도 틀림없이 자신의 노예로서의 도망자 오네시모를 용서하고 따뜻하게 영접했으리라 짐작됩니다. 주님으로부터 사죄의 은총을 입고 그 은혜에 감격한 자는 이렇게 용서의 삶을 살게 마련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원수 갚을 자격도, 원수를 미워할 자격조차도 없기 때문입니다. 주의 사랑을 입은 자가 원수를 향해 할 일이라고는 용서밖에는 없습니다. 빌레몬은 오네시모를 용서할 뿐만 아니라 그를 친구로, 동역자로 여겨 바울을 영접하는 심정으로 영접해야 했습니다. 이는 원수를 용서하는 차원을 넘어 오네시모를 자유인으로 인정하며, 완전한 화해를 이루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치 주님께서 죄의 종 된 우리를 구원하여 자유케 하시 사 하나님과 화해하게 하시고 또한 신령한 교제를 나누게 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화해를 도모하는 화해의 사신으로서의 사명을 잘 감당해야 하겠습니다. 고후 5:18절 말씀입니다.<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빌 2:3절 말씀입니다.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이 말씀을 붙들고 우리도 빌레몬처럼 하나님사랑과 이웃사람을 실천함으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당당하게 살아가시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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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9-15
  • [교회학교를살린다] “세상을 바꾸는 힘”
    코로나19 시대를 살아가며 지구촌 모든 사람들이 너나할 것 없이 힘들어하고 있다. 전무후무한 시절을 무려 7개월 넘게 보내고 있는 동안 이러한 난관을 타개하기 위해 수많은 분야의 지성인들이 다각도로 현실을 분석하고 미래를 내다보며 다양한 대안을 쏟아내고 있다. 지금까지 살아온 과거를 바탕으로 나온 현실적인 분석들과 새로운 세상에 적응하며 살아가기 위한 여러 방법들은 모두 다 의미 있고 소중한 통찰을 우리에게 전해주었다. 특히나 사회적 거리두기를 하면서 사람들이 가정에 머무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가정의 중요성과 역할이 강조되고 있다. 기독교교육 분야에서도 코로나이후의 시대에 가장 중요한 신앙의 장으로 부각되는 가정에 대한 대안들을 많이 내놓고 있다. 가정에 대한 강조는 이전에도 계속해서 있어왔지만 교회에서의 모임이 어려운 시기를 보내는 요즘 더욱 부각되고 있다. 교회에서의 신앙교육이 어려운 이 시점에서 어떻게든 신앙의 대 잇기를 하기 위하여 부모가 교사가 되어 더욱 적극적으로 신앙교육에 참여할 것을 제안하고, 자녀 세대도 오직 주일, 교회, 한 시간이라는 공식을 깨고 일주일 내내 언제든지 가정을 비롯한 온 세상을 교육의 장으로 여기고 신앙적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갈 것을 제안하고 있다. 그러나 쏟아지는 가정에 대한 지적인 이론들, 대안들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으로 요즘 가정은 많이 아프고 힘들다. 코로나 블루의 직격탄을 맞은 가정은 경제적인 어려움과 정신적인 우울감, 가정폭력과 같은 부정적인 모습도 많이 보인다. 실제로 가정에서 보내는 시간이 길어진 요즘, 부부사이의 갈등, 부모와 자녀 사이의 갈등은 더 증폭되고 있다. 코로나19 사태는 이전에 잠재적으로 존재해왔던 위기와 갈등을 터트리는 도화선이 되었고, 없던 위기와 갈등도 유발시키게 되었다. 사실, 우리는 모르는 게 아니다. 가정에서 보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함께 가정예배도 드리고, 말씀도 읽고, 찬양도 부르며 천국과 같은 삶을 꿈꾸지만 현실은 가족끼리 서로 맞서고 할퀴는 갈등의 연속인 것이다. 함께 보내는 시간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부부가 서로 부딪히는 일이 더 많아지고 부모와 자녀 사이에 못마땅한 점은 더 많이 보이게 된다. 그러면서 함께 있지만 불행한 시간은 더더욱 길어질 수도 있다. 이러한 와중에 어느 사이트에서 어린 두 아이를 키우는 한 엄마의 고군분투기를 읽은 적이 있다. 재활용 박스를 활용하여 이런 저런 것을 만들어 같이 활동적인 놀이를 하고, 과일을 재미있게 깎아 먹으며 시간을 보내기도 하고, 좁은 집에서나마 물놀이를 하는 등 그야말로 애를 쓰는 모습은 참 많은 감동을 주었다. 가정에서 자녀들과 보내는 시간이 언제나 즐겁지만은 않겠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미 있는 시간을 함께 보내기 위해 궁리하고 실천하는 모습이 참 존경스러웠다. 신앙교육도 그렇다. 이런 저런 이론과 분석을 내놓는 것은 쉽다. 그러나 현실 가족으로서 살아가며 신앙적인 활동을 하고 믿음을 지키며 세상 속에서 신앙인으로 살아가는 것은 너무나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쏟아지는 코로나19시대에 대한 대안 속에서 오롯이 자신의 길을 걸으며 믿음을 잃지 않으려고 애를 쓰는 한 사람의 신앙인의 노력이 그립다. 내 신앙 지키기도 힘든데, 자녀들 신앙까지 돌아보고 어떻게든 뭐라도 함께 신앙적인 실천 하나를 해보려고 애쓰는 부모들을 응원하고 싶다. 그들로 인해 세상이 조금이라도 나아지고 있다고 믿는다. 세상을 바꾸는 힘은 사실 인간에게는 없다. 다만 하나님을 믿고 그분의 은혜를 힘입어서 살아가는 하루하루가 모여서, 그리고 신앙인인 우리가 할 수 있는 작은 사랑의 실천들이 쌓이고 쌓여서 작은 1mm의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오늘도 짧은 하루를 살면서 신앙인으로서 그리고 신앙의 부모로서 살아낼 작은 실천을 이리저리 궁리해본다. 말씀 앞에 앉아 하루에 한 장이라도 읽고 그 말씀을 삶에 적용하기 위한 작은 실천 하나를 정하고 하루 동안 노력하는 것, 불성실하게 온라인 수업에 참여하는 청소년 자녀를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고 간섭과 잔소리를 잠시 참아주는 것, 가족들과 하루에 한번은 긍정적이고 따뜻한 대화를 나누는 것, 그동안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미루었던 자기계발 활동을 꾸준히 하는 것, 가정과 세상을 위해 시간을 내어 잠시라도 기도하는 것 등등. 생각하다보니 여전히 생각이 행동보다 앞선다. 그러나 오늘 하루 꼭 실천하리라 다짐해본다. 오늘 우리가 하는 하나의 신앙적인 실천이 세상을 바꾸는 힘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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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9-15
  • [은혜의말씀] 창조적 믿음(창 1:1-7)
    사람은 자기의 믿음에 따라서 운명이 달라집니다. 그 사람이 성공에 확고한 믿음이 있으면 반드시 성공하고, 그 생각과 믿음이 패배적이면 결코 성공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파괴적인 생각, 부정적인 생각, 소극적인 믿음을 버리고 <창조적인 믿음>안에 서시기를 바랍니다. 창조적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1. 창조의 하나님을 믿는 믿음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하나님은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여기서 ‘창조 하시니라’의 ‘창조’는 ‘빠라’(무에서 유를 만드심)를 말합니다. 하나님은 무슨 일이든 하실 수 있는 전지전능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만 믿고 의지하면 만사형통할 수 있습니다. 또한 전능하신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믿음을 가진 자도 능치 못할 일이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막9:23, 빌4:13) 아브라함은, 100세에 창조의 하나님을 믿고 이삭을 얻었습니다. (롬4:19-21) 전능하신 창조의 하나님을 믿으십시오. 그분이 여러분의 삶에 새로운 기적을 창조하십니다. 오늘도 창조의 역사가 그분을 통해 일어나시길 바랍니다. 2. 절대긍정의 믿음입니다. 절대긍정의 믿음은 어떤 경우라도, 실망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확신한 믿음을 끝까지 견고하게 붙잡는 것입니다. 잘되고 있으면 잘되었으니 감사하고, 잘못되었으면, 곧 잘 될 것이기 때문에 모든 일에 긍정적으로 감사하는 것입니다. 실패의 최대원인은 쉽게 단념하는 것입니다. 조금만 더 절대긍정의 믿음을 가지고 믿으십시오! 신앙의 금맥이 곧 터질 것입니다. 조금 더 기도하면 응답이 곧 나타날 것입니다. 조금 더 인내하면 하나님의 치료와 기적이 임할 것입니다. (마15:22-28) 3. 창조적 말씀을 선포하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은 천지만물을 창조하실 때 말씀으로 창조하셨고(창1:3) 예수님께서도 이 땅에 계시는 동안 수없이 많은 문제들을 말씀으로 해결하셨습니다. 가) 마귀와 대적할 때 3번이나 말씀으로 물리치시고, 나) 말씀으로 바람과 파도를 잠잠하게 만드셨으며(마8:) 다) 말씀으로 죽은 나사로를 무덤에서 살리셨습니다. 우리도 꿈과 믿음을 말을 통해 선포해 놓아야 합니다. (잠18:20-21) 지금 이 시간에도 당신의 입술의 선포를 통해 창조적인 역사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나는 성공하고 있다고 말하십시오!’ ‘내 병은 나았다고 선포하십시오!’‘우리 도시, 우리 국가는 잘 되고 있다고 말하십시오!’ 4. 어둠을 버리고 빛을 따라 살라 하나님의 최초의 역사는 분리(Separate)였습니다. (창1:4-5) 먼저, 어둠을 분리하십시오! 죄악을 버리고 거짓을 버리고 우상을 버려야 합니다. 밤의 일을 좋아하는 헛된 일을 버려야 합니다. 성경은 온갖 더러운 일을 버리고 빛의 열매를 맺으라 명령하십니다. (엡5:3-11) 그러므로 어둠을 버리고 빛을 따라 사셔서 창조적인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5. 계속적인 창조의 사역을 하라! 하나님은 우리에게 한번 창조한 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연속적으로 창조의 역사를 계속하고 계십니다. 저와 여러분을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대로 지으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구원을 완성하시며, 성령을 부어주셔서 지상에 있는 동안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게 하시고, 우리와 동행하시며 주의 사역을 시키십니다. 천국 가서도 영원히 하나님을 즐거워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구원받고 은혜 받고 사명 받은 주의 종과 성도들은 계속적인 창조의 사역을 힘써 감당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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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9-15
  • 고도비만환자들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
    대사비만수술센터 전담간호사 김고은 세계보건기구(WHO)는 건강을 해칠 정도로 지방조직에 비정상적인 또는 과도한 지방이 축적된 상태를 비만으로 정의하고 있으며,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늘어나는 추세인 비만에 대해 21세기 신종 전염병이라고 규정하였다. 2018년 국민건강보험공단에서 시행한 비만에 대한 국민인식도 조사에 따르면, 비만이 질병임은 알고 있으나 그 관리의 책임 주체를 환자의 본인으로 인식하는 정도가 높다는 분석결과를 알 수 있다. 특히 지난 10년간 우리나라 고도비만 인구는 1.6배, 초고도비만 인구는 2배가량 증가하였으며, 부의 상징이던 비만이 어느새 빈곤층의 대표적 질병 중 하나로 꼽히면서, 정신적 질환까지 동반하는 점점 더 치료가 어려운 병이 되었다. 사실 비만의 원인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과도한 영양공급과 운동부족 외에도 유전적 요인, 스트레스, 질병 등 다양하지만, 그들은 단지 뚱뚱한 사람이 아닌 치료받아야 된 환자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에는 그저 의지 약하고 식탐 많은 게으름장이라는 무지와 편견이 만연하다. 2012년부터 시작된 고신대병원의 비만수술은 올해 보험 급여화가 되면서 수술의 수가 점차 늘고 있다. 위장관외과의 전담간호사로 5년째 일 하면서 보아온 위암환자들은 암에서의 해방과 생명연장에 대한 간절함으로 수술하는 분들인데, 고도비만 환자들은 움직이기 귀찮으며 경제적 여유가 있는 살찐 게으름장이들이 살 빼기 위해 수술하는 일명 가짜환자들처럼 보였다. 그러던 2018년 어느 날 온몸에 문신이 가득했던 당뇨, 고혈압, 천식을 앓고 있고, 심장혈관스텐트도 두 개나 넣었다던 50대 남자환자가 외래진료실에서 교수님께,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을건데 수술이라도 한번 받아보렵니다. 교수님이 나좀 살려달라”고 간절히 빌던 모습을 보게 되었다. 이 사람들도 환자구나, 정말 절실하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그들은 마취에 대한 어려움과 위험이 일반환자보다 더 크기 때문에 수술에 거의 목숨을 걸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는다는 말은 지금 생각해도 참 슬프고 암담한 말이었다. 고도비만 환자들에 대한 첫 애착과 달라진 시선은 아마 여기서 시작되지 않았나 싶은 정도, 당시 나는 정말 충격을 받았다. 그전까지 나는 수술하고 퇴원하면 당연히 알아서 살이 빠지겠지, 심지어는 저렇게 살이 찔 때까지 뭐하고 살았을까.. 하는 한심한 시선을 바라본 적도 없지 않았다. 그랬던 내가, 요즘은 숫자상의 체중감량 뿐 아니라, 동반질환의 많은 약을 끊고 삶의 질이 향상된 그들의 밝게 웃는 모습을 보면서 아주 묘한 뿌듯함을 느끼고 있다. 사실 비만 환자들의 대부분이 수술을 받는 이유는 단순한 체중감량이 아니며, 미용적인 성형은 더더욱 아니다. 바로 삶을 위협하는 다양한 동반질환의 개선이 주목적이다. 감기에 걸리면 감기약을 처방받고, 위암에 걸리면 위를 잘라내는 것이 당연한 치료인 것처럼, 고도비만이라는 질환에 걸린 환자들에게 이 수술은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는 효과가 좋은 치료인 것이다. 지금 찾아오는 환자들은, 그나마 주변인의 지지로 용기를 낸 분들이 많지만, 아직도 외래에 처음 오는 비만환자들은 병원에 들어서면서부터 병원을 나갈때까지 다양한 사람들의 시선을 견뎌야만 하며, 그속에는 편견에 휩싸인 의료진의 시선도 포함되어 있다. 우리는 상식적으로, 아픈 사람을 보고 비웃거나, 멸시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아픈건 그 사람의 잘못이 아니기 때문이다. 게으름장이에서 치료가 절실한 환자로 나의 관점이 바뀐 것처럼, 사회 구성원들의 부정적 시선이 바뀌게 된다면, 그들의 병원을 찾는 첫 발걸음이 조금 더 가벼워지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해본다. 고도비만은 스스로 치료하기 어렵고, 반드시 의사의 처방과 치료가 필요하며, 고도비만인 유발하는 다양한 질환 중에서 무호흡증, 천식, 심뇌혈관질환의 경우 그 즉시 생명을 잃을 수 있는 아주 위협적인 질환이다. 그런 환자들에게 이 수술은 창피해서 또는 누군가에게 폐가 될까봐 세상밖에 나오지 못하는, 언제 죽을지 몰라 늘 조마조마한 삶은 사는 그들을,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게 하고 또 병이 나을 수 있게 하는 유일하고도 매우 효과적인 치료법이라는 것에 더 이상의 부연설명은 필요 없다. 다양한 질환을 동반한 고도비만 환자들에게 전담간호사 혹은 코디네이터는 그들의 말을 들어주고, 공감해 줄 수 있는 친구이자 동생, 가족 같은 역할이어야 하며, 학문적 고민을 하는 많은 의사선생님들과 같이 의료진의 관점에서, 한편으론 가족의 관점에서 환자를 관리하고 지킬 수 있어야 한다. 환자 뿐 아니라 가족구성원까지 교육대상자로 포함하여 수술 준비과정과 치료과정, 수술 후 변화된 생활에 대해 환자가 잘 적응할 수 있도록 격려하고, 그들이 주체적이고, 긍정적이며 능동적으로 바뀔 수 있도록 이끌어 내는 것이 비만수술 전담간호사의 가장 중요한 역할인 것 같다. 미국에 bariatric nursing이라는 분야가 따로 존재하는 것처럼 당장은 어렵겠지만, 앞으로 우리나라도 공인된 학회의 체계적 수련을 받은, 비만환자와의 면담기술을 충분히 익히고 공감할 수 있는 감성을 지닌, 검증된 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며, 이러한 발전은 고도비만환자와 의료진 모두에게 있어 매우 긍정적인 질적향상을 가져올 것이다. 고도비만치료에 있어 유일하게 장기적으로 효과가 있는 것은 수술뿐이다. 고도비만환자들은 그런 유일한 치료법을 찾아 창피하고 두렵지만, 살기위해 다시 한번 용기를 내어 이곳을 찾아온다. 그렇게 그들이 손을 내밀었을 때 좁게는 의료진들만이라도, 넓게는 사회구성원들 모두가 잘못된 편견을 버리고 비만은 질병임을, 그리고 그들은 치료가 매우 시급한, 고도비만이라는 매우 위협적인 질병에 걸린 환자들이라 생각하고 따뜻한 시선을 보낼 수 있도록 우리 모두의 인식이 변화되기를 기대한다. Obesity is not a sin, obesity is a disea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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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9-15
  • 한국교회 온라인(비대면) 예배를 용납할 수가 없다
    8월과 9월초까지 코로나19로 인해 매 주일마다 제한된 인원 수의 대면 예배를 드리고 있다. 이번 한달포 주일은 정신없이 긴 장마와 태풍이 연이어 오는 바람에 엎친데 덮친 격으로 생활이 피폐해졌다. 2019년 12월 중국 우한에서 발생한 코로나19는 한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우리의 일상생활을 바꾸어 놓았다. 대면에서 비대면 언택트(Untact)으로 공동체의 교회는 교회대로 직장인들은 재택근무를 시행하고 학생들은 온라인 강의를 집에서 듣고 있다. 문화 생활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일상 생활은 공동체의 가정으로 축소되고, 가정에서도 개인으로 자기 방 안에 혼자(방콕) 갇혀 버렸다. 이것을 뉴노멀(New Nornal)시대라고 한다. 가만히 주일날 유튜브로 비대면 예배를 보고 있는데 그냥 편하고 듣기 쉽게 침대 위에 누워 듣고 “아멘”하는 태도가 과연 하나님을 향한 경건회로 거룩함을 보여주는 걸까? 이건 아니다 싶다. 거룩성이 상실된 예배의 본질은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지는 거룩성에 배치되는 것이다. 마치 하나님을 하나의 극작가의 스크린에 뜨는 영상에 지나지 않게 소홀해 지는 느낌을 감출 수가 없었다. 세상이 아무리 바뀌었다 해도 혼자만의 세상이 되어 갈수록 인간의 근원적인 바람은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공동체를 그리워하고 신에 대한 간절한 애절함이 묻어나도록 하지 않겠는가? 창세기 2장 18절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보기 좋지 않으시어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를 만든 것이다. 히브리서 10장 24~25절 말씀에 보면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고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라고 말씀하셨다. 교회는 서로 돌아보고 격려하고 우는 자와 함께 울고 웃는 사랑의 공동체이자 예배의 공동체이다. 고난이 오고 어려움이 올수록 모이기를 피하는 습관에 길들이여 지지 말아야 할 것이다. 절대 모이지 않는 것에 익숙해서는 안되고 습관화 되어서도 안된다. 오히려 핍박을 받고 억압과 세상권세로 부터 탄압이 와도 더욱 모이기를 힘써 하나님께 기도해야 할 것이다. 세상은 역병을 핑계로 사람을 혼자 있게 만들고 혼자 있는 문화로 만든다. 마귀는 그 틈을 타서 막히고 혼자 있을 때 죄를 짓게 하고 죄의 굴레를 씌워 지옥으로 데리고 가려 한다. 그래서 하와가 혼자 있을 때(창세기 3:1~6), 당신이 혼자 있을 때(삼하11:1~5) 마귀가 찾아와 죄를 짓게 했다. 엘리야도 혼자 남았다고 생각할 때 탈진이 오고 해서 차라리 나를 죽여 달라고 하지 않았나(왕상19:4)? 심지어 예수가 광야 40일 혼자 금식할 때까지 마귀가 찾아와 돌로 떡이 되게 하라고 하고, 성전에서 뛰어 내리고 자기한테 절하면 천하만국을 주겠다고 유혹을 했다. 마귀는 온 세상 사람들을 혼자 있게 하기위해 흩어버린다. 코로나19 정은경 질병본부장은 “흩어져야만이 살 수 있다”고 말하지만 믿음의 세계는 이와 정반대다. 흩어지면 죽고 뭉치면 사는 이승만 박사의 하나님을 향한 믿음에서 나라를 구하는 그 외침이 예언처럼 들리면서 강하고 담대해야 살아 갈 수가 있다. 정부당국은 코로나19를 교회가 촉발 된 원인인 것처럼 여론을 확산하지만 처음부터 중국 우한에서의 입국을 허용한데서 촉발 되고 확산된 정부 당국의 책임이 첫째 있다. 물론 일부 교회들이 방역을 소홀히 한 결과로 확산 시킨 점도 부인 못하지만 광화문 집회에 모인 수많은 군중들 이전에 고 박원순 장례식에 서울 시민들의 2만명 가까운 조문객의 허용도 책임이 없다 할 수 없고 민주노총 집회에 모인 2천여 명에 대하여 왜 방역 전수는 하지 않고 넘어 가는가? 수많은 지하철 시민들 검사는 고사하고 면면한 서울 사랑제일교회 교인과 문재인 타도 광화문 집회에 참여한 시민들만 전수 검사를 강요하는데 극성인가? 한국교회는 비대면 예배에서 대면 예배로 하루 빨리 전환해야 한다. 방역 수칙을 잘 지켜 나가면 얼마든지 질병으로 부터 예방되고 대면 예배로 드릴 수가 있다. 교회는 예배를 통해 하나님께 마음껏 예배하고 목장에 모여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고 기도해 줄 때 사랑의 예배 공동체가 활발히 전개 될 수 있다. 2천년전 역사가 증명한다. 로마의 말발굽아래서 교회는 오히려 단단하고 핍박을 받아도 복음은 더 멀리 전파 되었고 역병도 막아 내었다. 어둠의 권세 잡은 세상 권력은 교회를 지시하거나 간섭하는 헌법 정신을 망각하는 행동을 거두어야 한다. 독일의 히틀러를 처음에는 지지했으나 나중엔 반 나치 투쟁을 벌이다가 체포되어 8년간 수용소에 갇혔던 마르틴 니묄러(1892~1984) 개신교 목사는 “나치가 그들을 덮쳤을 때 나를 위해 말해 줄 이들이 아무도 남아 있지 않다”고 그는 “시”에서 표현했다. 얼마 전 고신교단의 부산 세계로교회 담임 손현보 목사는 “이런 코로나19 정국에 침묵하는 교단이라면 탈퇴하고 싶다”고 말로만 순교정신 운운하는 교단에 대해 의미있는 한 마디를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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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9-14
  • [소강석칼럼] 봄과 여름 사이의 청춘 연가
    저는 9월에 있을 총회 준비를 위한 지방 순회를 했습니다. 마지막 날 저녁은 서울에서 서북지역협의회 리더들과의 간담회가 있었습니다. 5시부터 시작해서 6시 반부터는 같이 식사를 해야 하는데, 제가 초청을 해 놓고 식사를 못했습니다. 왜냐면 63빌딩에서 있는 남진 장로님 55주년 헌정 앨범 콘서트에 참석하여 유일하게 축사를 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헌정앨범 콘서트 자리에 본인이 새에덴교회 장로라고 소개하고 가장 사랑하고 존경하는 담임목사님으로부터 유일하게 축사를 받고 싶다고 하는 남진 장로님의 신앙이 더 별처럼 빛나게 느껴졌습니다. 제가 무대에 올라가서 “불멸의 전설, 영원한 오빠, 노래하고 또 노래하는 남진의 55주년을 함께 축하합시다”고 하자 축사가 끝나기도 전에 청중석에서 “오빠”하는 환호성과 박수가 터져 나왔습니다. 헌정 콘서트가 시작하자 남진 장로님의 젊은 시절부터 영상이 나오며 우리나라의 내로라하는 후배가수들이 남진 장로님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조항조씨가 ‘울려고 내가 왔나’를 부르자, 제 옆에 있는 미연방하원의원을 지낸 김창준 장로님이 옛날 사귀는 여자가 생각나서 눈물이 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이어서 가수협회 회장 이자연, 알리, 서문탁, 육종완밴드 등이 남진 장로님의 노래를 재해석을 하여 각양각색의 느낌으로 부르는 것입니다. 그분들이 어찌 트로트의 제왕, 남진을 따라갈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노래를 듣고 있자 저도 한 번 남진 장로님의 노래를 가장 근사치로 부르고 싶은 욕구가 솟아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우수’를 비롯해서 ‘가슴 아프게’라든지 이런 노래를 부르고 싶은 마음이 확 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설운도씨가 나와서 ‘모르리’라는 노래를 부르는데 역시 트로트의 레전드답게 거의 근사치로 부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 내가 안 나가기를 잘했다. 정말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번 헌정 콘서트의 주제는 ‘당신을 노래 합니다’입니다. 우리나라 가요계 역사상 최초의 일입니다. 제가 남진 장로님의 뒷모습을 보니까 청년의 순수한 모습을 가지고 후배들이 헌정해주는 노래를 들으며 함께 박수를 치며 그렇게 행복하게 듣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의 가슴을 더 찡하게 하는 영상이 있었습니다. 팬들의 축하 영상 시간에 여름과 가을 사이에 있는 한 중노년의 여인이 나와서 축하를 하는 것입니다. 그 분이 젊은 시절부터 남진 장로님의 광팬이 되어 좋아하자 남편분이 얼마나 시샘을 하고 싸웠겠습니까? 그런데 나중에는 남편이 여자를 인정해주고 이해하게 된 것입니다. 이번 헌정 콘서트에 남편과 같이 오고 싶었는데 이미 남편은 하늘나라에 가 있는 것입니다. 하늘나라에 있는 당신도 마음으로 함께 축하해 주기를 바란다고 하는데 가슴이 찡한 것입니다. ‘음악이란 것이 이처럼 아름다운 감동을 주는 구나’하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마지막 순서에 남진 장로님이 후배 가수들과 함께 ‘나에게 여러분이 있다면’노래를 부르는데 그 모습이 그렇게 아름답게 보였습니다. 이처럼 후배들로부터 존경받는 가수가 우리 교회 장로님이라는 것이 너무 자랑스럽고 행복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 교회 안수집사님들이 ‘나에게 새에덴이 있다면’, ‘나에게 소목사님이 있다면’ 노래를 부르던 모습이 오버랩 되었습니다. 그리고 가수 이선희가 부른 ‘청춘’이라는 노래의 가사 한 구절이 떠올랐습니다. “봄과 여름 사이 어디쯤에 있을 그 시절 노래 부른다 / 청춘 노랠 불러본다” 저도 봄과 여름 사이의 시절에는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질주를 하던 청춘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느덧 그런 시절을 지나 지금은 여름과 가을 사이에 있고, 또 언젠가 가을과 겨울 사이에 서 있을 것입니다. 과연, 그때가 되었을 때 후배들이 나를 이렇게 사랑해주고 아껴주고 존경해줄 것인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지금은 제가 전성기로 올라가고 있고 대부분 만나는 사람마다 칭찬하고 박수치고 응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과연 저의 전성기가 지나고 인생의 겨울을 맞을 무렵 가을과 겨울 사이에 있을 때도 우리 교인들로부터, 후배들로부터 존경과 사랑을 받을 것인가 생각해 본 것입니다. 지금은 여름과 가을 사이에 있지만, 가을과 겨울 사이에 있는 저의 삶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때를 대비하며 인생의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며 삶의 길을 걸어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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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8-28
  • [성서연구] 여호와의 계획을 들으라
    예레미야 선지자는 남 왕국 유다의 말기에 활동했습니다. 그는 남 왕국 유다가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왕의 말발굽 아래 무너지는 처참한 상황을 지켜보았습니다. 그는 피를 토하듯 하나님의 말씀을 외쳤지만, 모두 듣지 않았습니다. 애굽을 통해 바벨론을 견제하려던 그들은 바벨론에게 항복하는 것이 살길이라고 외치는 예레미야를 미워했고 핍박했습니다. 그러나 바벨론은 하나님께서 죄악으로 가득한 유다를 징벌하는 일시적 채찍이었고, 하나님께는 유다를 구원하여 돌아오게 하실 계획이 있었습니다. 백성들은 하나님의 계획에 귀를 기울여야 했으나, 그렇지 않았고, 결국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예레미야의 예언은 남 왕국 유다에 국한되지 않았습니다. 유다가 그토록 의지하던 애굽, 그리고 모압과 암몬과 에돔과 다메섹과 블레셋, 게달과 하솔, 엘람에 대해서도 예언했고, 나중에는 소위 <세계의 망치>(렘 50:23)였던 바벨론도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고 예언했습니다. 예레미야가 열방에 대해서도 예언한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유다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전 세계 열방을 다스리는 왕이시기 때문입니다. 열방이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그 어떤 나라도, 그 어떤 제왕과 통치자도 하나님의 손밖으로 나갈 수 없습니다. 당시는 바벨론이 강성해서 주변 나라들을 침략하여 휩쓸던 시대였습니다. 근동 전체가 전쟁과 멸망의 공포에 빠져 있었습니다. 각 나라의 왕들과 백성들은 나름대로 자구책을 강구하면서 노심초사했을 것입니다. 서로 동맹을 맺어 적을 방비하려 했고, 혹은 이웃 나라가 침략을 당할 때, 돕기는커녕 침략하는 나라의 편에 서서 함께 약탈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다른 나라들은 멸망해도 자신들은 안전할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혼란기, 다양한 해법과 의견이 분분할 때, 귀를 기울여 들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의도와 계획입니다. 예레미야 49장 20절은 <그런즉 에돔에 대한 여호와의 의도와 데만 주민에 대하여 결심하신 여호와의 계획을 들으라 양 떼의 어린 것들을 그들이 반드시 끌고 다니며 괴롭히고 그 처소로 황폐하게 하지 않으랴>고 하십니다. 그 누구의 의도나 계획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생각입니다. 당시 하나님께서는 에돔에 대한 계획이 있었습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계획대로 될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어떤 사람의 생각도 무용했습니다. 하나님의 의도와 계획을 알고 거기에 맡겨 따라야 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도 하나님의 생각을 따라야 할 이유에 대해 말씀한 바 있습니다. 이사야 55장 8-9절은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고 했습니다. 성도의 믿음은 바로 여기 있습니다. 저도 오늘 우리 현실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합니다. 코로나 사태, 부동산 문제 등으로 촉발된 국민의 불안과 우리 경제의 미래, 북한의 핵과 미사일 등으로 인한 안보, 한국교회의 미래, 차별금지법과 사학법 개정안 등이 가져올 불안한 미래 등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합니다. 전문가의 견해에 귀를 기울이기도 하고, 나름대로 이런저런 해결책을 모색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많은 생각이 떠오르고 사라진 후에 마지막으로 도달하는 곳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아무리 우리를 무너뜨리려는 적이 많아도 하나님의 뜻이 정해져 있다면 우리는 안전할 것입니다. 반면에 아무리 인간적 해결책을 강구하더라도 하나님의 뜻이 우리를 꾸중하는 데 있다면 우리는 달게 받아야 할 것입니다. 지금은 해법을 찾는 노력도 필요하지만, 하나님의 의도와 계획을 구하고, 거기에 순종할 준비를 하는 것이 더 시급하다 여겨집니다. 그 누구도 하나님의 뜻을 피해갈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부디 하나님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기만을 기도할 뿐입니다. 하나님이시여, 저희를 긍휼히 여기사 구원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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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8-28
  • [시사칼럼] 룬샷
    21세기에 ‘유니콘’이 살고 있습니다. 전설 속 뿔 달린 말이 아니라, 기업가치 1조원 이상의 비상장 스타트업 기업을 일컫는 말입니다. 국내에는 잘 알려진 쿠팡이나 위메프 등 11개 기업이 있고, 전세계에는 현재 586개가 유니콘 기업에 해당합니다. 최근 10-20대 취향을 저격하면서 입점 브랜드만도 5,000개를 돌파하고 700만 가입자를 자랑하는 ‘무신사’를 예로 들어 볼까요? 연평균 성장률 45%를 기록하며 2019년 11월 유니콘으로 지목된 무신사의 기업가치(2조 2,000억)는 굴지의 신세계(2조 6,000억)과 맞먹습니다. 물론 이들 유니콘 기업에 음영도 존재합니다. 하지만 무언가 거대하고 새로운 조류를 타고 있는 주인공들이라는 사실 하나만은 분명합니다. 최근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 방위에서 개별 주체들의 의중과 관계없이 엄청난 변화가 예고되고 있고 또한 끊임없이 새로운 지각 변동이 태동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인류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요? 우리는 무엇을 준비해야 하겠습니까? 물리학자 출신으로 미국 오바마 행정부의 자문위원을 거쳤고 지금은 신약업체의 대표로 재직 중인 사피 바칼(Safi Bhacall)은 <룬샷(Loonshots)>이라는 나름대로의 해답을 제시합니다. 제목 그대로 일견 ‘미친’(loon)것처럼 보이는 획기적인 아이디어가 “전쟁, 질병, 불황의 위기를 승리로 이끄는 힘”이라는 주장으로, 코로나의 선지자로 불리는 빌 게이츠가 가방에 넣고 다니며 읽는다고 해서 화제가 된 책 제목이기도 합니다(2020, 흐름). 바칼이 자신의 혁신 이론에서 강조하는 것은 ‘구조의 변화’입니다. 아무리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나와도 이를 정신 나간 의견으로 배척하는 구조라면 결코 작금의 위기를 타파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가 말하는 여러 사례 중 대비되는 두 가지를 인용해 본다면, 휴대폰 시장의 절대강자였던 노키아는 다중앱 기반을 내놓은 직원들의 아이디어를 묵살한 결과 몰락했고, 자체 스마트폰을 시도하다가 애플과 삼성에 밀려 실패했지만 참여한 직원들을 오히려 승진시킨 아마존은 오늘날 세계 최고의 기업으로 도약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1969년 인류가 달착륙에 성공하자 이를 두고 “문샷(Moonshot)”이라 했는데, 사칼의 주장대로라면 룬샷이 문샷이 될 수 있는 구조야말로 신인류의 새로운 연착륙을 위한 핵심이 되겠습니다. 향후 한국 교회도 거대한 변화에 직면하고 익숙하지 못한 국면들을 조우하리라 예상합니다. 그렇다면 이 시점에서 우리도 스스로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에게 있는 “룬샷”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지금 그러한 “룬샷”을 어떻게 다루고 있나요? 생각해 보면 성경이야말로 격변의 시대에 일종의 룬샷을 제시한 인물들 이야기로 가득합니다. 예레미야는 당시 다수파와 다른 이야기를 한다는 이유만으로 혹독한 고초를 당했습니다. 바울은 아예 “네가 미쳤다”는 말을 공개적으로 들어야 했지요(행 26:24). 하기야 예수님조차 “미쳤다” 소리를 듣지 않으셨던가요?(막 3:21) 성경과 양심에 기반을 두고 혁신을 외치는 아이디어라면 허튼 소리로 여기지만 말고 일단 경청하고 토론하는 구조의 변화가 절실한 때입니다. 그렇지 않을지라도, 스스로 광야의 목소리가 되거나 광인의 목소리가 되는 일을 두려워하지 않는, 진정한 룬샷이신 예수의 사람들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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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8-27
  • [김기현 목사] 판단하지 말고 믿으세요
    신모 변호사는 저랑 나이도 같고, 지적 욕구도 왕성하고,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여 장애인 차별 금지 운동에 깊숙이 관여하는 분입니다. 그래서인지 인간의 총체적 구원과 복음에 대한 관심이 많습니다. 장애인들의 영혼과 정신, 육체, 그리고 사회적 관계에서 어떻게 하면 웰빙을 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지요. 그분 덕분에 저도 장애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교제하며 많이 배웁니다. 새로 옮긴 교회에서 집사가 되었다고 판사가 아닌 집사로 불러달라고 할 만큼 순수하고 착한 분입니다. 그런 그분이 본인말로 “체질상 성령집회 같은 것은 내키지 않았지만 경험 삼아 한번쯤은 참석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 참석을” 했답니다. 말씀을 마치고 목사님께 기도를 받는데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하는데 ‘픽픽 뒤로 넘어’ 지더랍니다. 손으로 머리를 미는 것인지, 하나님의 역사인지 호기심이 발동하여 앞으로 나아가 차례를 기다렸답니다. 이분을 위해 한참 기도하던 목사님 왈, “판단하지 말고 믿으세요.” 순간 자신도 모르게 절로 뒤로 넘어지고 날아갈 듯 가뿐했다 합니다. 신집사님은 평상시에도 저에게 자주 전화를 걸어서 이것저것 물어보는 것이 많습니다. 때로는 묵직하고 고전적인 것에서부터 어떤 때는 전혀 예상치 못한 특이한 질문을 해서 저로 하여금 많은 생각을 하게끔 합니다. 제 딴에도 제 스스로 질문이 많지만, 아무래도 목사인지라 정통이랄까 정해진 틀에 익숙해지기 십상인데, 이런 분들 때문에 ‘확’ 깨게 됩니다. 글감도 많이 제공해 주고, 아무튼 좋은 벗이자 주 안의 한 가족입니다. 그분의 글을 보면서 고전적이면서도 유치찬란한 주제인 신앙과 이성의 관계를 생각해 봅니다. 신앙은 히브리서 11장 1절 말씀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화 「밀양」에도 전도하는 분이 그러지요. 하나님의 은총은 마치 태양빛과 같다고. 눈에 보이지 않지만, 없다고 부인할 수 없이 명백히 존재한다고. 그러자 신애가 말하지요. ‘그것은 그냥 햇빛이에요.’ 과학 절대 만능주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익숙한 생각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없는 것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비단 우리 당대의 사람들만의 행태는 아닙니다. 모든 신들의 형상을 갖고 있던 로마 시대에 하나님을 그 어떤 모양으로 만들기를 거부했던 그리스도인들을 지금 들어보면 참 아이러니한 비판인데, ‘무신론자’라고 했습니다. 신이라 할지라도 손으로 만지고, 눈으로 보고, 머리로 계산할 수 있는 어떤 것이어야 하는데, 하나님은 보이지 않고, 보이는 것은 십자가에서 처형당한 예수만을 이야기하니 실로 희한한 무리였던 게지요. 신집사님도 예외가 아닙니다. 법관답게, 지식인답게 눈에 보이는 것 밖의 세계에 머리를 갸우뚱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주변인으로부터 들은 얘기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책인 멜 테리의 「급하고 강한 바람처럼」을 소개받은 한 분이 그분에게도 권했던 모양입니다. 대충 내용을 들은 신 판사님 말이 “그럼 신문 기사로 나왔겠네요?” 하더라나요. 사회적으로 객관적이고 실증적인 것만을 인정하려는 계몽주의적 사고방식입니다. 신문에 나온다고 공인된 사실이 되는 것 아닌데도 말입니다. 사실 신앙과 이성의 문제는 여간 복잡한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이성이 제 아무리 발달해도, 이성은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판단할 깜냥이 아닙니다. 이성은 이성 자신에 대해서도 이성적이지 않습니다. 그걸 이성의 언어로 말하면 이성도 비이성적이고, 종교의 언어로 말하면 이성도 신앙적입니다. 하여 신앙도 이성적이고, 이성 또한 신앙적입니다. 그래서 칸트라는 철학자는 이성이 자기의 분수와 한계를 알아야 한다고 책을 썼는데, 「순수이성비판」입니다. 사실 이런 생각은 오래 된 것입니다. 성 어거스틴이 “나는 알기 위해 믿는다”(credo ut intelligam)고 했습니다. 한 마디로 하면, 믿지 않고서는 알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믿어야 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우리가 알고 있는 많은 지식, 심지어 과학도 교사와 학교, 교과서의 권위에 의거해 먼저 믿고 이해합니다. 무조건 믿으라고 윽박지르는 것이 아니더라도 우리가 그것을 믿지 않고서는 과학을 배울 수 없습니다. 맹목적으로 믿으라는 것도, 이성적으로만 믿으라는 것도 아닙니다. 신앙에 어느 정도 이성적인 요소가 있고, 맹목적인 측면도 존재합니다. 그렇지만 어떠한 지식이나 앎도 믿지 않고서는 결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니 ‘판단하지 말고 믿으세요’라는 말은 지극히 정상적이고 상식적입니다. 유한한 인간의 생각 틀 안에 무한한 하나님의 생각을 끼워 넣으려고 하지 마세요. 당신에게 하나님이 당신 크기로 밖에 안 보이겠지만, 그렇다고 하나님이 그것 밖에 안 된다고 착각하지는 마세요. 베뢰아 사람들이 그랬습니다. 그들은 복음을 아주 기꺼이 받아들였습니다. 여기서 멈추지 않고 받은 말씀을 조사했습니다. 예수 이야기가 구약에서 약속한 그 메시아인지를 연구했다는 것이고, 바울의 설교대로 살아보아서 말씀의 진실성 여부를 검증해 보았다는 것입니다. 영이라도 하나님에게서 온 것인지 시험해 보라고 했습니다(요1 4:7). 그러니 믿지 않고 있다면 판단하려들지 말고 그냥 믿으세요. 그리고 한 마디 더하면, “신집사님, 믿었으니 판단해 보세요, 가차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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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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