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2-12-09(금)

오피니언
Home >  오피니언  >  정론

실시간 정론 기사

  • [송길원 목사] 임종실, 임종돌봄이 필요하다
    조르주와 안느, 음악가 출신의 80대 부부다. 평온한 노후를 보내고 있던 어느 날, 아내 안느에게 갑작스런 뇌경색이 덮친다. 다정한 노부부의 일상은 한순간에 무너져 내린다. 시간이 흐를수록 상태는 점점 악화된다. 수술후유증으로 오른쪽 편마비가 찾아든다. 스스로 배변을 해결할 수 없다. 몸을 씻을 수도 없다. 음식은커녕 물조차 삼키기가 어렵다. 서서히 말라간다. 말조차 어렵다. 딸과 사위는 입원을 시키자고 제안한다. 하지만 아내의 뜻은 아니다. 남편 조르주는 병원에 보내지 않겠다는 약속을 지키게 해달라는 아내와 실랑이를 벌이다 자신도 모르게 아내의 뺨을 후려갈긴다. 상황은 처절하다. 결국 아내를 베개로 눌러 질식사시킨다. 조르주는 죽은 아내를 꽃으로 장식하고, 방문을 테이프로 봉인한다. 장문의 편지를 남겨놓고 사라진다. 딸이 아빠⸱엄마를 찾았을 때 잠긴 문 뒤로 엄마의 시신은 꽃에 둘러싸인 채 썩고 있었다. 2012년 칸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미하엘 하네케 감독의 <아무르>의 줄거리다. 영화는 끊임없이 묻는다. “죽음이란 무엇인가?” “당신은 어떻게 죽음을 맞이하고 싶은가?” 나라면 무엇이라 답할 수 있을까? 안타깝게도 우리네 삶은 ‘맞이하고 싶은 죽음’과는 거리가 먼 죽음을 맞이한다. 연간 사망자 30만 명 가운데 80% 이상이 요양시설과 종합병원 응급실ㆍ중환자실을 오가다 그 쳇바퀴 어딘가에서 죽음을 맞는다. 4명 중 3명꼴이다. 정든 집에서 가족들의 손을 잡고 떠나는 죽음은 전설이 되었다. 66~83세까지 17년, 삶의 5분의 1을 각종 질병에 시달린다. 사망 직전 1년의 의료비가 평생 쓴 의료비를 웃돌기도 한다.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주렁주렁 기계장치를 달게 된다. 사지가 포승줄에 결박당하듯 묶이기도 한다. 콧줄로 영양 공급을 받으며 고통 속에 서서히 죽어간다. 우리나라 ‘최빈도 죽음’의 풍경이다. 연명치료를 받지 않겠다는 사전의향서를 작성한 사람은 130만 명이다. 3년 새 6배로 늘었다. 하지만 전 국민의 3%에 불과하다. 통증을 줄여주는 완화의료센터를 이용하기도 어렵다. 매년 8만 명이 암으로 숨진다. 호스피스 병상은 1,500개도 되지 않는다. 암 환자의 호스피스 이용률은 23%에 그쳤다. 의료강국의 이면은 의외로 어둡다. 반지하 방만이 아니다. 잠시 병원으로 시선을 돌려보자. 병원에는 응급실에서 입원실, 수술실, 회복실, 재활치료실... 숱한 방들로 가득 차 있다. 장례식장으로 내려가 보자. 안내실, 추모실, 접객실, 휴게실, 안치실.... 그런데 정작 있어야 방이 보이지를 않는다. ‘임종실’, 의료진은 죽음이 눈앞에 다가와 있다는 것을 안다. 더 이상 의료행위가 도움이 되지 않을 때, 죽음을 눈앞에 둔 이들이 가족과 함께 임종을 그들을 임종실에서 가족들과 함께 머물며 죽음을 맞이하게 도울 수는 없을까? 현재 우리나라는 빅 파이브에 해당하는 대학병원들조차 한둘 정도의 임종실을 두고 있을 뿐이다. 종합병원은 아예 없다. 우선 돈이 안 된다. 코로나 상황 속에서 감염과 방역 규칙에 따른 운영지침도 없다. 제도와 법령준비도 필요하다. 결국 ‘편안한 죽음’을 원하지만 기대와 달리 대부분이 ‘고독사’로 세상을 뜬다. 곁에 가족은 없다. 의료진이 임종을 지켜보는 경우는 희귀하다. 신음소리를 내는 또 다른 환자 옆에서 가족의 이름조차 부르지 못하고 조용히 눈을 감는다. 곁에 가족이 있다 해도 소리 내 울지도 못한다. 다른 환자들에게 방해가 될까 봐 눈치를 살피지 않을 수 없다. 아무르의 영화 이야기가 프랑스만의 이야기일까? 최근 대한민국 국회에도 조력 존엄사법이 제출되었다. 말이 존엄사지 속을 들여다보면 조력 존엄사는 의사조력 ‘자살을 통한 안락사’이다. 이런 법안이 법안 통과를 원하는 사람들이 80%가 넘는다는 설문조사 결과를 근거로 한다. 어쩌다 죽음마저도 여론조사를 따라야 하는 세상이 된 것일까? 임종실이 있으면 달라진다. 더 이상 눈치 보지 않아도 된다. 환자가 좋아하는 노래를 틀어줄 수 있고 함께 부를 수도 있다. 못다 한 사랑고백을 나눌 수 있다. 멋진 엔딩파티를 준비할 수도 있다. 이때 세족식을 할 수 있다면 더 좋겠다. 고인이 남기는 말이 유훈이 되고 고인에게 건네는 사랑의 말이 위로가 되는....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장면이 떠오른다. 존 H. 밀러 대위는 라이언에게 말한다. “라이언 꼭 살아서 돌아가. 잘 살아야 돼” 어느 날, 가족들과 함께 밀러 대위의 무덤을 찾은 라이언이 말한다. “가족과 같이 왔습니다. 오고 싶어 해서요. 여기 오면 기분이 어떨까 생각했습니다. 다리에서 하신 말씀을 매일 생각했죠. 최대한 잘 살려고 노력했고 그런대로 잘 살아왔습니다. 최소한 대위님의 눈에 대위님의 희생이 헛되지 않아 보였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아내에게 말한다. “여보, 훌륭히 살았다고 말해줘” 아내가 답한다. “물론이죠” 다시 라이언이 말한다. “내가 좋은 사람이었다고 말해줘” “당신은 훌륭해요” 나는 많은 돌봄 가운데 ‘임종 돌봄’이야말로 가장 아름답고 고귀한 것이라 여긴다. 기독병원들이 먼저 나설 수는 없을까?
    • 오피니언
    • 정론
    2022-11-25
  • [탁지일 교수] ‘하이브리드 이단’과 ‘K 이단’의 시대
    코로나 팬데믹은 국내외 이단 문제의 역사적 변곡점이 되었다. 코로나 이전에는 대면 포교가 일반적이었지만, 코로나 발생 이후에는 온라인을 기반으로 이단들의 미혹이 본격화되었고, 최근에는 전통적인 대면 포교와 온라인을 혼합한 하이브리드 형태로 진화되고 있다. 시공간을 초월한 미혹의 시대, 즉 ‘하이브리드 이단’의 세상이 열렸다. 그리고 하이브리드 이단은 한류의 날개를 단 ‘K 이단’의 모습으로 진화하며 세계 곳곳으로 침투하고 있다. 교회의 이단 대처도 업그레이드가 필요한 시점이 되었다. 전통적인 이단 예방교육과 함께, 온라인 대응도 시급하다. 이단들의 고퀄리티, 즉 고화질과 고음질의 동영상이 유튜브를 뒤덮고 있고, 심지어 콘텐츠 구성과 완성도까지 높아 청소년과 청년대학생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게다가 정체를 감추고 위장해 접근하기 때문에 피해는 점점 확산하는 추세이다. 신천지는 전통적인 모략 포교를 진행하는 한편, 온라인으로 포교, 교리 교육, 신도 통제를 병행하고 있다. 거짓말의 끈을 놓지 않는 동시에, 노골적인 커밍아웃을 통해, 오히려 우리를 당황스럽게 만들고 있다. 언론매체에서는 '신천지자원봉사단’을 ‘SCJ 자원봉사단’이라고 눈가림하고 선전에 열을 올리고 있다. 그나저나 한때는 신천지 비판에 열을 올리며 실리를 챙기던 주요 언론들이, 이제는 신천지 선전을 통해 다시 돈벌이에 열을 올리고 있으니, 후안무치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최근 하나님의교회도 전통적인 거리 포교와 함께 온라인 홍보에 집중하고 있다. 특히 요즘 ‘어머니 하나님’을 선전하는 30~40대 여성 신도들이 곳곳을 누비고 있다. 거리청소는 물론이고 자연재해 지역에는 어김없이 나타나 활발한 구제 활동을 벌이며, ‘선한 이웃 코스프레’에 여념이 없다. 하나님의교회는 온라인 홍보에 막대한 재정을 투입하고 있다. 세계 거의 모든 언어로 된 홈페이지를 운영하는 한편, 실시간 업데이트를 통해 곳곳에 세련된 미혹의 덫을 설치하면서 가장 파급력 높은 K 이단으로 등장했다. 박옥수 구원파 경우도 국내외 활동이 활발하다. 그동안 중단되었던 월드캠프를 올해부터 다시 대면으로 진행했고, 마인드교육을 내세워 국내외 공교육 현장을 공략하고 있다. 특히 해외 교육 관련 정부 기관들과 활발한 MOU 체결을 맺고 있다. IYF의 경우, 국내 캠퍼스 활동으로부터 해외 자원봉사에 이르기까지 대표적인 K 이단으로 국내외에서 광폭 행보를 보이고 있다. 온라인 홍보를 통한 포교 활동이 대면 만남과 집회로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하이브리드 홍보와 포교도 나름 정착된 것으로 보인다. 이단들은 시대적 트렌드에 민감하다. 도움이 될 만한 것은 무엇이든 신속하게 벤치마킹하고 스스로에 맞게 업그레이드한다. 문화적 키워드를 선점한 후, 정보기술력을 앞세워 포교 대상자를 공략한다. 교회의 선제 대응이 필요한 시점이다. 사후약방문식의 수동적 대처로는 이단 피해를 막기에는 역부족이다. 한 걸음 앞선 응전이 필요하다. 복음의 전래와 정착 시기에, 교회는 가장 선진적인 문화 도입과 선도적인 정보 제공으로 사회적 순기능을 감당했다. 하지만 이제는 사회의 정보기술은 물론이고 이단들의 콘텐츠조차 따라가기 벅찬 시대가 되었다. 심지어, 사회를 걱정하던 교회가, 역으로 사회의 염려를 한 몸에 받는 매우 당혹스러운 상황이 연출되고 있다. 경제력, 정보력, 기술력을 앞세운 하이브리드 이단의 시대, 한류를 이용해 세계화를 시도하는 K 이단의 시대, 교회의 경쟁력 강화를 위해 오히려 ‘복음의 순전함’ 즉 ‘신앙적 기본과 상식’으로 돌아가는 역발상적 접근이 필요하다. 세상의 방법으로 이단과 경쟁하기보다, 오히려 성경적 방법으로 하나님의 백성 그리고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자긍심과 자존감을 회복하는 것이 더욱 시급하다. 복음의 순전함을 소유하고, 복음의 능력에 온전히 의지하는 것이, 온 시대를 초월한 교회의 생존전략이었음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 오피니언
    • 정론
    2022-11-04
  • [송시섭 교수] 성벽 있는 성내의 가옥
    교회를 떠나는 청소년들이 교회가 위안을 주는 장소가 아니라 억압의 장소로 이해하고 있다는 분석 기사를 읽어본 적이 있다. 부모세대가 이루어놓은 물질적 풍요와 휴대폰 속에 넘쳐나는 대중문화의 유혹은 극심한데, 21세기의 삶을 사는 자신들에게 여전히 19세기의 방식을 주입하는 어른들에 대하여 문화적 격차를 느끼는 것은 당연할지도 모른다. 이는 청년들도 예외가 아닐 것인데, 청년들이 교회를 떠나는 주된 이유 중 하나가 복음의 본질을 듣지 못하거나, 설교가 자신들의 삶의 고민과 동떨어진 다고 느낄 때라고 한다는 점은 뼈아픈 현실이다. 그들을 다시 교회로 불러올 수 있는 다양한 해결방안에 대하여 모두 동의하면서 필자는 작지만 의미 있는 제안을 한 가지 더하고자 한다. 그건 다름 아닌 성경에 대한 인식의 변화다. 다소 오래된 미국의 통계이긴 하나, 1991년 바나 리서치(Barna Research)가 ‘성경이 가르치는 원칙들은 정확무오하다’라는 언술(言述)에 대한 동의 여부를 질문했을 때 46%가 강력하게 동의했는데, 2016년경에는 같은 조사에서 30% 정도만 그렇다고 대답했다는 결과는 무엇을 말해주고 있는가. 이러한 경향은 우리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속단한다면 위험한 추정일까. 아마도 청소년, 청년들은 성경에 대한 다소 고루한 인식, 즉 성경은 교조적이며 어떠한 예외도 허용하지 않는 고지식한 명령들로 가득 찬 낡은 법률 서적이라고 이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성경은 생각보다 열려 있고, 타협적이며, 각 시대의 역사적 소명의 맥락을 읽는 깊은 통찰을 보여주며, 동시에 또 다른 가능성을 언제나 열어두고 있는 책이라는 점은 젊은 세대에게 잘 전달되지 못한 면이 있다는 걸 느끼게 된다. 그 대표적인 예(例)가 바로 레위기의 희년(禧年, jubilee)규정을 읽을 때다. 성경은 희년규정을 설명하면서 ‘무르기’(redemption)에 대한 대표적인 예외로 ‘성벽 있는 성내의 가옥’(dwelling house in walled city)에 대하여는 1년이라는 유예기간을 허용한 뒤 그 뒤로는 무르기가 불가능함을 천명하고 있다.(레위기 25장 29-30절) 이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읽다보면 참으로 하나님의 ‘거룩한 융통성’을 보게 된다. 그 중 한 견해는 성벽 있는 성내가옥은 주로 부자들의 소유물이므로 희년의 취지인 약자들의 생존권보장의 보호범위 밖에 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도 1년이라는 유예기간을 허용해줌으로써 부자도 주택 무르기의 혜택을 누릴 수 있도록 조정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또 다른 견해는 희년이 일방적인 분배철학만을 고집하지 않고 보다 유연한 시장경제를 지지하고 있으며 더구나 1년이 지난 가옥의 경우 매입자가 새롭게 형성한 부가가치를 인정하여 매도인의 권리를 제한하고 있다고 보기도 한다. 어떤 견해를 취하든 성경은 우리의 청소년, 청년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매우 세밀하고 정치(精緻)하며 놀라울 정도의 현실적 구체성을 띄고 있으며, 시대적 배경과 경제 사조까지 반영한 아주 합리적인 책이라는 점이다. 어릴 때부터 성경 속 이야기를 위인과 기적위주로 전달할 때 청자(聽者)는 그 본래 취지에 맞지 않게 성경을 영웅위주의 차별적이며, 신중심의 권위적인 문서로 이해할 위험을 안게 되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성경이 참으로 유연하면서도 새로운 해석에 항상 문을 열어두고 있는 놀라운 합리성을 갖고 있는 책(冊)임을 가르쳐야 할 것이다. 성경을 읽으면 읽을수록 시대를 뛰어넘는 지혜를 제공해주며, 천국과 구원에 대한 영적인 진리뿐 아니라, 이 세상을 살아가는 깊은 깨달음을 전해준다는 점을 제대로 알려주어야 한다. 우리의 위대한 스승이자 구원자이신 예수님은 늘 우리에게 ‘~라고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라는 새로운 성경해석에 대한 열린 자세를 늘 강조하셨다. 우리의 위대한 선생님은 결코 성경을 묵고 굳은 계명으로 인식하지 않았던 것이다. 다음 세대를 걱정하는 요즘, 다양한 대책이 봇물처럼 쏟아지는 지금, 어쩌면 미래세대를 붙잡을 수 있는 유일하게 남은 마지막 전략은, 성경에 대하여 ‘알기를 감행하는’(dare to know) 칸트의 제안을 실행해보는 것이 아닐까 한다. 그러기에 바로 이 지점에서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이라고 외친 종교개혁가들의 주장에 필자는 전적으로 동조하는 바이다.
    • 오피니언
    • 정론
    2022-09-23
  • [최병학 목사] 동물의 눈에서 예수의 눈, 하나님의 시선을 발견한 엔도 슈사쿠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일본 가톨릭 작가 엔도 슈사쿠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혹시 이름은 몰라도, 적어도 소설 『침묵』(1966)이나 영화 <사일런스>(2017)는 알 것입니다. 주인공 로드리고 신부가 죽어가는 일본 농부들을 살리기 위해 그리스도의 얼굴이 그려진 후미에를 밟고 배교하면서 이렇게 되뇝니다. “그리스도는 사람들을 위해 분명히 배교했을 것이다. 자, 지금까지 누구도 하지 않은 가장 괴로운 사랑의 행위를 하는 거야!” 지금까지 자신의 전 생애를 통해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해 온 것, 가장 맑고 깨끗하다고 믿었던 것, 인간의 이상과 꿈이 담긴 것을 밟는 것입니다. 이 발의 아픔. 그때, 밟아도 좋다고, 동판에 새겨진 그분이 신부에게 말했습니다. 이제까지 침묵했던 신의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신의 말, 아니 신의 시선은 동판에 새겨진 예수의 얼굴뿐만이 아닙니다. 엔도는 동물들의 눈에서도 예수의 눈, 하나님의 시선을 발견합니다. 『엔도 슈사쿠의 동물기』(정은문고, 2018)는 엔도의 진지한 듯 유쾌하고, 무심한 듯 애정이 가득한 동물에 관한 에세이입니다. 엔도는 동물은 친구고, 때론 친구 이상의 특별한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이 소설에는 개, 고양이, 원숭이, 너구리, 구관조, 송사리, 물벼룩까지 많은 동물과 곤충이 나옵니다. 이렇게 동물의 눈을 통해 “인생을 슬픈 눈초리로 바라보는 하나의 존재를 의식”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물론 “식물도 마음이 있다!”라고 외칩니다. 1장 ‘개는 인생’의 짝꿍에서 엔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개는 인간의 슬픔을 달래준다. 양친의 사이가 차츰 나빠져 이제껏 즐거웠던 가정이 저물녘 갑작스레 해가 기운 것처럼 어두웠다. 소년이던 그때는 이유를 전혀 알지 못했다. 다만 그저 당혹스러워 숨죽인 채 하루하루를 보냈다. 아버지가 상냥하게 대해주면 어머니를 배신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고, 어머니에게 응석을 부리면 아버지를 거스르는 것 같아 신경이 쓰였다. 그렇다고 친구들이나 선생님에게 마음의 고통을 상담할 수는 없었다. 말한들 또래 아이들이 이해할 리 만무했다. 학교를 가고 오는 길, 항상 내 곁을 어슬렁어슬렁 따라다니던 검둥이. 어‘집에 가고 싶지 않아!’ 검둥이한테만은 나의 슬픔을 털어놨다. ‘어째서 이렇게 된 걸까?’ 그는 눈물 어린 눈으로 지긋이 바라보며 대답했다. ‘어쩔 수 없어요. 인생이란 그런 거니까요.’” 이렇게 엔도의 동물 이야기는 어린 시절 한 마리 개와 만나면서 시작됩니다. 그 개는 엔도가 어렸을 때 중국 다롄에서 기른 만주견 ‘검둥이’입니다. 엔도는 부모한테 말할 수 없는 감정이 있었습니다. 공부도 못하고 느릿느릿한 엔도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민이나 슬픔을 자주 검둥이에게 말해주었습니다. “아직 집에 돌아가기 싫어”, “학교는 재미없어” 같은! 그러면 검둥이는 엔도를 잠자코 바라봅니다. 눈물이 맺힌 듯한 눈을 하고서 이렇게 말합니다. “어쩔 수 없잖아요? 이 세상은 참지 않으면 안 되니까요.” 따라서 엔도는 어린 시절, 부모나 형제 말고 ‘사랑하는’ 것을 배우는 상대는 개라고 고백합니다. 특히 엔도에게 첫 이별을 알려준 이도 검둥이였습니다. 부모의 이혼으로 인해 일본으로 돌아오면서 작별 인사도 변변히 못 한 채 검둥이와 헤어진 것에 대한 속죄의 마음은 엔도 슈사쿠 문학의 중요한 원점 가운데 하나가 됩니다(『깊은강』의 누마다의 이야기죠?). 엔도 슈사쿠의 첫 마음이자 첫 이별인 검둥이입니다. 엔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검둥이만은 내 외로움을 알아줬어” 물론 이런 외로움과 이별만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엔도 특유의 유머도 책 곳곳에 숨겨져 있습니다. 엔도는 기르던 개가 새끼 고양이를 잘 보살피자, “저 둘 사이에 아이가 생길지도 몰라. 그러면 ‘야멍’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한바탕 돈을 벌어야지. 놀면서도 걱정 없이 생활할 수 있을 거야.”라고 우리를 웃깁니다. 판다의 교미를 적나라하게 보도하는 방송을 보고 “판다의 사생활을 지키는 모임을 만들자!”라고 술자리에서 한바탕 연설을 늘어놓습니다. 이렇게 이 책은 만주견 ‘검둥이’로부터 시작해 개, 고양이, 원숭이, 너구리, 구관조에 이르기까지, 엔도가 키우거나 만나왔던 여러 동물과의 이런저런 인연을 가식이나 과장이 없는 목소리로 들려줍니다. 일생을 통해 사랑하고 교감했던 여러 동물의 눈에서 예수의 눈, 하나님의 시선을 발견한 엔도입니다. 따라서 엔도는 다음 생에는 ‘사슴’이 되고 싶다고 합니다. 그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엔도가 인도에 갔다가 세계 제일이라고 자칭하는 점술가로부터 “당신의 전생은 비둘기, 다음 생에는 사슴으로 태어날 것입니다.”라는 말을 듣고, 독자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만약 훗날 나라 공원에서 사슴이 된 자신을 만난다면 사슴 전병을 많이 던져주세요.” 하나님 나라는 이렇게 동물들의 눈에서 예수의 시선을 발견하는 나라일까요?
    • 오피니언
    • 정론
    2022-09-08
  • [김기현 목사] 사울은 천천
    창을 들고 앉아 있는 사울은 고립무원이다. 사방팔방이 적들로 우글거린다. 처음에는 다윗 한 명만 적이었는데, 적 곁의 적이 하나둘 늘어난다. 듬직한 요나단은 다윗을 구명하는 탄원을 하지 않나, 신하 중에 언제부턴가 다윗에 줄을 대지 않나, 어찌 키운 내 딸인데, 그 죽일 놈을 사랑한다니. 최악은 그도 그가 사랑스럽다. 신앙 좋지, 인품 좋지, 실력 좋지, 뭐 하나 나무랄 것도 없는 그가 충성심도 단연 최고다. 사울은 만인에게서, 자신에게서 스스로 소외되었고, 그런 다윗이 밉고, 그런 자신이 미워 죽을 것 같다. 나는 오랫동안 선택받은 왕인 사울이 왜 버림받고 실패했는지, 가족과 장인과 아내에게서 홀대받던 다윗은 추앙받는 최고의 왕이 되고, 군주의 모델이 되었는지, 그 갈림길이 어디인지 퍽 궁금했다. 사울은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자 건국자가 아닌가? 그 정도면 태조 왕건, 태조 이성계급인데, 그의 최후는 너무 쓸쓸하고 아리다. 무엇이 그를 무너뜨렸을까? 그는 지금이라도 제정신 차리고 예의 그 용감무쌍하고 총기 넘치는 초기의 사울로 돌아갈 순 없을까? 창을 들 것인가, 시를 쓸 것인가? 분노, 시기, 적대감과 열패감을 어떻게 표현하느냐가 둘을 갈랐다. 다윗이라고 그런 감정이 없을 리 만무하다. 시편을 보라. 폭력으로 분출하느냐, 일기장에 털어놓느냐의 차이일 뿐. 그 무언가에 들들 볶이고 미쳐 돌아버릴 것만 같을 때, 한 사람은 창을 던졌고 또 한 사람은 시를 썼다. 던진 창은 부메랑이 되어 자기 배에 꽂혔고, 외롭고 무서울 때 그 감정을 글로 남겼더니 절창이 되었다. 운명은 결정된 것이 아니라 결정한 것이다. 창을 던질 것인가, 글을 쓸 것인가, 선택하라. 그것이 그대의 데스트니다. ‘다윗과 골리앗’은 하나의 대명사요 고사성어로 인류 역사가 존재하는 동안, 내내 전달되고 전파될 아름다운 이야기이다. 그의 공적을 기리는 여인네들의 춤과 노래가 없을 수 없다. 그것이 사울의 심기를 건드린다. 다윗은 만만이고, 나는 천천이라. 그의 전공에 비해 10분의 1이잖아. 그의 인기가 날로 치솟고, 나는 바닥을 치면, 왕좌가 위험하다.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만은 없다. 일거수일투족을 의심하고 호시탐탐 염탐하고,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그를 죽여야 내가 산다. 사울은 비운의 왕이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전대미문의 길, 인간 왕이 다스리는 국가의 길을 열어야 역사적 사명을 안고 태어났다. 그러나 선례가 없다. 비교 대상이 없다. 남의 나라는 모방하지 말고, 하나님을 모방하라는데, 뭔가 손에 잡혀야, 눈에 보여야 배우든, 따라 하든 할 텐데. 도무지 오리무중이다. 앞길에는 아무도 없고, 그가 맨 앞에 홀로 섰다. 뒤에서는 다윗이 맹추격하는 중이다. 나아가 길을 열 수 없다면, 돌아서 다윗을 쳐내는 수밖에. 사울은 비교 대상을 잘못 골랐다. 나와 남을 비교할 것도, 나의 최악과 남의 최고를 견줄 것도 아니다. 나의 장점을 무참히 깎아내리고, 남의 장점은 한없이 우러르고, 나의 단점에는 현미경을 들이대고, 남의 장점은 망원경으로 숭배할 일이 아니다. 남과 비교하지 마라. 내가 내게 기준이다. 나는 나다. 나는 딱 하나다. 비교 불가의 존재다. 대신,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를, 오늘의 나와 내일의 나를 비교하라. 어제는 백백, 오늘은 천천, 내일은 만만이 될지니. (삼상 18:7)
    • 오피니언
    • 정론
    2022-08-12
  • [김정환 사무총장] 기후 위기에 대응하는 작은 실천 - 다시 아나바다!
    봄은 새싹이 움트고 여름은 만물을 키우고 가을이 오면 결실을 맺고 겨울은 결실을 함께 나누는 계절의 섭리가 이제는 완전히 변했다. 봄이 오는지 가을이 가는지도 모르게 여름과 겨울이 온다. 거기에 더해 날씨까지도 심상치 않다. 전 세계적으로는 때 아닌 한파와 폭염, 홍수가 발생해 지구촌을 고통스럽게 하고 있다. 대한민국도 마찬가지다. 보지 못했던 큰 산불로 그동안 잘 가꾼 숲이 훼손되었다. 이번 장마에도 서울을 비롯한 중부권은 폭우가, 남부지역은 폭염으로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날씨를 경험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무너뜨리는 인간의 무절제한 삶의 행태가 만들어 낸 기후 위기로 인한 것임을 알게 되고 해가 갈수록 두려운 마음이 든다. 요즘 탄소중립, 넷 제로라고 해서 이해하기도 어렵고 알게 되어도 선뜻 실행하기 힘든 말들이 언론을 통해 계속 들려오고 있다. 기후변화로 위기에 처한 지구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탄소중립을 위한 다양한 분야에서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한다. 정부는 탄소중립을 위해 각 나라들과 연대하며 지원하는 정책 방안을 마련하고 실행해 나가야 하며 기업은 기업의 이윤 뿐 아니라 사회적 책임을 다하기 위해 탄소중립을 향한 노력을 해야 한다. 시민은 정부나 기업이 그 책임을 다해 나갈 수 있도록 관심을 가지고 지켜볼 뿐 아니라 정책 과정과 기업의 노력을 점검해 나가야 한다. 그와 함께 개개인은 효율적으로 에너지를 사용하고, 재사용 재활용 등을 통해 탄소 배출량을 최대한 줄이는 제로웨이스트 운동을 생활 속에서 실천해 나감으로써 삶의 변화도 필요하다. 2009년 캘리포니아의 한 여성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하는 ‘제로웨이스트 운동’은 처음에는 한 여성의 블로그에서 시작된 개인으로부터의 작은 실천 운동이었지만 지금은 생활 속에서 배출되는 쓰레기를 최소화함으로써 환경을 살리고 탄소 발생도 줄여나가는 개인의 일상을 변화시키는 운동이다. 일회용 컵을 사용하지 않고 다회용 컵을 사용하고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비닐봉투 대신 장바구니를 사용하고 채소나 과일은 다른사람 보다 먼저 용기에 담아서 오는 ‘작은 용기’도 필요하다. 우리 주변을 둘러보면 크고 작은 생활협동조합, 제로웨이스트 매장이 있다. 그곳에 가면 다양한 제로웨이스트 제품이 지구를 위해 환경을 위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제로웨이스트는 새로운 실천 운동이 아니다. 1997년 한국YWCA에서 시작한 재활용운동의 대명사라 할 수 있는 ‘아나바다 운동’이 그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어렵고 힘들었던 IMF 시기에 아껴 쓰고 사용할 수 있는 물품은 이웃과 나누고 내가 필요한 것과 바꿔쓰고, 다시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수리해서 쓰는 아나바다 운동은 어렵고 힘들었던 시기에 전 국민의 호응을 받았다. 이제는 지구를 살리기 위해 제로웨이스트라는 이름의 아나바다운동을 다시 시작해야 한다. 조금은 불편하지만 우리 모두를, 지구를 행복하게 만드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지구를 회복시키는 일이기 때문이다.
    • 오피니언
    • 정론
    2022-07-15
  • [강규철 장로] 한번 생각해 봅시다
    오늘의 교회에는 많은 갈등과 분란이 내재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중에 목사님과 장로님간의 갈등이 가장 큰 요인으로 대두되고 있습니다. 특히 장로님들 중에는 장로가 되기 전에는 정말 열심히 섬기며 교회의 모범이 되었던 분이 장로안수 받고 난 뒤에는 교회의 걸림돌이 되어버린 경우가 종종 들려지곤 합니다. 이는 이분들이 장로가 되기 위해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하는 믿음의 깊이와 신앙적인 훈련보다는 외적으로 잘 나타나는 활동과 봉사, 그리고 인맥과 재물의 우위를 통해 장로가 되니 원래의 모습이 드러난 것이라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장로가 되고자 하는 열망은 많았지만 장로가 되고나서 교회와 성도들을 어떻게 섬겨야 하는 것에 대한 생각은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 처음 기독교가 들어 왔을 때 교회의 장로는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믿음이 깊고 신망이 있는 성도를 투표하여 결정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사회에서 천시 받던 백정도 장로가 되었으며 신분이 미천한 머슴이 양반인 상전을 제치고 장로가 되기도 했습니다. 놀라운 것은 이런 현상을 모든 성도들이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고 그 결과에 순종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훌륭한 전통과 신앙의 선배들이 한국교회의 굳건한 초석을 세웠으며 오늘의 한국교회를 이루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한국교회의 현실은 어떠하리라 생각하십니까? 어떤 목사님은 자기 교회 성도 중에 명문대 출신의 학벌 좋은 사람이 많이 출석하고 있으며 특히 대학교수와 의사들이 많음을 자랑하고 이에 대해 상당한 자부심을 갖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게다가 이들이 장로가 되도록 애쓰는 모습도 보였습니다. 현재 많은 교회에서 재산이 많다고 해서 혹은 사회적 권력을 가졌다고, 신앙의 연륜과 교회에서의 헌신과 봉사와 관계없이 빠르게 장로가 되고 있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마도 교회를 빠르게 성장시키고 싶고 경제적으로 안정되길 원하는데 필요하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개인적으로는 화려한 교회당을 지어서 대외적으로 자랑하고 싶은 마음도 있을 것입니다. 물론 학식과 경제적 능력을 무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뛰어난 학식과 경제능력을 갖춘 분이 깊은 신앙과 믿음을 가졌다면 이는 교회의 큰 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장로님들 중에 병든 성도들을 위해 손잡고 기도 할 수 있고 지친 몸과 마음으로 교회에 나온 성도들을 위로하며 보살피고 교회 장년들의 성경공부를 담당하며 그들의 신앙을 지도할 수 있는 분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사실 장로가 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장로로서 어떻게 섬겨야 할 것인가가 더욱 중요합니다. 많은 교회가 그렇게 가고 있는데 뭘 유별스럽게 할 필요가 있느냐고 하면서 그 시류에 편성하여 따라가다 보니 오늘날의 한국교회가 세속주의다 또는 물질만능주의가 팽배해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으며 많은 분란과 갈등이 생기게 된 계기가 된 것 같습니다. 큰 나무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깊은 뿌리가 땅속에서 뻗어 있습니다. 아무리 비바람이 들이치고 눈보라가 몰아쳐도 그 큰 나무가 굳건하게 서 있는 것은 그 존재감을 자랑하지 않는 뿌리 때문입니다. 교회의 뿌리는 묵묵히 교회 곳곳에서 겸손하게 헌신하고 있는 평신도들입니다. 오늘날 교회의 성장이, 웅장한 교회의 건축이 나의 업적이라고 생각하는 교회의 지도자들이 너무 많은 것 같습니다. 수많은 성도들이 흘린 많은 헌신, 수고의 땀과 기도를 하찮게 여기며 소수의 교회 지도자들이 모든 영광을 가져가는 모습에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교회의 머리는 오직 예수님이십니다. 목사나 장로가 교회의 머리가 될 수 없습니다. 똑똑하다고 해서 혹은 재물이 많다고 해서 지위가 높은 것은 더욱 아닙니다. 모두가 한 지체이고 단지 맡은 역할이 다를 뿐입니다. 예수님은 과부의 두 렙돈을 더 귀하게 보시고 성전 구석에서 죄인이라며 흘리는 눈물의 기도를 더 높이 평가하셨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 오피니언
    • 정론
    2022-06-24
  • [김성철 목사] 교회교육 팬데믹 단상
    코로나 팬데믹으로 학교 교육과 교회 교육은 초유의 사태를 맞이하게 되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직면한 학교와 교회가 취한 교육활동의 초기 대응 방법은 유사하였다. 컴퓨터 동영상을 시청하거나 관련 동영상 링크를 연결해 학습하는 방법을 사용하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갈수록 학교 교육과 교회 교육의 대처 방법은 확연한 차이를 드러내게 되었다. 학교 교육은 2020년 4월 9일 사상 최초로 온라인 개학을 한 이후, 원래 교육시스템을 회복하기 위해 「온라인 화상을 활용한 대면교육시스템」을 구축하기 시작하였다. 모든 교사들은 화상회의 프로그램이었던 줌(Zoom) 프로그램 운영법을 배워 학생들과 직접 대면할 수 있는 전문성을 갖추어 나갔다. 각 가정에 있는 학생들도 온라인 대면 수업이 가능하도록 준비하였다. 그 결과, 매일 아침 교사와 학생들은 줌(Zoom)을 통해 만남으로, 코로나 이전의 「대면 수업」, 「현장 수업」을 상당부분 대체할 수 있도록 되었다. 학생들은 가정에서 정한 시간에 컴퓨터 앞으로 등교하고, 화상을 통해 교사와 학습 활동을 하며 코로나 이전의 모습을 회복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처음에는 교육현장에서 실수와 어려움이 많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오류가 교정되고 정착되어 학년별로 정해진 커리큘럼을 감당해 나가게 되었다. 이처럼, 학교교육은 현장교육이라는 것을 제외하면 이전 교육의 많은 부분을 회복하는데 성공하였다고 본다. 교회 교육도 교육 정상화를 위한 노력에 힘을 쏟았다. 교역자들은 대부분 예배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집중하였다. 반면 반별성경교육은 교회교육현장에서 생략되어졌다. 주일학교 학생들에게는 유튜브를 통한 설교영상이나 예배순서 전체를 묶어서 구성한 영상을 방영하는 「비대면 예배 방식」만 제공되었다. 학교교육 현장이 줌(Zoom)을 활용한 온라인 대면 수업이 진행되고 있었음에도 소수의 교회를 제외한 대부분은 여전히 초기와 같은 비대면 동영상 시청을 위주로한 예배 방식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당시 대부분의 성인예배는 실시간 유튜브 비대면 또는 줌을 활용한 온라인 대면 예배가 진행되었다. 주일학교 학생들의 경우 예배훈련과 더 많은 성경학습이 요구되는 대상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 교육현장에서는 동영상 시청이라는 비대면 예배 방식이 주를 이루었다. 2년간의 코로나 팬데믹 기간동안, 현장이 사라진 예배와 생략된 성경공부에 대한 안타까움과 극복을 위한 방안을 찾지 못한 채 상당 기간 방치된 상태로 지나왔다고 할 수 있다. 학교교육은 코로나시대에 변화하여 비대면 교육에서 온라인 대면교육으로 현장교육을 살려내었지만, 교회교육은 「비대면 교육현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한 걸음도 「대면 교육현장」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코로나 팬데믹 초기에 행하던 비대면 상태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 필자는 코로나 시작인, 2020년 4월부터 지금까지 매주 토요일 줌을 통한 「온라인 대면 성경공부」를 진행하고 있다. 코로나로 인해 생겨난 토요 줌 성경공부는 정식 프로그램으로 정착되어 새로운 성경공부와 친밀한 교제 활동으로 자리매김했다. 지속적인 온라인 대면 성경공부는, 코로나 기간 동안 학생들의 성경에 대한 관심과 지식을 더욱 증가시키는 역할을 했다. 또한 개인적인 일로 주일 예배에 참석하지 못한 학생이라도 토요일 성경공부에서 다시 만날 수 있고, 교육할 수 있다는 장점이 생겼다.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경계가 없는 교육체계가 자연스럽게 구축된 것이다. 코로나 팬데믹을 통해 얻은 가장 값진 선물이다. 코로나 팬데믹 상황속에서 교회교육이 놓친 것이 무엇인지 돌아보아야 한다. 또 다시 예상치 못할 환경을 대비하여 적극적으로, 본질을 유지하는 방향에서 새로운 준비를 하여야 한다. 단순한 문화 수용이나 유행처럼 쫓아가는 일에 매몰되지 않아야 한다. 그 문화를 제대로 학습하여 교회교육의 본질을 더 강화시킬 수 있는 힘을 키워야 한다. 다시는 다음 세대들이 예배와 성경학습이 없는 시간을 보내지 않도록 하여야 한다.
    • 오피니언
    • 정론
    2022-06-10
  • [전영헌 목사] 이 맘때면 생각나는 제자가 있습니다
    수업 시간마다 굉장히 독특한 반응을 하는 H가 있었다. 말하는 것도 삐딱하고, 친구들에게 비아냥거리고, 어쨌든 굉장히 독특한 캐릭터를 가진 아이였다. 그래서 ‘참 묘한 녀석이다’라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날은 수업 시간에 ‘나의 강점과 약점’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시간이었다. 학급의 친구들에게 자신을 오픈하고,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퍼즐 조각을 맞추듯 조화를 이루는 학급이 되도록 하자고 하는 것이 그날 주제였다. 여러 학생이 자신의 강점으로 ‘끈기, 운동 잘하는 것, 말 잘하는 것, 아무 곳에서나 잘 자는 것, 수학, 영어 말하기, 리더십, 긍정적인 생각 등’ 다양한 답을 했다. 자신의 약점으로는 ‘끈기 부족, 집중력, 성적, 가정환경, 외모, 키 등’으로 대답을 했다. 그런데 H는 ‘나의 약점은 오른손인데요’라고 대답을 했다. “H야 넌 왜 오른손이 너의 약점이니?” 하고 물으니, 뒤쪽에 같은 중학교를 나온 아이들이 픽픽하고 웃었다. “H야 왜 오른손이 너의 약점이라고 생각하니?” 재차 물었다. H가 책상 밑에 있던 오른손을 올리더니 “나는 내 오른손이 저주받은 손이라고 생각합니다. 중학교 때 이 손에 카트 칼을 들고 친구를 찌르려고 했던 손입니다. 나는 이 손이 저주스럽습니다.” 같은 중학교를 나온 아이들이 “우~~~”하고 야유 섞인 소리를 내었다. 진정시키고 수업을 마친 후 H를 교목실에 불렀다. “너 중학교 때 무슨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안 좋은 일이 있었니?” “학교에서 수업을 마치고 버스를 기다리는데 친구들이 자꾸 놀렸습니다. 저는 외모 콤플렉스도 있고, 목소리도 이상해서 늘 움츠리고 있는데 그날도 계속 친구들이 나에게 찌질하다고 놀리는데 너무 화가 나서 가방에 있던 칼을 꺼내 휘둘렀습니다. 목사님 그런데요 그날부터 나는 화만 나면 칼을 찾습니다. 오늘도 교복 호주머니에 칼을 넣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런 내가 너무 싫습니다. 안 그래야지 하는데 또 그러고 있습니다. 한 번은 제 오른손이 너무 싫어서 칼로 제 오른손을 그은 적도 있습니다. 그래서 친구들이 나를 더 피하는 것 같습니다. 저도 이런 제가 싫습니다.” 외모도 투박하고, 목소리도 독특하고 대인관계에 어려움이 있어서 안 그래도 친구들의 타겟이 되기 쉬운 아이였는데 중학교 때 일이 계속 H의 발목을 잡고 있는 것이 안타까웠다. “목사님이 네 손을 잡고 기도해주고 싶은데 괜찮을까?” “네” “하나님, H의 마음을 위로해 주시기 원합니다. H의 답답한 마음의 소리를 들어 주시기 원합니다. 무엇보다 오래전의 일이 H의 마음을 짓누르고 있습니다. 도와주시기 원합니다. 상처 있는 손이 사람을 살리는 손으로 바뀔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 원합니다. H의 손이 외로워하는 친구에게 위로의 손이 되게 하시고, 넘어진 사람을 일으킬 수 있는 소망의 손이 되게 해주십시오. 하나님이 H의 손을 붙잡아 주십시오.” 녀석은 기도하는 내내 가슴을 주먹으로 치며 “윽~윽”소리를 내며 울분을 토하고 있었다. 나보다 덩치가 큰 녀석을 안아주었다. 물론 H의 상처가 바로 회복된 것은 아니었다. 졸업하기 전에도 학교에서 한 번 소동이 일어났던 적도 있다. 지금 나는 H가 어떻게 지내는지 잘 모른다. 소식이 닿지를 않는다. 그런데 문득문득 기억나는 제자 중 하나이다. 그냥 가슴 한켠에 아픔으로 남아있는 아이이다. 빠른 시간에 반응하고 바뀌는 아이들도 있지만 긴 시간이 지나서야 바뀌는 아이들도 있다. 나는 H가 20대를 지나가는 동안 좋은 사람들을 만나서 더 이상 자신의 손을 저주하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약점이었던 오른손이 자신의 가장 강점이 되는 손이 되길 축복하며 기도해본다.
    • 오피니언
    • 정론
    2022-05-20
  • [김태영 목사] 우크라이나 인접 국가들의 난민구호 현장과 기도요청
    인간이 저지르는 범죄 중에 가장 악한 죄라면 그 첫째가 전쟁이다. 군인들끼리의 힘겨루기가 아니라 그 안에는 인간의 탐욕과 소유욕, 정복욕, 과시욕, 교만이 들어있다. 전쟁으로 얼마나 많은 비무장 민간인들과 어린이들이 희생당하고 얼마나 많은 약탈과 파괴가 있었던가. 도시 전체가 잿더미가 되기도 하고, 나라가 통째로 무너지기도 하면서 생명의 소중함이나 인권은 깡그리 짓밟히고 만다. 참 무섭다. 온 세계가 지구촌이라며 그 어느 때 보다 정보, 통신, 교류가 활발한 21세기에 난데없이 전쟁이 터지고 벌써 2개월이 되어 가지만 휴전이나 종전 소식은 들리지 않고 많은 국민들이 고통당하고 있다. 필자가 섬기는 한국교회봉사단(한교봉)은 15년 전, 서해안 태안지역의 기름 유출 사고 때 전국의 교회와 기독교 NGO들이 기름 방제 작업을 각각 하면서 효과적인 연합 사업을 위하여 설립되었으며 국내의 크고 작은 재난 현장뿐 아니라 용산참사 유가족 위로, 정신대 할머니들에게 마포 주택을 제공하였으며 해외의 네팔과 아이티 지진에도 현장에 가서 봉사하고 기술학교를 세워서 지금까지 섬기고 있다. 금년 2월 24일, 군사 강국인 러시아의 푸틴이 우크라이나를 침공함으로 전쟁이 시작되었고, EU소속 국가뿐 아니라 대다수의 국가들이 ‘전쟁을 그칠 것’을 권하여도 아랑곳하지 않고 민가까지 미사일이 떨어지므로 400만명 이상의 피난민이 생기고 방공호에 피신한 국민들은 날마다 생사의 기로에 놓여지게 되었다. 한교봉은 고난받는 우크라이나를 위한 기도회를 한 후에 3.8-14 까지 기자들을 동행하여 8명을 루마니아 국경 지역으로 파견하여 긴급구호 활동과 사태의 심각성을 생생하게 보도하여 한국교회로 하여금 기도하고 관심을 가지게 하였으며, 4.1-8 2차로 필자와 함께 5명이 체코, 스로바키아, 헝가리를 방문하여 긴박한 구호 현장과 효율적인 피난민 지원을 점검하였다. 국경 인접 지역의 기독교 교단과 기독교 NGO, 한인선교사회, 우크라이나 선교사님들의 희생적 수고가 있음을 보았다. 체코에 머무르는 우크라이나 피난민은 약 30만명이며, 국립 프라하대학교 총장이며 신부였던 종교개혁가 얀 후스(1372-1415)가 종교 재판으로 화형당한 후 후스의 후예들이라고 하는 ‘체코형제복음교단’(ECCB) 소속 130교회에서 1,200명의 피난민들에게 숙소와 음식, 유치원 교육을 제공하고 있었으며, 이 지원을 총괄하는 디아코니아 기관이 있었다. 헝가리 정부는 에너지 정책 등의 이유로 친러 정책을 펴고 있으나 칼빈의 교리를 따르는 헝가리개혁교단(RCH)은 ‘약자를 섬기는 것이 곧 주님을 섬기는 것이다.’는 말씀을 모토로 1,249교회, 180만 성도들이 피난민 20만명을 적극적으로 보살피고 있었다. 한교봉은 헝가리개혁교단 봉사단과 MOU를 체결하고 종전 후 우크라이나 복구 때에도 함께 협력하기로 하였다. 특히 우크라이나 안에 헝가리개혁교단 소속 교회가 108교회가 있으며, 그중에 73명의 목회자들이 교회와 성도들을 섬기고 있다고 하였다. 그들은 회중이 피난 간 교회에서 사례비조차 받지 못하면서도 남아 있는 교인들을 돌보고 있었다. 한교봉은 전쟁지역인 우크라이나에 입국할 수가 없어서 유엔 세계식량계획(UN WFP)과 유엔 난민기구(UN HCR)에 각각 10만 달러(환화 2억 6천만원)를 기부하여 그들로 하여금 우크라이나의 눈물을 닦아주도록 하였다. 우크라이나 피난민들은 한국교회가 전쟁 종식을 위해 기도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했을 때에 ‘알지 못하는 나라를 위해 기도해 주셔서 감사하다.’고 눈시울을 붉혔다. 지금은 교단이나 기독교 NGO가 각자의 방식으로 모금하고 돕고 있으나 종전 후에는 기독교 라운드 테이블을 만들어서 ‘한국교회 이름’으로 선교사회와 전후 복구에 함께 했으면 한다. 6.25 전쟁의 참회를 겪은 우리나라는 우크라이나 전쟁을 통하여 국가 안보의 소중함을 더욱 절절히 깨달아야 한다. 파스칼은 ‘힘이 없는 정의는 무능이요 정의 없는 힘은 폭력’이라고 했다. 힘없는 우크라이나와 정의 없는 푸틴을 보면서 새 정부가 힘과 정의의 균형을 이루고 교회는 평화의 도구가 되는 일을 위하여 기도를 요청 드린다.
    • 오피니언
    • 정론
    2022-04-29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