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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서연구] 나는 여호와이니라(레위기 22장 31-33절)
    사두개인들은 이성주의자이면서 현실주의자였습니다. 이들은 이성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은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내세나 부활을 믿지 않았고, 당연히 이 세상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현실주의자였습니다. 이 세상밖에 없다고 생각하니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성공하려고 노력했고, 예루살렘의 부유한 지역에 주로 거주했습니다. 어느날 이들이 예수님께 이상한 질문을 했습니다. 한 사람이 후사가 없이 죽은 후 시동생이 형수와 결혼하여 또 후사가 없이 죽었고, 계속 동생들이 형수와 결혼했고, 결국 일곱 형제와 여인까지 모두 죽었는데, 부활이 있다면 나중에 여인은 누구의 아내가 되어야 하는가 라는 질문이었습니다. 현실성이 전혀 없는, 단지 예수님을 곤란하게 만들 마음으로 한 질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대답하시면서 마태복음 22장 32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하시니> 이 말씀은 본래 미디안 광야의 떨기나무에서 나타나신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하셨던 말씀입니다. 출애굽기 3장 6절을 보면 <또 이르시되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모세가 하나님 뵈옵기를 두려워하여 얼굴을 가리매>라 했습니다. 아브라함과 모세는 대략 7백여 년의 차이가 있습니다. 모세의 입장에서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은 수백 년 전에 죽은 조상들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었다...>라고 과거형으로 말씀하시는 게 맞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다>라고 현재형으로 말씀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영원히 살아계신 현재의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도 죽은 아브라함이 아닌, 살아 있는 아브라함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즉 수백 년 전에 죽어서 사라진 아브라함이 아니라, 살아 있는 아브라함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니라>는 말씀이 바로 이 뜻입니다. 사두개인들은 죽은 후에는 아무 것도 없는 것처럼 생각했지만, 아브라함은 죽은 후에도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현재형으로 말씀하시는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오늘 말씀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세 번을 반복해서 말씀합니다. <나는 여호와이니라, I am the Lord.> 하나님께서는 <나는 여호와였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현재형으로 영원히 존재하십니다. 존재하셨던 분이 아니라, 존재하시는 분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신앙을 <사건의 모음>으로 이해하지 말고, <존재와 관계>로 이해해야 합니다. 사건으로 모음으로 이해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에 일으켜 주신 특별한 일들을 모은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증거가 무엇일까요?>라는 질문에 대해 어떤 이는 자신이 경험한 기적 같은 몇 가지 일을 나열합니다. 간증집회에서 이런 현상을 많이 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일으키신 놀라운 일들은 <과거>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자니>라고 했는데, 이것은 지나간 과거입니다. 출애굽, 홍해를 건넌 일, 아말렉을 이긴 것 등은 다 과거입니다. 중요한 것은 현재 내가 존재하고, 하나님께서 존재하시고, 그 사이에 사랑의 관계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 자체입니다. 예수님께서 유월절 만찬을 폐지하신 것도 그것이 과거의 출애굽을 기억하는 데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만찬은 예수님께서 몸과 피로 우리에게 현재적으로 임하여 계신 것입니다. 우리 신앙에 가장 큰 축복은 과거에 경험한 특별한 기적적 사건들이 아닙니다. 가장 큰 복은 <현재 하나님께서 나의 하나님으로 계시다>는 그 자체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있는 모든 곳에 함께하시고, 모든 상황에 우리를 도우십니다. <나는 너의 하나님이다>, 이것이 최고의 복입니다. 이 복을 누리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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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4-09
  • [소강석 칼럼] 교회 부흥의 씨앗, 순교의 정신
    지난 3월 18일 김제 광활교회에서 열린 고 최원귀 집사님 순교자 등재 감사예배 설교를 하였습니다. 최원귀 집사님은 김익두 목사님의 부흥성회에 참석하여 은혜를 받고 예수님을 믿기 시작하셨습니다. 그 후, 일사각오 순교자의 믿음으로 1948년 7월 4일에 광활교회를 설립하고 오직 교회와 자유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 사셨습니다. 그러던 중 6.25전쟁이 일어난 1950년 8월 15일 김제경찰서에서 온갖 폭행과 고문을 당하다가 철사줄에 묶인 채로 생매장을 당하여 순교를 하셨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얼마나 참혹한 삶입니까? 최원귀 집사님은 생전에 4남 2녀를 낳았는데 장남인 최대진 장로님이 동생들을 다 키웠습니다. 저는 그 분을 보면서 주기철 목사님의 아들 주광조 장로님을 만나는 것처럼 감격스러웠습니다. 최원귀 집사님의 아들들은 장로님이 되고 딸들은 권사님이 되어 다들 신앙의 명문가정을 이루었습니다. 그 자녀분들과 성도들 앞에서 설교를 하려고 하니 눈물이 울컥거려서 몇 번을 참았습니다. 이윽고 제가 순교자 기념등재증서를 드린 후에 차남 최광진 장로님이 인사말씀을 하시면서 아버지를 향한 글을 써서 읽으셨습니다. 그 글을 읽는데 제 가슴에서 끊임없이 눈물이 흘러 내렸습니다. 그 글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아버지, 꿈에도 잊지 못할 6.25, 민족의 가슴에 아픈 상처를 냈던 6.25, 시간이 지나도 빈자리는 크고 가슴은 시리기만 합니다. 아버지 없는 빈자리에 때로 외롭고 때론 힘들었지만 돌이켜 보니 오늘의 우리를 여기까지 지킨 것은 아버지의 순교였습니다. 지나간 70년, 가난과 풍요, 고난과 성공이 수없이 교차했지만 가난 속에서도 비굴하지 않고 풍요 속에서 물질이 하나님이라 믿지 않고 고난 속에서도 끝까지 견뎌온 것은 아버지가 말없이 가르친 순교의 정신 때문이었습니다. 그동안 교회도 어지러워 곁길로 가고 우리도 세속화, 물질화, 영적 전쟁으로 힘들어할 때 그래도 주님의 몸이라 무너진 교회의 기둥을 붙들며 눈물로 지새워온 것도 아버지가 우리 가슴에 새겨준 순교의 교훈 때문이었습니다. 죽으면 살고 죽어야 살며 살아서 죽으면 죽어도 살고 죽어서 살면 영원을 사는 진리를 몸으로 가르친 아버지,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숲을 이루고 그 숲에서 많은 열매를 맺는 복음의 진리를 죽음으로 가르쳐 주신 아버지, 우리도 아버지처럼 살아 매일 순교적 삶으로 살고 아버지처럼 죽어 매일 순교자의 영광으로 사는 복되고 아름다운 후손들이 되겠습니다. 부디 하늘나라에서 평안히 영원한 생명을 누리시고 아직도 다 오지 않은 부활의 아침을 위해 조국과 교회를 위해 도고해 주소서...(하략)” 이러한 내용을 들으면서 그 분들께 너무 감사하였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실망하지 않고 각 교회에서 장로로, 권사로. 또 장손은 헝가리의 선교사로 간 집안을 이루었기 때문이죠. 초대교회 교부 터툴리안은 “순교는 교회 부흥의 씨앗”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청년시절의 소원이 순교였는데 그렇지 못해서 항상 빚진 자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물론 지금은 우리가 순교를 하고 싶어도 순교할 수 없는 시대입니다. 그렇다고 순교를 너무 쉽게 이야기 하거나 아무데나 적용해서도 안 됩니다. 분명한 것은 이럴 때일수록 순교의 정신과 가치가 더 고귀하게 여겨져야 합니다. 우리 모두 진정한 순교의 정신을 회복하고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최원귀 집사님의 모든 후손들에게 하나님의 넘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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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4-09
  • [시사칼럼] 신인류의 탄생
    IT 혁명으로 촉발된 급속한 변화에 코비드의 비자발적 충격이 가해진 결과 현세에 거대한 격변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 '신인류'가 생성되는 중입니다. 학술적으로 많은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지만, 상식적인 관찰을 통해서도 무언가 새로운 인간형이 출현하고 있다는 사실을 쉽게 인지할 수 있습니다. 과연 현생 인류(호모 사피엔스)에게 어떤 일이 벌이지고 있을까요? 그렇게 해서 등장하게 될 궁극적인 인간형은 과연 무엇일까요? 자율적 인간(homo autonomous)을 먼저 예로 들 수 있겠습니다(최배근). 칸트가 말한 자율적 주체 개념이 아닙니다. 급속한 자동화 세상에 적응하는 신인(新人)이라는 의미입니다. 요즘 입장할 때 큐알(Q. R.) 코드를 입력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핸드폰으로 비교적 쉽게 할 수 있는 과정이지만 이마저도 버거워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가게마다 늘어가는 키오스크(kiosk)는 어떻습니까? 커피 한 잔 아이스크림 하나 주문하려고 해도 기괴한 조형물 앞에서 겁부터 덜컥 나는 아날로그 세대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자동화에 익숙한 신인류들은 새로운 조류에 완벽하게 적응해서 온오프라인 공히 파도타기(surfing)를 만끽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스스로를 세상의 중심으로 여기고 스트리밍(streaming) 라이프를 즐기며 소비에도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fanshumer) 날마다 스스로를 업데이트(update)하며 살아갑니다. 오죽하면 이들이 만들어가는 경제를 '미코노미(miconomy)'라고 부르겠습니까? 유목민 인류(homo nomad)가 다음 차례입니다. 가축과는 무관한 신유목민을 뜻하는 이 말은 질 들뢰즈(Gille Deleuse)로부터 시작해서 최근 자크 아탈리(Jacques Attali)의 새로운 정의를 거쳐(L'homme Nomade) 이른바 '디지털 유목민'으로 수렴하고 있는 개념입니다. 과학기술문명의 발전으로 이전과 달리 시공의 제약에서 어느 정도 벗어난 인류는 이제 컴퓨터와 인터넷의 엄청난 발전으로 인해 등장한 초연결사회(hyper connected society)에서 어느 시대 어느 장소든 마음대로 갈 수 있는 능력을 구비했습니다. 김난도 교수는 이렇게 등장한 신인류의 정체성은 더 이상 단수(myself)가 아니라 복수(myselves)로 존재하며 직장에 있을 때와 퇴근 후 그리고 일상에서와 SNS 상의 모습이 각각 다른 '멀티 페르소나(muli persona)'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늘 그러하듯 여기에는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이 공존합니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해묵은 질문이 공허와 불안과 함께 찾아오기 마련이니 말입니다. 공감형 인간(homo emphaticus)을 강조하는 추세는 따라서 자연스러운 결과라고 해도 무방합니다. 근대 이후 해체와 탈구조화 현상 속에서 점차 피상적이고 파편적으로 변해가는 인관관계 때문에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급증해 왔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율적 유목민이 되어갈수록 고립감과 소외감은 심화되기 마련입니다. 인간은 결코 혼자 살아갈 수 없는 존재입니다. 아니, 어찌 인류만이겠습니까? 환경생태학자 라이히홀프(Josef Reichhof)는 '모든 고등생물의 기본 토대는 공생이다"라고 강변합니다(Symbiosen, 8). 그러나 정보화혁명은 공감혁명을 수반하고 있습니다. 최근 선한 치킨집 주인을 "돈쭐내자"는 바이콧(buycott) 운동, 배구 선수에서 시작해 사회전분야로 엄청나게 파급효과를 일으킨 "학폭" 문제, 그리고 인천국제공항 정규직 전환 문제를 놓고 특히 MZ 세대를 들끓게 했던 이른바 "인국공 사태" 등은 모두 공감과 공정이라는 가치가 빚어낸 신인류의 자화상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포노 사피엔스(phono sapiens)의 출현입니다! 2015년 3월 영국의 <이코노미스트>는 "스마트폰의 행성"이라는 기사를 통해 '포노 사피엔스의 시대가 도래했다"고 선언한 바 있습니다. 스마트폰이 뇌이고 손인 사람들, 이들은 2007년 1월 9일 탄생했습니다. 스티브 잡스가 아이폰을 들고 나타난 바로 그 날입니다. 이들을 표현하는 말에서 마침내 무언가가 떨어져 나갔다는 사실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즉, 이들은 "호모"로 명명되어 왔던 구인류를 대체할 '포노'로 상징되는 신인류를 일컫습니다(최재붕). 미래학자 호세 코르데이로(Hosé Cordeiro) 역시 '포스트휴먼(posthuman)'과 '트랜스휴먼(transhuman)'이란 말을 선호합니다. 아, 그렇다면 이제 이들이 만들어 갈 세상은 도대체 어떤 모습일까요? 하지만 간과하지 말아야 할 진리가 있습니다. 인류는 결코 진정한 창조주(Creator)가 될 수는 없다는 사실입니다. 설령 창조하는 능력이 있더라도 창조의 근원이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하기야 <호모>든 <포노>든 인류의 존재 자체가 절대적 창조주로부터 기인했음을 어찌 부정할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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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4-09
  • [은혜의 말씀] 십자가, 하나님의 능력(고전1:18)
    고난주간이 되면 십자가를 떠 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십자가는 복음의 핵심이요, 기독교의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시대가 변하고 사상이 변해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방법인데, 하나님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를 통하여 구원을 이루십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십자가에 대한 교리적 지식이 아니라, 십자가의 은혜를 체험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십자가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무엇입니까? 1. 십자가는 우리의 저주가 얼마나 큰지를 보여줍니다.(눅 23:33) 십자가는 원래 로마 사람들이 중죄인을 사형하는데 사용하던 형틀입니다. 이 십자가에 달린 사람은 저주를 받은 것으로 인식됩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께서 이 저주의 상징인 십자가에 달리셨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죄의 결과로 영원한 죽음이라는 벌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죄지은 인간이 받아야 할 벌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줍니다. 바로, 가장 고통스럽고, 가장 잔인하고, 가장 저주스러운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우리 대신 십자가에서 그 저주의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십자가를 바라볼 때, 나는 죄 때문에 저 십자가에서 영원히 저주를 받고 죽어야 할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2. 십자가는 우리의 저주가 끝났음을 보여줍니다.(갈 3:13) 예수님께서 우리가 달려야 할 그 십자가에 우리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려 저주를 받으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속량하셨습니다. ‘속량’ 이라는 말은 ‘값을 지불하고, 자유하게 하다’ 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죄값을 지불하시고, 우리를 자유케 하신 것입니다. 이제 십자가에서 우리의 저주는 끝났으며, 이제 우리는 죄인이 아니라 의인이며, 죽음이 아니라 생명이며, 지옥이 아니라 천국이 기다리고 있는 줄 믿습니다. 3. 십자가는 나의 정욕을 못 박는 곳임을 보여줍니다.(갈 5:24) 이제 중요한 것은, 그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고백하고, 나의 주인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체험한 성도는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삽니다. 무엇이든지 주님의 뜻에 맞추어 삽니다. 여전히 정욕대로 살고, 교만하고, 자기중심적이고, 내 생각대로 산다면 십자가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십자가의 은혜를 아는 사람은 주님 앞에 겸손히 엎드립니다. 무엇보다 성령으로 살아갑니다. 그 사람이 십자가의 대속의 은혜 아래 있는 성도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이, 십자가에 자신의 정욕과 탐심은 못 박고, 오직 주님의 은혜로, 오직 주님의 사랑로, 오직 주님께 충성으로 살아가시는, 십자가의 사람 되시길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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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4-09
  • [의학 칼럼] 빠르게 찾아오는 노안, 백내장 한 번에 치료 가능
    최근, 장시간 컴퓨터와 스마트폰 사용이 일상화 되어있는 현대사회에서는 나이가 들수록 시력이 빠른속도로 나빠지고 있다. 그리고 중.장년층에게 찾아오는 노안과 함께 백내장질환이 고령화 노인성질환이 아닌 전 연령층의 문제로 점점 이어지고 있다. 백내장은 시력이 나빠지면서 노화가 진행될수록 본래 정상적인 투명한 수정체에 이상이 생겨, 혼탁해진 수정체로 인한 눈앞에 시야가 뿌옇게 보이면서, 빛을 제대로 통과하지 못하고 사물의 가까운 곳과 먼 곳의 초점을 맞추는 수정체의 조절근육의 탄력을 잃게되어 초점이 흐려지는 노안과 함께오는 일반적인 노화질환 중 하나라고 볼 수있다. 백내장 증상이 의심되면, 빠른 조치를 취하는 것이 중요하다. 눈부심과 눈의 침침함을 느끼는 백내장 초기증상에는 서둘러 반드시 전문의 진료를 받아 완벽한 치료를 우선적으로 해야한다. 노안과 백내장치료는 초기,중기,말기 등으로 발생시기나 질환증상에 따라 수술법이 다르며, 연령층 대상별 환자 각각 개인의 진단 후 전문적이고 알맞은 수술시행이 필요한 부분이다. 이전의 백내장 치료의 일반적인 수술방법은 단초첨 인공수정체를 사용해 원거리나 근거리 중 한곳만 초점을 정해 맞추는 방법으로 수술 후에도 돋보기안경을 착용해야하는 단점이 있었다. 하지만 100세시대 현대사회에서는 단초점 수술방법의 단점을 보완한 다초점렌즈 인공수정체를 사용한 수술방법이 개발되어 원거리,중간거리,근거리를 동시에 볼수있고, 별도로 돋보기안경착용이 필요없이 노안까지 한번에 해결되어 중,장년층의 시력회복으로 활발한 사회활동으로 삶의 질을 더욱 높일 수 있다. 부산 밝은눈안과병원 정지원 병원장은 “ 최근 발생연령이 낮아지고 노안과 백내장환자가 점차 증가하게 되면서 다초점인공수정체 수술방법으로 노안과 백내장치료를 한번에 해결하게 되어 단축된 회복시기와 더욱 정확한 시력교정을 가능하게 된 수술법이 다양해져, 차별화된 전문적 진단과 케어가 더욱 필요해졌다. 특히 백내장환자들에게 증상에 따른 알맞은 수술의 최상의 결과를 가져올 수 있도록 세부적인 정밀검진과 종합적인 케어로 눈과 관련된 모든질환의 풍부한 수술경력을 갖춰진 병원을 잘 선택하는 것과 특히 백내장수술 후 눈의 안정을 취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과 장소가 중요하다”라고 전했다. 백내장∙노안수술을 한번에 해결을 가능하게 하는 진화된 수술방법으로 인해 가벼운 질환으로 생각하고 단순하게 넘기기엔 바람직하지 않다. 우선적으로 질환의 근본적인 치료개선 외 다른 합병증 또는 부작용확률을 줄이고 회복시기도 중요하기 때문에 수술 받기 전 환자들이 올바르게 선택하고 고려해야 할 사항들이 다양해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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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4-09
  • [목회자 칼럼] 미투 – “너가 아니, 내 마음을?”
    “10년도 더 된 일이지만, 저는 그 날을 어제 일처럼 생생히 기억합니다. 그 친구는 그날도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가고 있는 저를 학교 뒷문에서 조금 떨어진 골목길로 불러 온갖 욕설을 하고 머리를 때린 후 돈을 받고 보내줬습니다. 그런 일들을 종종 있었고, 그럴 때마다 저는 두렵고 수치스러운 마음을 느끼며 하루하루를 살았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자연스럽게 그 친구와 멀어졌는데, 어느 날 TV에서 익숙한 그 아이의 얼굴이 보이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10년도 더 지났고, 오랫동안 그 친구를 보지 못했는데도 불구하고 TV에서 그 아이의 얼굴을 보자마자 몸이 먼저 기억했습니다. 갑자기 그 때의 두려움과 수치심이 물밀 듯이 몰려오고 분노의 마음까지 생기는 것입니다. TV에서 그 아이를 볼 때마다 이런 감정이 생기고, 나는 아직까지 이렇게 고통스러운데, 저 친구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살고 있는 것이 너무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어 어렵게 용기를 냈습니다” 얼마 전, 한창 활동하고 있는 아이돌 가수를 상대로 학창 시절의 학교 폭력을 밝힌 ‘미투’ 폭로자의 증언입니다. 최근 우리 사회는 공직자 혹은 유명 연예인들의 ‘성문제’와 같은 주제의 미투를 넘어 학창 시절의 학교 폭력, 혹은 운동부들의 선수 폭력과 같은 주제의 미투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미투는 2006년 미국 사회 운동가 타라나 버그(Tarana Burke)가 성범죄에 취약한 유색 인종 여성, 청소년을 위해 제안했으며, 2017년 10월 폭로된 하비 와인스타인의 성폭력 사건을 계기로 빠르게 확산되었습니다. 한국에서는 공직, 연예계, 직장, 학교 등에서 일어난 것을 SNS를 통해 자신의 피해 경험을 연달아 고발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미투(Me Too)는 “나도 고발한다”는 뜻으로 성폭력 피해 경험을 공유하며, 피해자들에게 “당신은 혼자가 아니며, 우리는 함께 연대할 것”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사건의 피해자들은 얼마나 마음이 아플까요? 아마 이들은 이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너가 내 마음을 알아? 아무도 모를거야, 찢기고 상한 내 마음을.” 당해보지 않은 자의 아픔을 누가 알 수 있을까요? 특히 어린 청소년 때에 생긴 마음의 상처, 집단 구타와 왕따로 인하 상처는 오래 갑니다. 여기서 우리는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더 이상 이런 일들이 반복해서 일어나지 않기 위해 어떤 방법을 구해야 하는지 고민하고 논의해야 합니다. 먼저, 가장 우선되어 생각해야 할 것은 ‘피해자 입장’입니다. 비록 시간이 지난 일이라 하더라도 상처와 아픔으로 남아 있는 피해자를 어떻게 돕고 치유해야 할 것인지, 제도적인 장치를 마련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동료들과 부모들의 입장도 고려해야 합니다. 학교 폭력이나 이와 비슷한 사건을 겪은 사람이 바로 내 옆에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사실 이들도 방법을 잘 알지 못할 수 있습니다. 내 자녀 혹은 동료가 이런 일을 겪었다면 무작정 분노하며 감정적으로 판단할 것이 아니라 사회 기관이나 상담을 통해 도움을 구할 수 있는 방법을 마련해야 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사회 구성원 모두가 미투로 인해 발생한 일들을 가볍게 여기지 말고 ‘나의 사건’이 될 수 있다는 생각으로 관심을 갖고 사회 구조화 시켜야 합니다. 미투 운동은 피해자와 가해자가 명확하며, 피해자가 직접 용기를 내어 잊혀진 과거의 사실을 밝힌다는 점에서 결국 ‘사람’에 집중해서 ‘사람’을 살리고 회복시키는 데 힘을 쏟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무엇보다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고, 내면 깊은 곳에 숨어 있는 아픈 감정을 읽어서 치유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또한 가해자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인간의 죄성과 사회 환경에 대한 문제점들도 짚어서 바로 세워야 할 것입니다. 결국 치유와 회복은 사람의 마음을 어루만짐으로 일어나고, 그들의 아픔을 동의하고 이해하며 동시에 안아줄 수 있는 공동체가 있을 때 살아날 수 있습니다. 오늘 나의 주변에서 생겨나는 일들에 관심을 갖고 따스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나 한 사람이 든든한 공동체가 될 때, 10년 후 일어날 수 있는 미투와 같은 사건을 오늘 미리 막을 수 있는 힘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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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4-09
  • [부산기독교이야기] 포로선교사 해롤드 보켈(3)
    거제도에서의 보켈의 포로전도 사역은 1951년 초부터 시작되었다. 1951년 3월부터 종교활동을 조직화했고, 정기적인 예배 외에도 개인 전도와 상담, 성경학교 프로그램을 준비했다. 그는 과거 한국에서 선교사로 일한 경험 때문에 한국어가 유창했고, 유창한 북한 엑센트의 한국어는 인민군 포로들에게 친근감을 주었다. 특히 인민군 출신이라는 이유로 미국인들에게 고문을 당하거나 죽임을 당할 것이라는 공포감에 빠져 있던 포로들을 마음을 진정시켜 주는데 도움을 주었다. 보켈은 한국을 방문했던 피어스나 빌리 그래함을 초청하여 설교하게 한 일도 있다. 당시 거제도에 수용된 14만 명의 포로 중에서 개신교 신자는 3만여 명, 로마가톨릭 신자는 1천여 명에 불과했다. 이들을 상태로 공개적인 설교를 하고 개인 전도를 실시했다. 그 결과 수용소 내의 각 구역에 교회 텐트가 설치되었고, 개신교 신자들 중에 집사와 장로를 세웠고 새벽기도회를 시작했다. 출석은 의무나 강제가 아니라 자발적이었다. 보켈은 일종의 담임목사였다. 보켈의 사역을 도와주었던 한국인 동역자들이 강신정, 강응무, 김윤찬, 남기종, 박지서, 이대영, 임재수, 그리고 임한상 목사 등이었다. 또 선교사들로는 전 중국선교사였던 우드베리(E. Woodberry), 감리교의 윌리엄 쇼(W. E. Shaw) 등인데, 부산에서 포로들을 위한 사역을 도와주었던 이들은 킨슬러(Francis Kinsler) 린튼(William Linton) 목사 등이었다. 보켈 목사는 전도하고 설교하는 사역을 통해 결신자들이 생겨났는데, 1951.5-1952. 4월까지 1년간 학습 지원자는 2,402명이었고 학습자는 1,973명, 세례지원자는 1,271명인데, 실제 세례자는 900명이었다고 한다. 보켈은 설교와 전도 활동 외에도 성경통신학교를 열고, 특히 이들을 위한 성경학교를 열었는데, 같은 기간 15개소에서 3,883명이 참가하였다고 한다. 약간 다른 통계도 있는데, 이 성경학교는 5개월 과정으로 진행하였는데, 등록 포로수는 1,500여명에 달했고, 이 과정을 이수한 중공군 포로는 308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포로중 인민군 회심자는 6천명에 달했다고 한다. 세례받은 인민군 출신 포로는 2,266명이었다고 한다. 포로 중 장로교 감리교 혹은 성결교 신학교 입학하려는 자가 642명에 달했는데, 이중 신학교에 진학한 130명을 월드비전이 학비를 지원했다고 한다. 이 점에 대하여 보켈은 이렇게 쓰고 있다. “월드 비전이 이 포로수용소에서 한 일이 어떤 것인지 이제 그 결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이제 몇 년이 가지 아니하여 이들은 목사 안수를 받고 그리고는 교회의 목회자들이 될 것입니다. 이들은 다 깊은 경건에 쌓여 있으며 헌신적이고 능력이 있으며, 열성이 있고, 주님을 위해서 몸 바칠 결의가 되어 있는 의지의 사람들로 변하였습니다.” 물론 이 모든 일이 보켈 선교사 한사람만의 결실은 아니지만 보켈은 포로선교를 위해 일한 중심인물이었다. 포로 출신으로 후에 신학을 공부하고 전도사나 목사가 된 이는 200명에 이른다고 한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전영규(1932-1998) 목사였다. 그는 1957년 경남 김해의 장유성결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하였고, 2년 후에는 부산의 수정제일교회에서 목회했다. 1953년 보켈의 보고에 의하면 포로 중 1만4천458명의 결신자가 있었다고 한다. 한편 보켈의 부인 또한 여군 포로들을 위해 헌신했다. 서울 서대문에 북한여군 포로수용소가 있었다. 보켈의 부인 거트루드 보켈(Gertrude Voelkel)은 1951년 6월부터 이곳을 출입하면서 주일 설교는 물론이지만 주간 평균 6시간 씩 성경공부를 인도했고, 포로들과 인간적인 대화와 교제를 통해 상담하고 위로하여 주었다. 그 결과 109명이 결신하고 60여명은 공산주의를 포기하는 역사가 일어났다. 종교적인 혹은 선교활동 외에도 모든 포로들에게 구호하고 의류를 공급하고 의료혜택을 베풀었다. 이런 보켈 부인의 사역을 도와주었던 한국인이 김혜수 라는 여성이었다. 정리하면 16만7천명의 포로 들 가운데서 7천여명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한 것이다. 따지고 보면, 보켈 선교사의 전도와 신앙지도로 반공 기독교 포로의 증가하였고, 이것이 이승만 대통령의 1953년 6월 반공포로 석방이라는 과감한 정책을 감행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다고 한다. 1953년 휴전 협정으로 포로 선교는 막을 내리게 된다. 보켈은 포로선교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미국 정부로부터 자유 훈장을 수여 받았고, 1961년 한국정부로부터 문화훈장을 수여 받았다. 부인 거트루드 보켈은 그간의 공로를 인정하여 1957년 6월 이호 법무부장관으로부터 공로상을 수여받았다. 보켈 부부는 한국에서의 사역을 마감하고 1967년 은퇴하였고, 1976년에는 숭실대학으로부터 명예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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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4-09
  • [성서연구] 조금 더 해야 할 이유(누가복음 10장 30-37절)
    많은 종교가 고행을 장려합니다. 종교학 사전은 고행을 <넓은 의미로는 자기통일과 정신성의 개발을 목적으로 하는 자기 수련을 가리키는데, 엄밀한 고행은 육체를 정신적 지복에 대립하는 악으로 보고, 정신적 지복을 얻기 위해서 자발적으로 신체에 고통을 주는 종교적 수단>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고행에는 소극적 측면과 적극적 측면에 있습니다. 소극적 측면은 <행하지 않음>입니다. 적극적 측면은 <행함>입니다. 그런데 때로는 <행함>이 <행하지 않음>에 의해 영향을 받기도 합니다. 삼국유사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여자 걸인이 눈이 펑펑 쏟아지는 겨울에 길에서 아기를 낳게 되었습니다. 그때 옆을 지나던 불교의 승려가 자신의 가사를 벗어 산모와 아기를 덮어주고 자신은 알몸으로 절에 갔습니다. 후에 승려의 미덕이 알려져서 왕의 스승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에는 산모와 아기가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없습니다. 눈이 펑펑 쏟아지는 겨울에 승려의 옷을 덮었다고 해서 추위를 이길 수 있었을까요? 혹시 동사하지 않았을까요? 그 상황에서는 옷을 벗어 덮어주는 것보다는 여인과 아기를 데리고 가서 돌봐 주어야 하는 게 아니었을까요? 그런데 승려를 높이 평가한 것은 여성의 몸에 손을 대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승려로서 여성에게 손을 대는 것은 계율을 깨뜨리는 것이니, 옷만 덮어주고 끝낸 것이고, 오히려 그것을 높게 평가했다는 것입니다. 고행은 대단히 훌륭해 보이지만 그 자체에 모순을 안고 있습니다. 성경은 고행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고행은 다분히 인본주의적 노력입니다. 고행은 자신을 지키고, 자신의 성취를 위한 이기적 동기가 강합니다. 성경은 고행이 아닌 고난을 가르칩니다. 고난은 자신은 죽고, 남을 살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고행하신 것이 아니라, 고난 받으셨습니다. 고행이 자신을 위한 이기적 동기가 강한 반면, 고난은 자신은 죽고 남을 살리는 이타적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십자가에서 죽어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사랑을 기준으로 하면 앞의 이야기는 어떻게 전개될까요? 예수님께서는 산모와 아기에게 옷만 덮어주고 가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산모를 엎고, 아기를 안고 따스한 온기가 있는 집으로 달려가셨을 것입니다. 후에 누군가 여인의 몸에 손을 댄 것으로 비난한다면, 기꺼이 비난을 받으셨을 것입니다. 앞의 승려는 자신의 정결을 지키려 했지만, 예수님께서는 다 내어주신 분이십니다. 승려는 옷을 줄 수 있었을 뿐이지만, 예수님께서는 생명까지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대 사회에서 죄인으로 낙인찍힌 세리와 창기들 곁에 머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조롱을 받으면서도 기꺼이 세리장 삭개오의 집에 들어가셨습니다. 본문에서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 만난 사람에게 약을 발라주고 떠난 것이 아니라, 그를 데리고 가서 주막에 맡겨 지속적 치료를 받게 해 주었습니다. 그게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우리는 고행을 하는 수련자가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예수님처럼 해야 합니다. 이사야 40장 1-2절에 보면 <너희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너희는 예루살렘의 마음에 닿도록 말하며....>라고 되어 있습니다. 위로하되 <마음에 닿도록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지금까지 한국 교회는 많은 섬김을 해왔습니다. 그런데 이제 조금 더 하길 원합니다. 무엇보다 마음을 더 쏟길 원합니다. 목회자에게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목회 활동의 기준이 정해져 있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장례식에는 발인예배까지, 심방은 특정 상황인 경우에만, 상담인 경우엔 한 시간 이내로....이런 것들입니다. 그것보다 조금 더 하는 것은 여건상, 혹은 다른 성도와의 형평성 등의 이유로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저도 종종 <그때 조금 더 했어야 하는데....> 하는 후회가 많습니다. 모든 순간에 <예수님이시라면 어떻게 하셨을까>를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그것 때문에 힘든 일을 당한다면, 그게 곧 우리에게서 말라가고 있는 고난이 될 것이고, 그것은 참 기쁨을 가져다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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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3-29
  • [시사칼럼] 브레이브 걸스, 믿음은 버팀입니다.
    요즘 세간에 ‘브레이브 걸스(Brave Girls)’가 화제입니다. 십년 전 데뷔했지만 뜨지 못하고 인원 교체를 거듭하다가 결국은 해체 수순을 밟고 있던 중에 갑자기 인기가 급상승해서 본인들마저 어리둥절해 하고 있는 30대 초반의 네 여성으로 구성된 그룹 이름입니다. 뭘 어떻게 해도 안 되니 이제는 정리하자 생각하고 각각 옷 장수와 커피 바리스타 그리고 취직 시험을 준비하며 짐을 챙겨 숙소에서도 나온 상태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4년 전 발표했던 노래가 ‘역주행’을 거듭하면서 현재 각종 음원 차트를 석권하며 특히 젊은 세대를 열광하게 만드는 주역이 되었습니다. 우연히 이들의 사연을 들은 유튜버가 안타까운 심정으로 만들어 올린 동영상 하나가 엄청난 반향을 일으켜 불과 며칠 사이에 천만 조회 수 이상을 기록한 결과 나타난 현상이라 ‘알고리즘’이 만들어 낸 현대판 기적이라고들 부릅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현대인들의 무딘 감성을 촉촉하게 적시고도 남은 감동적인 사연이 있었습니다. 생방송 중 1위에 오르는 순간 멤버 중 한 명이 울먹이는 목소리로 남긴 소감 한 마디가 그간에 일어났던 많은 일들을 대변해 주었습니다. “대한민국 국군 장병과 예비군 그리고 민방위 대원 모든 분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노래는 부르고 싶은데 더 이상 불러주는 데가 없어 낙심하던 차에 군부대 위문 공연을 나서게 되었고 뜻밖에 열렬하게 호응해주는 장병들 때문에 힘을 얻었던 그녀들, 힘든 군 생활 가운데 비가 오고 바람이 불어도 불원천리하며 달려와 행복한 미소와 진심어린 태도로 노래하는 그녀들을 보면서 큰 위로와 활력을 얻었던 군인들, 선임이 후임에게 인계하며 군대에서만큼은 전설로 자리매김한 그녀들이 사라지려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이제는 은혜 갚을 차례라며 한 마음 한 뜻이 되어버린 현역과 예비역들, 그리고 ‘어려운 고비라도 잘 버티자, 그러면 언젠가는 해 뜰 날이 있다’는 사실로 위로 받고 희망을 가진 많은 청춘들을 비롯한 수많은 뒤처지고 낙오했다 여기던 인생들, 이 모두가 다 같이 써나가는 마치 한 편의 영화 같은 실화가 여기 있습니다. 그러나 버티기만 한다고 되는 일은 결코 아닙니다. 브레이브 걸스가 부활(?)한 두 가지 중요한 비결이 있다고 봅니다. 첫째, 힘들고 짜증날 법도 한 상황인데도 언제나 웃음과 친절을 잃지 않았습니다. 특히 한 멤버가 보여준 ‘미소’는 이번 기적을 견인하는 역할을 해냈습니다. 군인들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감명을 받은 주된 이유였습니다. 둘째, 비가 오고 바람이 불어도 불러주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찾아가 열정을 다한 결과 어떤 상황에서도 공연할 수 있는 실력을 기를 수 있었습니다. 실력이 뒷받침 되지 않은 감동은 신파로 전락하기 마련이라, 모처럼 기회가 찾아와도 묵묵히 쌓아 올린 내공이 없었다면 결코 신화의 주인공이 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버틸 수 있었던 중요한 요인이 하나 더 있습니다. “우리 대표님 기도하는 사진이 있어요.” 인터뷰 중에 툭하고 나온 말입니다. 막대한 손해를 감수하면서도 끝까지 지원했고 직접 노래까지 만들어준 제작사의 대표는 한 때 어둠의 세계에 몸담고 있다가 지금은 독실한 신앙인으로 살고 있는 ‘용감한 형제’라 불리는 사람입니다. 그라고 해서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겠습니까? 하지만 그 역시 끝까지 버티며 묵묵히 곡을 만들고 그녀들을 진심으로 응원해 주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호전적인 부족 아말렉을 만나 싸울 때 아론과 훌이 모세의 두 손을 붙들고 올렸습니다(출 17:12). 이 때 쓰인 동사가 뜻밖에 ‘아만’입니다. 주로 ‘믿음’으로 번역하는 단어가 아닙니까? ‘아멘’도 여기서 나왔습니다. 여기서 ‘믿음은 버팀이다’라는 영적 공식을 도출합니다. 예수님도 그러하셨습니다. 모세처럼 언덕 위에서 두 손을 들고 서셨지만, 예수님의 두 손을 붙들고 올렸던 것은 굳게 박힌 대못이었습니다. 하지만 극심한 고통 가운데서도 십자가에서 끝까지 버티시며 자애로운 미소와 긍휼하신 마음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는 믿음의 주를 바라봅니다. 믿음의 다른 말은 버팀입니다. 그냥 버티는 것이 아니라 묵묵하게 실력을 쌓으면서도 언제나 미소와 여유를 잃지 않고 끝까지 버티는 것, 이러한 모습이야말로 고난 가운데 우리가 보여줄 수 있는 진정한 신앙이라고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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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3-29
  • [은혜의 말씀] 언약은 신실합니다.(수10:5~11)
    기브온이 이스라엘과 화친 조약을 체결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이를 괘씸하게 여긴 가나안 서쪽의 왕들이 연합군을 일으켜 기브온을 치러 올라옵니다. 그러자 기브온 사람들은 즉시 여호수아에게 사람을 보내 도움을 요청하지요. 그런데, 기브온이 이렇게 당당하게 여호수아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화친조약”입니다. “언약”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누구와 언약을 맺었습니까? 온 우주의 통치자이신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습니다. 누구의 중재로요. 예수님이시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흘리신 보혈의 피는 언약의 피라고 했습니다. 마 26:28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언약이란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구원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복 주시기 위하여 세운 약속입니다. 좀더 성경적 정의를 내린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와 피로 맺은 약속'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변하지 않는 약속의 증거, 피로써 우리와 언약의 관계를 맺으셨습니다. 그러면 이 언약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1. 언약의 특징 : 언약은 신실하게 유지됩니다.(7절, 9:19,20) 비록 기브온이 속임수를 통해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었지만 한번 맺은 언약은 신실하게 유지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언약의 특징이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는 온 군대를 동원하여 하나님 앞에서 기브온과 한 약속에 책임지고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 앞에서 언약의 신실성이 중요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와 언약을 맺으실 때 우리가 불성실하고 믿음으로 살지 못하면 언약을 파기하십니까? 아니지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맺어진 언약은 영원불변합니다. 그러므로 의심하지 마십시오. 불안해하지 마십시오. 신학적으로 이것을 “견인교리”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맺으신 구원의 언약은 이렇게 신실하게 유지된다면 우리도 하나님과의 약속을 신실하게 지켜야 하겠지요? 2. 언약의 특징 : 언약은 보호를 약속합니다.(8절, 시 121편) 하나님은 전투에 나가는 이스라엘에게 두려워 말라 말씀하십니다. 적들을 여호수아의 손에 넘겨주겠다고 하십니다. 이것은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이스라엘과 언약한 기브온을 보호하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언약 속에는 보호의 약속이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과 언약한 우리들을 끝까지 지키고 보호해 주십니다. 오늘 가나안 연합군과 전투에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보호하고 계십니까? 크게 세 가지 방법으로 보호하고 계십니다. 1)사람을 통하여(10절) 2)자연을 통하여(11절) 3)초자연을 통하여(13,14절) 말씀을 맺기 전에 또 하나 나누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여호수아를 격려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고 선택에서 실수한 여호수아에게 하나님은 격려와 용기를 주십니다.(8절) 하나님은 우리가 저지른 실수마저도 고치시고 회복시켜 주십니다. 하나님의 말씀 한마디가 여호수아에게는 얼마나 큰 위로와 힘이 되었을까요? 여러분의 말 한마디가 인생을 바꿉니다. 서로 칭찬하고 격려하십시오. 약점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약점을 자꾸 보지 말고 장점을 보십시오. 그러면, 칭찬하고 격려할 수 있습니다. 저는 우리 성도님들이, 서로 칭찬하고, 서로 격려하고, 서로 사랑할 수 있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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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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