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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기독교이야기] 사보담 선교사
2019/08/27 11:24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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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북장로교회는 윌리엄 베어드를 부산으로 보내 부산 선교부를 설치한 이래 1914년 부산경남지방에서 철수할 때까지 23년간 21명의 선교사를 파송하였는데, 그 중의 한 사람이 리차드 시더보탐(Richard H. Sidebotham, 1874-1908), 곧 사보담 선교사였다. 그의 한국어 이름을 史保淡으로 표기하지만 본인이 소지하고 다녔던 명함을 보면 謝普淡으로 되어 있다. 그가 한국에 체류한 기간은 8년이었으나 첫 1년은 대구지부에서 활동했으므로 부산에서 활동한 기간은 7년에 불과했다. 비록 짧은 기간이지만 그는 부산지방 기독교 형성에 기여하였다.
 
사보담은 1874년 10월 14일 윌리엄 헨리 시더보탐(William Henry Sidebotham)과 이자벨 심슨(Isabelle Laycock Simpson)의 5남매 중 장남으로 영국 비글스웨이드(Biggleswade) 출생했다. 감리교 목사였던 그의 아버지는 1883년 가족을 데리고 미국 미시간 주 레이크시티로 이주하였다. 그래서 사보담은 미시간 주 래피어(Lapeer)에서 초,중등학교를 졸업했다. 그 후 미시간의 엘마대학에 입학하였다. 재학 중에 그는 복음주의 운동과 학생자원운동(SVM)의 영향으로 선교사가 되고자 결심하게 된다. 1896년 엘마대학을 최우수 성적으로 졸업한 그는 프린스톤신학교에 진학하여 1899년 졸업하였고, 그해 5월 목사 안수를 받았다. 한 달 후인 6월 28일에는 에피 알덴 브리스(Effie Alden Bryce)와 혼인했다. 에피는 제이콥과 사라부라이스의 딸로서 1876년생이었다. 그의 외조부도 장로교 목사였다. 사보담은 1899년 9월 6일 공식적으로 미국북장로교 한국선교사로 임명되었고, 10월 14일 샌프란시스코에서 선편으로 조선으로 향하는 긴장도에 오르게 된다. 한국에 도착한 것은 그해 11월, 25세 때였다.
 
내한 한 그는 대구지부에 배속되어 약 1년간 체류했다. 이 기간동안 조선어 공부에 주력했는데, 1900년 9월에 모인 선교사 연례회의에서 95%의 성적으로 얻어 응시자 13-14명중 가장 좋은 성적을 얻었다고 한다. 사보담은 대구지부에서 1년간 일했으나 부인의 건강 때문에 대구지부에 계속 남아 있을 수 없어 1900년 11월 부산선교부로 이동하였다. 이 때 그의 나이는 26세였다.
 
부산으로 내려온 그는 일본인 거류지 내의 주택에서 부산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이때부터 1908년 첫 안식년을 떠나기까지 7년 간 부산에서 사역했는데, 그의 사역은 3가지 영역으로 정리될 수 있다. 첫째는, 지역교회 개척이다. 북장로교는 초량에서 중앙동 남포동으로 연결되는 부산 서북부지역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래서 영선정교회(현 초량교회), 절영도교회(현 제일영도교회), 자갈치교회(현 항서교회) 등의 일에 관여하며 초기 교회 형성에 기여하였다. 그 외에도 경남지역의 여러 교회의 설립과 조직에 기여하여, 1904년에는 김해군 일천(日泉)교회 설립에 관여하였고, 1906년에는 창년군 오호(五湖)교회 설립에 기여하였고, 합천군 초계(草溪)교회도 사보담의 전도를 받은 이윤팔에 의해 1906년 설립된다. 사보담의 두 번째 사역은 부산지역 외에도 경남지역 교회 관할이었다. 당시는 한국인 목사가 배출되기 전이었으므로 지역교회를 순회와 설교하고 세례나 성찬을 베풀었다. 사보담이 맡은 지역은 부산의 서부지역과 김해, 밀양, 창원, 웅천, 칠원, 창녕, 영산, 초계, 합천 등지였다. 그는 이런 지역의 40여개 처의 교회 순회 당회장으로 활동했다.
 
그 외에도 사보담은 나병 환자들을 위한 사역에도 동참했다. 적절한 치료나 보호 없이 방치되고 있던 이들을 위해 1904년 북장로교의 어빈과 빈톤의사(Dr. C. C. Vinton), 스미스(Dr. W. E. Smith, 沈益順) 등과 함께 이 일에 참여하였다. 그 결과 ‘나병선교회'(The Mission of Lepers in India and the East)의 재정지원으로 1909년 11월 나환자 수용시설(Leper Asylum)인 ’상애원‘(相愛院)이 부산 남구 감만동에 건립되게 된다. 이듬해 1910년에는 한국 최초로 부산나병원이 설립되었고, 이 일을 관장하는 일은 호주 선교부로 이관되었다.
 
한국에서 8년간 사역한 사보담은 안식년을 맞아 1907년 8월 가족들을 데리고 미국 미시간 주 래피어로 돌아갔다. 사보담 선교사는 곧 한국으로 돌아가기를 기대했으나 예상치 못한 1908년 12월 3일 아침에 발생한 가스폭발 사고로 3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사보담 슬하의 아들이 알프레드(Alfred Bryce, 1900-1970)와 딸이 마가렛(Margaret, 1906- )이었다. 사보담의 부인은 남편이 사망하자 다시 한국으로 오지 못했고, 1909년 4월 30일 부로 선교사직을 은퇴했다. 일리노이주 디카터에서 거주하던 그는 1942년 12월 캘리포니아주 소살리토에 있는 아들 알프레드 집에서 66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사보담이 불의의 화재로 사망하게 되자 북장로교 선교부는 그의 사역을 대신하게 하기 위해 다른 한 사람의 선교사를 부산으로 파송했는데, 그가 한국 이름 위철치(魏喆治)로 불린 조지 윈(George H. Winn) 선교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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