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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남자, 아내 그리고 아버지
2018/04/09 13:11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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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언제나 성실한 사회인이자 친절한 동료, 착한 아들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내 주변을 돌아보니 나는 지난 10여 년 동안 직장, 친구관계, 가족관계에서 실패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것도 매번 같은 실수를. 어찌된 일일까?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전인권,『남자의 탄생』(푸른숲, 2003)
 
1. 남자의 탄생 
『남자의 탄생』은 5살부터 12살까지 자신의 유년기를 소재로 삼아 한국 남자의 인성 형성 과정을 심리적ㆍ정치적ㆍ사회적 맥락에서 분석하여, 이 시대 한국 남자들의 정체성을 결정지은 한국 특유의 가족문화와 한국사회의 구조적 특징들이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는 책이다. 전인권에 의하면 ‘한국식 남자는 동굴 속 황제’이다. 부모에 의해 철저하게 한국식 남자로 길러지는데, 동굴 속 황제는 모성의 공간에서 양육되고 부성적 질서에 의해 완성된 한국 특유의 가족문화가 낳은 인간이라는 것이다.
한국식 남자인 동굴 속 황제는 모든 인간관계를 진선미의 우열에 따라 상하관계로 설정하는 봉건적 인간이며 자신을 ‘진선미의 화신’이라고 여기며 자신의 우월함을 타인에게 강요하거나 타인으로부터 인정받으려고 한다. 또 그러한 신분관계에서 생겨나는 심리적 영토를 끊임없이 넓히려는 행동원칙을 갖고 있다. 
전인권의 말을 들어보자. “‘동굴 속 황제’의 허영심에 대해 좀 더 깊이 생각해보면, 두 가지의 특징적 증상이 있는 듯하다. 첫째는, 그저 ‘남보다 우월하다’는 데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진선미(眞善美)의 화신’이라고 생각하며, 이 사실을 끊임없이 타인에게 주지시키려 한다는 것이다. 둘째는, 자신의 심리적 영토가 있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끊임없이 넓히려 한다는 것이다.”
더구나 권위주의와 자기애의 동굴에 갇힌 황제의 성에 대한 인식도 신분관계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다. 이성과 성을 물건처럼 다루는 성적 체험에서 ‘여성은 성녀 아니면 창녀’라는 이분법적 구도가 자리 잡혔던 것이다. 따라서 여성에 대한 관심의 범위도 단순했고 평화로운 사랑을 하기에는 너무 거칠었다. 전인권의 다음의 진솔한 고백은 비단 그만의 열등감이 아니라, 대한민국 모든 남자들의 모습이다.  
“(동굴 속 황제는) 일단 손을 대었다 하면 자신의 소유물처럼 생각한다. 그리하여 그에게는 고향도 내 것이고, 대한민국도 내 것이며, 출신 학교도 내 것이며, 가족도 내 것이고, 직장도 내 것이 된다. (…) 심지어 경제학자나 회사원인 내 친구가 플라톤 이야기를 하면, 굳이 틀린 이야기도 아닌데, 괜히 속이 뒤틀리고 이상한 느낌이 들곤 했다. 플라톤이나 막스 베버는 정치학을 전공한 나의 소유물인데, 엉뚱한 직업을 가진 의사나 경제학자가 뭐라고 하면, 다른 집 사람이 내 아파트 열쇠를 들고 있는 것처럼 이상했다는 말이다. 사정이 이 모양이나 나의 학문이 제대로 발전할 수가 없었다.” 
따라서 스스로를 ‘동굴 속 황제’라고 부르는 전인권은 이제 자신이 누구인지 제대로 알고 자신이 갇혀 지내온 동굴에서 벗어날 때가 되었다고 말한다. 그것은 바로 동굴 속 황제의 습성을 버릴 때 가능하며, 그때 비로소 자신과 주변부터 행복해질 수 있다. 나아가 한국사회의 발전을 가로막는 권위주의, 아버지를 ‘신분의 감옥’에 가두고 어머니에게 세 얼굴(여자와 현모양처, 어머니)을 만들어준 그 권위주의의 그물도 걷어버릴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2. 아내란 무엇인가? 
메릴린 옐롬은 ‘아내’라는 키워드를 가지고, 서양 역사 속에서 아내의 지위 변화를 살펴보며 아내의 개념, 지위, 역할이 언제 형성되어 어떻게 변해왔으며, 역사 속에서 아내들은 자신의 위치를 어떻게 보았고, 이를 바꾸려고 어떻게 싸워왔는지, 그 순종과 반항의 역사를 우리들에게 들려주며『아내』(시공사, 2007)에서 “부부 간에 지위, 역할, 성별 등 어떤 차이도 없는 결합이라면 아내라는 용어가 의미를 가질 것인가?”를 묻는다.  
먼저, 아내라는 이름은 일반적으로 남과 여의 결합에서 파생된 것이다. 아내라 불리는 여성의 역사는 결혼과 이혼, 여성성, 모성, 임신, 성과 사랑에 관한 역사와 다를 바 없으며 더불어 아내의 역사는 남편의 역사이기도 하다.
사실 아내의 시작은 성서 속 하와이며, 이때 아내는 ‘아담의 갈비’, 곧 남자의 갈비뼈로 태어난다. 그러나 고대 그리스와 로마 시대에 아내는 남편이 사용하는 ‘가재도구, 혹은 재산’이었다. 나아가 중세 기독교 사회에서 아내는 ‘출산의 그릇’이었다. 이 시기 여성들 중 아내의 지위는 처녀, 과부, 그 다음이 아내였다. 왜냐하면 이 시기 섹스는 타락이었으므로 여성들 내부의 서열은 금욕을 기준으로 매겨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근대에 와서 아내는 ‘일하는 기계’가 되었다.  
그러나 현대에 들어서면서 이러한 전통적인 아내상 혹은 아내 관념이 급격하게 변한다. 옐롬은 이렇게 말한다. “역사 이래 1950년대에 이르기까지 아내를 먹여 살리는 것은 남편의 의무였다. 아내는 그 대가로 섹스, 아이, 가사노동을 제공했다.” 그러나 맞벌이 아내들이 대거 등장함으로 이 관념은 급속도로 약화되었다. 그렇다면 여기서 생기는 질문 두 가지! 
첫째 질문, ‘아내’와 ‘어머니’의 관계는 무엇인가? 옐롬은 이렇게 말한다. “아내와 어머니 사이의 경계는 분명치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 속에서 아내인 동시에 어머니이지 않았던 여자들은 자식을 낳지 못한다는 이유로 철저히 박해를 받고 죄인 취급 받았다(구약성서의 유다의 며느리 다말을 보라). 반대로 아내가 아니면서 어머니인 여자들은 독신모라는 낙인을 피하려고 갓난아이 살해를 자행하였다. 그러다 들켜 마녀로 오해받고 처형당했다. 아내는 ‘아내로서 어머니’가 되어야만 인정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둘째 질문, ‘그렇다면 아내는 여성인가?’ 오늘날 캐나다, 덴마크, 스웨덴, 스위스, 벨기에, 프랑스 등 세계 여러 나라에서 동성 간의 결혼이 합법화 되는 이때에 동성 결혼에서 아내는 누구인가? 현대에 들어 아내라는 이름이 멸종 위기에 직면한 것은 아닌가? 다시 돌고 돌아 아담과 하와 시대로 돌아가야 하는가?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창2:21-23) 
코뼈도 다리뼈도 아닌 왜 하필 ‘갈비뼈’일까? 갈비뼈가 감싸고 있는 가슴은 사랑으로 콩닥거리는 감성의 진원지이며, 갈비뼈가 위치한 옆구리란 남녀의 동등한 지위를 암시하는 인체의 중심이 된다. 성서학자인 매튜 헨리는 이렇게 말한다. “여자는 남자를 지배할 머리 꼭대기도, 남자에게 짓밟힐 발도 아닌, 동등하게 옆구리로부터 만들어졌으니, 이는 남자의 팔로 보호받고 그 가슴으로 사랑받을 수 있게 함이다.” 이탈리아의 성서학자 움베르토 카수토도 “좋은 아내란 그의 옆에서 조력자로 서며 영적으로 남편과 단단히 매어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3. 아버지란 무엇인가? 
동굴 속 황제인 남자가 영적으로 맺어진 아내와 하나가 되어 이제 아버지가 된다. 그러나『아버지란 무엇인가』(르네상스, 2009)에서 융이 설립한 국제분석심리학회 회장을 지낸 분석심리학자 루이지 조야는 “서구 사회, 나아가 오늘날의 인류 전체가 아버지 상을 잃어버림으로써 거대한 공황 상태에 처했다.”고 분석한다. 조야는 역사적, 심리학적, 문화적 관점에서 아버지의 발생사적 연원을 추적하지만, 핵심은 ‘심리학적 관점’이다. ‘원형’, ‘집단무의식’ 같은 융의 심리학 개념을 근거로 서구 사회 집단무의식 안에서 발견되는 아버지 상의 원형을 찾아 서구 문화의 시원으로 들어간 뒤 거기서부터 역사를 밟아 내려온다.  
1단계, ‘선사시대’에 아버지가 탄생했다. 여기서 조야는 아버지 곧, ‘부성’과 ‘남자’를 구분한다. 남자가 생물학적 속성이라면, 부성은 사회적·문화적 구성물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남자라고 해서 다 아버지가 되는 것은 아니다. 남자는 파괴적이고 공격적인 충동과 욕구에 직접적으로 지배받는다. 그러나 아버지는 충동과 욕구를 제어하고 인내, 의지, 지성으로써 삶을 계획하고 끌어가는 존재이다. 따라서 책임감이야말로 부성의 핵심 특징이 된다. 조야는 이렇게 말한다. “원시 인류가 진화의 어느 단계에 이르러 이런 특성을 지닌 아버지를 탄생시켰고, 그 탄생은 문명의 출발과 다르지 않았다.”
2단계, ‘고대’에서는 ‘문화적 형성물인 아버지’는 그 내부에서 ‘원시적 남성성’과 다툼을 벌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다툼을 신화적 장대함으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고대 그리스 서사시인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이다. 그리스의 트로이 정복을 그린 『일리아스』의 경우, 부성과 남성의 대결은 트로이의 왕자 헥토르와 그리스의 영웅 아킬레우스의 싸움으로 나타난다. 헥토르는 가족을 걱정하고 자식을 염려하는 전형적인 아버지의 모습이다. 반대로 아킬레우스는 남성적 힘의 분출 욕구만을 따르는 거친 전사이다.『일리아스』에서 헥토르는 아킬레우스에게 패배하는데, 남성이 부성을 이겼다는 사실은, 부성 내부의 남성이 지닌 힘의 파괴성을 잘 보여준다.

816호 9면 최병학목사.png▲ 남성성의 상징인 영화 <트로이>의 아킬레우스
 
816호 9면 최병학목사1.png▲ 아버지의 상징인 영화 <트로이>의 헥토르
 
트로이 함락 후 오디세우스의 귀향을 그린 『오디세이아』역시 부성과 남성 사이의 대결 드라마이다. 여기서는 ‘고향에 돌아가려는 오디세우스’와 ‘한없이 충동에 이끌리는 오디세우스’의 대비로 부성과 남성의 대결을 잘 살펴 볼 수 있다. 이러한 싸움은 거인-괴물 퀴클롭스와 오디세우스의 싸움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오디세우스의 부하들을 산 채로 잡아먹는 퀴클롭스가 원시적 남성성을 상징한다면, 지략을 발휘해 퀴클롭스를 제압하고 탈출하는 오디세우스는 부성적 존재를 가리킨다.  
그리고 오디세우스는 기나긴 유혹과 충동의 항해를 끝내고 마침내 고향으로 돌아온다. 이것은 아버지의 귀환이며 남성에 대한 부성의 승리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조야의 분석은 좀 더 나아간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그리스 문화의 이런 아버지 승리는 동시에 어머니의 패배를 뜻하는 것”이다. 부성은 남성을 제압함으로써 여성도 함께 종속시켜 가부장제를 확립했던 것이다.  
가부장제의 승리를 보여주는 것이 아이스퀼로스의 비극 『자비로운 여신들』이다. 미케네의 왕 아가멤논이 트로이 원정을 떠난 틈을 타, 아이기스토스와 정을 나누고 아버지를 배신한 어머니 클뤼타임네스트라를 죽인 아들 오레스테스가 존속살해 혐의로 재판을 받는데(물론 이때 공범은 누나이자, ‘엘렉트라 콤플렉스로 유명한 엘렉트라이다), 판관은 아버지의 원수를 갚은 오레스테스의 손을 들어준다. 판관은 이렇게 말했다. “어머니는 자식의 생산자가 아니라, 아버지 씨의 양육자일 뿐.” 이 판결은 서구 문명사에서 어머니의 패배를 상징하는 사건이 되었다. 이후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신화적 판결을 과학과 철학의 이름으로 합리화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여성을 남성에게 종속된 존재이나 노예보다는 우월한 존재라고 보았던 것이다.『정치학』제12장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말한다. “노예에게는 생각하는 요소가 결여되어 있다. 여성은 그 요소는 갖고 있으나 권능이 결여되어 있다. 아이는 생각하는 요소를 갖고 있으나 불완전하다.” 그리고 그리스를 이어받은 로마는 법률로 가부장제를 확정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부성이 모성을 처단한 역사의 시작이었던 것이다.  
3단계, ‘중세’에는 이렇게 확립된 아버지의 권위가 기독교라는 저항에 부딪혔다. 기독교는 천상의 신만을 아버지로 섬기고 지상의 아버지를 부정함으로써 부성적 권위를 뿌리부터 흔들었다. 지상의 아버지를 부정하고 남은 것은 ‘형제 관념’과 ‘평등 관념’이었다.  
4단계, ‘근대’에는 18세기 계몽사상과 프랑스혁명을 통해 아버지는 숙청당했으며, 산업혁명은 아버지들을 공장으로 밀어 넣어 무력한 존재로 만들었다. 우울증 걸린 아버지들은 술에 찌든 불량한 아버지가 되어 남은 권위마저 잃어버렸다.  
5단계, 아버지의 상실은 그 자리를 대신할 다른 것을 찾게 되는데, 이때 등장한 파시즘이 무력한 아버지들을 규합하고 국가주의를 외치며 텅 빈 아버지의 자리를 대신했다. 조야는 이렇게 말한다. “파시즘이 겉보기에는 가부장적 권위의 발현 같지만, 실은 부성 상실의 반작용이었다.” 게다가 포스트모던의 부친살해는 현대의 질환을 더욱 그 극단으로 몰아가고 있다. 파시즘이 부성 상실을 폭력적으로 해결하려 했다면, 포스트모던은 해결이 아니라, 무덤까지 이장하여 삭제시켜 버린 것이다. 그리하여 오늘날 문명의 위기는 ‘모성의 부활’인가, 아니면 ‘부성의 새로운 자리 비워주기인가’가 되었다. 따라서 조야의 다음의 말은 현대 문명의 질환을 치유하기 위해 ‘아버지를 되찾아야 할 것인가?’, 아니면 ‘어머니를 되찾아야 할 것인가?’를 고민하게 한다.  
“부성 상실 문제는 오늘날 더욱 깊은 문화적 질병으로 산재해 있으며, 그 질병을 극복하려면 잃어버린 아버지를 되찾아야 한다. … 집단무의식 속의 아버지 향수는 사라지지 않는다.”

최병학 목사.JPG
 








최병학 목사 (남부산용호교회 담임)

* 이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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