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6-02-12(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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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에는 여러 단계를 따른 회의가 있다. 곧 당회, 노회, 총회이다. 교회는 이 회의들로 말미암아 관리된다. 특별히 노회가 하는 일 중 하나는 구역을 나누어 ‘시찰’회를 조직하고 ‘시찰’위원을 두어 관내 교회를 ‘시찰’(視察)하는 것이다. 교회 <교회정치>에서 이를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지금 노회의 시찰 기능이 사실상 중단되었다. 시찰은 언제 어떻게 생겨났을까? 없어도 되는 것일까? 있어야 한다면 어떤 목적을 위해서일까? 성경의 원리로 돌아간 16세기 종교개혁은 이신칭의 복음을 통해 교리 개혁을 이루었다. 나아가 중세교회를 거치면서 변질된 교회시찰을 회복했다. 개혁가 루터가 가장 먼저 교회시찰을 회복했다. 그런데 개혁가 칼빈은 교회시찰을 어떻게 했을까?

칼빈(1509-1564) 역시 자신이 목회하는 스위스 제네바교회에 시찰을 도입했다. 1561년 교회법령을 개정하면서 “제네바에 속한 교구와 목사 시찰에 관한 질서”(Orde sur la visitation des Ministres et paroisses dependantes de Geneve) 이름으로 실었다(31-38). 시찰규정은 크게 둘로 나눈다. 하나는 시찰의 목표를, 다른 하나는 시찰 방법을 다루었다.

 

시찰을 하는 목표는 제네바 전체 교회의 몸, 도시와 시골 교구에서 선한 질서와 교리의 하나됨을 지키기 위해서라고 밝혔다. 시찰위원으로 시의회에서 2명을 선출하고 목사회에서 2명을 선출했다. 시찰위원은 1년에 한 차례 교구 시찰 임무를 맡았다. 선한 질서와 교리의 통일성을 위한 시찰임무를 위해 다음 다섯 가지 질문으로 정리했다. 시찰 대상은 무엇보다 목사였다. 첫째, 목사들이 복음의 순수성을 훼손하는 새로운 교리를 가르치지 않았는가? 둘째, 목사들이 설교를 통해 교회를 세웠는지, 혹은 모호하고 쓸데없는 문제를 다루고 혹은 적절하지 않고 충격을 주는 방식으로 가르치지 않았는가? 셋째, 교인들을 공예배에 참석하도록 권면해서 예배를 기뻐하고 여기서 유익을 얻어 보다 더 기독교적 방식으로 살게 하는지, 또 목사직이 어떤 것인지를 가르쳐서 이를 어떻게 사용할지를 배우도록 하고 있는가? 넷째, 목사들이 설교뿐 아니라 환자 심방에서, 또 곤경에 처한 자들을 권면하고 주님의 영광을 훼손하는 모든 일을 막고 있지 않는가? 다섯째, 목사가 좋은 본을 보여주며 진리 안에서 영예롭게 생활하고 있는가? 혹은 경거망동한 처사로 가족을 소홀히 대하지 않는지, 회중과 화평하게 생활하고 있는가?

 

시찰의 방법도 규정했다. 시찰을 위해 파송된 목사는 먼저 설교를 하고 이어서 회중을 권면했다. 목사의 교리와 생활, 목사의 가르치는 열심과 방법에 대해 교구 장로와 집사에게 물었다. 시찰 위원은 보고서를 작성하여 목사회에 보고해서 해당 목사가 권면을 받거나 책벌을 받도록 했다. 그러나 시찰은 법적인 조사가 아니며 재판이 될 수 없음을 강조했다. 시찰은 재판과정을 막을 수 없으며, 목사도 정부에 대한 순종 의무에서 예외가 될 수 없었다. 시민 생활이나 법률과 관계해서 또는 범죄행위에 책임지는 것에서 목사는 일반 시민과 같았다. 시찰은 걸려 넘어지게 하는 모든 것을 예방하고 도구였다. 특별히 목사가 부패하고 타락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규정과 달리 실제는 약간 달랐다. 우선 시찰이 매년이 아니라 격년마다 이루어졌다. 본래 목사 2명이 선출해야 했지만 실제로는 1명만 임명되었다. 목사가 주일을 세 번씩이나 빠질 수가 없었다. 목사 시찰 위원은 주로 도시 교회 목사가 맡았기에 시찰은 시골 교구 목사들에게는 불편한 일이었다. 이로써 도시 목사와 시골 목사 사이에 갈등이 깊어져 가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교회시찰은 당시 제네바 교회는 물론 종교개혁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오늘날 교회가 이 중요한 유산을 등한시하는 것이 너무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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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법특강]칼빈의 제네바교회법령(1561년)과 시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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