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월 25일 이순재 배우가 돌아가셨습니다(1934-2025). 현역 최고령 배우로 많은 사람의 존경과 신망을 한몸에 받았던 인물이었기에 연예계 종사자들 뿐만 아니라 격동의 현대사 속에서 그와 함께 울고 웃었던 많은 국민들이 깊은 슬픔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이런 대배우도 결코 완전하지는 않았습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천상 배우를 자처했지만 50대 정계에 입문하여 민정당 소속으로 한 차례 낙선한 후 민자당 소속으로 마침내 지역구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당 부대변인까지 역임한 이력도 가졌습니다. 수년 전에는 뜬금없는 갑질 논란에 휩싸여 적잖은 파문을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작년 연말 KBS 연기대상에서 드라마 <개소리>로 깜짝 대상을 받으며 마지막으로 극적인 반전을 선사했는데, 지금도 그러하고 앞으로도 두고두고 회자될 다음과 같은 감동적인 수상 소감을 남기셨습니다. “평생 동안 신세 많이 지고 도움 많이 받았습니다. 감사합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면서, 일세를 풍미했던 대배우의 마지막 대사같았던, 시청자들에게 남긴 깊은 감사의 인사는 그간 존재했던 그 모든 오점을 다 지워버렸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새해 들자마자 우리는 소중한 또 한 분을 잃었습니다. 안성기 배우입니다(1950-2016). 아역으로 출발해서 이순재 선배와 데뷔 연도가 거의 같은 점도 놀랍지만(1957, 1956년), 전쟁둥이로 태어나 평생 남긴 작품들을 보면 – 만추(1980),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1981), 고래사냥(1984), 겨울나그네(1986), 칠수와 만수(1988), 남부군(1990), 투캅스(1993), 태백산맥(1994), 인정사정 볼 것 없다(1999) - 그야말로 격동과 청춘의 한국 현대사 그 자체라 새삼 감탄과 경의를 표할 수밖에 없는 그런 인물입니다. 특히 박중훈 배우와 함께 열연한 ‘인정사정 볼 것 없다’의 마지막 격투 장면은 헐리우드는 물론 전세계에서 수없이 오마주(hommage)되며 오늘날 한국영화 세계화의 초석을 낳았다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의 ‘영화력(映畫力)’을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더군다나 단 한 번의 구설수도 없이 또한 오직 영화 한 길만을 팠던 모습도, “광고 많이 찍으면 체한다”며 한 브랜드(커피)와만 38년을 지켰던 의리도 멋졌습니다. 갑질도 교만도 고인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동료들은 물론 현장에서 일하는 모든 분들을 살갑게 챙겼다는 후일담이 끝없이 이어집니다. 이 모든 정황을 한 마디로 정리라도 하듯 누군가의 한 마디가 또한 깊은 울림을 남겼습니다. “사람 자체가 훌륭한 분이다.”
새삼스럽지도 않은 일이지만 최근 정치계는 여당 인사들마저 각종 논란에 휩싸이면서 여간 어수선한 모습이 아닙니다. 계엄 정국에서 맹활약하는 바람에 국정원 출신으로 일약 집권 여당의 원내대표가 된 의원에 대해 최근 경향신문은 ‘특권 의식 끝판왕, 9가지 의혹 총정리’라는 기사를 게재했습니다(2025. 12. 29). 물론 ‘의혹’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이른바 정치개혁을 주도해야 마땅한 자리에 앉아 있는 인물에게 왜 그렇게 많은 ‘의혹’이 따라다니는지 국민들은 답답해 합니다. 정치인치고는 비교적 청아한 이미지를 구축해 오던 여당의 한 여성의원은 지난 지방선거 당시 서울시당 공천관리위원으로 있으면서 받았던(사무국장 수령) 금품수수가 문제가 되어 스스로 탈당하였으나 결국 제명 처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현대판 탕평책(蕩平策)의 일환으로 기획예산처 장관으로 전격 발탁된 국민의힘 3선 의원 출신의 경제통을 자처하던 여성의원에게서 드러나버린 작태들은 달리 거론할 필요성조차 느끼지 못할 정도입니다. 문화예술계뿐만 아니라 돌아보면 곳곳에 우러러볼 만한 분들이 그래도 많이 있는데, 도대체 우리 정치판에는 왜 이렇게 ‘훌륭한 사람’이 없는 걸까요?
그러다가 문득 이런 말 자체가 ‘누워서 침뱉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술하는 사람들이야 괴짜들의 일탈이라 치부하는 측면이라도 있겠지만, 정치하는 사람들이야 어차피 정치란 게 다 그렇고 그런 거 아니냐며 체념하는 측면이라도 있겠지만, 누구보다도 선한 양심과 정직한 행실과 성결한 생활을 보여주어야 할 기독교계가 만일 일탈의 행렬에 합류한다면 어떤 변명이 통하겠습니까? 더구나 목사를 비롯한 지도자들이라면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최근 한국 교계에서 그간 혁혁한 명성을 쌓아왔던 한 원로목사에 대한 논란이 불거져 대단히 유감입니다. 유독 성화를 강조하며 많은 성도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던 분이기에, 공공연하게 번영신학을 추종하고 힘의 기독교를 과시했던 그런 인물들의 행태를 보면서 가졌던 마음과 차원을 달리하는 서글픔이 느껴졌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떨까요? 안성기 배우와 친형제나 다름없던 박중훈 배우가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고인이 화를 안 내는 분인데, 골프를 칠 때면 승부욕 때문인지 예민하시기에 고언을 한 적이 있다. 몇 개월 지나 다시 만났는데, 갑자기 지갑에서 종이를 꺼내 보시더라. <1. 골프가 안 돼도 화내지 말 것, 2. 골프 칠 때 예민하지 말 것.> 얼마나 많이 보셨는지 구깃구깃해졌더라, 안성기라는 사람은 이걸로 설명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완벽한 인간은 없습니다. 다만 반성과 노력이 훌륭한 사람을 만드는 것 같습니다. 그런 훌륭한 사람이 우리 주변에도 있으면 좋겠습니다, 아니 내가 그런 훌륭한 사람이 되면 좋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