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3일 금요일 밤 프랑스 파리에서 동시다발적인 연쇄 테러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프티 캉보주 식당(Petit Cambodge restaurant), 카리용 바(Le Carillon barr), 바타클랑 극장(Bataclan concert hall), 벨레키프 바(Belle equipe barr), 스타드 드 프랑스(Starde de France) 경기장 인근, 공화국 광장(place de la Republique) 등 파리 중심지 일대에서 금요일 밤에 벌어진 총격과 폭발 등으로 현재까지 150여 명이 사망했고 수백 명이 부상을 입는 대참사였습니다. 프랑스는 국가 비상사태를 선포했고, IS(이슬람 국가 연합)는 이번 사건이 자신들의 소행이라고 발표했지만, 아직도 정확한 범행 동기와 주체는 밝혀지지 않고 있습니다.
파리 테러 하루 전날인 12일, 레바논의 베이루트에서도 2건의 자폭테러가 일어나 최소 43명이 죽었고, 같은 날 13일에는 이라크에서 테러범이 장례식장을 공격해 최소 21명이 사망했습니다. 이라크에서는 지난 해 매달 평균 90명의 민간인들이 폭탄 테러로 숨졌다는 통계도 있습니다(Iraq Body Count). 내전 중인 시리아 또한 2011년 이후 민간인만 무려 25만 명이 테러나 각종 공격으로 희생되었습니다. 나이지리아는 과격 이슬람 무장단체 보코하람(Boko Haram)의 무차별 납치와 테러로 인해 지금까지 약 15,000명이 사망하고 150만 명 이상이 난민으로 전락했습니다. 호주에 본부를 둔 영국 경제평화연구소(IEP)는 작년 한 해 동안 전세계에서 발생한 9,814건의 테러와 그로 인한 사망자 수 17,958명 중 80% 이상이 이라크, 시리아,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나이지리아 5개국에서 발생한 것이라고 ‘세계 테러리즘 지수(Global Terrorism Index)’에서 밝혔습니다.
올해 초 샤를리 에브도(Charlie Hebdo terror) 잡지사 테러 사건을 경험했던 프랑스는 이번 파리 테러가 발생한 직후 곧바로 이슬람 극단주의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나섰습니다. 유명 해커 집단인 어나니머스(anonymous)까지 나서서 IS에 대해 대대적인 사이버 공격을 감행할 것을 선포할 정도로 국제사회도 공명(共鳴)하고 있습니다. 지난 2월 워싱턴에서는 정부간 ‘폭력적 극단주의 대응 고위급 각료회의’가 개최된 바 있고, 혹자들은 앞으로 인류가 치러야 할 진정한 전쟁은 바로 이 극단주의와의 전쟁이 될 것이라고 예측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폭력적 극단주의가 어떠한 비극적 폐해를 초래하는지 역사를 통해 이미 충분한 교훈을 얻었습니다. 극단주의는 자기 의(righteousness)에서 시작해서 폐쇄성과 배타성을 거쳐 푸코(M. Foucault)의 말처럼 집단적 광기로 발작(發作)합니다. 두 차례에 걸친 세계대전은 민족이나 이념에 기초한 극단주의에 폭력적 광기가 더해진 결과물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에리히 프롬(E. Fromn) 같은 사람이 집단적 나르시시즘(narcissism)이야말로 이성을 마비시키는 치명적인 독약이라고 말한 데는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던 겁니다.
1980년대 우리 사회는 ‘범죄와의 전쟁’을 치른 적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지금 우리 사회 또한 ‘극단주의와의 전쟁’을 한번쯤은 치러야 하는 상황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극단주의는 나만 옳다는 진리 논쟁으로 출발해서 결국 나와 의견이 다른 이들을 배척하고 나아가 공격하는 폭력성을 조장합니다. 아직도 우리 사회는 심지어 교계와 교회까지도 의견의 다름(different)과 틀림(wrong)을 구별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서구 사회도 오랜 세월에 걸쳐 비슷한 진통과 산고를 겪어 왔습니다. 하지만 기독교의 깊은 뿌리가 되는 경구, 즉 ‘본질은 일치를, 비본질은 관용을,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necessariis unitas, unnecessariis libertas, omnes caritas)’의 정신을 잊지 않았기 때문에 폭력적 극단주의의 함정에 빠지지는 않았습니다. 우리도 그러한 중용의 길을 걸어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울러 이 시대 극단주의자들의 손에 들려 있는 억압적 수단과 폭력적 도구들이 하루 속히 제거되고 나아가 그들 속에 부드러운 마음과 새 영이 새롭게 자리잡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겔 11:19; 36:26).
파리 테러 하루 전날인 12일, 레바논의 베이루트에서도 2건의 자폭테러가 일어나 최소 43명이 죽었고, 같은 날 13일에는 이라크에서 테러범이 장례식장을 공격해 최소 21명이 사망했습니다. 이라크에서는 지난 해 매달 평균 90명의 민간인들이 폭탄 테러로 숨졌다는 통계도 있습니다(Iraq Body Count). 내전 중인 시리아 또한 2011년 이후 민간인만 무려 25만 명이 테러나 각종 공격으로 희생되었습니다. 나이지리아는 과격 이슬람 무장단체 보코하람(Boko Haram)의 무차별 납치와 테러로 인해 지금까지 약 15,000명이 사망하고 150만 명 이상이 난민으로 전락했습니다. 호주에 본부를 둔 영국 경제평화연구소(IEP)는 작년 한 해 동안 전세계에서 발생한 9,814건의 테러와 그로 인한 사망자 수 17,958명 중 80% 이상이 이라크, 시리아,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나이지리아 5개국에서 발생한 것이라고 ‘세계 테러리즘 지수(Global Terrorism Index)’에서 밝혔습니다.
올해 초 샤를리 에브도(Charlie Hebdo terror) 잡지사 테러 사건을 경험했던 프랑스는 이번 파리 테러가 발생한 직후 곧바로 이슬람 극단주의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나섰습니다. 유명 해커 집단인 어나니머스(anonymous)까지 나서서 IS에 대해 대대적인 사이버 공격을 감행할 것을 선포할 정도로 국제사회도 공명(共鳴)하고 있습니다. 지난 2월 워싱턴에서는 정부간 ‘폭력적 극단주의 대응 고위급 각료회의’가 개최된 바 있고, 혹자들은 앞으로 인류가 치러야 할 진정한 전쟁은 바로 이 극단주의와의 전쟁이 될 것이라고 예측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폭력적 극단주의가 어떠한 비극적 폐해를 초래하는지 역사를 통해 이미 충분한 교훈을 얻었습니다. 극단주의는 자기 의(righteousness)에서 시작해서 폐쇄성과 배타성을 거쳐 푸코(M. Foucault)의 말처럼 집단적 광기로 발작(發作)합니다. 두 차례에 걸친 세계대전은 민족이나 이념에 기초한 극단주의에 폭력적 광기가 더해진 결과물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에리히 프롬(E. Fromn) 같은 사람이 집단적 나르시시즘(narcissism)이야말로 이성을 마비시키는 치명적인 독약이라고 말한 데는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던 겁니다.
1980년대 우리 사회는 ‘범죄와의 전쟁’을 치른 적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지금 우리 사회 또한 ‘극단주의와의 전쟁’을 한번쯤은 치러야 하는 상황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극단주의는 나만 옳다는 진리 논쟁으로 출발해서 결국 나와 의견이 다른 이들을 배척하고 나아가 공격하는 폭력성을 조장합니다. 아직도 우리 사회는 심지어 교계와 교회까지도 의견의 다름(different)과 틀림(wrong)을 구별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서구 사회도 오랜 세월에 걸쳐 비슷한 진통과 산고를 겪어 왔습니다. 하지만 기독교의 깊은 뿌리가 되는 경구, 즉 ‘본질은 일치를, 비본질은 관용을,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necessariis unitas, unnecessariis libertas, omnes caritas)’의 정신을 잊지 않았기 때문에 폭력적 극단주의의 함정에 빠지지는 않았습니다. 우리도 그러한 중용의 길을 걸어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울러 이 시대 극단주의자들의 손에 들려 있는 억압적 수단과 폭력적 도구들이 하루 속히 제거되고 나아가 그들 속에 부드러운 마음과 새 영이 새롭게 자리잡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겔 11:19; 3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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