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노라면 물은 필요하고 갈증은 심화되어 마시기는 마셔야 하는데 마실 물이 없다는 것, 더 나아가 물을 발견하기는 했는데 그 물은 써서 마실 수 없는 물이라면 그 상황은 한 마디로 절망이다. 이스라엘 민족이 3일 길을 걸어도 물이 없어 목말라 하다가 마라의 쓴 물을 발견하고 마시지 못한 상황에 백성들의 불만이 터지고 지도자 모세를 향하여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 불평을 쏟아낸 출애굽기 15장의 내용이다. 그렇다. 이 상황이 어찌 물 문제만 그렇겠는가?
작금의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이 그런 것을 느낀다. 정치 현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고 동참하지 않을 수 없는데 백성들의 갈증을 풀어주는 정당이 없다. 하나님을 믿고 신앙생활은 해야 하는데 가고 싶은 교회가 없다는 것, 그것은 물을 발견하고도 마실 수 없어 불평 불만을 쏟아낸 히브리 민족의 상황과 다를 바 없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여행 중 사흘 길을 걸어도 물이 없게 되자 백성들은 갈증으로 고통 하게 되었고, 메마르고 척박한 광야에서 물을 찾아 사흘 길을 헤매다가 천신만고 끝에 찾은 물이 불행하게도 써서 도저히 마실 수 없는 물이었다. 백성들의 불만과 불평은 모세를 향하여 폭발했다. 우리는 여기서 깨닫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인생 여정과 같다는 사실이다.
이처럼 인간에게는 미래의 희망보다는 현재의 욕구 충족이 더 시급한 것인지도 모른다. 멘슬로우의 욕구 충족 5단계에서 지적하고 있듯이 가장 저급한 식욕이나 성욕에 의해서 인간의 의지가 꺾어진다면 이것은 동물과 별다를 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역사의 위대한 인물들은 현실에 안주하지 않았다. 힘들고 어려워도 미래를 지향한 삶이었다. 그러나 멘슬로우의 욕구 충족 5단계중 가장 저급한 단계에서 벗어나지를 못했던 사람들은 역사를 어둡게 하고 공동체를 힘들게 한 인물들로서 하나 같이 미래를 보는 눈이 닫혀있었고 철저하게 현실에 안주하고 눈앞의 손익계산에 민감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니 항상 문제 앞에서는 누구 때문에 라고 원망 불평을 한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삶에는 쓴 물이 많다. 실패의 쓴 물이 있다. 질병의 쓴 물, 가난의 쓴 물, 미움의 쓴 물, 죄악의 쓴 물, 근심의 쓴 물, 절망의 쓴 물이 있다. 목이 말라 타지만 쓴 물을 마실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갈증에 죽을 지경이지만 눈앞에 있는 물이 쓴 물이니 어떻게 살 수 있나? 답은 한 가지 뿐이다. 쓴 물을 달게 만드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하실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출애굽기 15장의 교훈이다.
마라의 쓴 물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실 수 있는 단물로 변화시키신 하나님의 방법과 능력은 참으로 기이했다. 원망하고 불평하는 백성들 가운데서 기도하는 모세에게 한 나뭇가지를 잘라서 그 쓴 물에 던지라고 하셨고 말씀대로 순종하였더니 놀랍게도 그 쓴 물은 더 이상 쓰지 않고 오히려 달아졌다. 쓴 물과 같은 인생을 단물처럼 바꾸어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깨우치는 메시지가 있다. 그리고 문제의 해결은 불평하고 원망하는 사람을 통해서가 아니라 엎드려 기도하는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은 응답하시고 문제를 해결해 주신다는 것이다.
그렇다. 히브리 민족이 물을 마시고 싶은데 발견된 물은 쓴 물이어서 마실 수 없었던 것처럼 인생여정도 그렇다. 성공하고 싶은데 실패하고 말았다. 건강하고 싶은데 병이 들고, 부유하고 싶은데 가난하게 되었고, 사랑하고 싶은데 미움으로 가득하다. 기뻐하고 싶은데 근심으로 가득하고, 행복하고 싶은데 불행하게 되었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원망 불평하고 있을 것인가? 대답은 하나뿐이다. 하나님이 지시하신 그 나뭇가지를 그 쓴 물에 던지는 것이다. 그 나뭇가지가 무엇을 의미하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의미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모든 인간의 죽음을 생명으로 바꾸어 인간 생활의 생명의 갈증을 해갈해 주는 쓴 물을 단물로 바꾼 사건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순종하는 것뿐임을 깨우치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주시는 교훈이다.
그렇다. 아무리 쓴물 같은 환경이라도 예수님이 함께 하시면 그 쓴 물이 달게 되는 것이다. 죄악의 쓴물도 예수 사랑으로 구원의 단물이 된다. 근심의 쓴물도 예수 사랑으로 기쁨의 단물이 된다. 불평의 쓴물도 미움의 쓴물도 예수 사랑으로 감사와 사랑의 단물이 된다.
가인은 아벨을 미워했다. 그런데 가인은 망했고 아벨은 의로운 사람으로 남았다. 에서는 야곱을 미워했다. 그런데 에서는 축복권에서 멀어졌고 야곱은 족장의 반열에 들어갔다. 요셉의 형들은 요셉을 미워했다. 그런데 형들은 복을 누리지 못했고 요셉은 축복의 주인공이 되었다. 사울은 다윗을 미워했다. 그런데 사울은 망했고 다윗은 성군이 되었고 그의 족보에서 예수가 탄생되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를 미워했다. 그런데 그들은 망했고 예수는 역사의 주인공이 되었다. 마르다는 마리아를 질투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마르다는 책망하고 마리아를 칭찬했다. 아합은 엘리야를 미워했다. 그런데 아합은 망했고 엘리야는 위대한 선지자로 남았다.
우리가 기억할 것이 있다. 미워하는 사람은 미움의 쓴물을 단물로 바꾸지 못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누구나 지니고 있는 미움이라는 쓴 물을 예수 사랑으로 바꾸어 놓으면 모든 인간관계에서 단물처럼 감사의 생활이 될 것이다. 내 마음의 쓴물을 예수 십자가 사랑으로 달게 만들어 살아가는 것이 축복받은 삶이다.
작금의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이 그런 것을 느낀다. 정치 현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고 동참하지 않을 수 없는데 백성들의 갈증을 풀어주는 정당이 없다. 하나님을 믿고 신앙생활은 해야 하는데 가고 싶은 교회가 없다는 것, 그것은 물을 발견하고도 마실 수 없어 불평 불만을 쏟아낸 히브리 민족의 상황과 다를 바 없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여행 중 사흘 길을 걸어도 물이 없게 되자 백성들은 갈증으로 고통 하게 되었고, 메마르고 척박한 광야에서 물을 찾아 사흘 길을 헤매다가 천신만고 끝에 찾은 물이 불행하게도 써서 도저히 마실 수 없는 물이었다. 백성들의 불만과 불평은 모세를 향하여 폭발했다. 우리는 여기서 깨닫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인생 여정과 같다는 사실이다.
이처럼 인간에게는 미래의 희망보다는 현재의 욕구 충족이 더 시급한 것인지도 모른다. 멘슬로우의 욕구 충족 5단계에서 지적하고 있듯이 가장 저급한 식욕이나 성욕에 의해서 인간의 의지가 꺾어진다면 이것은 동물과 별다를 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역사의 위대한 인물들은 현실에 안주하지 않았다. 힘들고 어려워도 미래를 지향한 삶이었다. 그러나 멘슬로우의 욕구 충족 5단계중 가장 저급한 단계에서 벗어나지를 못했던 사람들은 역사를 어둡게 하고 공동체를 힘들게 한 인물들로서 하나 같이 미래를 보는 눈이 닫혀있었고 철저하게 현실에 안주하고 눈앞의 손익계산에 민감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니 항상 문제 앞에서는 누구 때문에 라고 원망 불평을 한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삶에는 쓴 물이 많다. 실패의 쓴 물이 있다. 질병의 쓴 물, 가난의 쓴 물, 미움의 쓴 물, 죄악의 쓴 물, 근심의 쓴 물, 절망의 쓴 물이 있다. 목이 말라 타지만 쓴 물을 마실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갈증에 죽을 지경이지만 눈앞에 있는 물이 쓴 물이니 어떻게 살 수 있나? 답은 한 가지 뿐이다. 쓴 물을 달게 만드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하실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출애굽기 15장의 교훈이다.
마라의 쓴 물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실 수 있는 단물로 변화시키신 하나님의 방법과 능력은 참으로 기이했다. 원망하고 불평하는 백성들 가운데서 기도하는 모세에게 한 나뭇가지를 잘라서 그 쓴 물에 던지라고 하셨고 말씀대로 순종하였더니 놀랍게도 그 쓴 물은 더 이상 쓰지 않고 오히려 달아졌다. 쓴 물과 같은 인생을 단물처럼 바꾸어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깨우치는 메시지가 있다. 그리고 문제의 해결은 불평하고 원망하는 사람을 통해서가 아니라 엎드려 기도하는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은 응답하시고 문제를 해결해 주신다는 것이다.
그렇다. 히브리 민족이 물을 마시고 싶은데 발견된 물은 쓴 물이어서 마실 수 없었던 것처럼 인생여정도 그렇다. 성공하고 싶은데 실패하고 말았다. 건강하고 싶은데 병이 들고, 부유하고 싶은데 가난하게 되었고, 사랑하고 싶은데 미움으로 가득하다. 기뻐하고 싶은데 근심으로 가득하고, 행복하고 싶은데 불행하게 되었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원망 불평하고 있을 것인가? 대답은 하나뿐이다. 하나님이 지시하신 그 나뭇가지를 그 쓴 물에 던지는 것이다. 그 나뭇가지가 무엇을 의미하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의미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모든 인간의 죽음을 생명으로 바꾸어 인간 생활의 생명의 갈증을 해갈해 주는 쓴 물을 단물로 바꾼 사건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순종하는 것뿐임을 깨우치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주시는 교훈이다.
그렇다. 아무리 쓴물 같은 환경이라도 예수님이 함께 하시면 그 쓴 물이 달게 되는 것이다. 죄악의 쓴물도 예수 사랑으로 구원의 단물이 된다. 근심의 쓴물도 예수 사랑으로 기쁨의 단물이 된다. 불평의 쓴물도 미움의 쓴물도 예수 사랑으로 감사와 사랑의 단물이 된다.
가인은 아벨을 미워했다. 그런데 가인은 망했고 아벨은 의로운 사람으로 남았다. 에서는 야곱을 미워했다. 그런데 에서는 축복권에서 멀어졌고 야곱은 족장의 반열에 들어갔다. 요셉의 형들은 요셉을 미워했다. 그런데 형들은 복을 누리지 못했고 요셉은 축복의 주인공이 되었다. 사울은 다윗을 미워했다. 그런데 사울은 망했고 다윗은 성군이 되었고 그의 족보에서 예수가 탄생되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를 미워했다. 그런데 그들은 망했고 예수는 역사의 주인공이 되었다. 마르다는 마리아를 질투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마르다는 책망하고 마리아를 칭찬했다. 아합은 엘리야를 미워했다. 그런데 아합은 망했고 엘리야는 위대한 선지자로 남았다.
우리가 기억할 것이 있다. 미워하는 사람은 미움의 쓴물을 단물로 바꾸지 못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누구나 지니고 있는 미움이라는 쓴 물을 예수 사랑으로 바꾸어 놓으면 모든 인간관계에서 단물처럼 감사의 생활이 될 것이다. 내 마음의 쓴물을 예수 십자가 사랑으로 달게 만들어 살아가는 것이 축복받은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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