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은 꿈에 그리던 낙원이었습니다. 일찍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가나안을 약속하신 이래로 가나안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가나안에 들어가기만 하면 지상 낙원에서 살 것처럼 생각하였습니다.
이런 생각은 오늘 우리에게도 비슷한 모습으로 자리 잡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한 교회가 예배당을 이전하여 아름답게 건축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 교인들은 새 예배당으로 옮겨가는 것을 가리켜 광야 생활을 끝내고 가나안에 입성하는 것과 같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지나친 비약입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광야나 가나안이나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모두 귀하였습니다. 광야에서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셔서 그들을 보호하시고 인도하셨고, 만나와 메추라기로 먹이시고, 전쟁에서 승리하게 하셨습니다. 가나안에서도 하나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본질은 <거기가 광야인가 가나안인가>에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는 것, 이것이 본질이며, 하나님이야말로 복의 근원으로서 복을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가나안이 행복을 보장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착각하는 순간, 가나안은 하나님을 대신하는 우상이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참된 행복이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에 있음을 명심해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과 함께 역사하시는 분이시며, 말씀을 따라 사는 자들과 함께 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간 후 백성들로 하여금 말씀 앞에 서게 하셨던 일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철 연장으로 다듬지 않은 자연석으로 에발산에 제단을 쌓게 하셨고, 그 돌들에 하나님의 율법을 기록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모든 백성을 모아 절반은 그리심산 앞에, 절반은 에발산 앞에 서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리심산에서는 축복의 말씀을, 에발산에서는 저주의 말씀을 낭독하게 하셨고, 백성들은 그 말씀을 받았습니다.
이때는 그들이 여리고성과 아이성을 점령하고 가나안 사방으로 뻗어 나갈 시점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는 서둘러 남은 땅을 정복하도록 하지 않으시고, 멈추어 말씀 앞에 서게 하셨을까요? 그 이유는 가나안을 얻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가나안에서 살아갈 원리를 깨닫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가나안이 하드웨어라면 말씀은 가나안에서의 삶을 가능하게 하는 소프트웨어라 할 수 있었습니다. 소프트웨어가 깔리지 않은 컴퓨터가 깡통과 다를 바 없듯이, 말씀 없는 가나안은 결코 행복의 동산이 될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가나안을 점령하느라 흥분하고 있을 때, 가나안을 얻었다는 기쁨에 들떠 있을 때, 말씀 앞에 겸손하게 서도록 하신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사백 삼십 년 만에 애굽을 벗어나 흥분 상태에 있던 이스라엘을 시내산에서 말씀 앞에 서게 하셨던 것과 같은 이치였습니다. 말씀이 없다면 애굽을 벗어나 자유를 얻어도 그 자유 때문에 망할 것이고, 아무리 가나안을 얻어도 가나안의 풍요속에서 멸망할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후에 어떻게 되었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에 삶에 도취되어 말씀을 잊었고, 우상에 빠졌습니다. 그렇게 되자 가나안은 그들에게 행복의 땅이기는 커녕, 결국 북왕국 이스라엘과 남왕국 유다가 앗수르와 바벨론에게 차례로 멸망함으로써 멸망의 땅이 되고 말았습니다.
지금 하는 일이 잘 되고 있습니까? 지금 성공하고 있는 중입니까? 그렇다면 지금 잠시 멈추어 말씀 앞에 서야 합니다. 말씀을 배제한 채 달려가는 것처럼 위험한 일은 없습니다. 선남선녀가 만나 이루어진 가정도, 잘 꾸미고 개업한 사업장도, 웅장한 새 교회당을 소유란 교회도 말씀 위에 세워서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다양한 인간적 수단에는 귀를 기울이면서도 정작 말씀을 붙잡는 데는 게으른 것 같습니다. 다시 한 번 말씀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하겠습니다. 말씀, 그 안에 모든 지혜와 복과 생명과 승리가 있음을 기억하길 원합니다.
ⓒ 한국기독신문 & kcnp.com 무단전재-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