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목회철학 절차탁마목회(切磋琢磨牧會)의 10가지 중 중심에 있는 것 한 가지가 모심목회(母心牧會)다. 평생을 모심목회로 일관하여 대과 없이 은퇴하게 되었고 은퇴 후 생각지도 못했던 낭패스러운 일을 당하면서도 그 고통과 아픔을 이겨내는 중심에는 항상 모심목회가 버팀목이 되었다.
모심(母心)에는 통감(通鑑)의 울타리가 있다. 그 모심(母心)의 내면에는 농심(農心)과 예심(藝心)과 시심(施心)과 애심(愛心)과 성심(誠心)과 관심(關心)이 자리 잡고 있다.
어릴 때 쌀밥 달라고 졸라대던 어린것 품에 안고 종갓집 마당에서 쌀밥 한 그릇 얻어 들고 돌아와 명태 두 마리 구워 한 숟갈 한 숟갈 입에 떠 넣어 주시면서 그렇게 좋아하셨던 분이 어머니였다. 발에 종기가 나서 걸음을 걷지 못할 때 김치를 입에 빨아 종기에 대고 “엄마가 붙이는 모든 것은 명약이다”라고 입으로 후후 부시면서 다독거려 주시던 분도 어머니였다. 20리 길 고무신 한번 못 신고 학교 다니는 것이 안쓰러워 학교 가기 싫어하는 어린것 등에 없고 흥얼거리면서 학교까지 데려다주셨던 분도 어머니였다. 몸에 신열이 나서 온몸이 불덩이같이 달아올라도 춥다고 이불 뒤집어쓰고 앓고 있던 때 이웃집에 가서 아스피린 한 알 얻어 부엌 가마솥에 물을 끓여 후후 불어주시면서 약 먹여 주시던 분도 어머니였다. 아직은 설익은 풋풋한 사과를 먹고 배가 아파 아랫목에 엎드려 울고 있을 때 “내 손이 약손이다. 엄마 손이 약손이다.” 하면서 배를 쓸어 문질러 주실 때 희한하게 아프지 않고 잠이 들게 하셨던 분도 어머니였다. 설날이 되면 이웃 부잣집 아이들은 때때옷 입고 세배 다닐 때 묵은 헌 옷 입고 세배하는 것이 속상해 정월 초하룻날 들판으로 연 날리러 갔다가 돌아온 어린것을 치마로 감싸안고 무슨 큰 죄라도 지은 듯 돌아서서 눈물짓던 분도 어머니였다. 100점 시험지만 들고 오던 것이 어쩌다가 94점짜리 시험지 들고 사립문을 들어서는 어린것을 방안으로 들여주지 않고 “이놈아, 이래 가지고서야 어떻게 훌륭한 사람이 되겠니?”라고 회초리로 모질게 종아리를 치시고, 저녁에 잠든 아들 부풀어 오른 종아리 쓸어 만지면서 눈물짓던 분도 어머니였다. 나이 들어 목사가 되었을 때 잠 못 자는 것이 안쓰럽게 보이시고, 소견 좁은 교인들에게 이리저리 시달리는 것 속상해 새벽까지 아들 머리맡에 앉아 기도하시면서 성경을 눈물로 적셨던 분도 어머니였다. 세상을 마무리하실 때 “교회의 어미 같은 늙은이들은 모두 목사의 어미야. 알아듣겠는가?”라고 마지막 말씀 남기시고 조용히 천사 같은 모습으로 눈을 감으시고 천국으로 가신 분도 어머니였다. 이것이 모심(母心)이다. 평생 그런 마음으로 목회했고 은퇴 10년을 넘기고도 여전히 한주도 쉼 없이 나의 말씀 사역은 모심목회(母心牧會)의 현재 진행형이다.
5월이 되면 제일 먼저 생각나는 것은 어머니다. 끝없이 베푸시는 어머니의 사랑, 퍼 올려도 퍼 올려도 멈추지 않는 샘물처럼, 어머니 마음의 사랑은 그랬다. 철없기만 했던 어린 시절, 그저 투정 부리고 어머니 속만 태웠던 날들이 생각나면 자꾸만 슬퍼지고 속상하다.
목회를 시작하면서, 많은 성도에게 어머니 같은 목사로 목양해야지…. 그러면서 벌써 은퇴한지 강산이 한번 바뀌었다. 그런데 왠지 요즈음 자꾸만 어머니가 더욱 그리워지는 것은 무엇 때문인지? 늦은 밤, 서재에 앉아 묵상하다가 천국가신 어머니가 자꾸만 보고 싶어 “엄마”하고 눈물짓는 시간은 어린아이가 된다.
내가 다닌 초등학교는 집에서 7km 떨어진 곳에 있었다. 매일 걸어서 등하교 했다. 5학년이 되면서 오후 수업이 있는 날이면 도시락을 싸야 했다. 대부분의 아이는 쌀밥에 좁쌀과 보리쌀이 섞인 밥이었지만 나의 도시락은 언제나 감자를 삶아 밀가루를 찐 것에 함께 버무려진 밀가루 범벅이었다. 어린 나이에 점심시간은 나에게 트라우마가 되었다. 가난한 집 아들은 그 시간이면 영락없이 드러나는 것이 너무 싫었다.
어느 날 괜스레 도시락 갖고 가기 싫어 투정을 부리면서 그냥 학교로 갔다. 넷째 수업이 진행되는 시간에 교실 뒷문이 드르륵 열리면서 엄마 얼굴이 교실 안으로 들어왔다. 요즘 같으면 엄마하고 뛰쳐나갈 상황이지만 그때의 우리 엄마는 거지 엄마 같았기에 나는 얼굴이 빨개지면서 고개를 숙였다. 선생님이 엄마에게 가서 이야기를 나누고 무엇을 들고 내 책상 서랍에 넣어 주셨다. 도시락이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아들이 굶을까 봐 앞집에 가서 나중 하루 일을 해줄 약속을 하고 품값으로 쌀 한 되를 받아 따뜻하게 지은 쌀밥과 명태를 구워삶아 고추장을 바른 당시로는 최고의 반찬을 준비하여 20여리 길을 걸어서 아들 얼굴도 보지 못하고 도시락만 전해 주고 돌아간 엄마였다. 엄마는 내가 도시락을 가지고 가지 않으려고 생트집을 부리고 간 것을 아셨다. 그것이 모심(母心)이다.
목회하다 보면 나의 어릴 때 도시락 사건의 내 모습과 같은 교인들을 수없이 만난다. 개인 일이나 가정사나 목사와는 아무 관계도 없는 자기들끼리 얽히고설킨 일들도 목사에게로 가져와 화풀이하는 일도 다반사다. 그렇게 목회하다 보면 아프고 속상하고 억울하고 화나는 일 한두 가지 아니지만 도시락 사건을 생각하면서 나는 모심목회(母心牧會)를 했다. 은퇴한 후에도 다를 바 없이 괜스레 원로 목사를 걸고넘어지는 일 또한 다반사다. 세월이 훌쩍 흘러 은퇴를 한지 강산이 한번 변했다. 이제야 교인들이 종종 편지도 문자도 보내온다.
“사랑하는 원로 목사님, 한세월 흐르고 이제야 목사님의 중앙교회 사역을 돌아보면서 목사님의 목회가 모심목회(母心牧會)였음을 깨닫고 눈시울이 젖습니다. 철없이 행동한 것 용서하시고 사모님과 같이 평행감축의 노후를 기도합니다.”
깨닫는 것이 은혜라고 했던가? 5학년 때 엄마의 마음이 내 마음이 되면서 그 모든 사람의 일상을 여전히 품고 오늘도 모심목회(母心牧會)의 하루를 살아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