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은 ‘부활의 달’입니다. 1900년부터 2050년까지 부활절이 3월에 있는 경우는 33번인데 나머지는 모두 4월이었습니다(117/150(78%), 2025년까지는 97/125(77.6%)). 그렇다면 이 부활의 달에, 특히 부활절 전후해서 이 땅에는 무슨 일들이 있었을까요? 아마도 가장 유명한 사건은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선교사의 도착일 텐데, 부활절 당일인 1885년 4월 5일로 알려졌지만 사실은 사흘 전인 4월 2일 부산에 먼저 당도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한국 개신교 본격적인 선교의 역사는 부활절이 아니라 고난주간에 시작되었던 셈입니다. 같은 고난 주간에 일어났던 가슴 아픈 일도 있었습니다. 2014년 4월 16일 발생한 세월호 사건입니다. 수요일에 전복되어 금요일에 완전히 침몰해서 304명의 희생자를 내었던 이 사고로 그 해 부활절(4월 20일)은 유난히 슬펐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영원한 부활이 있기를 소망합니다.
1592년 4월에는 부활절을 전후해서 임진왜란이 발발합니다. 4월 13일에는 부산진전투, 그리고 4월 15일에는 동래성전투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현장에 있던 일본군은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휘하였는데 붉은 비단 장막에 흰 십자가를 그린 군기를 사용했고 본인 뿐 아니라 다수의 부장과 군사들이 기독교인이었다고 합니다. 일본에 들어와 화승총을 전해주고 포교 활동을 하던 예수회의 영향 때문이었는데, 1593년에는 그레고리오 데 세스페데스라고 하는 신부가 일본군 진중에 거하며 밤마다 미사를 집전했다고도 합니다. 이것이 사실상 최초의 기독교 전래라니, 얼마나 기이한 역사입니까? 또한 임진왜란 중에 포로로 끌고 간 소년 하나가 일본 땅에서 세례를 받고 예수회의 사제가 되었다는 기록을 찾았습니다. 나가사키의 순교자 기념관에 성자(聖者) 다음의 복자(福者)로 이름이 올라 있는 권 빈첸시오(Vincent Caun)라는 인물인데, 이승훈의 첫 수세(1784년)보다 180년 빠른 1600년대 초에 세례를 받았고 김대건의 사제 임직(1845년)보다 220년 빠른 1625년 옥중에서 서원을 했다는 사실을 최근에야 발견했으니 이 또한 얼마나 역설적인 부활입니까?
부활의 달에는 굴곡진 역사들이 더 있습니다. 1948년 부활절은 3월 28일이었는데 바로 그 부활주간의 끝자락인 4월 3일에 제주도에서 사건 하나가 발생합니다. 남로당 제주위원회 주도로 350명의 무장대가 12개 경찰서와 서북청년회 등 우익단체를 습격하여 시작된 ‘4·3 사태’였습니다. 1948년 11월 17일에는 제주도에 비상계엄이 선포되었고 대대적인 토벌작전이 시작되었지만, 결국에는 이념과 관련 없는 무고한 많은 시민들까지 목숨을 잃었습니다. 하지만 오랜 세월 묻혀 있다가 2003년 국가 차원의 진상보고서가 채택되면서 부활하는 사건이 되었습니다. 아픈 부활과 슬픈 부활도 있는지를 알았습니다. 십여 년 뒤의 부활절 무렵에는 아픔과 슬픔을 넘어 영광의 부활이 된 일이 발생합니다. 1960년 부활절은 4월 17일이었는데, 이틀 뒤 ‘4·19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 시위대로 인해 전국적으로 계엄령이 발포되었고 경찰이 발포를 감행하면서 130명이 죽고 1,000명 이상이 심각한 부상을 입었습니다. 그러나 마침내 혁명은 일종의 부활을 이끌어냈으니, 권위주의 체제 하에서 눌려있던 자유의 부활이었고 제한되어 있었던 민주주의의 부활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번 부활의 달인 4월 초입에 우리는 또 하나의 중요한 서사를 역사의 서판에 남기게 되었습니다. 작년 ‘12·3 비상계엄’으로 말미암아 촉발된 사태들이 일단락되면서 4월 4일에 사상 두 번째로 현직 대통령을 파면하는 탄핵 결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계엄과 탄핵이라는 데자뷰를 바라보면서 마음이 그리 편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는 과정에서 분열과 다툼과 미움과 배제가 기승을 부리는 시간들을 보냈기에 더욱 그러합니다. 하지만 이번에도 부활의 역사가 있기를 바라는 마음 가득합니다. 돌아오는 부활절을 기점으로 하여 다시 한 번 이 세상에도 혼란을 딛고 모든 사람과 모든 일들이 새롭게 태어나는 부활의 역사가 펼쳐지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예수 부활의 증인인 그리스도인들이 앞장서서 악의와 저주의 말들 대신 관용과 격려의 말들이 되살아나도록, 분열과 다툼 대신 화해와 일치의 마음들이 되살아나도록, 의기소침과 퇴행보다는 격려와 상승의 분위기가 되살아나도록, 부활의 믿음과 능력을 보여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부활의 기도를 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