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셰비키 혁명(1917. 10)으로 소련이 공산화되자 공산주의 사상은 동유럽으로 확산되고 동쪽으로는 몽골까지 확장되었다. 지식인들은 실험되지 않는 허황된 유토피아 사상을 환호했다. 중국이나 러시아 등지에서 활동하던 우리나라 독립운동가들도 공산당과 연계하여 독립자금 지원이라는 사탕발린 독약을 받아먹게 된다. 이동휘와 박진순이 중심이 되어 1918년 5월 31일 창당한 ‘한인사회당’은 동아시아 최초의 공산당이라고 할 수 있는데(중국 공산당은 1921년에, 일본공산당은 1922년에 창당된다), 볼셰비키의 지원을 받아 항일투쟁을 전개한 것이다. 이런 현실에서 이승만이 쓴 공산주의에 대한 논설은 당시 한인 사회에도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된다. 중요한 사실은 이승만은 독립운동의 근거지를 대륙 세력인 중국이나 러시아를 택하지 않고 해양 세력인 미국을 택하여 독립운동을 했다는 점이다. 그래서 그에게는 공산주의에 대한 이념적 연계(ideological chain)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 이후에도 이승만은 공산주의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두 편의 논설을 남겼는데, 「태평양 잡지」 1924년 7월호에 쓴 “사회공산주의에 대하여”와 「태평양잡지」 1925년 7월호에 쓴 “공산주의”가 그것이다. 그는 전자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일변(一邊)으로는 우리 사람들이 이런 새 주의(主義)를 들을 적에 우리의 오늘 경우가 다른 것을 미처 생각지 못하고 다만 남이 좋아하니 우리도 좋아하자고 덮어 놓고 따라 나가다가 영향을 받을까 염려함이라. 물론 우리 내외지(內外地)에 모든 인도자들이 응당 앞을 보아 지혜롭게 인도할 줄 믿는 바이지만, 그중에 몇 사람이라도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일시(一時) 풍조에 파동(波動)되면 그 손해가 장차 전체에 미칠까 하는 근심이 없지 아니함이라.”
도처에서 공산주의 운동이 흥기할 때에 쓴 이글은 “공산주의의 폐해를 이론적으로 명쾌하게 논증한 세계 최초의 논설”로 평가받고 있다. 이런 반공정신은 팽창주의를 지향하던 러시아에 대한 경계라고 하는 측면을 부인할 수 없지만, 따지고 보면 이승만의 반공사상은 그의 정신세계를 관통하는 기독교 신앙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승만의 반(反) 유물론적 이념체계가 자유민주의를 지향하고 공산주의를 거부하는 반공사상의 기초가 된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승만의 반공주의는 ‘자유주의적 반공주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승만은 자유민주주의를 가장 이상적인 정치 체계로 인식하게 한 것이다.
이승만의 반공주의는 그의 모스코바 방문 이후 심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1933년 제네바에서 개최된 국제연맹 회의 참석차 유럽을 여행하고, 7월 19일과 20일에는 모스코바를 방문했는데, 이때 공산주의 치하의 국민 생활의 실상을 보게 되었다. 또 제2차 대전 이후 소련의 팽창주의 정책을 보면서, 그리고 1949년 중국의 공산화 이후 한국이 공산화될 위험이 있다고 보아 크게 우려하였다.
제2차 대전 이후(1944-45) 소련이 동독을 비롯하여 동유럽의 약소국가들, 곧 헝가리 유고슬라비아 불가리아 루마니아 알바니아 폴란드 등을 점령하고 공산주의를 이식하여 소련의 위성국으로 만들었고, 1948년 2월에는 마지막으로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쿠데타로 공산당 독재국가를 수립함으로써 공산화를 마무리 지었다. 이보다 앞서 1947년 9월에는 국제공산당(Cominform)이 결성되면서 동유럽의 공산화는 두 번째 단계에 접어들었다. 인접한 중국에서는 1949년 마우쩌둥(毛澤東, 1893-1976)이 장제스(蔣介石, 1887-1975)의 국민당 정부를 몰아내고 중화인민공화국을 선포하게 되자 국제정세에 민감했던 이승만은 공산주의 체제를 용납해서는 안 된다는 강한 의지를 갖게 된다. 그래서 이승만의 반공주의는 해방 이후 건국투쟁에서 더욱 선명하게 드러나게 된 것이다. 해방 후 귀국한 이승만은 정략적 고려에서 박헌영(朴憲永, 1900-1956)의 조선공산당에 대하여 관용적인 태도를 보여준 바 있다. 1945년 10월 21일 행한 중앙방송 연설에서, 그리고 11월 21일 ‘공산당에 대한 나의 관념’이라는 제목의 연설에서 공산당에 대한 포용적 입장을 피력한 바 있지만, “절불굴(折不屈)하고 배일항전(排日抗戰)하던 공산당원들,” 혹은 “경제방면으로 근로대중에게 복리를 줄 목적으로 공산주의를 주장하는 인사들과는 협조할 용의가 있다”는 식의 제한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시사는 정략적인 의도였다. 그는 한번도 공산주의를 용인하지 않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