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으로 산다는 말에는 믿을 만한 진리가 있어야 하며 진리를 알아보고 믿기까지의 과정이 있어야 한다. 먼저, 믿음은 무조건 생기지 않는다. 믿을 만해야 믿게 되는 것이다. 무조건 믿으라고 하는 것은 사기일 수 있으며 맞더라도 내 자유를 빼앗는 것이기 때문에 해로운 것이다. 사람이 사람을 믿을 때도 상대방이 믿을 만한 말과 믿을 만한 행동과 믿을만한 실력과 믿을 만한 인격이 있는지를 확인해야 가능하다. 이 네 가지 중에 하나라도 부족하면 믿을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믿음까지 가기 위해서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믿기만 하면 그 즉시 다 된다는 말이 아니다. 예를 들어, 말을 알아듣는 어린 아이에게 “너 믿기만 하면 금세 힘 있고 부유하고 똑똑한 어른이 된다. 믿을래?” 그러면 이 아이는 손해될 것이 없기에 “예, 믿겠습니다.”라고 할 것이다. 그러면 그 믿음이 금세 어린 아이를 어른으로 만들 수 있는가? 감나무 씨앗이 믿는다고 금세 큰 나무가 되어 감이 주렁주렁 열릴 수 있겠는가? 그럴 수 없는 것이다. 세상 어디에도 무엇인가에 열매가 생기려면 씨를 뿌리고 어려움을 겪어내며 땀과 노력을 기울이며 세월을 보내야 하는 것이 하나님이 만드신 생명의 법칙이다. 이 하나님의 법칙을 깨뜨려 버리는 것이 오직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아닐 것이다.
믿음으로 살리라는 진리를 알기 위해서는 수많은 단계가 있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즉 사람은 자기가 주인이 되고 지배력을 갖기 위해 세상의 돈과 권력을 추구하는 에고의 상태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어려운 사건과 힘든 환경 속에서 상처를 받아 거짓된 부정적 생각에 사로잡혀서 죄책감을 느끼고 두려워하며 절망하게 된다. 그리고 좀 더 힘이 있으면 화를 내며 원망하고 비난하며 증오하며 살아간다. 그러다가 마음의 상처를 청소하고 치료하는 상담이라는 세계를 들어간다. 이 심리적 치유의 단계는 감정적 노폐물을 제거해서 밝고 맑은 본래의 감정을 나오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두려워하고 미워했던 수많은 마음의 존재와 화해하도록 만들어준다. 이 과정을 거치면 다시 에고가 없어지는 '본래 나‘를 만나야 한다. 내가 누구인지 알게 되는 것이다. 내가 사랑이며, 내가 기쁨이며, 내가 자유인 것을 알게 된다. 이제 나로 살면서 돈을 벌고, 건물을 사고, 여러 가지 역할을 하고, 사회에 기여를 하며 자신의 삶을 살게 되게 된다.
여기까지 최선의 삶을 살고 난 다음에 결국에는 절망감을 만나게 된다. 왜냐하면 모든 진리들은 보이는 것을 추구하고 육체에 관계된 것이기에 아무리 부유해져도 죽음 앞에서는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죽음 후의 삶. 내 영혼에 대한 막막함과 두려움의 문제는 어떻게 할 것인가? 여기에서 영적 진리를 찾기 시작하는데 까지 오게 된다. 여기부터는 사람의 의지로 갈 수 없는 길이다. 모르기 때문이다. 어떤 진리를 믿어야 하는가? 또 그 영적진리를 어떻게 만날 것인가? 그 진리를 어떻게 알아볼 것인가의 벽에 부딪히게 된다.
내 영혼을 살리는 영적진리는 영적인 눈이 떠지고 하나님께서 안에서부터 빛을 비추셔야 가능한 것이다. 영적진리를 알아보는 눈은 삶에서 진리를 선택하며 사람을 사랑하고 사람에게 선을 행하는 태도에서 나온다고 할 수 있다. 두려워하고 비난하고 소유욕과 쾌락을 추구하는 사람이 어찌 영적인 진리를 알아보겠는가? 삶에는 수많은 선택의 순간이 있다. 선을 선택할 것인가? 악을 선택할 것인가? 성공을 추구하는 당신의 눈에 늘 실패하고 문제만 일으키는 사람이 어떻게 보이는가? 괜찮게 보이는가? 미련하게 보이는가? 지배욕을 추구하는 사람이 자신이 무시당했을 때 어떻게 반응하는가? 고마운 말로 받아들이는가? 화가 나는가? 거짓말 한 마디만 하면 1억 원이 생긴다면 당신은 거짓을 택할 것인가? 1억을 택할 것인가? 선택하는 상황에서 두려워하고 분노하고 쾌락을 추구하고 지배욕과 거짓을 옹호하는 쪽을 선택하면 결코 영적진리를 알아볼 수도, 받아들일 수도, 사랑의 모습을 보여줄 수도 없을 것이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에 보이지 않은 수많은 과정이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사랑과 선을 행하며 오랫동안 이 과정을 반복할 때 더 명확한 진리를 알아보고 점점 더 믿음으로 살아나는 일들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믿음으로 살리라는 진리를 알기 위해서는 수많은 단계가 있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즉 사람은 자기가 주인이 되고 지배력을 갖기 위해 세상의 돈과 권력을 추구하는 에고의 상태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어려운 사건과 힘든 환경 속에서 상처를 받아 거짓된 부정적 생각에 사로잡혀서 죄책감을 느끼고 두려워하며 절망하게 된다. 그리고 좀 더 힘이 있으면 화를 내며 원망하고 비난하며 증오하며 살아간다. 그러다가 마음의 상처를 청소하고 치료하는 상담이라는 세계를 들어간다. 이 심리적 치유의 단계는 감정적 노폐물을 제거해서 밝고 맑은 본래의 감정을 나오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두려워하고 미워했던 수많은 마음의 존재와 화해하도록 만들어준다. 이 과정을 거치면 다시 에고가 없어지는 '본래 나‘를 만나야 한다. 내가 누구인지 알게 되는 것이다. 내가 사랑이며, 내가 기쁨이며, 내가 자유인 것을 알게 된다. 이제 나로 살면서 돈을 벌고, 건물을 사고, 여러 가지 역할을 하고, 사회에 기여를 하며 자신의 삶을 살게 되게 된다.
여기까지 최선의 삶을 살고 난 다음에 결국에는 절망감을 만나게 된다. 왜냐하면 모든 진리들은 보이는 것을 추구하고 육체에 관계된 것이기에 아무리 부유해져도 죽음 앞에서는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죽음 후의 삶. 내 영혼에 대한 막막함과 두려움의 문제는 어떻게 할 것인가? 여기에서 영적 진리를 찾기 시작하는데 까지 오게 된다. 여기부터는 사람의 의지로 갈 수 없는 길이다. 모르기 때문이다. 어떤 진리를 믿어야 하는가? 또 그 영적진리를 어떻게 만날 것인가? 그 진리를 어떻게 알아볼 것인가의 벽에 부딪히게 된다.
내 영혼을 살리는 영적진리는 영적인 눈이 떠지고 하나님께서 안에서부터 빛을 비추셔야 가능한 것이다. 영적진리를 알아보는 눈은 삶에서 진리를 선택하며 사람을 사랑하고 사람에게 선을 행하는 태도에서 나온다고 할 수 있다. 두려워하고 비난하고 소유욕과 쾌락을 추구하는 사람이 어찌 영적인 진리를 알아보겠는가? 삶에는 수많은 선택의 순간이 있다. 선을 선택할 것인가? 악을 선택할 것인가? 성공을 추구하는 당신의 눈에 늘 실패하고 문제만 일으키는 사람이 어떻게 보이는가? 괜찮게 보이는가? 미련하게 보이는가? 지배욕을 추구하는 사람이 자신이 무시당했을 때 어떻게 반응하는가? 고마운 말로 받아들이는가? 화가 나는가? 거짓말 한 마디만 하면 1억 원이 생긴다면 당신은 거짓을 택할 것인가? 1억을 택할 것인가? 선택하는 상황에서 두려워하고 분노하고 쾌락을 추구하고 지배욕과 거짓을 옹호하는 쪽을 선택하면 결코 영적진리를 알아볼 수도, 받아들일 수도, 사랑의 모습을 보여줄 수도 없을 것이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에 보이지 않은 수많은 과정이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사랑과 선을 행하며 오랫동안 이 과정을 반복할 때 더 명확한 진리를 알아보고 점점 더 믿음으로 살아나는 일들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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