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5-04-25(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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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승만(李承晩, 1875-1965) 초대 대통령은 자유민주주의를 토대로 대한민국을 건국하고 미국식 대통령 중심제 통치체제를 확립한 인물로서, 그가 남긴 한 가지 중요한 업적은 반공을 국시(國是)로 하는 자유민주주의 체제로 건국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일생동안 반공주의자로 살았고 자유민주주의 신봉자로 살았다. 이승만의 건국 사상 혹은 건국이념은 반공민주주의, 자유민주주의, 국제평화주의, 사회균등주의 등으로 표현되어 왔는데, 따지고 보면 이런 사상은 기독교 사상이자 기독교적 가치에 기초한 것이었다. 1899년 한성감옥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이승만은 1905년 초 세례를 받았고 일생동안 기독교 신자로 살았다. 1919년의 만세운동으로 임시정부가 조직되고 수반으로 추대되었을 이때 벌써 기독교 건국론을 피력한 바 있는데, 그 이후에도 변함없이 유지되었다. 그는 기독교 정신에 입각한 대한민국 건설이라는 이상을 가지고 살았고, 그것은 바로 반공주의의 실현을 통해 가능한 것이었다. 그는 1948년부터 1960년까지 12년간 남한을 통치하면서 반공주의에 기초한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고수함으로서 정치 외교 군사 경제 교육 사회 문화 교육 등 여러 분야에서 괄목할 만한 업적을 달성했다. 그가 지향했던 이른바 기독교 건국론은 용공주의와는 병립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승만의 반공사상은 해방 공간에서 갑자기 드러난 것이 아니었다. 유영익 박사가 지적하는 바처럼 그는 청년기부터 제정 러시아에 대한 공로증(恐露症) 혹은 혐로(嫌露)의식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런 반러시아 의식이 1917년 볼셰비키 혁명을 통해 러시아의 로마노프 왕조가 붕괴되고 공산주의 정부가 들어서자 반공사상으로 바뀐 것이다. 이승만의 반공주의 사상이 처음 표현된 것은 1923년이었다. 그는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발간되던 「태평양 잡지」 1923년 3월호에 “공산당의 당 부당(當不當)”이란 제목의 논설을 게재했는데, 제목이 암시하는 바처럼 이 논설에서 이승만은 공산주의의 합당한 점과 부당한 점을 정확하게 지적했다. 이승만은 공산주의자들이 선전하는 인민평등주의는 조선의 신분제도인 상반(常班)의 철폐와 반상제도의 연장선에서 인간이 인간을 지배하는 노예제도를 없애는 것으로 보아 이를 합당한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사유재산을 철폐하고 재산을 공유하자거나, 자본가를 없애자는 주장이나, 지식계급을 없이 하자거나, 종교단체를 혁파하자는 주장이나, 정부나 군사를 없애자는 등 5가지 주장은 현실성 없는 부당한 허위 선전이라고 보았다. 사유재산제도가 불평등을 조장한다고 하여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노동 의지는 감소될 것이며 결국 모두가 가난하게 되는 피해를 보게 된다고 본 것이다. 이때는 1917년 10월 볼셰비키 혁명이라고 불리는 소련 공산당 정권이 등장하지 불과 6년이 지난 때였다. 사람들은 공산주의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고 수많은 지식인들이 거짓된 유토피아 사상에 열광하고 있을 때 이승만은 공산주의의 본질과 모순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이승만은 공산주의란 “원래 자유롭게 되기를 원하는 인간의 본성을 거역해가며 국민을 지배하려는 사상체계”로 판단했고, 이런 이념을 따르는 정치는 반드시 실패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이런 확신을 피력한 것이 위에서 지적한 “공산당의 당부당”이라는 논설이다.  

 

  이런 글을 발표한 배경에는 공산주의의 문제에 대한 현실적인 인식이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는데, 이승만이 상하이(上海) 임시정부 대통령으로서 1921년 초 상하이에 부임했을 때 당시까지 임정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던 이가 한인공산당 중앙위원장인 국무총리 이동휘(李東輝, 1873-1935)였다. 함경도 출신의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이기도 했던 그는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자 볼셰비키에 가담한 바 있고, 임시정부 국무총리직을 이용하여 사회주의운동 확산하고자 했다. 사실상 그는 한국 최초의 공산주의자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 반공주의자인 이승만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임정 개혁안을 둘러싸고 이승만과 격한 논쟁을 벌였던 이동휘는 결국 임정을 탈퇴하였다. 이 무렵 공산주의를 수용하는 한인들이 점점 많아졌다. 사실상 이승만을 탄핵하려는 이들은 이런 공산주의자들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공산주의에 대한 이승만의 반감은 심화되었고, 공산주의가 무엇인가를 분명하게 제시할 필요를 느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이승만은 자신이 인식한 공산주의 이념과 사상, 그것이 추구하는 실상을 제시하고 맹목적으로 공산주의를 추종하는 이들을 계몽하러 한 것이다. 반공, 반공주의, 반공사상은 이승만이 끼친 가장 큰 이념적 계몽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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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규교수의 역사탐색] 이승만의 반공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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