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로남불이라는 말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이 용어가 우리들의 삶에 일상이 되면 우리들의 삶은 황량한 벌판이 된다. 그래서 복음의 삶이 되어야 한다. 복음의 삶이란 이해와 관용과 용서와 사랑이 일상이 되는 십자가 은혜의 삶이다. 그것은 역지사지(易地思之)의 관점에서 공동선을 추구하는 ‘네가 있기에 내가 있다’는 삶의 아름다움이다.
언제나 그렇지만 작금의 여의도 1번지 이야기를 듣노라면 속이 뒤집혀 먹던 것도 내뱉고 싶은 충동을 갖지 않는 사람은 별로 없다. 이건 해도 너무 한다는 생각뿐이고 도대체 소위 선량(選良)이라는 분들의 사고력(思考力)이 그것밖에 못되면 우리는 정치인들에게서 국태민안을 기대하기란 물 건너갔다는 생각에 마음이 천근만근이 된다. 하나 같이 내 잘못은 없고 네 잘못뿐이라는 논리를 당연시하는 정치 지도자들의 의식은 무엇일까, 생각해 보면서 이 지경이 되도록 교회는 무엇을 했는가 하는 자괴지심에 고개를 들 수 없다.
슬프고 아픈 것은 왜 우리는 국민들을 살맛 나게 해 주겠다고 그렇게 목이 쇠도록 외치던 그들로 인하여 고통해야 하는가? 어느 기자가 보도한 대로 ‘코미디도 이렇지는 않다.’는 말이 가슴을 시리게 한다. 대통령이 구속되어 헌법재판소의 탄핵소추를 받는 상황에 국가경쟁력은 곤두박질치고, 경제는 여름 가뭄에 논바닥 갈라진 듯하고, 학원이 막판 장터가 되고, 사회가 카오스 현상이 되어가는데도 불구하고 어느 누구 하나 ‘내 탓이오’라고 나서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 슬프기만 하다. 국가와 국민을 위한다고 호언하던 사람들로 인하여 국가가 무너지고 국민의 삶이 좌불안석이 되어도 그들은 오직 개인주의 집단 이기주의에 가히 혈안이 된 듯한 행태를 보면서 난세에 영웅이 난다는데 아직도 이 나라는 영웅 같은 정치 지도자가 보이지 않으니 그럼에도 아직은 난세가 아닌가 보다.
교회도 다를 바 없다. 은퇴 후 초교파적으로 매 주일 말씀 사역을 다니면서 듣고 보고 경험하는 것이지만 시끄럽고 분쟁으로 교인들이 아파하는 교회의 공통점 또한 ‘내 잘못 없고 네 잘못’ 뿐이다. 추(醜)함이다. 십자가 은혜와 평강으로 거룩한 동행을 하는 교회는 좋은 것은 주님의 은혜이며 잘못은 모두 ‘내 탓’이 일상화된 것을 볼 수 있다. 아름다움이란 이런 것이다.
카톨릭의 신뢰 회복 운동의 하나인 ‘내 탓이오’ 캠페인은 1990년부터 시작된 것으로서 사회적으로 불신과 갈등이 만연된 원인이 모두 자기 자신에게서 비롯됨을 자각하고 자기반성 운동으로 전개되었다. 그래서 김수환 추기경이 승용차에 ‘내 탓이오’스티커를 붙인 것을 시작으로 하여 전 카톨릭 신자는 승용차에 ‘내 탓이오’스티커를 부착하여 사회 정화 및 자기반성 운동으로 솔선수범하여 우리 사회를 함께라는 공동선을 지향했다. 동시에 개신교인들은 ‘익수스’(Ιχθυς) 물고기 모양의 스티커를 승용차에 붙이고 자신이 그리스도인임을 공표 하면서 모든 사회생활에 귀감이 되기를 다짐하는 것도, 같은 의미에서 이해되는 아름다운 자기반성의 아름다운 사회운동이었다. 그런데 정작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은 그런 스티커를 부착한 승용차들이 신호 위반을 하기도 하고 교통질서를 무시한 운전을 행하는 일을 종종 볼 수 있었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사회정의를 외치며 하나님의 공법을 역설하면서 성경을 강론하는데 자기 생각을 채색하여 선포하여 교인들은 둘로 갈라치기 되고 교회는 분쟁이 일어난다. 성령은 하나 되게 하시는데 왜 교회는 자꾸 분쟁으로 카오스현상이 되는가. 아이러니한 일이다.
논어 위령공편(衛靈公篇)에 보면 살신성인(殺身成仁)의 가르침이 있다. 자신을 죽여서라도 인(仁)을 이룬다는 뜻인데, 높은 뜻을 지닌 선비와 어진 사람은 삶을 구하여 ‘인’을 저버리지 않으며 자신을 죽여서라도 ‘인’을 이룬다.(志士仁人, 無求生以害仁, 有殺身以成仁)고 했다. 이 가르침으로 우리의 선조들은 공(公)을 위해 사(私)를 희생하는 것은 지고한 삶의 가치로 알았고 이를 수행하는 것이 군자의 길임을 가르쳤다.
언론에 오르내린 수많은 잘난 분들, 조금만 힘이 있어도 그 힘을 못 써먹어 안달하는 소인배, 좁쌀만 한 명예와 권력을 가졌거나 관계되면 별별 희한한 짓을 당연한 듯 행사하는 졸부들이 지도자로 있는 한 공리(公利)는 요원한 것이라 생각한다. 세월이 그래서인가? 요즘 사람들의 삶의 모습에서 ‘내 탓이오’가 없고 하나같이 너의 잘못으로 돌리면서 ‘나는 소크라테스요 너는 돼지’라는 논리로 예수님이 그렇게 경계했던 바리새인의 모습을 재현하고 있으니 걱정스럽기만 하다. 이 황량한 사막 같은 삶의 현장에서 그리스도인은 오늘의 난국이 나의 잘못임을 고백할 수 있는 겸손함으로 엎드림의 삶이 절실히 요구된다.
지도자는 항상 이론과 실제, 그리고 가르치는 것과 실제로 행동하는 것의 차이로 고민을 하게 된다. 그것은 국민들은 정치 지도자의 행동철학을 보고 싶어 하기 때문일 것이다. 자고 나면 거짓말이 되는 정치지도자의 언행에서는 결코 국태민안의 정치리더십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종종 오늘의 국민들은 야고보의 리더십을 요청한다. 이론으로서가 아니라 실천으로서의 지도자를 요구한다는 말이다. 왜 이순신을 회고하고, 김구를 읊조리며, 윤동주를 그리워 하는가? 왜 주기철을 회고하고 손양원을 읊조리며, 조만식을 그리워 하는가? 그들에게서 행동하는 리더십을 보았기 때문이리라. 어디서 행동하는 리더십을 배울 수 있는가? 말할 것 없이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배울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리더쉽은 긍휼이었고 겸손이었고 섬김이었다. 오늘의 보통 사람들은 정치에서나 종교에서나 인물 풍년에 인재 흉년이라는 아픈 용어가 사라지기를 소망한다.
너나없이 오늘도 힘든 하루를 살아가면서 역사는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진행됨을 믿기에 오늘도 엎드림으로 나라와 민족과 교회를 위하여 기도하면서 하루를 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