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5-03-14(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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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준 목사(1890-1959)는 3.1 운동 당시 33인 중 한사람이었고 감리교회를 대표하는 유망한 인물이었으나 변절자가 되었다. 1950년 전쟁이 일어나고 공산 인민군이 6월 28일 서울을 점령했을 때 김창준은 서울에 나타나 김일성 환영대회를 개최하는 등 침략자들을 지원하였고, 서울 태평로에 사무실을 내고 ‘기독교민주동맹’을 다시 결성했다. 사무장은 전북 삼례 출신으로 경동교회에 출석하던 김욱이라는 자였다. 이 조직은 이승만 정부가 들어서면서 해체되었던 친북조직이었다.

 

  평안남도 강서군 증산면 가풍리의 평민 집안에서 1890년 5월 3일 출생한 김창준은 18세 때 감리교 선교사 문요한(John Z. Moore)에게 세례를 받았고, 숭실대학과 일본 아오야마에서 1년간 수학하고 감리교의 협성신학교에서 공부하고 1917년 3월 졸업했다. 만주에서 일한 손정도와 동기생이었다. 그 후 서울 인사동의 중앙교회 전도사로 일하던 중 1919년, 3.1운동 때 민족대표 참가한 33인 중 가장 어린 나이로 참가하였다. 이 일로 붙잡혀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 6개월 형에 처해졌다. 1921년 12월 22일, 한용운 등과 함께 가출옥(가석방) 된 그는 서울 감리회 중앙교회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1922년 9월 목사안수를 받았다. 1924년 5월부터 1926년까지 미국 게렛신학교(신학사)와 같은 켐퍼스의 노스웨스턴 대학교(문학사)에서 공부하고 1926년 12월 27일 귀국했다. 귀국한 그는 감리교신학교 교수로 활동하는 한편 글도 쓰고 중국과 만주선교에도 관심을 표명했다.

 

  그러다가 해방을 맞게 되었고, 이때부터 좌익노선을 걷기 시작한다. 사실 그는 1930년대부터 기독교사회운동을 제창한 바 있는데, 기독교사회주의를 지향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그는 해방 이후에는 인민민주주의로 경도되었다. 그는 경제적 평등을 위해서는 김일성이 주창했던 인민민주주의로 나아가야 한다고 인식하고, 1947년에는 ‘남조선기독교민주동맹’을 결성하고 위원장이 되었다. 김일성을 지지하는 좌파 조직이었다. 그래서 신탁통치 결정을 지지했다. 그는 또 좌파 인사들의 민주주의민족전선(민선) 확대 중앙위원회에 참가하여 김기전, 김원봉, 박헌영, 여운형, 허헌 등과 같이 의장단에 선출되었다. 그는 자신이 하는 일이 예수의 정신과 기독교적 양심을 실천하는 것이라고 말했지만 그에게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과 은총의 개념은 사라졌다. 

 

  그런데, 김창준은 1948년 봄 김일성으로부터 초청을 받고 1948년 4월 18일 월북했다. 남북연석회의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는 평양에 체재하며 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및 상임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 후에는 남조선 제정당 사회단체협의회 부서기장,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회 초대 서기국장에 임명되었다. 1949년부터는 파리, 프라하, 비엔나 등지에서 열린 세계평화회의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대표로 참석했다. 김일성 정권의 하수인이 된 것이다. 그는 미제국주의를 비난하고 기독교회를 파괴하고 기독신자들을 살상한 것은 미제국주의의 소행이라고 주장했다.  

 

  그런 중에 1950년 6월 북한이 남침하자 인민군을 따라 서울에 나타나 김일성장군 환영대회를 개최한 것이다. 이런 반미 반한 행각을 벌이다가 북한으로 돌아갔고, 1950년 6월의 홍남표 장의위원에 이어 1951년 2월에는 김책 장의위원, 1951년 8월에는 허헌 장의위원, 그리고 1953년 4월에는 김정주 장의위원을 지내는 등 북한의 일인 독제정권의 지도자 반열에서 활동했다. 1953년 7월 29일에는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미영제국주의 무력침범자들을 반대하여 자유와 독립을 수호한 조선인민의 정의의 조국해방전쟁의 승리를 보장함에 있어서 온갖 헌신성과 창발적 활동으로써 특출한 공훈을 세운 국가정권기관 및 당 지도일꾼’으로 선정되어 로력훈장을 받았다.

 

  김창준은 1957년 9월, 2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재선되었고, 최고인민회의 부의장으로 선출된다. 그는 말년까지 재일교포 북송사업에 관여하다가 1959년 5월 7일, 오후 2시 30분에 뇌출혈로 사망했다. 그의 나이 69세 때였다. 국가장의위원회가 구성되었고 부고는 “조국의 평화적 통일과 사회주의 건설 사업을 위하여 계속하여 투쟁하여 왔다. ... 고 김창준 동지가 전체 조선 인민이 한결같이 갈망하는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보지 못하고 서거한 데 대하여 심심한 애도의 뜻을 표한다.”라고 기록했다. 이후 시신은 애국렬사릉 조성 이후 그곳에 묻혔다고 한다. 감리교 목사였던 그가 어떻게 월북하여 교회를 탄압하고 반 기독교운동을 전개하게 되었을까? 장병일은, “쓸데없는 명예욕과 생활에서의 불만이 가져온 결과”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는 “나지 않았더라면 차라리 자기를 위하여 더 유익했을 것”이라고 썼다(장병일, 『한국교회유사』, 19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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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규 교수의 역사탐색] 감리교 김창준 목사의 변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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